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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중화미각 - 김민호, 이미숙, 송진영 외 : 별점 3점

중화미각 - 6점
김민호.이민숙.송진영 외 지음/문학동네

다양한 중국 음식에 대해 써 내려간 음식사, 문화사 서적이자 넓게 보자면 일종의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입니다. 바로 얼마 전 읽었던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와 비슷해요. 전문 연구자들이 각종 음식에 대해 사료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개인의 느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 책이 훨씬 가볍고 쉽게 쓰여졌다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목차는 크게 전채, 주요리, 식사류, 탕, 후식, 음료, 간식으로 구분되며 각 항목별로 많게는 5종, 적게는 1종의 요리와 음료가 소개되면서 마지막 '연회 차림표'까지 모두 열 아홉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음식에 대한 전문적인 글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향장육"을 소개하는 첫 번째 글에서 잘 알 수 있어요. 오향장육의 현재 생김새와 구성, 주요 재료 소개, 오향장육 본고장인 산동 소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오향장육에 대한 깊이있는 이야기는 주요 재료 소개에 그치는 탓입니다. 산동성 소개도 재미는 있었지만, 무송이 호랑이 때려잡는 이야기 비중이 높아서 이게 오향장육과 무슨 관계가 있나 싶고요.

그래도 건질게 없는건 아닙니다. "량반황과"에서 식초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은 좋았습니다. 음식 재료로서의 식초보다는 '초'라는 한자어는 깨끗하고 가난한 선비를 가리킨다던가, 동양화 소재로 자주 쓰이는 "삼산도"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유가 소동파, 도가 황정견, 불가 스님 불인이 각각 식초를 맛보고 짓는 표정이 다르다는 고사를 통해 유가, 도가, 불가의 인생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이런 생각도 있었구나 싶었거든요.
"농어회"에서는 중국 회의 역사와 회의 조리에 대한 여러가지 고사, 시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진나라 관리 장한이 초가을 농어회와 순채탕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향한 뒤, 그가 모시던 왕과 측근이 모두 반란군에 의해 죽었다는 고사를 통해 '순갱노회 (순로지사)'라는 4자성어가 남아 있을 정도라는데, 중국에서도 진나라 때 부터 회를 먹었다니 놀랍네요. "쑹수구이위"를 통해 소개해주는 중국 물고기 요리, 그 중에서도 잉어 요리에 대한 정보도 좋습니다.

특히 마음에 든 건 "호떡"입니다. 당나라 백거이가 쓴 호떡이 등장하는 시에서 시작하여, 곡물가루로 반죽해 발효시키지 않고 화덕에 구운 '병'의 역사와 그 발전 과정,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분류 - 기름에 지진 젠병, 쪄는 증병, 튀겨낸 유병, 화덕에 구워낸 소병, 뜨거운 국물과 같이 끓여 낸 탕병 등 -, 당 이후 송, 청의 사료를 통한 '병'의 여러가지 조리법들, 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래었는지까지, 그야말로 '호떡' 이라는 길거리 음식에 대한 한 편의 깊이있는 미시사로 손색없는 글인 덕분입니다. '병'이 어떻게 발효를 거쳐 푹신하고 달콤하며 기름진 한국식 호떡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없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중화미각" 이라는 책에서 한국식 호떡 이야기를 깊이있게 다루기는 어려웠겠지요. 이 부분만 보강된다면, "호떡의 역사"라는 별도의 책으로 팔아도 충분할, 좋은 글이었습니다. 

호떡과 비슷한, 과자 이야기들도 괜찮은게 많습니다. 후식에서 소개되는 "장원병" 이야기도 역사와 깊이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장원병의 시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그 중 하나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소년이 무려 49일이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어느 요리사가 준 과자만 전혀 상하지 않아서 그걸 먹고 목숨을 부지한 뒤 장원급제를 하였던 일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바삭한 껍질에 마른 견과류와 달콤한 소가 필수인 장원병이 오랜 기간 상하지 않는건 이해가 됩니다만, 정말로 상온에서 49일을 버틸지는 잘 모르겠네요. 여튼 이 후 장원병은 널리 퍼져서, 지금은 행운과 부귀영화를 상징하게 되었다니 중국에 가면 한 번 맛 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맛보다는 의미와 상징적인 측면에서 말이지요.

"반도 복숭아"에서 중국에서의 복숭아의 의미와 우리나라에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에 대한 고찰은 개인적으로 아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복숭아가 에로틱한 느낌을 줄까? 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했던 적이 있는데, 이 글에서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관' 때문일 거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조선 시대에서 복숭아가 여성의 욕망과 에너지를 상징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건 조금 아쉽더군요. 중국에서 복숭아가 여신 서왕모의 이미지이기 때문일까요? 그런 설명을 조금 더 보강해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산양뤄우"와 "훠궈"라는 탕 요리 소개도 다른 곳에서 흔하게 보았던건 아니라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익히 알고 있었던 요리들이 많이 등장하는건 단점이기는 합니다. "북경오리구이", "동파육" 이 대표적입니다. 요리법과 역사가 상세하게 소개되는 편이지만, 거의 모든 중국 요리 소개서 (이런거) 에서 소개될 정도로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이 접했던 이야기라 신선함이 떨어집니다. 물론 "동파육"에서 실제 해당 요리와 상관없는 동파 소식의 인생과 그의 시를 소개하는 식으로 차별화 요소를 가져가고 있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았지만 책 취지에는 많이 어긋난 내용이었다 생각되네요.
"만두"에서의 만두의 여러가지 종류에 대한 소개도 단순한 형태와 만두소에 따른 분류가 전부라 깊이가 부족했고요. "짜장면"도 차별화된 컨텐츠로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백주와 약주", "용정차" 역시 중국술과 차에 대한 방대한 책들에 비하면 딱히 내세울 내용은 없어요. "용정차"에서 "삼국지" 속 유비가 구하려고 했던 차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 정도만이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훠궈"도 앞서 좋다고 설명드리기는 했지만 말미에 중국에서 훠궈 먹는 방법을 소개한건 어색했어요. 솔직히 필요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 "마파두부"는 굉장히 널리 소개된 소재임에도 다행히 '두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두부의 역사에서부터 시작되거든요. 마파 두부도 흔한 진 마파의 조리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천 요리의 핵심인 '두반장' 소개로 다른 마파두부 컨텐츠들과는 조금은 다른 내용을 선보이고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다른 유명 요리들도 이렇게 다른 디테일을 파고 들었다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적당하며, 책의 빼어난 만듦새도 좋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중국 요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9/27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주머니 속의 호밀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은선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융 회사 사장 포티스큐가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죽었다. 독을 먹은게 확실하여 경찰은 수사에 나서는데, 유력한 용의자였던 미모의 젊은 부인마저도 자택에서 과자와 꿀을 먹던 중에 사망했고, 비밀을 숨기고 있던 하녀 글래디스마저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포티스큐의 옷 속에 '호밀'이 들어 있었던 것, 글래디스가 빨래 집게로 코가 집힌 채였던 상황을 통해 미스 마플은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 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라는 마더구스 동요를 떠올렸고, 미스 마플의 조언에 따라 닐 경위는 '지빠귀'를 찾다가 의외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미스 마플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별점 5점짜리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미스 마플이 하녀 글래디스의 불쌍한 죽음을 파헤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복수의 여신'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해서 시리즈 중 최고로 멋지기 때문이랍니다. 추리적인 구성이나 트릭에 점수를 주고 있는건 아닌데, 여사님 작품이라면 추리적인 요소는 당연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나 싶네요.
그런데 저는 뭐가 그렇게 멋진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글래디스가 살해당한걸 뉴스에서 읽고 직접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출동한거라 다른 작품들 보다 적극적이기는 한데, 딱히 정의의 수호자 느낌을 받지는 못했거든요.

그래도 작품은 좋았어요. 저는 외려 "공략"에서 언급하지 않은, 추리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범을 제외한 (!) 모든 등장 인물들이 수상하다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진범이 랜스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더욱 충격적이었거든요.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티스큐 씨를 독살한 방법은 차가 아니라 아침 식사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었던 겁니다. 가족 중 포티스큐 씨만 마멀레이드를 먹기 때문에 그 속에 독을 넣어 살해한 거지요. 이 수법은 비교적 초반에 드러나며,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라 몇 개월 전 영국의 포티스큐 저택을 방문했던 랜스에게 아예 불가능한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머문 손님이, 그것도 안성마춤으로 몇 개월 후에 먹을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는건 상식적으로 어려운 탓에, 랜스는 경찰은 물론 독자의 시야에서도 완벽하게 빠져나갑니다.
게다가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기 위해 누구나 범인이 아니라 여길 덜 떨어진 하녀 글래디스를 실행범으로 조종했다는 수법이 정말이지 기가 막힙니다. 랜스가 가명으로 글래디스를 유혹한 뒤, 독을 자백약이라고 속이고 포티스큐 씨에게 먹게 만든건데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거든요. '맹했다'는 글래디스의 캐릭터 묘사도 설득력을 뒷받침 해 주는 요소였고요.
이후 랜스는 아버지, 유산을 손에 넣을 새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증인 글래디스까지 살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범행을 포장하기 위해 마더 구스 동요를 가져온 것도 기발했어요. 확실히 나쁜 놈들이 머리가 좋은 법입니다.

이런 랜스의 범행을 적절히 배치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 - 특히 글래디스의 유품인 사진과 편지 등 - 을 통해 독자가 미스 마플과 같은 수준에서 추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전개, 동기인 '돈'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 점, 이론적이고 상식적인 닐 경위와 인간 관계를 통해 진상을 파악해내는 미스 마플의 협업, 랜스의 부인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습성을 통해 랜스의 본질을 파악하는 미스 마플의 통찰력 등 그 외에도 돋보이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랜스가 글래디스를 죽일 때까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을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실제로 그녀는 죽기 전 미스 마플에게 편지와 함께 결정적인 단서를 보냈으니까요. 닐 경위에게도 거의 실토하기 직전이었고요. 이래서야 천재 범죄자의 완벽한 범죄로 보기는 힘듭니다. 기껏해야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알기 전에 몰래 글래디스를 죽이고, 막 도착한 듯 티 타임에 참석해서 새어머니의 차에 독을 타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쉽게 흘러간건 좀 아쉬웠어요. 교살할 때 글래디스가 반항했더라면? 피터 러브시"밀랍 인형"에서처럼 새어머니가 즉사하지 않고 난리를 쳤다면? 바로 체포되어 교수대로 향했을 테지요. 이는 조금은 편의적인 전개였다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더 구스의 '6펜스 노래를 부르자'와 비슷하게 사건을 꾸민 작전도 기발할 뿐, 현실적이지는 않아요.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맥켄지 가문의 후예나 형 퍼시벌이 유력한 용의자인데 구태여 정신병자인 제 3의 인물을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요. 오히려 '지빠귀 광산' 이 유력한 동기임이 드러나는 멍청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녀 글래디스 살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걸 강조했더라면 차라리 말이 되었을텐데, 이대로는 좀 애매합니다. 그나마도 이렇게 복잡하게 사건을 꾸밀 필요 없이 글래디스가 뭔가 목격해서 죽였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는게 더 현실적이라는건 분명하고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9/26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고영 : 별점 3.5점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8점
고영 지음/포도밭출판사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이 읽고 먹고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대로, 음식문헌 연구자인 저자가 본인이 경험했고, 맛보았던 식문화먹거리에 대해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크게 "아, 침이 고인다"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 그리고 "온전한 밥 한 그릇"이라는 세 개의 대 분류로 구분됩니다.
이 중 "아, 침이 고인다"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에 식문화와 먹거리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 가치있는 글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인 "온전한 밥 한 그릇"은 주로 저자의 '느낌'과 단상이 가득한,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 많고요.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주제가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식문화, 먹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탓이지요. 단순히 이미 널리 알려져있던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가 음식문헌 연구자인 덕분에 본인의 연구가 바탕이 된, 깊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글들이 오래전 한시와 옛 문헌의 한 토막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제일 첫 글인 "융도, 두 자의 뭉클함"를 보자면, 김려가 남긴 서사시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의 소개와 해설을 토대로 당시 먹거리에 대해 일람하다가 '융도'라는 두 글자에 주목합니다. 융도는 건국 초기 조선의 북쪽 끝, 여진과의 접경지대에서 나는 벼를 의미합니다. 이른바 조생종 벼인데, 보리를 먹어 치우고 벼를 수확하기 전 식량의 징검다리 역할과 냉해를 견디는 품종 확보를 목적으로 조선은 세종 때 도입 육종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고 소개합니다. 시 한 구절에서 이러한 전문적인 역사 관련 지식까지 풀어내는 그 식견이 사뭇 놀랍습니다.

이 책 덕분에 옛 문헌 속 이런저런 몰랐던 식문화와 먹거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세종 때의 문헌 "산가요록"을 통해 우리에게는 일찍이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는 소개처럼요. 복숭아 김치, 살구 김치, 수박 김치 등이 있었다는데, 그 맛이 사뭇 궁금해지네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 수필집 "침초자"에 소개된 아마즈라와 13~14세기 원나라의 갈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빙수의 원형 이야기, 제빙 기술이 발달하여 1910년대 조선에서도 여름에 얼음 띄운 화채나 빙수 먹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빙수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광수 소설 "무정"에서도 빙수를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널리 퍼졌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와인에 대해 최초로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이기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는 1720년 북경 천주당에서 와인을 맛보고 "소림과 대진현이 또 나를 어떤 방으로 이끌었다. 탁자에 수정병이 하나 있는데, 높이는 세 자(약 30.3cm)쯤이고 술이 떠 있는 듯 담겨 있었다.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데 술맛이 감미로우면서도 상쾌하고 이채로운 향이 코를 찔렀다. 마시고 난 다음에는 그저 조금 취기가 오를 뿐이고 취하지는 않았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이기지가 이후 와인 제조법을 물어보아 남긴 기록을 보면, 이 와인은 '포트 와인' 이었습니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북경 천주당의 예수회 신부들이 먼 북경까지 포도주를 옮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으로 설명됩니다. 도수가 높아야 쉽게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꽤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포트 와인은 높으면 도수가 20도를 넘어가는 제법 센 술이라 마시고 나면 취할텐데, 이기지는 술이 꽤 셌나 봅니다. 이 뒤 다른 자리에서 포도주 세 잔을 거푸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저자의 글은 뒤에 조선 땅에 상륙한 여러가지 외국 술에 대한 글로 이어집니다. 각 글이 항목별로 분리가 되어 있기는 해도, 와인과 브랜디 등 각종 서양 술, 맥주, 사케와 정종, 청주 등의 일본 술, 희석식 소주와 증류식 소주 등이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항목만 따로 떼어 놓아도 충분히 가치있는 술에 대한 미시사 문헌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그만큼 자료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풍성한 사료를 통해 깊이를 더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냉면 먹방"에서 소개되는 냉면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흔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당대 여러 기사들을 통해 냉면 먹는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조망해 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겨울에 평양 냉면'을 먹었다는게 전부가 아닌 것이지요. 1936년 "조선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냉면 미각의 절정은 삼복 (더위) 이전' 임이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매일신보" 1936년 기사에서도 여름 관청, 회사 점심시간이면 냉면집 전화통에는 불이 날 지경이라고 소개되었다고 하고요. 그러나 지금과 다른 점은, '경성 냉면은 평양 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냉면을 주문하면 20분은 기다릴 각오'를 했어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패스트 푸드가 아니었던 겁니다.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을 통해 풀어놓는 우리나라 소금 산업의 역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굽는 방식의 제법을 사용하였는데, 일본이 조선 강점 시기에 한국 해안에 대단위 천일 염전을 조성한게 대단위 소금 산업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소금을 만드는 염호가 옛부터 고단하고, 노비나 군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해 중국 산동 출신 노동자를 대거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네요. 이후 중국 노동자들의 파업, 퇴사 이후 1930년대에는 조선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요. 고되고 힘든데다가 사회적 인식까지 부족한, 지금의 염전 노예 사건의 단초가 이렇게 일본에 의해 강제된 천일염 제조 산업 초창기부터 있었다는게 참 가슴 아픈 사실이네요.

그러나 이렇게 정보 전달 측면에서 우수하며,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글들에 비해 저자의 느낌,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은 좀 별로입니다. 저자의 생각 - 식문화와 먹거리는 빈부에 상관없이 평등해야 한다 - 도 옛 문헌을 통해 먹거리가 빈부에 따라 큰 격차를 보였다는걸 소개하면서, 이런 격차가 그나마 평등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알려주는데 비슷한 주장의 반복이 많은 편입니다. 이러한 격차가 현대에도 이어지는걸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지나치게 과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보 전달 측면의 글들은 별점 4점도 아깝지 않으나, 비슷비슷한 에세이 류의 글로 약간 감점합니다. 저자의 음식 관련 미시사, 문화사 전문 서적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네요.

2020/09/25

에놀라 홈즈 3 기묘한 꽃다발 - 낸시 스프링어 / 김진희 : 별점 1.5점

기묘한 꽃다발 - 4점
낸시 스프링어 지음, 김진희 옮김/북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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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병원에 갖힌 환자 키퍼솔트는 자신은 의사 왓슨이라고 주장하지만, 수간호사는 다른 병동에 셜록 홈즈도 있다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그러나 그는 진짜 왓슨 박사였다. 한편 밖에서는 왓슨 박사 실종에 대해 셜록 홈즈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에놀라 홈즈가 사건에 뛰어드는데....

셜록 홈즈와 마이크로포트 홈즈, 왓슨 박사 등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홈즈의 여동생인 에놀라 홈즈가 활약하는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최근 영상화도 되었다고 해서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북 대여가 세 번째 작품만 가능하더라고요.

이런 류의 작품들 중 기대를 충족시킨건 별로 없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마찬가지로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애초에 추리라는걸 보여줄 여지가 거의 없어요. 에놀라가 마음먹은대로 신통방통하게 전개되는 탓입니다.
우선 왓슨을 구해주기로 마음 먹은 뒤, 에놀라는 왓슨의 집을 방문하는데 그 곳에서 협박을 의미한다는 (순전히 에놀라 생각이지만) 꽃다발을 발견합니다. 꽃다발이 또 올거라고 확신한 에놀라는 왓슨 자택 맞은 편 집에 방을 구해 감시하는데, 바로 다음날! 꽃다발이 정말로 보내져 오지요. 에놀라는 꽃다발을 가져온 덜 떨어진 심부름꾼 소년으로부터 의뢰인 신사가 코가 없어서 가짜코를 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짜 코를 취급할 법한 변장 도구를 파는 상점에 찾아가 가짜 코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상점 주인인 페르텔로트 부인은 엄청난 적의를 보이며 그녀를 쫓아내지요. 당연히 그녀는 범인과 관련이 있었고, 에놀라는 곧바로 그녀 집에 잠입했다가 페르텔로트와 그녀의 동생 플로라의 대화를 엿듣고,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됩니다.
이렇게 에놀라 의식의 흐름대로 사건이 흘러가고, 해결되는걸 보면 탐정이 아니라 무당이라고 하는게 옳아요. 이야기도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모험물에 가깝고요.

그러나 모험물이라면 극적인 서스펜스, 스릴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에놀라의 쓸데없는 심리 묘사와, 그리고 그녀와 어머니간 애증과 같은 불필요한 설정들에 대한 설명이 많은 탓에 그런건 느끼기 힘듭니다. 이런 불필요한 설명은 에놀라가 왓슨 박사의 집에 찾아갈 때 까지의 전체 분량 중 1/5 가량을 소모할 정도입니다. 전개도 답답하고요. 

에놀라 홈즈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여성의 능력을 억합하던 당대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독립적인 여성을 그려내는게 의도였던 듯 한데, 작중에서는 그냥 전형적인 말괄량이 왈가닥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남자들은 단순한 얼간이들이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멍청이가 된다' 는 등의 언급은 왜 등장하는지 의문이며, 코르셋에 이런저런 장비를 넣고 다닌다는 '소년 탐정단' 스러운 설정, 변장으로 미녀와 못난이 아가씨를 오간다는 설정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그래도 이런 단점들은 참아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를 독선적이고 무능하며 관찰력 떨어지는 인물로 그려낸건 정말이지 유감입니다. 에놀라의 들러리, 병풍 역할에만 그려낸건 에놀라 홈즈 시리즈이니 당연하다 쳐도,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여성에 대해 논리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는 식으로 이상하게 몰고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성 대상으로는 탐정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데 이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어요. 저자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기나 한 걸까요?
셜록 홈즈가 에놀라는 한 번 보고 눈치 챈 수상한 꽃다발에 대해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꽃말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 역시 홈즈 팬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에놀라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모리스 르블랑뤼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헐록 숌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멋대로 망가트렸던게 떠오르네요. 이는 코난 도일의 분노를 샀고, 모리스 르블랑은 욕을 먹었던 행위였습니다. 원전에 기댄 주제에 원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런 제멋대로 각색은 정당한 창작자의 행위는 아니에요.

물론 유명세답게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 대한 충실한 묘사는 좋았어요. 몇 개 등장하는 암호 트릭 중 에놀라의 어머니가 에놀라에게 보낸 메시지 암호도 괜찮았고요. 그냥 읽으면 Alone part part alone이라는, 외로움에 사무친 문구로 보이지만 거꾸로 읽으면 에놀라! 함정을 조심해! 라는 의미가 되니까요. 이름을 잘 활용한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또 결정적 단서가 되는, 왓슨 부인에게 전해져 온 꽃다발은 꽃말로 볼 때 복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추리는 바로 직전에 읽었던 "남은 날은 전부 휴가"와 겹쳐서 조금 신기했습니다. 확실히 여성스러움이 넘쳐나는 단서라 시리즈 취지와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꽃다발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스파라거스에서 A spear of Gus라는 문장을 뽑아내어 아우구수투스 (거스) 키퍼솔트라는 이름으로 연결하는 과정도 깔끔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꽃말도 아니고, 이런저런 민속적인 의미나 꽃이 피는 장소 등을 결합해서 저주의 의미라고 풀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범인은 플로라라서 아우구수투스의 창이라는건 딱 맞는 표현은 아니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처음에 '키퍼솔트는 코가 없어서 가짜 코를 연구하다가 변장 도구를 다루는 상점을 열게 되었고, 왓슨 박사에게 원한을 품은건 코 절단의 집도의였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것과 '키퍼솔트의 아내 페르텔로트에게 플로라라는 정신병자 여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어린 시절 쥐에게 코를 뜯어먹힌 뒤 정신병을 갖게 되었으며, 키퍼솔트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졌지만 언니의 도움으로 돌아온 뒤 키퍼솔트를 죽이고 그로 변장해서 살아온 것' 이라는 진상도 꽤 재미있는 편이었어요. 참고로 플로라가 왓슨 박사를 정신 병원에 가둔건, 플로라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문서에 서명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러나 장점 보다는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져서 전체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홈즈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면, 좀 더 정교한 트릭으로 승부하는 본격물이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홈즈를 존중이라도 하던가요. 두 번 다시 이 시리즈를 읽어 볼 일은 없겠습니다. 책 보다는 차라리 영상화한 쪽 결과물이 훨씬 좋으리라 확신이 드는데,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 쪽을 챙겨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9/23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스핀 오프로 시작한 C.M.B도 이제 40권 째를 향해 달려가네요.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성장기, 한 편은 일상계이고, 나머지 두 편은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본격물입니다. 이 중 첫 번째 작품인 "상상 살인"은 아주 좋은데 다른 작품들은 그냥저냥입니다. 마우 주연의 이야기는 심지어 수준 이하이고요. 그래도 "상상 살인"의 하드 캐리 덕분에 전체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상 살인"

디자이너를 꿈꿨지만 이상과 다른 현실 때문에 괴로와 하던 디자인 회사 영업직 구보타 토미오는 출근길에 우연히 고등학생 시절 사귀었던 미와와 마주쳤는데 그녀와 왜 헤어졌는지를 떠올리지 못했다. 토미오는 그녀와 헤어졌던 과거를 고치면, 미래의 나도 바뀔거라고 생각하는데....

사고로 위장한 살인이 등장하는 본격물입니다. 미와의 남편 아키요시는 몸을 내밀었던 베란다 발코니가 떨어져서 추락사하는데, 이게 사실은 계획된 조작에 의한 살인이었지요.

범행은 베란다 안전핀을 뽑는 간단한 조작이 전부이며, 아키요시가 베란다 쪽으로 몸을 내밀게 한 트릭 (물뿌리개 안에 중고 휴대폰을 넣어서 울리게 함)도 간단하다는 점에서 무척 현실적입니다. 이 휴대폰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신라가 사건에 엮이게 되는 이유도, 피해자 아키요시가 떨어진게 신라가 눈독들이던 개구리 조각이기 때문이라는 우연도 재미있었습니다. 토미오가 확실하게 죽게 만들려고 조각을 베란다 밑으로 옮겨 놓아서 조각이 깨지고, 분노한 신라가 무보수(?)로 사건 해결에 나서거든요. 

무엇보다도 토미오가 2층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사람이 죽을리 없다며, 누군가 떨어진 아키요시를 죽였을거라고 주장하는 마지막이 기가 막힙니다. 이는 진범은 미와임을 암시하지요.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무서운 추론이라 소름끼칠 정도였어요.

그러나 회사를 그만 둘 정도의 결단력도 없는 토미오가 살인을 결심해 실행에 옮긴다는 전개는 조금 석연치 않았습니다. 상상한건 모두 이루어진다는 긍정맨 토미오 캐릭터와 범인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도 단점이고요. 미묘한 미친놈인데, 캐릭터 구축이 어설픈 탓입니다. 그냥 미와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정도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려다 폭주하는 소시민 정도면 적당했을텐데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토미오의 범행을 밝히기도 어려울거라 생각되네요. 그가 베란다에 조작을 가하는게 목격되지 않았다면, 단지 물뿌리개 속 대포폰으로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는 불가능해 보이거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물로는 나무랄데 없는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팔레오파라독시아" 

고등학교 1학년 미쿠와 하야토는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여동생과 함께 외딴 산 속 숙부 집에서 황금 연휴를 보내게 되었다. 마침 숙부는 산 속에서 '팔레오파라독시아'의 화석을 발굴 중이었다.

신라는 학교 공부에 의미가 없다며 징징대는 하야토에게 '모두가 언제나 의미있는 답을 낼 수 없다, 하지만 답을 내기 전에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그리고 숙부가 화석을 발굴하는 상황을 이에 대입하지요. 답보다도 문제의 쪽을 오히려 모르고 있다는 뜻으로 말이죠. 일종의 성장기로서 나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같은 신라가 명확한 인생관을 들려주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하야토가 고생물학자로 선생님이 되었다는 결말 역시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러나 추리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위기에 처한 하야토가 '문제를 이해하여' 적합한 답을 내여 생존한다는 클라이막스는 작위적이었고요. CMB 특유의 현학적 재미 역시 '팔레오파라독시아'라는 동물에 대해 박물학 지식을 살짝 인용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미그라스의 모험" 

마우는 부호 브렌드가 밀실에서 책꽂이에 깔려 죽었을 때 쥐고 있던 책을 입수했다. 그 책은 90년대 발표된 판타지 소설 "미그라스의 모험"으로, 대신 미그라스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이웃 제국과 맞서 싸우다가 패한 뒤,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별 볼일 없는 내용에 절망한 마우는 책을 방치하다가 도둑맞고, 브랜드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다가 그가 교통사고 합의 관련 분쟁에 휘말렸던걸 알게 되는데...

신라의 등장없이 마우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작품입니다. 브렌드가 죽은 밀실을 만든 트릭은 문 옆에 놓인 갑옷 기사를 이용한 장치 트릭인데 꽤 그럴싸합니다. 갑옷 기사가 들고 있는 칼을 돌리는 방식의 자물쇠 위에 잘 얹어 놓는 거에요. 그러면 칼 무게로 자물쇠는 돌아가고, 칼은 떨어져 제자리에 오게 되지요. 균형을 잘 맞춰야 겠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이는 트릭이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범인이 조카 시로노와였다는건 억지스럽습니다. 동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탓입니다. 시로노와가 일으켰던 교통 사고를 브랜드가 합의해 주었었는데, 시로노와는 합의를 기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해서 살해했다는게 동기죠. 그러나 기사도와 시로노와의 관계가 설명되고 있지 않아서 완전 뜬금 없었어요. 차라리 유산이 동기라면 모를까, 21세기에 기사도라니?
또 이를 극중 극 형태로 소개되는 미그라스의 모험과 연결시킨 전개도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미그라스가 가난한 마을에서 침략해온 제국군과 싸운다는 이야기인데, 전쟁을 하지 말라는게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렇게 싸워보지도 않고 협상을 한건 기사도 정신에 위배된다는거지요.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미그라스가 일으킨 전쟁으로 온갖 비극이 일어납니다. 마우의 말 대로 미그라스야말로 전쟁의 원흉이자 비극의 씨앗인 셈입니다. 도대체 이야기 어디에 기사도라는게 있는걸까요?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로노와를 협박해서 돈을 쥐어짠 뒤, 경찰에 넘기겠다는 마우의 사악함도 나쁘진 않지만, 설득력이 낮습니다. 아무리 피해자와 책의 관계를 밝힐 수 없었어도, 시체에 '기사도'를 의미한 책을 남겨놓은게 범인이라는게 증명되는건 아니니까요. 피해자가 어딘가에서 빌려왔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작해야 시로노와가 마우에게서 책을 훔쳤다는 정도만 증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밀실 트릭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그닥이며, 특히나 판타지 소설을 우겨넣은건 아무리봐도 무리수였습니다.

그나저나, 작가가 왜 이렇게 마우에게 미련을 갖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지극히 만화적이며 딱히 매력도 없는데 말이지요. 제발 그만 좀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빈 터의 유령"

야스다 시노는 인터넷을 쓸 수 없는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다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던 곳에 갑자기 나타나 서 있던 사람을 목격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네코와리와 하츠키 등 친구들은 모두 현장을 방문했다가 그 '유령'을 목격하고 도망치는데...

오래전 추억 속 라면 가게를 다시 열기 위해 그 곳을 방문한 아저씨가 유령의 정체였으며, 우체통 때문에 사각이 생겨서 아저씨가 지나가는 걸 못 봤다는게 진상인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충분히 그럴싸한, 설득력 넘치는 아이디어로 동네 유령 이야기 진상으로는 아주 잘 어울렸어요. 추억 속 라면 가게, 편지 쓰기 등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도 풍성하고, 편지를 쓰기 싫어하는 시노가 이 사건에 대해 사진 중심으로 편지처럼 꾸며서 보낸다는 마지막 장면, 그리고 아저씨의 라면 맛이 별로였다는 에필로그까지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트릭이 대단한건 아니고, 순전히 우연에 불과한 사건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또 시노 혼자라면 모를까, 함께 갔던 친구들 모두 동일한 '사각'으로 아저씨를 보지 못했다는건 설득력이 낮아요. 그래서 조금 감점하여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경이의 방으로 안내하는데 요금을 받지 않는데, 친구들의 부탁이기 때문인지 불분명합니다. 캐릭터가 바뀐걸까요? 이런 설정마저 없어져 버린다면 정말로 Q.E.D와의 구분이 애매해지는데 말이죠.

2020/09/20

심리 조작의 비밀 - 오카다 다카시 / 황선종 : 별점 3점

심리 조작의 비밀 - 6점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어크로스

사이비(책 속에서는 컬트 교단이라고 칭함) 종교나 각종 강매 행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심리 조작을 일으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지를 상세하게 파헤쳐서 알려주는 책입니다.
심리 조작, 세뇌, 최면 등이 소개되는데, '심리학'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심리 조작과 세뇌, 최면을 거는 방법 및 실제 사례들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항상 궁금해왔던 질문에 대한 답도 많고요. 예를 들면 '사이비 종교를 믿는 이유는 폭력적인 남편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를 의심하면,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더 강한 믿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네요.
소규모 집단, 배타적인 작은 팀에서 외부 정보가 차단되면 공동 생활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테러리스트 훈련 과정은 왜 시골 마을이 배타적이고 자신들만의 룰을 강요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에 딱 들어맞고요.
또 애착불안이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을 지탱해갈 수 없기에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게 되기 쉽다고 합니다. 즉, 눈앞에 그 사람이 있을 때는 헤어지는 일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끈끈하게 연결된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아주 간단하게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리는 거지요. 남자 친구가 군대 간 사이, 여자 친구가 복학생 오빠와 사귀는건 애착불안이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일 수 있다는 겁니다!

더블 바인드라는 기법도 눈길을 끕니다. 상대가 무언가 해주기를 바랄 때, 그 일을 할 생각이냐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선택지를 준비해 질문하는 방법으로, 복수의 선택지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결과로 유도됩니다. 자동차를 살까말까 갈등하는 고객에게 "이 장치를 달아놓을까요?” 아니면 "자동차 색깔은 흰색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검은색을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식으로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다음 선택 사항으로 고객의 관심이 향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는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을 때 “국어와 수학 중 어느 쪽부터 할까?”, “숙제를 엄마와 함께 할래? 아니면 혼자서 할래?" 라고 공부를 하는걸 전제로 묻는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합니다. 강하게 저항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는 “숙제를 간식 먹기 전에 할래? 아니면 먹고 나서 할래?”와 같은 식으로 한 발 물러난 제안을 하여 하나를 선택하게 하거나, 반대로 “숙제를 할래? 목욕탕 청소를 할래?”와 같은 식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께 넣어서 선택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네요.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라는 말을 들으면, 명령받았다고 받아들여 반항심이 생기지만 간접적으로 넌지시 말하거나, 하는 것을 전제로 놓고 말하면 저항감이 생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고 놀고 있을 때 공부하라는 독촉은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내년 이맘때에는 이렇게 가족이 모두 모여 한가롭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없겠네. 대학교는 1학년 때가 가장 바쁘다고 하니 말이야.”와 같이 말하는게 훨씬 효과가 좋다는 뜻이지요. 아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비난도 명령도 아니기에 마음에 저항이 생기기 어려우니까요. 그럴싸 합니다. 꼭 한 번 써 먹어 봐야겠습니다.

조언은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실제 사례로 설명해 주어서 와 닿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릭슨 박사의 이야기로, 어느 날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10대 소년에게 에릭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너의 행동이 얼마나 변할지 상상조차 못하겠는데." 이 말은 소년이 변하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단정 짓지도 않지요. 또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안도감과 함께 자신의 행동이 전문가가 예측조차 못할 정도라고 바뀐다는 것에 자극받아서 실제로 소년의 행동은 변했다고 합니다.
상대가 예스라고 대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방법으로 신뢰성을 높여 최종적인 질문에도 예스라고 대답하도록 이끄는 예스 세트도 같은 원리입니다. "노!" 대신 상대가 “예스!"라고 대답하도록 유도하면, 상대의 저항을 없애고 본심에 다가서거나 결단을 좌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군요. 예를 들면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죠?”라고 묻는 식입니다. 또는 “그와 헤어지고 싶나요? 아니 그럴 리가 없죠.”와 같이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하거나요. 이렇게 하면 “아뇨.”라고 부정하고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건 심리 상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표현된 말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문제와 마주 서서 의식화된 경우에 한하거든요. 문제와 마주 서기를 피하고 핑계만 생각할 때는 직접적으로 지적당하면 더욱 강하게 저항하고 부정하게 되는거죠.

생활과 행동을 유형별로 분류해놓고, 다음 행동이나 생각으로 전환시킬 때 신호가 되는 자극을 주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에요. 정해놓은 음악을 틀거나 벨을 울리는 행위가 널리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뇌에 대한 굉장히 상세한 이론과 실제 예가 소개되는 부분도 눈길을 끌고요. 이 부분은 내용이 워낙 많아서 제가 요약해서 설명드리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정말 그럴듯해서 와 닿았습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주제의 반복이 많고, 목차가 조금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 들거든요. '오옴 진리교' 사건 직후 발표된 책인지 오옴 진리교 이야기도 지나치게 많고요. 읽다보면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아요.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심리 조작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덕분입니다. 제가 소개해드린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니만큼, 이런 류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0/09/19

남은 날은 전부 휴가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 별점 3점

남은 날은 전부 휴가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

이사카 고타로단편집입니다. 그다지 많이 읽어 본 작가는 아닌데, e-book 대여가 가능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단편집인데 구성이 특이합니다. 수록작 모두 화자도 다르고, 시점도 다르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모두 다르지만, 돈만 주면 뭐든 하는 해결사 미조구치-오카다 컴비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연작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성만 특이한게 아니라, 작품들도 독특한 발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백수가 된 오카다가 이제 인생의 남은 날은 모두 휴가, 바캉스다라는 의미의 제목부터가 그러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자! 보다 훨씬 와 닿는 멋진 제목이라 할 수 있어요. 작품 속에서 장 뤽 고다르의 "작은 병정"이라는 영화 속 대사라고 하는데 참 적절하게 잘 써 먹었다 싶더군요.

물론 수록작 중 "남은 날은 전부 휴가"와 "불길한 횡재"는 그 자체만으로 완성된 작품은 아닙니다. 설정에 대한 소개, 수록작들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 뿐이지요.

그래도 나름의 재미도 분명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봐야 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아빠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된 가족의 마지막 날, 아빠에게 친구가 되자는 전화 메시지가 날아왔고, 가족은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사람과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메시지를 보낸건 해결사 오카다였다. 상사 미조구치가 조직에서 발을 빼려면 전화 메시지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화자는 가족의 고교생 딸 사키로, 미조구치와 오카다 및 주요 설정에 대해 소개하는 도입부 격 작품입니다. 문제는 사키 가족과 드라이브와 식사를 즐긴 오카다가 조직을 배신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미조구치 씨 일당에게 끌려간 뒤, 세 가족만 차에 남는 결말이라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다는 거지요. 사실 여기서 다른 사건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사키 등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서 당황스럽더라고요.

가족이 친구가 되는 과정, 오카다의 여러모로 독특한 시각 등은 볼거리이지만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성가신 어른의 오지랖" 

미조구치와 오카다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유다이라는 가정 폭력 피해 아동을 알게 되었다. 아빠에게 폭행당하는 유다이를 구해주기 위해 오카다는 기묘한 작전을 구상하는데...

오카다가 자신이 협박하던 불륜남 곤도와 함께 유다이의 아빠 사카모토가 폭력에서 손 떼도록 만드는 귀여운 작전이 펼쳐지는 일상계 추리, 범죄, 사기극입니다.

사실 오카다의 작전은 유치합니다. 성인이 된 유다이가 미래에서 사카모토를 찾아와, 유다이 폭행을 그만두지 않으면 성인이 된 유다이 때문에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연극이 전부거든요.

그러나 이 연극을 위해 터미네이터, 타키온 입자 등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사카모토에게 주입시키는 과정, 그리고 문 닫은 슈퍼마켓을 엉망으로 만드는 다른 의뢰를 활용하고 유다이와 이미지가 비슷한 곤도에게 연기를 시키는 등의 디테일은 빼어납니다. 혹시라도 사카모토가 유다이를 죽일 수 있어서 미리 그에 대해서도 확실히 선을 긋는 등 계획도 나름 정교하고요.

덕분에 뻔하고 유치하더라도 설득력은 있는 편이에요. 유치하지만 맘 먹고 이렇게 속이겠다고 덤비면 저라도 혹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한 횡재"

'나'는 미조구치와 오타라는 남자들에게 납치당했다. 그들이 훔친 차로 이동하던 중, 다나카 중의원이 칼에 찔린 탓에 시작된 검문에 걸렸지만 미조구치는 훔친 차의 번호를 외워 말하는 노하우로 검문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트렁크에는 거액이 있었고, 차 번호도 잘못 외웠었다. 경찰은 왜 미조구치 일당을 놓아준걸까?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이에 대해 미조구치 등은 검문하던 경찰이 차에 돈을 숨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주고 몰래 숨겨둔 휴대폰 GPS로 위치를 추적하여 돈을 회수할 생각이었다고 추리하지요. 그러나 사실로 밝혀지는건 없습니다. 고작해야 돈이 든 가방 속 휴대폰 정도만이 근거가 될 뿐이고요.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보다는 낫지만 마찬가지로 완성된 이야기로 볼 수는 없어요.

결말도 석연치 않습니다. 미조구치와 오타가 GPS 추격을 피해 거액을 나누어 달아나는건 그렇다쳐도, '나'도 놓아준다는건 말이 안되거든요. 의뢰인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을거라는(죽었을테니) 그녀의 말만 듣고 놓아준다는건 프로로서는 있을 수 없을 일이잖아요. 최소한 보스인 부스지마의 허락은 받았어야 합니다. 

또 그녀의 납치는 다나카 중의원의 의뢰였고, 이유는 그녀가 불륜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나카 중의원 암살 계획의 일부로, 흉기를 은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실제 습격한 사람, 흉기를 숨기는 사람 등 여러 명이 역할 분담을 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아이디어만큼은 나쁘지 않았지만, 예전 "소년탐정 김전일" 등 다른 작품에서 접했던 내용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연작을 이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용 작품이라는 느낌입니다.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 

초등학교 4학년 생인 '나'는 해외에서 극비 임무를 수행 중인 아빠와 통화 중에 아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빠가 유미코 짱이 위험하다, 학교에 페인트 낙서가 되어 있지 않냐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아빠에게 말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미코 짱이 담임인 유미코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나'는 페인트 낙서를 한 오카다에게 이러한 내용을 물어보았고, 오카다는 유미코 선생님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말해주는데...

오카다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났던 사건을 그린 나름 본격 추리물입니다. 화자는 오카다의 친구 '나'이고요. 아빠가 '나'를 몰래 감시하는 것과, 유미코 선생님 스토커 이야기의 조합이 절묘하며, 이야기 앞 뒤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오카다가 페인트 낙서를 한 이유는 유미코 선생님의 욕이 적혀 있었기 때문, 아빠가 이 사실을 알았던 건 그날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던 등산이 취소되었기 때문인 등 앞선 기묘한 행동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게 설명됩니다. 참고로, 아빠는 불륜으로 이혼했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스파이라고 꾸몄던 겁니다. '나'를 보기 위해 쌍안경으로 몰래 관찰했고, 그래서 유미코 선생님 욕이 쓰여져 있는걸 알게 되었던 거지요. '나'를 관찰하던 아빠를 오카다와 '나'는 스토커로 착각했고요.
아빠가 주변 사물을 무기로 이용한다고 스파이인척을 할 때 했던 말을, 나중에 오카다가 위기에서 탈출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등 - 칼로 위협하던 스토커를 향해 거울로 햇볕을 반사시켜 눈을 부시게 만듬 - 복선 활용도 완벽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연작 단편집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었다는게 문제네요. 자체만으로도 완벽할 뿐더러 오카다 외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지도 않으니까요. 오히려 미조구치의 부하 오타가 영화감독이 된 '나'를 찾아가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는 에필로그가 사족처럼 추가된건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별점은 4점! 이 단편집 수록작 중 최고입니다.

"날아가면 8분, 걸어가면 10분"

오타 후임으로 미조구치의 파트너가 된 다카다는, 뒷 차를 고의적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가 사고를 당해 입원한 미조구치 문병을 갔다. 미조구치는 뒷 차를 협박하다가 뒷 트렁크에서 권총을 발견했고, 피해자가 달아나다가 여파로 다른 차에 치였었다. 조직의 보스 부스지마 빌라에 총격이 가해졌고, 뒷 차 운전수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게 된 조직은 미조구치와 다카다에게 용의자 색출을 지시하는데...

전 편이 본격 추리물이었다면, 이번 이야기는 본격물의 한 갈래인 암살물입니다. 화자는 미조구치의 새 파트너 다카다로, 부스지마를 암살하려고 하는건 미조구치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독립하려던 오카다가 처단당했다고 생각하고, 그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지요.

부스지마는 병원 별실에서 휴양 차 입원 중인데, 음식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부하가 받아 시식 후 전달하며, 방문자는 2~3명의 경호원으로 부터 몸 수색을 받는 철통의 보안에 놓여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미조구치가 이러한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부스지마를 습격하기 위한 작전이 상세하게 펼쳐지고요.

어설프지만, 한 번 정도는 먹힐 만한 작전이 상당히 볼거리입니다. 작전은 이전 뒷차 추돌 사고 때 부터 시작되었었습니다. 빌라 총격을 사주하여, 미조구치가 범인을 알고 있다고 조직이 생각하게 만든 뒤 미조구치는 다카다에게 미조구치와 친한 입원환자 '선생님'이 암살범이라고 생각하도록 함정을 팝니다. 협박장에 붙어있는 파슬리 스티커의 의미를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다카다의 조사로 파슬리의 꽃말 중 하나가 '죽음의 전조'라는게 밝혀지며, 이를 통해 협박과 꽃말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선생님' 병상에서 의사로 변장하기 위한 가운을 발견하며, 동기로 선생님'의 아들 부부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우연찮게 들려오고요. 그래서 다카다가 '선생님'을 암살범으로 오해한다는 건데, 읽으면서는 굉장히 작위적이라고 느껴졌었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싸 했을 것 같습니다. 앞 뒤가 척척 잘 맞아 떨어지니까요.
이를 통해 다른 경호원들이 '선생님'을 잡으러 떠난 사이, 부스지마 병실에 남아있게 된 미조구치는 음식 전용 엘리베이터로 권총을 반입하는데 성공하지요. 

마지막 작품 답게, 앞서의 이야기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음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알려주는 것도 좋았어요. 미조구치가 오카다를 찾아다녔던 것, 단 것을 좋아하는 미조구치가 자주 찾는 맛집 블로그, 부스지마 암살 계획에 여러명이 관련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 등은 모두 앞서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내용들인 덕분입니다. 미조구치의 작전에서 다카다가 '선생님'을 범인으로 착각하게 만든 수법 중 하나는 "성가신 어른의 오지랖"에서 오카다가 쓴 방법과 같고요. 누군가에게 그럴듯하게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무심결에 듣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2년 전 처음 만나기 전 부터 미조구치와 오카다가 알고 있었다는 설정은, 미조구치가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에 등장했던 애드벌룬 감시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만들어 재미를 더합니다. 그러고보니 "조만간 전화를 들고 다니는 시대가 올 거라고 하지만 그런건 꿈이지 현실감이 없다. 전화를 가지고 다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할 바에야 직접 만나러 가는게 낫다. 꿈을 꾸기보다 주위의 현실을 봐야 한다"는 애드벌룬 감시인의 장광설은 그 파격적인 발상과 강한 자기 주장이 미조구치와 꼭 닮아있기는 하지요.

결말도 흥미롭습니다. 죽기 직전 부스지마는 오카다가 살아있다며, 맛집 블로그인 '사키의 블로그' 운영자가 오카다라고 알려 주거든요. 미조구치는 다카다에게 블로그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라고 지시한 뒤, 3분 내 답이 오지 않으면 총으로 부스지마를 쏴 죽이겠다고 하는데 3분 뒤 다카다의 폰이 울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오카다일까요? 아니면 계속 날라오던 스펨 메일일까요? 열린 결말인데,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어요. 미조구치가 8분과 10분에 대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다던가 하는 독특한 발상과 묘사도 많은데, '단지 나는게 걷는거보다 낫다'가 아니라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남자가 하늘을 날아와서 '네가 좋아!'라고 말하는' 상상을 하다니 이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만 합니다.

마무리로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미조구치의 파트너가 오카다 - 오타 - 다카다로 바뀌는데 일부러 이름이 비슷한 사람을 채용한건지 궁금해집니다.

2020/09/18

마구의 역사 - 최정식 : 별점 2.5점

마구의 역사 - 6점
최정식 지음/브레인스토어

스포츠 서울 체육 기자 출신 저자가 쓴 프로 야구 투수들이 던지는 변화구에 대한 서적. 미국의 프로 야구 초창기부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책에서 '마구'로 소개된 공들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19세기 
언더핸드 체인지업 : 짐 크레이턴
커브 : 캔디 커밍스
20세기
라디오볼 (소리는 들려도 보이지 않는 패스트볼) : 월터 존슨 외
스핏볼 : 잭 체스브로, 에드 월시 외 
에머리볼 : 러셀 포드 외 
샤인볼 : 에디 시코트 외 
스크루볼 : 칼 허벨 외 
너클볼 : 호이트 윌헬름 외 
이퍼스 : 트루엣 슈얼 
슬라이더 : 스티브 칼턴 외 
스플리터 : 마이크 스콧 외 
컷 패스트볼 : 마리아노 리베라

이 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공에 대해 소개해드리자면, 스크루볼의 정체는 커브와 반대 방향으로 변화되는 변화구입니다. 우투수가 우타자에게 던지면 우타자 몸 쪽으로, 좌투수가 우타자에게 던지면 타자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식으로요. 그렇게 기묘한 변화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칼 허벨이 이 공으로 선풍을 일으킨 1930년대에는 던지는 투수가 많지 않았고, 허벨이 정통 커브도 잘 던져서 효과가 컸다고 합니다. 다저스의 영구 결번인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역시 스크루볼을 배우기 전에는 커브가 주 무기였다고 하네요. 스크루볼이 팔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는 칼 허벨의 말년 등으로 (팔이 비틀어졌다죠) 널리 알려져 왔지만, 이 책에 따르면 현재 의학적 연구 결과로는 스크루볼이 투수 팔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고요. 스크루볼이 사라진건 부상 우려가 아니라, 다양한 오프스피드 피치가 개발되었으며, 장타를 억제하는게 주요 목표가 된 탓이라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두산의 유희관 선수때문에 유명해진 초저속 고각도 변화구인 '이퍼스'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무려 1946년 올스타 전에서도 등장했을 정도로 유서깊은 공이며, 이름의 뜻이 히브리어 '에페스', 즉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 등은 모두 몰랐던 이야기였거든요.

슬라이더가 보다 빠른 변화구를 추구하는 흐름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지금은 슬라이더보다도 빠른 컷 패스트볼 (커터)이 많아진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겠죠. 패스트볼의 스피드가 점점 빨라지니, 변화구도 마찬가지로 점점 빨라지는 모양새인데 앞으로 얼마나 빠른 변화구가 등장할지 지켜보는 것도 큰 재미요소일거 같아요. 

스플리터의 원형인 포크볼이 무려 1905년에 처음 등장했다는 데에도 놀랐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포크볼과 스플리터의 차이도 설명해 주고 있는데, 결국은 같은 구질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스플리터는 스피드, 포크볼은 낙폭이 더 중요하다네요. 그렇다면 쿠니미 히로의 '고속 포크볼'은 진정한 마구인 셈이겠죠.

아울러 등장하는 구질 모두 당연히 야구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 개발되었으며, 따라서 대표하는 투수들도 모두 메이저리거입니다. 그러나 각 구질 소개 뒤에 일본과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 구질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브를 던진 투수는 1912년 '마구'를 던졌다는 유용탁이라고 설명합니다. 커브는 놀라운 공일 수 밖에 없어서 '마구'라 불렸을 거라는 해석인데, 실제로 일본에서 한때 커브를 마구라고 불렀다고 하니 꽤 그럴싸합니다. 

패스트볼은 사와무라 상으로 유명한 사와무라와 한국의 김양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와무라의 무용담이야 익히 알려져있지만, 1958년 메이저리그 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마운드에 오른 김양중이 명예의 전당 타자인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아냈다는 이야기는 처음 알았네요. 김성근 전 감독의 말에 따르면 김양중 선수의 구속은 140Km 초반이었을거라고 하는데, 좌투수인데다가 무브먼트가 좋았다니 당시에는 충분히 먹힐만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우리나라 초창기 야구 역사와 영웅들을 소개해주니 좋긴 좋네요. 

마지막으로 스크루볼은 저도 잘 알고 있는 김일융 선수가 삼성이 전, 후기 리그를 석권한 1985년 던졌는데, 이를 1984년 다저스 캠프가 있는 베로비치에서 동계 훈련을 하면서 배웠다니 재미있습니다. 이 공은 이후 김일융 선수가 일본 복귀해서 재기하는데도 기여했고요. 더 재미있는건 삼성이 베로비치 다저타운을 찾은건 이후 1992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1984년 삼성이 동계 훈련을 해외에서 진행하지 않았다면, 삼성의 전, 후기 통합 우승도 없지 않았을까라는 가정도 해 봄직 합니다.

이렇게 야구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를 가질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 유명 선수의 일화와 명승부도 소개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설명이 부실해진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야구 초창기인 앞 부분, 커브와 패스트볼, 스핏볼 등은 15~20페이지 정도를 할애하여 설명하며 일본과 한국에서의 역사도 덧붙인 반면, 이퍼스 이후는 각 구질마다 1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의 소개에 그칩니다. 일본과 한국에서의 역사는 소개되지도 않고요. 또 누구나 알고 있는 한국 야구 레전드와 그들의 변화구도 소개해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동원 선수의 커브, 선동렬 선수의 슬라이더처럼요. 

아울러 프로야구 초창기와 데드볼 시대에는 제구력이 중요했지만 라이브볼 시대로 넘어가면서 투수들이 살아남기 위해 변화구를 연마하는 흐름 속에서 어떤 변화구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알려주기는 하는데, 우연히 만들어졌거나 초기 발명 자체는 굉장히 오래된 구질이 많아서 전체적인 경향이나 흐름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점점 구속이 증가하면서 바뀌는 구질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당연하겠지만 각 구질별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 책에서의 설명보다 많은걸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책의 가치를 떨어트립니다. 인터넷에는 동영상도 많으니 자료로는 훨씬 좋지요. 이 책은 도판도 아예 없다시피한데, 책의 특성 상 공을 잡는 그립 정도는 최소한 소개해주었어야 했어요.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대로 처음 알게 된 내용도 많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초창기 한국 야구에 대한 이야기들은 자료적인 가치도 충분해 보이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야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9/13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6)

먹고 자는 마르타 1 - 4점
타카오 진구 지음/대원씨아이(만화)

포르투칼 대학원생 마르타는 석사 논문을 제출한 뒤에도 일본 도쿄가 너무 좋아서 떠나지 않고 머문다. 그러나 항상 가난뱅이 신세. 돈을 아끼기 위해 있는 재료를 최대한 아껴 쓰고, 비싼 재료는 어떻게든 비슷하게 만든다!는 극빈 유학생의 혼밥 + 궁상 먹방 이야기입니다.
최대한 절약해서 먹는게 핵심으로, 고향 어머니가 보내준 바캴라우 (염장하여 말린 대구)로 튀김을 만들어 먹는다던가, 100엔으로 생크림과 요구르트를 구입하여 사워크림을 만들고, 여기에 바칼라우를 미끼로 낚은 가재를 섞어 사워 크림 딥을 만드는 등의 에피소드가 펼쳐집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카레 가게에서 주문할 때의 팁이었어요. 고기를 뺀 카레를 주문하면, 그만큼 카레의 양이 늘어난다고 하네요. 여기에 공짜 락교를 가득 담아 먹는데, 정말 생각도 못한 방법이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자급자족에 가까운 내용이니만큼 레시피도 꽤 많은데,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가 헤밍웨이를 초대한 파티에서 선보였다는 칵테일 '빌린' 제조법은 눈길을 끕니다. 복숭아를 자르고 씨와 껍질을 제거한 뒤 어항(또는 비슷한 통)에 담고 브랜디 절반, 샴페인 절반을 채워 만드는 칵테일로 맛있을 수 밖에 없어 보이네요.

그러나 있는 재료로 아는 요리를 최대한 비슷하게, 그럴듯하게 만든다는 내용은 "격식 파괴 요리책 한그릇 더!"와 같습니다. 최대한 근검절약해서 아껴 먹는다는 내용은 "빈민의 식탁"이고요. 때문에 그다지 새롭거나 신선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게다가 현대 일본 도쿄에서 자급자족은 말도 안되니 여러모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요.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뒤로 가면 갈 수록 옆집 아가씨가 재료를 준다던가, 도우미로 일하는 그림 교실에서 칵테일을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갑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이래서야 취지에는 어긋나지요.
또 주 재료는 아껴서 산다 쳐도, 온갖 조미료와 도구가 갖추어져 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올리브유나 버터 정도는 포르투칼인이니 구입했다 쳐도, 간장과 미림까지 전부 갖추어 놓는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바닐라 에센스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되죠.... 아울러 포르투칼 아가씨 마르타가 귀엽기는 한데, 민폐에 가까운 궁상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후속권을 더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고화질] 삼국지의 밥상 01 - 4점
혼조 케이/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중화요리집 "누상촌"을 운영하는 삼국지 매니아 아타루와 그의 가족들이 가게를 방문한 신선 '좌자'의 영향으로 삼국지 속 요리를 현세에 재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원결의' 속 요리를 재현하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 (제민요술)를 찾은 뒤 새끼돼지를 통째로 튀길 수 없어서 돼지고기 덩어리를 사용하고, 천채를 우락으로 볶은 것은 말린 배추 등을 활용하여 재현한다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좋았습니다. 제 기대에도 부합했고요.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와 요리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일단, 삼국지 본편과 상관없는 요리가 너무 많은 탓입니다. 계륵 (닭갈비)로 만든 닭고기 수프는 삼국지에는 등장하지 않는 아타루의 오리지널이며, 유비가 칼과 바꿨던 낙양의 차는 중요 아이템이지만 마시는 장면이 삼국지에 등장하지는 않으니까요. 조비가 배와 포도로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배와 포도로 디저트를 만드는 등 삼국지에서는 그냥 소재, 재료만 따 온 것도 많습니다. 제갈량의 만두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래서야 제목과 취지에 걸맞는 이야기들로 보기는 힘듭니다.

또 좌자의 등장까지는 이야기 전개상 그렇다 쳐도, 그의 능력으로 삼국지 시대로 이동해서 당시 요리를 실제로 보고 온다! 는 설정, 그리고 심지어는 주인공 아타루가 실제로 전장으로 이동해서 요리를 만든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아타루가 삼국지 당시 재료와 도구로 최대한 현재의 맛을 재현한다는건 "노부나가의 셰프"와 다를 바도 없고요. 좌자의 말을 듣고 아타루와 가족들이 이런저런 고민 끝에 요리를 만드는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문제가 많습니다. 삼국지의 내용과 본 편의 이야기를 엮는 부분은 억지스러우며, 전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감정 과잉이 수시로 드러나는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때문에 별점은 2점.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이야기 전개와 소재들은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후속권 구입 계획은 없습니다.


전통의 시리즈도 이제 45권째네요. 이번 권에서도 언제나처럼 소소한 일상 속에서 소다츠의 술과 안주에 대한 개똥 철학(?)을 웃으며 즐길 수 있습니다. 꼬치 요리의 재료를 빼야 하는지 그냥 먹어야 하는지? 라던가 왜 이자카야는 월요일에 붐빌까?와 같은 주제에 대한 확고한 견해같은건 나름 그럴듯 했어요. 화이트 와인은 이탈리아, 레드 와인은 칠레 등 남미산이 좋다는 주장은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는 볼 만했고요.
무엇보다도 소다츠의 절친인 타케노마타가 약혼하고 약혼자를 소개해주는 에피소드는 놀라왔습니다. 소다츠와 카스미도 빨리 진전이 있어야 할텐데 말이지요. 은근하게 분위기만 깔고 가는게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에키벤 투어 관련 이야기나, 오사카 타코야키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보아왔던 소재라 별로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소재 고갈 탓도 있겠지만, 이런 기행문스러운 이야기는 한 권에 한 편 정도로만 수록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타코야키는 무려 3편에 걸쳐 소개할 내용과 분량도 아니었어요. 다카키 나오코의 작품 어딘가에서 소개되었던 분량 정도 만으로 충분했을겁니다. 그 외의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제는 재미보다는 팬심으로 읽는 작품이 되었네요. 그래도 소다츠의 개똥 (?) 철학은 언제나 재미있는 만큼, 다음 권은 그런 이야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상계 식도락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양이 맘마 - 6점
우오노메 산타 지음, 김진희 옮김/애니북스

다른 음식 만화로 접했었던 우오노메 산타의 작품입니다. 메이지 초기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갓 들어왔던 새로운 음식들과 당대 풍물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단지 메이지 시기를 무대로 한 음식 만화라면 특별할게 없겠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을 미식가 고양이로 하여 고양이 시점에서 묘사한다는 점이 차별화 요소입니다. 주인공인 이름없는 고양이가 소설가 메이지노 씨 집에서 함께 살면서 메이지노 선생님과 그 가족, 그리고 주변 식당 등에서 먹는 음식들을 소개하는데, 미식가라서 음식에 정통하고 심지어 반주를 즐기기까지 하거든요.

이야기들도 굉장히 짤막해서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훈훈하고 잔잔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어서 마음에 들 뿐 아니라, 모리 소바와 자루 소바의 차이를 알려 주는 등 새로운 내용도 제법 많아서 만족스러웠어요. 참고로 두 소바의 차이는 쓰유에 있답니다. 자루 소바는 처음 우러낸 육수로, 모리 소바는 두 번재로 우려낸 육수로 조리한거라 면 자체는 동일해서, 직원이 잘못 나르지 않도록 자루 소바 위에 김을 뿌린거라는군요. 그 외 중간중간 '메이지 시대 미식 탐방기'라는 짤막한 한 페이지짜리 5편의 컬럼도 볼거리입니다. 미식, 요리 뿐 아니라 꽃놀이까지 소개하는 등 이런저런 소개가 많습니다. 오노메 산타의 포근한 그림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9/12

괴담의 테이프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괴담의 테이프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미쓰다 신조)는 편집자 도키토 미나미로부터 녹음된 괴이담을 기초로 한 단편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녹음한 카세트나 MD는 많아도 대부분 써먹기 힘든 탓에 거절했지만, 도키토 미나미는 자기가 듣고 소재를 찾아보겠다며 카세트와 MD를 빌려갔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작품이 "빈 집을 지키던 밤"이었다. 

도키토는 후속 작품도 정기적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연작 단편 구성을 취하기 위해 실제 괴담을 겪은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고 쓴 글이라는 머릿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도키토는 녹취를 시작한 이후, 기묘한 걸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마시던 홍차 속 기묘한 반원형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나날이 바뀌어 결국 작은 사람의 모습이 되었고, 도키토는 이후 홍차 마시기를 그만두었다. 이외에도 샤워할 때 빗소리가 들리는 등의 괴이 현상이 그녀 옆에서 계속 일어나자 나는 그녀에게 녹취를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

작품 연재를 마무리한 나는, 도토키 미나미로 부터 회수한 MD와 카세트 중에서 예전에 듣다가 무서워진 나머지 꽁꽁 봉해놓고 처분했던 기류 마사히코의 카세트를 다시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카세트를 듣다가 그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괴기 현상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실제 사연들을 소설화 했다는 설정의 생활 괴담 단편들이 미쓰다 신조가 괴담 단편을 창작하는 과정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가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또 저자의 '작가 시리즈'와 유사하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처럼 쓰여진 덕분에 실제감, 현실감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작품은 논픽션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야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도 빼어나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쓰다 신조 장편이 두께 때문에 손대기 어려우셨던 분들이라면, 이 책으로 발을 들여놓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 

나 (미쓰다 신조)는 자살 명소에 대한 글을 의뢰하기 위해 프리랜서 작가 기류 요시히코를 만났다. "호러 재피니스크 총서" 기획 때문이었다. 기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테이프를 여러개 가지고 있다며, 그 테이프 녹취를 출간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3개월 뒤, 기류는 3개의 테이프를 듣고 기록한 샘플 원고를 보내 오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생함입니다. 특히 진짜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듯한, 생생한 테이프 녹취가 아주 일품이에요. 그 처절한 죽음의 순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섬찟합니다. 생생함은 미쓰다 신조 1인칭으로 쓰여지고, 미쓰다 신조의 과거 펀집자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낸 덕분이기도 합니다. "붉은 눈"에 수록되었던 1인칭 괴담과 같은 계열이지요.

또 3개의 괴담 테이프 녹취 중 앞의 2개는 호텔에서 목을 매거나, 자동차로 절벽을 향하는 등 일반적인 자살에 대한 단순한 녹취이지만, 마지막 녹취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류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고, 미쓰다 신조가 기류의 테이프를 잠시 틀어보고는 바로 봉인해 버리는 결말이지요.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은 듯 하지만 기류는 죽었고, 기류가 녹음한 테이프는 누군가 회수해서 미쓰다 신조에게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받은 사람이 듣기를 원했을테고요. 즉, "링"과 같은 일종의 저주, 죽음의 연쇄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로서의 얼개는 갖춰진 셈이지요. (*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이야기에서 어느정도는 비슷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입니다.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가 1인칭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생생함도 대단했고요. 무서워야 한다는 괴담의 조건도 아주 잘 충족하고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빈집을 지키던 밤"

마이코는 대학 문예부 선배 오다기리로부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젊은 부부가 백모와 함께 살고 있는 시골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부부가 집을 비운 동안 백모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아르바이트 내용이 소개되는 시작부터 흥미를 잡아 끕니다. 여대생이 선뜻 수락하기에는 너무 수상한 아르바이트잖아요? 역에서 저택까지 거리도 멀고, 인기척도 없는 곳에 홀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다니, 이래서야 바로 납치되어 이상한 비디오 주인공이 되는 전개도 어색하지 않죠. 당연히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마이코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겨우 탈출한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뻔한 설정과 전개임에도 여러가지 복선과 디테일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택에 대한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아치 장식 등을 통해 위화감과 뒤틀림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하여튼, 미쓰다 신조의 무서운 집 묘사는 정말이지 최고에요.
또 저택에서 느낀 위화감과 뒤틀림을 젊은 부부에게서도 느끼게 된다는 연계도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가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백모님을 숭배하고 있으며, 백모님은 낯선 사람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집을 지킬 때 백모님이 계신 3층에는 올라가지 말아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백모님은 이미 죽었으며 남편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아, 정말 섬찟합니다.

단순한 체험 괴담이 아니라 한 편의 완성된 소설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3층에 있던건 백모님이 아니라 젊은 남편 미쓰노부였으며, 그가 이전 아르바이트 생들을 살해했다는 명확한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말에 앞서 마이코는 팔 다리가 길었고, 저택 근처에서 양팔만 잘라 가슴께에 평행하게 올려놓은 기묘한 토막 살인 사체가 발견되었었고, 부부가 저택 안을 오갈 때에 복도 한 가운데로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등의 복선과 단서를 통해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앞서 위화감을 느꼈던 아치는 '도리이'이며, 도리이 아래 길은 신이 지나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백모의 방과 통해 있다, 사체의 토막은 도리이를 나타내고, 그래서 긴 다리를 지닌 피해자가 필요했다... 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니까요.

젊은 부부의 광기, 백모님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미쓰노부가 살인마라는 반전은 뻔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호러, 공포 소설로 나무랄데 없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우연히 모인 네 사람"

오쿠아먀 가쓰야는 가쿠 마사노부의 하이킹 계획에 동참했는데 정작 가쿠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쿠야마가 리더가 되어 하이킹을 이끌어 달라는 휴대전화의 부재 중 메시지 탓에 가쓰야는 모르는 세 사람과 하이킹을 떠나는데...

네가히산이 실존하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를 보는 듯한 상세한 묘사도 좋고, 가쿠씨가 오지 못한 이유로 불안이 쌓여가는 전개도 멋집니다. 가쿠씨가 보낸 메시지 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서서히 하나씩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하이킹을 일렬로 가야 하는 상황도 불안하고요. 그러다가 숨겨진 길로 발을 들이는건 그야말로 화룡정점입니다. 알 수 없이 무서운 공간에 대한 묘사도 좋지만, 길에 남아있는 발자국 오른쪽보다 왼 쪽이 더 먼저 찍힌것으로 보인다는 묘사가 아주 기가 막혔어요. 방 구석에 있는 사람을 차례로 터치하는 게임처럼, 가쿠가 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특급 열차에 네 명이 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의심을 품는 장면도 오싹합니다. 가쿠가 오지 못한다는건 미리 알지 못했다면, 표가 모자랐을테니까요!

하지만 괴이한 존재였던 이마이 쇼조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쿠는 어떻게 되었는지, 산에서 주은 계란돌은 무엇인지 등 수수께끼만 남긴채 이야기는 마무리되기에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생생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었습니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

'나'에게 중학교 동창 K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는 기묘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던 요양병동에서는 밤마다 희미한 비명 소리나 남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 이어 입원한 노인 로쿠바 히로는 K의 뒤에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거의 정신을 잃은 노인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이야기를 모아 놓았더니 무서운 이야기였더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습니다. 로쿠바 히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는 그야말로 엄청나고요.

로쿠바 히로 노인의 이야기를 설명드리자면,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다른 가족들이 다치거나 상황이 어려워 부의금을 가지고 상가에 혼자 방문하게 된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소년은 출발 전 할머니와 함께 한 곳쿠리님에서 '시체와 함께 자지 마라'는 계시를 받죠. 그러나 기차에서 소년은 이상한 노인을 만나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서 잠을 깨고,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의 부고를 받는다... 는 루프물입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운 요소는 없어요. '나'를 통해서 노인의 괴이한 행동은 노인이 젊은 아이의 몸을 빼앗는 과정이라 설명되는데 이 역시도 뻔한 설정입니다. 또 이야기만 놓고 보면 K에게 시카바네 히로(로쿠바 히로)가 뒤집어 씌여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쿠바 히로가 한 말 중 '휴대'와 '뉴루우스'라는 말 뜻을 몰라 궁금해 하는 장면이 있어서 충격적인 진상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도 전혀 없어서 실망스러웠고요.

흥미로운 설정이었고, 전개도 대단했지만 결과물은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아쉽습니다.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내었더라면 분명 걸작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

잡지의 편집자인 '나'는 점성술사 취재를 하다가, 그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냐는 질문에 절대로 답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답을 알려준 적이 있다는 점성술사에게 '나'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단 사토루와 '기우메' 이야기로 답해 주었다.

기우메는 사토루 자취방에서 학교 통학로에서 목격된,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과 레인코트, 장화, 우천용 모자를 노란색으로 전부 갖춰입은 여자였다. 사토루는 어느 날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선배의 조언으로 기우메를 무시했다. 그리고 여름 방학, 점성술사는 사토루와 헤어져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며 편지로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사토루의 마지막 편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기우메가 수로에 휩쓸려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사토루의 자취방을 찾아간 점성술사는 빈 방에서 쓰다만 편지를 읽었다. 사토루가 기우메의 시체를 발견하기까지 했지만, 계속 기우메를 통학로에서 목격했는데 그녀가 볼 때마다 점점 자취방으로 다가왔으며 마지막에는 폭우와 함께 문을 두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토루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초반에 비중있게 설명되는 '나'가 과거 고교 시절 겪었던 기묘한 유령 체험은 본 편인 기우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점성술사의 기우메 이야기도 그녀가 왜 죽을 날을 손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지와 크게 관련이 없고요. 괜히 이야기만 두서없이 전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기우메 이야기는 충분히 무섭기는 했습니다. 괴이한 무언가를 눈치챈 후 '그것'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온다는걸 알게되는 이야기는 몇 편 읽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말이지요.

실화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

도쿄에서 직장에 다니며 혼자 사는 유나는 어느날 집을 나서다가 문 앞에 꽃이 꽂혀 있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져 있는걸 발견했다. 그 뒤 유나는 출근길에서 검은 이상한 형체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형체는 출근길을 거슬러 점점 유나의 집으로 다가왔고, 유나는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검은 형체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었던게 아닌가 싶어 공포에 떨었다.

드디어 어느 월요일 아침, 유나의 집 앞에 검은 형체가 도착해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도움을 요청한 친구 히나타가 도착하자 이상한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후 히나타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 기우메와 비슷하게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대한 괴담입니다. 마지막 유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 히나타에게 무언가 씌워진다는 결말은 상당히 오싹합니다. 이전 작품과 유사하기는 한데, 정확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애매한 공포라서 실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차별화 요소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왜 유나의 집 앞에 그것이 다가오는지, 대체 그건 무엇인지 등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기는 합니다. 유나의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건널목 근처 사고 현장에 놓여진 공양물이었고,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이를 가져다 유나의 집 앞에 놓았기 때문에 원령이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식의 추리가 살짝 등장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작은 유리병과 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유나의 집 앞에 놓여 있는지도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기승전결은 있고, 오싹한 맛도 괜찮았습니다.

2020/09/10

별걸 다 기억하는 - 한지은 : 별점 2점

별걸 다 기억하는 - 4점
한지은 지음/보통의나날

저자가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회고 형식으로 짤막하게 정리한 에세이집입니다.

저자의 옛 집, 옛 동네에 얽힌 추억은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그 시절 인기있었던 여러가지 컨텐츠나 소재들, 그리고 보편 타당했던 문화와 풍물에 대한 회고들은 저 역시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브이"는 첫 방영 당시 정말 사람들을 늘었다 놨다 했었지요. "WWF"도 마찬가지고요. 당시 토요일 오후 AFKN에서 WWF를 볼 수 있었는데,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경기를 TV로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대한민국 시간표"에서 새마을 노래, 국기 하강식, 9시 잠자리를 안내하는 TV의 '착한 어린이' 멘트에 대한 회고도 반가왔어요. 그간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었으니까요. 여기에 '애국가'와 방송 종료 시그널도 더하면 제 어린 시절 시간표가 완성될 겁니다.

제가 아예 몰랐지만, 저자의 소개로 새롭게 알게된 것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호러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전설적 명작 '덕대골'편 소개입니다. 남편의 병을 고치려는 한 부인이 지나가던 스님으로부터 "덕대골에 가서 죽은 지 사흘이 안 된 남자의 다리를 잘라 푹 고아 먹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덕대골을 찾아가 시체 다리를 잘랐는데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내 다리 내놔!" 하며 외다리로 쫓아 왔다죠. 결국 집에가지 도망친 뒤 다리를 팔팔 끓는 물에 집어 넣었더니 시체가 쓰러지고 그 물을 먹은 남편의 병은 씻은 듯 나았으며, 시체를 찾아보니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 모양 산삼이 있었답니다. 별로 무서운 이야기는 아닌 듯 한데, 실제로 어떤 작품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쌍쌍바, 더브러, 나무젓가락, 아폴로 등으로 하는 "우정 테스트"도 처음 들어보았고요. 이런게 있었던가...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제 기대와는 너무 다른 책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문화와 풍물을 잘 알 수 있도록 상세한 소개와 함께 분석과 도판이 어우러진 책이라 생각하고 구입했거든요. 이렇게 단순히 저자의 어린 시절 경험을 다룬 이야기들만 있을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저자의 고향, 옛 동네 이야기를 제외하면 제 어린 시절들 추억과도 별 차이 없는 비슷한 이야기 뿐입니다. "연고전" 이야기에서 저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상민, 우지원이 연고전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0년대 중, 후반생일거에요. 또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고 연고전을 보러 갔다니 서울 살았던게 분명하고요. (최소 경기권) 그렇다면 저와 거의 동시기에, 비슷한 지역에서 별다를게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을걸로 추측됩니다. 저로서는 구태여 남의 글로 읽을 필요가 없는 추억들인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기대와는 달랐을 뿐더러 앞서의 이유로 제가 구태여 찾아 읽어야 할 글은 아니었습니다. 돈 주고 사서 읽기 보다는, 인터넷 블로그나 페이스 북 등에서 가끔 찾아보고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가 딱 좋아 보이네요.

2020/09/06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 정대식 : 별점 1.5점

죽음과 모래시계 - 4점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작은 산유국 제리미스탄은 고갈되는 석유 자원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감옥 국가"로 거듭났다. 거대한 사형수용 감옥을 만들고, 세계 각지의 사형수들을 돈을 받고 수감한 뒤 사형까지 집행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형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흉악 범죄와 무기수의 종신 수용을 위한 비용 증가에 고심하던 각 국은 사형수 한 명당 수만 달러의 비용으로 제레미스탄 "종말 감옥"에 처분을 맡겼다. 

이 "종말 감옥"에 부모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앨런 이시다가 수감되었고, 그는 사형수로 감방장을 맡고 있는 슐츠의 조수가 되어 감옥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2016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지만, 본격물의 애호가로서 놓치기 힘든 수상 이력이라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형수를 수감하는 "종말 감옥"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감옥의 운영, 죄수의 관리 및 감독 방식 - 죄수 몸 속에 삽입되어 죄수가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마이크로 칩 - 등을 꽤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들을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작 수만불로 흉악한 사형수를 받아들인다는게 말은 안되지만, 이 정도는 눈 감아 줘야겠지요. 안그러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거의 모두가 설득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망작들인 탓입니다. 그나마 처음의 두 편,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과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정도만 조금 볼만한 트릭이 나올 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다운 본격물도 별로 없고요. 읽어보신 분들이 대부분 칭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도 저는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평균 별점은 1점 이하 수준이지만, 종말 감옥의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었기에 0.5점을 더합니다. 강호순 같은 범죄자는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네요.

짤막하게 요약한 수록 단편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 담겨있으니 참고하세요.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맨 몸에서 칼이나 만년필을 끄집어내는 물질화 마술로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샤보는 사형 집행 전날 독방에서 난도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맞은편 독방의 용병 출신 사형수 난조는 목이 베여 죽었다. 완벽한 밀실이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데다가, 사형 집행 전날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샤보는 전쟁 때 손상된 엉덩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장착한 넙다리 인공골두 안이 텅 비어 있있지요.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다는게 물질화 마술의 정체입니다. 피부에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서 빼낸거지요. 때문에 물질화 마술로 꺼낼 수 있는건 가늘고 긴 물건들(만년필)로 한정되고요. 샤보는 이 트릭으로 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어 던져 난조를 죽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쟁 때 용병 난조에게 가족을 잃었는데, 그 복수를 직접 하기 위함이었지요. 난죠를 죽인 뒤 칼(에 묶어둔 실 따위로)을 회수하여 자신의 몸을 난자한 뒤 실혈사했습니다. 난자한 이유는 마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를 다 흘리기 전에 칼을 다시 숨길 수 있고, 상처가 많으면 칼을 꺼내는 구멍의 존재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물질화 마술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대담한 트릭은 볼 만 하지만 트릭이 그렇게 설득력 높아보이지 않으며, 자살한 뒤 칼을 다시 숨길 이유가 없다는건 눈에 거슬립니다. 마술의 트릭을 밝히지 않는게 마술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난자한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구태여 사형 집행 전날 난조를 죽인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그나마 이게 이 단편집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종말 감옥에서 탈옥한 사람은 딱 한명, 의사 출신의 반체제 정치범 첸 웨이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마이크로 칩을 무력화하였을까? 그리고 왜 훤한 보름달이 뜬 밤 탈옥을 하였을까? 왜 가장 건장한 경비원 다르위시가 감시탑에서 근무할 때 탈옥을 하였을까? 다르위시는 어떻게 죽였을까?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사리흐 아리 파힐은 슐츠에게 사건 해결을 명하는데...

감옥이 나오니 탈옥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겠지요. 두 번째 작품이 바로 탈옥물입니다.

첸 웨이츠가 의사 출신으로 중국인 죄수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마이크로 칩이 어디있는지 알아냈다는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100Kg이 넘는 다르위시가 경비하는 날을 노린 이유도 그럴듯해요. 다르위시의 목에 가죽 밴드를 엮은 끈을 걸어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버팀돌 삼아 감시탑을 올라간게 진상이니까요.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체중이 제일 무거운 경비원이 필요했던 겁니다. 보름달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다르위시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트릭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모두 설명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의무실의 허술한 보안으로 메스 한 두개, 죄수 구속용 밴드 여러개를 빼돌려 탈옥에 이용했다는 것부터가 그러하지요. 사형수들이 많은 감방에서 메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3미터 위의 감시원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고정된 목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경비원이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올가미를 보고 피하지 않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밝은 보름달 밤이라 죄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거에 비하면 담을 넘은 뒤 야생 낙타를 올가미로 잡아 사막을 가로질렀다는 탈출 방법은 오히려 쉬워보이네요. 이렇게 거대하면서 대단한 감옥 도시가 CCTV없이 감시원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며, 감시원도 2인 1조가 아니라 1명만 근무를 선다는 등의 허술함에 바탕을 둔 탈옥이라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영웅 첸 웨이츠가 탈옥 후 현실의 벽에 부딛힌 나머지 3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진짜 사형수가 되어 종말 감옥에 복귀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안 나오니만 못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추리 퀴즈 이상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종말 감옥을 감찰하기 위해 찾아온 감찰관이 배를 칼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감찰에 걸려 좌천될 예정이었단 옥졸 무바라크였다.

악덕 옥졸 무바라크의 혐의가 짙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중 최악의 빌런이 용의자라면, 없던 죄도 만들어 누명을 씌울 판인데 그를 위해 진상을 밝힌다? 영 와닿지 않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슐츠와 앨런 입장에서는, 감찰관이 자살했건 살해당했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진상을 밝힐 이유도 없고요. 감찰관이 자살하면서 악덕 옥졸인 무바라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진상도 별로입니다. 업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감찰관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를 그의 삭발과 구토 흔적으로 추리해내는 부분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많이 줘 봤자 1.5점입니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티벳 출신 사형수로 제리미니스탄 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불가한 죄수 라쿠파 걀포는 홀로 사형 집행된 죄수의 묘를 파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가 사체를 다시 파헤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조사를 통해 최근에 묻힌 사형수 사체의 일부가 훼손되어 사라진건 사실로 확인되었다. 슐츠는 고심한 끝에 이를 숨기지만, 사형수 로드리고 소토홀의 시체가 완전히 훼손된게 밝혀지자 걀포 역시 곧바로 사형 집행을 받게 되는데...

소토홀과 걀포가 친구였으며, 티벳인 걀포는 소토홀을 위해 최고의 장례인 '조장鳥'을 치뤄주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앞서 시체를 훼손했던건 그 고기(?)로 독수리를 모으기 위해서였고요. 이 정도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네요. 애초에 수천명의 사형수의 묘지를 감옥 내에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본국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증거도 걀포가 티벳인이라는게 전부입니다.

소토홀이 언어 천재였다는 복선으로 그가 걀포와 친구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감방과 분리된 여감방의 죄수 한 명이 임신했다게 알려지고, 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여감방 의사 라일라는 추리력으로 유명한 슐츠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슐츠는 이야기만 듣고 사건 조사를 앨런에게 위임했고, 앨런은 직접 여감방에 방문해서 임신했다는 여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죄수는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리아였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교도소 안에서 임신을 할 리 없지요. 그냥 앨런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앨런을 좋아했었고, 정말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레즈비언 관계였던 여의사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유와 동기, 결말 모두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앨런이 여죄수 감방에 방문한다는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슐츠와 앨런에게 사건 의뢰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거짓말의 뒷 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이미 임신 3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 시점에 앨런의 정자로 마리아를 임신시키면 주차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이 정도면 나무한테 미안한 수준이에요. 별점은 0점입니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앨런 이시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4일. 그 동안 앨런은 독방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부모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앨런 부모가 죽은 사건에 대한 앨런의 회고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나마 부모 사건의 도화선이 된 친아버지가 보낸 편지 - 자신이 TS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걸 밝히는 -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아버지가 슐츠라는걸 알아내는 과정만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슐츠는 생화학 병기를 연구하던 테러리스트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앨런의 어머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테러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 뒤, 종말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메일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건 감옥이었기 때문으로, 앨런은 종말 감옥의 편지지 등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걸 확신합니다. 예상대로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파힐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으로, 홀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이런 집행인 상대라면 인간 흉기급 사형수라면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발악이라도 해 보는게 당연하고요.
파힐이 앨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몰래 잠입한 슐츠가 파힐을 협박하여 통행증을 받아 앨런에게 건네주고 탈옥시킨 뒤, 파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감옥 경비의 허술함, 파힐의 무능함이 합쳐진 결과인데 이 정도라면 진작에 사단이 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또 파힐이 전 세계 부호들에게 사형 순간을 생중계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않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것 하나만 위안이 되는 졸작. 별점은 0.5점입니다.

"에필로그" 

슐츠는 파힐의 시체를 숨긴 뒤 바이러스 발작이 일어남을 느낀다. 그는 갓난아기 앨런에게 TS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균자로 만든 과거를 떠올리며 죽어간다...

읽어본 사람들 모두가 인상적이라 칭했던 반전이 등장하는 마무리입니다.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테러를 꿈꾸던 슐츠가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TS 바이러스를 흩뿌린다는 결말로, 앞서 망작이었던 5, 6편 이야기는 모두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 두 편이 왜 망작이었는지는 살짝 이해가 됩니다. 반전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뒷통수를 쎄게 후려치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그렇게 빼어난 반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앨런이 보균자였다면 투옥되기 이전 생활에서부터 착실히 주변인들에게 감염을 이어왔을겁니다. 앨런의 탈옥이 무슨 계기라도 된 것처럼 부풀릴 필요는 없어요. 잠복기 수십년인 바이러스의 발작이 때마침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다는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이런 류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나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9/05

가족의 탄생 - 도진기 : 별점 2.5점

가족의 탄생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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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먹고 사는 김진구에게 여자친구 혜미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다. 얼마 전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일식 요리사 이교준의 의뢰였다. 그는 아내의 사고에 두 처형이 관련되어 있다며, 갓난 자신의 딸 아름이 100억대인 장인의 유산을 독식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구는 젊은 새어머니의 유산까지 아름의 것으로 해 줄것을 약조하며, 이교준 명의의 3억짜리 집을 담보로 잡았다.

그러나 두 처형도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며 이교준을 의심한 나머지, 이런 류의 범죄에 해박하다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고용하고, 김진구와 고진의 두뇌 게임이 시작되는데...

눈에 뜨일 때 마다 집어들고 읽게 되는 도진기 작가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해결사 김진구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함께 등장한다는게 특징이고요. 그러나 공동 주연 작품은 아닙니다. 각자의 의뢰인이 적대하는 관계라서,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괴도 키드' 라기 보다는 '소년 탐정 김전일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에 좀 더 가까운 셈이지요.
이 중 주인공은 김진구입니다. 고진은 남고운, 남문영 자매로 부터 받은 '제부의 유산 상속을 막아달라' 라는 의뢰만 해결하고 빠지는 반면, 나머지 사건과 유산 상속 정리는 김진구가 해결해버리고, 작 중 비중도 두 배 가량 될 정도로 높으니까요.

그래도 남유정 사망 사건 해결은 나름 둘이 함께 힘을 합치기는 합니다. 이 사건에서 유산 상속 문제가 비롯된건 물론, 추리적으로 작품의 핵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처음에는 단순 교통 사고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교준이 동승하여 남유정이 운전하던 미니가 김순옥의 모하비와 추돌했고, 조수석에 탔던 이교준은 생명을 건졌지만 남유정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탓에 사망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사건은 이교준이 일으킨 살인 사건으로, 진구의 말에 따르면 '3중 방어막'이 쳐진 교묘한 계획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어막은 원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인 혐의를 찾아보기 힘든, 단순 교통사고로 보이도록 꾸민 겁니다. 그러나 이교준이 김순옥과 불륜 관계라는게 밝혀져 첫 번째 방어막은 뚫리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두 번째 방어막은 '고의적인 충돌 사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불륜을 목격한 남유정이 과속하여 추격하다가 모하비에 추돌하여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는 주장이에요.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남유정이 고의적으로 추돌하게 만들었다는건 증명할 수 없어서 단순 사고로 처리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그러나 남유정의 목에 교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살인이라는게 밝혀진 뒤 마지막 방어막인 '정황의 방어막'이 등장합니다. 이교준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김순옥의 모하비에 타고 있어서 범행을 저지르는게 불가능했다는게 정황입니다. 하지만 진구는 남유정 목의 교살 흔적은 왼손잡이의 흔적인데, 가족 중 왼손잡이는 이교준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CCTV에 찍힌 모하비는 추돌 부위가 이미 부숴져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모하비와의 추돌은 조작된 것이고,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을 목 졸라 죽인 뒤, 자기 무릎에 시체를 앉히고 전봇대에 추돌하여 사고를 위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3중 방어막이라는 말만 그럴듯하지, 그다지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실제 자동차 추돌 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점, 사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점, 꽤 장기간 불륜 관계였던 김순옥과 이교준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점 등 사고 발생 시 수사에 나섰던 경찰의 무능이 확실한 탓입니다. 진구의 말 대로 조금만 파고들면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결합된 수상한 사건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소한 명확한 사인은 검증했어야 합니다.

추리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고진과 진구가 사고 전 CCTV를 입수하여 이를 단서로 이교준의 공작을 증명하는게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니가 한 쪽으로 쏠린걸 과학 수사까지 이용하여 검증한 디테일은 좋지만, 이게 이교준의 범행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문제는 큽니다. 진구가 이교준이 범인이라며 쏘아붙이는 것들 - 범인은 남유정을 목졸라 죽이고는 미니에 싣고 달리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살인자는 왼손잡이인데 가족 중 이교준만 왼손잡이다. 미니는 남유정 남편인 이교준의 불륜녀가 운전하는 모하비와 부딪혀 사고가 난다, 그 모하비는 CCTV를 통해 보니 사고 전에 이미 충돌 부위가 부서져 있었다 등등등 - 은 모두 정황 증거 뿐이에요. 왼손잡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증거도 아니고요. 제 생각에 이교준이 유죄 판결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추리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유산 상속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법조인 출신 작가라 그런지, 현행법에 기초하여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덕입니다. 고진과 진구의 활약도 대단하고요.

우선 고진이 의뢰에 따라 이교준의 친권을 박탈하여 아름이 몫의 상속분을 빼앗습니다. 이교준의 딸 아름이가 사실은 남유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불륜녀 김순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는걸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아름이의 친부임을 주장한 남유정의 불륜남 원경호 소동에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증거를 확보한 거지요.
또 진구와의 조사 결과 공유를 통해,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 사망 후 남유정 - 원경호의 딸인 진짜 아름이를 자신과 김순옥 사이의 딸로 바꿔치고, 아름이를 입양 기관에 보냈다는 걸 알아냅니다. 아내가 죽은 뒤, 가사 도우미를 해고해서 아름이가 바뀐걸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장님이고, 다른 친척들은 아름이에게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이는 진구가 이교준의 집을 방문하는 제일 첫 장면에서, 부부의 사진은 있지만 아이 사진이 없는 복선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친부가 아니더라도, 아름이는 부부 사이의 딸이므로 이교준이 친권자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자기 친딸과 바꿔치기하고 입양 기관에 보낸 사람에게는 친권 자격이 있을리가 없으니 친권 상실 청구를 하면 이교준은 아름이 몫을 못 받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유정 몫의 대습 상속은 유지되는데, 이 역시도 진구가 남유정을 살해한건 이교준이라는걸 밝혀내어 상속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앞선 순위나 동순위 상속인을 살해하면 상속권을 잃는 법 때문입니다. 결국 이교준은 빈털터리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의 전개인데, 그 뒤 다른 상속인들 모두의 상속권이 날아가버리는 전개는 예상치 못했네요. 새어머니 유재연이 낙태를 한게 발단입니다. 그녀는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갖지만 이런저런 부담감으로 낙태를 선택합니다. 이 낙태에 그녀를 미워하던 두 의붓딸 남고운, 남문영 자매가 진구의 권유로 모처럼 동행했고요. 그러나 유재연이 가진 아이가 남현호 할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법률상으로는 엄연히 부부간의 아이이고 적법한 상속인입니다. 즉, 상속인을 살해한건 마찬가지라 그녀도 상속권을 잃고, 낙태에 동행했던 두 딸도 낙태를 도운 공범으로 상속 자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즉, 남유정의 딸 아름이가 유일한 상속인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낙태가 상속을 막는다는건 정말이지 처음 접해보았는데, 완전 대박이네요.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작가라 쓸 수 있던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의뢰대로 상속을 막은 진구가 의뢰인 이교준에게 당신이 살인범이라는걸 밝혀낸건 의뢰와 관계 없었으니 보수를 챙기겠다며 쿨하게 마무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어요. 가족이 모두 파멸하는 결말인데, 워낙 많은 분량에 걸쳐 비호감을 끌어온터라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 자신만의 가족을 꿈꾸었던 이교준, 그리고 가족이지만 각자 자기 생각만 했던 남씨 일가족이 무너진다는건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러나 이 유산 상속 과정가 전부 잘 짜여져 있는건 아닙니다. 콩가루 집안이 모두 몰락한다는건 지나치게 전형적인데다가, 남고운, 남문영 자매는 악인도 아니기에 결말이 썩 개운하지 않거든요. 막내 동생을 제부가 죽였다고 의심하여 제부에게 유산이 가는걸 막으려고 노력하는데,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으니 그녀들은 잘못한게 없습니다. 오히려 새어머니 유재연의 낙태를 도와준건 순전한 선의였기에,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악당 김진구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김진구가 작중에서 벌인 활약과 행동은 모두 이교준의 범행을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이교준의 의뢰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건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유재연의 임신과 낙태, 그리고 진구의 권유를 받은 남씨 자매가 낙태 수술에 동행했기 때문으로, 진구의 활약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걸 보면 그다지 정교하게 잘 짜인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부부가 모두 불륜을 저질러 같은 시기에 혼외자를 낳는다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고, 우연과 작위적인 설정이 많이 결합된 전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낙태를 통해 기존 알고 있던 유산 상속의 상식을 깨 버린 아이디어 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 한데,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진짜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서두와 에필로그에 "정신자살"의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다음 작품과 연결시키는 구성을 갖추고 있는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구스미 마사유키 / 최윤영 : 별점 2점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4점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인디고(글담)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의 음식 관련 에세이집입니다. 모두 26가지 요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10페이지 안되는 짤막한 분량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글에서 약간은 장난스럽고, 소탈해보이는 작가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덕분에 읽기는 편했어요. 있어보이고 젠체하지 않으니까요. 친근한 동네 형, 동네 아저씨 느낌이거든요. 등장하는 요리들도 모두 친근한 것들 뿐이며, 싸구려 정크 푸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집에서 해 먹음직한 간단한 요리 소개가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양이 맘마'에 날달걀을 올린 '야옹이불알', 오징어 젓갈을 밥에 얹고 그 위에 뜨거운 호지차를 부어 먹는 '젓갈 오차즈케', 살짝 데친 양배추 물기를 제거한 뒤 명란젓을 말아먹는 '양배추 말이' 등은 간단하면서 맛도 좋아 보였거든요. 작가가 먹었던 가장 맛있는 양배추 요리인, 뼈째 고아 만든 토종닭 수프에 십자로 칼집을 넣은 양배추를 통째로 넣어 소금만으로 간해 한 시간 정도 푹 끓인 뒤, 솥에 지어 살짝 눌어붙은 누룽지밥에 끼얹어 먹는 수프밥 소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누룽지 백숙에 양배추도 넣어 국물을 낸 셈인데,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레시피나 실제 맛있어 보이는 새로운 음식에 대한 소개는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과 소신에 대한 것들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거진 다 어딘가에서 접했본 느낌이 강했다는게 문제입니다. 한 가운데에서부터 먹기 시작한다는 돈가스 먹는 방법 등은 "음식의 군사"의 돈가스 에피스도와 비슷하며, 대부분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소다츠의 개인 취향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탓입니다. 이야기 별로 마지막에 추가되어 있는 4컷 만화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친근해서 쉽게 읽히고 허허, 이 사람은 이런걸 이렇게 생각하는군! 하는 재미는 있는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었습니다. 딱히 추천드릴만한 책은 아닙니다.

2020/09/01

익명의 전화 - 야쿠마루 가쿠 / 최재호 : 별점 1.5점

익명의 전화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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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담당도 아니었던 아라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누명을 쓰고 경찰에서 쫓겨난 아사쿠라는 그 뒤 가족과도 등을 돌렸다. 그러나 딸 아즈사가 유괴당한 뒤, 유괴범을 홀로 잡으려다가 유괴범들의 목적이 3년 전 사건의 진실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 몰입감을 주는 전개로 다수의 인기 작품을 발표한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도입부만큼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3년 전, 마약에 취해 사고를 일으켜 유치원생을 포함한 7명을 사망케 한 아라이 사건의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라이 사건을 몰래 수사하다가 경찰 조직에 의해 인생을 망친 경찰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 경찰을 만나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 떳떳해지자고 설득하는게 순서일겁니다. 그런데 대뜸 유괴부터 한다? 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유괴범들이 나오미와 아사쿠라가 몸값을 들고 뺑뺑이 돌게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몸값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요구하면 되니까요. 경찰인 치하루가 유괴범 중 한 명이었으니, 뺑뺑이를 통해 경찰 신고 여부를 파악할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이 과정에서 아사쿠라가 유괴범으로 몰리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겨서 조사만 불편해지고,1억이라는 돈을 낭비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1억은 마약상에게 준거라 동정의 여지도 없고요. 

뺑뺑이 과정도 복잡하게 서술하여 치밀해 보이지만 나오미가 범인이 준, 거는게 불가능한 핸드폰을 가지고 범인에게 휘둘리는 장면에서 메모를 적어 역무원이나 건물 경비원에게 줄 생각은 왜 못했는지 등의 단점만 눈에 띕니다. 유괴극이니 반드시 몸값 전달하는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등장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아사쿠라가 이미 남과 같은 자신에게 처음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내 나오미가 경찰에 신고하려는걸 막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건 마찬가지에요.

이후 아사쿠라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은 더 가관입니다. 현직 경찰 시절에 몇일에 걸쳐 조사해도 밝혀내지 못했던 진상을,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신세로 하룻밤만에 알아낸다? 설득력이 없습니다. 사기꾼 범죄자 키시타니의 도움이 있기는 하지만, 현역 경찰 신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수사력과는 비교하기 어렵지요.
조사 방법도 스스로를 미끼로 내걸어 경찰의 움직임을 떠 본다던가, 급작스럽게 카라키를 불러낸 뒤 먼 곳에서 쌍안경 관찰로 의중을 파악한다던가, 일부러 아라이의 공범이었던 이와키가 속한 조직에게 잡혀간다는 식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계획과는 무관한 즉흥적인 발상 투성이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도 맞으면서 버티는 '몸빵' 밖에는 없고요.

진상을 알아낸 것도 아라이의 공범인 전직 경찰 이와키를 찾아내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인데,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사고는 도주하던 아라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일어났으며, 아라이는 유력 정치인 니시자와를 협박하던 범인이었기 때문이라는게 겁니다. 니시자와는 매춘부 아케미와 마약을 하다가 아케미가 죽게되자 아는 경찰을 통해 사건을 무마시키켰는데, 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던 거지요. 그래서 니시자와와 연결되었던 경찰이 무리해서 협박범을 잡으려다가 사고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니시자와의 관계 여부를 떠나서 일곱 명이나 죽은, 그것도 희생자 중에 어린 유치원생이 포함된 사건을 덮는다는게 21세기에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총소리를 들은 증인이 분명히 있었고, 당시 수사를 하던 아사쿠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게다가 생존한 유치원 버스 운전사 미카미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 이 정도면 거의 국가에서 움직여 조작한 수준입니다. 주택가에서 차량 추격 중 총질을 한다는 헐리우드 영화스러운 발상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또 이 진상은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어색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서던 카라키가 나오미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대화는 다 녹음되었고, 카라키가 아사쿠라를 협박하는 영상까지 찍혀 완벽하게 외통수에 몰리게 되기는 하지만 , 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사고를 덮었는데 고작 이 정도 사건을 덮지 못한다는건 설득력이 약한 탓입니다. 아사쿠라가 이와키로부터 확보한 증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최소한 니시자와와 아케미가 함께 마약을 하고 정사를 나누던 비디오 테이프는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지문이 묻은 마약 봉투와 영수증 따위는 증거가 될 수 없어요. 봉투와 영수증의 지문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증거로서의 효력은 없습니다.
설령 증거가 된다고 한 들, 니시자와가 마약을 했다는 증거이지 그가 아케미 사건, 그리고 아라이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섰던 장인 마사타카가 아사쿠라의 호소에 개심해서 자수한다는 끝맺음은 최악 중 최악이고요.

그 외에도, 유괴 수사를 벌이는 와중에 유괴 아동의 어머니인 나오미가 태연하게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전개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괴와 상관없는 제3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토다의 존재도 불필요했습니다. 나오미가 아사쿠라의 진심을 알게되는 계기가 된 증언을 한 게 전부니까요. 이는 치하루가 해도 되는 역할입니다. 토다의 과거도 뻔하디 뻔하고요. 단순한 분량 늘리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와 설득력, 현실성 등 뭐 하나 갖추지 못하고 흔해빠진 설정들로만 이루어진 졸작입니다. 찾아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