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