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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무뢰한의 죽음 - M.C. 비턴 / 전행선 : 별점 2점

무뢰한의 죽음 - 4점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실라가 약혼자인 극작가 헨리 위더링을 로흐두로 데려오고, 약혼 파티가 시작된다. 초대 손님 중 피터 바틀릿 대위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킨 유명한 사교계의 무뢰한. 이 파티에서도 여지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다가 어느날 아침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된다. 처음에는 사고사로 생각되었지만 해미시 순경이 몇가지 단서로 살해되었음을 밝혀내고, 이에 동기가 명확한 파티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가 펼쳐진다. 결국 은행가 프레디 포브스그랜트가 체포되지만 그 다음날, 프레디의 아내 비라마저도 독살당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M.C. 비턴의 해미시 순경 시리즈 2작. 1작이 마음에 들었기에 곧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시리즈답게 전작에서 이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아서 즐겁더군요. 우선 주인공 해미시 순경의 독특한 설정이 더욱 보강되어 소개되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사냥은 그를 미워하는 할버턴스마이스 대령까지 인정할 정도로의 전문가이며, 달리기, 사격, 낚시, 심지어 체스 대회까지 나가면 우승하는 다양한 능력에다가 전작에서도 등장했던, "시골 마을 인간 관계를 사건에 대입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해 명료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통한 심리 분석, 게다가 '속기'까지 가능한 슈퍼맨으로 묘사됩니다! <<홍반장>>의 추리 소설 버젼이라고해도 무방하죠. 전작에서 이어지는 캐릭터들도 반갑운데, 이름만 등장했던 (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밀렵꾼 앵거스 맥그리거가 직접 등장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고루하면서 부패하고, 그리고 난잡한 부르조아들에 대한 고전스러운 묘사도 여전합니다. 작가가 이런 묘사를 너무나 하고 싶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질만큼 애정도 묻어나고요. 부르조아인 '무뢰한' 바틀렛은 알고보니 나름 능력자이며, 그를 죽인 평민 헨리 위더링이 '속물'에 불과하다는 진상만 보아도 작가가 부르조아들을 동경하고 있는게 증명되지 않나 싶습니다.

단, 이러한 점들이 장점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작에서 이어지는 블레어 경감 캐릭터는 전형적 악덕 경찰 상사 캐릭터로 너무 뻔합니다. 분명 전작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 마음을 터 놓았다 싶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으며, 블레어가 성공을 독차지하는 결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고전스러운 묘사도 너무 정도가 지나칩니다. 한국 근대를 연상케 하는, "장남"의 가족 부양 의무가 중요하다고 소개되는 등 기본 설정부터가 고전적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만... 분명 밀땅을 하고는 있지만 스스로의 주제를 파악하고 프리실라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해미시의 행동, 부모님이 좋아하는 약혼자가 있지만 해미시를 향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프리실라 두 명 모두 현대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답답하거든요.

하지만 추리적인 부분에 비하면 이런 단점들은 사소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어요.
물론 좋은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범인의 의외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동기만큼은 아주 괜찮았으니까요. 범인이 정말로 뜬금없기는 하지만, 동기 자체가 파티에서 비롯되었으며,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동기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은 편입니다.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도 전작보다는 나아진 점이고요.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추리의 과정은 그닥 인상적이지는 못해요. 우선, 보다 공정한 전개를 위해서 파티에서 푸루니(푸루넬러)의 말로 헨리의 히트작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바틀릿 대위가 알았다는 부분은 좀 더 보강했어야 합니다. '파티 후반부에 바틀렛이 푸루니를 유혹하여 끌고간 후 연극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는, 뒷부분에 프리실라와 푸루니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덧붙였더라면 아주 좋았을거에요. 아니면 최소한 해미시가 <<공작 부인의 연인>>을 관람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정도로라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대령의 과거 사생활을 이전에 여러 채널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스캔들 중 하나가 연극의 핵심 내용이더라... 정도로 말이죠.
해미시 스스로 이 사건의 범인은 익숙한 사냥꾼일 것이다, 이유는 총알을 바꿔넣을 정도로 충분한 여분의 탄환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것을 스스로 뒤엎는 결말도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독자의 헛다리를 유도해 놓고 그냥 발을 빼버리는 것이잖아요? 별다른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울러 비라를 살해한 범행의 동기, 방식과 과정 모두 운과 우연에 의지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동기부터 이야기하면, 바틀렛이 함께 밤을 보낸 3명의 여성 중 비라에게만 연극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범행 도구인 쥐약도 우연히 입수한 것이며, 그녀가 단 것에 사족을 못 쓴다는 약간의 복선이 있기는 하지만 독이 든 케이크를 먹어치운다는 것도 보장하기 어려운 일종의 사고에 불과합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저녁을 못 먹는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는 정도의 묘사는 필요했어요.
여튼, 이 시리즈는 두 편 밖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살인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장점, 단점 모두 전작과 비슷합니다. 추리적으로 조금만 괜찮았어도 계속 읽어볼텐데 애매하네요. 다음 권을 읽어봐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2017/08/26

악녀 (2017) - 정병길 : 별점 2점

 

옥수수 앱에서 몇주 전 토요일, 무료로 풀렸기에 보게 된 작품.

기대했던 액션은 역시나 대단했습니다. 특히 시작하자마자 휘몰아치는 첫 액션 시퀀스는 그야말로 대박이에요. 1인칭 시점에서 펼쳐지는 독특함도 좋지만 그야말로 날이 선 칼을 휘두르는 맛이 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저씨'를 쫓는 시퀀스도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요.

그러나 이 두 장면을 제외하면 건질건 없습니다. '이야기'가 부재하기 때문에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러닝 타임은 2시간이 넘는데 밀도있는 스토리 라인을 그리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의 복수를 위해 한 조직을 숙희(김옥빈)가 절딴내고 경찰에 체포된다. '아저씨'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안 숙희에게 국정원이 킬러로 일할 것을 제의하고, 딸의 행복을 위해 숙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던 어느날, 타겟이 죽은 줄 알았던 '아저씨'라는 것을 알게된다" 까지는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지만 그나마 괜찮아요. 하지만 이 뒤 부터는 엉망진창입니다. 제대로 이야기를 수습하기는 커녕 쓸데없는 이야기만 벌려놓거든요. 그나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요. 왜 신하균이 김옥빈을 배신하죠? 왜 신하균이 딸까지 죽이죠? 왜 신하균이 중간에 김옥빈을 풀어주죠? 스토리 라인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글이 인터넷에 많은 것을 보니 저만의 생각은 아닌듯 싶더군요.
이상하게 겉 멋 든 장면들도 부담스럽습니다. 결혼식 당일, 김옥빈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저격총을 드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평이 좋다는 오토바이 추격 씬에서의 칼부림 액션도 마찬가지, 총이 있는데 왜 장검을 휘두르며 쫓아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불필요한 이야기는 다 정리해버리고, 이야기를 압축해서 전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아저씨'는 정말 나쁜 놈이고, 김옥빈을 '악녀'로 만들어서 김옥빈은 '아저씨'를 죽이는게 맞다는 식으로 몰고 가려면, 괜히 아저씨와 밀땅하는 내용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때 날 안 죽인건 실수였어! 캬캬캬!" 하면서 한판 붙는게 더 명확하죠. 국정원 요원과의 로맨스 역시 불필요한 요소였고요. 아니면 여러모로 <<니키타>>가 바로 떠오르는데, 설정만 한국화해서 <<니키타>>를 번안한 작품으로 만들던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뭐 터미네이터에게서 감정 연기를 기대하지 않듯이, 액션 영화에서 대단한 이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도가 너무 지나치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2017/08/25

험담꾼의 죽음 - M.C.비턴 / 지여울 : 별점 2.5점

험담꾼의 죽음 - 6점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어와 송어 낚시 전문 로흐두 낚시 교실"에 낚시를 배우기 위해 8명의 수강생들이 모인다. 그러나 그들 중 '레이디 제인'이라는 여성은 엄청난 재앙 덩어리였다. 그녀의 특기는 낚시 교실 참가자들의 뒷조사를 통해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 다른 수강생들과 낚시 교실 운영자 존과 헤더 부부마저 그녀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4일 째 되는날 레이디 제인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의 순경인 해미시 맥베시 시리즈 제 1작입니다. 눈에 띄는 점은 정통 영국 미스터리, 그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스타일을 쏙 빼닮았다는 점입니다. 시골 촌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부르조아들과 계급 문화 등 바탕이 되는 설정이 굉장히 영국적이라는 점, 시골 촌 마을의 인간 관계가 여러 사건 관계자들의 경우와 맞아 떨어져 추리의 바탕이 된다는 점,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이고 싶어한 험담꾼 레이디 제인의 설정과 그녀의 협박 재료들 모두 그야말로 여사님의 재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덕분에 지금 읽기에는 좀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묘사부터가 빅토리아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1985년 작품이라고 하는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부유한 상류층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속셈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 소집단 형태 부터가 별로 현대적이지 않잖아요? 게다가 로맨스 관련 이야기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진부합니다.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인 앨리스는 20세기 아가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순진해 빠졌으며, 해미시 순경과 지역 유지의 딸 프리실라의 로맨스 역시 고루하기 짝이 없거든요. 전형적인 부자집 망나니 제레미도 켸켸묵은 설정인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그래도 현대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캐릭터들이 적극적이고 입체적이기는 하거든요. 레이디 제인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은근하게 사람들을 상처주던 여사님 작품 속 할머니나 부르조아 귀부인과는 다른, 직접적 짜증 유발자로 작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독자마저도 분노케 만들만큼 캐릭터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최근작 중 이렇게 누구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캐릭터는 오랫만이네요. 앨리스가 제레미에게 넘어가 밤을 같이 보내는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여사님 작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나름 현대적인 부분일테고요.
해미시 순경 역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할 말 다 하는 독특한 인물라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레이디 제인이나 찰리 백스터의 어머니에게 일갈하는 장면은 개중 백미입니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조리있게, 할 말 다 하는 캐릭터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데 굉장히 잘 그려져 있어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탐정 역할로도 괜찮아서 앞서 말씀드린 미스 마플 스타일의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추리력에 더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다면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지론도 인상적입니다.
아울러 로흐두라는 마을과 주변 묘사의 디테일도 상당한 수준이며, 이야기의 큰 축인 낚시 교실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져서 여정 미스터리의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해미시 순경 등 멋드러진 캐릭터만으로는 역부족이네요. 여러모로 원조 여사님 작품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적으로는 실망스럽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소소한 시골 마을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사건에 접목하는 추리 방식이라던가 마지막에 해미시 순경이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추리쇼를 벌이는 등의 추리 과정만큼은 고전 스타일인데, 실제 '추리'는 전혀 고전 본격물스럽지 않아요.

일단 공정하지가 않습니다. 핵심 단서인 "BUY BRIT...", 그리고 스트리퍼 에이미에 대해 순경이 알아낸 정보를 독자에게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죠. 독자도 에이미 로스가 "레드훅"이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순경이 인맥을 통해 전화를 걸어 알아낸 정보를 독자가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 핵심 단서 들도 헛점이 너무나 많아요. 스트리퍼가 성공해서도 과거 예명을 계속 사용한 이유, 술잔이 비었을 때 호텔이라면 마땅히 종업원이 있어야 하지만 에이미가 모두에게 술을 따라준 이유 등 핵심 단서 역시도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나마의 사진도 '증거'라고 밀어붙이기는 영 부족할 뿐더러, 무엇보다도 밀렵꾼에게 목격되었다는 말로 자백을 유도한 것은 최악이었습니다. 정통 본격물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탐정의 야바위 짓이라 생각되거든요. 살해 동기도 영 시원치 않고요. 이럴거라면 차라리 소거법으로 근거를 보강했어야 합니다.
  • 어린아이인 찰리 백스터는 거구의 레이디 제인을 살해해 옮기기 어려우니 제외.
  • 앨리스는 과거의 치부를 이미 제러미에게 밝혔기에 드러난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니 제외.
  • 제러미와 프레임 소령의 비밀은 아는 사람은 다 알 뿐더러 알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알려진다고 해도 본인이 창피할 뿐 해가 될 일은 당장 없기에 제외.
  • 대프니의 과거 정신병 이력이야말로 드러난다고 해도 무엇 하나 해로울 게 없기에 제외.
  • 존과 헤더 부부가 살해했다면 최소한 존의 낚시에 시체가 걸려 끌려 나오도록 처리하지는 않았을터이니 제외.


그러면 결국 정계 진출을 노리고 있지만 과거가 드러나면 위태로울 수 있는 마빈 로스와 에이미 로스 부부만이 남게 되니, 여기서부터 해미시의 조사 결과와 추리를 이어가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그래도 적당한 내용, 묘사, 분량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현대적인 캐릭터들도 볼거리이고요. 비록 추리적으로는 꽝이더라도 현대물에 여사님의 작풍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텍스트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2.5점. 해미시 순경은 마음에 들었기에 후속권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코지 미스터리'라고 분류하고 연애질이나 해 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인 부분도 적절하고, 책도 예쁘게 잘 나온 편이니까요.

2017/08/20

시노다 과장의 삼시세끼 - 시노다 나오키 / 박정임 : 별점 2.5점


시노다 과장의 삼시세끼 - 6점
시노다 나오키 지음, 박정임 옮김/앨리스

알라딘의 신간 소개글을 인상적으로 읽고 기억에 담아 두었다가 구입한 책.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제목 그대로, 평범한 직장인 시노다 과장이 무려 23년간, 1990년 ~ 2013년까지 매일 무엇을 먹었는지를 기록한 일종의 그림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책인데, 먹은 것에 대한 기록 (가격을 포함해서)과 약간의 단상, 그림이 전부거든요. 이야기라고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본인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상의 기록을 위해 적은 것이기에 당연하겠죠. 참고로, NHK의 <<사라메시 (샐러리맨 식사>>라는 프로그램에 투고하여 방송된 후, 우연찮게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읽는 내내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림이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시작부터 아예 재능이 없던 사람이 아닌데, 이십여년간 꾸준히 그려오다 보니 정말로 그림이 좋아지기도 하고요.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1만 시간의 법칙" (10년 (1만시간)을 투자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대로인 것이죠. 물론 1만 시간의 법칙은 최근 그 실체가 부정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오랫동안 한우물을 파서 노력한 결과가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 그림이라면, 컬러링을 조금만 보완한다면 음식을 소재로 한 책 삽화는 충분히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시노다 과장이 정말 제대로 힘을 줘서 그린 그림이 보고 싶기도 하네요. 자료를 조금 찾아보니 실제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뷰도 한 모양이니까요.

그리고 가끔 엿보이는 소박한 일상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나고야 주민으로, 나고야 중심의 음식과 다양한 문화를 언급하는 것도 독특했고요. 주니치 드래곤즈의 팬으로 경기 관람 후 먹은 음식, 또 우승 축하를 기념하는 음식을 먹는 이야기가 그러하죠. <<식탐 여행>>에서도 언급되었던 명물 '안카케 스파게티'가 언급되는 것 역시 반가왔고요. <<배빵빵 일본 식탐 여행>>에서와는 다르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는 것도 기억에 남네요. (참고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맛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울러 23년간 외식을 경험한 인물다운 노하우도 몇 가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좋아하는 단골집 소개는 물론, 기차 여행에서의 에키벤 소개가 그러합니다. 저자는 신 오사카역의 팔각 도시락을 최고의 도시락으로 치고 있더군요. 오사카에 가면 한번 먹어봐야겠습니다.
아울러 정말 "손으로 쓴 느낌" 그대로 번역 출간한 국내 출판사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드라마가 없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그래도 볼만한 점은 많습니다. 무언가 하나의 행동을 20년 이상 꾸준히 이어간 열정, 노력은 별점 따위로 평가할 수 없을 터이고요. 평범한 사람의 식도락을 멋드러진 그림으로 감상한다는 점에서는 일상계 구루메 만화와 별 다를게 없지 않은 만큼, 이런 류의 만화,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기분좋게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인이고, 가정이 있고, 그날 그날 먹을 것에 대한 선택이 나름 원칙이 있다는 점 (이번 달은 돈까스 덮밥이다! 라고 정하면 정말 돈까스 덮밥만 찾아다니면서 먹습니다!) 에서는 <<노하라 히로시의 점심식사 방식>>과 똑같으니까요.
그나저나 저도 이 블로그를 운영한지가 14년 째인데, 앞으로 6년 더 해서 20년이 지나면 책을 한 권 낼 수 있을까요? 누굴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글들은 아니지만...

2017/08/19

매혹의 근대, 일상의 모험 - 김지영 : 별점 2점

매혹의 근대, 일상의 모험 - 4점
김지영 지음/돌베개

부제는 '개념사로 읽는 근대의 일상과 문학' 입니다. 대충의 목차만 보았을때 근대관련 미시사 서적이라 생각하여 구입한 책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개념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앞부분 거의 100여페이지에 달합니다. 신문화사와 일상 개념이라는 분야에 대한 학술적인 흐름을 더듬고 있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부분일 뿐더러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더군요. 재미도 없었고요.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은 연구원이 아니라면 접근 자체가 어렵지 않나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부분을 지나 문학에 자주 쓰인 몇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시대를 분석하는 본문 부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연애", "청춘", "탐정", "괴기", "명랑"이 그것인데 이 단어들이 근대에 어떻게 도입되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다양한 문학 작품이나 사료를 통해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탐정"과 "괴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두 부분만큼은 기대에 값합니다. 탐정 소설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기대는 "계몽"이라는 측면, 즉 다방면의 지식에 통달하여야 쓸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이것은 심층적인 것이 아니라 표피적인 것이었다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저 역시 마찬가지라 굉장히 공감가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도판도 괜찮았고요.
또 "괴기" 편에 소개된 다양한 엽기 사건들에 대한 기사와 소설들은 간략한 소개나 인용문만 보아도 - 예를 들어 유기된 상자 안에서 사람의 다리가 발견된 사건이라던가 - 내용이나 진상이 어떨지 무척이나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항목 외에는 다 그냥저냥입니다. 다른 미시사 서적에서 많이 접했던 내용이기도 하죠. 전체 분량에서 관심이 있고 읽을만한 부분은 1/3이 채 되지 않으니 어떻게 보아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17,000원이라는 가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게다가 "탐정"과 "괴기"에 관련된 항목은 결국 <<대중 서사의 모든 것 3 : 추리물>>에서 소개되는 이야기와 별 차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8/18

물건의 탄생 - 앤디 워너 / 김부민 : 별점 3점


물건의 탄생 - 6점
앤디 워너 지음, 김부민 옮김/푸른지식

여러가지 일상 속 물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미시사 만화 서적. 욕실, 옷장, 거실, 주방, 카페, 사무실, 마트, 술집, 야외라는 8개 항목의 대분류 속에 4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 생활 속에 맞닿아 있는 사소한 물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불과 수 십년 전만 해도 대세였던 고리가 달린 캔 뚜껑 따개를 누가 만들었는지, 지금과 같이 뚜껑이 떨어지지 않게끔 누가 개선했는지 알려주는 식입니다.

당연하게도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들의 비중이 높습니다. 대충 훝어보아도 면도기, 고양이 모래, 비단, 찍찍이 (벨크로), 옷핀, 슬링키, 전자레인지, 볼펜, 종이, 포스트잇, 종이봉투, 인스턴트 라면, 아이스크림 콘, 감자칩, 철조망의 15종은 다른 책에서 상세하게 접한 내용이죠.
또 220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으로 머릿말, 참고 문헌, 감사의 말 등을 제외하면 이야기 하나 당 4페이지를 갓 넘는 정도라 그다지 밀도가 높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화로서도 꽤나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별 것 아닌 이야기에서 나름 드라마를 뽑아내어 전개하고 있어서, 이야기 하나하나가 만화 한 편으로 볼 만 하거든요. 저자가 유머러스하게 전개하고 있어서 읽는데 아주 즐거웠고요. 흑백 톤으로만 그려져있지만 정확한 뎃셍으로 그려진 작화도 이야기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이런 부분은 <<만화로 보는 맥주의 역사>>와는 다른 명확한 장점이죠.
아울러 1/3이 다른 책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2/3는 새로운, 신선한 정보들이라 이러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비롯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괜찮았어요. 1904년 흑인 여성 마담 C.J 워커가 샴푸로 대박을 쳐서 미국 최초로 자수성가한 여성 백만장자로 기록되었다는 이야기, 흑인 혼혈 청년 마첼리허르가 네덜란드령 기아나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후 구두 골 위에 가죽을 씌우는 라스팅 공정을 자동화하는 기계를 발명한 이야기, '요요'가 필리핀에서 유래된 것이며, 1915년 미국으로 이주한 요요의 달인 페드로 플로레스가 대량 생산을 처음 시작한 후 던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 전국적 인기를 얻지만 이후 '요요'라는 말은 필리핀어로 장난감을 뜻하는 일상 용어라 제품명 저작권을 상실하고 결국 도산하게 된다는 이야기, 감자칩을 과자의 왕으로 만든 사람은 서부의 감자 칩 여왕 로라 스커더로 그녀가 처음으로 바삭한 감자칩을 유통했다는 이야기, 1922년 흑인 발명가 개릿 모건이 신호등 특허를 출원했다는 이야기 등등이 좋은 예에요.
또 수박 겉핥기 수준이라도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항목으로 관련된 Trivia를 소개하고 있는 점도 꽤 괜찮았어요. 주로 후일담이나 관련된 이야기들인데 몇 컷 되지는 않지만 본 편만큼이나 재미있거든요. 자기 발명품으로 돈을 벌지 못한 실패자들이 등장하는 장면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만화의 장점을 잘 살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많았던 "학습 대백과" 류의 만화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만큼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2017/08/13

왕의 목을 친 남자 - 아다치 마사카쓰 / 최재혁 : 별점 2점


왕의 목을 친 남자 - 4점
아다치 마사카쓰 지음, 최재혁 옮김/한권의책

프랑스 대혁명 시기, 사형 집행인이었던 샤를 앙리의 일대기적인 기록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을 조망하게 해 주는 독특한 역사서.

대대로 사형 집행인인 상송 가문의 4대 째인 샤를 앙리의 이력도 독특하고,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에서 보아왔던 사형 집행인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 차별에 대한 일화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사형 집행에 대한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눈길을 끕니다.
대표적인 것은 제목 그대로의 에피소드, 즉 루이 16세의 사형 집행이겠죠. 왕에 의해 임명된 사형 집행인임에도 제목 그대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라마틱하니까요. 그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칼로 목을 베는 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과 그 중에서도 3대 집행인 장 바티스트 상송과 인연이 있었던 랄리 톨랑달 백작의 사형 집행에 관한 것, 기요틴의 도입과 기요틴 칼날의 형태에 대해 루이 16세가 적절한 지적을 해서 개량했다는 것, 기요틴에 의해 최초로 처형된 인물 등 다른 곳에서 쉽게 알 수 없었던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형 집행에 관련된 내용을 빼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좋은 텍스트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혁명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루이 16세와 왕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좋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평은 그 중에서도 압권으로 굉장히 총명하고 백성을 생각한 계몽 군주로 그리고 있습니다.
또 글을 써내려간 묘사도 부담스럽습니다. 역사서다운 객관적 서술이 아니라 샤를 앙리의 심리 묘사를 과하게 풀어낸 탓이죠. 그나마 담담한 묘사라면 모를까, 굉장히 감정적으로 쓰여져 있으며 묘사력도 좋다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프랑스 근대의 사형 집행에 대해 궁금하다면 읽어볼만한데, 그러한 분이 아니라면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온 것 이상의 새로운 이야기도 없거든요. 차라리 상송 가문이나 사형집행에 대해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2017/08/12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 윤병권 : 별점 2.5점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 6점
윤병권 지음/상

세계의 명문 호텔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 모두 13개의 호텔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익히 잘 알려진 파리의 릿츠 호텔,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 싱가포르의 래플즈 호텔, 도쿄의 데이코쿠 호텔,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방콕 오리엔탈 호텔, 도쿄 오쿠라 호텔은 물론 그 외 초고급 호텔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관광 안내 서적은 아닙니다. 알라딘의 책 분류로는 문명 / 문화사 서적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각 호텔 별로 상세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호텔 업계의 큰 흐름을 잘 알 수 있도록 구성이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호텔의 왕 릿츠의 파리 릿츠 호텔을 다루는 첫번째 챕터를 보면, 릿츠 호텔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최초에 오픈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요약해서 설명해 주는 것에 시작해서, 릿츠 호텔의 특징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 그리고 릿츠 호텔에 관련된 여러가지 에피소드 - 독일 가수 타코의 노래, 헤밍웨이의 릿츠에 대한 헌사 등 - 를 이야기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호텔의 역사, 에피소드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홍콩의 별 볼일 없는 오지 주룽이 페닌슐라 호텔의 번창 이후 지금의 '침샤초이'가 되었다던가, 런던 사보이 호텔에 관련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 - 모네가 발코니에서 템스 강변의 풍경을 그리고, 가수 멜바를 위한 '피치멜바'의 탄생지이며, 영국에서 유일하게 우측 통행을 하는 도로가 있는 등 -,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의 초대 총지배인 조지 C. 볼트를 발탁한 에피소드와 조지 C. 볼트가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또한 저자가 서울 신라 호텔 증축 및 개수부터 참여하여 호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소개되는 호텔들에 대해서 창문으로 바라본 경치가 좋다! 집기가 고급스럽다!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전문가적 식견에 기반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텔 창업자의 철학, 호텔의 역사, 해당 지역에 대한 설명 및 호텔의 방향성 등 여러가지를 통틀어 자세하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든요. 모두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호텔에 대해 구석구석 살펴보고, 그 서비스를 접해본 곳들이라 설득력도 높습니다.

단점이라면 도판의 질이 낮다는 것입니다. 전부 컬러가 아닌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기껏 실린 사진들도 해상도가 낮아서 모자이크 현상을 일으킵니다. 책의 만든 모양새도 그닥이고요. 최고급 호텔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꾸미지도, 돌보지도 않은 모양새라 조금은 실망스럽네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한데, 수록된 호텔들을 선정한 기준도 모호합니다. 단지 저자의 마음 속 순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보다 객관적인 지표로 호텔들 순위를 매겼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래도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문 호텔 안내서라는 점은 높이 사고 싶네요.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정보들이더라도 그 것을 모아서 한 번에 소개한다는 측면도 간과하기 어려운 장점이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여기 소개된 호텔들 투어를 떠나고 싶군요. 막대한 돈이 들겠지만....

2017/08/1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 - 대중서사장르연구회, 박유희 외 : 별점 3점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 - 6점
대중서사장르연구회.박유희 외 지음/이론과실천

한국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 등장했던 추리물의 역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정리하여 알려주는 문화사 서적. 근현대 이후의 장르 문학이나 매체가 아니라 고전 설화와 각종 야담, 역사서 등에 등장했던 추리 서사부터 소개하고 있기에 그 양과 깊이가 실로 방대합니다. <<아랑 전설>>에서 밀양 부사가 빨간 깃대를 흔들고 가는 아랑에 대해 꿈꾼 후, 범인이 '朱旗'라는 사람임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에서 '한각사중계월침, 붕월반월원무심'이라는 점 글귀의 뜻 풀이 같은 것이 등장하는 식이거든요.

근대적인 추리 소설, 즉 '정탐 소설'이 처음 등장한 <<쌍옥적>> 이후의 자료는 더욱 풍부합니다. <<쌍옥적>> 시기에 <<박쥐우산>>이라는 작품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르루주 사건>>을 번안한 <<누구의 죄>>를 표절한 느낌의 작품이기는 한데, 범행 동기와 범인 설정에 있어 당시 국내 실정에 잘 맞도록 나름 개선, 발전시킨 부분도 있어서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더군요. 근대 초기에 셜록 홈즈와 같은 정통파 추리물이 아니라 '에밀 가보리오'의 프랑스 소설이 유독 인기를 끌었다는 점도 꽤나 흥미로왔고요.

아울러 근대에 추리 소설이 번안되어 소개되면서 이른바 '탐정 소설'이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가진 독자들이 읽는 지적인 작품으로 어필했다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추리 소설이 항상 싸구려 문학의 대명사로 알려진 80년대 이후를 살아온 저에게는 이해가 안되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트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과학적인 지식이 뒷받침 된 이해력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근대에는 그러한 독자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요. 이렇게 초창기 추리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아주 괜찮은 듯 싶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정탐', '탐정'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당대 분위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어요. 인용되는 자료들을 보니 각종 신문 기사 헤드라인에서 이 단어들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대구에 사는 한 소년이 10세 아동을 납치 살해한 후 협박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대표적이에요. 범행도 충격적이지만 이 소년이 '탐정소설만 매일 탐독'했다고 소개되거든요. 이렇게 탐정소설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상식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죠. 가슴아프게도 이러한 부정적 인식, 앞서 말씀드린 물질 문명에 대한 부분, 거기에 '그로 (그로테스크)'라는 말로 대표되는 새로운 유행의 결합 등으로 한국 추리 문학이 서서히 선정성, 엽기성이 강조된 싸구려 펄프 픽션화하는 과정이 해방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아울러 지적인 영역, 논리적 추론과 과학적 수사 외에도 서구 물질 문명의 유혹 역시 지식인들을 끌어당기는 요소였다고 하는데, 이 역시 후대에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적인 영역이 아니라 물질 문명에 대한 부분만 확대, 발전해 버렸으니까요.

그래도 저도 익히 알고 있는, <<최후의 증인>>이라는 기적으로 대표되는 김성종 시대에서 현재 (이 책이 발표된 2010년 기준)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마지막 부분 덕분에 아직 한국 추리문학에 희망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한국 추리문학의 미래로 <<경성탐정록>>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경성탐정록>>이야 말로 한국 현대 추리문학이 이룬 놀라운 성취 중 하나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정성, 엽기성이 사라지고 정통 추리 서사에 기반한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원점에 회귀한다는 측면은 분명히 있죠. 이를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 추리문학의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반은 농담인거 아시죠?)

<<경성탐정록>> 외에도 고전에서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는 추리문학 발전 와중에 등장한 수많은 작품이 소개되기에 눈길을 끄는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문학의 홍수 속에서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추리 서사를 보여주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 친일 문학이기에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사면에서는 흥미로와 보이는 김내성의 <<태풍>>, 해방 후 추리 문학계의 1인자였다는 방인근의 작품들 (그 중에서도 사립탐정 장비호 시리즈), 허문영의 번개 탐정 시리즈 등이 그것들입니다. 아쉽게도 방인근, 허문영의 작품들은 소개만 보아도 앞서 말씀드린 펄프 픽션들에 다름없기에 구태여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방인근 작품들에 등장하는 해방 이후 주요 설정들 - 일본인이 해방 후 강제로 쫓겨가며 챙기지 못했던 재산을 되찾으려고 한다던가, 국가 혼란기에 국보를 훔친다던가 등등 - 은 한번 연구해 볼 만 하다 싶더군요.

이러한 추리 문학 뿐 아니라 추리 문학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흐름 및 주요 작품의 소개 또한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이 역시 읽어볼만 합니다. 007 시리즈의 여러 모방작들 등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스파이물, 액션 스릴러, 느와르 등 다루는 폭도 넓고요. 제가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놓치시기 힘들 내용들이었어요.

단점이라면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기껏 흥미를 자아내는데 정작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니 무척 답답하더라고요. 지금 구하기 쉬운 작품들도 아니니까요. 도판도 부실한 편이라 아쉽습니다.
그래도 읽기 전에는 내가 아무리 추리 애호가지만 이런 것 까지 찾아서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얻은 것이 훨씬 많은 독서였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3만원이라는 가격도 마음에 들고요.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가 식민지 시대 추리 문학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책은 다루는 폭과 기간이 훨씬 넓다는 차이가 있기에 비교해 읽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추리 문학, 장르 애호가분들께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7/08/06

나만이 없는 거리 Another Record - 산베 케이, 니노마에 하지메 / 강동욱 : 별점 1.5점

나만이 없는 거리 Another Record - 2점
산베 케이 원작, 니노마에 하지메 지음, 강동욱 옮김/㈜소미미디어

변호사 켄야는 37명을 죽인 연쇄살인범 야시로의 항소심 국선 변호인을 맡게 된다. 야시로는 직접 쓴 수기가 발견된 후 책임 능력이 인정되지 않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상태였다. 아울러 그는 과거 켄야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으로 친구 사토루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던 인물. 켄야는 한 명의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사건에 임하는데...

만화 <<나만이 없는 거리>>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준다는 소설. 자주 찾는 lion heart님 블로그에서 정보를 접하고 관심이 가던 차에 e-book으로 출간되어 구입해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분량이 범인 야시로의 수기로, 그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설명에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원작 만화 최고의 강점이었던 범인과 사토루의 불꽃튀는 대결, 긴장감넘치는 심리묘사는 찾을 수도 없으며, 별다른 수수께끼 풀이나 만화에 있던 떡밥 해결 역시 전무합니다. 한마디로 별개의 책으로 나올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물론 수기를 통해 평범한 싸이코패스와는 다르다는 점은 충분히 부각되기는 합니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을 인용해가며 일종의 '선지자'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괜찮았어요. 그냥 나쁜 놈은 아니고, 나름 피해자들을 도와주려고 했다는 점은 신선하게 느껴졌거든요. 인생은 별 거 없고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타성'으로 살아갈 뿐이라는 범행 초기 발상도 꽤나 그럴듯 했고요. 현대 사회에 넘쳐나는 바보들에 대한 시선 -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버려 두면 한없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생물이며 '권리'나 '평등'이 공짜라고 착각한다. - 은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기에 공감이 가기도 했습니다.
켄야가 야시로의 국선 변호인이 되어 왜 변호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꽤 - 켄야와 야시로의 관계만 떠나서 본다면 - 그럴싸했고요. 뭐 의뢰인이 사실은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 변호인의 딜레마와 비스무레하긴 하지만요.

그러나 이외에는 건질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괜찮다고 말씀드렸던 야시로의 동기부터가 사실 문제에요. 그 자체는 설득력있고 나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야시로 캐릭터에는 마이너스에요. 만화에서 순수한 절대악으로 보였던 캐릭터가 흐려졌을 뿐입니다. "서른명이 넘게 죽였지만 사실 야시로도 사연이 있었습니다!"라는 것은 그냥 나쁜 놈, 싸이코패스인 것 보다도 안 좋은 결과로 보였어요. 게다가 서른 명이 넘는 어린 소녀들을 죽인 놈이 '굴복하지 않는 마음, 용기가 중요하다.',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한 명이라도 더 못 죽여서 아쉽다'가 이 쓰레기에게는 더 어울리죠. 심리 서스펜스물이 감동의 인간 드라마로 돌변하는데, 그 시점이 연쇄살인마 야시로라는건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또 수기에서 언급되는 '스파이스'가 누구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수수께끼처럼 다루어지지만 이것은 일종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외려 진짜 핵심은 마지막에 야시로가 주인공 후지누마 사토루의 타임 슬립을 알아챘다라는 것인데... 만화를 읽은 독자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진상은 아니죠. 게다기 이를 알아챈 이유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 않을 뿐더러, 수기만 읽고 켄야가 이것을 눈치챘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 외에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묘사들도 그닥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귀가 들리지 않는 남자의 커뮤니케이션에 '권총'이 필요했다는 장면이 대표적으로, 이 이야기가 '살아있는 한 인간은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도저히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 켄야가 '의뢰인을 위해' 변호를 하는 모습을 더 잘 보여주었더라면 오히려 괜찮은 법정물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닙니다. 원작 만화나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고 글을 쓴 것으로 보이지 않아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만화의 인기에 기대어 책 한권 더 팔아먹으려는 얄팍한 상술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점수를 그나마 약간이라도 준 부분은 그닥 히트하지 않는 작품의 외전격 완결편 소설까지 국내에 발간해 준 출판사의 정성 정도랄까...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2017/08/05

삼국지를 읽다 - 여사면 / 정병윤 : 별점 2점

삼국지를 읽다 - 4점
여사면 지음, 정병윤 옮김/유유

중국에서는 유명한 역사학자 여사면의 책으로, 출간된지는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지다시 읽기' 류의 컨텐츠인데, 기대대로 여러가지 삼국지 속 일화를 실제 역사는 어땠을지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재해석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목차 순서대로 소개하자면, 우선 앞부분의 환관과 외척 항목에는 별다른 새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환관이 원래는 직급이었다던가, 외척을 등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논파하는 정도만 눈길을 끌 정도에요. 딱히 삼국지 본편 이야기를 재해석하는 내용도 별로 없고요.
동탁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량병이 변란을 일으킨 것을 민족적, 문화적 문제로 해석하는 것도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런 류의 책으로는 처음 접하는 '조조'라는 인물의 재 해석이 우선 눈에 띱니다. 우릭 알고 있는 '난세의 간웅'이 아니라 진정 한나라를 위했던 충신이었다는 해석이거든요. 한 왕실의 보위와 천하 평정에 대한 의지로 가득찬 영웅이라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자신을 접대하려는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킨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사료를 통해 진궁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마의야 말로 소인배라고 논파합니다.

다른 인물, 사건, 전투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많습니다. 관우가 죽고 형주를 잃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유장을 서둘러 병합하려는 유비의 조급함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지 않고 부탁대로 장로를 공격했다면, 마초와 한수의 연합과 더불어 조조에게 큰 피해를 안길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땅욕심으로 결국 조조가 서량을 평정할 시간을 줘 버렸다는 것이거든요.
또 관우가 죽은 후 일으킨 전쟁은 1년 반이 지난 뒤 일으킨 것으로 감정에 북받혀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는 설명도 재미있어요. 외려 조조를 치기에는 부족하나 형주를 다시 취하기에는 병력이 충분하다고 여겼던 탓이라고 해석하죠. 제갈량의 북벌 계획도 익주를 통해 관중을 공격하는 것과 형주에서 남양을 거쳐 낙양을 공격하는 두가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기에 형주를 다시 손에 넣는 것은 촉나라 입장에서 필수이기도 했고요. 즉,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한 날 한 시에 죽기로 한'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기사, 한 나라의 황제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위연에 대한 재해석도 재미있습니다. 상당한 능력자로서 제갈량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죽은 탓에 철군을 주장하던 양의, 비의 등에 의해 모함받아 죽게 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근거 자료도 탄탄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위연이 실제로 모반을 일으켰다면 이를 제압한 양의가 중용되지 못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만약이지만 제갈량이 죽고 나서 위연이 군권을 장악했더라면 북벌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당시는 위나라에서 조씨와 사마씨가 분란을 일으킨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연 대신 군권을 잡은 것이 신중론자 장완과 비의 탓에 북벌을 시도하지 못했는데, 가정이지만 재미있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삼국지 재해석의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닙니다. 그냥 실제 역사에 대한 서술이 많아요. 또 삼국 당시 형세를 설명하면서 당시 지명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데 참고할만한 지도가 제대로 수록되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이고요. 마지막으로 번역도 좋은 편은 아닙니다. 문체를 살리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글만 읽으면 나이 드신 노교수님이 어렵게 설명하는 그런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유유 출판사의 10년 대여 e-book 할인에 힘입어 읽게 되었지만 그나마의 값어치도 안됩니다. 삼국지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