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4/03/31

이웃 사냥 - 해리슨 쿼리, 매트 쿼리 / 심연희 : 별점 1.5점

이웃 사냥 - 4점
해리슨 쿼리.매트 쿼리 지음, 심연희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리와 사샤는 대학 동창으로 결혼 후 산에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아이다호주 티틴 산맥에 위치한 농장을 구입하였다. 꿈을 이룬 기쁨도 잠시, 이웃 농장주 부부인 댄과 루시로부터 봄, 여름, 가을에 나타나는 악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해리는 격하게 화를 내었다. 전 해병대원이자 파병용사로 전투에 익숙했고, 비과학적인건 싫어하는 기질 탓이었다.
그러나 악령을 의미하는 이상 현상은 진짜로 일어났고, 해리와 사샤도 노부부가 알려준 퇴치법을 이용하며 점차 악령에 익숙해져 갔다. 농장에서의 삶은 안정을 찾았지만 간혹 나타나는 악령은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점점 끔찍해졌고, 해리와 사샤는 이 농장 땅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이사를 갈 수 없다는 저주까지 알게 되었다. 심란해진 해리는 참지 못하고 노부부의 방침과 다르게 악령에게 싸움을 걸었고, 그 결과 댄이 죽음을 맞게 되었다....


2019년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의 괴담 게시판 연재작을 소설로 개작했다는 호러 소설. 게시판에서 인기를 끌었다면 최소한의 재미는 보장될거라 생각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10억을 들여 판권 계약을 해서 영상화를 추진 중이라는 광고에도 혹했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완전 별로였습니다. 일단 무섭지가 않아요. 여름의 악령인 곰에게 쫓기는 나체의 남자, 가을의 악령인 허수아비들, 겨울의 악령인 해리가 전장에서 죽였던 적들 모두 이미지만 떠올리면 나름 섬뜩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퇴치하는 방법이 명확해서 공포심을 느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정해진 규칙대로만 처리하면 되는데 무서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인디언 조 가족은 물론 댄과 루시 부부도 그렇게 수십년을 살아왔다고도 하고요. 농장에 출몰하는 곰이나 늑대보다도 위협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악령이 하는 것도 별게 없습니다. 개울의 빛은 그냥 빛날 뿐이고, 곰에게 쫓기는 나체의 남자는 곰에게 잡아먹히는게 전부거든요. 해리가 죽였던 적병의 모습을 한 악령들은 그냥 전형적인 악령이라 식상했고요. 그나마 허수아비들의 기묘한 모습과 발버둥칠 때의 행동은 해리의 마음을 뒤흔들기는 했지만, 글로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악령의 정체, 기원이라도 공포스럽게 풀어나갔다면 좋았을텐데 그런 설명도 전무합니다.

이야기도 작가 편의에 따라서 흘러가는게 훤히 보입니다. 처음에 했던 이야기에서 계속 부풀려지고, 새로운 설정이 덧붙여지는 식이거든요. 애초에 댄은 봄, 여름, 가을에만 악령이 나타나며 정해진 방법대로 물리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을 떠나면 죽는다는 설명이 추가됩니다. 해리가 악령에게 이 땅은 자기 것이라는 말을 하며 도발했다가 댄이 죽게 되고요. 왜 처음부터 악령에게 말을 걸면 안된다던가 하는 등의 조건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은걸까요? 댄이 죽은 다음에서야 악령에 대해 잘 아는 인디언 조가 나타나서 겨울에는 해리가 죽인 적들이 악령으로 나온다는 말을 해 주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해리와 사샤가 악령을 받아들인 뒤 (?) 악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그야말로 최악었습니다. 앞서 아무런 설명도, 복선도 없었던 뜬금없는 결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별로인데, 결말까지 이 지경이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도 모두 전형적이며 식상합니다. 해리가 아프간 전쟁 참전 용사였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게 없어요. 게다가 해리는 쓸데없이 악령에게 도발을 하는 발암 캐릭터라 짜증을 불러 일으키고요.
댄과 루시도 굉장히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런지 의심스럽습니다. 첫 만남 때 해리와 사샤에게 악령이 나온다고 설명은 해 주었지만 면박을 당했다고 방관한건, 첫 봄에 해리와 사샤가 충고를 따르지 않아서 죽어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았을거라는 이야기인데 이래서야 좋은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처음부터 악령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없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의 "장마" 속의, 피해자들을 산제물로 여기며 방관하는 마을 사람들과 별다를게 없어 보였어요.

결론적으로, 권해드리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미국 시골 대농장의 한적한 분위기 묘사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주며, 조금 독특한 악령들 - 곰에게 쫓기는 남자와 허수아비 - 은 영상화에 어울리겠다 싶기는 한데, 그 외 건질건 없습니다

덧붙여 레딧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게시판에 실제 상황처럼 글을 썼던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꿈꾸던 외딴 농장을 구입해서 이사왔는데, 옆집 노부부가 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며 그걸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어요! 어떻하죠?"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진짜 불빛이 나타났어요!" 등등으로 글이 업데이트되었을테고, 이용자들이 각자 댓글을 달고 하는 식으로 흥미를 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픽션으로 가공해버리니 '뭔지 모르지만 무서운게 진짜로 나타났다!'는 핵심 공포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네요. 우케쓰의 "이상한 집"의 실패 이유와 거의 비슷한 셈이지요. 이런걸 보면 괴담은 그냥 괴담처럼 써내려가는 미쓰다 신조 방식이 차라리 낫지 싶습니다.

2024/03/30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밤비 뱅큇에서 컴패니언으로 일하는 교코의 친구 에리가 호텔에서 죽은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다. 에리가 죽은 호텔 방문에 도어 체인이 걸려있었고, 독약을 고향에서 챙겨 왔다는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밤비 뱅큇 사장 마루모토와 팀장 에자키 요코와의 삼각관계가 원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미심쩍은 이유로 형사 시바타는 자살설에 의문을 품었고, 마침 이웃이 된 교코와 함께 조사에 나섰다. 여기에 에리의 전 직장 동료 유카리도 합세했다. 그녀 역시 에리의 자살을 믿지 않았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에리는 전 애인 이세의 자살과 얽힌 사건 진상을 밝혀내려 노력해왔고, 그 목적으로 밤비 뱅큇으로 이적했다는걸 알아냈지만, 유카리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장편. 1992년 발표작입니다. 원제는 "ウインクで乾杯 (윙크와 건배)"입니다.
'복고풍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그대로인 작품이에요. 특히 부자와 결혼하는게 꿈이라는걸 서슴없이 밝히는 여주인공 교코, 그리고 '프린세스 프린세스'와 '티파니'를 즐겨들으며 교코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귀엽게 선보이는 형사 시바타는 80~90년대 유행했던 일본 트렌디 드라마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교코의 철없음과 연인 미만 우정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시바타의 모습은 "롱 바케이션"의 미나미와 세나와 아주 흡사해 보였거든요.
컴패니언이라는 직업과 화려한 보석상의 파티, 부동산 재벌과 함께 하는 데이트도 80~90년대 버블 경제의 편린을 느끼게 해 줍니다. 80~90년대를 떠오르게 만드는 장치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LP와 CD가 공존하던 시기, 테이프로 앨범을 녹음하고 워크맨으로 듣는 모습 등처럼요.
조금 찾아보니 오래전에 영상화(1988년, "화요 서스펜스 극장")가 되었던데, 아니나다를까 시바타 형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포스터만 붙여진 원룸에서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는 장면 등 화면이 완전 트렌디 드라마더군요.
 

'복고풍'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고전 본격물적인 성격도 일부지만 갖추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본격적인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에리 살해 사건은 여러가지 트릭과 상황이 잘 어우러져 추리 애호가들을 만족시킵니다. '방 문에 걸려 있던 체인'이라는 밀실 트릭을 비롯해서, 어떻게 에리가 독을 먹었는지, 마루모토가 어떻게 알리바이를 만들었는지 등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거든요. 체인은 걸려있던게 아니라 양면 테이프같은걸로 방 문에 '붙어 있었을' 뿐이었다는 간단한 트릭이지만, 범인 마루모토가 처음 방문을 확인했고 나중에 회수할 기회가 확실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 높다는 점이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에리가 살해당한건 9시 30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서 마루모토의 알리바이가 성립했으며, 이는 연인 에자키가 공범으로 에리인 척 프런트에서 열쇠를 빌렸기에 가능했다는 추리도 그럴듯했고요. 이 추리가 에리가 마루모토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프런트에서 구태여 이름을 밝힐 이유가 없다는 착안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설득력 높은 이유였어요.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시바타가 여러가지를 생각한 뒤 직접 확인해보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체인을 끊고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범인이 욕실에 숨어 있다가 몰래 나가지 않았는지를 직접 실험해보는 장면처럼요. 이런 모습은 현실적이며 경찰이라는 직업 성격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체인 하나를 벌려 밖에서 이어 놓은 뒤, 그 체인을 펜치로 끊어 증거를 인멸한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체인에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실현은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추리가 계속 등장하는건 추리 애호가로서는 반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단서인 이세가 남긴 유서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건 억지였습니다. 비틀즈를 녹음한 테이프 뒷 면에 진짜 유서를 적어 놓았다는건데, 이렇게 꼬아서 암호처럼 전달해야 했을 이유가 없었던 탓입니다. 이세가 자살한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유서는 경찰, 그리고 유족에게 전달될 터이니 테이프에 적어 두었던 글을 유서에 적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겁니다. 이세가 죽는 시점에 자기 유서를 겐조가 먼저 발견하리라는걸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게 말이 되려면 공범인 겐조 등이 이세가 자살하게끔 유서를 적고 목을 메는걸 협박으로 강요했어야 했습니다. '페이퍼백 라이터'라는 곡 명을 '페이버 백'이라고 표기해서 '종이 뒷면', 즉 녹음된 테이프 뒷 면을 보라고 했다는 것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전개도 초기작답게 어설픈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다카미에게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로 그를 수상쩍게 만드는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이 사람이 진범이다!'라는걸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 했어요. 에리가 겐조를 살해하려다가 잔을 바꿔치기한 겐조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진상도 마찬가지고요. 맥주야 안 마시면 그만인데 말이지요. 진범이 겐조라는 것도 급작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마루모토 선에서 끝내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저처럼 80~90년대 일본 트렌디 드라마에 향수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트렌디 드라마 풍의 '복고풍 미스터리'로 홍보하려면 원제를 살리는게 좋았을겁니다.

2024/03/29

딜리셔스 - 롭 던. 모니카 산체스 / 김수진 : 별점 4점

딜리셔스 - 8점
롭 던.모니카 산체스 지음, 김수진 옮김/까치

진화생물학과 인류학 관점에서 먹거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과학, 식문화사, 인문학 서적.

이 책에 따르면 동물들의 거주지가 제한되는건, 동물들의 미각 수용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입맛에 맞는 먹이가 있는 장소를 떠나기 힘들지요. 그러나 인류는 조리를 통해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료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인류가 불을 사용한 것도 불로 조리한 음식이 더 맛있어졌기 때문이고요.
음식 조리는 음식 소화 시간도 단축시켰습니다. 침팬지는 깨어 있는 시간의 40%를 먹이를 씹는데 씁니다. 하지만 인류 조상들은 이 시간을 대폭 줄였고(현재는 평균 하루의 4.7%를 씹는데 소모),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조리가 문명을 발달시킨 한 요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맛있는 요리에 대한 집착은 수렵 채집으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조사한 결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선호하는 음식 - 1위는 꿀 - 을 구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거든요.
이런 집착은 북아메리아에서는 거대 동물(매머드 등)의 멸종도 불러왔습니다. 불법이지만 코끼리 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에 따르면 엄청나게 맛있다니까요. 특히 코끼리는 발 요리가 최고라고 합니다. 당연히 매머드도 맛있었을테고, 그래서 크로비스인들도 멸종할 때까지 매머드를 집중적으로 노렸던 것이지요.
맛있는 동물만 사냥하는건 지금도 수렵인들을 통해 증명됩니다. 현실적으로는 찾아서 죽이기 쉽고, 가공하기 쉽고 많은 열량을 제공하는 동물을 잡아 먹는게 일반적이겠지만, 연구 결과 사냥꾼들은 맛있는 동물들을 발견하면 무조건 추격한다고 합니다. 사냥하기 쉬운 동물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맛없는 동물들은 아예 사냥 대상에서 배제되고요.

향미에 대한 추구는 향신료의 사용도 불러왔습니다. 처음에는 항균제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쾌락적 경험을 불러오는 효과 때문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고추의 캡사이신을 조금씩 늘려 제공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매운 맛이 가장 맛있다고 골랐다는 연구 결과로도 증명됩니다. 통각을 자극하는 맛은 실제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도 위험을 피할 때의 황홀감을 느끼게 해 주는게 아닌가 싶네요.
발효도 항균제 효과와 같은 이치로 생겨났을 겁니다. 장기 보관을 위해서요. 같은 이치로 염장, 훈제, 건조도 발명되었고요.
참고로 이 부분에서 아예 고기를 물에 담궈놓는 일종의 습식 숙성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말 한마리를 호숫물에 담궜던 실험이 소개되는데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진공 포장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장기 보존되었다는데 이유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일종의 발효같은 과정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손이 많이 가는 복잡한 숙성 연성 치즈가 만들어진 것도 맛에 대한 추구때문이라는 이론도 흥미로왔습니다. 노동과 근면을 장려하고, 재료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먹는건 제한적이었던(고기를 먹지 못햇던) 수도사들이 심혈을 기율여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치즈를 제조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게 숙성 연성 치즈 제조의 원인이라는데 참 그럴듯했어요. 이 이론은 숙성 연성 치즈의 맛은 고기와 흡사하다는걸로 증명될 수 있고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 요리에 대한 추구가 문명 발전과 인류 진화를 이끌었다는걸 알려주는데, 목차 구성이 다소 정리가 불충분한 느낌이 드는건 아쉬웠습니다. 주제에 맞게끔 통사적으로 구성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도판과 등장 레시피 소개도 부실합니다. 

그래도 맛에 대한 집착이 진화를 이루어냈고, 식문화의 발달을 만들었다는걸 여러가지 연구 결과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좋은 책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보니 맛에 대한 집착이 많은걸 이루어낸건 분명한 만큼, 맛에는 다소 엄격해져도 될 것 같군요.

2024/03/27

비스트 (2022) - 넬슨 딜립쿠마르 : 별점 1.5점

비라는 인도 최정예 경찰 조직 RAW의 최고 요원이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 체포 작전 때 어린 소녀가 사망했던 탓에 조직을 떠났다. 그 뒤 연인 쁘리티가 소속된 경비업체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업체 사람들과 업무차 대형 쇼핑몰을 찾았는데, 수십 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쇼핑몰을 강탈한 사건에 휘말렸다.
처음에는 방관하려 했던 비라는 곧바로 테러리스트들을 처단하고 인질들을 구출하러 나섰다. 테러리스트들의 요구 사항이 자기가 체포했던 테러리스트 수장 파르쿠의 석방이라는걸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비라의 활약으로 테러리스트들은 괴멸되었지만, 내무부장관이 사전 모의했던 탓에 파르쿠는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자 비라는 단신으로 파키스탄 테러리스트 캠프에 침투하여 파르쿠를 다시 체포해온는데 성공한다.


인도산 액션영화. "바후발리"를 보고 감명을 받아 인도 영화를 찾다가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설정과 각본입니다. 단순한 스토리를 채워나가는 대사와 캐릭터들 수준이 황당할 정도거든요. 나름 비중이 높은 개그를 수준 낮은 바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게 가장 거슬렸어요. 주인공 바리 외에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은 없을 정도라 참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점 - 바보 개그가 어우러지는 액션 - 은 "최가박당"같은 80년대 홍콩 액션 영화를 떠오르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만들어진건 2022년.... 한 마디로 한 40년은 뒤떨어진 각본과 설정입니다.
인도 영화에서 즐거움을 주는 요소인 특유의 뮤지컬스러운 연출도 별로 없습니다. 두어장면 등장하기는 하는데, 영화 본편과는 아예 무관한 일종의 뮤직 비디오처럼 연출되고 있어서 억지스럽더군요. 이럴거라면 빼는게 나았을겁니다.

그나마 인도 영화 특유의 과장과 멋부림(?)이 가득찬 액션 연출은 나름 볼만하지만, 이 역시 그러나 주인공 비라가 무적인데다가, 완력이건 두뇌건 호각을 이룰 라이벌이 없어서 보다보면 지겨워집니다. 마지막에는 전투기까지 조종하니 말 다했죠.
애초에 파키스탄 캠프까지 가서 홀로 파르쿠를 체포해 올 수 있었다면, 처음 작전은 왜 공들였나 싶습니다. 쓸데없이 잔인한건 덤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인도 영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계 시장에 먹히려면 이보다는 좀 더 각본, 설정에서 고민해야 할 겁니다.

2024/03/24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라플라스의 마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및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물 영화 제작자 미즈키 요시로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나카오카 형사는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경찰 수사 협조를 요청받은 환경 분석 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는 고의로 중독 사건을 일으키는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마테 온천에서 유사한 황화수소 중독사가 또 일어났고, 나카오카와 아오에는 피해자들이 영화 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아마카스도 수년 전 가족을 황화수소 중독으로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아마카스의 아들 겐토를 쫓는 소녀 우하라 마도카와 만난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그녀 주변인물들을 통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이 모든건 뇌수술로 물리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겐토의 복수극이었다....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주년 기념작인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겐토와 마도카가 가진, 물리법칙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구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등으로 꽤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겐토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인 과거 아마카스가 가족을 살해했던 사건의 동기도 놀라왔습니다. 아마카스가 작성했던 블로그 글과는 사뭇 다른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등의 설명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아마카스가 주장하는 천재 이론 -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 과는 반대되는 주제의식 -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는 없다 - 도 와 닿았고요. 암요, 천재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있어야 천재도 빛을 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 뿐이고 대체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선, 전개부터 예상 그대로라 굉장히 평이합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살인은 온천을 방문했던 청년이 일으켰다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 정체도 읽다보면 아마카스 겐토라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전문가 아오에 교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황화수소를 이용한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마도카의 특수 능력이 초반에 밝혀지는 탓에, 그런 능력을 이용한 범죄라는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활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지 않게 전개도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많아서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도카 등 다른 인물들 시점으로의 전환은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나카오카 형사의 수사가 '위'에서의 지시로 마무리되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뇌 수술 덕분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초능력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머리가 좋아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즉, 아래와 같이 '아마데우스 조'가 미사일 궤도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똑같아요.
물이 흐른다던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물리법칙 이용은 듀나의 SF 단편 "나비전쟁"에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했었고요.
게다가 이 능력에 대한 것 모두는 온갖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결국 과학이라기보다는 판타지입니다. 여기에 특수 능력자를 나라에서 관리한다 등의 설정에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코드네임(?)까지 더해지니 이거야 원, X-men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등장인물들도 진부하고 평이합니다. 겐토는 특히 문제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마카스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치사토를 유혹하여 범죄에 끌어들이고 마지막에 함께 죽여버리려고 하면서 정의, 복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심지어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말이죠!
아오에 역시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서 전혀 교수답지 않았을 뿐더러, 아오에가 가족 붕괴를 앞두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우하라 교수가 딸 마도카의 뇌수술을 하게 된 동기인 '토네이도' 사고도 굉장히 억지스러웠어요. 설령 이런 사고가 있었다한들, 딸에게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겐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추리적으로도, SF적으로도, 전개와 완성도 측면에서 별로이며 문제 투성이라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뻔하고 유치한 마블 히어로물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좀 궁금하네요. 예고편을보니 아오에 교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복잡했던 시점 분산을 깔끔하게 정리한 듯 보여서 책보다 좋아보이거든요. 평이하고 쉬운 전개는 영화에는 분명 장점일테고,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장면들 - 특히 클라이막스의 '다운버스트' - 은 화면에서는 꽤 그럴싸하게 보일테니, 최소한 소설 후속권보다는 기대가 됩니다.

2024/03/23

중간의 집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중간의 집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러리의 지인인 변호사 빌의 매제 조가 살해당했다. 현장을 찾은 엘러리는 피해자가 뉴욕 상류층 사람인 조지프 켄트 김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볼은 조 윌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빌의 여동생 루시와 결혼했고, 본래 신분으로는 돈많은 과부 제시카 보든과 결혼했던 중혼자였다.
현장에서 조 윌슨의 아내 루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수집되었고, 김볼로 가입했던 1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수취인이 얼마전 루시로 변경된걸 근거로 경찰은 루시를 체포했다. 빌은 동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분투했지만 루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엘러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볼의 의붓딸 안드레아의 결정적 증언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여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검은숲의 엘러리 퀸 전집 중 한 권. "도중의 집"이라는 제목의 자유추리문고 버젼도 이미 읽었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러리 퀸 1기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와 3기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 2기 시기를 연 작품이라고 하는데, "스웨덴 성냥 미스터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았을 거라는 언급이 작중에 등장할 정도로 '국명 시리즈'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후더닛'에 충실한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이며, '독자에의 도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명 시리즈'보다는 드라마의 변화 폭이 넓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반부는 아예 법정물로 간주해도 될 정도니까요. 법정물로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범인의 다분히 고의적이고 어설픈 행동들을 열거하며, 이는 루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는 빌의 마지막 변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범인이 충분한 휘발유가 있었는데도 구태여 주유소를 방문해 베일을 쓴 얼굴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등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역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변론을 펼칩니다. '범죄자들은 아둔하며, 뛰어난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은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럴듯했습니다.
거의 빌이 이길 뻔 했지만 흉기에 루시의 지문이 묻어 있있다는 증거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는 결말도 현실적이었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핀치의 만년필에 독특한 초록색 잉크가 들어있었다는 것, 범인이 립스틱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여 코르크를 태워 필기구로 쓴 것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의 도전' 단계 전까지 독자들에게 정말로 공정하게 제공된다는건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통해
  1. 범인은 남자다.
  2. 범인은 흡연자고, 아마도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3. 범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낼 내용이 새겨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다.
  4. 범인은 김볼과 루시에게 적대적인 동기가 있다.
  5. 범인은 필기구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소유한 필기구를 사용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어 사용하기를 꺼렸다.
  6. 범인은 아마도 김볼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7. 범인은 앤드레아에게는 우호적이다.
  8. 범인은 오른손잡이다.
  9. 범인은 김볼이 보험 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리를 끌어내고, 관계자들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런 후더닛 추리 외에도 '중간의 집'으로 명명된 집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만으로 그 용도를 꿰뚫어 보는 추리도 볼만한 등, 확실히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점은 많았어요.

그러나 완성도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던, 앞서 안드레아가 목격했던 성냥부터가 그러합니다. 이를 토해 엘러리 퀸은 범인은 담배를 피운게 분명한데, 재와 꽁초와 같은 흔적이 없으니 파이프를 피웠다고 추리하지요. 하지만 애초에 엘러리 퀸 스스로가 범인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파이프로 흡연이 가능했다는걸 초반에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냥 모두가 코르크를 태우는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억지이자 반칙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의 아내 루시가 빌에게 선물하려고 산 문구 세트 칼을 만졌다는 완전한 우연이 재판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 것, 핀치의 간단한 변장이 주유소 사장이 루시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전개 면에서는 수수께끼가 모두 엔드레아의 위증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점이 큽니다. 앤드레아가 중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했던걸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 거에요. 앤드레아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었고요.
엘러리 퀸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은 여전히 짜증스러웠으며, 빌이 엔드레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무고한 동생이 20년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덕 중혼자의 의붓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설명도 대체로 부족합니다. 빌이 처음에 '중간의 집'에서 발견했던 앤드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겼던 이유는?(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 김볼이 빌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마음먹은날 앤드레아까지 중간의 집에 부른 이유는? 대체 핀치는 그 날 그 시간에 김볼이 중간의 집에 혼자 있을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명 시리즈'보다는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냥저냥합니다.

2024/03/22

완득이 - 김려령 : 별점 3점

완득이 - 6점
김려령 지음/창비

딸 아이 논술 교재.영화화까지 되었던 인기 소설이지요. 줄거리는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사회적 약자층에 속한 청소년이 울분과 한을 품고 살다가, 마음을 둘 곳을 주위 사람들을 통해 하나 둘 씩 찾게 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성장기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뻔한데, 딱 한 가지 이 작품만의 차별화 요소가 있다면 선생 동식입니다. 도무지 선생님같지 않은, 반쯤은 불량한 동네형같은 인물인데 주변 사람들을 나름대로 챙기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보듬는 이중적인 모습을 생생하면서도 코믹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완득이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도 어둡지만은 않게 묘사됩니다. 본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희극으로 보이는,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이런걸 보면 확실히 현대적이구나 싶었습니다. "아홉살 인생"만 보아도 야만적이고 우울한 상황투성이였는데 말이지요. "공포의 외인구단"과 "슬램덩크" 정도의 차이랄까요? 마음 한 구석에 비장함을 품고 살던 80, 90년대 감성과 2,000년대 감성은 다를 수 밖에 없지요.

다른 성장기들과는 다르게 그래도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장편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에피소드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득이의 가정이 안정을 찾고,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깊어지고,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꿈을 실은 킥복싱도 계속한다는 것으로 확실히 마무리지어 주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3점. 최근 읽었던 유사한 성장기들 중에서는 발군이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요새 딸 아이 논술 교재로 읽었던 책들 중 "아홉살 인생", "순례 주택"은 사회적 약자와 아웃사이더들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유사한 작품들을 교재로 삼는걸까요? 제가 어렸을 때에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같은 책이 청소년 권장도서였지만, 앞서 말했듯 80, 90년대와 2,000년대 감성은 다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는 해도 그 때만큼 와 닿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에요. '논술'을 별도로 배울 정도의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할테지요. 비슷한 소재의 책은 한 권으로 줄이고 좀 더 다양한 책을 추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03/20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2024) : 별점 3점

 'We are the World' 노래 녹음 당시, 그야말로 탑 오브 탑이라 해도 무방했을 팝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하룻밤동안 녹음을 진행했던 과정을 당시 촬영본 중심으로 알려주는 다큐멘터리. 노래의 창작 과정과 녹음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각 가수별 파트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녹음을 어떻게 했는지와 같은 녹음 과정의 디테일은 물론이고 다이애나 로스가 굉장히 소녀 감성을 가진 착한 아가씨였다던가, 밥 딜런은 적응을 잘 하지 못했으며(눈빛부터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수준) 노래에도 제대로 동참하기 어려워 했었고, 해리 벨라폰테가 소개될 때 모두 그의 히트곡을 합창해주었다는 등의 소소하지만 인간미넘치는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프린스를 초대하기 위해 실라 E를 이용한 등의 비즈니스적인 행태도 눈에 띄였고요.
마이클 잭슨 혼자서만 뮤직 비디오에서 솔로 파트(?)가 있었던게 항상 궁금했었는데 그 의문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스타들과는 다르게 혼자서 AMA (American Music Award)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먼저 와서 녹음을 했었던 덕분이더군요.

가수들 대부분의 전성기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 중 당대에는 이미 한물 갔다 여겨졌지만 밥 딜런이 초대되어 참여한게 참으로 다행이다 싶어요. 일반적인 팝 보컬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을 곁들여 곡을 풍성하게 해 준 공도 있지만, 지금은 이미 잊혀져버린 반짝 스타들이 많았던데 반해 밥 딜런의 명성은 영구불멸할테니까요. 라이오넬 리치, 브루스 스프링스턴, 휴이 루이스, 신디 로퍼 등이 지금도 정정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당시 추억담을 함께 들려주는 것도 반가왔던 부분이었고요. 브루스 스프링스턴은 정말 똑같더라고요!

한가지 아쉬웠던건, 완성된 위아더월드를 엔딩 크레딧과 함께 틀어주는데 이왕이면 뮤직 비디오로 함께 틀어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앞에서 보기는 했지만, 각자 보컬을 맡은 부분을 합쳐진 완성된 영상과 함께 보고 싶었거든요. 아래처럼 소개도 함께 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겁니다.

그래도 80년대를 보냈던 팝 키드 중 한명으로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어지간한 영화보다는 재미있기도 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3/18

중고 만화, 정말로 돈이 되나?

예전에 돈이 되는 중고책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글에서 돈이 되는 중고책의 대표로 1980년대 ~ 2000년대까지의 만화가 해당된다고 했었는데, 그런걸 증명하는 듯한 쇼핑몰을 발견했습니다. 안양에 위치한 헌책방 글모아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인데, 도서 분류에 "희귀"라는 카테고리에 고가의 중고 만화들이 다수 업로드되어 있네요. 알라딘 중고 서적에서는 취급하지 않았을 해적판도 엄연한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국내 작가 작품보다는 일본 번역본이 많다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그런데 고가인 희귀본들 중 납득이 안되는 책들이 꽤 많더군요. '한 놈만 걸려라' 마인드로 중고책에 황당한 가격을 붙여 팔던 알라딘 셀러보다는 그래도 오프라인 매장을 갖춘 전문 사업자가 분류하여 가격을 책정했다는 점에서 보다 믿을만은 하겠지만, 정말로 저 가격에 팔리는걸까요? 몇가지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유령 하숙생 1~5" : 1,340,000원!
아로 히로시의 "유우 앤 미이"의 해적판. 지금은 잊혀졌지만, 80년대 잠깐이나마 '파천황 캐릭터 개그'를 대표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연재 당시 거의 실시간으로 접했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해적판으로 출간되었는지는 몰랐네요. 굉장히 좋아했고, 즐거웠던 추억이 있는 작품이지만 정식 출간본도 아닌 책에 이 가격이라니.... 말문이 막힙니다. 지금은 '만화도서관 Z'에서 원본을 무료로 볼 수 있는데 말이지요. 전 8권인데 왜 5권까지인지도 모르겠고요.

"노만 1~3" : 620,000원
데즈카 오사무 작품. 책 상태가 미개봉 소장품이라 가격이 올라간 측면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이미 e-book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반 독자는 저 가격을 주고 살 이유가 없는 셈이지요. 저 금액으로 구입하는게 누구실지 정말 궁금합니다.
"캔디 캔디"는 이 애장판 외에도 여러 버젼이 '희귀' 카테고리에 등록되어 상당한 가격이 붙어 있습니다. 이 4권짜리 애장판은 저도 소장하고 있는거라 가격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이 서점 안에서만 "캔디 캔디"를 5~6 질은 보았는데 정말 '희귀'가 맞는걸까요? 우리나라의 "캔디캔디" 대부분이 이 서점에서 보유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이 가격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1~8권 : 150,000원
완결까지 전 시리즈를 갖춘 것도 아닌데 150,000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한, 두 권 정도만 빠진 셋트를 가지고 있는 수집가를 위한 듯 한데, 과연 수요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 외에도 대체로 이런 식이라 가격 책정이 무슨 기준인지 정말 알고 싶어졌습니다. 관심있으시면 사이트 한 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대지옥전진광대왕"은 얼마에 팔릴지 물어보고 싶어지는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가까운 시일에 한 번 방문해봐야겠습니다.


2024/03/17

돈까스를 쫓는 모험 - 이건우 : 별점 2.5점

돈까스를 쫓는 모험 - 6점
이건우 지음/푸른숲

돈까스에 진심인 저자가 우리나라의 유명 돈까스집의 돈까스를 먹고 평가하는 식도락 먹부림 에세이. 개인의 기호와 철학에 따라 주제를 정해 맛집들을 깊숙하게 탐구했다는 점에서는 조영권 씨의 "중국집"과 "경양식집에서"가 연상됩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돈까스라는 주제에 더 깊숙이 집착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까스 자체는 물론 관련된 요리와 음식에 대한 정보와 특징들이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아래와 같이요.

  • "샐러드 하면 자연스레 이탈리아가 떠오르고 거기에 시저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로마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황제 샐러드 혹은 시저가 먹었던 샐러드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시저 샐러드는 탄생한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음식이다. 20세기 초,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 국경 도시 티후아나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시저 카르디니(Ceasar Cardini)가 어느 날 가게에 몰려든 손님에게 낼 음식이 떨어지자 기지를 발휘해 남은 식재료로 샐러드를 만들어냈는데, 이게 바로 시저 샐러드의 기원이라고 한다."
  • "일본 돈까스의 시초 '렌가테이(煉瓦亭)'에서는 뭉텅뭉텅 썬 양배추를 육수에 데쳐서 돈까스와 함께 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남성 직원이 징용되어 일손이 부족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데치지 않은 양배추를 그대로 내기로 했다."
  • "히레는 안심을 뜻하는 필레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단어다."
  • "멘치는 무엇인가? 갈아놓은 고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 민스(mince)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멘치까스는 고기와 양파를 갈아 뭉친 반죽을 튀겨서 만든다. 이런 음식,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맞다, 크로켓. 흔히 '고로케'라고 부르는 음식이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멘치까스는 멘치고로케라고 부르기도 한다."
  • "코르동 블뢰는 음식 이름이기도 하다. 치즈를 햄으로 감싸 튀긴 음식으로, 스위스에서 처음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졌고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오며 흔히 아는 치즈돈까스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 "일본 나고야의 대표 요리인 히쓰마부시(장어덮밥) 전문점에 가면 먹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해준다. 먼저 밥주걱으로 4등분하여 처음에는 밥과 장어 본연의 맛을 즐긴 다음 파와 김, 와사비 등을 곁들여 먹는다. 그 후에 찻물을 부어 말아 먹고, 마지막에는 가장 맛있었던 방법으로 마무리하는게 정석이다. 꼭 시키는 대로 먹을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가게에서 하는 제안이니 따라 해 보는게 좋다."
  • "후쿠진즈케는 무, 순무, 오이, 우엉, 작두콩, 연근, 차조기 등 일곱 가지 채소로 만든 장아찌로 일본에서는 카레 가게에서 단골 반찬으로 볼 수 있는 반면, 그 외에는 반찬으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음식이다. 카레와 후쿠진즈케를 함께 내는 전통은 의외로 역사가 깊어 1900년대 초반, 일본 최대 해운 회사인 NYK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会社)의 유럽 항로에서 1등석 식사로 카레와 함께 낸 것이 시초라고 한다.
  • 한편 우리나라에도 후쿠진즈케와 아주 비슷한 반찬이 있는데 오복채라고 부른다. 후쿠진즈케가 일곱 가지 채소로 만들기에 칠복신을 뜻하는 시치후쿠진(七福神)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오복채 역시 이름이나 형태로 봤을 때 같은 뿌리를 갖는 음식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오복채는 무, 연근, 오이, 다시마, 우엉, 이렇게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다(재료는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가게 이름 끝에 붙은 ‘안(庵)’은 대개 소바 전문점을 의미한다. 안이라는 한자는 우리식으로는 암자(庵子)를 뜻하는 암으로 읽는다. 그런데 하필 안이라는 글자가 소바집을 뜻하게 되었을까? 언급했듯, 안이라는 글자 자체가 암자, 즉 사찰 내에 승려가 머무는 작은 집을 뜻하는데, 이는 결국 절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소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사찰음식은 철저히 채식일 수밖에 없다. 메밀가루로 만드는 소바는 이런 식단에 꼭 들어맞는다. 또한 면이라는 음식은 일단 만들어두기만 하면 끓는 물에 데쳐 빠르게 대량 조리하여 낼 수 있어서 신도를 비롯해 많은 손님이 찾아오는 절에서 간편하게 대접하기 좋은 음식이다. 마지막으로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는 종종 피난처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보존성이 우수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용적인 장점 외에도 메밀은 승려들이 수행 중에 자유롭게 섭취할 수 있는 곡물이기도 하다. 일본 천태종에는 승려가 수행 중에 쌀, 보리, 조, 기장, 콩 이렇게 다섯 가지 곡물을 먹지 않는 특정한 기간이 있는데, 메밀은 금식해야 할 곡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더없이 소중한 식재료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바라는 음식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사찰 및 승려와 함께 발전해왔다."
  • "소바집을 뜻하는 ‘안’ 자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에도 시대 아사쿠사에 도코안(道光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여기에 기거하던 주인이 이른바 소바 명인이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소바가 오죽 맛있었으면 사찰 내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손님이 몰려들어 결국 주지스님이 소바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에도의 소바집들이 하나둘씩 이름 뒤에 안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소바집에 안을 붙이는 유래라고도 전해진다."
  • "타레는 우리가 익히 아는 소스와 거의 흡사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스는 주로 양식풍 요리에 쓰며 조리 중에 넣거나 혹은 완성된 요리 위에 뿌리는 액체를 말한다. 타레는 양식 외의 요리에 쓰며 조리 중에 넣거나 혹은 완성된 요리를 찍어 먹는 액체를 말한다."
  • "썰’로 나도는 싸만코의 진정한 유래, 서머(summer)를 일본어식으로 발음한 사마(サマー)와 팥을 뜻하는 앙코(あんこ)가 합쳐져 싸만코가 탄생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개인적인 돈까스를 먹는 방법에 대한 설명도 아래와 같이 상세합니다.

"내가 일본식 등심 돈까스를 먹는 방식을 설명해보자면, 일단 가운데에서 한 조각을 있는 그대로 먹어본다. 밑간이 훌륭하다면 양끝 조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레몬 즙만 뿌려서 먹는다. 밑간이 약하다면 먼저 소금을 찍어 먹고 양끝에 가서야 비로소 소스를 곁들여 먹는다. ‘순정’보다는 소금, 소금보다는 소스 맛이 강하기 때문에, 마치 회나 초밥을 먹을 때 담백한 부위에서 점점 기름진 부위로 옮겨가듯 맛의 농담(濃淡)에 신경 써서 먹는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음식의 군사"가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방법은 다르지만 발상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저자의 글 솜씨도 좋습니다. 유쾌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록된 거의 모든 가게가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 생활권이 아닌 강북(마포 등)에 위치한 가게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나 지방보다는 접근성이 뛰어나니 언젠가는 한 번 가 볼 기회가 있겠지요.

그런데 무시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은 그건 바로 디자인입니다. 구입 의욕을 사라지게 만드는 표지에서 시작해서, 소개하는 가게 및 돈까스의 사진이 너무 볼품이 없어요. 돈까스가 핵심이면 돈까스 사진이라도 다양하게 올려줬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수록된 사진은 그렇게 맛있어 보이지도 않더라고요.
사진과 도판이 풍성했더라면 별 4점도 아깝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지금 결과물은 별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제 기억에 남아있든 돈까스 가게는 '허수아비 돈까스' 본점입니다. 두툼한 고기에 바삭한 튀김옷이 어우러진 일본식 돈까스였는데 당시(약 30년 전)에는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음식이었지요. 처음 먹었을 때 정말이지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체인점 사업으로 이어진 것까지는 아는데, 십 수년간 가 본 적이 없네요. 마침 생각난 김에 찾아봤더니 아직은 건재한 듯 하니, 근처에 가 볼일이 있다면 추억삼아 한 번 방문해봐야겠습니다.

2024/03/16

전기인간의 공포 - 요미사카 유지 / 주자덕 : 별점 2.5점

전기인간의 공포 - 4점
요미사카 유지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대생 아카토리 미하루는 민속학 리포트를 위해 고향 토오미 시를 찾았다. 도시괴담 '전기인간'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모교인 나사카 초등학교에서 용무원으로 일했던 다케미네 노인의 도움으로 전쟁 전 방공호까지 둘러본 뒤, 전기인간 도시괴담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던 호텔에서 죽었다. 사인은 심부전이었다.
미하루의 연하 섹스 파트너였던 고등학생 토오루는 홀로 사건 조사에 나섰다. 미하루가 남긴 리포트와 유품으로 토오미 시로 찾아간 그는 다케미네 노인까지 욕실에서 급사했다는걸 알아내었다 토오루는 노인의 집에서 열쇠를 훔쳐 방공호 안 잠겨진 방까지 침입했지만 4개월 뒤, 나사카 초등학교 6학년인 니라사와와 켄자키에 의해 방공호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일련의 사건 뒤, 비디오 게임지 "프레스타"의 작가 사쿠마는 편집장의 부탁으로 전기인간의 실체를 밝히는 기사를 쓰기로 수락했다. 사쿠마는 후배 작가 요미사카 유지와 함께 토오미 시 방공호 수색에 나섰고, 그곳에서 요미사카 유지는 미하루, 다카미네, 토오루 사건에 대한 기상천외한 추리를 내 놓는데....


'전기인간'이라는 도시 괴담과 관련된 괴사건을 그린 작품.
괴담 자체에 대해 탐구하는 부분과 의외로 본격적인 추리를 펼치는 부분으로 나뉘는데 두 부분 모두 괜찮았습니다. 제목이 유치해서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었는데, 기대 이상이었어요.

괴담 탐구는 주로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펼쳐지는데, '전기인간' 괴담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속성들에 대한 분석은 물론이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괴이는 죽습니다. 육체를 가지지 않는 괴이의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는 한 괴이는 몇 번이고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라는 이론을 이야기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전기인간'은 실제로 있었고, '도시괴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질러 도시괴담의 수명을 연장시켰다는게 진상이거든요. 이렇게 괴담 분석을 통해 사건의 동기를 밝혀내는건 추리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피해자들은 '전기인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국한된다는건 신선했습니다. 교수는 이 정도 이야기라면 전기인간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최초에 기사를 가져왔던 선배 기자 루카와 역시 "만약 호러 분위기로 쓸 거라면 진짜로 자신이 무서워야 합니다. 쓰는 사람이 무섭지 않은 호러는 형편없습니다. 그 존재에 대해서 말하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러면 말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규칙은 존중해야 합니다."라며 그 존재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요. 그래서 두 명은 죽지 않았던 겁니다. 사쿠마는 딱히 믿지는 않지만, 전기인간이 실존한다는 기사를 써야 하니 살려두었고요. 피해자가 전기인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건 경찰은 알 수 없고, 1인칭 심리 묘사를 읽은 독자만 알 수 있는 장치라는 점에서도 재미있는 요소였습니다. 소설 속 경찰보다 독자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셈이니까요.

추리 부분도 정통 추리, 범죄 소설 느낌을 전해줍니다. 작가와 동일한 이름의 추리 소설가 요미사카 유지가 등장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한데,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세 명이 죽은 사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추리였습니다. 범인은 다카미네 노인으로 그는 구 일본군 관계자였습니다. 연구했던 전기 병기를 숨기고 있었고요. 그래서 비밀을 지키려고 조사에 나선 미하루를 살해했던 겁니다. 전기 병기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요. 호텔 방은 비상계단을 통해 들어와서 미하루가 문을 열어주면 아무도 모르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자동 잠금 장치가 되어 있으니 살해 후에는 그냥 나가면 되고요. 미하루에게는 뭔가 알려줄게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들어가는데는 문제가 없었을테지요. 
이후 노인이 욕실에서 사망한건 진짜 사고였고, 그래서 토오루의 죽음 이후 사건이 벌어지지 않은겁니다. 범인이 죽어버렸으니까요. 토오루는 노인이 방공호의 잠긴 문에 숨겨 놓았던 전기 장치에 감전되어 죽었습니다. 문이 빡빡하게 잘 열리지 않아서 한 손은 손잡이를 당기고, 다른 한 손은 문 틀에 대고 버티는 과정에서감전된 것이지요. 
이렇게 '전기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범행이 가능했다는걸 설명하는데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말은 되니까요.

물론 증거가 하나도 없을 뿐더러, 토오루의 죽음에 대한 추리만큼은 확실히 비현실적입니다. 아무리 노인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뒤라 하더라도, 사람을 감전시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 유지되고 있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 경찰의 수사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미하루의 죽음은 단순 변사로 처리하여 수사를 하지 않았더라도, 토오루의 죽음은 철저한 현장 조사가 수반되었을겁니다. 만약 장치가 있었다면 여기서 드러났어야 합니다. 비슷한 트릭이 사용되었던 "네 명의 의인"은 20세기 초엽이 무대로 그렇다쳐도, 현대 배경의 작품에서는 숨기기 어려웠을거에요.

어차피 이 추리는 작품 안에서도 단순한 아이디어 피력 정도로만 받아들여져서 별 문제는 없는데, 진짜 문제는 전기인간이 실제로 있다는 진상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전기인간을 볼 수 있는 초등학생 니라사와가 전기인간과 휴대폰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이 모든게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설명되는데 여러모로 별로였어요. 미궁에 빠진 괴사건에서 범인이 마지막에 나타나 스스로 범행을 고백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좀 더 세련되게 풀어나가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전개에 있어 정리도 다소 부족했습니다. 교수의 말은 반복적이고, 니라사와와 켄자키의 관계와 묘사도 불필요하게 느껴졌던 탓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7년에 출간되었던 "전기인간"의 리커버 버젼인데, 리커버 버젼이 나올 정도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생각보다는 괜찮았어요.

2024/03/15

내가 읽은 '잭 리처' 시리즈 별점 순위

미국 작가 리 차일드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나무위키에서는 하드보일드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저는 추리 요소가 가미된 무협지라고 생각합니다. 잭 리처의 인간 사냥, 무쌍 액션을 보는 재미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협지도 좋아하고, 악이 철저하게 멸망하는 권선징악 복수극도 좋아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국내 출간작 중 당장 구해볼 수 있는건 대충 다 읽었기에, 제가 읽은 작품들의 별점을 정리하게 되었네요.

현재까지의 제 베스트는 "메이크 미"(별점 3점)이며, 전체 평균 별점은 2점보다 살짝 높네요. 이 정도면 단순 킬링 타임용 액션물치고는 괜찮은 편이겠지요. 최소한 아주 시간 낭비까지는 아니라는 의미니까요. 가볍게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4/03/13

아쿠아맨 (2018) - 제임스 완 : 별점 2.5점

얼마전 개봉했던 2편이 아닌 5년 전 개봉했던 1편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시간 떼우기에는 좋더군요. 왜 메라가 옴의 계획을 반대하며 아서를 찾아와서 그를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왜 옴이 지상을 적대시하며 오션 마스터가 되려 하는지 등 상세한 설명보다는 액션과 화려한 볼거리에 집중한 덕분입니다.
액션도 합이 잘 맞추어져 있으면서도, 아쿠아맨의 강함과 메라의 능력이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시실리에서 블랙 만타 일당과 벌이는 거리 액션이 특히 눈에 들어왔어요. 환한 햇살 아래 펼쳐지는 슈퍼 히어로 무쌍을 보는건 정말 오랫만이지 싶더라고요. 해저에서 펼쳐지는 액션도 꽤 신선했어요.
배우들도 적역이라 보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제이슨 모모아는 비쥬얼부터가 강함, 능력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마초적이면서도 아주 가끔은 영리하고 섬세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엠버 허드의 메라는 비쥬얼로는 완벽에 가까왔고요. 덕분에 없던 설명(메라가 아서를 돕는 이유 등)도 왠지 설득되어 버리는 마법이 생기네요. 니콜 키드먼, 윌리엄 데포우, 돌프 룬드그렌! 등 유명 배우들의 출연도 반가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스토리의 개연성, 설명은 지극히 부족하지만, 블랙 만타의 탄생과 아쿠아맨에게 원한을 품는 과정도 꽤 설득력있게 그려져서 긴장감을 안겨줍니다. '아틀란의 삼지창'을 찾는 과정에서 '병 속에 지도가 있다'라는 말을 활용한 암호 트릭은 꽤 재미있는 설정이었고요.

한마디로 돈을 제대로 써서 만든, 킬링타임용 슈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교과서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이 영화를 보니 "블랙 아담"이 더 아깝네요. 이상한 설정을 집어넣지 말고 블랙 아담의 강함과 파괴에 집중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2024/03/12

여태까지 잘못 셌습니다. 정확하게는 1,212번째!

이전에 이런 글을 올렸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잘못셌더군요. "브라운신부 전집"의 "의심", "비밀", "스캔들"처럼 분명 다른 책인데 한 번에 리뷰를 올려서 같은 책으로 카운트 한 것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긴 장편이 분권되어 있는건 한 권으로 치고, 같은 책을 두 번 읽은 경우는 출판사가 다르면 카운트를 했지만 아예 똑같은 책은 카운트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준으로는 얼마전 올렸던 "10호실"은 오른쪽 카테고리 글에는 1,206번째 글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212번째 새롭게 읽은 책이 됩니다. 100번째부터 1,200번째까지 새로 읽고 리뷰를 올린 책들은 아래와 같고요.

100 :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2004.10.07)
200 : "여류 조각가" (2005.09.05)
300 : "사신 치바" (2008.02.28)
400 :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2009.11.25)
500 : "호수 살인자" (2011.02.19)
600 : "손 안의 작은 새" (2013.05.17)
700 : "살인을 부르는 수학 공식" (2015.03.02)
800 : "네버 고 백" (2017.02.17)
900 :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2019.06.21)
1,000 : "완전 범죄 연구" (2020.11.15)
1,100 : "심야의 손님" (2022.06.25)
1,200 : "스파이와 배신자" (2024.02.24)

숫자를 바로잡은만큼, 앞으로는 카운트를 잘 해가면서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24/03/11

십각관의 살인, 영상화


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찮게 예고편(?)을 보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핵심 트릭은 예고편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영상화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궁금하네요. 
3월 22일에 Hulu에서 독점 방영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디즈니 플러스에서 소개해 주려나요? 트릭 때문에라도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2024/03/10

10호실 - 리 차일드 / 윤철희 : 별점 2.5점

10호실 - 6점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아버지의 고향인 뉴햄프셔 래코니아를 충동적으로 방문하여 아버지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한편, 캐나다 출신 연인 쇼티와 패티는 새출발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중간에 차가 고장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래코니아 근처 모텔에 머물렀다. 그런데 손님은 그들 둘 뿐이었고, 자동차는 완전히 퍼졌다. 휴대폰 전파도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마크 외의 모텔 관리자들과 충돌도 빚던 둘은 어느새 10호실 방에 감금되어 버렸다. 알고보니 마크들은 사람을 활로 사냥하고 싶어하는 멤버들을 모아 거액을 받고 사냥감을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결국 쇼티와 패티를 사냥감으로 하는 활 사냥꾼들의 밤이 시작되고 말았다.


"웨스트포인트 2005"을 잇는 잭 리처 시리즈 23번째 작품. 원제는 "Past Tense"입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큼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출간 제목이 훨씬 좋네요. 원제(과거시제(?))는 잭 리처가 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이야기를 핵심으로 그린 듯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10호실에 갖힌 쇼티와 패티의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광할한 미국 대륙 외딴 곳에서 자동차가 고장나고,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도입부부터 마크를 비롯한 모텔 관리인 일당이 10호실을 CCTV와 마이크로 감시, 도청하여 둘을 농락하며 위험에 빠트리는 과정이 정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정비공인줄 알았던 카렐이 둘의 뒷통수를 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화룡정점이었고요. 둘을 위기에서 구해줄 은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냥꾼 중 한명이었을 줄이야!

마크 일당이 둘의 생명을 걸고 벌인게 인간 사냥 게임이었다는 진상도 꽤 신선했습니다. 장기 매매라던가 스너프 필름 등을 위한게 아닐까 싶었는데 인간 사냥은 생각도 못했네요. 진상을 드러내는 '이틀치 비상식량'에 끼워넣어진 '손전등'라는 중요한 단서를 수수께끼처럼 배치해서 흥미를 더하는 전개도 일품이었고요. 억지로 비상식량에 손전등을 끼워넣어 전해 준 건 밤에 벌어질 사냥 시간에서 도망갈 때 효과적으로 쓰라는 이유였거든요. 손전등에 GPS가 장치되어 본부(?)에서 추적할 수 있다는 이유도 크고요. 하지만 쇼티와 패티는 이를 무기로 활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악당들의 판단 착오였던 셈이지요.

완력이 쎄고 즉흥적인 계획에 강점이 있는 쇼티, 어느정도 추리력을 갖춘데다가 행동력도 탁월한 두뇌파 패티 캐릭터의 설정도 좋으며, 사냥이 시작된 후 둘이 머리를 짜내 위기를 탈출해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쇼티가 자동차들 휘발유를 이용하여 모텔에 불을 지르고, 앞서 설명드렸던대로 손전등을 활용하여 야간투시경을 무력화한 뒤 사냥꾼들을 처단하는 장면들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처가 아버지 과거를 조사하다가 마크의 모텔을 찾은 뒤, 모텔과 10호실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둘을 돕게되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가 완벽하게 짜낸 거짓말을 하나씩 분석하여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특유의 추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요. '제 3의 인물'로 마크 일당과 사냥꾼들이 방심한 사이에 그들을 급습해서 처치하는 장면도 잭 리처스러워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친해진 변호사 캐링턴이 위험에 빠졌을거라는 추리도 잘못 짚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반면 리처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은 별 재미는 없었습니다. 와중에 아버지가 과거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별다른 이슈가 되는건 아닙니다. 리처가 우연찮게 동네 건달을 혼내주고, 사과 과수원 주인 아들을 혼내주다가 킬러와 덩치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루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사냥꾼 중 둘이나 쇼티와 패티에게 당해버리고, 마크가 혼자 돈을 차지하기 위해 패거리들을 총으로 쏴죽인 뒤 달아날 생각을 하는 등 마지막 사냥 장면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줍니다. 특히 마크는 리처가 있다는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데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이 상황에서는 카렐을 죽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리처 시리즈가 아니라 쇼티와 패티를 주인공으로 한 별개의 작품이었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4/03/09

웨스트포인트 2005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웨스트포인트 2005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가장 먼저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탄 잭 리처.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산책길에 나선 리처는 전당포 앞을 지나가다 진열창에 놓여 있는 반지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리처가 졸업한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2005년도 졸업 반지. 4년에 걸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반지를 전당포에 맡길 졸업생은 아무도 없기에 리처는 반지의 주인인 여자 생도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추적에 나섰다.
반지가 흘러들어온 경로를 더듬어가던 리처는 FBI 출신 사립탐정 테리 브라몰과 의뢰인 매켄지와 함께하게 되었다. 매켄지는 실종된 여자 생도 세레나의 쌍동이 언니였다.
우여곡절끝에 세레나는 군대에서 입었던 치명적인 얼굴 부상으로 각성제에 중독되었다는게 밝혀졌다. 리처는 세레나의 치료가 안정될 때까지 필요한 각성제를 확보하고 밀매 조직을 괴멸시킨 뒤, 우두머리 스콜피오마저도 처리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잭 리처 시리즈 22번째 작품. 원제는 "Midnight Line"입니다. "메이크 미"에서 이어지는 작품으로 미셸 장과 헤어진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반지를 전당포에 맏길 졸업생은 없다'는 취지로 반지 주인을 찾아나서는 초반부는 흥미진진합니다. 졸업 성적도 우수했고, 여러 전장에 참전해서 훈장까지 탔던 졸업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큰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 훈장, 그리고 '항상 얼굴을 감추고 숨어있었던 여자'라는 단서가 세레나는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깔끔했고요. 이 추리는 독자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수준인데, 세레나와 함께 있다가 자살한 사이러스가 사타구니 총상으로 괴로워했다는건 신선한 아이디어였어요. 집안도 좋고 외모, 사지 멀쩡한 청년이 약물에 중독되어 결국 자살을 택한 이유가 없을테니 살해된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알고보니 너무나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니까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매켄지가 세레나의 언니라는걸 그녀의 빗으로 확인하는 장면, 그리고 세레나의 현재 소재를 사이러스의 집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결국 찾아내는 장면, 리처가 카우보이들에게 죽을 뻔 했을 때, 그들이 사실은 사이러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는걸 깨닫는 장면 등 리처의 추리력이 발휘되는 장면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진통제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주삿바늘같은게 아니라 TV에서 광고하는 제품을 소비하는 행위가 결국 마약 중독이라는 이야기로, 단순한 마약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제조, 판매되는 진통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문제를 고발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세레나가 은신한 곳이 '라라미' 근처의 깡촌 뮬크로싱이라는건 재미있었어요. 예~전에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라는 서부극 영화를 보고 잠깐 찾아봤을 때도 깡촌이라고 느꼈었는데, 지금 도 잊혀지길 원하는 사람이 은거하기 위해 선택하는 깡촌이라는게 신기했거든요. 한번 깡촌은 영원한 깡촌인거 같네요.

그렇지만 중반 이후는 다소 시시했습니다. 잭 리처가 세레나에게 이르는 과정도 끄나풀들을 찾아가 주먹질을 하고, 이미 죽거나 도망친 사람들의 집을 뒤지는게 전부입니다. 초반의 스콜피오의 부하들과의 대면, 그리고 스콜피오의 사주를 받은 카우보이들이 리처를 습격해서 죽이려하는 장면 외에는 위기도 전무하다시피 하고요. 
정교한 맛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콜피오가 정식 의약품을 빼돌릴 수 있었던 방법 역시 석연치 않습니다. 군대용 의약품을 빼돌렸고, 이를 눈치챈 사이러스의 고발이 무위로 돌아갔다는 등의 설명이 있지만 이보다는 더 정교한 계획이 필요했습니다. 
스콜피오를 뒤쫓는 래피드시티의 형사 글로리아 나카무라 시점에서도 전개도 가끔 보여주는데, 그리 필요했던 내용은 아니었고요. 오히려 나카무라 형사의 컴퓨터 범죄가 친구가 스콜피오가 산 휴대폰 번호를 추리해내는 장면이 더 볼만했어요.

전개가 시시한만큼 리처의 활약이 그걸 보상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이 작품에서 리처는 스스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습니다(스콜피오는 아마 죽었겠지만요)! 리처를 죽이려 했던 카우보이 중 한 명이 죽은건 오발 탓입니다. 마약상 스태클리를 죽인건 세레나고요. 리처는 놀랍게도 별다른 액션을 보이지 않습니다. 리처가 뭔가를 보여줘야 할 만큼 스콜피오 조직의 무력이 신통치 않은 탓도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리처 시리즈의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2024/03/08

봄 소재 미스터리 작품들

2024년 3월도 이미 1/3이 지나고 있네요. 아직은 조금 쌀쌀하지만, 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봄은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젊음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 가득한 미스터리 작품과 잘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벚꽃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던가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삼월은 붉은 구렁을" 같이 제목에서부터 봄이 떠오르는 작품들도 많지만 보통 봄은 단순히 무대 배경으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요. 
그래도 '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작품을 몇 편 찾아서 소개해드립니다.

첫 번째는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입니다. 하이쿠 동호회 회원 가타오카 소교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무연고자라는게 밝혀집니다. 회원 중 한 명이었던 나나오는 생전의 인연으로 왜 소교가 고향을 버리고 살게 되었는지?를 뒤쫓게 됩니다. 소교가 "원하건대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라는 싯구처럼 죽어갔기도 했지만, 소교의 사체가 발견된 방에 놓여있었던, 계절보다 빨리 벚꽃이 피어있었던 벚나무 가지가 다른 살인 사건의 증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봄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벚꽃은 일본에서도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소재이기에 봄을 무대로 한 다른 작품에서도 주요한 소재로 사용됩니다. 사보에 매월 연재되는 단편이라는 주제로 묶인 단편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의 첫 번째 이야기 "벛꽃이 싫어"에서 처럼요. 오래된 아파트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내용으로 봄 벚꽃놀이와 벛꽃잎이 중요한 단서로 등장합니다. 아파트 이름마저도 '사쿠라기장(桜木荘)'이니, 이 역시 봄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이 두 편은 살인 사건, 방화 등의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무겁다기보다는 잔잔하면서도 가벼운 일상계 느낌의 단편들입니다. 봄이 소재이자 배경이라면 앞서 말씀드렸듯 미스터리를 잘 결합시키는건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인 '미시마야' 시리즈 6번째 작품 "눈물점" 수록작인 시어머니의 무덤"은 "벛꽃이 싫어"와 똑같이 봄의 벚꽃놀이를 소재로 삼았지만, 섬찟한 괴담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같은 소재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게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괴담, 공포물로는 스티븐 킹의 "딸기봄"도 빼놓기 힘듭니다. 8~10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시기로는 봄이지만 아직도 추운 비정상적인 시기에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내용이거든요. 봄이 봄답지 않게 춥다면, 확실히 미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봄을 주요 소재로 삼은 미스터리 작품 중 제가 떠올린건 이 네 편입니다. 다른 분들의 추천과 생각도 궁금해집니다.
 
마지막으로,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2024/03/06

오무라이스 잼잼 13, 14 - 조경규 : 별점 2.5점 / 2점. 마지막일듯.

오무라이스 잼잼 13 - 6점
조경규 지음/송송책방

신간이 나온지 꽤 되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권은 코로나 펜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지 못해 급식을 먹지 못한다던가, 좋아하는 농구 직관을 가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강원도 원주까지 원정 직관을 하러 간다는 등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 가격이 제가 1권을 샀을 때 보다 많이 올라서 이제 정가 19,000원인데, 가격에 걸맞는 볼륨은 갖추고 있습니다. 거의 600페이지에 가까운 풀 컬러 인쇄본이니까요. 웹툰이라 페이지 내 여백이 많아서 정보량은 페이지수 대비 많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가격은 납득이 되는 수준입니다.
작가 가족의 이야기 비중이 높아져서 전형적인 가족 일상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과 요리에 대한 정보도 기대에 값합니다. 후추의 종류와 제조 방법, 딸기 우유의 빨간색을 내는 방법, 사우전드 아일랜드 샐러드 드레싱의 제조법과 역사, 대파와 양파의 차이 등 잘 몰랐던 여러가지 정보들을 언제나처럼 재미있게 소개해주고 있거든요.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초코 다이제 맛있게 먹는 방법"이었습니다. 초코 다이제를 차에 담갔다가 먹는 방법은 '이그 노벨상'까지 수상한 과학적 방법이라는군요. 꼭 한 번 따라해봐야겠어요.
조경규 작가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좋습니다. 다양한 튀김 덮밥들, 치킨 버거들 등등... 왠만한 사진보다 먹음직스럽고 예쁘게 그려져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웹툰을 이미 본 독자에게는 중요할 부가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독자분들이 뽑은 오무라이스 잼잼 베스트 에피소드는 책에 수록할만한 정보는 아니었고요. 
그 외 이런저런 정보 소개도 대부분 식당 탐방 수준이며, 김영환 선수 인터뷰는 농구팬이 아니라면 큰 관심을 가지기 힘든 내용이라 책 성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만화와의 연결고리를 가져가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이보다는 차라리 농구팀 식단같은 정보를 알려주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아울러 작가 가족 이야기 비중이 너무 과합니다. 예전처럼 조금 독특한 이야기도 없고요. 그냥 가족들과 뭘 먹으러 갔다, 준영이가 많이 먹는다 등의 이야기가 반복될 뿐입니다. 연재가 이어지면서 소재가 고갈된 탓일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무라이스 잼잼 14 - 6점
조경규 지음/송송책방
13권과 함께 구입한 14권. 14권이 되니까 드디어 20,000원으로 가격이 올랐네요. 물론 536페이지에 풀 컬러의 볼륨이라는 측면에서 비싸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요.

이번 권은 요리 관련 정보보다는 경험담 비중이 높더군요. 물론 요리, 음식 관련 정보가 아주 없는건 아닙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 해쉬브라운은 1887년 요리책에 '해쉬드 앤 브라운드 포테이토스'라고 처음 등장했는데, 생감자를 강판으로 채 썰고 녹말 제거 후 버터나 기름으로 지져낸 요리였다
  • 우리나라 마라탕은 2012년 대림동의 라화쿵부가 시초
  • 키세스 초콜릿은 키스하는 입 형태에서 따온게 아니라 19세기의 일반적인 작은 사탕의 통칭에서 따 온 이름이다었다.
  • 볶음밥을 달걀로 감싸고 토마토소스를 얹은 오무라이스는 홋쿄쿠세이가 원조로 오믈렛과 흰밥만 먹는 단골을 위해 변주해서 만든 요리가 시초, 렌카테이의 원조 오므라이스는 밥을 날달걀에 먼저 비비고 팬에 지져낸 것이다.
  • 미국식 멕시코 요리 텍스-멕스는 따지고보면 우리나라식 중화요리같은 것으로 이 중 구운 고기와 채소를 토르티야에 직접 넣어 만드는 화이타도 1969년 텍사스주 소도시 카일에서 '화이타 킹' 소니 팔콘이 처음 만들어낸 미국의 발명품.
  • 회오리 감자도 한국인의 발명.
등입니다.
작가와 제가 살아온 시대가 거의 같아서 저 역시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에피소드도 재미있었어요. 옛날 기차에서 팔던 그물망 포장 삶은 계란과 종이 포장 소금과 군대에서 전자레인지로 데워먹던 냉동 만두처럼요.

하지만 집에서 감동란을 만들어 먹고, 곤지암으로 소머리 국밥을 먹으러 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라탕을 먹으러 가고, 태국과 홍콩 등지에서 망고를 먹고, 인생 첫 순대국을 먹으러가고... 하는 식의 경험담은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보통은 경험과 함께 해당 음식의 역사를 함께 풀어주곤 했었는데 그런 내용도 많지 않고요. 은영이가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또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재미도 없고, 관심도 가기 어려운 이야기였어요.

이제는 완전히 가족 일상툰이 되어버린 느낌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다음 권은 연재분을 먼저 확인해봐야겠지만, 이대로라면 더 이상 구입해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조경규 작가 가족 이야기는 딱히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2024/03/03

나이트 스쿨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나이트 스쿨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6년 어느날, 잭 리처는 미 육군 수훈장을 받은 날 '학교'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학교'에서 리처는 FBI의 케이시 워터맨, CIA의 존 화이트와 만났고, 그들 모두 조직 최고의 요원으로 특별한 작전을 위해 소집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법무장단체가 '1억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어떤 미국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사려고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은 그 미국인이 누구이며, 팔려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작전에 돌입했다.
거래가 있던 독일 함부르크로 향한 리처는 목격자 설명에 따른 몽타쥬를 통해 미군 탈영병 윌레이가 범인이라는걸 밝혀냈다. 윌레이의 은신처는 그가 사용했던 가명을 통해서, 그리고 윌레이의 주변 사람들 증언을 통해 그가 팔아넘긴게 '소형 핵폭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지만 윌레이는 시체로 발견되고 마는데.....

잭 리처 시리즈 21번째 작품. 원제는 동일합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정체와 그가 팔려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전개는 일종의 첩보물을 연상케합니다. 첩보물에서 "숨어있는 적 정보원, 그리고 그가 확보한 중요 단서"를 찾으려는 설정, 과정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사물의 기본 얼개와도 비슷하기에 잭 리처의 추리도 많이 선보이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이미 드러난 윌레이의 가명들을 통해 그가 현재 쓰고 있는 가명을 추리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윌레이가 먼저 사용했던 가명은 '에른스트'와 '겝하르트'였습니다. 리처는 마지막 남은 이름은 '아이작 H. 켐프너'라고 추리합니다. 윌레이는 텍사스 슈거 랜드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텍사스 최초의 독일 정착촌을 설립한 에른스트, 텍사스 출신의 유명한 핫소스 창업자 겝하르트의 뒤를 이을 이름은 슈거 랜드를 이룩한 슈거 랜드의 아버지 아이작 H. 켐프너 뿐인 것이지요. 실제로 윌레이가 쓴 가명도 아이작 헤르베르트 켐프너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번안하자면 LG 트윈스 팬인 범인이 첫 가명을 "김용수", 두 번째 가명을 "이병규"라고 했다면 마지막 가명은 "박용택"이다!라고 하는 느낌이겠지요? 텍사스와 독일계 미국인에 대해 엄청나게 자세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추리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현장을 분석하여, 윌레이는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트럭을 항구 근처 창고에 숨겼을 것이다, 그 창고는 트럭 2대가 들어갈 양문형에 추가 잠금 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다는 추리도 좋았고요.

윌레이가 팔려고 했던 물건이 그가 입대 동기로 이야기했던 "데비 크로켓 때문에 군인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라던가, 유년 시절 함께 살았던 엄마의 정부 "삼촌"의 경력 등이 토대가 되어 천천히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도 합리적이며,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었어요. 미군이 냉전시절 개발했던 소형 핵폭탄이 착오로 버려진걸 윌레이가 확보했다는 정체도 괜찮았고요. 유럽과 미국이 '1'을 쓰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현재 위치를 찾아내었다는 아이디어도 그럴싸 했습니다.

"1030"의 니글리, 오로스코의 등장도 반가왔습니다. 만나는 모든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리처가 가장 신뢰하며 오래되었을 부하 니글리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밝혀지기도 하고요. (접촉 기피증)

하지만 이야기를 지나치게 길게 늘린 느낌이 듭니다. 앞서 대단한 듯 했던 '학교'에서의 멤버들 중 FBI와 CIA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실제 독일에서의 활약은 니글리와 오로스크라는 리쳐의 인맥과 독일 경찰 그리즈만이 활용되었으니까요.
윌레이가 거래가 마무리 되기 전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매춘부와 즐기다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범행은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윌레이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별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독일 경찰 그리즈만은 리처를 돕지만, 뮬러는 배신해서 극우 조직의 리더인 드레믈러에게 정보를 팔아넘긴다는 설정도 똑같아요. 극우 조직이 이 사건에 개입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범죄 조직과 극우 조직이 비록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는 있어도, 비교적 성공한 사업가인 드레믈러가 돈 때문에 물건을 빼았앗을리는 없어서 개연성도 부족합니다.
이런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윌레이를 보다 신중한 인물로 그린 뒤 그와의 대결에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여러가지 설정들은 이야기만 길게 만들었을 뿐으로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윌레이와 드레믈러의 최후는 시시하기까지 하고요.

타국에서 일종의 비밀 작전을 벌이는 것이라 액션이 별볼일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리처가 드레믈러를 제외한 악당을 아무도 죽이지 않아서, 다른 작품들만큼의 파괴에 대한 쾌감은 부족하거든요. 당연히 펼치는 액션과 무기에 대한 설명도 부실한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리처의 군 시절 활약이 펼쳐진다는 특이함은 팬으로서 기뻤지만, 전체적으로는 평작에 가깝습니다.

2024/03/02

출입통제구역 - 리 차일드 / 정세윤 : 별점 2점

출입통제구역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바니아, 우크라이나 조직이 양분하고 있는 이름모를 도시를 지나던 잭 리처는 강도를 당할 뻔한 노인 셰빅을 구해주었다. 셰빅은 알바니아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으러 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사채업은 우크라이나 조직으로 넘어가버렸고, 잭 리처의 기지로 노인의 빚은 탕감되었다. 하지만 셰빅에게는 딸 메그의 치료비로 거액이 더 필요했다. 리처는 셰빅을 대신하여 셰빅인 척 우크라이나 조직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그리고 집을 알아내려던 조직원들을 없애버렸다.
그런데 조직원들을 없앤게 알바니아 조직이라고 오해한 우크라이나 조직의 보스 그레고리는 복수를 명령했고, 두 조직은 서서히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리처는 메그의 보스 트롤렌코의 거처를 찾아 나섰다. 그에게 메그의 치료비 손해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롤렌코는 우크라이나 조직이 가짜 뉴스 배포를 위해 보호하고 있었다. 결국 리처는 두 조직 모두를 몰살시켜 버리고 말았다.


잭 리처 시리즈 24번째 작품. 원제는 "Blue Moon"입니다.
이전 "악의 사슬"에서 "피의 수확"이 떠오른다고 언급했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잭 리처 버전의 "피의 수확"입니다. 한 도시를 두 세력(우크라이나 - 알바니아)이 양분하고 있는데. 초반에 잭 리처가 저지른 살인을 서로 상대 조직에서 저지른 일이라 여겨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 잭 리처를 잡으려다가 각개격파당하고 내분까지 일으켜 자멸한다는 점에서 아주 흡사했습니다.
또 제가 보았던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잭 리처 본인의 무력이 가장 엄청납니다. 맨손은 물론 다양한 총기를 활용하여 수십 명의 악당 조직원 상대로 무쌍을 찍습니다. 조직원들 모두가 죽어 마땅한 놈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손속에 자비란 없습니다. 그냥 전부 죽입니다. 전체 킬 수로는 아마 시리즈에서도 탑일거에요. 아래처럼 딱 한 번 자비를 베풀긴(?) 했지만, 거의 죽은 상태의 상대에게 그냥 손을 더 대지 않았을 뿐이지요.
"숨을 쉬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 그게 나에게는 승자의 관용이오. 보통은 놈들을 죽이고, 가족들을 죽이고, 조상의 무덤에 오줌을 싸지."

리처가 '외로운 늑대'가 아니라 전 해병대, 기갑부대원들과 한팀이 되어 행동을 펼치는 전개도 독특합니다. 약간 "1030"과 비슷한데, "1030"보다 팀원의 활약이 오히려 많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했던 트롤렌코의 은신처 입구를 돌파하기 위해 조직원들과 체형이 비슷했던 반트레스카가 사로잡힌 조직원으로 변장하여 적들을 끌어내는게 핵심이거든요. 이외의 활약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요.
잭 리처의 말주변도 확실히 선보여 줍니다. 본편의 히로인 애비에게 "함께 가자"는 권유를 할 정도 상당히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잭 리처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인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잭 리처가 일부러 두 조직을 와해하려 했던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치밀한 작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악당들이 제발로 찾아와 죽어주니 작전이 필요할 이유도 없고요.
우크라이나인의 보스 그레고리가 사무실에 탈출구를 마련해두었다는 추리는 급작스러웠어요. 아무런 단서도 없었고요. 이치에 맞게끔 나름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솔직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좀 더 탄탄한 복선, 단서를 제공해주었어야 했습니다. 

트롤렌코의 위치 파악은 그나마 추리와 조사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낫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난공불락의 19층에 있던 경비원들이 케이지를 열고 나온다는 설정은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누가 들어와도 버틸 수 있는데 왜 밖의 일을 신경쓰겠습니까? 그레고리 조직이 괴멸해서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한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조직의 가짜 뉴스 관리 업무의 핵심입니다. 당연히 온갖 통신망이 연결되어 있고, 당연히 밖의 뉴스는 바로 알 수 있어요. 밖에서 별로 대단한 뉴스가 펼쳐지지 않는 한, 공격은 비공식적이며 빠르게 해결될거란건 짐작 가능합니다. 트롤렌코가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돈도 천만 달러가 넘으니 다른 조직이나 인력을 고용할 수도 있고요.
설득력없는 설정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애비는 물론 반코, 호건과 반트레스카처럼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는 지인들이 목숨을 걸고 리처를 도와 총격전에 뛰어든다는 것 처럼요.
러시아 정부가 가짜 뉴스를 뿌리기 위해 트롤렌코를 이용하고 있다는 설정도 과했습니다. 트롤렌코 이야기는 아예 빼고, 두 조직간의 암투를 조금 더 극적으로 그리는게 좋았을겁니다. 지금은 마지막 결전에서 악당들이 무모한 돌진을 감행하다가 차례대로 총에 맞아 죽으며 마무리되는데, 이보다는 더 박진감있게 풀어냈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역시나 1.5점에 더 가까운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적당합니다.

2024/03/01

원티드 맨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원티드 맨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네브래스카 시골 마을 펌프장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2인조 범인들은 마을 술집에서 일하는 카렌을 납치하고, 그녀의 차를 타고 도주했다. 하지만 2인조라는게 들통났기 때문에, 인원수를 속이고자 히치하이커 한 명을 태웠다. 그 히치하이커는 잭 리처였다. 맥퀸과 킹에게 수상함을 느낀 잭 리처는 어떻게든 카렌을 구하려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둘이 카렌과 함께 떠나는걸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FBI 수사관 줄리아 소렌슨을 만난 잭 리처는 그녀의 차를 타고 뒤를 쫓다가 불에 탄 카렌의 차와 변사체를 발견했다. 줄리아에게 수사를 중지하라는 기묘한 상관의 압박이 들어오는 와중에, 카렌의 딸마저 유괴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FBI에 이끌려 그들의 은신처로 향한 잭 리처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카렌과 만났다. 카렌의 정체는 테러 조직 '와디아'에 잠입한 FBI 수사관 맥퀸을 지원하기 위한 또다른 FBI요원이었다. 그녀를 덥치려던 킹을 죽이고 불태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탓에 맥퀸의 정체가 드러났고, 최소 8시간 이상은 걸릴 SWAT 팀을 기다리지 못한 리처, 줄리아, 카렌은 맥퀸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잭 리처 시리즈 16번째 작품. 작품은 14번째 작품인 "악의 사슬"에서 이어집니다. 15번째 작품인 "하드웨이"는 리처가 아직 군대에서 복무 중일 때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이지요.

한 때 유행했던 잠입 수사관이 등장하며, FBI 수사관 시점에서 수사가 이루어지는 범죄 수사극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히치하이킹으로 얻어탄 차의 3인조가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초반부터 잭 리처의 관찰력과 추리력이 잘 드러납니다. 그들이 똑같이 맞춰입은 셔츠는 자세히 보니 기업체 유니폼이 아니었고, 킹이 떠벌인 말과 다른 여러가지 오류들 - 3시간 동안 쉬지않고 달려왔지만 연료는 별로 줄지 않았다, 아무도 기름을 넣을 때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 이 대화 중에 속속 드러나며, 심지어 킹은 멤버인 카렌의 커피 취향마저 모르는 등 수상한 단서들이 계속 제시되거든요. 리처가 드러난 단서를 조합하여 내 놓는 추리들도 모두 합리적입니다.
범인들이 남긴 정보를 가지고 소렌슨에게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범인들은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며,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벌어졌다는 추리로 이어지며 이는 모두 사실로 밝혀집니다. 카렌의 딸을 왜 유괴했을까?라는 의문을 풀어나가는 '와이더닛' 방식 추리를 펼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1030" 리뷰에서 문제로 지적했었던 부분인데 말이죠. 참고로 납치한 이유는 카렌에게 딸을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카렌을 '은신처'로 옮길 때 그녀가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리처의 특기인 수학도 잘 활용됩니다. "지나쳤던 삼거리와 사거리의 비율은 2대 3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평균 13킬로미터였다. 땅딸보의 차에 남아 있는 기름으로는 대략 1시간을 달릴 수 있다. 따라서 그 1시간을 달린 뒤에도 리처가 킹과 맥퀸의 도주로를 그대로 쫓아가고 있을 확률은 약 650분의 1이었다."처럼 범인들을 제대로 쫓아갈 수 있는 확률을 순식간에 계산하는 식으로요.

'와디아' 조직이 일종의 뒷세계 은행으로, 핵 폐기물 본위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는 참신했고, 조직의 근거지인 구 미사일 격납고 설정과 묘사도 탄탄합니다. "메탈기어"스러운 잠입 액션물 분위기도 잘 살리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 잭 리처가 맨손보다는 콜트 자동소총, 글록 19와 17등 총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것도 이채로왔습니다. 이는 "사라진 내일"과 유사한데, 아무래도 대형 테러 조직이 상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악의 사슬"바로 다음 작품이라 코뼈가 부러진 채로 이동하는, 그리고 코뼈가 부러진게 굉장히 강조되는 묘사도 반가왔습니다. 시리즈 팬이라면 이런 디테일들은 즐거울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에서 스테일이 커지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다. 핵 폐기물을 보유한 테러 조직이 미국 캔사스 시골 농장지대에서 암약한다는건 비현실적에요. 최초 피해자가 CIA 지부장급 요원인데, 알고보니 CIA에 잠입한 와디아의 고정간첩이었다던가, 알고보니 카렌이 캔자스시티 지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FBI 본부 출신 잠입 요원이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러웠고요.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펌프장에서 맥퀸과 킹이 자기들 차를 타고 오지 않은 이유 등 세세한 디테일들은 설명되지 않거든요. 펌프장에서 피해자가 맥퀸을 공격했던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맥퀸의 정체(잠입 수사 요원)을 알아챘다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맥퀸을 죽일 이유는 없었거든요. 본부로 돌아가 죽이는게 맞지요. 우리편이 훨씬 많으니...
맥퀸의 수사가 이렇게 이어져야 했을 까닭 역시 모르겠습니다. 맥퀸의 GPS 정보만 보아도 테러범들의 본거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 진작에 타격해서 섬멸하지 않은걸까요? 맥퀸이 사로잡힐 때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우리 쪽 '좋은 사람' 들이 죽어나가는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착한 시골 마을 보안관인 굿맨의 죽음이야 그렇다쳐도, 줄리아 소렌슨이 저격총에 맞아 사망한다는건 황당했어요. 리처의 분노에 불을 붙여 홀로 테러리스트들을 섬멸한다는 이야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이런 설정 없이도 리처라면 충분히 혼자서 쳐들어가 악을 물리치고 맥퀸을 구해냈을 겁니다. 지나친 흥미 본위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와디아 조직이 줄리아를 저격해서 죽였다면, 당연히 경계 태세를 강화했어야 했는데 이를 대충 퉁치고 넘어가는 전개도 어설퍼 보였고요.
마지막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카렌이 등장하여 리처를 구해준다는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히치하이킹을 했는데, 차 주인이 알고보니 살인범'이라는 설정을 살린 수사물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