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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31

펜슬 퍼펙트 - 캐롤라인 위버 지음, 오리아나 펜윅 그림 / 이지영 : 별점 4점

펜슬 퍼펙트 - 8점
캐롤라인 위버 지음, 오리아나 펜윅 그림, 이지영 옮김/A9Press

연필이 만들어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알려주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광물 흑연이 발견된 뒤, 필기 재료로 팔리다가 점차 나무 사이에 흑연 기둥을 넣는 필기구로 진화하고, 흑연 심과 제조 공법에 여러가지 혁신적 기술과 아이디어가 도입되어 현대 연필로 발전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제조 공법, 연필 등급, 주목할만한 인물과 회사, 회사별 주요 제품에 대한 설명은 물론, 2차 대전으로 재료가 부족했을 때 탄생한 플라스틱 연필, 또 복사용 연필과 컴퓨터용 연필, 향기 나는 연필, 더 나아가 '노벨티 연필' 이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연필까지 망라하고 있고요.
거기에 더해 연필 광고, 연필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지우개, 연필에서 지우개를 고정하는 페럴까지 빼 놓지 않고 소개될 정도입니다. 연필로 그려진 우아하고 섬세한 일러스트도 최고 수준이고요.

몇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흑연이 발견되어 광물로 값어치를 갖게 된 1560년대부터 이미 '필기 재료'로 팔렸다고 합니다. 태생부터가 필기구인 셈이지요. 1600년대에는 끈으로 감싸서 사용하는 초기형 연필이 등장했다니 그 역사가 실로 깊네요.

미국 연필 산업 부분 소개를 통해 "월든"으로 이름을 날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원래 연필 산업에 종사했다는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존 소로와 연필을 만들기 시작한 헨리 데이비드는 독일 연필들을 연구한 끝에, 당대 미국에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흑연 심과 연필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독일산 연필이 시장을 점령했고, 자신이 만든 기술을 극비로 하여 특허를 내지 않았기에 결국 연필 산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지만, 이 책 저자 표현에 따르면 그는 미국 최초의 연필 혁신가, 즉 "펜슬 히어로"라고 불리워야 한답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존 스타인백 등 유명 문필가들이 사랑한 연필인 블랙 윙 602는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그들이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이 책을 통해서 드디어 알 수 있었습니다. 블랙 윙 602에는 연필심에 왁스가 다소 많이 첨가되었고, 흑연은 더 많이, 점토는 더 적게 함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4B연필 처럼 쓰이지만 독특하게 미끄러지고, 똑같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다른 연필에 비해 힘이 반만 들어가서 더 빨리 쓸 수 있었던게 인기의 비결이었던 것이지요. 이 특성 덕분에 문필가들 뿐 아니라 월트 디즈니와 애니메이터들 역시 블랙 윙을 애호했고요.
1988년, 블랙 윙을 만드는 에버하르트 파버사가 파버-카스텔에 인수된 뒤 블랙 윙 생산이 중단되었는데, 2010년 팔로미노사가 블랙 윙을 부활시켜 정식으로 출시했다니 다행입니다. 연필심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꽤 비슷하다니, 저도 한 번 기회가 되면 써 보고 싶네요. 정말 "힘은 반으로, 속도는 두 배로" 쓸 수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반 쯤은 농담같았던 "연필 깎기의 정석"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가 온라인에서 공인된 연필 깎는 장인으로, 최근까지 연필 한 자루에 40달러씩 받고 연필을 깎아주었다는 이야기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거든요. 이 책에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시시하고 사소한 일에 대한 헌신'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칭송하는데, 이렇게까지 포장할 일인지는 아닌듯한데 말이지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하여튼, 재미도 있고 소장 가치도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조금 두서없는 설명도 얼마간 있고,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하다 싶은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2만원이라는 가격은 제법 센 편이지만 그 정도 값어치는 있어요. 연필의 역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10/30

방과 후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방과 후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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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카 여고 수학교사인 '나' 마에시마는 누군가로부터 생명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와 범인을 알지 못해 답답해 하던 중에 특별 활동인 양궁부 지도를 마친 뒤, 남자 탈의실에서 학생 지도부 부장 무라하시 선생이 살해된걸 발견했다. 발견은 양궁부 주장 게이코와 함께였다. 남자 탈의실은 밀실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불량학생 다카하라 요코가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학교 제일의 수재 호죠 마사미가 친구 요코를 위해 밀실 수수께끼를 풀어냈고, 다행히 알리바이가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 뒤 학교 문화제에서 마에시마로 오인된 다카이 선생이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독살당했고, 마에시마도 차량 공격으로 죽기 일보 직전에서 겨우 탈출하는데...

우리나라 기준으로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기념할만한 데뷰작입니다. '제 31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데다가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에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서도 높은 순위로 랭크되어 있어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수작입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본격 추리물치고도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대신 죽은 걸로 보였던 다케이 선생이 사실은 진짜 목표였고 마에시마를 노린 범행은 다케이 선생이 진짜 목표라는걸 가리기 위한 연막이었다, 차량을 이용해서 생명을 위협하고 마지막에 칼로 찔렀던 범행은 아내 유미코가 불륜남과 벌였던 진짜로 마에시마를 노린 범행이었다는 등 추리적으로 볼거리가 아주 많은 덕분이지요. 핵심인 밀실 트릭도 무려 두 개나 등장하고요. 데뷰작이라서 아이디어가 넘쳤던게 아닌가 싶네요.

특히 범행 장소인 남자 탈의실 문에 빗장이 가로질러 있었는데, 범인이 어떻게 빠져나갔는지?에 대한 밀실 트릭은 공들여 만든 티가 물씬 납니다. 여자 탈의실에 출입했던 호리 선생님이 자믈쇠에 열쇠를 꽂은 채 들어가는 버릇을 이용하여, 자물쇠 자체를 통째로 바꿨다는 첫 번째 트릭부터 굉장히 설득력있고 좋은 트릭이었거든요. 특별한 버릇을 이용하고 있다는 약점은 있지만,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좁은 창문으로 볼 때 문을 막고 있어 보였던 빗장은 위장이고, 사실은 양궁 화살로 문을 막고 있었다는 두 번째 트릭도 첫 번째보다는 별로이고 번거롭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처음에 문을 부술 때 빗장이 먼저 떨어졌을텐데, 떨어지는 소리는 어떻게 막았을지와 같은 사소한 의문은 있지만 충분히 현실적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화살은 막 양궁 훈련을 마친 뒤라 화살통에 자연스럽게 넣을 수 있었다는 디테일만큼은 아주 좋았습니다.
이외에도 디테일이 돋보이는 부분은 많으며 무라하시 선생 주머니에 콘돔이 들어있던 이유라던가, 아소 선생이 경찰에 협력한 이유들도 작 중에서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범행 동기가 애매해 보였습니다. 학생 미야사카 에미가 합숙 훈련 중 자위하는 모습을 무라하시, 다케이 선생님에게 들킨게 동기라는데, 과연 살의를 품을 일인지 좀 아리송하거든요. 남학생에게 들켜 협박을 받거나, 소문이 났거나 했더라면 나름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두 명의 교사는 그래도 비밀을 지키고 함구했던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설령 에미는 수치심에 살의를 품었다 치더라도, 친구 게이코까지 직접 공범으로 나서서 살인을 저지를 타당한 이유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바꿔치기된 다케이 선생이 사실은 진짜 타겟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바꿔치기에 마에시마가 동의하지 않아서 그대로 피에로 역할을 했다면 어쩔 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외에 마에시마를 노리는 걸로 보였던 공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마에시마는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았던걸까요?
이런 점들 때문에 두 소녀가 선생들에게 품은 살의는 진정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도 복수가 중요하다면, 그건 그냥 살인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술 취한 피에로 연기를 한다고 소품인 술병 속 물을 마신다는 보장도 없지요. 저라면 절대 마시지 않았을 겁니다.

아내 유미코와 사이가 벌어진걸 드러내다가, 마지막 마에시마를 칼로 찌르는 범행을 유미코와 불륜남이 저질렀다는 결말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앞서 아이와 유산 문제, 그리고 마에시마를 유혹하는 여학생들에 대한 묘사로 부부는 이미 거리가 멀어졌다는걸 독자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외성이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또 경찰이 왜 이 때는 마에시마를 경호(?)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요. 어차피 범행도 어설퍼서 경찰 수사로 진범은 쉽게 드러날 수 있어 보였습니다. 마에시마도 그걸 직감했기에, 이대로 죽어서 유미코를 살인범으로 만들면 안된다고 발버둥쳤을테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청춘 학원 본격 추리물로는 나무랄데 없는 수작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국내 번역본 표지는 스포일러네요. 범인과 핵심 트릭에 사용된 도구(?)를 드러내는 그림이거든요. 읽어봐야 알 수 있기는 하지만...

2020/10/25

목사관의 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 김지현 : 별점 2점

목사관의 살인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지현 옮김/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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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팍하고 성미 급한 성격을 가진 프로더로 대령은 조용한 마을 세인트 메리 미드의 골칫거리였다. 그의 딸이 수영복 차림으로 화가의 모델이 된 일로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던 대령을 보고, 교구 목사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누군가 프로더로 대령을 죽인다면, 세상에 더없이 이로운 일을 하게 되는 셈일 거야." 예언이 들어맞은 것처럼 며칠 후 총에 맞아 사망한 대령의 시신이 목사관 연구실에서 발견되는데... (출판사 소개 책 소개 인용)

추리소설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이 쓴 미스 마플 시리즈 첫 장편이기 때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이 부여한 별점은 3점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나오지도 않고, 두드러지게 괴상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 무대가 특색이 있지도 않은 후더닛 물이며, 무료한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지요.

그런데 무료하지는 않았어요. 프로더로 대령 살인 사건이라는 핵심 사건 외에도, 고고학자 스톤 박사가 사기꾼 도둑이었고,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르는 귀부인 레스트랭 부인이 프로더로 대령을 협박했었으며, 마을에 소문을 이야기하는걸 즐기는 프라이스 리들리 부인에게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등 여러가지 사건이 곁가지로 잘 배치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다운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취미로 인간의 품성에 대해 연구하고,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에서 연구한 인간 품성을 다른 큰 사건에 대입시킨다는 미스 마플의 추리법이 처음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에서 있었던 자잘한 사건들이 본 사건과 맞아 떨어지는 과정은 기가 막혔습니다. 이런 부분은 후대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는 보기 힘들지요.

그러나 의외로 추리적인 부분이 함량 미달입니다. 미스 마플의 목격 증언 탓이 큽니다. 그녀는 유력한 용의자인 프로더로 부인과 상간남 로렌스 레딩이 각각 화실로 들어가서, 살인 시각에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진범은 둘이었습니다! 먼저 온 로렌스 레딩이 현장 근처에 총을 숨겼고, 뒤이어 나타난 앤 프로더로가 목사관 서재에 앉아있는 남편을 쏜 뒤 화실로 향했다는게 진상이에요. 미스 마플이 직접 '둘은 화실로 바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계속 지켜보았는데 이게 가능했을까요? 가능했다면, 그 이유와 방법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은 덧붙여져 있어야 했습니다. 범행 당시 소음기를 사용했다는걸 대충 넘기는 전개도 영 납득이 가지 않고요.

로렌스 레딩이 벌인 여러가지 공작도 어설픕니다. 우선, 프로더로 대령이 살해당한건 6시 20분 경으로 밝혀집니다. 검시 의견부터가 명확하니까요. 검시의가 용의자 중 한 명이라 검시 의견은 무시한다 쳐도, 7시에 귀가한 클레멘트 목사가 시체를 만졌을 때 이미 차가와져 있었다고 언급했었죠. 즉, 레딩이 애써 만든 메모와 멈춰진 시계를 통한 조작은 별 의미가 없었던 셈입니다.
숲에서 총성이 들리게 만든 조작도 무의미했던건 마찬가지입니다. 미스 마플이 한 증언이 없었다면, 숲에서 총성이 들리건말건 앤 프로더로가 혐의를 벗는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호즈 부목사를 진범처럼 위장하려 한 방법도 억지스럽습니다. 부목사가 황령을 저질렀다고 클레멘트 목사에게 고백하기 전에 그를 처치했어야 했는데 중간 과정이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덧붙이자면, 목사라는 직업이 정말로 '성직'이라는걸 느꼈습니다. 세인트 메리 미드에는 혐오스러운 인간들이 너무 많이 살거든요. 이들과 어울리며 사는건 정말로 힘든 일로 보였어요. 부목사 호즈가 헌금을 횡령할 생각을 한건 무리가 아닙니다. 그는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2020/10/24

명작순례 - 유홍준 : 별점 5점

명작순례 - 10점
유홍준 지음/눌와

우리 옛 그림, 글씨와 궁중미술 중 주목할만한 일품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림이 책의 중심으로 총 32점이 조선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설명되며, 뒤이어 글씨 9점과 궁중미술 8점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그림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 및 작가 관련 일화, 그림이 그려진 상황 및 시대 배경 등도 함께 평가하고 소개해주고 있지요.

제일 큰 장점은 시각적인 만족감, 그리고 읽기 쉽다는 점이었습니다. 시각적인 만족감은 도판이 화려하고 인쇄질이 좋은 덕입니다. 읽기 쉬운건 유홍준 교수의 쉽고 편안한 글 솜씨와 짤막한 분량 덕이고요. 이야기 한 편 당 4~5페이지 분량밖에 안 되거든요. 하루에 조금씩 읽다보니 금방 읽게 되더라고요. 시대별로 대표작가와 대표작들이 소개되는, 일종의 연대기 식 구성이라는 점도 좋았습니다. 조선 서화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잘 몰랐던 대가와 작품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요. 수월헌 임희지가 그린 난초, 몽인 정학교가 그린 괴석 그림들은 지금 보아도 가히 일품이라 할 만 하더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오원 장승업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저는 솔직히 조선 문인화가 왜 좋은지 잘 모릅니다. 선비들이 그림을 그리는건, 글씨와 어우러질 때만 뭔가 있어보이지, 그림만 놓고 보았을 때 그 결과물이 대단한 감동을 주는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 속 오원 장승업 소개를 보니, 환재 박규수라는 분 생각이 저와 같더군요. 문인화가 극에 달한 탓에 아마추어리즘이 가득해져버렸다고요. 그래서 추사 이후 주눅들어있던 전문 화원들에게 '직업 화가라면 프로 의식을 찾으라!'고 호소했고,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나타난게 오원 장승업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선비라는 한량들이 얼척없는 그림을 서로 돌려보며 뭔가 있어보이는 듯 자화자찬하던 상황에서, "진짜 프로는 이런거다!"라며 튀어나와 그들을 압살해버린 겁니다. 심지어 장승업은 일자무식이었다고 하는데에도 그림 하나로 당대를 평정했다니 그 실력은 두 말할 필요 없지요. 소개된 "수리"와 "고양이" 그림은 이를 잘 증명해주는 걸작이었습니다.
또 16세기 함경도 기생 홍랑이 임과 헤어지면서 쓴, 아주 오래전 교과서에서 보았던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라는 시조를 직접 한글로 쓴 '절유시'는 글씨가 너무 예뻐서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 시조가 아직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만약 수록되어 있다면, 홍랑이 직접 쓴 이 서예 작품도 함께 실어주면 참 좋을 듯 합니다. 학생들에게 우리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려줄 수 있을거에요.

물론 새로운 내용, 작품, 작가만 소개된건 아닙니다. 당연히 신사임당,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 등등 일찌기 잘 알고 있던 대가와 명작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지요. 조선 서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가와 작품들이라 어쩔 수 없었을거에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좋은 책입니다. 편집과 디자인도 완벽한 수준이고요. 이런 책을 소장하지 않으면 무슨 책을 소장하겠습니까.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제가 구입한 책은 2013년 초판 2쇄 버젼인데, 지금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시리즈 두번째 권으로 표지까지 바뀌어서 재출간되었네요. 제가 예전에 구입했던 "국보순례"도 이 시리즈에 포함되어 재출간되었고요. 이럴거면 처음부터 시리즈로 출간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가격을 올리려는 꼼수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2020/10/23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검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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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요시키 다케시에게 이혼한 전처 가노 미치코로부터 5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함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우에노를 찾아 유즈루 9호에 탄 미치코를 창 밖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오모리에 정차한 유즈루 9호에서 젊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휴가를 내어 아오모리 경찰서를 찾은 요시키는 피해자가 미치코는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미치코가 걱정된 탓에 그녀가 이혼 후 머물렀던 홋카이도 구시로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라는걸 알게 되는데....

시마다 소지가 쓴 요시키 형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본격 미스테리 100선에도 선정되어 있습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는 이전에 딱 한 작품만 읽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전형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보다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탐정이라 느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키 형사의 인간적인 매력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돈이나 지적 만족감 따위는 필요없이, 사랑하는 전처가 무죄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 사랑꾼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도 그녀를 구하는 모습은 슈퍼 히어로를 연상시킵니다.

범인들이 미치코 집 안에 시체 두 구를 옮겨 놓는 순간 이동 트릭도 괜찮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미치코 집과 범행 현장인 범인들 자택 사이의 건물 옥상에 로프를 매달아 만든, 일종의 커다란 그네(진자)를 이용하여 시체를 옮긴 겁니다. 시체에 갑옷을 입혀 진자 운동을 시키면, 반대쪽 정점에 오면 속도는 0이 됩니다. 그러면 회수는 가능했을테니 나름 '과학적'이지요.
가면 무사가 유령처럼 사진이 찍힌 이유도 이 진자 운동 트릭과 맞물려 '과학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관리인실 뒷 창을 막 지나게 되어 사진에 찍힌 겁니다. 발상만큼은 정말 기가 막혀요.
이 때 로프가 난간에 부딛혀 나는 소리를 현장에 있었던 '밤에 우는 돌' 전설과 연결시키고, 시체가 벽에 부딛혀도 괜찮도록 시체에 갑옷을 입힌걸 '가면 무사' 유령 전설과 엮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민속 탐정 야쿠모" 속 베스트 에피소드에 뒤지지 않을 정도에요. 그만큼 전설이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본격 추리 100선에 꼽힐만 합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대부분이 갖춘 특징인 여정 미스터리 성격도 잘 드러납니다. 도쿄에서 아오모리로, 아오모리에서 배를 타고 하코다테로,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를 타고 삿포로로, 삿포로에서 기차로 구시로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구시로 범화가인 기타오도리 외길 및 구시로를 포함한 각 지역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트릭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맞은편 건물까지, 개천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으니 약 10m 떨어져 있다고 칩시다. 1층 관리인실 창문을 지날 정도면 5층 높이이니 거의 비슷하겠죠. 후지쿠라 레이코가 시체를 놓쳤을 때 회수를 쉽게 하려고 로프를 한 번 더 연장했다니 두 배, 그러니까 최소 20m는 되는 긴 로프가 필요합니다. 현장도 두 곳이라 두 군데에 걸쳐 설치해야 하고요. 그런데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로프를 잘 설치하고, 회수한 방법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10m 로프에 매달린건 갑옷 입은 시체입니다. 50kg 이라고 할 때,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엄청났을 겁니다. 특히 중심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요. 이 속도로 가운데 건물에 충돌했다면? 갑옷을 입었다고 시체가 무사할리 없습니다. 그 소리를 관리인 등이 들었을게 뻔하고요. 한마디로,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성공했을 뿐입니다. 설득력은 무척 낮아 보여요. 최소한 건물에 로프를 걸 부분이 튀어나와 있었다는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진범인 후지쿠라 이치로, 지로 형제에 대한 묘사도 아쉽습니다. 이런 고급 트릭(?)을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실수가 많은 탓입니다. 유쾌한 모습을 요시키 형사에게 들키는 첫 등장부터 실수에요. 레이코가 실종되었다는건 미치코를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살아서 증언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는건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의심한 요시키 형사를 습격해서 중상을 입힌건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입니다. 용의선상에 있지도 않은데 도쿄 경시청 수사 1과 형사를 습격해서 폭행한다?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요시키 형사가 살아만 있다면 중상을 입건 말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황상 요시키 형사를 습격한건 그들 형제가 분명하니까요. 두 형제와 요시키 형사의 다툼을 카페 아르바이트와 손님들이 목격하기도 했고요. 즉, 살인 혐의가 아니더라도 요시키 형사 폭행 혐의로 충분히 수사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자기 무덤을 판 셈이에요.

나중에 직접 미치코를 살해하려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어설퍼요. 원래 계획대로 미치코를 자살한 걸로 위장해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미치코는 살아서 누군가의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난게 목격되었습니다.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 '화이트'에 전화를 건 뒤, 카페에서 보낸 차를 타고 떠났다는 것도 호텔에서 증언해 줄 수 있고요. 그런데 이 뒤에 호수에서 미치코 목을 졸라 죽인다? 바로 체포될 겁니다. 설령 경찰이 호수에 빠트린 미치코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요. 정황이 너무 확실하니까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습격과 미치코 살인 미수 당시에는 별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는 행동에서도 고급 트릭을 고안하고 실행한 두뇌파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있습니다. 이래서야 요시키 형사 상대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죠.

그 외에도, 게이코가 미치코 집에 들어간건 관리인에게 안 들켰고 열쇠도 복제해 놓았을 뿐이라던가, 미치코가 어린 시절 형제에게 지은 죄로 살인 공작에 끌려 들어갔다던가 하는건 모두 작가 편의에 따른 전개에 불과해 보입니다.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미치코가 형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죄의식이 있었다면, 형제가 거창하게 장치를 마련해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없습니다. 최소한 미치코 돈부터 빼앗는게 순서죠.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요시키가 중상을 입고, 추리에 시간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요. 특히 시간 제한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미치코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도 공식 재판까지 시간을 두고 추리해도 되니까요. 구태여 영장 발부 전으로 시간을 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영장이 발부된다고 다 전과자가 되는게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지만 단점도 명확한, 전형적인 신본격 추리물입니다. 선뜻 권해드릴 정도는 아니지만, 본격물 팬이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습니다.

2020/10/18

마쓰모토 이즈미 별세

제 청춘 시절 한 자락을 채워주셨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더 이상 아프지 말고 편히 쉬시길. 

R.I.P

Kimagure Orange Road! (변덕쟁이 오렌지 로드)

리셋 - 기타무라 가오루 / 고주영 : 별점 2점

리셋 - 4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황매(푸른바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5년, 전쟁 막바지에 아버지 요양차 지방 친척집으로 향하게 된 중학생 마스미는, 호감이 있던 슈이치에게 직접 만든 선물을 전해주고 작별을 고했다. 슈이치와 마음이 통한걸 느꼈지만, 슈이치는 폭격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린이 책을 만드는 직장인이 된 마스미는 초등학교 졸업반 무라카미와 친해졌다. 그리고 그가 슈이치의 환생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일상계 미스터리인 '엔시 씨와 나'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의 '시간과 사람' 3부작 중 한 편입니다. 예전 미스테리아 8호에 수록되었던 요네자와 호노부 특집에서 요네자와 호노부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았던 책입니다. 기타무라 가오루를 좋아하기도 하고, 요네자와 호노부 역시 좋아하는 작가라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품 장르는 생각과는 다르게 윤회전생 멜로물이더군요. 특이한건 핵심인 윤회전생이 초능력이나 특정 장치, 장소와 같은 방법이라던가, 우연한 자연 현상이나 사고와 같은 계기가 없는, 그야말로 단순한 윤회전생이라는 점이고요. 다시 태어난 연인이 원래의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도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 부분들에서 약간이나마 추리적 요소를 기대했지만 찾아보기 힘들어요. 

내용도 윤회전생 멜로물이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수천 수만가지 비슷한 콘텐츠와 비슷합니다. 어린 중학생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만, 남자가 전쟁통에 폭격으로 죽고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채 직장인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환생하여 중학생이 된 남자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여자는 사고로 죽고 다시 환생한다, 그리고 다시 만나 결혼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도 차별화 요소를 찾아 본다면, 우선 슈이치가 마스미가 만나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교감한게 '2차 대전'이라는건 독특했습니다. 마스미와 주변 지인들 모두 유복한 가정이고, 사는 동네도 부촌이라는 설정이라 2차 대전에서 일본이 극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유있고, 공포와 두려움은 찾아보기 힘든 묘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무대로 한 작품들 중에서는 돋보일 정도로 색다른 분위기였어요. 이런 분위기는 작 중, 공습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커피에 설탕을 곁들여 먹는다는 묘사라던가, 마스미 지인 중에서 전쟁 때문에 죽는건 슈이치 말고는 징집된 친구 유코 오빠 밖에는 없다는 걸로 잘 드러닙니다. 

그리고 1, 2부 구성으로 1부는 마스미, 2부는 환생한 슈이치인 무라카미 가즈히코 시점으로 전개된다는건 다른 윤회전생이라 시공간 초월 멜로물과 유사하지만, 성인, 아니 중년 이상 나이가 된 무라카미가 자신이 어린 시절 썼던 일기를 토대로 자식들에게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한다는 2부 구성은 색다른 맛이 있더군요. 당대 분위기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압권이었고요. 아마 저자 본인이 1949년 생이라 직접 경험해 보았던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마스미와 슈이치가 공유했던 기억이, 슈이치가 환생한 무라카미와 마스미, 그리고 무라카미와 마스미가 환생한 마이코가 서로 인연임을 공유하는 방아쇠 중 하나가 ''책" 이라는게 가장 독특하면서도, 마음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이야기 서두에서 갓 알게된 마스미에게 슈이치는 사펠 여사가 쓴 "사랑의 가족"이라는 책을 빌려 줍니다. '사자 자리 유성균'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한 게 이유였지요. 그리고 성장하여 중학생이 된 뒤, 전쟁 탓에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는 마스미에게 슈이치는 기노시타 유지가 쓴 시집 "전원의 식탁"을 빌려 줍니다. 두랄루민이 비행기 제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두랄루민이 언급된 시가 있는 시집을 빌려준 겁니다. 그리고 그 시집에는 '텐 예다 프뤼링 핫 누아 아이넨 마이'라는 슈이치가 쓴 메모가 꽂혀 있었습니다. "춤추는 회의"라는 독일 영화 속 주제가로 '그래도 5월은 한 번 밖에 오지 않겠지'라는 뜻이었습니다. 5월이 생일인 마스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함께 담아 전하는, 애틋한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슈이치가 환생한 무라카미에게 마스미는 기노시타 유지가 쓴 "아동 시집"을, 그 뒤 무라카미가 입원했을 때 "사랑의 가족"을 빌려줍니다. 마지막에 무라카미 가즈히코와 마스미가 환생한 마치코가 만나게 된 건, '텐 예다 프뤼링...'을 무라카미가 부르다가, 그 노래에 마치코가 가능하여 달려나온게 인연이 되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책들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으며, 사소한 단서들을 쌓아 올려 환생과 재회에 이용한건 추리 작가다운 솜씨라 생각되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건 어쩔 수 없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2001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2020/10/16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미나가와 히로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런던, 해부학 교실을 운영하는 외과의사 대니얼 버턴의 연구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사지가 잘린 소년과 얼굴이 짓뭉개진 중년 남자였다.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은 부하들과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섰다. 대니얼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사체로 발견된 소년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를 위해 사체를 훼손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소년과 중년 남자 해링턴을 죽인 범인으로 대니얼 버턴의 형인 로버트 버턴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데...

"죽음의 샘"으로 잘 알려진 여류 작가 미나가와 히로코의 대장편입니다. 제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허구추리"와 공동 수상했다지요. 사실 이 상의 권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검증된 '본격 추리물' 임에는 분명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영국 해부학 교실이 무대인 역사 추리 소설로 해부학 교실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전개와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목부터 해부학 교실을 위해 몸을 열게 해 준 시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무대가 이러하니 당연히 시체가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해부학 교실에서 기묘한 사체 두 구가 발견된 사건입니다. 손과 발이 토막나 사라져 있던 첫 번째 사체는 가난한 소년 네이선, 얼굴이 뭉개져 있던 두 번째 사체는 퍼블릭 저널 사장이자 대중을 선동하는 선동가 해링턴으로 밝혀집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치안판사 존 필딩에게 대니얼 버턴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사체를 훼손했다고 고백합니다. 네이선이 자살한걸 발견한 뒤, 자살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거라 여겨 상흔이 있던 손을 떼어냈다는 거지요. 손만 떼어내면 이상하니 발까지 떼어 은닉했던 겁니다.
해링턴 사체는 해부학 교실 제자들도 몰랐다고 하는데, 존 필딩은 백년도 더 전에 사용했던 '루퍼트 왕자의 난로' 구조를 이용하여 은닉한 상황을 보고 난로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추리하죠. 그래서 해부학 교실 관계자 외에 유일하게 난로 구조를 알고 있을 저택 주인 로버트 버턴이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이자 사기꾼 가이 에번스가 치안판사 부하들 눈 앞 밀실에서 살해되는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번스가 있는 방으로 로버트 버턴이 들어간게 목격되었지만, 그는 사라지고 에번스의 시체만 발견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침대에 걸려있더 천을 이용하여 옆 방으로 탈출한 걸로 드러나고요. 그런데 에드워드가 이 사건은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합니다. 네이선을 이용하고 괴롭힌 에번스에 대한 복수라면서요. 그러나 만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네이선을 위해 에드워드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여러모로 석연치 않지요. 여러모로 로버트 버턴이 범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로버트는 에번스에게 사기를 당해 거액을 빚지고 있었고, 에번스가 계획한 사기를 돕기 위해 해링턴까지 살해했다는걸로 밝혀지니까요. 토마스 해링턴은 네이선이 가지고 있는 고문서 작성 능력을 알고 있어서 입막음을 위해 죽인겁니다.

뒤 이어 로버트 버턴이 에번스 자택에서 불에 타 죽은 채로 발견된 세 번째 사건으로 연쇄 살인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에드워드가 자백한건, 궁지에 몰린 로버트에게 해부학 교실과 교실이 보유한 여러가지 표본, 즉 대니얼 버턴의 가진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를 쓰게 만드려는 계획으로 밝혀집니다. 즉, 모든 사건은 로버트 버턴이 저질렀고 결국 채무 관련 문서를 불태우려다가 죽은 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진범은 에드워드와 나이절이었습니다. 대니얼 버턴이 발견한 내용, 표본 등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던 로버트 버턴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가이 에번스에게서 네이선이 탈출해 찾아온걸 계기로 이 모든걸 꾸민겁니다.
둘은 우선 변장하여 가이 에번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로버트 버턴을 불러 궁지에 몰리게 한 뒤, 탈출시켜 각서를 쓰게 만들고 살해합니다. 대담하게 치안판사 수사 중에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당시 런던에서는 누군가가 고소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는걸 이용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이 두 사건, 즉 가이 에번스가 로버트 버턴의 살해에 대한 재판이 열리지 않을걸로 판단했거든요. 예상대로 에반스에게는 상속인이 없었고, 로버트는 저지른 범죄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탓에 미망인은 소송을 포기하지요. 

그러나 치안판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도 두 사건에 대한 재판은 포기하지만, 네이선 어머니의 고발을 통해 네이선 사건 실행범으로 둘을 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는 성공하니까요. 네이선이 남긴 유서와 옷의 잉크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걸 단서로 둘이 궁극적으로 로버트를 살해하려고 네이선을 먼저 죽였다고 추리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네이선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지며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달리 구입한 사체를 네이선으로 꾸몄던게 진상입니다.

이렇게 사건도 많고, 토막 시체와 밀실 살인 등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으며, 진짜 네이선이 살아있있다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까지 괜찮아서 추리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격 추리물답게 탐정 역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도 거의 공정합니다. 독자는 존 필딩과 판사와 같은 수중에서 추리를 전개할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도 납득이 가네요. 

아울러 디테일하게 그려낸 18세기 런던에 대한 묘사가 아주 빼어납니다. 여기에 더해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해서 설득력도 배가됩니다. 당시 재판 방식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부분도 인상적이고요. 일본 작가가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소설을 쓰면 당연히 엉망일거라고 생각한 제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줍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죽음의 샘"보다 훨씬 낫더군요.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도 눈에 뜨입니다. 범행 동기가 그 중 첫번째에요.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네이선과 사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를 위해 사람을 죽어가며 복수를 한다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석연치 않지요.
게다가 로버트 버턴에 대해 복수심과 살의를 품고 범행을 저지른건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가 대니얼의 성과와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한다 한 들, 그건 두 형제의 문제이지 제자들의 문제는 아닙니다. 소중한 해부학 교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사명감이나 연대 의식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나지 있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로버트가 대니얼의 재산을 포기하게 만들려면, 구태여 에번스를 죽일 필요도 없었어요. 일레인 양 사건과 토머스 해링턴 사건으로 협박만 하면 충분했을 테니까요. 

가이 에번스와 네이선이 얽힌 과거사 이야기는 함께 전개되어 독자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반면, 로버트에게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가 에번스가 엮여 거액의 손해를 보고 해링턴은 죽이는 과정, 그리고 에번스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뒤 에드워드 방 옷장 안에서 에드워드가 각서의 댓가로 범행을 고백하는걸 엿듣는 장면 정도는 로버트 시점에서 묘사해 주었어도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일레인 양을 임신시킨 뒤 살해한 사건도 곁가지로 나오기 보다는, 로버트를 악인으로 확실히 부각시킬 수 있도록 그 진상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테고요. 

에드워드 본인의 복수심과 때문에 재판이 엉망이라는걸 대중 앞에 선보이려고 일부러 재판에 회부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는 정말이지 작위적인, 그야말로 반전을 위한 전개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변장해서 밤문화(?)를 즐기는 인물이라는 설정은 설명도 부족하고, 등장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더군요. 여장 후에는 그 바닥에서 요정 여왕(?) 이라고 불리우는 나이절이 자기 매력을 이용하여 치안판사의 부하인 데니스 애벗마저 유혹해 정보를 빼돌린다는 등 억지스럽기만 할 뿐이었어요. 안 나와도 됐을 듯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 측면에서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충분하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애호가 분들 중에서도 역사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10/11

개의 힘 1,2 - 돈 윈슬로 / 김경숙 : 별점 2.5점

개의 힘 1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개의 힘 2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 윈슬로의 대장편 범죄 소설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 해외편 무려 2위로 선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두던 책입니다. 하지만 1, 2권 합쳐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기가 죽어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추석 연휴 집콕 동안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읽히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약 단속 국장 아트 켈러,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파트론 아단 바레라의 20여년에 걸친 악연과 대결을 그리는데, 실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각색했습니다. 여러 카르텔, 여러 보스가 얽힌 이야기를 바레라 가족 중심으로 풀어내었을 뿐입니다.

우선 작품 내에서 콘도르 작전 당시 마리화나 재배지가 초토화되고, 당시 보스였던 돈 페드로의 사망, 뒤이어 티오 미겔 앙헬 바레라가 사업을 코카인 운송으로 바꾸며 조직 보스인 파트론이 되면서 조직을 3개로 나누는 건, 실제로 시날로아 카르텔이 아마도를 보스로 하는 후아레스 카르텔, 아레나요가 보스인 티후아나 카르텔, 그리고 엘차포가 보스인 시날로아 카르텔로 분리된 역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여기에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이 생산한 코카인 유통을 도맡게 된 걸프 카르텔이 급성장하여 4대 조직이 되는데, 작품에서는 티오의 조카 아단 바레라가 지능적인 코카인 유통 혁신을 통해 카르텔 실권을 손에 쥐는 모습으로 그려지고요. 1985년 미국 요원 키키 카마레나 고문 살해 사건도 작품 안에서 어니 요원이 납치되어 고문받다가 살해되는 이야기로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아단, 라울 바레라 형제와 게로 멘데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항쟁은 시날로아 카르텔 보스 엘차포와 티후아나 카르텔 보스 아레나요 형제 간에 실제로 벌어졌던 전쟁을 거의 그대로 따 왔습니다. 대표적인게 아레나요 형제가 잘생긴 킬러 클라벨을 시켜서 시날로아 카르텔 2인자 엘구에로의 아내 레이하를 유혹하게 만든 겁니다. 레이하는 유혹에 넘어가 클라벨, 어린 아들, 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클라벨에게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그 뒤 엘구에로는 레이하의 목과 아들, 딸이 다리에서 내던져지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받게 되지요.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만 바뀐 채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아단 바레라가 사주한 킬러 파비안이 게로 멘데스의 아내 필라르를 유혹한 뒤 그녀와 아이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로요.

작품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후안 신부 살해 사건 - 공항에서 바레라에게 살해당하지만, 바레라와 게로 멘데스간 전쟁에 휘말려 죽은걸로 처리되는 - 도 아레나요 형제와 엘차포 간 총격전에서 티후아나 대교구장 포사다스 오캄포 추기경이 휘말려 사살된 사건과 똑같습니다. 작품에서는 후안 신부가 멕시코 정부와 여러 관계자가 마약 조직과 관계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살해된 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실제로 오캄포 추기경 역시 티후아나 카르텔과 살리나스 대통령간 결탁에 대해 폭로하려다 살해된 걸로 알려졌지요. 게로 멘데스가 성형 수술을 받고 모습을 바꾸어 재기하려다가 아단 바레라 측 킬러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도, 후아레스 카르텔 보스 아마도가 1997년 성형수슬을 받다가 사망한 역사를 따 온 듯 하고요.

NAFTA 이후 멕시코 경제가 파탄나고, 마약 사범들이 나라를 거덜내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실제 카르텔간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엘차포는 체포된 뒤 멕시코 감옥에서 7년여간 편안하게 수감생활을 하다가 탈옥했다는 정도입니다. 작품에서 아단 바레라는 미국 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연방 감옥에서 복역하는 결말이거든요.
그 외의 모든 디테일들, 예를 들어 은이냐 납이냐, 코카 콜라냐 펩시 콜라냐와 같은 협박 문구라던가, 마약 수송용 지하 땅굴, 대형 여객기 수송 등도 모두 실제 조직 이야기에서 따 왔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렇게 실제 마약 카르텔 이야기를 극화했기 때문에 설득력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럴거면 아트 켈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구태여 소설로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마약 전쟁 이야기 외의 이야기는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바레라를 뒤쫓는 아트 켈러 이야기만 해도 간단한 도청, 정보원에 의지할 뿐이고 기껏 티오와 아단을 체포해봤자 모두들 기가 막히게 빠져나가는 탓에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니까요.
또 소설로 만들면서 추가된 요소들도 거의 대부분 지루하고 뻔합니다. 이런 마약 전쟁의 뒷 배경에 중남미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걸 경계한 미국의 자금 투입과 원조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그랬으리라 짐작되는 설득력있는 설정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식상하지요. '케르베로스'. '레드 미스트' 운운하며 뭔가 있어보이게끔 노력은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 흔히 보아왔던, 미국이 돈을 주고 키워낸 용병단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CIA 국장 존 홉스가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은폐하려고 난리를 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미국은 이미 그 이상의 추문을 수도 없이 들켰잖아요.
또 이 설정이 사실이라면, 아단 바레라가 콜롬비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댓가로 마약을 손에 넣으려는건, 파멸의 지름길에 발을 담근 셈입니다. 구태여 들쑤셔서 체포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울러 어차피 미국이 돈을 대지 않아도, 바레라 가문이 멸족해 버려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누군가 권력을 잡고 마약을 여전히 유통할 겁니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요. 흑막이니, 음모니 하는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후안 신부와 유일하게 정의로운 멕시코 폭력 경찰 라모스 정도만 독특함과 생생함이 느껴질 뿐,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며 단순한 탓입니다. 특히 실제 인물을 따오지 않은 창작 캐릭터들 문제가 심각해요. 고급 매춘부 노라를 한 번 볼까요? 그녀는 멕시코 대 지진 때 '우연히' 알게 된 후안 신부와 친분을 맺습니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아단의 정부가 되는데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된 뒤, 여러가지 정보를 아트에게 제공한다는 설정입니다. 아단이 노라에게서 푹 빠져서 온갖 사업상 기밀을 전해주고, 심지어 사업 이야기에 동참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노라 설정에만도 우연이 여러개 겹쳐있지만, 티오와 게로 멘데스, 아단 바레라 모두 여자에게 푹 빠져서 파멸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일랜드 낭만 킬러 칼란도 한 번 볼까요? 그는 우연히 킬러가 된 뒤, 멕시코에서 아단의 목숨을 '우연히' 구해주고, 아단과 게로 멘데스 전쟁에 끼어들어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되는걸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 뒤 '우연히' 받은 청부로 정보원이 된 노라를 보호하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에요. 마지막에는 아트를 죽이는 킬러로 고용되었다가 노라의 진심을 알고 고용주들을 쓸어버리고요. 이렇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거라면 솔직히 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게다가 칼란도 그렇고, 엘 티부론 파비안도 그렇고, 청소년 때 이미 타고난 킬러라는게 증명되었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수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애송이들인데 말이지요.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어야 할 아트 켈러도 이런 류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마약 전쟁에 대한 사명감으로 가족을 저버리고 일에 몰두한다는 설정인데, 별다른 매력이나 특이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노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정도만이 의외였어요. CIA 국장 존 홉스와 그의 오른팔인 인간 백정 군인 살 스카키 이런 작품에 나오는 악덕 CIA 국장과 그 부하와 전혀 다를 바 없어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지만 실화에 끼얹은 부분이 대부분 기대 이하, 함량 미달이라는 감점합니다. 흔하디 흔한 미국 음모론과 헐리우드식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각에 존재하는 높은 평가를 이해하기는 힘드네요. 이 작품보다 실화 논픽션이 훨씬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일종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엘차요와 '라 파밀라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돈을 위해 살인하지 않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지만, 죽어 마땅한 놈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만들지만 절대로 마을과 멕시코 내부에는 판매하지 않고 미국에만 판다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기묘한 세력이거든요.

2020/10/10

루팡의 딸 - 요코제키 다이 / 최재호 : 별점 1점

루팡의 딸 - 2점 요코제키 다이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으로 불리우는 수사 1과 형사인 카즈마의 가족은 모두 경찰이며, 심지어 키우는 개 까지 은퇴한 경찰견인 경찰 집안. 그와 교제하는 하나코는 도서관 사서로 위장했지만 가족 모두가 도둑인 도둑 가문의 딸이었다.

카즈마가 결혼을 전제로 하나코를 가족들에게 소개시킨 얼마 뒤, 카즈마와 수사 1과는 한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피해자는 처참하게 구타당해 죽은 고령의 노인으로 얼굴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여러가지 단서로 경찰은 피해자의 신원이 '다테시마 마사오'라는걸 알아냈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하나코 가족은 피해자가 신분을 감춘 할아버지 미쿠모 이와오라는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피해자가 '다테시마 마사오'로 위장한 이와오라는걸 알아내지 못해 사건은 미궁에 빠졌지만, 카즈마는 시체에 남겨져 있었다는 손수건을 단서로 진상을 알아냈다. 이 사건은 50년 전 성폭행 미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성폭행 미수범은 카즈마의 동료 마키 형사의 할아버지 에이스케였다. 이와오에게 쫓기던 에이스케는 손자 마키를 시켜 그를 죽이려 했는데, 마키의 착오로 진짜 다테시마 마사오가 살해되었다. 그래서 이와오와 와이치는 마사오의 죽음을 이용하여 범인을 잡을 계획을 세웠다...

일본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만화적인 설정이 극대화된 작품입니다. 그냥 봐도 "세인트테일"이 바로 떠오르지요. 그래도 카즈마가 하나코를 소개한 날, 그녀가 며느리로 적합한지 아닌지에 대해 가족회의 하는 등 나름 설정을 살린 요소들은 재미있었습니다. 형사인 아버지는 감으로 그녀가 착해서 마음에 든다고 하지만, 과학 수사대 요원인 어머니는 '착하다는 증거'를 요구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설정에 따른 재미는 소소할 뿐, 전개와 내용 모두 지나치게 만화적이고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추리적으로도 건질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와오를 죽인건 누구인가?' 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가기는 하는데, 동기가 말도 안되고 제공되는 단서도 공정하지 못하며, 범인도 급작스럽게 드러나는 탓입니다. 동기는 이와오가 50년 전 성폭행 미수범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성폭행 미수범이 자신의 손자를 시켜 이와오를 살해한 거랍니다. 증거는 이와오가 '범인의 눈을 보면 안다'라는 말 밖에 없는데 무려 50년 전 성폭행 미수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것도 손자를 시켜서? 심지어 손자 마키도 능력있는 형사로 전통있는 경찰 집안 출신이라 나름대로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데 할아버지가 시킨다고 살인을 저지른다? 뭐 하나라도 말이 되는게 있어야지, 이래서야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키가 범인임을 알아채는 과정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마사오를 살해한 마키 형사를 이와오가 쫓다가, 그의 손수건을 훔쳐 마사오의 시체에 남겨 놓은게 가장 큰 증거가 되는데, 손수건을 훔쳐낼 정도로 쫓았다면 지갑을 훔쳐내는 등으로 신원을 밝혀낼 수도 있던거 아닐까요? 왜 손수건을 훔쳐내는 정도로 만족했을까요?
그리고 성폭행 미수범이 마키 에이스케라는걸 안 이상, 이렇게 복잡하게 범인을 밝혀낼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마키 에이스케를 협박(?)하면 될 일이었어요. 

또 손수건에 'M'이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는게 단서라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카즈마는 신원을 감춘 미쿠모 이와오가 자신의 이니셜을 새길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테시마 마사오의 이름도 M으로 시작되니 별로 이상한건 아닙니다. 아울러 손수건에 지문이 남아있다면 모를까 손수건이 마키 형사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도 없고요.

범행을 밝혀내는 카즈마 결혼식에서의 몰래 카메라 생중계 역시 지극히 만화적입니다. 촬영이 가능했다면, 구태여 생중계를 할 이유는 없지요. 이건 하나코와 헤어진 뒤, 충동적으로 선택한 에미리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파토내려는 카즈마의 수작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카즈마는 솔직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으로 이래서야 주인공으로는 실격이지요. 속편에서 에미리에게 처절하게 보복당해도 할 말이 없어요. 

그 외에도 카즈마가 하나코가 도둑 집안의 딸이라는걸 알게 되는 과정, 카즈마가 단 며칠 사이에 수십년 전 부터 활약해 왔던 천재 강도단 L을 사로잡을 증거를 모은다는 전개 등 모두가 작위적이며 어설프고, 만화적입니다.
 또 아무리 나쁜 사람들 물건만 훔치고 라며 포장하고 있지만, 도둑은 분명한 악당인데도 우리 편인양 포장이 가능한지도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반에 중국 강도단이 보석상을 턴 뒤, 그 강도단을 미쿠모 가족이 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간 과정이 하나 끼어 있을 뿐 보석상을 턴건 마찬가지잖아요? 할아버지 이와오가 죽은 걸로 알고 있는 가족이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와 희희낙락하는 묘사도 이해가 잘 안되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입니다. 세세한 묘사는 전부 들어내고 캐릭터에 집중한 빠른 호흡과 전개 덕분에 읽기는 편했지만, 그 외에 건질건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읽어 볼 가치는 전무합니다. 작가가 쓴 다른 작품들도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군요.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10/03

시계와 문명 -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 최파일 : 별점 3점

시계와 문명 - 6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미지북스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라는 부제의 미시사, 문화사 서적인데 이전 "해상 시계"에서 느꼈던 지적인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책으로 기대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좋았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의 개발이 시작된건, 도시 문화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는 도입부부터 흥미롭습니다. '종'을 울리는게 굉장히 중요했었던 당시 시대 문화가 결국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로 이어져, 그 결과 도시와 수도원에 '시계탑'이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흐름인데 굉장히 그럴싸합니다. "노틀담의 꼽추"도 종을 치는게 주 업무였잖아요? 이를 정확한 기계로 대치하고자 한 건 풍차 등으로 기계적인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당시 분위기와 충분히 맞아 떨어지고요. 도시마다 경쟁적으로 '아름다운', 혹은 '놀랍고 기묘한' 시계를 장치하고자 한 것도 국가의 발전보다 '도시'의 발전이 더 에너지가 넘쳤던 시대 상황에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16세기를 지나면서 '수공업자' 들 중 시계공이라는 직업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이들은 대장장이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계가 가정용, 휴대용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독자적인 직업군을 이루게 되었다는, 시계공이라는 직업 자체의 역사적 흐름도 재미있습니다. 여러 도시들이 시계 산업을 시작하지만 결국 시계 산업을 주도한 곳은 영국과 파리, 그리고 제네바였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계 산업은 '시계공의 유입'과 관계가 깊었다네요. 제네바의 경우는 종교 개혁으로 특정 시기에 전 유럽에서 많은 시계공 유입이 벌어졌고, 영국 런던도 마찬가지로 외국 이주 숙련공이 정착한게 시계 산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거든요. 특정 직업군 장인들이 모여 산업을 일으키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만은 종교 개혁 당시 시계공이 유출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불사조처럼 부활하여 18세기에는 시계 산업 세 축의 하나가 되었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데, 이유가 무척 궁금해집니다.

시계 자체의 역사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최초 '탈진기'에서 시작된 기계식 시계가 언제 조절장치로 폴리옷 대신 진자를 도입하였으며, 그래서 어떻게 고정밀 기기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짚어주는 덕분입니다. 관련된 도판, 부록에서 설명해주는 시계의 원리와 진화 과정, 주석도 모두 완벽한 수준이고요.

이렇게 앞 부분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시계 발전 과정 설명을 마친 뒤, 동양, 특히 중국에 기계식 시계가 도입된 과정을 설명해주는데 이 역시 아주 재미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유럽의 시계사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서양과 양산된 생산물의 수준에서 전혀 뒤지지 않았던 중국이 왜 시계, 그리고 총기류는 자체 개발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중국의 정치 및 관료 체제가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수공업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무역이 가능했던 대도시 외 대부분 지역 주민들은 외부와 고립되어 서양 신문물에 대해 알지 못했다' 등 여러가지 이유를 드는데 결론은 '중국이 유럽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는걸 당연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라는 겁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좀 허무하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히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높은 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프롤로그와 주석을 제외하면 100여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라는 겁니다.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담고 있는 내용도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뿐 입니다.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주석도 미주가 아니라 각주로 표기해서 본문 분량을 풍성하게, 깊이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고요.

그래도 재미있게, 흥미롭게 읽은건 분명한 만큼 별점은 3점입니다. 이런 류의 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10/02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신일본 항공 승무원인 하야세 에이코를 탐정으로 내세운 시리즈이지요. 에이코는 통칭 A코로 불리우는, 도쿄 대학을 중퇴하고 입사하여 훈련생 수석까지 차지한 재원으로, 마른 몸매의 고전적 외모의 미녀이기까지 하지요. 그녀가 겨우 합격하고 훈련생에서도 꼴찌인 동기 후지 마미코(통칭 B코)와 콤비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구태여 승무원이 주인공일 필요는 딱히 없어요. 승무원 설정을 살린 이야기가 한 편 정도? 때문에 버블 시대에 승무원 관련 컨텐츠 유행에 편승한 설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B코 역시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추리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민폐만 끼칠 뿐이니까요. 사실 등장할 때 마다 짜증만 날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이야기는 많이 없어요. 무리한 설정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K호텔 살인의 밤" 

가고시마로의 비행 후 언제나처럼 바 '와이키키'에 모여 한 잔 하던 승무원들 모임에 그날 승객이었던 혼마가 동석했는데, 마침 그 때 혼마 아내의 전화가 걸려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그녀의 호텔 방으로 샌드위치를 배달하는건 호텔에 있던 B코가 목격했다. 4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새벽 1시 경 호텔로 돌아간 그들은, 혼마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때 A코의 눈에 들어온건, 혼마 씨 부인 시체가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도가 구태여 트윈룸에 침입할리 없으며(두 명이 있을 수 있으니), 오토록으로 잠긴 문을 돌파할 방법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나 알리바이 공작임을 알아챌 수 있는 술자리 설정을 더하면 범인이 혼마 씨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이렇게 범인이 뻔하기에, 트릭이 중요합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트릭은 단순한 변장 트릭이라 시시합니다. 배달된 샌드위치를 받았던 건 변장한 조카였거든요. 둘은 자신들의 유산을 혼마 씨 부인이 멋대로 주식에 투자해서 큰 손해를 보자, 의기투합하여 살인을 공모했던 겁니다. 간단하고 현실적이기는 한데, 재미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나마 사체 부검 결과 위장 속에 있었던, 먹은지 30분 정도 지난 샌드위치는 배달 전에 따로 구입한걸 혼마 씨가 부인에게 먼저 먹였다는 조금 고심한 트릭이 곁들여져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새롭거나 기발한 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추리를 경찰이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카가 피해자로 변장했다는걸 밝혀내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혼마 씨가 따로 샌드위치를 샀다는걸 결정적 증거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이건 단순한 정황증거일 뿐입니다. 혼마 씨 조카의 지문이 피해자 방에서 나왔다면 모를까, 증거가 샌드위치가 전부라면 무죄 판결을 받는게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실물에 유의하세요" 

베이비 투어에 참가했던 25쌍의 가족이 탑승했던 비행이 끝난 뒤, B코는 실내를 정리하다가 남겨진 아기를 발견했다. 서둘러 베이비 투어 일행을 찾았지만 아이는 25명이 모두 있었다. 아이는 누구이며, 왜 혼자 남겨져 있었을까? 결국 사건은 방송을 타게 되는데, 다행히 교토에 사는 아기 엄마가 나타난다. 아기는 엄마와 함께 산책 중 실종되었었다...

A코는 베이비 투어 일행이 교토에서 그 공원에 들렸던 걸 알아낸 뒤, 참석했던 부부 중 누군가가 자기들 아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남의 아기를 착각해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에요.

그래도 비행기에서 내린 베이비 투어 참석자의 아기가 25명이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꽤 괜찮습니다. 남편이 먼저 자기 아기를 데리고 도쿄로 먼저 출발한 겁니다. 부인은 남의 아기를 데리고 원래의 투어용 비행기에 탑승했고요. 착륙 후 남의 아기는 자리에 남겨두고, 공기 인형 따위에 아이 옷을 입혀 위장한 뒤 비행기에서 내렸고, 곧바로 남편을 만나 자신들의 진짜 아기를 안고 있던 겁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실수로 데려온 남의 아이와 함께 비행기까지 탄 뒤 비행기에서 유기한다는건 너무 억지스럽지요. 투어였다면 가이드와 상의해서 처리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비행기에서 유기하는 순간 애가 울기라도 했으면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요. 마찬가지로 남의 아기를 태연히 버린 부모를 용서할 수 없던 A코와 B코가 그 부부의 아기를 인형과 바꿔치기 한 뒤 옥상에서 떨어트리는 쇼를 펼쳐 응징한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중범죄인 탓입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상황은 흥미롭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티가 너무 많이 났습니다.

"중매석의 신데렐라"

B코는 비행 중 친해진 나카야마라는 승객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운전사 딸린 벤츠로 B코를 에스코트한 뒤, B코에게 청혼했다. B코는 재산을 노리는 나카야마 친척들의 욕심을 좌절시켜야 한다며 A코에게 완벽한 신부 연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나카야마의 벤츠로 이동하던 A코는 운전사 다무라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느끼는데...

간단한 일상계 소품. 나카야마와 B코의 결혼은 나카야마의 부탁으로 진행했던 연극이었습니다. 나카야마가 진짜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연극을 꾸민거지요. 나카야마의 연인이 남자인 운전수 다무라였기에 친척들이 반대할게 뻔했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인데, 2020년 관점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특이한 설정이나 반전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무라를 성전환 시키겠다는 이야기는 이게 뭔가 싶더군요. 그럴거라면 성전환 후에 당당하게 결혼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억지 연극을 벌일 이유는 없죠.

전체적으로 억지스럽고 작위적일 뿐 아니라, 결말이 황당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나카야마가 연극 상대로 B코를 점찍은 이유가 다무라와 B코가 닮았다는 것 정도만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길동무 미스터리" 

후쿠오카 전통 과자 가게 도미야의 주인 도미타 게이조가 호리이 사키코라는 여성과 함께 도쿄의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자는 욕조에서 손을 그어 출혈사하였고, 여자는 칼에 가슴이 찔린 채였다. 처음에는 치정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그들이 마셨던 커피 잔 두 잔 중 한 잔은 지문이 지워져 있던 상태였고, A코와 B코를 통해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며 같은 호텔에 투숙한 것 역시 우연이라는게 드러났다.
도미야가 경영 위기였고, 도미타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아내의 범행도 의심했지만 알리바이는 철벽이었다. 또 자살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데 자살로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만들리도 없어서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는데...

진상은 도미타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자살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걸로 위장하려고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손을 그었지요. 그러나 투숙객 사키코가 열쇠를 주운 뒤, 친절하게도 방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도미타는 자살 시도가 밝혀지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죽이고 자살했고요. 찻잔을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열쇠를 다시 버리러 갈 여유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우연이 겹친 작위적인 사건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도미타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진상을 밝혀내는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인사건으로 처리될지는 확실치 않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문제고요. 자살로도 처리될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도미타의 아내가 진상을 알고 나서도 보험금을 꼭 받겠다고 단언하는 마무리는, 개죽음당한 사키코에 대한 배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주 중요한 분실물" 

A코는 비행 중 화장실 앞에서 유서를 주웠다. 27명의 승객 중 화장실을 간 승객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일흔살 쯤 되어 보이는 은발의 노부인, 여자 중학생, 머리가 벗어진 중년 남자, 인텔리 남자 회사원, 염치없는 중년 여성, 그 중 누구의 유서인가?

유서에 서명이 없는게 결정적 단서가 되는게 독특했던 작품. 소녀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바뀌게 되어서, 어떤 성을 써야 할 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허깨비 승객" 

신일본 항공 객실과 승무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A코에게 자신이 어제 신일본 항공 승객을 죽인 뒤 도쿄만에 유기했다고 털어놓으며, 돈을 내 놓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을 계속 죽일거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지만, 찾은 건 피가 묻은 핸드백 뿐으로 시체는 발견되지 았다. 핸드백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핸드백 속 탑승권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런 여자 승객은 없었다는게 드러나는데...

앞서 협박 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핸드백 주인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가 핵심 수수께끼인 일종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이 모든건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 나리타의 계획이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꾸민 범행이지요. 피 묻은 핸드백을 버려두고 협박 전화를 건 뒤, 핸드백 주인을 보았다고 하면 얼굴을 확인시키기 위해 다른 승객들을 만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이를 핸드백 속 립스틱으로 알아챈 A코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립스틱은 신상으로 출시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많이 닳아있던걸 보고 조작을 간파했던 것이지요. 일부러 쓰던 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니까요. 장난이 아니라 협박이 사실이라면,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나야 범인에게 유리한데 그렇지 않다는건 아주 공들인 장난일 거라는 추리 역시 합리적이고요.

무엇보다도 여성 승객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승무원 중 한명인 A코들의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그날따라 승객으로 탑승했던겁니다! 그녀가 핸드백 주인이 아니라는건 전 승무원들이 아는 만큼 수사 초기에 밝혀졌으니, 범인 나리타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선뜻 실행하기에는 너무 큰 범죄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장난이라도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아요. 또 B코가 번호를 잘못 눌러 발신번호 추적이 실패했다는 설정은 황당했습니다. 이건 경고 정도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한 실수잖아요?

그래도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예상치 못했던 동기가 잘 결합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누가 A코를 노리는가" 

결혼과 함께 승무원을 그만 둔 전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승객으로 탑승한 비행을 마친 A코는 가오리로부터 그녀 옆에 앉았던 이상한 승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휴일에 쇼핑을 나선 A코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깨닫고 불안해서 귀가하던 중, 차량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날, 출근한 A코에게 형사가 찾아왔다. 어떤 남자가 그녀가 기타지마 가오리와 함께 했던 비행편에 탑승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A코는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그가 대학 동창이자 전 연인 쓰카하라라는걸 알고 놀랐다. 그는 모리오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었다. A코는 쓰카하라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게 되는데...

진상은, 쓰카하라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장 동료 다구치가 범인이었지요. 다구치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비행기로 이동 중, 우연히 기타지마 가오리 옆 자리에 앉았던게 발단입니다. A코가 기타지마 가오리에게 "오랫만이에요"라며 아는 척 했는데, 승무원끼리는 개인적인 대화를 삼가하는 관습 때문에 대 놓고 아는척 하지 못한 기타지마 가오리가 눈인사만 전한게 화근이었어요. 다구치가 인사말을 자기에게 한 걸로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A코가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한게 자동차 습격 사건의 진상입니다. 3개월 전, A코의 옛 연인이기도 했던 쓰카하라가 A코와 우연히 재회했을 때, 다구치는 쓰카하라와 함께 있었던 탓도 큽니다. 그래서 더 쉽게 오해했던 것이지요.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승무원의 업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쓰여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2.5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