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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5

가구, 집을 갖추다 - 김지수 : 별점 2.5점

가구와 인테리어를 단순히 취향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생활사와 주거문화의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장점은 가구와 인테리어 전문가인 저자의 식견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화장대를 설명하면서 청동기시대의 거울 대체품 이야기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이후 화장 문화의 변화, 17세기의 로보이 화장대, 18세기의 토일렛 테이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더치스 화장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정리해 주면서 화장대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미의식, 계급 문화, 생활양식의 변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점을 잘 알려주는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서양 가구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 말기의 경대, 유리 거울의 보급, 좌식 문화에 맞추어 발달한 소반의 구조와 쓰임, 사랑채와 안방의 변화를 통해 한국의 주거문화와 가구를 연결해 설명해 주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읽다보면 왜 과거의 가구들이 작고 이동하기 편한 구조였는지, 왜 안방이 오랫동안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지, 또 근대 이후에는 거실과 식탁 중심의 공간으로 어떻게 옮겨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온돌의 일반화와 좌식 문화의 정착, 그리고 그에 따라 소반이나 경대 같은 생활 가구가 발달해 나갔단 것이지요. 

현재의 생활 방식과 이어지는 제안들도 흥미롭습니다. 소파보다 식탁에 투자하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조언이 아니라, 거실과 부엌을 통합하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따라 하고 싶은지와는 별개로, 집을 꾸민다는 일이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와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이사를 계획 중인데 여러모로 참고가 됩니다.

엠파이어 스타일, 리젠시 양식, 아르데코 같은 서양 디자인사의 흐름을 대중문화와 사회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예술가와 장인, 파리지엔느와 프렌치 시크 등의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다만 책의 성격에 비해 도판이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시각 자료가 꼭 필요한 책인데 말이지요. 저자의 일러스트가 수록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울러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에는 전문성이 조금 부족합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넓은 범위의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근거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도 가구와 집을 둘러싼 역사, 문화, 생활양식에 대해 쉽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26/04/19

Q.E.D Iff 증명종료 29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시리즈를 처음 접했던 것은 1999년 세기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신간이 나올 때마다 계속 구입해 왔습니다. 블로그에도 꾸준히 리뷰를 남겼고요.

그러는 사이 저는 50대가 되었지만, 토마와 가나는 여전히 고등학생입니다. 그래도 작품 속 시간 역시 아주 조금씩은 흐르고 있습니다. 에나리 선배들은 졸업했고, 토마와 가나도 3학년이 되어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거의 30년 가까이 사실상 '커플'처럼 그려졌으면서도,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만 있을 뿐 특별히 언급할 만한 진전이 없어서 조금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직전 에피소드에서 이번에는 정말 고백을 하겠구나 싶은 묘사가 있어서 기대했는데, 토마가 이번 권 첫 에피소드 초반부터 고백을 해 버리네요. 무려 30여 년, 정확히는 27년에 걸친 기다림을 드디어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별다른 이벤트나 분위기 조성 없이 담백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역시 토마답습니다. 쿨하게 이를 받아주는 가나도 역시 가나답고요.

고백 이야기 외에도 '성장기'라는 측면에서 볼 만한 부분이 많아서 마음에 드네요. 팬심을 더해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권이 완결편인데,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프리 칼리지 수업으로 하버드 대학의 '문제 해결과 계획' 강의를 선택한 가나에게, 대부호 홀든 가문의 양녀인 슐리아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건이 과제로 주어졌다. 담당 교수 브라이언이 슐리아의 은사였기 때문이었다. 가나와 조원들은 슐리아와 FBI 담당 수사관 엘마 등을 인터뷰하며 진실을 찾아 나서는데...

조사를 통해 드러난 핵심 단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슐리아는 SNS에 연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지만 연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양녀인 그녀가 유산을 받는 것을 막으려는 홀든 가문이 계좌를 동결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력한 용의자를 FBI가 놓친 탓에, 슐리아를 보호하는 일이 공식화됩니다.

이렇게 그녀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공식화되면, 홀든 가문은 괜한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 계좌 동결을 해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FBI 수사관 엘마가 슐리아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즉, '슐리아가 연인과 함께 유산을 쓰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게 진상이었던 겁니다.

FBI 수사관이 애인이라는 설정부터 억지스러운 등 추리적으로 아주 대단한 작품은 아니지만, 토마의 고백과 아래와 같은 마지막 장면의 쐐기골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어쩌면 "Q.E.D"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미 있는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서 이 작품의 별점은 3점입니다. 순전히 팬심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중요하고 멋지고 의미있는 장면의 작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비율과 뎃셍 모두 엉망이에요. 카토 모토히로, 과연 저게 최선이었습니까?

"에세이"

가나는 하버드 대학 지원용 에세이를 쓰기 위해, 4년 전 중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진학을 방해하던 불량배가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졌던 사건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자신을 설명하는 '에세이'가 무엇인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보여 줍니다. 에세이에는 그 사람의 '배경'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예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대학이 다양성을 원하는 이유에 대한 소개 역시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을 정도고요. 가나가 4년 전 사건을 떠올리며 다시 정리한 에세이도 굉장히 와 닿는 결과물입니다.

당시 검도 사범이 가나를 변호해 주기는 했지만 '현장에 있었는데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이상한 상황을 통해 검도 사범이 흑막이었다는걸 밝혀내는 추리, 그리고 막다른 골목의 담 너머에서 공격했다는 간단한 트릭 모두 모두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높아서 추리적으로도 마음에 듭니다.

'에세이'라는 소재를 통해 "Q.E.D"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 제공도 해 주고, 성장담으로서도 우수하며, 추리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일상계 미스터리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