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2/03/27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 강동혁 : 별점 3점

프로젝트 헤일메리 - 6점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의 에너지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페트로바선이 에너지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는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가 대량증식하여 이산화탄소를 찾아 금성으로 향하며 에너지를 내뿜는게 페트로바선의 정체였다. 아스트로파지의 증식과 감염으로 모든 항성들이 10% 정도의 에너지를 잃었지만 타우세티만 건재하다는걸 알아낸 페트로바 대책위원회는,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우주선 헤일메리를 건조했다.

'나'는 기억을 잃고 나는 기억을 잃고 우주선 안에서 홀로 깨어났다. 동료 두 명은 수면 여행 중 사망한 상태였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은 '나'는, 내가 지구의 운명을 걸고 타우세티로 향한 헤일메리호의 유일한 생존자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타우세티에서, 같은 목적으로 이 별을 찾아온 외계인 '로키'를 만나게 되는데...


<<마션>>의 원작자가 쓴 장편 SF 소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용감한 전문직 종사자가 목숨을 건다는 내용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일단 <<아마게돈>>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날아오는 운석을 파괴하는 수준이 아니라요. 태양 에너지를 빼앗고, 이산화탄소를 향해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증식하는 아스트로파지의 생태에 대한 상세한 설정이 특히 돋보였습니다.
뒤 이은,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위해 전 지구의 의지를 모으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했습니다.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아스트로파지에 대해 연구하여 그 생태의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일종의 반물질 에너지원같은 아스트로파지를 우주선 연료로 쓰려고 계획하여 여러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이를 만들어가는 모습 모두 적절한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굉장한 설득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전혀 개념은 다르지만, 엄청난 효율의 에너지원이기도 한 아스트로파지는 '시즈마 드라이브'가 연상되더군요.

타우세티에 도착한 후, '항성 40 에리다니'에서 온 외계인 로키와 만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고, 목숨을 건 모험 끝에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타우메바'를 채집하는 장면도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왔습니다. 탄탄한 과학적 배경을 바탕에 둔 건 물론이고요. 아스트로파지의 천적 타우메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진화' 관련 담론이 인상적이었어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화한 로키와 그레이스가 어떻게 같은 주파수 소리를 듣는지에서 시작해서, "왜 같은 속도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는데 답이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의 가설은 각자 행성을 확실히 지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능을 갖춘 뒤 진화를 멈췄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중력'이고요. 중력이 높아지면 땅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나므로, 움직임이 더 빨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과학자 역할의 그레이스, 그리고 뭐든지 만들어내는 엔지니어 로키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는 팀 구성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서로의 언어를 습득하고 진짜 친구가 된 뒤, 그레이스가 죽을걸 알면서도 로키를 구해주러 가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가고 있어 친구. 기다려"는 정말 명대사였어요.

전편에 흐르고 있는 유머도 남다릅니다. 프로젝트의 어원부터가 미식축구 등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을 노리고 시도하는 성공률이 매우 낮은 작전을 일컫고, 그레이스도 자기 부정 등이 포함된 기묘한 유머 감각으로 상황을 그려낼 뿐더러, 상황 자체가 유머스럽게 그려진게 많거든요. 목숨을 건 임무를 거부했던 그레이스를 속여서 강제로 우주선에 태웠던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총책임자 에바의 행동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한데 솔직히 너무 웃겼습니다.

그러나 편의적인 전개가 너무 많기는 합니다. 그레이스와 로키가 만나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아이큐가 80이 넘는다는 돌고래와는 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건지 설명이 안됩니다. 설령 가능했다 한 들, 만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스트로파지를 없애는 방법을 함께 찾을 정도로 서로의 언어에 숙달하게 되었다는건 억지입니다. 외계인이 언어 체계를 제외하면, 사고 방식 등이 모두 인류와 유사하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편의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타우메바의 진화가 쉽게 이루어지는 등 비교적 해결책이 쉽게 도출된다던가, 진화한 타우메바가 제노나이트를 뚫고나와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위기에서 타우메바의 유일한 천적(?)인 질소를 우주 비행사 중 한 명이었던 두보이스가 자살용으로 헤일메리에 실어놓았었다는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과학적인 설명도 가득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까지 있어서 무척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별점 3점은 충분하지요. 베스트셀러 작가는 확실히 다르네요.

2022/03/26

사진관 살인 사건 - KBS 일요 베스트 (1999)

 

사진관 주인이 야구방망이에 맞아 죽은 사건 수사를 맡은 김형사는 피해자의 아내 지경희에 대해 파고든 끝에, 사진관을 자주 찾는 사진작가 정명식의 존재를 알아냈다. 지경희는 정명식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어왔다고 말했지만, 김형사의 심문에 정명식은 정반대로 그녀가 먼저 유혹했다고 말하는데....

김영하의 동명 단편을 원작으로 한 KBS 일요베스트 단막극. 마츠모토 세이초의 옛 드라마를 유튜브로 찾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KBS에서 공식적으로 업로드해 놓았더군요.

처음에는 추리 단막극이라고 생각했었고, 전개도 생각대로 흘러가나 싶었는데 진범은 따로 있었다는 결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지경희와 정명식이 진짜 불륜 관계였고, 살의가 있었던건 확실하다는 약간의 반전은 괜찮았지만, 이 결말 때문에 추리물이나 범죄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작은 예산으로, 몇 명의 등장 인물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며, 몰입할 수 있도록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여기에 더해 아내와 관계가 소원한 김형사가 지경희에게 호감을 품고, 아내는 종교에 깊이 빠져있다는 묘사로 '피의자, 형사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솜씨가 괜찮았어요. 그냥 돌직구로 적나라하게 모든걸 보여주는 최근 영상물에 비하면 낡은 느낌이지만, 저 역시 나이가 드니 이런게 더 마음에 들더군요.

90년대 작품으로 사운드가 많이 뭉개져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찾아보아도 괜찮은 단막극이었다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3/25

신성한 관계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1.5점

신성한 관계 - 4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트릭 켄지와 안젤라 제나로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거부 프레드 스톤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둘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실종된 딸 데지레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켄지의 사수이기도 했던 최고 탐정 제이 베커마저도 데지레를 찾다가 실종된 상태였다.
알고보니 데지레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200만 달러를 횡령한 관계자 제프 프라이스와 도망쳤고, 베커는 그녀를 찾아낸 뒤 사랑에 빠져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데지레를 살해한 뒤 베커는 프라이스를 죽였다. 베터는 둘에게 데지레를 죽이라고 의뢰했던건 트레버 스톤이라며, 복수를 위해 출발했지만 스톤 부하의 공격으로 죽고 말았다.
겨우 경찰에게서 풀려난 켄지와 제나로의 앞에 데지레가 나타나 도움을 요청하는데....


직전작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데니스 루헤인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후속작. 이전 작에서의 충격으로 켄지와 제나로는 탐정 사무소 문을 닫고, 상실감을 달래고 있던 중이라는 설정이지요.

수사 과정 초기에 불거지는, 슬픔 치유사와 연계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사기 행각은 꽤나 볼만했습니다. '고해 성사'를 협박과 사기를 위해 써먹는게 효과가 큰건 당연할테니까요. 단순 협박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은행 비밀번호와 같은 개인 정보까지 수집한 뒤 이를 교단 내 국세청 직원 등의 전문가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장악한다는건 90년대 초반 발표된 작품 치고는 꽤나 앞서가는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설정을 잘 써먹지는 못했습니다. 슬픔 치유사들에게서 정보를 빼낸 방법도 강도짓과 부바 등 친구들을 동원해 완력을 써서 캐내는게 전부였고요. 이 뒤는 트레버 스톤이 사실 데지레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알고보니 데지레가 먼저 트레버 스톤을 불구로 만든 사고를 사주했다는 것 등이 밝혀지며 트레버 스톤과 데지레 스톤, 두 악마가 서로 죽이려는 대결로 바뀌고 맙니다.
데지레가 비련의 천사가 아니라 주위 남자들을 모두 홀린 뒤 써먹다가 죽게 만드는 악녀라는 반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억지스러웠어요. 주변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자신의 이익을 단지 몸 하나를 팔아서 얻어내는데, 남자들이 아무리 섹스에 미친 바보들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유치한 발상이었습니다.

전개도 억지스럽고 납득하기 어려운 점 투성입니다. 모든 것의 발단인 데지레 실종부터 그러합니다. 그녀는 왜 사라졌을까요? 트레버 스톤이 사고를 사주한게 그녀라는걸 알아냈기 때문에? 그런 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이 베커의 입을 통해 그녀를 죽이는게 트레버 스톤의 의뢰라는걸 밝히기는 하지만, 이 때만해도 그녀가 악당 흑막이라는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애초에 제이 베커에게 이렇게 의뢰했다면,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이유가 불분명하고요.
제이 베커의 죽음도 이상합니다. 그는 데지레의 복수를 한다며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려다 트레버 스톤 부하의 공격을 받고 죽게 되지요. 그러나 데지레가 죽었다면 트레버 스톤의 부하들은 제이 베커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제이 베커의 의도 (복수)를 알아챘다면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 그걸 알 수 있었던 방법도 없었습니다. 또 베커가 어떤 길로 가는지 알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단순하게 자동차로 밀어버려 죽이려 했다는 것도 너무 어설펐어요. 프로답지도 않았고요.
반대로 데지레가 죽지 않았다는걸 알아챘다면, 제이 베커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어야 했습니다. 데지레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니 사로잡아 행적을 캐내는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차로 들이받아 죽이려 한다는건 영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이는 작가가 화끈한 액션 장면을 넣고 싶어서 삽입한 장면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켄지가 데지레의 정체를 알게된 건, 데지레가 제이 베커에게서 들었다며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페일세이프'는 오래전부터 켄지와 제이 사이에 있었던 암호였습니다. 누군가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하면서 나타나면 무조건 적이니 박살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즉, 제이 베커는 데지레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말하지 않고, 사랑했던 그녀를 잃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다가 죽는다는건 영 앞 뒤가 맞지 않아요. 트레버 스톤이 그녀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정작 죽인건 그 시점에서는 아무 관계없던 프라이스였으니 복수의 대상도 잘못된게 아닌가 싶네요.
'페일세이프'를 통해 데지레의 정체를 알아낸 뒤, 켄지와 제나로는 그녀의 뒷통수를 칠 계획을 짜지만 정작 잘 써먹지도 못하고 데지레에게 사로잡혀 위기에 빠진다는 전개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땅에 파묻었던 제나로가 자력으로 탈출해 스톤 부녀를 응징한다는 결말도 너무 대충 수습한 느낌이었고요.

이런 앞뒤 안맞는 급작스럽고 자극적인 전개는 오래전 신문 연재 소설이나 싸구려 펄프 픽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 무리수를 막 던진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도를 넘는 폭력과 비도덕적인 가족 관계 정도만이 하드보일드스러운 느낌을 전해줄 뿐이며, 추리적으로도 건질건 거의 없었으니까요. 가짜 신분으로 수감된 제이 베커를 찾아가 그가 말한 기묘한 말을 듣고 진상을 풀어내는 정도만 그런대로 탐정스러웠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작가가 자극적인 소재를 끝까지 건드리고 전개 역시 흥미본위로 채워놓은, 노골적으로 흥행을 노린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전형적인 성인용 헐리우드 액션 범죄물로, 차라리 영화였더라면 더 볼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리즈 팬에게는 켄지와 제나로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점, 그리고 <<라쇼몽>>을 언급한다던가, 막스형제의 고전 영화 <<선상 대소동>>을 즐겨 본다던가, <<페일세이프>>를 결정적 단서로 쓰는 등 영화광 켄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부바의 활약이 미미하지만 여전하다는 아주 약간의 즐길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22/03/20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 요리후지 분페이 / 서하나 : 별점 2.5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 6점
요리후지 분페이.기무라 슌스케 지음, 서하나 옮김/안그라픽스

오래 전에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고 글을 남겼었고, 몇 권의 책을 읽기도 했던 일본의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의 에세이. 디자이너로서 디자이너라는 업과 디자인이라는 일에 관련된 여러가지 생각과 가치관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현업 디자이너로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중 특히 요리후지 분페이의 대학시절 은사가 한 말은 디자이너로서 새겨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디자인은 감성적이지 않고 과학적이다". 즉 감각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것은 아무런 가치없는 자기만족일 뿐이며, 무언가를 만든다면 왜 그걸 하는지를 언어로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가 전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했던 전공투 세대였기 때문에 그랬을거라는 부연 설명이 살짝 덧붙여져 있지만, 세대를 떠나 맞는 말입니다. 최소한 왜 만드는지는 생각하고 만들어야하는건 당연합니다. 단지 예뻐서, 멋져 보여서가 아니라요. 요리후지 분페이도 가슴 속 깊이 새겼는지, 이 책을 통해서 자기가 만든 다양한 작업물에 대해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작업도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다양한 요소를 모듈화하여, 이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일러스트를 만들고 그 모듈 킷의 사용료를 받는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조합 가능한 일러스트라는 아이디어는 흔합니다. 제 대학 졸업작품도 비슷했었지요. 시기상으로 따져보면 거의 동시기라 뭔가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겨 상용화했다는건 아주 참신했어요. 제 아이디어는 머리, 몸, 다른 유닛을 조합하여 무궁한 몬스터를 만들어낸다는, 비교적 작은 범위의 딱히 효용성 없는 결과물이라 상업화에 성공한 요리후지 분페이의 작업물과 비교하기도 어렵고요.
짤막하게 스쳐지나가는 2020년 도쿄 올림픽 엠블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도쿄는 물의 도시이고, 스포츠에서 땀은 빼 놓을 수 없고, 재생이 중요한 시대 환경을 감안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 엠블렘을 색깔만 파란색으로 바꾸어 재활용하는게 어떨까? 라는 건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디자인에 부가되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설명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중요해져 버린 시대 비판을 위해 든 예였지만, 2021년 올림픽 엠블렘으로 사용되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가 풀어놓는 본인의 경력들도 흥미로왔습니다. 디자인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실력만 가지고는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경제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여 피터 드러커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일화에서는 확실히 남다른 부분이 느껴졌고요. 저도 30대에 한 3~4년 정도 디자인 에이전시 사무실을 운영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의 요리후지 분페이보다도 나이가 많았음에도 이런 발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놀기 바빴었지요. 심지어 기껏 읽은 피터 드러커 관련 책은 이거 하나밖에 없고요. 많이 반성이 됩니다.
당시 읽었던 다른 책을 통해 '참신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면, 그 아이디어만으로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자세를 본받아, 그렇게 일하려 노력했다는 것도 대단해 보였고, 본인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자기의 디자인론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노하우를 참고할 만한, 프로 현업 디자이너로서의 조언들도 제법 됩니다. 그 중 아이디어를 형태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별로 특이한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막히면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라는 등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슬럼프가 왔을 때는 방법이 없으니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면서 슬럼프를 벗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건 괜찮은 조언이었어요. 홈런보다는 번트라도 대라는 건데, 젊은 디자이너들에게는 굉장히 유용할 조언이었다 생각됩니다.
여러 관련 부서, 담당자와 소통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라는 조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뒤에, 너무 자세하게 적으면 상대방이 생각을 하지 않게 되니 문제라고 바로 자기 말을 뒤집기는 하는데, 자세히 설명해서 나쁠건 없지요. 저도 한 때 디자이너에 대한 선민의식이 있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요리후지 분페이 말에 동의하는게 하나 있습니다. 전문가에게 맡기면서 정작 인쇄 감리처럼 현장에 가서 지켜보는건 확실히 이상해요. 당연히 믿고 맡겨야지요.
그림은 생각이 20%, 작업이 80%인데 디자인은 반대라는 이론도 좀 특이했고, 북 디자인은 관심이 많은 영역이 아니라서 기억에 많이 남지는 않지만 디자이너의 재능이라는 부분은 상당부분 알고리즘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의견도 굉장히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작가가 이 책을 왜 썼는지를 언어화해 두고, 이 책과 어떻게 만나고 싶은지를 상상한다는건 다른 디자인 작업에도 써 먹음직한 내용이었어요. 이는 '경험 디자인'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되네요. 잘 팔리는 책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큰 제목' 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디자이너를 본 적이 없다던가, 서로간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는 '인사하기' 라던가, 디자인을 포함해 어떤 것을 창조하는 일은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커다란 불안을 원동력으로 한다는 등의 경험이 뒷받침된 말들도 염두에 둘 만 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건 아닙니다. 내용에 두서가 없을 뿐더러, 유명 디자이너가 썼고, 본인 디자인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도판이 지극히 부실하다는 큰 문제가 있는 탓입니다. 컬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소개된 작품에 대해서는 도판을 모두 수록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원소생활>>이라는 책을 만들 때 이야기를 꽤 길게 이어가는데, 정작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그 결과물은 함께 소개되지 않는 식입니다. 북 디자인이 책 표지만 있는건 아닌데, 표지만 잔뜩 도판으로 수록한 것도 문제이며 북 디자이너로서의 생각을 잔뜩 풀어놓지만 이 책의 디자인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용에서 설득력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이 책 디자인처럼 저자와의 간극이 느껴지는 결과물은 그 외에도 제법 많습니다. 픽토그램 활용한 디자인이 대표적이에요. 솔직히 좋은지 잘 모르겠더군요. 다리 사이의 구멍이 왜 그렇게 큰 완성도를 가져다 주는지 저는 알 수 없었거든요. 본인 스스로 픽토그램은 수도 없이 손 봤다면서, 그 다음에 바로 광고 카피 문구 자간에는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하는 맥락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후배 디자이너로서 경외감을 가지고 읽을 만한 부분도 없지 않고요. 그러나 단점도 확실하고, 취향도 많이 탈 것 같아 선뜻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2/03/19

기억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3.5점

 

기억의 의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이전에 <<액자>>를 읽고 꼭 구입하기로 했던 사물들의 미술사 두 번째 책. 제목대로 의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자는 제품 디자인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재라서, 의자 디자인에 대해 다룬 책은 저도 그동안 많이 읽어 왔습니다. (이런 책이런 책이런 책이런 책 등등등). 그러나 이 책은 역사 속 의미있는 의자에 대해 다룬 미술사 책이라기보다는, 특정 의자를 주제로 하여 그 의자가 있었을 때의 사회상을 조망하는 문화사에 가까운 책입니다. 의자의 디자인은 상세하게 소개되지만, 의자가 주인공은 아니에요.
책에서 의자와 함께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섯 개입니다. 첫 번째는 중세 시대입니다. 대성당의 의자 스탈의 안장을 접으면 나오는 미제리코드 조각으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해줍니다. 두 번째는 루이 14세의 옥좌에서 시작해서 '위대한 은공예품'과 당시 아유타와 왕국 사절단 이야기 등으로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17세기 후반 프랑스에 대해 알려주고요. 세 번째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 형식 의자 '타부레'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따로 있었다는, 이른바 '타부레' 권한을 통해 부르봉 왕조 시기 프랑스의 귀족 서열과 예법들을 상세하고 알기쉽게 설명해 줍니다. 네 번째는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의 주문으로 만드는 루이 들라누아의 의자 제작 과정으로 18세기 가구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마지막은 전통적인 가구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대량 생산으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18세기 후반의 토머스 치펀데일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잘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많았고, 재미도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요. 우선 '미제리코드'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았네요. 엄격한 종교 기반의 사회였지만, 대성당 안 의자 속 미제리코드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각이 가능했다는 것도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갑니다. 도판도 풍부해서 자유분방했던 당시 목수의 솜씨도 충분히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루이 14세 옥좌에서 시작되지만, 이는 '은'이라는 소재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위대한 은제품과 왕의 권위 과시가 반드시 필요했던 시대를 다루기 위해서였지요. '위대한 은' 세공품들이 지금도 남아있더라면 아주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이런저런 도판과 기록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알게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타부레'는 당시 왕실 서열과 예법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왕의 친척인 친왕들조차 함부로 의자에 앉지도 못했던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의 베르사이유 궁전 모습이 아주 재미있더군요. 이를 둘러싸고 왕의 정부와 왕의 제수씨의 기싸움 등 세세한 볼거리가 가득했던 덕분입니다. 당시를 다루었던 수많은 컨텐츠들에서 미처 접하지 못했던 디테일이기도 했고요. 저자도 당시 그림에서 이 예법을 지키지 않은 등장인물을 알려주고 있는데, 저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찾아보면서 고증을 되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 왕권의 대명사같은 루이 14세와는 사뭇 달랐던 루이 16세 시대에는 14세 때 만큼이나 엄격하지는 않았겠지만요.
네 번째 이야기는 폴란드 왕이 루이 들라누와에게 의자를 주문하는 과정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압권입니다. 의자 디자인을 어떻게 고르는지와 같은 고객 입장에서의 디테일은 물론, 장인이 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여러가지 비용들, 장인간 협력 관계 등 장인 입장에서의 정보들도 살뜰히 챙겨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모든게 실제 사료 기반이라는 것도 대단하고요.
마지막 치펀데일 이야기는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설명의 핵심은 치펀데일의 카탈로그였고요. 고객들은 조립식 가구 처럼 카탈로그를 보며 다양한 조합을 고를 수 있었고, 치펀데일도 유행하는 스타일을 모두 갖춰 제공했다는데 정말 시대를 앞서갔던 마케팅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책에서 말해준 대로 18세기의 이케아였던 거지요.

이렇게 새롭고, 재미난 내용이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미제리코드 부분은 관련 사진 설명 뿐이라 좀 지루했습니다. 종교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지만, 그걸 입증할 근거도 애매했어요. 그렇게까지 도발적인 풍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요.
'의자' 보다는 관련된 역사, 문화적 배경을 고찰한다는 책 컨셉도 마음에 들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의자는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약간 아쉬웠던 점이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는 의자를 억지로 엮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책의 판형입니다. 작은 판형은 저자의 의도였다고는 합니다. 들고 다니기 편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요. 그러나 도판이 너무 작게 들어가서 식별이 어렵다는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그림 속에 있는 의자를 설명하는 도판들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해당 부분만 확대해 주거나, 접이식으로 크게 삽입했어야 했습니다. 나름 비싼 책이고, 도판 수준도 우수한데 이런 세세한 고려가 뒷받침 되지 않은건 너무 아쉽네요.

그래도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문화사,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3/18

완전살인 - 크리스토퍼 부시 / 남정현 : 별점 2점

완전살인 - 4점
크리스토퍼 부시 지음, 남정현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런던의 주요 신문사와 경시청에 '마리우스'라고 자칭한 인물이 '완전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 속에 마리우스가 지정한 날짜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부유한 독신 노인 토머스 리치레이였다. 토머스 리치레이가 결혼을 앞둔 탓에,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할 위기에 빠진 조카들이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네 명 모두 알리바이가 완벽했었다.
줄랑고 회사 사장인 프랜시스 웨스튼 경은 회사의 새로운 중핵이 될 비밀 탐정부를 키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완전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회사의 두뇌 역할을 맡고 있는 수재 루드빅 트레버스와 전 형사부장 존 프랭클린을 투입하는데...


크리스토퍼 부시가 1929년에 발표했던 고전. <<고전 추리, 범죄 소설 100선>>에서 추천하였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추리 소설의 초창기 황금기 발표작다운 면모를 과시합니다. 추천받을만한 요소가 몇 가지 보이더군요.
첫 번째는 트릭을 추리해내기 위한 단서 제공이 공정하다는 점입니다. 범인 프랭크 리치레이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 트릭은 변장한 대역을 내세웠던 겁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단서 모두는 작품 맨 앞 프롤로그 부분에서 제공됩니다. 대역이었던 플래이스가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영화배우 진 앨런의 대역을 찾는 오디션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 단서였거든요. 플래이스의 편지에서 사용되었던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암호 트릭도 인상적이었고요.
두 번째는 다양한 용의자를 드러내고,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계속 등장시켜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전개입니다. '마리우스'가 보낸 편지에서 시작해서, 범행이 일어나기 전 피해자 토머스 리치레이를 방문했던건 누구인지? 토머스 리치레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협박장을 쓴 T.W.리처드는 누구인지? 등이 그러합니다.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수수께끼가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야말로 고전 본격 황금기 작품의 기본은 해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두뇌 역할의 부르주아 루드빅 트레버스와 발로 뛰는 유능한 수사관 존 프랭클린의 컴비 탐정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두 명이 컴비로 등장할 경우, 보통 한 명은 평범한 일반인 시각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명 모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꽤 신선했습니다. 이들이 사건에 뛰어든게 '회사 선전'을 위해서였다는 것도 굉장히 현대적인 동기였고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만한 고전 명작이냐고 물으신다면, 제 답은 '아니오'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 된, 유통기한이 지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의 '완전 살인'을 예고한 마리우스의 편지입니다. 괜히 경찰의 주목을 끌 이유는 없는데, 프랭크 리치레이가 왜 이런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범행을 널리 알려야 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의 시선이 분산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왕 살인을 저지르니, 사회적인 반향도 불러 일으켜보자고 여겼던걸까요? 하지만 프랭크는 자신의 완전 살인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불쌍한 대역 배우 플래이스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만 잔혹한 범죄자입니다. 이런 사명감같은걸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또 이 때문에 여론이 크게 움직였다는 묘사도 딱히 없고, 경찰도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은 등, 한 마디로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핵심 알리바이 트릭이 단지 변장이었다는 것도 다소 맥빠지는 요소였습니다. 또 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찰리 채플린 급의 유명 배우 대역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이 탓에 루드빅 트레버스의 주목을 끌고 말았지요. 프랭크가 자기와 꼭 닮은 누군가 - 플래이스 - 를 발견한 뒤 범행 계획을 꾸몄다는데 더 설득력 높았을 겁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프랭크 리치레이를 몰아세운 뒤, 그가 자멸하는걸 노렸던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의 작전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플래이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프랭크의 알리바이가 조작되었다는걸 증명할 수 없었기에 플래이스가 프랭크에게 살해당했다는 거라도 증명했어야 했는데, 시체조차 찾지 못했으니 이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프랭크가 둘에게 추궁당한 직후 곧바로 범인임을 자백할 이유역시 마땅치 않았습니다. 프랭크 본인 말대로 시한부였다면 더더욱요. 어차피 오래 못 살텐데, 뭐하러 범행을 인정한단 말입니까? 도주 후 시체로 발견되는 과정도 쉽게 흘러간 느낌이라 별로였고요.
차라리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의 선량했던 프랭크를 물에 빠트려 죽인 뒤, 범인임을 자백했다며 죄를 뒤집어 씌우는게 더 현실적인 전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번역의 질이 심하게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 출간 버젼이라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번역은 정말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앞서 괜찮았다는 암호 트릭이 사용된 편지는 나쁜 번역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지요. 번역 때문에라도 도저히 권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인건 분명한데,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기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작가와 작품이 잊혀진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이런 류의, 명성은 약간 남아있지만 지금은 그 생명을 고해버린 작품은 이젠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22/03/13

모돌이 탐정 1~4 세트 - 전4권 - 이우정 : 별점 2점

모돌이 탐정 1~4 세트 - 전4권 - 4점
이우정 지음/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우정 화백의 고전 추리 만화. 드디어 복간되었네요. 그야말로 전설의 작품으로 저는 어린 시절 <<소년 중앙>> 독자로 이 작품이 연재될 때 실시간으로 일부 에피소드를 감상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감개 무량하네요.
전 4권 세트로 모돌이 탐정의 시작을 알리는 탄생편, <<쥐덫>>을 각색한 <<잊혀진 산장>>, 추리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스케일의 첩보물이자 범죄물인 <<홍콩 대탈출>>, 바닷 속 보물을 찾는 <<보물 찾기>>, 그리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던 장미가 주인공 탐정으로 등장하는 스핀오프 <<여탐정 장미>>까지 모두 5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크리스티 여사님의 <<쥐덫>>을 70년대 후반 한국을 무대로 각색한 <<잊혀진 산장>>은 제법 읽을만한 추리물입니다. 6.25 때 있었던 비참한 과거가 동기가 되었다는 각색도 좋았지만, 진범이 사라졌던 오빠가 아니라 '북괴'의 일원이었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어요. 시대 상황을 볼 때 충분히 있음직한 이야기였으니까요. 모돌이의 활약도 인상적이었고요. 세세한 부분을 들면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당시 아동 눈높이에는 잘 맞춰진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보물 찾기>>에서 보물이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였다는 발상도 꽤 그럴듯했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장미 탐정>>은 괜찮은 암호 트릭도 눈여겨 볼 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핀 오프' 작품이라는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발상이었어요.

하지만 일부만 아슬아슬하게 합격권일 뿐이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추리 만화로서의 완성도는 그 수준이 지극히 낮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추리와 계획 모두 유치한 탓입니다. 특수 도료를 사진으로 찍으면, 현상한 사진이 특수 도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발상, 뱀을 피리로 조종하여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트릭이 난무하니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몇 개의 암호 트릭 정도는 괜찮았지만 남발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캐릭터 설정도 문제에요. 모돌이 탐정은 작품 전체에 걸쳐 슬랩스틱에 가까운 개그만 하고, 추리는 모두 조수인 표표와 박돌이에게 시키는 악덕 고용주로 그려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모든게 자신의 계획이었다는 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뭔가 싶더군요. <<우뢰매>>로 따지면, 앞 부분의 모돌이는 바보 형래이고 뒷 부분은 에스퍼맨으로 등장하는 셈인데 <<우뢰매>> 만큼의 설득력도 없습니다. 에스퍼맨은 변신이라도 했다지만 모돌이는 그런것도 없으니까요. 개그와 추리,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운과 우연에 많이 의지하는 전개도 감점 요소였고, 시대를 여실히 느끼게 하는 작화도 가독성을 크게 저해했습니다. 일관성도 없어요. <<장미 탐정>> 에피소드는 다른 사람이 그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이런 단점은 작품이 발표된 시기와 연재된 매체를 고려해보면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무려 50년이 지났으니 어쩌겠습니까. 모르고 구입한 것도 아니고요.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추억을 다시금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걸 기뻐해야 하는게 맞겠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다른 분들께 권해드리지는 못하겠네요. 추억 외에 다른 가치는 거의 없다시피 하거든요. 4만원이라는 정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2022/03/12

부자연스러운 죽음 -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블루프린트 : 별점 3점

부자연스러운 죽음 - 6점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블루프린트

<<아래 리뷰에는 동기, 진범 등을 밝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사를 하던 피터 경과 파커 경위는 한 의사로부터 흥미로운 사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3년 전, 부유했던 도슨 부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의사의 주장으로 부검도 진행되었었다. 사망 원인이 불명확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도슨 부인의 유산을 물려받을 메리 위태커 양을 모함했다며 의사를 따돌렸고, 결국 그는 병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의 냄새를 맡은 피터 경은 노처녀 클림슨 양을 투입했다. 그녀는 사건이 벌어졌던 햄프셔 주 리햄튼 시에 방을 구한 뒤, 이런저런 정보들을 수집하여 알려주었다. 이를 통해 피터 경은 사건 직전에 해고되었다는 도슨 부인의 하녀 고우트베드 자매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여겼고, 그녀들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지만 자매 중 동생인 버사 고우트베드가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현장에서 발견한 단서들과 관련되어 있던 포레스트 부인에게서도 별다른 혐의를 찾아낼 수 없었고, 위태커 양은 절친 핀들레이터 양을 통해 버사 고우트베드가 살해되었을 당시 알리바이가 증명되었다.

무엇보다도 도슨 부인은 불치병인 암을 앓고 있어서 곧 죽을 예정이었는데 그녀의 죽음을 앞당길 이유가 없었고, 죽였다 해도 범행 방법도 알아내지 못했으며, 버사 고우트베드 양 살해 방법도 밝혀낼 수 없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마는데...


도로시 세이어즈의 피터 윔지경 장편 (이하 피터 경). 사실 저는 피터 경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트릭 면에서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작품도 별로 없었고, 피터 경의 잘난척도 도가 지나쳐서 호감을 갖지 못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스테리아 35호>>에서, 샌드위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언급되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끔 쓰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미발표 원고 - 추리소설과 요리'라는 글에서 샌드위치를 다루어볼까 하던 차여서, 과연 어떻게 샌드위치가 사용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의외로 재미있어서 놀랐습니다. 트릭도 여러가지가 사용되고 있고, 피터 경의 추리도 눈부시며, 동기도 공들여 만들어져 있어서 추리적으로도 아주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암에 걸려서 살 날이 머지 않았을 도슨 부인을 왜 위태커 양이 죽였는지?에 대한 동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위태커 양은 도슨 부인 유산의 유일한 상속자로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도슨 부인을 서둘러 살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슨 부인이 사실은 위태커 양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되었는데, 도슨 부인이 유언장을 쓰지 않았다는게 밝혀지며 이는 부정됩니다. 오히려 변호사와 위태커 양이 유언장을 쓰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도슨 부인이 유언장을 쓰면 재수가 없어질까봐 극렬하게 거부했다고 하고요.
그러나 알고보니 명확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1926년 1월부터 새로운 법률이 시행되어서, 유언장 없이 누군가 사망할 경우 그 재산은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어서 메리 위태커가 전부 물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생겼던 겁니다! 그래서 위태커 양은 도슨 부인에게 유언장을 쓰게 만드는데 실패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부인을 1925년 안에 살해했어야 했던 거지요.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동기였습니다.

독극물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범행의 트릭도 기발했습니다. 간호사였던 위태커 양이 피하주사로 '공기'를 주사하여, 일종의 공기 탄환으로 심장 마비를 일으켰던 거지요. 많이 알려져 있어서 지금은 조금 식상하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는 굉장히 참신한 트릭이었을겁니다.
메리 위태커가 런던에서 이런저런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포레스트 부인으로 변장하여 살고 있었다는 트릭도 효과적이었습니다. 저는 포레스트 부인이 공범으로 절친 핀들레이터 양이라 생각했었는데, 제 생각보다 더 과감하면서 괜찮았어요. 메리 위태커의 사진은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메리 위태커는 일종의 동성애적인 관계에만 몰두했다 등의 복선으로 잘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고요. 확실히 유명 작가는 저 같은 일반인과는 뭔가 달라도 다른 법이지요.
마지막에 핀들레이터 양을 살해한 뒤, 도슨 부인의 먼 친척인 할렐루야 목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계획도 나름 정교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은 '흑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편견과 증오심을 잘 활용한게 눈에 뜨입니다. 범행 현장에서 여러 남자가 덮친듯한 현장 발자욱이 모두 동일인의 것이라는걸 알아내고 계획을 파헤쳐버린,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과학 수사 기법을 활용한 피터 경과 파커 경위의 추리도 아주 괜찮았고요.
일종의 데이트 폭력 범죄로만 여겨졌던 버사 고우트베드 사건을 명확한 살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게 만든게 '샌드위치'라는 것도 제 기대를 충족시킨 부분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작품 전개에 큰 역할을 한 요리라는걸 부정하기 힘들 정도에요. 이건 앞서 말씀드렸던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미발표 원고"로 다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메리 위태커는 버사 고우트베드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도슨 부인을 속여 유언장을 쓰게 만들려 했던 과거가 폭로될 수는 있었겠지만, 이건 죄가 아닙니다. 어차피 도슨 부인은 공식적인 부검을 통해 자연사로 확인되었고, 시체가 재발굴되어 검시되더라도 독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을테니까요. 오히려 포레스트 부인이라는 존재가 드러났고, 결국 위증을 하게 만들었던 절친 핀들레이터까지 살해해서 사건을 키워버렸으니 안 하느니만 못한 범행이었습니다.
또 새로운 법률에 대해 상담했던 변호사 트리그를 살해하려 했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을 벌렸다가, 트리그를 죽이지도 못해서 위기에 빠진 셈입니다. 트리그가 겁을 먹고 사건에 대해 입을 닫았기에 망정이지, 진작에 꼬리가 잡힐 뻔 했었지요.

그리고 메리 위태커가 포레스트 부인이라는걸 알아내는 마지막 장면을 클림슨 양의 탐문 수사를 통해서도 알려주는 부분은 전개에서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냥 피터 경과 경찰들이 진작에 입수했던 포레스트 부인의 지문과 메리 위태커의 지문이 같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만으로 반전의 맛은 충분했어요. 정체만 알아내면 메리 위태커를 핀들레이터 살인범으로 체포하는건 어렵지 않았으니 전개에도 무리가 없었고요. 여성의 능력도 남성 못지 않게 뛰어나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기 위했던 장치라 여겨지는데, 당시라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습니다. 피터 경 시리즈를 많이 읽었을 여성들에 대한 서비스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하며, 그동안의 제 편견을 모두 깨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저와 같은 이유로 피터 웜지 경 시리즈를 싫어하시는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3/09

블랙 머니 - 로스 맥도날드 / 박미영 : 별점 2점

 

블랙 머니 - 4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내용, 진상,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촌 몬테비스타를 찾은 루 아처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로 수상쩍은 남자 프란시스 마텔의 조사에 착수했다. 피터의 약혼녀였던 지니가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마텔의 정체는 몬테비스타 테니스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가난뱅이 불법 체류자 펠릭스 세르반테스였다. 그는 7년 전, 지니 아버지 로이가 자살한 직후 파리 유학을 떠난 뒤 출세해서 첫 눈에 반했던 지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유학은 라스베가스 도박사 케첨 (레오 스필먼)의 도움 덕분이었고, 마텔이 가지고 있던 현금 십만여달러 역시 레오 스필먼의 돈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더듬어 가는 와중에 지니의 어머니 마리에타, 마텔이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하드보일드 3대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날드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
제목의 블랙 머니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레오 스필먼이 탈세로 빼돌린 돈을 의미합니다. 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할인된 금액으로 수금을 하는 식으로 빼돌렸던 거지요.

거장의 작품답게 읽는 재미는 상당했습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의뢰가 점점 커져가고, 이 와중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더럽게 얽히고 섥힌 관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완급 조절과 흥미를 돋우는 묘사와 전개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빼어난 덕분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등장하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풀어보지요.
  1. 7년 전, 레오 스필먼은 도박 빚 대신 딸을 상납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로이 파블론을 구타했습니다.
  2. 혼절한 로이 파블론을 태블론 교수가 수영장 속에 밀어 넣어 살해했습니다.
  3.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레오 스필먼을 협박해서 유학을 떠납니다.
  4. 펠릭스는 유학 후 프란시스 마텔이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한 뒤, 파나마 영사관에서 일하게 됩니다.
  5. 마텔은 영사관 직원 신분을 이용하여 레오 스필먼의 블랙머니 세탁을 돕습니다.
  6. 7년이 후, 레오 스필먼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프란시스 마텔은 모든 블랙머니를 들고 달아닙니다.
  7. 마텔은 몬테비스타를 찾아 첫 눈에 반했던 버지니아 (지니) 파블론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8. 지니는 태블론 교수와 불륜 관계였고, 단지 돈이 필요해서 마텔과 결혼했던 겁니다. 곧바로 이혼하고 위자료를 챙길 셈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에서는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전체 시간 순서상으로는 사건의 도입부인 셈인데, 인간들이 서로 엮이게 된 동기가 명확하고 나름 말은 됩니다.

그런데 이 뒤,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게 되는 태블론의 범행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순서대로 써 보자면,
  1. 지니는 마텔과 결혼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2. 이 때 마리에타는 지니로부터 남편 로이 죽음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3. 마리에타가 무언가 언급하려 하자, 태블론은 그녀를 살해합니다.
  4. 뒤이어 태블론은 마텔을 살해하고 돈을 갖고 도망칩니다.

인데, 우선 태블론은 마리에타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마리에타가 로이의 범행을 폭로할걸 우려했다? 마리에타도 지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은게 전부일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경찰도 모두 자살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알콜중독자 아줌마의 하소연을 누가 제대로 귀담아 들어주었을리도 없고요. 또 지니가 7년이 지나서야 태플론의 범행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까닭도 알 수 없습니다. 마텔로부터 진상을 들었다 한 들, 그걸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마텔을 죽이고 현금을 가지고 도망친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텔이 블랙머니를 빼돌려 쫓기고 있었다는건 태블론이 알 턱이 없었으니 이를 위장해 살해한다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로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마텔을 죽이고, 마리에타를 죽인 범죄를 마텔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을 수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랬다면 마텔의 시체를 숨겼어야 했습니다. 지니의 도움을 받았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살인 하나를 덮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바로 발각된다는건 바보나 할 범행이지요.
아울러 죄를 뒤집어 씌울 의도였다 한들, 마텔은 이미 지니와 결혼해서 집을 떠났으니 마리에타를 죽일 하등의 동기가 없습니다. 경찰을 속이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차라리 지니와 함께 도피하기 위한 자금 마련 목적이었다면 말이 되었겠지만, 미적거리며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 이 역시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루 아처가 태블론이 진범이라는걸 깨닫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추리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태블론이 베스와 결혼한 이야기를 들은 정도로 그가 지니와 깊은 관계였다는걸 깨닫기는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게다가 지니도 단지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고, 베스는 루 아처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레오 스필먼은 남의 아내 키티를 빼앗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고, 실베스터 의사의 아내 오드리는 로이 파블론과 불륜 관계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문란하기 때문에, 이를 태블론만의 문제로 돌릴 이유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비밀을 숨긴 탓에 사건이 커져버린다는 뻔한 전개를 답습하는 탓입니다. 예컨데 지니가 태블론과의 관계만 일찍 밝혔어도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겠지요. 지니가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에도 태블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건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태블론을 훨씬 더 사랑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도 커요.
탐정이 들쑤시고 다녀서, 모두에게 지옥문이 열렸다는 결말도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루 아처가 없었다면, 마텔의 죽음은 블랙 머니를 둘러 싼 악당들의 복수극으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태블론은 10만 달러로 가정의 평화와 불륜을 이어갈 수 있었을테고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는 마텔의 죽음으로 끝난 상황이라서, 루 아처가 사건에 계속 개입할 명분도 없는데 왜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도박과 여자 때문에 파멸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지요. 미모를 제대로 활용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건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요. 또 첫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거액을 모은 뒤 살해당하고 마는 프란시스 마텔은 <<위대한 개츠비>> 설정과 너무 똑같아서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 따르면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전통에만 기대고 있을 뿐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비교적 후기작인데, 확실히 초기작들보다는 많이 처지네요.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다고 몇 년 전 언급했던데, 영화 버젼이 차라리 더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독이 코엔 형제니 기본 이상은 해 줄거라 확신합니다.

2022/03/06

안개의 깃발 (霧の旗) (2010)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나기다 키리코는 채권자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오빠를 구하기 위해 고향 출신의 유명 변호사 오오츠카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오츠카는 변호 의뢰를 냉혹하게 거절했다. 결국 키리코의 오빠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항소 도중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모든걸 잃은 키리코는 도쿄로 올라와 호스테스로 일하던 중, 우연찮게 스기우라가 살해된 현장을 목격했다. 그곳은 오오츠카 변호사와 불륜 관계였던 미치코의 아파트였다. 미치코는 원래 스기우라와 사귀고 있었지만, 오오츠카 변호사와의 관계로 스기우라와 헤어지려고 했었고, 그 탓에 큰 다툼이 있어 왔다.
미치코는 자신의 결백을 키리코가 증언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키리코는 오오츠카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키리코에게 유리한 증언, 그리고 진범을 나타내는 증거를 인멸했다는걸 숨기는데...


제가 읽어보지 못했던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 수차례 영상화되었는데, 제가 본 건 2010년 버젼이에요. <<미스테리아 36호>>에 수록되어 있던, 국내에서 영상화된 마쓰모토 세이초 작품에 대한 소개를 읽다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유튜브에 누군가 불법이겠지만, 자막까지 붙여서 올려놓은 버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실망이 컸습니다. 추리물로 보기는 너무나도 허술했던 탓입니다. 키리코 오빠가 뒤집어 쓴 범죄, 그리고 스기우라 살인 사건 모두 범인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기우라 살인 사건은, 미치코가 현장을 발견한 뒤 그냥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범인 야마가미 체포에는 아무 문제 없었을 거에요. 라이터라는 증거가 있었으니까요.
물론 마침 근처에 있던 키리코를 불러 도움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미치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건 분명했으니까요. 그러나 키리코가 현장에 있던 야마가미의 라이터를 몰래 빼돌리는걸 대충 넘긴건 여러모로 문제였습니다.

또 키리코가 오오츠카 변호사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동기 역시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진범, 아니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경찰이나 검찰에게 원한을 품었다면 모를까, 사건 수임 자체를 거철했던 변호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앙심을 품는단 말입니까? 원래 고향에서 친하게 지냈었다던가 하는 인연도 없는데 말이지요. 오오츠카 변호사 역시 키리코가 앙심을 품었다는걸 증명했더라면 향후 미치코 변호에 유리하게 써 먹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키리코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 미치코 변호를 위해 하는게 아무 것도 없어서 유능한 변호사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도 못합니다. 오오츠카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끝에 겨우 성공했다는 성장과정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부분이었고요.
고작 몇 분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최악이었으며, 오오츠카 변호사가 어쨌건 풀려나는데 성공한걸로 보이는 미치코와 행복하게(?) 살아갈걸 암시하는 장면은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그래도 키리코의 '복수극' 한정으로는 나름 괜찮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오츠카 변호사를 파멸시키기 위한 키리코의 집념이 정말 눈부시거든요. 특히 은근슬쩍 술을 먹여 육체관계를 맺은 뒤 고소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게 맞기는 맞나 봅니다.
두 배우의 연기도 괜찮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치카와 에비조가 냉혹한 변호사 역할에는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를 버리고 미치코에 올인하는 과정의 빌드업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건 배우보다는 각본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워낙 커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거라던가, 이거 등 그동안 보아왔던 TV용 마쓰모토 세이초 영상물들 모두가 기대 이하였는데, 역시나 별다르지 않는 수준이었어요. 앞으로는 구태여 찾아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2022/03/05

미스테리아 3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35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알라딘 온라인 중고로 미스테리아 36호를 사다가 곁다리로 구입하였습니다. 배송비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지요.
관심이 없었던건 '少年'이라고만 적혀있는 뭔지 모를 특집 때문이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였습니다. 제목의 소년은 <<20세기 소년>>에서 따온 것으로, <<20세기 소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오사카 만국박람회, 그리고 올림픽과 1970년대 전기 소설의 유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도 잘 모를 정도로 두서없는 글들이더군요. 전기 소설에 대한 부분만 괜찮았는데, 차라리 이 부분만 조금 더 깊게 파고드는 특집을 꾸미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뒤이은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며 휴가 여행에서 생기는 사건들을 다룬 글은 완전히 뜬금없었어요. 앞의 글들과 맥락이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소개되는 작품 절반 이상이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들이라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소개라도 다양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나마 여기까지는 추리 문학 애호가로서 참고 볼만한 내용이기는 했는데,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27페이지에 달하는 리뷰와 분석은 지루함의 끝판왕이었습니다. 보지도 않았고, 볼 생각도 없는 영화 리뷰가 재미있을리도 없지만, <<미스테리아>>라는 잡지에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소개될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이 영화가 정통 추리물이거나, 혹은 그 쪽 장르에 부합하는 영화일까요?
그 외의 글들도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제가 쓰는 글과 코드가 비슷해서 좋아하는 정은지 작가의 '미스터리 속 음식 이야기'가 이번에는 피터 윔지 시리즈 전반을 다루는데 눈여겨 볼 부분이 많있습니다. 저도 미스터리 속 샌드위치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볼까 하고 있었는데, <<부자연스러운 죽음>>에서 샌드위치가 결정적 단서라는 글이 특히 눈길을 끌었고요. 전자책으로 출간된 모양인데, 이번 주말에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특집과 인터뷰, 리뷰 등 기사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 정도? 중고책으로 저렴하게 구입해서 별다른 내상은 없기는 한데, 앞으로는 특집이 별로면 절대 구입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록 단편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해피엔딩>> 서미애
데이트 폭력을 그린 단편. 전기 충격기로 디지털 도어 잠금을 풀 수 있다는 생활 상식(?) 말고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없었던 단편. 전개가 너무 뻔한 탓이었습니다. 도무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곽재식
1949년, 탐정은 친분이 있던 이 선생님 행사에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이 선생이 완전범죄 비결을 탐정에게만 - 관객들에게 알려주면 완전범죄가 늘어날거라는 이유로 - 알려주고, 탐정이 비결은 그럴듯했다고 인정하며 마무리되는 행사였다. 그 뒤 누군가 탐정을 납치했다. 완전범죄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탐정에게 협박과 고문을 가했고, 탐정은 '거래'를 위해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유명한 해결사 황금지네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고 나타난건 복수를 위해 황금지네를 쫓던 사채업자 용산쌍룡이었다....

해방 직후를 무대로 해결사 황금지네, 황금지네에게 원한이 있는 사채업자 용산쌍룡, 정체불명의 남자와 탐정, 완전범죄에 대해 떠벌이는 전직 형사 이선생 등 기묘한 등장인물과 완전범죄 좌담회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가득했던 작품. 뭔가 만화같기도 했는데, 이런 설정을 잘 살린 묘사만큼은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가난하지만 입담하나는 최고인 탐정 캐릭터 묘사가 괜찮았어요. 이 선생이 황금지네였다는 반전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완전범죄 계획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 등에서 익히 보아왔던, 일종의 살인 대행업을 조금 키운 형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다크 웹 형태로 운영한다는 <<디 아더 피플>> 속 설정과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념 정도라면 모를까, 비중있게 가져갈 설정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죄자들끼리 쫓고 쫓기는 구도를 조금 더 정교하게 배치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범죄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3시 정각>> 코넬 울리치
시계 장인 스텝은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뒤, 그녀를 지하실에 설치한 폭탄을 터트려 죽일 계획을 꾸몄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조금씩 화약을 모으고, 장치를 만들어나간 끝에 마지막 D-day에 맞춰, 지하실에 잠입해 자명종을 셋팅했다.
그러나 스텝은 집에 들어온 강도들에 의해 지하실 기둥에 묶이는 신세가 되어버리는데....


스스로 설치한 시한 폭탄 타이머가 눈 앞에서 움직이는걸 보는 상황의 묘사가 실로 일품인 작품. 왜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시)가 서스펜스 스릴러의 제왕인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명편이었습니다.
지하실에서 아내의 불륜이 사실이 아니라는걸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가스 검침원과 공놀이하던 꼬마를 통해 어떻게든지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의 빌드업이 특히 대단했어요. 희망을 아주 약간 주었다가 곧바로 빼앗아버리는 장면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스텝이 급작스럽게 강도들에 의해 갇혀버린다는 작위적인 설정, 그리고 결국 스텝은 미쳐버렸고, 아내가 화약을 모르고 버린 탓에 폭발은 없었다는 다소 진부했던 결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을 모두 담고 있어서 새로왔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군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네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네요.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 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닙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차를 터트려 도창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