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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금빛 눈의 고양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5점

금빛 눈의 고양이 - 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중간중간에 놓친 권이 있어서 제가 읽은 걸로는 세 권 째네요. 언제나처럼 4편이 아니라 5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작 중 <<열리지 않는 방>>은 굉장했습니다.. <<벙어리 아씨>>도 성내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사건에 대한 진상은 꽤 볼 만 했고요.

그러나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덧붙여진 설정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미지로가 이야기를 몰래 듣는 역할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오치카와 함께 듣고 난 뒤, 관련된 그림까지 그린다는 설정 처럼요. 애초에 오치카가 괴담을 듣게된 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미지로는 부잣집 도련님이자 한량으로 괴담은 재미삼아 들을 뿐이에요. 이래서야 시리즈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심지어 이번 권 결말에서 오치카가 시집을 가게 되어 도미지로가 공식적으로 괴담을 듣는 역할을 물려받게 되는데, 더 이상 시리즈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전 권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들, 소품들이 많아서 별로 무섭거나 섬찟하지도 않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이전부터 반복되어왔던 문제인데, 뻔한 설정이 많고 의외성 부족하다는 단점도 여전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열어서는 안 되는 방>>은 아주 좋으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열어서는 안 되는 방>>
인기밥집 돈부리야의 주인 헤이키치가 흑백의 방을 찾아와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철물상인 미요시아의 막내 아들로 부모님과 3남 3녀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키치가 10살 때 소박맞고 집에 돌아왔던 누님 오유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소금을 끊고 애매하게, 하지만 절실하게 기원한 틈에 요물이 파고 들고 말았다. '행봉신'이라 자칭한 요물은 집 골방에 자리잡은 뒤, 소원을 이루려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가족 일부의 일탈이 시작되고, 행복했던 대가족은 헤이키치를 제외하고 모두 목숨을 잃고 마는데...


악마나 요물이 사람의 욕망을 가지고 논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바로 전편의 <<오쿠라 님>>도 비슷한 설정이었지요. 하지만 <<오쿠라 님>>은 비젠야를 도와준건 맞는 반면, 이 작품의 행봉신은 소원을 빈 사람에게 비참한 말로를 가져다 준다는, 전통적인 재앙신 전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뻔하지만은 않습니다.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행봉신을 통한 소원 성취가 비참한 말로를 맞는 두 가지 이유처럼요. 첫 번째는 '등가교환' 이에요.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하는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간과합니다.
두 번째는 '소원이 애매하다'는걸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장녀 오유가 이혼당한 뒤, 시댁에 빼앗긴 아이를 보고싶다는 소원입니다. 어떻게 보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하나도 없이 그냥 아이를 돌려달라고 빌었고, 행봉신을 집 안에 끌어들인 죄책감에 자살하자 아이가 돌아오게 되었다는 결말이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비열하게 이용해서 무조건 최악의 결과를 만드는 술수에 걸려든 셈이죠. 다른 가족들의 소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니 로또 당첨된 사람들 말로가 좋지 않다는 뉴스가 떠오릅니다. 비슷한 이치인것 같아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게 맞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네요. 하지만 이왕 살 거라면, 막연히 1등을 바라지 말고 1등이 된 뒤 어떻게 할 지 계획을 잘 세워두는게 바람직해 보이고요.

여튼 오랫만에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했던 작품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행봉신에 의한 행복했던 대가족의 파멸 과정은 충분히 섬찟했어요. 에도라는 시대 상황과 소원들을 맞물려 묘사한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설정이 뻔하고 결말이 좀 시시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다 용서가 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벙어리 아씨>>
데릴 사위인 종이 도매상 미노야의 후사노스케가 친모 오세이를 모시고 흑백의 방에 찾아왔다. 오세이는 귀신을 부르는 '몬모 목소리'의 소유자로, 자신이 젊었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몬모 목소리 때문에 고향인 아사히 마을을 떠난 뒤, 이런저런 경험 끝에 영주 측실 딸 가요히메의 요강담당 하녀가 될 수 있었다. 오세이는 성에서 선대 영주의 장자 잇코쿠의 망자와 친해졌고, 잇코쿠가 때문에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잃었다는걸 알게되었다. 그래서 잇코쿠를 둘러 싼 죽음의 진상을 알아낸 뒤, 잇코쿠가 성을 떠나 성불하고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데....


귀신이 잘 꼬이는 <<백귀야행>>의 리쓰를 비롯 (몇 권까지 읽었더라....), '귀신을 부르는 체질'이라는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목소리'가 귀신을 부른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소리는 단순한 설정 수준에 그칩니다. 잇코쿠가 죽은 이유를 알아내고, 성불시키는 과정에서 몬모 목소리의 역할은 별로 없거든요. 오히려 몬모 목소리로 귀신이나 망자, 요괴를 불러내도, 오세이를 도와주는 쪽이라 딱히 저주나 괴로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수호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 이래서야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그래도 잇코쿠의 죽음을 둘러 싼 진상만큼은 재미있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잇코쿠는 선대 영주의 장자이자, 측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실이 아들 구니카즈를 낳자, 성은 잇코쿠파와 구니카즈파로 쪼개져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정실은 에도에 거주하고, 측실은 현지 성에 거주하던 탓이었지요. 그런데 다툼 중 잇코쿠가 갑작스럽게 죽어서 이런저런 의혹을 낳았는데, 알고보니 측실의 아버지이자 잇코쿠의 할아버지 센자에몽이 잇코쿠를 독살했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가문의 충신이자 영주의 오른팔로 성주 대리까지 맡았던 할아버지가 가문의 단결을 위해 손자를 죽인겁니다. 그 뒤 사실을 알게 된 딸도 죽고, 스스로도 할복해 버리고 말았고요.
현재 영주는 이렇게 잇코쿠 죽음과 관계가 있는 구니카즈이기 때문에, 잇코쿠가 성을 떠나야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되찾을 거라는 설정도 꽤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잇코쿠가 성을 벗어나기 위해 '그릇'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오세이가 백방으로 노력해서 초대 영주의 영웅담을 그린 인형극 인형을 써먹는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런데 잇코쿠 사건 이야기는 재미는 있었지만,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어요. 모시는 가문이 중요하다고 해도, 가족보다 소중한건 없을텐데 말이죠. 측실이더라도 손자는 엄연히 영주의 피를 이었으니, 손자 편을 들어 주도권을 갖는게 당연하지 않나요? 주군의 가문이 자기 피붙이보다 중요하다는건 지극히 일본적인 발상이었다 생각됩니다.
또 잇코쿠 사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개도 지루했습니다. 특히 체질 탓에 어린 시절을 외지에서 보낸 오세이의 파란만장한 청춘은, 성에서 일하게 된 상황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한 빌드업에 불과해서 이렇게까지 길게 묘사할 필요는 없었어요. '요괴를 불러오는 목소리를 타고 났기에 고향에서 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귀가 먼 노부부의 하녀로 일하게 되면서 그 분들의 수화를 익혔다. 노부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수화 기술 덕분에 벙어리 공주님이 계신 성의 하녀로 뽑혔다." 가 전부니까요.

아울러 도미지로가 그림을 그린 뒤 인상을 그림에 남긴다는 설정도 이 작품에서 첫 등장하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설정이 덧붙여지는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도미지로가 추가된 것 부터가 별로에요. 첫 등장했을 때는 비젠야를 찾는데 남다른 행동력을 보여주면서 나름 활약했지만, 그 뒤는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면의 방>>
어느날, 소녀 오타네가 괴담 이야기를 하겠다며 미시마야를 찾아왔다가 무례를 범한 끝에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소녀는 공동주택 관리인에게 끌려와서 오치카와 도미지로에게 '가면의 집'에서 겪었던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악의 결정체인 가면을 봉인하여 지키는 저택으로 오타네는 하녀로 고용되었었다. 악인만이 가면의 행동을 보고 들을 수가 있어서 좀도둑 오타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작 석달여만에 오타네는 가면의 꾀임에 넘어가 가면이 도망가는걸 돕고 마는데...

세상에 재앙을 불러 온다는 가면이 쌓여 있는 저택이라는 설정이 신화나 전설을 연상케했던 작품. 그래도 가면을 악당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덕분에 화재가 일어났던 가게 아들과 주변 사람들이 '사람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는 결말도 그럴싸 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재미를 느낄만한 극적 요소는 별로 없었습니다. 가면이 오타네를 유혹해서 도주한 뒤, 화재를 일으켰다는 전개는 예상 가능했거든요. 오히려 가면이 무엇이고 가면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등에 대한 정보는 쏙 빼 놓고 있으며, 가면이 달아날 수 없게 방에 파수꾼을 세워 놓으면 되지 않나? 와 같은, 설정상 헛점이 눈에 더 많이 뜨여서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고, 딱히 에도물일 이유도 없어 보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이한 이야기책>>
다른 무사의 약혼녀와 사랑의 도피를 한 탓에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던 도망 무사 쥬베에는 일류 세책방 잇센도로부터 책 필사를 100냥이라는 거금으로 부탁받았다. 수상했지만 고민 끝에 빚을 갚고 홀로 남은 딸과의 삶을 위햐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쥬베에는 책 필사를 하면서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게 된 뒤, 자주 왕래하던 세책집 효탄고도의 주인에게 딸의 안녕을 부탁하는데....

세책집 효탄고도의 작은 주인 간이치가 흑백의 방에서 들려준 이야기. 여러모로 <<가면의 방>>과 좀 유사합니다. 구멍투성이라는 점에서요. 잇센도가 필사를 맡긴 책의 정체도 알 수 없고, 책 내용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거든요. 간이치가 잇센도 책 필사를 했었고, 덕분에 스스로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고 있다는걸 암시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는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 이야기를 들은 오치카가 간이치와 결혼할 결심을 한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전에 연심을 품고 있다던가 하는 묘사도 없이, 간이치가 남은 수명을 알고 있고, 그래서 뭔가 세상만사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게 드러난 이유의 전부라서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노안'이나, 조금 원숙해 보이는 사람이 오치카 취향이었나....

하여튼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금빛 눈의 고양이>>
오치카 결혼식으로 미시마야는 분주해졌다. 도미지로의 형 이이치로도 파견나갔던 가게에서 겸사겸사 잠깐 돌아왔고, 그는 도미지로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둘이 어렸을 때 겪었던 기묘한 고양이 마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미시마야에서 일할 뻔 했지만, 손을 다쳐서 포기하고 말았던 여성 삯바느질꾼 오킨의 생령이 고양이 마유가 되었었다는 이야기. 도미지로와 미시마야 가족들의 젊은 시절이 그려지는 소품입니다.
그냥 귀여운 고양이로만 남았다면 나름 훈훈한 추억담이었을텐데, 오사토가 낳았던 갓난 아이를 죽일 뻔 했다는 전개로 이야기가 무거워진건 아쉽습니다. 자기 대신 삯바느질 일꾼 자리를 차지했던 오사토에 대한 원망이 쌓였다면 오사토를 직접 노렸어야죠. 갓난아기를 죽이려고 한 건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잖아요.

이 작품의 존재 의미는 도미지로가 흑백의 방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는걸 확정하는 것 뿐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4/25

수의사 헤리엇이 사랑한 동물들 - 제임스 헤리엇 / 김석희 : 별점 3점

수의사 헤리엇이 사랑한 동물들 - 6점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할아버지, 그러니까 저희 아버지가 손녀에게 선물해 준 책입니다. 딸아이가 재밌다고 해서 읽어보았는데, 전체 시리즈에서 가장 마지막 권에 해당하는 작품이더군요. 그래서 시리즈 초반부에 등장했었을, 해리엇이 대학을 졸업한 뒤 어떻게 시골 마을에서 수의사로 일하게 되었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룸메이트들은 누구이며 헬렌과 언제 만나서 어떻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언제 결혼했는지 등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읽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짤막한 이야기 한 편으로 구성된 단편들로 엮여있기 때문입니다. 설정도 해리엇이 시골에서 일하는 수의사라는 것만 알아도 충분했고요.

이야기들도 해리엇이 젊은 시절 수의사 생활하면서 겪었던 경험담들인데, 이 중 수의사답게 동물 환자들이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장면들이 추리물을 방불케 해서 기억에 많이 남네요. 증상과 동물들이 이전에 겪었던 일들, 혹은 바뀐 환경들을 토대로 병명을 알아내기 때문입니다. 칼버트 씨네 송아지가 납중독에 걸린걸 알아내는게 대표적이에요. 주인은 30년간 그런 적이 없었다고 부정하지만, 해리엇 선생은 송아지 우리에 덧댄 널조각에 부슬부슬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는걸 찾아내거든요.
또 나름대로의 반전이 인상적인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술을 마시면 애견을 방치했던 상황에 대한 죄책감이 폭발해 새벽마다 전화로 왕진을 요청하곤 했던 코브 씨 이야기처럼요. 요청으로 새벽 왕진을 수차례 갔지만, 애견 머틀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게 반복되자 헤리언은 왕진 요청을 거부하기로 결심하지요. 그러나 왕진 요청을 거부한 날 머틀은 정말 죽을 뻔 했고, 자다가 머틀의 병이 뭔지 눈치챈 해리엇이 부리나케 달려가 머틀을 겨우 살리게 됩니다. 그런데 머틀이 그렇게 아파보이지 않았고, 해리엇이 주사 한 방에 바로 쾌활해졌기 때문에, 코브 씨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지친 해리엇에게 "밤중에 자네를 성가시게 해서 정말 미안하네. 내가 바보였어. 오늘 밤 머틀이 아무 이상 없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남기거든요. 약간 오 헨리 느낌이 들지 않나요? 뭐, 코브씨도 머틀이 죽을 뻔 했다는건 모르는게 더 나았겠지만요.
이런 류의 목가적인, 시골 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늙어서 필요없어진 암소를 팔았지만, 결국 다시 키우기로 결심하는 데이킨 씨 이야기나 눈 병으로 고생하는 양치기개 미키의 눈 수술을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의뢰하는 이야기 등 훈훈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 외에도 책의 판형, 디자인도 예쁘고, 수록된 삽화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물론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던가, 220여페이지인데 12,000원이 넘는 가격은 조금 부담스럽기는 합니다. 저야 선물받기는 했지만, 선뜻 구입하기는 약간 애매한 가격대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아주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초원의 집>>이 떠오르는, 착하고 성실하며 훈훈한 그런 이야기들이 가득하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시리즈 다른 권도 찾아봐야겠습니다.

2021/04/24

삼귀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5점

삼귀 - 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괴담듣는 아가씨 오치카가 주인공인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시리즈 네 번째 작품. 대충 읽다보니 순서를 건너 뛰었네요. 그래도 읽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살짝 안 읽은 이야기가 소개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괴담 이야기 한 개가 한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원래도 연재물이기도 하고요.
별로 무섭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접해 보았던 설정이 많았다는건 전작과 동일합니다. 그래도 나름의 변형이나 상세한 설정, 묘사가 좋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단, 새로운 등장인물과 함께 시리즈의 큰 변화를 암시하는 마무리는 여러모로 불길합니다. 다음 권에서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해주면 좋겠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읽으시기 전 참고 부탁드립니다.

<<미망의 여관>>
고모리, 오사키, 요노 세 마을은 매년 봄, 마을에서 모시는 신인 아카리님을 깨우는 초롱 축제를 열어왔다. 하지만 영주님이 세살짜리 딸을 잃었다는 이유로 축제를 금지하자, 농사를 위해 축제를 멈출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누시의 손님으로 마을에 머물고 있던 화가 이와이 세키조의 제안을 따르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다. 나누시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유폐시켰던 별채를 초롱으로 만들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와이 세키조의 진짜 계획은 따로 있었다. 그는 죽은 자신의 어린 아들과 아내에 대한 회한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초롱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축제날, 별채에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그림이 어우러져 초롱처럼 밝혀지자 저승과의 문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별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죽은 사람을 돌아오게 만든다는 괴담은 많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돌아온다는 식의 전개가 대부분이고요. 고전 <<원숭이 손>>,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가 대표적입니다. 이 작품도 기본 설정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글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서, 단순한 아류작들과는 수준이 다릅니다. 죽은 사람을 돌아오게 만드려는 이와이 세키조의 계획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실제로 돌아온 뒤 벌어지는 대소동, 그리고 돌아온 망자들을 극락으로 돌려보내는 마무리까지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회한, 애정과 연민이 절절이 묻어나는 에피소드들도 감동적이었고요. '집착하지말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와이의 계획이 '여러 지방에서 지내는 제사를 조사해봤는데,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열심이었다'는 데에서 착안했다는건 좀 이상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제사는 망자를 잘 먹여서 돌려보내는게 목적이니 그럴듯한 착안인건 맞아요. 그런데 이건 죽은 사람, 망자들이 잘 돌아온다는 뜻이잖아요? 이전에 죽은 사람의 그림을 아무리 열심히 그려봤자, 현실 세계와 맞닿아 있지 않으면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았는다는 이야기와는 정반대인거지요. 이 말 때문에 3개의 마을을 동원해가면서, 마을 축제급으로 애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아카리 님의 신통력이 뭔가 작용했다는 식으로 조금 설득력을 갖추어 주었더라면 완벽했을텐데 아쉽더군요. 작품에서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망자들을 불러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일 뿐이에요. 망자들에게 저승으로 가는 통행증을 주는걸로 만사해결되는 결말도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한건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 만큼은 확실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식객 히다루가미>>
후사고로는 십년만에 방문했던 고향에서 에도로 돌아오는 길에서 아귀 히다루가미에게 씌워졌다. 그 뒤 히다루가미에게 먹을걸 주기 위해 과식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히다루가미는 중요한 손님을 끌어들이는 능력으로 후사고로가 도시락 장사로 성공하도록 도왔고, 후사고로는 '다루미야'라는 도시락 가게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과식으로 히다루가미가 살이 찐 탓에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다루미야는 여름에는 가게를 접고 휴식 기간을 갖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십년 뒤, 다시 후사고로가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히다루가미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장례식에서 들었던 스님의 독경 탓이었으리라...


열심히 일하면 도깨비도 도와줘서 복이 온다는 전래 동화같은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괴담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더라고요. 후사고로가 도시락 가게 다루미야의 주인인 덕분에, 여러가지 요리들이 등장해서 즐거웠습니다.
이야기도 뻔하지만, 히다루가미가 살이 쪄서 집이 무너질뻔하는 등 위기를 불러와서 '다이어트'를 위해 가게를 쉰다는 설정은 조금 특이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좀 극단적이다 싶기는 했습니다만, 한번 뭔가를 한다면 극단적으로 하는게 에도 마인드?라는 생각도 드네요.
소품같지만 여러 볼거리가 많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삼귀>>
구리야마 번의 에도 가로였던 무라이 세이자에몬이 오치카를 찾아와 대략 이십여년전, 그가 겪었던 괴상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죗값으로 깊은 산 속 호라가모리 마을 산지를 맡았을 때의 일이었다. 살기 힘든 호라가모리 마을은 위, 아래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이유는 마을에서 수습하기 어려운 환자를 솎아낼 때, 다른 마을 손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느 날 부터, '오니'가 나타나 솎아내기를 맡게 되었다.
동료 산지기 스가의 아내와 아이가 솎아내기를 당한 뒤, 무라이와 스가는 오니를 쫓게 되는데...


무라이가 산지기가 되기 전 서두는 장황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구리야마 번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은 특히 과했고요.
다행히 진짜 괴담인 호라가모리 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윗 마을과 아랫 마을로 나뉜 이유가 섬뜩하더군요. 기근이 닥친 마을에서 아이들을 잡아 먹기로 했는데, 자기 아이는 잡아 먹을 수 없어서 나무 상자에 넣고 교환했다는 중국 괴담이 떠올랐어요.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 죽음을 도맡는 '처형인'이 있는게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단지 입을 줄이는 정도의 소극적인 방법으로 끈질기게 가혹한 삶을 이어나간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오니의 정체가 설명되지 않은건 아쉬웠습니다. 단지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산의 분노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습니다. 오니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윗 마을에 환자가 생기면 아랫 마을 촌장이 가서 죽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계속 이어졌을겁니다. 오니는 아무런 댓가 없이 촌장들의 죄책감만 줄여준 셈으로, 오니는 그나마 마을이 유지되도록 도운, 유익한 지박령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형편좋은 요물이 있을리 없지요. 마을 사람들의 원념이 모인 결정체였다던가 같은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무라이와 스가가 오니를 추격하다가 마지막에 오니가 빈 껍데기라는걸 알게 되는 정도에 그칩니다. 무라이가 '이 슬픔과 분노를 어찌할까'라고 생각하는건 그냥 멋드러질 뿐, 설명되는건 없어요. 오니가 뭔가 이유라도 외치며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라도 - 사라졌다면 더 나았을텐데 말이죠.

호라가모리 마을 묘사가 탁월하고, 윗 마을과 아랫 마을에 얽힌 비밀에 대한 진상은 흥미로왔지만 오니의 정체 등 상세 설정이 개운하게 설명되지 않는 단점은 큽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오쿠라님>>
흑백의 방에 찾아온 손님은 향료가게 비젠야 미녀 3자매의 막내 오우메였다. 그녀는 오치카에게 자기 가게에서 모시는 수호신 오쿠라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오쿠라님은 가게의 안녕을 돕고, 화재와 같은 재앙에서 가게를 지키며 가게 여주인과 딸들이 모두 미인이도록 도와주는 신이었다. 그러나 큰 재앙에서 가게를 지킨 뒤에는 딸 들 중에서 한 명이 오쿠라님이 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그 말대로 오우메가 15세가 되었을 때, 큰 화재에서 비젠야가 무사한 뒤 오우메의 언니 오기쿠가 새로운 오쿠라님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집의 수호신이 사실은 신이 아니라 불행을 가져다 주는 요물이었다는 괴담은 많습니다.
그래도 설득력있게 수호신을 그려낸 묘사도 좋고, '수호신'의 존재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젠야의 오쿠라님은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거든요. 집을 지켜준건 분명하니까요. 이를 위해 오쿠라님이 딸 중 한 명이라는 진상도 으스스했는데, 생각해보면 딸 중의 한 명을 무조건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대에 걸쳐 큰 재앙이 닥쳤을 때 바치는 정도라면 꽤 합리적인 거래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간의 설정 변주 외에 재미를 느낄만한 부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말도 뻔했고요. 이 이야기를 해 준 오우에는 사실 '생령'이 찾아온 거라는 진상도 별로였습니다.
비젠야의 마지막 데릴사위가 딸을 잃는건 참을 수 없다며 스스로 오쿠라님의 가호를 끊어버린 결과도 영 납득이 되지 않더군요. 행동 자체는 이해가 되지만, 문제는 비호를 잃자 그간의 재난들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와 비젠야가 삽시간에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는데, 이런 기본적인 정보가 비젠야에서는 전승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이런 점에서는 오쿠라님 괴담보다는 미시마야의 둘째 도미지로와 세책점 후계자 간이치를 비중있게 등장시키기 위한 발판 역할의 작품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문제는 새 등장인물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특히 한량으로 재미삼아 괴담에 관심을 가지는 도미지로는 최악입니다. 괴담 이야기는 단순히 재미로 접근할건 아닌데 말이죠. 그나마 간이치가 과자 종류를 맞출 때 추리력을 살짝 선보이는건 인상적이었지만, 오우메와 비젠야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는 딱히 두드러지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새로운 인물들과는 반대로 반대로 이전에 오치카 상대역으로 보였던 아오노 리이치로가 결혼과 귀향이라는 이유로 퇴장하는 결말도 급작스러워서 당황스럽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이었습니다.

2021/04/23

튀김의 발견 - 임두원 : 별점 2점

튀김의 발견 - 4점
임두원 지음/부키

국내 과학자가 쓴 튀김에 대한 인문학, 과학, 교양서적. 박찬일 셰프 등의 호평이 인상적이라 눈여겨보던 차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튀김의 역사와 대표적인 튀김 요리에 대한 소개로 시작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튀김 요리가 처음 등장한 문헌은 로마 요리서 <<요리에 대하여>>입니다. 유명했던 전설의 미식가 아피시우스가 썼다고 알려진, 1세기 경 편찬되었을 걸로 추정되는 책이죠. 여기에 '알리테르 둘키아 (또 다른 달콤한 요리)'라는 튀김 요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밀가루와 우유로 만든 도우를 올리브유에 튀겨낸 뒤 꿀을 듬뿍 바르는 요리로, 지금의 프렌치 토스트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튀김의 핵심 재료였던 기름이 비쌌던 탓에 튀김이 대중화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3세기 이후부터 많은 튀김 요리가 등장한다고 하니, 거의 천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셈이죠. 그 뒤에는 대표적인 튀김 요리로 덴푸라, 돈카츠, 라면, 프라이드 치킨, 프렌치프라이, 피시앤칩스, 탕수육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내용은 재미있었고, 특히 피시앤칩스에 대한 소개는 괜찮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이 때 스페인 전통 튀김 요리 '페스카도 프리토'가 전파된게 그 유래라고 하네요. 식초를 뿌리는게 중요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2부 격인 튀김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튀김의 핵심인 '겉바속촉'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예로 들자면, 이는 '수분 배출이 유리한 구조' 와 '육즙의 유출을 막는' 두가지 기법이 동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기름에 튀길 때 수분들이 기화하면서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가 팽창하여 부풀어 오르고, 무수히 많은 작은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튀김옷의 글루텐과 전분은 재료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수행하고요. 그래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요리가 탄생하는 겁니다! 돈카츠가 맛있는 이유는 겉바속촉을 강화했기 때문이에요. 돈카츠는 보호막용 밀가루옷, 튀김옷에 고소한 맛을 더하고 빵가루를 붙여주는 달걀옷, 마지막으로 바삭거리는 식감을 강화하는 빵가루 옷을 입혀 튀겨내니까요. 책에서 설명한대로 '묻고 더블로 가는' 조리법입니다. 튀김이 왜 맛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실려 있습니다. 고온에 의한 마이야르 반응, 그리고 캐러멜화 반응 때문이라네요. 겉바속촉에 마이야르와 캐러멜화 반응이라니, 이건 정말 반칙입니다. 이래서야 맛이 없을 수가 없겠죠.
마지막 3부로 기름, 튀김옷, 튀김기의 종류가 설명되며 책은 마무리 됩니다. 항목별 분류와 차이점에 대한 소개가 아주 상세합니다. 튀김업 입문자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모두 3부에 걸쳐 튀김에 대해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터치하고 있는데, 솔직히 기대에 미치진 못했습니다. 광고에 낚인 기분이에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책에서 접할 수 있었던 내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튀김 요리 소개가 그러합니다. 대부분 다른 요리 관련 서적에서 한 번 이상 접했던 요리들이거든요. 총 7종의 요리 중 3종이 일본 요리라는 것도 잘못된 배분이 아닌가 싶고요. 우리나라에서 즐겨 먹는 튀김 요리를 소개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분식집 튀김의 유래에 대해서 파헤쳐주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튀김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설명은 <<맛있는 요리에는 과학이 있다>>에서, 글루텐 때문에 튀김옷을 많이 반죽하면 안되고, 차게 놔 두어야 한다는 건 <<맛의 달인>>에서, 프렌치 프라이는 <<오무라이스 잼잼>>에서, 그 외의 다른 소재들도 다양한 많은 작품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목차와 설명에서 정리가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쉽게 쓰여진 듯 하지만 읽다보면 뭔가 두서가 없다고나 할까요? 반대로 전문적인 부분은 너무 전문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이 책만 읽는다면 나름의 가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요리 관련 전문 서적을 많이 읽은 분이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21/04/18

만화로 보는 99가지 발명품 이야기 - 토마스 윙글레스키 / 21세기북스 : 별점 1.5점

 

만화로 보는 99가지 발명품 이야기 - 4점
토마스 윙글레스키/21세기북스

제목 그대로 만화로 보는 99가지 발명품 이야기입니다. 만화라고는 해도 일러스트에 가깝습니다. 만화적인 이야기 전개가 있다기 보다는 3~4컷 정도로 발명품 소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최대한 재미있게, 요약해서 정보를 알려주려고 하는 노력은 돋보입니다. 몇 가지 소개된,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반가왔습니다. '유리불기'는 지금도 기원전 페니키아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던가, '요요'가 필리핀어라는 이야기, 손전등이 '플래시 (깜빡이)'라고 불리게 된 건 첫 손전등이 배터리 문제로 5분밖에 켜 놓지를 못해서 껐다 켰다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블루진의 어원이 프랑스어 '블루 드 제네 (제네바의 우울)' 이라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림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당연하게도 정보의 깊이도 얕습니다. 저렴한 e-book으로 읽었는데도 가성비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클 정도로요. 정말로 읽을게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구태여 집어들 이유가 없는 책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4/17

안주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5점

안주 - 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에도 간다에 있는 미시마야는 장신구와 주머니를 파는 주머니 가게로 멋스러운 주머니 외에도,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주인 이헤에가 최근에 재미를 붙인 특별한 도락으로, 실제로 있었던 괴담을 모으는 괴담 대회이다. 이야기를 듣는 건 이헤에의 조카딸 오치카로, 그녀는 약혼자를 소꿉친구에게 잃은 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숙부가 운영하는 주머니 가게에 '예절 견습'이라는 명목으로 맡겨진 소녀였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 한 두어권 읽기는 했지만 딱히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우연찮게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게 전작이 있는 이야기더군요. 오치카가 겪었던 이전 사건이 계속 인용되더라고요. 그 외에도 이야기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다행히 따로 읽어도 무방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고는 조금 달랐습니다. 별로 무섭지는 않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괴담'이 '무서운 이야기'라고 잘못 생각한 탓입니다. 사실 '괴담'의 '괴 (怪)'는 괴이하다는 뜻이지요. 괴담도 '괴상한 이야기'라는 뜻이고요. 등장하는 이야기들 모두 괴이하다는 점에서 괴담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모든 여성 이름들 앞에 '오'가 붙어서 혼란스러운 것과는 별개로요. 또 <<으르렁거리는 부처>> 외에는 모두 지나치게 평이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기는 해요. <<달아나는 물>>은 심지어 뻔하기까지 했고요.

그래도 괴이함이 에도라는 공간과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글 솜씨로 결합되어 뿜어내는 독특함은 마음에 들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편도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각 수록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달아나는 물>>
오래전 마을을 보호하는 신으로 숭배받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찬밥 신세가 되어 허물어지는 신사에 봉인되었던 뱀신 오히데리는 우연히 만난 마을 소년 헤이타의 도움으로 봉인에서 풀려난다. 헤이타에게 씌워져 마을에 돌아온 뒤, 마을 물을 마르게 하는복수를 벌이자, 마을 고노기의 쇼야 (마을 사무를 맡아보는, 일종의 면장 직무)는 소년을 에도로 보내 버린다. 에도에서도 마찬가지 소동을 일으키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 오치카가 살뜰히 보살펴서 에도에 무사히 적응한다. 그리고 헤이타는 물을 좋아하는 오히데리를 위해 소년은 뱃사공이 될 결심을 한다.

오래된 무언가에 깃든 요괴가 속박에서 해방되어, 누군가에게 씌워진다는 이야기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알라딘>> 부터가 그런 이야기지요.
천진난만하면서도 의리있는 주인공 소년, 본체는 뱀이지만 귀여운 소녀인 요괴라는 조합도 전형적인 소년 만화스러운 설정이고요. 훈훈한 전개와 결말 역시 소년 만화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아동용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요.

뱀 요괴가 신이 되었다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 이유에 대한 설정은 탄탄하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 에도라는 시공간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
미시마야 이웃인 바늘상 스미요시가에는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혼인하지 못한 고명딸 오우메가 있었다. 그녀가 시집을 간 뒤, 그녀가 왜 시집을 늦게까지 가지 못했으며 결혼식날 있었던 이런저런 기묘한 일들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그녀의 어머니 오미치가 이야기해 주기 위해 '흑백의 방'을 찾아온다.

오미치 말에 따르면, 오우에가 시집을 늦게 간 건 그녀의 쌍둥이 자매 오하나가 병사한 뒤. 쌍둥이를 싫어했던 할머니의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오우메 혼자서 무언가를 누리게 되면 저주를 받기 때문에, 죽은 오하나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돌보았고, 그래도 오우메가 혼자 이득을 얻는게 있다면 오하나 인형에 바늘이 꽂히고, 오우에는 지독한 습진을 앓아 왔는데 결혼은 혼자서 이득을 얻으니, 도무지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저주였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핵심인 '상인은 예로부터 쌍둥이를 싫어한다'라는 말부터 이해 불가였어요. 친할머니가 이 말 때문에 쌍둥이와 며느리를 저주했다는 것 역시도 납득할 수 없었고요. 에도 시대 일본 정서가 이랬던건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인형에 바늘을 꽂은건 사람이었다는 진상도 와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에요. 친딸이지만 강제로 동생 집에 딸을 보내고, 자기들은 인형과 함께 살며 재산까지 나눈 다에몬 부부, 친딸처럼 키워 온 양녀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센에몬 부부 사이에 알력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오하나 인형에 바늘을 꽂는 형태로 표출했다는건 비약이 심했습니다.
또 두 형제가 집을 합치려고 할 때 처음으로 저주가 발생했으니, 바늘을 꽂은 건 둘째 부부여야 말이 됩니다. 양녀를 잃기 싫었다면요. 그렇다면 합치지 않기로 한 뒤에 바늘이 꽂힌건 설명이 되지 않지요. 이렇게 두루뭉실하게 풀어내지 말고, 정말 오우메를 증오한 누군가가 있다는걸 증명했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바늘이 꽂힌 뒤 실제로 오우메가 습진을 앓았다던가, 할머니가 모든 가족들 꿈에 나타나 저주를 했다던가, 오카쓰가 대신 저주를 뒤집어 쓰는 역할을 한 뒤 모든 저주가 사라졌다는 등 이야기 속 주요 설정들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오하나 유령이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는 대사 하나는 조금 섬찟했고, '인형'과 같았다는 설명은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던 이유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안쥬>>
수국 저택이라고 불리우는, 지금은 폐허가 된 무가 저택에서 불이 나 3명이 죽었다. 사망자의 아들 나오는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아버지의 사촌인 야채상 야오노에 양자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뀐 환경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해 불안해 하던 차에, 미시마야 하인으로 습자소 친구인 신타를 폭행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 뒤 나오를 개인적으로 돌봐주는 습자소 선생 아오노 리이치로가 나오 아버지가 죽은 저택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표제작. 읽기 전에는 술안주 할 때의 안주라 생각했었는데, '暗獸'의 일본어 발음이더군요. 특이한 점은 추리물 성향이 짙다는 점입니다. 나오의 아버지 요헤이가 죽은 화재 사고에 대한 진상을 괴담을 통해 추리해내기 때문입니다.
아오노 리이치로의 말에 따르면, 수국 저택에는 아오노 리이치로의 스승 부부가 은퇴 후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 주인 아내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집 값이 쌌던 덕분이었지요. 그 곳에서 부부는 저택의 염 '구로스케'를 만나 친해지지만, 구로스케가 사람 때문에 약해진다는걸 알게 된 뒤 저택을 떠납니다.
그러나 주인 때문에 도망갈 생각이었던 옆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과 하녀, 그리고 이 둘을 도와주던 나오의 아버지 요헤이가 마침 빈 수국 저택에서 계획을 모의할 때 주인이 덮쳤고, 이를 막으려던 구로스케를 본 사람들이 놀라 도망치다가 죽은게 사건의 진상이었지요.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러한 작풍도 마음에 들지만, 스승 부부와 구로스케가 보냈던 날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아주 좋았습니다. 노래라던가 공놀이를 가르쳐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정을 나누는 모습이 아주 훈훈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구로스케의 '귀여움'도 폭발합니다. (아래 그림 참고)

판타지물에서 슬라임과 교분을 나누는 노학자 부부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요? 사람과 가까워지면 질 수록 약해진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하지만 결국 사람이 3명이나 죽은건 분명하고, 원인을 제공했던 관리 나마즈히게가 딱히 대단한 응징을 받지 않았다는 결말은 개운치는 못했습니다. 이는 구로스케의 귀여움, 사랑스러움과는 너무 상반되는 이야기인 탓도 큽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도, 괴이한 이형은 결국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온다는 뜻이겠죠?
에도 시대에 그렇게 높은 관직도 아닌데 하인과 고용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다는 것도 조금 놀하더군요. 하인이야 그렇다쳐도, 요헤이는 엄연한 고용인인데 말이지요. 나오가 양자로 간 야오노 가에서 겪는 불합리한 대우를 참고 견디는 모습 등도 우리나라 정서와는 잘 맞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으르렁거리는 부처>>
아오노 리이치로의 지인인 괴승 교넨보가 미시마야를 찾아온다. 그는 과거 깊은 산 속 '다테나리'라는 마을에서 겪었던 일을 오치카에게 이야기해 준다.
다테나리는 고신지라는 절의 스님 가쿠넨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마을이었는데, 도미이치라는 주민이 마을의 풍요에 대한 소문을 내려다 '반작'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도미이치의 아내와 갓난아기는 굶어죽었고, 광인이 된 도미이치는 장작에 불상을 새기는데 그 불상이 신통력을 발휘해 마을에 내분이 생겨 붕괴했다는 이야기였다...


마을 관습, 또는 집단 이기주의로 피해를 받았던 누군가가 복수한다는 이야기는 흔한 편입니다. 하지만 다테나리 마을과 '반작'이라는 설정은 탄탄하고, 수록작 중 제가 기대했던 '괴담'의 정의에 가장 충실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넨보가 겪었던 다테나리에서의 체험은 섬찟하면서도 이야기도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복수심에 불탔던 도미이치가 마을을 붕괴시키는 전개는 정말로 설득력이 넘치거든요. 혼자서는 역부족인 상황에서, 일종의 '초능력(?)'으로 가쿠넨 스님의 지배력을 무너트리는 과정이 아주 생생하면서도,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도적단이 미시마야를 습격한다는 이야기는 왜 등장시켰을까요? 억지스럽고, 이야기에 별로 도움도 안 됐는데 말이죠. 아오노 리이치로와 오치카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겠지만, 둘의 관계도 급발진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영상물로 만든다면 아주 볼 만 할 거라는 확신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이형'이 된 도미이치가 "이 세상에 부처 따위는 없다!"고 외치는 장면이 말이죠. 조금 찾아보니 전작은 TV 드라마화가 된 것 같은데, 이 작품도 드라마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2021/04/16

최후의 일격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최후의 일격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9년 겨울, 작가로 갓 데뷔한 엘러리는 크리스마스부터 공현절까지 12일간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어 인쇄업자 아서 크레이그의 저택으로 향한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젊고 매력적인 시인이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이기도 한 존과 그의 약혼녀, 허영 가득한 여배우, 출판업자인 댄 프리먼 등을 비롯해 모두 12명.

모두가 파티 분위기로 들떠 있는 사이 저택은 폭설로 고립되고,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초대 손님들에게 열두 별자리를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초대받지 못한 13번째 손님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엘러리 퀸의 마지막 장편.
말년의 엘러리 퀸이 고전 본격물의 향취를 되살리고자 의욕적으로 도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부터가 엘러리 퀸 데뷰작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 직후니까요. 작품은 고전 본격물에 굉장히 충실합니다. 클로즈드 서클에 가까운 무대 설정과 부유한 주요 등장인물들, 기묘한 범행과 단서들 모두가요. 모든 단서는 공정히 제공되며, 심지어 '독자에의 도전'도 삽입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인용했다는 형태로 말이죠.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망작입니다. 고전 본격물의 단점만 집대성해 놓은 결과물이에요.

고전 본격물의 존재 가치가 멋진 트릭과 기발한 설정에 있다는건 분명합니다. 어떤 작품은 트릭과 설정만으로도 모든 단점이 덮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설정들은 '비현실성;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큽니다. 기상천외할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이 최소한의 현실성을 가지려면, 사용되거나 그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라도 명확해야 합니다. 작위적인 상황 연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의 예를 들자면, 범인이 피해자의 목을 잘라 T자 형으로 매단 이유는 피해자인척 하기 위해서 벌인 행동이었죠. 작위적이기는 하나, 말은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도 변변치 않고, 설정들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표적인건 범인이 12일에 걸쳐 20가지 선물을 예정된 피해자에게 보낸다는 설정입니다. 선물들은 폐니키아 알파벳이 유래한 사물들을 의미했습니다. 첫번째 '황소'는 알레프, A, 두번째 집은 베스, B 라는 식으로요. 이 경우 마지막 Z는 단검인 자인을 뜻하죠.
하지만 범인은 스무번째 선물이 전달되는 마지막 날, 단검으로 존을 살해한다는걸 미리 알리기 위해 선물을 보낸게 아닙니다! 범인 아서 크레이그는 존을 꼭 죽였어야 했어요. 파산을 막기 위해서요. 누군가 존의 죽음을 막거나, 자기 범행을 멈추어 주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선물을 보냈을까요? 이유랍시고 나오는건, 명탐정 엘러리 퀸이 선물은 페니키아 알파벳이고, 선물 카드 뒤에 그려진 그림은 교정용 기호를 쓴 거라 편지를 보낸건 이쪽 분야에 정통한 인쇄업 종사자 아서 크레이그라고 추리해내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너무 뻔한? 단서라서 명탐정은 아서 크레이그는 진범이 아니고 누명을 쓴 거라고 주장해 줄 걸 기대했다면서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어요. 이러니 명탐정들이 현대의 비웃음거리가 된 겁니다...
차라리 피해자만 아는 일종의 기호로 피해자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려고 했다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트릭을 알아채서, 자신의 범행을 멈추어 줄 것을 기대했다던가, 범인이 페니키아 알파벳에 집착하는 미치광이였다는 이야기가 조금 더 나았을 겁니다. 딱히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작품 속 설정보다는 말이 됩니다.

애초에 아서 크레이그가 선물을 보내면서, 열 두명이나 되는 손님이 모인 저택에서 12일 동안 파티를 즐기면서 시간을 끌 이유도 없습니다. 언제든 존을 죽이면 되요. 사고로 위장해서요. 실제로 작 중에서도 존은 2번의 큰 사고 - 승마 중 낙마, 과음 후 계단에서 추락 - 을 겪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범죄를 저지를 경우, 유산이라는 동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 부분은 선물을 보낸 뒤 살해해도 어차피 똑같습니다. 구태여 복잡하고 번거롭게 단서만 늘린 셈이에요. 게다가 아무리 자기 저택이라지만, 경찰마저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12일 동안 몰래 선물을 놓아둘 수 있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선물을 놓아두다가 잡혔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전개와 설정도 엉망입니다. 존3가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협박하는 장면은 볼썽사나울 지경입니다. 뭐 프리먼의 인쇄소를 손에 넣고자 했던건, 돈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허나 롤랜드 페인을 협박해서 존1이 쓴 시집에 대한 호평을 얻고자 한 건 설명이 안됩니다. 스스로가 존1이 될 생각이었을까요? 협박했다는 사실을 존1에게 숨긴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고요. 물론 협박을 한게 존 1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협박대로 인쇄소와 시집에 대한 호평을 손에 넣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마디로 존을 죽이고 싶은 용의자를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협박을 한 건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선물이 보내지고 난 이후이니, 이 둘을 용의자로 보기도 힘들어요.

아울러 작품 속 경찰들은 정말로 무능했습니다. 사건 이후 아서 크레이그의 재산 흐름만 확인했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고 미해결 사건으로 덮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존의 쌍둥이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사실 존은 '세쌍동이'여서 존 2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나름의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살아있는게 존 1이냐 존 3이냐는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평가를 끌어올리기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제 정말 엘러리 퀸은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21/04/11

막차의 신 - 아가와 다이주 / 이영미 : 별점 2.5점

막차의 신 - 6점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소소의책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다는 소설. 아무런 정보없이 그냥 추리 소설이겠구나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추리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 드라마 단편집입니다. 아래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원 전철에서 치한을 만난 베일에 싸인 여성(「파우치」), 납기 마감에 쫓기는 와중에 휴가를 명령받은 벤처기업의 엔지니어(「브레이크 포인트」), 근육질 경륜선수와의 엇갈린 사랑에 고민하는 전문직 여성(「운동 바보」), 이발사 외길 인생을 걸어온 아버지의 임종을 코앞에 둔 아들(「오므려지지 않는 가위」), 콩트 작가 여장 남자의 충격적인 과거를 듣는 젊은 연인(「고가 밑의 다쓰코」), 자기의 충동적인 실수를 오해해서 등교 거부를 하게 된 소년을 몹시 걱정하는 인간 혐오증 성향의 여고생(「빨간 물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을 만나기 위해 25년간 역 매점에서 일한 중년 여성(「스크린도어」) <<책 후기에서 인용>>

특징이라면 각 작품들이 모두 연결된, 연작이라는 점입니다. 제목처럼 작품들 대부분이 막차와 관련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이 겹치거나 같은 막차에타고 있었던가 하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우치>> 속 도키타가 탔던 막차에 <<운동 바보>> 속 도모코, <<오므려지지 않는 가위>> 속 시바야마, <<고가 밑의 다쓰코>> 속 사야의 연인 쇼짱이 타고 있었거든요. 사야와 다쓰코는 멈춘 막차 바로 밑에 있고요. 또 <<빨간 물감>> 속 사가노는 다쓰코가 어렸을 때, 해수욕장에서 서로 스쳐 지나갔으며, 다쓰코는 <<스크린도어>> 속 히로타 기미코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는 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약간 반전이 있거나, 일종의 단서가 있어서 살짝 추리물 성향을 보이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습니다. <<파우치>>가 대표적이에요. 도키타가 남성이라는걸 드러내는 장면과, 그가 화장을 지우지 않고 아내 병원으로 찾아가 비밀이 들통난다는 결말은 반전물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인데, 도키타가 여성 옷을 입고 있는 시점의 심리 묘사로 이를 잘 덮고 있습니다. 인사 사고 때문에 같인 막차 안에서, 사람들과 막차 안 광고를 보며 느끼는 심리의 흐름이 정말이지 깜빡 속아넘어갈 정도로 디테일하고 섬세했습니다. 사랑을 끝내기로 결심했지만, 그러기 싫었던 연인의 엄청난 거짓말을 듣는 <<운동 바보>>의 결말도 나름 반전이었고요.
그 외에도, 오해 때문에 참극이 벌어질 뻔 했던 <<빨간 물감>>은 이야기 전개를 바꾸면 충분히 추리물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며, <<고가 밑의 다쓰코>>에서 다쓰코가 어렸을 적, 엄마가 바닷가에 온 적이 있었다는걸 알게 되는 수영복 자국 이야기는, 단서로서 충분했던 마음에 드는 디테일이었습니다.

꼭 추리물 느낌을 주지 않더라도, 이런 디테일과 섬세한 묘사는 대부분 작품에서 빛납니다. 작품 중에서는 <<브레이크 포인트>>가 가장 와 닿더군요. 아무래도 저와 조금 관련된 분야인 탓인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삶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궁지에 몰렸지만, 우연히 접한 권투를 통해 희망을 꿈꾼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다른 작품들 거의 모두 팍팍한 삶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찾는 이야기들로, 이런 부분이 높은 인기를 얻은 비결이 아니었나 싶네요.

하지만 지나치게 진부하고 전형적인 전개를 보이는 부분도 많습니다. <<오므려지지 않는 가위>>에서, 평범한 직장인인 시바야마가 암으로 임종을 앞 둔 아버지의 이발소를 잇기를 결심하자, 아버지가 가위를 한 번 오므리고 타계한다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야말로 이런 류의 이야기를 쓰겠다! 고 한다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진부한 전개와 묘사였다 생각되네요. <<스크린도어>>도 디테일은 좋지만 진부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내용은 좋지만, 제가 생각했던 작품은 아니고, 몇몇 작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딱히 추천드리기는 애매하네요.

2021/04/10

대량살상수학무기 - 캐시 오닐 / 김정혜 : 별점 3점

대량살상수학무기 - 6점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흐름출판

수학박사이자 펀드회사 퀀트, 데이터 과학자 등으로 일하던 저자가 빅데이터 경제가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쓴 수학, 과학, 인문학 교양서.
빅데이터를 기반한 수학 모형 프로그램이 대량살상수학무기 (이하 WMD)로 불릴만큼 위험한지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위험한 이유는, 인간의 편견과 오해, 편향성을 코드화했으며 유해한 결론이 나오더라도 개인이 반박하거나 수정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대체로 직접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대체 혹은 대리 데이터로 억지로 연관성을 도출하고요. 한 마디로, 가난한 동네에 살고, 신용이 낮고,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고 모두 범죄자가 되는건 아닌데 이런 식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지요. 이 책에 따르면 이건 뭔가 있어보이지만 실상 '인종차별'과 다르지 않은 논리에요. 특정 피부색은 행실이 나쁘고, 그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거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굉장히 공감이 많이 됩니다.

또 이러한 WMD가 널리 사용됨으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차별받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신용을 측정하는 '신용평가점수'입니다. 신용평가점수는 대부분의 경우 업무 능력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용평가점수가 낮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죠. 말 그대로 하향식 악순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아요. 얼마전 대통령께서 신용도 낮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더 많이 해줘야 하지 않느냐? 라는 말을 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었습니다. 물론 원칙에 따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렇게 신용도로 대출을 하게 되면, 당연히 부자나 안정적인 직장인에게 더 유리할 수 밖에 없어요. 정작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은 고금리 사금융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어렵겠지만, 뭔가 대책은 필요한건 분명해요.

인간의 편견이 양형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여 범죄자들을 더욱 공정하게 대하자는 재범위험성모형 recidivism models 의 문제점도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양형의 일관성을 높이고, 판사의 기분이나 편견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이며, 평균 수감 기간도 줄여서 예산을 절약해 주는 획기적인 모델이라는데, 아쉽게도 이 역시 전형적인 WMD에 불과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대리 데이터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사람은 일정한 직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족과 친구가 많은 환경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죠. 그러면 이들은 재범 위험성 평가에서 받은 높은 점수가 더해져, 더욱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범죄자들에게 둘러싸인 감옥에서 사회와 격리된 채 수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수감 생활은 그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즉 재범 위험성을 확실히 증가시키고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더라도 예전에 살던 가난한 동네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전과자라는 별까지 단 상태라 일자리를 구하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결국 그는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걸 재범위험성모형이 정확한 예측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냥 하향식 악순환의 또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단지 '현재의 범죄'만 놓고 판단을 해야지, 사건과 관계없는 주변 데이터들을 판단에 집어넣는건 잘못된 알고리즘이죠.
그 외, 취업 시장, 대학 입시 시장 등 다양한 곳에서 WMD가 사용되는 사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일정 관리 소프트웨어의 가혹한 일정 관리는 끔찍할 정도에요. 게다가 거의 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상 일반 개인이 반항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게 무섭네요. 거대하고 불투명하며, 무책임하다는 측면에서 최근 화두가 되는 마이크로 타기팅 광고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WMD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한 무리수도 몇 가지 있습니다. 경찰이 사용하는 범죄 예측 모형 프레드폴이 대표적입니다. 경범죄를 중시하도록 설계되어, 빈민가 중심의 순찰을 통해 검거율이 대폭 상승했지만 저자는 진짜 중범죄는 잡지 못한다고 역설하지요. 하지만 순찰 경관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경제사범을 체포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순찰이라는 행위가 거리에서의 범죄 단속이니까요. 저는 순찰 경관이 필요한 범죄 카테고리 중심으로 설계된 지금 모델은 충분히 신뢰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력서 서류 심사에서, 깔끔한 것과 지저분한 것의 차이로 평가하는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이력서를 내는데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을 선발하는게 마땅하니까요.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배려심,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은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높고요. 아, 이런 것도 대리 데이터에 따른 개인적 편견일까요?
비만인에게 건강 보험료를 많이 걷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비만이 병의 원인임이 분명하면, 그다지 잘못된 정책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비슷한 사례가 계속 이어지니 좀 식상한 측면도 있고, 목차 구성에서 'WMD가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하 한 뒤, 뒤의 사례들을 소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각 사례 소개 때 마다 '이건 이러해서 WMD이다' 에 대한 설명이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등장하는데, 목차 구성을 통해 이런 부분은 최소화할 수 있었을걸로 보이거든요.

아울러 이런 프로그램을 통한 개인 평가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근본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도 좀 아쉬웠습니다. 지난 수백년간 모든 모델, 즉 대출이나 재판, 고용, 입시 등 거의 모든 경우에서 '평가'라는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 평가는 그동안은 해당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에 의해 진행되었고요. 과연 사람이 이런 프로그램보다 더 나을까? 라는 측면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책에서는 대체, 대리 데이터가 문제가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사실 경험적으로 어느정도 성립하는 대체, 대리 데이터가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고요. 예를 들면 예전 <<신입사원>>이라는 만화에서 보았던, '학력필터' 이론이 그러합니다. 부모님 노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학생들끼리 '학력' 으로만 평가해서 순위가 높은 대학에 들어간거라면, 저라도 명문대생을 우선 뽑을 것 같네요.

그래도 오랫만에 굉장히 유익하고 좋은 독서를 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인공지능의 문제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가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21/04/09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정영목 : 별점 2점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백만장자 노부인 애비게일 도른이 수술을 살해당한다. 범인은 병원 내에 있는건 확실하지만 수사는 난항에 빠지고, 주요 사건 관계자였던 외과 과장 닥터 프랜시스 재니까지도 살해된 채 발견된다. 실마리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던 엘러리는 친구인 네덜란드 병원 의료과장 존 민첸이 한 말 덕분에 범인을 추리해 낸다.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입니다. 국명 시리즈다운 본격 추리물로,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 게임이 펼쳐집니다. '독자에의 도전'도 적절한 위치에 삽입되어 있고요.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모든 단서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 더해, 중요 단서는 엘러리 퀸이 중요하다고 콕 짚어 주기까지 하니까요. 때문에 추리 자체는 비교적 쉽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1년에 발표되었던, 비교적 초기작인 탓이겠지요.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언급하는 '구두'가 대표적입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이미 엘러리는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구두 혀가죽'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닥터 제니의 구두 사이즈를 물어봅니다. 키가 165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닥터 제니의 발 사이즈도 245밀리미터인데, 발견된 구두는 240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았지요. 이를 통해 독자는 범인은 발이 240밀리미터보다 작은, 아마도 여성일거라는 추리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구두 끈을 수선했던 반창고도 마찬가지에요. 닥터 민첸이 "외부인들은 아무도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반면, 병원에서 이런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라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범인은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일 거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동기도 쉽게 드러납니다. 애비게일 도른이 죽으면 이득을 얻는 사람은 많지만, 닥터 재니가 죽음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은? 닥터 재니의 아들로 밝혀진 토머스 스완슨밖에 없습니다. 책을 함께 쓰고 있다고 밝힌 닥터 존 민첸이 책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엘러리 퀸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구태여 살인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으니까요. 즉 범인은 토머스 스완슨과 관계가 있는, 네덜란드 기념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인 거지요.

물론 그냥 이렇게 사건이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트릭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범인인 루실 프라이스가 어떻게 닥터 재니로 변장한 범인과 함께 범행 시각에 함께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트릭으로, 그녀가 닥터 재니로 변장하고, 목소리는 자기 목소리만 내었다는 간단한 1인 2역 트릭이지만 꽤 효과적으로 보였습니다. 트릭은 언제나 간단하면 간단할 수록 설득력이 높은 법이지요.
범인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추리쇼도 멋졌습니다. 속기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루실 프라이스를 모든 수사 관계자가 모여있는 범행 현장에 불러 경찰청장에게 보내는 메모를 쓰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을 눈치 챈 퀸 경감이 "‘도른 부인과 닥터 재니의 살인자는…….’ 토머스, 이 여자를 잡게! ‘루실 프라이스입니다!’”라고 외치는데, 셜록 홈즈의 <<주홍색 연구>>에서, 짐을 가져온 마부를 붙잡고 범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나중에 추리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그렇게 쉽고 단순하지만은 않고, 나름 여러가지 변수를 생각해서 추리를 했다는걸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만큼 멋지지고,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요한 부분에서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티가 물씬 나는 탓입니다. 가장 작위적이었던건 '사라진 캐비닛' 입니다. 원래 닥터 재니가 살해된 현장에는 캐비닛이 있었습니다. 등 뒤 캐비닛으로 향하는 사람을 닥터 재니가 의심하지 않아서 살해당했고, 이로써 닥터 민첸이 초반에 말했던 "그 기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재니와 나 그리고 재니의 조수인 프라이스 양뿐일세. 프라이스 양은 훈련받은 간호사인데, 일반적인 사무를 본다네.” 를 통해 범인이 드러나는 중요한 단서죠. 그러나 캐비닛의 존재는 마지막에서야 밝혀집니다. 함께 책을 쓰던 닥터 민첸이 모든 관련 서류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라면서요. 서류를 없앨 때 '캐비닛' 째로 가져가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서류가 아니라 휴지 한 장을 가져가도 문제가 될 상황인데 캐비닛 째로 무언가를 가져가서 없앴다? 현장을 지키던 경찰이 허수아비도 아니고, 이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설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캐비닛으로 들어가려면 좁은 책상 틈을 통과하여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는데, 시체를 놔 둔 채로 캐비닛을 어떻게 치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또 앞서 구두와 반창고 때문에 범인이 병원에서 일하는 여자라는건 이미 추리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병원에 있던 모든 관계자,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인적 사항을 낱낱이 파헤치는게 경찰의 할 일인데, 도대체 경찰은 뭐 하는지, 엘러리는 왜 이야기를 안 해 주었는지 모르겠어요.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진 마침 그 시간에 모든 주요 관계자들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못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제목 역시 마찬가지에요. '네덜란드' 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사건 무대가 된 병원 이름이 네덜란드 기념 병원일 뿐이니까요. 국명 시리즈는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요.

아울러 전개도 불만스럽니다. 수상한 용의자들을 잔뜩 만들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는건 억지스럽고 짜증만 났어요.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 경찰 앞에서 모든 주요 관계자들이 뻔뻔하게 자신이 했던 일, 만났던 사람은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주하는에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들이 사실만 이야기했어도 절반 분량의 이야기는 필요가 없었을겁니다. 이런 억지는 고전 본격 추리의 황금기 시절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기는 합니다. <<비숍 살인사건>>에서 처럼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묘사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억지스러워요. 정신나간 인물들이 태반이에요. 정신병자이자 광신자인 사라 풀러, 누이 돈을 축내며 살아가는 기생충 헨드릭 도른은 고전 본격물에 등장하는 짜증나는 용의자의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였고, 기묘한 합금을 발명한다는 헛똑똑이 모리츠 크나이젤은 엘러리 퀸이 호적수를 만났다 운운하면서 띄워줬는데, 바로 다음에 자신이 살인자의 목표라는 허황된 추리를 떠벌여서 왜 등장해야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더군요. 아이가 죽고, 산모도 곧 죽을거라는 잔인한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산부인과 의사 닥터 펜니니도 사악함만 기억에 남을 뿐 등장할 이유가 없던건 마찬가지고요.
사라 풀러를 강간하다시피해서 훌다 도른을 낳게 한 내과 의사 루시우스 더닝은 그야말로 최악의 쓰레기였는데, 적절한 응징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엘러리 퀸이 인물 묘사에 약하기는 한데,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백만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본격 추리물로서의 묘미를 잘 갖추고 있지만, 추리 자체는 추리 퀴즈 수준인데다가 작위적인 전개와 함량 미달의 인물들로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국명 시리즈는 저와 맞지 않는 듯 합니다. 세상에 읽어야 할 추리물은 많으니, 국명 시리즈는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21/04/04

이야기의 집 - 요시다 세이지 / 김재훈 : 별점 3점

이야기의 집 - 6점
요시다 세이지 지음, 김재훈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등장 메카닉 등 관련 설정을 모아 놓은 책, 이른바 '화보집'은 익히 많이 보아 왔습니다. 좋아하기도 하고요. 멋진 그림, 그리고 자세한 설정을 알아가는데서 큰 재미를 느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도 그림과 설정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기존 애니메이션 화집의 경우, 이야기가 아무리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어느정도는 내용을 파악하고 책을 보는게 보통이었습니다. 설령 관련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인터넷 검색 등으로 충분히 찾아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책은 유명 작품이 아니라 작가 요시다 세이지의 개인 창작물에 등장하는 설정만 담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발표된 적이 없어서 찾아보기도 불가능하지요.
두 번째 차이점은 캐릭터, 메카닉이 아니라 '집', 또는 '거주 공간' 에 대한 설정만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집이 주인공인 화집은 정말이지 처음 봤네요.

그러나 결과물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요시다 세이지가 창작했던 (아마도?) 이야기 속 집들을 전경을 그린 세밀한 일러스트, 그리고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평면도 및 구조도와 함께 소개해 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이 정말이지 완벽하게 취향을 저격하고 있거든요. 작가의 뎃생력, 따뜻하고 정감어린 컬러링 모두 완성도가 높아요.
집에 대한 설정들도 굉장히 상세합니다. 만약 설정대로의 집이 있다면, 정말 이렇게 지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각 방들의 구성과 꼭 필요한 요소들이 모두 정확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용을 타고 배달하는 우체국' 그림처럼 말이죠.

이러한 집 화보가 무려 33편이나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도 부록도 풍성합니다. 컬럼으로 지붕, 화장실과 작가 아틀리에 소개가 실려있으며, '과묵한 정비사의 별장' 이야기 속 하루를 그린듯한 짤막한 만화, 그리고 어떻게 작품을 그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책의 완성도도 좋습니다.

다만 함께 소개되는 이야기 설정은 솔직히 그냥저냥이기는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워낙 그림과 구성이 마음에 들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하여튼 화집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추천 드리는 바입니다.

2021/04/03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정운현 : 별점 5점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10점
정운현 지음/개마고원

왜 친일파를 조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인물사 서적. 크게 관리, 경제인 (갑부), 지식인, 언론인, 작가 및 예술가, 종교인, 직업적 친일분자라는 7개 분류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소개되는, 타국 친일파 처벌 사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3.1 문화상을 수상한 친일파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까지 있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뒤이은 친일파들의 매국 행각도 화려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 친일파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선대의 재산에 힘입어 해방 이후 한 자리씩 차지했던 후손들의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부분 반성은 커녕 친일 재산을 되찾으려는 등 뻔뻔함으로 일관했으니까요. 최소한 '친일을 해서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해서 못 사는' 나라가 아님을 지금이라도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반대로, 친일 행각을 반성했던 소수는 이 점을 감안해서 대접해야 햘 테고요. 윤서인같은 인간들이 망발을 내뱉는 사회가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는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겁니다.

그럼 몇 명의 인상적이었던 친일파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대우입니다. 3.1 의거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지만 감옥살이 이후 변절하여 일제하 도지사를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죠. 반민특위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1960년 총선에 출마했다는 뻔뻔함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끌며 수백명의 독립군을 체포, 사살하는데 기여했던 김창영이 반민특위에서 고작 '공민권 정지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해도 마땅한 악질 친일파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김창영이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해방 이후 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죗값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희선은 원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알고보니 변절자로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 노릇을 했다니 기가 찹니다.
유명했던 친일경찰 노덕술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독립 운동 사건만 취급했던 악질 고등 경찰 출신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될 당시, 무려 34만 1천원이라는 도피 자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질이었지요. 게다가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테러 음모에도 가담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바로 사형을 시켰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등으로 수감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네요. 그 뒤 제 1사단 헌병대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6.25 때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해 구속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응징을 받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조선 제일 갑부의 한 명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 이야기도 볼 만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관직에 있으며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하여 치부한 인물이거든요. 단순 치부였다면 모를까, 재산 증식 및 인맥 확보를 위해 친일파들과 적극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본 밀정 노릇을 하기까지 했다네요. 그나마 그 많던 재산은 해방 이후 다 날리고, 제실도 흉가가 되었다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런 정보로 치부한 공직자들도 모두 패가망신하면 좋겠네요.
영덕 갑부 문명기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 골몰했던 친일파인데, 1935년에 일제에 10만원을 헌납해 비행기를 기증했다는 일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복엽기!더라고요. 일제에서 누군가 문명기 돈을 빼돌린 모양인데, 전쟁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죠.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런저런 공직에 종사하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연좌제처럼 공직을 박탈할 필요야 없지만, 할아버지 재산이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던 할아버지 못지않은 파렴치한이라는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운동가로 알려졌던 이선근은 열렬한 친일파였던건 물론이고 박정희 시절 유신 독재 찬양에 전두환까지 찬양했던,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더군요. 국립묘지 안장에 아들과 손녀들이 모두 떵떵거리며 산다니, 지금이라도 국립묘지 파묘는 물론 그의 정체와 후손들 모두 널리 알리는게 당연할테고요.

조선에 있었던 신사에서 신직, 즉 신관으로 일했던 조선인 이산연 이야기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덕분에 이산연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처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행방불명된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것 하나만 위안거리네요.
조선 불교 총 본산 조계종이 일제 강점기 때 생겼으며, 이를 주도했던 첫 종무총장 (총무원장) 이었던 불교계 거두 이종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더러 그 아들은 동국대 대학원장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친일해서 후손이 잘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1급 친일파 조병상 이야기는 좀 놀라왔어요. 직업이 아예 친일이었는데, 학병 출정을 독려하며 자기 아들도 5명 중 3명이나 출병시켰다니 그 충정이 대단합니다. 아들들이 다 생환해서 모두 출세했다는게 좀 쓰린데, 조병상 본인은 6.25때 실종된 걸로 추정된다는게 위안입니다.

친일파 정보는 물론, 일제하 공직자 관등과 같은 볼만한 자료도 많습니다. 최상급은 일왕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조선 내에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두 명 뿐이고 그 다음이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순서입니다.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고요. 지금의 5급 공무원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며,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현재의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군수는 5급 공무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친일파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권한과 재량이 더 많았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당연합니다.

좌옹 윤치호의 친일 논리도 곱씹어볼만했습니다. 윤치호가 친일파가 된 건,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그리고 개화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 그리고 105인 사건 때 겪었던 가혹한 고문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군요. 이후 윤치호는 '황인족 담합론'과 강자에게 약자가 순종해야 평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게 조선이 살 길이라는 등의 등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낸게 더 웃깁니다.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변절하여 친일을 한 이유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다'고 고백했는데, 차라리 이게 더 합리적이지요. 최린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진솔하게 반성과 후회를 보였다니, 같은 친일파라도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을 도운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자 밀정 배정자 같은 경우는 친일의 이유가 나름 합당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좀 애매했습니다. 김인승은 조선 말기,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탈주했던 인물이거든요. 공권력과 싸워서 패배하여 도망친 뒤, 자신을 버린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판 오자서인 셈이지요.
배정자의 일생은 더 기구합니다. 아버지가 대원군 실각 때 한 패로 몰려 처형된 뒤 유랑생활을 하다가 관기로 팔렸고, 그 뒤 중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거든요. 조선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고, 일본에 충성을 바친 이유도 타당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해야 할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결과야 친일인데, 그 이유는 수긍할 만 하니....

이렇게 친일에 대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된 좋은 독서였습니다. 박흥식, 김활란 등 익히 잘 알려진 친일파가 함께 소개된다거나, 그 외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일파들이 많은건 조금 아쉽지만, 책의 취지 상 쉽게 빼지는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빠진 친일파가 세간에서 잊혀질까 두렵네요.
역사 바로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제가 읽은 구판은 절판되었지만, 아래의 책으로 재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10점
정운현 지음/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