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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23

책이라면 팔 만큼 - 코지마 아오: 별점 3점

헌책방을 중심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화입니다. 2025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남성편 <1위>, 2026년 일본 만화대상 <1위>라는 수상 실적에 혹해서 충동구매하여 읽었습니다. '서점'이나 '헌책방'이 등장하는 작품들 대부분이 재미있었다는 이유도 컸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있습니다. 이런 소재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억지스러운 신파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충분한 드라마를 갖추고 담백하면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가서 좋았어요.

모든 에피소드가 실제 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 "커피에 별사탕"의 경우, 남편과 사별한 노부인이 남편이 좋아했던 컵과 커피, 꽃에 대해 이야기하자 헌책방 주인은 그것들이 데라다 도라히코의 시에 나오며, 그 시에 따르면 노부인이 남편에게는 '미인'이었다는걸 알려줍니다. 책과 한 사람의 추억 연결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따스하지요. 저도 이런 이야기를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헌책방 '시월당'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점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구성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월당 자체의 이야기보다 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책을 읽지는 않지만 수집을 좋아하는 '조지 씨' 이야기처럼요.

물론 소재와 설정, 전개는 뻔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전문가나 특정 직종을 테마로 하는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 탓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신선함은 부족하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새롭지는 않아도 담백한 분위기와 책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추천작입니다. 다음 권에서는 실제 책과 사람들의 사연을 연결하는 매력 포인트를 더 잘 살려주면 좋겠네요.

2026/08/21

희극비기극(喜劇悲奇劇)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 화물선을 개조한 공연용 배 '우콘호'에 시치로는 마술사로 고용되어 조수 마코토와 탑승했다. 그러나 연예인 혹부리 곤타와 세가와 박사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치로 일행은 피해자들 모두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졌다는걸 알아냈다. 시치로는 전처 우타코, 조수 마코토(모리 마리모라는 예명)가 다음 피해자가 될까 걱정하면서 점차 사건에 깊숙히 휘말리게 된다...

일본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본격 추리와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소동극이 결합된게 특징입니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한다는 설정도 독특하고요. 목차의 모든 소제목도 회문으로 구성되어 있을만큼 회문을 전편에 걸쳐 적절히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첫 피해자였던 논 레논(None lenon)이 진범이었고, 그 정체는 그랜트였다는 전개도 좋습니다. 그랜트와 레논은 동일 인물이었으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고 있었다는건데, 이를 마술이라는 소재로 드러내는게 아주 기막힙니다. 

우선 레논의 특기 마술은 얼굴을 가린 채 선보이는 독심술인데, 이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장의 거대한 트럼프를 이용한 마술 리허설도 진상과 연결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바꿔치기 마술이었지만, 곤타만은 그 공연을 유난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곤타는 무대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트럼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해 보였던 바꿔치기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는걸 알아챈 것이지요.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사건 당시 배 안의 전화는 계속 불통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킨 단장은 전화로 곤타의 방에 불려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화는 배 밖에서 걸려 왔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모두 파악하면서 외부에서 바킨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그랜트뿐이었고요.

연쇄살인의 배경이 된, 과거 사이비 종교 집단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근처를 지나던 무일푼으로 궁지에 몰렸던 바킨 단장과 산엔자이 극단원들이 환자들을 돕는 대신 마약으로 독살하고 금품을 빼앗은 사건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이를 통해 범인 그랜트는 사이비 종교 집단 교주로 현재의 살인들은 산엔자이 극단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복수극이었던게 밝혀지는데,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높습니다. 아울러 앞서 결정적 조건으로 보였던 회문 이름은 단순히 회문을 좋아했던 바킨 단장이 단원들 예명을 지어서 생긴 우연의 일치였다는 상황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좌충우돌하는 희극적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곤타의 시체가 들어 있는 호랑이 탈 인형이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면서 벌어지는 대소동이 대표적입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과 황당한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제목처럼 희극과 비극이 뒤얽힌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주인공 시치로가 아주 별로입니다. 아내가 떠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마술사라는 설정, 조수 마코토와 전처 우타코를 둘러싼 관계 모두 진부합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논리적인 추리 과정과 다르게 개별 살인에 사용된 트릭들도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레논이 칼에 찔려 죽은 것처럼 꾸민 방법이 대표적입니다. 배의 근육과 지방을 등 쪽으로 이동시켜 칼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레논이 인도에서 특별한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세가와 박사를 사고사로 위장한 라이터 트릭 역시 가스 라이터에서 나온 불꽃이 사람을 태울 정도로 강하게 번진다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어서 비현실적이에요. 인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망할 정도의 사고가 될리는 없었을 겁니다.

곤타와 타마하의 시체가 뒤바뀐 과정도 별볼일 없어요. 당시 시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인물이 사실상 그랜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일찍 짐작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거 미국의 사이비 종교 집단과 관련된 외국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주요 인물 가운데 그 조건에 맞는 외국인은 사실상 그랜트뿐이니까요. 

그래도 '회문'과 마술이라는 소재의 사용과 추리적인 전개, 흥미로운 과거의 범죄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개별 트릭의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회문과 마술을 결합한 색다른 본격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추천드립니다.

2026/08/15

동궁(2026) - 최정규: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건이 연못 귀신의 저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연못 귀신의 원한은 자신을 모함해 죽인 대왕대비를 향한 것이었고, 왕과 동궁에는 원한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왕이 왕이 될 수 있던건 왕의 생모인 숙빈이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벌였던 독살 덕분이었고, 숙빈은 대왕대비와 연못 귀신의 원한을 이용해 진실을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하지만 이 과거의 사건 역시 현재 세자들의 죽음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의 악귀는 얼마 전 죽은 세자였거든요. 결국 죽은 세자가 형제를 독살해 왕이 되려 했고, 이를 알아챈 왕이 세자를 죽이면서 원한이 시작되었다는 진상이 밝혀집니다.
이렇게 반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못 귀신 - 대왕 대비 - 숙빈 최씨 - 세자로 주적이 계속 바뀌는 구성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왕 역의 조승우와 대왕대비의 연기는 감탄이 나오며 영상도 인상적입니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감을 유지하면서 왕의 곤룡포와 생강 옹주의 화려한 한복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장면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의상과 세트도 보기 좋게 갖춰져 있으며, 꺼먹살이의 귀여운 존재감도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어요.

하지만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초반 영안군을 습격한 존재가 연못 귀신처럼 묘사된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연못 귀신은 영안군을 습격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 이는 진상과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귀매의 눈을 얻은 구천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쪽 세계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와 같이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제법 되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액션입니다. CG도 과하지만 액션이 최근 다른 작품들에 비해 화려함, 강함, 속도감 모두 부족한 탓입니다. 특히 마지막 세자와 구천의 대결은 90년대 오래된 홍콩 영화 와이어 액션처럼 보입니다. 세자와 구천 모두 무술에 능하다는 설정도 없어서 이런 육탄 대결에 대한 설득력도 약하고요.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궁중 미스터리와 반전이 많은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추천드립니다.

2026/08/09

와일드 씽 (2026) - 손재곤: 별점 3점

20년 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불가리아 국민 가요 표절 의혹으로 몰락했던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의 리더 황현우는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엑스포 유치 기념 콘서트에 재결성 라이브 공연을 제안 받은 뒤, 재기를 위해 옛 멤버들을 모아 공연에 나섰다. 하지만 공연장으로 향하다가 20년 전, 정산도 하지 않고 도주했던 전 소속사 사장 박용구를 우연히 만난 뒤 모든게 꼬여만 가는데...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좋은 인상을 잠겼던 손재곤 감독의 최신작 코미디 영화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깔끔한 이야기 전개입니다. 러닝타임은 길지 않지만 사건이 계속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변도미가 다시 합류하지 않고 최성곤이 새로운 멤버가 되는 결말도 합리적이고요.

등장인물 모두의 목적과 동기도 분명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공연에 대한 트라이앵글 멤버들과 최성곤의 집념, 이들을 살인범으로 오해한 경찰들의 추격, 죽은 척하며 상황을 이용하는 박용구, 소심한 복수를 꿈꾸는 나태풍까지 모두 황당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손재곤 감독 영화답게 신파에 기대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드네요.

극 중 '트라이앵글'의 전성기 무대와 음악 역시 1990년대와 2000년대 가요를 기억하는 저에게는 아주 반가왔던 점입니다. 최성곤의 활약도 눈부셔요. 등장할 때마다 분위기를 살리는 최고의 신 스틸러로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CF까지 찍은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에요.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변도미가 공연에 합류하는 과정이 조금 매끄럽지 못한 점, 그리고 공연에서 PD가 멤버들 합류가 늦어지자 대타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 장면 정도입니다. 앞 순서 가수들이 한 곡씩만 더 불렀어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오락 영화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웠어요.웃음과 추격, 대 소동과 음악이 적절히 어우러져 끝까지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더운 여름, 가볍게 즐기기에 문제없는 추천작입니다.

2026/08/07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 까지(till death do us part) - 존 딕슨 카: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작가 리처드(딕) 마컴은 식스 애시즈 마을에서 레슬리 그랜트와 약혼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마을 바자회에서 레슬리가 점쟁이의 천막을 찾은 뒤 이상할 정도로 동요했고, 심지어 사격장에서 레슬리가 우연히 쏜 총탄이 점쟁이를 맞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저명한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는 세 번이나 남편들이 밀실에서 청산가리를 주사하여 자살한 것처럼 만든 독살범이라는 이야기를 딕에게 들려주며, 레슬리가 딕을 초대할 때 자신이 집에 숨어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하비 길먼 경도 밀실에서 청산가리 주사로 사망한 사체로 발견되었고, 현장에 나타난 기디언 펠 박사는 피해자는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유명한 사기꾼 샘 드 빌라라는걸 밝히는데...

존 딕슨 카의 장편으로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초반 설정입니다. 주인공 딕 마컴의 약혼녀 레슬리는 한 점쟁이에게서 불쾌한 말을 듣고 분개하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총으로 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점쟁이는 자신이 유명 병리학자 하비 길먼 경이며 레슬리가 과거 남편들을 청산가리로 살해한 독살범이라고 주장하고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하비 길먼 경마저 자신이 설명했던 사건과 똑같은 형태로 밀실 안에서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은 채 발견됩니다. 마컴은 레슬리를 믿고 싶지만, 피해자가 남긴 말과 똑같이 벌어진 죽음은 그녀를 의심하게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아, 정말이지 두근두근합니다.

피해자가 하비 길먼 경이 아니라 변장한 사기꾼 샘 드 빌라였고, 레슬리가 독살범이라는 거짓말로 마컴을 속여 그녀의 집에 몰래 들어간 뒤 보석을 훔치려 했다는 계획도 좋아요. 점쟁이의 예언과 독살범이라는 폭로가 모두 절도 계획을 위한 연극이었다는건데 상당히 잘 짜여져 있는 사기극이라는 느낌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원래 밀실 살인 트릭은 없이 이 사기극만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되었다는데, 납득이 되는 완벽한 구성이라 생각되네요.

딕슨 카 작품답게 밀실 트릭도 괜찮습니다. 벽에 난 구멍으로 실을 빼낸 뒤, 그 실을 당겨 창문의 잠금 장치를 잠근다는, 아래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지극히 단순한 트릭이지만 단순해서 현실성은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에 벌인 총격 소동으로 장치에 사용했던 구멍을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빼어나며, 이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고전 본격 추리물답게 공정합니다. 총 구멍이 밤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애시 경의 증언처럼요.

하지만 진범인 미들스워스 박사가 직접 기디언 펠 박사를 데려와 사건 해결을 부탁했다는 전개는 이상합니다. 자신의 범행을 밝혀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스스로 현장에 부를 이유가 있을까요? 미들스워스 박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능한 지방 경찰들에 의해 샘 드 빌라는 자살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을 산 레슬리는 마을을 떠나게 되고, 딕과도 헤어지게 되겠지만 둘의 사랑을 미들스워스 박사가 지켜줄 이유는 없어요.

그리고 독자를 속이기 위한 설정도 과합니다. 새벽에 레슬리가 피해자의 집 앞까지 갔는데 몽유병 상태라 기억하지 못했다던가, 금고 속 내용물 때문에 신시아와 격투를 벌였다는 설정들이 대표적입니다. 마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상황 묘사와 신시아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도 모두 혼란스럽고요. 쓸데없는 작전으로 마을 우편소장이 살해당한 것도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크지는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묘사는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었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일 테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강한 도입부와 효과적인 밀실 트릭이라는 장점만으로도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힙니다.

#여태까지 내가 읽었던 존 딕슨 카 작품 순위

2026/07/17

소소한 미식 생활 - 이다 치아키 / 장하린 : 별점 3점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있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장르입니다. 관심이 가는 책은 꾸준히 구입했고, 지금도 유심히 찾아보고 있는 장르이지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치아키의 이 책도 이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식 장르는 '단편 에세이 만화'이지만, 수록된 그림이 워낙 뛰어난 덕분입니다.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붓 터치와 풍부한 색감으로 그려낸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고, 식기와 주방용품, 집 안의 소품들까지 하나의 일러스트처럼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요리와 음식, 식기와 생활 소품, 그리고 집에서 보내는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낸, 특별한 사건 없는 잔잔함도 매력적입니다. 또 음식을 소재로 한 에세이 만화는 많이 봤지만, 식기와 식탁이나 생활 소품을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은 처음이라 신선했습니다. 각각의 물건에 담긴 고민과 추억을 풀어내는 과정에서는 작가의 섬세한 감성이 잘 드러나고요. 정말 요리와 음식,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어느 작가가 젓가락 받침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요? 휴일에 집에서 여유롭게 하이볼 한 잔을 즐기는 모습은 공감이 팍팍 갔습니다.

반면 드라마로서의 재미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읽었기에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요. 그러나 책의 성격 상 e-book으로 출간되는게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확대해가면서 그림들 디테일을 더 잘 보고 싶거든요. 너무 작게 인쇄된 글자들을 읽기도 힘들고요.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나, 잔잔한 힐링 에세이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e-book으로 출간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2026/04/26

존 윅 4 (2023) - 채드 스타헬스키 : 별점 3점

최고 회의의 그라몽 후작이 직접 존 윅을 처단하기 위해 나섰다. 존 윅의 친구 케인이 후작의 하수인으로 직접 나섰고, 그는 존 윅을 보호하던 또 다른 친구 코지마저 죽였다. 존 윅은 살아남아 자유를 얻기 위해 후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는데...

존 윅 시리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시리즈 장편답게 독립적인 에피소드라기보다는 앞선 세 편에서 쌓아 온 존 윅에 대한 설정과 서사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종결부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당연하겠지만 액션은 정말 최고입니다. 더 기대할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을 보여주네요. 몇몇 장면이 특히 인상적인데, 첫 번째는 베를린 시퀀스에서 존과 독일 지부 수장 킬라 하르칸의 격돌 장면입니다. 현란한 네온 조명에서 춤추는 군중 사이로 처절한 격투가 어우러지는 몽환적인 연출이 돋보입니다. "발레리나"의 첫 액션 시퀀스가 노렸던게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결투 직전 파리에서 펼쳐지는 '사냥' 장면은 더욱 대단합니다. 존은 결투에 참가하기 위해 자신을 노리는 킬러들을 상대로 개선문 로터리의 자동차 지옥을 통과하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가 다시 기어오르며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데 그 쾌감이 장난이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건물 내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길게 이어지는 총격전은 역대급입니다. 카메라가 인물 위를 부유하듯 이동하면서도 동선이 흐트러지지 않고, 각 방을 돌파하는 리듬과 총기 화력의 변화가 롱 테이크를 통해 합을 맞추며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게임과 홍콩식 총격 액션, 현대 스턴트 설계가 한 장면 안에서 결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어요.

등장 인물들도 좋습니다. 케인은 견자단의 존재감만으로도 강함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젊은 킬러 노바디도 애견인 킬러라는 설정과 가방을 활용한 독특한 액션이 시선을 사로잡고요. 빌런 킬라 하르칸의 거구, 그라몽 후작의 뺀질거리면서도 잔혹한 모습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시리즈가 길어지면서 생겨난, 설정 놀이가 지나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결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존이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싸운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이 남네요. 후작이 윈스턴의 호텔을 파괴하고 샤롱을 죽이는 선택 역시 이유도 알 수 없는 비효율적인 행동이었고요.
마지막 결투도 여러모로 석연치 않습니다. 승패가 후작이나 존 윅이 죽어야 갈리는 거라면, 처음에 후작을 쏴 버리고 끝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초반 오사카 파트는 완전히 억지였습니다. 존이 일본에 가서 서사적으로 얻는게 전무한 탓입니다.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친구 코지만 죽게 만들었을 뿐이지요.
코지도 의리는 멋지지만 액션이 영 별로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총격전 중심 세계관에 활과 수리검을 들고 나오는 행동도 영문을 모르겠고요. 감독이 와패니즈일 거라는 강한 의심만 듭니다. 

그래도 어차피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요. 중요한건 압도적인 액션인데, 액션만큼은 충분히 기대에 값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6/04/19

Q.E.D Iff 증명종료 29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시리즈를 처음 접했던 것은 1999년 세기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신간이 나올 때마다 계속 구입해 왔습니다. 블로그에도 꾸준히 리뷰를 남겼고요.

그러는 사이 저는 50대가 되었지만, 토마와 가나는 여전히 고등학생입니다. 그래도 작품 속 시간 역시 아주 조금씩은 흐르고 있습니다. 에나리 선배들은 졸업했고, 토마와 가나도 3학년이 되어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거의 30년 가까이 사실상 '커플'처럼 그려졌으면서도,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만 있을 뿐 특별히 언급할 만한 진전이 없어서 조금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직전 에피소드에서 이번에는 정말 고백을 하겠구나 싶은 묘사가 있어서 기대했는데, 토마가 이번 권 첫 에피소드 초반부터 고백을 해 버리네요. 무려 30여 년, 정확히는 27년에 걸친 기다림을 드디어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별다른 이벤트나 분위기 조성 없이 담백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역시 토마답습니다. 쿨하게 이를 받아주는 가나도 역시 가나답고요.

고백 이야기 외에도 '성장기'라는 측면에서 볼 만한 부분이 많아서 마음에 드네요. 팬심을 더해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권이 완결편인데,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프리 칼리지 수업으로 하버드 대학의 '문제 해결과 계획' 강의를 선택한 가나에게, 대부호 홀든 가문의 양녀인 슐리아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건이 과제로 주어졌다. 담당 교수 브라이언이 슐리아의 은사였기 때문이었다. 가나와 조원들은 슐리아와 FBI 담당 수사관 엘마 등을 인터뷰하며 진실을 찾아 나서는데...

조사를 통해 드러난 핵심 단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슐리아는 SNS에 연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지만 연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양녀인 그녀가 유산을 받는 것을 막으려는 홀든 가문이 계좌를 동결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력한 용의자를 FBI가 놓친 탓에, 슐리아를 보호하는 일이 공식화됩니다.

이렇게 그녀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공식화되면, 홀든 가문은 괜한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 계좌 동결을 해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FBI 수사관 엘마가 슐리아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즉, '슐리아가 연인과 함께 유산을 쓰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게 진상이었던 겁니다.

FBI 수사관이 애인이라는 설정부터 억지스러운 등 추리적으로 아주 대단한 작품은 아니지만, 토마의 고백과 아래와 같은 마지막 장면의 쐐기골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어쩌면 "Q.E.D"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미 있는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서 이 작품의 별점은 3점입니다. 순전히 팬심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중요하고 멋지고 의미있는 장면의 작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비율과 뎃셍 모두 엉망이에요. 카토 모토히로, 과연 저게 최선이었습니까?

"에세이"

가나는 하버드 대학 지원용 에세이를 쓰기 위해, 4년 전 중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진학을 방해하던 불량배가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졌던 사건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자신을 설명하는 '에세이'가 무엇인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보여 줍니다. 에세이에는 그 사람의 '배경'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예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대학이 다양성을 원하는 이유에 대한 소개 역시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을 정도고요. 가나가 4년 전 사건을 떠올리며 다시 정리한 에세이도 굉장히 와 닿는 결과물입니다.

당시 검도 사범이 가나를 변호해 주기는 했지만 '현장에 있었는데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이상한 상황을 통해 검도 사범이 흑막이었다는걸 밝혀내는 추리, 그리고 막다른 골목의 담 너머에서 공격했다는 간단한 트릭 모두 모두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높아서 추리적으로도 마음에 듭니다.

'에세이'라는 소재를 통해 "Q.E.D"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 제공도 해 주고, 성장담으로서도 우수하며, 추리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일상계 미스터리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6/04/04

리미트리스 (2011) - 닐 버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디 모라는 한물간 작가이자 삶이 완전히 무너진 남자로 소설 계약은 사실상 진전이 없고, 연인 린디와의 관계도 파탄 직전이며, 생활은 무기력과 자기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에디에게 우연히 만난 전처의 남동생 버논이 NZT라는 정체불명의 약을 건네 주었다. 약을 복용한 에디는 마치 잠들어 있던 뇌의 모든 영역이 깨어난 것처럼 엄청난 집중력과 기억력, 사고력, 판단력을 발휘하여 책 한 권을 몇 시간 만에 흡수하고, 과거에 스쳐 지나가듯 듣거나 본 정보들까지 완벽하게 재구성하며, 사람의 표정과 말투, 공간의 분위기까지 계산해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에디는 이 능력을 이용해 며칠 만에 원고를 완성하고, 외모와 말투까지 완전히 달라진 채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했다. 약효는 떨어졌지만, 살해당한 버논의 집에서 찾아낸 대량의 약을 계속 복용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그는, 결국 재계의 거물 칼 밴 룬의 눈에 들어 거대한 합병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 누군가 약을 빼돌렸고, 이전에 약을 건네주었던 사채업자 겐나디의 습격으로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2011년, 무려 15년이나 전에 발표되었던 스릴러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물이 우연한 계기로 특별한 힘을 얻고, 그 힘을 발판으로 성공의 정점까지 치솟는 구조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에디 모라가 약물의 힘으로 얻은 정보 습득력과 판단력, 자기 연출 능력, 대화 기술, 순발력 같은 요소들을 성공 과정에서 적절하게 묘사하여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브래들리 쿠퍼의 캐스팅도 정말 적절합니다. 초반의 방구석 폐인 같은 초라함에서, 중반 이후 모든 상황을 장악하는 매혹적인 성공가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고도 강렬합니다. 영화 대부분을 사실상 혼자 끌고 가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여기에 로버트 드 니로가 칼 밴 룬 역으로 등장해 영화의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데, 묵직함 덕분에 영화 전체의 신뢰도가 높아지고요.

NZT가 만능이 아니라는게 드러나면서 시작되는 위기에 대한 설정도 아주 좋습니다. 약효가 떨어질 때마다 극심한 공백과 금단 현상이 찾아오고, 같은 약을 복용한 사람들 상당수가 심각한 후유증을 겪거나 죽음에 이르렀다는 설정인데, 이 설정이 없었다면 이세계 전생물과 다름없는 뻔한 치트 능력물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면들 - 에디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 후 기억 단절이 발생하는 장면, 약 없이는 무능했던 자신으로 돌아가는 공포를 그려낸 장면 - 도 좋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위한 촬영과 편집도 빼어납니다. 에디가 NZT를 복용했을 때 세상이 전혀 다른 질감으로 보이는 효과, 화면이 급격히 확장되거나 도시의 거리가 빨려 들어가듯 이어지는 연출, 빛과 색감이 강조되며 감각이 극대화되는 장면들이 대표적입니다.
액션 장면도 많지 않지만 속도감이 있고 긴장감도 충분합니다. 여기에 점프컷과 리듬감 있는 편집이 더해져, 많은 정보를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 안에 효율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식 역시 제법 교묘해서, 전형적이지만 경쾌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교훈극으로 끝나지 않는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보통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약물의 힘으로 성공한 주인공이 결국 대가를 치르고 모든 것을 잃거나,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면서 겸손한 교훈을 얻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전혀 달라요. 에디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거든요. 그는 사업가로 성공하고, 정치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이며, 마지막에는 칼 밴 룬조차 자신보다 아래에 놓인 인물처럼 다룹니다. 심지어 NZT의 능력을 약 없이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세계 전생물과 다름없는 결말인 셈인데, 이런 류의 장르물에서는 정말이지 처음 봤네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특히 약까지 복용했던 겐나디가 궁지에 몰린 에디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은 실망스러워요. 긴장감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위협에 비해 마무리가 너무 쉽게 풀려 버린 탓입니다. 약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우연이나 기묘한 행운을 이용해 간신히 살아남았더라면 더 강렬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애초에 에디가 겐나디와 얽히는 과정은 작위적이며, 그 뒤 겐나디 일당을 모두 처리하고도 별다른 뒷문제 없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NZT를 복용한 사람이 에디만이 아닌데, 왜 유독 그만 후유증을 통제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러닝타임이 길지 않은 탓에, 이런 구멍들은 그 외에도 제법 눈에 띕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영화 전체의 속도감도 좋고, 전개와 시각적 완성도가 높은 덕분입니다. 발표 당시 호평이 충분히 이해가 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웰 메이드 스릴러 영화를 찾는다면 추천드립니다.

2026/04/03

하에다마처럼 모시는 것 - 미쓰다 신조 / 신정명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는 편집자 시노, 오가키와 함께 고라 지방 도쿠유 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전해지는 네 가지 괴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행이 '하에다마 님' 숭배 신앙이 남아있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불가해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네 가지 괴담의 상황과 장소가 일치하는 네 건의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도조 겐야가 나서는데...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 최신 장편입니다(국내 기준).  
괴담과 본격 미스터리를 결합하는 시리즈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라 지방에 전해지는 네 개의 괴담이 단순한 배경 설명이나 분위기 조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벌어지는 네 개의 사건과 정확하게 대응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네 개의 사건은 모두 일종의 밀실 살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본격물적인 가치도 높고요. 특히 노조키 렌야 사건과 신관 사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노조키 렌야 사건은 멀쩡히 입구가 열려 있는 대숲 신사에서, 어디에도 결박된 흔적이 없는 노조키 렌야가 어째서 굶어 죽었는가라는 기묘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언뜻 보면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였지요.
그러나 범인은 낡은 법의를 노조키 렌야에게 입힌 뒤 그 법의에 긴 대나무 장대를 꿰고, 천으로 양손을 결박해 양팔이 벌어진 상태로 몸을 고정해 두었던 겁니다. 그 결과 노조키 렌야는 빽빽한 대숲 사이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눈 앞의 출구도 어떻게 해도 걸려서 나갈 수 없었고요. 이는 현장에 남아 있던 대나무 장대와 사당을 부수려 했던 약한 타격 흔적, 대숲 입구에 남은 내려친 자국들로 증명됩니다.
닫힌 방이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는 밀실처럼 만든 점, 현장의 자연물 자체를 트릭의 일부로 끌어들였다는 점, 그리고 괴담과 동일한 '아사'라는 살해 방법을 택한 점 모두가 대단합니다. 별점 5점도 충분할 정도로요.

망루 오두막 전망널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던 신관이 추락사했는데, 호리이 씨가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고 사바오도 곧바로 망루를 찾은 탓에 범인이 도망칠 수 있었을 리 없었다는 신관 사건의 트릭도 돋보입니다.
범인은 먼저 신관을 살해한 뒤 망루 안의 옷장 위치를 바꾼 뒤, 벽과 옷장 사이에 시체가 가부좌 상태로 고정되게 끼워 놓았습니다. 이후 사후 경직이 진행된 다음날 아침, 범인은 신관의 옷을 입고 신관인 척 망루로 올라가서 굳어 있는 시체에 다시 옷을 입혀 전망널로 밀어 놓고 사라집니다. 범인이 사라진 뒤 시간이 지나자 시체는 사후 경직이 풀려서 아래로 떨어졌던 겁니다.
전망널이라는 망루의 독특한 구조와 망루 내부의 기물들, 그리고 항상 명상하는 신관을 바라보는 목격자 호리이의 존재를 알리바이 조작에 활용한 멋진 시한장치 트릭입니다. 이 역시 별점 5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에요.

도조 겐야와 소후에 시노의 티격태격, 도조 겐야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 등의 요소도 팬으로서는 즐길거리였고 괴담도 미쓰다 신조라는 작가의 이름값에 걸맞게 충분히 섬뜩합니다. "하에다마 님"으로 짐작되는 존재를 노골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은근하게 공포를 끌어내는 솜씨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괴담을 활용하여 현실의 사람들이 음모를 꾸몄다는 네 번째 괴담의 진상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다른 도조 겐야 시리즈와 비교하면 괴담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500여 페이지 분량 중 무려 120여 페이지가 괴담에만 할애되어 있습니다. 그 탓에 도조 겐야가 마을 안에서 직접 움직이며 활약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주요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인 가키누마 도루와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또한 몇몇 사건의 동기는 썩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신관이 오래전 마을의 범죄와 인신공양이라는 과거가 밝혀질까봐 노조키 렌야를 살해했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범죄자의 가족까지 오랫동안 낙인찍는 일본 특유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있는 동기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이 이해하기는 무리라 생각되네요. 이보다는 사랑하는 손녀 스즈카제를 탐내고 있었다던가, 보다 직접적인 협박을 받는다는 설정이 나았을 겁니다.
고라 지방 마을의 우두머리(?)인 5인방이 합병을 막기 위해 유리아게 촌에서 생활하는 닛쇼방적 사원을 위협했다는 이야기 역시, 목적과 동기가 다소 모호합니다. 사원 몇 명이 마을에 발길을 끊어봤자, 마을 합병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 같으니까요. 이 역시 보다 직접적인 위협이 필요했을거에요.

스즈카제 양이 다루마 동굴에서 기지를 살해한 사건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스즈카제가 동굴 내부를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는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동굴 내 도구를 이용해 원거리 살인을 성공했다는건 여러모로 무리라고 생각되거든요. 기지가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무방비하게 있어야 성립한다는 점에서도 말이 안되고요. 작품의 완성도를 해칠 정도는 아니지만, 앞선 두 사건이 워낙 뛰어나서 오히려 이 약점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오래전 마을이 상선을 침몰시켜 약탈했고, 어린 여자아이를 인신공양했다는 등의 고라 마을에 얽힌 괴담의 진상도 이전에 읽었던 미쓰다 신조 작품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어요. 게다가 정말로 '하에다마 님' 같은 괴이가 실존한다는 결말은 영 아니었습니다. 괴담이 실존한다는 분위기가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징이기도 한데, 한 개 마을이 깡그리 사라진다는건 억지였어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워낙 분명해서 충분히 읽어볼 만 합니다. 괴담은 섬찟하고, 추리는 현실적이면서도 참신하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는 본격 미스터리의 쾌감을 놓치지 않으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독자분들, 특히 도조 겐야 시리즈 팬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2026/03/20

지뢰 글리코 - 아오사키 유고 / 김은모 : 별점 3점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작가인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의 단편 연작집입니다. 2024~25년에 걸쳐 일본의 4대 미스터리 랭킹 1위를 휩쓸었던 작품이지요. 저 역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습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유쾌함과 만화적인 설정, 그리고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본격 미스터리를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게임’의 영역으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모두 다섯 가지 게임이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게임이지만, 여기에 약간의 변주를 더했다는 점에서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게임은 ‘정확하게 정해진 조건’ 아래에서 진행되며, 그 조건의 허점을 파악하고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는 플레이어가 승리하게 되고요. 이러한 점 덕분에 단순한 놀이를 넘어 두뇌 게임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계단 오르기나 가위바위보에 더해진 약간의 변주만으로 순수한 두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여러 랭킹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축제 때 좋은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카페 주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등 비교적 일상적인 이유인 게임의 목적들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인 이모리야 마토도 꽤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놀라울 정도의 분석력을 지닌 천재이기는 하지만, 게임 이외의 부분에서는 그렇게 기이한 면모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연이나 기묘한 습관도 없는, 다소 가벼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여학생입니다. 구누기 선배에게 거는 장난스러운 모습이 본래 모습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아래 만화판 이미지처럼요.
친구이자 주요 화자인 고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며, 다른 등장인물들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사립 세이에쓰 고교와 화폐처럼 유통되는 S칩을 걸고 게임을 벌이는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1억 엔에 가까운 돈이 걸린 게임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도박 실력이 학교 내 서열을 결정한다는 "카케구루이" 수준의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세이에쓰 고교와 얽히면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어 학생회장 사부리나 이모리야와 비슷한 수준의 게임 천재인 우키타 에소라 등도 앞서 등장했던 평범한 학생들과는 상당히 다른, 다소 비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토가 세이에쓰의 용벙(?)처럼 활약한다는 여지를 남기는 에필로그도 영 별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게임을 고도의 두뇌 게임 영역으로 끌어들인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등장하는 이야기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뢰 글리코 :

학원제 때 옥상의 사용권을 놓고 마토와 학생회의 구누기 선배가 ‘지뢰 글리코’라는 게임으로 대결합니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플레이어가 3의 배수만큼 계단을 올라가는 게임인데, 서로 계단에 ‘지뢰’를 장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마토가 장치한 지뢰에 걸린 구누기 선배가 3연타로 30계단을 미끄러져 패배하고 맙니다.

3의 배수로 올라가는 상황을 이용하는 초반부 전개, 그리고 설치한 지뢰 위치에 선배가 서도록 유도한 마지막 승부는 볼 만합니다. 그러나 구누기 선배가 마토의 지뢰를 모두 밟아 열다섯 계단 차이가 벌어진 뒤 바로 패배 선언이 이어지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위나 보로 이기면 여섯 계단씩, 바위로 이기면 세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니 3연승만 하면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두뇌 게임이라면 모를까, 순수한 가위바위보 승부라면 3연승 정도는 그리 낮은 확률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님 쇠약 :

카루타 카페에 출입 금지당한 카루타부를 위해, 카페 사장과 마토가 백인일수 카루타와 ‘신경 쇠약’을 결합한 ‘스님 쇠약’ 게임으로 승부를 벌입니다.

그런데 ‘두뇌 게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카페 사장은 카루타 카드에 몰래 표시를 하여 사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를 간파한 마토가 카드를 바꿔치기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카드 마킹을 새로 한 뒤 바꿔치기한다는 방법 자체도 비현실적이고, 마지막 카드 조합 역시 운의 비중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사기를 고발해 망신을 주는 편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 :

마토를 마음에 들어 한 학생회장 사부리 선배가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합니다. 선배가 이기면 마토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마토가 이기면 선배가 마토의 중학교 동급생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만들어 준다는 조건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는 일반적인 가위바위보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각각 ‘독자손’을 추가해 7전 4선승제로 겨루는 게임입니다. 독자손은 형태와 이름을 정하고 그 효과를 설정할 수 있는데, 최소한 한 종류의 손에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설정들이 꽤 복잡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토는 ‘형태가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교묘하게 활용해 마지막 대역전승을 이끌어냅니다. 핵심은 중반 이후 고다에게 부탁한 핫초콜릿을 마시기 위해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던 장면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손이므로 사실상 무효가 되어 그 판에서는 패배한 셈이었는데, 사부리 선배는 이를 독자손 설정의 효과로 오해해 마지막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처럼 평범한 게임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두뇌 게임으로 만든 점이 인상적인 이야기이며, 주어진 조건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길 수 있다는 전제도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물론 사부리 선배가 이 게임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안했던 ‘스네일’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 :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사립 세이에쓰 고교 학생회와 게임을 벌입니다. 그들의 ‘S칩’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승부 게임은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로, 방법은 한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표적(술래)은 몇 개의 단어로 외칠지를 먼저 정하고, 암살자(공격자) 역시 몇 걸음을 움직일지를 미리 선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사실 게임을 만든 스도는 그동안 잔꾀를 부려 ‘0’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 왔고, 그 덕분에 항상 승리해 왔습니다. 암살자는 최소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마련이니,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모리야는 이 트릭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표적에게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을 걸어 둡니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 정면만 보고 움직여야 한다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표적이 보지 못하는 공원 밖으로 돌아 나간 뒤, 떡갈나무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 표적을 붙잡는 데 성공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승리한다는 두뇌 게임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만, 세이에쓰의 오케가와가 엄청난 청력으로 숫자를 추측한다는 설정은 다소 과합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거액이 게임에 걸리는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게다가 스도의 필승법도 소문이 나면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4 Rooms Poker :

마토가 호적수 에소라와 S칩 전액을 걸고 세 장의 카드로만 패를 만들어 겨루는 포커 게임으로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처음 받은 카드는 버리고 한 번 다시 받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포커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가 제한된 시간 안에 카드를 가지러 네 개의 무늬 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방에 놓여 있는 카드 중 원하는 카드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이지요.

등장하는 게임 중 조건이 가장 많고 복잡하며 여러 장치들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건들 가운데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에 불까지 지른다는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생각되네요.

마지막 승부 역시 아쉽습니다. 아무리 카드의 뒷면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에소라가 최후의 승부 순간까지 뒷면의 색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입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뒷면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가 원래의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에 모든걸 걸기에는 너무 확률이 낮지 않나 싶어요.

무려 1억이라는 판돈을 쿨하게 포기하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토의 성격이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본인은 몸을 팔 생각까지 했는데 그걸 이대로 퉁친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2/28

상점가의 전진 - panpanya / 유유리 : 별점 3점

국내에 출간된 전권을 구입해 읽을 정도로 사랑하는 작가 panpanya의 신작입니다. 출간 사실을 뒤늦게 알아 구입이 조금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단편 열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 언제나처럼 일상 속에서 기발한 발상을 끌어내 독특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건물’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의 집"은 집 가족이 자라고 성장해 하나의 큰 집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연"은 멀리 보이던 집들이 사실은 건설업체의 간판이었다는 설정입니다.
"슈퍼 하우스"는 집이 일종의 로봇이 되어 외부의 공격을 격퇴합니다.
"즐거운 부동산"에서는 복권으로 택지에 당첨된 뒤 집 프라모델을 구입해 집을 건설합니다.
"윤번지"는 상속받았지만 사라진 땅을 탐정인 주인공과 레오나르도가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보니 그 땅은 과거 투영법 제작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평면 지도로 인해 발생한 사기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입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어긋남을 다시 분석해, 이 ‘윤번지’가 지하에 위치했다는걸 밝혀냅니다.
"빌딩"은 빌딩이 원래 싹이며, 그것을 잘 키워 만들어낸다는 내용입니다.
"상점가의 전진"에서는 확장하고 이동하는 상점가를 따라 주인공이 집을 상점가에 포함시켜 가게를 열고 이사까지 하지만, 다른 현으로의 이동까지는 동참하지 못해 결국 상점가를 떠납니다.

이 가운데에서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적 설명이 잘 결합된 "윤번지"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구체를 평면으로 만들 때 발생하는 오류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주인공과 파트너인 충견 레오나르도가 어딘가에 도착한 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내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확보할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모은 뒤, 과학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추론으로 정답에 접근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추리물 같은 재미를 줍니다. 단순한 귀납적 추리가 아니라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직사각형 모서리 방의 양쪽 끝에서 도쿄 스카이트리와 후지산이 각각 보이면 ‘원주각 정리’가 성립하고, 거리를 감안하면 현재 위치는 미우라 아니면 이타미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시리즈 8편이 대표적입니다.


"올바른 주먹밥 개봉 방법"은 주먹밥 스티커를 훼손하지 않고 뜯어내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뒤의 해설을 보니 작가가 실제로 주먹밥 스티커를 수집하며 연구한 듯한데,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알기 어려운 디테일이야말로 panpanya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구야바노 홀리데이",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 처럼 말이지요.

다만 "집의 집"이나 "빌딩"처럼 설정이 다소 단순한 작품과, "슈퍼 하우스"에서 보이는 panpanya답지 않은 액션물 분위기의 전개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공격을 내선번호로 시도한다는 디테일은 재미있었지만요.


"여기는 어디일까요?" 시리즈 역시 몇 편은 다소 식상하게 느껴졌고, 이야기로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성립하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npanya 특유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작품도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

2026/02/20

꽃다발은 독 - 오리가미 교야 / 이현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세는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이었던 마카베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기타미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소장 대리인 기타미는 기세의 중학교 선배였다. 마카베가 의뢰를 망설여서 기세는 직접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를 통해 협박은 마카베가 저질렀다는 4년 전 강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났다. 마카베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마카베는 모든 걸 잃고 학교마저 그만둔 채 지금에 이르렀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분량이 비교적 간결한 편이라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마카베에게 익명의 협박장이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협박은 4년 전 그가 저질렀다는 강간 사건과 관련되었고, 협박범은 당시 피해자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마카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도 그가 누명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기타미의 조사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마카베는 억울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이렇게 '원죄(엔자이)'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사회파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뒤이은 전개는 마카베가 정말 결백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을 싹트게 하여 흥미롭습니다. 마카베의 모친도 그의 무죄를 믿지 않고, 마카베 가족이 왜 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 - DNA 검출 -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기세를 통해 소개된 마카베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서, 독자로서는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뒤집어 버리는 덕분입니다. 우선, 4년 전 사건은 피해자였던 나가노 가나미의 자작극이었습니다. 마카베에게 푹 빠진 나머지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성공해서 마카베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박장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의 아버지 나가노가 마카베를 돕기 위해서 보냈던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자연스럽게 믿어온 전제가 뒤집히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 반전이 결혼식 직전의 마카베에게 진상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로 이어지는 결말도 충분히 흥미롭고요. 

그리고 반전은 협박장이 두 종류 - 강경한 경고와 정중한 문체 - 였다는 단서로 뒷받침되는데 이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기타미와 기세는 강경한 경고는 마카베에게 보냈고, 가나미가 받아볼 수 있는 협박장은 정중한 문체로 보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나가노는 처음에 가나미에게 강경한 경고가 전달되도록 협박장을 보냈습니다. 부부의 이름으로 동거 중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내가 우편함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는 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경고가 효과를 보지 못해서, 마카베에게 정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은 물론 독자까지 공정하게 제공한 단서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했다는게 아주 좋았어요.
가나미가 마카베를 옭아매기 위해 벌였던 몇 가지 장치 - 당시 마카베가 연인과 시간을 보냈던 러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DNA를 손에 넣었다는 등 - 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요.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기타미가 벌이는 조사의 상세함도 최고 수준입니다. 주로 탐문과 관계자 면담이 중심이지만, 기타미는 피해자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카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보를 캐 내기까지 하는데 이는 법대생 기세의 입을 빌어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이라고 설명되거든요. 그야말로 일반 '탐정'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를 그려낸 느낌이에요.
개인이 받은 '협박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재를 다룬 점도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 역시 일개 탐정이 해결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죄일테니까요.

그러나 마카베가 받는 협박의 원인이 4년 전 사건일 수밖에 없는 탓에 협박범이 그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가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길어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합니다.  
아울러 중학생 시절부터 탐정으로 활약해 왔다는 기타미의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저해합니다. 굳이 필요했던 설정은 아니었어요. 기세와 기타미의 1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불필요해 보였고요. 

그래도 반전을 중심에 둔 일상계 범죄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1/31

아사토호 - 니이나 사토시 / 김진아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의 쌍둥이 동생 아오바가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 교수 후지에다가 실종되었고, 교수를 찾던 친구 아즈사도 자살했다. 다른 실종 사건이 여럿 있었으며, 이 모든 사건은 '아사토호'라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나쓰히는 다시 재회한 아키토와 함께 '아사토호'의 정체에 대해 찾아 나섰다. 이 모든건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천과 관련이 있었다...

신예 작가 니이나 사토시의 장편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지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아오바가 신비한 천에 의해 사라진 뒤, 둘 말고는 아무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교수 후지에다의 실종과 교수를 찾던 아즈사의 기묘한 자살, 이 모든 것과 얽힌 책 '아사토호'에 관련된 수수께끼가 이어지는데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나쓰히와 아키토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아사토호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합니다. 아사토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마쓰무라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마쓰무라의 산장 위치를 추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키토는 기록의 증기 기관차에 탔던 시간과 버스를 탄 거리를 토대로 대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장소에서 결국 기요하라 병원까지 이어지는 단서들을 수집해 내어 진상에 도달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사토호'에 대한 상세한 설정들도 굉장히 설득력 높습니다. 저자가 실제로 문학사 전공인 덕분이겠지요. 정말로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실감납니다.

추리적으로는 그 외에도 괜찮은 부분이 제법 많아요. 아키토가 영매사로서 선보이는 짤막한 에피소드처럼요. 일종의 콜드 리딩, 사전 답사와 의뢰인의 현황—신혼부부가 굳이 교외에 있는 단독 주택을 산 이유는?—을 토대로 추리를 통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지요.

호러 장르물로서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아즈사가 남긴 논문이 유서처럼 이어지는 장면이라던가, 후지에다 교수의 아내 미나미의 등장, 그리고 나쓰히가 사라지고 아오바가 나타난 시점에서 '아사토호'라는 책이 고전 걸작으로 널리 퍼졌고 결말까지 달라진 - 원래는 온나니노미야가 추녀였다는 한심한 결말이었는데, 아오바처럼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다는 결말로 -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부분 등은 꽤 섬찟했습니다.

모든 건 앞뒤가 딱 맞게 말이 되는 패턴이고,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히의 생각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진상도 잘 풀어냈습니다. 단순 괴기현상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고 말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해요. 나쓰히는 아오바와 아키토의 환상 속 존재였다는 진상과 이에 따른 시점 변화도 적절했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이, 천을 함께 본 사람들이 원하고 빠져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키토가 일으킨 사고로 크게 다쳐 흉터가 생긴 아오바가 상처 없는 나쓰히로 거듭난 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오바에 대해 나쓰히와 아키토가 이상한 기억을 공유하고, 새롭게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즈사가 원한 건 연구자로서의 성공이었는데, 천이 심어준 건 좌절감이었고, 그녀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원했던 후지에다 교수를 차지한 미나미 이야기뿐입니다.

천을 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종의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서 하나의 우주에 천을 본 사람들이 여럿 얽힌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개입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니까요. '천'이 만든 이야기에서 '천'의 진상을 밝히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요. 기껏 꿈 속에 데리고 왔는데, 이게 꿈이라는걸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의 정체가 밝혀진 뒤의 분량은 많이 길고 애매했습니다. 아오바가 천과 일체화되어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는 장면이 특히 길었어요. 감정 과잉이라 여겨지기도 했고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정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두사"처럼 환상은 환상처럼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한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6/01/24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 (2025~2026) : 별점 3점

"흑백요리사 시즌 2"는 지금은 흔해빠진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다른 요리 서바이벌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 이미 성공한 셰프들과 신인들을 대결시킨다는 대결 구도를 잘 살려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워낙 쟁쟁한 셰프들이 백수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참가자는 단연 후덕죽 셰프입니다. 50년이 넘는 요리 경력을 지닌 요리계의 거물이 자신의 긴 이력에 기대지 않고, 거의 자식뻘에 가까운 후배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연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큰 감동이었습니다. 결승 직전까지 가는 엄청난 실력이 함께 한 덕분이지요. 특히 당근 요리 지옥에서 요리괴물과 맞붙은 대결은 무협지의 비무대회에서 원로 고수와 신예 후기지수가 맞붙는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긴장감과 재미가 넘쳤습니다. 그날의 당근 짜장면은 단연 최고의 한 수였고요. 만약 그게 결승 요리였다면, 요리괴물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애청하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친숙해진 셰프들의 출장도 반가왔습니다. 손정원 셰프야 백수저로 등장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정호영 셰프와 샘 킴 셰프는 솔직히 초반에는 애매하거나 웃음 후보가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 경연에서 예상과 달리 끝까지 잘 버텨주어서 좋았어요. 특히 정호영 셰프는 탑 4에 오르는 성적으로 실력을 분명히 입증했지요. 대진운이 따른 측면도 있겠지만, 이런 경연에서 운 역시 실력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결과라 생각됩니다.

또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나치게 캐릭터를 과시하거나 센 척에 집중하는 흑수저 요리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요리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매너 있게 경연에 임하고 있어, 시청자로서 불편함 없이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시즌 1에서 중간에 하차했던게 이상한 캐릭터 만들기에 의한 불편함 때문이었는데, 그런걸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대결도 꽤 잘 짜여 있습니다. 개인전과 팀전의 배치, 그리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요리 천국과 요리 지옥이라는 대비되는 무대는 흐름을 단조롭지 않게 만듭니다. 특히 요리 지옥에서 진행된 당근을 활용한 30분 요리 대결은 이번 시즌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라 할 만합니다. 제한된 재료인 당근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발상과 요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결과물의 완성도 역시 납득이 갔습니다.

결승으로 이어지는 서사도 인상 깊었습니다. ‘나를 위한 요리’라는 결승전 주제는 경쟁의 끝에서 요리사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들었고, 최강록 셰프의 우승은 단순한 실력 경쟁을 넘어 감정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감동과 재미를 모두 잡은,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시즌 1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백수저 참가자들 사이의 급 차이는 여전히 큽니다. 각종 대회 우승자, 미슐렝 스타 셰프와 단순히 방송 출연 경험이 많은 스타 셰프를 같은 선상에서 경쟁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참가자 선별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재 스님은 사찰 요리의 대가이지만 육류나 오신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제약을 안고 있고, 고기굽기 연구소장의 경우는 BBQ에 특화된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문 셰프라고 보기 애매한 참가자, 혹은 특정 장르에만 지나치게 특화된 참가자들은 애초에 어느 정도 걸러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괴물의 캐릭터 만들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굳이 그렇게까지 센 척하는 연출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대결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흑백 팀전이 가장 큰 문제에요. 여기서 패한 팀은 전원이 탈락한다는 규칙인데, 흑수저들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으니까요. 패자 부활전으로 두 명을 살려주기는 했지만, 그 중 한 명이 누가 봐도 결승까지 올라갈 요리괴물이라서 긴장감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팀을 섞거나, 최소한 두 팀 씩 나눠 경쟁하게 했다면 긴장감과 공정성을 모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심사위원 평가 역시 쉽게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백종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진 탓이 가장 크지만, 안성재 셰프의 심사 또한 일관되게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특정 분야에 대해 가혹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심사위원 수를 늘려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었더라면 더 좋았을거에요.

그래도 잘 짜인 미션과 인상적인 참가자, 그리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결말을 보여준 재미있는 시리즈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요리 서바이벌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2026/01/10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2025) - 라이언 존슨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드 신부는 몬시뇰 윅스 신부가 지배하는 일단의 추종자들 중심의 성당 보좌로 부임했다. 그는 윅스 신부의 비정상적인 운영과 범죄에 가까운 행동에 분노를 쌓아가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  윅스 신부가 미사 중 밀실에서 살해당하자 범인으로 몰렸고, 유명한 탐정 브누아 블랑이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지만 윅스 신부의 부활 후 정원사 샘슨의 죽음, 의사 냇 박사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는데...

미국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인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 최신작입니다. 그런데 분위기와 접근 방식은 전작들과 꽤 다릅니다. 전작들은 브누아 블랑이 직접 휩쓸린 사건을 추리해 나간다면, 이번에는 주드 신부를 도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조력자일 뿐이라는 점에서요. 작품의 주인공은 주드 신부거든요. 비교적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던 전작들에 비해 종교와 신앙, 개인의 분노와 죄책감 등 묵직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도 차이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주 괜찮습니다. 고전 본격물 팬이라면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밀실 트릭이 펼져지는 덕분입니다.

게다가 정보 제공이 공정하다 못해 노골적입니다. 영화에서 존 딕슨 카의 “할로우 맨(국내 출간명 "세 개의 관")”에 등장하는 밀실 트릭 강좌가 직접 인용되기 때문입니다. 브누아 블랑은 장치 트릭 설명에서 멈추지만, 이 뒤에는 '시간차 트릭(살인이 발생한 시점과 발견된 시점이 다르다)'가 이어지는데 실제 범인은 이 트릭으로 범행을 저질렀거든요. 마사는 흉기인 칼 머리의 악마 장식과 동일한 장식을 윅스 신부 미사복 등에 미리 꿰메 두었습니다. 그리고 밀실로 향한 윅스 신부가 항상 마시는 술에 약을 탔고, 술을 마신 신부가 쓰러진 후 피 주머니를 터트려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냇 박사가 상태를 확인하는 척 하다가 악마 장식을 떼고 진짜 칼로 찔러 죽였던게 진상이지요.
이를 진범이 아니라 주드 신부로 혐의를 돌리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윅스 신부의 부활을 그린 불가능 범죄도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당연히 시체를 바뀌치기한 것이고(대역은 당연히 윅스 신부와 닮았고, 관을 만들고 나중에 죽은 샘슨이지요) 트릭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주드 신부가 신앙심과 개인적인 분노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서, 그가 보고 듣는 정보가 어느정도 왜곡되었다는걸 활용하여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그가 ‘부활한 몬시뇰을 자신이 죽였다'고 믿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정말 극적으로 잘 연출했어요.

한편으로는 8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보물 찾기도 병행되는데 이 역시 관객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유일한 단서인 ‘이브의 사과’를 분해한 뒤, 나중에 그게 일종의 '보석함'이었다는걸 드러내는 식으로요.

동기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마사는 성당을 지키기 위해 윅스를 죽였지만, 동시에 그가 부활한 것처럼 꾸며 성당을 되살리고자 했던 겁니다. 윅스 신부가 입을 열면 경력이 끝장날 위기에 빠진 냇 박사가 실행범으로 동참했고요. 그러나 냇은 8천만 달러짜리 보석 앞에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샘슨을 죽인 뒤, 마사까지 죽이려 했지만 되려 그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그리는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워낙 유명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시리즈답게 이번에도 배우들 캐스팅이 엄청 화려한데, 마사 역의 글렌 클로즈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평생 헌신했으나 내면에 분노를 품은 인물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표현해 냅니다. 주드 신부 역의 조쉬 오코너는 흔들리는 신앙과 불안한 정신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몬시뇰 윅스 역시 광기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보여주며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다른 배우들 연기도 다 좋아요.

그런데 너무 길다는 단점은 큽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조쉬 신부가 윅스 신부와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 여러가지 관계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탓입니다. 물론 인물들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윅스 신부가 추종자들을 마지막에 협박했더라도 경력을 잃을 위기에 빠진 냇 박사와 작가 리오 말고는 동기가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시몬이 실행범일리는 없고(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걸 보여주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지만), 베라 변호사는 아버지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서 동기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즉, 이런 인간관계는 관객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사족입니다.
신앙심과 개인적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드 신부의 딜레마 역시 흥미롭지만 이렇게 길게 풀어낼 정도로 재미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드 신부의 정신력이 너무 약하지 않나 싶은 생각만 들어요.

브누아 블랑의 매력도 잘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는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사의 자백을 유도하는데, 이는 정의 구현에 충실했던 그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는 추리 기계가 갑자기 따뜻한 남자로 돌변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마사가 용서와 구원의 이미지를 남긴 채 생을 마감하는 결말 역시 식상할 뿐 아니라, 끝까지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는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지막에 보석이 주드 신부가 만든 십자가 그리스도 상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 역시 뻔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는건 분명합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아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작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2025/11/14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 켄 피셔, 라라 호프만스 / 이건, 백우진 : 별점 3점

책 소갯글을 보면, 원래 성공한 투자자는 책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투자에 몰두하다 보면 글을 쓸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투자 책을 쓴 사람은 실전 투자자라기 보다는, 책 판매가 목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켄 피셔는 실제로 큰 성과를 이룬 전문 실전 투자자이자 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출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들은 흘려듣기 어렵습니다.

주장은 간단하지만 확실합니다. 시장에는 영원한 약세장도, 끊임없는 경기 침체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켄 피셔는 과거 데이터를 근거로, 하락장이라 불리는 시기에도 배당까지 포함하면 대부분의 경우 수익이 발생했으며, 침체 뒤에는 빠르고 강한 반등이 뒤따랐다는 걸 보여줍니다. 흔히 말하는 V자 반등입니다. 결국 시장은 순환하고, 위기는 오래가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주가는 반드시 고점을 갱신해 왔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입니다.
이런 말이 먹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비관론에 끌리기 때문이며, 저자는 인간 심리가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예측에 더 큰 신뢰를 부여한다고 말합니다. 공포를 자극하는 목소리는 과장되어 보이지만 그럴듯하게 들리는 법이지요. 그러나 시장의 역사는 이런 비관론을 무수히 부정해 왔고, 결국 반등하고 회복하는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장기 투자 관점에서 시장을 바라보면, 일시적인 하락에 크게 흔들릴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기를 견디지 못한 투자자들이 더 큰 기회를 놓쳤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해 줍니다. 강세장은 대체로 약세장보다 길고, 상승폭도 크며, 평균 수익률을 훨씬 웃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투자자는 겁먹지 말고,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 시장에 꾸준히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또 '지나치게 빠른 상승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강세장이 원래 그런 속성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천천히 오르는 장보다 단기간에 크게 오르는 장세가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단기 조정은 불가피하지만, 기업의 펀더멘털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아울러 시장 변동성에 대한 접근도 기존 상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변동성이 클 때는 투자를 미루라고 말하지만, 피셔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합니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려면 일정 수준의 변동성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안정성과 수익률은 본질적으로 상충 관계이며, 만약 변동 없는 수익을 원한다면 낮은 금리의 예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면서요. 심지어 변동성 없이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말은 대부분 사기에 가깝다고 경고합니다. 메이도프의 폰지 사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투자 지평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도 현실적입니다. 대부분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투자 계획을 짜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 방식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산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어야 하느냐이지, 나이가 몇 살이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본인의 삶은 물론, 배우자와 가족까지 고려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긴 투자 지평이 필요할 수 있고, 이런 상황이라면 주식 비중을 과감히 줄일 이유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어떤 투자보다 주식 투자를 오래, 길게 가져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국가 부채에 대한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정 적자는 경제에 부정적이라고 생각되지만, 피셔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와 반대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재정 흑자일 때 대공황이 발생했고, 재정 적자 이후에는 오히려 시장 수익률이 개선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기업에 일률적인 부채 기준이 없는 것처럼, 국가에도 획일적인 부채 한계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국채는 통화 정책을 운영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라는 점도 강조됩니다.

미래를 지나치게 예측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입니다. 24개월을 넘는 시장 전망은 의미가 없으며, 한때 시장을 이끌었던 종목이나 섹터에 대해 '이제는 끝났다'고 단정 짓는 것도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현재 흐름이나 기존의 가정에 의존한 예측보다는, 데이터와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실용적인 조언도 많습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유망한 자산군이 달라진다는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약세장 바닥을 벗어나는 시기에는 소형주가 강세를 보이며, 장기금리와 단기금리의 차이가 좁아질 때는 성장주가, 차이가 벌어질 때는 가치주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분석은 실제 투자 전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치와 주가의 관계에 관한 내용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시장이 뚜렷하게 반응하지는 않으며, 이 부분은 미국 정치 중심의 설명이라 국내 독자 입장에서는 큰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식 투자자라면 흥미를 느낄만한 내용이 많지만 미국 기준으로 서술되었다는건 분명한 한계입니다. 기본적으로 국내 주식 시장은 미국 시장만큼 투명하다고 보기 어려우니까요.
아울러 주식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동산과 금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단호한데 이 역시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한 부동산 관련 투자 근거 - 미국 기준으로 지난 40년간 상업용 부동산의 수익률이 주식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고, 주거용은 그보다 더 낮았다는 통계 - 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이건 미국 기준이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10년만 보아도 대출 및 전세라는 레버리지를 활용해서 3~4배(300~400%) 되는 수익을 거둔 사례가 즐비하니 동의할 수 없어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전세 제도가 사라지고, 대출은 어려워지며 부동산의 매매가 실거주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정책이 자리잡으면 모르겠지만요.
금 역시 장기적인 수익률이 낮고, 포트폴리오 다변화에도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안전 자산' 측면에서 충분히 투자 효과가 있다는건 이미 증명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화제인 전자 화폐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책의 주제에 걸맞는 오랜 기간, 최소 50년 이상 역사가 없는 탓이겠지만, 최근 10년 정도의 흐름만 짚어 주어도 엄청난 상승률을 보인 자산이라는걸 부정할 수 없을텐데 말이지요. 저자가 이를 '튤립 버블'과 같은 무가치한 거품 자산으로 볼건지, 진지한 투자 대상으로 볼건지 궁금했는데 언급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참고할 내용이 많고 미국 주식 대세 상승론에 대한 이견도 없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금과 국내 증시에도 분산 투자하는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코스피는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는 확신을 가지기는 힘드니 미국 주식에 직, 간접적으로 투자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환율과도 연동되는 만큼 국내 투자자로서는 확신을 가지고 장기 투자하기는 어려우니까요. 1:1:1 비율로 분산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