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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5

종장 - 니콜라스 블레이크 / 정병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나이젤 스트렌지웨이즈는 출판사 웬함 앤드 제랄딘사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았다. 누군가 교정쇄를 손 대어 도레스비 장군 회고록의 삭제 필요 문구가 그대로 출간되었고, 그 결과 출판사는 고소당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 관계자들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인 결과, 여류작가 밀리센트 마일즈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교정 담당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그녀 소설의 재출간을 반대했던 탓에, 교정쇄에 문제를 일으켜 프로더로오를 제거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마침 그녀는 출판사 안에서, 그것도 프로더로오 바로 옆 사무실을 빌려서 자서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도 충분했다.
그러나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밀리센트 마일즈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그녀가 쓰던 자서전 원고를 수정하고 달아났다. 교정쇄 사건이 살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챈 나이젤은 수사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데...


시인으로, 그리고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작품. 전설의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발간된 고전입니다. 지금은 절판된지 오래라 구하기도 힘들지만, 읽는 것도 만만치않게 힘들었습니다. 오래전 일본어 버젼을 번역한 듯한 낡은 문체와 장황한 묘사, 그리고 세로 쓰기 등이 지루하고 장황한 내용과 결합된 탓입니다.
특히 교정쇄에 손을 댄게 누군지 조사하는 초반부는 그야말로 지루함의 극치였습니다. 중요한 등장인물만 해도 스티븐 프로더로오, 밀리센트 마일즈와 출판사 공동 경영자 3인 -아아더 제랄딘, 리즈 웬함, 바질 라일 -에 밀리센트 마일즈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과 과거 등을 모두 대화를 통해서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끝없는 대화가, 엉망인 번역으로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이어지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정작 교정쇄를 누가 손 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는 이 부분에서는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밀리센트 마일즈를 바질 라일이, 스티븐 프로더러오를 리즈 웬함이 흠모하고 있었다는 등의 인간 관계가 드러나는 것에 그칠 뿐이에요.

다행히 이 초반부를 극복하고, 밀리센트 마일즈가 살해된 다음부터는 꽤 재미있어집니다.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범인이 그녀를 살해하고 자서전 원고를 직접 타자를 쳐서 수정하고 달아나는 장면을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처럼 묘사한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러한 범인의 공작이 모두 경찰에 의해 곧바로 밝혀져 버린다는 전개가 아주 신선했거든요. 독자에게 모두 알려져버린 부분에 분량을 낭비하지 않는건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를 피해자 지문이 타자기에 잘못 찍혀 있다는 등의 단서로 밝혀내는 추리 과정도 볼 만 했고요.

명탐정 나이젤의 수사와 추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경찰은 유산을 노린 밀리센트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습니다. 유산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도 있었고요. 그러나 나이젤은 남겨진 밀리센트 마일즈의 자서전 원고를 읽고, 또 이어지는 대화 중심의 탐문 수사를 통해 아아더 제랄딘과 스티픈 프로더로오 두 명에게 유력한 동기가 있다는걸 알아냅니다. 아아더 제랄딘은 밀리센트 마일즈를 강간하려다 실패했던 옛 과거에 덜미가 잡혀 있었고, 스티븐 프로더러오는 동생이 밀리센트 마일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의 변심으로 불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를 여러가지 단서와 증언을 조합하여 밝혀내는 나이젤의 모습은 명탐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두 명 중 아아더 제랄딘이 더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이게 함정을 파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도 그럴싸했고요.
또 이를 통해 교정쇄에 손을 댄건 스티븐 프로더로오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깔끔합니다. 아들 포올이 학살당하게 만든 총독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는건 누가 봐도 확실한 이유가 되니까요. 이후 프로더로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낸 추리 역시 나쁘지 않습니다. 사건 발생 전 이미 현장을 떠난게 확실했던 나이젤을 제외하면, 진범은 교정쇄를 손 댄 프로더로오일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서 출발해서 프로더로오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걸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든요. 사소했지만 연결 고리가 되는 단서들도 하나, 둘 씩 설명되고요.

이렇게 추리물적인 가치도 높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밀리센트 마일즈라는 독특한 악녀 캐릭터에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동기들만 놓고 보면, 아아더 제랄딘이나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악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보면 모든건 밀리센트 마일즈의 계획이자 음모, 그리고 그녀의 악한 마음으로 생겨난 사건들이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타고난 거짓말장이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능숙했던 거지요. 살해당한 것도 교정쇄를 손댄걸 알고 프로더로오를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몇 개월에 걸쳐 그의 옆에서 일하면서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였던 스티븐 동생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하겠다고 협박했다는건 정말 생각도 못했던 악행이었어요. 성직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지옥이 아니었을까 싶거든요. (물론, 이 아이는 스티븐의 아이로 밝혀지기는 합니다만) 하여튼, 제가 보아왔던 모든 소설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했던 악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템포 자체가 느리다는건 중, 후반부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억지도 많아요. 밀리센트 마일즈를 흠모했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한 바질 라일이 범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건, 빼어난 묘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갖추기는 어려웠습니다. 범인일 수 있는 용의자를 여럿 내세우는건 본격 정통 추리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명에 그쳐야지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을 싸잡아 엮는건 무리였어요. 패륜아 시프리안 그리이드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나이젤을 살해하려고 독을 사용했다는건 아예 설명 자체가 불가능했고요.
스티븐 프로더로오의 유력한 동기 중 하나로 제시되었던, 밀리센트와의 관계가 끝나버리고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것도 저자같은 시인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에게 와 닿는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나이젤이 스티븐 프로더로오를 범인이라고 확신한건, 주요 용의자들 대상으로 소거법을 벌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는 프로더로오가 범인임을 확신하기는 힘들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젤 외의 다른 인물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시프리안 그리이드도 여전히 범인일 수 있으니까요. 증거도 프로더러오의 알리바이가 무의미하다는걸 밝혀낸 정도에 불과했고요.
그래서 마지막에 나이젤이 바질과 프로더로오를 데리고 범인의 살해 수법을 재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궁지에 몰린 프로더로오의 자살로 진상을 드러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이거든요. 작가도 이후 경찰 수사 등의 지루한 설명을 이어나갈 필요도, 의지도 없었을겁니다. 문제는 이는 연극적이면서도 과장된 억지의 정점으로, 탐정의 깜짝쇼라는 클리셰의 저열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모로 해결 부분에서의 나이젤은 전혀 명탐정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 진부하고 지루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도 있고,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번역이 굉장히 아쉬웠는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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