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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1

장난감 수리공 - 고바야시 야스미 / 김은모 : 별점 2점

장난감 수리공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일본의 호러, 장르문학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데뷰작인 표제작과 중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가 수록된 중단편집. 호러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조금 기묘한 장르 소설이더라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별점은 2점. 딱히 새롭지도 않고 약간의 반전 역시 그닥입니다. 가볍게 읽기에는 좋지만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난감 수리공>>
어린 동생 미치오를 데리고 육교를 건너다 사고로 굴러떨어진 소녀는 동생이 죽은 것을 알게 된다.
동생을 고치기 위해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는 장난감 수리공 '요그소토호스후'를 찾아가고, 그가 동생의 시체를 낱낱이 분해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죽은 사람도 고치는 기묘한 능력자가 나오는 심리 호러이자 독특한 크리쳐(장난감 수리공을 크리처로 볼 수 있을까요?). 반전으로 누나의 눈이 고양이 눈이고 이 이야기를 듣는 '나'가 두번이나 죽었던 동생 미치오라는 것이 밝혀지는 결말부는 약간 서늘한 것이 '기묘한 맛'류를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누나의 장황한 대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용 자체는 상당한 흡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수리공의 수리법이라던가, 죽은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 흥미거리가 많아서 끝까지 단숨에 읽게 되더군요. 분량도 적절하고요.

허나 문제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난감 수리공의 정체 등 대충 넘어간 부분이야 단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너무 담백하지 않았나 싶어요. 반전도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고요. 시각적인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데 소설보다는 영상, 그림으로 보는게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대학 시절 연인 데고나를 되살리기 위해 두 남자가 의기투합하여 금단의 뇌 시술을 서로에게 시행한 후 시간을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내용의 중편 SF.

장점이라면 갖가지 물리이론을 들먹이며 펼쳐지는 장황한 설명이 제법 그럴싸하다는 점입니다. 작가가 물리학도라는 것이 잘 드러난달까요?

하지만 문제는 이 장황한 설명 외에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입니다. 뇌의 특정 부분을 파괴하여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 시간을 제어하는 능력, 파동 함수를 재 발산하지 않는 능력 등 다양한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를 앞서 말씀드린 장황한 설명으로 때울 뿐이죠. 이렇게 길어질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의 이야기로 그만큼 지루하기도 합니다.

아울러 시공을 초월한게 아니라 시간의 덫에 갖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일종의 저주라는 결말은 씁쓸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기나 지금 읽기에는 좀 뻔했습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정신병자의 거대한 헛소리고 주인공은 그에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결말이 더 나을 수도 있겠어요. 뭐 어느 쪽이든 지옥이긴 마찬가지지만...

여튼 별점은 2점. 재미와 완성도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2016/10/30

서프라이즈 : 인물편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지음 : 별점 1.5점

서프라이즈 : 인물편 - 4점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지음/MBC C&I(MBC프로덕션)

MBC의 방송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던 인물들이 소개되는 책. 허나 직전에 읽은 <<사건편>>보다도 더 재미없고 자료적 가치도 없습니다.두권이 세트 느낌이라 한꺼번에 읽기는 했지만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리지가 않네요.

그나마 기대에 최소한이나마 값했던 이야기는 피타고라스 이야기 정도였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무리수라는 개념을 두려워해 무리수를 발견한 제자 히파수스를 죽이고 무리수를 아르곤이라고 명명한 뒤 외부로 누설되는 것을 강력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무리수의 개념은 얼마후 피타고라스의 발견으로 공식 발표됐고 오히려 거기서 확장된 개념, 예를 들어 정오각형의 한 변과 대각선의 비는 1:1.618이라는 황금분할의 비율이다!라는 것인데 꽤나 그럴듯했어요. 뭔가 수학 관련 추리소설 소재로도 쓸만해 보였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체로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식상한 이야기, 별로 미스터리하지 않은 가쉽과 스캔들, 기묘하고 흥미롭더라도 진위 여부는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별 관련 없는 이야기를 정말 중요한 이야기처럼 포장해서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은 정말 짜증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진 이유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휴전하고 모든 대군을 프랑스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며, 이는 나폴레옹을 증오한 오스만 황제의 어머니 에메 뒤비크 때문이었다.. 는 것입니다. 나원참... 하긴 <<사건편>>에서는 워털루에서의 패전이 통조림 대신 병조림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니 그에 비하면 조금 나은 주장일지도 모르겠군요.
아인슈타인을 유혹한 화가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사실 소련의 스파이였으며 그녀에게 아인슈타인이 연구 기밀을 제공한 덕분에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은 이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는 사실입니다.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개중 낫긴 합니다. 예를 들면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했던 21살 연하의 테오 이야기로 에디트가 결혼하고 1년만에 사망하자 테오는 임종 사진 보도에 대한 독점권을 팔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 결혼은 돈이 목적이었다고 비난하고요. 허나 테오가 7년 뒤 사망하자 의외의 사실이 밝혀집니다. 에디트 피아프가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 빚을 테오가 갚았다는 것이죠.
장국영 자살 사건에서 그는 타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는 것도 추리소설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의혹들은 제법 그럴듯한데 과연 진상이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허나 이런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가쉽에 가깝다는 문제가 크죠.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연예가 중계>>에 가까운 내용들이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사건편>>보다도 가치가 낮아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별로 없네요. 인터넷의 유사 사이트를 서핑하는 것 보다 나은 점 역시 전무합니다. 가격까지 비싼만큼 이런 류의 논픽션을 좋아하시더라도 구태여 찾아 읽지 마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방영 당시 아주 흥미롭게 보았던 일본의 여왕벌 히가 가즈코 이야기가 빠진게 의외였습니다. 검증된 사실일 뿐더러 충격적인 내용으로 이 책에 딱 맞는 소재인데 왜 빠졌을까요?

2016/10/29

서프라이즈 : 사건편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제작팀 : 별점 2점

서프라이즈 : 사건편 - 4점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지음/MBC C&I(MBC프로덕션)

MBC의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던 이야기들이 두권의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한권은 <<사건편>>, 다른 한권은 <<인물편>>으로요.
<<서프라이즈>>는 최근 잘 보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저도 자주 보았던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제 절친 철호군의 애청 프로그램이기도 하고요. 이 친구가 얼마나 좋아하냐 하면, 예전에 월드컵으로 <<서프라이즈>>가 결방하자 짜증을 낼 정도였죠. 아 철호야 보고싶다....

여튼, 이 <<사건편>>은 제목 그대로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던 기묘한 사건들 중 약 90여편을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의외성이 있다거나, 크게 새로운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이런 류의 컨텐츠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많이 접해본 것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자면 아틀란티스, 모아이, 마야, 일루미나티, 야마시타 골드, 사해 사본, 코덱스 기가스.... 이런 저런 곳에서 하도 많이 언급해서 이제 쉬어버렸다고 해도 무방할 이야기들이죠.
게다가 400페이지 정도 분량에 무려 11개 주제, 90여편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 탓에 그다지 자세하거나 깊이 있지도 않습니다. 한 이야기당 4페이지를 할당하기도 버거울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TV에서 방영한 이야기를 가공한 것임에도 단 한장의 도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밀림 속 신비의 사원과 같은 고대 유적이나 그림, 주요 문화재와 같은 소재는 도판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또 주제에 맞춰 이야기를 너무 각색하여 본질, 실제 역사가 왜곡되는 듯한 느낌의 이야기도 몇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이유가 병조림 때문이라는 (영국은 더욱 개선된 통조림을 장비) 주장이 대표적이죠.

그래도 아주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은 이슬람의 신비의 명검 다마스쿠스 검에 대한 이야기. 칼 표면의 소용돌이 또는 물결무늬가 특징인데 이 무늬가 강도와 탄력성을 부여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700도까지 가열한 후 280도에서 담금질을 하였다는 제조법 또한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다마스쿠스 검의 최신 분석 결과로는 탄소나노튜브가 검출되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오래전에 감상했던 <<13번째 전사>>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분한 이븐 파들란이 전투를 앞두고 준비하던 칼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중세 집집마다 상비했던 명약 무미야는 사실 이집트 미라를 갈아서 만든 것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이라를 만들 때 쓴 "몰약" 성분 덕분이라는데 몰약은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성분이 무엇인지는 몰랐는데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동부아프리카 해안 자생 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살균, 정화 능력이 탁월하다네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에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림 위에 다섯 줄의 평행선을 그리고 제자들의 손과 빵의 위치에 점을 찍은 후 거울에 반전시켜 40초 분량의 찬송곡이 나왔다는군요. 이거야말로 TV로 보았으면 그림, 음악이 실제로 나왔을터라 더욱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 외에도 나우루 공화국이 인광석을 바탕으로 엄청난 복지를 이루었지만 자원 고갈, 환경 오염 및 섬의 고도가 낮아져 가난과 공포에 휩싸인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라던가 하트셉수트의 사망 원인이 당뇨병, 온 몸에 퍼진 골암이었다는 이야기 등등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TV로 보는게 더욱 의미있는 내용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책으로 읽을만큼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 생각되지도 않고요. 책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수십년 전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발간한 <<세계진문기담>>이나 <<세계상식백과>> 등과 비교해보아도 현격하게 처집니다. 별점은 2점. 궁금하신 주제가 있으시다면 인터넷으로 찾아보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2016/10/24

뇌물의 역사 - 임용한, 김인호, 노혜경 : 별점 2.5점

뇌물의 역사 - 6점
임용한.김인호.노혜경 지음/이야기가있는집

뇌물의 역사와 뇌물 관련 에피소드 등을 통해 뇌물이 무엇인지 고찰하고, 뇌물의 실체를 파헤치는 책. 뒷부분에는 김영란 법까지 연계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등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뇌물에 대한 고찰 측면으로는 사회과학 서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제 관점으로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뇌물의 실체를 알기 위한 과거 사례 인용이 내용의 대부분이기 때문인데, 미시사 서적다운 현학적 재미 역시나 큽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몇개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흔히 들어본 "첨지"는 원래 중추원의 고관인 정3품 첨지중추부사를 이르는 말로 아주 고관직이라고 합니다. 허나 조선 후기에는 공명첩 판매로 너무 흔해져 그냥 벼슬하지 못한 양반을 부르는 용어처럼 되어버렸다죠. 1660년 (현종 1) 첨지의 공정가격은 양반의 경우 40석, 양인은 10석을 더해 50석이나 1718년 (숙종 44)에는 8석과 10석으로 떨어집니다. 한 가마니는 지금보다 무거워 80킬로그램 정도, 즉 한 가마니 가격을 40만원으로 잡으면 400만원이면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농법, 기술의 차이로 쌀 1석의 가치는 훨씬 더 했겠지만...
또 단지 양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 때문에 진짜 양반들이 얼치기 양반들과 구분하고자 점점 이상한 예절과 행동규범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 뛰어서 안된다던가 등등인데 그중 최악은 '일을 하지 않아야 진정한 양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매관매직 행위를 뇌물로 간주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답니다. 공명첩은 정부가 공인한 합법적 증서이기 때문입니다. 뇌물이란 음지에서 자행되는 불법적인 거래여야 하니까요.

이러한 공명첩과 반대되는 것으로 스스로 노비가 되는 사례도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민이 아니라 도망친 노비, 혹은 그 후손이라고 고소하는 것이죠. 조선은 도망 노비를 신고하면 포상으로 신고자에게 노비를 주었다고 합니다. 4명을 신고하면 25%인 한명을 주니 이 규정을 이용한 가짜 신고가 많았다네요. 양인 농민이 스스로 노비가 되는 경우도 많고요.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기 때문이랍니다. 이 모든 과정에 뇌물이 개입함은 물론입니다.

효자나 열녀 역시 마찬가지, 효자, 열녀, 열부로 선정되면 지방 잡세가 면제되고 잘 하면 관직도 얻을 수 있었기에 뇌물이 만연하고 현재 전해지는 효행 이야기도 과장 투성이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식이 피를 내고 허벅지 살을 베어먹이는 식으로 말이죠. 정부도 공명첩으로 관직이 흔해지니 유력 가문과의 친분을 유지하려면 효자, 열녀 표창으로 차별화를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공명첩 가격이 떨어지니 새로운 수단을 찾은 것입니다.
이외에도 세종이 뇌물을 없애기 위해 재상들과 기싸움을 펼친 일화 등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뇌물 관련 고사 대부분이 국내 사료,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큰 특징입니다. 국내 연구진에 의해 쓰여진 덕분인데, 실록 등 근거가 명확하며 인용된 내용도 굉장히 디테일해서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까지 조사해서 기록해 놓았을 정도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사례들로 뇌물이 나쁜 이유를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뇌물은 개인을 부패시킬 뿐 아니라 열정과 능력까지 빼앗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사람도 배척하게 만들고요. 그래서 뇌물이 공공의 적이며 집단과 국가를 파멸시키는 첫번째 원인인 것이죠.
조선 시대도 공명첩 등에 의해 명예는 남발되고 신분제가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모두가 더러운 목적, 수단에 의한 것으로 이에 따른 정치적 문란과 갈등의 확산이 이어졌을 뿐이니 씁쓸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일단 아쉽게도 해외 사례, 일화는 그닥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뇌물의 행태는 어딜가나 마찬가지이기에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우리 역사 이야기로만 소개했어도 충분했을텐데 왜 들어갔는지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홍콩이 부패를 일신하기 위해 "염정공서"라는 조직을 만들어 성공했다는 이야기 정도만 <<13.67>>에도 인용된 내용이라 기억에 남는 정도입니다.

같은 이유로 전체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도 단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의미를 담아 이야기하려면 대표 에피소드 몇개로 충분했을텐데 괜히 분량만 늘어나는 느낌이랄까요?
덧붙이자면 첫번째로 언급되는 공명첩은 저자 스스로 뇌물이 아니라고 말한 만큼 내용에 적합한 것인지 살짝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자료적 가치와 재미에 더해 의미까지 있으며, 뇌물의 역사와 행태를 이해하기는 용이하지만 좀 길고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아 감점합니다.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군요.

2016/10/22

소년 생활 대백과 - 현태준 : 별점 2점

소년 생활 대백과 - 4점
현태준 지음/휴머니스트
아 그간 격조했습니다. 올해들어 가장 바쁜 요즈음이네요. 주말만 글을 올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뽈랄라 대행진>>으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콜렉터인 현태준씨가 쓴 한국 프라모델, 완구를 시대별로 망라한 독특한 책입니다. 작가의 책은 공저이기는 하나 예전에 <<이우일, 현태준의 도쿄 여행기>>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죠.

한국 프라모델에 대해 그야말로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책으로 제품 명칭, 스케일, 가격, 출시년도, 주요 특징과 가격 및 주로 제품이 무엇을 베꼈는지?가 중심인 간략한 제품 소개가 곁들여진 구성입니다.
덕분에 화보집을 보는 듯한 재미가 넘칩니다. 시대를 연상케하는 패키지와 광고 문구들부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일본식 발음이라던가 오타, 반공 분위기가 팽배하던 70년대에 소련기를 출시하면서 '적기를 식별하자'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반공 분위기 하에서도 출시에 문제가 없게 했던 나름의 마케팅 정책 등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조립식'이라는 용어도 반가왔고요.

또 70년대 생으로 80년대 모형 라이프를 보냈던 세대이기에 직접 만들어 보았던 여러가지 제품들이 소개되는 것 역시 굉장히 반가운 점이었습니다.
몇몇 제품만 꼽아보자면, 우선 아카데미의 연발 루가총은 확실히 만든 기억이 납니다. 동작이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재미있어서 두어번 만들어 보았던 것 같아요.
'내 맘대로 인디언' 시리즈는 너무 좋아했던 시리즈입니다. 쉽게 만들 수도 있고 결과물도 이쁘고 완성도도 높아서 자주 만들었었어요. 추억 돋네요.
건담 시리즈는 그냥 그랬지만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어딘가의 샵에 전시되어 있었던 건담 마크 2 조립 완성품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손가락이 움직인다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변신 혹성 전자 로보트 (다이덴진)', '발디오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가리안 시리즈' 모두모두 반가왔고요.
보물섬 시리즈는 어린 마음에도 큰 녀석은 너무 비싸 그림의 떡이었었죠. <보물섬 3호 감시전망대>는 그래도 확실히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한 간단한 제품 소개 외에도 제일과학의 창시자 김병휘 사장 관련 기사와 같이 토막 수록된 재미난 기사도 꽤 괜찮습니다. "중앙매스컴"에 근무하던 평범한 광고인이었는데 우연히 계열사 '소년중앙'에 소개될 아카데미 과학 광고를 의뢰받은 후 모형에 흥미가 생겨 결국 모형점 개업, 직접 모형 개발 및 판매, 영광의 시간을 보내지만 황당한 법적 고초 (모형 전시회에 전시한 영국기를 일본기로 오해받은 후 금수제품인 일본 모형 수입이 들통나게 됨) 후 사업 철수 등 나름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소개되거든요. 평범한 직장인이 취미를 살려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은 굉장히 부럽지만 이게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회사를 그만두시지 마시고 차라리 <<라면 요리왕>>의 후지모토처럼 부업으로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러한 추억을 되새기기 위한 용도 외의 무언가를 보여주기에는 좀 부족합니다. 모든 프라모델을 일람하여 소개하고 있지는 못하고, 당대의 유행과 흐름을 실제 역사와 연계하여 설명하는 미시사적인 시각도 많이 부족하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소련기 출시 당시 광고 카피라던가 인기 만화, 영화와 연계된 흐름이 짤막하게 소개되기는 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비중있게 등장하는 저작권을 무시한 표절, 복제 행태는 이미 다른 서적이나 컨텐츠를 통해 수없이 많이 접한 것이라 그다지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고요.
국내 모형에 대한 역사 측면에서도 앞서 말씀드린 제일과학 이야기 외에는 눈에 띄는 당대의 유명 메이커에 대한 소개가 없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카데미를 비롯하여 아이디어 과학, 에이스 과학, 뽀빠이 과학 등 주요 업체에 대해서는 흥망성쇠라던가 관계자 인터뷰를 충실하게 수록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특히 명가 중의 명가 아카데미 과학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어야 할 것 같은데 한페이지에 그친 것은 좀 이해가 안되더군요.
국내 최초의 모형 동호회였다는 걸리버모형회와 한때 저도 애독했던 취미가 기사도 역시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못한, 그야말로 구색 맞추기 수준이고요.

역사적 흐름에 부합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모델"에 집중했어야 하는데 그 역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 패키지 외 러너와 구성품 및 실제 작례가 소개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국산 프라모델 카탈로그라고 하는게 정답입니다. 물론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아요. 저 역시 충분히 즐겼습니다.
허나 미시사적 측면, 모델 측면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35,000원이라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오래전 읽었던 <<클로버 문고의 향수>> 오래전 유행했던 컨텐츠를 시대순으로 조망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깊이, 디테일 측면에서는 현격히 뒤떨어진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6/10/17

살아있는 육체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2.5점

살아있는 육체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빅터 제너는 어느 날 공원 숲에서 한 여자를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쫓기게 된다. 그를 뒤쫓아 오는 사람들을 피해 숲을 빠져나와 마을로 도망친다. 빈집을 찾아 잠시 몸을 숨기려고 들어간 집이었으나 집안에 홀로 있던 젊은 여인은 소리를 지르며 창문을 깼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집을 포위한다. 빅터는 여자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한다.

그런데 빅터는 이모부의 것이었던 루거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빅터는 그 총이 진짜 총이니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며, 여자를 놓아줄 것이니 도망칠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경찰이 그 총은 가짜 총이라며 말하면서 그의 말을 믿지 않자, 빅터는 경찰관인 데이비드 플리트우드의 척추 아랫부분을 향해 총탄을 발사한다.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플리트우드는 반신불수가 되는데… (이상 출판사 책 소갯글에서 인용)

평범함 속의 악의를 다루며 읽는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능력자인 - 개인적으로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와 동급으로 봅니다 - 여성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 루스 렌델 여사의 대표작. 1986년 골든 대거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경찰 데이비드 플리트우드 시점으로 인질극과 총격이 일어나는 27페이지 분량의 1장 이후 392 페이지까지 범인 빅터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400 페이지 가까운 장편인데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또한 루스 렌델 여사 작품의 최고 강점인 심리 묘사 역시 아주 탁월해요. 한명이 반신불구가 되고, 한명은 살해당하고, 몇 명의 여성들이 성폭행당하는 범죄 소설인데 범죄 보다는 빅터가 처한 상황과 심리묘사를 더욱 디테일하게 그린다는 점에서는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 일맥상통하네요.

추리적으로는 그다지 특출난 점은 없지만 빅터의 범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넘칩니다. 플리트우드처럼 장애인으로 가장하여 도주하는 과정은 기가 막힙니다.
그리고 사소한 부분이나 빅터가 이모부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져온 코트가 사실은 주프 씨의 것으로 너무나 눈에 띄는 물건이었다는 것을 호주머니 속 박하사탕 껍질로 알게된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복선과 디테일이 잘 결합된 좋은 장면이었어요.

그러나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수를주기 힘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주인공 빅터의 모든 것이 불쾌해서 읽는 내내 불쾌함이 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빅터는 단지 나이만 들었을 뿐 아이나 다름 없는 존재로 자신에게 닥친 모든 나쁜 일에 대해 남 탓을 하는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거든요. 온전히 자기 행동을 책임질 능력이 전무해요. 성폭행에 대한 후회, 반성도 없으며 플리트우드가 자신의 총에 맞아 반신불수가 된 것도 플리트우드가 자신의 총이 진짜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합리화하죠. 게다가 이런 합리화가 여사의 디테일한 심리묘사로 전편에 걸쳐 표현돼니... 아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듭니다.
- 플리트우드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빅터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빅터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압박감을 받을 때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늘 그래 왔었다. 정신을 잃고 갑작스레 겁에 질려서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죄를 묻고 살인미수죄를 씌우는 건 부당했다. (40p)-
- 빅터는 플리트우드를 불구로 만든 것에 이모부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 이따금 생각해보곤 했다. 시드니 이모부와 플리트우드, 그리고 로즈마리 스탠리도 각각 책임이 있었다. 우선 시드니 이모부는 그 권총을 손에 넣은 책임이, 플리트우드는 명백한 사실을 믿지 않은 책임이, 로즈마리는 멍청하게 소리 지르고 창문을 깬 책임이 있었다. (81p)-
- 플리트우드가 아둔해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인데, 모든 영광을 누리는 건 그였고 빅터는 오랜 시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빅터는 플리트우드가 고의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어쩌면 플리트우드는 평생 보살핌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이 불구가 된 영웅을 우러러 본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스스로에게 총을 쐈는지도 모른다.(127p)-

또 무언가를 얻는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만큼 무언가를 쉽게 얻으려고만 하죠. 한번 얻은 것은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합리화의 달인답게 말이죠. 대표적인 예는 아래의 단락입니다.
- 빅터는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여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여자들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를 방치한 어머니, 악의에 가득 찬 뮤리엘 이모, 폴린, 온정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소리 지르며 창문을 깼던 로즈마리 스탠리, 고약한 표정의 그리피스 부인. (140p) -
이 단란 속 모든 것은 엉터리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방치한 것은 묘사는 되지 않지만 후술할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선 뮤리엘 이모가 조카에게 악의를 갖는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폭행에 경관에게 중상을 입히고 10년 이상 수감되어 있던 전과자를 조카라고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 여자친구 폴린은 성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뿐 적대적이었다는 것은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수상한 사람이 집에 침입하고 그가 연쇄 성폭행범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로즈마리 스탠리가 소리를 지르고 창문을 깬 것 역시 당연합니다. 여기서 그가 베풀었다는 '온정'은 죽이지 않고, 상처를 입히지 않은 것에 불과해요.
마지막으로 지금 세든 집의 주인 그리피스 부인 역시 집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의 수준을 넘어간 것은 전혀 없습니다. 불쌍한 전과자를 받아주었는데 경찰이 찾아오고, 밤에는 소리를 지르고, 가구까지 때려부수는데 쫓아내지 않는 것만해도 고맙게 여겨야 할 형국이죠.
뮤리엘 이모에게서 현금을 훔친 뒤 '어차피 유산은 자기 것이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미리 현금을 건네 주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이모가 범죄자에게 유산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범죄가 아니라 이모 탓으로 돌리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클레어와의 하룻밤 후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지요. 데이비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가 반신불구로 성능력이 없기에 잘생긴 빅터와의 하룻밤 불장난을 벌인 클레어의 실수도 분명 있지만 이후의 지속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빅터는 클레어를 손에 넣기 위해 결국 폭주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타고난 악당으로 멋대로 폭주하다가 끝장난다는 <<내안의 살인마>>처럼 막나가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폭주 후 깔끔하게 처리되었더라면 후련하기라도 했을텐데.... 빅터의 삽질에 의한 패혈증으로 사망한다는 결말은 별로 개운치 못했습니다.

아울러 이유를 알 수 없는 빅터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원인을 유년 시절 부모님의 성관계를 목격한 경험 탓이 크다고 설명하는 것은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어쨌건 부모님은 서로를 극진하게 사랑했고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으로 보이는데 성관계를 들킨 약간의 실수만으로 아이가 괴물이 되었다는건 크게 와 닿지 않더군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인간쓰레기를 주인공으로 몰입감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은 <<사채꾼 우시지마>>와 유사합니다. 두번 읽게 될 것 같지 않다는 점까지 말이죠. <<우시지마>>에서는 이런 쓰레기는 보통 피해자 포지션이긴 하지만....

덧 1 :  전과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 모든 것은 빅터를 그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여사님의 필력 때문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성범죄자들은 사회에 다시 풀어 놓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만들었어요.  최소한 반드시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강제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더. 뭔가 정상이 아닌 범죄자들을 단순 형량만으로 석방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겠죠.

덧 2 : 제목의 "살아있는 육체"는 빅터를 상징하는 단어라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육체를 지녔지만 그 속의 정신은 썩어있다, 뭐 그런 의미로 쓴 제목이 아닐까 싶네요.

2016/10/13

리커시블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2.5점

리커시블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학교는 계속해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맨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 하루카.
나는 란카에게 계속 빚만 지고 있다. 원래라면 경계해야 할 사태다. 남에게 뭔가를 빚지는 것은 안 좋은 일이다. 갚을 가능성이 없을 때는 특히 그렇다. - 하루카
이무기는 확실히 마을에 도움이 됐어. 하지만 역할이 끝나면 결국은 괴물이란 말이지. 더는 필요가 없어. - 무언가를 해 준 뒤 죽어나간 사람들을 빗대어 미우라 선생이 하는 말. 타지 사람들도 괴물과 다를 게 없다...

아버지의 횡령 사건 이후 도망치듯 의붓 어머니의 고향 사카마키 시로 이사온 하루카. 가족은 의붓 어머니와 짐같은 의붓 동생 사토루 뿐. 아버지 범죄로 이전 학교에서 따돌림 당했던 경험으로 하루카는 새 학교 적응에 사력을 다하고, 다행히 같은 반 린카와 친해진다.
하지만 사토루의 기묘한 예언이 시작되고, 그것이 마을에 전해지는 다마나 아가씨 전승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하루카 앞에 기묘한 일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것을 알려준 학교 선생 미우라마저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지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2013년도 발표 장편.
요네자와 호노부는 왠지 장편보다는 단편에 능한 작가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장편도 좋은 작품이 있지만, 제가 읽은 작품은 단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탓이 크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장편인데  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넘칩니아. 제 선입견을 좋은 의미로 깨 주네요.
우선 호기심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초반부 하루카 시점에서 묘사되는 몰락해가는 시골 마을 사카마키시, 아버지가 횡령 후 홀로 도망가고 새어머니, 의붓동생과 이사오게 되었다는 고시노 하루카의 집안 사정이 드러나는 과정까지는 특별하게 없습니다. 하지만 의붓동생 사토루가 기묘한 행동을 보이는 부분부터 긴장감이 쌓여나가는데 속된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특히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다마나 아가씨' 설화와 현대의 고속도로 유치를 둘러싼 암투를 결합시킨 부분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 동안 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이야 이런저런 작품들을 통해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가 대표적이죠 - 많이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처럼 설화와 현대의 이슈를 엮어서 전개되는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수준도 높아서 만족스러웠어요. 
사실 다른 설화 모티브 작품들은 설화 속 사건과 비슷한 상황이 일어난다던가, 설화 속 등장인물을 코즈프레한 범인이 등장하는 일종의 "재현" 수준에 그치는 것이 많었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다릅니다. 마을을 위해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자살하는 다마나 아가씨 - 마을을 위해 소원을 들어주고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 실력자 - 라는 전승이 현대에도 '그대로' '다마나 아가씨'에 의해 재현된다는 것이 핵심이니까요.

또 설화와 엮어 사토루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는 듯 묘사하다가, 이 모든게 사토루의 유아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거대한 작전이었다는 것으로 넘어가는 구조도 깔끔합니다. 이 과정에서 린코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녀가 진짜 다마나 아가씨였다는 반전을 드러내기 위한 각종 장치 역시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이 과정에서 하루카 혼자 마을 전체와 대결하는 대결 구도는 폐쇄적 시골 마을 주민 대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구도 (<<이끼>>(?))라 약간 식상하지만, 자주 사용될 만큼 효과적이라는걸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마을 주민들의 행동이 가면 갈 수록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전개가 일품인 덕도 크고요.

타지 중학생으로 살아남기 위한 하루카의 눈물겨운 노력도 볼거리입니다. 어떻게하면 따돌림당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해요.
이를 위해 의붓 동생을 귀찮고 창피해하고,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일한 친구 란코에게 의지하는 평범한 소녀가 점차 성장해 가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부분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도둑질까지 시도하는 것이 의붓어머니의 통보로 명복상의 가족이 해체된 후라는 점입니다. 허울은 깨졌지만 보다 굳건한 심지가 남은 것으로 둘의 관계가 정말 가족이 된 것은 물론, 이후 하루카가 남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보다 당당하게 나아갈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마을에서는 최고 위치라 할 수 있는 다마나 - 린코와 대등한 위치에까지 올랐으니 뭐 더 말할 것도 없죠.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의붓 어머니에게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 하루카 캐릭터는 여태까지의 요네자와 호노부 캐릭터 중에서도 불쌍하기로는 따를 인물이 없지만, 이러한 점을 보면 뛰어난 리뷰로 존경해마지 않는 정윤성 님 리뷰대로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 중 가장 희망적인 작품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울러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묘사도 탁월합니다. 특히나 미우라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5년 전 교수의 죽음에 얽인 진실을 하루카가 떠올린 순간의 묘사가 압권이에요. 다리 위에서 란코가 사토루에게 기묘한 웃음과 함께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보는 장면인데... 영상이 머리 속에 떠오를 만큼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영상화 한다면 이 장면만큼은 정말 대박일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일단 작중에서도 계속 지적되는 부분인데, 고속도로 유치에 아무리 마을의 사활을 걸었다 하더라도 단지 유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보고서 때문에 사람이 죽고 마을 전체가 거대한 작전을 벌인다는 것은 설득력이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라고 해도 이 정도 노력이면 다른 방법 (다른 전문가를 통한 보고서 작성 등) 을 시도하는게 훨씬 빠르고 품도 덜 들었을 테니까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냥 일종의 종교처럼 숭배한다... 는 것은 여러모로 설득력이 약해 보입니다.
<<오레!>>와 같은 만화를 보아도 돈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어봤자 애물단지로 전락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지자체에서 증명되어 왔습니다. 이런 맹목적 광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또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답게 분명 '공정'한 작품이지만 너무 공정항 것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가짜 다마나가 먹는 음식은 누가 봐도 무녀답지 못하고, 란코가 온모밀에서 파를 빼고 먹는 묘사 역시 지나칠 정도로 자세합니다. 이외의 부분들도 중요한 단서다 싶으면 너무 자세한 것은 마찬가지에요. 사토루가 무언가를 숨기는 장소에 대한 묘사처럼 말이죠.
그리고 의붓 어머니가 아무리 살기가 팍팍해도 그렇지 자기 친아들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마을 ("강"이라는 조직)에 선뜻 넘긴다는 것도 부모 입장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었고요.

마지막으로, 성장기로 그리고 싶은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중학교 1학년이라는 하루카의 나이는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추리력과 행동력 모두 중학교 1학년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요새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독립적으로 행동을 보일 정도라면 고등학생 정도는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저런 단점들 탓에 읽는 재미는 뛰어나고 지역 전승 설화와 현재의 문제를 엮는 솜씨는 탁월하나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하루카 캐릭터만큼은 마음에 들었던 만큼 단편으로라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6/10/11

ONE OUTS 1~20 - 카이타니 시노부 : 별점 3점

One Outs 20 - 6점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대원씨아이(만화)

카이타니 시노부의 출세작. 이른바 '원 아웃'으로 불리우는 갬블의 달인 토쿠치 토아가 합류한 후  만년 약체 리카온즈가 우승에 이르기까지의 한 시즌이 그려집니다.

시즌은 길지만 핵심 시합은 지장으로 불리우는 시로오카가 이끄는 버거브즈와 비밀무기인 대주자 존슨과의 대결, 온갖 방법으로 사기를 치며 홈 구장에서 승리를 계속해온 블루마즈의 트릭 파헤치기, 그리고 라이벌인 최강팀 마리너즈와의 우승 결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토아와 사이카와 구단주와의 지략 대결이 함께 펼쳐지는 식이죠.

이 과정에서 시합의 승패와 토아, 사이카와의 대결은 실력 이외의 지략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야구만화라기 보다는 <<라이어 게임>>같은 두뇌 배틀물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근간이 되는 토아의 절묘한 제구력과 심리전은 분명 허구의 영역이니까요. 빗맞은 볼이 안타로 연결되는 등 공은 둥글기 때문에 이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심리적 문제가 있던 무르와카와 쿠라이가 최대 승부처에서 각성한다는 내용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고요.
게다가 설정면에서의 오류도 있습니다. 토아의 공을 이데구치가 받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마지막 최종 결전을 앞두고 마리너즈의 타카미가 만들어낸 파해법은 '공을 받기 어렵다' 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던가, 리카온즈 타자들이 적응해서 부숴버린 요시다 히토시를 이후 만났을 때에는 그러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던가... 물론 앞서 말씀드린대로 공은 둥글고 여러 변수가 존재하는 것이 야구인지라 오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면에서는 정교함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래도 야구 만화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요소는 많습니다. 마리너즈의 최강 타선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출루율'이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야구 만화에서는 보기드문 디테일이었어요. 초반 토아가 처음으로 대량 실점하며 사이카와가 승기를 잡지만 결국 토아가 우천 노게임 - 게임 포기 선언을 이끌어내는 장면처럼 지략 대결이 중심이라고는 해도 철저하게 야구 '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시합 장면도 충분히 드라마틱합니다.

또 안티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토쿠치 토아의 캐릭터가 강렬한 것도 좋습니다.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 태어난 듯한 갬블러라는 것이 너무나 설득력있게 묘사되어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안배하는 전개가 잘 와 닿았어요. 공 하나하나, 승패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프로야구의 본질은 이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여준 캐릭터는 많지 않기도 하고요. 헤어스타일에서 시작해서 승부욕과 승부사적 기질, 치밀한 심리전과 작전 구사 (헤어스타일까지) 등은 여러모로 <<아이실드 21>>의 히루마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결론은 추천작.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단 몇페이지로 정리해버리는 결말이 조금 미흡하기는 하지만 야구 만화로도, 두뇌 배틀물로도 모두 볼만한 괜찮은 작품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인기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구단주와 특정 개인이 어마어마한 돈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베팅하고, 그 때문에 구단주와 대결한다는 내용은 <<공포의 외인구단>>과 비슷하네요. 이를 위해 영입된 사교성없는 선수들이 구 선수들과 대립하여 팀 내 분열을 가져온다던가, 막강한 라이벌팀과 천재 타자가 그것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이 작품은 최종 보스 토아가 절대 흔들리지 않고, 여자 관계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으며 끝까지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완벽하게 승리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뭐 시대가 달라도 너무 다르긴 하지만요.

2016/10/10

기억나지 않음, 형사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2.5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말야, 당연히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지!
어떻게 하면 나를 드러내 보일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분수를 알고 나 자신을 지킬까 하는 거라고.
- 쉬유이의 선배 화 선배가 하는 조언.


수사의 목적은 대답을 듣는 게 아니라 대부분 문제를 찾아내는 겁니다. - 쉬유이가 수사에 대해 아친에게 하는 말.

급작스러운 두통으로 차에서 잠이 깬 웨스턴 경찰서의 쉬유이 경장. 그는 고질적인 단기 기억상실증 탓에 지난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6년전 당시 맡았던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의 후속 이야기를 취재하는 미모의 신문기자 아친의 취재에 동참한 후, 6년전 사건을 풀어내기 위한 새로운 실마리를 접하고 옌즈청이라는 스턴트맨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13.67>>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찬호께이의 장편 소설. 제 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수상작입니다.

'기억을 상실한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간다.'는 설정은 <<공포의 검은 커튼>>이후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전가의 보도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어떤 작품을 써도 기본 이상은 해 주니까요. <<사라진 시간>>, <<살인자의 기억법>> 등이 그러하죠.

이 작품 역시 재미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재미를 위한 만능 조미료 같은 설정 -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채 우연히 6년전 사건의 재수사에 돌입한다 - 에 더해 초중반부까지의 흡입력이 정말 장난이 아니거든요.
생생했던 6년전 기억과 6년 후 새롭게 밝혀진 단서를 조합해나가는 과정의 설득력도 넘치며,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본인이 얽혀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긴장감 역시 독자의 흥미를 크게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또 작가에게 기대했던 추리적 요소 역시 기대에 값합니다. 6년전 벌어진 잔혹한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의 재조사가 시작된 후, 쉬유이가 새롭게 접한 몇가지 단서들 - 사건 당일 피해자 이웃 후 어르신이 공격받지 않은 이유, 린젠셍의 아내 리징루가 건네준 린젠셍의 수첩 등 - 을 가지고 새로운 진상에 이르는 추리가 놀랄만큼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본격물의 향취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단서들 - 영춘권 도장의 위치,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 영국 TV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 쉬유이와 옌즈청이 같이 찍은 사진, 영화 촬영소에서의 대화 등등 - 이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 역시나 고전 본격물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 이러한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반부 이후부터는 힘이 서서히 빠집니다. 특히 쉬유이 경장이 병원에서 정신이 든 후 자신이 사실은 옌즈청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이야기는 모두 억지스럽습니다. 작가가 반전을 너무 의식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현실적인 설정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옌즈청이 경막하출혈을 일으킨 등의 이유로 스스로를 쉬유이로 착각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 와중에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최초 경찰서에서도 그렇고, 뤼후이메이가 사건 당시 담당 경찰이었던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착각의 이유가 된 옌즈청의 개인적 수사의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린젠성의 무고를 확신한 이유가 고작 린젠성이 걸어온 전화 한통에 불과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워요. 이 약점을 보완하고자 인간 쓰레기로 묘사되었던 린젠성이 급작스러운 사고로 고아가 된 옌즈청을 가끔 돌봐주었다는 식의 과거사를 추가한 것도 공정치 못하고요.린젠성의 자동차 사고는 고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후일담은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작위적 설정의 극치였습니다.

게다가 진범이 피해자 뤼슈란의 언니 뤼후이메이였다는 반전은 더 억지스럽습니다. 작가가 CCTV와 같은 제약 조건을 너무 많이 달아 놓은 탓에 린젠셍, 옌즈청이 범인이 아니라면 범인은 최초 발견자이자 열쇠를 가지고 있던 뤼후이메이일 수 밖에는 없긴 합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하기 위한 내용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옌즈청이 단기 기억상실을 일으킨 것은 촬영 시 입었던 뇌손상이라는 결정적 이유라도 있지만 뤼후이메이가 본인 스스로를 뤼슈란으로 착각할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거든요. 이런 말도 안되는 착각, 그에 따른 동기보다는 차라리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인간을 응징한다는 린젠셍의 동기가 더 설득력이 넘칩니다.

마지막으로 뤼후이메이가 아친을 살해하려 한다는 결말 역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옌즈청이 진범이라는 옌즈청 본인 스스로의 수사는 당시의 알리바이로 이미 부정된 상황이라 린젠성이 범인이 아님을 증명할 길은 없는데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아친은 그냥 조력자에 운전수 역할 정도일 뿐 탐정 역할은 옌즈청 혼자라 아친을 죽일 이유도 크지 않으며, 살인으로 아친의 입을 막아 봤자 새로운 수사가 시작될 뿐입니다. 어차피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면 세간의 관심을 피할 길도 없고요.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핵심 추리 중 하나인 린젠셍이 엄지손가락을 다쳤을 것이다라는 추리는 주어진 단서 - 서툰 글씨에 이은 당구 약속 취소 등 - 에 비하면 비약이 심합니다. 린젠셍이 범인이 아니라는 이유 중 하나로 조리있게 설명되고 있기는 하지만 많이 부족해요. 엄지손가락으로 힘을 주지 않으면 10센티미터가 넘는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인데 두손을 쓰면 되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전개도 돋보이고 중반부까지의 몰입도는 역대급이지만 이후 억지스러운 반전의 반복으로 힘을 잃은 작품입니다. 재미면에서는 나쁘지 않은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밀정 (2016) - 김지운 : 별점 2.5점


오랫만에 아내와 함께 데이트 느낌으로 감상한 작품입니다. 추석 연휴 때 감상했는데 리뷰는 좀 많이 늦었네요. 현재 흥행 중이라 이런 저런 리뷰와 정보가 이미 인터넷 상에 많이 퍼졌을 터이니 짤막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감상 전에는 독립군들이 조국을 위해 활약하는 그런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금 다르더군요. 좀 오래된 표현이지만 "첩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밀정인지?"를 밝히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니까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긴장감이 제법으로 특히 기차에서 벌어지는 이정출과 김우진, 하시모토가 벌이는 신경전과 추격전은 개중 백미입니다.  마지막 하시모토의 급습, 이윽고 벌어지는 총격전까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계속 이어집니다.
와중에 배신자를 밝혀내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모두에게 다르게 알려주는 장면도 전형적이지만 재미나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무간도>>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특정 조직에서 다른 특정 조직을 없애기 위해 누군가를 밀정으로 파견한다... 그런데 그는 그 다른 조직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는 식의 전개가 똑같으니까요. 조직에서 자신이 배신자라는 것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도 그 처절함이 비슷한 수준이에요.
이를 뒷받침하는 송강호씨의 연기가 아주 출중하다는 것, 그에 반해 공유씨 연기는 조금 처져보인다는 것도 무간도스러웠습니다. '양조위 - 송강호, 유덕화 - 공유'인 것이죠. 송강호씨는 정말 이정출 그 사람이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는데 법정씬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의열단 단장으로 특별 출연한 이병헌씨의 등장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게를 잘 잡아 주었어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너무 길다는 것이에요. 2시간을 훌쩍 넘기는 긴 러닝타임 내내 재미와 흥분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거든요. 초중반까지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설정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왜 의열단원들 모두가 꼭 폭탄과 함께 경성에 잠입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의열단원들은 이정출처럼 중간에 기차에서 뛰어내리면 안 되었던 걸까요?
마지막의 테러도 수많은 의열단원들의 희생을 감안하면 큰 성과는 아닌듯 싶어 보였습니다. 이러느니 군경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게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팠던 시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계기도 되었고 그럭저럭 재미도 있었던 작품입니다. 경성과 상해에 대한 묘사는 해당 시대를 다룬 작품을 창작하는 입장에서 참고도 되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미스테리아 8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별점 3점

미스테리아 8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창간호를 읽고 실망이 커서 더 구입하지 않을리라 결심했었는데 우연찮게 최신호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호는 아주 좋더군요! 이전 실망감을 모두 날려버리고 앞으로 계속 구입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았어요.
우선 1호에서 지적했던 편집, 디자인이 일취월장 했습니다. 구성 면에서 나무랄데 없더군요.
매 호 이어지는 장편 연재물이 없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연재물들도 한회 분량으로 마무리되고요. 잡지를 계속 사 보지 않고 한권만 구입해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으니까요.

수록 기사들 역시 모두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기본은 해 줍니다.
도입부를 장식하는 요네자와 호노부에 대한 심층 분석부터가 괜찮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집중 탐구에서 시작하여 서면 인터뷰, <<빙과>>로 유명한 고전부 시리즈에 대한 심층 분석과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걸작들 9편에 대한 짤막한 소개로 마무리되는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거든요. 자세하고 깊이있는 내용도 많은 편이고요.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아홉가지 레퍼런스' 중 7편을 이미 읽었는데 남은 2편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기타무라 가오루의 '시간과 사람 3부작 <<스킵>>, <<턴>>, <<리셋>> 과 히구치 유스케의 <<나와 우리의 여름>> 입니다. 정확하게는 4편이군요.)

올림픽 시즌을 겨냥한 특집 기사도 볼거리입니다. 올림픽을 물들였던 도핑 스캔들에 대한 짤막한 논픽션, 그리고 스포츠 관련 추리 작품들 소개가 이어지는 구성인데 이 중 도핑 스캔들 기사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의 러시아 도핑 스캔들에 얽힌 뒷 이야기라던가, 동독에서 약물을 복용했던 전 여성 투포환 챔피언이 성전환 수술을 받아 남성이 되었다는 등 그간 몰랐던 내용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스포츠 관련 추리 소설을 다룬 글은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선정된 작품들 대부분이 프로야구 관련 소설 (<<마구>>, <<최후의 일구>> 등)이라 관련성, 의외성 모두 떨어지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신간 소개도 좋습니다. 1호와는 다르게 잘 쓰여진 글들로 한편의 잘 된 리뷰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기 때문으로 도진기의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루스 웨어의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미나토 가나에의 <<리버스>>는 소갯글을 읽고나니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뒤이은 논픽션 기사들 3편 역시 기대 이상입니다. 법의학자 유성호가 쓴, 국내에서 있었던 파트너 범죄를 <<적과의 동침>>,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의 원형인 '엘리자베스 캐닝' 사건을 다룬 <<나를 찾아줘>>, 소설가 곽재식의 우리나라 옛 괴사건을 다룬 <<왜 머리카락을 잘랐을까?>>의 3편인데 특히 <<왜 머리카락을 잘랐을까?>>는 압권입니다. 1966년 발생한 6세 여아 살인 사건을 다룬 글이죠. 범행 동기도 짐작이 안되는 상황, 경찰의 다각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질 뻔 한다... 는 내용에서 극적으로 진상이 밝혀지는데 무척 충격적입니다. 시체의 머리카락이 잘려있던 것이 머리카락을 잘라 판 가출 소녀와 이어지게 되고, 그녀가 머리카락을 팔기 위해 살인 사건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아픈 시대의 아픈 이야기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더군요.

마지막으로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전부 시리즈' 단편이 포함되어 서두의 요네자와 호노부 특집과 이어지는 수미쌍관식 구성에 눈길이 가네요. 3편에 대한 상세 리뷰는 아래에 다시 첨부토록 하겠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전체 분량에서 2/3 이상은 평균 이상의 가치와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기사들과 글들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비교적 읽을 만한 잡지였다 생각되네요. 다음 권도 구해봐야겠습니다.

수록 단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거울에는 비치지 않는다>>
앞서 말씀드렸던 '고전부 시리즈' 단편.
특이하게도 이바라 마야카가 주역입니다. 중학교 졸업 작품 제작 당시 벌어진 사건 - 단체로 거울용 테두리를 만들기로 했는데 오레키 호타로가 자신의 팀 파트를 엉망으로 제출하여 작품을 망쳤던 사건 - 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이바라 미야카가 호타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 팬이라면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겠죠.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큽니다.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제공을 하지 않은 탓이죠. 무엇보다도 거울 테두리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독자가 추리에 동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또 덩굴이 S자라는 것을 수상히 여긴 오레키의 행동도 석연치 않습니다. A라면 모를까, 덩굴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면 S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S를 뺌으로서 나름 정의구현을 한다는 (아사미를 아미로 만드는 것) 결말로 가져가기 위함이었겠지만 억측이 지나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가 모토인 호타로가 왜 직접 뛰어들어 욕까지 사서 먹었는지 역시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팬이라면 읽어봐야 하겠지만 추리적으로는 약한 편이라 감점합니다.

<<사라진 앨리스>>
갓 결혼한 남편이 호텔방을 구하지 못해 아내를 홀로 호텔에 남겨두는데 다음날 아침 아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아내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전혀 남아있지 않죠. 숙박계는 물론 호텔 매니저, 주유소 직원에 결혼식을 주관한 판사마저 모두 사실을 부정하고요.
그러나 손수건에 새겨진 이니셜 하나만을 믿고 형사 에인슬리가 캐넌을 도와 사건을 파헤치게 됩니다. 에인슬리의 논리는 확고합니다. "이 혼란의 핵심은 호텔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어. 실종의 과정보다는 이유를 밝혀내는 게 더 쉬울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 모든 일을 거슬러 점점 앞선 시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앨리스를 처음 만난 저택으로 돌아가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는 걸작이에요. 아내가 사라진 말도 안되는 상황 묘사가 발군인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위기에 처한 여성을 구하는 모험극이기도 한데 특히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서스펜스의 제왕 코넬 울리치'의 작품다운 남다른 몰입감을 자랑합니다. 상황 설정부터가 기가 막히잖아요?

아쉬운 점이라면 서스펜스 스릴러 (아내가 사라졌는데 모든 사람들이 아내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분에 비해 어느정도 진상이 드러난 이후의 모험극 쪽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단점은 아니지만 아내의 존재를 돈으로 막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지 조금 의문이 들기는 하더군요. 존재를 지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니까요.

그래도 작가 명성에 어울리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

<<1908년산 포트와인 독살 사건>>
몬터규 에그는 고객인 보로데일 경을 방문한 자리에서 경이 독살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독은 경이 마시던 포트와인에 들어 있어서 경찰은 몬터규 에그에게 몇가지 확인을 부탁하고, 몬터규 에그는 간단한 조사와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낸다...

도러시 세이어스 여사의 초단편. 이름만 들어보았던 와인 판매원 탐정 몬터규 에그 시리즈입니다.
일단 몬터규 에그 캐릭터만큼은 참 좋았습니다. 약간 허세끼있는 떠벌이로 그가 이야기하는 수다들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그런 캐릭터인데 밉지 않게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영국적인 느낌도 한가득 전해주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완성도가 무척 낮습니다. 추리 자체가 비약이 심할 뿐 아니라 범인과 경찰이 누가 멍청한지 경쟁하는 듯한 느낌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범인들은 왜 희생양을 내세우지 않았을까요? 보로데일 경이 자살하지 않은 것이 밝혀진다면 범행이 드러나는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말이죠?
경찰 역시 멍청함과 무능함으로는 이에 견줄만 합니다. 범행 현장에 있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신원조사를 하지도 않고 무슨 수사를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몬터규 에그 캐릭터 외에는 건질게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은 조금 더 낫기를 바랍니다.

2016/10/09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테쓰야 / 한성례 : 별점 1.5점

스트로베리 나이트 - 4점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택가에서 발견된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버려진 사체. 치과 진료 기록을 통해 피해자는 사무기기 임대 회사 오쿠라 상회의 영업맨 카네하라로 밝혀진다.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착실한 인물로 매월 두번째 일요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것과 최근 급작스럽게 업무에 열의를 보인 것 정도가 수상한 점.
사건을 담당한 히메카와 레이코는 직감적으로 사체는 원래 발견 장소 바로 옆 우치다메 낚시터에 유기될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리한다. 단서는 피해자 복부 사후에 생긴 절창으로 배에 가스가 차 떠오르지 않게끔 하기 위함. 이를 낚시터에서 기생 아메바에 감염되어 사망한 젊은이 사건과 엮어 상부에 설명한 후 낚시터에 대해 긴급 수색을 벌인다. 그리고 낚시터 안에서 다른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잘 나가는 광고맨 나메카와로 그 역시 매월 두번째 일요일의 약속과 최근 급격하게 업무에 열의를 보였다는 것이 일치하는데...

혼다 테츠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첫번째 작품. 2006년도 발표된 작품이죠. 동명의 드라마를 추천받은 적이 있는데 미처 감상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가는 도서관에 책이 있길래  연휴때 읽을까하고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별로였습니다. 세간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도무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요.. <<백야행>>처럼 드라마가 원작을 초월하는 완성도로 제작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요?

아주 약간이지만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정인에게 공개되는 살인쇼라는 설정은 <<호스텔>>과 유사하지만 살인쇼 참가자 중 피해자를 골라낸다는 아이디어만큼은 신선했습니다. 인터넷 뒤에 숨어 즐기는 비겁자가 많은 현대 문병에 대한 비판 같기도 했고요.
또 초반 레이코와 검시관 쿠니오쿠가 국수를 먹으면서 나누는 시체 태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레이코가 이오카와 조를 이루어 카네라하 주변 인물에 대한 사정청취에 나섰을 때 등장하는 취조 방법에 대한 약간의 팁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 말을 기록 한다고 의식하면 입이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오카는 보란 듯이 노트를 덮고 오자와가 입을 열기 쉽도록 유도한 것이었다.)등 몇몇 경찰 수사 과정이나 묘사에서의 디테일도 나쁘지 않습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했던 레이코가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 큰길을 통해, 비디오 대여점과 편의점을 거쳐 집으로 간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가혹 행위를 당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추억과 현재 시점의 사건이 살짝 엮이며 진행되며, 이 소년이 후카자와 (일 것)라는 것은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나 경찰 시점에서 후카자와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호기심을 자아내는 전개도 비교적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너무나 별 볼일 없습니다. 사건의 원인이 매월 두번째 일요일의 만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이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밝혀내는지가 재미의 핵심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허나 이 과정은 나메카와의 친구에 의해 너무 쉽게 해결되어 다음 단계로 진행됩니다. 경찰 수사에 따른 결과라곤 해도 이래서야 너무 시시하죠.

게다가 뒷골목 탐정이라는 타쓰미가 돈 몇푼에 수사의 핵심에 접근한다는 것은 해도 너무한 전개입니다. 약간의 돈과 시간으로 키타미가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이럴 거라면 경찰은 왜 필요한 걸까요?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이나 하는 쓰레기들인데 말이죠. 차라리 경찰을 전부 해고하고 타쓰미를 고용하는게 훨씬 가성비가 높아 보입니다.

소소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만 알고 레이코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기적인 형사 카쓰마타와의 대립, 레이코를 놓고 벌이는 부하 오쓰카 - 키쿠타의 대립 등 수사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드라마가 너무 많아요. 특히 카쓰마타는 상사도 아니고 계급도 같은데 성희롱을 넘어서는 폭언을 듣고도 참아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되더군요.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사실은 카쓰마타도 좋은 경찰이었다!'라는 엔딩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 <<분노의 늑대>>의 야규 캐릭터 변절급인데 앞선 작품들은 수십권의 에피소드를 쌓아놓기라도 했지 이건 뭐... 요새말로 우디르급 태세 전환?

자극적이고 진부한 묘사도 무척 거북합니다. 특히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실체가 살인쇼라는 것이 밝혀진 후 등장하는 고어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히메카와 레이코에 대한 설정 역시 마찬가지, 과거에 당했던 성폭행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긴 했지만 그녀가 경찰이 되게 만들었다는 과거사는 뻔함과 진부함 그 자체입니다. 은인인 시타 형사 이야기는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겠죠.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이고 그녀가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 그것이 과거 성폭행의 결과라는 것 역시 진부하다는 틀을 깨기는 역부족입니다. 여기에 더해 후카자와 유카리가 진범임을 숨기기 위한 장치도 작위적이라 짜증 날 정도에요. 담당 의사라 면담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개인 기록은 당연히 넘겨 줬어야죠. 초반에 주치의가 몇몇 특이 사항만 경찰에 이야기했더라도 사건은 바로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점이라고 했던 살인쇼 참가자 중 피해자를 고른다는 아이디어도 발상에 비하면 디테일은 모두 부족합니다. 참가자 모집 방법도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일 뿐더러, 이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그리고 살아있다라는 가치관을 재인식하게 해줘 삶에 열의를 갖게 한다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 날텐데 말이죠.
또 결국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될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행을 의식한 저속한 펄프 픽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세간의 고평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네요. 세간의 평가는 드라마에만 한정된 듯 합니다. 아주 약간의 장점이 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만, 도저히 후속권을 읽어볼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2016/10/06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이번영 : 별점 3점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6점
이번영 지음/이른아침

정조가 남긴 <<심리록>>을 기반으로,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 내용을 덧붙여 정조 당시 대표적 옥사 18건을 추린 후 사건의 전말과 소송의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책.  참고로 <<심리록>>은 정조가 자신이 관여한 모든 중범죄 소송에 대하여 그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 등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 뒤 이를 묶어 편찬한 종합적인 형사소송 판례집이라고 합니다.

무려 1,850건이나 되는 <<심리록>> 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 18건인 덕분에 기본 재미는 보장됩니다. 소설 형식으로 쓰여져 읽기 편하다는 것 역시 큰 장점이에요. 정조 시절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심문, 최종 판결에 이르는 과정을 사건별로 디테일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도 아주 높고요.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후진적인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두번째는 그것과 비교되는 생각보다 놀라울 정도의 치밀한 과학 수사 및 판결 과정입니다.

문중 며느리가 간음의 소문이 났다는 이유로 친오빠까지 합세하여 물에 빠뜨려 죽인 사건,  소문으로 정절을 의심받은 여인이 소문을 낸 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 동네 천것에게 희롱당해 팔을 잡힌 여인이 작두로 자신의 팔을 자른 사건, 아버지의 원수를 직접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씹고 창자를 몸에 둘렀다는 엽기적인 복수극 등 소문 중심의 동기와 여성의 정절과 인륜을 법보다 중시 여기는 문화, 이어지는 끔찍하고 잔혹한 범행은 굉장히 후진적이죠.

허나 반대로, 범인을 잡은 후 실제 판결을 내리기까지 심지어 10년 이상 걸릴 정도로 집요하게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은 나름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이라 대비됩니다.
일단 수사는 "무원록"을 기반으로 한 검시가 기준이 됩니다. 무원록에 '만삭 여인의 태아가 다치거나 죽은 경우'까지 수록되어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그 상세함과 깊이에 세삼 놀랐습니다. 예전에 "신주무원록"에 대한 책은 읽은 적이 있지만 실제 사건 중심으로 어떻게 무원록이 활용되었는지 설명되고 있어서 훨씬 쉽고 이해하기가 편하더군요.
이른바 "상명의 률", 즉 누군가의 목숨은 다른 목숨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사형에 있어서는 극도로 신중하게 판단하여 임금이 직접 지시와 판결을 내리는 모습도 돋보입니다. 목숨을 중히 여기는 모습에서는 후대에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헛점이 발생한 경우 관찰사 등 관계자까지 처벌하는 꼼꼼함은 외려 지금보다도 나아 보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원수의 간을 씹고 창자를 꺼낸 복수극'의 원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현감과 부사가 제대로 형사사건으로 처리하지 않아 사적인 복수극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후 현감과 부사를 사헌부에서 구속, 처벌케 하는 판부를 내린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격쟁"이라는 제도를 통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고하는 행위도 지금보다 낫고요.

물론 이러한 판결 과정도 후진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심문과 취조는 형벌 중심이라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덕분에 취조 중 용의자, 범인이 장독으로 죽는 경우도 많고요.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또 조카며느리 일가를 도둑으로 몰아 일곱명이 자살하게 만든 사건에서 범인 이경휘에게 '장일백으로 엄중히 처벌하라'라는 지시를 통해 '엄중히' 처벌받은 이경휘가 관문도 벗어나기 전 동헌 뜰에서 숨이 끊어지는 속 시원한 경우도 있어서 필요악이었다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판결을 내리는데 기준이 되는 <<대명률>>에 있는 몇가지 조항들도 후진적입니다. '부모를 죽인 현장에서 살인자를 죽이는 복수는 죄가 되지 않는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를 법전에서 최상위 조항으로 정해놓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분명 악용될 소지도 있고 말이죠.
그리고 정조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실무자들이 철저히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대해 재검토를 지시하거나, 보고와 다른 본인 생각대로의 판결을 내리는건 좋아보이지 않더군요.

이러한 점을 종합해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을 하나 소개하자면 가장 복잡하고 최종 판결까지 오래 걸린 사건인 <<04. 자신의 목을 세 번이나 찔러 죽은 의문의 자살사건>> 입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박여인 사건이죠. 사건부터가 후진적이죠?
반면 시체를 검시하는 과정의 디테일부터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무원록>>을 토대로한 검시관들의 다양한 의견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바보같은 의견도 있지만 - 치명상을 세번 임에도 자살로 판단한 것 등- 목맨 자국이 초검에서는 나타났으나 재검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죽은 뒤 목을 매어 목의 혈맥이 돌지 않은 까닭이라 밝히는 식으로 현대 과학 수사 못지않은 내용도 등장합니다.
또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시어머니와 간통남이 둘의 행각을 며느리에게 들켜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간통남 조광진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밤에 상복을 입고 방문했다는 일종의 트릭이 등장하거든요. 덕분에 당시 예법 상 상제로 상복을 입고 다니던 이차망이 장기간 곤욕을 치루게 됩니다만 수사 중 관계자의 증언으로 결국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도 볼거리이고요.
한마디로 후진적 사건을 해결하는 과학 수사와 단서를 조합하는 추리가 결합된 잘 짜여진 이야기였습니다.
간통남으로 몰린 이차망이 석방 전 옥사하고, 진범인 간통남 조광진도 심문 중 사망한다는 것 역시 앞서 말씀드린 형벌 중심의 후진적 취조 과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놀랍고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대동소이합니다. 소설 형식으로 구성되어 읽기도 편하고요. 조선 시대 (후기)의 형사 사건 수사와 판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셔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6/10/03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유승훈 : 별점 2.5점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6점 유승훈 지음/살림

한국의 도박사를 다룬 미시사 서적.
도박은 제의와 점술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이론에서 시작하여 신라, 백제, 고려, 조선, 근현대에 걸친 각종 도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박에 관심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주제임에는 분명하죠. 또 제가 좋아하는 미시사 서적이기도 해서 주저없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목차는 크게 9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개인적으로는 "윷놀이", 조선을 주름잡았던 "쌍륙"과 "투전"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도박들에 비하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될 뿐더러,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백제인의 저포, 윷놀이의 조상인가>>에서 소개되는 윷놀이는 중국의 저포에 가깝지만 한국에 특화되어 토착화된 것이라는 기원에서부터, 윷놀이 판이 하늘의 천체를 상징하며 말이 가는 길은 해가 가는 길로 비유된다는 것, 도개걸윷모의 확률 - 윗면이 곡면이라 확률은 평면 대 곡면이 6:4,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걸-개-웇-도-모 순으로 나오게 됨 - , 윷사위 이름의 유래 - 도 : 돼지, 개 : 개, 윷 : 소, 모 : 말, 걸은 다양한 이론 존재 - 등 내용 모두가 흥미로왔습니다.
<<양반과 기생, 쌍륙판에서 내기를 벌이다>>와 <<조선후기의 투전, 도박의 전성시대를 열다>>에서 소개되는 쌍륙과 투전은 고전 소설이나 근대 개화기를 다룬 미시사 서적에서 간혹 접했을 뿐 그 정체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어떤 것인지를 도판과 함께 설명해주어서 나름 만족스럽네요. 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투전 - 짓고땡과 거의 동일! - 에 비하면 쌍륙은 소개된 내용 정도로는 시도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조금 아쉽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가려운데는 긁어준 듯 합니다.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가 여진족과 쌍륙 승부를 할 때 원하는 숫자가 나오도록 조작한 주사위로 야바위를 쳐서 이겼다는 고사와 같이 사료로 확인되는 관련 일화들도 자주 등장하여 이해를 돕고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어지는 식민지 시기 화투 이야기도 상세합니다. 매국노 이지용의 도박 중독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접했었지만 당시 '골패 세령'이라는 것이 제정되었다는 등 새로운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록 내용 모두가 기대에 값하지는 않습니다. <<신라의 귀족. 주사위 놀이로 밤을 지새다>>는 안압지 출토 주사위를 가지고 풀어나가는 이야기인데 근거부터가 도박과는 거리가 있어서 주제에 걸맞지 않거든요. 고려시대의 격구를 스포츠 도박이라고 장황하게 소개하는 <<고려시대의 격구는 스포츠 도박이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격구가 도박일 수는 있지만 "스포츠"에 더 가까운 것인데 비약이 너무 심했어요. 그리고 현대 이후 고스톱을 다룬 부분은 관심사와 다를 뿐더러 내용도 특별하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울러 저자가 연구자일 뿐 도박과는 거리가 멀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래서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소개되는 도박의 "방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아쉽습니다. 뭐 비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묘수 정도는 소개해 주는 것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한국 최초의 도박사(史)라는 점에서 의의를 둘 만 하지만 내용의 깊이가 아주 깊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도판 및 책의 장정, 디자인은 그냥 무난한 수준이고요.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출판사가 "살림 지식 총서"로 유명한 살림 출판사인데 흥미로왔던 주제 (윷놀이, 투전과 쌍륙)를 살림 지식 총서처럼 분권으로 출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유령 군함 사건 - 시마다 소지 / 김동주 : 별점 2점

러시아 유령 군함 사건 - 4점 시마다 소지 지음, 김동주 옮김, toi8.스즈키 쿠미 그림/영상출판미디어(주)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타라이와 이시오카의 지인인 영화배우 레오나가 그녀가 받은 기묘한 펜레터를 두명에게 보내준다. 미타라이는 내용에 깊은 흥미를 보이고, 둘은 펜레터에 쓰여진 하코네의 호텔을 방문한다. 목적은 본관 1층 매직룸의 사진을 보기 위함. 그리고 1919년, 하코네에 나타났던 "러시아 유령 군함"에 대한 사진과 함께 괴담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이 미국의 안나 앤더슨, 그리고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타라이는 이후 몇가지 조사와 추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게 된다.


시마다 소지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기나긴 연휴를 버티기 위해 별 생각없이 집어든 책. 제목만 봤을 때에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국명 시리즈"류의 작품이라 여겼는데 읽어보니 "아나스타샤 황녀"를 소재로 한 작품이더군요.

자신을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던 미국인 안나 앤더슨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안나 앤더슨과 그녀의 미국 정착을 도운 남편 마나한의 비참하고 불행한 말년 - 집은 개와 고양이 배설물로 엉망인데다가 죽을 때까지 이런저런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렸다 - 에 대해서는 처음 알긴 했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안나 앤더슨의 주장과 수수께끼는 이미 많은 매체와 컨텐츠를 통해 상세하게 검증된 바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지금은 안나 앤더슨의 주장의 진위는 이미 판명난지 오래라 이미 쉬어버린 떡밥입니다. 거의 10년 전 DNA 검사를 통해 그녀가 로마노프 황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안나 앤더슨이 진짜 아나스타샤라는 내용입니다. 아직 안나 앤더슨 주장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던 2001년 작품인 탓으로 문제라고 볼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잘 알려진 역사 속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재미의 핵심이고요.

이 부분에서 경쟁, 유사작과 차별화되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안나 앤더슨의 주장의 큰 맹점 중 하나인 "왜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중 미타라이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이론으로 '두개골 부상 당시 뇌손상을 입어 특정 언어에 대한 회화 능력을 잃고 극심한 정신병이 생겼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뇌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만큼 아이디어만큼은 정말 칭찬해주고 싶어요. 최소한 안나 앤더슨의 정신병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이 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물론 미타라이가 소설 속에서 강하게 주장한 "뇌의 모국어 담당 영역이 손상되고 외국어 담당 영역이 무사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라는 것 자체가 검증되지 않았단 문제는 큽니다. 이렇게까지 전례가 없는 뇌손상이 가능했을까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요. 뭐 소설 속 재미있는 가설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 싶네요.

이것 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러시아에서 탈출했는지에 대한 해석 역시 볼만합니다. 탈출 시 제공된 로마노프 황제의 금괴를 이용한 꽤 그럴듯한 설명이 등장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제목인 "러시아 유령 군함" 입니다. 소설 속에서 1919년 하코네 호수에 나타난 러시아 군함을 의미하죠. 정체는 당시 존재했던 도르니에의 거대 비행정이라 설명되고 있습니다.
물에서 뜨고 내릴 수 있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등 나름 조건에 부합합니다. 게다가 날개, 프로펠러만 뺀다면 물 위에 떠 있는 배라는 것도 맞고요. 여러모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좋은 점은 이 정도고... 아쉽게도 시마다 소지 작품답게 전개상의 헛점과 억지가 상당하다는 것은 큰 단점입니다. 아나스타샤가 감금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어떻게 탈출하였는지는 정작 설명되지 않는게 대표적이죠. 구라모치와 독일로 향한 후 베를린에서 갑자기 착란을 일으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 역시도 엉터리고요. 히틀러가 환영했다는데 자살 소동을 벌일 이유는 없죠. 이러한 설정 구멍 모두의 이유로 정신 이상을 내세우는 것은 비겁해 보였습니다.
또 아나스타샤와 황제 가족에게 닥친 잔인했던 능욕의 현장 묘사는 불필요했으며, 이후 아나스타샤가 성폭행으로 잉태한 아들이 일본에서 아나스타샤와 사랑에 빠졌던 일본군인 구라모치에게 입양되어 '네무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영 와닿지 않더군요. 작중 설정대로라면 네무리가 로마노프 가문의 정통 후예임은 분명한 만큼 당연히 일본 정부에서 관리했어야 하잖아요?
홀로남은 러시아 황녀가 일본군인 구라모치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솔직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고요.

그리고 왜 미타라이 시리즈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스탠드얼론 작품으로 그려냈더라면 훨씬 완성도가 높았을 것 같아요. 미타라이가 다국어에 능통한데다가 뇌과학 전문가, 그리고 직접 로마노프 왕가 유골 발굴까지 참여했다는 등 설정 비약이 너무 심하고 이시오카 역시 정말 하는게 없으니까요. 이럴 바에야 일본인은 일본 현지 후지야 호텔의 러시아 유령 군함 괴담과 사진을 미국 저널리스트 제레미에게 연결시키는 정도의 역할 정도만 수행하고 제레미가 모든 것을 밝혀내는 전개로 가져가는게 더욱 깔끔하고 보기도 좋았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시리즈에 욕심을 낸 탓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결과물이라 생각되네요.

요약하자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역사 속 미스테리를 기발한 아이디어를 덧붙여 소설로 만들었다는 점은 인상적이기는 합니다. 설득력이 아주 높다거나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배울게 많거든요.
허나 앞서 말씀드렸듯 단점이 명확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역사 속 미스테리를 다룬 <<진리는 시간의 딸>>이나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실제 사건을 변주한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등 쟁쟁한 미스테리 실화소설 경쟁작에 비하면 완성도도 턱없이 부족하며,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이야기라 지금 읽기에 시효가 다 되었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긴 하였으나 이러한 이유들로 추천드리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2 - 니토리 고이치 / 이소담 : 별점 2점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2 - 4점 니토리 고이치 지음, 이소담 옮김/은행나무

전편을 읽고 호감이 생긴 덕에 연이어 읽게 된 2권.

그러나 모든 면에서 1권에 미치지 못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런 류의 요리 전문가 이야기에서 최악이라 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 먹고 한건 해결!" 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3편 중 2편, <<가미나리오꼬시>>와 <<사쿠라모찌>>가 그러합니다. 단절된 부자관계가 맛있는 오꼬시 과자를 먹은 후 회복되고, 대입 실패 충격으로 거식증에 걸린 아가씨가 모찌떡을 먹고 식욕을 회복한다... 인생사가 이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1권에서도 마지막 이야기가 이러해서 조금 불안했는데 역시나,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가 않는걸까요.

물론 즐길거리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화과자 장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소소한 드라마를 해결해 나간다는 전개 자체는 나쁘지 않고, 이에 따라 각 이야기별로 등장하는 화과자들은 충분히 볼거리이긴 하거든요.
그리고 캐릭터 관계가 1권에 비하면 한발자욱 더 나아가는 것도 시리즈 독자로서 반가운 부분이었습니다. 구리타와 아오이의 관계, 아오이의 성이 호죠라는 것, 그녀가 대단한 집안의 딸이라는 암시 등이 그러하죠. (그런데 이 장면은  <<맛의 달인>> 1권에서 신선한 재료를 위해 목장으로 유우코를 데려간 지로에게 목장 사람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장면과 똑같습니다... 이 정도면 일종의 클리셰라고 해도 무방할 듯?)
그 외 변두리 오래된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인간 관계, 아사쿠사 곳곳을 발로 누비며 쓴 듯한 디테일한 배경 묘사도 여전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훨씬 많기에, 그리고 기본적인 재미가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4권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1권은 그럭저럭, 2권은 실망이라 3권을 읽어야 할지 망설여지는군요. 점수가 갈수록 떨어지는 추세로 보면 안 읽어야 할 듯 싶은데, 일단 추이를 좀 지켜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이니 읽으시기 전 참고 부탁드립니다.

<<가미나리오꼬시>>
오코노기라는 남자가 오꼬시 과자를 찾는다. 이유는 아내와 사별한 후 멀어진 아들 가즈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구리타와 아오이는 이런저런 추리로 즐겨 먹었음직한 가미나리오꼬시 과자 가게를 추천해주고 심지어 직접 만들어 주기까지 하지만 아들은 강한 거부감만 보이는데...

등장하는 화과자는 아사쿠사의 명물이라는 가미나리오꼬시입니다. 구리타가 직접 만드는 묘사를 통해 재료와 제법까지 자세하게 소개되는데 묘사와 설명 모두 맛깔집니다.
또 "왜 가즈야가 가미나리오꼬시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괜찮습니다. "오꼬시"라는 화과자가 사실은 2개 - 도쿄의 가미나리오꼬시와 오사카의 아와오꼬시 - 라는 것이 답으로 화과자에 대한 전문 지식과 수수께끼가 잘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구리마루당을 습격한 가즈야가 오사카 사투리를 쓴다는 묘사로 비교적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좋았고요. (물론 한국인 독자에게는 별로 공정치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엇나가기 시작한 아들과의 극심한 갈등이 과자 하나로 해결된다는 전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완전한 사족일 뿐입니다.
<<맛의 달인>> 에피소드 중 코이즈미 국장이 아들에게 '급제죽'이라는 요리를 해 주고 관계를 회복한다는 에피소드와 굉장히 흡사한데, 100여페이지에 이르는 중편 소설이 30여페이지도 안되는 만화 단편과 흡사하다는 것 부터가 문제죠.
참고로 구리마루당에서 날뛰는 가즈야가 구리타의 눈빛에 제압당하는 묘사도 만화적이라 아주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오꼬시가 사실은 2개였다는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았기에 억지스러운 부자 화해보다 다른 이야기로 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주>>
구리타와 아오이는 아사쿠사 연예홀로 향한다. 평상시 단골인 라쿠고가 슌코테이 후쿠미미의 주문인 만주를 배달하기 위한 것.
그리고 공연을 감상하던 커플은 후쿠미미의 스승 다이쇼의 호출로 후쿠미미가 급작스럽게 잠들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수면 유도제가 든 만주를 먹은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3명의 용의자가 떠오르는데...

나름대로 진지한 범죄가 등장하는 추리물. 엄연히 독(?)을 먹인 것이라 일상계로 보기는 무리죠.
여튼,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 라쿠고 <<만주가 무서워>>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만주를 실컷 먹고 "지금은 녹차가 무서워"라고 이야기했다는 라쿠고로, 이 라쿠고를 공연하려 한 후쿠미미가 만주는 먹었지만 음료수를 먹은 흔적이 없다는 것에 착안한다는 식으로 본편과 이어지는 전개는 꽤 절묘합니다.

하지만 추리는 비약이 심합니다. 만주와 어울리는 음료수는 우유일 것이라 단정짓는 것 부터가 비약이죠. 또 범인을 끌어내기 위해 쓰레기장으로 향한다는 전개도 어색해요. 쓰레기장에서 우유팩이 한개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우유팩이 발견되더라도 범인이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요.
그리고 만주는 도구에 불과할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단팥빵의 기원이 만주라던가 하는 식으로 화과자에 대한 정보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조연 수준도 안되는, 단순한 먹거리에 불과합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 화과자의 이야기의 조화인데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어요.

후쿠미미의 강철 체력 때문에 힘들어한 제자 고미미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동기 정도만 참신할 뿐 별로 건질만한 내용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사쿠라모찌>>
오랜 라이벌 아사바의 부탁, 그것은 대입 실패로 거식증에 걸린 여동생 가에데를 위해 사쿠라모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쿠라모찌의 핵심인 벚나무 잎을 구할 수 없는 계절에 구리타는 장인의 자존심을 걸고 분투하는데...

추리물도 아니고, 음식 하나로 모든게 해결된다는 단점만 가득한 마지막 작품. 사쿠라모찌를 만드는 과정이라도 재미있게 풀었어야 했는데 그 역시 실패입니다. 무엇보다도 구리타의 행동은 영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장인의 자존심을 걸고 벚꽃잎을 얻어오지 않겠다!라고 결심해서 모찌 제작이 벽에 부딪히는 과정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벚꽃잎 (화과자의 70%)은 이즈의 한 공장에서 만들어 납품하니 공장에 가서 벚꽃잎을 받아오자!라는 마무리가 참으로 황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럴거라면 공장에 가서 받아오나 동네 가게에 가서 얻어오나 결국 같은거잖아요?

앞서 말씀드렸듯 사꾸라모찌로 모든게 해결되는 결말도 최악입니다. 거식증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서 나을 수 있는 병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심리적 문제가 크다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몸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작품 속 등장하는 말 - 곤란할 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다정한 사람이 옆에 있어준다 - 은 짠하게 와 닿으며 고토토이라는 지명, 미메구리 신사에 대한 설명 등 아사쿠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여전히 좋습니다. 구리마루당을 살리기 위한 신제품 홍백 사꾸라모찌 설정도 나쁘지는 않아요.
허나 전개가 이래서야 도저히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