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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3

녹스머신 - 노리즈키 린타로 / 박재현 : 별점 2.5점

녹스머신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반니

추리소설, 그 중에서도 본격 추리소설은 체계적인, 나름의 규칙이 존재하는 장르죠. 이 작품은 이러한 본격 추리소설의 규칙을 실제하는 물리학, 양자역학에 끼워넣은 독특한 SF인 "녹스 머신"과 "논리 증발", 그리고 추리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메타 픽션 "들러리 클럽의 음모", 그리고 독특한 암호트릭 중심의 본격 SF "바벨의 감옥"으로 이루어진 중단편집입니다.

발표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온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3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4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부문 모두 1위) 작품으로 국내 번역이 언제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 미스터리"에서의 이벤트 당첨 덕에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관계자 분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완독한 첫 느낌은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작가의 역량이 정말 대단하구나! 라는 것입니다. 추리 소설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추리소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 외에도 광범위한 물리학, 양자역학 지식까지 어떻게든 충족시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라 작가의 노력, 탄탄한 지식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네요. 이런 점은 확실히 배워야겠죠. 추리 소설의 규칙을 과학 이론으로 만든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기대했던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고, 작품의 난해한 정도가 지나친 탓입니다. 독자를 의식하고 쓰여진게 아니라 작가의 자기 만족, 취미 활동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에요. 독자를 의식했더라도 굉장히 특이한 독자를 대상으로 했을 겁니다. "파운데이션"의 '심리역사학'처럼 이론에 대해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온전히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소설로서는 더 맞는 방향이었어요.

게다가 "녹스 머신"에서 문헌수리해석, 물리학과 타임머신 관련 이론, 양자역학, 평행 세계 등에 대한 학술적 이론을 빼면 '타임머신 개발에 성공한 중국인이 과거로 돌아가 녹스를 만나고, 그 탓에 녹스가 자신의 십계명을 수정한다'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기대했던 반전도 없고,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고민도 별 볼일 없이 해결되며, 예상했던 결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시시해요. 솔직히 도라에몽의 타임머신 단편들이 더 그럴듯하고 흥미진진하게 타임 패러독스를 다뤘다 생각됩니다.

"바벨의 감옥" 역시 마찬가지. 일종의 격자화된 틀, 그리고 그곳에 배치된 글자들을 이용한 암호 트릭이 전부입니다. 외계 종족과 일종의 텔레파시 싸움을 벌인다는 설정 및 다른 내용은 이 트릭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어서 읽으면서 졸 정도였어요. 트릭도 일본어 세로쓰기 구조를 이용한 것이라서, 일본 외에서는 애시당초 먹히기 힘들고요. 어떻게든 한글화를 시도한 번역자의 노고는 알겠지만 성공한 결과물도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들러리 클럽의 음모"와 "논리 증발" 두 편은 그래도 조금 더 쉽게 읽히며 재미 면에서 더 낫기는 합니다. 일단 메타 픽션인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다른 세 작품과는 다르게 SF는 아닙니다. 본격 추리소설에 대해, 그리고 여러 추리소설 작가들과 그 주인공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독특한 창작물이죠. 추리소설의 화자 역할인 탐정의 파트너들이 소속된 '들러리 클럽'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10번째 인디언 인형"이 추리 소설에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을 놓고 회의를 진행한다는 내용으로,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그것도 본격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정말로 실존한 인물들처럼 묘사된 들러리 캐릭터들 — 특히 악역인 밴 다인 (반 다인), 꼰대가 되어버린 왓슨 — 묘사도 아주 좋으며, 실존했던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 실종 사건을 들러리 클럽과 엮는 시도도 괜찮았습니다. 빅4 등의 다양한 패러디도 볼거리였어요. 마지막 밴 다인의 독살이 뜬금없이 이루어지는 등 정작 추리적인 요소가 기대 이하라는 점은 좀 아쉬웠지만요.

"논리 증발"도 "녹스 머신"보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내용이 풍성해서 완성도는 더 높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이론을 걷어내더라도 전자화된 데이터에 발화를 일으키는 촉매재로 엘러리 퀸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독자에의 도전'이 삽입되어 있지 않은 "샴 쌍둥이의 비밀"이 이용된다는 추리소설 매니아만이 할 수 있는 발상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전개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각기동대"를 연상시키는 전뇌 생명체가 된 유안이 메시지를 남긴다는 결말도 깔끔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평균 별점은 2.5점. 추리소설 매니아가 자신의 역량을 극한으로 발휘한, 지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하고 덕분에 평론가들과 매니아들에게 사랑받을 작품이기는 합니다만 추리, SF 양쪽 장르 모두에서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작가의 이름에 어울리는 작품들은 아니었어요. 저는 "매니아"로서 충분히 즐길 수 있었지만 다른 분들께 쉽게 권해드리기 어렵네요.

2009/08/24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 윌리엄 윌키 콜린스 외 / 한동훈 : 별점 1.5점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 4점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한동훈 옮김/하늘연못
하아.... 오랫만에 추리소설 포스팅입니다. 최근 바쁘기도 하고 여유가 없어도 통 책 읽을 시간이 없었네요. 이 책도 읽는데 1주일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럼 리뷰를 시작할께요.

일단 이 책을 소개하기 전에 "골든에이지" 가 과연 어떤 시기인지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는 단편 중심의 추리소설의 시대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여명기를 지나 1913년 벤틀리가 "트렌트 마지막 사건" 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둔 이후 이든 필포츠의"빨간머리 레드메인즈". 메이슨의 "독화살의 집", 버클리의 "독초콜릿 사건" 등 장편 추리소설 명작들이 속속 발표되고 곧바로 크리스티, 반다인, 엘러리 퀸, 딕슨 카, 크로포츠 등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들이 데뷰를 하기 시작한 시기, 즉 1차대전 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거장들의 데뷰가 이어지고 본격 추리소설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황금시대 (골든에이지)"라고 하는 것이죠.

때문에 1차대전 이전의 소설만 담고있는 이 책의 "골든에이지"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책 소갯글을 보면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기를 연 대표작가 다섯 작가의 소설을 담은 책" 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소갯글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개척기에 활동한..." 이라고 설명되는 것이 더욱 적당한, "개척기 (여명기) 미스터리 중편선" 이 더 합당한 표현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못된 제목이라면 과장광고를 넘어서서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제대로 목차나 내용을 살펴보지 않은 제가 죽일 놈이지만요.

그래서인지 사실 책 내용은 기대와는 많이 달라서 실망이 컸습니다. 이 "골든에이지"라는 시기에 나온 작품들을 제가 워낙 좋아라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흥미진진한 본격추리물을 기대했는데 이 책에 실린 중편들은 실제 추리물로 보기에는 힘든, 추리물 성향을 띈 드라마들로 단지 오래되었다라는 가치 밖에는 없는 탓입니다. 더군다나 5편의 작품들 중 한작품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 을 다룬 것이 아닌 일종의 "창작극"이나 "자작극" 이라서 그런지 더더욱 몰입하기도 어렵고 지루했습니다. 이럴바에야 셜록 홈즈의 라이벌이나 번역해 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아노 탐정 중단편이 하나 실려있긴 하지만 많이 부족해요. 작품도 별로였고요.

물론 역사적인 의미는 크고 책 자체의 번역이나 장정, 디자인도 훌륭한 편이라 과장된 제목으로 현혹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물론 그랬더라면 절대 구입하지 않았겠지만요. 별점은 1.5점입니다(솔직히 1점 주려다 책 자체의 가치를 생각해서 참습니다.).

3층 살인사건 / 프랭크 보스퍼 

런던 블룸즈베리의 한 하숙집을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목 그대로 하숙집 3층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하숙집을 무대로 하여 몇몇 인물들만 등장하여 주로 대화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인 작품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작가가 배우 출신인 탓이 크겠죠.

그러나... 제목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과는 달리 추리소설로 보기는 애매했습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확립되지도 않았고 특히나 퍼즐 미스터리는 등장하지도 않았던 때에 쓰여진 작품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추리물로 정의하기는 확실히 무리였어요. 가장 중요한 목격자의 증언이 범인의 변장을 통해 유도된 것이라던가 하는 간단한 트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유치한 수준의 트릭이며, 경찰의 수사 역시 너무 대충이고 전개도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등 범죄와 관련된 부분에서의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더군다나 극중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추리소설이나 장르문학에 대한 홀대(?)가 묻어나는 것 역시 조금은 불쾌한 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추리소설 초창기의 추리물의 성격을 띈 소설이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네요. 영국 하숙집과 거주민들의 생생한 묘사, 블랙코미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 재기발랄하면서도 요란한 대사들은 재미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뻔하기도 하고요.

애시당초 이 작품 하나밖에 작품이 없는 작가를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기를 연 대표작가" 라고 선전하는 출판사 행태가 더욱 문제겠죠.

데드 얼라이브 / 윌리엄 윌키 콜린스 

영국인 변호사가 미국의 외딴 농장에 휴양차 체류하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으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하네요. 피해자가 사실은 살아있었다... 라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법정 장면에서의 증거를 둘러싼 공방과 감형을 위한 거래로 거짓된 자백이 속출하는 등 드라마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시나 추리물은 아닙니다. 사건이 결국 범인(?)의 자백으로 해결된다던가 - 아니 애시당초 사건 자체가 없었지만 - 주요 증인을 찾아 나서는 것도 신문 광고를 통한 제보에 의지한다던가 등으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라는 발상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초창기 법정 드라마 정도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역사적 가치 이외의 재미를 찾아보기도 힘들고요.

안개속에서 /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 

초면인 사람들도 친구가 되는 영국의 한 클럽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용인데, 등장인물들의 "증언 (목격담 / 경험담)" 으로 사건이 이어지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미국인이 간밤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자 그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러시아 공주를 자칭하는 여자도둑과의 인연을 다른 회원이 이야기하고, 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귀족의 변호사가 살인사건의 다른 진상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식으로 증언과 증언이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거든요.

결국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사건에 관심을 보인 클럽회원 준남작이 하원에서의 연설을 하지 못하도록 한 작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르는 약간의 반전이 밝혀지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앞선 두 작품에 비하면 확실히 추리라는 과정이 묘사된, 때문에 그나마 "추리 소설" 로는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두 번째 다이아몬드 사건 이야기는 내용에 별반 필요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추리의 과정은 있지만 결국 경찰 수사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지는 뻔한 추리라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쓰여진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 박하게 굴 필요는 없겠죠?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입니다. 그런데 엘러리 퀸의 ‘가장 중요한 추리소설 125편’에 선정된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무슨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이유를 통 모르겠네요. 그만큼 가치있는 작품은 아닌듯 싶은데...

버클 핸드백 /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 

"나선계단의 비밀"로 유명한 서스펜스 소설의 대모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의 작품입니다. 시리즈 캐릭터이기도 한 간호사 "힐더 애덤스" 시리즈의 한편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된 시리즈 같네요. 작가의 간호사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듯한 디테일한 묘사와 별명에 걸맞는 서스펜스, 스릴의 묘사가 일품인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이 넘치면서도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고 결말도 합당해서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너무 급작스럽게 사건이 해결되는 점, 주요 등장인물의 고백(?)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 하죠. 무엇보다도 소설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이 좋았으니까 말이죠. 이 책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세미라미스 호텔 사건 / 알프레드 에드워드 우들리 메이슨

"독화살의 집"에 등장했던 명탐정 아노 탐정의 중단편입니다. 상당히 좋아하는 캐릭터라 기대가 큰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 별로네요. 본격물스러운 맛이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의 핵심인 여주인공이 우연히 본 범인의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심리적인 부분에 기대고 있어서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심리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아노 탐정의 캐릭터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등 실망스러운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초반부 마약을 발견하는 과정과 추리가 여러 단계로 발전하는 부분, 그리고 범인의 이상한(?) 행동과 장물을 숨겨놓는 곳에 대한 아이디어 정도는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다른 중단편들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구태여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09/06/18

[옛날 신문 검색] 불황 소설가 추리소설 바람 - 의외의 작가, 의외의 작품

네이버 옛날 뉴스로 검색을 즐기다가 발견한 1983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추리소설 전문 부정기 잡지 [미스터리]의 소개로 시작하는 기사는 이어서 순수소설 작가들의 추리소설 작품을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본격 추리소설로 이병주씨의 "미완의 극"과 "황백의 문", 황석영씨의 "심판의 집", 박범신씨의 "형장의 신", 조해일씨의 "갈수없는 나라", 표성흠씨의 "낙동강 오리알"을 들고 있으며, 시인인 정건섭씨의 "덫"도 포함되어 있네요. 저는 정건섭 선생님을 추리소설 작가로만 알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작가 조정래씨의 추리소설 붐에 대한 짤막한 의견 (우리사회가 산업사회화 함에 따라 지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추리소설을 찾는다는 의견), 국내 추리소설의 문제점 (엽기적 제목과 지나치게 통속적인 내용 등) 도 이야기하는 등 상당히 풍성한 기사네요.

무엇보다도 본격 추리소설로 소개된 유명작가들의 작품들이 어떤 작품들인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작품들도 모르고 "내가 추천하는 한국 추리소설" 같은 글을 썼다니 창피할 뿐이네요. 곧바로 조사해봤는데 아뿔싸, 대부분 절판이군요... 빌어먹을 이땅의 장르문학 홀대가 유명작가한테까지 이르렀을 줄이야!!! 그나마 황석영의 "심판의 집" 만 "객지"라는 황석영 중단편전집 3권에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병주의 "미완의 극"은 최은희 납치사건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것 정도만 확인했을 뿐인데 다른 작품들은 과연 어떤 작품들일까요? 헌책방에서 대부분의 작품은 구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심판의 집"부터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2018/11/23

맥파이 살인 사건 - 앤서니 호로비츠 / 이은선 : 별점 3점

맥파이 살인 사건 - 6점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고 없는 조용한 마을 색스비온에이번에서 대저택 파이 홀의 가정부 메리 블래키스턴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추도식을 맡은 목사, 음흉한 앤티크 숍 주인, 고인과 갈등을 겪은 아들, 시신을 발견한 관리인 등 등장인물들의 미심쩍은 행동과 죽음을 둘러싼 소문들이 밀도 있게 흘렀고, 이후 파이 홀의 주인인 매그너스 파이마저 기이한 죽음을 맞았다. 소식을 접한 탐정 아티쿠스 퓐트는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는데... 라는 내용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 최신작 "맥파이 살인 사건" 원고를 읽던 담당 편집자 수전 라일랜드는 소설의 결말이 누락된 것을 알아챘다.
원고를 전해 준 출판사 사장 찰스로부터 작가 앨런 콘웨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전은, 사라진 원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앨런의 자택과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앨런 콘웨이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작 중 최고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중 하나인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맥파이 살인 사건"과, 이 책의 출판을 담당하는 클로버리프 북스의 소설팀 팀장 수전 라일랜드가 저자인 앨런 콘웨이 사망 사건에 얽힌 진상을 추적하는 두 개의 소설이 함께 수록된 작품입니다.
본 이야기 속에 하나 이상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인 액자 소설이라기보다는 "맥파이 살인 사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완성된 추리 소설로 수전 라일랜드 이야기의 동기로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보통 액자 소설은 본편 주인공에게 소설 내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 작품에서의 "맥파이 살인 사건"은 강력한 동기 외에는 딱히 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인기 시리즈로 베스트셀러가 확실한 작품인데다가 수전 라일랜드부터가 굉장한 추리소설 매니아라서 안 찾고는 못 배겼을 거라는, 굉장히 확실한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은 높습니다. 

문제는 "맥파이 살인 사건"이 앨런 콘웨이 사건에서 큰 단서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앨런 콘웨이가 추리 소설을 싫어하고 증오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만 사용될 뿐입니다. 딱히 대단한 단서나 트릭이 숨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도구로의 사용도 대부분 앨런 콘웨이의 장난에 불과해서 크게 와 닿지 않고요. 오히려 "맥파이 살인 사건" 이라는 추리 소설 자체만으로의 완성도가 높은 수준이라 이렇게 사용되는게 아깝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1955년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크리스티 여사님으로 대표되는 당대 본격 추리물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였거든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모든 등장 인물들이 동기가 있고 수상하다는 전개도 본격물스러우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도 무척이나 합리적이며 범인의 동기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전 라일랜드의 활약을 그린 본 편도 흥미롭습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딱히 대단한 능력은 없는 출판사 직원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대치를 뽑아내는 전개도 좋으며 ,본격물답게 엄청나게 많은 용의자가 엄청나게 많은 수상한 점을 드러내지만 이 모든게 마지막에 제대로 밝혀지는 결말까지는 아주 완벽했어요.

하지만 범인이 드러난 직후부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일단 범인이 찰스였다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게 밝혀지는 이유가 잠깐 스쳐지나간 해고된 비서와의 대화에서 비롯된다는건 우연에 기댄 작위적인 전개일 뿐 아니라, 찰스의 행동이 너무나 허술해서 황당할 정도에요. 앨런 콘웨이을 사전에 만났고, 이미 완성된 원고를 전달받았다는걸 수전이 아는 순간 모든게 끝나 버리잖아요? 마지막에 수전을 죽일 생각이 들었다면 비서부터 죽였어야지요.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낮습니다. 앨런 콘웨이가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를 완벽한 조롱거리로 끝장내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의 계획과 인터뷰는 책을 화제로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작품 자체의 수준도 높은 만큼, 판매에 지장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아요. TV 시리즈야 물 건너 갈 수도 있겠지만 판매량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한다면 영상화 판권을 소유한 업체가 쉽게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즉, 수전 라일랜드가 처음에 찰스를 의심하다가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리 없다'고 생각을 접은게 타당한 추리입니다. 수전만큼의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을 찰스가 보였다면 그나마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래서야 현실성이 없죠.
아울러 앨런 콘웨이가 시리즈 제목을 활용하여 '애너그램' 이라는 말을 만들어 안배한게 고작 '아티쿠스 퓐트의 이름을 풀어서 해석하면 욕이다'라는 핵심 동기는 물론, 앨런이 추리 소설을 우습게 보았다는 각종 설정(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하철 역 이름이나 만년필 회사 등으로 대충 지은 것)도 딱히 이상하다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고 그것을 조롱하고자 했더라면 좀 더 거대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출판계 동료들이 수전을 배신자라 생각하여 등을 돌렸다는 후일담도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앨런 콘웨이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해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더라도,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엄연한 범죄인데 배신자는 무슨 배신자입니까... 마지막 수전이 그리스로 옮겨가는 에필로그는 솔직히 완전한 사족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두 편의 완성도 높은 추리 소설을 한 권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굉장하지만 위의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욕심이 좀 지나쳤달까요? 차라리 "맥파이 살인 사건" 만으로 출간되었더라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부분이 많고, 현대에 전통 본격물을 제대로 복원한 공 만큼은 인정합니다. 추리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2/01/25

명탐정의 저주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3점

명탐정의 저주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존 본격 추리물을 비웃는 블랙코미디였던 시리즈 전작과는 다르게, 작가인 주인공이 일종의 유체이탈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작품 속 세계에서 활약한다는 동화 같은 설정의 독특한 연작 단편집입니다. 

전작과의 공통분모는 제목, 주인공의 이름을 제외하면 거의 없습니다. 본격 추리에 대한 비꼼이 약간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격 추리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요. 동화 같은 설정은 "시미가의 붕괴"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점은 비교적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동화적인 설정임에도 동기와 전개, 트릭 모두 확실한 본격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무차별한 비난이 즐거웠던 전작이 더 취향에 맞았지만, 본격 추리물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이번 작품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이쪽 장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여전하지만, 전작보다는 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가깝다는 것도 확실한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전체적으로 평균하여 3점입니다.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념관

주인공이 덴카이치가 되어 이상한 마을로 소환된 뒤, 의뢰받은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과 여러 등장인물들, 사건의 무대가 되는 기이한 마을에 대해 소개하는 도입부 역할이 강한 에피소드입니다. 짧은 분량 안에서 많은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추리적으로 특별히 눈여겨볼 점은 없습니다. 덴카이치가 기념관 수위의 팔뚝에 난 자국을 보고 그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리라 추리하는 부분 정도가 유일할 정도죠.

그러나 동화 같은 마을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마을의 크리에이터라는 미이라, 미이라 발굴 직후 도난당한 30cm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Who done it?"이라는 문구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볼거리가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자산가

기념관 보존 위원회 멤버이자 마을 제일의 자산가 미즈시마 유이치로를 찾아갔다가, 그가 밀실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밀실 추리극이 펼쳐지는데, "명탐정의 저주"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덴카이치 시리즈 특유의 추리소설 비꼬기가 다수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피해자의 아들 아키오가 "먼저 타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 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의심해 보라고 한다"는 밀실 트릭의 문제를 비판하는 부분이겠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밀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자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니까요. 걸작 추리만화 "nervous breakdown"에서도 언급된 내용이라 반가웠습니다.

이렇듯 밀실을 비꼬고는 있지만, 트릭 자체는 합리적이기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작품입니다. 간단한 트릭이지만, 사건의 무대가 효과적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또한, 밀실의 일곱 가지 종류라는 덴카이치의 이론도 추리 애호가로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이 마을이 '본격 추리'라는 개념을 전혀 모른다는 것과, 마을 자체가 짜여진 무대장치 같은 설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다 효과를 극대화하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소설가

덴카이치 탐정이 기념관 보존 위원회 멤버인 소설가 히다를 방문한 직후, 히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범인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간 소실' 트릭이 펼쳐집니다.

본격 추리물에 대한 나름의 작가론이 담겨 있는 점은 인상적이지만, 트릭이 너무 쉽다는 점과 "자산가" 에피소드와 유사한 느낌이 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그냥저냥 평작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위원회

남은 기념관 보존 위원회 멤버들이 시장의 별장에 모인 뒤, 벼락으로 인해 고립된 후 한 명씩 살해되기 시작하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연쇄살인극입니다. 고립된 별장, 요일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참석자들, 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를 예언한 듯한 살인마의 장치 등, 설정만 봐도 작가의 의도가 뻔히 보입니다. 마치 "이게 왕도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패기마저 느껴집니다.

물론 작가가 이러한 작위성을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기에 단점은 아니며, 오히려 진부하고 뻔한 클리셰를 동화적인 설정과 결합해 효과적으로 구현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트릭 역시 예측 가능하지만, 작품과 잘 어우러져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본격 추리에 대한 작가의 향수와 애정이 잘 느껴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무리 낡고 오래된 장르라 하더라도, 추리물의 원류는 본격 추리물이기 마련이고, 이 장르에 대한 애정은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별점은 3.5점입니다.

2010/06/28

허무에의 제물 - 나카이 히데오 / 허문순 : 별점 3점

허무에의 제물 - 6점
나카이 히데오 지음, 허문순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히누마 집안에서 일어나는 연쇄 밀실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 저자 나카이 히데오가 작명하고 창안한 '안티 미스터리'의 첫 작품으로 추리 장르문학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명한 고전이기도 하죠. 관심은 많았지만 두께와 악명높은 동서문화사의 번역탓에 읽기를 꺼렸었는데 국내 최대 추리동호회 "하우미스터리"에서 발기한 독서클럽 "고등고등열매" 에서 읽어야 할 첫번째 작품으로 선정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안티 미스터리'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아래와 같더군요.
  1. 미스터리 속에 미스터리가 존재
  2. 스토리의 반전이 많다.
  3. 결국 미해결 사건이 되거나 뒷맛 씁쓸한 결말로 끝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사건이 과연 이 작품안에서 등장인물인 무레타가 쓴 소설인지, 아니면 다른 등장인물들의 추리를 통해서만 펼쳐지는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 경쟁하듯 추리를 쏟아내기 때문에 추리와 트릭이 난무할 뿐 아니라 추리마다 새롭게 이야기가 반전되기 때문에 결국 뭐가 진상인지도 헛갈리거든요. 마지막 결말이 씁쓸한것 역시 공식대로고요.
또한 '안티 미스터리'라는 이름답게 정통 고전 본격 미스터리의 반대되는, 어떻게 보면 고전 본격물의 패러디같은 느낌을 강한게 전해주는건 특이했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던가 "밀실",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악연", "증오가 넘치는 가족관계", "색깔로 형상화된 범행" 등과 같은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는 일본 본격물의 요소들을 모조리 도입하여 작품안에서 정말 작위적으로 녹여내는 점이라던가, '녹스의 추리소설 10계'나 란포의 '속 환영성'같은 추리소설의 교과서적인 룰들을 따라 추리쇼를 진행하는 것 모두가 본격물에 대한 비틀기, 패러디로 보였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비틀기와 패러디가 좋은 쪽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앞과 뒤가 연결이 잘 안되는 것도 있었지만, 비틀기와 패러디를 위한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서 뒤로 갈수록 몰입하기 힘들었거든요. 작위적 설정이 한두번 정도 양념으로 쓰인다면 모를까 전편에 걸쳐 벌어지니 지루할 수 밖에요. 하나의 사건이 벌어질때마다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만의 장황한 추리를 펼치는 추리쇼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책의 구성도 나중에는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는 사람이 아는 독자들을 위해 맘먹고 비틀고 패러디한 희대의 괴작' 입니다. 중반까지는 본격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교적 괜찮은 추리와 트릭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본격 추리소설의 얼개를 제대로 갖추고 있기는 해서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기는 합니다만 패러디와 비틀기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지루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어떻게보면 미완성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해괴한 작품이네요.

아는 사람이 읽어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기도 쉽지 않으며, 보는 시각에 따라 5점 ~ 1점을 오갈 수 있어서 별점으로 평가하기가 정말로 어려운 작품인데 제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악명높은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이라 걱정했는데 역시나 뒤로 갈수록 번역이 거슬리더군요. 아쉽습니다.

2025/09/26

돈돈 다리, 떨어졌다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쓴 단편집으로,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독자에의 도전장' 삽입 작품으로 추천받았지만, 국내 번역 출간되지 않은 탓에 원서를 구해 읽었습니다. 수록작 중 표제작은 작년에 번역해서 소개해 드렸던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해서 완독은 좀 늦었네요.

특징이라면 앞서 말한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될 정도로 본격 추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어 '후더닛' 물로는 완벽한 수준이에요. 본격물답게 여러가지 트릭도 사용되며, 다섯 편의 작품을 하나의 연작처럼 묶기 위한 디테일들도 인상적입니다.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에 모두 '다케마루'가 사용된다는 점 처럼요.

그리고 작가가 조금 가벼운 마음을 쓴 팬 서비스용 작품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장난스러운 센스도 가미되어 있습니다. 주요 화자가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인데 건방진 후배 U군의 도전에 패배하는 등 스스로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고, 어떤 작품에서는 범인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이런 부분은 작가의 팬이라면 크게 반길 요소라 생각됩니다.

다섯 편 모두 이야기의 밀도나 묘사는 가벼운 편이며,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보다는 '후더닛'에 집중한 탓에 추리 퀴즈적인 느낌이 들게 만든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독자에게 정정당당하게 단서를 제시하고, 그로부터 추리를 유도하는 정통 본격 추리의 맛을 선명하게 전해주기 때문에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충분히 즐길 만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돈돈 다리 떨어졌다"

서술 트릭을 사용해 범인의 정체를 감추는데,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것 부터가 도무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요. 작가 후기를 보면 1984년 교토대 추리소설연구회 합숙에서 했던 ‘범인 맞히기’의 단편이 원형이라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탓이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지금 시점에서는 40년 전 트릭이니 어쩔 수 없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보우보우 숲 불탔다"

"돈돈 다리"와 유사한 서술 트릭이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이를 반대로 사용했습니다. 확실히 아이디어는 참신합니다.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돈돈 다리"도 작위적이었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도 심하니까요. 이런 점에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보다는 추리 퀴즈에 조금 더 가까워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페라리는 보고 있었다"

아야츠지 유키토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계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색작입니다. 실존하는 편집자 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걸 보면, 의뢰처와 웃고 떠들고 즐기기 위한 친목적인 성격의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실제 사건 추리는 억지스럽고, 그냥 이런 것도 가능하다 수준으로 끝나며 진상은 그야말로 '현실'이었다는 것도 일상계 느낌이고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만 '독자에의 도전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페라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역시 서술 트릭으로 교묘하게 정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인데, 단서는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소노 가의 붕괴"

밀실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이 사실은 자살 사건이었음을 밝혀내는 추리가 아주 그럴싸합니다. 흉기를 사라지게 만든 트릭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요.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 제공도 지극히 공정하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동기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수록작 중 최고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 본인의 '본격 이론'이 꽤 길게 펼쳐지는 것도 볼거리였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의외의 범인"

수년 전 아야츠지 유키토가 참여했던 TV 기획물의 대본이라는 설정으로, 드라마 대본 형식으로 쓰여 독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진범은 화면 내가 아닌 밖에 있는 카메라맨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지금 보기에 새롭지는 않지만 작품에는 잘 어울렸어요. 게다가 단순히 카메라맨이 범인이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카메라맨이 바로 아야츠지 유키토였다는 점이 밝혀지는 반전이 아주 신선했습니다. 이를 위한 정보 제공 역시 바람직했고요. 영상물로 실제로 만들어도 좋을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9/07/28

46번째 밀실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 별점 2.5점

46번째 밀실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일본의 딕슨카라 불리우는 밀실 추리소설계의 거장 마카베 세이치의 별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친구인 에이토 대학 조교수이자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 히데오와 함께 초대받는다. 파티에 참석한 인물은 마카베 세이치의 가족을 제외하면 모두 추리소설작가와 편집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카베 세이치는 이번에 발표할 46번째 밀실작품을 끝으로 밀실 추리소설을 그만둘 것을 선언하는데 그날 밤 그는 밀실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일본 신본격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다섯번째 장편으로 그의 명탐정 캐릭터 중 1인인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소설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의 데뷰작입니다. 이 컴비의 시리즈는 제 블로그에서도 여러번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절규성 살인사건" ,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소개했었지만 장편은 처음 읽어 보네요.

일단 장점과 단점이 확연한데, 장점이라면 제목에서부터 독자에게 도전하는 듯한 밀실 트릭이 괜찮다는 것, 그리고 사건의 전개와 결말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매끄럽게 흘러간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트릭"에 집착해서 이야기 전개에 설득력을 잃어버리던 다른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이 작품에서의 "트릭"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내용과 잘 결합되고 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추리소설이라면 당연하지만 의외로 내용과 트릭이 잘 결합된 작품을 최근에 찾아보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니까요. 아울러 가장 중요한 단서가 초반부터 설명되고 있는 등 추리적으로 공정하게 독자와 승부하려는 작가의 모습도 마음에 듭니다. 일본의 "엘러리 퀸" 다운 모습이랄까요?
또한 단편에서는 느끼기 힘들었던 히무라 히데오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과거 및 심리 묘사, 작가의 추리관을 엿볼 수 있었던 추리소설가들의 대화라던가 밀실 트릭에 대한 소개 등 작품 외적으로 즐길거리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네요. 예를 들자면 작가가 소개한 "Locked Room Murders"라는 책,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소개하는 미국 추리소설 작가 댈리 킹의 트레비스 타란트 시리즈 "트멘트 4세호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읽고싶어지게 만들더군요.

그러나 작가 특유의 단점, 예를 들어 추리소설작가들과 편집자들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벌어진 눈 덮인 고원 별장에서의 밀실 살인사건이라는 작위적인 무대 설정이라던가, 사건의 실질적인 동기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의 단점도 여전합니다. 특히나 동기 측면에서는 아직도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살인"이라는 범행을 시도하기 전에 진실을 고백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밑져야 본전일텐데 말이죠.
그리고 서재를 밀실로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되고 있지 못한 것은 확실히 옥의 티입니다. 범인이 기상천외한 범행을 저지른 목적은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는데 결과론적으로는 이 의도와 서재를 밀실로 만든 이유는 별로 관련이 없어보입니다. 차라리 목격자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 넘치는 상황이죠. 어차피 두명죽이나 세명죽이나 별반 차이도 없잖아요. 그리고 아리스를 만약 살해했더라면 범인이 결국 빠져나갈 수 있었던 상황이라는 점 (가장 중요한 발자국에 대해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에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불필요한 암호 트릭 등은 사족으로 느껴졌고요. (차라리 손빈처럼 "여기서 방연이 죽다" 정도가 어땠을까요?)

이렇게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골고루이기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국내 출간된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 중에서는 베스트라 생각되며 일본의 엘러리 퀸 다운 모습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니만큼, 일본 신본격 작품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저는 최고 걸작이라는 "쌍두의 악마"나 차분하게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덧붙여, 학산의 "북홀릭"에서 출간되었는데 표지, 편집 모두 마음에 듭니다. "경성탐정록"도 다음에는 조금 더 신경써 주시길~^^

2014/12/09

파리인간 - 한스 올라브 랄룸 / 손화수 : 별점 2.5점

파리인간 - 6점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책에이름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저항하는 군인으로 활약했고, 전후 고위 관직도 역임했던 하랄 올레센이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수사 총 책임자로 임명된건 콜비외른 크리스티안센 경감이었다. 경감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랑나르 보르크만 교수는 경감에게 자신의 딸 파트리시아로부터 조언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녀의 뛰어난 추리력을 알아챈 크리스티안센은 그녀와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노르웨이 작가의 추리소설. 원래 북유럽 쪽 추리소설은 취향이 아닌데 평이 굉장히 좋았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정통 본격물 느낌이라는게 의외였습니다. 북유럽 추리소설이라서 "웃는 경관"이나 발란더 시리즈와 같은 묵직한 수사물이 아니면 요 네스뵈로 대표되는 스릴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첫 사건인 하랄 올레센 살인사건에 사용된 밀실 트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현대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시대 배경이 1968년이라 비교적 고전적인 추리가 사건 수사에 동원될 여지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범인이 가짜 범인을 조작하는 과정이 등장한 점도 고전 정통 본격물 스타일이라 할 수 있으며, 여러 증언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진상까지 끌고 가는 전개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고전적 추리 스타일에 더하여 전쟁영웅인 줄로만 알았던 하랄 올레센의 과거가 아파트 거주민들을 통해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진진합니다. 2차대전 중 국경지대 안내인이 자기 방어를 위해 두 명의 유대인 부부를 사살한 후 무죄 판결을 받았던 펠드만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데, 역사학자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발휘된 셈입니다. 안데르손에게 듣는 하랄과 디어풋의 목숨을 건 탈출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치는 등 디테일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탐정역의 천재 소녀 파트리시아도 특이했습니다. 발로 뛰는 형사와 장애가 있어 칩거하는 천재 조합은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설정이면서 링컨 라임 시리즈와 똑같아서 아주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리 소설을 백여 권 읽은 추리 소설 매니아라는 설정만큼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추리 소설 애호가라서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네요. 처음 만났을 때 책상에 놓인 책 중 한 권은 스텐리 엘린의 작품이라는 디테일도 돋보였습니다(1968년은 "발렌타인의 유산"이 발표된 해이기도 하죠). 그냥 설정으로 끝내는게 아니라 매니아답게 여러 가지 추리 소설을 응용하며 대화를 펼치는 점도 좋았어요. 아이 울음소리를 불평한 주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며 셜록 홈즈를 흉내 내는 식으로요. 중반부에 공소시효가 끝난 뒤 벌어진 동일한 범죄를 다룬 조르주 심농의 작품을 언급한 것도 기억에 남는데, 무슨 작품일까 궁금해집니다. 물론 추리소설 백여 권 읽은 걸로는 매니아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작가의 데뷔작이기 때문일까요? 아쉬운 부분도 많이 보입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정통 추리물의 스타일을 따르고는 있지만 실제 추리적으로는 그렇게 잘 짜여져 있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하랄과 엮여 있다는 인간 관계는 작위적이며, 주요 인물들의 증언이 거의 모두 거짓이기 때문에 공정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도 못합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밀실 트릭도 반 다인의 작품 등에서 이미 선보였던 고전적인 트릭에 지나지 않아 참신함이 부족해요. 레코드판이 아니라 테이프를 사용하는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수준도 유치하고요. 마지막에 모든 주요 인물들 앞에서 펼치는 추리쇼라는 작위적 설정까지 고전적 스타일을 답습했어야 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또 비록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사진까지 있는데 디어풋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다는건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범인이 원래 계획대로 자살을 위장한 완전범죄를 벌이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총도 새로 구해왔으니 모든 준비가 끝난 것 아닌가요?

그 외에도, 사라의 미모와 크리스티안과의 불륜은 지나치게 과하게 묘사된 듯 싶었어요. 할리퀸 로맨스 성인버전을 읽는 기분이었으니 말 다했죠. 휠체어에 앉아있던 장애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 역시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출연했던 수작 스릴러 "서스피션" 등 여러 작품에서 숱하게 등장했던 것이라 진부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데뷔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인 완성도가 미흡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히는 재미만큼은 충분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04/12

우부메의 여름 - 교코쿠 나츠히코 : 별점 2.5점

우부메의 여름 - 6점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손안의책(사철나무)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작가 세키구치는 친분이 있던 탐정 에노키즈의 조수 역할을 계기로 유서깊은 산부인과 병원 가문인 구온지 의원의 괴사건 - 구온지 가문의 사위인 마키오씨가 밀실에서 행방불명되고 아내인 교코는 20개월째 임신 중인 상태라는 것 - 조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전쟁 때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일종의 과거-원념을 볼 수 있게 된 에노키즈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남긴 채 사건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그러나 과거 마키오와 학교 동창으로, 교코와 마키오의 연애편지를 전달했던 역할을 했던 세키구치는 잃어버렸던 과거에 쫓기며 사건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사건은 평소 친하던 고서점 교코쿠도의 주인이자 세이메이의 계보를 있는 신사의 신주인 추젠지 아키히토의 추리로 구온지 가문의 역사와 사건 뒤에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는데….


일본의 유명 인기 작가 교코쿠 나츠히코의 데뷰 장편. 꽤 비싼 가격이지만 괜찮게 디자인된 장정과 작가 이름에 혹해서 바로 집어 든 작품입니다. 좋은 책은 많이 사 주어야 추리장르가 활성화 되겠죠? 물론 저도 헌책방을 애용하긴 합니다만... 하여튼, 손안의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디자인과 장정은 정말 괜찮네요.

작가 교코쿠 나츠히코는 추리소설가이기도 하나, 일본 요괴에 대해서도 권위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전에 먼저 접해보았던 단편집 “백귀야행”도 괴담류의 공포소설이었죠. 그래서 그럴까요? 이 작품 역시 “우부메”라는 일본 전통 요괴, 즉 아이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의 집념이 형상화 된 요괴를 테마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단순 괴담은 아니며 20개월이나 임신을 하고 있다는 임산부나 밀실에서 사라진 의사, 그리고 구온지 가문 병원에서 발생한 계속된 신생아 실종 사건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전통 요괴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현대적인 감각의 추리 소설로 재탄생시킨 솜씨는 과연 일품이더군요. 변격물과 유사하지만 그 감각을 따와서 보다 현대적인 작품으로 발전시켰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세간의 호평, 걸작이라고 소문에 비하면 아쉬움이 더 많습니다. 일단 말 많은 주인공인 추젠지 아키히토부터가 별로에요. 똑똑하고 잘난척 하는 탐정의 전형이라 왠지 거부감이 느껴질 뿐더러, 추리의 바탕이 되는 논리를 설명하는 부분들은 짜증이 날 정도로 장황하고 지루하거든요.
해설자역의 실질적 화자 세키구치 역시나 추리소설의 해설자 역으로는 빵점에 가깝습니다. 너무나 심약하고 마음의 병도 있는데다가, 사건에 간접적으로 관여되어있기도 해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결정적 이유가 세키구치의 오락가락하는 정신 상태 탓이니 더 말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제가 추리소설에 보아왔던 것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감점 요소에요. 이래서야 추리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작가의 논리 - 추젠지의 말을 빌린 - 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수긍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독특하고 감성적인 문체에서 발생하는 흡입력도 상당하며, 현대적 감성의 변격물을 요괴 이야기와 결합한 아이디어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정통 본격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웠던 결과물입니다. 
제가 아는 추리 매니아이신 decca님은 집어들고 하루만에 다 읽으셨다고 하는데, 좀 더 추리소설에 가까운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22/10/30

무엇을 위한 해체? 엽기 토막 살인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들

* 자주 소개드리는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입니다. 이번에는 토막 살인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들로 대체로 좋은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데드맨>>보다는 이런 류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나 <<문신 살인 사건>> 등을 포함시키는게 더 나았을것 같네요.


엽기 범죄의 대명사인 시체를 해체하는 토막살인. 추리 소설 작가들은 주로 "범인이 왜 일부러 시신을 토막내야만 했을까?"라는 동기에 주목하지요. 이 매력적인 수수께끼에 큰 속임수, 그리고 드라마를 숨겨서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를 보여주는 추리 소설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의 데뷔작이자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제1탄. 밀실 살인과 엽기적인 토막 살인, 관계자의 수기, 독자에의 도전장 등 본격 추리 요소가 가득한 작품.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추리 소설에 빠져든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 명작.

"치아키의 해체원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신체의 일부를 토막내고 해체하는 살인 사건을 다룬 9편의 단편이 수록된 보기드문 단편집. 수록작 모두 '왜 시신을 해체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퍼즐같은 정교함을 맛볼 수 있는 작품들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데뷔작이자 '다쿠미 치아키 시리즈' 제1탄.

"살인 방정식" 아야츠지 유키토 

신흥 종교의 교주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살해되고, 머리와 팔이 절단된 시체로 발견된다.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 라는 본격 미스터리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작품. 대담한 트릭과 의외의 진범, 완벽한 복선 회수를 통해 논리적으로 해결되는 수수께끼. 과연 아야츠지 유키토!라며 탄복할 수 밖에 없다. 속편도 추천.

"망량의 상자" 쿄고쿠 나츠히코 

연쇄살인으로 시작되어 민속학, 요괴, 전기 소설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전개되는 작품.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두껍지만 질리지 않는 재미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해보시길. 최고의 세계관에 푹 빠질 수 있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대표작이라는 이야기도 많은 걸작.

"데드맨" 가와이 간지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6구의 시체.그리고 그 부품을 연결해서 만들었다는 '데드맨'으로부터 메일이 보내지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시마다 소지의 걸작 "점성술 살인 사건"에 오마주를 바친 작품. 의외의 전개를 통해 오락성이 강한 서스펜스 추리물이다.

2010/12/28

2010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2009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일곱 번째 결산 보고입니다. 12월은 아직 남아있지만 남은 기간 동안 책을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아 포스팅 올립니다.

올해는 만화와 잡지류 제외하고 총 166권을 읽었습니다. 분포로 따지자면 1월 13권 / 2월 8권 / 3월 12권 / 4월 18권 / 5월 25권 / 6월 15권 / 7월 14권 / 8월 18권 / 9월 14권 / 10월 11권 / 11월 12권 / 12월 6권입니다. 장르별로는 추리 / 호러 관련 독서가 95권. 장르문학 전부 합치면 107권이고요.

전체적으로 굉장히 책을 많이 읽은 한 해였어요. 산본으로 이사 온 뒤 근처 도서관을 애용한 덕분이죠. 이사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남들에게 취미가 독서라고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은 숫자를 읽은 것 같아 왠지 뿌듯하네요.

그럼 결산 들어갑니다~ 언제나처럼 제 블로그에 올린 리뷰들 중에서만 선정했습니다.

2010년 베스트 추리소설 :
"유다의 창"
단평 : 고전으로서의 묵직함, 트릭이 빛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참맛,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재미까지 선사해주는 걸작.

올해는 많이 읽은 만큼 별점 4점짜리 후보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후보작은 아래의 8편이었습니다.

이 중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팬심이 반영되었기에 아깝게 탈락, 그리고 "7퍼센트 용액"은 셜록키언으로서의 애정이 포함되어 있어서 역시 아깝게 탈락. 그리고 "셜록 홈스의 과학"과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추리소설로 보기는 조금 어려운 책이라 제외해서 남은 3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유다의 창"을 꼽습니다.

2010년 워스트 추리소설 :
별점 1.5점의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단평 : 차라리 요리책이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2010년 베스트 장르 문학 :

덧붙여 2010년 베스트 장르문학 단편으로 "계약은 충실하게"를 꼽겠습니다. 이유는 여기서 확인해 주세요!

2010년 워스트 장르 문학 :
별점 1점짜리 두 편 선정합니다.

  • "하노이의 탑"
    단평 : 수학자가 쓴 수학자가 세상을 구한다는 자뻑 판타지로 소설로서의 가치는 전무.
  • "인간 동물원"
    단평 : 읽으면서 내내 불쾌하기만 했던 쓰레기.

결산평 :
일단 추리소설 쪽에서는 많은 고전과 명작들이 많이 소개되어 참으로 풍부한 한 해가 아니었나 싶네요. 하지만 널리 알려진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작품 자체는 그닥인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좀 의외였달까요? 그래도 추리소설 독자로는 무척이나 즐거운 한 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기타 다른 도서들은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새롭게 접한 작가들의 좋은 책이 많았던 것 같네요.

내년에도 많은 책들과 함께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상으로 올해 결산을 마칩니다~

2022/10/03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는 참을 수 없다! 법정 추리 소설의 고전 걸작들.

* 이전 소개드렸던 honto의 북트리 서비스에서 추천하는 법정 추리 소설들

법정 추리 소설의 고전 걸작들을 소개해드립니다. 1950~60년대 작품들이지만, 검찰측과 변호측이 증인을 서로 심문하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피고인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다투는 긴박감, 관계자들을 둘러 싼 복잡한 인간관계 등 작품의 핵심 매력들은 시대가 지났어도 전혀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읽을 가치가 충분한 명작들이니, 한 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사건" 오오카 쇼헤이 (국내 미출간) 

19세 소년이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법정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일본의 재판 제도와 절차가 상세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치밀한 르포르타쥬로 보이기도 하는, 읽을만한 법정 추리 소설.

"파계 재판" 다카기 아키미쓰 

 일본 법정 추리 소설의 원점이라고 불리우는 걸작. 전편에 걸쳐 법정 장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피고의 무죄를 믿는 변호사와 검사가 엮어내는 진검승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금씩 수수께끼가 밝혀지면서, 여러 복선이 회수되어 클라이막스로 이르는 과정은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외국 추리 소설 번역가로서 활약했던 저자의 데뷔작. 애거서 크리스티의 "검찰측 증인"을 의식하여 쓰여졌으며, 다카기 아키미쓰도 절찬했다는 법정 추리 소설. 과연 변호인 측 증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50년 전에 쓰여졌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복선과 트릭은 지금 읽어도 선명하게 그 가치를 내뿜는다.

"검찰측 증인" 애거서 크리스티 

남편이 살인 혐의로 재판받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된 아내. 그 곳에서 아내는 뜻밖의 증언을 하기 시작한다. 원래 희곡으로 쓰여진 작품답게 전편이 대화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으로 마치 연극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도 전해준다. 숨쉴틈없이 휘몰아치며 결말로 향하는 진행으로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걸작.

"유다의 창" 카터 딕슨 '밀실의 거장'으로 유명하지만 법정 추리 소설도 집필하고 있었던 저자가 밀실물과 법정 추리 소설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피고의 무죄 판결을 위해 헨리 메리베일 경이 파헤치는 진실은 무엇인지? 재판을 통해 상세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가설을 내놓고, 이를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 훌륭하게 묘사된 본격물.

2015/02/12

능숙한 솜씨 - 피에르 르메트르 / 서준환 : 별점 2.5점

능숙한 솜씨 - 6점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다산책방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명의 매춘부가 엽기적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베르호벤 반장은 두 사건이 2년 전에 있었던 다른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공통점은 현장과 시신에 가짜 손가락 지문이 남겨져 있었던 것, 그리고 어떠한 이유도 찾아낼 수 없는 범행 과정상의 디테일들이었다. 우연히 이 디테일들이 모두 유명한 추리소설을 모방했다는걸 알아낸 베르호벤은 탐정문학 전문지 광고로 범인과의 접촉을 시도하는데....

간만에 읽은 최신 프랑스 추리 소설입니다. 그동안 프랑스 추리소설들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뺑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외에는 딱히 취향이 아니어서 별로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과 표지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블로그 이웃과 커뮤니티의 호평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읽을 일이 없었을겁니다.

여러 면에서 프랑스 소설이라는걸 여실히 드러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그 안에서도 많은 부분을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할애한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이건 제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그리고 싫어했던 프랑스 소설들의 단점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꽤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범행들이 워낙에 자극적인데다가, 유명 작품들의 범행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설정이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뭔가를 따라 한 연쇄 살인은 흔한 설정이지만, 추리소설을 따라 했다는 작품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명작, 고전 취급을 받는 작품들을 모방했다는데 제가 읽은 작품은 달랑 한 작품밖에는 없네요. 이런 명작, 고전 선정은 작 중에 나오듯이 자의적인 판단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은 아쉬웠어요. 아무래도 제 취향이 수사물, 하드보일드보다는 고전 본격물 쪽인 탓도 크겠지만요. 참고로, 작중 명작, 고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브랫 이스턴 앨리스 "아메리칸 싸이코" : 작품 도입부에 소개된 두 명의 여성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범죄의 원전.
  • 제임스 옐로이 "블랙 다알리아" : 이전 여성 토막 살인사건의 원전
  • 마이 셰발 / 페르 발뢰 "로제안나" : 역시나 기이했던, 이전에 벌어졌던 살인사건의 원전
  • 윌리엄 매킬바니 "레들로" : 범인이 현장에 서명을 남긴 첫 번째 사건의 원전
  • 에밀 가보리오 "오르시발의 범죄" : 범인이 소설을 따라 벌인 첫 번째 살인

참고로, 제가 읽은 "블랙 다알리아" 말고 번역된 작품은 "아메리칸 싸이코"밖에 없군요. 못 읽은 게 당연하네요...

하여튼, 애호가를 자극하는 설정 외에도 놀라운 반전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1부 분량)이 사실은 범인이 쓴 소설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자 액자 소설 같은 구성이 드러나는 반전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현대물에서도 이런 아이디어를 가진 작품이 계속 나온다는게 놀라울 뿐입니다. 베르호벤이 말발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소설 속 인물들과 실존 인물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디테일도 아주 절묘했어요.

그러나 설정과 이러한 놀라운 반전 서술 트릭을 제외하고는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추리"라는 것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결국 범인이 기자 필리프 뷔송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니까요. 발랑제르 교수와 통화하다가 우연히 얻은 정보가 없었다면 영원히 알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소한 아내가 죽을 때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까지 예상해서 범인이 모든 것을 안배한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는 건 전혀 합리적이지가 않죠. 범인이 무슨 신도 아니고....

이러한 우연, 그리고 범인의 안배를 제외하고는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한 베르호벤과 동료들의 수사는 모두 헛수고일 뿐이라 정말 명수사관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범인이 유명한 추리소설들을 모방하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정도 재미는 있고 시선을 사로잡는 데는 충분하지만, 이러한 범행을 통해서 범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아니 설명되기는 하는데 작중 정신과 의사인 크레스트 박사의 말 - 사실은 미친 게 아니다 -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가 범인의 편지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 - 제대로 미친 놈이다 -가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더군요.

작중 등장했던 괜찮았던 착안점, 즉 왜 "레들로" 사건은 실제로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는데 다른 사건들은 프랑스에서 재현했는지? 에 대해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등 떡밥 회수가 부실한 것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소설다운 장황한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갓 태어난 아기까지 참살한 필요 이상의 잔인한 묘사, 유명 화가인 어머니의 임신 중 흡연으로 키가 145cm에 불과하다는 베르호벤의 설정과 그에 따른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베르호벤 설정은 과합니다. 키가 작다고 해서 대단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며 작품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는 부분도 없거든요. 그나마 덜 기형적인 툴르즈 로트렉의 창백한 복사판 운운하는 묘사처럼 독특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냥 얄팍한 캐릭터 만들기에 불과한거지요. 장님이지만 작품에서는 특징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맥스 캐러도스가 연상되었습니다. 부하인 루이가 부유하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에요.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캐릭터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 주는 것은 좋지만, 이러한 만화 같은 설정이 과연 작품에 필요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를 위한 설정에 더해 읽는 재미도 괜찮고, 독특한 반전의 가치는 높습니다. 하지만 추리 소설로의 완성도는 그냥저냥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베르호벤 시리즈는 이어지고 이 작품과도 연계성이 있다고 하니 후속작도 읽어는 봐야겠네요.

2021/11/07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5점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 자체를 풍자했던 "명탐정의 규칙" 시리즈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코미디 풍자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번에는 추리 문단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 즉 작가, 독자, 편집자, 평론가 모두를 비판하고 풍자합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 제목과 약간의 설정만 다른 똑같은 작품을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는 독자들. 책의 완성도 따위는 관심없고, 쉽게 돈 벌 생각에, 생각과는 다른 평론을 써 제끼는 평론가가 등장하거든요. 2001년 발표작이라는데, 데뷰한지 15년이 지났고 여러 히트작으로 업계에서 탄탄한 지위를 굳힌 히가시노 게이고였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만큼 과격한 풍자가 많습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하는건 "세금 대책 살인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추리소설가 '나'가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고액의 영수증을 비용 처리하려고 원래는 홋카이도가 무대인 소설에 하와이를 집어 넣고, 여러가지 옷을 구입한 이유와 골프 비용 등을 집어 넣으면서 작품이 산으로 가게 만든다는 내용이니까요. 소설을 어떻게 바꿔 썼는지가 자세히 등장하는데, 이게 굉장히 웃기더라고요. 결국 '나'의 작품은 망해서 연재마저 끊기고, 세금 대책에도 실패한다는 결말이고요.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블랙 코미디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점의 명탐정" 수록작이었던 "일상 업무 탐정단"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이렇게 읽게 되어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는 "장편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합니다. 긴쵸사의 편집자 오기는 그는 '초대작' 이어야만 팔린다고 작가 구주하라 만타로를 꼬드겨서, 800장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2,000 장으로 늘려버립니다. 별 거 아닌 문장을 몇 배로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를 덧붙이는 식으로요. 게다가 신작 "커브볼"은 3,000장을 목표로 작품과는 상관도 없는 정보를 다수 삽입하여 분량을 늘려가다가, 결국 '무게'로 승부하고 만다는 황당무계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말지요.
구즈하라가 작품 길이를 늘리기 위한 분투를 상세히 묘사한 내용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알맹이는 없는데, 이상하게 긴 대작 장편이 많은건 저도 불만이었는데, 정말로 이런 짓거리가 벌어진게 아닌가 의심스럽군요. 

"마카제관 살인사건"은 아주 짤막한데, 편집자에게 휘둘려 본의아닌 작품을 쓰게 되었던 작가의 절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편집자를 풍자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작가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자기가 썼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연재 소설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90대 고령 치매 작가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등장하는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은, 제목 그대로 '고령화'가 닥친 추리 작가의 비극(?)을 그려낸 블랙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들을 비판하는 작품이에요.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엉망인 작품을 쓰면서도, 심지어 이전에 출간했던 작품과 같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팔리는 이유는 독자들이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기 때문이거든요. 독자들도 고령이라 전작을 다 잊었다는 식으로 끝맺기는 하는데, 전작을 잊지 않았더라도 현실에서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독자로서 반성하게 되더군요.
예를 들어 요코미조 세이시의 "삼수탑"은 "여왕벌"의 자가 복제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던건, 이름값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소비하는 독자 탓도 분명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과계 살인사건"은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읽은 척, 잘난 척을 해대는 매니아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 역시 추리 애호가로서 많이 와 닿았습니다.

"독서 기계 살인사건"은 책을 읽지도 않고, 편집부 요청대로 호평과 혹평을 써갈기는 평론가 몬마가 주인공입니다. 이는 '쇼혹스'라는 기계를 구입한 덕에 가능했었지요. 쇼혹스를 만든 회사는 쇼혹스를 평론가들과 출판사에 팔아먹은 뒤, 쇼혹스의 비평을 최고 점수로 통과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쇼혹스 킬러를 만들어 작가 지망생들에게 팝니다. 마지막 제품은 일반인용의 시타카브릭스로 책의 요약과 재미있고 지루한 부분을 알려주는 장치였고요.
단순히 평론가들만 비판하는건 아니고, 책을 읽지도 않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책이 팔리지도 않는데 베스트셀러가 발표되고, 일반 독자는 알지도 못하는 상이 들어나는 등 책은 사라지고 있지만 책을 둘러싼 환상만은 요란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컨텐츠가 넘쳐나서 사람들이 책을 예전만큼 읽지 않는건 명확한 사실인데 차라리 시타카브릭스같은 장치가 상용화된다면 팔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줄거리는 물론 스포일러까지 가득 담고 있는 제 리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한데, 조회수를 보면 이나마도 안 읽는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싶어 좀 씁쓸하기도 하네요.

이런 블랙 코미디나 풍자극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 외에도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이 그러합니다. 유명 작가 시마부쿠로는 직접 쓴 추리 소설 '문제편'을 해결하는 편집자에게 신작 장편을 넘기겠다고 말하고, 각 회사 편집자들의 두뇌 싸움 끝에 긴초샤의 가타기리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시마부쿠로가 쓴 신작 장편 따위는 없었습니다. 얼마전 죽은 그의 아내가 진짜 작가였기 때문으로, 시마부쿠로는 아내가 남긴 소설 문제편의 해답을 알 수가 없어서 편집자를 동원했던 겁니다. 즉, 어떻게든 돈벌이를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장편을 걸고 편집자를 이용한거지요.
악덕 작가의 표본처럼 묘사되는 시마부쿠로를 통한 적절한 풍자도 인상적이었지만, 편집자가 그럴듯한 해답을 추리해 낼 수 있게끔 문제편에서의 단서 제공이 완벽한 덕분에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로 보아도 충분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예고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마쓰이 기요후미는 매 화마다 제복을 입은 여자가 살해되는 작품을 연재하는 인기없는 추리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내용대로 실제로 제복을 입은 여자들이 살해되기 시작하고, 마쓰이의 작품도 덩달아 큰 인기를 얻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마지막 화에 범인이 '자살'한다고 쓴 마쓰이는, 범인과 대결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하는데 그 탓에 범인으로 몰리고 만다는 결말입니다. 마쓰이는 중반 이후. 범인과 결탁해서 원고를 썼기 때문에 돈벌이에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풍자보다는 일종의 범죄물에 가까왔던 작품이에요.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코미디이자 풍자극으로도 재미있지만 정통 추리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은 만큼, 독특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추리 문학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1/02/24

추리소설 쓰는 법 -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보성사 : 별점 2.5점

추리소설 쓰는 법 - 6점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보성사

미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발표한 추리소설 작법서. 다른 작법서들처럼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지 않는게 특징입니다.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법, 플롯을 구성하는 법, 스토리 구성법 등 추리 소설을 쓰는데 중요한 요소들을 뽑아 놓기는 했지만, 이를 어떤 원칙에 따라서 소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 작가들이 각자 한 꼭지 씩 맡아서,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 구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원칙대로의 작법서라기 보다는 유명 작가의 비법(?)을 엿볼 수는 있는 일종의 족보 (?)에 가깝습니다. 

프레드릭 브라운, 존 D 맥도널드, 렉스 스타우트, 그레고리 맥도널드, 스텐리 엘린, 헬렌 매클로이, 에드워드 D 호크 등 우리나라에도 그 이름이 익히 알려진 유명 작가들이 쓴 각자의 비법을 읽는건 확실히 재미있더군요. 추리 소설을 쓰기위한 요소 외의 정보들도 유용했고요. 작가들에게 보낸 앙케이트 결과를 소개하는 '왜 쓰는가?', '언제 어떤 식으로 집필하는가?'에 대한 내용들과 투고하는 요령 등이 기억에 남네요.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법'이 있습니다. 로스 맥도널드는 겉으로 보이는 사물을 뒤집어 보는 것부터 플롯을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D 호크는 우연히 생각난 제목에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고요. 로버트 L 피쉬는 트릭을 떠올리는게 가장 중요하며, 장편은 기상천외한 상황 설정에서 시작한다는데 과연 본격작가답습니다. 미리암 알렌 데포드는 신문 스크랩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데 무척 공감되었습니다. 이외에는 독특한 인물이나 꿈, 배경 설정, 결말, 중심 테마 등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가장 놀랐던건 존 볼의 '24시간 노동', 즉 항상 생각한다는 건데, 과연 유명한 '버질 팁스'의 창조자답습니다! 버질 팁스 시리즈가 정식 출간되면 좋겠네요. 

그리고 프레드릭 브라운이 플롯 구성법에 대해 짤막하게 쓴 글도 인상적입니다. '금붕어'라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해서 플롯을 짜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어에서 시작해서 등장인물, 테마, 사건, 배경 등을 차츰 덧붙여 발전시키는 방법인데, 거장답게 깔끔하면서도 재미있는 설명이 돋보였어요.
폴린 블룸이 알려주는, 쓰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결말을 알고 난 뒤 중심부 플롯을 만들라는 스토리 구성법도 유용해 보였습니다. 특히 강조한 '대립'을 스텐리 엘린의 "배반"을 예로 들어 설명해 준 것도 좋았어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짧은 작품 속에 열 개가 넘는 극적 대립이 드러나 있다는게 놀랍더라고요. 이를 위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른건 접어두고 "이 아이디어로부터 등장인물을 심각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직면할 만한 대립이 무엇이며, 뭐가 장애요소인지를 떠올리고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해 보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데이나 라이온 역시 스토리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는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사례로 나온건 아니지만, 얼마 전 읽었던 "숙명"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형사가 대기업 사장 살인 사건을 수사하게 되면서, 사건이 어린 시절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정신 지체 여성의 죽음및 어린 시절 라이벌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게 된다."가 되겠네요. 음... 이대로는 영 재미는 없어 보입니다만.... 

서두는 이야기를 결말까지 고려하고,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지 생각하고 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지적에는 감탄했습니다. 거장은 문장 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는 법이지요.

어떤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게 좋은지에 대한 여러 작가들의 생각, 대화는 액션과 마찬가지라는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설명과 작가들이 각자 소개해주는 여러가지 퇴고 및 수정 방법들도 앞으로 창작 작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 외 시리즈물과 단발물 (스탠드 얼론)의 차이점과 장, 단점에 대한 설명과 왓슨역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등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에 대해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던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1987년 출간된 버젼인데 번역이 정말 엉망이었어요. 지금은 쓰지 않는 용어도 많았고요.

또 이미 30년도 전에 출간된 책이니만큼,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내용들도 제법 됩니다. 아울러 플롯을 짜는 법 등 소설을 쓰는 기본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꼭 '추리 소설'에만 국한된 내용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번역도 좋고 완성도 높은 작법서를 읽는게 나을겁니다. 애써 구해 읽으실만한 책은 아니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7/29

비밀의 백화점 (추리소설 특급 가이드) - 한겨레21 별책부록

한겨레 21의 여름 특집 별책부록 추리소설 가이드입니다.

별책부록이라고는 하지만 분량으로는 100여페이지 정도이고 폰트 크기도 작은 편이니 외견보다는 많은 내용을 담고는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저자들을 섭외해서 여러 종류의 글들을 짧게 짧게 실어놓은 책으로 김탁환씨와 성귀수씨와 같은 메이저 작가, 번역가에서 영화평론가들, 그리고 Howmystery.com과 화요추리클럽 분들을 비롯해서 알라딘 전설의 리뷰어 물만두님까지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기고자들이 면면이 화려하고 워낙 많아서 다양한 취향을 음미하는데에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 짤막한 만화까지 포함되어 다양한 쟝르를 포괄하고 있는 점도 좋은 기획으로 보입니다. 척박한 국내 만화계에서 비교적 정통파 추리 만화를 그렸던 한혜연과 석동연씨가 작가진에 있는것이 반가우며 추리 매니아이신 김진태씨도 짧지만 재미있는 만화를 개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워낙 짧다보니 글의 테마와 종류에 비한다면 그다지 깊이가 없긴 합니다. 조금 페이지를 늘리더라도, 아니면 기고자를 조금 줄이더라도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물론 별책부록인 만큼 자금과 페이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지금 상태는 좋은 기획의도를 충분히 받쳐주지 못하는 팜플렛에 가까운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온라인 추리 동호인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척박한 풍토에서 고생해온 국내 추리작가들의 비중이 너무 없는 것은 불만스럽습니다. 이젠 원로축에 끼시는 김성종 선생님이나 정건섭 선생님에게는 최소한 한페이지 이상은 의뢰드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번역계에서도 국내 추리계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신 정태원 선생님의 이름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책 권말의 추리소설 목록은 솔직히 불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보이고요. 어차피 다 싣지 못할 바에야 올해 신간만 리스트업하는게 더욱 좋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손을 본다면, 그리고 출판사의 의지가 작용한다면 장래에는 국내판 "이 미스테리가 굉장해!" 수준의 책을 뽑아 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던져 주는 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작가의 비중이 보다 높아져야 하리라 생각되고 국내 추리소설계도 분발해야 겠지요. 부디 내년에는 보다 풍성한 내용으로 가득차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포함되어 있는 앙케이트 한번 해  봅니다...

1. 가장 사랑하는 추리소설 1-5
어떻게 다섯개만 뽑을 수 있겠습니까만은, 현재의 베스트는
미야베 미유키 "화차", PD 제임스 "어떤 살의", 피터 러브시 "밀랍인형", 로스 맥도널드 "소름", 크리스티 "화요일 클럽의 살인"

2.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작품
아카가와 지로의 삼색털 고양이 홈즈 시리즈. 명성이라는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요.

3. 최고의 작가
레이몬드 챈들러. 두말할 필요 없겠죠...

4. 가장 사랑하는 탐정
모스 경감. 나름 약점도 많고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 마음에 듭니다.

5. 가장 인상적인 악당
"유니스의 비밀"의 유니스 파치먼. 전형적인 악당이 아니고 평범한 하녀에서 폭발하는 광기에의 감정 이동이 놀라왔던, 그래서 더욱 무서웠던 인물입니다.

6. 가장 훌륭한 결말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결말
훌륭한 결말 - 피터 러브시 "가짜 경감 듀"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복선과 사건이 완벽하게 정리되며 모두가 행복해지는 멋진 엔딩이라 추천합니다.
어처구니 - 사카구치 안고 "불연속 살인사건" 이렇게 모두 죽어나가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밖에 없잖아요?

7. 가장 완벽한 범죄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끼". 범죄자의 자기 합리화를 독자에게도 공유하게끔 하는 설정이 놀랍습니다.

8. 가장 멋진 대사
"정말 잘 가라는 말은 벌써 해 버렸단 말이야. 정말 잘 가라는 말은 슬프고, 쓸쓸하고,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을 걸세"
 레이몬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마초이즘과 서정성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명대사.

9. 배신하지 않는 작가 (가장 믿을 만한 작가)
로스 맥도널드, 국내 출간된 작품을 다 읽은 유일한 작가일 뿐더러 작품이 전부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10. 가장 잘된 추리(미스터리)영화
알프레드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 구관이 명관, 명불허전의 작품입니다.

11. 우리나라에 꼭 소개되어야 할 작품
비교적 소개된 것이 적은 일본 고전 본격물과 신 본격물의 다양한 소개를 기원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나 노리츠키 린타로. 다카키 아키미쓰 등이요.

12. 가장 좋아하는 국내 추리소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라면 김성종의 "최후의 증인"

13. 미스터리 초보에게 추천하는 작품 셋
초보자에게는 단편이 더욱 어울리리라 생각됩니다. 세 편이라면 크리스티의 "화요일 클럽의 살인",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의 모험" 두 단편집과 황금시대 정통 본격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를 추천합니다.

14.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그 이유
항상 저를 지적인 흥분상태로 몰고 가는 두근두근한 긴장감이 좋습니다. 또 혹시 압니까? 향후 요긴하게 써먹게 될지도.....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나 한번 만들어 볼까나!

15. 그리고 할 말이 남아 있다.
추리 독자의 저변이 더욱 넓어져서 제가 군침만 삼키던 작품들이 더욱 많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뭔가 기획해서 책을 내보고 싶기도 한데, 저변과 시장이 넓어지면 언젠가는 기회가 되겠죠.

2021/12/19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마틴 에드워즈 / 성소희 : 별점 2.5점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6점 마틴 에드워즈 지음, 성소희 옮김/시그마북스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발간한 고전 범죄소설 시리즈를 읽을 때 참고할 안내서입니다. 1901년에서 1950년 사이에 출간된 소설 중 범죄 소설에 초점을 맞춰 모두 102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시기별, 장르별, 특징별로 상세하게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별로 왜 그 작품을 선정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덕분에 소개된 작품만 읽어도, 고전 추리, 범죄 소설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황금기를 지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통 고전 본격물'을 일컫는, 이른바 '페어플레이 미스터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면 저자는 1차대전 이후 전쟁에 지친 대중이 현실 도피와 함께 흥미진진한 게임을 원했기 때문에 이 분야가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점점 소설 속 탐정과 지혜를 겨루는 작품이 많아졌으며, 그 결과 오락거리로 즐기는 가벼운 문학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이른바 범죄 소설의 '황금기'가 바로 이 시기인겁니다. 복잡한 퍼즐, 이야기 속 단서 삽입, 독자를 현혹시키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선보이기 위해 장편 형식이 유행하게 된 것도 필연이었고요. 

또 불가능 범죄 미스터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편 형식이 가장 잘 맞는다는 주장도 기억에 남습니다. 독자가 불신을 유예하는 시간, 즉 사실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멈춰놓는 시간이 짧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저 역시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리뷰를 쓸 때는 "생각해보니 억지스럽고 작위적이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 없이 두뇌 게임만을 온전히 즐기려면 이야기가 길면 안 되겠지요.

이런 추리소설 통사적인 측면 말고도, 작품별 소개글도 수준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진짜 흥미를 자아내는 선까지만 알려주는, 스포일러가 전혀 없는 내용 요약도 일품이며 소개된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도 충실히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화 버젼에 대한 정보가 아주 디테일해요. 영화는 물론, TV 시리즈까지 모두 소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움직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통제 불능 상태의 로터리와 마주치는 두 번째 추격 장면은 히치콕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각색한 영화에 활용했다는 이야기까지 소개될 정도니까요. 

비슷하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에 대한 소개 역시 그 방대함과 깊이가 남다른 수준이며 그 외 여러가지 토막 정보들도 충실합니다. 바로네스 오르치의 "미스 엘리엇 사건"은 1915년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남극 탐험을 떠날 때 챙겨갔던 책이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가 1979년, "독 초콜릿 사건" 재판본 서문을 쓰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일곱 번째 방법을 발표했다, 우드소프의 1932년 데뷔작 "사립학교 살인사건"은 1934년 미국 사립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처럼요. 1931년 발표되었던 에블린 엘더의 "흑백 살인"은 주인공 샘 호더가 그린 그림이, 프랜시스 비딩의 1935년 작 "노리치의 피해자들"에서는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 단서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추리 소설 관련된 아이디어가 이미 20세기 초엽에 정립되었다는 정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자의 추리, 범죄 소설 분야에 대한 방대하면서 해박한 지식에는 감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리 소설가들이 작품을 썼던 의도들도 볼만했던 정보입니다. A.E.W 메이슨이 "독화살의 집"을 쓸 때 목표로 했던 건,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된 후 추가 설명해야 하는 내용을 가능한 없애겠다는 것처럼요. 페어플레이 추리 소설의 초창기 표본인 "밤중에"를 쓴 고렐 경의 목표는 모든 필수적인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하며, 고렐 경의 이 작품에서 건물 평면도, 지도 등이 처음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A.A. 밀튼은 추리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탐정이 독자보다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는데, 과연 곰돌이 푸를 쓴 작가답습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마이클 이네스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추리 소설은 어쨌거나 순전한 오락물이니 독자를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해 주겠다는 야망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데 정말이지 맞는 말입니다! 빅터 로렌조 화이트처치가 "다이애나 웅덩이의 범죄"를 쓸 때, 본인 스스로 왜 범죄가 일어났고 누가 범인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창작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자 뿐 아니라 작가조차도 의미를 모르는 단서들을 살펴보며 수사를 하고 글을 썼다는 건데, 발상이 참 독특했어요.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안내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내에 따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이 턱없이 부족한 탓입니다. 총 102편 중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래의 29편에 불과합니다. 절판된 책도 포함한 것으로, 실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보다도 훨씬 적을 거에요. 이래서야 이 책을 읽는 의미가 많이 퇴색할 수 밖에 없지요.

  1. "배스커빌 가의 사냥개" - 아서 코난 도일
  2. "네 명의 의인" - 에드거 월리스
  3. "브라운 신부의 순진" - G.K. 체스터턴
  4. "오시리스의 눈" - R. 오스틴 프리먼
  5. "하숙인" - 마리 벨록 로운즈
  6.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어니스트 브래머
  7. "트렌트 마지막 사건" - E.C. 벤틀리
  8. "통" -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9. "붉은 저택의 비밀" - A.A. 밀른
  10.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1. "증인이 너무 많다" - 도로시 L. 세이어즈
  12. "독 초콜릿 사건" - 앤서니 버클리
  13. "목사관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4.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15.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 이든 필포츠
  16.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17. "시행착오" - 앤서니 버클리
  18. "완벽한 살인사건" - 크리스토퍼 부시
  19. "ABC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20. "막다른 사건 부서" - 로이 비커스
  21. "살의" - 프랜시스 아일즈
  22.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조세핀 테이
  23.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24. "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25. "붉은 오른손" - 조엘 타운슬리 로저스
  26.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7. "수상한 라트비아인" - 조르주 심농
  28.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 H. 부스토스 도메크
  29. "야수는 죽어야 한다" - 니콜라스 블레이크

자유 추리문고에서 출간된 "포튠을 불러라"는 이 책에서 소개한 "포춘 씨, 부탁입니다"와는 다른 단편집으로 생각됩니다. 언급되고 있는 "작은 집"이라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외 수록작은 다르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소개된 걸로 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개된 작품은 한 3~4권 빼고 전부 읽었기에, 별 의미없는 소개였던 셈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대한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이런 이유로 감점하여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10/02

미로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권일영 : 별점 3점

미로관의 살인 - 6점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한즈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가 환갑을 맞았다. 그는 자신의 저택 '미로관'에 제자 작가 4명과 평론가, 담당 편집자, 친한 추리소설 애호가를 초대했다.

미로관에 모인 그들에게 미야가키의 비서 이노 미쓰오가 요타로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함께 공개된 유언장에는 4명의 제자 중 한 명에게 거액의 유산을 줄 생각인데, 그 한 명은 앞으로 닷새 동안 미로관에서 그들이 각각 쓴 추리 소설을 함께 참석한 편집자, 평론가, 애호가들의 심사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죽기는 했지만, 워낙 거액이 걸려있는 탓에 작가들과 심사 위원들은 요타로의 유언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작가 중 한 명인 스자키가 살해당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 모두는 미로관에 갇혔다는걸 알게 되었다. 유일하게 사라진건 비서 이노였다. 작가 중 한 명인 기요무라는 이노가 범인이라며, 유언에 따른 추리 소설 창작 대결을 속행할 것을 주장하는데....

신본격의 탄생을 알렸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1988년에 출간되었던 작품이지요. 

사실 이 작품은 나름대로는 비교적 빠르게 국내에 소개되었던 편입니다. 1997년에 학산 문화사에서 정식 출간되었었으니까요. 하지만 절판은 더 빨랐었습니다. 이유는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대가 아니어서 정보가 전달되고 소개되는게 많이 늦었던 탓입니다. 저 역시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가 출간되었던 것 조차 잘 알지 못했던, 그런 시대였거든요. 인터넷 서점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절판 이후 인기가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이지요. 덕분에 중고책 가격도 꽤나 올라가게 되었었고요. 이렇게 '1. 국내 출간 -> 2. 광속 절판 -> 3. 인터넷 등으로 유명세, 가치 상승 -> 4. 중고가 상승'이라는 과정을 거친 책들은 1990년대 후반에 꽤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점성술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지요.

그래도 저는 절판 직후 연이 닿아서, 2000년대 초반에 "십각관", "수차관", "시계관", 그리고 "인형관"을 구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도 대체로 기억나고요. 그런데"미로관의 살인" 만큼은 이상하게도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러던 차, 추리 소설 관련 정보를 조사하다가 한 랭킹에서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 빼어난 작품으로 "미로관의 살인"을 꼽고 있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생겼고, 오래된 숙제를 마치는 기분도 느낄 겸 해서 알라딘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 오래 전에 읽지 않았던 작품이 맞더군요. 모든 내용이 새로왔기 때문입니다. 당초에 왜 읽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의 기억이라는게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각설하고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자면, 이야기는 '시마다'가 시시야 가도미라는 작가의 "미로관의 살인"을 선물받아 읽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미로관의 살인"이라는 소설 속 소설이 곧바로 이어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미로관의 살인"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미로관'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고요. 시마다 기요시가 다른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탐정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미로관의 주인이자 추리 소설계의 거장인 미야가키 요타로가 자살하면서, 4명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에게 유산을 넘겨줄 생각으로 그들을 미로관에 불러 모았다는 도입부부터 시선을 확 잡아 끕니다. 이들을 닷새 동안 미로관에 가두고 작품을 쓰게한 뒤, 같이 초대했던 평론가와 편집자,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심사 위원 역할을 맡길 셈이었다는 계획은 꽤 그럴싸해 보였거든요. 뛰어난 신진기예 작가들의 실력을 극한으로, 하지만 공정하게 뽑아내기 위해서는 이만한 방법도 없을테니까요. 물론 공정함을 위해 현장에서 동일한 주제 - 무대는 미로관이며 피해자는 작가 본인으로 할 것 - 를 주기는 했지만, 작가 중 누구라도 자기가 쓰려고 했던 다른 작품에서의 획기적 트릭을 유용할 수 있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 실제로 다이잉 메시지를 쓰려고 했던 작가가 있었는데, 이는 장소와 피해자가 누구라도 상관없는 트릭이니까요 - 아주 공정했다고 보기는 힘들긴 하지만요. 이후 4명의 제자들이 각자 작업했던 작품에서처럼 살해당한다는 전개도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피해자들이 살해당한 현장 등 여러가지 단서들과 정보들 모두가 화자격인 우타야마를 통해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진상 역시 합리적이고요. 조금 상세히 설명드리자면, 가장 처음 살해당했던 스자키는 목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목 부분에는 소 머리 박제가 놓여 있었고요. 하지만 왜 머리를 아예 잘라 놓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박제 머리를 올려놓지 않고 이렇게 어중간하게 현장을 만들었을까요? 시마다 기요시의 추리는 범인이 현장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피를 피로 덮기 위해서 목을 잘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사실로 판명되고요. 

마찬가지로 하야시는 입구에 바리케이트까지 쳐 놓았을 정도로 준비가 철저했었는데, 왜 범인을 쉽게 방 안으로 들여 보냈는지? 그리고 후나오카가 살해당한 방은 빗장까지 걸린 완벽한 밀실 상태였는데 범인은 어떻게 도주한 것인지? 에 대한 답은, 미로관의 각 방은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하야시가 남겼던 다이잉 메시지, 후나오카가 죽기 직전 거울을 가리켰던 행위로 비밀 통로의 존재는 밝혀지고, 이로써 진범은 죽은 줄 알았던 미야가키 요타로였다는게 드러나고요. 그는 살인이 하고 싶어서 4명의 제자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방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지요. 이렇게 기묘한 현장 조작과 밀실 살인, 원격 조종 살인 등이 함께 펼쳐져 추리의 여지가 많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냥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까지 추리적으로, 그리고 반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워드프로세서의 키보드 배치 문제, S가 하나 더 표기된 MINOSS 왕의 철자, 지속적으로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축물은 특별한 장치가 있다며 시마다 기요시가 비밀 통로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는 등 다이잉 메시지와 비밀 통로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주어지고 있어서 아주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비밀 통로'는 트릭으로서는 작품 내에서도 언급되듯 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요무라를 살해한 트릭을 제외하고는 '미로관'이라는 말 그대로 미로를 이용한 트릭이 부족한 것도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부분입니다. 기요무라 살해 트릭도 우타야마의 입을 통해 '통로에서의 위화감'이 계속 언급되고 있어서 특별히 대단한 추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요. 아울러 기요무라가 가면이 아니라 평면도를 통해 이동해서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 등 상세한 내용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하지만 에필로그를 통해 드러나는 반전과 또다른 진상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작품 전체에서 당연히 남자인줄 알았던 사메지마가 여자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던 겁니다! 이로써 스자키의 목을 잘랐던건 시마다 기요시의 추리가 맞았다는게 판명됩니다. 당시 현장에서 그 누구도 출혈을 일으킬만한 상처가 없어서 범인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사메지마가 갑자기 생리가 터졌던게 출혈의 원인이라는게 밝혀지거든요. 그녀와 미야가키의 오래된 인연, 장애가 있는 그녀의 아이 등 사건의 동기 역시 모두 공정하게 설명되고 있고요. 자살을 위장해서 미야가키 요타로만 살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유산의 전부나 일부가 미야가키 요타로가 만들려고 했던 추리상 기금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 죽게 만들었다는건 충분히 합리적이었습니다. 연쇄 살인마가 만든 추리상을 받고 싶은 작가는 없을테니까요. 

액자 소설 형태를 취했던 이유도 알고보니 이 서술 트릭을 위해서였는데,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 되고 있어서 완성도도 높습니다. 서술 트릭물답게 성별은 물론, 여성이라고 짐작 가능하게끔 사메지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등 알고보면 억지가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만 합니다. 이는 에필로그의 대화를 통해 '일부러 그렇게 썼다'는 작가의 말로 재치있게 빠져나가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사건의 무대인 미로관과 사람이 죽어나가는 중에 벌어지는 추리 소설 창작 대결 등 비현실적인 소재가 많다는 등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라나 신본격의 중흥을 이끌었던 작가의 당시 대표작다운 재미는 충분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기본 이상은 해 주며 그리 길지 않다는 미덕도 크고요.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해드립니다.

2017/08/1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 - 대중서사장르연구회, 박유희 외 : 별점 3점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 - 6점
대중서사장르연구회.박유희 외 지음/이론과실천

한국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 등장했던 추리물의 역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정리하여 알려주는 인문학, 문화사 서적입니다. 

"아랑 전설"에서 밀양 부사가 빨간 깃대를 흔들고 가는 아랑에 대해 꿈꾼 후, 범인이 '朱旗'라는 사람임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에서 '한각사중계월침, 붕월반월원무심'이라는 점 글귀의 뜻 풀이 같은 것이 소개되는 등, 고전 설화와 각종 야담, 역사서 등에 등장했던 추리 서사부터 소개하고 있기에 그 양과 깊이가 실로 방대합니다.

근대적인 추리 소설, 즉 '정탐 소설'이 처음 등장한 "쌍옥적" 이후의 자료는 더욱 풍부합니다. 처음 알게 된 건 "쌍옥적" 시기에 발표되었던 "박쥐우산"이라는 작품입니다. "르루주 사건"을 번안한 "누구의 죄"를 표절한 느낌이지만, 소개를 보니 범행 동기와 범인 설정을 당시 국내 실정에 잘 맞도록 나름 개선, 발전시킨 부분이 있는 덕분에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근대 초기에 셜록 홈즈와 같은 정통파 추리물이 아니라 '에밀 가보리오'의 프랑스 소설이 유독 인기를 끌었다는 점도 꽤나 흥미로왔고요.

아울러 근대에 추리 소설이 번안되어 소개되면서 이른바 '탐정 소설'이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가진 독자들이 읽는 지적인 작품으로 어필했다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추리 소설이 항상 싸구려 문학의 대명사로 알려진 80년대 이후를 살아온 저에게는 이해가 안되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독서라는 취미 자체가 어느정도 지적 수준이 있는 계층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을테고, 그 중에서 추리 소설은 트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적인 지식이 뒷받침 된 이해력이 필요하니까요. 근대에는 그러한 독자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렇게 초창기 추리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아주 괜찮은 듯 싶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정탐', '탐정'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당대 분위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어요. 인용되는 자료들을 보니 각종 신문 기사 헤드라인에서 이 단어들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더군요.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대구에 사는 한 소년이 10세 아동을 납치 살해한 후 협박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대표적이에요. 범행도 충격적이지만 이 소년이 '탐정소설만 매일 탐독'했다고 소개되거든요. 이렇게 탐정소설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상식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죠. 가슴아프게도 이러한 부정적 인식, 앞서 말씀드린 물질 문명에 대한 부분, 거기에 '그로(그로테스크)'로 대표되는 새로운 유행의 결합 등으로 한국 추리 문학이 서서히 선정성, 엽기성이 강조된 싸구려 펄프 픽션화하는 과정이 해방 이후 현대에 걸쳐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아울러 지적인 영역, 논리적 추론과 과학적 수사 외에도 서구 물질 문명의 유혹 역시 지식인들을 끌어당기는 요소였다고 하는데, 이 역시 후대에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적인 영역이 아니라 물질 문명에 대한 부분만 확대, 발전해 버린 탓입니다.

그래도 저도 익히 알고 있는, "최후의 증인"이라는 기적으로 대표되는 김성종 시대에서 현재(이 책이 발표된 2010년 기준)까지 이어지는 과정의 마지막 부분 덕분에 아직 한국 추리 문학에 희망이 있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만들어 줍니다. 한국 추리문학의 미래로 "경성탐정록"이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경성탐정록"이야 말로 한국 현대 추리문학이 이룬 놀라운 성취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선정성, 엽기성이 사라지고 정통 추리 서사에 기반한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원점에 회귀한다는 측면은 분명히 있죠. 이를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 추리문학의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고요(반은 농담인거 아시죠?).

"경성탐정록" 외에도 고전에서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는 추리 문학 발전 와중에 등장한 수많은 작품이 소개되기 때문에 눈길을 끄는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문학의 홍수 속에서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추리 서사를 보여주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 친일 문학이기에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사면에서는 흥미로와 보이는 김내성의 "태풍", 해방 후 추리 문학계의 1인자였다는 방인근의 작품들(그 중에서도 사립탐정 장비호 시리즈), 허문영의 번개 탐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방인근, 허문영의 작품들은 소개만 보아도 앞서 말씀드린 펄프 픽션들에 다름없기에 구태여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방인근 작품들에 등장하는 해방 이후 주요 설정들 - 일본인이 해방 후 강제로 쫓겨가며 챙기지 못했던 재산을 되찾으려고 한다던가, 국가 혼란기에 국보를 훔친다던가 등등 - 은 한번 연구해 보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추리 문학 뿐 아니라 추리 문학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흐름 및 주요 작품의 소개 또한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이 역시 읽어볼만 합니다. 007 시리즈의 여러 모방작들 등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스파이물, 액션 스릴러, 느와르 등 다루는 폭도 넓고요. 제가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놓치시기 힘들 내용들이었어요.

그런데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은건 단점입니다. 기껏 흥미를 자아내는데, 정작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니 답답할 수 밖에 없지요. 지금 구하기 쉬운 작품들도 아니니까요. 도판도 부실한 편이고요.

그래도 얻은 것이 훨씬 많은 독서였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3만원이라는 가격도 마음에 들고요.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가 식민지 시대 추리 문학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책은 다루는 폭과 기간이 훨씬 넓다는 차이가 있기에 비교해 읽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읽기 전에는 내가 아무리 추리 애호가지만 이런 것 까지 찾아서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 정도면 모든 추리 문학, 장르 애호가분들께 권해드릴 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