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방살의 -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
7월 7일 7시, 추리작가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를 음독하고 사망했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었으나, 사카이의 약혼자 나카다 아키코와 친구 쓰쿠미 신스케는 의문을 품고 각자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나가는데.....
이런저런 추리 커뮤니티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은 평을 받아서 관심 가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추리적인 요소, 특히 트릭은 상당히 빼어나더군요. 추리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기에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요.
추리소설가 사카이의 자살을 사카이의 약혼자 아키코와 친구이자 동료인 신스케가 각자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전개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두 명의 시점을 오가는 교차 전개를 지닌 작품은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 트릭을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두 시점이 서로 다르다는 서술 트릭이지요.
핵심 트릭 중 하나인 '두 명이 알고 있는 사카이는 다른 사람이다!'는 중반 정도에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기는 합니다. 나카다 아키코의 약혼자 사카이는 출판사에서 정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깔끔한 원고를 쓰는 사람인데 신스케의 친구 사카이의 원고는 지저분하다는 설명이 가장 큰 단서였어요. 트릭을 알고 나니 그 외의 몇 가지 자잘한 단서들도 눈에 뜨이더군요. 아키코가 약혼자 사카이의 신인상 수상을 몰랐다던가... (다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는 단점은 아니에요. 외려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합니다. 또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첫 발표는 1970년대) 상당히 앞서나간, 놀라운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저도 다른 서술 트릭물을 많이 접해보았으니 눈치챘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무척 놀랐을 것 같네요.
게다가 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는 점도 대단합니다. 즉 두 사건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다는 다른 서술 트릭도 등장하며, 곁가지로 사용된 트릭들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의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트릭,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열차와 충돌한 트럭에 쓰여진 회사 이름("오코노기" / "고시바")를 활용한 트릭 등이 그러합니다. 물론 이건 트릭이다! 라는게 노골적이라서 약간은 추리 퀴즈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수준도 높고 작품과 잘 연결되어 재미있게 묘사됩니다.
서술 트릭과 함께 이러한 트릭들이 연이어 펼쳐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지네요. 이렇게까지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투입한 역작은 최근에 본 적이 없으니까요.
범행에 관련된 동기도 비교적 설득력이 높아서 와이더닛 물로도 괜찮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 뇌성마비 아이와 관련된 유괴, 거액의 현금이라는 동기와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의 유명 작가 표절에 얽힌 동기 모두 그럴듯했어요. 특히나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거장 세가와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사카이의 작품에 얽힌 진상 - 사실 세가와가 1년 전에 죽은 사카이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었고, 이 노트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입수한 1년 후의 사카이가 표절한 것이라는 표절의 윤회 - 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첫 번째 사건을 "모방"한 이유도 비교적 타당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냐고 하면 선뜻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이름이 같은 다른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 (청산가리 음독)으로 자살한다는 것부터 트릭을 위해 사건을 만든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물론 이런 작위적이라는 굴레는 본격물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고, 트릭이 빼어나서 단점이라고만 하기 어렵습니다만, 소설로서의 완성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키코와 신스케가 각자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들, 즉 도가노 리쓰코(아키코)와 야나기사와 구니오(신스케)를 대면하자마자 즉흥적으로 범인임을 확신하고 공격하는 등 이야기의 밀도와 설득력이 낮기 때문입니다. 택시에서 몇 마디 들은 것을 가지고 처음 만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몬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또 비교적 공들인 트릭인 사진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했음에도 첫 번째 사카이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던가, 마찬가지로 알리바이를 공작한 편집장 야나기사와 구니오가 실제로 범인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허탈했고요.
작가 스스로도 정말 여러 번 고쳐서 발표한 작품이라는데, 고쳐 쓴 작품이 이 정도라면 역량 부족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괜한 욕심에 여러 가지 트릭을 넣어 이야기를 키우지 말고, 차라리 서술 트릭에 1년간의 시차를 이용한 표절의 윤회 중심으로 보다 짧게 썼더라면 완성도는 높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사카이 유괴 사건과 그로 인한 자살, 슌스케의 사카이는 표절의 진상 폭로를 걱정한 나카이에게 살해당한다 정도면 아주 깔끔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트릭들이 결합된 좋은 추리물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캐릭터와 묘사 역시 트릭에 비하면 좋다고 하기 어렵기에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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