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에서 술병은 꽤 익숙한 소품입니다. 이전에 와인병이 흉기로 사용된 작품을 소개해드리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술병은 무언가를 숨기는 역할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술병은 작은 물건을 감추기에 제법 괜찮습니다. 위스키나 코냑처럼 짙은 색 유리를 사용하는 병은 더욱 좋지요.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기 어려우니까요. 술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면 더 알아채기 쉽지 않을 테고요. 무엇보다 술병은 술을 담아두는 물건이라는 선입견이 강한 탓에, 책상이나 선반에 놓여 있어도 누군가 굳이 안을 확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인 "잃어버린 얼굴"에서는 이 점을 아주 잘 써먹습니다. 이야기 초반, 한 여성이 다세대주택 외부 계단 아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됩니다. 그녀의 곁에는 깨진 산토리 올드, 둥글고 짤막한 검은 병 때문에 '다루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위스키 병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병에서는 여성의 지문뿐 아니라 이미 살해된 남성 야기 다쓰오의 지문까지 검출됩니다.
여성은 야기에게 선물하려고 가져간 위스키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지문이 새로 가져온 병에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그녀는 과거 야기에게 가져다준 술병을 그의 집에서 다시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연스럽게 수사에서는 왜 굳이 사건 현장에서 위스키 병을 가져가려 했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야기가 술병을 단순히 술을 담는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데이터를 작은 저장장치에 담아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그것을 위스키 병목 안쪽에 숨겨두곤 했습니다. 짙은 검은색 병이라 밖에서는 안쪽을 살펴보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했던 겁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형사 히노가 이 사실을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히노는 야기의 단골 바에서 기네스를 마시다가, 잔 속에 노른자를 넣은 ‘옐로 선셋’이라는 칵테일을 받습니다. 이렇게 검은 맥주 때문에 잔 안의 노른자가 잘 보이지 않았던 점에 착안하여, 검은 위스키 병 속에도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추리로 이어지거든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바텐더의 재치와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산토리 올드는 일본 위스키의 역사에서도 꽤 유명한 술입니다. 1940년에 처음 완성됐지만 전쟁으로 출시가 미뤄졌다가 1950년에 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둥글고 검은 병 모양 때문에 '다루마'나 '다누키'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1950~60년대에는 성공한 뒤 마시는 고급 위스키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과 함께 대중화되어 1970년대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요. 현재의 산토리 올드는 야마자키의 스패니시 오크통 원액을 키 몰트로 사용하는 블렌디드 위스키로, 강렬하고 거친 맛보다는 달콤한 향과 부드럽고 둥근 맛이 특징입니다. 지금도 특유의 둥근 검은 병을 유지한 채 판매되고 있는데, 실제 병을 보면 왜 작가가 무언가를 숨기는 장소로 이 술을 선택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병의 특징을 활용한 작품도 있지만, '술병'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작품도 있습니다. 엘러리 퀸의 "킹은 죽었다"입니다. 작품의 무대는 억만장자 킹 벤디고와 그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입니다. 킹에게 살인 예고가 전달되고, 예고된 시각이 되자 동생 유다는 자신의 방에서 권총을 발사합니다. 하지만 유다가 쏜 총에는 실탄이 들어 있지 않았고,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던 킹은 다른 방에서 실제 총탄을 맞습니다. 문제는 킹이 총을 맞은 방에서는 총도, 탄피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소품이 유다가 저택 곳곳에 숨겨둔 세공자크 V.S.O.P 코냑입니다. 피아노 현 위에서 여섯 병이 발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체육관, 수영장, 당구장 등 어디에서나 짙은 녹색 술병이 튀어나옵니다. 유다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라서, 술이 필요할 때마다 그게 어디든 자신만 알고 있는 장소에서 병을 찾아냅니다.
처음에는 괴짜 부호의 기이한 습관처럼 보이는 이 술병들은 사실 사건의 트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작품을 읽을 재미를 크게 해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만, 범행 직후 유다가 술을 찾는 장면과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과정에서 술병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V.S.O.P는 ‘Very Superior Old Pale’의 약자로, 코냑의 숙성 등급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 규정에서는 블렌딩에 사용된 가장 어린 원액이 최소 4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오래 숙성된 코냑을 뜻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20년이나 30년 이상 숙성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코냑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생산하는 브랜디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만듭니다. V.S.O.P급 코냑은 일반적으로 어린 코냑의 거친 느낌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과일 향에 바닐라와 견과류, 향신료, 오크 같은 숙성향이 더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브랜드와 숙성 기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스트레이트로 천천히 향과 맛을 즐기기에도 좋은 등급입니다.
"잃어버린 얼굴"과 "킹은 죽었다"는 시대도, 분위기도 상당히 다른 작품입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술병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누구나 술병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 자체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지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눈앞에 계속 보였는데도 의심하지 않았던 물건이 사건의 중요한 열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마술의 '미스디렉션' 같은 트릭을 활용하여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다음에 바의 선반에서 오래된 위스키 병을 보게 된다면, 라벨보다 먼저 병 안쪽이 궁금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다루마, 즉 산토리 올드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으니, 바에서 실제 병을 본다면 한 잔 주문하고 찬찬히 병 안쪽을 살펴볼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