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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9

와일드 씽 (2026) - 손재곤: 별점 3점

20년 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불가리아 국민 가요 표절 의혹으로 몰락했던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의 리더 황현우는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엑스포 유치 기념 콘서트에 재결성 라이브 공연을 제안 받은 뒤, 재기를 위해 옛 멤버들을 모아 공연에 나섰다. 하지만 공연장으로 향하다가 20년 전, 정산도 하지 않고 도주했던 전 소속사 사장 박용구를 우연히 만난 뒤 모든게 꼬여만 가는데...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좋은 인상을 잠겼던 손재곤 감독의 최신작 코미디 영화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깔끔한 이야기 전개입니다. 러닝타임은 길지 않지만 사건이 계속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변도미가 다시 합류하지 않고 최성곤이 새로운 멤버가 되는 결말도 합리적이고요.

등장인물 모두의 목적과 동기도 분명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공연에 대한 트라이앵글 멤버들과 최성곤의 집념, 이들을 살인범으로 오해한 경찰들의 추격, 죽은 척하며 상황을 이용하는 박용구, 소심한 복수를 꿈꾸는 나태풍까지 모두 황당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손재곤 감독 영화답게 신파에 기대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드네요.

극 중 '트라이앵글'의 전성기 무대와 음악 역시 1990년대와 2000년대 가요를 기억하는 저에게는 아주 반가왔던 점입니다. 최성곤의 활약도 눈부셔요. 등장할 때마다 분위기를 살리는 최고의 신 스틸러로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CF까지 찍은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에요.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변도미가 공연에 합류하는 과정이 조금 매끄럽지 못한 점, 그리고 공연에서 PD가 멤버들 합류가 늦어지자 대타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 장면 정도입니다. 앞 순서 가수들이 한 곡씩만 더 불렀어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오락 영화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웠어요.웃음과 추격, 대 소동과 음악이 적절히 어우러져 끝까지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더운 여름, 가볍게 즐기기에 문제없는 추천작입니다.

2026/08/08

Chat GPT가 그린 카즈키 케이시로 ("메이지 단두대")

Chat GPT로 탐정들을 원하는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시도한 건 야마다 후타로의 "메이지 단두대"에 등장하는 태정관 탄정대(太政官弾正台)의 대순찰, 카즈키 케이시로(香月経四郎)입니다. 그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헤이안 시대의 궁중 귀족이 시간 여행을 해 나타난 것처럼 고결하고 우아한 미남이라는 묘사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냥 고전적인 복장을 한 미남에 불과한건 아닙니다. 여러 불가능 범죄를 뛰어난 추리력으로 해결해 내는 명탐정인데다가, 권력자의 부패와 관료 사회의 타락을 용납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로 부패한 관리들을 법 앞에 세우려는 강한 정의감을 갖춘 인물입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케이시로는 '정의로운 정부'를 만들기 위해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권력자들을 제거하려고 암약해 왔었고, 마지막에는 모든걸 고백한 뒤 스스로 단두대에 올라 "탄정대 만세!"를 외치며 생을 마감합니다. 지금 보면 낡아보이지만, 한 때를 풍미했던 낭만 가득한 협객인 셈이지요.

이런 낭만적인 영웅들이 여러 콘텐츠를 수놓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시대착오적인 감성이 그리워집니다.

2026/08/07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 까지(till death do us part) - 존 딕슨 카: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작가 리처드(딕) 마컴은 식스 애시즈 마을에서 레슬리 그랜트와 약혼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마을 바자회에서 레슬리가 점쟁이의 천막을 찾은 뒤 이상할 정도로 동요했고, 심지어 사격장에서 레슬리가 우연히 쏜 총탄이 점쟁이를 맞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저명한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는 세 번이나 남편들이 밀실에서 청산가리를 주사하여 자살한 것처럼 만든 독살범이라는 이야기를 딕에게 들려주며, 레슬리가 딕을 초대할 때 자신이 집에 숨어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하비 길먼 경도 밀실에서 청산가리 주사로 사망한 사체로 발견되었고, 현장에 나타난 기디언 펠 박사는 피해자는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유명한 사기꾼 샘 드 빌라라는걸 밝히는데...

존 딕슨 카의 장편으로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초반 설정입니다. 주인공 딕 마컴의 약혼녀 레슬리는 한 점쟁이에게서 불쾌한 말을 듣고 분개하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총으로 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유명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가 과거 남편들을 청산가리로 살해한 독살범이라고 주장하고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하비 길먼 경마저 자신이 설명했던 사건과 똑같은 형태로 밀실 안에서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은 채 발견됩니다. 마컴은 레슬리를 믿고 싶지만, 피해자가 남긴 말과 똑같이 벌어진 죽음은 그녀를 의심하게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아, 정말이지 두근두근합니다.

피해자가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변장한 사기꾼 샘 드 빌라였고, 레슬리가 독살범이라는 거짓말로 마컴을 속여 그녀의 집에 몰래 들어간 뒤 보석을 훔치려 했다는 계획도 좋아요. 점쟁이의 예언과 독살범이라는 폭로가 모두 절도 계획을 위한 연극이었다는건데 상당히 잘 짜여져 있는 사기극이라는 느낌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원래 밀실 살인 트릭은 없이 이 사기극만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다는데, 납득이 되는 완벽한 구성이라 생각되네요.

딕슨 카 작품답게 밀실 트릭도 괜찮습니다. 벽에 난 구멍으로 실을 빼낸 뒤, 그 실을 당겨 창문의 잠금 장치를 잠근다는, 아래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지극히 단순한 트릭이지만 단순해서 현실성은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에 벌인 총격 소동으로 장치에 사용했던 구멍을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빼어나며, 이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고전 본격 추리물답게 공정합니다. 총 구멍이 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애시 경의 증언처럼요.

하지만 진범인 미들스워스 박사가 직접 기디언 펠 박사를 데려와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는 전개는 이상합니다. 자신의 범행을 밝혀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스스로 현장에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미들스워스 박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능한 지방 경찰들에 의해 샘 드 빌라는 자살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을 산 레슬리는 마을을 떠나게 되고, 딕과도 헤어지게 되겠지만 둘의 사랑을 미들스워스 박사가 지켜줄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독자를 속이기 위한 설정도 과합니다. 새벽에 레슬리가 피해자의 집 앞까지 갔는데 몽유병 상태라 기억하지 못했다던가, 금고 속 내용물 때문에 신시아와 격투를 벌였다는 설정들이 대표적입니다. 마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상황 묘사와 신시아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도 모두 혼란스럽고요. 쓸데없는 작전으로 마을 우편소장이 살해당한 것도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크지는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묘사는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었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일 테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강한 도입부와 효과적인 밀실 트릭이라는 장점만으로도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힙니다.

#여태까지 내가 읽었던 존 딕슨 카 작품 순위

2026/08/02

R.I.P. 히가시노 게이고

지난 7월 23일, 일본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투병 중이었던 대장암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에도 신작이 출간되었으며 평소에 운동도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건강에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요. 

추리 소설이라는 제 평생의 취미 활동에 많은 활력을 더해준 작가셨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신나게 보드를 타시길...

# 나의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베스트 15

광장(2025) - 최성은: 별점 2.5점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김부장"을 챙겨봐서인지, 넷플릭스 추천으로 뜨길래 보게 되었네요. 

가장 큰 장점은 액션입니다. 남기준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인지를 과장 없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초반 PC방에서 벌어지는 난투극과 구준모가 숨어 있던 별장에서의 액션은 현실감 있는 타격감과 묵직한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화려한 기술보다 그야말로 상대를 압도하는 힘과 타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서 남기준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단순한 복수극에서 끝나지 않고, 거대한 음모를 결합한 전개와 흑막은 이금손이었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경찰이면서도 돈을 위해 폭력 조직과 결탁한 뒤, 조직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핵심인물 차영도 설정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준모가 죽은 이후 이야기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남기준의 목표는 동생 남기석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는데, 구준모가 제거된 시점에서 그 목적은 사실상 달성되니까요.
이후 이금손과 차영도가 진짜 배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새로운 복수의 대상이 생기지만, 구준모와 이금손, 차영도의 관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다소 억지스럽습니다. 구준모가 남기석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금손과 차영도가 그 선택을 어떻게 유도하고 설계했는지는 작품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탓입니다. 구준모가 두 사람의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후반부 액션의 완성도 역시 초반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PC방과 별장에서 보여준 묵직한 실전 액션과 달리, 끝판왕 격인 재일교포 킬러 카네야마와의 대결은 칼부림 중심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홍콩 액션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에요. 이어지는 차영도와 이금손과의 대결 역시 두 사람이 애초에 남기준과 대등하게 맞설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긴장감을 끌어내기는 힘들고요. 쓸데없이 잔인한 것도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액션과 분위기만으로도 볼거리는 충분합니다. 후반부 이야기와 액션이 초반의 완성도를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킬링 타임용으로는 괜찮습니다.

2026/08/01

Chat GPT가 그린 가제와 나루 컴비 ("명탐정의 유해성")

Chat GPT로 탐정들을 원하는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시도한 건 사쿠라바 카즈키의 "명탐정의 유해성"에 등장하는 명탐정 고코타이 가제와 조수 나루미아 유구레 컴비입니다.

저와 같은 세대인,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 빛나는 청춘을 보냈지만 지금은 50대의 투명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나루의 심정에 공감했기 때문에 그려보게 되었네요. 그들이 가장 빛났던 청춘, 90년대 명탐정 4대 천왕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의 모습입니다. 가제는 자신의 원래 모습 거의 그대로이지만 나루는 광고 회사에서 만들어 준 이미지로 변신했습니다. 가제의 친구라서 보이시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이유로요. 원래는 아무로 나미에같은 갸루 스타일이었는데 말이지요.

명탐정 콤비라기보다 어딘가 히피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분위기의 두 사람이지만, 개성이 강하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각종 미디어에 등장해 명대사를 쏟아냈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현실의 탐정보다 '슈퍼 히어로'처럼 받아들였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지금은 아무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50대 동네 카페 주인이 된 나루의 모습은 다소 씁쓸하게 다가오지만 누구에게나 화려했던 과거는 있기 마련이고, 결국 그 시간은 모두 지나갑니다. 이 작품은 지나간 영광에 매달리기보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중년분들 화이팅입니다!

2026/07/31

명탐정의 유해성 - 사쿠라바 카즈키 / 권영주 : 별점 2점

20년 전 명탐정 가제의 조수였던 나루는 결혼 후 가업인 카페를 운영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튜버 코롱이가 명탐정들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한 탓에 가제가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제는 나루와 함께 과거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고, 명탐정의 추리가 언제나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주했다. 

결국 여행은 끝났고, 나루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오키 상 수상 작가 사쿠라바 카즈키의 장편입니다. 제목만 보면 본격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탐정이라는 캐릭터와 추리 소설의 관행을 풍자하는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같은 완전 풍자 유머 소설은 아닙니다. '명탐정'이라는 존재를 통해 헤이세이와 레이와라는 두 시대를 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중년 성장기에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헤이세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화려한 명탐정들의 시대입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든 나타나 극적인 추리를 펼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명탐정들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 만화 속 히어로처럼 그려집니다. 반면 레이와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시대입니다. 한때 명탐정의 조수로 이름을 알렸던 나루는 오십 대가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동네 중년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헤이세이와 소박한 레이와를 '명탐정'이라는 의외의 소재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나루가 가제와 함께 화려했던 헤이세이의 영광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잊고 지냈던 즐거운 기억뿐 아니라 외면했던 상처까지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시절을 되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요. 그래서 중년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성장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추리적인 재미도 아예 없는건 아닙니다. 초반 나루와 가제가 처음 만났을 때 나루가 사는 곳을 추리해 내는 가제의 추리나 AI 탐정이 사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 연기하고 있었다는 진상을 나루가 사소한 단서만으로 밝혀내는 장면 등은 꽤 그럴듯 합니다.

명탐정 풍자도 재미있습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에나 나타나고 화려한 언행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작품 속의 헤이세이 명탐정들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과장된, 초법적인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졌던 겁니다. 그야말로 만화와 다를게 없었던 것이지요. 

명탐정의 추리를 비판적으로 비판하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당시 주어진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리였더라도, 나중에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다면 그 결론 역시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즉, 명탐정이라는 존재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DNA 검사 등으로 나중에 증거는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부족한 정보로 산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데 불과하다는 코롱이의 비난도 꽤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작품 속 추리들은 대부분 이미 해결된 사건을 되돌아보는 형식이고, 그나마 등장하는 사건과 트릭들도 만화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은 탓입니다. '크리스마스 연쇄 살인'에서 피해자들이 받았던 장식물의 순서대로 살해당했단게 대표적입니다. 순록 - 굴뚝 - 벽난로 순으로, 이건 산타의 이동 경로라는 추리거든요. 

코롱이를 중심으로 한 현재 시점의 전개도 다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유튜브 폭로 영상 하나가 과거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긴 여정의 계기가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후반부에 코롱이가 가제와 나루의 일행이 되는 전개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솔직히 등장하지 않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케이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루가 처한 현재 상황 - 모두가 무시하는 투명 인간 - 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성격과 행동이 지나치게 거슬려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명탐정을 주제로 그려낸 성장기라는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명탐정에 대한 재해석은 흥미습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로는 별볼일 없어서 감점합니다.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6/07/26

비키퍼(2024) - 데이비드 에이어 : 별점 2점

양봉꾼 애덤 클레이는 친절했던 이웃 엘로이즈가 보이스 피싱 조직에게 전재산을 잃고 자살하자 복수에 나섰다. 그는 원래 초법적인 해결사 집단 '비키퍼'의 에이전트였기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피싱 조직을 분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싱 조직의 우두머리 데릭 댄포스는 미국 대통령의 아들이었고, 데릭은 어머니의 경호 조직을 최대한 활용하여 숨어버리는데...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 제이슨 스타뎀이 주연을 맡은, 요새는 너무 흔해진 '은퇴한 중노년 전문 요원의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다른 유사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액션을 선보이는게 차이점입니다. 제이슨 스타뎀이 50대 후반이기는 하지만, 중년을 넘어 이제는 노년에 가까운 키아누 리브스, 리암 리슨, 덴젤 워싱턴보다는 훨씬 쌩쌩한 덕분입니다. 

물론 전성기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은 없지만 보스턴 나인스타 빌딩에서 FBI SWAT 팀이 지키고 있는 입구를 아무런 장비 없이 홀로 돌파하는 장면, 용병들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몰아넣은 뒤 한꺼번에 처치하는 장면처럼 지형 지물과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는 신선하면서도 시원한 액션을 선보입니다.

빌런인 댄포스가 개발했다는 자금 흐름 추적 알고리즘도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유산을 상속할 대상이 없는 고인의 자금'을 빼돌린다는 아이디어는 한 편이 범죄 스릴러로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어 보였습니다. 살짝 지나치기는 아쉬웠어요.

그러나 아무리 액션 중심 영화라 하더라도 이야기의 설득력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애덤 클레이가 복수에 나서는 계기는 서사가 충분하지 않아 공감할 수 없었고, 아무리 비키퍼가 법 위에서 움직이는 초법적 조직이라고 해도 대통령 별장에 암살을 목적으로 침입한 인물을 그대로 방관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미국 대통령 별장에 쳐들어와서 경호원들을 학살하고 대통령 아들까지 죽인 인물을 그냥 놔 둘리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절정부의 대통령 별장에서의 액션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미국 대통령 경호 조직이 수수깡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애덤이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도가 지나쳤어요.

댄포스의 알고리즘과 그 뒤에 숨은 음모 역시 거창한 설정을 끝까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마무리되는데, 차라리 단순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배후 정도로 그리는게 더 깔끔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아무 생각 없이 1시간 30분 정도를 흘려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합니다.

2026/07/25

아이 윌 파인드 유(I Will Find You) (2026) - 로버트 헐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비드 버로우스는 아들 매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5년째 복역 중이었다. 그러나 처제 레이철이 매슈가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증거 사진을 보여준 뒤 탈옥하여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누군가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버로우스를 옭아맸고, 버로우스는 수차례 체포와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도 점점 사건의 흑막과 진상에 접근해 나가는데...

"숲"의 작가 할런 코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입니다. 넷플릭스에서 흥행하고 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처제 레이철이 가져온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매슈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발견한 뒤 생명의 위협을 받다가 탈옥을 선택하는 이야기 도입부는 아주 강렬합니다. 설정도 흥미롭지만 탈옥 과정의 디테일도 좋고, 이후 도주 과정도 설득력있게 선보이는 덕분입니다. 

버로우스가 인간관계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TV 드라마답게 매회 반전과 새로운 의문을 던지면서 시청자가 다음 화를 보게 만드는 솜씨도 제법이고요.

하지만 반전이 많은게 좋게만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애덤 맥켄지가 사실 악당 니키 피셔의 끄나풀이었다는 반전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까지 걸면서 버로우스의 탈옥을 돕고, 매슈의 관까지 파헤칠 정도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배신자로 바뀌는 전개는 그동안의 행동과 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니키 피셔가 최종 흑막조차 아니라는 사실이 비교적 쉽게 드러나면서 이러한 반전이 왜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진범이 헤이든이었다는 진상은 최악입니다. 헤이든은 매슈가 자신의 친아들이라고 믿어서 매슈를 데려갔던 겁니다. 그런데 왜 헤이든이 버로우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줄까요? 심지어 좋아하는 레이철이 함께 있지 않는 상황에서 버로우스를 경찰에 넘기거나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버로우스가 매슈를 끝까지 찾으려 하니, 없애버리는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헤이든은 후반부까지 충실하게 버로우스를 도와줄 뿐입니다. 

애초에 사건의 시작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버로우스를 매슈의 살인범으로 조작할 정도의 재력과 영향력이 있다면, 매슈만 빼돌린 뒤 버로우스 가족이 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꾸미는 편이 훨씬 간단했을테니까요. 막대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버로우스가 친아들을 살해한 것처럼 꾸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설명되지 않는건 많아요. 예를 들자면, 니키 피셔는 버로우스의 아버지가 흉기인 야구 배트를 숨겼다는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니키 피셔가 부하를 시켜 증인을 죽이고, FBI를 공격할 이유도 없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반부의 압도적인 몰입감만큼은 최고지만, 진범과 진상을 끝까지 숨기려는 데 지나치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다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추천드리기 어려운 졸작입니다. 드라마가 아니라 복선과 심리 묘사를 충분히 쌓을 수 있는 소설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026/07/24

203호실 - 가몬 나나미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신입생 오키무라 기요미는 한정된 예산 때문에 도쿄 변두리의 작은 원룸 203호실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방을 꾸미며 자취 생활을 즐겼지만, 어느 날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 뒤 방 안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계속되었고, 무너져 가던 기요미는 호감을 품었던 썸남 니이자토, 그리고 아르바이트 동료 유키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도움은 미미했고, 결국 기요미는 203호실 안의 깊은 어둠에 삼켜지고 말았다... 

가몬 나나미의 "203호실"은 여대생이 기이한 원룸에 삼켜지는 과정을 그린 장편 호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흔히 대저택을 무대로 삼는 전형적인 ‘저주받은 집’ 이야기인데, 이를 가난한 대학 신입생의 원룸으로 축소한게 인상적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취, 천장에서 누군가 뛰어다니는 소리, 사람이 앉았다 간 듯한 바닥의 온기, 기묘한 얼룩과 벌레, 갑자기 젖은 현관 매트처럼 일상적인 소재가 괴이현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공포가 한층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천장 얼룩을 가리려고 붙인 외국 풍경 그림 속 창문을 누군가 긁는 듯한 장면처럼 섬뜩한 묘사도 제법 많고요.

기요미와 이전 세입자들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결말 - '전에 살던 학생이 집세를 밀린 채 도망가 버렸을 뿐이다'. - 도 좋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이 공포심으로 승화되어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단순한 호러가 아니라, 비정한 현대 사회를 고발하기도 하는 멋진 설정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203호실이라는 좁은 공간과 기요미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이야기의 규모가 작은 탓에 뒤로 가면 지루해집니다. 기요미의 행동도 답답합니다. 왜 진작에 방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부동산에 제시할 명확한 사유가 없다는 설명은 한국 독자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행동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가장 큰 아쉬움은 괴이현상의 원인이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03호실에 정체불명의 악의가 존재하고 거주자들을 삼킨다는 사실만 제시될 뿐, 그 기원이나 정체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처럼 괴이의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설명은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드렸듯, 극한 외로움으로 기요미가 미쳐버렸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식으로요.

그래도 독자를 섬찟하게 만드는 호러 소설로서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분량도 적당한 편이고요. 헌티드 하우스와 저주받은 집 이야기, J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7/19

퍼즐(만화) 1~2 - 원작 야마다 유스케 / 작화 산베 케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마다 유스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산베 케이가 만화화한 작품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원작을 따르지만, 각색을 통해 원작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보완했습니다. 우선 원작에서는 테러범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강요하는 이유가 다소 불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만화판에서는 미토메가 연인 카와모토가 임신 후 동급생들에 의해 자살로 내몰린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정을 추가해서 동기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퍼즐 게임의 의미도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원작에서는 퍼즐 조각을 학교 곳곳에 숨긴건 그냥 게임이었을 뿐이지만, 만화판에서는 카와모토가 괴롭힘을 당했던 장소들에 조각을 숨겼다는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보완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퍼즐을 완성하면 카와모토의 얼굴이 드러나고, 학생들은 그녀의 죽음과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니까요. 

학교에 테러범들이 폭탄을 설치했고, 보다 강하게 학생들을 통제한다는 설정 역시 경찰이 권총 한 정 뿐인 테러범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48시간을 흘려 보낸다는 원작보다는 더 낫습니다. 

산베 케이의 그림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여성으로 변경된 야스다 선생을 적극 활용해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던 특유의 육감적이면서 성적인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적인 연출이 너무 과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주인공 유아사까지 여성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이고요. 

그리고 원작 각색도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학생의 임신 후 죽음과 그에 관련된 복수는 "동급생" 등 여러 작품에서 활용된 다소 진부한 설정이니까요. 또 원작의 핵심 주제였던 입시와 성적만을 중시하는 학교에 대한 비판도 희석되어 버린건 아쉽습니다. 야스다 선생이 성적 향상을 미끼로 남학생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설정만 기억에 남을 뿐이에요. 

2권이라는 짧은 분량 탓에 미토메 일당이 총과 폭탄을 얻은 방법 등 주요한 설정 설명이 부족하며 전개가 지나치게 빠른 것도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전개가 빠른 만큼 쉽게 페이지가 넘어간다는 장점은 분명합니다. 설정, 전개 모두 원작보다는 나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원작과 비교하며 각색 과정과 차이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으니 원작을 읽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7/18

신입사원 강회장 (2026) : 별점 2점

얼마 전 종영된 최신작으로 재벌 회장 강회장과 신입사원 황준현의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살인 음모와 미스터리를 더한 드라마입니다. 티빙으로 감상했습니다. 

"재벌집 막내 아들" 원작가인 산경의 원작을 따르지만, 추리 요소를 크게 강화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회장이 황준현의 몸에서 깨어난 뒤 회사를 노리는 자식들의 음모와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는게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강회장의 호적수인 나병모 회장의 딸이자 강회장의 며느리인 나은세가 강재경으로 변장해 병원에 잠입하고 강회장을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인상적이에요. 동기와 근거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제법 추리적으로도 볼만했어요

원작 대비 바뀐 설정들도 매력적입니다. 특히 황준현의 설정이 좋습니다. 평범한 신입사원이 아니라 유망한 축구 선수였지만 뺑소니 사고로 꿈을 접은 인물이라는 배경은 강회장이 그의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니까요. 죽은 줄 알았던 강회장이 살아 돌아오는 반전과 황준현이 원래 몸을 되찾는 해피엔딩도 원작보다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식들 교육을 방치하고 황준현을 무시했던 강회장 자신의 잘못인 만큼, 피해자로서 복수를 이어가는 전개는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강재경과 강재성 남매가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처럼 보이지 않고, 황준현과 강방글의 러브 라인이 이루어지는게 급작스러웠던 탓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또 다른 몸 바뀜 역시 유치하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없는게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교하면 황준현(강회장)의 능력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약간 아쉬웠어요. 회장 시절 알고 있던 정보를 활용하는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눈에 띄는 활약이 적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었으며,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히 추천할 만합니다. 최소한 원작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7/17

소소한 미식 생활 - 이다 치아키 / 장하린 : 별점 3점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있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장르입니다. 관심이 가는 책은 꾸준히 구입했고, 지금도 유심히 찾아보고 있는 장르이지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치아키의 이 책도 이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식 장르는 '단편 에세이 만화'이지만, 수록된 그림이 워낙 뛰어난 덕분입니다.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붓 터치와 풍부한 색감으로 그려낸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고, 식기와 주방용품, 집 안의 소품들까지 하나의 일러스트처럼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요리와 음식, 식기와 생활 소품, 그리고 집에서 보내는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낸, 특별한 사건 없는 잔잔함도 매력적입니다. 또 음식을 소재로 한 에세이 만화는 많이 봤지만, 식기와 식탁이나 생활 소품을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은 처음이라 신선했습니다. 각각의 물건에 담긴 고민과 추억을 풀어내는 과정에서는 작가의 섬세한 감성이 잘 드러나고요. 정말 요리와 음식,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어느 작가가 젓가락 받침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요? 휴일에 집에서 여유롭게 하이볼 한 잔을 즐기는 모습은 공감이 팍팍 갔습니다.

반면 드라마로서의 재미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읽었기에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요. 그러나 책의 성격 상 e-book으로 출간되는게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확대해가면서 그림들 디테일을 더 잘 보고 싶거든요. 너무 작게 인쇄된 글자들을 읽기도 힘들고요.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나, 잔잔한 힐링 에세이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e-book으로 출간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2026/07/12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9) 축배와 흉기 사이

추리소설에서 와인은 익숙한 소재입니다. 독살에 사용되기도 하고,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식탁에 오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와인 병 자체가 흉기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술병을 휘두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오히려 드문 소재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와인병은 사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암포라 같은 토기나 참나무통이 와인을 담는 용기였습니다. 두꺼운 유리병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자리 잡은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와인병의 모양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보르도 와인은 어깨가 각진 병을, 부르고뉴 와인은 둥근 어깨를 가진 병을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병의 실루엣만 보고도 어느 지역 와인인지 짐작할 정도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병은 와인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두껍고 단단한 유리로 제작됩니다. 자연스럽게 무게도 제법 나가고, 목 부분을 잡으면 손에 쥐기도 편합니다. 축하와 만찬을 위한 물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둔기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한 형태인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에서도 와인병은 종종 인상적인 흉기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앤서니 호로위츠의 "숨겨진 건 죽음"입니다. 

유명 이혼 전문 변호사 리처드 프라이스가 자신의 집에서 와인병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현장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적힌 ‘182’라는 숫자가 남아 있고, 탐정 호손과 작가 호로위츠는 그 숫자의 의미를 쫓으며 수사를 시작합니다. 여러 용의자가 저마다 충분한 살해 동기를 가지고 있어 마지막까지 범인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정통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작품 속에서 흉기로 사용된건 1982년산 샤토 라피트 로트실드 병입니다. 보르도 1등급 와인의 대표격으로, 흔히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브랜드 중 하나이지요. 그 중에서도 1982년은 최고의 빈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아무리 와인병이 흉기로 적합했다 하더라도, 흉기로 쓰기는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비싼 와인이지요. 이 보다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와인이 흉기로 등장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쳐"입니다. 

이 작품은 사진가를 꿈꿨지만 월가의 변호사가 된 벤 브래드포드의 이야기입니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연인 게리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인기작입니다. 유난히 와인이 자주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벤의 인생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와인이 함께하거든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블랑입니다. 

클라우디 베이는 뉴질랜드 말버러 지역을 대표하는 화이트와인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벤은 아내의 불륜을 이 와인 때문에 눈치챕니다. 와인을 잘 모르던 베스가 어느 날 갑자기 클라우디 베이를 사 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가게에서는 이 와인을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웃인 게리가 즐겨 마시던 와인이었고, 베스 역시 그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습니다. 벤은 게리를 찾아가 같은 와인을 함께 마시다 말다툼 끝에 결국 클라우디 베이 병을 휘둘러 그를 살해합니다. 와인 한 병이 불륜의 단서가 되고, 결국 살인의 흉기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클라우디 베이 와이너리의 설립자는 더글라스 케네디와 친구였다고 합니다. 작가는 친구의 와인을 작품 속에서 최고의 소비뇽블랑이라고 극찬했지만, 그 와인을 살인의 흉기로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설립자는 처음에는 못마땅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클라우디 베이 역시 함께 유명해졌고, 와이너리도 고액에 매각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무척 고마와하지 않을까 싶네요.

와인병은 원래 축배를 위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에서는 때로 사건의 단서가 되고, 때로는 살인의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와인병이라도 작품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평범한 식탁 위의 와인 한 병도 작가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클라우디 베이를 보게 된다면, 저는 아마 먼저 이 소설부터 떠올릴 것 같습니다.

2026/07/11

악의 등교 - 원작: 산천, 각색: 팀 더 제이, 작화: 시원

김현성은 학폭 피해로 식물인간이 된 뒤, 정신만 남은 채 10년을 버티며 복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사건 발생 직전 시기로 회귀한 뒤, 10년을 준비한 계획에 따른 복수를 시작하는데...

흔해빠진 회귀 복수극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몇 개의 확실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김현성이 10년 동안 복수를 시뮬레이션 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회귀 후 복수의 과정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집니다. 여기에 식물인간 상태에서 뉴스와 사회 변화를 기억했다는 설정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대산 지역 건설 회사 후계자와 미래의 대권 후보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배경을 만드는 과정은 제법 치밀합니다. 

두 번째는 복수 자체입니다. 김현성은 가해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1회성 응징이 아니라 아예 인생 자체를 무너뜨리거든요. 기껏 회귀했는데 복수는 시시했던 다른 회귀 복수물들에 비하면 훨씬 화끈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세 번째는 '대산'이라는 가공의 소도시가 무대라는 점입니다. 워낙 작은 도시라서 중앙의 통제가 잘 먹히지 않고, 지역 최고의 건설 회사가 도시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복수에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괜찮은 재미를 선사해 주는데, 아쉽게도 '골든 서클'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영 별로입니다. 정재계 최상위층이 속해있는 “골든 서클”은 고등학생이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탓입니다. 그리고 김현성이 10년 동안 계획을 세웠다고 해도, 골든 서클에 대한건 과거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야기처럼 잘 풀렸으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이는 작품만의 좋았던 차별화 포인트를 내다버린 어리석은 전개입니다.

골든 서클이라는 조직의 설정도 황당합니다. 하는거라곤 학폭을 유도해 타겟의 학교 생활을 지옥으로 만드는 정도입니다. 이걸 국내 최상위 그룹 후계자가 이끈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사건의 증명 역시 학폭 주도자들의 현금 흐름만 추적해도 충분했을테고요. 

싸움 실력은 UFC 선수급이고, 공부는 수능 만점 수준인 김현성의 능력에 대한 설정, 명진건설의 고창범처럼 김현성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물 설정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등, 그 외의 설정들도 문제는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장면만 놓고 보면 꽤 시원하지만, “골든 서클” 사건으로 키우지 말고 대산시 안에서 복수극을 마무리했다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7/10

퍼즐 - 야마다 유스케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사립 도쿠메이칸 고등학교가 테러범들에게 점거당했다. 최우수 학급인 3-A 반의 담임 야스다와 전학갔던 이전 동급생 미토메가 인질로 잡혔다. 테러범들은 인질들의 목숨을 댓가로 3-A 반 학생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48시간 내에, 학교에 숨겨져 있는 2,000개의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는 게임이었다.  

일본 작가 야마다 유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만화, 드라마, 영화에 심지어 게임까지 제작되었던 인기작인데 국내에는 아직 정식 소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징이라면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폐쇄된 곳은 학교, 게임은 학교 안에 숨겨진 2,000개의 퍼즐 조각을 48시간 안에 찾아서 맞추는 것. 게임의 보상은 인질의 목숨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와 비교해 보면, '게임'이 장점입니다. 학교 곳곳에 작은 퍼즐 조각이 숨겨져 있는데, 이를 찾아내서 맞춰야 한다는 현실성도 좋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퍼즐 조각을 발견하는 묘사도 흥미를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그리고 퍼즐 조각을 찾아서 맞추기 위해 열 세 명의 학생들이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 이 때 서로 각자가 가진 심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을 끝내 발견하지 못해서 게임은 실패하는데, 여기서 테러범들의 정체로 이어지는 결말도 그럴싸 합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미토메의 얼굴이었고, 퍼즐의 원본 그림이 3-A반 학생들의 입학식 사진이라는 단서도 충실하고요. 테러범들은 입학은 같이 했지만 성적 하락으로 낙오하여 전학갔던 동급생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입시 학원처럼 변한 학교 비판도 담고 있어서, 약간 사회파스러운 느낌도 전해줍니다. 초반에 이탈했던 이케타의 어머니가 다른 애들이 갇혀 있을 때 공부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게임 외 설정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테러범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경찰이 48시간 동안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학생 두 명이 초반에 돌아가는 등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요. 또 학생들이 왜 계속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합니다.야스다 선생은 학생들을 성적과 입시 기준으로 대하던 교사입니다. 과거에 낙오한 학생 미토메가 누구인지도 대부분 몰랐고요. 그런데 학생들이 야스다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부자연스럽습니다. 

테러범들의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이들이 낙오한 가장 큰 이유가 야스다 선생 때문이라면, 복수의 대상은 야스다로 한정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시킨 이유는?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퍼즐을 찾는 과정과 학생들의 심리 묘사를 통한 긴장감은 제법이지만, 설정과 동기 등의 측면에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7/05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2025) - 시게하라 카츠야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마토 칸스케는 용의자를 추격하던 중 저격을 당해 왼쪽 눈의 시력과 당시 사건에 대한 기억 일부를 잃었다. 10개월 뒤, 모리 코고로의 옛 동료 사메타니가 저격당해 죽자, 모리 탐정은 경찰과 함께 사메타니가 찾았다는 나가노현으로 향했다. 

결국 여러가지 단서들로 범인은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려 했던 나가노현 경찰 하야시였다는걸 밝혀냈다. 마지막 설산 추격전 끝에 하야시는 체포되고, 야마토 칸스케도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으며 사건은 해결된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의 28번째 극장판입니다. 전작은 하코다테가 무대였는데 이번에는 나가노현이 무대입니다. 설산과 노베야마 전파망원경 시설이 주 배경으로 등장하지요.

가장 좋았던 점은 원작 만화나 TV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모리 코고로가 오랜만에 사건 해결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나름대로의 추리는 물론이고 뛰어난 사격 실력까지 선보이며 제 몫을 톡톡히 합니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비중 배분도 훌륭합니다. 나가노현 경찰 3인방은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만큼 당연하게 활약하고, 란은 범인과 맞서 가라데 액션을 보여 줍니다. 소년 탐정단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 하이바라는 마지막 추격전에서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요. 비중이 적은 사토와 타카기도 마지막 추격전에서는 나름 역할을 합니다. 아가사 박사의 퀴즈, 아무로 토오루의 냉정한 모습도 팬으로서 반가왔어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범인이 사용한 총기를 주요 단서로 쓰는게 좋았어요. 겉으로는 권총이지만 실제로는 소총탄을 사용하는 개조 총기였는데 이는 앞서 여러 단서들로 밝혀지고, 결국 범인이 경찰 내부 인물이라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거든요. 피해자의 별명인 '와니' 역시 진범을 특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나가노현 경찰 하야시가 연인의 죽음 탓에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설산과 전파망원경 시설을 활용한 액션들도 대체로 그럴듯하게 그려집니다. 최근 극장판에서 자주 보였던 어처구니없는 액션이 줄어든 점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 무대인 나가노의 풍광도 수려하게 그려지고요.

반면 코난의 활약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추리에서는 큰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했고, 마지막 평지에서 무한 동력으로 날아다니는 스노보드 추격 장면은 황당했습니다.

범인 하야시의 행동도 쉽게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려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사메타니를 살해한 것은 스스로 범행의 명분을 무너뜨린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법안이 바뀔 이유도 없고요.

야마토 칸스케의 기억 상실 역시 아쉬웠습니다. 특정 기억만 사라졌다가 사건 해결에 필요한 순간 되살아나는 전개는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메'와 '와니'의 연결도 많이 사용된 소재인데, 작중 등장인물들이 모두 모르고 있다는 것도 좀 와 닿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이야기 완성도가 떨어졌던 전작보다는 여러모로 낫습니다. 모리 코고로의 활약도 만족스러웠고요. 일부 설정은 아쉬웠지만 코난 팬이라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7/04

Q.E.D Iff 증명종료 30 - 카토 모토히로

"Q.E.D."의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의 마지막 권입니다. 

이전 권에서 토마가 가나에게 고백하길래 이번 권을 마지막으로 시리즈가 끝날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Q.E.D. UNIV"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최근의 폼은 작가의 최전성기가 지났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것은 반갑네요.

이번 권에도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비교적 가벼운 입시 부정 사건이고, 한 편은 살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스티지"

하버드에 합격한 가나는 브라이언 교수와 학장으로부터 입시 부정 관련 사건 조사를 의뢰받았다. 자동차 부품 회사 사장 넬리 게레로가 기부 입학을 위해 천만 달러 수표를 보냈는데, 아들 야엘이 불합격하고 자살했다며 학교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수표를 받지 못했다.

넬리가 마약 카르텔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자, 입시 컨설턴트 시퍼가 천만 달러 수표를 학교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챙기려고 했던 것이 수표 분실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녀는 야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학교에 수표를 돌려주었지만 들통나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나 진짜 진상은 넬리가 야엘을 마약 카르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시켰던 것입니다.

진상은 나쁘지 않지만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야엘의 위장 자살과 시퍼가 학교에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수표를 반납한 일은 경찰과 학교 측 조사가 미흡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습격한 마약 카르텔을 가나가 공격해서 물리친다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정보 제공도 기부 입학에 대해 약간 알려주고 끝날 뿐입니다. 제목의 "프레스티지"도 명예와 환상을 의미하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문이 닫힐 때"

암호화폐 투자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간호사 허버트는 투자 회사 사장 체스터 피멜 살해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체스터의 혈액만 낭자할 뿐, 시신은 없었다. 시신 없는 상태로 기소된 허버트의 재판이 시작되는데...

허버트가 체스터의 혈액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풀어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안티에이징 클리닉에서 허버트와 체스터가 만났다는 것이 단서가 되거든요. 젊은 시절에 채혈했던 피를 주입하는 요법을 위해 확보했다는 것인데, 실제 미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꽤 높습니다. 체스터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체스터의 작전이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교살한 체스터의 사체를 숨긴 방법도 앞서 나온 복선과 이어집니다.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키트에 대한 복선으로, 체스터의 사체를 마약 중독 사망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개에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체스터의 변호사가 노력해서 허버트를 재판정에 세웠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허버트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체스터의 부재로 인한 암호화폐 폭락이 멈추지도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길거리 마약 중독자의 시신이라도, 살해당한 시신을 마약 키트로만 검사하여 매장한다는 것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최소한 근처에 유명 투자자의 시신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근처 시신들은 철저하게 조사하는게 당연합니다.

허버트가 변호사를 살해하려 한 척 해서 체스터 사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아요. 두 사건은 관계가 없으니까요. 변호사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해서, 체스터를 죽이지 않았다는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는 발상은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멍이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키스 씬은 마음에 듭니다. 무려 80권의 연재 끝에 결국 성사된 데다가, 토마가 얼마나 괜찮은 녀석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덕분입니다.

2026/07/03

고블린 숲의 집 - 존 딕슨 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브와 빌 커플은 헨리 경을 피크닉에 초대했다. 장소는 이브의 사촌 비키가 어린 시절 깜쪽같이 사라졌던 사건으로 유명한 고블린 숲에 있는 별장이었다. 그런데 이번 피크닉에서도 비키가 깜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브와 헨리 경이 별장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뒷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있었으며 별장 안에는 다른 숨을 곳도 없었다...

존 딕슨 카의 명탐정 중 한 명인 헨리 메리베일 경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이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고블린 숲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언급된 작품이지요. 원서를 구해 읽었습니다.

"밀실 대도감"에서 언급할 만큼 밀실 트릭이 핵심인 작품입니다. 사건의 수수께끼는 별장 안에 있던 비키가 사라진 겁니다. 정문은 헨리 경과 이브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비키는 그쪽으로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뒷문과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별장 안을 수색해도 비키는 발견되지 않았지요.

의사인 빌이 비키를 살해한 뒤, 욕실에서 시신을 해체하고 유포에 싸서 바느질한 다음 세 개의 큰 피크닉 바구니에 나누어 담았다는게 진상입니다. 이후 빌은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나중에 헨리 경 앞에서 둘을 찾는다며 정문으로 들어온 이브가 뒷문을 잠그면서 처음부터 잠겨 있었던 것처럼 꾸몄고요.

트릭도 괜찮지만, 핵심 단서인 유포 조각과 세 개의 피크닉 바구니도 미리 제시된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어요.

반면 작품 전체의 완성도는 다소 아쉽습니다. 가장 이상한 건 빌과 이브가 헨리 경을 목격자로 초대한다는 설정입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그걸 실종으로 위장하려는 범인이 굳이 유명한 명탐정을 현장에 불러들일 이유가 있을까요? 

범행의 현실성에서도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범행에 헨리 경이 시가 세 대를 피울 정도의 시간이 흐른걸로 묘사됩니다. 대략 두세 시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 시간 안에 성인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해체한 뒤 유포에 싸서 바느질하고, 바구니에 나누어 담은 후 현장 정리까지 끝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이브와 비키의 목소리가 같다는 정보가 후반에 공개되는 점도 공정성 측면에서는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게 필요했던 정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비키가 신비로운 공간에서 살아있다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실종 신고 후 유산을 받으려면 오히려 하면 안되는 행동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6/28

트리플 프런티어 (2019) - J.C. 챈더 : 별점 2.5점

포프는 자신이 노리던 마약왕 로레아의 현금 은닉처를 알아낸 뒤, 이를 털기 위해 과거의 전우들을 불러 모았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돈으로 헬기가 추락해 버렸고, 이들은 육로로 돈을 옮겨야 했다. 이 과정에서 리더였던 톰이 전사하고 마는데...

넷플릭스로 감상한 영화입니다. 액션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돈 앞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흔들리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 성격이 더 강하더군요. 처음에는 나름대로 명분과 원칙이 있었지만 점점 살인 강도와 같은 범죄로 변해 가는 과정이 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손을 댄 덕분이겠지요? 전장을 떠나 평범하게 살던 인물들이 다시 위험한 작전에 뛰어드는 과정의 빌드업도 좋고, 제목처럼 여러 '경계'(예를 들어 돈이냐, 인간성을 지키느냐)를 사이에 둔 딜레마도 설득력있게 표현되고요.

액션도 이런 드라마적인 성격에 맞춰 현실적인 편입니다. 작전은 계속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도 계속 생기거든요. 톰을 죽인 인물이 로레아의 부하가 아니라, 톰이 죽였던 마을 주민의 가족이었다는 점도 이 영화의 방향과 잘 맞아 떨어졌어요. 마지막에 현금을 다시 찾으러 갈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것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재미 측면에서는 영 아쉽습니다. 액션부터 장르적인 쾌감을 느끼기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범죄 작전물로의 재미도 별로입니다. 작전도 부실한데다가 주인공들의 전문가답지 않은 판단도 많이 거슬리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헬기에서 옮길 수 있는 무게가 문제였다면, 돈을 일부 숨겨 두고 옮길 수 있는 만큼만 가져가면 되었겠지요.
마지막 보트 탈출 장면에서 상대가 죽이려 드는데도 갑자기 총을 쏘지 않겠다는 태도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돈을 옮기려는게 목적이었다면, 사람을 죽이는건 살인 강도와 다름이 없다는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탈출은 톰의 시신을 가족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공격해 오는 적은 해치워도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톰이 초반에는 안전과 작전을 중시하다가, 돈 앞에서 갑자기 무너지는 변화가 너무 급작스러운 등 거슬리는 부분이 제법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저냥한 평작 정도였습니다. 액션이나 드라마 둘 중 하나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2026/06/2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8) 카레가 건너 온 추리 소설

카레는 친숙한 요리입니다. 한국군 전투식량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요. 우리와 교류가 적었던 인도의 전통 요리가 이렇게 친숙해진 건, 영국의 인도 식민지 지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식민지에 진출했던 영국인들이 현지에서 고용했던 요리사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여러 인도 요리가 영국에 들어왔지요. 이후 이 음식들은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밀가루를 넣은 스튜 형태로 변형되었고, 때마침 영국 회사 C&B에서 인도 향신료를 배합한 가정용 분말을 출시하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고기와 채소를 썰어 넣은 걸쭉한 스튜처럼 조리하되, 시판 향신료 분말로 이국적인 맛과 향을 더한 음식. 영국인들은 이를 인도 타밀어로 ‘소스’라는 뜻의 ‘카리(Kari)’에서 따와 ‘커리’라고 불렀습니다. 정작 인도에는 없는, 영국에서 탄생한 인도 요리인 셈입니다. 참고로 커리라는 명칭은 카릴, 혹은 카리라고 불리던 매콤한 남부 인도 요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삶 속에 커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주마 은점박이" 사건에서 마방 조교사 집의 저녁 식사로 양고기 카레가 등장하니까요. 범인은 마굿간 청년들에게 맛이 강한 아편 분말을 섞어 먹이기 위해 이 요리를 택했습니다. 커리의 강렬한 맛이라면 웬만한 약을 숨기기에 적절했을 테니, 범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지요.

"해군 조약"에서는 의뢰인 펠프스와 함께하는 식사 메뉴 중 하나로 닭고기 커리가 나옵니다. 허드슨 부인의 특기처럼 소개되는데, 이렇게 평범한 저녁 메뉴로 등장할 정도라면 당시 영국에서 커리는 우리나라의 김치찌개 정도 위치의 음식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영국에서 커리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 영국 외무부 장관 로빈 쿡은 인도 카레라이스의 일종인 치킨 티카 마살라를 ‘진정한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 2015년에 발표된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도 정통 인도 커리인 치킨 코르마가 자주 먹는 요리로 소개됩니다. 코르마는 주 향신료인 마살라에 버터와 크림, 요거트 등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내는 커리인데 여주인공 릴리는 단골집에서 테이크아웃해 온 치킨 코르마에 견과류를 갈아 넣습니다. 심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연인 에릭을 살해하기 위해서요. 에릭은 예상대로 치킨 코르마를 먹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릴리가 치료제를 숨긴 탓에 결국 질식사합니다. 약을 섞지도 않은, 그야말로 완전범죄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렇게 영국인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커리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카레는 단순한 서양식 요리를 넘어, 밥과 함께 먹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일본에는 1870년대 국비유학생 야마가와 겐지로가 최초로 영국식 커리를 전래했습니다. 이때 일본식 발음으로 ‘카레’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당시 일본에 여러 서양 요리가 전파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카레는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영국군을 따라 카레를 장병들에게 보급했던 덕이 컸습니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 주요했지요. 고기도 작게 썰어 넣어, 육고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일본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에 돼지고기와 감자, 당근이 들어가는 현대적인 레시피가 정착합니다. 영국 C&B 카레 가루를 국산화한 카레 가루 제조사도 등장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카레라이스’가 가정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3분 카레’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즉석 카레 역시 1968년 일본 오츠카식품이 레토르트 파우치에 카레를 넣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일본은 카레에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카레의 인기는 밥과 함께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 여러 음식으로 확장된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카레빵이 대표적입니다. 이름 그대로 속에 카레를 넣은 빵이지요. 도쿄 명화당이 1927년 특허 등록한 양식 빵이 원조라고 합니다. 라쿠고가 엔시 씨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소설 "가을꽃"에서 맛있게 빵을 먹는 삼원칙 이야기가 나올 때도 언급되었지요.

카레 우동은 1909년 와세다대학 옆의 오래된 소바집 ‘산초안’에서 개발한, 메밀국수 위에 카레와 파를 얹은 카레 남만이 발전한 음식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도입부에서 낯선 여학우가 무슨 메뉴를 주문할지를 두고 아케치와 하무라가 추리 대결을 펼칠 때, 아케치가 선택한 메뉴이기도 합니다. 일본 전통 요리와 카레가 결합된 음식이라는 점에서, 좀비물과 본격 추리물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런 나라니 당연히 카레 전문점도 많습니다. ‘아비꼬’나 ‘코코이찌방야’ 같은 일본 카레 전문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영업 중이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에는 ‘파라다이 로스트’라는 카레 가게가 등장합니다. 이 가게는 미나코가 중학생 때 교회 부설 고아원인 ‘성모의 정원’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뒤 시작한 곳입니다. 그녀의 아들 분지는 정신지체아로, 성장한 뒤 가게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미나코는 성모의 정원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지만, 수녀들은 더럽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녀가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근처에서 실종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카레를 제공했을 때뿐이었지요.
그 뒤 죽어서도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거절당한 미나코를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분지는 먼저 어린아이를 유괴합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미나코의 사체로 만든 카레를 제공합니다. 고기의 특성을 지울 수 있는 카레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영국에서 태어나 일본의 생활 음식으로 자리 잡은 카레는, 카레는 우리나라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곧바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컸을 것입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도 경성지방법원에 호송된 뒤 법원 구내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김치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는 후쿠신즈케가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카레라이스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김치도 한 번 권해 주고 싶네요.

하지만 카레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슴 따뜻한 드라마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알려주듯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영양 균형이 좋은 음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향신료 요리는 영국에서 스튜가 되었고, 일본에서 밥과 만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치와 함께 먹는 일상식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한 끼를 든든하게 채우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같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카레가 어떠신가요? 기왕 먹을 것이라면, ‘컨트리 캡틴 치킨’을 한 번 시도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요리는 1849년 출간된 책에 실린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레시피로 널리 알려졌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허드슨 부인이 홈즈를 위해 만들었던 닭고기 커리도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로버트 플라워 리델, "인도 가정과 요리책", 1849

  1. 닭고기를 잘게 썬다. 
  2. 양파는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 
  3. 닭고기에 소금과 커리 가루를 뿌리고 노릇해질 때까지 볶는다. 
  4. 스튜 냄비에 수프 1파인트와 재료를 함께 넣는다. 
  5. 국물이 반으로 줄 때까지 뭉근히 끓인 다음 밥과 함께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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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6/21

참교육 (2026) - 홍종표 : 별점 2.5점

교권 침해와 학교 현장의 여러 문제를 교권보호국이 해결한다는 내용의, 요새 한창 인기인 10부작 TV 드라마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제목 그대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교권 침해에 대한 참교육입니다. 교권 침해 사례들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라는 점도 몰입을 돕습니다. 실제로 저렇게 처벌받는다면 좋겠다는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한 화에 하나의 사건으로 이루어진 구성도 좋아요. 부담 없이 볼 수 있고, 전개도 빠릅니다. 

참교육의 대부분은 나화진의 무력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시험지를 빼돌리던 교사를 응징하는 에피소드나 진상 학부모를 상대하는 에피소드 등 나름대로 머리를 쓰는 작전들도 펼쳐지는데 이 역시 꽤 볼 만 합니다.

캐스팅도 좋습니다. 특히 나화진 역의 김무열이 돋보입니다. 강한데다가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언제나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봉근대 사무관도 인상적입니다. 언더커버 작전과 정보 수집에서 활약하는데, 교권보호국이 단순히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만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거든요. 

다만 뒤로 갈수록 사건 해결 방식이 비슷해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결국 핵심은 나화진의 무력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참교육도 개인 정보를 확보한 뒤, 그걸 활용하여 피해를 주는 식으로 선을 넘는 부분은 좀 불편했어요. 아무리 대상이 학폭을 저지른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이건 또 다른 가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인 빌런인 조규철도 애매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은 있지만, 그래봤자 고등학생일 뿐입니다. 국가 기관을 상대로 위협이 될 수는 없어요. 조직이나 무력도 별 볼일 없고요. 여러모로 빌런으로서의 존재감은 약합니다.

그리고 주연 배우들 캐스팅은 대체로 좋지만, 학생 역할의 조연 배우들은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으로 보기 어려운 배우들이 너무 많더군요. 특히 6화의 촉법소년 중학생들은 거의 30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좀 더 어린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래도 빠른 호흡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속 시원한 킬링 타임 액션물로는 괜찮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6/20

케이트 (2021) - 세드릭 니콜라스-트로얀 : 별점 1.5점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키워진 케이트는 일본 야쿠자 두목 키지마 암살에 실패한 뒤, 치명적인 독을 먹었다. 딱 하루의 생명이 남은 상황에서, 케이트는 자신에게 독을 먹인 사람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나섰다. 알고보니 이는 키지마의 자리를 노리는 렌지의 음모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액션 영화입니다. 요새 운동할 때 액션 영화만 찾아 본 탓인지,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작으로 표시되었길래 보게 되었네요.

케이트가 키지마의 행방을 쫓는 초, 중반부에서 펼쳐지는 액션들은 볼 만합니다. 도쿄가 무대이기 때문인지 총기 액션보다는 몸과 몸이 부딪히고, 칼부림이 난무하는 날것 액션이 중심인데 여성 주연 액션물치고는 속도감과 타격감이 괜찮은 편입니다. 타격, 단검, 총기, 자동차 추격전 등 액션의 종류도 다양하고요. 이를 처절하게 펼쳐내는 케이트 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캐스팅도 괜찮습니다. 비교적 큰 체구가 묵직함을 살려주거든요. 덕분에 중반부까지는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아 소녀를 데려다가 킬러로 키운 스승과 소녀 킬러라는 설정, 스승이 결국 제자를 배신했다는 전개, 냉혹한 킬러가 어린 소녀와 우정을 나누며 변한다는 흐름 등 의외성이라고 찾아보기 힘든 지극히 뻔한 설정 투성이인데다가 케이트와 애니의 교감은 진부하고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애니 입장에서 케이트는 처음부터 자신을 위협한 인물입니다. 그런 상대와 한두 시간 함께 있었다고 해서 깊은 감정의 교류가 생긴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애니가 케이트에게 동경심 정도를 품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영화가 보여주려는 감정적 유대감을 느끼는 단계까지 나아가기에는 과정이 너무 빈약합니다.

음모의 구조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베릭이 렌지와 손을 잡고 키지마를 제거하려 했다고 해도, 키지마 암살이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렌지가 케이트를 독살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베릭 역시 렌지와 손을 잡고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키운 귀한 킬러만 잃은 셈이에요. 만약 베릭이 렌지의 독살 계획을 알았다면 렌지를 제거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몰랐다면 케이트의 복수 대상이 베릭으로 향하는 것도 애매해집니다. 적어도 베릭이 직접 독살을 지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이는 복수극에서 가장 중요한 복수의 대상을 불명확하게 만듭니다. 케이트가 렌지를 증오하는건 이해할 수 있지만, 베릭이 최종적으로 단죄해야 할 대상이라는건 설명이 빈약하니까요. 

제일 큰 문제는 절정부입니다. 키지마와 손을 잡고 렌지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후반부는 앞서 보여준 장점마저 제대로 이어받지 못합니다. 초중반의 화려하고 거친 액션은 찾아보기 어렵고, 긴장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키지마와 렌지의 검술 대결은 뜬금없고, 케이트와 베릭의 일기토 역시 기대에 비해 허무합니다. 특히 케이트에게 총 한 발 맞고 죽어버리는 베릭의 최후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우디 해럴슨이라는 배우를 기용해 놓고 이렇게 소모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액션 장면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볼거리는 있지만 한 편의 영화로 성립하는 이야기를 갖추지 못한 망작입니다. 굳이 본다면 액션 장면만 모아보는 쪽을 추천드립니다.

2026/06/19

스와이프 엄금 - 치넨 미키토 / 김은모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밝은 미래를 위해 선배 야에가시가 부탁한 '도메키의 동네'라는 괴담 조사를 나섰다.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도메키의 피해자였던 아메치의 정보를 입수하여 도메키의 동네가 어디인지 알아냈지만, 현장 조사 후 나에게 '도메키'가 들러붙은걸 알게 되었다... 

한쪽에는 본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휴대폰 앱 화면이나 관련 그림이 실려 있는 그림책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유리탑의 살인" 등으로 유명한 치넨 미키토의 신작으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형식만큼은 휴대폰 중심의 이야기와 잘 어울립니다. 메시지, 위치 정보, 앱 인터페이스처럼 보이는 화면이 동일한 내용의 본문과 함께 펼쳐져서 독자가 화자와 똑같은 화면을 보는 느낌을 주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외의 장점은 없습니다. 우선 괴담치고 무섭지 않은 탓이 가장 큽니다. "도메키의 동네"는 눈이 그려진 이미지 외에는 긴장감이 거의 없고, 도메키의 습격도 뻔합니다. 피해자들을 추적하는 매개체가 휴대폰이었다는 진상 역시 책의 형태와 도메키의 행태를 보면 쉽게 짐작되고요.

내용도 별게 없어요. 화자가 하는거라고는 앱에 표시된 내용을 확인하거나 검색하는게 전부입니다. 피해자인 아메치의 집을 찾아가 계정 정보를 얻는 정도를 빼면요.

처음에는 야에가시의 후배 가즈마가 화자였던걸로 보였지만, 사실 화자는 가즈마의 연인 루리카였다는 반전도 애매합니다. 교묘하게 서술 트릭을 쓴건 맞지만, 이 반전은 이야기와 별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가즈마와 루리카는 모두 죽거든요. 이래서야 그냥 서술 트릭을 활용한 깜짝쇼에 불과합니다.

그림도 아쉽습니다. 휴대폰 앱 화면처럼 꾸민 페이지는 형식과 잘 어울리는데 그 외의 일러스트는 영 별로에요. 분위기를 살리기는커녕 유치하게 보여 그렇잖아도 무섭지 않는 괴담으로의 가치를 더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독특한 편집 형식 하나를 제외하면 추천할 만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일러스트로 포장했을 뿐인 망작입니다.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6/06/14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7) 달콤한 커피의 뒷 맛

추리소설 속 커피는 대개 쓰고 진한 음료가 연상됩니다. 밤늦게 사건을 조사하는 탐정의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피로를 쫓기 위해 마시는 각성의 음료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커피의 쓴맛은 긴장감이나 고독한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고요.

하지만 커피가 언제나 블랙으로만 통했던 것은 아닙니다. 커피에 설탕을 넣는 습관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고, 우유나 크림을 더해 쓴맛을 줄이는 방식도 커피 문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니까요. 커피에 데운 우유를 섞어 마시는 프랑스의 카페오레,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더해 마시는 비엔나식 카푸치노처럼요. 오늘날 익숙한 카푸치노와 카페라테, 카페모카 역시 에스프레소에 우유와 거품, 초콜릿 등을 더해 커피의 쓴맛을 부드럽게 조절한 커피입니다. 여기에 바닐라 라테나 캐러멜 마키아토처럼 향과 단맛을 더한 음료까지 생각하면, 달콤한 커피도 엄연히 커피를 즐기는 오래된 방식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생각하면, 추리소설 속에서 커피에 설탕이나 우유를 넣는 장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설탕과 우유를 섞는게 커피를 마시는 익숙한 방식이었을 수 있습니다. "빙과"로 잘 알려진 고전부 시리즈의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에 나오는 이바라가 방문한 커피 맛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가게에서는 주문할 때 우유와 설탕이 필요한지를 먼저 묻고, 필요하다면 각설탕 두 개를 내주고 우유는 커피에 미리 넣어 주거든요. 이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낯선 방식이지요. 보통은 손님이 직접 취향에 맞게 우유나 설탕을 넣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이렇게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더해 마시도록 준비된 곳도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 "커피, 그리고 교수와 여대생"도 비슷합니다. 주인공 다케미야 교수는 집에서 직접 원두를 볶을 정도로 커피에 관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 역시 커피를 마실 때 자연스럽게 설탕을 넣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설탕은 커피 맛을 망치는 첨가물이 아니라, 커피에 진심인 사람의 취향에 따라 커피를 완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달콤한 커피는 생각보다 평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리 소설에서도 달콤한 커피를 여러모로 활용하고 있고요.

첫 번째로는 강한 쓴맛과 단맛을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 "잔 속에 든 독"에서 스텔라는 남편의 불륜녀를 모르핀으로 독살할 때 뜨겁고 진한 커피를 선택합니다. 설탕을 듬뿍 넣어서요. 이는 친절이나 취향이 아닙니다. 커피의 쓴맛과 설탕의 단맛이 모르핀의 이상한 맛을 덮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탕 때문에 스텔라는 콕크릴 경감에게 덜미를 잡히고 맙니다. 단맛은 독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범행을 드러내는 단서가 된 셈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단 맛이 아니라, 달콤하게 만든 형태가 트릭으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단편 "키리가미네 료와 보이지 않는 독"에 등장하는 모카치노처럼요. 모카치노는 초콜릿 시럽을 섞고, 휘핑크림을 얹고, 초콜릿 가루를 뿌린 뒤 시나몬 스틱까지 꽂아 내는 음료로 커피라기보다는 디저트에 가깝습니다. 작품 속에서도 그 모습은 컵에 담긴 케이크처럼 묘사될 정도지요.

그런데 카도쿠라 할아버지가 모카치노를 마시다가 독살당할 뻔합니다. 당연히 의심은 모카치노로 향하지요. 초콜릿 시럽, 휘핑크림, 초콜릿 가루, 시나몬 스틱 등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간 음료라면 달콤한 맛과 향이 이상한 냄새나 쓴맛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커피와 시나몬 스틱 어디에서도 독은 검출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결국 할아버지가 한쪽 손을 다쳤다는게 열쇠가 되어 진상이 밝혀집니다. 범인은 모카치노의 레시피를 활용하여 커피에 독을 넣지 않고 독을 먹였던 겁니다. 단순한 블랙 커피였다면 성립하기 어려웠을 트릭이라서, 특별한 커피 레시피가 수수께끼, 트릭의 형태가 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례는 미나토 가나에의 "리버스"에 등장하는 달콤한 벌꿀을 넣은 커피입니다. 이 커피는 죽은 친구 히로사와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이자 반전의 핵심 역할을 합니다. 히로사와는 단것을 좋아하던 친구였고, 특히 벌꿀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후카세가 카페에서 벌꿀을 커피에 넣어 마시는 장면은 처음에는 좋았던 추억으로만 보입니다. 커피에 꿀을 넣고 천천히 저어서 커피와 벌꿀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만든, 들꽃 향이 입안에 퍼지는 듯한 맛은 히로사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하지만 후카세와 주변 사람들이 히로사와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벌꿀은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히로사와가 좋아했던 것, 후카세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그리고 과거의 어떤 순간이 커피 한 잔을 통해 다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는 핵심 반전으로 이어지고요.

이 점에서 "리버스"의 벌꿀 커피는 다른 작품 속 달콤한 커피와 조금 다릅니다. 앞서의 달콤한 커피들이 주로 범죄를 숨기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리버스" 속 달콤한 한 잔의 벌꿀 커피 안에는 우정과 기억, 그리고 아직 말해지지 않은 진실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커피의 쓴맛은 추리소설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달콤한 커피도 못지않게 추리소설적입니다. 쓴 커피가 탐정의 정신을 깨운다면, 달콤한 커피는 사건의 표면을 부드럽게 덮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뜻밖의 수수께끼가 천천히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카세가 히로사와를 위해 만들었던 벌꿀 커피 레시피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작품 속에서는 후카세는 융 필터로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에 벌꿀을 넣어 텀블러에 담아 히로사와에게 건네 주었지만, 집에서는 조금 간단하게 만들어도 좋습니다.

  1. 커피를 진하게 내린다.
    가능하다면 핸드드립이나 융드립처럼 향이 잘 살아나는 방식이 좋고, 산미가 강한 커피보다 부드럽고 묵직한 원두가 어울린다. 집에 드립 도구가 없다면 평소보다 조금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를 사용해도 괜찮다.
  2. 컵이나 텀블러를 미리 데운다.
    뜨거운 물을 잠시 담았다가 버리면 커피가 빨리 식지 않는다. 작품 속 후카세처럼 누군가에게 건넬 커피라면 텀블러에 담는 쪽이 더 어울린다.
  3. 벌꿀을 넣는다.
    가볍게 단맛만 더하고 싶다면 1티스푼이면 충분하다. 설탕 한 스푼 정도의 단맛을 원한다면 벌꿀은 2~3티스푼 정도 넣는 편이 좋다.
  4. 바닥까지 천천히 젓는다.
    벌꿀은 설탕보다 무겁고 끈적해서 컵 아래에 가라앉기 쉽다. 스푼으로 바닥을 긁듯이 천천히 저어 커피와 잘 섞는다.
  5. 토스트와 함께 먹는다.
    "리버스"를 떠올린다면 허니 토스트를 곁들이는 것도 좋다.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고, 남은 벌꿀을 조금 뿌린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6/13

아비무쌍 - 노경찬 / 이현석 : 별점 2점

무협 웹툰인데 초반에는 설정이 신선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노가장이 무림의 영웅이나 천하제일인이 아니라, 세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 홀아비 가장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별한 아내가 남긴 세 쌍둥이를 키우기 위해 그는 원래 하던 해결사 일을 접고, 안정적인 직장인 천룡회 무사로 취직합니다. 그리고 이후 10년 넘게 문지기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운다는 설정이지요. 이 과정에서 추가 보수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가장은 문파의 원한, 가문의 복수, 천하제일을 향한 야망 같은 동기는 없습니다. 오로지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무사히 키우는데 주력하지요. 무림의 명성보다 월급과 안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요. 이런 생활감 넘치는 설정은 그간 제가 읽었던 무협이라는 장르물에서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노가장이 상당한 실력자이면서도 스스로를 하수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무림인들에게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만났던 무림인이 무림 5존의 한 명인 관존이었기 때문에 묵사발이 났던 것 뿐이지요. 하지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노가장은 어떤 임무를 맡던 살아남는걸 최 우선 과제로 삼아 해결사 일을 하며 쌓은 경험과 실전 감각으로 여러 위기를 돌파합니다. 

노가장의 세 쌍둥이 아들과 딸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해서 진행되는 부분도 괜찮습니다. 무공을 배우고, 각자의 성향에 맞게 성장하며, 점점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라서 재미가 없을 수 없으니까요. 아들들과 딸의 개성도 뚜렷하고요.

작화도 좋습니다. 그림체도 독특하지만 액션 장면에서 속도감과 무게감이 빼어납니다. 검과 주먹이 부딪치는 장면, 인물의 움직임, 타격의 순간 표현이 시원하며 절묘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비교적 초, 중반부이며 후반으로 가면 흐려져 버리고 맙니다. 노가장이 무협지 속 절정고수의 반열에 오르며 가장 매력적이며 특별했던 '홀아비 가장의 외벌이 육아 생존기'라는 신선했던 컨셉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뻔한 무협지와 다를게 없어집니다. 

물론 십 여년이 지나, 노가장이 무시받는 수모와 천룡회 내부 암투에 휘말려 부하를 잃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려는 움직임만큼은 흥미롭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림인을 정리하려는 관존의 음모와도 얽히는데, 이 역시 기존 무협지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다른 쓸데없는 설정은 쳐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교의 우두머리 천소소가 왜 등장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행복이를 비롯한 여러 조연도 마찬가지고요. 게다가 비교적 비중이 높았던 천룡회 내부 암투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전개도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핵심인 오문 설정이 지나치게 만화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오행의 성질을 따른다는 설정은 그렇다 쳐도, 사람이 불이나 흙처럼 변해 마인이 된다는 표현은 유치했습니다. 노가장이 신존이 되는 과정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사부가 어떻게 기운을 가져갔는지, 노가장의 변화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는지 등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만큼은 분명히 신선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작품 고유의 색깔이 약해지고, 평범한 강자 중심 무협물에 가까워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2026/06/12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 화바이룽/ 김소희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에 사랑은 추억이나 순간,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남편 밍런이 갑작스럽게 이혼을 통보했다. 밍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한 나는 친한 팡 언니에게 부탁해 밍런을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이혼은 성립되었다. 

그 뒤 밍런이 사람을 죽여 체포된 뒤 구속되었고, 밍런의 동기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나에게 독방에서 자살한 밍런의 이메일이 전달되며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대만 작가 화바이룽의 장편소설입니다. 범죄물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남편 밍런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뒤, 이야기는 사건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밍런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 아내의 불륜 의심, 사설 조사, 살인, 구속, 자살, 마지막 진상까지 빠르게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개가 만들어 내는 흡입력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밍런이 왜 이혼을 요구했는지, 왜 개명했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왜 끝내 자살했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롯이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는 묘사도 좋습니다. 갑자기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혼란과 분노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덕분이에요. 사건은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주인공의 감정은 설득력이 넘칩니다. 그만큼 생생하고 생활감 있는 묘사가 빼어납니다. 웃기기도 하고요.

범행의 세부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밍런의 작업실은 보안이 엄격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뤄지가 그곳에 쉽게 들어갔다는 설명은 의심스럽고, 밍런이 자백한 그대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작업실에 있던 두 개의 옷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밍런은 옷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업실에는 옷장이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잠겨 있었는데 역시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는 밍런이 작업실에서 재스민이라고 부르는 러브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진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옷장은 밍런이 재스민과 관련 물품을 숨긴 공간이었고요. 이를 알아챈 뤄지는 밍런을 협박하다가 고압 전기에 감전되어 살해당합니다. 이 죽음 역시 앞에서 밍런이 형과 함께 감전 장치를 만들었다는 복선을 통해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꽤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뤄지가 밍런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도 재미있는데, 아내가 의뢰한 불륜 조사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 조사 때문에 밍런의 은밀한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밀은 협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살인까지 부르고요. 처음의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마지막 비극과 진상에 맞물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윤회식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밀리의 서재에서 홍보하는 대로 '추리소설'로 보면 아쉽습니다. 복선은 있지만 독자가 단서를 모아 진상을 맞히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뿐이며, 중요한 진실은 밍런의 자백(이메일)로 밝혀지니까요. 

밍런의 동기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러브돌에 깊이 빠졌을까요? 주인공 '나'의 1인칭으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밍런 시점의 고민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 머물고 싶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이미 이혼도 했고, 러브돌과의 관계가 불법도 아닌데 왜 살인까지 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허술한 부분도 보입니다. 작업실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은 좋은 복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뤄지가 경비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에 들어갔다고 밝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보안이 엄격하다는 설정의 힘이 약해집니다. 치밀한 장치로 보기도 어렵고요. 또 이 경비원 친구의 존재도 문제입니다. 밍런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뤄지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하지만 뤄지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도운 경비원 친구가 입을 열면 밍런의 비밀은 다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밍런의 자살 이유도 애매해집니다. 비밀을 완전히 묻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에서 시작해 불륜 조사, 살인, 자살, 진상 공개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빠릅니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도 좋고, 생활감 있는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추리물로는 아쉽지만 범죄 드라마로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6/0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6) 맥주가 맛있는 순간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닿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보리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젖은 빵이 발효된 것을 먹어 본 것이 맥주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문학으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음식을 대표하는 상형문자가 ‘맥주’와 ‘빵’이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를 맥주와 마늘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마늘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이집트에 냉장고가 있었을 리는 없지만, 더위 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하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합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드니까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 중 한 편인 "맥주 별장의 모험"에서 주인공 닷쿠 일행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무더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별장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대량의 맥주를 발견하지요. 당연히 일행은 유혹을 참지 못합니다. 긴급 피난이라는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체내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알코올의 이뇨 작용까지 더해지면 탈수 증상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젊은 닷쿠 일행에게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텅 빈 별장 1층에 싱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저마다 추리를 꺼내 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작가의 단편 "맥주집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닷쿠 일행이 빈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시며 그 이유를 추리하는 이야기거든요. 만화 단행본 표지에서도 닷쿠 일행은 맥주를 들고 있는데, 이쯤 되면 참 맥주를 좋아하는 일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작품 속 닷쿠 일행이 마신 것은 냉장고 속 캔맥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캔맥주보다 병맥주 쪽이 조금 더 시원한 인상을 줍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 병뚜껑이 열릴 때 나는 소리, 잔에 따를 때 올라오는 거품이 캔맥주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즐겼던 맥주도 Remmers 병맥주였습니다. "독사"에서 그 상표명이 직접 언급되지요.

병맥주 하면 역시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병을 꺼내, “퐁”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고, 살짝 얼음이 낀 잔에 거품이 올라오도록 따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데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에는 바로 이 습관을 이용한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노 쿄코는 냉장고 속 맥주를 냉동실에 얼려 둔 잔에 따라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남편을 원격으로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리 잔에 청산가리를 발라 두었던 겁니다.

다만 이 방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여도, 과학적으로는 맥주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주에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적정 온도가 있는데, 얼린 잔은 그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버리는 탓입니다. 또 잔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 때문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장 시원해 보이는 방식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방식은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고 더위 속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만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에 등장하는 사코미즈처럼, 2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맥주를 마신다면 어떨까요. 그 맥주가 맛없을 리 없습니다. 그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두고 “마치 목에도 미각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느끼며, 맥주를 “액체 모양을 띤 황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잘 와닿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지붕 공사 장면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는 간수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요구합니다. 그 덕분에 죄수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위에 앉아, 차갑게 식힌 Stroh’s Bohemian 맥주를 한 병씩 나누어 마시지요. 특별히 고급 맥주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교도소 안에서 잠시 자유를 맛봅니다. 죄수가 아니라 하루 일을 마친 평범한 노동자처럼요.

물론 차갑지 않아도 특별한 분위기가 함께한다면 맥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미시 순경은 일부러 맥주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시곤 합니다. 미국 영화 속 탐정들이 책상 서랍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장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 자신도 옛 하드보일드 탐정과 닮아진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맛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스티븐 킹의 "여름 천둥"은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든 것이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은 버려진 개 간달프와 함께 살아가고, 근처 고급 주택가에 홀로 남은 팀린과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결국 방사능 후유증이 심해져 죽음을 앞두게 된 팀린은 자살할 준비를 마친 뒤 로빈슨을 부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지근한 Budweiser를 나누어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맥주의 제왕”이라면서요. 차갑지도 않고, 세상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마시는 맥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의 Budweiser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맛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 그리고 맥주라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이 만들어 내는 쓸쓸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달프가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의 파트너 조처럼 Budweiser를 좋아하는 개였다면, 그 자리가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실 이 자리는 Budweiser보다 벨기에 맥주 Duvel이 더 어울렸을겁니다. 시원해야 제맛인 라거 계열의 Budweiser와 달리, 에일 계열 맥주는 어느 정도 온도가 올라왔을 때 본연의 맛이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도 Duvel이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향과 맛을 즐기기 좋은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udweiser도 겨우 구했던 로빈슨과 팀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요.

이처럼 맥주의 맛은 온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위, 갈증, 자유, 고독, 동경, 마지막 순간의 체념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맥주는 차가워서 맛있고, 어떤 맥주는 오래 기다린 끝에 마셔서 맛있습니다. 또 어떤 맥주는 맛 자체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시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날의 갈증이든, 하루 끝의 여유든, 이야기 속 인물이 느낀 자유든, 맥주는 그런 장면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방법인 ‘세 번 따르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네로 울프도 좋아하는 Remmers 병맥주를 전용 금도금 병따개로 딴 뒤, 정확하게 거품을 맞춰 따라 마시곤 했다고 하니, 미식가에게 검증된 방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맥주에 잘 어울리는 잔까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 번 따르기

1.
맥주병을 높이 들고 처음에는 천천히, 이어서 조금 세게 따라 거품을 만든다.

2.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 정도가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로 가져가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1cm 정도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맥주를 조심스럽게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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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6

리스타트 (Boss Level) (2021) - 조 캐너한 : 별점 2점

전직 특수부대원 로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죽은 뒤 다시 같은 날 아침으로 돌아오는 현상에 직면했다. 전처 젬마가 개발한 장치 때문이라는걸 알아낸 로이는, 젬마를 상관 벤터로부터 구하고 루프와 지구 파멸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하루가 반복된다는 루프물 영화는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소스 코드"를 보았었지요. 

뻔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만의 큰 특징은 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끊임없는 액션의 무대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비슷하지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을 무대로 복선과 음모는 거의 없이 시종일관 액션으로만 밀어붙인다는게 차이점이에요. 맨손 격투와 총격전은 물론이고, 맨몸 스턴트, 자동차 추격, 검술 액션까지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액션은 다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이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들과 악당들을 해치우기 위해 죽어가면서 공략법을 익히고 결국 그들을 극복해 나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선보이는 프랭크 그릴로의 외모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촬영도 화끈하며 적절한 유머와 합도 좋고요.

일종의 게임같은 '공략' 세계관은 전체 전개에서도 일관되게 선보입니다. 루프가 계속되면 세계가 붕괴하기 때문에, 로이는 살아남거나 악당들을 없애는 대신 잠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들과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로요. 그런데 로이는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전처 젬마가 그날 아침까지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로이는 다시 하루를 공략하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적들을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젬마를 최대한 빠르게 구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거든요. 이렇게 단계별로 공략이 진행되며 단서와 조건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원제 "Boss Level"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습니다.

또 아예 복선과 음모가 없지도 않습니다. 로이가 암살자들에게 쉽게 추격당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날 치위생사를 만났는데, 그때 치료받은 이빨에 추적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대단히 놀라운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액션 중심 영화에서 제법 흥미로운 요소로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는 좀 부족합니다. 우선 앞서 액션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는데, 암살자들 개개인과의 대결이 대부분이라서 규모가 많이 작습니다. 루프물답게 반복되는 장면도 많고요. 

또 중반부에서 아들 조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영화 전체가 쉴 새 없이 액션을 몰아치다가 갑자기 멈추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 선택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달리던 액션 영화로서의 기세를 잡아먹는건 사실이에요.

배우들의 활용도 아쉽습니다. 프랭크 그릴로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이름값에 비해 크게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멜 깁슨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별다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년의 대배우가 이렇게 몰락했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만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신선함보다는 액션의 물량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킬링타임용 루프물입니다. 저는 운동할 때 감상했는데 적당했어요.

2026/06/05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 최지혜 : 별점 2.5점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 "딜쿠샤"의 역사와 복원 과정을 다룬 인문학, 미시사, 근대미술사 서적입니다.

책은 우선 "딜쿠샤"의 역사부터 짚습니다. 테일러 부부가 이 집을 지은 과정, 화재 이후 다시 보수한 과정, 그 뒤 누가 이 집에 살았고 누가 이곳에서 일했는지를 차례로 알려주거든요. "딜쿠샤"는 이른바 문화 주택 열풍의 출발점처럼 볼 수 있는 집으로, 이 집의 건축 과정 소개를 통해 당시 조선에 방갈로를 비롯한 서양식 주택이 어떻게 들어오고 퍼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핵심인 복원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당시 촬영된 사진을 기준으로 실내의 세부 요소를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전등이 몇 개였는지 같은 고증은 물론, 복원에 필요한 물품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어떻게 제작했는지도 설명됩니다. 이를 통해 복원이라는 일이 단순히 낡은 건물을 고치는 수준에 그치는게 아니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사진과 온갖 자료들을 조사하여 물건의 쓰임을 확인하고, 없어진 것은 다시 만드는 굉장히 치밀한 작업이더군요. 그 정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리고 복원 과정에서 구하거나 만든 여러 소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좋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비연호는 코담뱃가루를 담는 작은 병입니다. 청나라 때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청에서는 담배는 금지했지만, 코로 흡입하는 코담배는 감기, 두통, 위장병 같은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약으로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담뱃가루는 습기에 약했기 때문에, 공기에 덜 닿도록 입구가 작은 병을 만들었고요. 그 병이 비연호입니다.

딜쿠샤 벽난로 옆에 놓인 둥근 그릇은 히바치로 일본 전통 화로입니다. 나무, 도자기, 동으로 만들었는데, 특징이라면 난방용으로만 쓰인건 아니라는 점 입니다. 방 안에서 차나 국을 데우거나, 김을 굽고, 찰떡을 구워 먹고, 깨를 볶는 데에도 썼다고 하네요.

2층 거실 탁자는 상판과 다리까지 조각 장식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건 일본의 닛코보리 탁자입니다. 닛코보리는 일본 닛코 지역의 공예품입니다. 1643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닛코의 도쇼구를 크게 고치면서 많은 조각 장인들이 모였고, 공사가 끝난 뒤 이들이 그 지역에 정착해 방문객을 대상으로 쟁반과 가구 같은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서양인의 서양식 주택이지만, 당시 조선의 가구와 소품들도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조선의 돈궤를 서양인들이 캐시박스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전통 가구 중 장은 분리되지 않지만 농은 층층이 분리되는걸 의미하며, 당시 서양인들에게 삼층장은 조선 가구의 대표였는데 1920~30년대 조선을 찾은 미국인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번쩍거리는 장식이 많이 붙은 삼층장을 선호했다는 등의 정보가 가득한 덕분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하는 도판도 좋습니다. "딜쿠샤" 복원에 관련된 소품과 세부 디테일 사진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소품과 관련된 도판, 당시 분위기를 알려주는 사진도 충실합니다. 이런 책은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사진 자료가 많아서 읽기 편했습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특히 문장이 아쉽습니다. 이런 저런 명언과 미학 이론을 들먹이며 이야기를 멋스럽게 쓰려는 표현이 많은 탓입니다. 책의 소재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만큼 오래된 사진을 보고, 사라진 물건을 찾고, 공간을 다시 만드는 과정만 담백하게 쓰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괜히 문장을 꾸미려는 부분이 오히려 정보 전달을 방해한다고 느껴집니다.

또 다른 단점은 일부 정보의 근거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전문분야인 건축, 미술, 복원 외의 생활문화 부분은 다소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한 이유를 영국 물의 미네랄 함유량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차 문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역사, 무역, 계급, 식민지, 기호품 소비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처럼 한, 두 페이지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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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0

Chat GPT가 그린 점장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레스토랑")

Chat GPT로 탐정들을 원하는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시도한 건 유키 신이치로의 연작 단편집인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레스토랑"에 등장하는 점장이자 셰프 탐정입니다.

그려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너무 잘 생겼기 때문입니다.

  • 정말이지 한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미남이었다. 어느 한군데가 아니라 전부. 얼굴 생김새도, 목소리도, 몸동작도 전부 완벽할 뿐만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 한눈에 반할 만큼 미남이었다. 얼굴 생김새도, 목소리도, 몸동작 자체도 전부 완벽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미남이거든요. 좀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묘사가 일관되어 있다는 점도 그림으로 그려내기 쉬우리라 생각했고요.

그래서 그려보도록 시켰는데, 대단합니다. 확실히 엄청난! 미남이네요.

소설을 읽고 떠올렸던 이미지를 초월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점장에게 주문을 넣어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