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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30

조선의 뒷골목 풍경 - 강명관 : 별점 3점

조선의 뒷골목 풍경 - 6점
강명관 지음/푸른역사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이라는 미시사 서적을 통해 접했었던 강명관 교수의 초기작. 2003년 첫 발표되었으니 거의 20여년 전이네요. 제목처럼 조선 시대, 정사 등으로는 언급되기 힘들었던 여러가지 생활사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인 <<수만 백성 살린 이름없는 명의들|민중의>> 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병을 치료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줍니다. 조선 시대의 공식적인 의료 기관과 의사들은 왕과 권력자들을 위해서 존재했는데, 일반 백성들은 '민중의'를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네요. 방법도 침술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처방하는 수준에 그쳤다니, 참 민중들은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을 겁니다.

<<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된다|군도와 땡추>>는 '군도', 즉 무리를 지은 도둑 집단과 이 군도 무리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땡추'에 대해 자세히 알려줍니다. 보원 스님 등 여러 분의 증언에 기반하고 있는데, '땡추'는 '당취'에서 나온 말로 조선 초 강력한 배불 정책 이후 금강산으로 들어가버린 종파가 그 유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배불 정책을 반대하니 당연히 반체제 집단이었고, 민중 교화 뿐 아니라 민중 구제까지 겸해서 산적과 결탁하게 되었다는군요. 1908년, 화적 집단이 체포되었고, 그 중 스님 송학이 동료들을 팔아넘겼다는 기사가 황성 신문에 실렸으며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다니,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투전 노름에 날새는 줄 몰랐다|도박>>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습니다. 우선은 제목 그대로 조선 시대 도박에 대한 상세히 소개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도박계의 패권을 차지한 것은 '투전'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던 '돌려대기'는 40장 투전목을 써서 다섯 명이 5장씩 나누어 가진 뒤 각기 3장을 모아서 10, 20, 30을 만들고 나머지 2장의 숫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답니다. 남은 2장은 여러가지 족보가 있는데 이는 현재 화투 도박 족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네요.
물론 이런 내용은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에서 더욱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지만, 이 책의 가치는 도박과 관련된 다른 일화 소개가 상세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18세기 조선 투전계 최고의 타자 (打子 투전고수)가 효종 딸 경숙옹주의 손자이자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던 원경하의 아들로, 그리고 본인 역시 이조판서에 우의정까지 올랐던 원인손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당시 양반사회 최상부층까지 투전이 침투했었다는걸 극명하게 드려내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군요.
그리고 투전 이야기 짤막하게 뒤에 언급된 조선 후기 도박 성행의 이유와 그와 관련된 '언막이', '보막이' 등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정말 머리를 세게 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조선 후기 도박 성행의 이유 중 핵심으로 개인의 재능과 노력과 사회적 성취가 정비례하지 않았던 불확실성에서 유래되었다고 봅니다. 즉, 사람들이 큰 성공을 하려면 정상적인 방법보다는 극한의 위험을 짊어지고 '한탕'을 노릴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지요. 공한지에 둑을 쌓아 논을 만든다는 '언막이', '보막이', 광산을 찾는다는 금점, 은점도 이런 사회적 불확실성으로 조선 후기 널리 유행했다고 하고요. 조선 후기로부터는 거의 200여년, 이 책이 발표된지도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런 상황이 2020년대 현재 시점에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게 정말 놀랍지 않나요? 젊은이들이 '노오력'에 대한 정당한 성취를 얻지 못해서 좌절하고, 심지어 주식과 코인, 부동산에 '투자' 하지만 이는 '언막이'나 '보막이' 처럼 위험부담이 크고 심지어 사기와 불법으로 점철되어 있는게 많아서 더 큰 좌절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정말 세상이 변한게 없다는걸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 글은 최근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주정|금주령과 술집>>에서는 연암 박지원이 알려주는 조선 시대 음주 문화(?)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청결하고 화려했던 술집과 조선 술집을 비교하며, 조선 술집은 운치도 없을 뿐더러 술 마시는 양은 너무 커서 큰 사발에 철철 따라서 들이 붓는 식으로 마셔서,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싸움질이라며 한탄했다는데 이게 뭐 한탄할 일이랍니까?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셔야죠! 조선 사나이, 남자일세!
그 외에도 술집은 목로술집, 내외술집, 사말막걸리집, 모주집, 색주가로 구분되며 술집은 쳇바퀴로 등롱을 달아 술집임을 표시했다는 등의 디테일, 영조가 금주령을 강하게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서울의 게토,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 지대|반촌>>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뒤흔든 무뢰배들|검계와 왈자>>, <<조선 후기 유행 주도한 오렌지족|별감>>, <<은요강에 소변 보고 최음제 춘화 가득하니|탕자>>는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 풍류를 즐기던 일종의 협객? 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반촌은 성균관 잡역을 세습적으로 맡아보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이곳 남자들은 사치스러운 복색, 호협한 기질과 폭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검계와 왈자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다만 가진 신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종의 폭력 집단(?) 속 남자들이라는건 똑같으니까요. 거지들이 모인 개방과 나름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이 모인 명문정파도 결국 폭력으로 모든걸 해결한다는 무협지 속 세계인 셈이지요. 별감은 화려함, 그리고 풍류를 추구하는 이른바 유흥의 최전선에 있으며 '오락'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이들 폭력 집단과 연결되고요. 영화 배우들을 장악했었던 홍콩 흑사회 조직이 떠오릅니다. 탕자는 이들과 어울리며 돈을 물쓰듯 쓰던 사람들이니 역시 한 배를 탄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는 조선 후기의 풍류와 오락, 그리고 당대 패션 리더 별감이 입었던 화려한 옷차림이 무엇인지 등 흥미로운 정보들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시험이나 어우동의 이야기를 다룬 부분은 다른 책에서 많이 접했던 이야기라 별로 새롭지 않았으며, 사료가 조선 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특정 인물 증언에 지나치게 의지한다던가, <<이춘풍 전>>과 같은 소설 등 그 근거가 다소 희박하다는 점 등이 그러했어요. 도판도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용도보다는 일종의 일러스트(?) 개념으로 들어간 그림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고요.

하지만 단점은 크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풍속과 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었다 생각되네요. 앞서 말씀드렸듯, 현재와 다르지 않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케하고 미래를 고민케 만드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4/29

Q.E.D Iff 증명종료 1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17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도 오랫만이네요. 이번에는 나름대로(?) 강력 사건 한 편과 일상계(?) 한 편이 수록되어 있는 전통의 구성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포플러 장의 살인 게임>>
포플러 장에 토마와 가나를 포함해서, 댄서와 마술사, 용병 등 다채로운 직업을 가진 10명의 사람이 모였다. 48시간 안에 저택에서 일어날 무언가에 대해 풀어내는 게임 참가를 위해서였다. 상품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푸른 나비 브로치였다. 게임을 하는 동안 포플러 장은 봉쇄되며, 참가자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참가자 중 코가모와 하토야가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살해당한 방은 밀실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있었다.

포플러 장은 유명 게임에서 반사회조직을 찾아내기 위해 회사가 만든 영역이었고, 푸른 나비 브로치는 게임에 사용되는 아이템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 비현실적인 상황을 그럴듯하게 그려낸 전개와 묘사, 그리고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기묘한 직업이 가장 큰 단서가 된다는 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밀실 트릭도 게임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살해당한 두 명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인 뒤, 창을 잠그고 자살했던 것입니다. 그 캐릭터는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는 설정이지요. 병 간호를 핑계로 불참했던 저녁 식사 때 게임 참가자들이 했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걸 통해, 토마는 주시마츠가 복수 개의 캐릭터를 이용한다는걸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독특한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캐릭터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주시마츠는 다른 두 캐릭터를 이용하며 밀실 살인을 저지르고, 아이템이 담긴 가방을 훔쳤던 겁니다. 그래서 세 명이 동시에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고요.
사건은 형사임을 자처했던 카리카네가 이 사실을 알아낸 뒤, 주시마츠를 협박해서 실제 주소를 알아냈다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카리카네 역시 가방이 범행 동기라는걸 알고 있었던 등 범인밖에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진상이 너무 극단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애초에 게임 회사는 계정 주인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으니, 이런 복잡한 게임을 따로 벌이지 않아도 수상한 사람의 조사를 경찰에 의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약합니다. 게임도 어디까지 자유도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평범한 게임이라면 직업별로 스킬이 있는게 당연하니, 밀실 트릭이 의미가 있는 상황이 아닐것 같거든요. 추리물로 기능하려면, 보다 정교한 설정이 필요했습니다.
추리 요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 개를 만든 것이었다!도 새롭다고 하기는 힘들었어요. 예를 들어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 노트>>에서도 두 쌍동이가 아니라 세 쌍동이었다!는 트릭이 등장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을 녹여낸 시도는 좋았지만, 설득력을 갖추는 데에는 실패했고 추리적으로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서 감점합니다.

<<트롤리 딜레마>>
토마와 가나가 휴식을 즐기던 바닷가 야키소바집 아르바이드생 이시카리 아유가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편모 가정 자녀로 아버지 쿠치무츠 고로 씨는 부자였지만 1년 전 캐나다에서 타고있던 선박 좌초 사고 이후 실종되었으며, 양육비 지원도 끊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토마는 고로 씨가 특별실종선고를 받게 되면, 사망한 것과 같이 처리되니 유산 분할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쿠치무츠 집안에서는 아유가 쿠치무츠 씨의 딸이 아니라며 유산 분할 및 DNA 제공도 거부했다. 심지어 쿠치무츠 가문에서 머리카락을 봉납해 왔었던 신사에 누군가 침입하여 쿠치무츠씨의 머리카락을 불에 태워버리고 마는데....


이전에 등장했던 변호사 키리시마 치도리가 재등장하는 작품. 제목의 트롤리 딜레마는 한 선로는 1명이, 다른 선로에는 5명이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선로로 폭주하는 기차를 유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런 저런 딜레마, 특히 사람 생명의 경중을 다루는 상황에서 많이 언급되는 문제이지요.
그러나 작 중에서 이 문제는 수 페이지를 할애해가며 설명하는 것 치고는,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쿠치무츠 가문 4명의 자식과 아유 한 명의 대결 구도가 아닌 탓입니다. 아유에게 돈을 준다고 다른 4명의 자식들이 다 망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야기도 별로였습니다. 쿠치무츠씨가 살아있었고, 화상 통화로 변호사와 가족이 참석한 회의에 화상 통화로 참여하여 장남에게 아유가 자기 딸이라며, 뒷일을 부탁하는 걸로 마무리되지만 알고보니 쿠치무츠씨는 이미 죽었으며, 유산 상속 분쟁은 모두 쇼였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화상 통화를 조작해서 살아있던 것 처럼 만든거지요. 암으로 죽음을 예상하여 꾸준히 자식들에게 재산을 증여해왔는데, 죽은 시점이 너무 이르면 이미 증여한 재산에도 상속세가 부과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듯하죠? 허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조작극을 가족들과 변호사만 있는 장소에서 벌이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가족들이 쿠치무츠 씨가 살아있다고 우겨도 믿어줄리가 만무하니까요.
그리고 이 화상 통화 조작극을 위해 유산 분쟁에 대해 쇼를 벌인 이유도 모르겠어요. 이럴거면 그냥 변호사들과 가족들이 함께하는 자리만 만들면 그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설득력없는 이야기를 위해 이런저런 설정을 가져다붙이기는 했지만, 그리 성공적인 결과물은 아니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04/24

퍼펙트 맨 - A.J. 킨넬 : 별점 1점

 

퍼펙트 맨 - 2점
A.J.킨넬/다모아

스코틀랜드의 도시 로커빌 상공을 날던 팬암 103 여객기가 폭발하여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테러범이 장치한 폭탄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아내 나디아와 네살 딸을 잃은 크리시는 같은 사고로 아내를 잃은 미국의 억만장자 상원의원 그레인저의 도움을 얻어 복수에 나섰다.
그러나 테러를 저질렀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의 아흐메드 지브릴도 크리시와 그레인저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지브릴은 그들을 없애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크리시는 새롭게 사랑하게 된 여인마저 잃고 마는데...


크리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예전에 읽었었는데 우연찮게 중고 도서로 다시 구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다보니, 최근의 이세계 전생물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크리시가 현재 사회와는 이질적인, 다른 세계에서 돌아온 절대무적 전투기계이며, 절대 악을 응징하는 일종의 정의(?)를 집행한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다양한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건 일종의 파티를 이루어 퀘스트를 달성하는 전형적인 RPG 전개이기도 하지요. 온갖 미녀들과 엮여서 하렘을 이룬다는 설정도 이세계 전생물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전형적인 전개조차도 제대로 그려내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인기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말이지요. 도가 지나친 크리시의 전지전능함은 이 시리즈의 핵심 요소이니 그렇다 쳐도, 전개와는 관련없는 흥미 본위의 설정과 억지가 가득했던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크리시가 급작스럽게 파트너가 필요하다면서 후계자 마이켈을 키워내고, 마이켈을 양자로 삼기 위해 배우 레오니와 위장 결혼한다는 설정이에요. 이 둘은 크리시의 복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이야기 전개에서 필요한 부분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분량을 늘리기 위한 설정 추가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마이켈을 인간 흉기로 만드는 과정이라도 상세하게 묘사되었더라면 조금 나았겠지만, 이 역시 '훈련으로 성장했다' 정도의 설명에 그칩니다. 구르카병 람바하두르 라이의 저격병 실습은 비교적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지만, 그냥 '참을성 기르기'에 불과해서 그리 와 닿지 않았어요. 또 그게 어떤 수업이던간에, 17살 고아가 고작 1년여 배웠다고 인간 흉기 크리시와 동급의 능력자가 된다는건 말이 안되지요. 하기사 애초에 크리시가 마이켈을 후계자로 점찍은 이유조차 불분명하니, 뭐 이런 설명이 부족한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레오니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었으며, 여자는 모두 남자를 위한 들러리처럼 보이는 마초적인 설정도 보기 껄끄러웠고요.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모두 들어내고, 크리시가 그레인저와 힘을 합쳐 지브릴을 없애려는 과정과 지브릴의 저항만 그려내는게 훨씬 깔끔하고 읽기 좋았을겁니다. 기 - 승 - 전 -결 구조로만 보아도 기 (여객기 폭파) - 승 (복수를 다짐한 크리시와 그레인저의 의기투합) - 전 (지브릴의 저항) - 결 (크리시의 복수 성공) 으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니까요.
게다가 잡다한 크리시의 주변 설정 묘사가 많은 탓에, 지브릴을 저격하는 마지막 작전은 허무할 정도로 짧게 마무리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냥 돈을 들여서 지브릴의 근거지에 잠입한 뒤, 저격 후 도주한다는게 전부거든요. 크리시가 한 일이라곤 잠입 및 은신처, 무기를 수급하는 사람에게 의뢰했을 뿐입니다. <<자칼의 날>> 처럼 철두철미한 작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레인저 상원의원 납치 계획을 저지하는 크리시 동료들의 활약이 훨씬 볼만했었습니다. 그나마도 쉽게 끝날 작전이 마이켈의 부상으로 어려움에 빠진다는건 도대체 앞서 마이켈을 키운 이유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실망스러웠던 전형적인 펄프 픽션이었습니다. 국내에 다시 출간될 일도 없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전에 왜 좋은 평가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예나 지금이나 - 박성호 / 박성표 : 별점 2.5점

 

예나 지금이나 - 6점
박성호.박성표 지음/그린비

100년전 신문 기사를 통해 그 시절과 지금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걸 알려주는 미시사인문학 서적.
<<조선의 풍속과 청춘>>, <<조선의 교육과 문화>>, <<조선의 정치와 역사>>의 3개의 주제로 나누어 총 38개 항목에 대해서 100년전과 지금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걸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벛꽃 놀이, 애완견에 대한 여러가지 정책들, 미래 상상, 음란물 규제와 대응, 청춘들의 허세, 썸타기 등 정말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들은 재미있었습니다. 대부분 '문화'와 '사고 방식'에 가까운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런게 과연 쉽게 변하는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이를 기사 뿐 아니라 여러가지 사료와 도판으로 설명해주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게 아니라, 오히려 100년 전에 시대를 엄청나게 앞서갔던게 아닌가 싶었던 아이디어들이 더 눈에 뜨이기는 했습니다. 2000년의 '선영아 사랑해'를 떠올리게 만드는 1914년 매일신보 광고처럼요. 신문 하단을 통으로 이용해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녀 사진을 싣고, "이 미녀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한 광고인지 알고 싶으면 내일 같은 지면 광고를 확인하시라"는 문구만 실었다는데, 이건 정말 100년 전에 광고 천재가 살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대단한 아이디어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허가해 준 광고주도 대단한 사람이었을테고요. 이를 통해 처음에 광고는 개인적 용도로도 - 누구누구를 욕하고 비방하는 등 - 사용되었고, 이후 허황된 사기성 제품 광고에도 사용되었다는 등의 초기의 신문 광고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좋았고요.
참고로, 저 티저 광고의 정체는 담배 광고였다고 합니다. 미녀 등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들 시선을 잡아끄는건 지금도 술, 담배와 같은 기호품 광고가 많으니 그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라는 말에 딱 맞는 소재이기도 하네요.
'조선의 키보드 배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김동인과 필명 '제월'인 평론가가 기고를 반복하며 설전을 벌였다던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김동인이 제월에 대해 인신공격과 '카더라 통신'을 끌어들여 썼던 글들은 김동인이라는 작가도 보통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게다가 김동인 공격의 핵심은 '소설도 쓸 줄 모르면 비평도 하지 마라' 였는데, '제월'이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소설을 한 편 썼고, 그 작품이 바로 <<표본실의 청개구리>>였다는 일종의 반전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제월'이 바로 소설가 염상섭이었던 거지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고 김동인도 굉장한 충격을 느끼고 호평했다는 또 다른, 마지막 반전(?) 역시도 기억에 남네요. 몇 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던, 만화가 양경일의 루리웹 만지소 인증 사건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역시나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 약간 취지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세태를, 현실 비판 용도로 들고 오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현재 영어 조기 교육을 100여년 전 일본어 조기 교육 열풍에 빗대어 비판한다던가, 청춘들이 공무원을 꿈꾸던 세태 비판 등이 그러하며, 마지막 3장인 <<조선의 정치와 역사>>은 전체 내용이 '예나 지금이나'와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식민지에서의 여러가지 정치 활동 등이 주요 내용이거든요. 현재 시점에서 되새겨봄직한 내용인건 맞지만, 다른 주제들과는 확실히 결이 많이 달랐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2부까지는 재미있는 소재들이 많았는데 뒷 부분은 기대와 달랐기에 감점합니다.

2022/04/22

숲 - 할런 코벤 / 최필원 : 별점 2.5점

 

- 6점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폴 코플랜드는 얼마전 살해된 채 발견된 마놀로 산티아고가 20년 전, 캠프장 살인 사건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진 길 페레즈라는걸 알게 되었다. 당시 피해자 중 마고 그린과 더그 빌링엄의 시체는 발견되었었지만, 길 페레즈와 폴의 여동생 카밀 코플랜드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폴은 20년 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동생 카밀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사에 나서는데....

할런 코벤 작품은 처음 읽어봅니다. 전미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는 하지만, 제가 현대물보다는 고전 취향인 탓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격리 중 읽을 거리를 찾다가 드디어 읽어보았습니다.

이야기는 폴이 주도하는 젊은 대학생 젠레트와 마란츠가 스트리퍼 샤미키를 강간한 사건 재판과 20년 전 있었던 숲에서의 여름 캠프 참가자 살해 사건이 겹쳐져 진행됩니다. 가해자 젠레트의 아버지가 사건을 무마하려고, 협박할 거리를 찾아서 폴의 과거를 뒤지기 위해 풀어놓은 탐정에게 길 페레즈가 접촉해서 정보를 전해준게 20년 전 사건의 재조사로 연결되거든요.

그런데 전개만큼은 베스트셀러 작가답더군요. 여러가지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드러내가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면서, 결국 이 모든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 사건에 얽혀있는 주요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습니다.
폴의 여동생 카밀이 살아있는지?
어떻게 폴이 루시와 밀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그 날 웨인 스튜벤스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왜 폴의 아버지는 카밀을 찾기 위해 2년간 숲을 뒤지다가 포기했는지?
왜 폴의 어머니는 폴을 남겨 두고 홀로 집을 나갔는지?
페레즈 가족이 카밀이 살아있다고 했는데,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
길 페레즈의 부모는 왜 마놀로 산티아고가 자기 아들이라는걸 계속 숨기는지?
마놀로 산티아고는 누가 살해했는지?

이 수수께끼들은 폴의 수사와 일련의 증언들로 하나씩 풀리는데, 우선 카밀은 살아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카밀일리 없지요. 그런데 검시를 통해 유골은 출산했던 여성이고, 40~50대의 나이로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이 조건에 부합되는건 폴의 어머니고요. 폴의 아버지는 떠나려는 어머니를 죽여 매장한 뒤 숲을 수색하는걸 포기했던 겁니다.
길 페레즈의 부모가 아들이 마놀로 산티아고라는 가명으로 살아왔다는걸 알면서도 부정했던건, 과거 캠프장 사건의 유족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진상이 모두 이치에 맞고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것도 놀라왔던 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젠레트와 마란츠 강간 사건에서 변호사 플레어와 대결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과정은 한 편의 좋은 법정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젠레트와 마란츠가 '짐과 칼' 이라는 기묘한 가명을 댄 이유를 클럽하우스에서 빌렸던 DVD 목록을 뒤져서 찾아내고, 그 DVD를 법정에서 상영하는 장면은 아주 멋졌어요. 단순히 20년 전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한 동기로 사용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말이지요.
카밀이 돌아오고, 젠레트와 마란츠 사건은 젠레트 아버지의 힘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20년 전 사건 당일 루시가 폴을 유혹했던 건 의도되었던 일이었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폴이 이런 류 (법조인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의 스테레오 타입인 것을 비롯해 몇몇 부분에서 눈에 뜨이는 헛점도 있습니다. 우선 마놀로 산티아고를 루시의 아버지이자 당시 캠프장 주인이었던 아이라가 살해했다는건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라가 나이를 많이 먹고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살해했다는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아이라의 폴 살해 시도로 이어지는 과정은 더 억지스러웠고요.
루시에게 젠레트의 아버지가 고용한 탐정사가 20년 전 사건에 대한 편지를 보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폴의 치부라고 생각했으면 공론화해서 폴을 검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게 맞습니다. 왜 아무 관계도 없는 루시에게 편지를 보낼까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동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또 길 페레즈의 부모가 마놀로 산티아고가 아들이 아님을 주장하는건 DNA 조사 앞에서는 무력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DNA 샘플을 얻는건 어렵지 않았을텐데 왜 조사를 하지 않는지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요. 심지어 폴은 검사인데 말이지요.
폴의 작은 아버지같은 존재인 소시가 카밀이 살아있음을 폴에게 끝까지 숨긴 이유도 불분명해요. 길 페레즈의 부모는 살아있지만, 폴의 부모는 모두 죽은 마당에 보상금을 받았던 죄를 물을 수도 없잖아요. 폴의 아버지가 죽은 순간, 진실을 이야기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지나치게 곁가지 이야기가 많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폴의 아내가 일찍 죽고, 폴은 아내의 이름으로 처제 가족과 신탁 기금을 운용하지만 이를 처제 남편이 횡령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폴의 아버지는 KGB 출신이었고 자신의 장인, 장모를 고발해서 아내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는건 어머니 살해의 동기로 써먹기는해서 좀 낫긴 하지만 과하게 거창했던 느낌이고요. 등장하는 여성들이 거의 대부분 엄청난 미녀라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구태여 이런 설정들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흥행할만한 요소는 충분히 갖춘 범죄 스릴러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4/17

죽음의 한가운데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1.5점

 

죽음의 한가운데 - 4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튜 스커더는 경찰 제리 브로드필드의 의뢰로 창녀 포샤 카가 왜 그를 고소했는지 조사에 나섰다. 그녀는 제리가 매주 100달러를 내 놓으라며 협박했다고 주장했지만, 제리는 자기가 경찰 내 부패 사건에 대해 특별 검사와 협조하고 있는 탓에 함정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튜가 포샤를 만난 다음날, 제리는 포샤 살해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은신처에서 포샤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는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다. 제리는 필사적으로 매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매튜는 특유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수사를 맡는데...

얼마전 읽었던 <<아버지들의 죄>>에 이은 매튜 스커더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본인 스스로 누구보다 부패한 경찰이면서 제발로 특별 검사를 찾아가 경찰이 부패했다는 사실을 알린 뻔뻔한 허영덩어리 제리 브로드필드 캐릭터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악당인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니컬하게 품위와 스타일을 추구하는게 나름 재치가 넘쳐서 감탄했어요. 구치소에 수감될 때 빼앗길게 뻔한 넥타이를 일부러 매고 갔던것 처럼요. 그는 풀려날걸 확신하며 그걸 매고 갔던 겁니다. 그리고 나올 때 넥타이를 돌려주면,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넥타이를 매기 위해서요.

그러나 이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었던 망작입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건질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를 들어 포샤가 처음에 전화를 건게 하디스티였다고 추리했던건 그냥 떠본 것에 불과합니다. 이걸로 사건이 급진전되는데, 이를 "그냥 한번 떠본 거군요" 로 퉁치고 넘어가는건 반칙같아요. 매튜 스커더가 알고 있는, 동성애자들이 찾는 술집 신시아를 제리 브로드필드가 자주 찾았다는 것도 우연에 불과했고요. 바텐더 케니로부터 포사 카가 죽기 직전,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증언을 한 것도 추리와는 무관한, 운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브로드필드의 이상 행동 - 제 발로 검사를 찾아가 경찰이 부패했다는걸 알린 - 과 포샤 카가 살해당한 핵심 동기인 '책'에 대해서 너무 늦게 언급되는 것도 공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글러스는 브로드필드의 증언을 바탕으로 '책'을 쓸 예정이었고,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는 포샤가 먼저 제안했었다는건 굉장히 중요한 증언인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더글러스의 행동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명확한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범인이 누군지 안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육감 덕분이다 어쩌구 하는건 추리 소설로는 명백한 실패작이지요.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첫 번째 범행이 제리 브로드필드에게 누명을 씌우려던게 아니라, 애당초 포샤 카가 진짜 목적이었다는 반전은 그럴싸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특별검사 프레자니언의 부하 클로드가 진범이었다는건 뜬금없었습니다. 매튜가 클로드가 범인이라며 댄 근거는 그가 제리로부터 포샤 카가 고객 명단을 검사에게 넘기고 있었다는걸 들었다는 것, 그리고 클로드도 포샤 카의 고객이었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모두 마지막 추리쇼 이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또 이 논리라면 포샤 카의 고객은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 클로드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못해요.
작가 더글러스 퍼맨을 살해한 두 번째 범행은 더 기가 찹니다. 퍼맨이 포샤로부터 클로드의 이름을 입수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즉, 이 범행은 작중에서 동기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퍼맨이 위험을 어떻게 알고 매튜에게 전화를 여러차례 했었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게다가 제리가 수감된 상태에서 퍼맨을 살해하는건 정말 머저리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아울러 매튜 스커더가 쓰레기로 등장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리의 부패와 문란함을 지적하지만 그 역시 제리의 아내와 곧바로 바람을 피웠으니 누가 누구를 탓한단 말입니까? "오늘은 지금까지 그의 의자에 앉아서 그의 위스키를 마시고, 그의 돈을 받고, 그의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다."라니,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그가 관계를 맺는 창녀 일레인은 그가 경찰이었을 때 경찰이었기 때문에 관계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하고요. 이런 개막장 행태는 살인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정의관, 그리고 보수를 받으면 십일조를 내는 정도로는 합리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돕고 사는 그런 세태를 그리고자 했던게 목적일 수는 있겠지만, 영 볼품은 나지 않더군요.

그나마 브로드필드가 특별 검사 프레자니언 전에 연방검사 하디스티를 찾아갔었다는 말을 통해, 경찰 부패는 특별 검사의 일인데 연방 검사를 찾아간건 이상하다고 추리해내는건 괜찮았습니다. 미국 경찰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머나먼 한국의 일반 추리 독자가 보기에는 꽤 괜찮은 착안점이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장점은 극히 일부였을 뿐으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후 시리즈가 계속될 수 있었던게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었는데, 다음 작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건지 조금 궁금해지기는 하네요. 문제는 더 읽어볼 의욕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지만요.

2022/04/14

큐브릭 게임 - 데릭 테일러 켄트 / 최필원 : 별점 1.5점

큐브릭 게임 - 4점 데릭 테일러 켄트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UCLA의 괴짜 영화학도 숀은 큐브릭 매니아라는 이유로 지도교수 마스카로에게 '큐브릭 게임'을 풀어낼 적임자로 지목되었다. 숀은 스탠리 큐브릭이 직접 남긴 수수께끼를 차례대로 풀어나가야 하는 게임에 친구 윌슨, 새미와 함께 뛰어들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게임에 위험한 세력이 연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스탠리 큐브릭이 생전에 남긴 메시지로 큐브릭의 영화를 분석해 퀴즈를 풀어낸다는 내용의 모험 미스터리.
누군가 남긴 퍼즐을 풀어내는 이야기가 가슴 따뜻하게 만드는 진상과 우승 상품, 그리고 여러모로 크게 성장하는 주인공의 성장기와 결합되었다는 점에서는 <<웨스팅 게임>>이 떠올랐습니다. 여러 팀이 서로 경쟁을 벌인다는 점도 유사했어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거장의 유명 작품들 속 단서들을 풀어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단서를 풀어가는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건 <<다빈치 코드>>와 똑같고요.

인기 있을만한 설정과 큐브릭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결합된 탓에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큐브릭에 푹 빠진 영화 매니아 청년이 친구들과 함께 거장이 남긴 메시지를 더듬어간다! 그럴듯하잖아요. 실제로 초, 중반부까지는 꽤나 흥미진진했어요. 큐브릭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 특히 <<샤이닝>>과 아폴로 11호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있고요.

하지만 이야기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상해져 버립니다. 정확하게는 게임의 목적과는 상관도 없는, 스탠리 큐브릭이 달 착륙 영상을 찍어서 조작했다는게 폭로되는걸 막기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조직이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이 조직 구성원들인 마스카로와 일당들이 프리메이슨 내 '기사단' 소속으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건 대체 뭔가 싶더군요. 시대와 장소를 100년이상 착각한 듯한 설정도 비현실적이며 우습기 짝이 없고, 숀을 이용하여 게임의 정답을 알아낼 속셈이었다가 중간부터는 노골적으로 숀을 위협하는 행동도 설명이 안되는 탓입니다. 직접 나서지않고 끝까지 같은 편인척 하다가 뒤통수를 치는게 훨씬 사실적이며 당연한 행동 아닐까요? 핵심 빌런이 하는 짓 치고는 너무 조잡했어요.
릭의 부하로 게임을 만들었으며, 게임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루크와 리치가 마스카로를 살해한다는 것도 당황스러운 전개였습니다. 숀과 같이 마실 수도 있었던 와인에 독을 탔다는 발상도 어처구니 없었지만서도, 사람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다면 왜 이중 스파이인 척 마스카로와 협조했는지도 알 수가 없거든요. 빌런을 없애기 위한 지극히 편의적인 해결책에 지나지 않아보였습니다.

아울러 스탠리 큐브릭의 메시지를 모두 해독하면 '꿈에서 그 답을 얻게 된다'는 결말은 비현실적인걸 넘어서는 황당한 결말이었습니다. 작가의 큐브릭 신격화가 도를 넘은 느낌이에요. 정도껏 했어야죠.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판타지를 만들어버리면, 모처럼 큐브릭, UCLA 등 현실적 소재와 배경으로 이야기를 채워넣은 보람도 없고요.
이보다는 그냥 큐브릭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푹 빠진 영화 애호가 후배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꾸며낸 게임이었다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등장하는 퍼즐과 퀴즈들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단서들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꽤나 공들여 만들어졌다는건 분명합니다. 게임 도중에 말콤 맥도웰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실제 헐리우드 거물이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 등 약간 팩션스러운, 논픽션스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대부분 말장난, 그리고 영화 화면 내 이미지와 상징에 주목하고 있어서 동참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광팬 정도만 재미있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지요. 수수께끼도 지나치게 꼬아놓아서 억지스러웠고요. 도판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되는 수준이었어요. 차라리 음악을 활용하는게 훨씬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2001>>의 가짜 OST 의 곡목 순서대로 그 곡이 사용된 영화 장면을 이어붙여 편집하면 무언가 답이 나온다는 식으로요. 실제로 숀이 이렇게 영화를 편집하기도 했었는데, 별다른 해답을 얻지 못했다는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스탠리 큐브릭 회고전 티켓 판매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흔해빠진 하이틴 모험 미스터리물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2/04/10

오늘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2.5점

오늘의 의자 - 6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사물들의 미술사 3권. 전 권에 이어 의자를 통한 당대 사회, 문화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

그러나 전 권보다는 의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훨씬 많아서, 주로 의자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토네트 14번 의자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혁신적인 디자인과 설계, 생산 및 운송으로 대량 생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당대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산업이 유행과 문화를 이끌게 되었다는건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어지는 바실리 체어, 파이미오 암체어, 임스 플라스틱 체어는 각각 금속, 합판, 플라스틱으로 의자 재료가 진화해나갔던 과정이 중심입니다. 이 역시 기대했던대로, 의자를 통해 당대 문화와 사회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실리 체어는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디자인의 태동을, 임스 플라스틱 체어는 전후 대폭발한 미국 중산층의 삶과 플라스틱의 인기를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중심에서는 빗겨나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명백히 의자였으니까요. 바실리 체어의 초기형 디자인이라던가, 임스가 공모전에 제출했었던 원형 임스 체어라던가 초기 모델에 대한 도판 등 몇몇 자료는 흥미로왔지만 책이 지향하는 바와는 좀 거리가 많았어요.

제가 기대했던, 의자보다는 그 의자가 등장했던 시대와 장소에 대한 설명이 더욱 상세한 이야기도 없지는 않습니다. 바그너의 포스트슈파르카세 의자 이야기처럼요. 이 이야기에서는 의자는 당시 최첨단, 모던의 상징이 되었던 소재들 중 하나에 불과한걸로 소개되며, 내용 거의 전부는 세기말 최첨단 유행의 도시였던 빈의 당시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웠어요. 명품 의자의 디자인적인, 그리고 디자인사에서의 의미를 다룬 책은 그동안 숱하게 읽어 왔던 탓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내용이 많지도 않았고요. 분류도 '역사'가 아니라 '디자인' 쪽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4/08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5점

 

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건축사로 일하는 마요는 중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십여년 만에 만난 삼촌 다케시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겠다며 수사에 나섰고, 마요도 삼촌과 힘을 합쳤다.
다케시는 오래전 사무라이 젠이라는 예명의 마술사여서 온갖 트릭과 심리전의 달인이었고, 덕분에 결국 범인을 알아내는데 성공하는데....

일본 추리 문학계의 거물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제목처럼 지명이 명확하지 않은 시골마을. 주인공 마요의 표현대로라면 '이름도 없는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본 적 없는 작고 평범한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쉽게 읽히기는 합니다.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배치해서 흥미를 배가시키는건 솜씨도 여전했고요.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 범인은 왜 흉기를 따로 준비하지 않고 수건같은 기묘한 도구를 사용했는지? 범인은 왜 이상하게 피해자 집을 어지렵혔는지?와 같은 핵심 수수께끼 외에도 장례식장에 나타났던 모리와키 아쓰미의 정체는 무엇인지? 가미오 에이치가 도쿄까지 가서 만났던 인물은 누구인지? 모모코의 남편은 왜 간사이에 파견 근무를 갔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마요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비밀은 무엇인지? 등 작 중에 스치듯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합치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에 대한 답들도 모두 합리적으로 공개되고 있고요. 최소한 불필요하게 등장해서 끝까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맥거핀은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탐정역을 소화하는 '블랙 쇼맨' 가미오 다케시가 보여주는 여러가지 현란한 트릭들도 볼거리입니다. 도청기나 몰래 카메라같은 장치의 효과적인 사용은 기본이고, 손재주를 이용해 경찰 스마트폰을 몰래 빼돌려 정보를 입수하고, 사람들을 경험과 마술 트릭에 기반한 심리전으로 현혹시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는데 분명 과장되었지만, 그럴듯하게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장치, 손재주에 비해 심리를 활용하는 부분이 꽤 설득력있는 편입니다. 마요를 처음 만났을 때 "고양이를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방법처럼요. 나중에 알고보니 고양이를 싫어하는 여자 아이는 없고, 그림도 일단 잘 그린다고 칭찬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칭찬이니 큰 문제는 안되며, 설령 그림을 못 그리더라도 누군가 칭찬하는걸 들었다고 할 생각으로요.
"일반적으로 인간은 뭔가를 상상하며 이야기하려 할 때 시선이 오른쪽 위로 향하는 경향이 있어. 반대로 사실을 떠올릴 때는 왼쪽 위를 향하지. 대강 말하면 거짓말을 할 때는 오른쪽, 사실을 말할 때는 왼쪽이야."라는 주장은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이전에 수차례 가키타니 경위를 만나서 확인했다는 전제가 뒷받침 된 덕분에 꽤 일리있는 추론의 근거로 사용되고요. "대화를 통한 정보수집의 철칙은 딱 하나다. 침묵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일 것. 10년지기처럼 대화를 즐겨."와 같이, 전문성이 느껴지는 대사들도 좋았습니다.

그가 수집한 정보들로 펼치는 추리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기름 라이터 오일 자국에 첫 수수께끼였던 '수건을 흉기로 쓴 이유'를 결합한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마요는 범인이 몸싸움을 하다가 오일이 샌 게 아니냐고 했었지만, 라이터의 오일은 왠만하면 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오일 자체를 가지고 왔던 것이고, 이유는 무언가를 불태우기 위해, 즉 방화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오일을 적시기 위해서 가져왔던 수건이 흉기가 되었던 거지요.

그러나 정교하거나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추리할 여지는 적습니다. 애초에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피해자 가미오 에이치 주변 인물들 조사를 통해 드러내는, 일종의 '와이더닛' 계열 범죄물이거든요. 문제는 동기가 이야기 속 당대 최고의 인기만화 <<환라비>>를 그린 만화가 구기야마와 관련되어 있다는게 예상 가능했다는 점이습니다. '이름없는 마을'과 반대로, 당대 최고의 만화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이름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가미오 에이치가 다가오는 중학교 동창회 겸 쓰쿠미 추모식에서 무언가를 공개하려고 했었고, 쓰쿠미는 생전에 구기야마와 아주 절친했다는 정보가 결합되면 답은 뻔합니다. 구기야마는 중학생 시절, 죽은 쓰쿠미와 함께 했지만 공개되면 안되는 추억이 있었던 것이지요. 즉, 구기야마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고고노에 리리카가 구기야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깨진 시점에서, 범인은 구기야마가 되는 셈입니다.
작가도 이렇게 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는 없었는지 가시와기가 주도했던 '환라비 하우스'와 관련된 잇권 다툼을 내세우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퇴직한 중학교 교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요. 급작스럽게 동창회를 앞두고 범행이 일어날 이유도 없고요.
추리도 억지가 많습니다. 고고노에 리리카가 범행 시각에 구기야마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파헤쳐서, 그녀가 스기시타와 불륜 관계였다는걸 드러낸 추리처럼요. 아무런 근거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고고노에 리리카의 상대가 같은 동창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울러 다케시 캐릭터는 심하게 작위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첫 등장에서부터 고구레 경감과 다투기 시작하는데, 과장이 너무 심했어요. 전형적인 천재형 독불장군으로 새로운 맛도 없고요. 조카에게서도 돈을 우려내는 모습 등 안티 히어로적인 묘사도 만화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며, 마지막에 사건에 관련되었던 동창들 앞에서 다케시가 추리쇼를 펼치는 것도 오랜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는 즐길거리였지만 대체로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엔터테이너로는 뛰어나다는걸 입증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 외에 읽어볼 만한 뚜렷한 가치는 비록 없어도, 재미가 가장 중요하지요. 제 별점은 2.5점 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적합한 작품이에요.

2022/04/03

플레인 센스 - 김동현 : 별점 3점

플레인 센스 - 6점
김동현 지음/웨일북

비행기 개발의 역사가 아니라 '비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알려주는 인문학 서적.

개인적으로 범죄, 사건, 사고에 관심이 많은 탓에 사고 사례 소개에 관심이 많이 갔는데, 책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비행기 납치 사례들 소개부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하이잭' 단어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해서, 보안승무원이 기내에서 테러범을 사살했던 1971년의 김상태 대한항공 월북 기도 사건, 베트남전에서 퍼플 하트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능력있는 해병대원이었던 라파엘 미니첼로가 월급 횡령에서 비롯된 실망감에 미국에서 비행기를 납치해 모국 이탈리아로 향했던 1969년 TWA 85편 납치 사건, 무려 넉 대의 여객기를 같은 시기 피랍했던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PFLP) 비행기 납치 사건, 일본 적군파가 평양으로 향하기 위해 납치했던 1979년의 요도호 사건, 평범한 오타쿠가 비행기 납치를 시도해서 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 했던 1999년의 니시자와 사건 등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꼼꼼하게 수록되어 있는 후일담들도 마음에 들었고요. 예를 들어 라파엘 미니첼로는 미국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탈리아에서 국민적 영웅이 되어 곧바로 석방되었고 본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기까지 했다는군요.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 납치 사건이 일어난 후 미국은 정예 요원에게 사복을 입혀 비행기에 탑승시키는 스카이마샬 제도를 도입했고, 그 외에도 테러를 막기 위해 좌석에서 승객에게 독극물을 주사하는 인젝션 키트나 납치범을 쉽게 격리할 수 있는 부비트랩 플로어 등의 발명이 이어졌다고 하고요. 니시자와 사건도 결국 니시자와가 지적했던 하이재킹 방지 정책이 실행되었다네요. 911 이후에는 국가의 안전이 더 우선시되어 테러범에게 납치된 비행기의 영공 진입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모두 인터넷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를 일종의 통사처럼 시대순으로 모아놓은 구성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어떻게 비행기 납치가 시작되어서, 어떻게 발전되어 나갔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끔찍했던 비행기 사고에 대한 사례 소개도 충실합니다. 저 역시 몇 년 전 까지는 출장 등으로 비행기를 자주 탔었기 때문에 더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네요. 언제든 저에게도 닥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집중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더라고요. 과냉각된 적란운 속으로 비행기가 진입했을 때, 비행기가 거대한 응결핵이 되어 순식간에 얼어붙은 탓에 추락하고 만 에어프랑스 447편 사고는 정말 무섭더군요.
기내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15분 내로 긴급 착륙하지 못하면 다 죽는다는 이야기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많은 승객들이 타고있을 비행기 내에서의 화재 진압이 왜 어려운지가 궁금했었는데, 외부 공기를 유입하기 위한 여압 시스템 때문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연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순식간에 일산화탄소 중독에 빠진다니 무섭습니다. 화재 현장을 빠져나가기도 불가능하니, 정말 죽을 수 밖에 없겠어요. 그동안 있었던 기내 화재로 인한 사고들은 많은 경우 기내 흡연 탓에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황당했고요. 저도 아주 오래전, 90년대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기내에서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나는데 얼마나 무식한 짓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리튬 배터리 폭발로 인한 화재 사고가 많다고도 하는데, 앞으로 편한 마음으로 비행기 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울러 비행기를 탈 때의 주의 사항도 몇 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건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을 때 바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압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산소 공급이 순식간에 끊어지므로 산소 마스크를 바로 쓰지 않으면 곧바로 의식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면 재빨리 뒤집어 쓰고 볼 일입니다.
사고는 아니지만, 랜딩 기어에 숨어서 밀항하려다가 떨어져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끔찍하더군요. 14세 소년 키이스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우연히 찍혔다는 아래 사진 이야기가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외에도 스튜어디스의 탄생이라던가 콜사인, 웨이포인트 등 여러가지 비행 관련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여기서는 기장 출신 실무 전문가다운 노하우가 빛납니다. 항공 통신에 대한 소소한 디테일들처럼요. 한국과 미국의 사고 방식의 차이를 들며 원할한 무선 교신을 위한 팁을 알려주고 있거든요. 이런건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겠지요.
여객기의 양대 산맥인 보잉사와 에어버스사의 간략한 역사와 콩코드 취항 등으로 알아보는 여객기의 발전 과정과 항공사별 대표 기종 소개도 흥미로운 정보였습니다. 도판도 충실하며, 보잉과 에어버스사 기종의 차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두 회사의 차이도 인상적이에요. 보잉은 인간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쪽이고, 에어버스는 반대로 인간의 조작을 컴퓨터가 모두 모니터링하고 제한한다는데, 앞으로는 에어버스 쪽이 대세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습니다.
링크 트레이너 등 다양한 비행기 시뮬레이터 개발의 역사를 이 책처럼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도 또 없으리라 생각되고요. 한마디로 비행에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종합 선물 세트같은 책이에요. 간만에 좋은 독서를 했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좀 과하기는 했습니다. 위도, 경도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요약해서 풀어놓지는 못했고,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한 린드버그의 모험담도 억지로 수록한 느낌이었거든요. 이야기 목차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강했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4/02

아버지들의 죄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점

아버지들의 죄 - 4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일 해니포드는 매튜 스커더에게 딸 웬디가 살해당한 사건의조사를 의뢰했다. 3년 전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두절된 딸이 왜 죽음을 맞았는지를 알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매튜는 웬디와 웬디의 룸메이트였으며, 현장 근처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후 얼마 지나지않아 자살해버린 리처드의 과거를 파헤치는데....

1976년에 발표되었었던,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제 1작. 대표작 <<800만가지 죽는 방법>>보다 무려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시기가 이른 탓인지 낯선 설정이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인건 매튜 스커더가 술을 엄청나게 마신다는 점입니다. 술 때문에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들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서 자책하는 느낌은 없어요. 제 3자 입장에서 건조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의뢰받은 사건을 다룰 때 처럼 본인 사건도 다루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방관자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창녀 일레인이 아니라 바텐더 트리나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모습도 새로왔고요.

그런데 내용은 무려 19편의 후속 시리즈가 이어진 작품답지 않게 별로 건질건 없었습니다. 일종의 스포일러인 제목부터가 문제입니다. 작 중에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모두 세 명 - 웬디의 의붓아버지 케일 해니포드와 이름도 모르는 웬디의 친아버지, 그리고 리처드의 아버지 마틴 밴터폴 목사 - 입니다. 이 중 웬디의 친아버지는 6.25 전쟁에서 죽었는데, 유부남이었던 주제에 웬디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도망갔던 쓰레기지요. 그 탓에 웬디는 아빠뻘 유부남에게 끌리는 비정상적인 성적 기호를 갖게 되었고, 결국 중년 남자들과 관계한 뒤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딸을 창녀로 만든 죄를 지은 셈입니다. 마틴 밴터폴 목사는 한술 더 뜹니다. 본인 스스로 웬디와 관계를 맺은 뒤 이를 자책하다가 그녀를 죽이고, 본인 아들이 죄를 뒤집어 쓰고 죽게 만든 두말할 것 없는 죄인이니까요.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할 친아버지들이 딸, 아들을 파멸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건, 베트남 전쟁의 패전과 오일 쇼크를 불러와 국민들을 고통받게 만들었던 미국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를 상징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반면 그나마 착한 사람이 웬디의 의붓아빠 케일 해니포드였다는건 조금 의외였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의붓아빠의 성폭행이 벌어지는게 다반사였는데 말이지요. 케일 해니포드는 다소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절대 선을 넘지 않았고, 오히려 웬디가 왜 죽었는지 알기 위한 조사를 의뢰하여 죄인을 처벌하게 만드는, '죄를 묻는 아버지' 쪽이라는게 새로왔습니다. 이 역시 시대상으로 보자면,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기 시작한 당시 분위기와 겹쳐지는 느낌이에요.

제목처럼 이야기도 간단명료합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없고 모든건 쉽고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이 역시 먹고 살기 힘들었던 당시, 머리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읽을거리로 소구되기 위해서라 짐작되네요. 매튜 스커더의 수사 과정도 아주 단순해요. 수사라 해 봤자 관계자를 만나 증언을 얻는게 전부이며, 이 모든 과정은 일반인 이상, 경찰 이하라는 매튜 스커더 수준에 딱 맞는 정도라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플하게 끌고나간 탓일까요? 등장 인물 중 범인역을 수행할 인물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틴 벤터폴 목사가 범인이라는 결말은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그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 그리고 그가 웬디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걸 추리해낼 만한 증거가 전무했던 탓입니다. 단지 목사가 봄에 웬디를 만났었다, 웬디를 사악한 마녀로 칭하며 섹스를 무기로 삼는걸 경계했다, 재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는게 전부인데, 이를 통해 봄에 웬디의 유혹에 넘어간 뒤, 관계를 지속하다가 죽였다고 추리하는건 비약이 심해도 너무 심했습니다. 살인을 결심한 이유, 동기도 설명이 부족했고요.
또 매튜 스커더가 강제로 목사가 자살하게 만든다는 결말은 전혀 그답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매튜 스커더 본인도 죄많은 존재입니다. 그가 누군가를 심판한다는건 상상하기 힘듭니다. 진실을 밝히고 사람들이 평가하도록 만들면 모를까요. 대체 누가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단 말입니까? 매튜 스커더에게는 어설픈 자경단 역할보다는 냉정한 관찰자가 더 어울립니다. <<더티 해리>>가 아니라요. 당시 사회 분위기가 악에 대한 무조건적인 심판을 바랬다 하더라도, 아무리봐도 무리수였습니다. 시리즈에서 설정이 폐기되어 버린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매튜 스커더에 협박에 못이겨 목사가 자살을 택한 것도 확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매튜의 중상에 무너져버린 꼴인데,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 아들이 살고 있는 방에 아버지 흔적이 남는건 당연하니까요.

그나마 중간에 잠깐 등장하는 매튜 스커더의 일종의 메소드 추리법(?) 정도만 인상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웬디와 리처드가 함께 살던 방에 잠입해서, 그들처럼 직접 체험해보고 느껴본 뒤 -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 방 저 방에 다니면서 의자에 앉았다가 벽에 기대기도 하면서, 그곳에 살았던 두 사람의 본질과 접해 보려고 애를 썼다." - 그들 관계에 대해 고민하다가 웬디와 리처드가 섹스가 아닌, 사랑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완벽한 커플이었다는걸 알아내게 됩니다. 돈도 없고, 대단한 과학 수사 도구도 방법도 없는 매튜 스커더에게 정말 딱 맞는 추리법이었어요. 후속작에서 이를 잘 계승했더라면 추리 소설사에 한 획을 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어지지 못한게 조금 아쉽네요.
또 이런 수사 과정을 통해 리처드가 진범이 아니라는게 자연스럽게, 합리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좋았습니다. 리처드는 동성애자인데다가, 웬디와 서로 사랑하고 있었고 동거하고 있었으니 구태여 죽여가면서 섹스를 강제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나기도 했고요. 시리즈의 팬으로 매튜 스커더의 시작을 알고 싶으신 분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04/01

사장을 죽이고 싶나 - 원샨 / 정세경 : 별점 2점

사장을 죽이고 싶나 - 4점
원샨 지음, 정세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 무명 연극 배우로 살아가던 위바이통 앞에 중국의 유명 금융 엘리트 투자자 양안옌이 찾아왔다. 그는 위바이통 부모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바이통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였다. 6개월 안에 금융 엘리트로 만들어주겠다는 장담과 함께. 위바이통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기심에 못 이겨 중국 강캉시로 향했다.
강캉시에서 양안옌과 만나기로 한 곳은 그의 회사인 바나 금융 사무실이 있는 88층짜리 신축 바나 센터 건물로 개장하기 직전 상태였다. 악천후 탓에 꼭대기층 사무실에 조금 늦게 도착한 위바이통은 양안옌 사장이 여러 명의 사람들과 언쟁 끝에 격투를 벌이는 걸 목격했다. 바이통은 싸움을 말리려 했지만, 누군가 꺼낸 칼에 사장이 찔려 죽는걸 막을 수 없었다.
현장에 있던 무리들은 사장이 강도 살해 당했다고 위장하려 했지만, 도망치려던 그들 앞에 류창융 등 금융계 거물 4명이 나타났다. 사장의 죽음을 숨기고 그들을 응대했지만, 곧이어 정전이 일어났고 비상 계단은 철문으로 잠겨있어서 일행은 88층 바나 은행 사무실 공간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숨겨놓았던 사장의 시체와 천뤄치가 깜쪽같이 사라진 다음날, 천뤄치, 리슈얼의 시체가 차례로 발견되는데...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집어 들게 된 중국 추리 소설.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금융업과 부동산업을 소재로 쓰여진 작품. 88층 건물에 여러 명의 사람이 함께 갇힌 상황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밀실 추리물이라는 점은 독특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보기 드문 설정이었는데, 악천후로 인해 개장 직전 건물에 정전이 되었고 그 탓에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꽤 그럴듯하게 상황을 연출한건 마음에 들었습니다.
초반에 위바이통이 처음에 양안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도 괜찮았어요. 위바이통의 출연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연극을 보러 왔었고, 또 다른 연극에서는 혼자 보기 적합하지 않고 오로지 위바이통을 찾기 쉬운 좌석을 골랐기 때문이었는데, 나름 추리력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생각되네요.

몇 가지 설정도 볼만했습니다. 첫 번째는 양안옌이 연극 배우 위바이통을 스카웃하려던 까닭입니다. 처음에는 911 테러 때 양안옌이 위바이통의 친부모 대신 심부름을 한 덕분에 살아남아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처럼 보였지요. 그러나 위바이통이 중국 유학 시절 흠모했던 연극배우 리슈얼이 금융 엘리트 중 한 명이라는걸 알게 되고, 양안옌 살해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수상한 행동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집니다. 양안엔은 '연기력' 때문에 배우들을 고용해서 금융 엘리트인척 시켰던 겁니다. 배우들은 모두 회사 AI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적절한 연기로 고객과 소통했고요. AI가 금융 엘리트의 거의 모든 실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 상대의 커뮤니케이션은 필요하니 저렴하게 배우를 고용했다는 건데 꽤 그럴싸 했어요.
두 번째는 양안옌이 입체 영상 기술과 놀이공원용 차량 기술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이게 류창융 회장의 주택 건물 개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정답은 좁고, 가사 도우미가 필요한 현재의 다세대 주택 환경 개선을 위해서였어요.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서 뿌리고, 엘리베이터는 놀이공원용 차량 기술을 도입해 고층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주면, 주민들이 고층에서 넓고 쾌적하게 산다고 착각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비상 계단 벽에 숨겨진 문은 가사 도우미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 셈이었고요. 이 역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이런 설정을 풀어가면서 부동산에 목숨을 건 모습, AI 때문에 직업을 잃는 사람들 등 중국, 아니 우리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을 잘 그려낸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이 사건과 이어지지는 못하며, 추리 소설로서 기본적인 얼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단점은 큽니다. 일단 사건의 범인 쩡자웨이가 양안옌 사장을 살해한 동기부터가 불분명합니다. 그냥 충동적인 범죄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몰래 칼을 꺼내 찌르다니, 상황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그 이후 천뤄치와 리슈얼 살해는 사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저지른 범행으로 이 역시 직접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양안옌 - 천뤄치 - 리슈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범행 순환 구조가 완성되기는 했지만, 이는 등장인물들 시점에나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독자들은 위바이통 시점의 묘사를 통해 리슈얼이 불쌍한 피해자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등장인물들 생각대로, 양안옌 사장이 죽지 않았고 천뤄치가 배신자였으며 리슈얼이 사장의 스파이였다면, 천뤄치를 죽이고 시체를 공개할 이유도 없어요. 중요한 투자처 손님들을 초대한 마당에 사건을 키울 필요가 있었을리 만무하니까요.

또 밀실에 대한 트릭은 알고나니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비밀 통로'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비상 계단 벽에 아래 층으로 가는 입구가 숨겨져 있었을 뿐이거든요. 때문에 '밀실이 등장하는 추리물'이지, '밀실 트릭'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차라리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뿌려서 88층으로 느끼게 했지만 사실은 3층이었다는 설정을 이용해서, 창문을 몰래 열고 지상으로 이동했다는 식으로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사실 트릭에 쓸 생각도 없었다면 구태여 필요했던 설정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정전 상태에서 창문으로 어떻게 88층 영상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겠지만요.
아울러 양안옌 사장이 사실은 위바이통을 죽이려고 했다는 일종의 반전과 에필로그도 별로였어요. 위바이통이 911 테러 희생자의 자식으로 거짓 인터뷰를 한 것 정도로 그를 죽이려 했다?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위바이통이 양안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설령 살의를 품었다 한들, 구태여 중국까지 불러들여 자기 건물에서 죽인다는건 말도 안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금융 엘리트에 대한 설정은 기발했지만, 정교한 맛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구태여 권해드릴 정도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