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단편집이라 주말동안 한번에 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수록작들이 기존에 잘 알려져있는 걸작들이 대부분이라 아쉽더군요. 제가 이미 읽었던 단편이 상당수이기도 하고요. 이런 책에는 보다 마이너하고 국내 독자가 접하기 힘든 작품들 위주로 선정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메그레 경감의 단편이나 더쉴 해미트의 컨티넨털 옵 단편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홈즈 단편과 브라운 신부 단편, 포와로 단편은 너무 안이한 선정이었습니다. 단편의 거장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앤솔로지에 포함된 작품들이 대부분인 헨리 슬레사 작품이 3편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대충 선정한 느낌이고요. 여튼,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책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어요.
또 앤솔로지로서의 정체성 문제도 큽니다. 일단 작품 선정에 있어서 기준이 모호해요. 연도별 베스트나 작가 중심 선정도 아니고 장르도 정통 추리물에서부터 서스펜스 스릴러, 꽁트, 마지막에는 SF 분위기의 단편까지 실려 있는 등 기준을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또 기왕에 선정했다면 편집에 있어서는 연도별로 배치하였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라 혼란스러웠어요.
전체적으로 초심자들이 즐기기 좋은 선정이기는 하나 너무 평범하고 무난하달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세계 서스펜스 명작여행" 보다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맛이 없네요. 제가 이런저런 작품을 너무 많이 읽은 탓도 있겠지만...
베스트는 제가 안 읽었던 작품 중에서만 뽑아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정통 추리물 "다섯명의 용의자"와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 버젼이라는 앤소니 버클리의 "무서운 초콜릿" 입니다. 더쉴 해미트의 "파리 종이"도 괜찮았어요.
작품별 간략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돼지와 피아노 - 헨리 슬레사
폭력적인 남편에게 괴롭힘 당하며 사는 한 여인이 숙면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 등장하는 단편. 심리 드라마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2. 헬로 자스민 - 헨리 슬레사
로봇개발에 취미가 있는 해리는 아내 자스민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만든 로봇 맥더프를 프로그래밍 하는데....
단편의 거장 중 하나인 헨리 슬레사의 독특한 단편. 다른 앤솔로지에도 많이 실려있는 작품이죠. 반전의 묘미가 탁월합니다.
3. 세 여인의 공통분모 - 빌 프론지니
30대의 금발머리, 그리고 영업을 위해 자주 출장가는 세 여인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한 남자가 자수하지만 과연 동기는?
단편으로 더 유명한 작가인 빌 프론지니의 괜찮은 작품입니다.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도 실려있는 작품이죠. 짧지만 강렬한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4. 한낮의 정사 - 브루노 피셔
앞집에 사는 노마가 살해당하고 불륜관계에 있었던 TV 수리기사 래리 포레스트가 구속된다. 그러나 브린 형사는 새로운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데...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단편으로 짧은 길이 안에서 꼼꼼하면서도 공정한 전개, 그리고 화자가 남편이라는 독특함까지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가 참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다른 앤솔로지에 수록된 작품이긴 하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5. 색다른 토끼 스튜 - 윌리엄 아이리쉬
수많은 앤솔로지에 실려있는 걸작 단편. 지금은 낡아 보이지만 괜찮은 증거 인멸 트릭이 등장하는 고전입니다.
6. 미인과 초콜릿 - 로버트 블록
아내 메어리를 죽이고 애인 프란시스와 새로운 생활을 꿈꾸는 존은 약제사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 직접 독을 넣은 초콜릿을 제조하여 아내에게 선물로 준다.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서 본 작품입니다. 살인을 계획하는 과정을 주 내용으로 하되 반전을 통한 파국으로 끝나는 미국 추리 단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런 전개는 "헬로 자스민"하고도 똑같죠.
7. 살아있는 라디오 - 존 딕슨 카
중요한 연구중이던 두 남녀가 허름한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라디오소리에 괴로워하다가 유령이 나온다는 방에서 라디오를 발견하지만 그 안에는 시체가 있는 상황. 과연 진상은?
꽤 장황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나름 명쾌한 해석과 결말이 있는 잘 짜여진 고전형식의 추리 단편입니다. 특히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거장의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작품이었습니다.
8. 사랑의 도박 -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작가 데이비드의 비서로 일하는 펜은 데이비드의 아내 지니와 사랑에 빠진다. 데이비드는 펜을 조롱하고 지니와의 사랑을 강하게 하기 위해 실종사건을 연출하는데...
스릴러라고 봐야 할까요? 마지막 한줄로 사건을 정리하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줄의 증언이 실제 수사단계에서 얼마나 확신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9. 초록색 벌레 - GK 체스터튼
브라운 신부 단편입니다. 굉장한 힘을 가진 인물이 조그만 흉기를 써서 광포한 살인을 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하지만 브라운 신부 특유의 화법으로 설명하는 작품으로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 단편입니다.
10. 마음 돌리기 - 도널드 마틴
그래디 부인은 자신의 수표를 훔치려다 다리를 삔 토빈이라는 젊은이를 치료해 주며 그를 개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토빈은 부인의 보석을 가지고 달아나게 된다...
추리물로서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마지막 반전이 괜찮은 소품입니다.
11, 파리종이 - 더쉴 해미트
건달과 사랑에 빠진 명문가 막내딸이 송금을 요청하자 컨티넨털 옵이 수표를 가지고 출동한다. 하지만 아가씨는 간데없고 송금요청은 조작된 것이었는데...
컨티넨털 옵 시리즈로 길이도 길고 내용도 풍성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책이 단서가 되는 등 트릭과 전개도 꽤 잘 짜여진 편이고요. 특히나 하드보일드이면서도 사람이 많이 죽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알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12. 위험한 초보운전 - 프레드 S 토비
굉장히 짤막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짧은 길이 탓인지 사건의 동기가 미흡한 것은 아쉽네요.
13. 사라진 열쇠 - 애거서 크리스티
포와로 단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죠.
14. 다섯 명의 용의자 - 죠르즈 시므농
벨기에 국경 밖으로 나가는 열차에서 한 부자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같은 객차안에 있었던 다양한 직업과 국적의 5인뿐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이 단편집 최대의 수확입니다.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단서가 완벽하네요. 트릭 자체는 별게 없는 완전범죄 스타일의 작품은 아니지만 메그레 경감의 수사방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15. 무서운 교배 - 죤 콜리어
예전에 호러 앤솔로지에서 본 기억이 나는 짤막한 호러단편입니다.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 의문이네요. 전혀 성격이 맞지 않거든요.
16. 무서운 초콜릿 - 앤소니 버클리
클럽 회원인 윌리엄 경에게 선물로 배달된 초콜릿을 같은 클럽 회원인 버레스포드가 아내에게 주기위해 대신 받지만 그 초콜릿을 먹은 아내가 독살당하게 되는데...
역시 이 단편집에서 베스트 중 한편입니다.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버젼이라고 하는데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전개가 나무랄데 없네요. 불특정 다수를 노린 듯한 트릭도 굉장히 우수하고 독창적입니다.
17. 약속의 그늘 - M.레버
모파상 단편같은 지독하게 잔인한 인생사를 다룬 소품. 그러나 15편 "무서운 교배"와 같이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18. 빨간 머리와 지하실 - 코난 도일
"붉은 머리 클럽"입니다. 설명은 필요 없겠죠?
19. 매력적인 안드로이드 신부 - 헨리 스레사
SF취향의 소품으로 전 아시모프 작품인줄 알았습니다....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설정만 독특한 작품으로 이 작품도 이 단편선 성격과는 잘 맞지 않는 선정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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