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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9

기회를 만드는 확률의 법칙 - 아미르 D 악젤 / 윤상운

 


삶을 살아가면서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경우 "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선택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을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표지에 혹했죠. "주식, 결혼, 도박을 둘러싼 확률에의 도전과 함정"이라는 카피가 너무나 근사해 보였거든요.

읽어보니 제목과 카피 그대로의 책입니다. 다양한 확률의 법칙을 정말 쉽게 풀어서 쓴 책으로 여러가지 사례를 적절하게 인용함으로써 보다 재미있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것 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더군요. 예를 들면 카지노에서 항상 잃은돈의 2배수로 돈을 걸면 언젠가는 딴 다는 유명한 법칙이 있죠.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예컨대 1달러를 걸어서 잃은 뒤 2달러를 다시 걸어서 4달러를 딴다고 치면 결국 배팅액은 3달러, 즉 딴 돈은 1달러밖에 안됩니다. 수가 늘어도 마찬가지죠. 즉 처음에 배팅한 금액 이상은 절대 따지 못한다는 이야기. 또 31명이 모였을 경우 그 중 적어도 2명의 생일이 똑같을 확률은 95%가 넘는다는 수학적 설명이라던가 불행이 일어날 확률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랜덤위크 그래프, 그리고 머피의 법칙을 설명하는 관찰 패러독스. 우연까지 풀어내는 확률의 법칙, 최고의 배우자를 찾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 등 재미있는 사례를 확률적으로 풀어낸 흥미진진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제가 수학쪽은 원래 싫어했고 젬병이었지만 이야기 자체가 워낙 흥미로와서인지 쉽게,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께나 내용에 비하면 가격은 좀 센편인 것이 좀 아쉽네요. 부록으로는 도박, 게임할 때 최고의 승률을 보장하는 방법이 실려있는데 이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서점에서 뒷부분의 짤막한 부록만 참고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도박은 안 좋은 것이지만요^^

2006/09/27

스카이잭 (A Tough One to Lose) - 토니 켄릭 / 변명식 (자유추리문고 46) : 별점 3.5점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출발한 국내선 747 점보 여객기가 360여명의 손님과 함께 사라진 직후 범인으로부터 2천 5백만달러의 다이아몬드를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온다. 옛 전우였던 항공 조사원 필 링롭에게서 우연히 사건을 전해들은 가난뱅이 변호사 윌리엄 베레커는 자신이 전날 골프를 친 골프장에서 비행기가 이륙했던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전 부인인 비서 애니와 함께 사건에 걸려있을 보험금을 기대하며 사건 조사에 뛰어든다.

전설의 자유 추리문고 46, 토니 켄릭의 스카이잭 입니다. 원제와는 다르게 직접적인 제목을 가져다 붙였네요. 이왕이면 사전 용어인 하이잭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여튼, 잘 모르는 작가의 잘 모르는 작품이지만 눈에 띄는 대로 사고 있는 자유 추리문고인데다가, 워낙 싼 가격 (1000원이었습니다) 이기도 해서 구입해 보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어서 흡족했습니다.

장점부터 말씀드리자면 먼저 우연히 사건에 가담하게 된 변호사 윌리엄 베레커와 전 아내이자 비서인 애니의 활약과 실제 범행을 저지른 인물들을 양 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구성이 아주 좋아요.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교묘하게 교차되며 진행되는게 기가 막히거든요. 코믹하거나 별거 아닌 듯 했던 복선들이 하나의 인과관계를 이루는 구성도 마음에 들었고요.
또 가장 큰 축인 베레커와 애니의 이야기에서 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재미나게 그리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스쿠루볼 코미디의 장르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감칠맛 나는 대사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는데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만들거든요. 단지 티격태격하는 것만 아니고 사건에 뛰어들면서 닥치는 여러가지 황당한 상황들 - 사이비 종교집단과의 조우라던가 스튜어디스로 위장했는데 진짜 스튜어디스로 착각되어 비행기에 타게 된다던가 - 역시 굉장히 기발하고 재미납니다. (이러한 코믹스러운 상황 중에서 개인적인 베스트는 애니가 납치된 뒤 그 사실을 모르는 베레커와 범인들의 통화 장면이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승객을 가득 채운 747 여객기를 어떻게 완벽하게 납치, 은폐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약점도 많이 보이긴 하지만, 꽤 그럴싸한 방법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작중에서 표현되듯이 범인들이 거액을 요구하지 말고 단지 짐을 빼돌리는 정도로 만족했으면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성립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사건의 공범 중 한명이 누구인지가 비교적 초반에 노출되나 이후 해당 인물에 관련된 별다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좀 떨어졌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지나치게 헐리우드 영화처럼 통속적으로 흐르는 것은 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베레커의 활약은 몸빵이었을 뿐이며 결과적으로 사건의 진상은 범인의 고백을 통해 밝혀진다는건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좀 어렵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는 폭탄마의 등장은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고요. 그리고 대체 벽돌이 들어있는 가방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래도 제가 읽은 작품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스케일의 범죄가 등장하고 그 트릭과 수법 자체가 괜찮을 뿐 아니라, 베로커 - 애니 커플의 톡톡 튀는 대사와 여러가지 상황 설정이 재미있어서 부담없이 가볍게 즐기기에 딱 좋았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 작품이 두번째 장편이라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되네요.

2006/09/26

헤이즐무어 살인사건 (The Sittaford Mystery) - 애거서 크리스티 / 장말희 : 별점 4점

 

헤이즐무어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장말희 옮김/해문출판사

황량한 지방 다트무어에 위치한 시타퍼드 저택 파티에 모인 참석자들이 우연찮게 벌인 테이블 터닝에서 시타퍼드 저택의 주인이자 지금은 헤이즐무어 저택에 사는 트레블리언 대령이 5시 25분 현재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대령의 절친한 친구 버너비 소령이 걱정된 나머지 눈길을 뚫고 대령을 찾아가지면 대령은 서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대령의 유언장을 조사한 결과, 그의 조카인 짐 피어슨이 사건 직전 (혹은 직후) 대령을 방문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곧바로 짐 피어슨은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에 짐 피어슨의 약혼자 에밀리 트레푸시스가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진범을 잡고자 한다. 신문기자 찰스 앤더비의 협조 (혹은 맹목적인 봉사)에 힘입어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가고 여러가지 조사를 벌인끝에 그녀는 진상을 알아낸다.

크리스티 여사님의 11번째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역시 헌책방에서 싸게 팔길래 충동구매한 책입니다. 포와로나 마플양이 나오는 작품은 좀 식상해서 골라잡았는데 기대이상으로 재미있어서 나름 대어를 낚은 기분이네요.

일단 여사님 작품에서 잘 보지 못했던 장치인 초반부 테이블 터닝 (일종의 강령술?) 에서 전해지는 살인의 메시지가 굉장히 기발했으며 살인 메시지와 실제 살인이 교묘하게 결합되는 부분은 여사님의 뛰어난 필력을 잘 느끼게 해 줍니다. 또한 작품 전체적으로도 지루하지 않게끔 살인사건 말고도 탈옥 사건과 같은 곁가지 사건이나 뜬금없이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주민들 같은 독자의 흥미를 계속 유지시키는 요소들이 많고 이러한 여러가지 사건과 설정이 결말부분에서 결국 하나로 엮이는 구성이 탄탄해서 감탄을 자아내고요. 
무엇보다도 여사님이 즐기면서 쓴 듯 적당할 정도로 유쾌한 분위기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부부탐정"이나 "비밀결사"같은 로맨틱한 요소도 적절한 수준입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동기나 단서 모두 공정하게 독자에게 제공되어 독자와의 두뇌게임을 펼치는데 그야말로 정통파답다는 느낌이에요. 트릭도 상당히 괜찮고요. 굉장히 상식적인 트릭인데 교묘한 설정이나 장치 없이 트릭을 실행하는 내용이라 그야말로 최고였어요. 정교하지만 작위적이고 딱히 신뢰도 가지않는 장치 등을 이용하는 최근 경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네요. 상식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지금 읽어도 별로 식상하지 않은 트릭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만한 점은 여주인공이자 탐정역인 에밀리라는 캐릭터입니다. 미모에 행동력과 과감성까지 갖추고 똑똑하기까지 한 호감도 100%의 주인공으로 여사님이 자기가 바라는 여성상을 투영해서 묘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가 생생하고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찰스 앤더비를 조종(?)하는 등 남자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대관절 왜 시리즈 캐릭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더군요.

물론 너무나 전형적인 돈많은 숙모 캐릭터나 비굴한 조카, 기자같은 평면적인 캐릭터들은 조금 쉽게 간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독특한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워낙 확실해서 그다지 거슬려보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여사님스러운 정통파 고전 트릭 미스테리였달까요? 미스 마플과 포와로에 가려진 여사님의 작품들 중에서도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여사님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 제법 있는데 부지런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들게 하네요. 역시 구관이 명관인 법이겠죠.

PS : 원제가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등장하는 저택의 이름을 바꾸어 놓은 번역 의도가 좀 궁금합니다.

2006/09/25

명탐정 코난 Movie 10 - 탐정들의 진혼가

모리 탐정과 란, 코난과 소년 탐정단 일원들은 새로 생긴 "미라클랜드"에 의뢰 때문에 초대된다. 스페셜 ID 손목 팔찌를 선물로 받은 일행은 본격적인 관광에 나서지만 모리 탐정과 코난은 남아서 의뢰인의 의뢰를 수행하게 된다. 의뢰는 의뢰가 되는 수수께끼 자체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는 것과 한마디 암호, 더불어 그들의 ID는 폭탄이기때문에 그날 저녁 10시까지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 TAKA 3-5라는 암호를 가지고 주소를 알아낸 그들은 그곳에서 4월 4일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우연찮게 똑같은 이유로 사건에 휘말린 하츠토리와 만나 공동 작전에 들어간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단서는 "YOU CRY"라는 암호에서 유추해낸 한 동호회의 인물들이 연관된 사건인데...

철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코난 극장판 제 10기입니다. 그간 워낙 많이 실망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이 10기는 꽤 재미있더군요.

일단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이 다 나오는 올스타 캐스팅이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모리탐정과 란, 코난과 소년 탐정단은 고정이라 해도 하츠토리와 카츠하, 소노코, 괴도 키드와 하쿠바 사구루, 모리 부인, 하츠토리의 아버지 헤이조와 오사카 경찰 여러분, 거기에 더해 거의 모든 경찰들 - 경부와 시라토리, 사토, 다카기, 요코미조 형사 - 까지 등장해서 코난 팬에게 확실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거든요. 또한 단순 등장이 아니라 모리 탐정이나 소노코 등도 각각 나름의 활약을 한다는 것 역시 팬으로써 즐거운 점이겠죠. 개인적으로는 하츠토리의 아버지 헤이조와 소노코의 등장 장면, 사토와 다카기의 데이트 장면 등은 캐릭터를 정말 잘 파악하고 만들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 구현해 놓았더군요.

그러나 단순히 캐릭터만 나열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캐릭터보다는 내용이 더욱 중요할텐데 이 극장판 10기의 경우는 기본적인 이야기 역시 그간의 허술했던 극장판과는 달리 나름 잘 짜여져 있는 편입니다. 사건의 주 설정인 시간 제한이 있는 미션 수행은 하도 많이 등장한, 식상한 설정이었지만 여러가지 장치와 상황을 만들어 진부함은 어느정도 피해가면서 재미와 긴박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추리물의 탈(?)을 쓰고 나온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트릭도 이번에는 꽤 그럴싸합니다. 특히 시간차 살인 트릭 같은 경우에는 제법이었습니다. 단서도 공평한 편이고 정보를 관객에게 충실하게 전달해 주고 있거든요. 아울러 괴도 키드와 하쿠바 사구루의 관계, 마지막 남은 ID 패스의 수수께끼 같이 어느정도 관객이 생각해야 하는 장치는 그간 코난 애니메이션에서 보지 못했었던 부분인데 상당히 괜찮았다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공되는 단서가 너무 비약이 심하고 (YOU CRY는 솔직히 억지에 가까왔습니다) 좀 생뚱맞은 중간 전개, 즉 진범이 탐정들의 생명을 노리는 부분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점, 스나이퍼의 실력을 갖춘 살인범이라던가 용병같은 해결사들, 총기를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는 등 사소한 부분 등등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비약이나 생략이 너무 심한 것은 추리물로 보기에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동용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리고 시간 제한 막판에 이르러 마지막 폭탄 해제를 위한 시스템 암호를 맞추는 부분은 굉장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더군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복선이 굉장히 어설펐거든요.

그래도 그간 모든면에서 형편없었던 아동용 모험극 수준의 코난 극장판에 비한다면 작화의 수준도 괜찮으면서 충분한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수작급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최고의 수준은 아니지만 즐기면서 보기에는 적당한 수준이었기에 기회가 되시면 한번쯤 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코난 팬이라는 전제 하에서요^^

2006/09/24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 헨리 페트로스키 / 최용준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지호

전에 읽었던 "디자인이 만든 세상" 이라는 책의 저자인 공학자 헨리 페트로스키의 칼럼 모음집입니다. "공학"전문 칼럼이라 공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공학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를 역설하고 있는 책으로 공학자들이라면 누구나 만족하면서 볼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제일 첫 칼럼인 "노벨상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부터 이 책의 주제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칼럼 내용은 노벨의 유언을 잘못(?) 이해한 유언 집행인들 때문에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분야에 상을 주게끔 되어버렸지만 실상 노벨은 원래 공학자였고 그의 일생과 여러 기록들을 통해 볼 때 그는 인류의 진보에 이바지한 "기술", "공학"에 상을 주기를 원했었다는 내용의 칼럼이거든요.

때문에 저같이 전에 읽었던 디자인 관련 서적을 기대한 사람들은 약간 실망할 수도 있을것 같네요. 그러나 실망은 잠깐이었고 내용이 워낙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읽고난 만족도도 꽤 큰 책입니다. 최소한 저같이 어떤 "문화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합니다. 예를 들자면 실제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어 냈지만 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못한 공학자들인 슈타인메츠, 토질역학의 시조인 테르차히, 불가능에 도전했던 천재 브루넬 등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광범위하게 실려있고 중요한 공학적 결과물인 여러 다리나 파나마 운하, 증기기관이나 에펠탑, 후버댐 그리고 꽤 최근 건물인 말레이지아의 페트로나스 타워 등에 대한 재미난 고찰 및 소고들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한 공학자의 필생의 업적 중 하나인 "의사진행규칙"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관심과 지적 영역의 폭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해박하면서도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칼럼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인문계, 그것도 예체능 전공 출신자라 이러한 소재들이 크게 와닿지는 않고 외려 어렵게 느껴지기 쉬운데 워낙 재미있는 글 쓰기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저자인 덕에 이 모든 내용들이 어렵지 않게, 쉽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 가장 큰 이 책의 장점이겠죠. 게다가 도판도 충실하고 SF쪽에서 유명하신 최용준님의 번역도 충실해서 읽는 맛을 더 해줍니다. 대중들 모두가 원하는, 관심있어할 만한 책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나마 흥미를 느낀다면 그에 걸맞는 재미는 가져다 준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 2권 읽었는데 저자의 다른 책도 빨리 구해봐야겠네요. 이번엔 어떤 소재를 가지고 재미나게 풀어줄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군요.

비밀결사 - 애거서 크리스티 / 신용태 : 별점 2.5점

 

비밀결사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용태 옮김/해문출판사

소꼽친구였던 토미와 터펜스는 전쟁이 끝난 후 런던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의기투합한 둘은 카페에서 즉흥적으로 "청년 모험가 회사"를 설립하는데 그들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휘팅턴이라는 인물이 바로 사건을 의뢰하고 터펜스가 즉석에서 말한 "제인 핀" 이라는 이름 한마디로 인해 둘은 큰 수수께끼에 직면하게 된다.

이후 둘은 정부 기관원 카터로부터 그녀가 루시타니아 호 침몰때 중요한 서류를 넘겨받아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 그 서류의 존재가 대영제국의 존망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정부의 비공식 첩보원으로 일하며 그녀와 서류의 행방을 뒤쫓는 일을 제안 받는다. 제인 핀의 미국인 사촌이자 대부호인 줄리어스와도 친분을 쌓으며 토미와 터펜스는 서서히 "브라운"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위험한 조직의 핵심에 접근해 나아가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두번째 장편이자 "부부탐정"으로 유명한 토미-터펜스의 첫 주연 데뷰작. 예전에 해문에서 출간된 아동용으로 읽었었지만 헌책방에서 싸게 팔길래 옛 기억을 되새길겸 해서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위에 줄거리를 짧게 요약해 놓았지만 추리물보다는 모험물이죠. 그러나 여사님의 전공을 반영하듯 몇몇 추리적 장치들이 소설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브라운"의 정체가 합당한 복선에 의한다는 것, 간호사 복장에 대한 심리적 장치 -간호사 복을 입으면 다 똑같아 보인다는-, 그리고 "마거릿" 이라는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 등 재미를 더해주는 여러 요소들이 쏠쏠하게 등장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여사님의 초기작 (두번째 장편) 답게 약점도 눈에 많이 띕니다. 가장 큰 약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소설이 순전한 "우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겠죠. 두 젊은이가 모험가 회사를 설립한 직후 휘딩턴에게서 의뢰를 받는다는 우연, 그리고 그 전에 그들이 나누던 대화의 한 부분에서 기억한 즉흥적 대답에 따른 사건 전개 등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모험의 거의 대부분이 순간순간의 우연한 요소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분명한 약점입니다. 치밀한 설정보다는 왠지 여사님이 즐기면서 쉽게쉽게 써 내려간 듯한 기분이 들 정도에요.

때문에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다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완성도 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여사님 소설 주인공중 가장 쾌활하고 즐거운 토미-터펜스 컴비의 등장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으며 기본적인 재미는 충분히 보장하는 유쾌한 활극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가끔 이런 식으로의 기분 전환은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겠죠? 가벼운 읽을거리를 원하시는 추리소설 초심자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06/09/23

야구 올 시즌 종료

어제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패배함으로써 4위와의 게임차는 2.5게임이 되어버렸습니다.

더이상 운이나 기적을 바라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10게임도 안 남은 상황이지만 신인급 투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선발 4인방에게는 휴식을 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특히 리오스, 랜들 선수에게 휴식을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5억팔 서동환 선수나 좀 봤으면 하고요. 도대체 2군에서 뭘하고 있는건지...

뭐 그래도 내년에는 병역을 마친 2년전 병역비리 의혹 선수들이 대거 돌아오니 투수진은 숨통이 좀 트이겠군요. 다른 선수들 보다도 구자운 선수를 좀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때 마무리 투수이기도 했던 만큼 승리계투조에 포함되면 참 좋겠더라고요. 박명환 선수는 잡지 못한다는 가정하에, 리오스-랜들-이혜천-김명제 4선발과 왼손 금민철, 오른손 김덕윤 롱 릴리프, 믿을맨 구자운과 마무리 정재훈으로 넘어가는 투수진이면 꽤 괜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올 시즌도 그랬듯이 문제는 타선. 리그 탑 클래스의 1번타자는 하나 잡긴 했지만 내년에는 유격수이자 하위타선의 핵이 빠진다. 리오스와 랜들 선수가 없었다면 꼴찌급 전력. 솔직히 이정도면 잘했어.

그럼 두산 팬 분들도, 다음 시즌에 뵈요~

2006/09/21

[번역] 이콜 Y의 비극 (5)

에필로그 [무대 뒤에서]


꽉 막혀 도무지 진전이 없던 수사 선상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돌파구가 열린것은, 다치가와 아카네가 살해된 뒤 5일이 지난 5월 3일, 헌법 기념일의 일이었다.

그 날 아침, 세이쥬서의 수사본부에 얼굴을 내민 노리츠키 경시는, 수사관 한명으로부터 기묘한 보고를 들었다. 세타가야 서 관내에서 발생했던 살인사건 수사에 관련하여, 어제 동서로부터 사카자키 부부에 관련된 사항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타가야 서 관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라고 한다면, 4월 30일 저녁, 타이지도우의 공원에서 나고야에 살고 있던 여성이 강도에게 습격당해 죽은 사건의 일인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여성이, 살해당하기 전날 [벨코포 시노다]의 206호실에 전화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사카자키 부부 집에 전화를?"

여성이 살해당하기 전날이라고 한다면, 다치가와 아카네가 살해당한 4월 29일의 일이다. 연속해서 일어난 이 2개의 사건에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경시는 지푸라기 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세타가야서에 연락하여, 30일에 일어났던 강도 살인 사건에 관한 수사정보를 이쪽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부터 계속 생각한 뒤 집에 전화를 걸어 자고 있던 아들을 깨웠다.

" 무척 급한 일이라서 그러니 곧바로 세이쥬서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구나"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4월 30일 오후 2시 30분경, 타이지도우 X쵸메의 공원의 공중 화장실에서, 20대 후반의 여성이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발견한 것은 근처의 주부로, 목에 나일론 끈이 감겨져 있었다. 누군가가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은 명백했다.

사망 추정 시각은 그날 오후 1시 30분 전후. 백주 대낮의 범행임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목격정보는 없었다. 사체에 난폭한 짓을 한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지갑 등의 소지품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당초 사건은 노상강도에 의한 범행으로 생각되었다.

소지품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피해자의 신원은 곧바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공원 쓰레기통에서 차 공원 호텔이름이 적힌 봉투가 발견되었고, 지문 등으로부터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 종이 봉투의 내용물은 결혼식의 초대장으로, 짐을 줄이기 위해 범인이 버린 것 같았다. 곧바로 호텔에 문의한 결과, 살해당한 여성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피해자는 나고야 시에 거주하는 토고 유카리라고 하는 28세의 여성으로, 4월 29일 아침,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신칸선으로 상경했다고 했다. 그날 밤은 피로연 잔치 때문에 호텔에서 1박한 뒤, 살해당한 당일 오전 11시에 호텔을 체크 아웃 했다고 했다. 양친에 따르면 유카리는 도쿄의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도내의 회사에서 근부하다가 2년전에 나고야로 돌아와 집안 일을 돕고 있었다고 했다. 30일은 도쿄의 동창 친구와 만난 뒤, 밤까지 나고야의 자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고 했다.

살해당하기 직전 피해자의 발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옷 주머니에서 새것인 성냥 상자가 발견된 덕분이었다. 그 성냥 상자에 범행 현장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상점가에 위치한 카페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카페 [카자미도리]의 주인은, 피해자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토고 유카리는 학생시대부터 가게의 단골로,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곤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방문이 점차 뜸해져 슬슬 얼굴 보기 힘들어 졌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0일 오후, 시계바늘이 1시를 가르키기 직전에 유카리가 오랫만에 가게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친구 결혼식때문에 상경했다가 들렸다고, 대학 동창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었습니다만-"

그러나,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만날 상대는 오지 않았고 유카리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때에, 가게에 남자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와서 '그곳에 토고 유카리라고 하는 여성분은 계십니까?' 라고 물었다. 시각은 1시 10분경. 주인은 유카리에게 전화를 건네주었지만, 전화를 건 남자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유카리는 곧바로 상대와 이야기 했고, 이야기가 끝나자, 만나기로 한 상대는 오지 않게 되었다고 주인에게 말하고, 서둘러 계산을 했다. 그 때 '담배는 피지 않지만, 모처럼 가게에 온 기념으로' 라고 말하고, 계산대에 놓여 있던 가게 이름이 들어간 성냥 상자를 집어 들고 주머니에 넣었다고 말했다-

노리츠키 경시는 타이지도우의 사건 개요를, 요약해서 아들에게 설명했다. 린타로는 잠버릇 탓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사건 내용은 대체로 알겠습니다만, 그것과 [벨코포 시모다]의 사건과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말거라. 토코 유카리가 숙박한 호텔 프론트를 조사한 결과, 객실에서 걸은 전화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더구나. 유카리가 전화를 건 것은 29일 오후 5시 2분부터 4분까지의 하나 뿐이였다. 그런데 건 곳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결과, 그것이 세타가야구의 맨션 [벨코포 시모다]의 206호실이라는 것이 밝혀졌거든"

경시가 그렇게 말하자 린타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카자키 부부의 집이요?"
"그렇다. 아직 본인에게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토고 유카리와 사카자키 미도리는, 확실히 같은 대학에 적을 두었던 동급생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30일 오후ㅡ 유카리가 타이지도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해서 기다렸던 상대라고 한다면, 사카자키 미도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토고 유카리의 29일 오후 6시대의 알리바이는? 설마 그 다이잉 메시지는 (=)등호 (토고), Y의 말을 조합했을 지도..."

경시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아니다. 유카리는 친구 결혼식의 피로연에 출석한 뒤, 오후 6시부터 롯퐁기의 가게에서 끝날때 까지 2차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밤은 늦을 때까지 술을 마셨던 것이 확인되었다. 같이 있던 회사시대의 친구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알리바이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는 것은, 토고 유카리가 [벨코포 시노다]의 사건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란다"

경시는 거기까지 말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린타로는 턱에 손을 대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2시 지나서 전화를 걸어왔던 남자라고 말하신 부분이 신경이 쓰이는군요"
"아아, 아마 그 남자가 유카리를 살해한 범인일거야. 뭔가 구실을 대고 유카리를 가까운 공원까지 유인해 낸 뒤, 그 장소에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겠지. 밝혀진 대로 계획적인 범행이야. 지나가던 강도의 짓은 아니야. 소지품을 훔쳐간 것은, 강도를 당한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면, 범인은 어떻게 유카리가 그 카페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카자미도리]라고 했죠? 가게 이름은"
"그렇다"
"- 어? 잠깐 기다려 주세요"
린타로는 눈을 감고, 카자미도리, 카자미도리 라고 여러번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등을 곧게 펴고 번쩍 눈을 떴다.

"그렇구나. 그 다이잉 메시지는 그런 뜻이었구나!"
"뭔가 알아낸거냐?"

경시가 조심조심 물어보자, 린타로는 싱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쯔부라야 아케미 범인설이 부정된 것에 대한 휴유증은 없는 듯 했다.

"예. 이번에는 틀림 없습니다. 같은 실패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정리해 보도록 하죠- 토고 유카리는 29일 오후 5시를 지나 [벨코포 시노다]의 206호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마 유카리는, 학생시대의 동급생이었던 사카자키 미도리와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겠지만, 미도리는 그 때, 담편 애인 맨션을 감시하고 있어서 집에 없었죠. 전화를 받은 것은 집을 지키고 있던 동생 아케미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아카네는 그때까지는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는 것이 가능했었죠. 유카리의 용건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수사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다음날 만날 약속을 하는 것이었겠지. 혹은 전에 약속을 했었다면, 그 확인을 하기 위한 전화였을 수도 있고. 시간이나 만날 장소 같은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전화를 건 흔적이 없는 이상, 유카리는 집을 지키고 있던 동생 아카네에게 언니에게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자연스럽겠죠?"
"흠, 그래서?"
"다음날 유카리의 발자취대로라면, 메시지의 구체적 내용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토고 유카리씨로부터 전화. 타이지도우의 [카자미도리]라는 카페에서, 오후 1시에 만나자] 최소한 이 정도의 정보를 아카네에게 전해준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유카리로부터 전화를 받은 아카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도록 하죠. 그녀는 확실히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전화 옆에 놓여져 있던 메모 패드에 지금 말한 내용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거실의 사이드 보드 위에 메모용의 필기용구가 없었나요?"

라고 린타로가 물었다. 경시는 범행 현장의 상태를 떠올렸다.

"음, 그렇게 말하니, 메모 패드 옆에 검은 사인펜이 있었던 것이 기억 나는구나"
"검은 사인펜. 그것으로 분명해 졌습니다. 아카네는 유카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만날 장소와 시간의 메모를 적었다- 그러나 [風見鷄 (카자미도리)]라고 하는 가게 이름이나, 喫茶店(카페)라고 하는 단어는 항상 한자를 적는 것은 획수가 많기 때문에 메모에 적는 것은 귀찮은 글자죠.  전화를 계속 하던 도중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미도리는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 생략하여 메모를 남긴 것이 분명합니다. 종이와 펜을 좀 주시겠습니까? 뭐 이런 식으로-"


"아카네가 살해당할때 까지, 이 메모는 메모 패드 제일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녀가 누군가에게 등을 찔리고 빈사 상태로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를 남기는 순간에도 메모 패드 위에 이 문자열이 있었던 것이죠. 우리들이 그 가능성을 놓쳤던 것은, 아카네가 메시지를 적은 메모를 사인펜으로 후루룩 써서 2장째의 종이에 흔적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그 다이잉 메시지는, 새 메모지에 써서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완전한 실수야. 그런데 그렇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는 사인펜으로 쓴 메시지 메모 위에 붉은색 볼펜으로 이콜 Y라고 써서 남긴 것이었군"
"그렇습니다. 이런 식이죠"


"아카네는 범인에게 습격당하기 직전까지, 빨간 볼펜을 써서, 미니-코미 잡지의 인터뷰 원고에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최후의 체력과 기력을 짜내어 단서를 써서 남겼을 때도 편집자로 일하던 발상의 연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는 등호가 아니고 문자열을 소거하기 위해 쓰는 이중선, [Y]는 필요한 문자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는 삽입기호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쨌건, 그녀는 메시지를 쓰던 도중에 힘이 빠져서 삽입해야 하는 문자를 써 넣지는 못했죠. 메시지를 완성하기 전에 숨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미완성이라도 이 문자열을 본다면 그녀가 추가로 써 넣고 싶었던 문자가 무엇인지는 일목요연합니다. 다름아닌-



"-사카자키 미도리인가... 하지만 미도리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네. 전에도 그렇게 말했을텐데?"

경시가 의견을 내자 린타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아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미도리의 진술을 다시 한번 잘 검토해 보도록 하죠. 사건의 관계자가 사카자키 미도리의 모습, 아니 목소리라도 실제로 확인한 것은, 오후 5시 30분 이전과 7시 20분 이후의 일에 한정되는데, 그 사이에는 2시간 가까운 공백이 있습니다. 그 정도의 사간 여유가 있다면, 전차를 갈아타서 세타가야의 시노다 까지 왕복하고, 동생인 아카네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말한다면야 미도리의 알리바이는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그 2시간 사이에 미도리가 계속 남편과 그 애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지 않나? 특히 6시대의 미도리의 진술은 모조리 사카자키의 행동과 부합하고 있다. 만약 그 때, 미도리가 니시나마 마유미의 맨션으로 부터 떨어져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 사카자키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 가능했겠니?'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맹점에 빠져버린 것이죠. 미도리가 남편과 공모해서 미리 그 날의 행동에 관해 입을 맞춰 놓았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경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미도리가 사카자키와 공모했다고? 그런 바보같은!"
"그렇게 바보같은 것입니까?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침식을 같이하는 부부였습니다. 운명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죠. 사전에 세밀한 시나리오를 세워 세세한 곳 까지 입을 맞출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겠죠. 범행 당일, 사카자키가 그 시나리오 대로 행동하기만 한다면, 마유미의 맨션에 숨어서 감시하지 않아도 미도리는 그 사이의 움직임을 손에 잡듯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뒤에는 사람들 앞에서 두사람의 부부 사이가 위험한 것 같은 연기만 하면 되지요"
"- 기다려라. 자, 배달 피자의 건은 어떻냐? 미도리는 7시 조금 전에, 피자 배달원이 마유미의 맨션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일은 그 장소에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아뇨. 그것도 아닙니다. 미리 배달 시각이 7시 전후가 되도록 사카자키가 타이밍을 맞춰서 피자를 주문하도록 마유미에 시킨 것일 뿐입니다. 확실히 그 전후의 미도리의 진술은 시간의 기억이 애매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피자 배달원도 미도리의 모습은 보지 못했고요"

"그렇게 한다면 구노 경부가 생각했단 사카자키와 마유미의 공모설과는 반대로, 니시나마 마유미는 간접적인 알리바이 증인으로 삼기 위해, 사카자키 부부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란 말이냐?"
"아마도, 그렇겠죠"

라고 린타로는 동의했다.

"사카자키 부부의 계획의 교묘한 점은, 니시나마 마유미에게 알리바이가 성립 하는 것 같이 타임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미도리의 입으로 그녀가 범인이라고 고발하게 한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마유미에게 아카네 살인을 뒤집어 씌울 생각은 전혀 없었죠. 다만 마유미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는 것을 경찰에게 확인 시키면서, 반대로 마유미와 사카자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한 미도리의 알리바이를 보강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제 3자일 뿐인 마유미를 끌어들인 것도, 부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언뜻 보기에는 미워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시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드디어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을 느꼈다. 린타로는 계속 말했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보지요. 미도리가 이 다이잉 메시지를 눈치챈 것은, 범행 직후는 아니고 8시 30분에 집에 돌아와서 사체의 발견자를 가장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미도리는 메모패드를 보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이 거의 적혀 있는 것에 깜짝 놀라, 메모 용지를 찢어서 숨겼습니다. 그 때, 한장 아래의 종이에 볼펜 자국이 남아 있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한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흠. 그렇게 된다면 이 전날 밤, 너가 쯔부라야 아케미에 관해서 세웠던 가설은, 그대로 사카자키 미도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겠군. 그러나 미도리가 범인이라면, 2색 볼펜의 글자색을 검은색으로 바꾸어 놓은것은 왜지? 검은색 잉크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빨간 색을 싫어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에에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 이유는 확실합니다"

"어떤 것이지?"
"미도리가 남긴 단서는, 단적으로 말한다면 [수정해 넣는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죠. 다시 한번, 범행 현장의 상황을 머리속에 떠올려 주십시오.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아카네가 수정하고 있던 인터뷰 원고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메모패드의 메시지와 동시에 그것을 본 미도리는 [수정해 넣는다]라고 하는 말을 연상해서, 당연히 그것을 피하려고 서둘러 볼펜의 글자색을 바꿨겠죠."

경시는 목을 숙이고, 불만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미도리는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었을까? 메모 용지를 찢어 낸 이후에는 [킷사카자미도리]라고 하는 원래의 문자열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수정하던 뭘하던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는 없어진 것 아니냐?"
"아뇨. 아버지.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은, 그 시점에는 그 메모를 남기게 한 토코 유카리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뭔가의 우연으로 아카네가 남겼던 메모의 내용이 밝혀질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미도리는 생각을 거듭, 아카네의 메시지가 문자 그대로 [수정해 넣는다]라는 것을 숨기려 했던 것이죠. 아마도, 유카리가 미도리가 집에 없었을 때 전화를 걸었던 것 자체가 미도리에게는 정말로 예상외의 사고였기에, 그 시점에는 아직 그녀의 입을 봉하는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겁니다"
"역시나"
"미도리가 당황하고 급해진 것은, 사정청취를 받고 있던 도중에, 이콜 Y라고 하는 볼펜 자국이 메모페드 아래 용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된 때라고 생각합니다. 망연자실한 미도리는, 간신히 그 형태가 니시나마 마유미의 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럭저럭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유카리를 살해할 결의를 굳히게 된 것은 그 때, 그 순간임이 분명합니다. 유카리의 입으로부터 [카자미도리]라고 하는 카페의 이름이 드러난다면, 자신의 범행이 들통날지도 몰랐기 때문이지요"

경시는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린타로의 말대로였다. 메모 패드를 보던 순간, 미도리가 숨을 멈췄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만 경시는, 그녀의 반응이 의미하는 것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경시는 기분을 돌리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의 말 대로, 사카자키 부부가 공모했다라고 한다면, 토고 유카리를 살해한 것은 미도리가 아니라 남편 사카자키의 짓일 가능성이 높겠군. 사카자키가 세이쥬서에 출두했던 것은 30일 오후 3시를 지났을 때였다. 유카리의 사망추정시각은 오후 1시 30분경. 타이지도우의 공원에서 그녀의 입을 봉한 뒤, 흔적을 없에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세이쥬서에 나타날 여유는 충분히 있었겠구나"
"그렇습니다. [카자미도리]에 걸려왔던 전화도, 남자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사카자키 부부는, 사람 앞에서는 부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 연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범행을 위해 연락용 휴대전화를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미도리는 메모 패드에 남겨진 메시지로부터, 토고 유카리가 30일 오후 1시에 타이지도우의 카페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남편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서, 선수를 쳐서 유카리의 입을 봉하라고 명령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기는 뭐지? 사카자키 부부가 이 정도의 수단을 동원해서 연극을 꾸미면서 까지, 동생 아카네를 살해할 수 밖에 없었던 동기는?"

린타로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어이어이 아버지.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아버지의 일 아닌가요?"

******

세이쥬서에 임의출두를 명령받은 사카자키 교우스케가 범행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3일후의 일이었다. 기운을 잃고 어깨를 늘어트린 사카자키의 입에서 사건의 전모와 다치가와 아카네 살해의 동기가 밝혀지게 되었다.

다치가와 아카네 살해 범인과 알리바이 공작에 관해서는, 대부분 린타로가 추측한대로였다. 곧바로 사카자키는 토고 유카리를 타이지도우의 공원에 불러내어, 그 자리에서 살해한 사실을 인정했다. 29일 심야에 휴대전화를 통해 미도리가 범행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사카자키는 20일 오후 [카자미도리]에 전화를 걸어 '아내가 급한 병으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내가 말했던 가게에 가려고 했지만 장소를 잘 알지 못해서 찾기가 어렵다. 가까운 공원에 있으니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유카리에게 전했다. 사카자키는 몇번 아내와 같이 토고 유카리와 만난 적이 있어서, 그녀는 공원에 와서도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준비한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조를 때에도 거의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카리의 가방을 가지고 간 것은, 강도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은 아니었고, 그녀의 휴대전화를 처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유카리가 [벨코포 시모다]에 전화한 것이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카리가 호텔 객실 전화로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사카자키는 굉장히 허탈해했다.

사카자키는 토고 유카리의 살해가 결국 실패한 범행으로 끝나 버린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범행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카리가 전화를 걸어왔던 것은, 계획외의 사고였고, 아카네가 남긴 다이잉 메시지의 의미를 깨닫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유카리가 아카네의 죽음을 알기 전에, 입을 막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메모 패드의 적혀진 메모를 본 미도리는 유카리가 휴대폰으로 전화 했다고 생각해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번 그녀의 번호를 걸어 보았지만, 그 번호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것 같았다. 새로운 휴대폰 번호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유카리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카자미도리]에서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이것 역시 너무나 위험한 방법으로 보였다고 했다.

또한 밝혀진 것은, 사카자키 부부가 아카네의 살해을 떠올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사카자키가 니시나마 마유미와 불륜의 관계에 빠진 것이었다. 마유미는 돈 씀씀이가 헤픈 여자로, 사카자키가 돈을 계속 쏟아부어도, 바닥이 없는 눞과 같아서 좀 더, 좀 더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여자의 기분을 계속 맞추어 주기 위해 사카자키는 결국 회사의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들통나지 않고 맛을 들여 회사의 장부를 조작해서 결국 백만단위의 돈을 횡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회사 돈을 빼돌리고 있다는 소문마저 사내에 퍼지게 되어 6월의 결산기를 앞두고 사카자키는 자신의 목을 지키기 위해 조급히 장부의 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안되는 궁지에 몰렸다.

그렇다 해도, 그만한 돈을 쉽사리 융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카자키는 고민끝에 아내 미도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 궁지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없는지 상담했다.

"이것을 기회로 니시나마 마유미와 완전히 손을 끊겠다고 약속해준다면, 뭔가 당신을 도울 방법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라고 미도리는 말했다. 수년전, 미도리의 양친이 차례로 돌아가신 직후, 두 자매가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동생 아카네와 같이 서로를 상호 수취인으로 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했다고 했다. 아카네를 살해, 사망보험금을 받아넨다면, 지금까지의 회사 장부의 구멍을 메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사카자키는 처음에는 아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카자키 이상으로 미도리 쪽이 진심이었다. 그 진심에 이끌려 가게 되어, 곧바로 사카자키도 아카네를 살해하는 일을 결의하게 된 것이었다. 사카자키에게도 생각이 닿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미도리와 결혼하고 얼마간이 지나서, 대수롭지 않은 불장난의 결과로, 동생 아카네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서로가 거북했기에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미도리는 그 사실을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출장으로 집을 비웠을때에 한해서만 동생을 집으로 부른것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탓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카네의 살해에는 1개월전부터 시간을 들여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했다. 니시나마 마유미를 알리바이 증인으로 세우자고 말한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도리 쪽이었다. 아니, 그것에 한해서가 아니라 모든 계획과 실제 범행 전부에 있어서 주도권을 쥔 것은 아내쪽이었다. 범행당일이 가까와 오자, 사카자키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내의 진짜 동기는, 보험금도,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물론 동생에 대한 질투때문도 아닌것 같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대로 조종해서 같이 범죄에 손을 담그도록 움켜쥔 뒤, 영원히 자신의 손에서 내가 도망칠 수 없도록 속박하는 것, 미도리는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이번 범행계획을 세운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 한편, 아내 미도리는 범행을 부인. 의연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PS :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재미있으셨나요? 오타와 의역 투성이라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내용 전개는 되는 수준이라 자평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으셨으면 감상이라도 한줄~

2006/09/19

[번역] 이콜 Y의 비극 (4)

제 3 막


다음날인 4월 30일은 연휴 이틀째의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노리츠키 경시에게는 평일과 다를바 없는, 아침부터 바쁜 하루였다. [벨코포 시모다]의 살인사건은 사건 발생 이틀채로 접어들었지만 해결이 어려울 것 같은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이쥬서에서 개최된 제 1회 수사회의에서는 무사시노 외국인 강도단 전속 수사팀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수사본부의 통일 견해도, 경시의 생각과 같이, 범행의 단서로부터 볼 때 결국 다른 사건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있었던 사법 해부의 결과 역시, 감찰의 나카지마의 소견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사망 추정 시각은 전날 오후 6시부터 7시 사이. 흉기인 나이프는 슈퍼 등에서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는 상품이어서 흉기의 입수 경로를 추정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는 것 이외의 특기할 만한 발언은 없었다.또한 수상한 사람의 목격 정보도 접수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수사 방침에 따라 사카자키 요우스케와 미도리 부부를 둘러싼 치정, 원한의 선, 그리고 피해자 다치가와 아카네의 교우관계의 방편 등 여러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시켜 나갈 것이 결정되었을 뿐이었다.

한편 오전중에 야마네코 운송의 도리야마 영업소에 조사를 갔던 구노우 경부는,

"야마네코 운송의 배달원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라고 확신에 가득찬 얼굴로 보고했다.

전달 저녁, [벨코포 시모다]에 물건을 배달한 담당자는 이시와타리 효우 라고 하는 삼십세의 운전수로 그도 직업 특성상 골든 위크와는 무관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구노우는 운 좋게도 그날 첫 배달에서 돌아와 영업소에서 자고 있던 이시와타리 본인을 만나 진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쯔부라야 아케미로부터 전해받은 부재자 연락표를 보고, 이시와타리는 부정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썼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케미가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그 이전에도 205호실의 물건을 206호실의 사카자키 부인에게 전달해 준 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양쪽 어떤 집에서도 그 일로 불평을 들은 적도 없었다고 했다.

"-주소지에 '부재시 이웃집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허용되는 것은 아니고 손님과 짐의 종류에 따라 가능한 것이지만요. 그런데 어제는 언제나의 사카자키 부인과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아아 동생이셨습니까. 에, 살해당했다고요? 정말입니까? 내가 갔을 때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건강했었는데, 믿을 수 없군요. 아니 집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배달 시간이요? 거기 쓰여있는데로, 오후 5시 32분이 틀림없습니다. 의심되신다면 업무일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업무일지는 문자 그대로, 분 단위의 스케쥴이 가득 적혀있었고, 그 안에는 범행에 필요한 시간을 속일 수 있을만한 의심스러운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시와타리 역시 좋은 인상을 주는 인물로 영업소내의 평판도 좋았고, 손님과의 문제도 전혀 없었으며 우량 사원으로 회사로부터 표창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구노우가 상상속에서 그린 범인과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오후에는 다른쪽 수사에 나섰던 수사팀 보고가 이어졌다. 먼저 피해자의 신변조사에 관해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돌연 죽음을 알게된 다치가와 아카네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녀가 살해당할 것 같은 이유는 전혀 알 수 없다고 답할 뿐이었다. 이콜 Y라고 하는 다이잉 메시지를 보여주어도 뾰족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생전의 남성관계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만한 유력한 정보는 없었다.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아카네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미니-코미 잡지의 편집을 둘러싼 트러블의 가능성 이었지만 그것도 희박해 보였다.

그나마 도다시의 니시나마 마유미의 맨션 주변의 조사는, 착실히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 1층에 위치한 카페 "챨스턴"의 주인은 전일 오후 4시를 지나서 5시 30분까지, 커피 한잔만을 시켜놓고 자리에 계속 앉아있던 여성 손님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창옆 좌석에 앉아 계속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순간 서둘러 가게를 나가버렸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마유미의 맨션으로부터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편의점의 점원도 미도리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7시 30분경, 전에는 본 적 없는 여성 손님이 찾아와 가게의 동전 투입식 복사기로 손으로 쓴 유인물을 대량으로 복사했다고 말했다. 직접 도와주지 않아서 별다른 접촉은 없었지만 슬쩍 보기에도  '뭔가 싫은 느낌' 이었다고 했다.

마유미 집에 피자를 배달한 배달원은 맨션 앞에 있었던 미도리의 모습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대신, 512호실까지 피자를 가지고 올라갔을 때, 입구에 서 있던 마유미의 어깨 너머로 방에 남성이 와 있던 것을 슬쩍 쳐다보았다고 했다. 배달시각은 6시 55분경. 가게의 전표에 따르면, 주문 전화가 걸려온 것은 6시 45분이고 품목은 S사이즈의 피자 2장과 사이드 메뉴가 2인분. 전화는 마유미의 방에서, 주문했던 것은 여성의 목소리였다고 했다. 모두가 미도리의 진술과 부합하고 있었다.

노리츠키 경시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모든 수사가 결국은 미도리의 진술의 뒤를 따라 확인하는 것이었을 뿐이고 수사가 진행되면 될 수록, 남편 요우스케와 마유미의 알리바이를 재 확인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카자키 요우스케가 세이쥬서의 수사본부에 스스로 출두한 것은 그날 오후 3시가 막 지날 때였다. 경시의 예상대로라면 좀 더 빨리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사정청취는 구노우가 담당했고, 경시도 그 자리에 동석했다. 사카자키는 럭비선수 같은 체격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동안을 가진, 뭔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옅보이는 인물이었다. 회사에서는 그런대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고 했다. 슈트 케이스를 가지고 걸어들어온 것을 볼 때, 어젯밤은 자택에 돌아가지 않고, 어디선가 외박을 한 것으로 보였다.

"-신쥬쿠 비지니스 호텔에서 1박했습니다. 일 관계로 자주 가는 곳이라 일반인보다는 싼 요금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거든요. 저녁까지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라가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TV 뉴스를 보고 어제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인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셨습니까?"
"예.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어서..."
"그렇습니까. 사실은 어제 [니이조 그랜드하이츠]의 니시나마 마유미씨에게 연락해서 이 사건에 대해 들으신 것은 아닌가요?"

구노우가 추궁하자 사카자키는 일순 놀라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부터 불륜의 건을 드러낼 각오를 한 듯, 생각을 조금 정리하는 듯 하더니 곧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제 오후의 제 행동은 아내 입에서 일부 들으셔서, 어느정도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미도리는 저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구노우는 싸늘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부인에게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여기서 전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직접 본인에게 듣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것보다도 수사를 위해서라도 당신 자신의 입으로 들려 주셨으면 하는데요"

사카자키 요우스케가 직장 부하로 있는 니시나마 마유미와 친밀한 관계가 된 것은 작년 여름경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불장난 정도로 생각했지만, 서서히 관계가 깊어져서, 결국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물론 도다시의 마유미의 맨션에 출입하게 된 것도 어젯밤이 처음은 아니었다. 1개월 정도 전에 거리에서 마유미와 우연하게 마주치게 되었을 때 부터, 아내가 자신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을 눈치채었지만, 요우스케는 도를 더해가는 애인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연휴 첫날에 맞춰, 교토까지의 여행에 동행한 뒤, 이틀째 저녁부터 마유미를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먼저 도쿄로 돌아오는 출장일정을 맞춰 놓았습니다. 물론 회사에는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아내에게는 2박 3일이라고 거짓말을 했죠. 하룻밤을 마유미의 방에서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동행했던 부하 직원에게 뒤를 맡기고, 어제 오후 신칸선으로 귀경하여 그길로 도다시로 향했습니다"

"교토를 떠난 것은 몇시의 신칸선이었습니까?"
"15시10분발의 '노조미18호' 였습니다. 동경 도착은 17시 24분 이었고요. 2시간 반 까지는 투어의 손님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것보다 빠른 열차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사카자키는 술술 발차시각을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지만 알리바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도쿄역에 도착해서부터, 사카자키는 츄오선과 사카케이선을 갈아타서 도다역에 내렸다. 마유미의 맨션에 도착한 것은 6시 15분 정도. 5시반에 도쿄역을 나왔다면 다른 곳에 들릴 시간 여유는 없었다. 그 때의 모습을 버스 정류장에서 아내에게 목격당했다는 것은 아직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사카자키의 표정을 차가운 눈으로 관찰하던 경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니시나마씨 집에 도착한 이후, 밖에 나간 적은 없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담배가 떨어져서 가까운 자판기까지 사러 갔었습니다. 마유미의 집에 도착한 뒤 15분 정도 뒤였던 것 같네요"
"6시 30분 경이라는 말씀이시군요. 혹시 그때, 니시나마씨의 담배도 같이 사시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걸 아시죠? 그렇구나! 미도리가 보고 있었던 거야! 이 여자가 정말..."

사카자키는 분하다는 듯 그렇게 외쳤지만 구노우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사정청취를 계속 진행했다. 마유미가 전화로 주문한 피자가 배달되었을때, 7시 직전 - 미도리가 인터폰을 눌러 마유미와 문답을 시작한 것은, 두 사람이 피자를 먹고 있던 도중 일어난 일이었다고 했다. 요우스케는 깜짝 놀랐지만 절대로 자신이 온 것은 인정하지 말고 집에서 나가지도 말라고 마유미에게 명령했다. 인터폰을 끊은 뒤에도 계속 벨이 울려서 그것이 멈췄을 때에는 두사람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사카자키는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를 떠날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이제와서 집에 돌아가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만의 하나 미도라가 맨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자리에서 들킨다면 어차피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고, 차라리 마유미의 방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저녁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면 불륜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을거야...라는 등의 이야기를 마유미와 나누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밤에 경찰이 찾아왔을 때 결국 사카자키는 마유미의 맨션에서 도망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때 설마, 우리 집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미도리가 골탕을 먹이기 위해 경찰에 장난처럼 신고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곧바로 도망을 치게 되더군요. 마유미가 인터폰으로 경찰과 대화하는 틈에 집을 나와, 맨션의 비상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죠. 집에 돌아갈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신쥬쿠까지 가서 아까 이야기했던 비지니스 호텔에서 하루 묶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친 것은 불륜의 현장을 들키는 것이 싫었기 때문일 뿐이지 경찰에 대해서 아무런 숨기는 것도, 그리고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사카자키는 보기에 괴로울 정도로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사카자키의 진술이 일단락 된 후, 경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남자에게는 꼭 한마디 해 줄 것이 있다.

"어쨌건, 사카자키씨. 부인이 '그랜드하이츠'의 현관에 니시나마 마유미씨를 욕하는 유인물을 뿌린 것은 알고 계십니까?"
"예. 마유미로부터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요"
"자. 천천히 봐 주십시오. 이것이 그 유인물입니다"

라고 말한 뒤, 경시는 미도리가 쓴 유인물 복사본을 들이 밀었다. 사카자키는 순식간에 얼굴이 굳은 채, 그 여자가 이런 노골적인 글을 썼다는 건가.. 라고 중얼거렸다. 경시는 엄한 목소리로

"부인은 어젯밤, 니시나마씨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대신에, 착각해서 아카네씨를 찔렀다는 것이죠. 물론 처음에는 당신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진술에 의해 당신들의 알라바이가 성립되어 버렸지만, 우리들은 당신이나 니시나마씨 중 한명이 살인범이라고 판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 두 사람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은 미도리씨의 덕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부인은 이번 일을 계기로 당신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카자키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애절한 눈빛으로 경시를 바라 보았다. 경시는 내뱉듯이 말했다.

"오늘 일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사카자키 요우스케를 돌려 보내고 경시는 소지품을 정리하여 경시청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이쥬서를 나왔다. 차 안에서, 운전석에 앉은 구노우 경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 사카자키의 진술을 들을때, 좀 이상한 점을 눈치 채신게 있으십니까?"

경시가 담배불을 붙였을 때,구노우가 물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알리바이에는 구멍이 있는 것 같지 않나?"
"-라고 하신다면?"

"마유미는 5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온 후, 계속 맨션의 자기 집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7시 전에 피자를 배달한 배달원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오후 6시대의 알리바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방에서 같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카자키의 진술 뿐이야. 그러나 사카자키와 니시나마가 공모하여 미리 말을 맞추어 놓았다면 어떻겠는가? 마유미는 5시 30분에 돌아와 화장품 세일즈를 가장한 사카자키 미도리와 대화를 나눈 뒤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 비상구를 통해 맨션을 빠져나와 [벨코포 시모다]로 향했지. 한편 교토로부터 신칸선으로 도쿄에 돌아온 사카자키는 6시 30분에[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를 방문해서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512호실에서 마유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면? 1시간 반 정도라면 니시나마 마유미가 차로 세타가야의 시노다까지 왕복해서 7시 직전에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 하지는 않다고 생각이 드는구만"

"하지만 6시 40분에 피자주문을 한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는 증언을 잊으셨습니까? 덧붙여 연휴 행락객으로 꽉 차 있을 시간대인데 범행과 현장의 위장공작에 필요한 시간을 더한다면 한시간에 도다에서 세타가야까지 왕복한다는 것은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전화 목소리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방법이 있었을 거야"

구노우가 말하자 경시는 웃으며 답했다.

"뭔가, 우리 아들놈 말버릇 같구먼. 하지만 두사람의 공모설에는 큰 문제가 있긴 하네. 마유미의 알리바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카자키의 증언 뿐만은 아니거든. 아까 사카자키에게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아내의 목격증언이 없었다면, 애인과 어떻게, 얼마나 입을 맞추어 놓았어도 결국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거든. 어제 오후 미도리가 마유미의 맨션을 방문한 것은 정말 우연히 남편 출장 일정에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집에 놀러온 동생에게 털어놓은 탓이거든. 만약 미도리가 동생의 충고를 무시했다면 두사람의 알리바이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뿐이지. 그 정도의 알리바이로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두 사람도 알고 있었을 거야. 사카자키와 마유미가 그런 위험한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하기 힘들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포인트가 아닐까요? 역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사카자키는 아내의 성격을 고려하여 그렇게 행동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어서 이번의 범행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미도리가 남편의 불륜을 눈치채고 출장일정에 의심을 품은 것도, 사실은 사카자키 자신이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도록 먼저 포석을 깔아 놓은 것은 아닐까요? 서재의 잘 보이는 장소에 마유미의 연하장을 방치해 놓은 것도 범행 당일의 오후에 미도리를 도다시의 [그랜드 하이츠]로 불러내기 위해서겠죠. 사카자키는 아내의 감시를 눈채채지 못한 척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던 거죠. 처음부터 그녀를 알리바이 증인으로 만들 생각이었을 겁니다. 6시 30분에 자기와 그녀의 담배를 사러 나온 것도 밖에서 감시하던 미도리가 마유미가 방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구태여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닐까요?"

"공교롭지만 그 추리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앞뒤가 뒤바뀐걸세"

경시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왜 그런가 하면, 범행 당일의 오후, 아내를 알리바이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 도다시로 꾀어낼 것을 사카자키가 계획했다면, 같은 시각에 [벨코포 시모다] 206호실에 미도리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잖나? 당연히 공범자 마유미가 미도리를 죽이러 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사카자키와 마유미 두명 모두 미도리가 아니라 동생 아카네를 살해할 동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가능성은 생각하기 힘들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애인의 증언을 종합해 본다면 , 진상은 아직이야. 뭔가 다른 부분이나 가능성, 놓칠 수 있는 사소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네"

구노우를 위로하며 담배불을 끈 경시는 경시청으로 돌아오자마자 안경을 쓴 뒤, 부재 중 책상에 놓여진 서류더미로 눈을 돌렸다.

그 속에는 [벨코포 시모다]의 범행현장에서 압수한 증거물건에 관한 감식 결과 보고서가 놓여있었다. 이콜 Y라고 하는 다이잉 메시지가 남아있던 메모패드와 피해자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2색 볼펜의 철저한 검사결과를 읽고 있던 도중, 경시는 보고서의 한 문장에 깜짝 놀라 외쳤다.

"응?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지?"

보고서를 보던 구노우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시는 곧바로 내선 번호를 눌러 감식 담당관을 호출하여 보고서에 기재된 것을 물어았지만 '검사의 결과에 이상은 없습니다'라는 확신에 가득찬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보고서를 사이에 두고 경시와 구노우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사람 모두 그 검사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곧 구노우가 천천히 말했다.

"완전히 두 손 들었습니다. 역시 아드님에게 지혜를 빌리는 편이 좋겠네요"

**********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노리츠키 경시는 철저히 시간을 들여 [벨코포 시모다]의 살인에 관한 조사의 상황을 자세하게 아들에게 전해 주었다. 린타로는 황금연휴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처음에는 그다지 사건에 뛰어들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화제가 이콜 Y라고 하는 다이잉메시지 대목에 이르자 눈을 빛내며 강한 호기심을 나타내었다. 경시가 마음 속으로 미소지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구나"

사건의 개요를 설명한 뒤, 경시는 아들에게 물었다. 린타로는 다이잉 메시지의 사진 (편광 렌즈로 자국이 떠오르도록 촬영한 것)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음- 이것을 니시나마 마유미의 니시(仁)라고 읽는 것은, 좀 억지로 같다 붙인 느낌인데요. 사카자키 미도리가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기분은 알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할 경우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살해당한 다치가와 아카네는 마유미와 한번도 면식이 없었을 텐데 동생이 형부의 애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찔린 순간 아카네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상대를 마유미라고 특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너가 말하는 대로다. 뭐 범인이 스스로 이름을 말했다면 모르지만, 그런 연극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었겠지"

"그리고, 택배 배달부가 범인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야마네코 운송의 트레이드 마크를 그려서 남겼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쩌면 좋을까요.... 얼굴 그림을 그리는 순서가 다릅니다. 그림의 위, 아래가 반대로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귀, 눈부터 먼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의 순서가 아닐까요?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정하는 근거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린타로가 미소지으며 말하자 경시는 안색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좀 봐주거라. 하여간 이젠 정말 두손 다 들었다. 너의 의견을 좀 들려줄 순 없겠니?"
"그렇다면, 한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요- 아버지는 이 다이잉 메시지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은 생각해 보셨나요? 예를 들면 제 1 발견자인 사카자키 미도리가 남편의 애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요"
"미도리가 범인이라는 뜻이냐?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구"

경시가 소리치자 린타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고요. 동생의 사체를 발견했을 때, 미도리는 분명히 남편의 범행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입니다. 남편을 감싸고 그 의심을 불륜 상대인 니시나마 마유미에게 향하게 하기 위해, 그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가짜 다이잉 메시지를 만들어 내었을 가능성이 있죠. 집에 돌아온 미도리가 거실에서 사체를 발견했기 때문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쯔부라야 아케미가 있는 곳으로 가는 사이, 아주 잠깐이지만 빈 틈이 있었겠죠. 그 때 아카네의 볼펜으로 전화용 메모 패트에 仁, 다름아닌 니시나마 마유미를 가르키는 메시지를 쓴 뒤, 볼펜을 피해자의 오른손에 쥐여 주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정도로는 확실히 일부러 만든 듯한 티가 나기 때문에 메모 패드의 첫장을 찢어낸 후, 범인이 가져간 것으로 위장한 것이죠. 물론 아래 종이에 볼펜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은 계산한 것일테고요"
"흠, 가설이지만 꽤 흥미롭구나. 하지만 실제로는 확실히 무리야. 피해자의 손가락에는 사후경직이 시작되고 있었기에 너의 가설대로라면 미도리가 사체를 발견했던 8시 30분의 경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만 하거든. 사체의 오른손에 볼펜을 쥐어 준다는 것 자체가 아마 불가능했을거다. 아카네가 죽을 때부터 볼펜을 쥐고 있어서 사체의 오른손을 메모 패드 위에 올려놓고 눌러서 메모를 썼다고 해도, 감찰의가 뭔가 이상을 눈치채는 것은 당연해. 마침 그렇게 이야기하니 한가지 놓친것이 있는데, 감식 결과로는 보고서에 이해불능을 기술했던 것이거든. 그 문제가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는구나"

경시는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던 것을 말했다. 아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제일 흥미로운 먹이를 최후까지 남겨놓았던 것이었다. 린타로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해불능이라고 적혀 있다고요?"
"피해자가 쥐고 있던 적과 흑 2색 볼펜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검은 쪽 볼펜은 잉크가 없었다더구나. 훨씬 전 부터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는 거지"
"검은 쪽이 쓸 수 없는 상태? 그래도 아버지가 현장에서 조사했을 때에는 검은쪽 버튼이 눌려져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렇단다. 덧붙여 보고서의 기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메모패드에 남아있던 이콜 Y의 흔적은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의 끝으로 눌러 쓴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 필압이랑 메모 용지 표면의 상태로 볼 때, 한장 위의 용지에 적은 글자 자국이 남은 것이 틀림 없다더구나. 나에게는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은 쪽은 쓸 수 없는 상태였다지만 빨간 쪽은요?"
"그것은 쓸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현재 아카네는 습격당하기 직전까지 미니코미지의 인터뷰 원고에 빨간 색 볼펜으로 수정사항을 기입하고 있었던 탓에, 그렇지만 그게 도대체-"
"잠깐 기다려 주세요"

린타로는 곧바로 얼굴 앞에 손을 모아 경시의 말을 막았다. 얼마간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다이잉 메시지지의 사진을 끌어 당겨 놓아서, 팔짱을 낀 채로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흡사 동물원 우리안의 곰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흥분 상태가 가라 앉은 뒤, 린타로는 경시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빨강과 검은 2색 볼펜. 정말이지 재미있군요"

라고 말했다.

"감식의 검사결과로부터 뭔가 알아낸 것이 있냐?"

경시가 묻자 린타로는 미소지으며 답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확실히 이 다이잉 메시지가 범인, 혹은 관계자가 고의로 조작한 가짜 단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어요"
"사카자키 미도리의 일인가? 확실히, 그건 아까 들었지"
"아뇨. 그것도 있지만, 뒤에서 다치가와 아카네를 찔러 살해한 범인이 범행 직후에 다이잉 메시지를 위조했을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콜 Y의 해석은 우선 제껴두고, 그것이 작성되었을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죠. 이 메시지가 가짜 단서라면, 그것은 어떠한 수순으로 남겨진 것이겠습니까? 아까 말한바와 같이 위조한 메시지는 그 대로 메모패드에 붙어 있다면 확실히 너무 작위적이라 부자연 스럽죠. 그래서 범인은 메모 패드 제일 윗 장 종이에 볼펜으로 이콜 Y라고 쓴 뒤, 그 종이를 찢어 가져가 버렸다- 라고 가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밑의 종이에 자국이 남는것은 감안한 것이겠죠"

경시는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나는 현장 상황을 봤었지만, 나도 너가 말한 대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경우, 범인은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쓴 뒤, 절명한 직후의 피해자의 손에 2색 볼펜을 쥐어 주었을 것입니다. 아까의 사카자키 미도리의 위조설과 다른 것은 이 점 뿐이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경우에는 범인 자신이 실제로 이 2색 볼펜을 사용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즉 사체 발견시에 피해자가 쥐고 있는 볼펜, 검은쪽 버튼이 눌러져 있는 상태였다는 사실은, 범인이 검은 글씨로 위조 메시지를 썼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체에 볼펜을 쥐여준 뒤에 펜의 글자색을 바꾸었을 가능성은 제가 보기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조사가 허술한 틈을 노렸다 하더라도, 결국 지금처럼 메시지의 진실성이 사라져 버릴 뿐입니다. 그러나 범인이 검은색으로 위조 메시지를 작성했다는 것은, 그 시점에서 볼펜의 검은 잉크가 막 떨어져버리고 쓸 수 없는 것에 눈치 챘을 것입니다"
"흠.. 그건 너가 말한 대로지"
"그래서 범인은 빨간 색 버튼을 눌러 빨간 글씨로 메시지를 썼겠죠. 빨간 쪽은 쓸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제일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습니다. 그리고 빨간 색 버튼을 누른 채, 즉 빨간 색 볼펜을 밖으로 끄집어 낸 상태로 볼펜을 피해자의 손에 쥐여 주었더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죠. 이것은 확실히 모순됩니다. 따라서, 이 가설의 전제조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이콜 Y라고 하는 기호는, 범인이 고의로 조작한 가짜 단서가 아니라 피해자 본인이 써 남긴 진짜 다이잉 메시지라는 것이죠"

경시는 머리의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담배불을 붙였다. 아들의 이야기에 홀딱 넘어가 버린 탓도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논증에 있어서는 별달리 이견을 이야기 할 것도 없었다.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러면, 다음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다치가와 아카네가 2색 볼펜의 어느쪽 색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남겼을까,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검은쪽을 검토해보죠. 물론 피해자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사용하는 볼펜이기 때문에 검은쪽 잉크가 떨어져서 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쪽 버튼을 눌러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버지?"
"아아, 그 정도는 알겠다. 뒤에서 범인이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잠깐 보더라도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상태로 보이게끔, 자국밖에 없는 백지의 메시지를 써서 남겼을테지. 그렇게 한다면 범인을 그냥 가버리게 할 수 있었을테니까"
"명답! 역시 아버지. 대단하십니다"

린타로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식 결과로 밝혀진 것과 같이, 메모 패드에 남겨진 메시지는 잉크가 없는 볼펜 끝으로 쓰여진 자국이 아니라 바로 위에 있는 종이에 쓴 글자가 밑의 종이에 자국이 남았다는 것 때문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제일 위의 종이에 쓰여진 오리지널 메시지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대로 범인이 찢어서 가져가 버렸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피해자가 보이지않는 백지에 메시지를 남긴 것을 범인이 방심하고 가버리는 대신에 범인은 그 흔적을 눈치챈 것이겠죠. 그러나 아버지. 조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팬으로 쓴 백지위의 메시지의 존재를 눈치챈 뒤 그것을 찢어서 가져갈 정도로 주의깊은 범인이 메모패드 바로 한장 아래에 있는 종이에 남은 볼펜 자국을 그냥 지나친다고 한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경시는 감탄했다. 이 녀석, 확실히 날카로운데가 있어.

"역시. 확실히 그런 실수는 있을 수 없겠지, 라고 하는 것은 그 가능성도 아니라는 것이겠군. 그렇다면 남아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아카네는 빨간색 볼펜으로 메시지를 써서 남겼다는 것밖에는 없을텐데, 그것도 역시 의문을 완전히 풀 수는 없는것 같다. 피해자가 쥐고 있던 볼펜의 글자 색이 바뀌었다는 것은 왜인가, 라는 의문이"
"예. 그게 문제입니다"

라고 답하고 린타로는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바른 입술을 적셨다.

"-피해자 본인이 메시지를 남긴 직후, 검은 버튼을 눌러 볼펜의 글자색을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은 없겠죠. 도대체 그런 짓을 할 이유도 없고, 그녀는 그 때 거의 숨이 넘어가는 상태에서 메시지를 써서 남기는 일에 모든 힘을 다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때문에 볼팬 글자색을 바꿀 여유같은것은 없다고 보아도 좋겠죠. 또 그녀가 숨진 직후에, 근육의 반사적인 운동이 이상한 작용을 해서 검은 버튼이 눌려졌을 가능성도 희박하고요. 그같은 우연이 일어날 가능성은, 물론 제로라고 할 순 없겠지만 한없이 낮을 것입니다. 이 두가지 가능성이 모두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검은색 버튼을 눌러 볼펜의 글자색을 바꾼 것은 그녀를 살해한 범인의 소행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에 모순이 있잖냐? 너는 아까, 조사가 허술하지 않는 한 드러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범인이 볼펜의 글자색을 바꾸어 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을 텐데"

경시가 묻자 린타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뇨.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범인이 검은색 볼펜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 한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범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거죠. 또한 범인은 피해자가 빨간색으로 적은 메모용지를 찢어서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볼펜 글자색이 바뀌어 있는 것을 드러날 염려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알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범인은 그런 짓을 한건가?"

린타로는 숨을 들이 마셨다.

"이제부터, 제 추측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만... 범인이 볼펜의 글자색을 바꾼 것은 빨간색 잉크로 기록된 피해자의 다이잉 메시지를 메모 패드로부터 찢어서 가져가 버린 것과 같은 이유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한 피해자의 손에서 볼펜을 빼서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흔적 그 자체를 없애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는, 뭔가 다른 사정으로 - 그것은 뒤에 설명드리겠습니다만 -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거죠. 때문에 범인은 차선책으로 볼펜의 글자색을 바꾸는 짓을 한 것입니다"
"기다려봐라. 범인이 메모 패드의 메시지를 찢어서 가져가버리고, 볼펜도 가지고 가 버리고 싶어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다만, 차선책으로 글자색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구나. 왜 그게 차선책인거냐?"

"메모 패드에 남겨진 메시지의 내용에 관계없이 처음부터 범인은 다이잉 메시지가 빨간색 잉크로 쓰여졌다는 것 자체를 알리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물론 피해자가 그렇게 한 것은 그것 외에는 뭔가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범인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죠. 빨간색 볼펜으로 기록된 메시지를 보았을 때, 글자색의 선택에도 피해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 있습니다. 때문에 범인은 메모 패드의 메시지를 찢어버리는 것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쥐고 있던 볼펜의 쪽에도 손을 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검은색쪽으로 바꾸지 않더라도 빨간색 볼 버튼을 잠구어 놓기만 하면 충분한 것 아니었겠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버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범인은 억지로 무리해서까지 볼펜의 글자색을 검은색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꿔 말한다면, 그만큼 빨간색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간단히 볼펜을 속에 넣어 잠궈놓는 것 만으로는 어떤 색이 사용되었을지 추측할 가능성이 반반이기 때문이죠. 즉, 범인은 검은 버튼을 눌러 끄집어 내면서까지 피해자가 빨간색 메시지를 기록했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은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순간적 판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흠. 그렇다면 범인이 그 정도로 빨간색 글자를 싫어한 이유는 왜냐?"

경시가 묻자 린타로의 눈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예리해졌다.

"그렇죠. 거기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범인이 빨간색 메시지를 싫어한 이유는 어쩌면 잉크색 자체가 범인을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예를 들면 범인 이름 일부에 赤, 혹은 적색계통의 색을 표시하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범인이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적이 된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사건의 관계자 속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나요?"
"적색계통 이라고 한다면 아카네의 이름 뿐이지만 그녀는 피해자잖냐. 해당하는 인물은 전혀 없는걸. 음.. 잠깐 기다려라. 너가 말한대로라면 주색의 주(朱), 205호실의 쯔부라야 아케미(朱美)를 말하는 것이구나!"

린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시는 놀란 채로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이 정도의 증거로는-"
"하지만 근거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쯔부라야 아케미의 일을 머리속에 떠올리고, 또 한번 이 이콜 Y라는 메시지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까? 아버지는 지금까지 이 두개의 기호, 혹은 문자의 위치관계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이콜 Y라고 하는 메시지는 피해자가 직접 종이 위에 기록한 오리지날 필적은 아니고, 메모 패드 종이 한장 밑에서 자국이 남은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라고 하는 것은 그 흔적이 넘는 과정에서 뭔가의 실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실수? 경시는 잠깐 생각하며 목을 갸웃했다

"하지만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메모 용지를 위에서 무겁게 내리 누르는 글자가 아래에 남았을 뿐이다. 실수가 생길 가능성은 아무것도... 그런가! 중요한 메시지를 쓰고 있는 도중에, 위 종이가 움직여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 메모 패드라고 하는 물건은 사용한 종이를 찢어낼때 백지의 아직 사용하지 않은 부분까지 반 정도는 중심에서 어긋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피해자가 오리지널 메시지를 기록했던 첫번째 메모 용지도 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급하게 빨간색으로 메시지를 쓰고 있는 도중에, 그 종이가 움직여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어쨌건 그 결과 이 '='과 'Y'라고 하는 두개의 기호의 위치관계가 처음 썼을 때와는 다른 흔적으로 두번째 종이에 남겨져 버린 것입니다"

경시는 다이잉 메시지의 사진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잠시 뒤, 그 입에서 부터 깜짝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 이콜 Y가 아니라 엔인가? 엔(円) 확실히 쯔부라야 (円谷)이라고 하는 것이구만!"
"예. 그렇게 그 기호는 빨간색 볼펜으로 쓰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쯔부라야 아케미라는 이름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은 불보듯 뻔했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케미가 이 메시지를 눈치챈것은 범행 직후가 아니라 사카자키 미도리가 귀가해서 동생 시체를 발견한 뒤의 일인것 같습니다. 미도리가 밖의 통로로 뛰쳐나왔을때, 아케미가 혼자서 범행현장으로 들어간 것은 알고 계시죠? 그 때, 빨간색으로 엔이라고 하는 메시지가 기록된 메모 패드를 발견한 아케미는, 곧바로 자신의 범행을 나타내는 단서라는 것을 알고 급히 메모를 찢어버렸죠. 곧바로 아케미는 사체의 손에서 볼펜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때는 사후경직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은 불가능했고요. 미도리의 눈이 있기때문에 그렇게 꾸물거릴 수도 없었을겁니다"
"흠, 아까 말했던 뭔가의 사정이라는 것은 그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아케미는 피해자가 빨간 볼펜으로 메시지를 남겼던 것에 주의를 쏠리게 하고 싶지 않았겠죠. 그래서 자선책으로 피해자의 손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버튼을 눌러 놓았습니다. 검은색 볼펜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몰랐기 때문에 그랬겠죠. 그 때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손톱 끝으로 버튼을 눌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경시는 아직 반신반의했었다. 경시는 자신의 머리속을 떠돌아 다니는 의문을 린타로에게 믈었다.

"확실히 다이잉 메시지에 관해서는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구나. 그러나 쯔부라야 마유미가 범인이라면 살인의 동기는 뭐겠냐? 동생 아카네와는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언니 미도리와 사람을 착각해서 살인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구나. 그렇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친하지도 않은 동생 쪽을 죽일 이유가 있었다는 걸까?"
"제 생각이긴 하지만, 범행은 발작적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어제 저녁, 택배편으로 배달된 짐 때문에 아케미와 아카네 사이에 뭔가 다툼이 생겼던 것이 아닐까요? 그 이전 옆집에 맡겨 놓았던 짐들은 문제가 없었다고 했지만, 어제에 한해서는 전례가 깨진것이죠. 205호실의 짐을 받아 놓은 것은, 친한 이웃 사람인 사카자키 미도리가 아니라 동생인 아카네 쪽 이었다고 했잖습니까. 부재연락표를 보고 짐을 받으로 간 아케미는, 뭔가 사소한 일 때문에 현관에서 아카네와 말다툼을 벌인 것일테죠. 순간적으로 머리에 피가 치솟은 아케미는 빈 손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서, 칼을 숨긴채 다시 206호실을 방문했을 겁니다. 사과한다는 핑계를 대고 안으로 들어섰겠죠. 그때 방심하고 있던 아카네의 등 뒤를 있는 힘껏 칼로 찔렀을 겁니다-. 미도리가 귀가했을 때, 아케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206호실에 나타났던 것은, 애시당초 택배물을 놓고 아카네와 말다툼한 일을 숨기기 위한 위장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쯔부라야 아케미의 어젯밤 알리바이에 대해, 뒤는 캐 보셨습니까?"

아들에게 지적당할때 까지 왜 그 가능성은 눈치채지 못했을까? 경시는 스스로 자괴감이 들며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다. 경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카자키 부부에게 완전히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가족이랑 유원지에 갔다 오며 초저녁에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7시 30분에 돌아왔다고 말했지만 의심이 가는구먼. 좋아,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아케미의 알리바이를 수사하도록 하겠다"

******

그렇지만, 사건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깨끗하게 빗나갔다. 다음날 수사관의 수사에 의해, 쯔부라야 아케미의 오후 6시대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

범행 당일 오후 6시부터 6시 50분까지, 아케미와 가족 3인은 [요미우리랜드]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것이 확인되었다. 레스토랑 점원이 쯔부라야 일가의 좌석과 테이블을 기억하고 있었고, 영수증도 기록되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케미의 진술은 결국 사실로 입증되었다. 어디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즉, 쯔부라야 아케미는, 다치가와 아카네를 살해한 범인일 수 없었다.

믿고 의지했던 린타로의 추리도 틀려버렸던 것이다.

PS : yuuhi님이 글을 남겨주셨는데 노리"츠"키 린타로가 아니라 노리"즈"키가 맞다고 하시더군요. 지금 다시 확인해보니 말씀대로셨습니다. 그래도 번역을 블로그에 후루룩 해버린 탓에 글자 검색을 일일이 해서 고치기가 어려우니 감안해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yuuhi님의 좋은 정보 감사드리며^^

[번역] 이콜 Y의 비극 (3)

제 2 막


경시는 뭔가 발견했다는, 성취감에 들떠 미소를 띄며, 메모패드를 구노우에게 건네주었다. 구노우는 상사와 똑같이 눈을 의심하며 메모패드를 몇번이나 돌려 보았다.

"볼펜 자국이네요. 이콜 (=) Y 라고 읽을 수 있겠군요"
"자. 이게 바로 다이잉 메시지라는 놈이야. 우리 아들놈이 듣는다면 기뻐서 펄쩍 뛰어오를지도 모를 단서라구"

"그런데 피해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써서 남긴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린가?"

돋보기를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경시는 자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답했다.

"피해자는 전화 수화기에는 손이 닿지 않았지만 메모패드는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있었을거야. 그리고 습격 당했을때 마침 쥐고 있던 볼펜으로 간신히 범인을 나타내는 메시지를 남긴 거라고. 아마도 칼에 찔리기 직전, 혹은 찔린 직후에 범인의 얼굴을 본 것이겠지. 피해자를 찌른 범인은 그때는 그녀가 즉사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실을 나가 강도가 든 것 처럼 보이기 위해 다른 방을 뒤집어 놓았을테니 미처 그것을 막지 못한거지. 메모 패드의 메시지를 눈치챈 것은 위장 공작을 끝내고 이곳에 돌아온 뒤였을 것이네. 메모패드는 마루 바닥 위, 피해자 바로 옆에 떨어져 있었을거야. 범인은 그것을 집어들어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제일 윗장을 뜯어낸 뒤 사이드 보드의 원래 위치에 올려 놓았겠지. 그것만으로도 증거를 인멸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볼펜 자국이 아래 종이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네. - 이 설명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딱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잠깐 생각하던 구노우가 답했다. 경시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뭔가?"
"감찰의의 판단으로는 피해자는 테이블에서 문서작성을 하던 도중에 습격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칼에 찔린 직후에도 눈 앞에는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겠죠. 그 경우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종이를 집을 수 있는데 왜 사이드 보드가 있는 곳 까지 기어가서 전화용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기려 했을까요?"

"좋은 지적이군. 그러나 그 의문도 간단히 설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 피해자는 등을 찔렸던 순간, 그 충격에 의해 볼펜을 손에서 떨어트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볼펜이 테이블 위를 굴러 사이드 보드 앞 까지 굴러간 것이 아닐까?"
"역시나, 테이블 주변에 다른 필기용구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군요. 말씀대로라면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볼펜을 주으러 사이드보드까지 기어갈 수 밖에 없었겠군요. 볼펜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이동하는데 체력을 거진 전부 소진하였을테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마침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있던 메모패드에 손을 뻗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조금은 이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범인은 단독범일걸세. 공범이 있었다면 피해자가 메시지를 남길 여유, 가능성이 거의 없었겠지. 그리고 메모패드의 찢다가 남겨진 조각이 오른쪽 상단에 있는 것으로 보면 범인은 오른손잡이일 가능성이 높겠군. 뭐 여기까지는 상상의 영역에 지나지 않네만, 감식에 메모패드와 볼펜을 중점적으로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겠네. 지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는 아니네만, 뭔가 다른 것이 밝혀질지도 모르잖나?"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메시지가 이 정도뿐이라는 것은 뭔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요. 이렇게 판단하기 어려운 기호같은 것 보다는 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을 써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쓰는 도중에 힘이 빠져버린것이 아닐까? 또 우리들이 보기에는 알수 없지만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본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피해자의 언니에게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겠구먼. 사체를 운반해 나가면 곧바로 사카자키 미도리를 이곳으로 불러와 주었으면 하네"

구노우는 두어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

"아까 쯔부라야 아케미의 증언에 대해서는 경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 남편의 불륜에 대한 증언 말인가? 확실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더군. 남편 사카자키 쿄우스케가 출장으로 집을 비웠다는 타이밍도 뭔가 관련이 있는것 같고. 조금 부인쪽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겠어"

사카자키 미도리는 곧 206호실에 나타났다. 외출때 입었던 옷 그대로 쓰러져 누워 있던 탓에 흡사 전날밤의 과음으로 아침에나 돌아오는 듯한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그래도 한시간전에 받았던 쇼크에서는 어느정도 회복한 듯, 나타나자마자 옆집에 돌려주어야 할 배달된 물건에 대해 신경쓰는 눈치였다.

"물건은 부엌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범인이 손을 댄 흔적도 없으며 송장의 기재도 문제는 없는 것 같고요. 야마네코 운송의 영업소에 문의한 결과 담당자의 확인도 있었습니다. 추후 쯔부라야씨에게 건네드리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은 좀 괴로우시겠지만 동생분의 유체를 발견했을 때의 일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구노우가 그렇게 말하자 미도리는 양손을 허리위에 올려 놓은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에는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술은 앞서 이야기했던 쯔부라야 아케미의 증언과 별로 다른 내용은 없었고 흉기로 사용된 칼도 이전에 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구노우는 생전의 피해자의 행동에 대해 물어보았다.

"동생분은 언제부터 댁에 계신거죠?"
"어젯밤부터요. 남편이 출장가서 없는 동안에는 전부터 자주 놀러오곤 했었어요. 생활비를 굉장히 절약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식사도 별로 잘 차려 먹는 것 같지 않아서, 되도록 우리 집으로 불러 먹이고 싶기도 했고요. 몇년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부터는 내가 부모님 대신인 셈이라 되도록이면 잘 보살펴주고 싶었어요"

"동생분에게 집을 맡기고 외출하신 것은 몇시경이셨습니까?"
"2시 조금 지나서였어요"
"외출은 어디로?"

미도리는 일순 입을 앙다무는 것처럼 보였고, 순간 이젠 어쩔 수 없다라는 시선이 드러났다.

"-게이오선으로 신쥬쿠까지 물건을 좀 살게 있어서..."

구노우의 표정은 순간 굳어 버렸다. 물건을 사러 갔다 왔다면, 집 안에 사온 물건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사온 물건이 있었더라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시체를 발견한 미도리에게는 물건을 달리 어떻게 할 여유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점은 언급하지 않고 구노우는 다음 질문을 계속 했다.

"외출하실 때, 동생분에게 같이 나가시자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 아이가 마침 인터뷰를 수정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때까지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서 널어놓은 세탁물과 시트를 정리해두고, 잠자리를 펼쳐 놓더군요.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하룻밤 더 자도 좋겠지'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잖아'라고 답해주었었어요. 아카네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이여서 휴일도 집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했었어요. 만약 이런 일이 생길줄 알았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나가는 쪽이 좋았을텐데-"

"어제부터 오늘에 걸쳐 동생분에게 뭔가 평상시와 다른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음... 언제나와 같았었다고 생각해요"

"최근 동생분으로부터 일관계, 혹은 남녀관계의 트러블 등의 원인으로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들은 적은 없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생각나는게 없네요. 특별히 사귀는 남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사카자키 부인. 부인쪽은 어떻십니까?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거나 생명을 위협받을만한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미도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 저 말인가요? 하지만 왜...?"
"동생분은 당신 대신에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평범한 강도의 범행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동생분은 이 방에서 혼자서 집을 보던 도중에 등 뒤에서 습격당했습니다. 때문에 당신을 노렸던 범인이 착각해서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혹시 아카네씨가 온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미도리는 입을 손으로 누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아뇨. 남편이 출장을 떠난 뒤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온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렇다면 동생분이 오늘 여기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죠? 스토커 같은 인물이 그녀의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미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별개로 하죠., 혹 그러한 인물이 있다면 부모님같은 당신에게 상담했을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도리는 듣는둥 마는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숙였던 고개를 일으켜 격렬하게 목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한 일을 떠올린 듯, 그 생각을 머리로부터 흔들여 지워버릴 기세였다.

"아뇨. 아니에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노우가 묻자, 미도리는 실수했다는 듯 금방 표정이 굳어버렸고 이윽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는 그녀의 마음 속에 한번 떠오른 의문을 불식시킬 수 없는 듯 복잡한 생각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구노우 경부와 교대하여 질문을 계속 이어나갔다.

"남편분은 신쥬쿠의 여행 대리점에서 근무하신다고요. 이번의 출장지는 어디십니까?"
"교토예요. 어떤 회사의 위안여행인가 뭐래나, 원래 다른 사람이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그이가 교토에 가보고 싶어서 서포트로 동행한 거에요. 어제 아침 여기를 떠나면서 내일 저녁에 돌아온다고 말했었어요"

흡사 책을 읽는 듯한 말투로 건조하게 거기까지 답하다가, 미도리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숙소는 교토의 여관이냐는 질문에도, 고개를 흔들 뿐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내뱉을 용기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젠 마무리인가, 하고 경시는 생각했다.

"그러면, 부인께 잠깐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까의 메모패드를 미도리 앞에 놓았다.

"동생분은 숨지기 직전에 이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메모의 원본은 범인이 가지고 가 버린 것 같지만, 다행히 아래 종이에 볼펜의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콜 Y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메모패드를 본 미도리는 처음에는 숨을 멈추고 망연자실해 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 안색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볼펜 자국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는 한순간 참았던 숨을 한번에 몰아쉬며 말했다.

"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걸 뒤집어 볼 수 없을까요?"
"이렇게 말입니까?"

경시는 메모패드를 거꾸로 놓았다.

"그러니까... 확실히-. 형사님. 이거, 仁 이라는 한자로 보이지 않으세요?"
"인? 흠... 확실히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군요. 만약 이것을 그렇게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도리는 눈을 빛내며, 승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시나마 마유미 (仁科眞弓) 라는 여성을 알고 있어요!"
"그 분은 어떤 분이시죠?"
"남편 회사 부하 직원이에요"
"남편분의 회사? 그 여성이 왜?"

미도리는 뭔가 확신한 듯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아까 쯔부라야 부인이 말했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렇다면 아까 역시 듣고 계셨군요. 그나저나 말하신대로라면-"
"그래요. 니시나마 마유미는 남편 애인의 이름입니다"

메모를 본 뒤 갑자기 사카자키 미도리는 뭔가 깨우친 듯 태도를 바꾸어 그때까지의 애매한 진술을 뒤집었다. 오후 외출의 목적은 물건을 사러 나간 것이 아니고 (물론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게이오선으로 신츄쿠로 이동한 뒤, JR 사이쿄우선으로 갈아타서 도다역에 내렸다고 말했다.

"도다역이요? 사이타마의? 왜 그런 곳에?"
"니시나마 마유미가 살고 있는 맨션을 보러 간 거에요"

미도리가 남편 주위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작년 말 경이었다. 사소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상한 행동이 잦아졌고 그 후 의심만 가득한 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요우스케의 불륜을 확실히 알게된 것은 올해 1월 되어서였다. 부부가 같이 외출했던 날,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쳐서 계장님 이라고 친밀하게 말을 걸던 젊은 여자 - 그것이 니시나마 마유미였던 것이다. 그때는 거리에서의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이었지만, 남편의 당황 - 변명할 수 없는 반응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미도리는 곧바로 두사람의 관계를 직감했고 곧이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고 있지만, 요우스케의 아내인 내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해 라고.

그런 일이 있던 탓에 미도리는 이번의 교토 출장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계장이 된 요우스케가 국내 여행에 써포트로 동행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사실 출발 전부터 거동이 수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2박 3일의 일정이라고는 하지만 교토에 간다고 아내에게 말해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사실은 하루 빨리 귀경하여 불륜의 하룻밤을 그 여자와 보내는 것이 아닐까? 미도리는 그렇게 가슴 속에서 떠다니는 의문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침 놀러온 동생과 상의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 여자 집까지 가서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어때?"

라고 아카네는 말했다. 미도리가 말릴 틈도 없이 남편 서재에 들어간 아카네는 니시나마 마유미로부터 온 연하장을 찾은 뒤 미도리에게 건네주었다. 미도리는 조금 겁을 먹었었지만 아카네가 그녀의 기를 북돋으며 정 뭐하면 자기도 같이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만약 형부가 그곳에 있다면, 내가 언니 몫까지 맛을 보여줄께" 라고 말하는 동생에게
"아냐. 이건 우리들 부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역시 나 혼자 해결하는 것이 좋겠어" 라고 말하고, 집을 봐 달라고 부탁한 뒤, 미도리는 혼자 그 여자의 맨션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 연하장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경시가 요청하자, 미도리는 자신의 백에 손을 뻗어, 속에서 연하장을 꺼냈다. 겉과 뒤 모두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된 조잡한 것이였다. 보낸이의 주소는 도다시내의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라고 하는 맨션의 512호실. 경시는 연하장을 구노우 경부에게 건네주며 조치를 지시했다. 구노우는 곧바로 거실 한쪽 끝으로 가서 휴대폰으로 본부에 연락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주소로 형사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경시는 미도리의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 동생 앞에서는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집을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곳에 가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어쨌든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간 뒤, 다음일은 그곳에서 생각하자,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섰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제발 남편을 보지 않기를 계속 빌기만 했어요"

미도리가 도다역에 내린 것은 오후 3시를 막 지나서였다. 낯선 도시를 헤멘 끝에, 연하장의 주소를 보고 니시나마 마유미의 맨션을 찾아내었을 때는 거의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는 현관이 자동문으로 되어 있어서 외부인은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했었고, 미도리가 현관에서 몇번이고 인터폰 벨을 눌러 보았지만 마유미는 집에 없었는지 512호실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맥이 빠져서 그대로 돌아가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요우스케와 마유미가 어딘가 밖에서 만나 같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맨션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1층 상가 구역에 카페가 있었고, 미도리는 그 카페의 창 바로 옆 좌석에 앉았다. "챨스톤"이라는 한가한 가게로 손님은 그녀밖에 없었다.

마유미가 돌아온 것은 오후 5시 30분 경이었다. 다행히 요우스케와 함께는 아니었다. 미도리는 카페 창 너머로 마유미가 맨션 현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노리츠키 경시는 거기서 미도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5시30분 경이라는 시간이 틀림 없는지 확인했다. 틀림없어요, 몇번이나 시계를 봤는걸요, 라고 미도리가 답했다. 경시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았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니시나마 마유미와는 길거리에서 딱 한번, 스쳐지나가듯 본 적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확실히 같은 여성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미도리는 왜 그런 당연한 것을, 이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확실하게 말했다.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 여자 얼굴을 잊어버릴리는 없잖아요. 그리고 목소리도... 조금 기다린 뒤 나는 카페를 나왔어요"
"니시나마 마유미의 뒤를 따라간 것입니까?"
"예"

가게를 나선 미도리는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현관으로 들어가 다시 512호실 인터폰 벨을 눌렀다. 마유미의 목소리가 들려, 재빨리 화장품 세일즈를 가장해서 마이크를 향해 적당한 말을 몇마디 던졌다. 물론 상대해 줄 리는 없었다.
'곧 손님이 올거니까 그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마유미는 인터폰을 끊었다.

손님이 있다고 말한것은 단순히 방문판매를 쫓아내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도리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까의 카페로 돌아간다면 카페 주인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장소를 바꾸기로 하고 장소를 찾다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이동했다. 맨션의 앞 까지 뻥 뚫려 있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척 미도리는 벤치에 앉았다.

오후 6시 5분경, 역 쪽으로부터 남편과 굉장히 닮은 뒷모습의 남자가 여행가방을 한손에 든 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도리는 얼굴을 숨기고 석양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 계속 그냥 닮은 다른 사람이길 빌었지만, 그것은 남편 요우스케였다. 그는 사람의 이목에 신경쓰는 듯 조용한 걸음으로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 들어갔다.

남편의 모습을 보았지만 미도리는 곧바로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공포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속은 하얗게 되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확실히 아카네와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걸, 이라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곧 저절로 그녀의 발은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 쪽으로 향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그 사이에도 계속, 분명히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그 여자 집을 찾아간 것일거야, 이제 5분만 있으면 기쁜 얼굴로 맨션에서 나오는 그를 볼 수 있을거야, 그런 생각만 가득했어요"

그런 그녀의 생각이 통했는지, 요우스케가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향하는 곳은 길 반대 방향의 편의점 자판기였다. 담배를 사러 나온 것이었다. 자신의 담배 뿐만이 아니라 여성용 담배까지도 같이 사는 것이 보였다. 전부터 담배를 피는 여자는 싫다는 말을 했었는데... 맨션에 돌아가는 남편의 뒤를 숨어서 바라보던 그 때, 비로서 미도리는 배신당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에서는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로부터 3,40분 정도, 미도리는 그녀 주위에 땅거미가 둘러싸기 시작할 때 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전후의 시간 경과를 확실히 기억하기 못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때 쯤 그 자리를 떠났다. 이유는 생각도 나지 않고 알 수도 없었지만 어딘가에 묶인 것 처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허탈한 미도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맨션의 현관앞에 서 있었던 것 정도였다.

"그 피자 배달 말인데요, 어떤 피자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경시가 묻자 미도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였더라... 얼굴을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 전부터 계속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럼 저희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 가게에 물어본다면 배달 시간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인은 그 이후에 뭘 하셨습니까?"
"언제까지 계속 기다린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죠. 깨닫는 것이 굉장히 늦어버렸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여자 방으로 찾아가서 남편의 불륜 현장을 덮치지 않으면 안돼. 늦어지긴 했지만 그렇게 결심 하고 다시 맨션 현관으로 갔어요"

용기를 내어 512호실의 인터폰을 누르고 미도리는 마유미가 답하기도 전에

"사카자키 요우스케의 아내입니다. 남편을 내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소리쳤다. 상대는 숨을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었다. 남편은 안 계시다, 라고 마이크를 통해 마유미는 시치미를 뗐다. 남편이 맨션에 들어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보았다고 답해도 '잘못 보신 거에요'라고 딱 잘라 말했고 있다, 없다의 지루한 문답을 계속하다가 '아까 화장품 판매도 당신짓이었군요' 라는 말을 끝으로 마유미는 회선을 끊어버렸다. 그 뒤도 계속 인터폰을 눌러 보았지만 두번다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분해서, 그 집 우편함에 들어있던 뒷면이 흰 광고지를 끄집어 내어 그 여자에 대한 것을 거기 썼어요. 그리고 아까의 편의점까지 가서 복사를 한 다음 맨션에 돌아와 그 복사물을 맨 끝에서 부터 우편함에 차례로 집어 넣었어요. 니시나마 마유미가 어떤 여자인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쳐 주려고요"
"그 복사물 남은 것은 가지고 있으십니까?"

미도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채, 백 속에서 반으로 접힌 복사물을 꺼냈다. 경시가 펼치자 종이 한 가득 크래용으로 갈겨 쓴 듯한 글자가 나타났다. 루즈를 사용하여 쓴 것 같았다. 문구는 이러했다.

'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 거주하시는 모든 분들께. 512호실의 니시나마 마유미는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오늘밤도 불륜 상대를 방에 데리고 들어와서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 발정난 돼지같은 색정광이 이곳에 살고 있는데 여러분은 괜찮으신가요?'

터무니없는 중상모략 글이었다. 경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미도리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이것도 부족할 정도라고요! 그 여자는 더욱더 심한 짓을 했습니다. 512호실의 니시나마 마유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라고, 그 때 써버리는 것이 좋았을텐데!"
"부인. 기분은 알겠지만-"
"아니요"

위로하는 경시를 미도리는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혼합된 연료가 마음 속에서 타 오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5시 30분에 그 여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뭔가 사러 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런것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 니시나마 마유미는 나와 엇갈려서 이 집으로 들어와서, 나를 죽일 생각으로 아카네를 살해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아무것도 아닌 듯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까 사람을 찔러 죽인 그 손으로 이번에는 내 남편을 방으로 끌어들인 거라고요. 정말 무서운 여자! 그래도 니시나마 마유미의 정체를 알게되면, 확실히 그 사람도 나에게 돌아와 주겠죠. 그러니 형사님. 제발 한시라도 빨리 그 여자를 체포해서 남편의 실수를 깨우쳐 주세요!"

사카자키 미도리의 사정청취를 끝냈을 때는, 오후 11시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경시는 뒷끝이 찜찜한 피로감이 느껴져 당분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노우 경부도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다가 웅얼웅얼 말을 꺼냈다.

"처음은 부인의 진술로 한번에 체포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좀 약한것 같네요"
"아아, 알리바이 때문인가? 미도리의 진술 대로 니시나마 마유미가 5시 30분에 도다시의 맨션에 돌아왔고, 그 뒤에 계속 집에 있었다면 다치가와 아카네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사망추정시각은 6시부터 7시 사이니까"

경시는 괴로운 표정으로 인정했다. 그 일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미도리에게 몇번이나 목격 증언을 확인했었다. 구노우는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 듯한 어조로

"감찰의의 검시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사법 해부의 결과가 나올 때 까지는 속단할 수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을걸세. 감찰의 나카지마는 저렇게 젊어 보여도 실력은 있어. 약간 사망 추정시각의 폭은 넓어질 수 있어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거야. 세타가야와 시이타마의 거리는 택시를 타고 날라온다고 하더라도 왕복 한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니시나마 마유미의 범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분명 이 경우는 남편 사카자키 요우스케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까? 미도리 부인도 처음에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의심한 것 같은데-"
"음. 진술 도중에 갑자기 입이 무거워 진 것은 그 탓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6시15분에 마유미의 맨션에 찾아 왔다는 미도리의 목격증언이 사실이라면, 사카자키의 경우에도 범행 당시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네.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들킨것이 알리바이라니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원"
"하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내와 착각해서 동생을 살해할 일도 없겠죠"
"그것도 그렇지. 미도리가 말한 것 같이, 사카자키가 출장 일정을 조정했다면 조금 수상한 점도 있어. 어떻게 사건과 연결되는 점이 없을까?"
"사카자키가 몇시의 신칸선으로 교토를 출발해도, 표를 살 필요가 있습니다. 도쿄역으로부터 도다시의 마유미의 맨션까지 직행한다면 그게 최고였겠죠. 만약 중간에 비는 시간이 있다면-"

휴대폰 착신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실례, 라고 말하며 구노우가 전화를 받았다. 마유미의 맨션에 파견한 수사관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선수를 쳐서 중요 참고인의 신병 확보에 나선 것이었다. 구노우는 부하의 보고에 귀를 기울인 후, 오늘 밤은 일단 연행할 것을 지시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쪽은 어떻게 되고 있나?"

경시가 묻자 구노우는 보고의 내용에 만족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진술은 사카자키 미도리의 진술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부인이 맨션에 나타나서 인터폰을 눌러 문답이 오간 것도 인정하고 있고요. 그 대신 회사의 상사가 방에 왔다는 것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사카자키는 마유미의 방에 없었단 건가?"
"네. 하지만 별로 이상한 건 아닙니다. 보고에 따르면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는 자동 잠금 현관과는 별도로 안에서부터 잠그는 비상구가 있다고 하는데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곳이 열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사카자키가 도망갔다면 수사관이 인터폰으로 용건을 말하는 사이에 512호실로부터 빠져나와 비상구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높죠. 또한 마유미의 방의 테이블에 빈 피자 박스가 2인분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마유미는 배가 너무나 고파서, 2인분을 먹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요"
"역시, 그렇다면 아까 진술에서 미도리가 목격한 피자 배달은, 니시나마 마유미가 주문했던 피자의 배달이라는 것이구만. 그 배달이 있던 시각은?"
"6시 45분에 주문의 전화를 받아, 피자가 도착한 것은 7시 조금 전. 사카자키 미도리가 인터폰을 눌러 남편을 보내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20분 정도 뒤로 보입니다"
"타임 테이블의 공백이 대충 맞아 떨어져 가는구먼. 오후의 외출에 대해서 마유미는 뭐라고 한다던가?"
"역전의 영화관에 가서 혼자서 영화를 보았다고 합니다. 돌아온 것은 5시 30분경, 그 직후에 화장품 세일즈를 사칭한 여자와 인터폰으로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역시나 미도리 부인의 진술대로죠. 그리고 또 하나, 조사원의 보고에 따르면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현관 우편함에 니시나마 마유미를 중상하는 유인물이 놓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흠, 마유미의 맨션은 도다역으로부터 걸어서 몇분정도 걸리나?"
"도보 5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 미도리가 복사한 유인물을 마유미의 맨션 우편함에 뿌린 것이 7시 30분 전후라고 했으니, 도다역에 도착한 것이 7시 35분. JR 기타게이선으로부터 게이오선으로 갈아타서 치도리야마에 도착한데에 필요한 소요시간은 - 갈아타는 시간을 포함해서 45분 정도인가.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우는데 10분정도 걸릴테니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딱 맞아 떨어지는구먼. 아직 남편 행동에 관한 부분이 남아있지만 미도리의 진술은 대체로 확실하다고 여겨지는군"
"사카자키가 여자 방으로부터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노우가 묻자 경시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론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당연한 반응 아니겠나? 반대로 자기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모처럼의 알리바이를 자신이 버리는 듯한 행동을 취할리가 없었겠지. 확실히 사카자키는 범인이 아니야. 특별히 수배하지 않더라도, 사건의 대한 이야기를 어디 다른 곳에서 듣는다면 창백해진채, 내일이라도 출두할 것이 분명해"

구노우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사카자키 부부의 주위에는 지금까지 범인으로 추측될 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하더라도 강도의 범행이라는 가정도 수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니시나마의 니시(仁)가 아니라면 저 이콜 Y라는 다이잉 메시지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으음... 아들놈의 지혜를 빌리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오늘 오후 이 방을 방문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뒤는 이시바시라고 하는 야마네코 운송의 배달원 정도밖에는 없는데"
"야마네코 운송이라-"

구노우가 아직 팔짱을 끼고 있는 채로 그렇게 웅얼거렸다. 짧은 침묵 뒤에 갑자기 경시는 깜짝놀라 구노우의 얼굴을 보앗다. 구노우의 쪽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이쪽의 얼굴을 놀려 자세히 옅보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대체로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아까의 부재자 연락표는?"

이라고 경시가 말했다. 205호실의 쯔부라야 마유미가 가져온 연락표를 꺼내어 놓고 구노우도 흥분한 어조였다.

"이겁니다. 저 메시지는 문자나 기호는 아니고, 피해자가 고양이의 마크를 닮은 그림을 그려 남긴 것입니다. 한쪽끝에 수염과 입을 그리던 도중에 힘이 떨어져 버린 것이죠. 이 이시바시라고 하는 인물이 배달을 왔다가 젊은 여성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칼로 협학해서 난폭한 짓을 하는 정신이상자라고 한다면-"

경시는 연락표에 눈을 떨구었다. 회사명과 평행하게 고양이의 얼굴을 그린 야마네코 운송의 트레이드 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생긴 도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