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살림 |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슾지대에서 태어난 카야는 엄마와 언니, 오빠들, 마지막으로 아빠마저 집을 떠나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카야는 어린 나이와 마을에서는 '마시 걸'이라고 불리우며 차별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놀라운 생존 본능과 흑인 점핑, 그리고 첫 사랑 테이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심지어는 글을 깨우친 뒤 독학으로 슾지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진행하며 책까지 출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이트와의 이별, 첫 남자 체이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몇 년이 지나 돌아온 체이스는 그녀를 강간하려 시도했고, 카야는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뒤, 체이스는 망루에서 떨어진 시체로 발견되었고, 카야는 유력한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는데...
일전에 소개해드렸던 랭킹에서 해외 미스터리 걸작 베스트 10에 당당히 선정되어 있기에 궁금한 마음에 읽어보게 된 작품입니다. '버려진 아이'인 카야가 테이트와 점핑의 도움만으로 훌륭한 늪지대 전문가로 성장한다는 낭만적인 성장기와 체이스 살인 사건이 병행해서 전개됩니다.
초반부 어린 카야 시점에서의 여러가지 묘사들과 성장기스러운 분위기,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엄청난 디테일 - 제목부터가 엄청난 오지인 노스캐롤라이나 늪지대를 의미합니다 - ,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재판이 있던 1970년까지 난무했던 인종 차별, 여성 차별, 편견이 난무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묘사와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 법정 장면이며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함께 펼쳐진다는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앵무새 죽이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성장기 측면에서는 이 작품 쪽이 더 볼만한 부분이 많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 남부 요리들에 대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츠'가 기억에 남습니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인데, 처음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먹는 형편없이 빈약한 일상식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의 40여년이 흐른 뒤에는 관광지의 별미처럼 격상하는게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보릿고개 때 소나무 껍질로 만들어 먹다가 지금은 지역 명물 별미가 된 송기떡 같은 경우겠지요? 그 외의 음식들 묘사도 그럴듯했습니다.
카야를 도와준 몇 안돼는 지인인 흑인 점핑과 메이블 가족과의 에피소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카야의 첫 책이 출간되었을 때,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에 서로 포옹하지는 못했지만 두 손을 꼭 감싸쥐었다가 돌아서서 떠나는 장면은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애매합니다. 디테일의 끝판왕이기는 한데, 한 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간 관계부터 그러하지요. 어린 카야만 남겨두고 엄마부터 시작해서 언니, 오빠들이 집을 떠난 뒤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건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카야의 아빠를 비롯, 조디 오빠, 테이트, 체이스 등 카야 주변의 모든 백인 남자는 모두 한 번씩 카야를 버렸다는 일관된 설정도 영 별로였습니다. 카야가 체이스같은 인간 쓰레기에게 손쉽게 농락당하는게 특히나요. 전혀 카야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야는 늪지 생태계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통해, 암컷이 수컷을 짝짓기와 먹이로 이용하는 방법을 이미 통달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수컷은 무가치하며, 암컷들을 전전하며 거짓으로 암컷을 유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본능적인 팜므 파탈로, 체이스의 등골까지 뽑아먹는 악녀로 묘사되는게 더 설득력이 높지 않았을까요? 단지 암컷으로서의 본능 때문에 체이스의 유혹에 넘어간다는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추리물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알리바이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카야가 빠듯한 시간 안에 망루에 도착해서 체이스를 살해할 수 있었던 건, 그 지역의 '이안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트릭인데, 전문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았으니까요. 그 지역에서 보트만 십 년 넘게 따온 카야라면 쉽게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할만큼 카야에 대한 배경 설정은 완벽한 편이기도 하고요.
마침 사건 당일 출판사로 출장을 떠났던 카야가 도심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 근처 호텔에 숙박했었던 등의 요소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검사측 주장대로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자연에서 지내다보니 도심 속 호텔을 싫어했으리라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버스에는 카야와 체형이 흡사한 승객이 탑승했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과연 카야가 법정에 피고로 서서 유죄 판결을 받을만 했나? 라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법정 추리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체이스를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체이스 옷에 그녀의 모자 섬유가 묻어 있었던건 사건 당일 묻었다고 볼 근거가 없고, 체이스 살해 현장으로 그녀가 이동했다고 확신하는 증인도 없습니다. 아니, 그녀가 체이스 살해 현장으로 시간 맞춰서 이동이 가능했는지조차 검사는 증명할 수 없었지요. 게다가 이 모든게 사실이라서 그녀가 망루에서 체이스를 만났다 한 들, 그녀가 체이스를 밀쳐 떨어트려 살해했다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 즉, 제대로 정신이 박힌 배심원이라면 그녀가 유죄라고 판단할리 없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배심원들의 편견인데, 마침 배심원 중에는 그녀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는 설정이니 그녀가 무죄로 풀려나는건 당연합니다. 카야가 흑인은 아니지만, 비슷한 편견 때문에 유죄를 받는 식으로 흘러갔다면, 그건 그야말로 <<앵무새 죽이기>>의 복제에 불과했을테고요.
카야가 체이스의 목걸이를 풀어 가져간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하는 약점도 거슬렸습니다. 목걸이가 남아있었더라면 그냥 사고사로 처리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목걸이를 아무리 잘 숨겨 놓았다 하더라도 집 안에 숨겼다? 완전 범죄물로 보기 힘들 정도의 큰 결격 사유에요. 완전 범죄를 계획했던 범인이 자기 집에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다 놓는건 아무리 봐도 말이 안됩니다. 이는 진상을 어떻게든 드러내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카야가 죽은 뒤, 그녀와 결혼한 테이트가 집 안 비밀 장소에서 목걸이와 카야가 쓴 글을 찾아내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결말도 식상했고요.
즉, 법정 미스터리나 완전 범죄 추리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기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낭만적인 성장기로는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소 진부했고, 추리물로서도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역대 서양 미스터리 베스트 10 중 한 작품으로 꼽힐 작품은 아니에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인건 맞습니다. 이런 류의 랭킹은 불신이 더 컸었는데, 가끔은 참고할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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