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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3

아비무쌍 - 노경찬 / 이현석 : 별점 2점

무협 웹툰인데 초반에는 설정이 신선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노가장이 무림의 영웅이나 천하제일인이 아니라, 세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 홀아비 가장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별한 아내가 남긴 세 쌍둥이를 키우기 위해 그는 원래 하던 해결사 일을 접고, 안정적인 직장인 천룡회 무사로 취직합니다. 그리고 이후 10년 넘게 문지기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운다는 설정이지요. 이 과정에서 추가 보수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가장은 문파의 원한, 가문의 복수, 천하제일을 향한 야망 같은 동기는 없습니다. 오로지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무사히 키우는데 주력하지요. 무림의 명성보다 월급과 안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요. 이런 생활감 넘치는 설정은 그간 제가 읽었던 무협이라는 장르물에서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노가장이 상당한 실력자이면서도 스스로를 하수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무림인들에게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만났던 무림인이 무림 5존의 한 명인 관존이었기 때문에 묵사발이 났던 것 뿐이지요. 하지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노가장은 어떤 임무를 맡던 살아남는걸 최 우선 과제로 삼아 해결사 일을 하며 쌓은 경험과 실전 감각으로 여러 위기를 돌파합니다. 

노가장의 세 쌍둥이 아들과 딸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해서 진행되는 부분도 괜찮습니다. 무공을 배우고, 각자의 성향에 맞게 성장하며, 점점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라서 재미가 없을 수 없으니까요. 아들들과 딸의 개성도 뚜렷하고요.

작화도 좋습니다. 그림체도 독특하지만 액션 장면에서 속도감과 무게감이 빼어납니다. 검과 주먹이 부딪치는 장면, 인물의 움직임, 타격의 순간 표현이 시원하며 절묘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비교적 초, 중반부이며 후반으로 가면 흐려져 버리고 맙니다. 노가장이 무협지 속 절정고수의 반열에 오르며 가장 매력적이며 특별했던 '홀아비 가장의 외벌이 육아 생존기'라는 신선했던 컨셉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뻔한 무협지와 다를게 없어집니다. 

물론 십 여년이 지나, 노가장이 무시받는 수모와 천룡회 내부 암투에 휘말려 부하를 잃은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려는 움직임만큼은 흥미롭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림인을 정리하려는 관존의 음모와도 얽히는데, 이 역시 기존 무협지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다른 쓸데없는 설정은 쳐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교의 우두머리 천소소가 왜 등장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행복이를 비롯한 여러 조연도 마찬가지고요. 게다가 비교적 비중이 높았던 천룡회 내부 암투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전개도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핵심인 오문 설정이 지나치게 만화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오행의 성질을 따른다는 설정은 그렇다 쳐도, 사람이 불이나 흙처럼 변해 마인이 된다는 표현은 유치했습니다. 노가장이 신존이 되는 과정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렵고요. 사부가 어떻게 기운을 가져갔는지, 노가장의 변화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는지 등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만큼은 분명히 신선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작품 고유의 색깔이 약해지고, 평범한 강자 중심 무협물에 가까워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2026/06/12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 화바이룽/ 김소희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에 사랑은 추억이나 순간,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남편 밍런이 갑작스럽게 이혼을 통보했다. 밍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한 나는 친한 팡 언니에게 부탁해 밍런을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이혼은 성립되었다. 

그 뒤 밍런이 사람을 죽여 체포된 뒤 구속되었고, 밍런의 동기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나에게 독방에서 자살한 밍런의 이메일이 전달되며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대만 작가 화바이룽의 장편소설입니다. 범죄물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남편 밍런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뒤, 이야기는 사건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밍런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 아내의 불륜 의심, 사설 조사, 살인, 구속, 자살, 마지막 진상까지 빠르게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개가 만들어 내는 흡입력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밍런이 왜 이혼을 요구했는지, 왜 개명했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왜 끝내 자살했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롯이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는 묘사도 좋습니다. 갑자기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혼란과 분노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덕분이에요. 사건은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주인공의 감정은 설득력이 넘칩니다. 그만큼 생생하고 생활감 있는 묘사가 빼어납니다. 웃기기도 하고요.

범행의 세부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밍런의 작업실은 보안이 엄격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뤄지가 그곳에 쉽게 들어갔다는 설명은 의심스럽고, 밍런이 자백한 그대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작업실에 있던 두 개의 옷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밍런은 옷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업실에는 옷장이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잠겨 있었는데 역시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는 밍런이 작업실에서 재스민이라고 부르는 러브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진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옷장은 밍런이 재스민과 관련 물품을 숨긴 공간이었고요. 이를 알아챈 뤄지는 밍런을 협박하다가 고압 전기에 감전되어 살해당합니다. 이 죽음 역시 앞에서 밍런이 형과 함께 감전 장치를 만들었다는 복선을 통해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꽤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뤄지가 밍런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도 재미있는데, 아내가 의뢰한 불륜 조사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 조사 때문에 밍런의 은밀한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밀은 협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살인까지 부르고요. 처음의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마지막 비극과 진상에 맞물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윤회식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밀리의 서재에서 홍보하는 대로 '추리소설'로 보면 아쉽습니다. 복선은 있지만 독자가 단서를 모아 진상을 맞히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뿐이며, 중요한 진실은 밍런의 자백(이메일)로 밝혀지니까요. 

밍런의 동기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러브돌에 깊이 빠졌을까요? 주인공 '나'의 1인칭으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밍런 시점의 고민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 머물고 싶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이미 이혼도 했고, 러브돌과의 관계가 불법도 아닌데 왜 살인까지 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허술한 부분도 보입니다. 작업실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은 좋은 복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뤄지가 경비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에 들어갔다고 밝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보안이 엄격하다는 설정의 힘이 약해집니다. 치밀한 장치로 보기도 어렵고요. 또 이 경비원 친구의 존재도 문제입니다. 밍런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뤄지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하지만 뤄지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도운 경비원 친구가 입을 열면 밍런의 비밀은 다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밍런의 자살 이유도 애매해집니다. 비밀을 완전히 묻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에서 시작해 불륜 조사, 살인, 자살, 진상 공개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빠릅니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도 좋고, 생활감 있는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추리물로는 아쉽지만 범죄 드라마로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6/0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6) 맥주가 맛있는 순간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닿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보리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젖은 빵이 발효된 것을 먹어 본 것이 맥주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문학으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음식을 대표하는 상형문자가 ‘맥주’와 ‘빵’이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를 맥주와 마늘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마늘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이집트에 냉장고가 있었을 리는 없지만, 더위 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하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합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드니까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 중 한 편인 "맥주 별장의 모험"에서 주인공 닷쿠 일행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무더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별장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대량의 맥주를 발견하지요. 당연히 일행은 유혹을 참지 못합니다. 긴급 피난이라는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체내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알코올의 이뇨 작용까지 더해지면 탈수 증상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젊은 닷쿠 일행에게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텅 빈 별장 1층에 싱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저마다 추리를 꺼내 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작가의 단편 "맥주집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닷쿠 일행이 빈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시며 그 이유를 추리하는 이야기거든요. 만화 단행본 표지에서도 닷쿠 일행은 맥주를 들고 있는데, 이쯤 되면 참 맥주를 좋아하는 일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작품 속 닷쿠 일행이 마신 것은 냉장고 속 캔맥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캔맥주보다 병맥주 쪽이 조금 더 시원한 인상을 줍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 병뚜껑이 열릴 때 나는 소리, 잔에 따를 때 올라오는 거품이 캔맥주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즐겼던 맥주도 Remmers 병맥주였습니다. "독사"에서 그 상표명이 직접 언급되지요.

병맥주 하면 역시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병을 꺼내, “퐁”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고, 살짝 얼음이 낀 잔에 거품이 올라오도록 따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데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에는 바로 이 습관을 이용한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노 쿄코는 냉장고 속 맥주를 냉동실에 얼려 둔 잔에 따라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남편을 원격으로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리 잔에 청산가리를 발라 두었던 겁니다.

다만 이 방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여도, 과학적으로는 맥주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주에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적정 온도가 있는데, 얼린 잔은 그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버리는 탓입니다. 또 잔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 때문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장 시원해 보이는 방식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방식은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고 더위 속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만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에 등장하는 사코미즈처럼, 2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맥주를 마신다면 어떨까요. 그 맥주가 맛없을 리 없습니다. 그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두고 “마치 목에도 미각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느끼며, 맥주를 “액체 모양을 띤 황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잘 와닿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지붕 공사 장면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는 간수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요구합니다. 그 덕분에 죄수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위에 앉아, 차갑게 식힌 Stroh’s Bohemian 맥주를 한 병씩 나누어 마시지요. 특별히 고급 맥주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교도소 안에서 잠시 자유를 맛봅니다. 죄수가 아니라 하루 일을 마친 평범한 노동자처럼요.

물론 차갑지 않아도 특별한 분위기가 함께한다면 맥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미시 순경은 일부러 맥주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시곤 합니다. 미국 영화 속 탐정들이 책상 서랍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장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 자신도 옛 하드보일드 탐정과 닮아진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맛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스티븐 킹의 "여름 천둥"은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든 것이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은 버려진 개 간달프와 함께 살아가고, 근처 고급 주택가에 홀로 남은 팀린과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결국 방사능 후유증이 심해져 죽음을 앞두게 된 팀린은 자살할 준비를 마친 뒤 로빈슨을 부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지근한 Budweiser를 나누어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맥주의 제왕”이라면서요. 차갑지도 않고, 세상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마시는 맥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의 Budweiser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맛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 그리고 맥주라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이 만들어 내는 쓸쓸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달프가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의 파트너 조처럼 Budweiser를 좋아하는 개였다면, 그 자리가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실 이 자리는 Budweiser보다 벨기에 맥주 Duvel이 더 어울렸을겁니다. 시원해야 제맛인 라거 계열의 Budweiser와 달리, 에일 계열 맥주는 어느 정도 온도가 올라왔을 때 본연의 맛이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도 Duvel이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향과 맛을 즐기기 좋은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udweiser도 겨우 구했던 로빈슨과 팀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요.

이처럼 맥주의 맛은 온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위, 갈증, 자유, 고독, 동경, 마지막 순간의 체념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맥주는 차가워서 맛있고, 어떤 맥주는 오래 기다린 끝에 마셔서 맛있습니다. 또 어떤 맥주는 맛 자체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시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날의 갈증이든, 하루 끝의 여유든, 이야기 속 인물이 느낀 자유든, 맥주는 그런 장면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방법인 ‘세 번 따르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네로 울프도 좋아하는 Remmers 병맥주를 전용 금도금 병따개로 딴 뒤, 정확하게 거품을 맞춰 따라 마시곤 했다고 하니, 미식가에게 검증된 방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맥주에 잘 어울리는 잔까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 번 따르기

1.
맥주병을 높이 들고 처음에는 천천히, 이어서 조금 세게 따라 거품을 만든다.

2.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 정도가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로 가져가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1cm 정도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맥주를 조심스럽게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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