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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9

이 사람을 보라 - 마이클 무어콕 / 최용준 : 별점 2점

이 사람을 보라 - 4점
마이클 무어콕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어렸을 때부터 기묘한 관심병과 자기 비하로 점철된 찌질한 인생을 살아온 칼 글로거. 그는 서점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과학자를 방문하여 그가 타임머신을 만든 것을 확인한다. 시간 여행자 지원 제안은 거절하지만, 오랜 시절 알아온 연인같은 섹스 파트너 모니카의 변절 후 즉흥적으로 시간 여행에 자원한다.
그가 목표로 한 시간대는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기 1년전...

걸작으로 소문난 작품이죠. 이런 저련 소개 자료를 통해 관심이 가던 차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카톨릭 -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입니다. 직전에 읽었던 <<양심의 문제>>와 유사하죠. 허나 <<양심의 문제>>가 카톨릭 세계관의 확고부동함을 강조한다면 이 작품은 정 반대입니다. 어떻게보면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말이죠. 아울러 과학적 설정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에요. 시간 여행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등 과학적 설정은 작품의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거든요.

하지만 확실히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난 듯 싶습니다. 외계인이 인류를 창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에서 '예수는 미래에서 시간여행을 한 관심병자 찌질이였다'는 내용이 충격적으로 다가올리 없잖아요. 작품이 발표된 1969년 당시였더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 때만큼 종교적 신념이 굳건하지도 않으며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에 딱히 대단한 이야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칼 글로거가 예수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기에 의외성을 찾기도 힘들었고요.

아울러 후대 전해진 성경 그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건 오류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구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성경 그대로야 하기 때문에 참수되도록 방치한다던가, 수제자들은 이름을 보고 뽑는다던가, 제자 중 유다를 시켜 자기 자신을 고발케 하는 등의 모습이 그러한데 이는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성경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상식이기도 하고요. 외려 그가 역사를 바꾸었더라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칼이 정상인은 아니며 이 행동을 통해 그가 신이 아니라 가짜 흉내내기에 불과했다는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번지수가 좀 틀렸달까요.
그나마도 완벽하게 성서 그대로도 아니에요. 특히 가장 어려울 부활을 대충 넘어간 것은 아쉽습니다. 그의 시체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사람들에 의해 시체가 도난당해 사라졌기에 생긴 소문이라고 설명되는데 많이 부족했습니다. 후대에 그렇게 받아들였을 과학적인 무언가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래도 고전 걸작답게 의외성을 포기한다면 생각할거리가 많긴 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모욕했다기 보다는 그도 그냥 인간이었을 것이다는 의견의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여기에 시간 여행을 접목한 것은 과학 중심 시대로 넘어가면서 생겨난 새로운 견해로 볼 수도 있을테죠. 칼의 전 연인 모니카의 다음과 같은 대사처럼요. "과학 의식이 훨씬 더 우월한데 그걸 제치고 종교 의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종교는 지식의 그럴싸한 대체물이야. 하지만 이제 그런 대체물이 더는 필요가 없어. 칼, 과학은 사고 체계와 윤리를 형성할 수 있는 굳건한 바탕을 제공해준다고. 과학은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고.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자신들이 쉽사리 알 수 있어 이제 더는 천국에서 내려주는 당근이나 지옥에서 휘갈기는 채찍 따위는 필요 없단 말이야." 말 그대로 과학이 종교를 만든 것이나 다름 없다는 해석인데, 작품 설정과 연계해 보면 나름 새로운 맛이 있네요.

작가의 필력도 대단합니다. 우울증과 자기 혐오에 사로잡힌 무능력한 관심병자 칼 글로거 캐릭터에 대한 장황한 서사와 묘사는 압도적이에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스러우면서도 천박한 양 극단을 오가는 묘사는 확실히 영국 작품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시간 여행 후 칼 글로거가 예수로 거듭나는 과정과 칼 글로거의 일대기를 병행하여 전개하는데 중간중간 심리 묘사와 대사를 적절히 끼워넣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는 정신지체아였고 마리아는 창녀와 다를바 없는 여자였는 식의 약간의 반전도 나쁘지 않았으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를 It's a lie, It's a lie, It's a lie로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최고였습니다. 현대의 랩으로 응용해도 라임이 딱딱 맞아 떨어지죠. "잇츠어라이, 잇츠어라이, 옐로이옐로이, 사박타니..."

결론내리자면 장, 단점이 명확한 작품입니다. 물론 단점의 가장 큰 요인은 늦게 소개된 탓이라 마냥 감점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심의 문제>>보다 나은건 분명하고요. 허나 개인적으로는 <<도라에몽>>보다 나은 점을 모르겠더군요.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더 큰 고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SF 팬이시라면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읽어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16/06/27

양심의 문제 - 제임스 블리시 / 안태민 : 별점 1.5점

양심의 문제 - 4점
제임스 블리시 지음, 안태민 옮김/불새

외계 행성 리티아에 파견온 과학자 4명. 그들은 파견 기간 마지막에 리티아를 어떻게 할 것인지 투표를 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리티아를 처리하려 하나 그들 중 예수회 소속 성직자인 루이스-산체스 신부는 리티아의 근원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국내 유일의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4번째 작품. 1959년 휴고상 장편부문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명성도 익히 들어왔을 뿐 아니라 <<SF 명예의 전당 1>>에 수록된 <<표면 장력>>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기에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허나 기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재미를 떠나서 이야기의 핵심 원칙을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계 행성 리티아의 원주민들은 거대 파충류로 지성을 갖춘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공동체는 완벽한 수준 (전쟁, 범죄는 커녕 "갈등"을 뜻하는 말 조차 없다)이다.' 라는 것에 대한 루이스-산체스 신부의 주장이 그것인데 철저하게 지구의 카톨릭 종교관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외계 행성을 왜 카톨릭 신앙 체제로 해석해야 하죠? 과학은 과학으로 해석해야죠. 구태여 종교를 끌어들여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 이유 자체를 모르겠습니다. 외계인들의 고도 문명을 보고 고작 하는 생각이 사탄이 만들었네, 이 행성이 교회를 부정하게 만들겠네라니 정말 어이가 없어요.
이에 비하면 차라리 호전적인 클리버가 주장하는 군수 공장 계획이 훨씬 논리적이에요. 세부 진행에 디테일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과학적으로 설명은 되니까요.

뒤이어 이어지는 후반부는 더 힘이 빠집니다. 리티아인 슈트카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의 아들 에그트베르치가 지구에서 성장한 후, 갈등과 혼란을 조장하는 주역이 된다는 내용인데 진부할 뿐더러 딱히 와 닿지도 않아요. 마지막에 에그트베르치가 리티아로 돌아가려 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종교적인데 굉장히 불쾌합니다. 에그트베르치가 지구에서는 위험 인물이었지만 리티아에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요? 설령 그렇다치더라도 리티아인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감염되어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 역시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생각되고요. 오히려 지구의 안 좋은 것을 배운 에크트베르치가 리타이를 멋대로 개조하려는 지구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을 억지로 부정하려는 행동에 불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혹 리티아인들이 지구와 적대적이 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모두 지워버린다는 결말은 더 끔찍합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버금가는 맹목적인 광신도들의 마인드와 다를게 없어요. 리티아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이 신부의 엑소시즘 기도문이라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고요.

하긴 이 모든 것이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종교적 이유로 타 국가를 침략하여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던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과 다를게 없거든요. 리티아를 지워버리는 행동도 제국주의 시대 종교, 혹은 기타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던 과거와 명확히 겹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러한 과거를 SF로 바꾸어 당당하게 써내려간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침략이나 정복이 아니라 진지한 수도사 시점의 이야기를 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미션>>이 되는건 아니죠. 루이스-산체스는 철저하게 제국주의 세계관에 기반한 인물이니까요.
제목의 <<양심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양심이 이러한 제국주의와 종교에 기반하고 있다면 양심부터가 왜곡된 것이 아닌지 한번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명성에 값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리타아에 대한 설정만큼은 압도적이에요. 리티아의 수도 코레데시치 스파아트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에서 시작되는 설명은 리티아인들의 행태와 문화, 기술과 과학 지식 전반을 아우르는 방대한 내용인데 창의적인데다가 설득력있게 쓰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리티아인들의 출생에서 성장까지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허나 이해도, 동의도 할 수 없는 이야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습니다. 책의 장정과 디자인 역시 익히 알고 있었던 대로 수준 이하고요. 퀄리티에 비하면 가격도 터무니 없다 생각될 정도입니다. 엄청난 미주가 붙어있는데 각주 처리를 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도무지 팔 수 없어 보이는 이런 작품을 출판한 용기가 가상하여 아무리 잘 봐주고 싶어도 양심상 제 점수는 이게 전부입니다.

덧붙이자면 카톨릭, 혹은 기독교 단체를 통해 판매했더라면 조금이나마 성적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군요. 과학으로 포장한 종교관 홍보물이라는 점에서는 과거 라엘리안에서 발표했던 일련의 소설들과 비슷하니까요.

2016/06/25

넨도nendo의 문제해결연구소 - 사토 오오키 / 정영희 : 별점 3점

넨도nendo의 문제해결연구소 - 6점
사토 오오키 지음, 정영희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현재 가장 각광받는 일본 디자인 회사 넨도의 오너 디자이너 사토 오오키의 에세이집.
원래는 잡지에 연재된 글들이라고 하는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한편, 한편이 짧다는 점, 거기에 더해 전달하려는 주제가 명확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나 디자인 방법론에 대한 글들 - 어떻게 디자인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떻게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 하는지 등 - 은 사례 중심으로 쓰여져 있는데 새겨들을만한 내용이 많더군요. 잘 나가는 디자이너다운 생각들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새로운 콘셉트의 상품개발이라고 해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하겠다는 것은 위험하다.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할 이상적인 감각은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아직까지는 없었던 것'을 '보충한다'는 정도의 감각이다. 예를 들자면 시력 보호를 위한 '컴퓨터용 안경'이나 '지워지는 볼펜' 같은 것.
  2. 일단 해본다. 할수 있을까, 없을까와는 별도로 반드시 그 안에 새로운 발견이 있다.
  3. 세계 일류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밀려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기 영역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영역을 사수하는 것이 일류의 필수 조건이다.
  4. 센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좋아하느냐의 여부이다. 투입한 시간의 양이 해결을 좌우한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연습을 하루 거르면 그것을 회복하는데 3일이나 걸린다고 하지 않은가.
  5. 기회란 기본적으로 여자와 같다. 한눈팔지 않고 하나의 일에 몰두해 있다 보면 질투심 많은 기회는 내가 있는 곳으로 기꺼이 찾아온다. 반대로 늘 기회만 엿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6. 디자이너에게는 독창성, 기발한 발상만큼 결단력이 중요하다. 결단의 요령은 '틀려도 괜찮으니 가능한 빠른 결단을 내리는 것.'
  7. 과제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눈 앞에 드러나는 문제보다 애초에 왜 그 문제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아보라.
  8. 디자이너는 누군가가 본 적 있는 것을 만드는 사람도,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드는 사람도 아닌, 누구나 본 적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다.
실제 사례로 수록된 디자인 작품들도 흥미롭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종이 블록'입니다. 잡지 부록으로 의뢰받았는데 조건이 까다롭더군요. "종이를 사용하여 입체로 조립할 수 있는데, 조립하기 쉬워햐 하고 조립하기 전에도 지면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의뢰거든요. 결과물은 "평면이지만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종이 블록"입니다. 사진만 보아도 의뢰를 100% 충족시키는 그럴듯한 결과물이더군요! 그 외 코카 콜라 식기라던가 하나로 합쳐지는 젓가락 등도 인상적이었고요.

이러한 내용들을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게 써내려간 글 솜씨도 인상적입니다. 누군가에게 '한수 가르쳐 주겠다'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디자인의 기본 사상이 확실히 '배려'에 기초해 있구나 싶었어요.
책의 장정, 디자인도 저자와 주제에 걸맞게 괜찮은 편입니다. 사토 오오키와 넨도의 작품 도판이 부족한 것은 좀 아쉽지만요.

사토 오오키라는 디자이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런 글을 쓰고, 이렇게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라면 분명 좋은 디자이너일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네요. 나이 탓인지 디자인 에세이에서는 최고봉인 하라 켄야 만큼의 깊이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이런 디자이너와 함께 일할 기회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무 전방위적으로 다작을 하는 것은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얻을게 많으니까요. 현업 디자이너이시라도 마찬가지고요. 저 개인적으로도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얻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이런 글, 읽는 독자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을 써 보고 싶네요.

2016/06/23

십자 저택의 피에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십자 저택의 피에로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모 요리코의 급작스러운 자살 사건 이후 1주기를 맞아 다케미야가(家)의 십자 저택을 찾은 미즈호. 그러나 1주기 다음날 그녀와 다케미야 가족, 그리고 손님들 앞에 현재 다케미야 산업 사장인 무네히코와 정부 미타 리에코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미즈호는 새벽에 깨었을 때 발견했던 단추가 현장에서 조작된 것 등으로 집안 사람 중 누군가 범인일 것으로 의심하고, 마침 누군가의 공작으로 다케미야 산업의 이사인 가쓰유키가 범인으로 밝혀지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 작품으로 34살 때 발표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정통 본격물로 독자에게 정정당당히 승부를 거는 내용, 인형사 고조라는 독특한 캐릭터 및 피에로 시점의 묘사가 들어가는 등의 참신한 시도는 확실히 젊은 작가의 패기가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이러한 내용과 시도가 작품에 좋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설정과 트릭 모두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본격물 대부분이 작위적이긴 하나 십자 저택이라는 공간은 아무리 봐도 트릭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티가 물씬 납니다. 공들인 설정일 수는 있지만 흔하게 볼 수없는 구조이기에 이를 활용한 트릭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죠.

그리고 인형과 인형사의 등장은 뜬금없습니다. 요리코 자살 사건 당시 장식장의 인형을 피에로 인형으로 바꿔치기한 이유, 인형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문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은 잘 설명되고는 있지만 이 정도 역할을 위해 '비극을 부른다'는 인형, 정체불명의 인형사를 등장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에요. 장식장에 인형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고, 설령 좌우 대칭인 소품이 필요했더라도 항아리 등 그 어떤 소품이라도 무방했을테니까요. 인형사 고조에게 만화같은 기묘한 캐릭터성을 부여한 것은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피에로 시점의 묘사 역시 독특하기는 하지만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신예 작가가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고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추가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괜히 복잡해지기만 했어요.

미치코와 고조 두명이 아니, 중간에 살해당하는 아오에마저 탐정이니 무려 세명이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전개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상호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동일한 정보를 제공받아 (아오에의 단서 포함) 동일한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W의 비극>>처럼 외부인에 가까운 미치코 혼자 탐정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진짜 사건의 핵심인 가오리의 역할에 대해서만 고조의 입으로 설명되지만 미치코만 단독물로 쓰였더라도 전개에 문제는 없었을 거에요. 덧붙이자면 중간에 진상을 파악한 탐정역 (사람들이 싫어하는)이 살해당하고 다른 인물이 뒤를 이어받는다는 전개는 크리스티 여사님의 <<누명>>이 떠오르는데, <<누명>>처럼 심리 서스펜스 분위기도 잘 어울렸을 것 같군요.

그 외의 디테일들, 초중반 상자가 찢어진 것을 발견한 경찰의 수색, 무네히코가 마술책에 메모를 남긴 것, 나가시마가 리에코의 집에 침입해 워드프로세서의 리본을 교체하는 것 등 모두 지나치게 편의적입니다. 요리코로 분장한 미타 리에코의 지문이 인형에 묻어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되리라는 생각도 안들고요. 심하지는 않다고 해도 막장 재벌 가문의 설정도 너무 진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년탐정 김전일>>의 초기 연재 에피소드와 유사한 설정, 트릭도 거슬린 부분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1989년에 발표되었고 <<김전일>>은 1992년 이후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허나 <<김전일>>이 더 설득력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어려워요. 예를 들어 어머니를 농락하고 버려 힘들게 살게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는 <<이인관촌 살인 사건>>과 유사합니다. 타 작품에서도 흔하게 쓰이기는 하지만 범인의 심리 같은 것이 왠지 모르게 비슷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극한 심리를 보여준 <<이인관촌 살인 사건>> 쪽이 한 수 위입니다.
십자 저택의 구조를 활용한 거울 트릭도 <<학원 7대 불가사의 사건>>과 거의 동일합니다. 하지만 사용된 소품과 방법 모두 <<학원 7대 불가사의 사건>>이 훨씬 설득력이 높아요.

그래도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가 있는 다케미야 가오리의 나가시마에 대한 집착은 아주 인상적이에요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난 뒤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나가시마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인데 여성 심리 묘사에 탁월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솜씨가 더해져 상당히 섬찟하게 다가옵니다.
범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즈카 할머니와 가정부 스즈에 아주머니를 통해 증거가 조작되어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된다는 초반 전개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통 본격물답게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미덕 역시 잘 살아 있습니다. 읽는 재미도 작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수준이고요.

허나 단점이 많아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없는 범작입니다.
욕심이 너무 과했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내고 보다 깔끔하게 정리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군요.

2016/06/21

해상시계 - 데이바 소벨, 윌리엄 앤드류스 / 김진준 : 별점 3점

해상시계 - 6점
데이바 소벨. 윌리엄 앤드류스 지음, 김진준 옮김/생각의나무
경도 이야기 - 6점
데이바 소벨 지음, 김진준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항해 중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경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설명해주는 미시사 서적. 딱히 관심이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형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왜 경도 측정이 중요한지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대항해 시대, 배의 현재 위치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지만 경도를 제대로 모르면 엄청난 피해를 입기 십상이었기 때문으로, 실제 영국 전함들의 난파 등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통행이 안전한 좁은 항로만 선택해야 했기에, 특정 장소에 해적 선단이 기승을 부릴 수 있었다던가, 위도는 모든 항해사들이 낮의 길이나 수평선 위의 태양, 알려진 별의 높이 등을 통해 쉽게 잴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그래서 1714년 영국에 경도법이 발표되고 심사원단인 경도 위원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2만 파운드 (현재의 1백만 파운드)의 상금을 걸고요. 명확한 기준을 두고 경도 측정하는 방법에 대해 상금을 수여하려는 목적이었죠. 이후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시골에서 독학으로 시계 제작법을 배운 영국의 시계 기술자 존 해리슨입니다. 그의 시계 H1에서 최후의 작품 H5의 개발까지 4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죠. 이 책에서는 각 시계별 특징은 물론 개발에 쏟은 열정과 노력이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완벽한 시계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경도 위원회를 천문학자가 이끄는 바람에 성과를 인정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 뿐입니다.

사실 경도 측정은 시간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 경도 자오선들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지구가 360도 한바퀴를 도는 데 24시간이 걸리므로, 한 시간은 360도 회전의 1/24인 15도를 가리킵니다. 항해 중인 배와 측정을 시작하는 지점 사이의 매 시간 시각 차이는 동쪽이나 서쪽으로 경도 15도의 차이를 의미하고요. 즉, 바다에서 매일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때 배의 시간을 정오로 맞추고, 본국 항구의 시간을 참고로 하여 매 시간 차이를 계산하면 경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항해의 과정에서 기온의 변화나 지구 인력의 미세한 차이 등으로 시간을 정확히 잴 수 없어서 다른 대안들이 등장하게 되죠. 그 중에서도 천문 관측법이 핵심으로 16세기 초반 요하네스 베르너가 착안한 달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방법에서 시작하여, 갈릴레오가 시작한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문학자 매스켈린이 해리슨을 폄하하며 그의 성공을 폄하한 것이죠.
물론 매스켈린 역시 그냥 뒷다리 잡고 딴지만 건 것은 아니긴 합니다. 정교한 월표의 발표 등을 통해 관측을 통한 경도 측정의 신세계를 연 것은 사실이거든요. 이른바 '달 거리 측정법'으로 항해사가 달까지의 거리를 재고 난 후, 달과 수많은 별 사이의 각거리를 기록한 표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관측자가 사분의, 또는 육분의로 달과 별 사이의 각거리를 관측하는 것에서 시작하죠. 각거리란 문자 그대로 관측자를 기준으로 한 두 물체 사이의 시선 각도를 뜻하고요. 매스켈린의 방대한 관측의 집대성인 월표는 이러한 관측결과 - 예를 들어 관측자가 특정 지점에서 달이 특정 별로부터 30도만큼 떨어져 있는 것을 관측했다고 하면 -를 관측자가 파리나 런던에서 그와 동일한 거리를 유지할 때의 시점과 비교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관측 시점이 새벽 1시이고 관측 시점과 동일한 각거리가 런던에서는 새벽 4시에 발생한다면, 배의 시간은 런던을 경도 0으로 보았을 때 서쪽으로 45도의 경도상에 위치하고 있는 셈인 것이죠.

이렇듯 두 명의 거인이 각자의 비법을 가지고 진검 승부를 펼쳤다는 점에서는 테슬라와 에디슨의 대결 느낌도 살짝 나네요. 다행인 것은 테슬라와는 다르게 해리슨은 결국 인정받았다는 것이고요. 이유는 달 거리 측정 시 달의 시차 문제 등 여러가지 요인들로 정확한 거리 측정을 위해서는 보정 계산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계산에는 상당한 수학적 능력을 필요로 했다는 점, 해와 달이 근접하면 (매달 약 6일 정도) 어떤 방법으로도 달 거리를 측정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기상이 악화되면 관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죠. 결국 매스켈린마저 해리슨의 후계자 중 한명인 언쇼의 해상 시계를 인정하고, 이후 동인도 회사와 영국 해군의 선장들이 크로노미터를 경쟁적으로 구입하며 달 거리 측정법은 사라져 가게 됩니다. 1860년 영국 해군은 2백척이 안되는 군함을 보유했지만 크로노미터는 8백개 가까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시계의 시대가 왔음을 명확히 알렸다고 하네요.

이후에는 크로노그래프를 대중화 시킨 해리슨의 후계자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지는데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아널드와 언쇼, 두명의 경쟁자가 크로노미터의 주요 부품인 용수철 멈춤쇠 탈진 장치에 대한 특허 싸움을 벌였다는 정도로 마무리 되죠.

경도 측정의 역사가 일종의 대결 구도였다는 것도 재미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저자 데이바 소벨의 필력입니다. 딱딱하고 어려울 법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더군요. 데이바 소벨은 이러한 과학사 관련 서적을 많이 출간한 작가라고 하는데 다른 책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200페이지 정도 남짓한 분량도 적절했고요.

단, 제가 읽은 책은 형에게 빌린, 20년전 자작나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절판본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의 장정, 디자인 모두 지금 기준으로는 수준 이하입니다. 게다가 해리슨의 독특한 시계들에 대해 설명만 있지 아무런 도판이 없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생긴 것 부터 독특하다고 해서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책으로 확인할 길이 없어 난감하더라고요. 심지어 H1의 경우는 저자 스스로 '영화의 성지 헐리우드에서도 최고의 천재들이 온갖 구상을 다 했지만 아직까지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한 어떤 화려한 영화도 이것처럼 설득력있는 타임머신을 내놓지 못했다."고 언급할 만큼 기묘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말이죠. 또한 해리슨의 아이디어가 빛난 다양한 부품들 역시 글로는 짐작이 어렵기에 도판이 필요했는데 왜 수록되지 않았는지 영문을 알기 어렵습니다.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찾아보기는 했지만 책으로 자세하게 설명되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책의 수준 및 가치가 높아 다른 출판사에서 재간되었는데 다른 판본으로는 도판이 충실하게 실려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과학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여러가지 다양한 지식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장정 및 도판 등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내용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정도는 아닙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간된 판본으로도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2016/06/18

매듭과 십자가 - 이언 랜킨 / 최필원 : 별점 1.5점

매듭과 십자가 - 4점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딘버러에 소녀들을 유괴하여 살해하는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며, 이혼한 전 SAS 특수부대 출신 경사 존 리버스에게 기묘한 협박장이 연이어 날아든다.
존 리버스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싸우며 사건 수사에 나서지만 여러가지 단서들로 범인이 정말로 노리는 것이 그였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타탄 느와르의 제왕'이라는 작가 이언 랜킨이 창조한 존 리버스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홍보 문구에 더해 적절한 분량과 괜찮은 책 디자인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기있는 소재들 몇개를 나열한 펄프픽션에 불과하기 때문이에요.
우선 주인공 존 리버스부터 살펴보죠.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못나가는 경찰, 전직 SAS 출신, 골초, 이혼남, 고독한 늑대, 트라우마..."
이 조합 몇가지를 섞어 만든 캐릭터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겁니다. 그냥 현대 하드보일드범죄물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나마 조금 특이한 것이 SAS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으로 관련된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이쪽 바닥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는 것 역시 뻔하디 뻔한 설정이죠. SAS에서의 훈련과 경험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불만스럽고요. 차라리 트라우마 없고 군대 경력을 활용하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마스터 키튼>> 쪽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또 그다지 잘생기거나 몸이 좋거나, 아니면 다른 매력이 있어보이지 않는데 여자들과의 원나잇이 쉽게 그려진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이게 영국적인 문화라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조직 내 동료들끼리 스스럼없이 원나잇을 즐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기는 어렵네요. 리버스의 전처가 리버스와 티격태격하는 상관 앤더슨의 새파랗게 어린 아들과 사귄다는 막장 설정은 도무지 왜 나왔는지 모르겠고요.
딱 한가지 마음에 드는 설정은 딸바보라는 점이랄까... 특히 딸에게 추파를 던지는 거리의 건방진 수컷들을 하이에나 떼 보듯이 하는 장면만큼은 공감이 가더군요. 문제는 사건과 별 상관없다는 점이지만.

게다가 범죄 스릴러로서의 가치도 형편없습니다. 범인이 지속적으로 존 리버스에서 메시지를 보내지만 리버스는 살인마가 SAS 당시의 전우 고든 리브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유는 트라우마로 과거의 기억을 봉인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막장 드라마기억 상실증에 버금가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편의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면 매듭을 통해 고든 리브를 쉽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당연히 체포도 손쉬웠을테고요. 최소한 사만다가 유괴되기 전에는 잡을 수 있었겠죠.
게다가 기억을 되찾는 것도 최면술사인 동생 덕분이라니 이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나마 첫 만남에서 동생 마이클이 최면으로 전생도 끄집어낼 수 있다 운운하는 복선을 깔아놓기는 했지만... 합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독히 편의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또 작중 리브스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처의 애인이 죽고, 전처는 중상을 입고 딸까지 유괴당한 후에도 하는건 집에서 술이나 먹는 것에 불과할 정도에요. 과거에 사로잡혀 자책하는 것은 덤이고요. 범인을 알아낸 것은 앞서 말했듯 동생 마이클의 최면술 덕분이며, 범인의 흔적을 잡는 것도 경찰에서 피해 아동들이 같은 도서관 (중앙도서관)에 다녔다는 단서를 포착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나마 마지막 추격전에서 아주 약간의 활약을 하기는 하지만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거기에 더해 급작스러운 결말과 두페이지 분량도 채 되지 않는 에필로그 역시 실망스럽습니다.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브스의 트라우마는 극복되었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이클은 어떻게 되었는지, 앤더슨은 어떻게 되었는지, 질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건지 등등등....

물론 몇가지 건질만한 재미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피해 아동들 이름의 머릿글자를 연결하면 리버스의 딸 사만다의 이름이 표시된다던가, <<죄와 벌>>에 대한 과거 대화를 언급하며 책 속에서 총을 꺼낸다던가 하는 요소는 제법 괜찮았어요. 기자 짐 스티븐스가 마이클 리버스의 마약 거래를 뒤쫓는 이야기가 병행해서 펼쳐지는 것도 흥미를 자아냈고요.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무대가 되는 에딘버러에 대한 묘사는 특히 좋아요. 유괴 사건에 대한 지루하고 기나긴 탐문, 자료 조사에 대한 끔찍함에 대한 묘사는 놀라운 수준이에요. 모든 내용이 250페이지 안쪽의 짤막한 분량이라는 것도 4~500페이지 짜리 장편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기 힘든 미덕이지요.
아울러 출판사 오픈하우스가 새롭게 런칭한 장르문학 전문 브랜드 Vertigo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성격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정과 디자인도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장점에 비해 단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 관심이 가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후속권을 읽을 생각이 없고요.
이런 싸구려 펄프픽션을 뭔가 있어보이게 "느와르"라는 표현을 써가며 홍보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습니다.

2016/06/16

셰이프 시프터 - 토니 힐러먼 / 설순봉 : 별점 2.5점

셰이프 시프터 - 6점 토니 힐러먼 지음, 설순봉 옮김/강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한 조 리프혼은 풋내기 경찰 시절 옛 FBI 사관학교 동료였던 멜빈 보크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리프혼이 이야기했던, 방화사건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전설의 '이야기하는 러그'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 조 리프혼은 보크가 보내준 잡지 기사 등을 통해 러그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보크와의 연락이 두절되고, 방화 사건과 관련된 범죄자들이 언급되면서 사건은 점점 심각해지는데....


정말 좋은 친구하고는 결혼하지 말아요. 좋은 친구는 남편보다 훨씬 좋다오. - 루이사. 리프혼의 청혼을 거절하며 인용하는 어떤 나이 든 부인의 말.

응원팀 베어스의 폭풍 질주 덕에 독서량이 많이 줄은 요즈음입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셰이프 시프터>>. 지금은 고인이 되신 토니 힐러먼의 나바호 인디언 경찰 조 리프혼 (짐 치) 시리즈 최신작이자 마지막 작품이죠.
사실 국내에 소개되었던 작품 중 초기작들은 좋아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벌써 6년 전이네요) <<스켈리톤 맨>>은 실망이 더 컸기에 읽을까말까 망설이게 되더군요. 그래도 국내 소개된 작가의 작품을 다 읽었고 (국내 출간된 토니 힐러먼 전작을 다 읽은 사람은 거의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 또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라기에 의무감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다행히 재미만 따지면 괜찮았습니다.
은퇴한 조 리프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잔잔한 분위기부터가 인상적이에요. 짐 치가 신혼 여행을 떠난 중이라 이야기의 핵심에서 빗겨나 있으며 조 리프혼의 활약이 대부분인데 그야말로 은퇴한, 중후한 멋진 미노년 캐릭터를 선보입니다. 그러고보니 원래 시리즈는 짐 치를 주인공으로 시작되었는데 언젠가부터 조 리프혼이 주인공으로 바뀌었네요.
그리고 추리적인 부분도 꽤 돋보입니다. 핵심 내용부터 추리적 서사에 기반하고 있거든요. 토터의 가게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 일급 지명수배자 슈낵이 사실은 델로스였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 그것인데 과정이 꽤나 합리적입니다. 조 리프혼이 처음에 델로스를 의심하게 된 것이 과할 정도로 권했던 과일 케이크라는 것부터 그러합니다. 이후 보크의 죽음과 이 과일 케이크가 연결되어 혐의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니까요. 트릭면에서도 이 과일 케이크 위의 독이 든 체리는 눈여겨 볼만 합니다. 소재도 독특할 뿐더러 트릭으로도 꽤 괜찮거든요. 케이크 자체가 아니라 장식품이라 할 수 있는 체리에 독을 주입했다는 것인데, 이렇다면 케이크가 조금 남아있더라도 거기서는 독이 검출되지 않을테니까요.
아울러 핸디 가게 강도 사건의 공범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델로니를 노린다는 당연한 동기를 통해 역으로 델로스의 마각을 드러내게 만드는 과정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방화사건 당시 동네 할머니가 도둑맞은 피뇬 수액을 사건과 엮는다는 복선 역시 빼어나고요.
사건의 발단이 되는 인디언의 전설적 러그인 '이야기하는 러그'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미국의 인디언 강제 이주에 얽힌 아픔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는데 인디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작가다운 소재였습니다. 델로스의 하인인 라오스의 흐몽 부족 생존자 토미 뱅을 등장시킨 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인디언들의 고난과 엮는 전개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인디언들의 신앙과 사고방식을 풀어내는 것이 과했다 생각되기도 하는데 러그나 토미 뱅을 통해 부드럽게 엮어서 묘사하니 훨씬 읽기도 편했어요.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적으로 돋보인다고 해도 그건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탓이고...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많아요. 그간 자신을 잘 숨기며 살아왔던 델로스가 잡지 인터뷰에 응해 자신이 숨겨왔던 러그를 공개한 이유부터가 불분명해요.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세간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내용으로만 보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충분한 재력을 보유한 것으로 보이기에 돈 문제는 아닌 듯 싶고 단지  개인의 만족을 위해 공개한 것이라면 그에 따라 치러야 할 댓가가 너무나 값비싸기에 어떤 면으로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살해 방법 역시 문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트릭은 나쁘지 않아요. 허나 과일 케이크를 싫어한다고 밝힌 조 리프혼에게 억지로 과일 케이크를 안겨 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죠. 조 리프혼이 먹지 않을 가능성, 그리고 먹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주거나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먹는 등의 행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봐도 도박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거든요. 어쨌건 다 먹지 않는다면 증거가 그냥 남아버리게 되니까요. 토미 뱅을 시켜  회수하려는 시도는 뭐 말할 필요더 없이 어설픈 행동에 불과하고요. 리프혼의 추리대로 토미 뱅이 독을 넣었다는 증거를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것 역시 불필요한 이야기입니다. 델로스가 온전히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을거에요.
그리고 앞서 러그를 통해 인디언 문화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 좋았지만 제목 "셰이프 시프터"에 관련된 설정과 이야기는 억지스러웠습니다. 사악한 존재를 뜻하는 것인데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있었나 싶거든요. 뭔가 관련된 반전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그외의 무리수도 많습니다. 토미 뱅이 사실은 착한 사람이고 그 역시 피해자였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토미 뱅이 델로스의 충실한 부하였다면 델로니를 찾아간 시점에서 리프혼과 델로니는 죽은 목숨이었을테죠. 마지막에 뱅이 델로스를 쏴버리는 것 역시 지나치게 쉽게 간 결말이고요. 또 제가 뱅이었다면 모두를 다 죽인 후 시체를 숨기고 델로스의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범죄의 하수인이었다는 건 변함이 없고 케이크는 그가 만들었다는 증거가 있는 만큼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리프혼과의 대화를 통해 향수병이 커졌기에 이렇게 되었다는건 솔직히 억지죠.
마지막으로 단점은 아닌데, 워낙 띄엄띄엄 번역된 탓에 캐릭터 설정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짐 치의 연애와 결혼, 조 리프혼의 동거와 청혼 등 주인공들의 주요 이벤트를 파악하기 힘드니 시리즈를 읽는 맛이 제대로 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곳곳에 허술한 부분이 많기에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확실할 뿐더러 인디언 탐정이 등장하는 독특함, 토니 힐러먼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상징성이 더해진만큼 추리 애호가라면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6/06/12

살인해드립니다 - 로런스 블록 / 이수현 : 별점 2.5점

살인해드립니다 - 6점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엘릭시르

감성 킬러 켈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로런스 블록 (로렌스 블록)연작 단편집. 원제는 <<Hit Man>>. 모두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두번째 이야기는 <<미스테리아 1호>>에서 읽었던 작품이기도 하고요.

이 작품처럼 살인 청부업자가 의뢰를 받고 특정 지역에 잠입하여 타겟을 제거한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다른 킬러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을 죽이는 작전이 내용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켈러가 작전을 위해 방문한 지역과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상황이 더 디테일하게 그려지거든요. 켈러의 심리 묘사 역시도 발군이고요. 이러한 묘사들과 전편에 흐르는 감수성은 확실히 로런스 블록의 작품답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물론 작전도 허투루 소화된 것만은 아닙니다. 치밀한 준비와 범행을 하는 순간의 묘사가 빼어난 작품도 있거든요. 특히나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여겨 경호를 철저히 하는 타겟을 살해하기 위해 소금통에 독약을 넣는 <<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라던가, 의뢰인이 누군가를 알아낸다는 <<현장의 켈러>>는 작전과 일상이 잘 조화되어 있는 작품들이었어요. 켈러가 속아넘어간다는 내용의 <<빛나는 갑옷을 입은 켈러>>와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도 독특한 맛이 좋았고요.

또 작품들의 설정과 시점이 모두 이어져 있어서 긴 호흡의 장편을 읽는 느낌을 준다는 것도 특이합니다. 특히 켈러가 점점 인간성을 회복해간다는 전개가 인상적이에요. 흐름으로 본다면, 우선 첫 단편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는 목표물과 대화하는 정도로, 본인이 그 지역에 대해 흥미를 잃자 바로 냉정하게 바로 살해해 버립니다. 하지만 두번째 단편 <<말을 탄 사나이 켈러>>에서는 타겟에 대해 알게된 뒤 오히려 의뢰인을 살해하게 되죠. 세번째 단편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다가 우연찮게 개를 맡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개 넬슨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작전때문에 부재 시 넬슨을 돌봐주기 위해 고용한 앤드리아와 동거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까지 밝히게 됩니다. (<<켈러의 카르마>>.) 그리고 앤드리아가 넬슨과 함께 떠난 후 켈러는 은퇴를 결심하고, 우표 수집이라는 취미를 갖게되지만 취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자 복귀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전개는 작품에 일상성을 부여하며, 묘하게 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켈러라는 캐릭터를 극적으로 드러내는데 큰 역할을 하지요. '옆집 아저씨가 킬러더라'라는 느낌을 현실적으로 구현했달까요? 여튼 이러한 캐릭터 설정과 묘사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 합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의 한권으로 만든 모양새, 크기 모두 좋다는 것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켈러의 정체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챈다는 것입니다. 10편의 작품 중 첫번째의 잉글먼, 세번째의 브린, 앤드리아, 여덟번째의 월리까지 네명이 알아내죠. 그것도 그냥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켈러가 치밀하지 못한 탓에 정체가 드러나는 이야기가 많아서 답답합니다. 첫번째 작품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 타겟이 운영하는 '퀵 프린트'에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는 전단 복사를 의뢰하지만, 전단지에 쓰여진 번호가 실존하지 않는 다는 것을 타겟이 전화를 직접 걸어보고 눈치챈다는 것부터 그러합니다.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정신과 의사에게 미행당하고요.
게다가 앞서 말씀드렸듯 <<빛나는 갑옷을 입은 켈러>>와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에서는 사기까지 당합니다. 그나마 도트에 의해 의뢰받은 <<빛나는 갑옷...>>이야 그렇다쳐도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는 아마추어에게 농락당하는 수준이라 많이 실망스러워요. 이래서야 진작에 체포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나름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킬러를 등장시킨 색다름은 좋았지만 정교함이 부족하여 감점합니다. 드라마로서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범죄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거든요. 한마디로 로런스 블록의 장점, 단점을 그대로 갖춘 작품집입니다. 로런스 블록의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16/06/10

삼국지 스피리츠 2 -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 김동욱 : 별점 2.5점

삼국지 스피리츠 2 - 6점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지음, 김동욱 옮김/애니북스
1권에 이어 구입하여 읽게 된 2권. 도저히 정가로 구입할 책은 아니라 여겼기에 호시탐탐 알라딘 중고매장 매물을 노리다가 드디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반년 이상 소요되었으니 무척 감개무량하군요.

하지만 기다린 시간, 그리고 들인 노력에 비하면 책의 수준이나 가치가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편과 마찬가지 단점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아라카와 히로무의 만화가 별로 재미가 없다는 단점이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조운의 대담함에 감탄한 유비가 그를 '온몸이 간으로 되어 있는 것 같구나!'라고 감탄하자 주위 장수들이 모두 조운을 '푸아그라 장군'이라고 부른다던가, 우금이 관우의 수공에 말려들은 상황에서의 유머, 'SES'를 육손이 모른다고 할 때의 반응 등 피식할만한 만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아라카와 히로무와 토코 준의 대담 부분은 꽤 재미있기는 합니다. 강유의 잦은 북벌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완고해지고 성미가 급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삼국지에 대해 잘 아는 동네 아줌마들 대화 같은데 나름 핵심을 꿰뚫는달까요? 제갈량의 아내 황월영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을 나름 부각시키는 등의 특이한 부분도 눈에 뜨이고요.
아울러 정사 순서 그대로 책이 구성되어 있기에 삼국지 1세대라 할 수 있는 조조, 유비, 손권의 퇴장 이후 3국이 통일될 때 까지 이야기를 충실하게 끌어나가고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문제라면 최훈의 <삼국전투기>가 이 부분에 정말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이지만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저는 절반 가격에 구입했기에 나름 만족합니다만 재미와 가치 모두 애매해서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16/06/08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1 - 제프리 스타인가튼 / 이용재 : 별점 3점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1 - 6점
제프리 스타인가튼 지음, 이용재 옮김/북캐슬
<<보그>>지의 음식 평론가 제프리 스타인가튼의 글을 모아놓은 일종의 컬럼, 에세이집. 음식 및 요리에 관련된 책들을 좋아라 하기에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책입니다. 이전에 2권 리뷰에서 말씀드렸듯, 1권은 절판 상태였는데 "알라딘 중고서점"을 통해 좋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죠.

책의 구성 및 내용은 2권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2권과 가장 큰 차이점은 제프리 스타인가튼의 음식에 대한 무한 열정, 무한 도전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첫번째 컬럼부터 도전입니다. 음식 컬럼을 쓰기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 (심지어 김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을 정복해 나간다는 것이거든요. 그 다음에는 직접 천연 효모를 쓴 자연 발효빵을 만들기 위한 노력, 프랑스의 새로운 다이어트 비법이라는 몽티냐크 다이어트를 직접 한달동안 체험한 기록, 채식주의를 체험한 결과 등이 이어집니다.
식도락 여행기도 '도전기'에 가깝습니다. 직접 어떤 음식의 오리지널을 체험하고 요리강습을 받아 오거나, 최소한 레시피라도 구해 와서 직접 재현한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슈크르트를 만들어 먹어보기 위해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여러 전통 농가 식당을 돌아다닌 뒤 뉴욕에서 그 요리를 구현한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심지어는 오리지널 레시피를 구현하기 위해서 소금에 절인 안심이 없어서 직접 절이는 식으로 미국에서는 팔지도 않는 고기 부위까지 구하려 노력할 정도니 뭐 말 다했죠.
완벽한 프렌치 프라이를 만들기 위한 고난의 과정 역시 발군입니다. 알랑 파사르의 비법 (말기름에 튀겨라!)에서 시작하여, 어떤 감자를 어떤 기름에 어떤 방식으로 튀겨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한 여정이 장황하게 펼쳐지거든요. 참고로, 저자의 최적 프렌치 프라이 조리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 재료 : 땅콩기름 2~3리터, 아이다호 러셋-버벵크나 삶아먹는 감자 450~570g, 소금

  1. 땅콩기름을 전기 튀김기나 철제 튀김바구니가 들어가는 6리터짜리 우묵한 튀김팬에 붓는다. (전기 튀김기에는 사용설명서 추천량만큼, 화로에 올려놓는 튀김팬에는 3리터)
  2. 튀김용 온도계를 기름에 꽂아 온도를 130도까지 올린다.
  3. 감자를 씻고 껍질을 벗긴 뒤, 프렌치프라이 자르개나 부엌칼로 단면이 각각 1cm가 되도록 길게 썬다. 가장 작거나 불규칙한 조각은 버린다. 감자의 양은 340~450g이 되어야 한다.
  4. 감자를 헹구지는 말고, 종이 수건으로 신경써서 말린다. 기름이 준비될 때 까지 단단히 싸둔다.
  5. 감자를 튀김 바구니에 담아서 기름에 담근다. 기름 온도가 다시 125도로 오를 때 까지 센 불에서 튀기다가, 불을 줄여 온도를 유지한채 9~10분간 튀긴다.
  6. 바구니를 든 뒤 기름의 온도가 190도가 될 때까지 감자를 건져둔다. 불은 세게 올려 놓아야 하며 기름 온도는 195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
  7. 감자를 다시 기름에 담가 3분 동안 튀긴다.
  8. 튀김바구니를 들어 올려 기름을 몇 번 털어내고, 종이 수건을 깐 접시에 뒤집어 기름기를 종이 수건으로 빨아들인다. 먹기 직전에 소금을 넉넉히 뿌린다.

또 과학적인 이론에 바탕을 둔 여러가지 이야기들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책 뒤 소갯글 처럼 여행기와 레시피, 논문이 결합된 독특한 책이라는 것이 허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에요. 특히 술이 심장질환의 요인이 아니고, 적절히 술을 마시는 사람은 마시지 않는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오래 산다는 컬럼은 아주 좋았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로서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컬럼 내용에 폭음은 위험하고 담배는 아주 좋지 않다고 쓰여 있어서 제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죠. 마셨다하면 폭음이니...
야채가 사실은 여러가지 자연 독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컬럼은 추리 소설에도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겠구나 싶었고요.
그 외에도 식욕 억제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검증한다던가, 소금에 대한 현재의 우려는 지나치다던가 (소금과 혈압의 관계는 증명되지 않았음) 하는 등의 이야기들도 재미와 가치 모두 뛰어나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재미있는 주제들에 저자의 음식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과 확고한 견해, 그리고 유머러스한 글 솜씨가 더해져 풍성함을 한껏 전해준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긴, <<보그>>지에서 음식 평론가로 활동하며, '줄리아 차일드 도서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이 거짓말일리가 없겠죠.

단, 글이 쓰여진 시기가 90년대로 보여지는데 2010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약간 유행을 따르는 주제들 (다이어트 방법) 이라던가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글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개정판이 최소 10년 단위로는 나와주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단점은 사소할 뿐 이런 류의 컬럼으로는 최상급이라 생각되네요. 저도 이런 컬럼을 써 보고 싶어집니다.

2016/06/05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홍성욱 : 별점 2.5점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6점
홍성욱 지음/책세상
제목 그대로 여러가지 그림을 토대로 과학의 역사와 다양한 과학 이론을 알려주는 독특한 과학 서적. 목차는 크게 3부분, '제 1부 근대 과학의 탄생, 제 2부 이성과 근대성, 제 3부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고요. 목차별로 다양한 소주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까지의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활용하여 설명해 주기 때문에 딱딱한 내용임에도 이해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준정다면체라던가,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의 다면체 다섯 개를 이용한 기하학적 원리를 여섯 개의 행성에 대입한다는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부분이 아주 좋더군요. (참고로, 케플러의 이론은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 이러한 수학적 조화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곤 하는군요) 그림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으니까요. '생명의 나무'를 이용하여 진화론을 설명해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시대순으로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는 것도 눈에 뜨이는 부분입니다. 본인의 그림 실력을 활용하여 자세한 달 그림을 남겼던 갈릴레오 도 이후 서적에서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만 사용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메디치 궁정의 철학자가 된 뒤 예술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예술보다 더 신분이 높다'는 것이 갓 암흑시대를 벗어난 시기에도 존재했다는 것이죠.
아울러 이 이야기를 갈릴레오가 관측한 달 그림이 로도비코 카르디 다 치콜리의 <<성모 마리아>> 그림에 활용되었다는 것과 엮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울퉁불퉁한 갈릴레오의 달 해석을 카톨릭 교회는 반대했지만 달은 '타락의 결점'을 상징하므로 성모가 짓밟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해석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정밀한 과학이 기존의 예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예술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술가들의 반격 역시 몇가지 예로 설명됩니다. 백과전서의 권두화에 대한 항목, 예술가 블레이크가 "예술은 생명의 나무이고, 과학은 죽음의 나무이다"라고 과학을 비판했다는 항목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백과전서 권두화 이야기는 좀 과잉해석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저자의 의도와 그림이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그림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일환이였는지가 밝혀지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죠. 권두화를 창작한 화가가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 외, 볼테르의 연인이었던 샤틀레 부인이 뛰어난 과학자였다는 것, 라부아지에의 아내 역시 만만찮은 능력으로 라부아지에를 충실히 내조했다는 것 등 새롭게 알게된 사실도 많습니다.
책의 특성상 도판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대체로 우수한 편이라는 것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에서 필요한 부분을 "확대" 해서 삽입하여 설명해주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큰 그림을 접이식으로 수록하는 것보다 훨씬 읽기 편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학당' 등 유명한 그림들이 사용된 것도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하지만 세번째 챕터인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 부분은 내용이라던가 분위기 모두 다른 내용과는 좀 분리되어 있는 듯 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유명한 그림도 등장하지 않으며 과학사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이론에 치우친 느낌이 강했거든요. 특히나 마지막 프리온 이야기는 완전히 생뚱맞은 내용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단점이 없지는 않아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 정도면 꽤 재미있는 과학 도서라 생각됩니다. 읽기 편한 과학사 중심의 과학 도서를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예술 두 분야가 영원히 양립할 수 없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현대의 미디어 아트같은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2016/06/03

피너츠 완전판 3 : 1955~1956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3점

피너츠 완전판 3 : 1955~1956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1권, 2권에 이어지는 3권. "Oldies but goodies"라는 것은 같습니다. 어느 편을 읽어도 푸근하고 따뜻한, 아직은 착하고 순진한 시대를 느끼게 해 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니까요.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몇개 꼽자면,
첫번째로는 라이너스가 찰리 브라운에게 친구가 되어줄 것을 제의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찰리 브라운의 절친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에피소드였달까요?
라이너스 : "내 친구가 되어줄래 찰리 브라운?"
찰리 브라운 : "당연하지, 라이너스... 기꺼이 네 친구가 될게!"
라이너스 : "루시가 나한테 슬슬 친구 좀 사귀래. 아무래도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 해서..."

그리고 찰리 브라운의 염세적인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는 에피소드들도 눈에 띕니다.
"이 세상에 2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알아?"
"그런데 그 중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 아무도!"
"게다가 더 끔찍한 건 뭔지 알아?"
"인구 증가 속도 때문에 난 날마다 더욱더 인기 없는 사람이 되고 있다고!"

심지어 아빠한테 고민 상담을 하니 찰리 브라운의 아빠도 아무도 자길 안 좋아한다고 항상 느껴왔다는군요. 세상에!

그러나 또 반대로 언제나 긍정적인 모습을 보일때도 있다는게 신기합니다.
"있잖아, 찰리 브라운? 저리 좀 가주면 정말로 기쁘겠는데!"
"다른 이의 삶에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건 꽤 근사한 일이야!"

그리고 지금 널리 알려진 설정도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주자 만루에서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찰리 브라운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질책받고 자책받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결정적 순간에 실수하는 찰리 브라운 캐릭터의 전형이죠.
스누피도 점점 똑똑해지면서 사람같은 생각을 많이 보여줍니다. 특히 이 시기의 스누피는 다른 무언가를 흉내내려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미키 마우스를 흉내내는 장면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언가에 대해 기발한 생각을 내어 놓는 편들도 마음에 들어요. 루시와 슈뢰더가 베이비 시터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한번 볼까요?
"베이비시터란 꼭 중고차같아. 실제로 만나기 전까진 어떨지 전혀 모르니까...."

그 외 당시 엄청난 유행이었다는 "데이비 크로켓"에 대한 조크가 꽤 많이 선보이는 등 시대상을 느낄 수 있던 소재들도 재미있게 다가왔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전체적인 평은 전편과 같습니다. 빵 터지는 맛은 없지만 저와 같은 올드 팬에게는 여전한 기쁨과 푸근함을 안겨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이제 3권인데 과연 전권이 출간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부디 끝까지 나와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