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4/02/28

잭 리처 (2016) - 에드워드 즈윅 : 별점 1점

잭 리처 시리즈인 동명의 18번째 작품을 톰 크루즈 제작, 주연으로 영화화한 작품. 2012년 작품인 "잭 리처"의 속편이기도 합니다. 이번 연휴에 잭 리처 시리즈를 몰아 읽으며 관심이 생겨 넷플릭스에서 찾아보니 이번 2월까지만 볼 수 있어서 서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2012년 작품은 이전에 감상했었는데, 그런대로 괜찮게 봤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주 많이 별로였습니다. 일단 원작을 각색한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지 못합니다. 다소 복잡했던 원작을 영화에 맞춰 요약하면서 흔해빠진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로 돌변해 버린 탓입니다. '군부의 악당이 하청업체와 짜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무기와 마약을 수입한다'라는 흔해빠진 내용이 되어버렸거든요. 이를 밝혀내는 과정도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과거의 사건과 육군 복무 규정을 이용하여 잭 리처를 옭아매는 등의 나름대로 치밀했던 악당들의 음모와 작전도 거의 묘사되지 않습니다. 원작에서 가장 멋지고 인상적이었던 수잔 터너와의 탈옥도 기대 이하였고요.
악당들과의 밀땅보다 잭 리처의 딸일지도 모르는 사만다와의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낸 것도 별로였습니다. 사만다는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위험을 불러들이는 민폐 발암 캐릭터인데다가, 계속 얼굴을 들이밀고 쓸데없이 투닥거리기만 해서 짜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액션 영화치고 액션도 많이 별로였습니다. 흔하디 흔한 폭파씬이나 자동차 추격씬도 거의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스케일이 작은 탓입니다. 잭 리처의 매력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작처럼 잭 리처 캐릭터와는 정 반대 속성인 단신미남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것 부터가 문제에요. 보다 거칠고, 보다 거대하며, 척 보기에도 강해보이는 인물이 주연을 맡았어야 했습니다. 
잭 리처가 악당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은 원작 파괴에 가깝고요.

과거 인상적인 역사물 대작을 발표해왔던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화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울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잭 리처 시리즈의 팬이시더라도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2/25

사라진 내일 - 리 차일드 / 박슬라 : 별점 2점

사라진 내일 - 4점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펜타곤에서 일한다는 수잔이 뉴욕 지하철에서 자살했다. 잭 리처는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었는데, 뉴욕 경찰을 비롯한 온갖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미지의 인물들이 잭 리처를 찾아와 수잔에게 무언가 받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잭 리처는 수잔은 협박을 받아 자살했다고 추리하고, 그녀가 받은 협박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 샌섬 하원의원이 80년대 초반, 델타포스 시절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과 손을 잡았던 과거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잭 리처는 그 때 찍었던 사진에 문제가 있었을거라 추리했다. 사진 원본이 파기되었기 때문이었다.......

"1030"에서 이어지는 잭 리처 시리즈 13번째 작품. 원제는 "Gone Tomorrow" 입니다. "1030"에서 딕슨의 초대(?)때문은 아니겠지만, 뉴욕을 방문한 잭 리처가 잠입한 알 카에다 조직원들을 박살내는 이야기지요.

잭 리처가 수잔을 폭탄 테러범으로 착각하고 접근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수잔의 자살 이유가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 연결되는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자살자 수잔 마크의 유품에 있어야할게 없다면,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던 잭 리처가 그걸 갖고 있을거다!라고 생각해서 관계자들이 잭 리처에게 몰려든다는 것도 설득력있고요.
수잔 마크가 빼돌릴려고 했던 정보가 오사마 빈 라덴의 치부를 건드리는 사진이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럴듯했습니다. 상원의원, 그리고 추후 대권까지 노리는 샘손 하원의원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보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오사마 빈 라덴에게 위협적인 정보여서 알 카에다가 이를 철저히 없애려 한다는건 확실한 반전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잭 리처 시리즈답게 액션도 화끈합니다. 특이한건 상세한 무장 묘사입니다. 기관단총이 주 무장이라는건 제가 읽어왔던 그간의 잭 리처 시리즈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었지요. 헤클러 앤드 코흐 MP5SD라는 총인데 좋은 총이라는 찬사와 함께 실전 활약도 멋지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떤 총인지 궁금해서 공식 사이트에서 모델을 한 번 찾아보았는데, 리처의 묘사 그대로더군요.
"개머리도 개머리판도 없다. 단순한 손잡이와 방아쇠, 서른 발들이 휘어진 탄창을 곶는 공간, 그리고 이중소음장치 덕분에 한층 두꺼워진 15센티미터 길이의 총신 뿐이다."

'나이프'가 결정적 활약을 한다는 것도 그간 잭 리처 시리즈에서는 보지 못했었던 설정이었습니다. 검은색 기계식 손잡이로 12cm 길이의 양날 칼날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벤치메이드 3300' 모델인데, 찾아보니 역시나 멋지더군요. 어머니 호스를 끝장낼 때의 작중 활약도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점들은 확실히 1인 대 테러 작전을 그리고 있는 작품다왔습니다. 잭 리처의 엄청난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아프가니스탄 테러범의 잔혹성에 대한 묘사도 과하기는 했지만 괜찮았고요.

테러리스트 일당을 찾기 위해 포시즌 호텔과 그 주변 - 3번로, 59번가...- 을 샅샅이 훝는 등의 상세한 뉴욕 묘사도 돋보입니다. 뉴욕을 가게 된다면 포시즌 호텔은 한 번 둘러보고 싶어질 정도로요. 지도를 보니 위치가 아주 좋네요. 최저가 150만원에 달하는 숙박비가 문제겠지만....
수잔이 버린 USB 메모리가 어디 있을지?에 대한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휴대전화를 갖고 있을 사람 소지품에 휴대전화가 없다면, 그건 어딘가에 버렸고 그렇다면 그걸 버릴 때 USB도 같이 버렸을 거라는건 지극히 합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설정에 너무나 명확한 약점이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우선, 오사마 빈 라덴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진은 수잔 마크가 펜타곤 서버에서 파기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건 원본을 복사한 USB 뿐이에요. 그렇다면 모든게 끝났어야 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 사진을 영구히 없애고 싶어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쓸데없이 복사본을 만들고, 또 그걸 확보하려고 이 고생을 하는걸까요? 지시가 원본의 파기 뿐이었다면, 수잔이 복사했다는걸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지요. 오사마 빈 라덴의 라이벌 조직이 수잔 마크를 협박했어야 말이 됩니다. 
21세기에 사진 한 장이 그렇게 큰 위협이 된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아요. 합성이나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알 카에다가 펜타곤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었던 시스템 엔지니어 수잔을 딱 맞게 포착해서 협박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녀의 능력과 기술, 약점을 알 카에다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더해 교통 체증으로 늦은 수잔에게 그녀의 아들 피터를 산체로 해부하는(?) 동영상을 보냈다는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피터에게 고문을 가할 수는 있지만 그를 죽이는건 말이 안됩니다. 수잔 마크로부터 USB를 넘겨받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잭 리처는 그녀들이 미쳐있었다, 그리고 수잔에게 미행을 붙여 놓았다고 설명하지만, 이 정도로 납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20명이 넘는 조직원을 뉴욕에 잠입시켜가며 수행한 작전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진행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결말부에서 무려 10명이 넘는 테러리스트들이 잭 리처 한 명에게 간단하게 쓸려나가는 것도 허무했고, 호스 모녀가 잭 리처와 일기토를 벌이는 설정은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편 전부를 쓰러트린 키 190cm가 넘는 거인 상대로 총이 있는데 칼만으로 싸운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호스 모녀는 리처가 등에 벤치메이드 3300을 테이프로 붙여놓은걸 놓쳤다가 낭패에 빠졌지만,설령 리처가 맨손이었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될 짓이었어요. 실제로 리처는 마지막에는 칼이 아니라 의자로 상대방의 칼을 떨어트리게 만들었지요.
잭 리처가 테러리스트 일당을 처단하기 위해 출동할 때, 이 모든걸 알고 있던 경찰(테레사 리)과 샘손 의원 측 사람들이 총기 제공 외 다른 협조를 하지 않는 것(테레사 리와 정사를 나누는 것 외에는) 역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 포시즌 호텔과 그 주변 등 묘사가 상세한데 이왕이면 지도도 함께 수록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누가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싶어 잠깐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도입부, 중반부까지는 무척 흥미로왔는데 후반부는 지나치게 흥행(?)을 의식한듯하여 아쉽습니다.

추리 소설 1,200번째 리뷰 등록

추리소설 리뷰는 2003년 2월 23일 "빙설의 살인"부터 올리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21년 뒤인 2024년 2월 25일에 1,200번째 리뷰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1,200번째 리뷰작은 잭 리처 시리즈인 "하드웨이"입니다.

1,100번째 추리 소설 리뷰글이었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올린 날짜가 2022년 8월 7일이었으니 100개의 리뷰를 작성하는데 걸린 기간은 551일입니다. 1,100번째 리뷰를 올렸을 때 우려했던 이글루스 서비스 종료가 현실이 되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1년 7개월만에 100개의 리뷰를 작성한 셈입니다. 한달에 5권 정도의 페이스지요. 목표인 2,000개의 추리 소설 리뷰까지 800개가 남았고, 160개월이라고 치면 완료하는 날은 2039년 2월 23일입니다. 그날까지 계속 블로그를 할지, 하더라도 추리 소설 리뷰를 계속 올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힘을 내 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블로그에 찾아주시고, 관심과 댓글로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마지막으로 그림은 11년 전 이글루스 유저셨던 EST님이 보내주셨던 '블로그 6주년 축전'을 이용한 것인데, EST님께는 특히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2024/02/24

하드웨이 - 리 차일드 / 전미영 : 별점 2점

하드웨이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전미영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여름밤,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리처에게 존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영국 공수특전단(SAS)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레고리는 전날 밤에도 리처가 그 카페에 있었던 걸 확인한 뒤, 전날 자정쯤 카페 앞에 주차되어 있던 벤츠를 타고 사라진 남자를 목격했는지 묻는다. 리처가 그렇다고 하자 그레고리는 자신의 상사이자 전직 특수부대원들을 모아 민간 용병 사업을 하는 에드워드 레인에게로 리처를 데려간다.
레인은 자신의 아내가 납치되었으며, 리처가 목격한 남자가 몸값 100만 달러가 실린 벤츠를 탈취한 납치범이라고 말한다. 레인은 아내를 되찾아 달라며 리처를 고용하고, 리처는 수사 과정에서 5년 전 레인의 첫 번째 아내였던 앤이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 후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리처는 전직 FBI 요원이자 사립탐정인 로런 폴링과 함께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나간다.


잭 리처 시리즈 10번째 작품. 이번에는 유괴극입니다. 유괴극의 핵심인 몸값 전달에 대한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인은 특정 차를 지정하여 차 안에 현금을 두고, 차 키를 다른 곳에 두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레인의 부하들과 리처가 차 키가 있는 곳을 감시하는 동안, 미리 빼돌렸던 스페어 키를 이용해 유유히 차를 몰고 달아나는 것이지요. 최소한 한, 두 번 정도는 먹힐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레인의 의붓딸 제이드가 그린 그림, 그리고 아이 침실의 인형들을 통해 유괴가 아닌 자작극이라는걸 깨닫게 만드는 소소한 디테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범인이 차를 열쇠로 열었다'는 것에 주목하는게 괜찮았어요. 무선 리모컨 키가 일반화된 시대에 잘 어울리는 착안점이었거든요. 군인처럼 시야 확보 등을 염두에 두고 범인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과정도 설득력 높았고요. 범인을 쫓으며 뉴욕의 지리를 상세하게 풀어내는 묘사도 좋았고, 레인이 아프리카에 버리고 왔던 부하 호바트 이야기도 그럴싸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추리적으로 점수를 주기 힘든 탓이 큽니다. 리처와 용병들 모두 유괴 사건은 백화점에서 차가 잠깐 멈췄을 때 유괴범이 총을 들고 올라타 유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화점 어디에서 차가 멈출지 범인은 알 수 없었다는게 문제였다는데, 이 점 하나만으로도 운전하던 테일러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테일러가 아니면 피해자 케이트가 공범이었을테고요. 심지어 범인은 레인이 보유한 현금이 얼마인지, 레인에게 무슨 차가 있는지를 꿰뚫고 있는 등 내부자가 아니면 모를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모두들 테일러가 죽었다고 확신하며 그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지 알 수 없어요. 자동차나 현금 가방에 GPS 추적장치 하나 몰래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일반인이라면 구하기 힘들었을 수 있지만, 레인 일당은 용병 부대이니 이런 장치를 구하는건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레인을 포함한 레인의 부하들이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 마지막 클리이막스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리처를 제외한 테일러 가족을 사로잡은 뒤, 성폭행과 낙태를 운운하며 잔인함을 부각시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수깡 인형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반격다운 반격은 아예 하지 못하니까요. 전직 델타포스, SAS 등 엘리트 특수 부대원 출신들이라는 설정이지만, 하는 짓과 최후는 시리즈 다른 악당들보다도 못해서 허무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테일러가 일부러 단서를 조금씩 남겨 레인을 영국 시골 농장으로 유인했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어요. 유능한 대원이라는 설명은 있었지만, 장기간 포위와 대치가 가능한 용병들인 레인 일당과의 전면전은 무리입니다. 이보다는 유괴극을 꾸미기 전에 레인을 먼저 살해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거에요. 케이트가 위자료 대신 레인이 가진 현금 절반을 몸값을 가장하여 챙겼다는데, 레인이 죽었다면 전부를 챙길 수도 있었을테고요.
레인의 남은 용병 버크, 크룸, 코왈스키가 미국으로 돌아가 레인의 남은 돈을 빼앗아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죽은 보스의 돈에 손을 대지 않을 정도의 도덕군자들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미 소액은 착복하려는 시도도 했었는데 말이죠.

인물들도 매력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입니다. 레인과 그 일당은 악덕 용병 부대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인물들로 묘사됩니다. '기뉴 특전대'와도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약하다는 점에서는 그보다도 못하고요.
잭 리처의 파트너인 전 FBI 수사관이자 현직 탐정 폴링 역시 시리즈 다른 작품 여주인공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등장하는 이유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그녀가 사건 수사와 해결에 도움을 주는 요소는 거의 없거든요. 탐정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영국 내에서 몇가지 정보를 얻는 등의 활약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리처 혼자서도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였습니다. FBI 출신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마지막 레인 일당과의 결전에서는 사로잡힌 공주님 역할 뿐이고요. 결론적으로, 그냥 리처의 스쳐지나가는 애인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2/23

1030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1030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틀랜드를 배회하던 잭 리처는 은행 통장에 입금된 1,030달러 - 부대에서 긴급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코드명 - 를 통해 옛 부대원 니글리를 만났다. 니글리는 리처에게 프란츠의 죽음을 알리며, 복수를 위해 옛 부대 재결성을 부탁했다. 그런데 남은 5명의 부대원 중 오도넬, 딕슨만 부름에 답했고 스완, 산체스, 오로스코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프란츠처럼 사막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단서들을 모아나가던 리처 부대는 군수회사 뉴에이지의 보안부서 책임자 라메이슨이 범인이라는걸 알아냈다. 신무기 미사일 리틀 윙을 불량품으로 처리한 뒤, 폐기한 것으로 속이고 외국 테러리스트에 팔아넘기려던 라메이슨의 행각을 눈치챈 스완이 가까운 곳에 있던 옛 부대원들을 불러모아 공격을 대비했지만, 오히려 라메이슨에게 당하고 만 것이었다. 라메이슨이 경찰일 때 동료였던 보안관 커티스 모니가 스완 일행을 속인 뒤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같은 방법으로 오도넬과 딕슨도 잡혔지만, 리처는 반격해서 라메이슨 일당을 철저하게 박살낸 뒤 미사일을 구입한 테러리스트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울어 봐야 소용없소. 눈물 따위에 마음이 약해질 만한 사내는 다른 곳에 가서 찾으시오."
"네 삶의 마지막을 즐겨라. 와인 한 병을 사고 DVD를 빌려라. 하지만 박스로 사지는 마라. 네게 남은 시간은 이틀 정도니까. 그것도 길어 봐야."

잭 리처 시리즈 11번째 작품. 원재는 "Bad Luck & Trouble"입니다. "불운과 문제"라고 직역하기에는 폼이 없어서 바꾼 듯 한데, 바꾼 제목도 나쁘지 않네요.
기존 시리즈처럼 한 마리 외로운 늑대 잭 리처의 활약을 다루지 않습니다. 죽은 전우들을 위해 옛 전우들을 모아 복수를 진행한다는 복수극이거든요. 부대가 뭉쳤기에 복수극도 군사 작전에 가깝게 묘사됩니다. 전직 엘리트 군인들, 복수극, 군사 작전이라는 키워드만 놓고 보면 "크리시" 시리즈가 떠오르네요. "익스펜더블"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이런 변주가 좋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리즈의 또다른 매력인 잭 리처의 추리력이 발휘될 여지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스완의 문진을 가지고 베런슨의 거짓말을 꿰뚫어 본다던가, 프란츠가 도움을 요청한게 아니었다는걸 깨닫는 장면처럼 소소한 추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프란츠가 남긴 문서가 '근무일' 기준이었다는 것도 꽤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외에는 추리는 커녕 리처의 무능함만 도드라질 뿐입니다. 특히 '왜 전 엘리트 헌병대원 4명이 허접한 녀석들에게 잡혀 죽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대로 풀어내지 않는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급 전문가들이라 웬만한 적들이 진압하는게 힘들다면 답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유일하게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산체스가 배신했거나, 누군가 믿었던 사람이 뒷통수를 쳤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후더닛' 말고 '와이더닛'으로 접근했어야 했던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일당들에게 당한게 아닐까 헛다리짚는건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6,500백만불을 카지노에서 따려면, 작중 설명되는대로 엄청난 조직과 돈이 필요했을겁니다. 쉽게 덮기도 힘들었을테고요. 상식선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조사까지 한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보안관 모니가 라메이슨의 옛 동료였고, 프란츠 일행은 모니에게 체포된 뒤 살해당했다는 반전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려 4명의 전 엘리트 군인들이 보안관 1명에게 제압당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모니가 총을 들고 있었긴 했지만, 잭 리처 본인도 그간의 시리즈는 물론 이 작품 내에서도 권총에 맞서는 장면은 수도 없이 보여주었는데 말이지요. 반격 시 최소한 한 명이 죽더라도 남은 세 명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처와 니글리는 LA의 교통 체증으로 모니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고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커티스 모니가 오도넬과 딕슨을 먼저 제압한 뒤, 리처와 니글리를 태연히 기다렸다가 잡아간다는 생각없이 현장을 뜰 정도로 바보였다는 것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악당들의 매력도 현저히 처집니다. 기본적인 능력부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탓입니다. 라메이슨 일당이 아무리 전직 경찰로 10년 이상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 흉기에 가까운 전투집단 군인들과 대등한 싸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본거지에서 맥없이 쓸려나가고 6,500만불까지 빼앗기는걸 보면 10년 동안 경력은 뭘로 쌓았나 싶고요. 리처와 니글리의 습격은 충분히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모니의 도움으로 뒷통수를 치는 것 외에는 너무 무력한지라 황당할 정도였습니다. 어느정도 실력자였어야 좋은 대결 구도가 성립했을텐데 이래서야 최소한의 긴장감조차 불러오기 힘듭니다. 악당들이 알아서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모니가 오로스코의 메모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라메이슨의 부하가 리처 일행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습격하지 않았다면 진상과 정체가 드러나는데 더 오래 걸렸을겁니다.
리처의 부대원들도 마찬가지에요. 별다른 매력도 없으며 결정적 순간에는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숫자의 귀재라는 딕슨의 특기는 리처와 동일하기도 하고요. 그나마 자금을 대는 니글리 정도만 약간의 활약을 보일 뿐입니다.

설명도 부족합니다. 라메이슨 일당이 이미 6,500만불을 받았는데 뉴웨이브라는 회사에 남아 근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리틀 윙을 빼돌린게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돈을 받은 이후인데 그게 문제가 될까요? 최소한 라메이슨 혼자만이라도 몸을 빼는게 당연했어요.
그리고 커티스 모니의 부하 브란트는 리처를 미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니와 라메이슨 일당이 모두 살해당했다면, 브란트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을거에요. 리틀윙 거래는 뉴웨이브 회사와는 관계가 없기에 ,잭 리처가 뉴웨이브를 공격해서 불을 지른 범죄 행위는 당연히 수사가 되었어야 했고요. 라메이슨 일당의 부하들 모두가 리틀 윙 거래에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살해한 것 역시 엄연한 범죄입니다. 그런데도 브란트가 수사에 나서지 않는건 물론이고, 중반 이후 사라져서 등장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복수극도 시시했습니다. 헬기에 숨어있다가 라메이슨 일당을 밖으로 떨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전에 리처가 라메이슨에게 "너는 곧 우리를 만나게 될 거다. 그럼 함께 헬리콥터를 타자. 네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번엔 한 가지 크게 달라질 게 있다. 내 친구들은 반항했을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하지만 년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 뛰어내리게 해달라고 애걸복결할 거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눈물 콧물 있는 대로 짜낼거다. 내 그것만은 틀림없이 약속하마."말했기에 보다 처절한 복수를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예정된 위험한 테러보다 복수를 먼저 선택한 리처의 모습도 당연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보다 살짝 높은 2점입니다. 스케일은 크지만 리처 시리즈의 매력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2024/02/21

천재탐정 미타라이: 살인사건의 진실 (2016) - 이즈미 세이지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지 편집자인 오가와가 미타라이를 찾아와 미해결 수수께끼 사건 해결을 요청했다. 미타라이는 고고섬에 변사체가 연달아 떠내려온 사건에 흥미를 갖고, 조사와 추리로 사체는 후쿠야마에서 해류를 타고 내려왔다는걸 알아냈다.
후쿠야마로 향한 미타라이는 다른 외국인 변사체와 함께,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된 사건과 마주쳤다. 그리고 사건에는 후쿠야마 굴지의 기업인 사이쿄 화학 공업과, 과거 '세이로'라고 불리우던 전국시대 병기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작가가 허락하지 않아서 영상화가 늦어졌다는, 시마다 소지미타라이 시리즈 첫 번째 영화. 티빙에서 감상했습니다. 지난 연초에 감상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여러 사건이 등장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하다는게 장점입니다. 아래 순서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1. 고고 섬으로 6구의 변사체가 떠내려온다. 한편 후쿠야마 바다에서는 '수룡'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2. 류진 폭포 부근에서 눈과 입이 꿰메어진 이비 부부와 그들의 죽은 아기가 발견되었다.
  3. 후쿠야마에서 외국인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사체를 옮기려던 외국인 무리를 검거했다.
  4. 역사 연구가 타키자와가 전국시대 병기 '세이로'의 존재를 알아냈다.
  5. 타키자와가 수상한 외국인과 부딪혔는데, 그는 이상한 알약을 떨어트렸다. 그 뒤 타키자와를 외국인 무리가 습격하려다 그녀의 저항으로 되려 추락사했다.
여기서 '외국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고고 섬 변사체, 후쿠야마 여성 변사체, 타키자와 습격 사건은 한 묶음입니다. 위험 약물을 제조 판매하던 외국인 무리가 관련자들 사체를 바다에 버렸고, 타키자와가 비밀을 눈치챘다 여기고 죽이려 했던 겁니다. 

이 사건들을 빼면 핵심 사건은 이비 부부 사건과 수룡의 정체, 두 가지로 중반 이후에는 두 사건, 그 중에서도 정통 추리물이라 할 수 있는 이비 부부 사건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 사건은 아기 보모 타츠미가 실수로 아이가 추락사한걸 감추려고 유괴극을 꾸몄으며, 복수를 위해 이비 씨 가족을 감시하던 마키타 사장이 이를 눈치채고 부부마저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게 진상인데 여러가지 단서, 복선을 나름 공정하게 보여주면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마키타 사장이 협박 편지를 남긴게 아니라서, 이비 씨에게 편지 내용을 읽어보라고 시켰고(내용 파악을 위해), 몸값 약속 시간도 선뜻 바꾸어 주었다는 등의 추리도 합리적이었어요.
'세이로'가 수룡이며, 이는 알고보니 잠수함이었다는건 역사 추리물 형태인데, 역사 속 기록과 연결하여 팩션처럼 전개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전국시대 병기가 흑선에 대항할 비밀무기로 기능한다는건 말도 안되지만, 잠수해서 흑선의 '외륜'만 노린다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설득력도 있었고요.

영화 만듦새도 좋습니다. 특히 촬영이 아주 인상적이에요. 요새 영화에서 보는 선명한 조명이 아니라, 자연광을 쓴 듯 자연스럽고 다소 낮은 채도의 약간 오래 전 영화같은 화면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작위적일 수 밖에 없는 추리물이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화면이 그래도 생생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촬영 덕분에 후쿠야마, 세토 내해 일대를 배경으로 삼는, 일종의 '여정 미스터리'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주연 타마키 코지의 미타라이 연기는 본격물 탐정으로서의 모습에 충실해서 나쁘지 않았어요. 전형적이지만 이런 작품 속 탐정들이 뭐 대부분 그러하니까요. 만약 미타라이가 실제로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는 이미지는 잘 전해줍니다.
하지만 추리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비 부부 사건은 마키타 사정의 동기, 그리고 경찰 수사 부분에서 아쉽거든요. 단순 복수로 이런 엽기적인 범행을 벌인다? 설득력이 낮습니다. 아기가 이미 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앙값음이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외국인 수하들을 시켜 진작에 복수할 수도 있었는데 이런 기묘한 범행을 구태여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못합니다. 이비 씨 가족을 꾸준히 감시해왔다는 설정, 성공한 사업자가 자기 공장에서 불법 의약품을 제조한 이유도 작품 내에서 조금 설명해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경찰은 이비 씨가 과거 과격한 환경 단체 시위를 했고, 그 시위 탓에 사이쿄 화학공업 관계자가 자살했다는걸 알아냈습니다. 그렇다면 자살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거에요. 영화에서처럼 '하나 뿐인 아들의 행방은 지금 알 수 없다'며 대충 흘려보낸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잠수함 세이로를 마키타 사장이 타고 도주하던 화물선에 충돌시켜 멈추는 장면은 뭔가 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당황스럽기만 했거든요. 이렇게까지 해서 화물선을 멈춰야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미타라이 시리즈 팬이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동안 저는 충분히 즐거웠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2/18

악의 사슬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5점

악의 사슬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겨울 네브래스카 주의 시골 마을에 흘러 들어간 잭 리처는 코피를 흘리는 여성을 도와준 뒤 그녀의 남편 세스 던컨을 박살냈다. 하지만 던컨 가문은 돈과 유통 계약을 통해 마을을 지배하는 악질들로 리처에게 복수하려 했다. 하지만 리처가 손쉽게 당하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판매하는 물건을 사가는 조직의 도움으로 킬러들을 마을에 불러들였다. 한편 리처는 25년 전, 마을 주민 도로시의 여덟 살 난 딸 마거릿의 실종 사건의 재조사에 나섰다. 사건의 범인이 던컨 가문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킬러들을 모두 해치운 리처는 던컨 가문의 인신 매매와 추악한 아동 성범죄 증거를 잡은 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던컨 가문을 끝장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잭 리처 시리즈 15번째 작품. 원제는 "Worth Dying For"입니다. 발걸음 닿는 대로 방문한 마을에서 우연히 사건에 휩쓸린 잭 리처가 악을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떠돌이 총잡이가 시골 마을을 지배하는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전형적인 서부극 영웅담과 똑같습니다.
흔한 소재이며 전개이지만, 이른바 '왕도물'답게 그만큼 효과는 뛰어납니다. 읽는 내내 몰입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악당들을 박살내는 묘사가 상세한게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읽었던 다른 시리즈 악당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그야말로 '씨를 말려버리고' 말거든요. 거처를 모두 불태운 뒤, 살려고 발버둥치는 던컨 가문 일족을 한 명씩 차례대로 제거하는 장면 묘사가 대단해서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당해도 싼 놈들이라는 설명을 앞 부분에서 충분히 해 준 덕분이지요. 여기서 드러나는, 던컨 가문이 밀거래하는 물건이 마약이 아니라는 설정도 신선했습니다. 인신매매라는건 상상도 못했네요.
던컨 가문의 수하인 미식축구부 콘허스커스 출신 덩치들을 하나씩 재기 불능으로 파괴하는 격투 장면도 상세하며, 이를 통해 잭 리처(그리고 미국 육군)의 완력과 강함 역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완력 뿐 아니라 덩치 중 한명인 존을 제압하는 화려한 화술도 볼거리에요. 입만으로 어설픈 초보 깡패를 뭉개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다른 시리즈 물보다도 '자동차'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것도 눈길을 끕니다. 자동차가 각 캐릭터들을 상징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연식은 좀 되지만 현대적인 옵션을 갖추었고, 운전하기도 편한 고급 캐딜락은 마을을 지배하는 오래된 가문의 악행을 잇는 젊고 철없는 후계자 세스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훔치기 쉬워 여러 명의 손을 탄다는 점도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파멸하는 세스의 모습 그대로고요. 이런 점도 '말'이 중요한 '서부극' 장르의 속성을 따른 듯해요. 밀밭이 펼쳐진 평원에서 자동차로 사람을 추격하고, 자동차로 직접적인 공격까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신 매매 조직 먹이 사슬의 가장 밑바닥이자 공급책인 던컨 가문 바로 위의 로시 조직, 그 위의 사피르 조직, 최상위 마흐마이니 조직이 각각 킬러 두 명씩을 보내는데, 이들이 서로 죽이려 할 때 리처가 본의아니게 개입하여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 리처가 먼저 마흐마이니 조직원을 한 명 죽이고 시체를 세스 던컨의 캐딜락 트렁크에 넣어 놓고, 나중에 남은 마흐마이니 조직원이 이를 발견한 뒤 던컨 가문을 족치다가 살해당하는 - 일련의 과정도 재미 요소입니다. 조직간의 알력 다툼을 이용해서 적을 약화시키는건(본의는 아니었지만) 고전 "피의 수확"을 떠오르게도 하고, 마흐마이니 조직원이 캐딜락을 훔친 뒤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은 잘 짜여진 코미디 범죄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잭 리처가 "61시간"의 벙커에서 탈출하다 팔을 다쳤다는, 시리즈의 연속성을 떠오르게 해 주는 장치도 반가왔습니다.
"실제 태풍을 말하는 게 아니오. 난 어느 지하 공간에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났소. 그곳엔 층계가 하나였고 환풍장치가 두 개였소.운이 좋았소. 불길이 환풍구들 쪽으로 몰렸거든. 난 층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에 타죽지 않았소. 하지만 불길이 환풍 장치 속으로 확 빠져나가면서 주변 공기들을 빨아대는 서슬에 위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 내려왔소. 나로선 마치 태풍을 뚫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았소. 두 번이나 바닥으로 나가떨어졌지. 일어서서는 도저히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소. 그래서 두 팔로 몸뚱이를 끝며 기어 올라가야 했던거요."

그런데 인신 매매 이야기를 꼭 끌고 왔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밀밭만 있는 네브래스카 시골 마을의 유통을 장악한 지역 유지가 인신 매매 공급책이라는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항구 도시에서 컨테이너 하역을 장악하고 있다면 모를까요.
25년전 도로시 사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경찰 수사가 부실했다는 결론인데, FBI까지 출동한 사건이 이렇게 허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최소한 마을의 버려진 건물들은 모두 조사를 했어야 하는건 당연합니다. 사건 현장이었던 헛간이 그 때 그 상태 그대로, 심지어 증거인 도로시의 자전거까지 멀쩡히 남아있었다는 것 역시 말도 안됩니다. 이런 점들은 던컨 가문의 악행을 부각시키기 위한 무리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골 마을을 지배하는 악덕 가문이라는 설정도 솔직히 21세기에 먹히기는 힘듭니다. 서부 개척 시대처럼 외부와의 연락을 통제할 수 있다면 모를까,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발전한지 오래니까요.

그리고 후반부에 리처가 세스 던컨과 미식 축구 덩치들에게 사로잡히는건 좋은 방향은 아니었어요. 세스 던컨은 제가 보아왔던 시리즈 중 가장 허접한 소인배 악당이기 때문입니다. 리처가 손가락 하나로 뭉개버릴 대상이지, 리처에게 위기를 가져다주는 존재일 수는 없어요. 이후 리처가 결정적 순간에 던컨 가문 외 5번째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추리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과는 정 반대되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사람이 '단순히 방심한다'는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던컨 일당이 사로잡은 리처를 바로 죽이거나 묶어놓지도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도 서부극을 좋아한다면 즐길 수 있는, 킬링 타임에는 적합한 활극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마동석 주연으로 한국화해서 영화를 만든다면 아주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2/17

메이크 미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3점

메이크 미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마더스 레스트라는 작은 마을 역에 내렸다. 역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탐정 미셸 장을 만났다. 그녀는 실종된 탐정 키버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 리처는 미셸을 돕기 시작했고, 둘은 키버의 의뢰인 맥캔의 거처까지 알아냈지만 누군가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맥캔마저도 이미 살해된 다음이었다. 사건의 흑막은 마더스 레스트에서 운영한다는 자살 도움 서비스였다.
그러나 자살 도움 서비스의 진짜 정체는 자살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촬영하는 스너프 필름 제작소였고, 잭 리처는 이곳을 주모자들 전부와 함께 쓸어버린다.


"희망은 최선을 기대하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서 세우는 거요."

저만의 '잭 리처 week'의 두 번째 작품이자 잭 리처 시리즈 20번째 작품. 어제 리뷰를 올렸던 "61시간"과 똑같이 일종의 수사 드라마 장르지만, "61시간"은 '보호'에, 이 작품은 '추적'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찾아오는 악당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실종자와 미지의 의뢰인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한 전개는 합리적입니다. 실종된 탐정을 찾기 위해, 그에게 사건을 의뢰했던 의뢰인과 의뢰한 사건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는건 당연합니다. 이런 저런 탐문 수사와 조사로 발견한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다음 단계로 추리하며 나아가는 과정도 설득력 높습니다. 맥캔의 거처를 알아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키버가 남긴 유일한 단서였던 LA 타임스 기자 웨스트우드의 전화번호로 웨스트우드를 찾아가 맥캔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그가 핸드폰을 산 가게와 평소 행적을 통해 거처를 추리하여 찾아내는데 굉장히 그럴싸하게 그려지고 있거든요. 다소 운이 작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웹에서 얻은 정보인 '시보레 엔진을 돌려 발생시킨 배기가스로 사망케 한다'에 들어맞는 구조물이 마더스 레스트 농장에 없고, 자살 도움 서비스 비용만으로는 전문가 킬러를 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더스 레스트의 자살 도움 서비스의 이면에 추악한 뭔가가 있다는걸 끌어낸 추리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이었고요. 
이곳이 '스너프 필름 제작소'라는 정체 역시 마지막에 반전으로 제시되는 순간까지 독자를 속이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앞서 '디프 웹'에서 접근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지만, '자살 도움 서비스'로 독자(그리고 미셸과 웨스트우드까지)의 눈을 현혹시킨 덕분입니다.

리처의 강함을 드러내는 액션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킬러 헤켓과의 1:1 대결, 맥켄의 여동생 에밀리 집에서 벌어진 킬러 3명과의 대결, 그리고 마지막 마더스 레스트 일당들과의 대결 모두 전문가적인 소견으로 잘 짜여진 작전, 동선으로 움직이는게 잭 리처와 잘 어울렸습니다. 아래와 같이 자비를 품지 않고 악당들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장면들 모두 마음에 쏙 들었어요.
"편하게 보내줘선 안 될 놈이었소. 주방에서 무딘 칼을 가져다가 모가지를 썰어버렸어야 했는데."
그야말로 '무숙자'인 리처의 특징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마더스 레스트' 역에 내린 이유부터가 그러합니다. 단지 역 이름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라니!

물론 단점이 없는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악당 조직의 힘이 허약하다는 결정적 문제는 큽니다. 돈은 있어서 킬러는 고용할 수 있지만, 본인들은 고작해야 시골 마을 촌부들에 불과하니 영 모양새가 살지 않더라고요. 하나의 단계, 역경을 극복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전개도 다소 진부했으며, 꼭 필요한 단서가 꼭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온다는건 우연치고는 너무 지나쳤어요. 이런 점에서 일종의 게임같은 느낌도 강하게 전해줍니다. 마침 에밀리 집에 리처가 방문한 날 킬러가 들이닥친다는 등 작위적인 부분도 많았고요.

그래도 펄프 픽션이라도 잘 짜여져 있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걸 알려주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잭 리처 시리즈 입문작으로 추천드립니다.

2024/02/16

61시간 - 리 차일드 / 박슬라 : 별점 2점

61시간 - 4점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버스 사고로 사우스다코타의 한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된 잭 리처에게 마을 경찰 부서장 피터슨이 도움을 요청했다. 마약 거래 사건의 증인 재닛 솔터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잭은 군대 내 후임에게 전화하여 마약 거래를 하는 폭주족들이 머무는 옛 군사 시설의 용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한편, 노부인 재닛의 경호를 맡아 분투하였다. 그러나 결국 피터슨과 재닛 모두 살해된 뒤에서야 리처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범인은 경찰서장 홀랜드였다.
리처는 홀랜드를 처단한 뒤, 사건의 흑막인 사악한 마약상 플라토마저 없애기 위해 옛 군사 시설에서 한 판 승부를 준비하는데.....


전직 엘리트 군인인 거한 잭 리처가 활약하는 리 차일드의 베스트셀러인 잭 리처 시리즈 14번째 작품.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입니다. 이번 설 연휴는 '잭 리처 week'로 정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시골 마을에 있던 군사 시설에 2차 대전 때 지급되었던 환각제가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었고, 시설의 원래 정체는 핵전쟁 이후 생존한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고아원이었으며, 육군 시설이 아니라 공군 시설이라서 잘 닦인 활주로가 함께 있었다는 등의 스케일 크면서도 대담한 설정이 돋보입니다.
잭 리처가 제대로 된 추리를 선보이는 것도 이채로왔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후임인 110 부대장 아만다를 도와 후드 기지에서 탈주한 대위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뉴스를 방송하는 곳, 그러면서도 경찰을 피해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특정한 뒤 버스 터미널 옆 모텔에 머물고 있을거라고 추리하지요. 과장되기는 했어도 그럴듯했습니다.
피터슨 부서장을 살해한건 경찰이라는걸 곧바로 알아채고, 제닛 솔터마저 살해당한 뒤 범인이 홀랜드 서장임을 깨닫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 사이렌이 울렸을 때 재닛 솔터의 집에 처음 나타난게 서장이었다는 등 서장이 앞서 범했던 실수들을 근거로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실 주요 등장인물 중에서 범인이 될 만한 사람은 홀랜드 서장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의외성은 없었지만요(범죄행위에 가담했던 인상을 준 마이애미 출신 경찰은 떡밥치고는 너무 노골적이었어요).

이런 추리와 함께 곁들여지는 살을 에일듯한 사우스다코타 주의 겨울 묘사도 대단했습니다. 재닛 솔터의 사체를 목격한 잭 리처의 얼굴 피부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묘사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얼마나 추워야 공기중 미세한 얼음 알갱이들이 얼굴에 수천개의 상처를 내는게 가능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네요. 잭 리처가 '무숙자(無宿者)'임을 잘 드러내는, 갑작스럽게 방문한 마을에서 사건에 휘말린다는 도입부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제닛은 플라토의 부하가 마약을 거래하는걸 목격했다는 증언을 할 예정이었으며, 이를 통해 폭주족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약 조직의 우두머리 플라토는 제닛을 살해하려고 했고요. 그런데 제닛을 살해하면 상황이 바뀔까요? 마약 거래보다 살인이 훨씬 중죄이고, 심지어 증인에 대한 계획 청부 살인은 차원이 다른 범죄에요. 게다가 경찰 부서장 피터슨마저 살해했으니 이 정도면 지방 정부 중심의 단순 조사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정부 기관이 나서야 할 상황이에요. 이보다는 차라리 수감된 폭주족을 자살하라고 시키는게 더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플라토가 어차피 러시아인을 물먹일 생각이었다면, 제닛을 살해했다면서 말로 대충 떼우고 일을 진행했어도 됐습니다. 러시아인이 손에 넣은 마약 창고가 텅 비었다는걸 알게 되는게, 약속했던 목격 증인을 실제로는 살해하지 않았다는걸 알게 되는것보다 더 정도가 약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어차피 신뢰를 잃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계획을 진행할 이유는 없어요.
전개 내내 언급되는 61시간이라는 시간 제한도 솔직히 왜 독자에게 알려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독자가 시간 제한 때문에 긴장을 느낄만한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플라토가 일방적으로 정한 시간이 흘러갈 뿐인 전개이고, 잭 리처가 시간 때문에 위기에 처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눈이 오지 않는 찰나에만 활주로에 플라토의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날씨는 미리 예측할 수 없고요. 그런데 어떻게 시간 제한을 사전에 정해 전개한단 말입니까? 이건 완전 넌센스입니다.

잔혹한 난장이 악당 두목 플라토도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글쎄요, 아무리봐도 잭 리처의 상대로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마약이 보관된 지하 벙커(?)의 높이가 낮아서 키가 작은 플라토가 조금 유리했다는 건 있지만, 애초에 가진 역량과 피지컬 차이를 뒤집을 수 있어 보이지 않았거든요. 플라토가 마약과 귀중품을 직접 수습하기 위해 나서는 것도 어이가 없었고, 이 와중에 배신자들이 나타나 그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인기있는 헐리우드 영화 클리셰는 다 가져다 붙인 느낌만 들더군요. 플라토의 최후도 시시하기 짝이 없고요.

마지막에 플라토를 죽인 잭 리처가 어떻게 벙커에서 탈출해서 남은 잔당과 장비를 박살내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영 별로였어요. "탑건 매버릭"에서 훈련만 줄창하다가, 진짜 작전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않고 매버릭 부하 시점에서 '성공했다'고 언급하고 끝내면 어떻게 될까요? 난리가 날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무난하기는 한데,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2/14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2017~2020) : 별점 2.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 4부의 조연 키시베 로한이 주인공인 단편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죠죠 시리즈는 좋아하기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에피소드도 4편 뿐이라 부담없어서 좋았습니다. 한 번에 몰아서 보았네요.

특징이라면 호러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기괴한 등장인물들과 더불어 대결 장면에서의 섬찟한 긴장감을 주는 묘사가 탁월한 덕분이지요. 최고는 "무츠카베자카"입니다. 오오사토 나오코가 실수로 남자친구를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에는 약혼자가 찾아와서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시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터져나옵니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꿰메기까지 했는데도 피를 막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약혼자는 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나오코는 어떻게 피를 숨겼을까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고해소"는 악령, "부호촌"은 산신, "더 런"은 헤르메스 화신이라는 기괴한 적과의 대결이 선보여집니다.

죠죠 시리즈다운 두뇌 게임 요소도 있습니다. "부호촌"이 대표적입니다.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산신을 상대로 함정을 간파하여 예의를 차림은 물론, 집사를 헤븐즈 도어로 조작하여 대결을 승리로 이끄는 식이거든요.
앞서 소개해드린 "무츠카베자카"에서 피를 숨긴 방법, "고해소"에서 비둘기 떼가 노리는 팝콘을 무사히 던져서 먹는 방법도 두뇌 게임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아요. 일단 작화 문제가 큽니다. 컬러와 디자인이 과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원작의 괴이한 패션 감각은 만화는 흑백이라서 그렇게 거슬리지 않지만, 풀 컬러 애니메이션에서는 거의 시각적 공해라고 해도 무방하겠더라고요. 핵심 장면 외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동화도 그닥이에요. 잘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효과가 조금 화려한 슬라이드 쇼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대결도 헤븐스 도어의 능력을 활용하여 마무리하는건 별로였습니다. "무츠카베자카"에서, 소녀가 사고로 죽었는데 헤븐스 도어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살려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는건 무리일 뿐더러, 살려내는 방법도 단지 '키시베 로한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리는게 전부라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호촌"도 단순 대결물로 끌고가다가 헤븐스 도어의 능력으로 마무리한건 아쉬었습니다. 마을의 존재가 굉장히 흥미로왔는데도 말이지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원작 에피소드들도 영상화되면 좋겠습니다.

2024/02/11

놀라운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들 - 북오프 칼럼

가끔 소개해드리는 이러저런 미스터리, 추리소설 추천 정보. 이번에는 북오프 온라인 칼럼 하나를 찾아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의역이 많은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촘촘히 짜여진 수많은 복선, 상상할 수 없는 전개, 충격적인 결말 ...... 소름이 돋는 오싹함을 찾아 추리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그 중 '반전'이 뛰어난 미스터리 작품들을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들과 유명 작가들로 나눠 소개해 드립니다.
꼭 한번, 그 '반전'에 감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반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
"가면병동" 치넨 미키토
"If의 비극" 우라가 가즈히로 (국내 미출간)
"신의 숨겨진 얼굴" 후지사키 쇼
"출판금지" 나가에 토시카즈 (국내 미출간)

유명 작가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나카야마 시치리
"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어둠 속의 기다림" 오츠 이치
"살인귀" 아야츠지 유키토

"가면 병동"
강도로 인해 밀실로 변한 병원, 숨 막히는 심리전의 막이 오른다!
요양병원에 강도가 침입해 자신이 쏜 여자의 치료를 요구한다. 사건에 휘말린 외과의사 하야미즈 슈고는 여자를 치료하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병원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폐쇄된 병원에서 펼쳐지는 궁극의 심리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현직 의사가 그리는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본격 미스터리×메디컬 서스펜스'. 저자 첫 문고판 장편소설!

인기 시리즈 제1탄.
의료 소설이라고 하면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알기 쉽고, 읽기 쉽습니다. 라이트 노벨 같은 경쾌한 터치로 독자를 쏙쏙 끌어당깁니다.
게다가 치넨 씨는 현직 내과 의사로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문적 견해를 바탕으로 집필되어 있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점도 매력적인 점입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속편인 '시한부 병동'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If의 비극"
소설가 가노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자살을 의심한다. 결국 여동생의 약혼자였던 오쿠츠의 불륜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쿠츠를 불러내어 살해한다. 하지만 위장공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노가 운전하는 차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A는 남자를 치어 죽인 경우, B는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치지 않은 경우. 두 개의 평행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때,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진다!
식인 작가(사람을 잡아먹는 소설을 많이 써서)로 알려져 '미스터리계의 기인'으로 불리는 우라가 카즈히로 씨의 작품. 경력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그 수수께끼 같은 부분을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고 합니다.
"절대 속지 않는다!"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이 작품이지만, 절대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 반전에 역시나 격침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숨겨진 얼굴"
신과 같은 청렴결백한 교사, 츠보이 세이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통곡의 밤은 슬픔에 휩싸여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참석자들이 '신'을 추모하는 가운데, 엄청난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실 츠보이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까...? 츠보이의 아름다운 딸, 후배 교사, 제자인 중년 남성과 요즘 여자, 이웃집 주부와 개그맨. 두 번, 세 번 뒤집어지는 그들의 추리는? 반전이 있는 결말이 화제!!!
제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대상' 수상작. 아리스카와 아리스, 온다 리쿠, 구로카와 히로유키, 미치오 슈스케라는 쟁쟁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받았다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절묘한 유머 감각이 있고, 서비스 정신이 넘친다 (온다 씨)', '개그맨으로 활동한 경험 때문인지, 말투가 매우 유쾌하고 유머 감각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미치오 씨)'라는 심사평에서 알 수 있듯이, 어쨌든 유머가 넘치는 작품입니다. 반전도 훌륭하고요.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출판금지"
작가인 나가에 씨가 손에 쥔 것은 "카뮈의 자객"이라는 소문난 원고였다. 저자는 작가 와카바시 고세이. 내용은 유명 다큐멘터리 작가와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신도우 나나오와의 단독 인터뷰였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산장, 동반 자살의 모든 것을 기록한 영상. 불륜의 끝에서 벌어진 비극인가? 왜 여자만 살아남은 것일까? 숨막히는 전개, 무서운 반전. 기형적인 걸작 미스터리.
작가인 나가에 씨는 원래 호러와 서스펜스를 전문으로 하는 TV 감독이었습니다.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프로그램 '방송금지'(후지TV)의 기획, 각본, 감독도 담당했다고 하네요. 이 책은 그런 경력을 가진 나가에 씨가 가상의 사건을 취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논픽션처럼 느껴져서, 도중에 공포에 질려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스릴 있고 무서운 작품이라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
어느 도시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은 아파트 13층에서 갈고리에 매달린 알몸의 여성이었다. 그런 시체 근처에는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히라가나로만 쓰여진 조악한 범행 진술서가 있었다. 이후 제2, 제3의 엽기 살인이 일어난다. 한 기자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범인에게 '개구리 남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
이 작품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에서 최종 후보까지 올랐던 작품입니다. 기괴한 살인을 다룬 서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지요.
마지막 반전에 이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반전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범인의 책임능력을 묻는 형법 제39조가 강하게 개입된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미로관의 살인"
추리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에 의해 신예 작가 4명이 '미로관'이라는 기괴한 관에 모였다. 미야가키의 비서는 미야가키가 자살했다며 카세트 테이프를 대신 건네 주었다. 테이프에는 '미로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달라', '가장 좋은 작품을 쓴 사람에게 유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도리없이 네 사람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는 "십각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등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있는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다.
곳곳에 깔려있던 복선이 회수되고 여러 가지 장치가 차례로 밝혀지는 후반부 전개가 특히 압권입니다. 이 작품은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걸작이에요.
참고로 이 작품은 시리즈 작품이지만, 이 작품만으로 독립된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권부터 읽어도 무방합니다.

"어둠 속의 기다림"
살인 혐의로 경찰에 쫓기던 아키히로는 눈이 보이지 않는 미치루라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숨어들었다. 미치루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있다'며 아키히로의 기척을 느꼈지만 계속 모른척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맹인 여자와 살인 용의자인 남자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는데...
여자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살인 용의자인 남자가 무단으로 여자의 집에 숨어든다 - 이런 줄거리를 보면 앞으로 도대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유대감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하거든요.
마지막에는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살인귀"
'TC멤버스'는 중학생부터 성인까지가 소속된 친목 단체다. 그런 TC멤버스 일행이 후타바산으로 캠핑을 떠난다. 하지만 즐거워야 할 캠프는 후타바산 살인마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참극으로 변해가고, 한 명, 또 한 명씩 살해당하는데............
이 작품은 스플래터 호러 소설입니다. 그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상당히 그로테스크해서 이런 작품을 싫어하는 분들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전부는 아닙니다. 후반부에는 아야쓰지 유키토다운 깜짝 놀랄만한 장치가 준비되어 있으며, 거기서 그려지는 반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로테스크한 작품에 면역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2024/02/10

아이를 빌려드립니다 - 알렉스 쉬어러 / 이혜선 : 별점 2점

아이를 빌려드립니다 - 4점
알렉스 쉬어러 지음, 이혜선 옮김/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인간이 노화를 극복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가 거의 태어나지 않게 된 미래. 태린은 그를 도박에서 땄다는 디트 삼촌에 의해 아이 대여 사업에 이용되어 왔다.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시간당 대여 후 돈을 받는 사업이었다. 디트는 태린이 영원히 아이의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불법인 '피피 수술'을 시킬 계획을 세웠다.
수술을 거부해왔던 태린은 수술 직전에 간신히 탈출했지만, 갈 곳이 없어 자살을 결심한 찰나 다행히 친부모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알렉스 쉬어러의 SF 소설. 인간이 과학과 의학의 도움으로 평균 수명을 200살 이상으로 늘리고, 외모 변화도 40이후 없는 세상이 되자 그 반동으로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칠드런 오브 맨"과도 유사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나름대로의 상상력으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귀해서 아이를 잠깐이나마 빌려주는 사업, 심지어 아이들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 수술까지 성행한다는 핵심 설정은 재미있었고, 학교가 없어졌으며 산부인과 의사가 직업을 잃었으며 거리에 나온 갓난아기가 군중의 주목을 잡아 끈다는 등의 설정과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저출산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모습이 살짝 겹쳐지네요.
태린 시점의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이루어지는 전개도 긴장감을 전해줍니다. 디트 삼촌에게 혹사당하며 '오후의 아이'가 되어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아이 행세를 하고, 심지어 거금에 팔려 애완동물처럼 지내다가 피피 수술을 받기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리고 끔찍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SF 소설로 보기에는 좀 부족합니다. 아이가 없어진 세상에 대한 설정을 과학적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탓입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과학과 의학이 발전했다면, 인공 수정으로 충분히 임신이 가능한데, 그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보다는 종교적인 사상이 근간이 된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감히 신의 영역을 건드려서 천벌을 받은 것이며, 노화 방지 시술을 받지 않은 태린의 부모는 임신과 출산이 가능했다는 설정이 이를 증명합니다. SF보다는 약간 이런 쪽(?) 계열 소설로 보이기도 하네요.
다른 설정들도 합리적이지 못한건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게 피피 수술입니다. 태린이 피피 수술을 받았다 한들, 태린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디트 삼촌이 태린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 몇 년을 더 벌기 위해 거액의 수술비를 낸다는건 이해하기 힘들어요. 차라리 수술비를 모아서 정착하는게 나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출구를 잃은 태린 앞에 유괴범인줄 알았던 남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태린의 친부라서 태린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데려와 행복을 찾게 만든다는 결말인데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사전에 복선이라던가, 관련된 정보 제공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이 정도면 거의 "소드 마스터 야마토"급 결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개도 디트 삼촌의 사업과 관련된 태린의 심리 묘사는 반복적이라 지루한 등의 문제가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결말까지 잘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청소년 소설로 유명하던데, 성인들이 읽을만한 장르 소설은 아닙니다.

2024/02/09

더는 잠들지 못하리라 - P.D. 제임스 / 이주혜 : 별점 2.5점

더는 잠들지 못하리라 - 6점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아작

P.D. 제임스 단편집. "겨우살이 살인사건"과 같은 출판사에서 동일한 판형으로,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간한 시리즈 도서. "겨우살이 살인사건"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에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겨우살이 살인사건"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정통 고전 영국식 본격 추리물보다는 범죄 심리물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반전이 중심인 몇몇 작품들은 대체로 헨리 슬레사등 미국 단편 전문 작가들 스타일이라 신선함을 느끼기도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요
인기없는 선생을 하인이 살해하는걸 목격한 소년은 거짓말을 지어내서 하인을 구해준다.
소년이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꾸며내고, 의도한대로 사건 수사가 흘러가도록 주도한다는 내용의 심리 범죄물. 요요를 통해 옛 추억을 떠올리고, 소년이 이 때 받은 인상으로 법조인이 되었다는 등의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소악마'라는 측면 외에는 특별한건 없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피해자
완전 범죄 계획을 꾸미고 실행하는 과정이 그려진 범죄 소설이자 도서 추리물. 완전 범죄물로의 가치도 높고, 전처 엘시가 완전 범죄가 가능하게끔 안배했다는 반전도 깔끔합니다.

그러나 거의 30년 전에 다른 추리소설 걸작 단편선 앤솔러지를 통해 이미 읽어보았기에 신선함은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결말의 반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물론 30여년 전에 읽었던 작품의 기억이 생생하다는건 그만큼 이 작품이 빼어난 작품이라는걸 증명하지만, 이전 번역은 주인공의 협박 편지 속 오타까지 한글화했었는데 반해 이 책의 번역은 그 맛은 살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추리소설가 찰스 미클도어는 1939년 16살 때의 의붓삼촌 살인 사건의 재조사를 시작했다.
삼촌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협박 편지를 받은 뒤 편지대로 그날 밤 살해당했다. 그런데 찰스를 제외한 저택의 초대 손님들과 주변 이웃들도 삼촌을 살해할 동기가 있었다...

저택에서 벌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 다양한 초대 손님들이라는 무대 구성부터 정통 고전 본격 미스터리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는 작품.
추리적으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범인이 너무 명확하거든요. 찰스가 목격했던 산타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발견된 삼촌 - 산타로 분장했던 - 은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찰스가 목격했던 산타는 누군가가 변장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손님 중에서 찰스 삼촌과 키가 비슷했던건 콜드웰 뿐이었고요. 콜드웰이 방을 바꾸자고 한 등의 정황증거들도 차고 넘치니 범인은 콜드웰입니다!
범인이 뻔하니 흥미를 돋우기 위해 터빌 부부를 수상하게 보이게 만드는 묘사를 시도했는데, 이는 실패에 가깝습니다. 알고보니 부부가 성모상을 훔쳐갔다는건 드러난 정보로는 추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한 번 정도 이야기를 꼬아서, 누군가 키높이 구두를 신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어야 했어요.
전개도 아쉽습니다. 찰스와 당시 사건 수사 담당이었던 존 포팅어 경감 시선을 오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관계자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에필로그 역시 불필요했고요.
한마디로 초기작 느낌이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묘지를 사랑한 소녀
어린 시절 고아가 된 뒤 숙모집에 머물게 된 소녀는 묘지에 푹 빠졌다. 어른이 된 뒤 오래전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옛 집을 찾아가서 어린 시절 봉인되었던 살인 사건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는 내용의 범죄물. 아버지는 할머니를 살해했다는 죄로 사형당했는데, 사실 할머니를 죽인건 소녀였다는 반전은 미국식 단편 범죄물 느낌인데, 심리 묘사로 잘 드러내서 섬뜩함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묘지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비일상적이라 억지스러웠고, 반전과 잘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는 사형수라 감옥 묘지에 묻혀있어 아버지 묘지에 갈 수 없다는걸 드러내는 결말은 작위적이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거주지
종합 중등학교 교사 해럴드 빈스는 아내 에밀리를 학대하다가, 에밀리 살인 미수 사건을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았다.
동료 교사였던 나는 이혼한 에밀리와 재혼해서 그녀의 소유였던 멋진 주택에 입주했다. 사실 살인 미수 사건은 모두 나와 에밀리가 사전에 모의해서 꾸며냈던 것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알고보니 덫에 걸려버렸다는 내용의 단편. 나는 에밀리를 위해 범행을 계획하고 도와주었지만, 에밀리가 먼저 죽으면 해럴드에게 누명을 씌웠던 범죄가 공개된다는 협박(?)을 받고, 원했던 주택마저 에밀리가 파는걸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채 결혼 지옥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요.
공들인 살인 미수 계획은 눈길을 끌지만, 설정과 전개, 결말 모두 전형적이고 흔한 미국식 범죄 스릴러물 단편을 연상케해서 아쉽습니다. 남편을 지옥에 빠트리는 에밀리라는 캐릭터의 마성(?)도 잘 드러나지 못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밀크로프트씨의 생일
밀드레드와 로드니 남매는 아버지의 생일 파티를 위해 양로원을 찾았다. 아버지는 과거 유산 때문에 동생을 독살했었는데, 비싼 다른 양로원으로 옮겨주지 않으면 이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남매는 옛날에 살던 저택에서 증거인 비소병을 몰래 회수하려했지만, 오히려 현 주인에게 들켜 약점을 잡히고 말았다.
결국 원하는 양로원으로 옮겨간 아버지는, 친구 '준장'과 함께 작전 성공을 자축하는데....

약간 코믹한 범죄극. 알고보니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약병의 회수와 관련된건 친구 준장과 함께 계획했던 작전이었다는 반전에 이어, 정말 아버지가 모티머 삼촌을 살해했다는 반전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깔끔합니다. 별 것 아닌 듯 했던 나무 구멍 속 비닐봉지를 반전으로 이어가는 솜씨는 과연 거장답다 싶었어요. 설득력도 높고요.
수록작 중 최고로 꼽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2/07

레벨 문 (Rebel Moon) 파트 1 : 불의 아이 (2023) - 잭 스나이더 : 별점 1.5점

잭 스나이더의 SF 장편. 배경 설정 및 등장 인물들이 주로 소개되는 거대 서사의 도입부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이야기부터 진부합니다. 죄다 어디서 본 설정을 짜깁기 했을 뿐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와 "스타워즈"를 섞은 건 이미 수십년 전 로저 코만이 "우주의 7인 (battle beyond the stars)"에서 써먹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더 재미있게요. 유튜브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화면은 저렴하고 낡았지만, 내용은 외려 더 낫습니다!
등장인물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개별적인 서사를 부여한 것도 별로였어요. 가망없는 싸움에 뛰어드는 이유와 강함, 특징과 특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좀 더 정교한 이야기를 썼어야죠. 지금 이야기는 별다른 특징을 부여하지 못한 분량 낭비였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빼면 충분히 한 편 짜리 영화로 만들 수 있었을겁니다.

설정을 납득하기도 힘듭니다. 제국이 거대 전함을 동원하여 변방 혹성 농촌 마을 식량을 수탈한다는 것부터 웃겼습니다. 변방 마을 곡식을 털기 위해 유비가 관우, 장비에게 대군을 딸려 보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전형적인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죠.
마을이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용사들을 모은다는건 더 황당했습니다. 상대방은 거대 전함에 온갖 무기가 다 있는 거대 제국인데, 일개 마을이 대체 어떻게 싸우겠다는건지 모르겠거든요. 용사들이 우주해적 코브라의 싸이코 건같은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촬영 및 액션도 그닥입니다. 잭 스나이더스러운 슬로우 모션 난무도 이제 식상하고 지겨웠으며, CG티가 물씬 나는 화면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후속 시리즈는 볼 생각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넷플릭스 투자의 폐해입니다. 극장에 걸렸다면 처참히 실패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우주의 7인"을 리메이크했더라면 좋았겠습니다.

2024/02/04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김승욱 : 별점 4점

스파이와 배신자 - 8점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열린책들

1970~80년대 영국 정보부서 M16와 내통하던 KGB 최고위급 간부(KGB 런던 지부장)였던 올레크 고르디엡스키에 대한 논픽션.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입니다. 냉전시대 여러 첩보 작전들이 굉장히 상세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큰 재미를 안겨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고르디엡스키의 정체가 들통나서 모스크바로 소환된 뒤부터는 논픽션이지만 왠만한 스파이 소설보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고르디엡스키가 궁지에 몰리며 수렁에 빠지는 과정,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설계되었던 '핌리코 작전'의 가동, 그리고 고르디엡스키의 목숨을 건 소련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지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실제로 진행되었던 작전이라 픽션에서는 주기 어려운 생생한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핌리코 작전 때 차 트렁크에 있는 고르디엡스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아기 기저귀를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갈았다는 것처럼요. 소련 당국의 안일한 태도 - 그래서 탈출을 눈치채지 못했음 - 도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픽션이라면 허술하다고 비판받았을테지만요.
이런 디테일들은 올레크가 M16과 안가에서 만나 내통하는 상세한 과정, 당시 기술로는 최고 수준의 정교한 라이터 내장 카메라, 스파이가 메시지를 잘 받았다는 답이 맥주병 뚜껑을 올려놓는 것인데 '진저비어' 병뚜껑을 올려둔건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던는 등으로 책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실제 스파이들을 둘러 싼 첩보 과정도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대표적인게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첩자의 정보를 그냥 활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간닪난 일이 아니더라고요. 적의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첩자가 우리 진영 내 첩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면, 적 역시 자기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M16는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길게 보고 이용하는걸 택했지만, 결국 정보를 이용한 탓에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CIA가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를 알아낸 과정도 왠만한 추리 소설은 비벼보기도 힘듭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CIA는 M16에서 제공한 라이언 작전 관련 정보로 정보원이 KGB 요원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보고서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M16과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그는 소련 밖에 있고 영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추리했습니다. 전달된 정보는 기술 정보나 군사 정보보다 정치 정보가 많다는 것으로 그가 제1주요부 PR라인에 근무한다는 걸 알려주었고요. 마지막으로 KGB 내부 첩자라면 서방의 소련 첩자를 알려주었을텐데, 최근 소련이 잃은 첩자들은 노르웨이의 호비크와 트레홀트, 스웨덴의 베릴링, 영국의 마이클 베터니였습니다. 호비크와 베릴링이 체포되었을 때 스칸디나비아에 있었고, 트레홀트와 베터니가 잡혔을 때 영국에 있었던 사람은? 올레크 고르디엡스키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올레크의 과거 조사는 그가 M16의 내부 첩자라는건 분명히 드러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CIA가 알아낸 내부 첩자의 정체를 CIA의 배신자 올드리치 에임스가 밀고하여 올레크가 위기에 빠졌던 것입니다.

고르디엡스키의 활약(?)과 함께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설명되는데 냉전 때 KGB 수장이었던, 그리고 소련 서기장까지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실제 서방의 핵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KGB는 서방의 선제 핵 공격 징후를 다각도로 포착하기 위한 '라이언 작전'을 진행했었으며,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는 등의 비화도 놀라왔습니다. 
라이언 작전 당시 크렘린은 '혈액 은행'이 진짜 은행처럼 혈액을 사고 파는 곳인줄 알았다는건 좀 웃겼고요.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도 무척이나 독특한 매력을 전해줍니다. 우선 그가 조국을 배신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탓이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스파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변절했는데 말이지요. 본인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보를 넘긴걸 다른 반체제 활동과 동일시했다는 올레크의 생각도 신선했어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작가 솔제니친은 글로 싸웠듯이 KGB 요원인 올레크는 첩보 세계에서 정보를 활용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간에 고르디엡스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에 대해 칭송하다시피하는 내용을 쓴건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적이라고 책에서 설명되는 것들의 실체도 모호하고요. 책에서는 소련이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걸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으로 전달된 정보로 서방은 알고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서방은 당시 스타워즈 계획을 중지하거나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고르디엡스키가 제공한 정보와 핵 전쟁을 막은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그의 활약과 희생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하고, 대처도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을 그를 높이 평가했다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인정받을만한 인물일까요? 가족도 잃은 채 조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 M16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는 현재가 고르디엡스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외한다면, 달리 나무랄데 없는 최고의 책입니다. 스파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4/02/03

여태까지 내가 읽었던 존 딕슨 카 작품 순위 (ver2)

2022년 7월에 "여태까지 나만의 존 딕슨 카 작품 순위"라는 글을 올렸었습니다. 1년 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후 4권의 장편을 더 읽었기에 새롭게 추가합니다. 
그 때도 평균 별점이 높아서 깜짝 놀랐었는데, 이번에 더 높아져서 전체 평균 별점이 무려 3.75점에 달하네요. 과연 타율왕답습니다.

제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별점 3점 이상
<<은빛 장막 속에서>>, <<합법적인 사형집행인>> 별점 4점
<<사라진 방>>, <<분장실의 시체>> :별점 3.5점
<<투명 인간 살인>> : 별점 3점

14위 : 별점 2점

순례 주택 - 유은실 : 별점 3점

순례 주택 - 6점
유은실 지음/비룡소

중학생 수림이의 아빠, 엄마는 외할아버지 소유의 아파트 원더 그랜디움에 사는게 자랑인 허영덩어리 무능력자였고, 언니 미림은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수림이만 가족 중 유일하게 스스로를 건사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여자 친구 순례씨에 의해 빌라 '순례 주택'에서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며 성장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수림이네 가족은 아파트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인데, 다행히 순례 씨의 배려로 저렴한 순례 주택으로 이사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 엄마와 언니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빌라촌 주민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는데....

딸의 논술학원 교재. 
부잣집이 망해서 신세가 전락한 뒤, 가난에 적응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코미디는 많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흔하게 쓰였던 소재이지요. 오래전 드라마 "엄마의 바다"가 떠오르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소속은 부잣집이지만 마음은 가난한', 그리고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어른인' 수림이를 통해 다른 유사 작품과 다른 독특함을 보여줍니다. 부모의 무능력과 추태는 수림이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객관적인 비판이 가능할 뿐더러, 중학생 시점에서 가족들이 서서히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성장기인 셈이지요. 이 과정에서 수림이한테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라고 순례 씨가 말하는 장면은 진짜 어른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줍니다.
아이 눈으로 바라본 세태 풍자라는 점에서 "아홉살 인생"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릅니다.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한 묘사 덕분입니다. 사실 "아홉살 인생"의 삶은 세태 풍자라고 보기에는 많이 끔찍한 편이었지요.... 여기에 기승전결을 갖춘 긴 이야기가 아니라 왁자지껄하면서도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순례 씨를 비롯한 순례 주택 주민들과 수림이네 가족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점 등이 더해져 한 편의 가족 시트콤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가족 시트콤에 세태 풍자를 결합한 정도로 끝냈어야 했는데 그레타 툰베리를 언급해가며 환경 보호 메시지까지 집어넣은건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기승전결이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마무리한 결말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엄마, 아빠와 미림이 정말 정신을 확실히 차렸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게 더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엄마, 아빠와 언니 미림의 설정도 지나치게 뻔했습니다. 뉴스 등에서 접했던 이슈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청소년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아빠 정신상태는 어른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부모가 아직도 있나? 싶을 정도로 극단적이었거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재미도 있고, 한 번 읽을 가치도 충분해 보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제 딸도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4/02/02

흉인저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김은모 : 별점 2.5점

흉인저의 살인 - 6점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와 겐자키는 나루시마의 의뢰로 폐허 놀이동산으로 유명한 드림 시티로 향했다. 드림 시티의 대표 후기 겐스케로부터 구 마다라메 기관에서 연구했던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나루시마는 용병들까지 고용하여 만전을 기했다. 드림 시티 안에 있는, 후기 겐스케가 거주하는 흉인저는 매달 종업원 한 명이 불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입한 일행은 흉인저 안에서 후기를 제압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모두 갇힌 채 외팔이 살인마 거인을 만나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거인이 햇빛을 싫어하여 낮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탈출을 고민할 수 있었다. 폐쇄된 문을 부수는건 거인이 밖으로 나가 더 큰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에, 첫 날 살해당한 코치맨이 가지고 있던 열쇠를 어떻게든 회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탈출을 준비하던 중 생존한 일행 내부에 또다른 살인자가 있다는게 드러났다. 후기와 흉인저 고용인 사이가가 살해당한 탓이었다. 뒤이어 거인을 유인하여 열쇠를 회수하는 작전도 실패했고 나루시마마저 거인에게 살해당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하무라와 겐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마다라메 기관이라는 연구 기관에서 비롯된 괴물, 괴인들이 핵심 소재인 '특수 설정'이 여전히 작품의 중심입니다. 이번에는 강화된 신체를 얻은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13일의 금요일"과 유사한, 초강력 살인마가 등장하는 슬래셔 호러물로 기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주는 덕분입니다. 살인마를 피해 탈출하기 위한 작전과 쫓고 쫓기는 상황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후기를 살해한 범인이 고리키 미야코라는걸 밝히는 겐자키의 추리부터 깔끔했습니다. '거인이 거주구역을 오가는 철문을 연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거인은 외팔이라 머리 두 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를 잠깐 내려 놓았을 수는 있지만 후기의 머리는 먼지가 묻지 않고 깔끔했다' 등의 근거를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모든 단서와 근거들은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고양이 장식 눈에 박혀있던 '알렉산드라이트'에 대한 말실수는 좀 오버스럽긴 했지만요.
사이가를 살해하고, 살해된 사이가의 머리를 머리 무덤으로 옮겨 놓은 사건은 불가능 범죄라 더 흥미롭습니다. 아침이 되기까지 사이가의 시체가 놓여있던 부구획에 드나든 건 거인밖에 없었습니다. 부구획은 하무라와 아울이, 주구획은 보스가 밤새 감시를 했었지요. 주구획 쪽에서 창문 너머로 목을 절단하기도 불가능했습니다. 밤이 되기 전 사이가의 목을 미리 잘라놓은게 아닐까?라는 것도 현장에 있던 중식도는 거인이 깨어난 뒤 나루시마가 후기의 방에서 가지고 나간 물건이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고요. 시신 주변에 고인 피가 굳은 상태로 보면 목이 절단되고 아홉 시간 가까이 지났기에 거인이 아침에 자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이가의 목을 절단했을까요? 겐자키는 '목이 야간에 절단되었다'는걸 증명하는건 피가 굳은 상태 뿐이라는데 주목해서 거인과 같은 특수 능력을 갖춘 '생존자'가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자신의 피를 뿌려 굳혔다는 트릭을 밝혀냅니다. '생존자'는 경이적인 생명력과 치유력을 갖춘 덕분에, 피를 많이 흘리고도 멀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인이 아침에 거처로 돌아가면서 시신의 목을 절단했던겁니다. 이렇게 특수 설정이 트릭으로 활용된건, 정통 본격물로는 반칙이겠지만 이 작품에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고 생각됩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반드시 피해자 목을 절단한 뒤 '머리 무덤'에 버리는 거인의 버릇을 이용해서 열쇠를 회수한 마지막 장면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생존자' 우라이는 코치맨의 시체에서 열쇠를 회수한 뒤 열쇠를 입 안에 넣었고, 머리 무덤 안에 숨어있던 겐자키가 거인이 가져다 버린 우라이 머리에서 열쇠를 회수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머리 무덤'의 존재와 거인의 버릇이라는 특수 설정을 활용했다는건 두 번째 살인 사건 트릭과 유사한데, 이런게 이 작품의 묘미겠지요.
미스터리 애호회에 가입하려는 친구들에게 테스트를 하는 도입부도 "9마일은 너무 멀다"가 떠오르는 소소한 재미가 좋았으며, 그 외 안락의자 탐정에 대한 의견이나 탐정과 범인의 역할에 대한 담론 및 기타 추리들도 풍성한 편입니다.

그러나 '특수 설정'을 위한 여러 설명들이 유치하고 작위적이라는 문제는 큽니다. 거인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케이라는 소녀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녀가 거인이며, 살육은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을 원숭이 괴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반전은 뻔하면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미쳐버린 케이를 후기가 그동안 어떻게 돌봐왔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생존자'는 거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얻었는데, 유사한 생명력과 치유력을 갖췄다는 것도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이었으며, 우라이 고타가 무려 30년 전에 케이와 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함께'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살인 (사이가 살해)을 저지른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작품의 핵심이라서, 이렇게 동기가 부실하다는건 추리물로는 큰 약점일 수 밖에 없어요.

작위적인 설정은 그 밖에도 넘쳐납니다. 사회 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고용하고, 이들 중 한 명을 매달 거인에게 산제물로 바친다는 설정은 이게 과연 21세기의 이야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마다라메 기관의 연구 성과를 노린다는 나루시마, 사고를 불러오는 명문가의 영애 겐자키 설정도 한결같이 만화스러웠고요. "13일의 금요일"이 떠오르는 거인 케이 설정 역시 뻔해서 고민한 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런 점들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고질적인, 당연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2차 대전 때 생체 실험을 하다가 괴물을 만들었고, 전후 공습으로 폐허가 된 연구소 내에서 생존한 연구원이 괴물을 데리고 연구를 이어왔지만 괴물의 친구가 모든걸 끝내기 위해 찾아왔다는 정도로 끌어나가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이가도 단순 고용인이 아니라, 연구소 내 연구원 중 한명이었다고 설명하면 동기가 설명되었을거고요. 너무 "경성크리처"스러웠을까요?
아울러 '흉인저''의 복잡한 구조에 대한 설명이 장황한 것도 별로였습니다. 계속 앞 부분에 수록된 약도를 찾아 읽게끔 하는 상세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사건과 추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아니었던 탓입니다.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이렇게 단점이 적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는건 감안해야겠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최소한 "마안갑의 살인"보다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