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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6

미스터 메르세데스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점

미스터 메르세데스 - 4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은퇴하고 홀로 외로이 TV에 빠져 사는 빌 호지스는 자살까지 꿈꾸게 된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 그것은 그가 형사 시절에 해결하지 못한 사건인 시티 센터에서 8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싸이코 살인마 "메르세데스 살인마"가 보낸 편지였다. 그의 목적은 호지스의 자살을 유도하는 것.
그러나 이를 도발로 받아들인 호지스는 새롭게 삶의 의미를 다지고 그를 자기 손으로 체포하기 위해 다시 수사에 나서는데....


은퇴한 형사 호지스와 '미스터 메르세데스'라고 불리우는 싸이코 살인마 브래디 하츠필드의 대결을 그린 600페이지의 대장편. 호러의 거장 스티븐 킹이 내 놓은 하드보일드 소설로 2015년 에드거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관심가던차에 늦게나마 읽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장, 단점 모두 기존 스티븐 킹 스타일 그 자체입니다. 장점이라면 뭐니뭐니해도 읽히는 재미가 최고 수준이라는 점을 첫 손에 꼽을 수 있겠죠. 브래디가 빌 호지스를 자살로 몰아넣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 이야기의 시작, 그리고 그의 도발로 외려 빌 호지스가 삶의 의욕을 되찾은 뒤 범인이 지정한 채팅  사이트 '데비스 블루 엄브렐라'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범인에게 접근해 나간다는 전개가 아주 흥미진진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차를 도난당한 올리비아 트릴로니의 증언을 믿지 않았던 것이 큰 실수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범죄물로도 괜찮은 편이에요. 브래디가 자동차를 훔친 방법,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호지스 등을 염탐한 방법, 본인의 범행을 위해 이런저런 발명을 하는 부분 등이 아주 설득력있게 그려지거든요.

또 캐릭터들도 매력적입니다. 주인공 빌 호지스부터가 그러해요. 사실 형사가 은퇴 후 사건을 해결한다는 작품은 피터 러브시의 <다이아몬드 형사> 시리즈 등 상당히 많습니다. 최근 쏟아진, 은퇴한 특수 요원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영화들도 비슷한 류일테고요. 허나 본작의 주인공 빌 호지스는 제가 읽었던 유사 작품 주인공들과 비교할 때 훨씬 드라마틱하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차별화 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묘사도 아주 좋고요. 초반의 자살을 기도하는 모습, 브래디를 잡기 위해 의욕을 불태우는 과정의 묘사 모두 자연스러울 뿐더러 체중 등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것을 신경쓰는 묘사 역시 한 몫 단단히 하거든요. 무엇보다도 제이니가 폭사한 직후 모습은 정말 압권이에요. 연인이 산산조각이 되어 팔 하나만 나뒹구는 상태에서 범인을 잡기위해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장면인데, 속된말로 '간지 폭풍'이었습니다.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에서 도미니크가 죽은 것을 알게된 코브라의 대사가 떠오르더군요. '안녕 도미니크 다음에 만날 때에는 지옥이겠지'
악당인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드 역시 나름의 존재감을 뽐냅니다. 어머니와 근친상간 관계에 동생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가족사 이야기는 진부했습니다만, 일반인보다 약간 똑똑한 미친놈이라는 설정이 인상적인 덕분인데 특히나 항상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는 성격이 그러합니다. 아주 설득력 높았어요. 사람 마음(빌 호지스)을 갖고 놀려다가 실패하는 과정의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요.
다른 인물들도 독특하기는 마찬가지로 사이드킥 2명이 대표적입니다. 제롬은 엘리트 흑인 집안의 아들인 우등생이라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설정으로 작중 언급되는 버락 오바마와 더불어 달라진 미국 흑인의 지위를 상징하는 듯 싶었어요. 또다른 조력자 홀리는 컴퓨터 천재지만 심한 우울증을 앓는 기묘한 노처녀고 말이죠. 지나치게 작위적인 감이 없잖습니다만.

허나 역시나 스티븐 킹 작품다운 문제도 많습니다. 첫번째는 '탐정 하드보일드'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나온 것 치고는 '추리물'로 볼만한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이죠. 주인공 빌 호지스부터가 은퇴한 형사라서 할 수 있는게 별게 없을 뿐더러, 결국 단서를 던지는 것은 범인 브래디고 호지스는 던져주는 단서를 받아 먹을 뿐이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범인과의 두뇌싸움이라던가, 범인이 보낸 편지와 채팅에서 입수한 것을 통해 프로파일링을 하는 것은 상당히 정확하지만 호지스 스스로의 입으로 이야기하듯 '감'에 의지한 것이라 그닥 정교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급작스러운 억지 전개가 많은 것도 단점입니다. 올리비아의 동생 제이니 패터슨과 사귀게 되어 잠자리를 같이하는 관계까지 발전하는 전개라던가, 마지막에 아이돌 가수 콘서트에서 폭탄을 터트리려는 브래디의 계획을 홀리와 제롬이 저지한다는 결말이 대표적이에요. 솔직히 좀 가관이었달까요. 하긴, 이건 스티븐 킹 소설이니깐...

그리고 호지스의 실수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에요. 대표적인 것이 제이니의 죽음이죠. 작중에서 계속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어떻게 차를 훔쳤는지까지 알아내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호지스의 실수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녀의 죽음은 독자가 브래디가 처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게 하긴 하지만 주인공의 무능력함을 돋보이게 하니 과연 적절한 장치였나 의구심이 생깁니다.
호지스가 월권에 가까운 단독 수사를 고집하는 것도 석연치는 않아요. 애초에 올리비아 컴퓨터에 심어진 수상한 파일에 대해 알게된 시점에서 경찰에 모든 자료를 넘겼다면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을텐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기 보다는 출판사의 억지 마케팅 결과물이 아닐까 싶긴 한데 이 작품은 정통 하드보일드는 절대로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공통적으로 탐정 스토리의 모습을 취하며, 범죄나 폭력, 섹스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추리물이기는 하지만 무미건조한 묘사는 절대 아니거든요. 반대로 감정 과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풍성한 편이에요.
그렇다고 폭력이 난무하는 마초물도 아닙니다. 호지스 캐릭터만 놓고 보면 정많고 정의감 넘치는 동네 아저씨거든요.
물론 호지스와 브래디 둘의 시점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전개에서 브래디 시점 묘사는 고전 하드보일드 느낌이 살짝 나기는 합니다. 스티븐 킹이 서두에 '제임스 M 케인을 그리며'라고 했는데 제임스 M 케인의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누른다> 같은 작품이 떠오를 정도로 말이죠.
허나 이 정도로는 많이 약하죠. 하드보일드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캐릭터와 서사 구조 모두 전통적인 서부극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은퇴한 총잡이에게 신세대 총잡이가 도전하고, 도전을 피하는 늙은이를 도발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결국 대결이 벌어지며 이 와중에 은퇴한 총잡이가 새로운 삶의 보람을 깨우친다는 내용과 다를거 하나 없어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장점이 없지는 않으나 단점이 더욱 컸고 무엇보다도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재미만 놓고 보면 그럭저럭이지만 말이죠.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니며, 특히나 저처럼 '하드보일드'라는 말에만 낚이신다면 크게 실망하실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앞서 말씀드렸듯 에드가상은 물론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선정한 "2015 최고의 장르소설 베스트 10"에도 당당히 선정되어 있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제 취향의 문제일까요?

2016/01/25

굿 다이노 (2015) - 피터 손 : 별점 2점



픽사의 신작. 딸아이와 주말에 더빙판으로 감상한 작품입니다.

미국 시장에서는 픽사 작품치고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는데 보고나니 이유를 알겠네요. 각본이 너무나 별로입니다.

공룡이 문명에 근접한 수준으로 진화하고, 인간은 일종의 애완동물 포지션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은 괜찮습니다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네요. "나약한 주인공이 몇번의 위기를 거쳐 한 몫하는 존재로 성장한다"라는 전형적인 성장기 작품과 다를게 하나 없는 진부한 내용이거든요. 픽사 특유의 재치 역시 찾아보기 어려우며, 벌어지는 위기는 유치하고 작위적이기 짝이 없고 말이죠. 대체 이놈의 세계관에서는 왜 이리 폭풍이 많이 몰아치는 걸까요?
스토리가 부실하다면 주인공인 알로와 스팟 컴비라도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종이 역전된 것에 기반한 약간의 재미 외에는 별다른 매력이 없습니다. 기존의 인간 - 다른 반려동물 컴비가 등장하는 작품과 똑같아요. 외려 알로가 상상 이상으로 나약한 캐릭터라 절로 짜증이 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CG의 완성도만큼은 정말 압도적이긴 하더군요. 자연의 표현이 정말 대단해요. 캐릭터들만 빼면 그냥 '다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죠. 차라리 <한반도의 공룡 점박이>처럼 정말로 '공룡'이 주인공인 다큐같은 작품을 만드는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딸아이는 그런대로 재미있게 본 모양인데 저에게는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CG의 수준이 높고 본편 전에 상영된 인도 신화 기반 슈퍼 히어로물 <산제이의 슈퍼팀> 덕에 큰 감점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16/01/23

마약 밀매인 - 에드 맥베인 / 박진세 : 별점 2.5점

마약 밀매인 - 6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추위가 몰아치는 12월의 어느날, 순찰경관 딕 제네로가 시체를 발견한다. 자살로 보이지만 부검 결과 타살로 밝혀지며, 카렐라는 피해자인 마약 밀매인 아나벨의 구역을 이어받은 '곤조'라는 별명의 마약 밀매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편 범행 현장에 있던 주사기에 남은 지문 문제로 87분서의 번스 경위에게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데...


에드 맥베인87분서 시리즈. 카렐라 결혼 직후 이야기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조사해보니 <경관혐오>와 같은, 1957년에 발표된 작품이네요. <노상강도> 바로 뒤에 말이죠.

그간 읽어본 바로는 에드 멕베인 작품은 초기작이 훨씬 좋았기에 나름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세명이나 죽고, 카렐라마저도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지는 등 강력 사건이 계속 이어지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굉장히 심플한 구성이기 때문입니다.
조무래기 마약상 아나벨이 살해 당하고 형사들이 아나벨의 구역에서 마약을 파는 마약상을 쫓습니다. 그의 별명이 '곤조'라는 것 까지 알아내고요. 그리고 결국 '곤조'를 잡아서 사건을 해결한다, 이게 전부에요.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이야기를 억지로 장편으로 늘린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범행 동기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아나벨을 살해한 이유부터가 문제입니다. 번즈 경위의 아들 래리가 아나벨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라는 비밀을 가지고 번즈를 협박하여 편하게 마약 거래를 할 속셈이라는 것인데, 형사들의 수사로 '곤조'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에 별 의미없는 협박이 되어 버리죠.
또 번즈를 협박하기 위해서는 '래리가 정말 범인일지도 모른다!"라는 의심을 독자와 번즈 모두에게 잠깐이라도 심어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조금은 복잡해졌겠죠. 허나 번즈가 래리의 마약 중독을 알아내고 훈육 (구타?) 하던 밤에 마리아 에르난데스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에 이 역시 물건너 가 버리고 맙니다. 아울러 범인의 협박 계획 역시 저 멀리 날아가 버리죠. 최소한 번즈는 자기 아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두 번째 범행이야말로 당쵀 이해 불가입니다. 마리아에게 래리와 말다툼 했다는 증언을 강요하다가 수틀려서 살해한 것인데, 래리의 존재는 범인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협박이 가능한 것이잖아요? 경찰들에게 래리의 존재를 알려서 얻을게 하나도 없는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무덤을 파는지 정말 알 수가 없네요. 작중 등장하듯 살인이 버릇이 된다는 이유라면 너무 억지스럽죠.

그래도 전통의 시리즈에다가 '그랜드마스터'의 작품 답게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경관혐오>가 '더위'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추위'가 정말 생생하게 묘사되는 등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마음에 와 닿는 생생한 묘사는 여전히 압권이거든요. 초기작 답게 지나치게 적나라하지 않기도 하고요. 번즈 경위가 아들 때문에 고뇌하는 장면, 그리고 카렐라가 곤조와 대치할 때의 묘사도 아주 멋졌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간단한 이야기 구조라 이렇다 할 건 없지만 딱 한가지, 경찰 끄나풀 대니 김프가 곤조를 찾아내는 과정은 그럴싸 했습니다. 이 바닥에서 곤조를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중독자들이 그에게서 마약을 사려고 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 놈이 이 구역에 있는 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아나벨의 마약 루트를 물려받았을까? 그건 적어도 그 놈이 아나벨을 개인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추리를 전개하는데 설득력 높은 잘 짜여진 이야기였어요.
또 곤조가 사실은 굉장히 어린, 순진해 보이는 청소년이었다는 나름의 반전도 상당히, 아주 괜찮았던 부분입니다. 외려 보다 잘 써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쉽게 소모한 듯 싶어 좀 아쉽더군요.

마지막으로 어머어마한 추위의 묘사, 잔혹한 사건의 연속에도 마지막에 크리스마스를 맞아 범인을 체포하여 사건은 해결되고, 래리의 마약 중독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고, 곤조의 총에 맞아 사경을 헤메던 카렐라가 살아난다는 완벽한 해피 엔딩이라는 것도 좋았어요.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은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이라던가 <영국식 살인> 등 많지만 이 작품 역시 한자리 차지해도 괜찮다 싶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기대보다는 못해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읽을만합니다.

2016/01/21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롤 볼턴 / 김진석 : 별점 2.5점

뱀이 깨어나는 마을 - 6점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시골 마을에 사는 수의사 클래라 앞에 무서운 독사를 비롯한 뱀 떼가 나타난다. 그녀는 전문가적 지식을 발휘해 뱀을 처리하면서, 뱀에 물려 죽은 것으로 알려진 노인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다.
그러한 와중에 그녀가 돌보던 노부인 바이얼럿이 역시나 뱀에 물려 죽고,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배후에 50여년 전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퇴마 의식과 마을 거주민들, 그 중에서 위처 형제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귀여워 보이는 책 표지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책.

읽어보니 내용은 아주 진지한 범죄 스릴러물이더군요. 그런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은 상당한 편입니다. 우선 한적한 시골 마을에 무시무시한 독사 (살무사와 타이판)가 나타난다는 상황부터가 아주 흥미로와요. 뱀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마을 유일의 뱀 전문가로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클래라가 사건에 뛰어든 뒤 위처 형제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며 서서히 위기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박진감이 넘치고요. 마지막까지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해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영국 시골마을을 무대로 하여 공포스러운 괴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이 모든 것이 오래 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에서 정통파 영국 고전물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시골 마을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독사가 포함된 뱀 떼가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처 공포물 같기도 했고 말이죠.

또 주인공인 수의사 클래라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여태 읽었던 수많은 추리 소설에 등장했던 까칠한 여주인공들과 비슷하기는 한데 분명한 차이점이 있거든요.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입은 얼굴의 상처입니다. 누구나 얼굴을 돌릴법한 끔찍한 흉터라는 설정인데 덕분에 그녀가 까칠하게 자기를 방어하며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한다는 묘사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어요. 스스로 흉터를 극복하는 성장기스러운 묘사도 제법 볼만했고요.
그리고 추리적으로 돋보이는 점은 없지만 우연히 어울리게 된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경찰이 그녀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은 아주 괜찮았어요. 그녀가 마을 노인들과 친해져 유언장을 조작하고 죽인다고 의심을 받는다는 것인데, 노인들 죽음에 독사가 관련되어 있고 그녀가 수의사로 뱀 전문가라는 설정까지 겹쳐져 상당히 설득력있게 다가오거든요. 클라이브의 정체가 솔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부분, 그리고 얼프레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고요.

하지만 재미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오순절 운동' 에서 비롯된 뱀을 다루는 사이비 목사를 등장시켜 마을 사람 반수가 관계된 대소동에서 비극이 촉발되었다는 등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영국 시골 마을에서 이런 일이 가탕키나 했을까요? 작중에서도 '전쟁 직후였다'라는 말로 어떻게든 설득력을 갖추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문란한 에덜린과 위처 형제들간의 관계, 그리고 범죄자 성향이 짙어 마을에서 추방당한 솔 위처 이야기 정도로 풀어내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아니면 앞서 말한 클래라가 범인일 것이라는 가설이 훨씬 현실적이었던 만큼 그렇게 밀고 나가던가.
억지스럽게 용의자를 등장시키는 전개도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뱀 전문가 숀 노스가 타이판의 본고장 파푸아뉴기니를 갔다 온 것을 숨겼다, 정신병자 얼프레드는 성도착자에 화가 나면 폭주하여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등의 묘사들이 그러하죠.

게다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아치로 위장한 조앨 패인 목사가 도싯으로 돌아온 이유는? 클라이브에게 얹혀 살기 위해서라면, 그는 클라이브가 솔 위처의 아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어떻게든 알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마을에 뱀을 푼 이유는? 조앨 패인이 클라이브 회사의 계획인 마을에서의 원유 탐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협력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얼프레드는 왜 병원에서 탈출시켰을까요? 조앨 패인 스스로도 뱀을 다룰 수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이유라면 뱀 떼면 충분했을텐데 독사를 푼 이유는 설명 불가죠. 독사가 등장하고 사람이 죽은 이상, 경찰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많은 뱀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요?
물론 독사의 등장과 뒤이은 살인은 클라이브의 지시와는 별개로 패인이 유산을 노리고 폭주한 것일 수도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경찰 맷을 공격하고 클래라마저 죽이려 한 시점에서 패인이 아치 흉내를 내면서 클라이브의 유산을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으니 계획은 실패죠. 클라이브 살해를 클래라에게 뒤집어 씌운다 해도 맷의 말에 따르면 바이얼릿의 죽음에 대해 클래라는 혐의를 거의 벗었고, 혹시나 패인의 지문이 채취된다면 진범이 누구인지 결국 밝혀졌을테니까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클래라가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과정의 개연성도 낮고 패인이 불탄 교회에서 얼프레드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자포자기?

그리고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클래라를 제외하고는 전부 평면적이고 진부하며 존재감이 낮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남자 주인공들부터가 그러해요. 숀 노스와 맷의 2인 체제인데 어디서 봤던 느낌의 캐릭터들일 뿐더러 숀은 하는게 거의 없다시피하고, 그나마 활약을 보이는 맷은 다른 여자친구가 있을 뿐더러 막판에는 짐짝이 되어버리니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노인들은 한두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영 보기 불편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지나치게 나간 부분 때문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고 전통을 계승한 부분도 있는 만큼 추리 애호가분들이리사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덧 1 : 작가 서문과 후기, 역자 후기나 기타 자료가 전무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최근 이런 책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했어요.
덧 2 : 프레드릭 포사이스<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와 비교해 읽어도 재미있을 듯 싶어요.

2016/01/19

아자젤 - 아이작 아시모프 / 최용준 : 별점 2점

아자젤 - 4점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집. SF는 아닙니다. 악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판타지, 환상 동화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모두 13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작 대부분이 아시모프의 지인 조지가 주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문제점을 해결해 주기 위해 2cm 악마 '아자젤'을 불러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예상하지 못한 문제로 불행이 닥친다는 내용이죠.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어요. 너무 뻔했거든요. 악마에게 소원을 빈 뒤 수렁에 빠지는 류의 설정부터가 흔해 빠졌죠. 때문에 악마와의 거래에서 밀리지 않는 치밀한 두뇌 싸움이 등장해도 시원치 않을 판입니다. 허나 이 작품에서 조지가 아자젤에게 부탁하는 소원들은 일부러 문제가 생기게끔 안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많아요. 추상적이거나 문제의 본질과는 떨어져 있거든요. 겨울동안 신세를 지기 위해 눈을 싫어해서 겨울 동안만 별장을 폐쇄하는 지인이 "눈 위에서는 가벼워지도록" 부탁한다는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같은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억지스럽고 지루했습니다.

또 그나마 세련된 부탁을 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뻔해서 이야기의 의외성이 높지 않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자에게 인기 없는 지인에게 인기가 생기도록 했지만 무시무시한 여자가 그에게 반하고, 그녀의 무시무시한 가족들의 협박으로 결혼하게 된다는 <승자에게> 가 대표적입니다. 그냥 의외성이 없다면 모를까, 그다지 웃기지 않은 성인 대상 농담이 많다는 것도 문제에요. 대학에서 왕따당하는 친구 아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상대에게서 회피하도록' 부탁한다는 <봄날에 벌이는 싸움>에서는 미녀를 얻는데는 성공하나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를 평생 안을 수 없게 되고,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대녀를 위해 그 조각상을 '단단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어 달라고 한 <갈라테아>에서는 조각상이 '단단해지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는 식이죠.

물론 볼만한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재능없는 농구선수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그가 골을 무조건 성공하도록 아자젤에게 부탁한다는 <2센티미터짜리 악마> 라던가, 1년 시한부 인생이 예상되는 지인이 '지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를 입지 않도록' 부탁한다는 <천지간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네>는 상당히 의외성이 있었어요.
또 유머러스한 분위기에 더해 이야기가 시작 전에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지이자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은 조지와 아시모프의 티격태격하는 말싸움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주로 조지의 입을 빌어 묘사되는데 "그건 선생의 부족하디 부족한 지능 덕인 듯합니다." "좋은 클럽이라면 선생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생과 이야기하는 건 끈적끈적한 당밀 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노력에 비해 그 대가가 너무 적어요." 같은 것들로, 아시모프의 자학 개그라 할 수 있겠네요.

허나 비슷한 류의 이야기들에 비하면 재미라던가 독특한 차별점을 찾기 어렵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여 비슷한 설정이라면, 감히 이야기하자면 제가 쓴 <계약은 성실하게>가 더 낫지 않을까 싶어요. 소원도 의외성이 있고 결말 역시 그러하다는 점에서 말이죠. 관심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6/01/18

엠브리오 기담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엠브리오 기담 - 6점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어딘가에서 읽었던 서평이 기억에 남아 있어 주말동안 읽기 위해 집어든 책.

에도, 아니 메이지 시대로 보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 단편집으로 모두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온천에 대한 여행기를 쓴 타고난 길치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동료인 미미히코가 이야기에 모두 등장하는 연작물이기도 하죠.

시대물 설정, 거기에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괴담이라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에도물이나 교코쿠 나츠히코의 작품이 떠오르는데 미야베 미유키 작품들보다는 환상 문학에 훨씬 가깝고,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들보다는 읽기 쉽고 명확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또 수록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리처드 매드슨 등의 선배 작가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구태여 구분하자면 <엠브리오 기담>은 일상계 크리쳐물,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윤회 판타지, <수증기 사변>과 <끝맺음>은 일상계 괴담, <얼굴 없는 산마루>는 일상계 드라마, <있을 수 없는 다리>는 전형적 괴담, <지옥>은 끔찍한 고어 호러,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는 괴담 분위기의 자살극으로 넓은 장르를 포용하거든요.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그냥 사족입니다) 이렇게 많은 장르물을 포괄하면서도 대체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인다는 것도 대단했고요. 코미디에서 호러까지 오가는 선배 작가들만큼의 넓은 변화 폭은 아니긴 합니다만 이 정도면 이름모를 작가 치고는 제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후기를 보니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츠 이치의 또다른 필명이더라고요! 솔직히 취향이 아니라 많은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팔색조 매력은 여전한 듯 하여 아주 반가왔어요. 그러고보니 최초 서평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오츠 이치의 이색작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놈의 기억력...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말도 안되는 설정이 제법 있는 등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이 정도면 괴담물로 최소한 기본은 해 주었다 생각되네요. 오츠 이치의 단점이라 여겼던 만화적인 상상력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요.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사족인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별점은 3점!
괴담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덧 1 : 앞서 말씀드린대로 수록 작품들의 장르가 천차만별이지만 절반 이상이 '괴담'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추리 / 호러' 장르로 분류합니다.

덧 2 : 저도 온천을 좋아하는데 딸아이가 좀 더 크면 온천이나 다녀봐야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끔찍한 경험은 사절입니다만 끔찍한 경험을 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가 그래도 온천을 다니는 것을 봐서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게 분명하겠죠.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엠브리오 기담>
갓난아기 전 인간의 모습인 '엠브리오'를 우연히 구한 미미히코. 금새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엠브리오는 살아남고, 도박빚에 시달리던 미미히코는 엠브리오를 이용하여 돈 벌 계획을 세운다.

인간의 태아(이전 단계)인 '엠브리오'에 대한 이야기. 엠브리오에 대한 설정 - 하얀 애벌레같아 허여멀건 몸뚱이에 볼룩 튀어나온 배, 발달이 덜 되어 단순한 돌기에 지나지 않는 손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머리에 점을 콕 찍은 듯한 눈, 도마뱀처럼 꼬리 같은 것 까지 있고 갓난아기 피부와 내장 표면의 딱 중간 정도 피부로 쌀뜨물을 먹고 미지근한 물을 좋아한다... 등등 - 이 실제 존재하는 생물처럼 상세하다는 것이 재미 요소입니다.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묘한  상상력'이 크리쳐에 발휘된 환상 문학이라고 할 수 있죠.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찾기는 어려웠겠지만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엠브리오를 넘겨 무사히 출산하게 하고, 수년이 지나 미미히코와 그 아이가 재회한다는 결말은 공식대로이며 식상합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
도매 서점에서 일하는 린은 행수 어르신의 지시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여행에 동행한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일행은 마침 발견한 마을에서 잠깐 묶어 가게 되는데, 다음날 촌장의 증손자가 고열로 쓰러진다. 마침 린이 가지고 있던 약으로 아이는 생명을 구하고 답례로 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피스 라줄리 (유리)'를 선물하는데...

린이 '라피스 라줄리'를 받은 이후, 인생을 되풀이한다는 윤회 판타지. 윤회를 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내용도 잔잔하니 읽을만 하지만 작품의 핵심은 반전에 있습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촌장 노파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죽는 어머니를 위해 뱃속에서 탯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는 결말이거든요. 행복한 결혼 생활도 해 보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도 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인데 참 절절하게 다가왔어요.
다른 수록 작품과는 다르게 미미히코 시점이 아니라 린 시점에서 묘사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특이했고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등 세세한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이 그러하죠. 또 린은 이전 기억을 계속 쌓아나가기 때문에 환생할 때 마다 강해질 수 밖에 없는데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었어요. 미래도 읽을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공부도 한다면 세계를 바꿀만한 재산이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증기 사변>
로안과 미미히코는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뒤 산기슭 온천 마을을 찾아낸다. 마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여관에 묶게 된 둘은 마을 온천을 밤에 찾아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밤에 온천에 몸을 담근 미미히코는 어린 시절 소꼽친구로 죽어버린 유노카를 온천에서 만나게 되는데...

저승과 연결되어 있는 온천을 그린 작품.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라던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유노카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잔잔한 일상계에 가깝습니다. 마지막에 미미히코가 유노카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문제는 너무 잔잔해서 극적인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노카의 죽음이 단순 사고보다는 드라마틱했어야 해요. 예를 들자면 사실은 미미히코의 잘못으로 죽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끝맺음>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묶어가게 된 바닷가 마을. 그곳은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기묘한 곳으로 식재료마저 그러하여 미미히코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아사 직전에 놓이게 된다.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는 이토 준지스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묘한 작품. 만화나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용 컨텐츠로 발표되었더라면 굉장히 그로테스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상상의 여지가 더욱 많은 소설이 섬찟함을 느끼는데 더 좋긴 하겠지만요.
이에 더해 그에 더해 굶어죽기 직전 상태에 놓인 미미히코가 자신을 끔찍히 따르던 닭 아즈키를 잡아먹고 살아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기고 살아 남는 왕따물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마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다리>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는 근사한 구름 다리를 발견한다. 허나 마을에서는 구름 다리는 이미 사십 년도 전에 무너졌다고 말한다. 둘이 묶게 된 숙소의 노파가 밤중에 넌지시 구름 다리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한다. 그녀는 구름 다리가 무너졌을 때 아들을 잃었는데 지나는 여행객들로 부터 다리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 미미히코는 다리에서 노파의 아들을 발견하고 둘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감동적인 상봉을 기대했지만 실상 소년은 그야말로 '귀신'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있는 존재였다는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 이전 수록작인 <수증기 사변>과 비슷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다가 깜짝 놀랐네요. 하긴 이게 귀신의 본 모습인 것이겠죠.
반전에 더해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소설보다는 영상화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귀신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묘사도 좋지만 특히나 귀신이 노파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가 미미히코를 붙잡고, 미미히코는 욕설을 하면서 노파를 어떻게든 떼어내려 하는 처절한 묘사가 기억에 남는군요.

재미도 있고, 반전도 있는, 괴담으로는 더할나위 없는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얼굴 없는 산마루>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우연히 방문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미미히코를 보고 놀란다. 이유는 그가 사고로 죽은 마을 사람 모키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

미미히코가 자신과 똑같이 생기고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 모키치의 가족을 만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일상계 소품. 잔잔하고 여운을 주는 내용은 좋았습니다.

허나 모키치의 아내 야에의 말을 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뻔한 결말에다가 왜 미미히코가 모키치와 모든 면에서 똑같은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는 것은 단점입니다. 그냥 닮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을텐데 흉터까지 같다는 것은 무리수였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조금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이었어요.

<지옥>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는 여행 중 강도를 만나고, 미미히코만 사로잡혀 신혼부부 후지와 요이치와 함께 축축한 구덩이 속에 갇힌다. 강도 가족이 던져주는 육포 조각을 먹으며 삶을 이어가던 중, 강도들이 한명을 꺼내 줄 것을 제안하고 상의하여 여성 후지를 올려보낸다..

구더기 그득한 축축한 구덩이 감옥 묘사도 사람 잡는데, '후지가 빠져나간 뒤 육포가 아니라 신선한 고기가 던져진다'에서 시작되는 공포스러운 묘사가 압권인 작품.
핵심은 강도 가족이 사람을 죽여 먹고, 가죽으로 생활 용품 등을 만든다는 설정인데 스코틀랜드 소니 빈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게 분명해 보입니다. 허나 단순히 영감을 얻은 수준은 아닙니다. 아이가 사람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노는 등의 디테일이 잘 살아 있거든요.

이러한 묘사에 더해 숨쉴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미히코가 머리카락을 엮은 줄을 이용하여 요이치를 끌어 올렸던 밧줄을 회수한 뒤, 강도 가족을 구덩이에 쳐 넣는데 성공한다.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가보니 강도 가족이 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기에 뚜껑만 덮고 도망쳐 온다..는 결말까지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감을 선사해주었으니까요.
이런 류의 돌직구 고어 호러는 오츠 이치의 특기이기도 하죠. <ZOO>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편 <seven rooms>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물론 해당 단편과 단점은 동일합니다. 왜 강도 가족이 포로를 잡자마자 죽이지 않고 귀한 육포를 먹여가며 살려두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점 등 세부적인 설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제법 되거든요.

그래도 섬찟함과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은 수록작 중 최고였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 작품이 쉬어가는 느낌이라 공포심이 더욱 배가된 듯 한데, 목차도 작가의 의도인지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빗을 주워서는 아니된다>
전편의 경험으로 미미히코는 여행을 거부하고, 이즈미 로안은 다른 고용인과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로안은 미미히코에게 동행인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며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떨어진 빗을 줍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줍는 것이기에 꼭 빗을 주워야 할 때는 발로 한 번 밟은 뒤 주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토대인 작품. 빗을 그냥 주웠다는 고용인이 머리카락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입에 들어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 엄청난 양이 나왔다는 부분까지는 평범한 괴담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노파가 빗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로 그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머리카락은 죽은 어머니의 것이라고 밝혀지는 결말이 아주 독특했어요. 괴담을 너무 좋아한 청년이 자작극을 벌이면서까지 괴담이 되려 했다는 내용이니까요.
누군가의 이야기가 괴담이 된다는 점에서 교코쿠 나쓰히코의 <백귀야행>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단순 괴담이 아니라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결혼한 뒤 온갖 괴롭힘을 당하던 여자가 우연히 만난 소년. 소년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데...

이즈미 로안이 길치가 아니라 사실은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텐구의 자식이라는 설정을 알려주기 위한 이야기.
단순한 설정 보강용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여자를 괴롭히던 시댁에 뭔가 천벌이 내렸다는 이야기라도 있었더라면 뭔가 완결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별점은 빵점입니다.

2016/01/16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1.5점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 - 4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케야 하루카는 아버지가 관련된 사고 이후 기분 전환을 위해 요트 인디아나 호를 타고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선장 류자키와 선원 아즈마, 그리고 대부호 우노의 초대를 받은 여행객은 하루카 외에 골프 선수 나라이, 산부인과 의사 가지카자와, 작가 후유카와, 변호사 구제까지 모두 7명. 
그러나 이상적이어야 할 그들의 여행 첫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들의 숨겨진 악행을 폭로하는 테이프가 재생되고, 이후 한명씩 살해당하게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오마쥬했다는 작품. 작가 나쓰키 시즈코는 대표작 <W의 비극>과 아주 예전에 출간된 단편집 <천사의 방울> 등을 통해 접해보았습니다. 두 작품은 그런대로 괜찮았었죠.

그런데 이 작품은 한마디로 실망입니다. 원전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하고 있거든요. 원전의 경우 미지의 인물이 법으로 재판할 수 없는 악인들을 응징한다는 설정에 더해 일반적인 추리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매력 포인트였죠. "열 개의 인디언 인형" 동요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게 정말 섬찟했어요. 여담이지만 예전 우리나라 방송에서 각색, 방영했었을 때 "열 개의 제웅 인형" 이라는 노래로 현지화했었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무서웠었습니다. ("열 개의 제웅 들이 어쩌구저쩌구 했었네.....")
허나 이 작품은 섬 대신 대형 요트로 무대를 옮기고 등장인물도 10명에서 7명으로 줄였을 뿐 설정은 베꼈다 해도 무방하고 진행 과정은 밋밋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밋밋하기만 한게 아니라 합리성도 결여되어 있어요.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방식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말이죠. 여행 첫날, 승객 들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동 재생 테이프에 의해 그들 한명 한명의 악행이 폭로되는 장면부터가 그러해요. 악행 폭로 후에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크리스티의 소설을 가지고 친 짖궂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의기투합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 실제 사건이 벌어진 후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죠. 혼자 남으면 다 죽는데 구태여 혼자 방으로 기어들어가서 죽어나가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요? 당연히 생존자들끼리 조타실에 모여서 문을 잠그고 함께 있어야죠. 당직과 조타수를 빼면 바닥에서라도 자면 되고. 첫번째 피해자 나라이 사건 때만 해도 연쇄 살인극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번째 피해자 아즈마가 발견된 시점에서는 행동을 함께 했어야 했어요.
아울러 작중 하루카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와키무라 유이치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고사에 불과하죠. 때문에 내용에 영 몰입이 되지 않더군요. 그녀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라 하더라도 무슨 연좌제도 아니고 그녀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말도 안되잖아요.

그나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부분은 나은 편인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바뀌는 마지막 결말은 정말이지 가관입니다. 하루카의 아버지 오케야 세이키의 탐욕 때문에 사망한 호텔 화재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모여 복수를 위해 하루카를 자살로 몰아간다는 것이 진상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되요. 목적이 그녀가 자살했다는게 알려지만 오케야가 죽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벌이다... 라는 것이었다면 그녀를 속여넘겨 배에 태운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거죠. 그냥 고문하고 극한의 고통을 주어 죽이고 그냥 바다에 시체를 버린 뒤 '자살했다;라고 하는 것과 차이가 없잖아요. 왜 이렇게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많이 드는 연극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 3대밖에 없다는 요트를 어떤 연유로 구할 수 있었는지, 하루카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고 연극을 밝혀내었다던가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등 계획에 헛점이 너무 많고 부실한 것도 단점이고요.
피해자 가족들이 범인을 가두어 놓고 연극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면산장 살인사건>이 떠오르는데, <가면산장...>에서는 주인공의 자유가 억압된 상태고 사람도 한명밖에 죽지 않아 연극도 손쉬웠을 뿐더러 연극의 이유도 "진짜 주인공이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알기 위해:라는 것이기에 '그나마' 납득할만 합니다만 이 작품은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덧붙여 하루카가 결국 살아남고 아버지 오케야는 죽는다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완전 사족입니다.

결론내리자면, 오마쥬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내용을 많이 베꼈을 뿐더러 원작보다 나은 점은 단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졸작이네요. 별점은 1.5점. 1점도 시원치 않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합쳐놓은 아이디어에 별점 0.5점 얹습니다. 뭐 위에서 말씀드리듯이 좋은 결과는 아니었지만요.
엘릭시르에서 출간된 작품은 항상 응원하고 싶은데 이 작품은 절대 아닙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시고, 관심조차 두지 않으시는게 좋을거에요. 작가의 대표작도 아닌 이런 작품이 왜 번역 출간되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2016/01/12

모방살의 - 나카마치 신 / 최고은 : 별점 2.5점

모방살의 - 6점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월 7일 7시, 추리작가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를 음독하고 사망한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지만 두명, 사카이의 약혼자 나카다 아키코와 친구 쓰쿠미 신스케는 자살이라는 점에 의문을 품고 각자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나가는데.....

추리소설가 사카이 자살 사건을 두고 두명 -사카이의 약혼자 아키코와 친구이자 동료 신스케 -이 각자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전개가 특이한 작품. 두 명의 시점을 오가는 교차 전개를 지닌 작품은 많지만 뒤에 말씀드릴 트릭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런 저런 추리 커뮤니티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은 평을 받아서 관심가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추리적인 요소, 특히 트릭은 상당히 빼어나더군요. 추리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기에는 충분했어요.
일단 기본적으로는 서술 트릭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핵심 트릭의 하나인 '두명이 알고 있는 사카이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것은 중반 정도에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기는 합니다. 가장 큰 단서는 나카다 아키코의 약혼자 사카이는 출판사에서 정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깔끔한 원고를 쓰는 사람인데 신스케의 친구 사카이의 원고는 지저분하다는 묘사였어요. 트릭을 알고나니 그 외의 몇가지 자잘한 단서들도 눈에 뜨이더군요. 아키코가 약혼자 사카이의 신인상 수상을 몰랐다던가... (다른 사람이니까)
허나 단점은 아니에요. 외려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또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첫 발표는 1970년대) 상당히 앞서나간 , 놀라운 아이디어였음에도 분명하고요. 저도 다른 서술 트릭물을 많이 접해보았으니 눈치챘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무척 놀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고 다른 트릭, 즉 두 사건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다는 것 까지 등장한다는 것도 대단했고요.

또한 핵심 서술 트릭 뿐 아니라 곁가지로 사용된 트릭들도 나무랄데 없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의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트릭,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열차와 충돌한 트럭에 쓰여진 회사 이름 ('오코노기' / '고시바')을 활용한 트릭 등인데 이건 트릭이다!라는 것이 노골적이라 추리 퀴즈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만... 트릭의 수준도 높고 작품과 잘 연결되어 어색하지 않게, 재미있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서술 트릭과 함께 이러한 트릭들이 연이어 펼쳐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절실한 노력이 충분히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투입한 역작은 최근에 본 적이 없네요.

그 외 범행에 관련된 동기도 비교적 설득력이 높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 뇌성마비 아이와 관련된 유괴, 거액의 현금이라는 동기와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의 유명 작가 표절에 얽힌 동기 모두 그럴듯했거든요. 특히나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거장 세가와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사카이의 작품에 얽힌 진상 - 사실 세가와가 1년 전에 죽은 사카이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었고, 이 노트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입수한 1년 후의 사카이가 표절한 것이라는 표절의 윤회 -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제목 그대로 첫번째 사건을 '모방'한 이유도 비교적 타당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냐고 하면 선뜻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네요. 이름이 같은 다른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날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 (청산가리 음독)으로 자살한다는 것부터 트릭을 위해 사건을 만든 느낌이 들잖아요? 물론 이 부분은 본격물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작위적인 트릭이라는 굴레일 뿐더러, 트릭 자체가 빼어나기에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허나 소설적으로 완성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해요. 이유는 아키코와 신스케가 각자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들, 즉 도가노 리쓰코 (아키코)와 야나기사와 구니오 (신스케)를 대면하자마자 즉흥적으로 범인임을 확신하고 공격하는 등 이야기의 밀도와 설득력이 낮기 때문입니다. 택시에서 몇마디 들은 것을 가지고 처음 만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몬다는건 말도 안되죠.
또 비교적 공들인 트릭인 사진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했음에도 첫번째 사카이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던가, 마찬가지로 알리바이를 공작한 편집장 야나기사와 구니오가 실제로 범인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허탈했고요.

작가 스스로도 정말 여러번 고쳐서 발표한 작품이라는데 고쳐 쓴 작품이 이 정도라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럴 거라면 괜한 욕심에 여러가지 트릭을 넣어 이야기를 키우지 말고 서술 트릭에 1년간의 시차를 이용한 표절의 윤회 중심으로 보다 압축해서 쓰는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카이 유괴사건과 그로 인한 자살, 슌스케의 사카이는 표절의 진상 폭로를  걱정한 나카이에게 살해당한다 정도면 아주 깔끔했을텐데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좋은 트릭들이 결합된 좋은 추리물임에는 분명합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캐릭터와 묘사 역시 트릭에 비하면 좋다고 하기 어렵기에 감점합니다만 장점은 확실한 만큼 추리 애호가라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6/01/11

헤밍웨이 위조사건 - 조 홀드먼 / 김상훈 : 별점 2.5점

헤밍웨이 위조사건 - 6점
조 홀드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헤밍웨이의 분실된 원고를 위조하여 한몫 잡으려 하는 존 베어드 앞에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그만 둘 것을 명령한다. 미지의 존재는 시공을 초월한 평행 우주의 관리자로 존의 작업이 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기 때문.
명령을 거절한 존을 죽이지만 존은 다른 평행 우주에 다른 모습, 다른 기억을 지닌채 부활한다. 그가 부활한 세계는 기존 세계와 무언가 조금 다른 곳이었다...

SF 작가 존 홀드먼의 중편 SF 범죄 스릴러. 초, 중반부까지는 헤밍웨이의 원고를 위조하여 한 몫 잡으려는 전형적인 위조 사기물인데, 관리자에 의해 존이 최초로 죽은 뒤에는 평행 우주 세계관의 SF물로 전환되는 작품.

일단 초반 위조 사기물 전개는 훌륭합니다. 원고를 위조하는 것 보다 그 원고가 가짜임을 증명하는 논픽션을 써서 대박을 치려 하다는 계획부터 아주 참신하거든요.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 높은 계획이라 생각됩니다.
또 나름 진지한 학자 존이 이 사기에 뛰어든 동기 (신탁 재산의 투자 실패와 그로 인한 아내의 유혹)도 설득력 높고, 사기꾼 캐슬과 존, 리사 부부, 문학을 공부하는 콜걸 팬지 등 주요 캐릭터도 생생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원고를 위조할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는 과정의 묘사와 헤밍웨이 관련 디테일도 괜찮은 편(국내 독자가 그 참 맛을 느끼기는 어렵긴 하지만)이며 전체적으로 유머가 묻어난다는 것도 좋았고요.
아울러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적나라한 성관계 묘사가 꽤나 빈번하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꽤나 잘 어울린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캐릭터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어 주더라고요.

허나 평행 우주의 관리자가 개입한 뒤 부터는 좀 별로에요. 특히나 존 베어드가 헤밍웨이를 위조하는 것이 왜 우주에 위기를 가져오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마지막이 영 이해가 안되고 별로였어요. 헤밍웨이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의 묘사는 압도적이긴 합니다만 결말이 대체 뭐죠? 두 여자를 구하고 죽은 뒤? 헤밍웨이가 되었다가 그를 초월한다?  존이 관리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주인공이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으로 결말을 퉁치는 작품은 너무나 많은데 (<타이거! 타이거!><제 5 도살장> 등등등) 딱히 차이점이나 더 나은 점을 찾기도 힘듭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뜬금없고 급작스러운 편이니까요. 여러모로 깊이 고민하지 않고,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의 기억 상실증 설정같이 일종의 만병통치약을 사용해서 뻔하고 쉽게 끝낸거 아닌가 싶어요.

이럴 거라면 그냥 위조 범죄물로 마무리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물론 평행 우주 하나의 존이 죽을 때 그의 기억을 간직한 채 다른 평행 우주의 존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부활할 때마다 조금씩 바뀌어간다!는 설정을 통해 호감가는 잔챙이 사기꾼에서 살인마로 돌변하는 캐슬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등의 디테일은 좋았지만... 핵심 이야기로 보기에는 어설프고 대충 넘어간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적당한 길이에 책의 장정과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도 충분합니다만 앞서의 이유로 감점합니다.

2016/01/09

앤트맨 (2015) - 페이튼 리드 : 별점 3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CU)의 또다른 시리즈. 작년 개봉작인데 감상이 늦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다른 마블 작품들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스케일의 이야기라는 것. 회사와 가정집 아이방에서 대부분의 액션이 이루어지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의 밀도나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대단합니다. 특히나 코믹하게 풀어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이에요. 조사해보니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초기부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는데 확실히 그런 감성이 느껴졌어요.

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앤트맨 (스캇 랭) 캐릭터도 매력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토니 스타크 류의 천재도 아니고, 캡틴 류의 정의감 넘치는 군인도 아닌 일반인에 가깝지만 똑똑한 도둑이라는 직업적(?) 특성 덕이 커요. 스캇 랭이 행크 핌의 저택에 숨어들어 금고를 털려는 장면을 통해 이러한 특성을 부각시키는 - 도둑으로의 몸놀림은 물론 몰래 침입해서 금고를 여는 과정에서 똑똑함 부각 - 식의 연출도 좋고요.
앤트맨의 능력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작아지는 것에 대한 묘사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제목 그대로 "개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장면들이 마음에 들더군요. 행크 핌과 호프의 개미 조종 장면도 그럴듯하지만 개미의 여러 능력을 활용하여 연구소를 공략하는 장면이 아주 좋았어요..
아울러 팬 서비스에 가까운 팔콘과의 액션씬이 의외로 비중있게 펼쳐지는 것 역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팬으로서 즐거운 부분이었습니다.
그 외 마이클 더글라스의 묵직한 행크 핌 연기는 반가왔고, 스캇 랭의 소악당 친구들도 작품을 유쾌하게 만들어줍니다. 지나칠 정도로 스테레오 타입이기는 하지만 감초 역할로는 충분했어요. 스캇의 딸 역시 무척 귀여웠고요.

하지만 악당인 옐로우 재킷이 그다지 부각되지 못한건 좀 아쉬웠습니다. 완력이나 능력이 앤트맨과 거의 동일하고 화력면에서만 앞설 뿐인데, 이래서야 특수무기 (원반)는 물론 철저한 훈련(?)을 거치고 개미까지 조종할 수 있는 스콧 랭이 훨씬 우위에 있는게 당연하잖아요.
앤트맨이 왜 작아지는 원반을 던지지 않았을지, 옐로우 재킷은 왜 스캇 랭 딸이나 협박하는 찌질한 짓을 하고 있는지 등 이해되지 않는 점도 제법 되고요.

그래도 단점은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재미있고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스케일이 컸던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보다도 훨씬 말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2016/01/08

테두리 없는 거울 - 츠지무라 미즈키 / 박현미 : 별점 2점

테두리 없는 거울 - 4점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박현미 옮김/arte(아르테)

'감성 호러'라는 마케팅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읽게 된 작품. 대체 호러가 어떻게 감성적일 수 있을까 아주 궁금했거든요.

허나 한마디로 기대 이하였습니다. 소녀 취향 감성은 넘쳐나나 호러의 비중은 지나치게 낮아서 전혀 무섭지 않거든요. 볼만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호러 소설로 보기는 어려워요, 이야기 자체도 <계단의 하나코> 외에는 호러로 보기 어렵기도 하고요. (범죄물, 혹은 일상계에 가까운 듯?)
또 수록작 5편 중 2편이나 내용 파악이 어렵다는 것도 감점요소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빠, 시체가 있어요>는 대부분 같은 의견이더군요) 독자 나름대로 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답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계단의 하나코>

  • 첫 번째. 이 학교의 하나코는 계단에 산다.
  • 두 번째. 하나코와 만나고 싶으면 하나코가 사는 계단을 진심을 다해 열심히 청소할 것.
  • 세 번째. 하나코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다.
  • 네 번째. 하나코의 질문에 거짓말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
  • 다섯 번째. 하나코가 상자를 줘도 받으면 안 된다.
  • 여섯 번째. 하나코에게 부탁할 때는 하나코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 일곱 번째. 하나코가 내리는 벌은 계단에 갇히는 무한 계단의 형벌.

학교의 왕따 사유리 자살 사건의 진상을 풀어가는 이야기.
일본 괴담 속에서도 메이저 중 메이저인 하나코가 등장합니다.. 독특한 것은 화장실이 아니라 계단에서 나타나는 하나코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설정이라면구태여 '하나코'였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여튼,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하나코에 얽힌 일곱가지 불가사의를 엮어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입니다. 아이카와의 후배 지사코로 변장한 하나코가 나타난 후, 그녀가 나타난 이유는 아이카와가 간절히 계단을 청소한 덕분 (핏자욱을 지우기 위해)이며, 하나코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데 다행히 아이카와는 지사코가 선물한 케잌과 사탕을 먹지 않아서 운 좋게 넘어가지만 결국 '거짓말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에 걸려서 무한 계단 지옥에 갇히는 결말까지의 긴박감은 정말로 대단했어요! 아이카와의 심리 묘사 역시 발군이고요. 마더 구즈 동요에 맞추어 살인극이 벌어지는 고전 본격 추리물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라면 우선, 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부분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코는 부탁을 들어 주는 역할도 있는 듯 한데, 여기서는 벌을 내릴 뿐이라는 것은 의아했어요. 아이카와 앞에 하나코가 나타난 것이 사유리의 죽기 직전 부탁이 아니라 아이카와의 간절한 소망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사유리의 죽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왜 복수자 역할을 수행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죽기 직전 사유리가 계단에서 "살려줘!"라고 외쳤다는 묘사 정도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아이카와의 범행이 상세하게 드러나지 않고 독자 상상에 기대는 것, 사유리를 왕따시킨 학교 아이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것 역시 답답하고 찜찜했던 부분입니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네를 타는 다리>
애니메이션 하이디의 그네 속도에서 착안한 작품 (으로 보입니다). 왕따 이야기와 분신사바를 엮는 과정과 '큐피트님'이라는 유령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은 당쵀 알 수가 없네요. 인기없던 미노리가 인기있는 가오리 그룹에 들기 위해 분신사바 놀이를 하다가 유령을 화나게 했다... 그런데 그 유령 때문에 미노리가 죽었다? 유령의 정체도 모호하고, 마지막에 아카네의 상상이 미노리와 겹치는 전개도 뜻을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보이려면 최소한 유령의 정체, 혹은 죽음의 이유는 명확했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아빠, 시체가 있어요>
쓰쓰지와 엄마, 아빠가 치매가 있는 시골 할머니 집 청소를 나섰다가 집안 곳곳에서 시체를 발견한다는 이야기.

시체가 왜 나왔으며 시간이 지나면 쓰쓰지를 제외한 사람들은 왜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연달아 시체가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에필로그는 누구의 제사 장면인지 등등등 도저히 내용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 인터넷을 뒤져봐도 대체로 제 감상과 동일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잠깐 고민해 본 결과로는, 앞서 청소 시작 전 아버지가 5월 내내 청소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데 마지막 에필로그의 일력은 5월 5일이라는 것이 핵심인 듯 합니다. 즉, 에필로그는 사실 청소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 것이라고 봐야죠. 앞서 2주에 걸쳐 시체를 치우고 집배원까지 죽인 뒤, 방문 간병인이 오게 되는 것은 아무리 봐도 한달은 걸렸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앞서 묘사된 청소와 시체 은닉은 모두 쓰쓰지의 상상이 아닐까요? 집에서 발견한 것은 시체가 아니라 쓰쓰지의 오래된 나쁜 기억, 예를 들자면 과거 이 집에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 주민들에게 몹쓸 짓이라도 당했던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야 매주 어머니, 아버지가 시체에 대해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설명이 되고요. 아니면 히로후미의 수건이 놓여져 있는 제사상을 볼 때 히로후미가 죽은 것일 수도 있겠죠. 죽음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혹은 가족 모두가 관계되었을 수도 있고.

허나 진상은 알 길이 없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블랙코미디스러운 전개는 그럴듯 했지만 내용도 모를 글에 점수를 줄 수는 없네요.

<테두리 없는 거울>
표제작. 거울에서 본 미래 (아이)가 악몽으로 구체화되고, 이 미래를 죽이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저주를 다중인격 범죄와 엮은 작품.
사건의 원인과 동기, 결말까지 깔끔해서 마음에 드네요. 약간 추리적인 성향을 띄는 것도 좋았고요. 특히 가나코 시점에서 다카하타 도야 - 다카하타 유이치로를 뒤섞는 심리 묘사는 일종의 서술 트릭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싶어요.

트릭이 약간 반칙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8월의 천재지변>
신지는 병약한 친구 교스케와 더불어 왕따를 당하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공의 친구 "유짱"을 창조하여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거짓말이 밝혀지고, 더욱 심한 괴롭힘을 당하게 될 때 "유짱"이 나타나는데...

거짓말이 현실이 된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가 이야기의 핵심인 작품. 초등학생들 사이의 우정과 비밀을 그렸다는 점에서 일상계 추리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신지가 나타난 유짱의 정체가 사실은 매미가 아닐까 고민하는 과정, 교스케가 진료소에서 친구를 사귀었다는 복선과 함께 밝혀지는 마지막 결말까지 아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가 스타일일까요? 결국 유짱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 이야기의 결말이 조금 불명확한게 옥의 티네요. 초등학교에서의 왕따가 주요 동기로 계속 등장하는 것도 지루한 요소였고요.

그래도 평작 이상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여름을 무대로 초등학생들이 등장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인데 설정이 반대라는 것도 재미있어요. 유짱이 매미의 화신인 것 처럼 묘사되다가 실존인물이라는 결말인데 <해바라기...>는 죽은 친구가 거미로 환생하는데 알고보니 주인공의 환상이었다는 결말이니까 말이죠.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네요.

2016/01/05

용의 이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용의 이 - 6점
이영수(듀나) 지음/북스피어

면세구역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연휴기간 읽은 듀나의 중, 단편집. 모두 4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이전 <면세구역>이라는 단편집을 읽고 리뷰를 올렸었는데 장, 단점은 모두 유사하더군요. 책 기준 출간 시점이 7년이나 차이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때문에 성장하는 작가다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작품들의 성향이 많이 달라 전체를 요약하는 대신, 아래에 작품별 상세 리뷰를 올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너네 아빠 어딨니>
아빠에게 학대당하던 두 자매가 아빠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하는데 아빠가 좀비로 부활한다!

이전 '판타스틱'에 개재되었던 단편으로 뻔하디 뻔한 좀비물입니다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국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가혹 행위를 일삼는 편부 슬하의 두 자매가 견디다 못해 저지른 살인이 좀비 아포칼립스의 시작이라는 것부터 아빠가 좀비로 살아나는 이유가 묻은 창고의 황토 때문이며 두 자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사의 부적 때문이라는 등의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이 재기발랄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항상 궁금했던 것, 즉 '동물'이 좀비가 되면 어떻게 되나?에 대한 나름의 해답도 반가왔어요. 아빠 등이 잡아먹은 쥐가 좀비가 된 뒤 탈출하여 서울을 좀비 도시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매일매일 좀비를 죽이고 또 죽여나가는 자매의 비밀이 마지막까지 유지되다가 클라이막스에서 한방에 폭발한다는 스피드와 박력 넘치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허나 좀 쉽게 쓴 느낌도 들기는 합니다. 도라지 도사의 부적이 대표적으로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어요. 위기에 처했는데 갑자기 UFO가 나타나서 외계인이 도와줬다는 설정과 다를게 없어 보일 정도로요.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자체인데 차라리 아빠를 매일매일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좀비에 익숙해져서 살아남았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엣지 오브 투모로우> 처럼, 결국 뭔가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는게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낙관적인 결말 - 자매는 살아남아서 80억이나 되는 현금과 보석을 나누어 보관한다 - 도 그닥 와 닿는 부분은 아니에요. 지옥같았던 두 자매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렸다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천국의 왕>
죽은 후의 영혼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로 크게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 즉 사고로 죽은 민서를 영체화 시키는 이야기와 주인공이 아버지와 연구를 진행할때의 이야기 두개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민서 이야기는 순전히 사족일 뿐이며, 아버지와 연구 진행할 때의 이야기 역시 다소 늘어진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영매 능력이 있었던 어머니의 영혼을 가둔 첫번째 병에 대한 이야기, 특히나 병 속에서 어머니의 영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장면 하나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만큼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고 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보다 간단한 이야기로 끌고나가는게 훨씬 나았을 거에요. 영혼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디테일과 아버지의 광기 역시 빼어나게 묘사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어머니 영체 이야기만큼은 별점 4점도 부족함이 없지만 다른 곁가지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
지성을 가진 나무들이 창조한 드라마 속 생명체가 자신의 능력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수페이지짜리 꽁트.
전형적인 듀나 스타일의 작품이에요. 재미있는 설정은 돋보이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러하죠. 별점은 2점입니다.

<용의 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고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자인 소녀가 우주선 불시착 후 홀로 살아남는다. 불시착한 별은 토착민들의 유령이 숭배하는 '여왕'의 존재를 놓고 유령들간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였다.

기묘한 분위기의 판타지 SF. 260페이지가 넘는 중편으로 일단 강력한 능력을 가진 소녀가 나옵니다. 정신을 조합하여 새로운 인격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정신능력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흡수한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죠.
미스터리도 있습니다. 여왕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은 누구인지, 대체 이 별은 무엇인지 등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거든요.
액션도 화끈한 편이에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적, 그리고 다양한 유령과 생명체, 기계와의 사투도 그려지니까요.

이렇게만 보면 되게 재미있고 좋은 작품같죠? 허나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불친절한 전개와 묘사 탓이 커요. 주인공 소녀 외에는 모두 유령이라 대화나 별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요. 작가의 문체이기도 한데 대사와 의식의 흐름이 구분되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명료한 맛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나마 중반까지는 제법 흡입력있었는데,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수습이 힘들다는 작가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났달까요.
그리고 별에 존재하는 유령들은 모두 오래전 멸종한 달팽이들의 강력한 잔유 사념에 지배당한 결과라는 진상 역시도 효과적으로 활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묘사 탓에 그냥 평이하게 흘러가고 끝나버리거든요. 어차피 주인공 소녀의 생각 밖에는 근거가 없기도 해서 이게 그냥 미치광이 소녀가 정신병원에서 꾼 꿈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렵고요.
아울러 별의 문이 멋대로 열린다는 설정은 편의대로 써 내려간 것 같아 더욱 별로였어요.

한마디로, 좋은 재료는 엄청 많은데 정작 결과물은 그냥 그런 비빔밥에 불과한, 그런 결과물입니다. 그나마도 고추장, 참기름이 빠져서 엄청 심심한... 물론 이게 입맛에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게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 고전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일로 보다 명쾌하게, 속도감있게 써 내려갔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2016/01/04

안데르센 동화집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이나경 : 별점 1.5점

안데르센 동화집 - 4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이나경 옮김/현대문학

에오스 클래식의 완역본. 2016년 첫 리뷰네요. 딸아이가 좋아하는 <엄지공주> 등의 이야기가 원래 어떠한지 궁금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읽기 힘들더군요. 재미도 없고 지루한 이야기 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야기의 완성도 자체가 낮아요. 개연성도 부족하고요. 예를 들자면 <눈의 여왕>의 경우, 겔다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카이를 찾아가는 과정이 내용의 핵심인데 정작 결말은 눈의 여왕이 그냥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겔다와는 만나지도 않죠.
또 이러한 모험(?) 비스무레한 과정이 우연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도 단점이에요. 대부분 공주가 어디 갔더니 왕자가 있더라는 식이거든요.
아울러 지나친 종교색도 지금 읽기에는 거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낡은 느낌의 문체 역시 읽기 힘들게 만들고요.

뭐 이런 단점이야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며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동화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들은 왜 이게 동화의 클래식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참혹한 이야기 (<분홍신> 도 그렇지만 나쁜 (?)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대표적인 것은 <부시통>. 눈이 큰 개 세마리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만, 약속을 어기고 마녀를 죽인 병사가 정말 나쁜 놈인데 공주를 얻는다는게 말이나 되나요. 마녀는 그냥 나쁜건가?
무슨 내용인지 당쵀 알 수 없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에요. <꿋꿋한 양철 병정>이 좋은 예인데, 양철 병정이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온 후 그냥 불에 녹아버린다. 이게 어떻게 동화가 되는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물론 아주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의 오리지널 풀 버젼이 무엇인지 알게된 것 만으로도 큰 성과니까요.
또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은데 <인어공주>에서 거품이 된 인어공주가 천국까지 3백년이 걸리는데 착한 아이를 발견할 때 마다 1년씩 줄여준다는 결말이 대표적입니다. 아이들이 아주 절망하지 않고 착하게 살게 만드는 적절한 동화스러운 결말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눈의 여왕>은 읽고나서 예전에 감상했던 러시아산 애니메이션이 비교적 원작을 충실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놀랐고요.

허나 이 정도로 점수를 주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오리지널, 원전으로서의 가치 외에 현대에 먹히지 않는 이야기들로 뭔가 교훈을 준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재미라도 줘야 하는데 지루함 말고는 별다른 가치를 찾기 어렵네요. 예쁜 디자인,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약간의 장점에 0.5점 더 얹어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