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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2

스파이더 맨 브랜드 뉴 데이(2026) -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별점 4점

지금 최고 흥행작이죠. 마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OTT를 통해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왜 리뷰가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번 작품은 오랫만에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가장 돋보인 건 액션입니다. 화끈하고 속도감 넘칩니다. 특히 초반의 1인칭 시점 질주, 활강 장면은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연출이라 신선했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도 적절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진 그레이가 점프하듯 다른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CG가 필요없는 아날로그적인 촬영으로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구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탄탄한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진 그레이가 벌이는 일종의 테러에는 V-Max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이는 나중에 진이 갇혀 있던 연구소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브랜드에서 유래되었다는게 밝혀지면서, 진의 언니 세라가 연구소에 감금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과거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단서가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고, 동시에 진 그레이의 행동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구성인데 아주 훌륭해요. 복선을 제시하고 회수하는 과정도 깔끔하고요.

중반에 진이 MJ의 육체를 강탈했지만, MJ인 척 피터 파커를 속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이 역시 진의 농간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의 가공할 능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켜 주거든요. 

블랙 위도우와 헐크 등 다른 마블 히어로들의 등장도 반갑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퍼니셔와 스파이더맨의 조합이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보면 잘 어울리는 콤비는 아니지만, 상극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의외로 잘 맞습니다. 피터 파커가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퍼니셔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등 개그 장면들이 아주 발군이에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피터 파커가 MJ를 잊지 못한 채 4년이나 홀로 지내며 괴로워한다는 설정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21세기 MZ 세대의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MJ 역의 젠데이야가 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외모를 갖췄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고요.

마지막 절정부도 조금 아쉽습니다. 영화의 중심이 강력한 슈퍼 빌런과의 대결보다는 피터 파커 내면의 사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액션 대결이 없습니다. 핸즈와의 대결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질 것 같지 않은 상대라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마블 영화와 세계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100% 즐기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신선한 아이디어, 적절한 유머에 잘 짜인 이야기를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2026/04/18

장송의 프리렌 : season 2 (2026) - 키타가와 토모야 : 별점 4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모두 10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Season2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구성이라기보다는, 각 화가 비교적 독립적으로 완결되는 형식에 가까운 흐름을 보여주는게 특징입니다. 긴 호흡의 대서사 대신 에피소드별로 잔잔하게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이어지거든요. 특히 프리렌이라는 작품의 핵심인 '과거의 모험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천천히 되짚는다'는 테마를 이야기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이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마을, 예전에 접했던 풍경들, 예전에 함께 보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만남과 사건을 통해 다시 의미를 얻게 되는데, 화려한 사건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힐링물로서의 매력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잔잔한 것만은 아닙니다. 웃음을 섞는 타이밍이 좋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소소한 재미도 살아 있으며, 필요할 때는 액션의 밀도도 충분히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액션 쪽에서의 만족도도 높습니다. 이번 시즌의 핵심인 마족 "신기의 레볼테"와 맞서는 에피소드는 비교적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데, 묵직하고 진지한 전투 연출에 더해 캐릭터들의 협력 구도가 돋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슈타르크와 게나우가 연계하여 레볼테와 싸우는 장면은 이번 시즌의 백미라고 부를 만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움직임과 타이밍이 잘 맞물린 연출로 마지막 순간까지 긴박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그 외, 주제가도 좋고 작화도 안정적인 등 단점을 찾기 어려운 좋은 작품인데,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여행, 모험에 대한 목적 의식이 다소 흐릿하게 느껴진다는 점 정도입니다. 게다가 잔잔하기까지 해서 긴 이야기 중간의 쉬어가는 부분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드네요. 다만 이건 단점이라기보다는, 본래 이 작품 특징에서 비롯된 셈이라서 불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분위기를 이어서 다음 시즌이 더 빨리 나와 주기 바랍니다.

2026/03/08

왕과 사는 남자 (2026) - 장항준 : 별점 4점

장항준 감독의 천만 관객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를 다루는 사극은 왕위 찬탈 과정이나 권력 다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폐위되어 귀양을 간 단종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시점이 가장 돋보입니다. 단종의 삶을 중심에 두며 세조는 나오지도 않고, 한명회가 빌런 우두머리인 사극은 처음 봤는데 굉장히 신선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크게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사료를 토대로 실제로 있었을 법하게 자연스럽게 구성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습니다. 폐위된 뒤 나약한 모습으로 살아가며 죽을 기회만 찾던 단종이 점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덕분이에요. 동시에 단종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려는 한명회의 계략, 금성대군의 역모가 함께 펼쳐지며 발생하는 긴장감도 제법입니다. 여기에 단종과 민초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엄홍도의 인연과 에피소드들도 큰 재미를 전해 줍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합니다.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과 한명회 역의 유지태의 경우 외모, 발성 등 모든 면에서 두 인물의 대비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이에요. 특히 거대한 체구부터 위압감을 전해주는 한명회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유배지 영월과 음식들 연출도 발군이에요. 이런 디테일이 이 영화의 큰 힘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크게 느껴진건 유해진의 연기입니다. 엄홍도라는 인물이 아니라, 익히 알고 있던 '유해진'이라는 인물 모습 그대로였던 탓입니다. 엄홍도라는 인물에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이게 좋은 연기였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등장도 조금 아쉬웠어요. 단종이 왕으로 각성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삽입된 장면이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CG가 어색하게 느껴졌고 현실성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신파적인 연출도 약간 과한 느낌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가셔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누이가 됩시다”, “차가우셨지요?”로 이어지는 3연타는, '이래도 안 울꺼야?'라는 감독의 의도가 너무 강했어요. 차라리 여운을 좀 더 길게 남겨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고 완성도도 안정적인 작품입니다. 천만 관객을 기록할 정도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크게 빠지는 부분 없이 잘 만들어진 사극 영화라는 점은 분명해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옆 자리에 앉은 딸아이가 거의 오열하면서 보던데 과연 엄홍도가 죽었어도 저렇게 울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는 했습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양억관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4/04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김성준, 김주식 : 별점 4점

미친 항해 - 8점
마이크 대쉬 지음, 김성준.김주식 옮김/혜안

마이크 대쉬가 집필한 역사 논픽션입니다. 1628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바타비아 호가 이듬해 6월, 현재의 소호주 해안 인근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한 뒤 생존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BBC History Magazine과 History Today 등의 권위 있는 역사 전문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항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선장이었지만, 직급상 최고 책임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대상인' 프란시스 펠사아르트였습니다. 선장 야콥스와 펠사아르트 사이의 갈등은 여자 문제 등으로 항해 중부터 깊어졌고,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부상인'이자 전직 약제사였던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였습니다. 그는 선장을 꼬드겨 선상 반란을 모의했는데, 바타비아 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면서 계획이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사아르트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바섬으로 떠난 틈을 타서 코르넬리스는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체계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식량과 식수를 가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서, 반항할만한 불순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펠사아르트가 구조대를 이끌고 보물을 회수하러 돌아오면, 그 배를 점령해 해적 생활을 하려는 계획으로요. 그래서 병자와 노약자,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약 115명에 달하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계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회수할 보물이 많기에 구조대 인원이 많지 않을거라는 코르넬리스 생각대로 구조대가 움직였거든요. 그러나 말라 죽으라는 의도로 다른 섬으로 보내졌던 위이버 헤이스와 건장한 남성들이 우물을 발견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코르넬리스의 학살을 알게된 후 방어 거점을 구축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코르넬리스는 친위대를 이끌고 위이버 헤이스를 속이려다가 사로잡혔고, 코르넬리스의 후임이 일당들과 함께 위이버 헤이스 섬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대상인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스럽다고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라웠어요. 여튼, 위이버 헤이스와 코르넬리스 세력은 각각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으로 사람을 보냈고,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에서 위이버 헤이스가 이겨서 폭도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코르넬리스의 음모는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난파 후 서사만으로도 영화나 소설로 각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코르넬리스가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학살을 지시하며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세계 전생물'로 바꾸어 보아도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와 조직(동인도 회사)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종교론과 조직에서의 직위를 무기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는게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저자 마이크 대쉬는 방대한 사료 조사와 기록 분석을 통해, 사고 외에도 각 인물의 생애와 심리, 사회 구조적 배경까지 책에 촘촘히 담아냅니다.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가 처한 시대와 개인적 몰락, 종교적 배경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업 구조와 식민 경영 방식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납니다. 실제로 코르넬리스의 생애만 따로 정리한 분량이 3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이 꼼꼼하게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놀라운 수준입니다. 코르넬리스의 아내에 대해서까지 최대한 조사해서 수록했을 정도니까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당시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설명 역시 상세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항해 중 먹거리 설명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바다 고기를 낚으면, 누가 고기를 낚든 매일 맨 처음 낚은 고기는 선장의 몫이었고 그 다음 12마리 정도는 상인과 사관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인정된 순서에 따라 고기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게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그래서 선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조림에 든 고기와 콩, 건빵으로 알려진 딱딱한 빵인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는 음식의 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 도축한 돼지와 소를 사들여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피도 빼내지 않은 채 바닷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리된 고기는 쌌지만, 아주 짜서 조리를 하려면 청수에 담가 짠 맛을 빼내야 했는데, 항해 중에는 한정된 식수를 절약하기 위해 바닷물에 넣어 끓였다는군요. 얼마나 짰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말린 생선도 싣고 다녔는데, 대구가 대부분이었다네요. 말린 대구는 스튜로 끓여서 역 시 말린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함께 먹었고요. 그 외 먹거리들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호 선원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잘 먹고 잘 마신 편이라는게 충격적입니다. 부과된 노동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가혹했던 항해에 대한 설명 등 재미있는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이렇게 재미와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 모두 빼어난데, 코르넬리스가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이라던가, 후일담 이후 코르넬리스가 정신병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 비중이 지나치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들 후예가 살고 있을거라는 추측도 마찬가지고요. 섬에서의 학살도 논픽션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책의 디자인과 구성도 옛스러워서 읽기 불편했고, 도판도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입니다. 난파에 대한 논픽션을 세 권째 읽게 되었는데 - "바다 한가운데서", "메두사 호의 조난" - 대체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장르인 것 같네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3/14

기차 시간표 전쟁 - A.J.P. 테일러 / 유영수 : 별점 4점

기차 시간표 전쟁 - 8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페이퍼로드

이 책은 1914년 7월 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는 전쟁이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강대국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기차 시간표와 병력 동원 계획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각국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군대 동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동원을 빠르게 마쳐야 했고, 이에 따라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이동시키는 계획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병력과 수천 대의 열차가 동원되는 만큼, 계획이 한 번 실행되면 중단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각국은 병력 동원을 상대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일종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원이 시작되면 이를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양면전 가능성을 고려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고, 다른 나라들도 부분 동원만으로는 전면전에 대비할 수 없어 연쇄적으로 동원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상대를 위협하려던 동원 계획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했던 동맹 및 외교 관계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입니다. 유럽 열강 간의 동맹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타협을 원했으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며 개입했습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명확한 대응 방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독일이 터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고, 영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군을 동원하면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했습니다. 독일 황제는 세르비아가 제시한 조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전쟁 준비가 진행된 후였습니다. 결국 1914년의 전쟁 위기는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강대국들의 경직된 대응으로 인해 확대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곧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각국의 황당하고 순진했던 생각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탁상공론과 연구만 오갔던 무능했던 각국 군사 작전 계획들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다들 말도 안되는 동원 계획 등으로 꿈만 꾸고 있었다는걸 잘 알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슐리펜이 여러 해 고심했던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는 계획 - 은 프랑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던가, 슐리펜이 오랫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프랑스가 어느 때인가 알아차리고 길을 막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난건 외교를 맡은 관료들 책임이 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합국이 전범으로 지목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야말로 '베오그라도 정지'를 제안하는 등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시도를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더라고요. 소위 군국주의 군주들을 온화하고 선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정치가들이 말한 바를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모든 결정권이 군주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쟁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합니다. 

1차 대전 불씨를 당긴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왜 암살을 시도했는지 -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이 나머지 민족을 지배했는데, 마침 세르비아가 터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었기 때문에 - 부터,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이 암살범 프린치프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수상 파시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 처음 폭탄 투척 사건에서는 암살에 실패했었지만 대공이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병원으로 갈 때 암살당했다는 사건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물론 범인 일당에 대한 재판 결과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당은 사형당했지만, 미성년자였던 프린치프는 사형을 면했다고 하네요. 수백만 명이 죽은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감을 안고 여생을 보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주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도판도 충실하고, 책의 장정과 디자인 모두 빼어납니다. 다만 '기차 시간표'가 중요한 핵심 소재는 아니고 일종의 키워드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시작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관련된 인물들과 국가들의 결말은 다른 경로로 알아 보아야 한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1/12

장송의 프리렌 : season 1 (2023~2024) - 사이토 케이이치로 : 별점 4점

용사 힘멜 일행이 마왕을 물리치고 80년이 지난 후,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 용사 힘멜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총 28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정통 판타지 설정인데도 잔잔한 힐링물 성격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프리렌이 추억을 되새기고 새로운 기억을 쌓는 여행 와중에 드러나는 소소한 추억들 - 힘멜이 동상을 세우는 이유, 프리렌이 꽃밭을 만드는 마법을 좋아하는 이유 등 - 은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힘멜이 경련화 반지를 선물하는 장면은 정말 희대의 명장면이었고요.
장명종 종족이 단명종 종족과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던전밥"의 마르실이 떠오르기는 했는데, 슬픔을 극복하기 어려워하는 마르실과는 다르게 프리렌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더군요. 장명종으로 시간을 개의치 않는 성격도 곳곳에서 드러나서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단순한 레벨업 구조를 벗어나, 캐릭터들의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돋보입니다. 괴물 한, 두 마리 잡았다고 레벨이 오르는게 아닙니다.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해서 실력이 오르는 것이지요. 당연히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더 쉽게 성공하기는 하지만, 그건 현실도 그러하니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계관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인 프리렌조차 마족을 쉽게 이기기 위해 마력을 숨기는 속임수를 쓰는 등, 마법사들의 대결에서는 레벨 대결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걸 일관되게 주장하는 점도 좋았고요.

힐링물임에도 액션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슈타르크와 홍경룡의 격투나 마족 단두대 아우라 일당과의 전투는 강렬한 작화와 연출로 박진감을 더해 줍니다.
소소한 개그씬들, 귀여운 캐릭터들 역시 매력적이에요. 특히 어린 시절의 페른은 너무 귀여웠어요. 피규어가 출시되면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수천년을 살아왔지만 귀여운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프리렌도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다만 중반 이후의 1급 마법사 시험 이야기는 아쉬웠습니다. 정통 판타지의 힐링물이라는 방향성이 흐려지고, 배틀물로 변질된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마법사의 등급 구조나 마법 상성 설정, 마법사들이 주요 마법 하나에 의존한다는 설정은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왜 다른 마법을 배우지 않는걸까요? '닌자물'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징어 게임"이 떠오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 시험을 이렇게 길게 끌고갈 필요도 없었고, 마력의 양으로 승부가 나는 상황도 시험의 필요성을 떨어트린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이럴 거라면 목숨까지 걸어가며 시험을 치룰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마력 순으로 줄세우기를 하면 되니까요. 애초에 프리렌이 1급 마법사 시험을 치루는 상황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북부 제국은 위험해서 1급 마법사만 갈 수 있다는 이유인데, 현 시점에서 마족을 가장 많이 죽인 마법사는 프리렌입니다. 시험을 보는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보내주는게 타당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누가 보아도 재미있을 작품입니다. 제 딸 아이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10/20

히트의 탄생 - 유승재 : 별점 4점

히트의 탄생 - 8점
유승재 지음/위즈덤하우스

1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장수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알려주는 책. 미시사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제품과 브랜드의 역사 뿐 아니라 그걸 만든 사람들, 장수하게 된 이유, 광고 및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폭넓게 알려줍니다. 무려 25개의 항목이나 되어서 양도 풍성하고요.

덕분에 새롭게 알게된 정보들이 많은데, 몇 가지 소개해드립니다.

샘표 간장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수 브랜드로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는 '몽고 간장' 이름의 유래입니다. 몽골에서 전래된건 아니나,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더군요. 마산에 고려 충렬왕 시절,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겠다며 여몽 연합군을 주둔시켰던 곳에 군사들 식수공급을 위해 건설한 우물 '몽고정'이 있습니다. 이 몽고정을 수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몽고간장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한 겁니다.

'메리야스'는 일본말이 아니라 스페인어 '메디아스Medias' 혹은 포르투갈어 '메이아스Meias'가 일본을 통해 전해지면서 일본식 발음이 더해진 말로 원래는 상의나 내의가 아닌 '양말' 또는 '스타킹'에 가까운 뜻입니다. 오늘날 백양을 있게 만든 대표 상품은 흰색의 민소매 러닝셔츠인데 백양이 1958년 아염산소다를 활용한 표백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후 나온 상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입는 속옷의 사이즈 구분은 백양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1960~70년대 백양, 쌍방울과 함께 내의업계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던 '독립문'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향복 선생이 창업한 회사로,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며 보던 독립문을 떠올리며 정한 브랜드입니다. 1947년 '대성섬유공업사'로 시작한 사업이 확장해가면서 1953년 '평안섬유공업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듬해 1954년 5월 독립문을 상표등록했습다. 김향복 선생이 평안도 출신이라 회사 이름에 평안이 들어갔는데, 1971년에 평안섬유공업의 영어 이름을 따서 피에이티PAT(Pyong An Textile)를 새롭게 출시, 내의에서 성인 캐주얼 브랜드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나다. 지금도 건재한 코뿔소 브랜드인 PAT인데, 독립 운동가가 만든 브랜드라니 앞으로 관심을 더 가져야 겠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박카스를 마시면 피로가 풀릴까?"에 대한 답도 알려줍니다. 박카스는 비타민B의 일종인 니코틴산아미드와 카페인 등을 함유하고 있어서 각성 효과와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생성해준다네요. 지속 효과는 극히 짧아서 그야말로 반짝 하고 느낄 뿐이라지만요.

마몽드는 광고 캠페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어서 흥미로왔습니다. 이영애의 "산소 같은 여자' 시리즈가 마몽드를 국내 최고의 브랜드로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하네요. 프랑스어로 '나의 세상'을 의미하는 브랜드 이름처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식이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 "나의 삶은 나의 것", "성취는 남자의 것만이 아니다" 등 여성의 심리적 욕구를 자극하는 카피도 강력한 위상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고요. 마몽드가 매출 1천억 원을 넘었던 해에 출시한 라네즈는 마몽드보다 더 빠르게 1천억 원 매출 벽을 넘어섰는데, 이 역시 유명한 "영화처럼 사는 여자' 캠페인이 주효했던 덕분입니다. 태평양은 1970년대부터 광고마케팅에 많은 비용을 투입했고 많은 히트 캠페인을 남겼지만, "산소 같은 여자"와 "영화처럼 사는 여자"는 태평양 뿐 아니라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 나아가 광고업계 전체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법한 명작 캠페인이라고 합니다. 타깃 고객인 여성들의 심리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적절히 반영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콘셉트를 바탕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면서, 장기간 지속하며 브랜드 자산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도 아직 생생할 정도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몇몇 브랜드, 제품명의 유래도 재미있었습니다. '트리오'는 그릇 외에도 야채와 과일까지 세 가지를 모두 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군요. 처음부터 설거지 외에도 농산물을 씻어 먹을 수 있는 세제로 고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라운을 대표하는 '죠리퐁'은 뻥튀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다양한 곡물을 가지고 실험한 끝에 1972년 출시한 과자로, 처음에는 먹어서 즐겁다는 의미의 '조이 Joy'와 뻥튀기를 의미하는 '퐁'을 합성하여 '조이퐁'이라 했지만, 동일상표가 등록되어 있어 같은 의미를 지닌 '졸리Jolly'로 대체해 '죠리퐁'이 된 것이있고요.

모나미의 '사인펜'과 '매직'도 사인하는데 편리하다는 뜻의 사인펜, 신기하게 어떤 표면이라도 쓸 수 있다고 해서 매직펜으로 이름을 붙였던건데, 이제는 보통명사로 굳어져서 국어사전에까지 올라가 있다고 하네요.

이 외에도 여러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하고, 브랜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잘 알 수 있어서 유익했는데 딱 한 가지, 너무 많은 제품들이 소개되는 탓에 다른 책이나 자료에서 접했던 제품들 - 호빵, 활명수, 박가분, 삼양라면 등 - 이 많고, 최근까지 위상이 살아있는 제품들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비슷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브랜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7/21

모래그릇 (砂の器) (1974) - 노무라 요시타로 : 별점 4점


마츠모토 세이초의 대표작을 1974년도에 영화화한 작품. 원작을 읽기는 했었는데 수십년 전이라, 잘 기억나지 않아서 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굉장히 잘 만든 영화입니다. 연기, 촬영은 물론 음악까지 모두 빼어납니다. 특히 히데오의 아버지가 나병에 걸린 뒤 부자는 정처없는 떠돌이가 되었는데, 카메다케 마을 순사 미키 켄이치의 설득으로 아버지는 히데오의 장래를 위해 수용소 행을 택했고, 결국 수용소로 떠나는 기차역으로 히데오가 달려오는 장면과 음악가가 된 와가 에이료(히데오)의 신곡 '숙명(사다메)'이 발표되는 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클라이막스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정적인 촬영과 장엄한 음악이 잘 어우러진 명장면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음악에 가장 많은 돈(300만엔)을 쓴 작품이었다는데,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리 영화로도 괜찮습니다. 이마니시와 요시무라 형사가 살해된 피해자의 사투리와 했던 말을 토대로 행적을 추적하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입고 있었던 옷과 한 여성이 잘게 자른 종이 조각을 흩뿌렸다는 신문 기사를 연결하여 기차 선로 주변을 뒤져 종이 조각이 아닌 '옷' 조각을 찾아내 피해자의 혈흔이 묻어있다는걸 밝혀내는 등의 뚝심있는, 발로 뛰는 수사를 잘 묘사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장된 연기 방식 등 다소 낡은 티가 느껴지는건 어쩔 수 없지만, 구로사와 아키라가 건재했던 일본 영화계 전성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7/13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점

눈의 황홀 - 6점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

'많은 발상가들이 생각의 도구로 사용한 ‘개념’이나 ‘형태’, ‘방법’ 등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탐색한 책이다. 다양한 ‘개념’, ‘형태’, ‘방법’ 중에서도 쌍[對]이라는 관념, 속도, 원근법, 나선, 추상 표현, 스트라이프, 콜라주, 레디메이드, 데포르메, 오브제 등 인간의 눈을 현혹해 온 18가지 테마의 기원과 변천을 묻는다. 이 과정에서 마쓰다 유키마사는 비주얼 문화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인류 가치관의 변천이 갖고 있는 놀라운 반전들을 보여 준다.'는 책 소갯글에 혹해서 구입했습니다. 

이러한 개념, 형태, 방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자의 개인적인 주장이 강하기는 하지만, 뒷받침되는 근거들이 방대하고 역사적인 깊이도 느껴졌습니다. 자기 주장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데 굉장히 능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궁금했었던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는 주장들이 특히 흥미로왔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가 동서 종교관의 차이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서양의 일신교는 수직 지향이며, 이를 통해 수직선 끝에 한 사람의 신이 있는 소실점이 등장했다고 하는데, 요약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도판, 사료가 많아서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추상 표현을 기차의 도입과 연결시킨 발상도 기발했습니다. 늘 보던 풍경이 기차의 속도로 왜곡되어 보였고, 이를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으로 잘라낸게 추상파의 뿌리일 수 있다는건 생각도 못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크 로스코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디자인 전공자라 '폰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편인데(이런 책을 읽었었지요), 폰트와 타이포크라피의 역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의 주장으로는 구텐베르크의 좁고 날카로우며 새까만 블랙 레터체(고딕체)는 성서에 위엄과 무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에서는 이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해 경멸했던 고트인의 문자(고딕체)라서 거부했고, 고대 로마 서체야말로 로마인에게 어울린다며 '로마체'를 부활시켜 사용했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프랑스에서 사용된게 올드 로마체를 대표하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가라몽체' 였고요. 그리고 서체, 타이포그라피 요소만으로 아름다운 지면을 만들어내려 했던 영국의 존 바스커빌이 18세기 모던 로마체를 도입했고, 뒤이어 이탈리아의 보도니가 완성하여 산업 혁명에 적합한, 공업 제품으로서의 활자를 만들어 냈다는군요. 이러한 주장과 함께 문자 레이아웃 디자인의 발전사도 설명해주는데, 지금 보아도 기발한 시도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외에도, 청각을 시각화한 것의 대표는 '악보'이다, 토기로 끓이는 요리 때문에 주기성-시간 관념-과 재분배에 의한 문명이 생겨났다는 등 한 번 읽어볼만한 주장이 가득하며, 주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판도 많아서 시각적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최초의 자동판매기 설명과 도판은 이런 책이 아니면 어디서든 찾아보기 힘든 자료일테니까요.

대부분 일본 중심으로 동양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류의 주장을 펼 수 있는 전문가가 나와주면 좋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7/03

테라코타 전사들의 수수께끼 (2024) : 별점 4점

넷플릭스에 올라온 신작 다큐멘터리. 관련 책도 몇 권 읽어보았을 정도로 진시황릉을 다룬 이야기는 좋아하기에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시청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미국인들의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거리 발굴에 그치는게 아닐까?', 진시황릉에 집중한 관광 홍보물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진시황릉 자체보다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진시황릉 주변 발굴 결과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우선 황릉과 그 주변 조사를 통해 심각한 인위적 훼손이 있었다는걸 알려줍니다. '테라코타 전사들'이 모두 부서지고 흩어진채 강한 불길에 휩싸였었고, 주변 건축물들 위치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너지고 불탄 흔적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클라이막스는 황릉 근처에서 발굴된, 크고 제대로 된 무덤의 주인이 누구냐는 조사입니다. 진시황 사후 1년 남짓한 기간에 매장되었는데 과연 누구였을까요? 호해를 제외한 황족들은 대부분 참살당했고, 유명한 장군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이 다큐는 역사 추리물의 느낌을 물씬 풍기며, 여기에 더해 당시를 충실히 재현한 드라마가 함께 펼쳐져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호해와 조고는 다른 관련 그 어떤 영상물보다도 잘 어울려보였어요.
다큐스러운 부분도 놓치지는 않습니다. 황릉 주변에서 발굴된 유골로 당시 후궁들이 사체가 토막난 잔혹한 형태로 순장당했다는 것, 왕자와 공주들도 떼죽음 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식으로요.

하지만 다큐로서의 한계도 명백한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 그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 수수께끼인 황릉을 덮친 인위적인 재해가 무엇이었는지?부터 본다면, 이는 당연히 항우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의 파괴 행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란군에게 수도가 점령당한 뒤 3개월 동안 불탔다는 역사적인 기록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큐에서는 가능성 정도만 언급하며, 명확한 답은 피하고 있습니다.
황릉 근처 무덤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큐에서는 "사기"에서 언급되었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신 황릉 근처 매장을 허락받은 '고 황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론합니다. 발굴된 치아로 주인공이 20대 청년임을 확인할 수 있기도 했고요. 그러나 다큐에서는 훼손이 심해 복원과 조사에 오랜 시간이 걸릴 관을 통째로 연구실로 옮기는 장면으로 마무리될 뿐입니다. 추후 관에서 인장같은 증거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속 시원하게 답을 내 주지는 않아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깊은 흥미를 자아내는 좋은 시청 경험이었습니다.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5/24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2015) - 죠지 밀러 : 별점 4점


후속편이자 프리퀄이라는 "퓨리오사"가 엊그제 개봉했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서야 전작을 감상했습니다. 발표되고 거의 10년 만이네요.

저는 오래 전, 죠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시리즈를 거의 실시간으로 감상했던 세대입니다. 80년대 당시에는 정말 충격적인 세계관이었어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자동차 폭주족' 무리가 지배하는 지옥으로 그려낸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놀라왔어요. 이를 뒷받침해주는 여러가지 무대 장치와 미술들도 굉장한 볼거리였습니다. 멜 깁슨의 상마초 카리스마도 대단했었고요.
후대에 미친 영향도 엄청났습니다. 단적인 예로, 여기서 모든걸 다 가져다 쓰면서 '폭주'만 '권법'으로 바꿔치기한게 바로 "북두의 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으로 바꾸면 "패미코만도 류"일테고.... "워터 월드"도 사막화 된 세상을 침수된 세상으로, 자동차 폭주를 해양 액션으로 바꾸는 등으로 정 반대 방식으로 베껴낸 표절작입니다. 그 외의 아류작들은 한 둘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원조의 창조자가 노구를 이끌고 직접 감독하여 만들어 낸 신작은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군요. 무엇보다도 80년대에는 예산, 기술의 문제로 구현하지 못했을 화면을 마음껏 그려낸 액션! 액션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폭주'와 기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결합을 제대로 선보이면서도, 화끈함을 잃지 않는 멋진 장면들이었어요.
전작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진화한 설정도 멋졌습니다. 임모탈 조와 그를 숭배하는 워보이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당연하다 싶을, 자동차와 엔진 등을 숭배하며 '8기통'을 외치는 모습이 아주 그럴싸 했습니다. '밈'으로 유명해져서 보기는 봤지만 맥락을 몰랐던 "기억할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주민들과 워보이들이 불치병과 선천성 기형에 시달리는 탓에, 건강한 육체와 몸을 원한다는 전개의 핵심 동기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새로운 설정에 걸맞는 비쥬얼도 역시나 멋졌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전개도 우직하면서도 간단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런 영화에서 깊이 고민할 이유를 만들 필요는 없지요. 퓨리오사가 살아남는 엔딩도 좋았습니다.
 
눅스가 급작스럽게 전향한 까닭이라던가, 빌런이자 최종 보스 임모탈 조의 최후가 다소 허무한 등은 조금 아쉬웠지만 큰 흠은 아닙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퓨리오사"도 빨리 보고 싶네요. 언제 보게 될 지는 기약이 없지만...

2024/03/29

딜리셔스 - 롭 던. 모니카 산체스 / 김수진 : 별점 4점

딜리셔스 - 8점
롭 던.모니카 산체스 지음, 김수진 옮김/까치

진화생물학과 인류학 관점에서 먹거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과학, 식문화사, 인문학 서적.

이 책에 따르면 동물들의 거주지가 제한되는건, 동물들의 미각 수용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입맛에 맞는 먹이가 있는 장소를 떠나기 힘들지요. 그러나 인류는 조리를 통해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료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인류가 불을 사용한 것도 불로 조리한 음식이 더 맛있어졌기 때문이고요.
음식 조리는 음식 소화 시간도 단축시켰습니다. 침팬지는 깨어 있는 시간의 40%를 먹이를 씹는데 씁니다. 하지만 인류 조상들은 이 시간을 대폭 줄였고(현재는 평균 하루의 4.7%를 씹는데 소모),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조리가 문명을 발달시킨 한 요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맛있는 요리에 대한 집착은 수렵 채집으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조사한 결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선호하는 음식 - 1위는 꿀 - 을 구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거든요.
이런 집착은 북아메리아에서는 거대 동물(매머드 등)의 멸종도 불러왔습니다. 불법이지만 코끼리 고기를 먹어본 사람들에 따르면 엄청나게 맛있다니까요. 특히 코끼리는 발 요리가 최고라고 합니다. 당연히 매머드도 맛있었을테고, 그래서 크로비스인들도 멸종할 때까지 매머드를 집중적으로 노렸던 것이지요.
맛있는 동물만 사냥하는건 지금도 수렵인들을 통해 증명됩니다. 현실적으로는 찾아서 죽이기 쉽고, 가공하기 쉽고 많은 열량을 제공하는 동물을 잡아 먹는게 일반적이겠지만, 연구 결과 사냥꾼들은 맛있는 동물들을 발견하면 무조건 추격한다고 합니다. 사냥하기 쉬운 동물은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맛없는 동물들은 아예 사냥 대상에서 배제되고요.

향미에 대한 추구는 향신료의 사용도 불러왔습니다. 처음에는 항균제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쾌락적 경험을 불러오는 효과 때문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고추의 캡사이신을 조금씩 늘려 제공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매운 맛이 가장 맛있다고 골랐다는 연구 결과로도 증명됩니다. 통각을 자극하는 맛은 실제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도 위험을 피할 때의 황홀감을 느끼게 해 주는게 아닌가 싶네요.
발효도 항균제 효과와 같은 이치로 생겨났을 겁니다. 장기 보관을 위해서요. 같은 이치로 염장, 훈제, 건조도 발명되었고요.
참고로 이 부분에서 아예 고기를 물에 담궈놓는 일종의 습식 숙성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말 한마리를 호숫물에 담궜던 실험이 소개되는데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진공 포장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장기 보존되었다는데 이유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일종의 발효같은 과정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손이 많이 가는 복잡한 숙성 연성 치즈가 만들어진 것도 맛에 대한 추구때문이라는 이론도 흥미로왔습니다. 노동과 근면을 장려하고, 재료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먹는건 제한적이었던(고기를 먹지 못햇던) 수도사들이 심혈을 기율여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치즈를 제조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게 숙성 연성 치즈 제조의 원인이라는데 참 그럴듯했어요. 이 이론은 숙성 연성 치즈의 맛은 고기와 흡사하다는걸로 증명될 수 있고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 요리에 대한 추구가 문명 발전과 인류 진화를 이끌었다는걸 알려주는데, 목차 구성이 다소 정리가 불충분한 느낌이 드는건 아쉬웠습니다. 주제에 맞게끔 통사적으로 구성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도판과 등장 레시피 소개도 부실합니다. 

그래도 맛에 대한 집착이 진화를 이루어냈고, 식문화의 발달을 만들었다는걸 여러가지 연구 결과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좋은 책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보니 맛에 대한 집착이 많은걸 이루어낸건 분명한 만큼, 맛에는 다소 엄격해져도 될 것 같군요.

2024/02/04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김승욱 : 별점 4점

스파이와 배신자 - 8점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열린책들

1970~80년대 영국 정보부서 M16와 내통하던 KGB 최고위급 간부(KGB 런던 지부장)였던 올레크 고르디엡스키에 대한 논픽션.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입니다. 냉전시대 여러 첩보 작전들이 굉장히 상세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큰 재미를 안겨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고르디엡스키의 정체가 들통나서 모스크바로 소환된 뒤부터는 논픽션이지만 왠만한 스파이 소설보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고르디엡스키가 궁지에 몰리며 수렁에 빠지는 과정,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설계되었던 '핌리코 작전'의 가동, 그리고 고르디엡스키의 목숨을 건 소련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지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실제로 진행되었던 작전이라 픽션에서는 주기 어려운 생생한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핌리코 작전 때 차 트렁크에 있는 고르디엡스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아기 기저귀를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갈았다는 것처럼요. 소련 당국의 안일한 태도 - 그래서 탈출을 눈치채지 못했음 - 도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픽션이라면 허술하다고 비판받았을테지만요.
이런 디테일들은 올레크가 M16과 안가에서 만나 내통하는 상세한 과정, 당시 기술로는 최고 수준의 정교한 라이터 내장 카메라, 스파이가 메시지를 잘 받았다는 답이 맥주병 뚜껑을 올려놓는 것인데 '진저비어' 병뚜껑을 올려둔건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던는 등으로 책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실제 스파이들을 둘러 싼 첩보 과정도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대표적인게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첩자의 정보를 그냥 활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간닪난 일이 아니더라고요. 적의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첩자가 우리 진영 내 첩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면, 적 역시 자기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M16는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길게 보고 이용하는걸 택했지만, 결국 정보를 이용한 탓에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CIA가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를 알아낸 과정도 왠만한 추리 소설은 비벼보기도 힘듭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CIA는 M16에서 제공한 라이언 작전 관련 정보로 정보원이 KGB 요원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보고서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M16과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그는 소련 밖에 있고 영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추리했습니다. 전달된 정보는 기술 정보나 군사 정보보다 정치 정보가 많다는 것으로 그가 제1주요부 PR라인에 근무한다는 걸 알려주었고요. 마지막으로 KGB 내부 첩자라면 서방의 소련 첩자를 알려주었을텐데, 최근 소련이 잃은 첩자들은 노르웨이의 호비크와 트레홀트, 스웨덴의 베릴링, 영국의 마이클 베터니였습니다. 호비크와 베릴링이 체포되었을 때 스칸디나비아에 있었고, 트레홀트와 베터니가 잡혔을 때 영국에 있었던 사람은? 올레크 고르디엡스키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올레크의 과거 조사는 그가 M16의 내부 첩자라는건 분명히 드러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CIA가 알아낸 내부 첩자의 정체를 CIA의 배신자 올드리치 에임스가 밀고하여 올레크가 위기에 빠졌던 것입니다.

고르디엡스키의 활약(?)과 함께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설명되는데 냉전 때 KGB 수장이었던, 그리고 소련 서기장까지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실제 서방의 핵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KGB는 서방의 선제 핵 공격 징후를 다각도로 포착하기 위한 '라이언 작전'을 진행했었으며,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는 등의 비화도 놀라왔습니다. 
라이언 작전 당시 크렘린은 '혈액 은행'이 진짜 은행처럼 혈액을 사고 파는 곳인줄 알았다는건 좀 웃겼고요.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도 무척이나 독특한 매력을 전해줍니다. 우선 그가 조국을 배신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탓이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스파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변절했는데 말이지요. 본인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보를 넘긴걸 다른 반체제 활동과 동일시했다는 올레크의 생각도 신선했어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작가 솔제니친은 글로 싸웠듯이 KGB 요원인 올레크는 첩보 세계에서 정보를 활용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간에 고르디엡스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에 대해 칭송하다시피하는 내용을 쓴건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적이라고 책에서 설명되는 것들의 실체도 모호하고요. 책에서는 소련이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걸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으로 전달된 정보로 서방은 알고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서방은 당시 스타워즈 계획을 중지하거나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고르디엡스키가 제공한 정보와 핵 전쟁을 막은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그의 활약과 희생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하고, 대처도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을 그를 높이 평가했다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인정받을만한 인물일까요? 가족도 잃은 채 조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 M16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는 현재가 고르디엡스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외한다면, 달리 나무랄데 없는 최고의 책입니다. 스파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3/12/30

서울의 봄 (2023) - 김성수 : 별점 4점

23년 대미를 장식한 영화. 천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전두환의 쿠데타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거의 실제 상황을 따라가고 있지만, 영화적 각색이 잘 되어 있어서 충분히 재미를 느끼면서 몰입하여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흥행작이구나 싶었어요.
신군부 세력에 대한 고발 의미로도 가치가 높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 보다 사리사욕을 추구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행태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그냥 보아도 혈압이 상승할 지경인데, 실존인물들을 맡은 배우들의 호연은 분노를 더욱 끓어오르게 만듭니다. 특히 전두광 역을 맡은 황정민의 엄청난 연기가 압권이었어요. 이 영화가 일찍 나왔다면 전두환이 사면받을 일은 없었을거라 생각될 정도로요.

다만 소소하게 흐름을 깨는 요소가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국방장관 및 '똥별'이라 불리운 장군들의 얼빠지고 무능력한 행태, 이태신 소장이 전화를 거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다가 (물론, 그의 활약이 있었다면 전두환 따위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마지막에 전두광과 극적으로 대치한 뒤 체포된다는 마무리는 뻔하고 식상했고요.
등장하는 장군들 대부분이 지나치게 젊어 보였던건 분장과 캐스팅 실수로 보였습니다. 김성균이 맡은 김준엽 준장이 특히 심했어요. 찾아보니 실존인물 김진기 준장은 전두환과 동갑인데, 영화의 김준엽 준장은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입니다. 한마디로 잘 만든 영화로,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도 딸아이가 조금 더 크면, 온 가족이 한번 더 감상할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영화를 보고 나니 씁쓸해집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비판받아 마땅한 이유로 전두환 일당이 사면받은 것도 모자라, 추징금도 제대로 추징하지 못한 채 그 자식들이 호의호식하고 있다는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에요.
아픈 과거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친일파 후손들부터 단죄해야겠지만, 이미 백년 가까이 지난 과거사를 추궁하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클 겁니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들은 아직 생존자도 남아 있는 등 현재 진행형이니 만큼 이들의 단죄부터라도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추징금부터 이자까지 쳐서 모조리 환수해야 될테죠 . 전두환을 기린다는 '일해 공원'같은 어처구니 없는 명칭도 빨리 없애버리고요. 
아울러 지금 대한민국 사회 지도층에서 전두환을 비호하거나 옹호하는 인간들, 그리고 권력을 사유화 및 사조직화 하는 인간들도 빨리 퇴출시키는게 역사와 정의를 바로세우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 영화에 대해 남자 많아 숨막힌다며 혹평한 글을 잠깐 읽었는데.... 실제 있었던 군부 쿠데타를 다룬 영화에 남자가 가득한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여자가 등장할 여지가 대관절 어디에 있는지.... 이런 사람도 평론이랍시고 글을 쓴다는게 황당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2023/11/19

식민지의 식탁- 박현수 : 별점 4점

식민지의 식탁 - 8점
박현수 지음/이숲

일제 강점기 시대 발표되었던 문학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먹거리, 식문화 및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고찰하도록 해 주는 미시사, 식문화, 인문학 서적.

일제 강점기 시대는 관심이 많아서 예전부터 이런저런 미시사 서적을 읽어왔었는데, '문학 작품'을 가지고 식문화를 조망하는 책은 처음 봤습니다. 크게 10개의 작품으로 목차는 구분되어 있는데, 실제로 등장하는 작품은 훨씬 더 많습니다. 이광수의 "무정", 이상의 "날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동백꽃", 심훈의 "상록수" 등 누구나 아는 유명 작품들에서 이름 모를 작품까지 그 폭도 굉장히 넓고요. 
샌드위치, 우동, 설렁탕 등의 요리와 관부 연락선 내 식당, 선술집, 카페와 바, 시골 주막, 백화점과 호텔, 명치제과 등의 장소, 그리고 요리의 가격과 그 유래, 당시 레시피까지 심도깊게 알려줘서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여러 작품들에서의 해당 요리와 장소에 대한 묘사를 뽑아내어 생생하게 알려줌은 물론이고, 관련된 다른 자료들도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선술집이 술 한 잔을 시키면 안주 하나가 공짜였다, 서울 시내에서 약수를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지짐이'는 찌개와 국 사이에 위치한 국물 요리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위스키 중 하나는 '화이트 호스'였다는 등 새롭게 알게된 지식도 많습니다. 김남천의 "사랑의 수족관" 속 묘사를 통해 당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는게 일반적이었다는 것도 그러하고요. 하긴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다방' 이란 곳에 가면 항상 설탕 단지가 놓여있었지요.
또 조선 최고의 고급 식당이었다는 조선호텔의 1936년 정통 코스 순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가짓수가 다소 부족하지만, 지금 보아도 손색없는 구성이더라고요. 1936년에 조선에서 자몽 소르베라니!
  1. 애피타이저 : 콘소메와 레터스 샐러드
  2. 메인요리 : 오리간 구이와 로스트 비프
  3. 디저트 : 자몽 소르베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아침, 점심, 저녁 각각 1원 50전, 2원, 3원 50전으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45,000원에서 105,000원 정도라는 가격도 꽤 상식적이고요.
그 외에도 송이 산적 레시피는 새송이 버섯으로 대체해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등, 제 흥미를 끈 내용은 굉장히 많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작품 속 인용하는 부분으로 분석하여 알려주기도 하는데, 심훈의 "상록수"에서 동혁과 영신을 초대한 백 선생이 입만 살아있는 속물이었다는건 그녀가 대접한 카레라이스, 하이라이스 등으로 알 수 있다는 식입니다. 농촌 계몽을 부르짖지만, 본인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그걸 과시까지 한다는걸 잘 드러내기 때문이거든요. 어린 시절 "상록수"를 읽었을 때에는 카레라이스가 '새로운 화양절충'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걸 몰랐었기에 저런 은유나 비유를 잘 알 수 없었는데, 확실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느냐가 작품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영신이 일본에 갔다 온 뒤, 선물로 가지고 온 바나나를 잘게 썰어 아이들에게 먹여주었던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귀했다는건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면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거지요. 조금 부끄럽네요. 앞으로 좀 더 책을 생각하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다른 일제 강점기를 소개하는 책들과 겹치는 내용이 많은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바와 카페는 이미 많은 책을 통해 접했었습니다. 이 책처럼 문학 작품을 이용하여 소개해 준건 아니지만요. 낙랑파라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시골 주막의 풍경 등은 주제와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였으며, 가끔 저자의 주장이 뭔가 촛점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는건 단점입니다. 샌드위치와 된장찌게의 비유에서 갑자기 레비스트로스의 요리의 삼각형으로 튀는 부분처럼요. 그냥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이 훨씬 더 많은 책인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식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10/29

겨우살이 살인사건 - P.D. 제임스 / 이주혜 : 별점 4점

겨우살이 살인사건 - 8점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아작

P.D. 제임스 여사의 단편집. 표제작을 포함 모두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사님의 "어떤 살의"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걸작이지만 다른 작품들 - "검은 탑",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 - 은 다소 지루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어요. 그래도 단편이라기에 집어들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선입견 때문에 읽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네요.
표제작을 비롯하여 모두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완성도 높은 명작들입니다. "단편은 좁은 반경 안에서 독자들이 좋은 범죄 소설에 기대하는 것 - 믿을 만한 미스터리, 긴장감, 흥분, 언제나 공감할 수는 없어도 정체를 알 수 있는 인물들, 그리고 실망스럽지 않은 결말 등 - 들을 찾아 신뢰 가능한 세계를 제공한다."며 단편 소설의 장점을 짚어낸 서문 그대로, 수록작 모두 독자들이 좋은 범죄 소설에 기대하는 것들을 충족시켜 줍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4점. 모든 추리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크리스마스가 무대이니 만큼, 얼마 안 남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읽어주시면 더욱 좋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겨우살이 살인사건" 
18살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P.D. 제임스는 오래전 가족과 결별했던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초대를 받아들였다. 할머니의 스터틀리 영주 저택에는 할머니와 사촌 폴, 그리고 또 다른 먼 친척 롤런드 메이브릭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하던 즐거움도 잠시, 크리스마스 밤에 롤런드가 살해당했다.

여사가 추리 소설계에 투신하게 된 계기였던 사건을 그린 자전적 소설. 실제 있었던 사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실감나게 쓰여있습니다.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 유형의 이야기입니다. 시골 저택, 그것도 치명적인 장소인 '서재'에서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다는 점에서는요. 주인공이자 화자이자 탐정역인 여사가 간단한 조사로 밝혀낸, 폴과 공범 - 할머니로 생각되는 - 이 폴의 형을 협박해서 자살하게 만든 롤런드를 살해했다는 진상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여사의 조사로 밝혀지는 단서가 곧바로 추리로 이어져서 독자가 함께 범인을 찾아내게 만드는 맛은 부족하지만, 고전 황금기 걸작에 뒤지지 않는 재미와 흥미를 가져다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아주 흔한 살인사건"
16년 전, 어니스트 게이브리얼은 직장에서 몰래 포르노를 읽다가 이웃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남녀 - 데니스 스펠러와 에일린 모리시 - 의 불륜 행각을 목격했다. 둘의 만남은 매주 금요일마다 이루어졌다. 에일린이 살해된 후 데니스는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게이브리얼은 그날 데니스가 에일린을 만나지 못했다는걸 목격했지만 자신의 은밀한 행동 -포르노를 숨어 읽은 것 - 이 들통날까 두려워 증언을 하지 않았다....

딱 4페이지 전까지는 게이브리얼의 딜레마를 그린 심리극으로 보였습니다. 심리극으로도 워낙 묘사가 탁월해서 흥미롭기 그지 없는데, 마지막에 게이브리얼이 에일린을 살해한 진범이라는게 드러나면서 범죄극으로 전환되는건 정말 기가막혔습니다. 서늘한 반전이 중요한 '기묘한 맛'류의 장르물로도 아주 우수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부동산 중개업자가 피해자 에일린의 남편이었다는게 마지막에 드러나는데 이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상황을 짐작할만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박스데일의 유산"
애덤 달글리시 총경의 대부 허버트는 앨리 종조모로부터 5만 파운드라는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하지만 앨리 종조모가 67년 전, 크리스마스 다음날 남편 오거스터스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달글리시에게 진상 조사를 부탁했다.

"이 세상에서 부자들은 딱 한 번만 대가를 치른답니다."

애덤 달글리시 시리즈 단편. 무려 67년 전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4살이었던 허버트가 진범이라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그리고 앨리를 미워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려다가 오히려 약점을 잡혀 전 재산을 잃고 만 고다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왔고요. 강한 여자들이 패자가 모든걸 잃고만다는 공정한 영국식 결투를 벌였다는게 신선했거든요. 앨리가 뛰어난 두뇌와 소매치기(?) 능력으로 승기를 잡는다는게 앞서 복선처럼 잘 설명되어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시 4살이었던 허버트가 진범이라는 진상은 다소 비약이 심했고, 이를 추리할 논리적인 근거도 전무하다는 약점은 큽니다. 달글리시가 아이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게 근거의 거의 전부거든요. 주전자 물이 줄어들었고 물 웅덩이가 닦였다는 정도로 앨리가 진상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억지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열두 가지 단서"
막 경사로 승진한 젊은 달글리시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한 고모 집으로 향하던 중 급한 용무가 있다는 헬무트 하커빌을 태워주게 되었다. 그는 삼촌 하커빌이 자살했다고 했다. 하지만 달글리시는 무려 열두 가지나 되는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하커빌을 조카 가족들이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하려한걸 달글리시가 여러가지 단서들로 밝혀내는데, 단서 제공은 공정하고 전개도 깔끔합니다. 작 중에 달글리시가 설명하는 아래의 열두 가지 이상한 점은 모두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제공되거든요.
  1. 유서는 편지의 마지막 장으로 봉투에 넣으려고 두 번 접었는데 누가 다림질을 해서 펴려고 했는지 (유서에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언급했는데 왜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살했는지)
  2. 벽난로에 타다 남은 여권
  3. 저택 매각을 의미하는 내용의 편지 조각
  4. 피해자는 모자를 쓰고 죽었는데 베개에 발모제 연고가 훨씬 많이 묻은 이유
  5. 크리스마스 크래커 장난감은 어디갔는지
  6. 유서에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조카 며느리가 만든다고 되어 있는데 요리사를 구하는 광고를 내라고 시킨 이유
  7. 전날 밤 조카들 가족과 같이 도착했다는 요리사 가방이 풀리지 않은채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이유
  8. 요리사가 쪽지 필체가 하커빌 것이라는걸 알고 있는 이유
  9. 직전에 고용되었다는 요리사가 엉망인 부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이유
  10. 피해자 잠옷 맨 위 단춧구멍에 호랑가시나무 가지가 꽂혀있었는데, 피해자 손은 가시에 찔리지 않았고 가시에는 연고가 묻어있지 않았다.
  11. 피해자가 크리스마스 푸딩을 손으로 파냈다면, 손톱 밑에 푸딩이 끼어 있지 않은 이유
  12. 피해자가 죽고 8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난로 안의 재가 여전히 따뜻했던 이유 (그리고 성냥은 어디 있는지?)
이 중 크리스마스 푸딩에 관련된건 잘 설명되어 있지 않은 등 몇 가지는 다소 억지스럽기는 합니다. 모든 이상한 점이 다 자세하게 설명되지도 않고요.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크래커 당기는 소리와 장난감과의 관계라던가 호랑가시나무 가지를 꽂은 이유는 잘 모르겠더군요. 영국식 크리스마스 파티의 필수 요소였던걸까요?

그래도 본격 추리 단편의 교과서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달글리시 말 그대로 '완전히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셈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3/07/19

마션 (2015) - 리들리 스콧 : 별점 4점


소설을 읽고 탄력받아 영화까지 감상했습니다. 마침 디즈니 플러스에 있더라고요. 

일부 디테일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며, 와트니에게 닥친 위기 중 몇가지 - 와트니 실수로 패스파인더가 망가져서 NASA와의 통신이 불가능하게 된 것, 마지막 여행 중 로버가 뒤집혀 버렸던 것 등 - 가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상영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탓이겠지요. 
 
반대로 영화에서 추가된 부분도 있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와트니가 우주 공간에서 슈트에 구멍을 뚫어서 대장에게로 이동하는 클라이막스, 두 번째는 구조 이후의 에필로그 형식 후일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영화 쪽이 훨씬 좋았어요. 클라이막스는 와트니가 불확실하지만 대담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주장하며 - 아이언맨처럼 날 수 있잖아요! - 실행에 옮기는건 그의 캐릭터에 딱 들어맞을 뿐더러, 영화라는 매체에도 잘 어울리는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단순히 '우주선이 이동하고, 와트니를 잡아서 구조한다' 정도였다면 심심했을테니까요.
그리고 후일담은 없어서 불만이라고 소설 리뷰에 적었었는데, 영화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전 지구적(?) 유명인사가 된 와트니가 NASA 교관이 되어 특유의 언변으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마지막 장면은 짤막하지만 만족스러웠어요. 그 외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빠짐없이 챙겨주고 있고요.

마크 와트니의 화성에서의 생존을 위한 분투가 너무 유머러스하고 재미있게 그려진 나머지, 위기감을 느끼기 힘들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 수백일을 감자만 먹고 지냈으며, 그마저도 부족했던 와트니 묘사를 위해 맷 데이먼이 감량이라도 좀 했어야 하지 않을까... - 사소합니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감상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