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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5

엔드 오브 에버노트 — 34,246개의 노트와 이별을 준비하며

저는 에버노트를 2012년부터 사용해 왔습니다.

처음 사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웹 클리핑 기능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읽다가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면 기사든 블로그 글이든 간단하게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가 직접 작성한 글과 메모까지 더해졌고요. 그렇게 14년 가까이 사용한 지금, 에버노트에 쌓인 노트는 34,246개입니다.

처음에는 무료로 사용했지만 저장하는 자료가 늘어나고 사용 빈도도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유료 회원으로 전환했습니다. 유료 결제를 이어온 지도 약 10년이네요.

그동안 에버노트의 가격 정책은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요금이 오르기도 했고, 요금제 구성이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용하는 범위에서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1년에 몇 만 원 정도라면 자료를 보관하고 검색하고 웹페이지를 쉽게 스크랩하는 비용으로 받아들일 만했으니까요.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계속 결제해 왔습니다. 작년에는 연간 이용료로 99,000원을 냈었지요.

그런데 최근 변경된 요금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변경된 요금제로 제가 사용하게 된 Evernote Starter의 연간 요금은 75,399원입니다. 그런데 현재 Starter 요금제에서 만들 수 있는 노트는 최대 2,000개입니다. 노트북은 20개, 첨부파일은 1,000개, 저장공간은 5GB, 동기화할 수 있는 기기는 3대로 제한됩니다.

물론 Starter 가입자라 해도 기존 노트가 삭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노트를 열어 보고 수정하거나 내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트 수가 한도를 넘은 상태에서는 더 이상 새 노트를 만들 수 없습니다. 당연히 웹 클리핑도 불가능하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하던 방식대로 에버노트를 계속 사용하려면 Advanced 요금제로 올라가야 합니다. 한국 기준 연간 요금은 Starter의 75,399원보다 매년 115,000원을 더 내야 합니다. 지금보다 약 153%가 늘어나며, 전체 이용료는 약 2.5배가 됩니다.

이건 단순히 가격이 조금 오른 게 아닙니다. 10년 가까이 유료로 사용하면서 3만 개가 넘는 노트를 쌓아 온 이용자가 지금까지 하던 일을 계속하려면 연간 이용료를 7만 5천 원에서 19만 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거니까요.

물론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비용이 들고, 운영비가 오르면 구독료도 오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비용을 지불해 왔으니 유료 서비스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기존 사용자의 기능을 줄여 놓고, 그 기능을 계속 사용하려면 훨씬 비싼 요금제로 옮기라고 요구하는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적은 금액도 아니고, Starter 역시 Advanced의 약 40%에 해당하는 비용을 내는 유료 요금제인데, 제 사용 방식에서는 새 노트 생성과 웹 클리핑이라는 핵심 기능조차 사실상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에버노트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동안 백업에는 너무 무심했습니다. 3만 개가 넘는 노트가 들어 있는데도요. 백업은 번거로웠고, 매년 비용을 내고 있으니 에버노트가 계속 잘 보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는 좋아하던 서비스가 사라지는 일을 이미 몇 번 겪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글루스입니다. 20년 가까이 사용했던 블로그 서비스였지만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오랫동안 제 기록을 쌓아 온 공간도 서비스가 끝나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구글 뮤직도 마찬가지예요. 구글이 운영하는 서비스라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기업의 판단에 따라 서비스는 언제든 종료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과 달리 에버노트는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서비스 종료를 발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어떤 서비스도 제 기록을 영원히 보관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버노트와 이별을 준비하려 합니다.

우선 34,246개의 노트를 제 손에 다시 가져올 겁니다. 에버노트에만 있는 자료를 백업하고, 필요한 것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앞으로 사용할 웹 클리핑 대안도 마련할 생각이에요. 웹 클리핑은 우선 Firefox의 SingleFile로 HTML 파일을 저장한 뒤 Google Drive에 자동 백업하는 방식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본문 검색은 ChatGPT 연결을 활용하고요.

당연히 이 방식은 하나의 서비스에서 통합된 경험을 제공했던 에버노트보다 불편합니다. 그래도 서비스는 빌려 쓰는 것이지만, 기록은 결국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이글루스와 구글 뮤직을 떠나보낼 때 이미 어렵게 겪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14년 동안 에버노트에 쌓인 3만 4천여 개의 노트가 지금 다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서비스에 종속되지 않고 데이터를 제가 직접 보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블로그에 쌓인 글들은 나중에 어떻게 백업하면 좋을까,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30

다시 뽑아보는 3대 미스터리 (from 알라딘)

"3대 미스터리"로 알려진 작품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하고, 이후에도 많은 미스터리가 발표되었기에 새롭게 3대 미스터리를 정해보자는 기획이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열두 명의 전문가와 알라딘 미스터리 마니아 100인이 작성한 추천 리스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세 작품을 선정하였다고 하네요.

선정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걸작이지만, "13.67"과 "용의자 X의 헌신"은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탓입니다. 장르 역사적으로 크게 의미있는 작품도 아니고요.

전문가라고 초빙된 분들도 아쉽습니다. 일본 소설 번역가, 출판사 대표의 경우 사심이 배제되기 어려울테니까요. 실제로 김은모 번역가의 추천작은 모두 일본 소설입니다. 에세이 작가 김혼비 님은 왜 전문가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알라딘 미스터리 매니아 100명의 투표 역시 일본 소설로 쏠려있는 국내 미스터리 시장의 현황이 극단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나마 아래 하우미스터리 운영자이신 decca님의 추천 정도만 납득할만 했습니다.

물론 이런 리스트는 수많은 매체에서 정리, 발표해 왔기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기는 합니다. 리스트에 선정되었다고 다 좋은 작품들도 아니고요. 이번 알라딘에서 선정된 작품들은 최소한 '재미'만큼은 보장되어 있으니, 오히려 추리 소설에 입문하는 분들에게는 더 좋은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알라딘 선정 정말 재미있는 미스터리" 같은 제목을 붙여서요. 선정 기준도 불분명하고, 트렌드에 치우친 현재의 투표 결과를 통해 선정된 작품을 '3대 미스터리'라고 부르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한 수식어에요.

마지막으로 저만의 역대 베스트 3을 소개드립니다. 책 소개는 링크의 리뷰로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