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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윤덕노 : 별점 3점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6점
윤덕노 지음/더난출판사

음식 관련 식문화사, 미시사 서적. 관련 서적을 많이 저술해 왔던 윤덕노 씨의 근간입니다. 주로 우리나라 역사나 일화 속 음식과 요리들을 다루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제목처럼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의 중국 역사에서 요리 관련된 이야기들을 뽑아내어 소개해 줍니다.

요리에 대한 단순한 소개보다는 그럴듯한, 그리고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었던 역사적 사실을 뽑아내는 글들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조개가 높은 가치를 가졌었다는걸 <<삼국지>>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사료를 통해 우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옛날 중국의 주요 도시들이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이었다고 말하는 식으로요. 물론 단지 거리 문제만은 아닐 수 있겠지만, 뭐든 구하기 힘들면 가치가 높아지는건 당연하니 그럴듯한 발상입니다.
당나라 이전 가 유행하지 못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저자는 우선, 당나라 이전은 북방이 남방에 비해 문화적으로 월등하게 발전했던 시기였다고 해석합니다. 당시 북방 민족은 차보다 낙농 제품을 더 선호했습니다. 차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접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러다가 당나라 때 강남의 발전,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호방한 북방 호족 문화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정신을 맑게 하는 차가 대접받는 남방 문인 귀족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지요. 차의 대 유행은 이런 역사적 흐름이 맞물린 덕분이라는군요.
남북조 시대, 남제 출신으로 북위에 투항 후 대장군을 지낸 왕숙이 양고기와 물고기를 비교했던 일화도 마찬가지에요. 북위의 수도 낙양은 허난성에 위치한 중원의 중심인데, 이 곳까지 북방 유목민 음식이 널리 퍼졌다는 뜻으로 남북조 시대부터가 호한 胡漢 융합이 시작된 시기로 보는 좋은 증거라고 하거든요. 충분히 설득력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왜 중국에서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많이 먹고 대접받는지?에 대한 설명도 실제 역사와 잘 맞아 떨어져서 재미있었습니다. 돼지고기가 황제 수랏상에 오른건 명 태조 주원장 때가 처음인데 그 이유는 주원장이 탁발승 노릇까지 했던 밑바닥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송, 원나라 때 귀족, 부자들은 주로 양고기를 먹었습니다. 돼지고기는 주로 가난한 서민이나 하층민이 먹었고요. 그런데 주원장이 황제가 된 뒤, 자기 입맛에 맞는 돼지고기를 수랏상에 올리게 했고 이후 돼지고기를 제일 좋아하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여 중국 육식 문화에서 돼지고기의 자리는 확고 부동해졌다고 하네요.

그 외 중추절 토란이나 오리고기를 먹는 풍습이 원나라 때, 몽골인을 죽이는 심정에서 비롯되었다던가, 도삭면은 몽골족이 한족으로부터 식칼을 압수해서 어쩔 수 없이 쇳조각으로 만들었던 상황에서 유래되었다는 고사도 역사와 음식을 잘 배치하여 설명한 사례라 생각됩니다. 몽골족은 한족으로부터 주방용 식칼을 압수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팩트 체크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여러 일화나 명언 등에 관련되어 있는 요리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강남 귤이 강북 가면 탱자 된다'는 고사를 예로 들며, 이 강은 화이허강이며, 귤과 탱자는 아예 다른 종류이고 강북에서 귤 재배가 되지 않는건 북방 한계선이 화이허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는 식으로요.
국수가 장수를 의미하는 음식이 된 유래도 기억에 남네요. 이는 그만큼 밀이 비싸고 고급 음식이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보통 생일날에는 평소와 달리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기 마련이니까요. 송나라 이후는 밀이 흔해졌지만, 숲이 많은 북방에서 평야 지대인 남방으로 밀려난 탓에 찌는 요리법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럴듯했습니다. 화덕에 구울 때는 화력이 센 장작이 필요한데, 숲이 없는 남방에서는 볏짚이나 밀짚과 같은 농업 부산물 혹은 낙엽을 연료로 쓴 탓에 연료 소비가 적은 수증기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지요.
복날과 보신탕의 유래도 가치있는 정보였습니다. <<사기>>에 근원을 둔 역사적인 행사와 음식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호떡은 군것질거리나 값싼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황제가 먹기에 손색없는 고급 음식이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조조, 수양제, 장한, 소동파 등 수많은 권력자와 문인들을 사로잡았던 송강 농어의 정체가 정약용을 포함한 조선 학자에 따르면 '꺽정이'라고 하는데 한 번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지금은 보호종이라고 하니 먹을 기회는 그다지 얺겠지만요. 그런데 고려, 조선인들은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는데 중국에서는 왜 이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아주아주 궁금해집니다. 그 외에도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등 여러모로 쓸만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내용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저자가 만주족이 돼지고기를 선호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고기를 썼다는 이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책 다른 부분에서 송나라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건, 주변 강대국인 요와 금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목민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예 먹지도 않았다는 이유로요. 만주족도 말갈, 여진의 후예로 유목민에 가까운데 왜 돼지고기를 선호했을까요?
또 남송에서 찌는 요리가 발달한건 연료가 부족했던 탓이라는 이유는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찌거나 볶거나, 연료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직화'인 경우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중국 요리에 직화 요리가 많지도 않으니까요. 이렇게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모호한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크게 3개 단락으로 구분해서 시대별로 목차를 구성해 놓았는데,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통사적으로 목차를 구성하여 해당 시기에 대해 여러가지 요리들을 일람하도록 하는 구성이 훨씬 보기 좋았을것 같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중국 요리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1/02/27

나는 언제나 옳다 - 길리언 플린 / 김희숙 : 별점 4점

 

나는 언제나 옳다 - 8점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성스러운 종려나무(Spiritual Palms)'라는 호텔에서 일하는 매춘부이다. 손목에 문제가 생겨 남성 고객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하던 수음 테크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호텔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점을 보며 사람들의 기운을 읽는다. 물론 실제로는 신기(神氣)와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익힌 요령으로 손님들의 상황을 짐작해 마음을 읽어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전 버크가 찾아온다. 그녀는 카터후트 메이너 가문의 낡은 저택을 처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낡은 저택은 그녀의 문제투성이 의붓아들, 열다섯 마일즈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퇴마사를 자처하며 귀신이 나온다는 저택을 정화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직접 본 저택과 마일즈의 상태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벽마다 기괴한 핏자국이 나타나고, 마일즈는 나를 볼 때마다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저택에 관해 조사하던 나는 100년 전 카터후크 가문이 이 저택에서 큰아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으로 본 큰아들은 마일즈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마일즈와 수전 모두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나를 찾아줘>>를 쓴 길리언 플린의 단편. 단편 한 편만으로 책이 출간되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드물지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단독 출판되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대박이에요. 저주받은 저택이라는 고딕 호러로 시작해서 사악한 소시오패스와의 두뇌, 심리 게임으로 이어지는 얼개가 탄탄하고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나'가 봉으로 보였던 수전 버크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첫 단계, 기묘하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저택과 저택으로 이사온 뒤 부쩍 더 의붓아들 마일즈와 불화가 심해졌다는 수전 버크의 강박증으로 고딕 호러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 두 번째 단계, 저택에서 과거 잔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범인은 마일즈와 똑같이 생긴 큰 아들이었다는게 드러나며 고딕 호러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세 번째 단계, 마일즈가 '나'에게, 이 모든건 남편이 '나'에게 수음을 받았단걸 복수하려는 수전의 음모라며 같이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멋진 완전 범죄 스릴러로 전환하는 네 번째 단계, 그리고 마일즈가 자기가 '나'를 속였다며 철저하게 '나'를 옭아매고 조종하는 마지막 단계인 심리 스릴러로 이어지는데 각 단계 모두 개별적인 장르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일 뿐 아니라, 항상 앞선 단계를 뒤집는 반전이 등장해서 흥미를 자아냅니다.
자세한 묘사와 여러가지 복선으로 설득력도 높습니다. '나'가 버크 가 가장의 사진을 마지막에 발견하고, 그가 자기 수음 서비스 단골이라는걸 알게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덕분에 마일즈의 거짓말이 설득력을 가지며 '나'가 속아넘어가는 네 번째 단계가 진행되게 되니까요. 위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자칭하던 '나'가 마지막에 마일즈에게서 '봄 냄새'를 맡는다는 장면도 의미심장했고요.
닳고 닳은 '나'와 악마를 구체화한 마일즈라는 주요 캐릭터 묘사도 아주 훌륭하며, 단편인 덕분에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에서 마지막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되짚어 생각하면 문제이기는 합니다. 마일즈가 '나'를 속여서 함께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그 이전 단계에서 '나'의 가방에 토를 하는 등으로 도발할 필요는 없었거든요. '나'가 저택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공포라는 감정도 설명되지 않는 작위적인 요소였고요.
또 결말에서 '나'가 마일즈의 어머니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서 사기를 쳐 거액을 얻는 꿈을 꾸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어요. 현재 상황은 '나'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니까요. 수전의 보석과 마일즈 유괴를 모두 뒤집어 쓸 수 있으니까요. 마일즈가 수전에게 전화했다고는 하는데, 내용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고요. 이래서야 수전은 경찰에 신고할 수 밖에 없잖아요? 조금은 애매한 열린 결말은 호불호가 갈릴 영역이 아닐까 싶어요. 스티븐 킹이라면 '나'가 자는 방으로 마일즈가 침입해서, 저택 살인 사건 내용처럼 난도질하면서 끝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다시 유추해서 떠올린 결과일 뿐, 읽는 내내 긴장감 넘쳤던 좋은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단편이 갖는 힘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2021/02/26

녹나무의 파수꾼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녹나무의 파수꾼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토는 절도 사건으로 체포되었지만, 집안의 어르신이라는 치후네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치후네는 그 대신 레이토에게 '녹나무 파수꾼' 직을 제의하고, 별다른 방법이 없던 레이토는 녹나무 파수꾼을 맡게 된다.
레이토는 파수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제약과 수수께끼 가득한 녹나무 기원 행사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지만, 치후네는 기원 행사는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며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마침, 기원을 하러 온 아버지 사지 도시아키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의심하여 미행해 온 사지 유미와 만난걸 계기로, 녹나무에 얽힌 수수께끼 풀이에 나서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이게 과연 무슨 장르물일까요? 사람의 염원을 담았다가, 그 사람의 혈육에게 전해 준다는 녹나무 설정은 분명 판타지입니다. 그런데 녹나무에 소원을 비는 '기념'이 무엇일까? 사지 도시아키가 만났던 불륜녀는 누구이며 그가 열심히 기념하는건 무엇 때문일까? 치후네 할머니가 녹나무 파수꾼 역할을 레이토에게 맡긴 이유와 그녀가 행해왔던 알 수 없던 행동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다양한 수수께끼가 던져지고, 이를 추리하는 전개는 추리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거든요. 저는 일단, 판타지 설정이 가미된 일상계 추리물로 보고 있습니다. 추리물로 완성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우선,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단서 제공이 상당히 공정합니다. 녹나무 기념 행사가 무엇인지는 레이토가 과거 '기념' 기록 데이터를 전산화하는 작업을 시작한 뒤 접한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레이토는 기념 행사가 가족간 행사이며, 그믐과 보름에 한해 이루어진다는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기념은 가족 중 누군가가 그믐에 염원을 한 걸, 보름에 다른 가족 누군가가 전달받는 행사이며 녹나무는 일종의 '염원 기억 매체'라는걸 레이토가 추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좀 과했던 추리이기는 했습니다만, 충분히 말은 되지요.
또 치후네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었다는건 이런저런 단서 제공과 복선이 많고 확실해서 그야말로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이었어요. 이를 약간 반전처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도 좋았고요, 확실히 추리 소설의 거장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과 흥미를 동시에 갖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외 가족을 증명하기 위해 호적 등본은 부실하다는 말과 유념을 받지 못할걸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오바 소치가 친아들이 아니라는걸 추리하는 등 세세한 추리들도 풍성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사지 도시아키가 기념했던게 무엇인지는 도시아키가 직접 알려주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가 몰래 만났던 여자는 불륜녀가 아니라 이미 죽은 형이 염원하여 남긴 곡을 피아노 연주곡으로 구체화해 주던 피아니스트였다는 전개는 재미있었어요. 귀가 먼 작곡가가 머리 속에 작곡되어 있는 '음악'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녹나무의 특별한 힘이 필요했다는 것도 나름 설득력 있었고요. 사지 도시아키가 처음으로 녹나무에서 형 기쿠오가 남긴 유념 속 음악을 받는 장면은 영상화된다면 꽤나 멋질 것 같아요.

노인 치매에 대해,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해,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들의 결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족과 추억은 소중하다는걸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거든요. 또 작가가 이전에 <<붉은 손가락>>으로 치매에 대해 다룬 방식과는 다르게 이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다카코에게 이미 죽은 기쿠오가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는 공연을 펼치는 클라이막스로 극대화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확실히 완숙해진 티가 났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녹나무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지 가족 이야기와 치후네 할머니에 대한 일상계 추리 영역은 하나로 잘 엮여 읽히지 않았던 구성부터가 그러합니다. 별개 에피소드로 보일 정도였어요.
캐릭터 설정과 배분도 문제입니다. 주인공 레이토는 기본 설정, 그리고 성장기로서의 전개는 너무 뻔하더군요. 치후네와 본의아니게 오래 떨어져 있다가, 급작스럽게 녹나무 파수꾼 역할을 맡는다는 배경 설정이 필요했다는건 이해됩니다. 그러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으로, 도둑질까지 저지르던 말종이라는 스테레오 타입 설정을 가져가야 했을지는 의문이에요.
첫 등장에서는 반쯤 양아치였는데, 작중 시점으로도 얼마 지나지도 않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파수꾼으로 나오는 것도 영 와닿지 않았고요. 제대로 된 성장기로 기능하려면, 좀 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주인공 포지션인 사지 도시아키의 딸 사지 유미의 존재도 애매합니다. 녹나무 기념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녀 없이 레이토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거든요. 오히려 아버지를 엿보는걸 넘어서 도청을 하려하고, 이를 위해 기념에 절대 개입하면 안되는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를 설득하여 한 편으로 만드는 과정은 여러모로 거북하기만 했습니다. 딸이 불륜으로 오해한건 가족 문제일 뿐, 파수꾼 레이토가 도시아키 기념을 엿들은건 명백한 사실이라 도시아키가 항의하면 레이토는 해고되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잖아요? 레이토와의 러브 라인도 딱히 드러나지 않아서 그닥 전개에 필요해 보이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미없이 레이토 혼자 과거 기록 정리를 통해 녹나무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낸 뒤, 사지 도시아키와 대화를 통해 진상을 풀어내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신파성 드라마도 과한 편입니다. 일본 특유의 한 방(?) 전개도 지나쳐서 기쿠오 작곡 결과물을 들려주는 연주회는 괜찮았지만, 치후네 할머니 고문 은퇴 등이 결정되는 임원 회의와 여기서 레이토가 열변을 토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야나기사와 호텔이 살아남는다는 결과는 작위적이었고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괜찮았던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노련하고 경력있는 파수꾼 레이토가 기념하러 온 손님들 고민을 들어주면서 사건을 해결해 주는 일상계 추리물로 그려내는게 더 좋았을 것 같지만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영상화 횟수를 보면 영상화될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데, 사기 기쿠오가 남긴 멜로디가 과연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해집니다.

2021/02/24

추리소설 쓰는 법 -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보성사 : 별점 2.5점

추리소설 쓰는 법 - 6점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보성사

미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발표한 추리소설 작법서. 다른 작법서들처럼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지 않는게 특징입니다.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법, 플롯을 구성하는 법, 스토리 구성법 등 추리 소설을 쓰는데 중요한 요소들을 뽑아 놓기는 했지만, 이를 어떤 원칙에 따라서 소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 작가들이 각자 한 꼭지 씩 맡아서,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 구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원칙대로의 작법서라기 보다는 유명 작가의 비법(?)을 엿볼 수는 있는 일종의 족보 (?)에 가깝습니다.

프레드릭 브라운, 존 D 맥도널드, 렉스 스타우트, 그레고리 맥도널드, 스텐리 엘린, 헬렌 매클로이, 에드워드 D 호크 등 우리나라에도 그 이름이 익히 알려진 유명 작가들이 쓴 각자의 비법을 읽는건 확실히 재미있더군요. 추리 소설을 쓰기위한 요소 외의 정보들도 유용했고요. 작가들에게 보낸 앙케이트 결과를 소개하는 '왜 쓰는가?', '언제 어떤 식으로 집필하는가?'에 대한 내용들과 투고하는 요령 등이 기억에 남네요.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소개해 드리자면, 우선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법'이 있습니다. 로스 맥도널드는 겉으로 보이는 사물을 뒤집어 보는 것부터 플롯을 발전시킨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D 호크는 우연히 생각난 제목에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고요. 로버트 L 피쉬는 트릭을 떠올리는게 가장 중요하며, 장편은 기상천외한 상황 설정에서 시작한다는데 과연 본격작가답습니다. 미리암 알렌 데포드는 신문 스크랩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데 무척 공감되고요. 이외에는 독특한 인물이나 꿈, 배경 설정, 결말, 중심 테마 등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가장 놀랐던건 존 볼의 '24시간 노동', 즉 항상 생각한다는 건데, 과연 유명한 '버질 팁스'의 창조자답습니다! 버질 팁스 시리즈가 정식 출간되면 좋겠네요.

그리고 프레드릭 브라운이 플롯 구성법에 대해 짤막하게 쓴 글도 인상적입니다. '금붕어'라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해서 플롯을 짜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어에서 시작해서 등장인물, 테마, 사건, 배경 등을 차츰 덧붙여 발전시키는 방법인데, 거장답게 깔끔하면서도 재미있는 설명이 돋보였어요.
폴린 블룸이 알려주는, 쓰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결말을 알고 난 뒤 중심부 플롯을 만들라는 스토리 구성법도 유용해 보였습니다. 특히 강조한 '대립'을 스텐리 엘린의 <<배반>>을 예로 들어 설명해 준 것도 좋았어요. 쉽게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짧은 작품 속에 열 개가 넘는 극적 대립이 드러나 있다는게 놀랍더라고요. 이를 위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른건 접어두고 "이 아이디어로부터 등장인물을 심각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직면할 만한 대립이 무엇이며, 뭐가 장애요소인지를 떠올리고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해 보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데이나 라이온 역시 스토리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하는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사례로 나온건 아니지만, 바로 얼마전 읽었던 <<숙명>>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형사가 대기업 사장 살인 사건을 수사하게 되면서, 사건이 어린 시절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정신 지체 여성의 죽음및 어린 시절 라이벌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게 된다."가 되겠네요. 음... 이대로는 영 재미는 없어 보입니다만....

서두는 이야기를 결말까지 고려하고,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지 생각하고 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지적에는 감탄했습니다. 거장은 문장 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는 법이지요.
어떤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게 좋은지에 대한 여러 작가들의 생각, 대화는 액션과 마찬가지라는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설명과 작가들이 각자 소개해주는 여러가지 퇴고 및 수정 방법들도 앞으로 창작 작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 외 시리즈물과 단발물 (스탠드 얼론)의 차이점과 장, 단점에 대한 설명과 왓슨역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등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에 대해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던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입니다. 제가 읽은 책은 1987년 출간된 버젼인데 번역이 정말 엉망이었어요. 지금은 쓰지 않는 용어도 많았고요. 또 이미 30년도 전에 출간된 책이니만큼,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내용들도 제법 됩니다. 아울러 플롯을 짜는 법 등 소설을 쓰는 기본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꼭 '추리 소설'에만 국한된 내용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번역도 좋고 완성도 높은 작법서를 읽는게 나을겁니다. 애써 구해 읽으실만한 책은 아니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제목은 '빵의 역사' 인데, 실제로 담고 있는 내용은 그게 아니라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을 주로 했으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여요.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아.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21/02/14

이름없는 사나이 (결정적 증거 중) - 로드리게스 오토렌기 (1895)

 <<1>>

사무실에 있던 번스 씨에게 심부름꾼 소년이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성함은?"
"없는데요!"
"그럴리가. 그건 이름을 대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이름은 있기 마련이지. 하여튼, 들어오시라고 해."
곧바로 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말했다.
"탐정 번스 님 맞으시죠?"
"네, 제가 번스입니다."
탐정은 대답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손님은 계속했다.
"그게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번스 씨의 눈이 반짝였다. 재미있을 듯한 사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제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제가 누군지 알아내려고요. 다 큰 어른이니 직업이나 가족 등 과거가 있을텐데, 기억이 텅 비어 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렇게 되었더라고요."
"저런."
"그래도 다행히 머리는 또렷한 편이라서요, 명탐정에게 의견을 묻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모로 수소문한 끝에 당신을 찾아오게 된 겁니다."
"매우 재미있군요. 아, 이건 제 관점입니다. 당신에게는 불행한 사건이지요. 하지만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사건들은 이미 많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일단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조만간 기억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올 거에요. 그래도 수수께끼는 빨리 풀어 버리는 게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좀 폐를 끼치겠습니다. 몇 가지 질문에 대답 부탁드립니다."
"네, 뭐든지 괜찮습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당신은 뉴욕에 살고 계십니까?
"전혀 모르겠어요."
"저를 찾아 가라는 말은, 누구로부터 들으셨나요?"
"월도프 호텔의 종업원입니다. 어젯밤에 거기에 묵었거든요."
"제 주소도 호텔 종업원에게 들었겠군요. 여기까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방법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나요?"
"아, 아니요. 신기하네요. 확실히 여기까지 어렵지않게 왔네요. 이건 중요한 사실이지요, 번스 씨?"
"그렇지요. 뉴욕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곳에 살고 계신지 아닌지가 더욱 중요하겠지요. 호텔 숙박부에는 뭐라고 쓰셨었나요?"
"M.J.G, 레밍턴, 시티."
"그렇다면 레밍턴이 당신 이름이겠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종업원이 두 번이나 그 이름으로 불렀는데, 저는 로비를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떤 남자분 한 명이 어깨를 두드리더니 종업원이 부르고 있다고 알려주었죠."
"그냥 지나쳤다...."
"네, '레밍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이름이 아닌 것 같아서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종업원에게 '왜 레밍턴이라고 부르는 거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만, 종업원은 '그렇게 쓰여 있어서요.'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 뒤 종업원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길래,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지요."
"호텔에 짐은 없었나요?"
"하나도요. 가방도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습니까? 편지 같은?"
"찾아보았는데 아무것도 못 없었습니다. 그나마 지갑은 있더군요."
"돈은요?"
"500달러 정도."
번스 씨는 테이블로 돌아앉더니 종잇조각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는 사이 의뢰인은 금으로 된 회중시계를 꺼내 자판을 힐끔 쳐다본 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 찰나 번스 씨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멋진 시계군요. 그런데 좀 특이하게 생겼네요. 제가 오래된 회중시계에 관심이 많거든요."
의뢰인은 순간 어리둥절해 했지만, 회중시계를 넣으며 답했다.
"별로 특이한 건 아닙니다. 평범한 유품일 뿐입니다. 제가 지금 가진 것 중 가장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제 사건 말입니다. 번스 씨, 언제쯤 제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름도 모른채 이렇게 사는 건 정말이지 별로거든요."
"물론 그렇겠지요."
탐정은 말했다.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단서가 전혀 없네요. 결과가 어떻게 하면 될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48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때 쯤이면 뭔가 발견했을 것 같거든요. 모레, 열두 시 정각에 다시 방문해 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그때 제가 누군지만 알려준다면요. 그리고 제가 누군지 알려준다면, 당신은 말 그대로 명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는 일어서서 떠나려 했다. 그 순간 번스 씨는 발로 테이블 아래 단추를 눌렀다. 부하에게 의뢰인을 몰래 미행시키기 위한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번스 씨는 미행 준비가 갖추어지도록 의뢰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실 건가요, 레밍턴 씨? 진짜 이름을 찾을 때까지는 이렇게 불러도 되겠죠?"
"네, 그렇게 하시죠. 48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그래,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네요.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니까요. 센트럴 파크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관광 같은 게 좋지요.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당연히 직업을 얻거나, 장사 같은 걸 할 수야 없겠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상품을 주문했다고 칩시다. 레밍턴이라는 이름으로요. 그렇다면 나중에 진짜 신원이 돌아왔을 때, 사기꾼으로 체포될 수도 있어요."
"오, 그런 건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제 입장은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틀 동안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확실히 가장 안전하겠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약속한 날에 뵙지요. 행운을 빕니다. 혹시라도 빨리 당신 신원을 확인한다면, 호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말과 함께 번스 씨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뢰인이 방을 나설 때까지, 책상 위 종이 조각에 정신이 팔린 척했다. 하지만 의뢰인이 떠나자 곧바로 서랍 속에서 벨이 울렸다. 의뢰인이 건물 밖으로 나갔다는 뜻이었다. 번스 씨는 서둘러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다. 머리 색깔도 바꿔서 번스 씨임을 알아보려면 한참을 바라 보아야 할 정도였다.

번스 씨가 거리에 나왔을 때, 의뢰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번스 씨는 건너편 건물 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파란 펜으로 '북쪽'이라고 쓰여 있었다. 번스 씨는 북쪽으로 향한 뒤, 다음 모퉁이 현관을 조사했다. 그곳에는 '오른쪽'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의뢰인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였다. 번스 씨가 미행에 나설 때 도움이 되도록, 부하에게 미리 알려 놓은 방법이었다. 번스 씨가 두 번째 표시에 도착할 때쯤이면, 부하가 근처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번스 씨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두 블록 정도 나아간 뒤, 쉽게 부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의뢰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미행하기 시작했다.
의뢰인은 번스 씨와 이야기를 나눈 대로,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센트럴파크에 도착한 뒤, 5번가 쪽 문으로 들어가 동물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숭이 산을 관람하는 인파에 섞여 원숭이들을 바라보았다. 번스 씨는 몰래 의뢰인 뒤로 다가가 그의 웃옷 옷자락에서 손수건을 재치 있게 뽑아낸 뒤, 재빠르게 자신의 손수건과 바꿔치기 하였다.


<<2>>
다음날 정오 전, 번스 씨는 서둘러 5번가 호텔 열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쪽에 훌륭한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작은 별실 세 개가 있었다. 별실은 윗부분에 유리가 끼워진 이중문으로 입실할 수 있었다. 유리는 노란 비단 장막으로 장식되었고, 중간에 방 번호가 쓰여 있었다. 보통 별실은 전화실로 사용되곤 했다. 사용자가 원하면 문을 꼭 닫고 외부 소음과 차단된 채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번스씨는 담당자에게 이야기하고 5번 방으로 향했다.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리로이 미첼 씨가 열람실로 들어 왔다. 그는 바쁜 표정으로 서류, 쪽지를 훑어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1이라고 적힌 별실에 들어 갔다. 10분쯤 지나 별실에서 나온 리로이 미첼 씨는 요금을 지불하고 호텔을 나섰다. 번스 씨도 뒤따라 별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번스 씨는 미첼 씨를 뒤쫓는 대신, 열람실 옆문을 통해 23번가로 나왔다. 그곳에서 고가 역을 지나 중심가로 향한 번스 씨는, 20분 뒤 미첼 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하인이 나와 주인은 부재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점심 때에는 귀가하시겠지?"
탐정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미첼 부인은 집에 계신가?"
"안 계십니다."
"로즈 양은?"
"계십니다."
"아! 그럼 기다리지. 명함을 전해 주지 않겠나?"
번스 씨는 호화로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잠시 뒤 미첼 씨의 양녀 로즈 양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아빠가 없어서 죄송해요, 번스 씨"
소녀가 말했다.
"그래도 기다리시면 점심 식사에 맞춰 돌아오실 거에요."
"고마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로즈 양 아버지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재미있는 사건인가요, 번스 씨?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 유감스럽게도 이야기해 드릴 만한게 아닙니다. 며칠 전에 로즈 양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찾아 왔습니다. 어제 우연히 최신형 자전거를 봤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에 최고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미첼 씨가 자전거를 사지 않으셨다면,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알려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아쉽지만, 너무 늦었네요. 아빠는 벌써 자전거를 사버렸거든요."
"정말입니까? 어떤 디자인의 제품인가요?"
"전혀 모르겠지만,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홀로 가시면 돼요. 거기 놓여 있어요."
"아닙니다. 별 의미가 없네요. 미첼 씨가 갖고 싶은 자전거를 발견하고 사셨다면, 제가 구태여 다른 자전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요. 구매를 후회하게 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럴까요?"
"아, 그래도 홀로 내려는가 보고 싶군요. 식당으로 안내해주시겠어요? 미첼 씨가 사냥했다고 자랑한 사슴 박제를 보고 싶어졌거든요. 박제사로부터 돌려받으셨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
두 사람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번스 씨는 사슴 박제와 미첼 씨의 사격 솜씨를 칭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홀에 놓여 있는 자전거를 관찰했다. 그 사이 로즈는 식당의 블라인드를 열고 있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응접실로 돌아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미첼 씨가 돌아오지 않은 탓에, 번스 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떠나면서 로즈 양에게 말했다.
"미첼 씨에게 내일 정오에 제 사무실에서 보자고 전해 주십시오. 꼭이요."


<<3>>
다음 날, 약속 시각에 맞춰 레밍턴 씨는 번스 씨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탐정은 사무실에 있었다. 리로이 미첼 씨는 몇 분 전 막 도착한 참이었다.
"레밍턴 씨에게 들어 오시라고 말해줘."
번스씨가 심부름꾼 소년에게 말했다. 의뢰인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가 미첼 씨를 보고 놀라기 전에, 번스 씨가 말했다.
"미첼 씨, 이쪽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했던 신사분입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티머 J. 골디 씨입니다! 스포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G.J. 모티머로 알려진 단거리 자전거 경주 챔피언이지요. 바로 최근 400m 트랙에서 1분 56초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1마일을 완주했습니다."
번스 씨는 두 손님을 향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첼 씨는 몹시 흥분했으며, 의뢰인은 진짜로 놀라 어안이 벙벙하며 번스 씨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의뢰인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탐정은 대답했다.
"당신의 과거도 자세히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돌아왔다면요."
번스 씨는 미첼 씨를 향해 무언가 짐작된다는 듯 윙크했다. 미첼 씨는 한바탕 폭소를 터트린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게 좋겠어, 골디. 번스 씨는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군."
"하지만 어떻게 알아내셨는지는 꼭 알고 싶네요."
골디 씨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꾸민 수수께끼를 이렇게나 빨리 해결할 수 있었나요?"
"기꺼이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번스 씨가 말했다.
"제일 먼저, 이쪽 신사 레밍턴 씨가 이틀 전에 저를 찾아와서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지요. 저는 듣자마자 의심했습니다. 그래도 레밍턴 씨가 제 의심을 깨닫지 못하도록 노력했어요. 이런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식으로요. 이건 당신이 한 말을 제가 믿는 것 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름 마저 잊어버린 사람이 잊어버린걸 이해한다? 이건 믿기 힘들죠. 저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이름까지 모두 잊어버리는 일은 있겠지만요."
"대단하군, 번스 씨."
미첼 씨가 말했다.
"그렇게 빨리 속임수를 의심하다니, 확실히 매우 날카롭네."
"뭐 그 때는 수상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 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 후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곧 자기가 누군지는 잊어버렸는데, 뉴욕을 기억하고 있다는걸 알아챘습니다. 별다른 안내 없이 이곳에 왔다고 시인했거든요. 이 역시 간과할 수 없었지요."
"기억납니다."
골디 씨가 답했다.
"네, 뉴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죠? 제가 이걸 확신한 건, 센트럴 파크에서 하루를 보낸다고 말한 뒤, 이곳을 나가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센트럴 파크로 향하는 걸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미행했다는 말인가요?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요."
"네, 미행했습니다."
번즈 씨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처음에 당신 뒤를 쫓은 건 제 부하입니다. 센트럴 파크에서는 제가 미행했지만요.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저의 추리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호텔 명부에 M.J.G. 레밍턴이라고 쓰셨다고 하셨지요. 이게 가장 큰 단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잠시 뒤, 당신은 회중시계를 꺼냈었지요. 저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책상 거울을 통해 회중시계 뚜껑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걸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뒤돌아보면서 시계에 관해 물었는데, 당신은 부랴부랴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그냥 평범한, 낡은 유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요?" 
"저런, 골디, 완전히 실수했구먼."
미첼 씨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바보 같은 실수였네요."
골디 씨도 웃었다.
"자 이렇게,"
번스씨가 계속했다.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에 또 두 가지를 알아챘습니다. 첫 번째는 조끼에 붙어 있는 자전거 배지였습니다. 미국 자전거 연맹 기장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지요."
"오!"
미첼 씨가 외쳤다.
"이럴 수가, 골디, 이건 정말이지 완전한 실수라고!"
"배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골디가 말했다.
"하지만"
탐정은 계속했다.
"다리를 꼬고 있을 때, 신발 밑창이 움푹 파인 걸 보았기 때문에 배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당신이 자전거 선수라는걸 추리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그럼 이제 이름과 그 의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정말로 당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면, 호텔 명부에 쓴 이름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는건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러나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에는, 선택한 이름 역시 의도가 있다고 추리했지요."
"오! 재미있는 곳에 접어들었는걸"
미첼 씨가 말했다.
"선택한 이름은 아무리 보아도 묘했어요. M.J.G라고 이니셜 3개를 쓴 게 특히 이상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남자가 그렇게 많은 이니셜을 선택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세 가지 이니셜은 어떤 이유로 선택했을까? 이 세 개의 이니셜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번스 씨가 계속 말했다.
"가명은 보통 본명을 재정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이니셜은 분명히 본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레밍턴이라는 마지막 이름은? 레밍턴사는 총, 재봉틀, 타자기와 함께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여기에 앞서의 배지, 그리고 신발 밑창에서 알아낸 정보를 더해 당신이 자전거 선수라는걸 확신했습니다. 가명의 이니셜로 본명을 택했다면, 이름의 레밍텅도 그만큼 친숙한 단어를 선택한 거지요. 혹시 레밍턴 사 자전거 판매상일 수도 있어서 대화 중에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조언해 보았는데,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곧바로 말씀하시더군요. 그렇다면 확실히 판매상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원에서 손수건을 훔친 끝에 당신의 정체를 확신했습니다. 손수건의 이니셜도 M.J.G였었거든요."
"이런, 자기 이니셜을 손수건에 새겨 놓다니!"
미첼 씨가 외쳤다.
"너무 바보 같잖아! 교활한 범죄자는 될 수 없겠군, 골디."
"아마 그럴 거예요! 물론 슬프지는 않습니다만."
"이쯤에서 저는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번스씨가 계속했다.
"그런데 다음 단계에서 좌절했어요. 미국 자전거 연맹 명단에는 딱 맞는 이름이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이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한마디로 말해 재료가 너무 많아 국물이 엉망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입니다. 손수건이 없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여튼, 다음으로 레밍턴 카탈로그를 구해서 공인 대리인 명단을 찾아보았는데 이것 역시 실패했어요. 하지만 사무실에 돌아와서 부하의 보고를 받고 난 뒤 길이 열렸습니다. 골디 씨의 연기는 좋았지만 공중전화에 들어가 누군가를 호출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하가 전화 교환수에게 뇌물을 주고 정보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런데 5번가 호텔의 별실의 누군가와 통화했다는 것밖에는 알아낼 수 없었어요. 부하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골디 씨가 사전에 전화 상대방과 약속한 시각, 약속한 장소에 전화를 걸어 의논하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이 정오였기 때문에 다음날, 즉 어제입니다만, 저는 같은 시간 조금 전에 5번가 호텔의 별실로 가서 숨어있었습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내용을 엿듣고자 했지만 그건 무리더군요. 별실이 워낙 잘 만들어져 있어서 방음이 완벽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미첼 씨가 룸에 있는 건 확인할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왜?"
"왜냐고요? 당연히 미첼 씨를 보자마자 이 모든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재능을 시험하려고, 기분 전환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걸요. 이를 알아채자마자, 미첼 씨가 치과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곧바로 진상을 파헤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집을 바로 찾아갔던 것이지요. 로즈 양과 수다를 떨려고요. 정보를 캐내기에는 딱 좋더군요."
"아이고, 빌어먹을! 번스 씨"
미첼 씨가 말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이용하다니, 염치도 없구먼!"
"부끄러울 건 없었습니다. 아무튼 잘 됐어요. 현관에서 골디 씨의 자전거를 발견했는데, 짐작대로 레밍턴이더라고요. 번호를 적어서 대리점을 찾아가니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고요. 586번은 정규 레이싱 팀의 일원인 G.J. 모티머가 타는 자전거더군요. 그리고 여기서 모티머의 본명이 모티머 J. 골디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명에 대한 추리가 맞았기에 이 역시 반가운 정보였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는 레이싱 네임으로 성을 바꿔서 사용했기 때문에 아까의 명단에서는 찾아낼 수 없었던 겁니다."
번스 씨가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슬쩍 실례했던 손수건이 없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미국 자전거 연맹 명단에서 G만 찾았었거든요. 손수건만 없었다면 G는 물론, J, M도 찾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곧바로 G.J 모티머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잘했어, 번스 씨"
미첼이 말했다.
"한동안 이름 없는 남자를 연기해 달라고 골디에게 부탁한건 나라네. 자네를 한 방 먹여 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번스 씨가 우리에게 한 방 먹인 것 같구먼. 하지만 만약 내가 주연을 맡았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이렇게 빨리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을 걸세."
"어! 글쎄요"
번스씨는 말했다.
"다음에 한 번 시도해 보시지요"
"그래, 다음에 자네에게 함정을 팔 때는 나를 주역으로 발탁할걸세."
"그거 기대되는군요"
번스 씨가 말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나저나, 이번 게임에서 지셨으니 최소한 저녁은 사셔야겠습니다."
"기꺼이 한턱내겠네"
미첼 씨가 말했다. 골디 씨가 거들었다.
"아닙니다. 진 건 제가 실수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내겠습니다."
"둘이서 함께 내세요"
번스 씨가 외쳤다.
"그보다 빨리 가시죠. 배가 고파졌어요!"
그들은 곧장 델모니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덧 : 아주 오래전 읽었던 단편입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번역을 진행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의역 가득한 엉망인 번역입니다.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이름없는 사나이 (결정적 증거 중) - 로드리게스 오토렌기 (1895) : 별점 3점

2021/02/13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레너드 카수토 / 김재성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10점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사"입니다. 말 그대로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의 역사적 변곡점,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는 문학사 서적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하드보일드의 통로 역할을 한 작품으로 소개된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입니다. 가족과 신앙이 도덕적 삶의 기초이고 중심이었던 19세기 모델에서 산업화, 도시화로 급변한 20세기 초 지극히 미국적인 범죄 행위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전통적 가족 모델이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 대쉴 해밋의 <<몰타의 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신뢰의 결핍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기업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지요. 당시 석유 회사에서 시작된 '트러스트' 체제 등장으로 가족 메타포가 기업 세계로 편입되었고, 기업 관행이 모든걸 지배했던 세계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족 관계는 붕괴하고 이기적 개인들이 가족 유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공감따위는 저버리고 돈만 쫓아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과 신뢰가 위험한 세상에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고, 샘 스페이드가 매로 상징되는 '투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1929년 주식 시장 폭락을 반영하며, 매 조각상이 가짜라는건 투기 역시 환상이라는걸 의미합니다. 광란의 투기 경제에 대한 해밋의 비판적 시각을 잘 알 수 있지요.
또 주목할만한건 '진짜 남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쉴 해밋은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건 정당한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페이드는 직업을 잃을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요. 반대로 부자들은 무르고 기괴하게 여성적입니다. 돈 많은 악당들을 여성화하여 폄하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황 시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은 제임스 M 케인의 <<밀드레드 피어스>>입니다.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가 결합된 작품이지요. 밀드레드는 감상주의에 빠져 완벽한 가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 딸과의 관계가 파괴된 후 술에서 위안을 찾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결말로 가정사는 더 이상 여성 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걸 알려줍니다.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급작스럽게 모든게 변한 탓입니다. 뉴딜은 현대 복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가족이 수행했던 보호 관리 역할을 정부가 맡아 수행했기 때문에 공감과 감성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은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하드보일드 소설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 관료주의가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차지했고요.

대공황 이후 가족은 위협받고, 남성은 남성상의 기본 토대인 가족 부양자로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탄생한게 완벽한 남자 필립 말로입니다. 위협받던 남성상과 파편화된 가족을 구하는 영웅으로, 배트맨과 슈퍼맨 탄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로는 무너진 의뢰인이나 관계자들 가족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감상적이고 선한 영웅이거든요. 이는 구시대 하드보일드 태동기의 냉혹한 회의주의와는 정 반대 모습이에요. 가정이 중심이 되며,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 말로는 더 깊숙이 사건에 개입하고, 더 정서적으로 엮이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기나긴 이별>>로 말로는 일이 아니라 일의 수혜자에게도 충성합니다. 이거야말로 감성적인 부분이지요. 이렇게 1950년대에 과도한 남성상을 지닌 폭력적인 마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영웅으로 변한건 냉전 시기, 강한 미국과 안정된 가정이라는걸 유지하려는 분위기 탓으로 설명됩니다. 가장 끔찍했던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여성의 일탈이었고요. 그 덕분에 이 때 진정한 의미의 '요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순위를 매기자면, 일하고 능력있는 여성도 나쁘지만, 동성애자는 전통적 가족의 대립항이라 훨씬 더 나빴고, 무엇보다도 잠재적 어머니 역할을 고의로 방기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최악 중 최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짐 톰슨은 풍요 속 공포와 우려를 표현했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를 잃은 도덕적 불안을 작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작가 작품 속 주인공들 모두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주의적 공감이 최대의 능력으로 묘사되며, 감상주의를 중산층에서 분리해서 상류층에 국한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주의가 위험하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합니다.

1960년대 들어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더욱 친절해지고, 범인들은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탐정들은 가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자에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정도로요. 이 시기, 로스 맥도널드는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그렸는데, 모자간 결합의 단절을 통해 부모들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걸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반항하는 자녀와 무력한 부모라는 1960년대 세대간 갈등을 극명하게 투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해주는건, 연민, 공동체적 결속과 공감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폭력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 사립 탐정이고요. 이렇게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립 탐정 속성의 변화는 여성 탐정들을 등장시킵니다.
반면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이 된 범인들은 결국 연쇄 살인범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연쇄 살인범 소설의 교과서적 캐릭터와 기본 플롯을 제공한 뒤, 포화상태를 넘어서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의 정신질환 정책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괴물로 변한 뒤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쇄 살인범은 이 대상화 작업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현대 연쇄 살인범 소설까지 큰 흐름을 일람하고 있으며, 흑인 범죄 소설과 같은 특이점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미국 근대사와 범죄 소설의 흐름이 절묘하게 일치하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상세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문제라면 저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이나 탐정 스펜서 시리즈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책에서 소개하는, 제가 읽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할 수 밖에 없지요. 60년대 이후 범죄 소설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별로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장르에 대한 문학사이자 비평서로서 재미와 가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와 범죄 소설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리뷰를 쓰기 어려웠어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기 시작했던게 문제였습니다. 약간은 공부하듯 분석하고 정리해야 내용 요약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뷰로 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건 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입니다....

2021/02/12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더글러스 프레스턴 / 손성화

 

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6점
더글러스 프레스턴 지음, 손성화 옮김/나무의철학

오래전부터 온두라스 밀림 속에 숨겨져 있다고 알려진 '시우다드 블랑카', 즉 백색 도시라 불리는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
정복자 코르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색 도시가 실려있는 다양한 사료 소개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험들부터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특히 미국의 대부호 헤이가 1930년대 미첼헤이스, 1935년 R.S 머레이, 1940년 모드를 고용하여 탐사를 벌였던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사기꾼이었고, 특히 모드는 유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금광을 찾기 위해 탐험에 뛰어들었던 악질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잃어버린 도시 탐험이 시작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율 주행 기술때문에 널리 알려진 '라이다' 기기를 활용했다는 점이었어요. 비행기에 실은 라이다 장치로 조사하려는 장소 스캔을 통해 GPS 정보까지 링크된 완벽한 3D 지도를 만들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실제 밀림을 뚫고 나가는 과정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는데 여러모로 놀라왔습니다. 과거 '인디아나 존스' 등으로 상징되는, 고고학자가 발로 뛰어들어 조금씩 유적의 실체를 벗기고 유물을 발굴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백색 도시 탐사 초반부의 어려움은 발로 뛰는 현지 조사가 아니라 온두라스 정부와 발굴 교섭을 하는 행정 절차였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온두라스 쿠테타로 인해 새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 백색 도시 발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후원했다는 언급도 좀 신선했어요.
백색 도시 실체를 3D 지도로 확인한 뒤, T1 지구라고 부르는 현지 밀림 속으로 들어가 유적을 확인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전직 SAS 장교 출신으로 위험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방송 관계자를 서포트하는 전문가들이 고용되고, 다양한 안전 장치를 거의 완벽하게 확보해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독사를 만나고, 온갖 벌레들에게 습격당하는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지 조사는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프로젝트 리더 스티브 엘킨스가 직접 참여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정글의 법칙>> 보다 조금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백색 도시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며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확실히 '내셔널 지오그래피' 소속 기자다운 느낌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중반부까지를 차지하는 백색 도시 탐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책 서두에 던진 질문,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깜쪽같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는가? 에 대한 답이 설명되는 뒷 부분이 진짜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모스키티아 주민들입니다. 원래 이 지역에 작은 부락을 만들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모스키티아 문명은, 수백 Km 떨어진 마야 도시 코판이 강성해지면서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426년 마야인 케트살마코가 코판을 장악했는데, 이 때 코판 지역 원주민들은 모스키티아 주민들과 동일 어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당연히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 뒤 코판과 모스키티아는 5세기 이후 각자 교류하며 발전해 나갔지만 코판에서 왕족들이 신성을 강조하며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다가 기근이 닥치고, 신성이 무너져 주민들이 반기를 든 탓에 코판은 9세기경 붕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이때부터 모스키티아 문명은 더욱 발전하여 마야 스타일 도시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도시 파괴 후 흩어졌던 코판 주민들 일부가 유입된 덕분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밀림에서도 복합 농경 사회를 일구며 발전한 모스키티아 문명도 1,500년 경 갑자기 몰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서구 사회에서의 전염병 유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색 도시 제단에 남겨진 제물들 형태를 볼 때, 살아남은 주민들이 제물을 바치고 떠난게 분명합니다.

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그대로 놔 두고 도망쳐 버린 이유, 그리고 도시가 저주받았다는 전설이 널리 퍼진 이유는? 전염병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치에 맞습니다. 신세계에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을 들불처럼 퍼트렸고, 이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신세계 주민들은 거의 90%가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충분한 근거가 되고요. 코르테스가 단 500명의 군대로 아스텍 제국을 정복했던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로 전염병 덕분인 셈이니까요.
구세계 주민들은 전염병에 어느정도 내성이 있었는데 신세계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는지도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도 볼거리입니다. 구세계에서는 일찍이 온갖 가축을 키웠고, 밀집한 장소에 모여 살아서 병원균 침입 및 전파가 잦았고,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주어서 유전 저항이 생길 수 있었지만, 신세계에서는 가축을 많이 키우지 않고 넓은 공간에 살아서 상대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총, 균, 쇠>>와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무자비한 구세계 전염병의 습격을 저자가 온두라스에서 걸려온 풍토병 리슈아만편모충증과 연결하여, 우리는 분명 저주받았으며 이렇게 신세계에서 발생한 미지의 전염병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로 글을 끝맺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와 어느정도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꽤나 깊은 울림을 전해 줍니다. 앞으로 어떤 미지의 병원체가 인류를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는데, 남의 일이 아닌 셈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천연 밀림으로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T1 지구가 온두라스 군대와 고고학자들이 머물며 파괴되어 가는 현재를 취재한 내용인데, 이렇게 사람 손 닿지 않은 비경이 훼손된 책임은 명백히 처음 도시를 찾아나선 전문가들에게 있으니까요. 때문에 그들은 저자처럼 훼손되는 숲을 보고 안타까와 하는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고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냥 발굴에 대한 명예만 얻고, 좋은 방송 콘텐츠 제작한걸로 끝내버리는 행동은 지극히 무책임해 보였어요.
하긴, 구세계 출신인 멤버들이 주도한 탐험과 발굴 자체가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망한 나라를 숨겨진 도시라며 다시 찾아와 마지막으로 바친 제물을 끄집어 낸다? 부관참시와 같은 죽은 자를 죽어서까지 모욕하는 행위와 별로 다를게 없지요. 이래서야 발굴에 참여한 구세계 출신 멤버들이 안 좋은 운명을 맞게 되는건 당연해 보여요.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고인능욕(?)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나라 그 민족 후예들이 중심이 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발굴과 조사도 무인 드론이나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무인 로봇개 등 무인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람 손 닿지 않게 이루어지는게 바람직할테고요.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건 물론, 비교적 재미있고, 건질게 많았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온갖 벌레와 독뱀이 사방에 천지라 쉽게 갈 엄두를 내기는 힘든 곳이지만, 제 평생 한 번 정도는 중남미 고대 문명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네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2021/02/08

이글루스에 바랍니다.

제가 이글루스에 블로그를 개설한 날짜는 2003년 12월 7일로 이글루스 블로그 서비스가 2003년 6월에 시작되었으니, 거의 초창기 유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동안 블로그 서비스를 공짜로 거의 17년간 써 온 것에 대해서는 이글루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글루스가 한창 인기있고, 유입자도 많았던 호시절이었던 2010년대 초반 역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뭔가 바꾼다고 해서 이용자가 늘어나고, 조회수와 트래픽이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이용자로서 상실감, 문제점을 느끼지는 않도록 지원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에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건 에디터입니다. 글을 작성해서 올려야 하는 블로그에서 가장 중요한 툴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글루스 에디터는 멋대로 폰트 사이즈를 정해버리는 버그, 링크 경로를 멋대로 http를 한개 더 붙여 오류를 일으키는 버그와 같은 다양한 버그를 자랑합니다. 모바일 웹 버젼으로는 에디터 입력도 제대로 안되고요. 그 외에, 쓰지도 않는 포토로그 버튼이 아직도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가끔 싸이월드 공감 버튼이 표시되는 등 정말 기본적인 수정과 업데이트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여기에 더해 에디터에서 광고 플랫폼도 잘 지원해 주면 좋겠어요. 아마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들은 대부분 구글 애드센스와 같은 광고 플랫폼 도입을 생각하고 있을텐데, 현재 에디터로는 구글 애드센스를 완벽하게 운영할 수 없습니다. 저만해도 크롬에서 쓰면 구글 애드센스 삽입이 불가하며, 기껏 삽입한 광고도 예전 글에서는 때때로 보이지 않는 등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광고 플랫폼 운영만 반자동으로, 제대로 되도록 개편해도, 이용자가 조금은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네요.
마찬가지로 모바일 앱도 지원할거라면 제대로 개발해서 서비스했으면 합니다. 베타라며 나온지 수년이 지나도록 베타라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은 모바일 앱을 설치할 이유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결과물이거든요.

밸리의 인기글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지켜보니 정치 관련 글은 꼬박꼬박, 특히 현재 집권 여당 욕하는 글은 한 번 빼먹지 않고 부지런히 인기글로 올라가더군요. 물론 집권 여당을 욕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조회수가 높아서 그 글이 인기글로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밸리 인기글은 왜 안올라가나요? 제가 주로 이용하는 도서 밸리는 인기글이 선정된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밸리로 카테고리를 구분해 놓았으면, 밸리별로 조회수 높은 글이 자동으로 인기글이 되도록 시스템을 꾸미는게 당연합니다. 밸리 전체를 통틀어 인기글을 뽑기 때문이라면 밸리별로 인기글이 뜨는 기능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도 대충 살펴보니 인기글이 있는 밸리는 손에 꼽네요. 한 때 이글루스의 최대 장점이었던게 밸리인데, 이렇게 망해가니 서글프기까지 하지만 이럴거라면 인기글과 밸리를 아예 구분하는게 맞습니다.
덧붙이자면, 혐오스러운 인기글은 두 번 다시 보지 않도록, 보기 싫은 블로그를 차단하는 기능도 있었으면 합니다. 특정 블로그는 정말이지 썸네일조차 보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추가를 원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백업 기능입니다. 글과 댓글까지 모두 일괄 추출하여 저장하는 형태로 백업했으면 하는데 왜 공식적으로 지원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네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글루스 백업을 위해 개인이 만든 툴들이 몇 개 존재하던데, 저는 아쉽게도 백업에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저처럼 역사가 오래된 사용자라면 누구든 원하는 기능이라 생각합니다. 이 기능을 위해 유료화가 필요하다면, 지불 용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관심있는 연례 행사였던 올해의 블로거는 꾸준히 진행해 주었으면 하고, 줌 인터넷과 연계하여 좋은 글들은 홍보가 좀 되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과 함께 글을 마칩니다. 운영자가 이 글을 볼 것 같지도 않지만...
마침 엊그제 뉴스를 보니, 줌 인터넷에 새로운 대표가 선임되셨더군요. 이글루스는 줌 인터넷 회사 소개에서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새 대표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블로그 서비스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기회를 빌어 뭔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2021/02/07

Q.E.D Season 1 정주행, 내맘대로 Best - part 2

 거의 10년 전, Q.E.D 1권부터 30권 까지 중 베스트 에피소드를 정리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즌 1이 50권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이어서 나머지 31~50권 중 베스트 에피소드를 꼽아봅니다.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도 넘버링이 10을 훌쩍 넘어간 지금 시점에서는 다소 뒤 늦은 감이 있지만요.


<<베스트 5>>
32권 <<매직 & 매직>>
추리마술, '트릭' 이라는 요소가 핵심이라는건 동일하지만, 추리는 트릭을 밝혀야 하는 반면 마술은 트릭을 밝히면 그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잘 드러내는 내용으로, 토마마저 놀라게 만드는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34권 <<모야당>>
두 개의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물. 특히 기발하면서도 독자의 허를 찌르는 첫번째 밀실 트릭이 좋았습니다. 풀장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키게 만든 두 번째 트릭도 주요 단서가 명확하게 남아있을 뿐 아니라 다이빙하는 시간을 특정할 수가 없는 등 문제는 있지만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제목인 '모야당'이라는 전설과 사건 내용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전개가 일품이었던 작품입니다.

35권 <<크리스마스 선물>>

언제나 기본 이상 재미를 보장해 주는 에나리 회장과 추리 동호회가 등장하는 일상계 작품. 토마가 쓴 각본으로 공연되는 연극 <<오각관 살인사건>>에 관련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다른 추리적인 요소 모두 좋았지만 특히 연극이라는 상황에 최적화되어 있는 <<오각관 살인사건>> 속 밀실 트릭이 귀엽고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42권 <에셔호텔>
제목 그대로 에셔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기이한 호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사용된, 에셔의 작품을 응용한 트릭이 좋았습니다.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눈물나는 동기를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옭아매는 토마의 냉정함도 인상적이었고요. Q.E.D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46권 <<순례>>
여러가지 증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낸다는 Q.E.D에 자주 등장하는 전개의 작품. 하지만 일본군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전투를 벌이던 당시를 무대로 해서 시대 상황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완성도 높은 역사 추리물이었습니다. 결말도 깔끔해서 만족스러웠어요.

이렇게 5편이 제가 선정한 후반부 베스트 5입니다. 이전 선정작과 합쳐 저만의 'Q.E.D season 1 (1~50권)의 베스트 에피소드 10'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덧붙여, 아깝게 베스트로 선정되지 못한 가작들도 소개해드립니다.

33권 <<추리소설가 살인사건>>
추리 소설가가 트릭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Nervous Breakdown>>에서도 등장했었던 설정이지요. <>도 '미키가 노래하는 미버'라는 초월 번역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이 작품도 만만치 않아요. 괜찮은 밀실 트릭과 추리 소설가들의 심리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아쉽게도 용의자가 너무 적고, 트릭이 만화적이라는 단점 때문에 살짝 감점했지만, 가작으로는 충분했습니다.

35권 <<두 용의자>>
강도 사건에 대한 추리물. 이야기 자체는 뻔합니다. 하지만 본 사건과 관계없는 과거의 사건을 들먹여 독자를 속이려고 시도하는,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전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가작으로 선정합니다.

38권 <<17>>
일본 수학인 "화산"을 다루고 있는 일종의 가상 역사 수학물로, 추리적인 요소보다 현학적인 측면에서 큰 만족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런 점도 Q.E.D의 핵심 재미 요소라고 할 수 있겠지요.

40권 <<밀실 No.4>>
금고 속 돈을 훔치는 방법에 대한 트릭이 돋보였던 일상계 소품이었던 <<4각관계>>도 좋았지만, 추리 동호회의 에나리가 등장하는 본격물인 <<밀실 No.4>>야 말로 진정한 가작입니다. 밀실 살인 사건 해결을 테마로 한 여행 상품 체험 중 벌어진 진짜 밀실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지요. 여행 상품 속 밀실 트릭은 억지스럽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실제 살인 사건에 사용된, 촛불을 이용한 시간 착오 트릭도 괜찮은 착상이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토마가 용의자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덕분에 가작으로 꼽습니다. 상세 내용은 링크 속 리뷰를 참조하시길.

41권 <<카프의 탑>>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어요. 그러나 논리 퍼즐에 대한 학습 만화로는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학습 만화적인 부분도 Q.E.D만의 볼거리이자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하기에, 가작으로 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