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커시블 - ![]()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학교는 계속해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맨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 하루카
나는 란카에게 계속 빚만 지고 있다. 원래라면 경계해야 할 사태다. 남에게 뭔가를 빚지는 것은 안 좋은 일이다. 갚을 가능성이 없을 때는 특히 그렇다. - 하루카
이무기는 확실히 마을에 도움이 됐어. 하지만 역할이 끝나면 결국은 괴물이란 말이지. 더는 필요가 없어. - 무언가를 해 준 뒤 죽어나간 사람들을 빗대어 미우라 선생이 하는 말. 타지 사람들도 괴물과 다를 게 없다...
아버지의 횡령 사건 이후 하루카는 도망치듯 의붓 어머니의 고향 사카마키 시로 이사왔다. 가족은 의붓 어머니와 짐 같은 의붓동생 사토루 뿐이었다. 아버지의 범죄로 이전 학교에서 따돌림 당했던 탓에 하루카는 새 학교 적응에 사력을 다했고, 다행히 같은 반 린카와 친해졌다.
하지만 사토루의 기묘한 예언이 시작된 후, 그것이 마을에 전해지는 다마나 아가씨 전승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하루카 앞에 기묘한 일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것을 알려준 학교 선생 미우라마저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지는데...
요네자와 호노부가 2013년에 발표했던 장편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왠지 장편보다는 단편에 능한 작가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장편도 좋은 작품이 있지만, 저는 단편을 압도적으로 많이 읽었던 탓이 큽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장편인데 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넘칩니다. 제 선입견을 좋은 의미로 깨 주네요.
우선 호기심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초반부 하루카 시점에서 묘사되는 몰락해가는 시골 마을 사카마키시와 아버지가 횡령 후 사라진 뒤에 새어머니, 의붓동생과 이사왔다는 고시노 하루카의 집안 사정이 드러나는 과정은 별게 없습니다. 하지만 의붓동생 사토루가 기묘한 행동을 보이는 부분부터 긴장감이 쌓여나가기 시작하는데,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특히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다마나 아가씨" 설화와 현대의 고속도로 유치를 둘러싼 암투를 결합시킨 부분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 동안 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이야 이런저런 작품들을 통해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가 대표적이었지요 - 많이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설화 바탕 작품들은 설화 속 사건과 비슷한 상황이 일어난다던가, 설화 속 등장인물을 코스프레한 범인이 등장하는 일종의 "재현" 수준에 그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처럼 설화와 현대 이슈를 엮어 전개하는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마을을 위해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자살하는 다마나 아가씨 - 마을을 위해 소원을 들어주고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 실력자 - 라는 전승이 현대에도 그대로 재현된다는 설정이거든요.
또 설화와 엮어 사토루에게 특수한 능력이 있는 듯 묘사하다가, 이 모든 게 사토루의 유아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거대한 작전이었다는 걸로 이어지는 구조도 깔끔합니다. 이 과정에서 린코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녀가 진짜 다마나 아가씨였다는 반전을 드러내기 위한 각종 장치 역시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또 하루카 혼자 마을 전체와 대결하는 대결 구도는 폐쇄적 시골 마을 주민 대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구도("이끼"?)라 약간 식상하지만, 자주 사용될 만큼 효과적이라는 걸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마을 주민들의 행동이 갈수록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전개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타지 중학생으로 살아남기 위한 하루카의 눈물겨운 노력도 볼거리에요. 어떻게 하면 따돌림당하지 않고 보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니까요. 이를 위해 처음에는 의붓 동생을 귀찮고 창피해하며,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일한 친구 란코에게 의지하던 평범한 소녀가 점차 성장해 가는 과정도 잘 그려집니다. 특히 동생을 구하기 위해 도둑질까지 시도하는게 의붓어머니의 통보로 명목상의 가족이 해체된 후라는 점은 인상 깊습니다. 허울은 깨졌지만 보다 굳건한 심지가 남았다는 의미로 둘의 관계가 정말 가족이 된 것은 물론, 이후 하루카가 남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보다 당당하게 나아갈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을에서는 최고 위치라 할 수 있는 다마나 - 린코와 대등한 위치에까지 올랐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의붓 어머니에게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 하루카 캐릭터는 요네자와 호노부 캐릭터 중에서도 불쌍하기로는 따를 인물이 없지만, 이런 점을 보면 뛰어난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 님 리뷰대로 요네자와 작품 중 가장 희망적인 작품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이 모든걸 뒷받침하는 묘사도 탁월합니다. 특히 미우라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5년 전 교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하루카가 떠올린 순간의 묘사는 압권이에요. 다리 위에서 란코가 사토루에게 기묘한 웃음과 함께 귓속말을 하는 장면인데... 영상이 머릿속에 떠오를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영상화한다면 이 장면만큼은 정말 엄청날 것 같아요.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고속도로 유치에 아무리 마을의 사활을 걸었다 하더라도 단지 유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보고서 때문에 사람이 죽고 마을 전체가 거대한 작전을 벌인다는 것은 설득력이 높다고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이런 맹목적 광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요. 의붓 어머니가 아무리 살기가 팍팍해도 자기 친아들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마을에 선뜻 넘긴다는 것도 부모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또 요네자와 작품답게 분명 '공정'한 작품이지만, 너무 공정한 것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가짜 다마나가 먹는 음식, 란코가 온모밀에서 파를 빼고 먹는 묘사, 사토루가 무언가를 숨기는 장소에 대한 과한 설명 등은 독자에게 너무 눈에 띕니다.
마지막으로 중학교 1학년이라는 하루카의 나이는 너무 낮아요. 추리력과 행동력 모두 고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어울리는 수준이니까요. 작가가 "성장기"로 그리고 싶어서 나이를 어리게 설정한 것 같은데, 좋은 설정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단점들 탓에 읽는 재미는 뛰어나고 지역 전승 설화와 현재의 문제를 엮는 솜씨는 탁월하나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하루카 캐릭터만큼은 마음에 들었던 만큼 단편으로라도 다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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