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즐무어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장말희 옮김/해문출판사 |
황량한 지방 다트무어에 위치한 시타퍼드 저택 파티에 모인 참석자들이 우연찮게 벌인 테이블 터닝에서 시타퍼드 저택의 주인이자 지금은 헤이즐무어 저택에 사는 트레블리언 대령이 5시 25분 현재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대령의 절친한 친구 버너비 소령이 걱정된 나머지 눈길을 뚫고 대령을 찾아가지면 대령은 서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대령의 유언장을 조사한 결과, 그의 조카인 짐 피어슨이 사건 직전 (혹은 직후) 대령을 방문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곧바로 짐 피어슨은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에 짐 피어슨의 약혼자 에밀리 트레푸시스가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진범을 잡고자 한다. 신문기자 찰스 앤더비의 협조 (혹은 맹목적인 봉사)에 힘입어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가고 여러가지 조사를 벌인끝에 그녀는 진상을 알아낸다.
크리스티 여사님의 11번째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역시 헌책방에서 싸게 팔길래 충동구매한 책입니다. 포와로나 마플양이 나오는 작품은 좀 식상해서 아닌걸로 골라잡았는데 기대이상이었어요. 나름 대어를 낚은 기분이네요.
일단 여사님 작품에서 잘 보지 못했던 장치인 초반부 테이블 터닝(일종의 강령술?)에서 전해지는 살인 메시지가 굉장히 기발했으며, 이 메시지와 실제 살인이 결합되는 부분이 교묘해서 여사님의 뛰어난 필력을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살인사건 말고도 탈옥 사건 등 곁가지 사건과 뜬금없이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주민들처럼 독자의 흥미를 유지시키는 요소들이 많고, 이러한 사건과 설정이 결말부분에서 결국 하나로 엮이는 구성도 탄탄해서 감탄을 자아내고요.
무엇보다도 여사님이 즐기면서 쓴 듯 적당히 유쾌한 분위기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부부탐정"이나 "비밀결사"같은 로맨틱한 요소도 적절한 수준입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동기나 단서 모두 공정하게 독자에게 제공되어 독자와의 두뇌게임을 펼치는데 그야말로 정통파다왔습니다. 트릭도 상당히 괜찮았고요. 상식선에서 복잡한 설정이나 장치 없이 실행하는 트릭이라 그야말로 최고였어요. 정교하지만 작위적이고, 딱히 신뢰도 가지않는 장치를 이용하는 식의 최근 경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네요. 현실적이면서도 지금 읽어도 별로 식상하지 않은 트릭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만한 점은 여주인공이자 탐정역인 에밀리입니다. 미모에 행동력과 과감성까지 갖추고 똑똑하기까지 한 호감도 100%의 주인공이거든요. 여사님이 자기가 바라는 여성상을 투영해서 묘사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찰스 앤더비를 조종(?)하는 등 남자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부분에서는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대관절 왜 시리즈 캐릭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더군요.
물론 전형적인 돈많은 숙모 캐릭터나 비굴한 조카, 기자같은 평면적인 캐릭터들 등 쉽게 간 부분도 없지는 않으나 다른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워낙 확실해서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여사님스러운 정통파 고전 트릭 미스테리였달까요? 미스 마플과 포와로에 가려진 여사님의 작품들 중에서도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여사님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 제법 있는데 부지런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시 구관이 명관인 법이겠죠.
PS : 원제가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등장하는 저택의 이름을 바꾸어 놓은 번역 의도가 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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