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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순전히 팬심으로 써보는 2022 두산 베어스 예상!

 


2010년대 두산 왕조 주역들의 라스트댄스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향후 2년은 현재 전력에 신인과 군 제대 선수들을 보태어 가면서 시즌에 임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장 중요한 김태형 감독의 계약이 코 앞이기는 한데, 여튼 선수들만 놓고 보면 그래요.
올해 성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풀어냈던 만큼, 다가올 22 시즌에 대한 이야기만 해 보겠습니다.

타선부터 살펴보자면, 박건우 선수는 떠나보냈지만 김재환 선수를 잡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오버페이라는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박건우 선수보다 김재환 선수가 더 필요했던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두산에 가장 부족하고, 그래서 필요한건 장타력이니까요. “홈런왕은 캐딜락을 몰고, 안타왕은 쉐비(포드)를 운전한다. (The home run hitter drives a Cadillac, and the single hitter drives a Chevy or Ford)”는 메이저리그 명언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지요. 박건우 선수의 공백은 대체 1순위인 김인태 선수가 그래도 홈런은 더 많이 쳤고 출루율도 준수한 편이니 일정 수준 메꾸어주는건 기대해 봄 직 합니다. 여기에 정수빈 선수의 반등까지 이루어진다면, 외야는 최소한의 구색은 갖춘 셈이에요.
내야는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졌고, 박계범 선수와 강승호 선수가 각자 포지션 주전을 꿰차고 맞는 첫 시즌이라는 점이 호재입니다. 박건우 선수의 보상 선수 강진성 선수도 기대가 됩니다. 두산에는 1루수 백업 자원이 부족했으니 괜찮은 선택이었어요. 20년 활약이 플루크였다고 하더라도, 21년 성적에서 장타력만 조금 더 회복한다면 보탬이 될 게 확실합니다. 작년 1루수 백업이었던 선수들은, 페르난데스 선수 말고는 처참한 수준이었거든요. 마침 양석환 선수가 부상으로 잠깐 공백을 가질 예정이니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 되었고요. 이렇게 보면 내야진도 나쁘지는 않네요.
결론적으로 스탯티즈 기록으로는 21시즌에 2위를 차지했었던 두산의 팀 타선 wRC+는, 22년에도 비슷한 수준은 유지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선발 투수진은 두 외국인 투수의 +30승 활약과 함께 이영하 선수가 2년간의 부침과 부진을 딛고 다시 토종 3선발 역할을 수행해 줄 경우, 리그 중위권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이 뒤를 2년 연속 10승투수 최원준 선수와 알을 깨고 나오기 직전인 곽빈 선수가 받쳐주니까요. 작년 후반기에 심하게 탈이 났던 미란다 선수가 기량을 회복하고 돌아올지, 새 외국인 투수 스톡이 연착륙 할 수 있는지가 가장 큰 관건이겠지만, 외국인 선수의 불확실성은 다른 팀도 마찬가지니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요.
그러나 계투진과 마무리는 문제입니다. 김강률 선수는 부상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마무리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이닝당 출루허용률이 너무 높아요. 당장은 어쩔 수 없더라도 슬슬 새로운 얼굴 발굴이 필요합니다. 계투진도 이승진 선수의 부진과 박치국 선수의 부상 이탈로 구멍이 뻥 뚫린 상태지요. 홍건희 선수도 작년에 많이 무리했고요. 확실히 1이닝을 맡길 수 있는 투수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베테랑 임창민 선수와 김지용 선수가 보강되기는 했지만,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상무에서 전역한 박신지 선수, 밸런스를 잡았다는 남호 선수 , 신데렐라 최승용 선수 등 영건들도 아직까지는 물음표고요.
그래서 타선과는 다르게 팀 투수력은 작년보다는 소폭 떨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스탯티즈 팀 분석으로는 21시즌 선발진은 4위, 구원 3위의 좋은 성적이었지만 이번에는 전체 종합해서 5위 정도로 봅니다.

타력이 2~3위, 투수력이 5위 정도 수준이라면, 과연 올 시즌도 5위 이상의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 팀의 전력 보강이 탄탄한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22시즌의 스트라이크존 확대라는 큰 변수 때문입니다. 투수진에게는 유리하지만, 이는 10개 구단 모두 마찬가지이니 논할게 없고, 그나마 두산이 상대적 우위를 가졌다 보여지는 타선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게 분명합니다. 두산에서 0.370 이상의 출루율을 가지면서 볼삼비가 1:1 이상인, 소위 '눈야구'가 되는 타자는 주전급 중에서는 페르난데스, 김인태 선수 (아슬아슬하게 박계범 선수) 정도뿐이니까요. 이런 점을 고려하면 평균 성적도 더 하락할 겁니다. 그래서 제 예상 순위는 6위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2년 안에 승부를 볼 생각으로 22시즌은 옥석 가리기와 육성에 집중한 뒤, 2023년을 기약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지명대상 신인들도 괜찮다고 하니까요. 지난 7년간 충분히 달렸으니, 조금 쉬어가도 됩니다.
쉬어가더라도, 올 시즌도 화이팅 허슬~두!

예상 라인업
투수 엔트리 :
선발 (5) : 미란다, 스톡, 이영하, 최원준, 곽빈
계투 (6) : 홍건희, (+김명신, 임창민, 최승용, 이현승, 권휘, 윤명준, 김지용, 이형범, 박정수, 남호, 박신지, 장원준 .... 등 중 5명)
마무리 (1) : 김강률
타선 (9): 정수빈 (중) - 허경민 (3) - 페르난데스 (지) - 김재환 (좌) - 양석환 (1) - 김인태 (우) - 박계범 (유) - 박세혁 (포) - 강승호 (2)
백업 (8) : 내야 - 강진성, 안재석 / 외야 - 조수행, 안권수 / 포수 - 장승현 + 최용제, 오재원, 김재호, 김민혁, 신성현, 권민석... 등 중 3명

순전히 팬심으로 써보는 2021 두산 베어스 예상!

2022/02/27

미스테리아 36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3점

 

미스테리아 36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출간되는 것 자체가 고마운 추리, 장르 문학 전문 계간지 미스테리아 36호. 80년대 대중 문화에 대해 분석하는 특집 때문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잡지 특성 상 '대중 문화'도 추리, 장르 문학을 기반으로 한 부분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인간시장>>과 <<어둠의 자식들>>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80년대 추리문학계의 왕성한 움직임을 '영상화'를 통해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 시선을 잡아 끌었습니다. <<추리극장>>과 <<베스트셀러 극장>>이 많은 한국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영상화했다는 것도 새로왔지만, 뒤이어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무단으로 번안하여 영상화했다는 건 정말 처음 알았거든요. 심지어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을 그냥 무단으로 표절해서 방영했다니 놀랍습니다. 그 외에도<<과다 지불한 중매 사례비>>, <<안개의 깃발>>, <<얼굴>>, <<수사권 외의 조건>>, <<목소리>>, <<조난>>까지 모두 일곱 편이 드라마화되었다는데, 이 중 제대로 원작을 알린건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제작했던 3편 뿐이라니 정말 무식한 시대였네요. 그나마도 제대로 베끼지 못해서, 사건이 시작되는 기본 설정 정도만 따 온 정도에 그쳤다니 아쉽고요. 예를 들어서 <<제로의 초점>>의 핵심은, 어려웠던 시기 몸을 팔았던 과거를 은폐하려 했던 여성의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무단 영상화 버젼에서는 이걸 그냥 '화류계에 몸 담았던 과거' 정도로 퉁치고, 남편을 위해 자살한다는 순애보로 바꾸었다니 이래서야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신파극에 불과해 보입니다. <<수사권 외의 조건>>도 핵심 소재였던 흘러간 유행가가 '그때 그 사람' 이라는건 와 닿는 변주였지만, 역시나 내용은 치정 멜로물이었다고 하고요. 이 책에서 소개된대로,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사회성'과 '역사성'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남는건 개개인의 사연과 이를 포장하는 한국식 신파 밖에는 없게 된 셈입니다. 이런 류의 번안은 생각도 못했는데 한 번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런 반쪽짜리 표절 드라마 이야기 다음에는, 영화를 통해 80년대를 설명하는 글이 이어지는데, 당대의 히트작이었던 <<적도의 꽃>>은 '아파트'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서울 무지개>>는 외설, 에로 영화가 사회물로 포장될 수 있었던 여러가지 배경에 대한 설명이 상세해서 볼 만 했습니다.

80년대 일어나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우범곤 대량 살인 사건'에 대한 글도 좋았습니다.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커졌고,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와 그 후일담까지 모두 알 수 있었던 좋은 르포르타주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쓰여진 사건과 실화 논픽션을 모아 출간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유리 겔러의 초능력 소동을 다룬 글도 빼 놓을 수 없네요. 왜 '초능력'이 인기를 끌었는지를, 10년 전 일본에서의 대 유행과 결합하여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고 있는 덕분이지만, 무엇보다도 저 역시 유리 겔러 쇼를 80년대 TV로 직관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당시 사회에 준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었습니다.

물론 이번에 수록된 기사들이 80년대 사회, 문화 현상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TV 드라마와 영화, 추리 소설 등 굉장히 지엽적인 부분의 분석에 그치고 있는 탓입니다. 그것도 드라마의 경우는, 좋은 부분이 아니라 나쁜 부분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딱히 가치있는 정보는 아니었고요. 제 기억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번안했던 <<열 개의 제웅 인형>>은 노래와 분위기 모두 굉장했던 수작이었는데, 이렇게 성공적이었던 번안물도 함께 소개해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대중 문화, 특히 추리, 장르 문학과 관련하여 80년대를 조망한다는 특집의 기획 의도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좋은 기사들이였습니다. 제 기대에도 역시나 충분히 부합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수록된 단편 3편에 대한 상세 리뷰는 아래에 따로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두의 약점>>
지후는 친구 이하리와 함께, 떡볶이 집 주인 동생 서소하의 부탁으로 한 2학년 여학생을 찾아 나섰다. 부족한 소하의 인상착의 설명에도, 가방이 없었던 등의 디테일에 주목하여 조사한 끝에, 그 여학생이 박재이라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소하가 여학생을 찾은 이유, 그리고 박재이가 멀리 떨어진 식자재 마트 근처에 간 이유 등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는데...

여고생들이 탐문 수사와 추리를 통해 특정 학생을 찾아낸다는 일상계 추리물.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단편 부문 상을 수상했다는 작품과 이어지는 세계관이라는데, 딱히 특별한 설정이 사용되지는 않아서 읽는데 부담은 없었습니다. 지후가 박재이를 찾아내는 과정은 잘 짜여진 추리물로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고요.

그러나 지후와 새아버지, 새언니와의 관계 설정은 비중에 비하면 딱히 의미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 볼 때는 말이지요. 그리고 서소하의 부탁을 지후와 하리가 선뜻 받아들이는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식자재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어묵을 사려던 할아버지의 행동을 목격했을지 모를 여학생을 찾는다는 서소하의 동기 역시, 여학생을 찾기 전에 걱정했던대로 소문이 날 거였다면 이미 났을 거라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오히려 그 여학생인 박재이를 찾아내어 입막음을 부탁했다면,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었을테고요. 또 박재이 입으로 식자재 마트에 간 이유를 털어놓는 결말도 좋은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웠어요. 박재이가 이혼하여 따로 사는 친아빠를 찾아가려 했다는 이유는, 작중에서 추리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어서 공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았던 평작입니다. 연작 단편 중 한 편이라 따로 떼어놓고 읽으면 좀 애매했던 부분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네요. 시리즈 전체를 한 권에 모은 단편집이 출간되면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사라진 궁녀>>
조선 태종 시대의 궁궐을 무대로 한 괴담물. 기승전결이 없고, 제대로 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야기를 시대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궐 내에서 사라진 궁녀가 어디로 갔을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승은을 입어서 다른 신분이 되었다'는건 상당히 기발했지만, 그렇다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 리 없다는 점에서는 문제입니다. 사라진 정의궁주의 궁녀 단지의 행방도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였고요. 단지가 승은을 입어 궁주가 되었다면, 그걸 궐내 궁녀들이 모른다는건 애초에 말이 안되겠지요. 효순 궁주가 병화어였다는 결말도 이게 뭔가 싶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한 편의 이야기로는 완결성도 없고 여러모로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괴담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요.

<<수전 데어의 첫 번째 사건>>
여류 추리 소설가 수전 데어는 친구 크리스타벨의 저택에서 조 브롬펠의 아내 미켈라가 크리스타벨의 동생 랜디를 유혹하는걸 목격했다. 미켈라는 크리스타벨과 결혼을 약속했었던 조 브롬펠을 꼬드겨 결혼했던 적이 있던 악녀였다.
그리고 그날 밤, 조 브롬펠이 살해당했고, 자수정 반지를 끼고 있던 크리스타벨이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범인의 손만 목격했다는 하인 마스가 범인이 '붉은 색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다고 증언했던 탓이었다.


발표 당시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맞먹는 인기를 누렸다는 미뇬 에버하트의 명탐정 수전 데어 시리즈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리즈 첫 작품이기도 하지요. '수전 데어 비긴즈'랄까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추리소설 황금기 단편답지 않게 '트릭'이라는게 등장하지도 않고, 동기는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정하지도 않고, 독자가 풀어낼 수수께끼도 별로 없다는 뜻이지요.
범인 트라이언 웰스가 끼고 있던 반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등장하기는 합니다. 반지 보석 알렉산드라이트는 주광과 야광에서의 색깔이 달라서, 낮에 확인했을 때는 초록색이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건 범인의 의도도 아니었고,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색깔이 바뀐다는 것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차라리 총을 쏠 때 불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어서, 그걸 반지로 착각했다면? 이라는 식으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랜디에게 빌려준 돈 대신, 크리스타벨의 저택을 압류하여 사업상 급한 불을 끌 생각이었던 트라이언 웰스의 동기도 그럴싸 하기는 했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를 계속 숨길 수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아요. 동기만 드러나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을테니, 잘 짜여진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추리 퀴즈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나마도 그렇게 흥미로운 퀴즈는 아니었으니까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2/26

세계를 매혹한 돌 - 윤성원 : 별점 3점

 

세계를 매혹한 돌 - 6점
윤성원 지음/모요사

보석과 주얼리가 주제이기는 한데, 이전에 읽었었던 <<보석 천 개의 유혹>>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석과 주얼리의 유행과 디자인 변천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행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건, 얼마전에 읽었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보석과 주얼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보석과 주얼리는 가격 때문에 사회 지도층이 관련될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단순한 보석, 주얼리 유행 통사가 아닌, 약간 미시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국가별로 달랐던 유행의 이유는 그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베를린 아이언은 철로 만들어진 주얼리로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 당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념품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군자금에 보태기 위해 금 주얼리를 기부하고, 철로 만든 베를린 아이언 주얼리를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 민족의식 발현이라는 속 뜻과 무관하게, 적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1 제정 몰락 후 왕정복고기에 문학, 건축 등 전 분야에서 중세 고딕 문화가 유행했던 탓에 베를린 아이언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왕정복고기에는 고가의 큰 보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현실도 한 몫 했었고요.
반면 영국에서는 19세기에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낀 주얼리가 유행했습니다. 상류층이 19세기의 놀라왔던 예술, 문학, 과학 기술의 진보를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동일시했던 덕분이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갈 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유행이었겠지요. 아울러 이 때 로마, 이집트, 헬레니즘 및 에트루리아 유적 발굴로 고고학적 복고 양식도 함께 유행했다고 합니다.

특정 아이템의 변천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여성의 목을 감싸는 초커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유행이 시작되었었습니다. 색깔도 빨간색이었고요. 허나 19세기에 접어들며 검은색 초커는 매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 등으로 잘 알 수 있고요. 이후 영국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갑상선 수술 흉터를 감추기 위해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여러 줄 세팅된 폭넓은 초커를 착용하기 시작한 뒤, 19세기 말 ~ 20세기 초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네요. 지금의 문신 (타투) 유행과도 조금 비슷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문신은 범죄 등 안 좋은 이미지의 대명사였는데 요새는 인스타그램 셀러브리티 등을 통해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초커의 유행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으로도 잘 알 수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 속 초커 실물은 나치의 압류 이후 사라졌다니 이 역시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 속 일화로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입니다.

이러한 흥미로운 역사 일화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인류 역사상 안정과 번영을 가장 길게 누렸고, 그 어느 때 보다 탐미적이었던 '벨에포크' 시대에서 유행을 선도했던 사교계의 중심지 막심 레스토랑을 무대로 화려함을 뽐냈던 3대 고급 매춘부인 라 벨 오테로, 리안 드 푸지, 에밀리엔 달랴숑의 승부 이야기처럼요. 이 일화와 함께 소개되었던 당시 쥬얼리는 도판만 보아도 그 화려함이 남다른 수준이라 과연 '벨에포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사교계를 주도했던 에스터 가문의 안주인 캐럴라인과 신흥 부호 밴더빌트 가문의 안주인 알바 밴더빌트의 승부와 거래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 외에도 벨에포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와 그녀의 쥬얼리, 영국 메리 왕비가 혼란기에 수집했던 당대 유럽 왕실의 명품 쥬얼리들 이야기도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소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상징과도 같은 '블라디미르 티아라'가 어떻게 영국 왕실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공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셋째 아들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던 마리아 파블로브나 '미첸' 블라디미르 대공작 부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몸을 피하면서 진짜 값비싼 보물을 블라디미르 궁전 비밀 장소에 숨겨두었었는데, 그녀의 친구였던 영국인 예술품 딜러 앨버트 스토퍼드가 노동자로 변장해서 궁에 잠입한 뒤 보물을 꺼내어 런던으로 빼돌렸다는, 혁명과 모험이 모두 들어가있는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를 메리 여왕이 구입하여 지금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식 석상에 착용하고 나오게 되었다는건 참 많은걸 느끼게 해 주고요. Winners takes it at all 인 거겠지요?
그리고 1차대전 후, 아르누보와 벨에포크 복고풍 로코코는 모두 옛 것이 되었고, 미래지향적이고 기하학적인 모티브의 디자인의 유행은 야수파, 입체파 등의 미술사조, 디자인의 바우하우스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네요. 부족해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쥬얼리 디자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인도 마하라자들의 어마무시한 쥬얼리 컬렉션들과 1922년 투탕카멘 발굴을 통한 동서양이 융합된 디자인의 유행과 2차 대전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얼리 유행 테마들 소개도 볼만했습니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이아몬드 제국 드비어스의 탄생과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로 기억되는 성공 공식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광고를 누가 어떻게 집행했는지를 다루는 글은 처음 읽어보기도 했고요.

전문적으로 쓰여진 글로 보기에는 저자의 개인 경험과 개인 생각에 대한 비중이 높으며, 미시사 서적으로 보기에는 쓰여진 내용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도 있으면서 여러가지 자료적인 가치도 높은 책인 덕분입니다. 도판만 보아도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보석, 주얼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2/25

종장 - 니콜라스 블레이크 / 정병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나이젤 스트렌지웨이즈는 출판사 웬함 앤드 제랄딘사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았다. 누군가 교정쇄를 손 대어 도레스비 장군 회고록의 삭제 필요 문구가 그대로 출간되었고, 그 결과 출판사는 고소당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 관계자들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인 결과, 여류작가 밀리센트 마일즈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교정 담당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그녀 소설의 재출간을 반대했던 탓에, 교정쇄에 문제를 일으켜 프로더로오를 제거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마침 그녀는 출판사 안에서, 그것도 프로더로오 바로 옆 사무실을 빌려서 자서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도 충분했다.
그러나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밀리센트 마일즈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그녀가 쓰던 자서전 원고를 수정하고 달아났다. 교정쇄 사건이 살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챈 나이젤은 수사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데...


시인으로, 그리고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작품. 전설의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발간된 고전입니다. 지금은 절판된지 오래라 구하기도 힘들지만, 읽는 것도 만만치않게 힘들었습니다. 오래전 일본어 버젼을 번역한 듯한 낡은 문체와 장황한 묘사, 그리고 세로 쓰기 등이 지루하고 장황한 내용과 결합된 탓입니다.
특히 교정쇄에 손을 댄게 누군지 조사하는 초반부는 그야말로 지루함의 극치였습니다. 중요한 등장인물만 해도 스티븐 프로더로오, 밀리센트 마일즈와 출판사 공동 경영자 3인 -아아더 제랄딘, 리즈 웬함, 바질 라일 -에 밀리센트 마일즈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과 과거 등을 모두 대화를 통해서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끝없는 대화가, 엉망인 번역으로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이어지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정작 교정쇄를 누가 손 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는 이 부분에서는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밀리센트 마일즈를 바질 라일이, 스티븐 프로더러오를 리즈 웬함이 흠모하고 있었다는 등의 인간 관계가 드러나는 것에 그칠 뿐이에요.

다행히 이 초반부를 극복하고, 밀리센트 마일즈가 살해된 다음부터는 꽤 재미있어집니다.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범인이 그녀를 살해하고 자서전 원고를 직접 타자를 쳐서 수정하고 달아나는 장면을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처럼 묘사한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러한 범인의 공작이 모두 경찰에 의해 곧바로 밝혀져 버린다는 전개가 아주 신선했거든요. 독자에게 모두 알려져버린 부분에 분량을 낭비하지 않는건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를 피해자 지문이 타자기에 잘못 찍혀 있다는 등의 단서로 밝혀내는 추리 과정도 볼 만 했고요.

명탐정 나이젤의 수사와 추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경찰은 유산을 노린 밀리센트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습니다. 유산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도 있었고요. 그러나 나이젤은 남겨진 밀리센트 마일즈의 자서전 원고를 읽고, 또 이어지는 대화 중심의 탐문 수사를 통해 아아더 제랄딘과 스티픈 프로더로오 두 명에게 유력한 동기가 있다는걸 알아냅니다. 아아더 제랄딘은 밀리센트 마일즈를 강간하려다 실패했던 옛 과거에 덜미가 잡혀 있었고, 스티븐 프로더러오는 동생이 밀리센트 마일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의 변심으로 불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를 여러가지 단서와 증언을 조합하여 밝혀내는 나이젤의 모습은 명탐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두 명 중 아아더 제랄딘이 더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이게 함정을 파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도 그럴싸했고요.
또 이를 통해 교정쇄에 손을 댄건 스티븐 프로더로오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깔끔합니다. 아들 포올이 학살당하게 만든 총독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는건 누가 봐도 확실한 이유가 되니까요. 이후 프로더로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낸 추리 역시 나쁘지 않습니다. 사건 발생 전 이미 현장을 떠난게 확실했던 나이젤을 제외하면, 진범은 교정쇄를 손 댄 프로더로오일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서 출발해서 프로더로오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걸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든요. 사소했지만 연결 고리가 되는 단서들도 하나, 둘 씩 설명되고요.

이렇게 추리물적인 가치도 높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밀리센트 마일즈라는 독특한 악녀 캐릭터에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동기들만 놓고 보면, 아아더 제랄딘이나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악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보면 모든건 밀리센트 마일즈의 계획이자 음모, 그리고 그녀의 악한 마음으로 생겨난 사건들이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타고난 거짓말장이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능숙했던 거지요. 살해당한 것도 교정쇄를 손댄걸 알고 프로더로오를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몇 개월에 걸쳐 그의 옆에서 일하면서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였던 스티븐 동생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하겠다고 협박했다는건 정말 생각도 못했던 악행이었어요. 성직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지옥이 아니었을까 싶거든요. (물론, 이 아이는 스티븐의 아이로 밝혀지기는 합니다만) 하여튼, 제가 보아왔던 모든 소설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했던 악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템포 자체가 느리다는건 중, 후반부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억지도 많아요. 밀리센트 마일즈를 흠모했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한 바질 라일이 범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건, 빼어난 묘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갖추기는 어려웠습니다. 범인일 수 있는 용의자를 여럿 내세우는건 본격 정통 추리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명에 그쳐야지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을 싸잡아 엮는건 무리였어요. 패륜아 시프리안 그리이드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나이젤을 살해하려고 독을 사용했다는건 아예 설명 자체가 불가능했고요.
스티븐 프로더로오의 유력한 동기 중 하나로 제시되었던, 밀리센트와의 관계가 끝나버리고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것도 저자같은 시인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에게 와 닿는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나이젤이 스티븐 프로더로오를 범인이라고 확신한건, 주요 용의자들 대상으로 소거법을 벌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는 프로더로오가 범인임을 확신하기는 힘들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젤 외의 다른 인물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시프리안 그리이드도 여전히 범인일 수 있으니까요. 증거도 프로더러오의 알리바이가 무의미하다는걸 밝혀낸 정도에 불과했고요.
그래서 마지막에 나이젤이 바질과 프로더로오를 데리고 범인의 살해 수법을 재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궁지에 몰린 프로더로오의 자살로 진상을 드러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이거든요. 작가도 이후 경찰 수사 등의 지루한 설명을 이어나갈 필요도, 의지도 없었을겁니다. 문제는 이는 연극적이면서도 과장된 억지의 정점으로, 탐정의 깜짝쇼라는 클리셰의 저열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모로 해결 부분에서의 나이젤은 전혀 명탐정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 진부하고 지루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도 있고,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번역이 굉장히 아쉬웠는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22/02/22

2021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매년 이맘때쯤 발표되는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 소설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추리 소설을 대상으로, 하우미스터리 회원들이 선정한 결과입니다. 이번에는 32명이 참여했네요.

2021년 1~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위 17표 <영매탐정 조즈카>

2위 16표 <샘 호손 박사의 불가능 사건집>

3위 10표 <마안갑의 살인>

<<영매탐정 조즈카>>는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만, 뭐 이런게 시대의 흐름이겠지요.

마지막으로, 이번의 제 선정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2021년에 출간된 책은 9권 밖에 읽지 못해서 추천은 애매했습니다만, 참가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1. 샘 호손 박사의 불가능 사건집
2. 홍학의 자리
3.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2019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22/02/20

양과자 시간여행 - 나가오 켄지 / 비앤씨월드 : 별점 3점

 

양과자 시간여행 - 6점
나가오 켄지 지음/비앤씨월드

제목 그대로, 여러 양과자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책. 첫 번째의 가토 데 루아에서부터 마지막의 비스킷까지 모두 15 종의 양과자가 소개되고 있는데, 단순 소개 이상의 식문화사 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양과자를 누가 만들었는지?" 뿐 아니라, 그 양과자가 만들어진 이유를 시대적 배경과 상황과 함께 설명해 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4월의 물고기'를 설명하는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물고기 과자가 4월 1일에 만들어진 이유가 예전 유럽 관습과 관련이 있다며 상세하게 알려주거든요.

이 책에 따르면, 봄의 도래를 상징하는 춘분은 예전부터 농경민족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이전 유럽의 책력에서 1년의 시작은 3월 25일이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3월 25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신년을 축하하고 8일째 되는 날인 4월 1일에는 친한 사람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이 있었고요. 그런데 1564년 프랑스 왕인 샤를 9세가 율리우스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도입해 1년의 시작이 1월 1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변해도 오래된 관습은 프랑스인들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변함없이 4월 1일을 진짜 신년인 것처럼 가장하고 계속 축하했습니다. 이렇게 '허위 신년, 거짓 신년을 축하하는 풍습이 세월과 함께 조금씩 변화해 '타인을 속이고 즐기는 풍습으로 변모해서 만우절이 된 것이지요. '4월의 물고기'는 이후 로렌 공과 관련된 설화 등에서 차용되어, 만우절에 물고기 그림을 등에 몰래 붙이는 장난이 생겨난 이후 과자로 진화하였고요. 재미있네요.



달걀이 부활절의 상징이 된 이유도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그것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고요. 원래 부활절 축제는 유대교의 과월제, 게르만 시에 등장하는 봄의 여신에서 유래되었고, 기독교 성립 이후 부활과 결부된 것이라나요. 부활절 토끼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부터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로 알려졌고, 그래서 풍작을 상징해서 부활절 축제와 이어진 겁니다.

뷔슈 드 노엘의 본래 의미는 크리스마스의 뷔슈, 즉 장작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장작을 태우는 풍습은 옛부터 있어 왔습니다. 기독교 이전 '동지'에 태양의 재생을 상징하고, 빛과 온기를 더하기 위해 태웠던게 계속 이어졌던 거지요. 그리고 19세기 후반, 서민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었지만 그들은 장작을 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집은 좁고 설비도 간소했기 때문입니다. 또 뷔슈 드 노엘은 불을 붙인 후 크리스마스가 끝날 때까지 절대 불이 꺼져서는 안돼서, 적어도 3일간은 계속해서 타야만 했는데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계속 타기 위한 큰 장작을 태울 난로도 없었고요. 그래서 뷔슈는 점점 작아지다고, 집에 난로가 없는 집이 늘어남에 따라, 결국 길모퉁이 제과점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뷔슈 드 노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실제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관련된 유래 외에도, 처음 누가 만들었는지?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와 같은 정말 양과자의 발전 과정을 다룬 설명도 자세합니다. '자허토르테'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프란츠 자허가 이 과자를 처음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진실에 대한 추적에서 시작합니다. 프란츠 자허가 메테르니히 공 주방에서 일한건 사실이지만, 만들었다는 시기에는 너무 어렸는데 왜 연도를 속였을까?라는 수수께끼가 불거지고요. 이유는 아들 에두아르트 때문이었습니다. 에두아르트는 호텔 자허를 설립한 뒤 프란츠 자허가 메테르니히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을 퍼트렸습니다. 19세기 후반 약소국이 된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메테르니히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이용하려 했던 겁니다. 저자 말대로, “메테르니히 공이 사랑한 그 초콜릿 케이크야말로 우리 호텔의 스페셜리티입니다. 당신도 꼭 메테르니히 공이 맛본 이 과자를 우리 호텔에서 음미해 보는 건 어떨까요?"라는 권유였지요. 에두아르트의 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자허토르테는 유명한 과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자허 가문의 몰락과, 과자 레시피가 두 개로 분리된 과정도 재미있었어요.



어원에 집중한 설명들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에클레르는 '번개'라는 뜻인데, 저자는 '천천히 먹으면 손과 입 주변이 크림으로 끈적끈적해 지기 때문에 번개처럼 빨리 먹어야 했다', '과자 옆에 번개같은 날카로운 선이 뻗어 있었다', '벨기에에서는 아예 과자 모양이 번개 모양이었다', '과자를 만든 파티시에가 이걸 완성한 순간 창 밖에 번개가 번쩍였고, 그 때 머리에 과자 이름이 번쩍 떠올랐다' 등의 다양한 설을 모두 소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윗면에 캐러멜로 광택을 입힌 에클레르가 원래는 '바통 드 자코브'라는 중세 이후 대항해시대에 사용된 측량 기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바통 드 자코브의 캐러멜이 빛을 받아 번쩍하고 반사되는 모양이 번개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에클레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을 거라는 저자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 외에도 마들렌, 매그 파이 등의 어원 등 다양한 과자의 어원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의 폭은 상당히 넓습니다. 원래 이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밀푀유가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이유까지 탐구할 정도로요. 저자는 가토 나폴리탄이라는 밀푀유를 본뜬 과자에서 나폴레옹이 유래되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근거는 불명확했지만 나름 재미있는 해석이었어요.

도판도 충실한 편입니다. 애플파이 레시피가 적힌 가장 오래된 문헌은 <<캔터베리 이야기>>와 거의 동시대에 나온 요리 해설서 <<폼 오브 퀴리(Forme of Cury)>>였고, 약 200년 후 극작가 로버트 그린의 <<아케이디아>>에 애플파이에 대한 대사가 나온다는 등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료적인 근거도 제법 갖추고 있고요.

파티시에, 혹은 관련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위해 쓴 글인듯 지나치게 전문 용어가 많다는 점, 그리고 모든 양과자 설명에 참고 문헌과 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여러모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졸저 <<콘 비프 샌드위치에 먹는 밤>> 증보판이 나온다면 (설마? 과연?) 써 먹음직한 내용이 많다는게 제일 좋았습니다. 과연 써 먹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2022/02/19

결국 소스 맛 - 은상 : 별점 3점

 

결국 소스 맛 - 6점
은상 지음/북오션

프리랜서 번역가, 작가인 저자가 집에서 요리들을 하면서 떠올린 이야기를 적은 에세이집.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고, 시사적인 화제를 피하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쓰기 원칙을 지켜서 썼다고 합니다. 소스가 주제인 이유는 본인의 요리가 소스로 맛이 좋아졌기 때문이라네요. 소스 때문에 삶이 풍족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요.

음식에서 이런저런 연상을 떠올리고, 음식에 대한 소개와 레시피로 이어지는 구성은 다른 먹부림 에세이들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유머가 가득해서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간히 보이는 재치가 대단하거든요. 감자탕은 단지 시간만 들이면 된다면서 등뼈 핏물 빼는 시간, 초벌로 삶아 내는 시간, 푹 익히는 시간을 <<워킹 데드>>와 <<빅뱅 이론>>, <<저스티스 리그>> 한 편 시간으로 설명하는 식으로요. 저자의 소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음식을 보고 떠올리는 연상들도 독특했습니다. 저자의 직업 특성 때문인 듯 한데, 대표적인건 'LA 북창동 순두부 연신내점'을 보고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떠올렸고, 거기서 직업병처럼 번역의 문제를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참고로 결론은 그 나라 사람에게 맞게끔 바꾸는게 맞다는 것인데 저 역시 동감하는 바입니다.

수록된 레시피도 많을 뿐 아니라, 저자가 집에서 만든 요리들이 주제라서 모두 집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다는게 큰 장점입니다. 바로 오늘 저녁에 시도해 봄직한 요리들도 있을 정도에요. 굴소스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면서 소개하는 중국 요리들처럼요. 고추잡채는 피망 세 개, 파 한 개, 양파 반 개, 잡채용 고기 300그램, 전분 한 스푼, 굴소스가 있으면 만들 수 있답니다. 야채들은 채를 썰고 기름에 파를 볶다가 돼지고기, 그리고 간장이나 맛술을 한 스푼 넣습니다. 어느정도 볶아지면 굴소스 한 스푼, 피망, 양파 채 썬 것을 넣고요. 피망이 숨이 죽으면 전분물을 뿌리고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뿌리면 끝이라고 합니다. 거의 다 집에 있는 재료라서 당장이라도 도전해 보고 싶어 집니다.
또 이 준비물에 게맛살, 버섯 약간, 계란 두 개만 있으면 중국식 계란탕도 만들 수 있다니 대박이에요. 기름에 파를 볶다가 향이 올라올 때 버섯, 양파 등을 굴소스와 같이 볶다가 물을 붓습니다. 간을 보고 싱거우면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고 게맛살을 찢어 넣고 계란도 풀어서 넣고요. 마지막으로 후춧가루와 참기름을 뿌린 뒤 전분물을 넣어 걸쭉하게 만들면 끝! 저 중국식 계란탕 아주 좋아하는데, 다음에 한 번 해 봐야 겠네요.

그 외 저자가 소개하는 소소한 팁들도 기억해 둘 만 했습니다.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케첩 뿐 아니라 우유를 적당량 넣는게 좋다던가, 김치찌개를 끓일때 신김치가 없어서 맛이 나지 않을 때는 타바스코 소스를 넣으면 좋다는 것들입니다. 타바스코 소스는 단맛, 신맛, 짠맛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김치찌개를 잘 보조해 준다는군요. 단, 찌개를 끓이는 도중에 넣어야 특유의 향이 살짝 날아간다고 하네요.

재미도 있고, 기억해 둘 만한 레시피도 많은 좋은 독서였습니다. 물론 정식 레시피로 보기에는 재료나 조리 과정에 대한 소개가 빈약했고, 도판도 부실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정 내 소스들을 망라하고 있지도 않고요. 그러나 이건 요리책은 아니니 큰 단점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2/13

인외 서커스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 별점 2.5점

 

인외 서커스 - 6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커스단 마술사 란도와 동료들은 급작스럽게 흡혈귀들의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흡혈귀들이 그들을 흡혈귀 사냥 조직 컨소시움이 위장한 서커스단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흡혈귀들은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크로바틱 곡예사 기프티와 비스트리 남매, 화살 묘기를 부리는 궁사 슈티, 동물 조련사 레이라, 공중 그네 묘기를 펼치는 리지와 진 컴비, 오토바이 곡예사 쿠와이, 마술사 란도와 조수 아야미, 그리고 피에로 단장까지 10명의 단원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그리즐리가 이끄는 다수의 흡혈귀들과 자기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처절한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중편. <<기억파단자>>처럼 능력자들끼리의 배틀을 다룬 배틀물인데, 한 쪽이 굉장히 불리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흡혈귀들은 뇌나 심장이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상처를 입어도 재생할 수 있거든요. 서두에서 컨소시움 군대 수십명이 강력한 중화기로 무장하고도, 흡혈귀 퀸 비 일당 세 명을 모두 쓰러트리지 못했기에, 읽으면서 서커스 단원들에게 과연 승산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단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펼쳐보이는 것에 더해 그들에게 유리한 서커스 무대 장치 등을 잘 활용하여 승리하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져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쓸데없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 화끈하게 풀어나가는 전개도 매력적이었고요.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란도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슈티가 죽어가면서 쏜 화살에 흡혈귀 위젤이 맞고 죽은 것을 통해 흡혈귀들이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는걸 깨닫고, 자신이 직접 만든 탈출 마술 장치를 이용하여 그리즐리를 없애는데 성공하니까요. 잠깐 관에 갖혔던 그리즐리가 나오는 틈에, 귀로 화살을 쏴서 죽였던 거지요. 진짜 최종 보스 미티아 역시 이 마술 장치로 발을 붙잡은 뒤 공격해서 죽일 수 있었고요. 단순 무식한 배틀이 아니라, 마술 장치와 같은 전개에서의 복선도 잘 활용된 잘 짜여진 두뇌 싸움이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련사 레이라와 키리피시의 대결도 볼 만 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와 함께 공격하면서 키리피시의 눈길을 끌고, 그 틈에 코끼리 점보를 탄 단장이 뒤에서 키리피시를 밟아 없앨 수 있었다는건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헛점을 이용하여 예상치 못했던 일격을 날렸다는 점, 그리고 코끼리 점보의 존재를 계속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공정한 두뇌 싸움의 좋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와 진이 공중 곡예로 캐터피라를 날려버리고, 쿠와이가 이 틈에 오토바이를 추돌시켜 불을 붙인 싸움은 그리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흥미진진하기는 했습니다. 오토바이 공격이 아니라 휘발유를 부어버리는게 진짜 핵심이었다는건 괜찮은 발상이었어요.
뛰어난 곡예사이지만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기에 기프티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는 피해자가 나오는 것도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문제는 다소 뜬금없었던 두 개의 설정입니다. 첫 번째는 숲 속에 홀로 산다는 여행객 도쿠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활약으로 캐터피라와 토타스를 없앨 수 있었지만, '산 속에 혼자 사는 무림 고수 은거 노인' 캐릭터와 다를게 하나 없는 진부한 설정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토타스가 문으로 습격할걸 예측하여 문에 낚싯줄을 걸어 두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고요. 토타스는 할아버지가 뭐 하는지 뻔히 보고 있던 상황이라서, 이렇게 쉽게 함정에 걸린다는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슈티가 흡혈귀 중 최강자인 미티아 였다는게 밝혀지는 일종의 반전 부분입니다. 흡혈귀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주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 부터가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 동안 서커스에서 일해가며 안배한 계획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허술했을 뿐더러, 최초 계획대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망신을 주는 선에서 끝냈어야 했습니다. 미티아 스스로 모레노와 위젤을 죽인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아요. 이렇게 죽일 거였다면 미티아가 직접 그리즐리 패거리를 찾아갔을 때 싹 죽이는게 나았겠지요. 슈티가 한 말 실수에서 란도가 슈티의 정체를 눈치챈다는 것 역시 조금 억지스러웠고요.
기프티가 흡혈귀가 되어 버렸다는 에필로그도 조금 애매했습니다. 이런 여지는 구태여 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분량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킬링타임용 읽을거리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형적인 일본 배틀물 만화를 글로 옮겨 쓴 느낌인데, 만화 버젼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22/02/11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쿠스미 마사유키 / 박정임 : 별점 3점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박정임 옮김/살림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의 먹부림 에세이 모음집. 총 3부 구성인데, 가장 비중이 높은 1부는 혼자서 혼술을 마실 때, 어떤 안주를 직접 만들어 어떤 술과 함께 먹는지에 대해 쓴 글들입니다. 2부는 혼자서 술집에 갈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요. 3부는 술을 다 먹고 마무리로 어떤걸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로 술과 안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술과 안주를 사랑하고,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고집과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술잔이라던가, 차림상의 구성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다츠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혼밥 자작 감행>>의 쇼지 사다오도 그러했는데, 혼술하는 아저씨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먹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전략, 전술'을 고려해서 안배한다는, <<음식의 군사>>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돈가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돈가스를 소금, 간장, 소스 순서로 찍어 먹는다던가, 마지막 두 조각을 미리 소스를 뿌려 절여두었다가 밥이랑 함께 먹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에피소드와 거의 똑같았으니까요. 오뎅을 접시에 담을 때 색감을 고려해서 담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며, 신쥬쿠 카페 베르크의 커피는 <<음식의 군사>>에서도 소개되었던 적이 있고요,

그러나 돈가스 정식을 일종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는건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육류에 전채 (야채절임), 샐러드 (양배추), 수프 (미소시루), 푸짐한 채소 요리 (밥)이 곁들여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왕 코스 요리니 주문할거면 값은 비싸도 히레가스 정식을 주문하자, 맥주를 시킬 때 "이집 맥주는 어디 건가?"하고 브랜드를 물어보면 와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에 이르르면, 이런걸 만화로 선보였다면 아주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요리 에피소드보다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의 길>> 속 추다와 멘치빵을 재현해 먹는 에피소드는 과연 만화가구나! 싶어서 기억에 남는 글이었습니다.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참고로 원작 속 '츄다' 레시피는 소주 3, 사이드 7의 비율입니다. 멘치빵은 아래와 같고요.



기요켄의 슈마이 도시락에 대한 글은 저자의 데뷰작 <<스키야키>>가 떠올라서 반가왔습니다.

혼자 안주를 만드는 이야기 속 레시피도 짤막하지만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가다랑어 안주입니다. 조금 얇게 썬 가다랑어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파를 잘게 다져서 듬뿍 올립니다. 다음은 양하도 잘게 다지고, 차조기나 깻잎 한 장도 채썰어 올립니다. 마지막이 비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늘 대신 편을 썬 마늘장이찌를 올리는겁니다. 생마늘은 맵고, 간 마늘은 느낌이 약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레몬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먹는다는데, 반주로 니혼슈, 조금 비싼 사케가 제격이라네요. 가다랑어 회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방어회로 다음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방어회는 먹다보면 물려서 남기기 십상이니까요.
다른 먹부림 콘텐츠에서 탕두부라고 소개되는 물두부 레시피는 정말 쉬워 보였습니다. 평범한 냄비에 다시마 한 장을 깔고 물을 담아 가스버너 등에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두부를 넣은 뒤 끓고 나면 간장과 가쓰오부시, 다진 파를 섞은 종지에 찍어 먹으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기로는 '조야나베'도 만만치 않아요. 냄비에 물을 붓고 저민 생강 두 조각 정도를 넣은 뒤 끓이다가 큼직하게 썬 양배추, 기다란 삼겹살을 세 토막 낸 걸 넣고 갈은 무와 다진 파를 듬뿍 넣은 아지폰 (감귤 과즙 폰즈 상품명)에 찍어 먹는게 끝입니다. 폰즈가 집에 없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재료나 조리법 모두 너무 쉬워서 당장 해 먹어도 됨직한 수준이네요. 심지어 우러난 국물은 제가 좋아하는 우동 사리를 넣어 먹으면 끝장이라니, 꼭 한 번 해 먹어 봐야 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열한 올리브 오일에 큼직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양배추 볶음, 오니기리를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굽다가 간장과 미림, 미소 양념장을 발라 굽는 오니기리 구이, 간단한 여주 볶음밥, 통조림 참지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 만든 속을 버터 발라 구운 식빵에 끼워 먹는 참치 토스트 (굽지 않은 빵에 머스터드를 바른 뒤 슬라이스 치즈를 깔고, 그 위에 참치 마요네즈를 올려 구워도 맛있다네요) 등 대부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만 소개되고 있어서 아주 반가왔습니다.

뻔한 먹부링 에세이지만 재미도 있고, 레시피들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적당했습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습니다.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았어요.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썼다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이라네요.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 했다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요소였을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아홍도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했고, 그러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도입부는 꽤 흥미로왔지만,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들었습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았던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이 재미있더군요.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이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던 작품입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건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해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좋았어요.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이었을거에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기억에 남네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라왔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했어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고요.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 추리적으로는 SF 추리물이 아니라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가 되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인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지요.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기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그의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 이야기.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가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와주었다.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 (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2/02/05

마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5점

마가 - 8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사건 진상과 진범 등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마는 새아빠의 동생인 삼촌과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재혼한 엄마가 임신 후, 미국 이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삼촌의 별장인 고무로 저택은 오래전에 부자 고무로 도쿠야로부터 받은 선물로, 실종되었던 도쿠야의 손자 히사시를 찾아 주었던 보답이었다. 그러나 별장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장소였다. 별장 뒤 숲에서는 아이들이 여러 명 실종되었었고, 근처 별장에서는 참극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유마는 별장에 머물면서 어린아이 형상의 누군가가 3층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결국 '세이'라는 아이를 만난 뒤, 세이의 꼬드김으로 유마는 혼자 들어가면 안된다는 사사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유마는 한 남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데....


저주받은? 귀신들린? 저택을 무대로 한 호러의 명수 미쓰다 신조의 작품. 제가 읽은 작가의 유사 소재 작품만 해도 <<흉가>>, <<백사당>>, <<사관장>>, <<기관>>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던걸 보면 '명수'라는 호칭이 과한건 아니겠지요.

작품의 특징이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목표하는 독자 연령대가 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영 어덜트 판타지를 연상케하는 표지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이 '잘 모르는 넓은 저택'과 '넓은 숲, 동굴' 에서 펼치는 모험 활극에 가까운 내용, 그리고 피가 튀기는 고어물도 아니고, 아주 무섭지도 않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러 작가로서의 솜씨가 사라진건 아닙니다. 유마가 저택 안을 배회하는 정체 불명의 무언가와 말없이 암투를 벌이는 광경, 이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사 숲과 나무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추격전 등의 묘사는 공포심을 충분히 자극시켜주는 멋진 묘사들이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호러와 범죄, 추리 소설과의 결합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초, 중반까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반전을 통해 '범죄 소설'로 전환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어요. 반전을 통해 삼촌이 유마를 돌보려고 했던게 아니라, 유괴를 했던 거라는게 드러나거든요. '삼촌이 삼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것 같았다'는 유마의 느낌, 밤중에 삼촌이 기묘한 목소리로 유마와 사람들의 이름을 표준어로 말하는 연습을 했던 것등은 모두 공포스러운 연출이라고 여겼었지만, 사실 전부 유괴라는 범죄에 대한 단서였던 겁니다!
별장으로 향할 때 삼촌이 해 주었던 말, 삼촌이 별장에 유마가 머물 줄 알고 미리 책을 사 두었던 이유, 어머니와의 통화 등도 알고보니 모두 단서와 복선이었고요.

고무로 히사시를 비롯한 과거 유괴 사건들도 사실은 삼촌이 일으켰었고, 이 때 사사 숲에 아이를 숨겨두면 아이들이 유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걸 눈치채서 범행을 계획했다는 진상도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10년 전, 고이즈미 마사토는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깔끔했습니다. 유마가 저택에서 만났던건 고이즈미 마사토의 유령이었던 거지요. 유령도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과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유마에게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렇게 등장하는 설정, 소재를 허투루 소비하지 않고 모두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도 돋보였던 장점으로, 유마가 이계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능력 덕분에 삼촌의 공범이었던 유괴범에게 쫓기다가 혼자서 사사 숲 이계 공간에서 무사 귀환할 수 있었으며, 삼촌도 유마를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는걸 명확하게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뜬금없었던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적절히 활용한 셈이라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대가는 다른 법이네요.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 한 줄의 반전, 유마가 옥상에 RC카를 두고 온건 실수가 아니었다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유마에 의해 삼촌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최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여러가지 치밀함을 발휘하여 유마를 옭아매던 삼촌의 최후치고는 너무 허무했으니까요. 세이의 유령이 뭔가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고요.
추리적으로도 호러와의 결합은 잘 하고 있지만, 정교함은 부족한 편입니다. 유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몸값을 받는 부분입니다. 이전 고이즈미 마사토 사건에서는 마사토의 새아버지로부터, 마사토가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으니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유마의 어머니는 그럴리가 없으니, 깜쪽같이 돈을 받아기는 힘들었을거에요. 그러나 관련된 계획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건 유괴물로는 큰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범행 후 삼촌이 유마를 죽이고 사체를 유기했더라도, 관리인이 유마를 목격한 이상 수사가 이루어지면 삼촌이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거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관리인도 살해할 생각이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조카가 유괴당한 후 실종되었는데 그 삼촌은 갑자기 생긴 거액의 돈으로 사업상 위기를 해결했고, 삼촌 소유의 별장이 있는 별장지 관리인이 살해당했다면, 경찰 수사가 시작될 경우 용의선상에 올라 철저한 조사를 받는건 당연했을겁니다. 여러모로 허술한 범죄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이며, 읽다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공포는 덜하지만, 범죄 소설로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분량도 적당하고요. 호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미쓰다 신조 월드 입문자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