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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30

올 여름 구입 목록 작성 ver 1.0

부활하는 남자들 1,2 (이언 랜킨) - 각 8,500원

망량의 상자 - 상/하 (쿄고쿠 나츠히코) - 각 14,000원

와일드 소울 1,2 (가키네 료스케) - 8,500원

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 19,800원

800만 가지 죽는 방법 (로렌스 블록) - 12,000원

제리코의 죽음 (콜린 덱스터) - 10,000원

사라진 보석 (콜린 덱스터) - 10,000원


옥문도 (요코미조 세이시) - 미출간

라파엘로의 유혹 (이언 피어스) - 8,900원


새로 출간되는 책은 늘어만 가는데.... 돈은 없고 큰일이네요. 인터넷 서점의 추리 분야 리스트를 쭉 훝어보고 소장하고픈 책들을 한번 모아 보았습니다.

빨간색은 반드시, 어떻게든 사고 싶은 책이고 다른 책은 좀 더 검토 후에...

일단, 이언 랜킨이라는 작가는 한번 접해보고 싶어서이고 교코쿠 나츠히코의 작품은 어쨌건 제가 일본 추리 작품을 좋아해서, 그리고 모스 경감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팬이기 때문에 소장하고 싶으며 이언 피어스의 핑거포스트는 읽고 싶어한지 벌써 몇년 되어 가는데 책값의 압박 때문에 그간 좌절하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는 꼭 한번 사봐야 겠습니다. 여전히 비싸지만 그래도 "보급판"이라고 나왔으니 말이죠.

이것만 다 사도 8만원을 넘어가는군요. 솔직히 우리나라 책 값,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다시한번 듭니다. 추리 독자로서 이 정도 작품군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는 감사하지만 문고본 형식으로도 간행되어 나와 주었으면 하네요.

2005/06/28

키스 미 데들리 (Kiss me Deadly 1955) - 로버트 알드리치 : 별점 1.5점

뉴욕의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는 어느 날 밤 한적한 도로에서 쫓기는 듯한 인상을 주는 미모의 금발 여인을 차에 태운다. 잠시 후 해머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아 어딘가로 납치된다. 괴한들은 해머에게 수면제를 주사하고 여자를 고문하다가 두 사람을 차에 태워 절벽으로 떨어트려 사고로 위장하려 하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해머는 여자의 죽음에 얽힌 배후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도 해머는 사건의 진상이 비밀스러운 상자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범인은 한발 먼저 상자를 가지고 달아나면서 해머의 비서 벨다를 납치한다. 가까스로 범인들의 아지트에 잠입한 해머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종결된다.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햄머 시리즈 영화입니다. B급 영화의 대부이자 필름 느와르의 거장이라고 하는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네요. 평 자체가 워낙에 좋아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솔직히 지루하고, 기대보다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발표 당시로 부터 무려 50년이나 지난 후에 감상한 탓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데 실패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죠. 원작을 읽지 않아서 원작 탓인지, 각색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한 것은 확실해요. 예를 들자면 마이크 해머가 왜 사건에 뛰어드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하고, 범인들을 추적하는 단서들도 그다지 와 닿지 않습니다. 악당들 역시나 가만히 있었으면 조용히 해결될 것을 해머를 구태여 건드려서 일을 만드는 멍청한 행동만 과시할 뿐이고요. 게다가 가장 중요한 단서인 "Remember Me"라는 암호같지도 않은 시적인 문구는 공정함의 영역을 벗어난 반칙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핵"이 등장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조그만 상자안에 뭔가 핵에 관련된 물질이 들어있다는 설정도 황당하지만 악당들이 그것을 얻어서 어떻게 할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더군다나 마지막 장면에서 상자를 열었더니 모두 불타버리더라....라니 이거 웃으라고 만든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 외에도 "미녀 비서" 벨다를 비롯해서 모든 여성 배우들의 미모가 기대 이하였다는 것도 저에게는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물론 영화 자체는 시대를 감안한다면 꽤 세련되고 괜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흑백의 톤을 잘 살려 시작부터 상당히 독특한 시각적 연출을 곳곳에서 보여주는 것이 역시 인정받을 만한 감독이라는 느낌이 들게끔 합니다. 특히 거울이나 방문등을 잘 이용한 미장센은 지금 보아도 독특한 맛이 있고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마쵸적인 느낌이 강한 주인공 마이크 해머 역시 설정만 본다면 완전히 "리썰 웨폰" 식인, 굉장히 현대적인 캐릭터라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이 부분은 원작 소설에 기댄 측면이 더 크겠죠.

여튼, 제가 무식한 탓도 있겠으나 저에게는 후대의 찬사를 얻을만한 부분이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대체 "펄프픽션"이 이 영화의 오마쥬라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이런 영화를 보면서 뭔가 느끼기에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이젠 생각 별로 안하고 컨텐츠를 즐겨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겠죠? 별점은 1.5점입니다.

2005/06/27

인생을 훔친 여자 (화차) - 미야베 미유키 / 박영난 : 별점 4.5점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시아출판사

다리에 총상을 입고 휴직 중인 형사 혼마는 죽은 아내의 먼 친척인 구리자키 가즈야라는 엘리트 은행원에게 개인적인 사건 의뢰를 받게 된다. 그의 약혼녀 세키네 쇼코가 가즈야의 권유로 신용카드를 만들려다가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직후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의뢰를 수락한 혼마는 쇼코에 대한 조사해 나가다가 세키네 쇼코라는 실제 인물과 실종된 가즈야의 약혼녀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되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입니다. 원제가 더욱 마음에 드는데 개정판이 나오면서 "인생을 훔친 여자"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출판되었네요. "천재 정신과 의사의 살인광고"처럼 제목으로 범인을 알려주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제목에서 내용을 짐작케 하기 때문에 별로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건, 이 작품은 신용불량과 개인 채무, 파산을 소재로 하여 사회파적인 기법의 추리소설로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전체적으로 혼마가 가즈야의 의뢰로 세키네 쇼코를 찾아 다니는 전반부와 실제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그 동기와 방법을 밝혀내는 후반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야기의 전개가 자연스러울 뿐더러 진상이 밝혀지게 되는 이유들이 합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범인 세키네 쇼코-신조 교코에 대한 묘사가 압권입니다. 살인범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이해가 될 수 있을만큼 개인 채무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거든요. 덕분에 감정이입은 물론 굉장히 높은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키네 쇼코-신조 교코가 철저하게 제 3자로 등장하여 그녀의 심리는 절대로 표현되지 않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독특한 점으로 작품의 냉정하고 공포스러운 면이 배가되는 듯 싶더군요.

그리고 추리적으로는 사회범죄를 다룬 사회파 기법의 작품답게 사회파 형사들의 추리 - 수사방식과 유사한 탐문과 증언 등을 토대로 수사가 이루어지는데 수사하는 과정의 디테일이 잘 살아있을 뿐더러 추론을 통해 진상을 짐작하고 범인을 추적하는 부분이 흥미진진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 애호가들에게는 트릭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아 약간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신조 교코가 타겟이 되는 인물의 데이터를 빼 내는 방법에 대한 부분만큼은 명쾌하고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러웠고요.

결론적으로는 추천, 아니 강추작입니다. 혼마 형사의 주변 묘사가 좀 지루할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완벽한 작품이에요. 일본 추리 문학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추리작가들은 많이 있고 국내에 소개된 작품 역시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러한 사회 범죄를 다룬 작품은 많이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는 점에서 보험악용을 소재로 한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라는 작품과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요.

PS : 이 책을 읽고 나니 군대있을때 부대 간부가 어느날 카드를 칼로 박살내며 저에게 한 말이 기억나더군요. "카드는 인류의 적이야!" 김중사님.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나요?

2005/06/25

침대특급살인사건 - 니시무라 교타로 / 윤정규 : 별점 2.5점

침대특급살인사건 - 6점
西村京太郞 지음/추리문학사
총기사고로 면직된 전직 경찰 다나베가 사립탐정 업무를 시작한 뒤 어느날, 한 부인이 자신의 임신한 딸을 에스코트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는 부인의 딸 유미꼬와 같이 오사카에서 사세베까지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의뢰를 완수한 직후, 공갈범 전과가 있는 기구찌 이사오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피해자의 책상 서랍에서 다나베가 에스코트 의뢰를 수락한 뒤 작성했던 영수증이 발견된다. 경찰은 영수증을 확보한 뒤 전직 경찰관 다나베가 기구찌를 협박한 증거로 삼아 다나베를 검거한다.

다나베는 사건 당일 사세베까지의 여행했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하기위해 후미꼬와 유미꼬 모녀에게 증언을 요구하지만 모녀는 다나베를 모르는 사람으로, 오히려 유미꼬를 귀찮게 쫓아 다니던 파렴치한으로 몰아가고 다나베에게 걸린 혐의는 점점 깊어진다. 마침내 과거 다나베의 상사였던 도쿄 경찰청 수사 1과의 토츠가와 경부가 옛 부하를 구해주기 위해 사건에 뛰어드는데...

여정 미스터리의 달인이라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입니다. 기차 시간표 트릭이라는 전통적 소재를 등장시킨 대표작을 작가별로 따져본다면 마츠모토 세이쵸에게는 "점과 선"이, 모리무라 세이이치에게는 "신간센 살인사건"이 있고 니시무라 교타로에게는 이 작품이 있는 것이겠죠. 예전에 읽었었지만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분명 예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괜찮았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많이 띄거든요.

물론 장점도 존재합니다. 저자가 기차 시간표를 늘어놓고 알리바이를 구상하는 장면이 상상될 정도로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트릭인 기차 시간표 트릭은 아주 괜찮고, 모녀에 의해 다나베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궁지에 몰리게 되는 상황이 꽤 치밀한 편이라 설득력도 높은 편이거든요.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재미도 느껴졌고요.
토츠카와 경부가 직접 발로 뛰면서 수사하여 오로지 사건 해결에만 집중하는 전개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약간 사회파스러운 분위기에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점도 장점이죠.
마지막으로 굉장한 악녀들인 두 모녀의 설정은 정말이지 최고입니다. 과거의 불우한 경험때문에 돈에 대한 엄청난 집착과 인간성이 상실되었다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떠오르는데, 훨씬 앞선 시기에 손에 잡힐 듯 그려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그러나 단점도 너무 명확합니다. 우선 어수룩한 사립탐정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하는 모녀가 그 사립탐정이 전직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워요. 이 때문에 그가 예전에 근무했던 도쿄 경찰이 사건에 뛰어들며, 이후 범행 사실이 쉽게 발각되는 이유가 되어 버리거든요. 작전의 핵심은 마나베를 옭아매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치밀한 사전 조사와 준비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전직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기구찌 이사오와 모녀와의 관계도 조금만 조사하면 쉽게 드러나는 동기가 있고, 결국 밝혀진 동기와 과거 때문에 다른 살인 사건들마저 발각된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허술했고 말이죠.
또 관련자들을 전부 죽이다보니 이래저래 너무 많이 죽이게 되는데 모녀가 살인을 통해 어느 정도 이상의 재력을 손에 넣었다면 청부 살인쪽을 보다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복잡한 알리바이 트릭을 써가며 몸으로 직접 해결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시킨다면 그 누군가의 입을 막아야 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덧붙이자면 기차 시간표 트릭 자체는 괜찮긴 한데 결국 기차를 경찰관들이 "한번만" 타 보고 바로 진상을 꿰뚫는다는 점에서는 좀 허무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소설에 나오는 27분 밖에 없는 시간의 갭이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오기에 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약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번역도 깔끔하고 어느정도 재미도 있지만 저자가 알리바이 트릭을 먼저 개발(?)하고 그 이후에 플롯을 가져다 붙인 듯한 어색함도 느껴지는, 범작 수준에 머무른 작품입니다. 허나 이런 정통 기차 시간표 트릭의 교과서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이쪽 장르물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최후의 증인 - 김성종 : 별점 4점

최후의 증인 김성종 지음/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과거 빨치산 부역, 그리고 사람을 죽여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0년만에 감형되어 출옥한 순박한 노인 황바우의 출소 직후, 양조장 주인 양달수가 살해당한다. 오병호 형사는 사건을 수사하던 중 이 사건이 서울의 변호사 김중엽 살인사건과 연관되어 있고 두 사건은 20년전 과거가 원인이라는걸 알게된다.
황바우가 죽였다는 한동주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증언을 확보한 오병호는 한동주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정당방위였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경찰에게마저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리나 끝까지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며 결국 한동주를 검거하는데 성공하는데....

보통 국내 추리작가의 양대산맥으로 "정건섭"선생님과 "김성종" 선생님을 꼽죠. 이 중 정건섭 선생님은 국내 현실에 잘 맞는 정통 추리물 "덫"과 "5시간 30분"을 읽고 좋아하게 되었지만, 김성종 선생님 작품은 김성종 선생님의 그간의 국내 추리계를 위한 노력과 활발한 작품 활동에 비해서 제 노력 부족 탓에 그동안 별로 읽은 것은 없습니다. "여명의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단편집 "어느 창녀의 죽음" 정도일까요? 그래서 평소에도 무척 아쉽던 차였는데 고려원에서 나온 한국 미스터리 컬렉션으로 구입해서 읽게되었습니다.

읽고나니 과연 명불허전! 거장 김성종 선생님의 진가를 잘 알려주는 걸작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직후의 우리나라의 비참했던 과거를 소재로 하고 있는 등 한국적인 소재와 내용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게 아주 마음에 드네요. 세세한 설정과 대사에서 토속적인 정감을 물씬 풍기는 작품은 정말 처음 봤습니다. 6.25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서 빚어진 비극을 이만큼 잘 묘사하고 있는 작품은 다른 장르를 통틀어도 드물것이라 생각되고요. 덕분에 미국식 스릴러와 일본 사회파와는 확실히 차별화됩니다.
아울러 연쇄살인에 대한 트릭없이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소재로 하고 있는 후더닛물이라는것 도 한국적이면서도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수사 과정도 마찬가지로 오병호 형사가 프렌치 경감처럼 주로 발로 뛰는 타입인데다가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요. 추리적 요소는 그렇게 크지는 않으나 사건의 실상을 파헤치는 증언이 워낙 충격적이라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마다 연계성이 치밀하게 설정되어 명쾌하게 정리되는 결말 역시 최고 수준이에요.
탐정역의 오병호 형사도 대단한 추리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끈질기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약간의 반골 성향에 곁들여 로맨티스트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흡사 무협지의 외로운 검객 스타일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마음에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좌익쪽 인물들의 캐릭터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인물들로 정형화되어 있는건 - 발표된 시대를 미루어 보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 아쉬운 부분이었고, 모든 관련자들이 죽는 결말은 감동을 극대화시키려고 무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건의 동기와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한 장면이기는 하나, 김성종 선생님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불유쾌한 성적 묘사의 등장은 별로 였어요.

그래도 참 간만에 좋은 독서를 했습니다. 요사이 읽은 책들은 다 대박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네요. 데뷰작이라는 것을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잘 구성된 작품으로 이 작품이 한국 추리사에 빛나는 작품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 추리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PS : 이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 "흑수선"이 제작되었다고 알고있는데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간략한 줄거리만 보아도 각색을 굉장히 많이 했더군요. 워낙 긴 작품이고 꽤 긴 기간을 아우르는 작품이라 어느정도의 각색은 반드시 필요했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 원작에 누를 끼치지나 않았을지 우려되기도 합니다. 굉장히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만큼 한번 구해보기는 해야겠네요. 혹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시면 어땠는지 정보 부탁드릴께요^^

2005/06/24

제 6계명 - 로렌스 샌더스 : 별점 3.5점

제6계명 1 로렌스 샌더스/고려원(고려원미디어)

빙햄 투자기관의 조사원 샘 토드는 손데커 박사라는 인물이 백만불의 후원금을 얻기 위해 신청한 연구의 조사를 위해 오지와 같은 시골마을 코번으로 떠난다. 손데커 박사는 그가 운영하는 요양기관과 연구소만이 마을을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탓에 쇠락해 가는 코번 마을을 그나마 지탱하는 유일한 인물로 남다른 카리스마와 설득력을 지닌 천재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토드는 그가 하는 연구는 세포의 노화를 유발하는 X라는 요소를 배재하여 인간을 불멸, 불사의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토드는 요양소에서 불분명하게 사망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는 것과 요양소에서 일하던 노인이 어느날 알 수 없이 실종되었다는 사실 등 손데커 박사의 매력 뒤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와 같은 여러 사건을 접한 뒤 박사와 그의 연구에 대한 의심이 깊어 가는데....


로렌스 센더스의 유명한 작품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전에 이미 "앤더슨의 테이프"와 "피터 S의 유혹"이라는 작품 2개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특히 "피터 S의 유혹이)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고 시드니 셀던과 비슷한 통속소설 작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죠. 그래서인지 유명한 작품이고 구하기도 별로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그동안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번에 헌책방 쇼핑 도중 충동적으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물건이네요!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한번에 쭉 읽어버리고 말았어요.

먼저 시니컬하면서도 냉정한 판단력의 주인공이 주로 탐문과 조사로 수사를 진행한다는 과거 전성기 시절의 하드보일드 공식에 충실한 묵직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적인 부분과 스타일까지도 거의 유사하더군요. 그러나 단순한 모방작은 아닙니다. 기존 하드보일드의 사립 탐정이나 형사와 다른 다른 특이한 직업의 탐정이 주인공일 뿐더러 의학 스릴러라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소재가 더해져서 현대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그리고 하드보일드 분위기의 작품치고는 그다지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원래대로의 공식이라면 중요 증인들이 중간중간 계속 죽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연결되겠지만 이 작품은 중요 증인 한명을 제외한다면 마지막 부분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짐과 동시에 주범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한번에 죽어버린다는 점에서 새롭기도 하고 내용 전개도 보다 깔끔하게 느껴졌어요.

미친 과학자가 불멸, 불사의 존재를 연구하다가 파국을 맞는다는 전형적인 줄거리 역시 나름의 과학적, 의학적 설득력을 지니는 요소들을 첨가하고 있어서 좋았는데 특히 미지의 세포 조직인 "X"라는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과정과 그 결과물은 나름 쇼킹합니다. 아주 옛날에 읽었었던 "엔젤딕"이라는 이현세 만화의 "미완의 변태"편의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이현세씨가 이 작품을 읽고 모티브를 얻었으리라는 강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복잡한 인간관계를 묘사함으로써 (물론 이러한 사소하고 큰 상관없은 인물들의 캐릭터 묘사가 재미있어서 그다지 늘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소설이 필요이상 길어진 것 같은 느낌이 조금 들기는 하며 제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성적 묘사가 제법 등장한다는 것은 좀 아쉽네요. 뭐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요.

어쨌건 결론적으로는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로렌스 센더스라는 작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전에 읽었던 작품들만 보더라도 실망스러운 부분은 많지만 그래도 "글재주는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작품은 전작들의 아쉬운 부분을 거진 걷어내고 재미까지 덧붙여졌을 때의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네요. 그야말로 포텐터진 유망주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또다른 걸작 시리즈라는 "대죄" 시리즈도 한번 구해봐야겠습니다.

PS : 저는 마지막 엔딩에서 주인공이 애인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의 엔딩과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상한 연상이네요...^^

2005/06/23

heads - 히가시노 게이고(글) / 마세 모토로우(그림) : 별점 2점


착하게만 인생을 살아온 나루세 준이치는 어느날 강도를 만나 머리에 총을 맞은 뒤 의학사에 전무했던 "성인 뇌 이식" 수술을 받게 된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나루세는 퇴원하는데 이후 발작적인 폭력성향에 시달린다. 원인을 알기 위해 자신에게 뇌를 기증한 도너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던 나루세는 이식받은 뇌의 원래 인격에 서서히 잠식당하게 되는데.....

음, 사실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인기 위주의 가벼운 글만 쓴다는 선입견이 어느새 생겨버렸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이 만화도 출간된 지는 좀 되었지만, 그리고 스스로도 추리 매니아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다지 구해볼 노력이나 생각이 들지 않았던 차에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많이 뻔합니다. 이식수술을 통해 이식받은 당사자가 원래 도너의 인격에 침식당한다는 소재는 너무 많이 나와서 식상할 정도죠. 거기에 도너의 정체가 충격적이며 모든 것의 배후에 뭔가 국가기관 급의 배후가 존재한다는 설정 역시도 진부한 수준을 넘어서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한 20년 전에 나왔더라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소재죠. 거기에다가 마무리가 너무 쉽게, 간단하게 끝나버려 더욱 불만스럽네요.
비슷한 설정이었던 "지뢰진"의 에피소드 - 여자 킬러가 착한 여인의 심장을 이식 받은 후, 자신에게 닥쳐오는 사랑이라는 인간다운 따뜻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심장 제공자가 사랑했던 사람을 하나씩 죽여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인을 제거하려 한다 - 가 훨씬 좋았어요. 이왕 뻔한 소재를 쓴다면 이정도 의외성과 변화 정도는 가져다 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 작품은 너무 쉽게 간 듯한 느낌이 아무래도 강합니다.

그래도 만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되어 작품이 좀 살기는 합니다. 그림도 괜찮고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너무 잘게 나눈 컷과 가끔 캐릭터들의 인상이 달라져 보이는 등의 문제는 있지만 만화로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하네요. 최근에 출간되었었던 추리만화들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안들던 차에, 특히 아마기 세이마루 원작의 만화인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나 "리모트" 같은 경우는 정말 기본도 안되는 작가가 그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그래도 기본은 있는 작가가 그려주니 추리만화 팬으로서는 기쁠 뿐입니다.

허나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내용이 너무 뻔해서 점수를 주기 어려워요. 제 인상에 남아있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 커졌는데, 아무래도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하고는 맞지 않는 듯 하군요.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닌 마세 모토로우의 신작을 기대해 봅니다.

2005/06/22

마지막 파티 - 윌리엄 캐츠 : 별점 2.5점

마지막 파티 윌리엄 캐츠 지음, 정태원 옮김/고려원(고려원미디어)

사만다는 꿈에 그리던 남자인 남편 마티를 만나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결혼 1년차의 주부. 그녀는 남편의 다가오는 생일을 맞아 기억에 남을 파티를 준비하려고 남편의 과거 학교 친구와 은사를 초대하려 하나, 그때부터 남편의 과거가 다 거짓이고 자신이 알고있는 남편 마티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해마다 12월 5일에 벌어지는 "캘린더"살인마로 불리우는 인물에 의한 연쇄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스펜서 크로스 경감은 우연히 입수한 사만다의 신고 파일을 통해 마티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수사에 착수하는데...

고려원 미스터리에서 출간된 연쇄 살인마를 다룬 서스펜스 스릴러물.

남편의 과거에 대한 거짓을 깨닫고, 조사가 거듭될 수록 남편의 무서운 과거가 드러난다는 설정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죠. 이야기의 전개 역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스릴러의 포맷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고요. 내용도 수사과정에 많이 치우쳐져 있으며 범인과 진상 역시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편이라 추리적인 요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드러나는 진상과 연쇄살인과 연계된 스토리 구성은 제법 짜임새있고 흥미진진합니다. 작가가 독자를 사로잡는 포인트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사만다의 남편의 과거에 대한 추적과 살인마가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는 과정이 교차되어 전개되는 부분이 특히 탁월하며 사건에도 12월 5일이라는 일종의 "시한 장치"가 있다는 설정이 아주 돋보였어요.
무엇보다도 후반부에 2번의 반전으로 진부함을 상쇄시켜 주고 있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좀 뻔한 이야기 전개에 의외성과 재미를 부여해 주는 요소로 잘 활용되고 있거든요. 특히 그야말로 의표를 찌르는 첫번째 반전이 아주 좋더군요. 두번째 반전은 사실 예측 가능한, 좀 뻔하고 안일한 설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여지니까요.
그 외에도 남편의 정체를 궁금해 하며 고민하는 사만다와 연쇄살인마의 심리묘사 디테일도 상당한 수준이라 이래저래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전형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으나 최소한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2005/06/21

공포특급 6 일본편 -정태원 편역 : 별점 2점

공포특급 6 - 4점
출판사/한뜻

한때 괴담류 서적의 붐을 타고 쏟아진 기획 도서 시리즈 중 한권. 터미널 가판대에서 접할 수 있는 싸구려(?) 급조 기획물이죠. 평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헌책방 쇼핑중 우연찮게 이 일본편만 한국 추리문학계의 큰 기둥 중 한분이신 "정태원" 선생님께서 편역했다는 것을 알고 주저않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싼 가격에 두께도 얄팍하니 적당한 만큼 쉬엄쉬엄 읽기에도 좋을 뿐더러, 정태원 선생님이 손댄 덕분인지 유치찬란 싸구려 표지와 기획의도에 걸맞지 않게 내용이 무척 알차서 마음에 듭니다. 선정 작가들이 일본 단편의 제왕인 아토다 다카시와 호시 신이치, 아카가와 지로, "허무에의 공물"로 유명한 나카이 히데오,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오야부 하루히코 등등 화려한 편이거든요. 또 추리 작가들이 많아서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만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단편 끄트머리에 짤막하게 소개되는 정태원 선생님 특유의 작가 소개 부분도 좋았고요.

그러나 역시 기획 도서의 한계이자 특성으로 보이는데 대부분의 수록작들이 2~3페이지 내외의 꽁트로 구성되어 있어서 깊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쉬웠습니다. 225페이지짜리 책에 실린 단편이 40편이 넘으니 작품으로서의 기본 수준을 갖추지 못한 정말로 형편없는 이야기들도 많아요. 특히 아토다 다카시 작품들이 그런데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은 수준의 작품도 제법 있더군요. 이 작가도 정말 작품 편차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태원 선생님의 이름을 믿고 구입한 보람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품"의 기획의도를 따르면서도 고심해서 작품을 선정한 듯한 정태원 선생님의 노고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소장가치가 있는 걸작선은 아니지만 일본 단편을 좋아한다면 한번 접해봐도 좋을 듯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내용 요약은 워낙 형편없는 작품도 많아 하지 않겠습니다만, 베스트로는 기발한 발상과 서늘한 반전이 인상적인 전형적인 아토다 다카시 스타일 작품인 "스타탄생", 야구장의 홈런볼을 이용한 기상천외한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적 성향이 짙은 "검은 홈런", 두 남자의 결투를 다룬, 추리물에 가까운 "색다른 결투", 피식하는 재미가 있는 "저주의 나이프", 여기까지는 모두 아토다 다카시의 작품이었고 그 외에도 순문학적이면서도 괴기스럽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잘 발휘된 하야마 요시키의 "시멘트통 속의 편지", 짤막한 꽁트지만 제목과 이야기 전개가 잘 어우러져 극적 반전을 짧은 페이지 안에서 이끌어 내는 이쿠시마 지로의 "유전"을 꼽겠습니다.

세계 미스터리 명작여행 악성인자 - 정태원, 최진섭 편역 : 별점 2점

지난주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단편집이라 주말동안 한번에 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수록작들이 기존에 잘 알려져있는 걸작들이 대부분이라 아쉽더군요. 제가 이미 읽었던 단편이 상당수이기도 하고요. 이런 책에는 보다 마이너하고 국내 독자가 접하기 힘든 작품들 위주로 선정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메그레 경감의 단편이나 더쉴 해미트의 컨티넨털 옵 단편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홈즈 단편과 브라운 신부 단편, 포와로 단편은 너무 안이한 선정이었습니다. 단편의 거장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앤솔로지에 포함된 작품들이 대부분인 헨리 슬레사 작품이 3편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대충 선정한 느낌이고요. 여튼,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책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어요.

또 앤솔로지로서의 정체성 문제도 큽니다. 일단 작품 선정에 있어서 기준이 모호해요. 연도별 베스트나 작가 중심 선정도 아니고 장르도 정통 추리물에서부터 서스펜스 스릴러, 꽁트, 마지막에는 SF 분위기의 단편까지 실려 있는 등 기준을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또 기왕에 선정했다면 편집에 있어서는 연도별로 배치하였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라 혼란스러웠어요.

전체적으로 초심자들이 즐기기 좋은 선정이기는 하나 너무 평범하고 무난하달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세계 서스펜스 명작여행" 보다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맛이 없네요. 제가 이런저런 작품을 너무 많이 읽은 탓도 있겠지만...

베스트는 제가 안 읽었던 작품 중에서만 뽑아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정통 추리물 "다섯명의 용의자"와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 버젼이라는 앤소니 버클리의 "무서운 초콜릿" 입니다. 더쉴 해미트의 "파리 종이"도 괜찮았어요.

작품별 간략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돼지와 피아노 - 헨리 슬레사
폭력적인 남편에게 괴롭힘 당하며 사는 한 여인이 숙면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 등장하는 단편. 심리 드라마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2. 헬로 자스민 - 헨리 슬레사
로봇개발에 취미가 있는 해리는 아내 자스민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만든 로봇 맥더프를 프로그래밍 하는데....
단편의 거장 중 하나인 헨리 슬레사의 독특한 단편. 다른 앤솔로지에도 많이 실려있는 작품이죠. 반전의 묘미가 탁월합니다.

3. 세 여인의 공통분모 - 빌 프론지니
30대의 금발머리, 그리고 영업을 위해 자주 출장가는 세 여인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한 남자가 자수하지만 과연 동기는?
단편으로 더 유명한 작가인 빌 프론지니의 괜찮은 작품입니다.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도 실려있는 작품이죠. 짧지만 강렬한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4. 한낮의 정사 - 브루노 피셔
앞집에 사는 노마가 살해당하고 불륜관계에 있었던 TV 수리기사 래리 포레스트가 구속된다. 그러나 브린 형사는 새로운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데...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단편으로 짧은 길이 안에서 꼼꼼하면서도 공정한 전개, 그리고 화자가 남편이라는 독특함까지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가 참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다른 앤솔로지에 수록된 작품이긴 하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5. 색다른 토끼 스튜 - 윌리엄 아이리쉬
수많은 앤솔로지에 실려있는 걸작 단편. 지금은 낡아 보이지만 괜찮은 증거 인멸 트릭이 등장하는 고전입니다.

6. 미인과 초콜릿 - 로버트 블록
아내 메어리를 죽이고 애인 프란시스와 새로운 생활을 꿈꾸는 존은 약제사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 직접 독을 넣은 초콜릿을 제조하여 아내에게 선물로 준다.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서 본 작품입니다. 살인을 계획하는 과정을 주 내용으로 하되 반전을 통한 파국으로 끝나는 미국 추리 단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런 전개는 "헬로 자스민"하고도 똑같죠.

7. 살아있는 라디오 - 존 딕슨 카
중요한 연구중이던 두 남녀가 허름한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라디오소리에 괴로워하다가 유령이 나온다는 방에서 라디오를 발견하지만 그 안에는 시체가 있는 상황. 과연 진상은?
꽤 장황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나름 명쾌한 해석과 결말이 있는 잘 짜여진 고전형식의 추리 단편입니다. 특히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거장의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작품이었습니다.

8. 사랑의 도박 -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작가 데이비드의 비서로 일하는 펜은 데이비드의 아내 지니와 사랑에 빠진다. 데이비드는 펜을 조롱하고 지니와의 사랑을 강하게 하기 위해 실종사건을 연출하는데...
스릴러라고 봐야 할까요? 마지막 한줄로 사건을 정리하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줄의 증언이 실제 수사단계에서 얼마나 확신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9. 초록색 벌레 - GK 체스터튼
브라운 신부 단편입니다. 굉장한 힘을 가진 인물이 조그만 흉기를 써서 광포한 살인을 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하지만 브라운 신부 특유의 화법으로 설명하는 작품으로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 단편입니다.

10. 마음 돌리기 - 도널드 마틴
그래디 부인은 자신의 수표를 훔치려다 다리를 삔 토빈이라는 젊은이를 치료해 주며 그를 개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토빈은 부인의 보석을 가지고 달아나게 된다...
추리물로서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마지막 반전이 괜찮은 소품입니다.

11, 파리종이 - 더쉴 해미트
건달과 사랑에 빠진 명문가 막내딸이 송금을 요청하자 컨티넨털 옵이 수표를 가지고 출동한다. 하지만 아가씨는 간데없고 송금요청은 조작된 것이었는데...
컨티넨털 옵 시리즈로 길이도 길고 내용도 풍성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책이 단서가 되는 등 트릭과 전개도 꽤 잘 짜여진 편이고요. 특히나 하드보일드이면서도 사람이 많이 죽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알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12. 위험한 초보운전 - 프레드 S 토비
굉장히 짤막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짧은 길이 탓인지 사건의 동기가 미흡한 것은 아쉽네요.

13. 사라진 열쇠 - 애거서 크리스티
포와로 단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죠.

14. 다섯 명의 용의자 - 죠르즈 시므농
벨기에 국경 밖으로 나가는 열차에서 한 부자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같은 객차안에 있었던 다양한 직업과 국적의 5인뿐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이 단편집 최대의 수확입니다.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단서가 완벽하네요. 트릭 자체는 별게 없는 완전범죄 스타일의 작품은 아니지만 메그레 경감의 수사방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15. 무서운 교배 - 죤 콜리어
예전에 호러 앤솔로지에서 본 기억이 나는 짤막한 호러단편입니다.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 의문이네요. 전혀 성격이 맞지 않거든요.

16. 무서운 초콜릿 - 앤소니 버클리
클럽 회원인 윌리엄 경에게 선물로 배달된 초콜릿을 같은 클럽 회원인 버레스포드가 아내에게 주기위해 대신 받지만 그 초콜릿을 먹은 아내가 독살당하게 되는데...
역시 이 단편집에서 베스트 중 한편입니다.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버젼이라고 하는데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전개가 나무랄데 없네요. 불특정 다수를 노린 듯한 트릭도 굉장히 우수하고 독창적입니다.

17. 약속의 그늘 - M.레버
모파상 단편같은 지독하게 잔인한 인생사를 다룬 소품. 그러나 15편 "무서운 교배"와 같이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18. 빨간 머리와 지하실 - 코난 도일
"붉은 머리 클럽"입니다. 설명은 필요 없겠죠?

19. 매력적인 안드로이드 신부 - 헨리 스레사
SF취향의 소품으로 전 아시모프 작품인줄 알았습니다....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설정만 독특한 작품으로 이 작품도 이 단편선 성격과는 잘 맞지 않는 선정인것 같네요.

2005/06/17

헌책방 쇼핑

간만에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서 몇권 구입했습니다.

사실 우연찮게 찾아간 헌책방 사이트에서 정태원 선생님이 편역한 "악성인자"라는 단편집을 보고 구매한 것이고 다른 책들은 거의 충동구매로 구입했습니다.
'악성인자"는 정말 꼭 보고 싶었던 단편집인데 구해서 기쁘네요.

다른 책들로는 먼저 정태원 선생님이 편역한 "공포특급 6", 일본 작가들의 공포 단편이 실려있는데 정태원 선생님이 편역하신 만큼 기대가 됩니다. 유치찬란 싸구려 책 표지 디자인은 용서가 용납되지 않는 수준이지만요.
로렌스 센더스의 "제 6계명",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평이 좋은 작품이라 싼 맛에...
윌리엄 캐츠의 "마지막 파티", 리뷰들만 보면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역시 싼 맛에...
그리고 김성종 선생님의 "최후의 증인", 얼마전에 관련 리스트를 보기도 했지만 한국 추리소설중에서도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일 듯 해서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2만원도 안 들었으니 헌책방은 역시 이런 재미에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들만 읽어도 다음주도 즐겁게 보낼 수 있겠네요.

아내의 여자친구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 별점 3점

아내의 여자 친구 - 6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대교북스캔(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

석원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와 리뷰를 읽고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장정과 디자인, 제목만 보아서는 추리쪽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 석원님 글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은데 먼저 감사 드립니다.

일본에서 꽤 잘 나간다는 여성 작가 고이케 마리코의 단편집으로 총 6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단편들의 소재가 주로 "가족"과 그 갈등관계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사건들도 이 갈등관계를 축으로 벌어지고 있어서 스케일이 작은 대신 현실감이 넘쳐서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예를 들자면 첫번째 작품 "보살 같은 여자"는 고모, 새엄마,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여성 중심 가족과 돈줄인 아버지와의 갈등관계. 두번째 작품 "추락"은 장인을 정점으로 하는 "가키누마 패밀리"에 속한 데릴사위 대학교수 가키누마의 은밀한 문제. 세번째 작품 "남자 잡아먹는 여자"와 네번째 작품 "아내의 여자 친구" 역시 한 가정 내에서 커지는 갈등관계를 다루고 있죠.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하고 감칠맛나는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추리적 요소가 많지는 않았고 괜찮은 설정에 비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여운을 남기는 깊은 맛은 로얄드 달이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작가들에 비해서는 부족한 편이에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 되는 맛이 제법 있어서 추리적인 요소에 치우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여성판 아토다 다카시 느낌, 혹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쓴 추리소설같은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의 베스트는 제일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까운 "보살 같은 여자"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남자 잡아먹는 여자", 표제작 "아내의 여자친구"입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는 재미는 있는 만큼 주위에서 발견하신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보살같은 여자" :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요시마루 가문. 집안의 돈줄인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의 거동이 어려워지며 점점 히스테리가 심해지고 집안의 다른 모든 가족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살의를 서서히 품게 된다.
이 작품으로 89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했네요. 제일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트릭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동기와 수법이 확실한 제일 정통 추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추락" :
여사원 사카모토 미야코는 소설가를 꿈꾸며 자신이 다니는 문화센터 창작반의 강사 가키누마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와중에 사고로 추락사하게 된다. 하지만 가키누마는 미야코와 드라이브할 때의 뺑소니 사건을 은폐했던 이유로 그 기록을 미야코가 남기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미야코가 추락사하기 전에 남기는 글 때문에 자살로 포장되는 사고사 과정이 기발합니다. 뭔가 다른 트릭으로 포장해서 쓴다면 근사한 정통 추리물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좀 실망스럽네요.

"남자 잡아먹는 여자" : 
하나뿐인 남동생이 결혼만 하면 남편이 사고로 죽는 여인과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먼저 오랫동안 키워온 개가 죽고 다음에는 주인공의 아들이 사고로 죽게되며 이에 앙심을 품은 주인공은 시동생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을 주로 묘사하는 심리드라마로 설정이 굉장히 좋습니다. 실제로도 있을법한 이른바 "남자 잡아먹는" 여인을 공포와 사건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이야기구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설득력 있고 결말도 깔끔하면서도 나름의 반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서 애완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보이네요.

"아내의 여자친구" :
약간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주인공이 아내가 학창시절 여고 동창과 친해지며 집밖에 나가는 시간이 잦아지자 그 여고 동창을 살해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를 현장에 두고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주인공의 심리를 처음에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주인공이 아내를 지극히,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과 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며 마지막 반전으로 독자의 뒷통수를 칩니다. 이 단편집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군요.

"잘못된 사망장소" :
한 방송인의 불륜상대인 여성이 그 방송인을 살해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방송인의 가족에게 사실을 고백하지만 가족은 오히려 온 가족이 나서 그의 시체만 서둘러 본가로 옮기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가족"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이 좀 특이하군요. 내용도 쉽게쉽게 진행되며 그다지 긴장감도 없고 설득력이 떨어져 이 책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종막" :
감독의 아내와의 불륜으로 주연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은 그 여자의 집착을 견디지 못해 살의를 품고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통해 알리바이를 위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비하여 범행을 실행에 옮기는데...
범인, 그리고 범행의 과정이 먼저 나오는 도서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트릭을 단서에 의해 밝혀내는 구조는 아니고 범인의 실수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때문에 완벽한 추리물로 보기는 좀 어렵네요. 그래도 알리바이 트릭 자체는 단순하지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2005/06/15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정태원 역 : 별점 3.5점


소문만 듣던 책인데 인터넷 서점에 마침 재고가 있길래 냉큼 구입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들의 단편선이니 구입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목과 서론을 보니 일본 추리작가 협회에서 직접 선정한 2000년도판 베스트 단편선쯤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한국 추리 작가 협회가 매년 출간하는 베스트 추리소설 모음집과 유사한 느낌입니다. 허나 워낙 일본이 추리 강국이라 저변과 시장이 넓은 만큼 수록된 작품의 양이 상당하네요. 덕분에 2권으로 나누어져 출판되었으며 1권에 11편, 2권에는 9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상당한 양이긴 한데 수록된 작품들이 우수하며 재미까지 있어서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통 추리물을 비롯해서 형사물, 공포스릴러, 환상단편, 인간 드라마, 심리 서스펜스에서 패러디까지 각종 쟝르를 넘나들며, 전개와 설정도 다양해서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고요.

작가군의 선정도 독특해서 사노 요, 노리츠키 린타로, 이마무라 아야, 모리 히로시, 니카이도 레이토 등 유명 작가들은 물론 끝부분 작가 소개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라고 표시된 작가도 상당수 있습니다. 이렇듯 작가진만 보더라도 정말로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엄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 주네요.

전체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이 실려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1권의 베스트는 사기극 "영원표묘", 정통추리물에 가까운 "사용중"과 "일곱통의 편지"이며 2권의 베스트는 정통 추리 "흉소면", "까마귀의 계시"였습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평균 이상의 재미는 전해줍니다.

번역이 약간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과 조금 더 작은 판형으로 예쁘게 장정하였다면.. 하는 등의 아쉬움은 약간 있지만 이렇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죠. 추리 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진수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생각되며, 수고롭더라도 구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00년만 아니라 다른 년도의 베스트 단편 모음집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자세한 각 단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
1. 잠들 수 없는 밤을 위하여 - 오리하라 이치 :
잡지의 "고민 상담실"의 투고와 신문기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으로 소품에 가깝습니다.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지만 마지막의 여운이 인상적이었어요.

2. 거짓말쟁이의 다리 - 사노 요 :
형사수사물. 두 형사의 대화로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의 뒤에 감추어진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는 전개로 잘 짜여져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약간 억지스러운 면은 있네요.

3. 배반의 푸가 - 스즈키 기이치로 :
영안차 운전수라는 독특한 직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여자의 집착을 서늘하게 그린 소품. 약간 로얄드 달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인데 조금 더 압축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4. 영원표묘 - 구로카와 히로유키 :
미술상을 무대로 한 독특한 사기극. 만화 "갤러리 페이크"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작품으로 초반에 제공되는 명확한 단서를 통해 결말까지 이끌어내는 추리극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독자까지 속이는 세련된 전개와 트릭이 돋보입니다. 작가가 미대 출신의 전문가라 그런지 이야기에서 보이는 미술품에 대한 묘사도 좋은 괜찮았어요.

5. 지난날의 사랑 - 오사카 쓰요시 :
사립탐정이 여배우의 의뢰로 애인의 불륜 뒷조사를 한다는 탐정물. 별다른 추리적인 요소는 없지만 이야기 전개도 깔끔하고 무난한 편입니다. 하지만 베스트로 선정되기에는 심심한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6. 얼음설탕 - 후지모토 유키 :
한 주부가 과거에 사라졌던 애인과 우연히 재회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점점 수렁속으로 빠져든다는 작품. 여성버젼의 스텐리 엘린 단편같다는 생각이 드는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심리 묘사가 탁월하며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7. 야수의 기억 - 고바야시 야스미 :
호러 스릴러의 성격을 띈 작품으로 다중인격의 소유자로 다른 인격일 때의 파괴적인 행동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추리적인 성격도 확실한 편이고 반전도 좋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속이기 위함인지 전개가 필요이상으로 복잡한 것은 감점 요인입니다.

8. 은폐꾼 - 가스미 야스시 :
사회적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불상사를 국가 차원에서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단체가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설정과 전개가 스티븐 킹의 "금연 주식회사"와 유사하네요. 기발한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후반 전개는 좀 뻔했습니다.

9. 사용중 - 노리츠키 린타로 :
한 추리작가가 살해되면서 그가 생각한 추리소설의 전개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입니다. 스텐리 엘린의 작품을 인용해가며 전개되는데 밀실 트릭에 대한 생각은 노리츠키 린타로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더욱 재미있네요.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짧은 분량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충분히 전해주는 단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10. 일곱통의 편지 - 아사기 마다라 :
동거하던 남자의 어머니와 왕래한 편지로 이면에 숨겨진 살인사건이 밝혀지는 작품으로 전개도 독특하지만 추리적으로도 일품입니다.

11. 먼 창 - 이마무라 아야 :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이 불구가 된 사고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환상특급"에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이야기전개도 소녀의 일기로만 전개되어 독특합니다. 재미도 있었고 후반부의 아버지의 일기에서 밝혀지는 진상도 좋았지만 예측 가능한 결말로 흘러간 점은 아쉽습니다.

2권 -
시효를 기다리는 여자 - 니이츠 키요미 :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직전 진범의 심리와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작품. 독자를 속이는 소설만의 효과로서 이루어진 트릭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반전과 결말은 수긍하기 조금 어렵더군요.

부하 - 곤노 빈 :
한 경부보가 부하를 믿고 신뢰하여 방화범을 잡는 내용으로 인간 드라마와 추리물이 잘 섞여 있는 소품입니다.

흉소면 - 기타모리 코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 처럼 대학의 민속학자가 한 고택의 오래된 가면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본격 추리물. 트릭과 전개가 깔끔하고 단편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범인의 동기까지 설득력있게 설명되어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독점 인터뷰 - 노자와 히사시 :
한 유괴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된다는 약간 사회파 느낌의 단편. 사소한 단서로 진상이 밝혀지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구성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였지만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힌 드라마가 잘 살아있어서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석탑의 지붕 양식 - 모리 히로시 :
사이카와와 모에 커플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하지만 둘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모에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사이카와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결국 정답은 집사가 맞춰버린다는 "흑거미 클럽"과 유사한 결말이 눈에 띄네요. 그러나 고대 인도의 수수께끼의 석탑 지붕 양식에 관한 수수께끼라는 설정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개중 설득력 있는" 것이라는 결말은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명성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출범 - 와카다케 나나미 :
메이지시대를 무대로 천방지축 아가씨의 탈출 계획을 막는 하녀의 기지가 발휘되는 소품입니다. 일본어를 이용한 트릭이 하나 등장하나 그다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유쾌한 분위기는 즐거웠습니다.

까마귀의 계시 - 우타노 쇼고 :
동네 쓰레기를 마당에 모아놓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정통 추리 단편. 사건 자체가 백만분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만 뺀다면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전개도 깔끔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생환자 - 츠부라야 나츠키 :
산악 경비대 대장을 주인공으로 산에서 발생한 알 수 없는 프로 등산인의 추락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재와 설정이 독특하며 등산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별로 평가할 건덕지가 없었어요.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 -니카이도 레이토 :
사람들이 식사 대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장소인 "독서 레스토랑"을 무대로 주인공 가스케가 건방진 싸구려 평론가 고토쿠를 추리소설 품평 내기를 통해 혼내준다는 작품.
독서 레스토랑과 추리소설 품평 내기라는 설정도 참신하고 등장하는 방대한 추리 작품에 대한 지식도 디테일하며 무엇보다 유쾌한 꽁트 분위기의 작품이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작가가 평론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엿보인다는 점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전개 자체는 로얄드 달의 포도주 맞추기 게임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라 신선함이 떨어지고 트릭도 추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작품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서중석


이 책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색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역사서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때만 해도 현대사에 대한 비중은 엄청 작았었고, 그나마도 독재정권하에서 대폭 손을 본 교과서였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읽으니 무척 신선하면서도 재미있어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조작된(?) 정보와 교육하에서 살아왔는지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일단 해방 이후부터 전두환 정권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습니다. 최근의 역사는 더 시일이 지난 뒤에 평가하겠다는 이야기일까요?

제일 앞머리는 해방 직후의 좌익, 특히 여운형의 활약에서부터 이승만의 과오와 6.25 전쟁, 그리고 4.19 까지를 조명하고 있는데 좌익과 우익을 어느정도 냉정하고 공평하게 보고 있는 시각이 돋보입니다. 자유당 정권의 수많은 부패와 과오가 눈에 띄네요. 그 이후는 장면 내각에 대한 냉정한 비판 뒤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비교적 공평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역사서로 냉정하게 평가 / 접근하고 있지만 역시나 박정희는 독재와 부정부패 말고는 별로 잘 한 것이 없군요. 우익이 찬양해 마지않는 경제성장은 미국의 자본을 들여와서 시녀노릇만 한 ("경제저격수의 고백"처럼) 것일뿐이죠. 그리고는 전두환 시대로 이어집니다. 전두환 역시 사리사욕을 위해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라는 명확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특히 이 두 군사정부 시기에 집중하여 암울했던 국내 민주주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에 대한 짤막한 설명으로 끝납니다.

단순히 그 정권하에서의 행위만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회현상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에피소드, 사건들도 제목대로 사진과 그림을 동원해서 디테일하게 접근하여 알려주는 방식도 마음에 드네요. 무엇보다도 그동안 보아왔던 다른 역사서들과 다른 공평한 시각이 눈에 띕니다.

책을 읽고나니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가장 불행했던 요소는 역시나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처벌이 없었다는 점 (친일파- 이른바 혁명세력 등)과 여러 질곡의 시기에서 미국의 개입이 너무나 심했다는 점, 극단적 반공체제로 극우보수로 흘러갔던 정치 상황, 그리고 박정희 시대부터 커지게 된 이른바 지역감정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와 전두환을 "前"대통령 취급하고 있는 역사관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죠.

저야 그나마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고 나서야 철이 든 셈이니 제가 무언가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겠지만 이러한 과오와 문제를 해결하는 몫은 결국 우리 세대로 이어지는 것 같네요. 앞으로 작은 것 부터라도 조금씩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가면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울러 자신이 보수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지지자들도 한쪽 방향으로 편중된 역사의식만 가질 것이 아니라 이런 책도 접하면서 보다 공평한 시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2005/06/12

흑거미 클럽 - 아이작 아시모프 / 강영길 : 별점 3점

흑거미 클럽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업무 때문에 차를 자주 가지고 다녀서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는 요즈음입니다만 석원님의 포스트에서 관련 글을 읽고 필받아서 읽게 된 작품입니다. 예전에 읽었었지만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차에 후루룩 읽고, 마침 리뷰도 작성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마음으로 써 봅니다.

SF로 더 유명한 작가 아시모프의 단편집으로 제목 그대로 "흑거미 클럽"이라는 일종의 사교 클럽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 매 단편마다 바뀌는 초대 손님이 가져온 사건을 클럽 회원들이 분석을 거듭하며 나름의 의견들을 내놓다가 마지막 진상은 급사 헨리가 탐정역을 수행하며 밝혀낸다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예외인 작품도 있긴 있습니다만...)
여러모로 설정면에서 아이디어가 돋보일 뿐더러 추리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생각되네요. 탐정역의 급사 헨리의 캐릭터도 조용하지만 신중하고 냉정한 면이 꽤 마음에 들고요.

또 사건을 외부에서 가져온 것을 놓고 토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줄거리의 핵심 요소인 만큼 안락의자형 추리물에 가깝긴 하지만 클럽 회원들의 직업이 전문성 높은 변호사나 암호전문가, 화학자, 수학자 등일 뿐더러 각자 성서나 영문학 등 특이한 분야의 전문가들이라서 사건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에 제공되는 정보의 수준이 높다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현실적이면서도 현학적인 재미를 전해주거든요. 이러한 점은 "구석의 노인"과 같은, 단순히 이야기 전달자와 탐정이 등장하는 구조에서 한단계 진보된 설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단편 끝부분에 아시모프가 추가한 개인적 내용의 글들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 후일담도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의 상황이나 아시모프의 유머 등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작가 아시모프도 상당히 즐기면서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추리적 요소는 그다지 대단하거나 기발하지 않다는 점은 아쉽네요. 사건들도 평범한 사건들 위주고요. 아울러 아시모프의 담백한 문체도 심심했으며 작가 특유의 불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장황하게 나열하는 부분도 많아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보다는 즐길거리가 훨씬 더 많은 것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저와 같은 추리단편집 팬이라면 꼭 읽어볼만한 작품집으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추리적으로는 "일요일 아침 일찍", 내용적인 기발함과 재미로는 "회심의 미소"와 "뚜렷한 요소"를 꼽고 싶네요. "가짜 Ph"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남자들만의, 그리고 회원들은 모두 "닥터"의 호칭을 가지는 기발하고 명석한 사교클럽, 저도 가입하고 싶습니다!

2005/06/09

바다의 어둠, 달의 그림자 - 시노하라 치에 : 별점 2.5점


쌍동이 자매 코바야카와 루카와 루미는 같은 학교 육상부 소속으로 육상부 선배 토우마 카츠유키를 서로 짝사랑 하고 있는 사이좋은 자매. 하지만 선배가 루미가 아닌 루카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날, 육상부 합숙에서 의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루미가 토우마 선배에 대한 감정을 루카에게 숨기지 않고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으로 죽이려 한다.

루미는 선배의 도움과 조사로 이 초능력은 바이러스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것과 바이러스에 감염된 날은 선배의 고백으로 루카에게는 인생 최고로 기쁜 날, 루미에게는 최악의 날이었다는 것 때문에 루카는 선한 마음을 유지한채 초능력을 얻게되고 루미는 사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자신에게도 있는 능력을 서서히 개발시켜 나간다.

하지만 루미는 자신의 혈액을 통해 다른 사람을 감염시켜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 가족과 학교 친구들, 마을 사람들을 서서히 감염시켜 루카를 궁지로 몰아가며 루카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혈액은 루미에게 감염된 사람들에게 혈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점차 지배와 정복욕이 커져 가는 루미에게 맞서 싸우게 된다.


꽤 오래되긴 했지만 상당히 유명한 만화죠.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진 히트작으로 한번 읽어 보고 싶었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닿지 않다가 우연찮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초능력을 주 소재로 하고 있는 탓에 기본 설정만 놓고 보면 뻔한 점이 많습니다. 초능력물로 착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약간 순정만화적인 분위기는 "붉은 이빨"과 유사한 느낌이죠. 초능력자들이 초인 록크의 "에스퍼"들 처럼 자연 발생(?) 한 것도 아니고 어떤 핏줄을 타고 나거나 돌연변이도 아닌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부분은 바벨 2세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도 하고요. 그리고 쌍동이 자매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된다는 숙명도 많이 등장해 왔던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초능력물이라면 이 작품이 그렇게 인기를 끌었을리는 없겠죠?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무엇보다도 선과 악의 숙명적인 싸움이 "한 남자" 때문이라는 굉장히 작으면서도 개인적인 부분이라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가 이 욕망을 이루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과정, 여기서 욕망이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전개도 굉장히 현실적이고요. 한마디로 말한다면 "옆집 처녀가 초능력자" 류의 전개랄까요?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이 너무나 확실해서 이야기의 중심이 잘 서있다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갈팡질팡 심리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역은 끝까지 확고한 선역, 악역 역시 끝까지 확실한 악역으로 남음으로 단순하지만 확실한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거든요. 두 쌍동이 자매의 순정만화같은 디테일한 심리묘사도 좋아서 상당히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고요.

그러나 재미는 여기까지입니다. 중반부터 의문의 사나이 존슨의 등장 이후에는 스케일도 엄청 커질 뿐더러 그 이후 새로운 초능력자들이 나오면서부터는 왠지 뻔한 초능력물의 궤도를 따라가버려 아쉽더군요. 물론 중반 이후 부분도 무협지스러운 재미는 있지만 초중반부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기에는 많이 부족하거든요. 보다 현실적이고 소박한(?) 한 마을과 가족을 서서히 침식해 가는 악의 세력 확장 부분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이 작품에는 평범한 초능력 액션물을 넘어서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바벨2세"의 무한루핑 대결이나 "붉은 이빨"의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에 비추어본다면 이 두 전설(?)같은 작품들보다 나은점도 분명 있고요. 선과 악의 대결이 펼쳐지는 초능력물에 대한 모범답안 중 하나랄까요?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은 아니고 지금 읽기에는 낡은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워낙 마이너하고 컬트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6/08

경제 저격수의 고백 - 존 퍼킨스 / 김현정 : 별점 4점

경제 저격수의 고백 - 8점
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황금가지

실제로 "경제 저격수"로 10여년간 일해온 존 퍼킨스의 고백담. 스스로의 양심에 너무나 반하는 행위로 인해 결국 경제 저격수로 일하며 쌓은 위치와 돈을 포기한 후 여러 협박과 주위의 압력을 이겨내고 기록한 내용입니다. 제목만 보면 그다지 끌리는 제목은 아니지만, 한번 손에 잡으니 맨 뒷장까지 손뗄 수 없게 하는 재미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요 소재인 "경제 저격수"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타 국가의 경제를 유린하는 인물로 설명됩니다. 예를 들면 한 국가의 전력 예상 수요를 굉장히 높이 산출하여 발전소나 댐 등의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외자, 여기서는 미국의 돈을 쓰도록 유도한 후 실질적인 개발은 미국 기업에서 담당하여 결국 돈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해당 국가에는 어마어마한 채무만 쌓이게 하는 그러한 작업들을 진행하는 인물들이죠. 뭐 미국 입장에서는 애국자일 수도 있겠지만 해당 국가들이 볼때에는 정말이지 해도 너무한 상황들만 진행되게 됩니다.

이러한 행위 중 저자는 주로 "석유"를 주 매체로 삼아 활동한 만큼 남미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활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만한 픽션을 넘어서는 재미가 넘칠 뿐더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이런 경제적 날강도 행위 이외에도 해당 국가의 위정자에 대한 여러가지 공작, 특히나 저자의 고백대로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는 "너무나 청렴하고 고결한" 지도자가 등장하였을 경우에 경제 저격수가 실패하면 결국 "자칼"이 등장한다는 대목과 그 실례 -에콰도르와 파나마의 지도자가 암살당하고 결국 두 국가가 추구하던 노선이 변경되는 과정- 는 정말 충격적입니다. 파나마의 노리에가 사건은 저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실체를 알고 나니 더욱 화가 나네요. 저자의 말대로 앞으로 세계 정세, 특히 개발 도상국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저도 좀 차분히 분석해서 봐야 겠습니다. 대부분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읽고 나니 상당히 미국 의존도가 높았고 지금도 높은 우리나라를 생각해 볼때에는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빼앗기고 있는 걸까요? 거기에 아직도 석유재벌 "부시" 가문을 추종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는 정신이 아득해지고요. 여의도 광장에 운집하는 이른바 "건전 보수 세력"에게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그림자 정부"같은 황당무계한 책 보다는 이런 책이 보다 잘 팔렸으면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무리일까요?

여튼 별점은 4점. 저자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많이 팔려서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PS : 이미 책이 발표되었으니 그럴리야 없겠지만 저자에게 "자칼"이 등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봤자 우리나라에서는 기사화도 안 되겠지만....

추리소설 필독서 16선이라는 목록을 보고...

추리소설 필독서 16선?! 

왕님 포스트에서 가져왔습니다.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2. 오리엔트 특급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4. 통 ~ 프리먼 윌스 크로포츠
10.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11. 노란방의 비밀 ~ 가스통 르루
13. 환상의 여인 ~ 윌리엄 아이리쉬

모 무가지의 어떤 기자가 작성하셨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글 치고는 국내 추리소설이 2편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척 환영할 만 하네요. 저도 무척 좋아하는 "Y의 비극"이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전 걸작 "통"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반갑고요.

하지만 걸작이긴 해도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이 3 작품이나 포함된 것은 좀 아쉽고 대체로 작가의 지명도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 합니다. 예전 "명탐정 추리특급" 어쩌구 류의 백과사전에서 나올법한 정보인거 같기도 하고요. 또한 목록의 5, 6번은 유명세에 비한다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니며 홈즈 시리즈의 진정한 걸작은 단편선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좀 의외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편선집이 포함되지 않은 장편 위주의 선정이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스럽습니다. 그리고 저도 얼마전에 읽었었던 쓰레기 "벌거벗은 얼굴"이 대체 왜 포함되어 있는지는 정말로 의심스럽네요. 시드니 셀던이라는 작가 이름 때문일까요? 무엇보다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정통파 독자라면 그다지 찬성할 만한 초이스는 아닌 듯 싶군요. 많이 팔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목록에서 보기에 반가운 작품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추리소설 입문자"를 위한 가이드로는 비교적 적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공신력은 전혀 없는 목록이긴 하지만 체크해 보니 총 12편을 읽었네요. 반 다인의 작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도 읽을 예정은 없지만 한국 작품 2편은 꼭 읽어 봐야 겠습니다.

* 2013년 1월 8일 추가. 이후 전권을 다 읽었습니다.

2005/06/06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조지 루카스


정말로 완결일까요? 여튼 드디어 다 보게 되었습니다. 스토리야 모두들 아실테니 생략하고 제 개인적인 감상편만 적어 보겠습니다.

일단 저는 상당히 지루(!) 했었습니다. 사실 조지 루카스가 각본이나 영화 연출에 대단한 몰입감을 가져다 주는 작가는 아니기에 예상은 했었지만 각본과 화면 연출 자체는 특수효과를 제외한다면 그다지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대사들도 상당히 유치한 편이기도 하고요. 중간부분에서는 졸기까지 했습니다.
거기에 개연성 없고 너무나 빠른 전개, 특히 아나킨이 어둠의 포스에 이끌리게 되는 부분은 설득력이 너무나 떨어집니다. 이 부분은 애니메이션 "Clone Wars"를 보아야만 그나마 조금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또 어렵게 어렵게 배신까지 해 가며 어둠의 포스의 부하가 되었지만 결국 시스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는 것이 없더군요. 더군다나 어둠의 포스에 빠지면서까지 살리겠다고 맹세한 파드메는 왜 그리 쉽게 죽이게 되는지.... 막판에 다스베이더로 재탄생(?) 한 직후 파드메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수긍하는지도 이해가 안되더군요. 저라면 시스의 목을 졸라버렸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막강한 적으로 묘사되는 두쿠 백작과 그리버스 장군의 최후는 어처구니 없을 지경입니다. 특히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도 대단하게 묘사되었던 그리버스 장군은 오비완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거의 도망가다가 죽어버리니 허탈하기만 하네요.

또 루카스가 시리즈의 연결을 위해 무리하게 설정한 장치들도 눈에 거슬리더군요.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는 오비완의 영혼이 가끔 등장하던 이후의 시리즈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겠지만 억지스러웠고 뭔가 살아있는 제다이들이 있는 것 같다는 여운을 남기는 것도 좀 불만스럽네요. 한번에 싹 정리되는 것처럼 묘사 했으면 오히려 이해가 쉬웠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시리즈의 결말을 어쨌건 매듭지었다는 점에서는 개인적으로도 큰 숙제를 끝낸것 같아서 기분은 상쾌합니다. 누가 뭐래도 장대한 스케일과 특수효과는 압권이고 아나킨과 오비완의 숙명의 대결은 정말로(!) 볼만한 장면이기도 하고요. 이제 에피소드 1편부터 다시 차분히 감상해 보아야 겠네요.

PS : 디지털 상영관에서 감상했는데 사실 필름과의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더군요.
PS2 : 아나킨 역의 배우는 아무리 봐도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2005/06/01

실험부부 (炎の女) - 다카기 아키미쯔 / 홍영의 : 별점 3.5점

정치가 가네꼬 센죠와 시오다 고헤이는 서로 앙숙으로 가문도 원수같이 지내는 상황. 가네꼬의 딸 하츠에와 시오다의 아들 쇼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헤어져야만 했고 하츠에는 앙갚음의 심정으로 쇼지의 회사 상사 모리 나오키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뒤 모양새만 갖춘 부부로 지내게 된다.

이러한 하츠에를 견디지 못한 모리는 정부 리츠코와 공모하여 알리바이를 만들고 하츠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나 알리바이를 위해 리츠코가 하츠에로 변장한 직후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어 하츠에의 신분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리츠코가 입원한 이후부터 시오다 가문의 주변에 연쇄살인이 발생하고 모든 살인 사건 현장에 하츠에를 암시하는 향수에 적신 손수건이 발견되는데...


다카키 아키미쯔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 제목이 너무나도 황당한데 원제도 "불꽃(같은) 여자"라는 조금은 낡은 듯한 제목이네요. 제목과 너무나도 형편없는 책 디자인에 비해 번역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밀고자" 이후의 작품으로 시리즈의 다섯번째 장편이라고 합니다. 발표년도는 1967년이군요.

전작들처럼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가 여러 단서를 모아 조합하여 추리하는 전개인데, 정통물에 가깝게 모든 정황과 사건에 관한 증거들이 독자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지적인 만족감을 느끼면서 즐길 수 있는 정교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그리고 평범한 인물에 가까운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라는 캐릭터도 그다지 튀지는 않지만 사건들을 차분히 이해하고 평가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해결하는, 한마디로 해설자와 탐정을 결합한 또다른 형태의 탐정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고요.
그간 읽었던 2편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와는 다르게 4명이나 살해당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연쇄살인극은 사건이 많으므로 단서도 많이 제공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용의자가 점점 줄어들어 막판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기 쉬워진다는 약점이 존재하나 이 작품은 치밀한 전개와 기발한 트릭으로 이러한 약점을 끝까지 잘 커버하고 있습니다.
또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를 제외하고 주 화자로 등장하는 리츠코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해서 사건마다 급변하는 주변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과 공포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 되면서도 돋보이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작인 "야망의 덫 (밀고자)"와 비슷한 전개라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식상할 수도 있는 트릭이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증거보다는 일종의 함정수사를 펼친다는 점은 반칙으로 느껴졌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결정적인 증거 자체가 없다는 점은 정통파로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되고요.
그리고 범인이 막판에 사건을 "미궁"으로 모는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정적인 범인역의 희생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도 천재적 발상의 범죄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여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전작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된 구조로 전개되기 때문에 읽기전에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의 작품에서도 상당히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이라 그런지 시대적으로 낡은 티도 적으며 즐길거리도 많거든요. 무엇보다도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와 천재적이고 악마적인 범인과의 두뇌 게임 하나만으로도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범인이 "거의" 성공할 뻔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죠. 구하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