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샘 -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권일영 옮김/시작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0년대 독일, 아이를 임신한 채 애인에게 버림받은 마르가레테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의 시설 '레벤스보른'에 몸을 맡긴다. 이 곳은 나치 독일이 순수한 아리아인종, 즉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로 그녀는 이곳에서 시설의 최고 책임자인 의사 클라우스 베셀만을 만나게 된다.클라우스 베셀만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에리히와 그의 형 같은 존재 프란츠를 양자로 삼기 위해 두 사람이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마르가레테에게 결혼을 제안하고 마르가레테는 이를 받아 들인다.
이후 독일 패망에 즈음하여 연합군의ㅁ 침공이 피난처를 덮친 어느날,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아이, 미하엘을 지키기 위해 프란츠와 에리히를 버리게 되는데...
거의 5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장편. 나치 독일의 인체 실험을 주도했던 의사를 주요 소재로 다룬 작품이죠. 사실 그동안은 일본작가가 2차대전과 관련된, 그리고 독일인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쓴 것이라고 알고 있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습니다만 얼마전 접했던 주간문춘 미스터리 리스트에 실려있는 것을 알고 읽게 되었네요.
작품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클라우스 박사와 결혼한 마르가레테 시점으로 독일 3제국 패망시점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2부는 권터와 게르트 2명의 시점으로 15년이 지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나치 독일의 실험이나 잔당을 다룬 작품은 그동안 많이 접했었고 특히나 광기의 의학실험을 다룬 작품은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나 <모레> 등이 유명하죠. 이러한 작품들과는 다르게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광기의 나치 의학 실험이 아니라 SS 출신의 의학박사 개인의 욕심을 위해 벌어지는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온갖 상을 수상했다는 유명세가 이해되지 않았어요. 복잡하고 거대한 서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요한 등장인물은 몇 없을 뿐더러 이 몇 명의 인물들이 거의 모두 우연으로 얽혀 있는 등의 작위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하엘의 친부 권터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그가 물려받은 폐허가 된 성이 클라우스 베셀만이 노리는 지하 통로의 입구로 되어 있다던가, 마르가레테와 레벤스보른에서 인연이 있는 브리기테의 아들로 클라우스의 아들일 수도 있는 게르트가 이런저런 우연으로 미하엘의 대부인 SS출신 대령이 이끄는 국방 스포츠단에 입단하게 된다던가,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프란츠와 에리히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던가 하는 식이에요. 우연도 이 정도라면 너무나 지나치죠.
게다가 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늘린 느낌입니다. 의학 실험이라 할 수도 없는 "거세"가 주요 테마라서 광기의 의학실험 따위는 곁가지 이야기일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며 (대관절 레나는 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2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게르트와 헬무트로 대표되는 주변인물들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이런 것들만 들어내도 분량은 절반이상 줄어들었을 거에요.
또 클라우스 베셀만의 예술에 대한 집념이 초반부터 강하게 묘사되어 이후의 전개가 어느 정도 예측된다는 것 등 잘 짜여진 스릴러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폐허가 된 성에서의 결전의 작위성은 정말이지 읽는 사람을 어처구니가 없게 만들어요. 대령이 마르가레테나 게르트 등 처음 가본 사람들이 척척 찾아내는 비밀의 방을 15년 동안 한번도 찾지 않다가 하필이면 마지막 그 시점에 그곳을 덥치는 하등의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도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클라우스 베셀만 박사가 악역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예술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는 것도 별로였어요. 빈 소년 합창단원에게 꽂힌 SS 친위대원의 사랑 이야기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물론 15년 뒤 만난 에리히는 사실 미하엘이며 미하엘인줄 알았던 소년은 클라우스와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만 2부 시작되면서 마르가레테가 운좋게(?) 미쳤다는 설정으로 이루어진 서술 트릭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고 마지막 "후기를 대신하여"라는 챕터에서 살짝 서늘한 느낌을 가져다 주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강한 느낌을 주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일본인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라 권터가 쓴 작품의 일본어 번역본이라는 장치는 안 나와도 그만이었고요.
내용 자체가 불쾌하고 찜찜하나 계속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흡입력은 있지만 그저 그뿐,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 그냥 완독했다는 것에 만족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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