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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9

블랙 머니 - 로스 맥도날드 / 박미영 : 별점 2점

 

블랙 머니 - 4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내용, 진상,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촌 몬테비스타를 찾은 루 아처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로 수상쩍은 남자 프란시스 마텔의 조사에 착수했다. 피터의 약혼녀였던 지니가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마텔의 정체는 몬테비스타 테니스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가난뱅이 불법 체류자 펠릭스 세르반테스였다. 그는 7년 전, 지니 아버지 로이가 자살한 직후 파리 유학을 떠난 뒤 출세해서 첫 눈에 반했던 지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유학은 라스베가스 도박사 케첨 (레오 스필먼)의 도움 덕분이었고, 마텔이 가지고 있던 현금 십만여달러 역시 레오 스필먼의 돈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더듬어 가는 와중에 지니의 어머니 마리에타, 마텔이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하드보일드 3대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날드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
제목의 블랙 머니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레오 스필먼이 탈세로 빼돌린 돈을 의미합니다. 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할인된 금액으로 수금을 하는 식으로 빼돌렸던 거지요.

거장의 작품답게 읽는 재미는 상당했습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의뢰가 점점 커져가고, 이 와중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더럽게 얽히고 섥힌 관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완급 조절과 흥미를 돋우는 묘사와 전개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빼어난 덕분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등장하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풀어보지요.
  1. 7년 전, 레오 스필먼은 도박 빚 대신 딸을 상납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로이 파블론을 구타했습니다.
  2. 혼절한 로이 파블론을 태블론 교수가 수영장 속에 밀어 넣어 살해했습니다.
  3.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레오 스필먼을 협박해서 유학을 떠납니다.
  4. 펠릭스는 유학 후 프란시스 마텔이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한 뒤, 파나마 영사관에서 일하게 됩니다.
  5. 마텔은 영사관 직원 신분을 이용하여 레오 스필먼의 블랙머니 세탁을 돕습니다.
  6. 7년이 후, 레오 스필먼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프란시스 마텔은 모든 블랙머니를 들고 달아닙니다.
  7. 마텔은 몬테비스타를 찾아 첫 눈에 반했던 버지니아 (지니) 파블론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8. 지니는 태블론 교수와 불륜 관계였고, 단지 돈이 필요해서 마텔과 결혼했던 겁니다. 곧바로 이혼하고 위자료를 챙길 셈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에서는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전체 시간 순서상으로는 사건의 도입부인 셈인데, 인간들이 서로 엮이게 된 동기가 명확하고 나름 말은 됩니다.

그런데 이 뒤,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게 되는 태블론의 범행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순서대로 써 보자면,
  1. 지니는 마텔과 결혼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2. 이 때 마리에타는 지니로부터 남편 로이 죽음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3. 마리에타가 무언가 언급하려 하자, 태블론은 그녀를 살해합니다.
  4. 뒤이어 태블론은 마텔을 살해하고 돈을 갖고 도망칩니다.

인데, 우선 태블론은 마리에타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마리에타가 로이의 범행을 폭로할걸 우려했다? 마리에타도 지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은게 전부일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경찰도 모두 자살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알콜중독자 아줌마의 하소연을 누가 제대로 귀담아 들어주었을리도 없고요. 또 지니가 7년이 지나서야 태플론의 범행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까닭도 알 수 없습니다. 마텔로부터 진상을 들었다 한 들, 그걸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마텔을 죽이고 현금을 가지고 도망친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텔이 블랙머니를 빼돌려 쫓기고 있었다는건 태블론이 알 턱이 없었으니 이를 위장해 살해한다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로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마텔을 죽이고, 마리에타를 죽인 범죄를 마텔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을 수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랬다면 마텔의 시체를 숨겼어야 했습니다. 지니의 도움을 받았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살인 하나를 덮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바로 발각된다는건 바보나 할 범행이지요.
아울러 죄를 뒤집어 씌울 의도였다 한들, 마텔은 이미 지니와 결혼해서 집을 떠났으니 마리에타를 죽일 하등의 동기가 없습니다. 경찰을 속이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차라리 지니와 함께 도피하기 위한 자금 마련 목적이었다면 말이 되었겠지만, 미적거리며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 이 역시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루 아처가 태블론이 진범이라는걸 깨닫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추리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태블론이 베스와 결혼한 이야기를 들은 정도로 그가 지니와 깊은 관계였다는걸 깨닫기는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게다가 지니도 단지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고, 베스는 루 아처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레오 스필먼은 남의 아내 키티를 빼앗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고, 실베스터 의사의 아내 오드리는 로이 파블론과 불륜 관계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문란하기 때문에, 이를 태블론만의 문제로 돌릴 이유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비밀을 숨긴 탓에 사건이 커져버린다는 뻔한 전개를 답습하는 탓입니다. 예컨데 지니가 태블론과의 관계만 일찍 밝혔어도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겠지요. 지니가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에도 태블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건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태블론을 훨씬 더 사랑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도 커요.
탐정이 들쑤시고 다녀서, 모두에게 지옥문이 열렸다는 결말도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루 아처가 없었다면, 마텔의 죽음은 블랙 머니를 둘러 싼 악당들의 복수극으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태블론은 10만 달러로 가정의 평화와 불륜을 이어갈 수 있었을테고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는 마텔의 죽음으로 끝난 상황이라서, 루 아처가 사건에 계속 개입할 명분도 없는데 왜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도박과 여자 때문에 파멸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지요. 미모를 제대로 활용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건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요. 또 첫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거액을 모은 뒤 살해당하고 마는 프란시스 마텔은 <<위대한 개츠비>> 설정과 너무 똑같아서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 따르면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전통에만 기대고 있을 뿐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비교적 후기작인데, 확실히 초기작들보다는 많이 처지네요.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다고 몇 년 전 언급했던데, 영화 버젼이 차라리 더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독이 코엔 형제니 기본 이상은 해 줄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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