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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0

이창 (Real Window) (1954) - 알프레드 히치콕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 작가 제프리는 촬영 도중 다리에 부상을 당해 집에서 몇 주 째 깁스를 하고 지내게 된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창 밖 이웃들의 일상을 관찰하던 제푸리는 어느날 스트레스 가득한 아내와 남편이 사는 집에서 수상한걸 발견한다. 남편이 새벽에 세 번씩이나 큰 가방을 들고 어딘가를 갔다 왔고, 그 뒤 아내는 사라진 것. 제프리는 전쟁 때 전우였던 형사 도일에게 사건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남편 쏜월드와 아내가 역에서 목격되었다며 제프리의 추리를 일축한다.
하지만 제프리의 연인 리사는 쏜월드가 아내 핸드백 속 보석을 정리했다는 제프리의 말을 듣고 아내의 죽음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어딘가 갈 때 핸드백을 두고갈 리 없다, 보석을 핸드백 안에 넣어 놓을리도 없다, 무엇보다도 결혼 반지를 두고갈 리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간호사 스텔라와 함께 쏜월드를 더 철저히 감시하며 증거를 찾아내려 노력하는데....

히치콕 감독의 고전 명작. <<우먼 인 윈도>>를 읽고 나서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네요. 윌리엄 아이리쉬의 소설이 원작인 덕분일까요? 하여튼, 쏜월드가 보석을 정리하는걸 보고 리사가 '여자라면 그럴리 없다!' 며 설명하는 장면, 동네에서 잘 노는 개가 죽었을 때 쏜월드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 개가 파헤치던 화단의 2주전 모습과 현재의 차이, 쏜월드가 욕실을 청소하고 짐을 싸는 것 등 설득력있는 단서들이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요소요소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2주전 찍은 정원 사진의 네가티브 필름을 프리뷰로 본다던가, 쏜월드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등 사진 작가라는 직업을 나름 활용하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쏜월드가 정원에 묻은건 아마도 아내의 머리(?) 였을거라는 마지막 대사도 섬찟하니 재미있었고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그레이스 켈리의 전설적인 미모라고 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명불허전,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특히 첫 등장은 'rear window grace kelly entrance' 라고 자동 완성 검색어가 뜰 정도입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확실히 오래된 티가 물씬 나며, 이야기도 지나치게 길고 장황한 탓입니다. 초반의 약 30분이 대표적입니다. 사건과 관계없는 일상들, 특히 제프리가 리사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길게 풀어낼 뿐이거든요. 솔직히 그레이스 켈리의 애절한 구애를 거절하는게 말이나 되나 싶기도 했고요. 비교적 초반에 쏜월드가 수상하다는걸 알게 되지만, 증거를 잡지 못하고 그냥 관찰만 하는 과정도 지나치게 길어서 서스펜스가 쌓일 여지가 없습니다. 빠른 호흡의 전개가 일반화된 지금이라면 1시간으로 충분히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또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설정을 그다지 잘 활용하지 못한 건 아쉽습니다. 오히려 이 핸디캡으로 리사가 위험에 처했을 때 경찰에 신고한 뒤 아무것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영 주인공스럽지도 못했거든요.

그리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쏜월드는 시체를 어디에 어떻게 버린걸까요? 그가 세 번에 걸쳐 밤에 가지고 나간 가방으로는 시체의 모든걸 담기는 아무래도 부족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또 중반부에 트렁크를 끈으로 묶어서 어딘가로 보냈는데, 제프리의 신고로 경찰이 조사한 결과로는 옷가지만 들어있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하지만 트렁크를 보내는건 제프리가 자기를 엿본다는걸 알아채기 전이므로, 충분히 이 안에 시체를 넣어 옮기는게 마땅합니다. 이 부분은 너무 대충 넘긴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눈여겨볼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기대했던 서스펜스와 스릴을 느끼기는 여러모로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지루할 정도로 길기도 하고요. 21세기에 볼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2020/08/29

흑사의 섬 - 오노 후유미 / 추지나 : 별점 3점

흑사의 섬 - 6점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시키부는 오랜 고객인 논픽션 작가 카츠라기의 행방을 쫓아 그녀의 고향인 '야차도'라는 섬을 방문한다. 그녀가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탄 것은 확인되었기 때문. 그러나 섬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으며, 마을에는 카츠라기의 원래 성인 하세가와라는 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방해라는걸 알아낸 시키부는 혼자만의 조사와 조력자인 마을 의사 야스다를 통해 시호가 참혹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는걸 알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시호가 '마두야차'의 심판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유는 그녀가 마을 영주인 진료 가문의 후계자 히데아키를 살해한 범인이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

이러한 섬 특유의 종교와 풍습에 시호가 죽었다면 그녀와 동행한 나가사키 마리라는 여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가사키 마리가 진료 가문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라면 시호를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마두야차와 진료 가문의 '슈고'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등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계속 더해지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현재의 '슈고'인 진료 아사히에 의해 모든 진상이 빍혀지는데...


<<시귀>>와 이런저런 괴담 단편집으로 호러, 공포 소설 작가로 알고 있었던 오노 후유미의 본격 추리물.
외떨어지고 고립된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과 그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토대로 풀어낸 본격 추리물은 오래전 부터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일본 작품이라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릅니다. <<이누가미 일족>> 등이 그러하지요. 가문의 저주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가문의 상속자들을 죽게 만드는 <<바스커빌 가의 개>>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고전적인 설정인데, 지금도 도조 겐야 시리즈, 민속 탐정 야쿠모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인기 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장기간에 걸친 전통 관습의 과정이 핵심 트릭(의도한 건 아니지만)의 하나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됩니다. 전설을 직접적인 트릭으로 이용한게 아니라 일종의 심리 트릭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뜨이고요.

마을만의 신앙과 전설, 관습, 그리고 트릭을 조금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우선 마을에서는 '마두야차'님을 신으로 모십니다. 마두야차는 죄 지은 자를 심판하며, 마을을 지배하는 진료 가문은 오래전 야차산에 사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을 응징한 행자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귀신인 '마두님'은 아직도 진료 가에 붙잡혀 있어서, 진료 가문에서는 대대로 후계자가 아닌 셋째 아들이나 딸에게 마두님이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인 '슈고'를 맡게 해 왔습니다. 슈고는 어렸을 때 정해지고, 한 번 슈고가 되면 그만둘 때 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게 관례입니다. 심지어 슈고로 있는 동안은 호적이 없어서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없는 사람인거에요. 그렇게 이십여년 정도 슈고를 맡다가 성인이 되면, 다음 대 슈고에게 자리를 넘긴 뒤 신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 관습을 이용하여 전 대 슈고이자 현재 진료 신사의 신관인 모리에가 슈고였을 때인 19년 전 나가사키 마리의 어머니 히로코를 깜쪽같이 살해했습니다. 섬 사람들이 '낯선 사람'을 목격했는데, 모리에는 슈고였던 탓에 집에 갇혀 있어서 사람들이 그 존재를 잘 몰랐던 덕분이었지요.
모리에는 사건의 진상을 감추기 위해 히로코와 결혼할 예정이었던 시호의 아버지 노부오도 잔인하게 토막 살해합니다. 이는 섬의 마두 신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섬 마을 사람들은 노부오의 잔혹한 시체를 보고 이를 마두야차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끝난 일로 치부하여 그냥 덮어버리고 말거든요. 단지 신사에 심판을 의미하는 화살촉 한 대만 놓아두면 끝이었던 거지요.
그 뒤 현재에 이르러, 모리에는 진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히데아키를 살해했습니다. 히데아키가 없으면 분가인 자신의 집이 종가를 잇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인 나가사키 마리가 종가를 잇게 될 수 있다는걸 알고난 뒤, 그녀마저 죽이고 완전범죄를 위해 19년 전 사건처럼 참혹하게 시체를 훼손합니다. 섬 마을 사람들은 역시나 관례대로, 나가사키 마리가 히데아키를 죽여서 심판받았다 생각하고 대충 사건을 수습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슈고' 라는 관습을 활용해서 섬 사람이지만 낯선 사람이었다는 상황을 만든 트릭 (우연이었지만), 그리고 마두 신앙을 활용하여 살인이라는 큰 범죄를 대충 수습하게 만든 일종의 심리 트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동기가 확실해서 범인을 특정하기 쉬운데, 비교적 초반에 발견된 시체가 카츠라기 시호라는게 증명되어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시호와 동행했지만 사라진 나가사키 마리가 진료 가문의 후예라는걸 알게된 후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진료 가문의 부를 노리는 종가의 범행이라면 카츠라기 시호를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와 함께 이런저런 용의자들도 부상하면서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일종의 '바꿔치기' 트릭이 잘 사용된게 추리적으로 큰 만족감을 전해줍니다. 진상은 카츠라기 시호와 나가사키 마리가 고등학생이 되어 섬을 나갈 때 서로의 신분을 바꾸었던 거에요. 여관에서 '나가사키 마리'를 찾는 전화를 받고 나가 살해된 건 섬에서는 시호였던 여자 마리였고, 섬에서 마리였던 시키부의 지인 '카츠라기 시호'는 당연히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도주한 겁니다. 이 때문에 폐가가 된 시호의 옛 집에서 채취한 지문은 시체와 일치했던 것이고요.
바꿔치기는 현재의 슈고이자 해결자 역할을 맡고 있는 아사히의 추리와도 연결됩니다. 섬 사람들은 모두 시호와 마리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둘 다 어린 시절을 섬에서 보냈으니까요. 그러나 범인은 시호와 마리를 구분할 수 없어서 시호를 죽였다고 생각한 아사히는 범인은 두 사람이 고등학생이 되어 섬을 떠난 뒤 태어났거나, 아니면 두 사람과 엇갈려 섬을 나갔다 돌아온 이로 한정된다고 추리합니다. 이런 섬 사람은 없으니, 범인은 당시 슈고였던 모리에라는 거지요. 진료 가문의 정보를 이용하여 마리의 현재 신상을 캐 내어 후쿠오카에서 얼굴을 확인까지 했으니, 충분히 착각할 만 했고요.

주인공인 시키부도 꽤 인상적입니다. 보통 폐쇄된 마을 공동체가 꺼리는 조사를 하는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공격당하는 탓에 어떻게든 도망다니면서 기회를 엿 봐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었죠. 그러나 시키부는 마을 사람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돋보입니다. 여관 주인 오에가 자신의 짐을 손댄걸 알고, 일부러 수첩을 비닐 봉투에 넣은 뒤 현금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며 협박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분명 범인의 지문이 남아있을거라고 장담하면서요.
옛 하세가와 집에서 담배를 피다가, 가츠라기 시호가 버린 듯한 캐빈 꽁초를 줍는 장면처럼 탐정 역할도 충실하며, 범인은 이 섬 신앙을 잘 알고 있지만 섬 사람은 아닐 거라는 등 추리력도 쓸만합니요.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면 마두님에게 심판받을 걸 두려워하는 섬 사람이 범행을 저지를리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그럴싸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한 몸은 충분히 지킬법한 능력과 기본 이상의 추리력은 갖춘 능력자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인 만큼 고전들처럼 마을 사람들도 섣불리 그를 건드릴 수는 없었겠지만,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시키부의 캐릭터가 명확한 탓도 있을겁니다.

황량한 섬도 실제하는 듯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핵심 트릭으로 사용되는 마두야차 신앙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시키부가 이런 쪽에 관심이 많고 주술과 음양 오행에 박식한 나머지 섬에서 모시는 신인 '마두야차 (마두관음상에 뿔이 난 형태)'가 '해치'라는걸 깨닫는다는건 무리수로 보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시키부 시점에서 이런저런 상세한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잘 전해줍니다.

한 마디로 기대보다 훨씬 좋았던 작품이에요.

그러나 핵심 트릭인 섬과 마두야차 신앙, 그리소 슈고 등 진료 가문과 관련된 풍습 모두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물론 오노 후유미가 공들여 설정을 잘 쌓아올려 놓은 덕분에 읽다보면 실제로 있음직하다는 설득력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반까지고, 아쉽게도 어린 소녀인 슈고 아사히가 후리소데 차림으로 나타나 모리에를 직접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마지막 장면 탓에 심혈을 기울였던 설득력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건 정말이지 만화에서나 쓰임직한 장면이었어요.
물론 마두, 해치의 심판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노력은 가상합니다. 진료 가문의 행자가 사람 잡아먹는 귀신을 응징하고 가둔게 아니라, 귀신이 진료 가문의 핏줄이라서 슈고는 그러한 핏줄을 타고난 후예를 가두어 놓는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사히가 슈고 입장에서 추리를 들려주는 정도로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감히 해치를 사칭한 모리에에게 천벌을 내린건 슈고로서의 임무였다고 하던가요. 또 이렇게 마두를 사칭한 자에게 천벌을 내린 거라면, 대체 19년전 사건은 왜 가만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서?
슈고 전통의 진상 역시 그다지 의외성없고 만화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진료 가문에서 아사하기 살인귀의 핏줄을 타고 났다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묘사도 없어서 그나마의 설득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부러진 용골>>이라던가, <<인어 공주>>, <<앨리스 죽이기>> 등 처럼 판타지 속 이야기로 풀어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군요. <<철가면>> 이야기를 응용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 외 야스다가 나가사키 가문의 아들이었다는 등의 자잘한 설정은 나오지 않는게 좋았습니다. 너무 관련된 인물이 많이 엮여 작위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용의자를 늘리려는 의도였다는건 알겠는데, 지나쳤어요.

그래도 오노 후유미가 본격 추리물 작가로도 충분한 실력을 갖췄다는건 여실히 보여준다는건 분명합니다. 남편 아야츠지 유키토도 긴장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손에 땀을 쥐고 읽을만한 서스펜스와 치밀한 두뇌 게임 모두를 갖춘 만큼, 더운 여름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8/28

사고 -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 유혜자 : 별점 3점

 

사고 - 6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아래아

섬유회사에 다니는 나이 마흔다섯 살의 신체 건강하고 외무 준수한 알프레도 트랍스는 그의 애차 스투데베커의 급작스러운 고장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트랍스가 하룻밤을 보내게 된 마을 주민은 전직 판사로 트랍스를 저녁 식사와 함께 하는 그들의 게임에 초대하고, 트랍스는 초대를 받아들인다.
게임은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에 사형 집행인이었던 집주인과 손님들이 벌이는 모의 법정 놀이로, 그 날은 트랍스가 피고가 되어 그의 유죄를 증명하게 되는데....


독일 작가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짤막한 단편. 평범한 영업맨으로 보였던 트랍스가 상사였던 기각스를 해치우기 위한 범행을 계획하고 실천한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난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완전 범죄물입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트랍스는 직장 상사 기각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그러면서 기각스가 심장이 약하다는 걸 알게되고요. 그 뒤 회사 내에서 기각스와 잘 소통하는 직원에게 불륜을 털어놓아 기각스가 그 사실을 알게끔 만들었지요. 그 탓에 기각스는 심장 이상으로 죽고 말아버립니다.

문제는 어느정도 고의였다 하더라도 트랍스의 행위만으로는 범행을 증명하기는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진지한 법정에서라면 트랍스가 유죄 판결을 받는건 불가능했을거에요. 그런데 이를 '모의 법정 놀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돌파하고 있습니다.
모의 법정 놀이는 트랍스가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은퇴한 옛 법조인들이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서 벌어지는 놀이인데, 판사와 검사, 변호사와 사형 집행인까지 조합은 완벽하지만 놀이인 탓에 분위기는 시종 일관 난장판입니다. 참석자들이 나오는 음식과 술을 과다 섭취한 탓도 있고요. 이렇게 반쯤은 미쳐 날뛰는 광란의 도가니탕이라 트랍스마저도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정도로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임을 자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왁자지껄 떠들썩한 모의 법정 놀이는 그야말로 현대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였습니다. 1956년 출간된 작품이니 무려 반세기도 더 지난 고전인데도 말이지요. 작중에 나오는대로 소크라테스, 예수, 잔다르크, 드레퓌스의 모의 법정 놀의 결과도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이러한 현대적인 설정과는 반대로 혼외 정사, 불륜을 전혀 범죄라 인지하지 못하는 트랍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좀 뜬금없었습니다. 트랍스는 자신이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 전능한 범죄자로 인식되어 유죄,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아 굉장히 기뻤던 나머지, 법정 놀이를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지만 오히려 남은 전직 법조인들에게는 짜증나는 결과였다는 결말인데,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마련이고, 인생사는 결국 희극이라는걸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짐작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모의 법정 놀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굉장히 짤막하고 읽기도 편한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작가의 이름값(?)도 있는만큼, 읽고 난 뒤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2020/08/23

백사당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 별점 3점

백사당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겸 편집자 미쓰다 신조는 다쓰미 미노부라는 남자의 괴이한 체험을 듣고 그가 쓴 원고를 건네받는다. 그 원고를 읽은 미쓰다 신조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 둘 씩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젊은 여성 편집자 다마가와는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미쓰다 신조는 이 현상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쓰미 미노부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교토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집에서도 괴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실종된 다마가와는 돌아온 뒤 눈 앞에서 자살하는 등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는데....


직전 <<사관장>>에 이어 읽은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 3부작 마지막 작품.

읽고 나니 <<사관장>>을 읽고 든, 미완성같다는 느낌이 맞았더라고요. <<사관장>>은 이야기의 도입부이자 전편이고, 이 <<백사당>>으로 이야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하나의 긴 장편이거든요. <<백사당>>을 통해 <<사관장>> 속 중요한 수수께끼들의 진상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작가 시리즈 3부작 전편 (사관장)'과 '작가 시리즈 3부작 후편 (백사당)'으로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소개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듯 싶네요. 잘 못하면 둘 중 하나만 읽게 되는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만해도 깜빡 그렇게 읽을 뻔 했습니다.

하여튼, 작품은 미쓰다 신조가 겪은 괴기 체험에 기반을 둔 '작가 시리즈'답게 공포의 마물 '마모우돈'이 실제한다는걸 전제로 하고 있긴 한데, 놀라운건 이야기 속 일어났던 괴이한 현상이 모두 합리적인 추리로 설명된다는 점입니다. 작 중 친구 소후에 고스케의 말에 따르면 "초자연 현상은 해석할 방법이 없으니,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건 확실하게 일어났다고 인정되는 현상만 상대하는" 식이지요. 그야말로 '호러 미스터리'라는 장르 정의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에요. 이 지론에 의하면, 결국 <<사관장>>에서의 수수께끼는 백사당에서의 아버지 실종과 새어머니 실종, 두 개의 사건만 확실히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두 사건에 대해서만 합리적인 해석이 될 수 있도록 파고들게 되지요.

첫 번째 수수께끼인 할머니 탕관 의식 도중 실종된 아버지 사건에 대한 탐정역인 아스카 신이치로의 추리는, 아버지는 새어머니 도미 씨에게 살해당했고 그 시체는 관 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미 씨가 백사당에 들어올 수 있었던건, 자물쇠가 잠겨져 있지 않았던 덕분입니다. 그녀는 탕관을 도와주겠다며 백사당에 들어오지요. 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뒤, 탕관 후 이물질을 배출하기 위한 탕관구를 통해 죽은 할머니의 시신을 분해해 버리고 관 속에 대신 아버지의 시신을 넣은 것입니다. 그 뒤 백사당 입구 옆 공간에 숨어있다가, 다미 할멈이 백사당 안으로 들어올 때 몰래 탈출했다는 추리지요. 백사당이 밀실이기는 하지만, 탕관을 하기 위해 설치된 탕관구라는 특이한 구멍의 존재와 요철 모양으로 입구 옆에 공간이 있는 구조라는 점을 잘 활용한 멋진 트릭이었어요.

마물에 의한 기억상실 정도로 치부되었던 도도야마 산에서의 체험도 알고보니 추리적으로도 잘 짜여져있으며 정교한 극적 반전이 등장해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서는 이전에 등장했던, 도도야마 산을 올랐던 사람들 이야기들입니다. 혼자서 산을 찾았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두 명이 방문하면 둘 다 무사하거나, 한 명만 무사하거나, 둘 다 죽었으며 세 명 이상이 올라가면 대부분 죽었다는게 그동안 있었던 일이었지요. 이를 통해 두 명 이상이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게 아닐까라는 추리가 이어집니다.
<<사관장>>에서는 아이들끼리 도도야마 산을 올라가기로 결심했었는데, 할머니 장례로 흐지부지되는 듯한 묘사가 나왔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들 모두 도도야마 산에 올라갔던 겁니다! 그 중 한 명이 경찰 서장의 아들인 전학생 미쓰다 신조였고, 미쓰다 신조는 도도야마 산 정상 신당에서 다쓰미 미노부를 만났는데 둘이 정신적으로 뒤바뀌어 버리고 만 것이에요. 무언가 습격한게 아니라 둘이 급작스럽게 만난걸 계기로 정신이 바뀐 채 기억을 잃은 겁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미쓰다 신조와 다쓰미 미노부가 엮이게 되었으며, 미쓰다 신조가 무언가에 쫓기는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미쓰다 신조가 다우군 다우초를 제 발로 찾아 햐쿠미가 은거방 격자 안에 갇히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 진상의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관장>>에서 친구가 된 전학생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등 이를 서술 트릭처럼 활용한 전개도 돋보입니다.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늙어 보이는 다쓰미 미노부가 사실은 미쓰다 신조들과 동년배라는 것 역시 서술 트릭의 일종으로 마지막 진상이자 반전의 순간 충격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다쓰미는 마모우돈에게 정기를 빼앗긴 탓에 폭삭 늙어버렸다는 설정인데, 이 설정은 작품 속 또 다른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6년전 아이들 실종 사건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모우돈이 정기를 빼앗으며 나라에서부터 다쓰미가 사는 교토까지 이동하면서 벌어진 일이거든요. 마모우돈은 아이들의 정기 덕분에 아름다운 여자로 탈바꿈 하게 되었고요.

전편에서 설명이 부족했거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해 주는 내용도 많습니다. 다쓰미 미노부가 겪었던 할머니의 학대는, 말 그대로 '첩의 아이'에게 명문가 대가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분노라고 이전 리뷰에서 설명드렸었는데, 이 작품에서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햐쿠미가 당주들은 모두 여성 편력이 심하고, 여성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대로 햐쿠미가 당주들에게는 여성들의 저주가 씌워졌다는군요. '나'인 다쓰미 미노부 (햐쿠미가에서 다쓰미가의 양자로 보내져 성이 바뀜)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던거지요.
아울러 스나가와가 살았던 집 폐허에서 만난 무언가는 스나가와의 할아버지의 원령인건 당연한데, '왜 원령이 나타나서 햐쿠미가를 원망하는지'는 전편에서는 설명되지 않았죠. 이 작품에서 원령의 존재는 앞서 설명드린 도도야마 산 체험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들끼리 도도야마 산을 올라갔다가 이상해졌는데 마침 스나가와는 함께 올라가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스나가와가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도록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결국 마을 사람들이 스나가와를 죽이게 되지요. 그 뒤 스나가와의 부모는 자살하고 할아버지도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어 원한이 남게 된 것입니다. 스나가와가 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한이 사무칠만한 비참한 죽음인건 분명합니다.

이외에 이 작품 속에서만 등장하는 괴이 현상에 대한 묘사들도 좋습니다. 다쓰미의 <<사관장>> 원고를 읽은 미쓰다 신조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인데, 특히 여성 편집자 다마가와가 자살하는 순간 입에서 쏟아낸 방언, 기묘하게 남긴 메시지는 섬찟할 뿐 아니라 미쓰다 신조와 다쓰미 미노부가 동일 인물이라는걸 드러난다는 복선으로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가 마모우돈을 만난 순간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스륵 스륵 스륵...' 의 표현도 섬찟하며, <<사관장>> 초반 할머니가 강제로 곰팡이 슨 만주를 먹이는 장면과 겹치는 스나가와 할아버지 원령의 전병 대접과 원한의 토로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눅눅한가...')

그런데 정작 추리와 진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다쓰미 미노부와 미쓰다 신조가 할머니 묘를 파서 관을 확인해 본 결과, 관 속의 뼈는 그냥 할머니 뼈였습니다. 즉, 도미 씨의 살의를 눈치챈 아버지 나오호 씨가 입구 옆 공간에 숨어있다가 다미 할멈이 들어오는 틈을 타 도망갔다는게 진상이라 좀 허무했어요. 다미 할멈이 다쓰미 미노부를 위해 꾸민 일로 당주 나오호씨가 도망치는 큰 소동이 일어나면, 체면을 중시하는 도미 씨가 아들을 본가에서 내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다쓰미 미노부를 아꼈던 다미 할멈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라 합리적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재미는 없습니다. 또 이 진상이 사실이라면, 도미 씨와 하룻밤 밤 백사당에 갇혀 있었을 때 무사했던게 설명 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또한 두 번째 수수께끼에 대한 추리는 명백히 문제가 있습니다. 아스카 신이치로는 도미 씨 장례식에서 탕관을 하던 다쓰미를 습격한건 단순한 환청과 환각이었으며, 다음날 아침 백사당을 찾은 다미 할멈은 쓰러진 다쓰미를 보고 충격을 받아 죽었다고 추리합니다. 이를 발견한 두 명 숙부와 고모는 도미 씨 시체를 탕관구를 통해 없애고 다미 할멈의 시체를 도미 씨 관에다 넣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나'가 멀쩡한만큼, 다미 할멈은 고령으로 인해 백사당에서 자연사한걸로 이야기하면 되는데, 이렇게까지 무리한 트릭을 감수해가며 고모와 숙부들이 다미 할멈의 죽음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앞서 첫 번째 수수께끼의 진상이 단순 도망이라면, 이러한 트릭을 고모와 숙부들이 급조해서 떠올릴 이유도 없고요.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은 미쓰다 신조 및 친구들의 말로가 조금 불분명하다는겁니다. 단순 실종으로 퉁치고 끝내는건, 이야기가 제대로 끝나지 않은 느낌입니다.
햐쿠미가가 백마리 뱀에서 가려 뽑은 뱀신을 모신다던가, 그 외 이런저런 스쳐지나가는 괴담들같이 뭔가 있어보였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던 묘사도 많습니다. 아버지 나오호 씨가 마지막 순간, 미쓰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등장해서 살짝 폼을 잡다가 바로 정기를 빨려 리타이어 해 버리는 장면도 단지 나오호 씨의 말로에 대해 알려주는 것 외의 역할은 없는 불필요한 이야기였고요.
무엇보다도 마모우돈이 다쓰미 미노부의 몸을 한 미쓰다 신조와는 잘 지내면서, 미쓰다 신조의 몸을 한 다쓰미 미노부는 햐쿠미가에 감금한 이유를 모르겠네요. 전의 사건들을 보면 미쓰다 신조를 납치하는건 일도 아닌데, 왜 이리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지도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추리를 펼쳐보이는 탐정 역인 미쓰다 신조의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의 캐릭터는 특별한 매력이 없어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모든 탐정들이 괴상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평범해서 작품에 많이 묻혀요. 탐정은 아니지만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친구 소후에 고스케도 등장하기 때문에 비중과 존재감도 흐릿한 편이고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도조 겐야 시리즈로 만드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전작과 합쳐 1000페이지를 훌쩍 넘는 어마무시한 분량도 부담스러웠고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백사당에 관련된 거의 모든 수수께끼는 완벽하게 풀린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더운 여름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2020/08/17

나도 먹어봤다. 신라호텔 애플 망고 빙수

휴가철도 지나가네요.
지난 휴가 때 아이 병원 때문에 서울로 나갔다가, 갈 데도 없고 해서 신라 호텔에서 브런치 겸 애플 망고 빙수를 먹어 보았습니다. 몇일 전 일이지만 기념삼아 기록을 남깁니다.

식전 빵은 무난 했습니다. 한 번 리필이 된다는데 하지는 않았습니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딸 아이를 위해서 주문한 파스타,
아내와 저를 위해서 주문한 클럽 샌드위치. 전부 무난한 맛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애플 망고 빙수! 6만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놀랍지만, 확실히 맛은 있었습니다. 특히 저와 우리 딸은 망고의 끈끈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아서 망고를 잘 먹지 않는데, 그런 우리 부녀 입맛에도 맞을 정도로 망고가 정말 맛있더군요. 식감도 쫀쫀하고, 단 맛도 풍부하며 시원해서 정말 여름에 딱이었습니다. 빙수는 팥과 망고 셔벗을 별도로 얹어 먹을 수 있는데, 역시나 맛있었고요.
그런데 맛 보다는 유행하는 여름 행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희가 나올 때 대기가 무려 70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대기를 할 만한 맛은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말이지요. 가격도 만만치 않으니, 저는 한 번 먹어본 걸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혹시라도 딸아이가 먹고 싶어 한다면 또 방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행히 또 먹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하지 않는군요.

2020/08/16

소년탐정 칼레 2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햇살과나무꾼 : 별점 3점

 

소년탐정 칼레 2 - 6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논장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 방학, 붉은 장미군과 흰 장미군의 처절한 (?) 전투가 펼쳐진다. 흰 장미군이 빼앗은 붉은 장미군의 보물 '성상'을 지키기 위해 안데스는 에바 로타에게 성상의 위치를 옮겨놓을 것을 지시하고, 명령을 수행하던 에바 로타는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만다. 범인은 유일한 증인인 에바 로타를 없애고, 증거 차용증을 회수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데...

1권에 이어 읽게 된 2권. <<녹슨 도르래>>에서 도야마 점장이 추천한건 이 2권이기 때문입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와 도야마 점장 모두 대단합니다. 제가 아동용 추리 소설 시리즈를 2권이나 사게 만들다니!

그런데 2권은 확실히 추천할만 하더군요. 1권에서 단점이라고 말씀드렸던 '장미 전쟁'이 핵심인 글렌 할아버지 살인 사건의 복선으로 잘 활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바 로타가 차용증 때문에 다툼이 난 걸 알게된 것 부터 '장미 전쟁' 덕분이에요. 장미 전쟁 중 포로로 잡힌 안데스의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 글렌 할아버지 집 지붕에 올라가다가 할아버지와 손님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거든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빈 집 지주 저택에서 에바 로타가 범인과 맞닥뜨렸을 때 위험을 알린 방법도 '장미 전쟁'에서 사용된 일종의 암호인 '산적말' 이며, 범인을 지주 저택에 한 개 밖에 없는 열쇠 있는 방에 가두는 데 성공하는 것 역시 '장미 전쟁' 때 한 번 갇혔었기 때문이니까요.
에바 로타에게 배달된 초콜릿에 이 들었다는게 밝혀지는 이유도 '장미 전쟁' 덕분입니다. 안데스가 전쟁의 핵심인 '성상'을 숨기려다가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초콜릿을 개에게 주었는데, 개가 다음날 크게 아파서 독을 먹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이죠. 에바 로타와 칼레가 초콜릿을 왜 안 먹었는지는 설명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복선으로서 두말할 나위 없는 역할을 수행한 셈입니다.
또 삼총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경찰이 도착한게 '붉은 장미군'의 도움이라는건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칼레가 오줌이 마렵다면서 숲에 들어가, 한창 전쟁 중이라 숲에 숨어있던 '붉은 장미군' 식스텐 삼총사에게 부탁을 한 덕분에 알맞게 경찰이 도착하게 된 것이죠. 주인공 삼총사 외에 다른 지원군은 없을 거라는 맹점을 잘 파고든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고리대금업자가 살해당한다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는 탓에 이게 정말 어린아이용 작품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범인이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들마저 죽이려는 흉악범이라는 묘사 역시 그닥이었고요. 살인보다는 차용증 절도 정도로 좀 가볍게 (?) 넘어갔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옛날이 이런 부분에서는 아동용이라도 가차없고 과격했던 듯 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 도야마 점장의 추천만큼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3권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2020/08/15

사관장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 별점 2점

 

사관장 - 4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의 도피를 한 뒤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귀향할 때 함께 귀향한 다섯 살 '나'는 아버지의 옛 정혼자인 새어머니와 거의 노망이 든 할머니에게 기묘하면서도 가혹한 학대를 받는다. 그런 나의 편은 아버지와 숙부들의 유모였던, 집 안에서는 존재감없는 다미 할멈 뿐이었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할머니가 쓰러진 어느 날, 나는 백사당에 갖혀 기묘한 존재의 추격을 받다가 기절하고 만다. 그런 나를 구해준건 다미 할멈이었고, 그 때문에 다미 할멈은 십여년의 나이를 갑자기 먹는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때 햐쿠미 가의 관례대로 홀로 할머니의 시신을 탕관하기 위해 백사당에 갇힌 아버지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미쓰다 신조의 시리즈물인 작가 삼부작 세 번째 작품. 8년 전에 읽었던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이 시리즈 첫 번째인데, 두 번째를 건너뛰고 세 번째부터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주인공인 '나'가 작가라고 등장하지 않아서 작가 시리즈가 맞는지 좀 의문이 드네요. 이야기 속에서는 아직 편집자거든요. 스스로 작품 활동을 하는 묘사도 없고요. 오히려 작가 시리즈가 아니라 '집 시리즈' 였던 <<흉가>>와 더욱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괴이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무섭고 공포스러운 저택을 보유한 지역 명문가 '햐쿠미 가(家)', 햐쿠미 가와 관련된 괴이를 뜻하는 '마모우돈'은 명백히 <<흉가>>의 '타츠미 가(家)', 그리고 '뱀 신'과 겹치니까요. 그 외에도 무섭고 커다란 저택, 공포스러운 할머니, 공포와 괴이가 얽힌 산들과 여러가지 사당 등 비슷한 설정이 많더라고요.

하여튼, 작 중 등장하는 공포스러운 요소는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햐쿠미 가에서 할머니에게 당했던 폭행과 학대, 백사당에서 겪었던 무언가의 습격, 아버지가 사라진 할머니 장례식 날 찾았던 도도야마 산에서의 기억나지 않는 체험, 삼십 년 뒤 방문한 어린 시절 친구 스나가와가 살았던 흉가에서 만난 무언가, 새어머니 장례식 날 백사당에서 진행한 탕관 의식과 무언가의 습격입니다. 이는 모두 주인공 '나'의 체험으로, 직접 겪은 듯한 묘사는 무척이나 생생합니다. 공포를 불러오는 공간들 - 햐쿠미가, 백사당, 도도야마 산 등 - 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섬찟함을 더해주고요. 이런 공간 묘사는 작가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나'의 공포 체험 중 첫 번째인 어린 다섯 살 때 겪었던 할머니의 학대는, 말 그대로 '첩의 아이'에게 명문가 대가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비정상적인 광기는 끔찍하기는 한데 괴담은 아니에요.
두 번째 체험인, 백사당에서 '나'를 습격했던 '무언가'는 작 중 정체가 밝혀지는 유일한 마물인 '마모우돈'입니다. 다미 할멈의 말에 따르면 성불하지 못한 햐쿠미가 사람의 영혼이라지요. 뱀 요괴로 사랑했던 사람들을 사로잡아 함께 저승길로 간다고 하는군요. 햐쿠미가는 여자들의 힘이 강해서 마모우돈은 대부분 여성 혈족으로 짐작되고요. 이에 따르면 아버지 실종 사건의 진상은, '나'의 아버지가 할머니 장례식 날 제대로 탕관을 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입니다. 성불을 하지 못한 할머니가 마모우돈이 되어 버린 후, 사랑하는 아들을 잡아간 거지요. 마지막에 백사당에서 새어머니의 탕관 의식을 진행한 '나'를 습격한건, 마모우돈이 된 새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똑 닮은 '나'를 잡아가려 한 것이고요.

하지만 마모우돈 외 다른 괴이 현상, 체험에 대한 설명은 전무합니다. 도도야마 산에서의 체험과 스나가와가 살았던 흉가에서의 체험은 그 이유,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백사당에서 탕관을 진행하는, '장송백의례'라 불리우는 햐쿠미가 전통 장례 의식도 상세한 설명에 비하면 왜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작 중 딱 두 번 - 할머니와 새어머니 - 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두 번 모두 당주를 '마모우돈'이 습격해버리니 이래서야 이 의식을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거든요. 이럴거라면 당주가 산제물이라는 설명이 있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또 이렇게 자주 출몰한다면 구태여 사당으로 세워 모실 이유도 없잖아요? 퇴마사든 뭐든 불러다 빨리 제령하고 불태워버리는게 낫지요.
그 외에도 '나'의 목덜미에 있는 뱀 비닐 모양 반점은 무엇인지, 햐쿠미 가에 시집오려 한 미와코와 새어머니는 처음부터 뱀 요괴였는지, 스나가와의 신분은 무엇인지 등등 알 수 없는게 많아서 답답합니다.

대부분 '나'의 체험일 뿐이고, '나'가 더 이상 햐쿠미가와 얽히지 않는다는 내용이라 이야기도 완결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붉은 눈>> 속 단편들같은 개인 체험 괴담류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괴담이라면 최소한 무섭기는 해야 하는데 별로 무섭지 않다는 점이에요. '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다미 할멈이 나타나 구해주기 때문이지요. '마모우돈'에게 십여년의 수명을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죽어버리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나'를 구해내는데 성공하는 탓에 마모우돈의 공포와 강함이 상대적으로 퇴색해 버립니다. 이래서야 정과 사랑이 넘치는 할머니 히어로물에 가까와 보입니다. 소설로 읽지 않고 영상화한다면, 아이들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에요!
아울러 여러가지 섬찟한 묘사들도 그 정도가 지나친 감이 듭니다. 반복적인 부분도 많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고, 일부 묘사를 제외하고는 무섭지도 않아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으로 <<백사당>>이라는 책이 있는 듯 한데, <<백사장>>과 합쳐진 긴 '뱀 신' 괴담의 도입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설명이 부족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닌데, 빨리 <<백사당>>을 읽어봐야겠습니다.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분을 맺는다. 그러나 그녀와 알게 된 몇일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한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린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고,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된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은 같거든요.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에 비하면,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깝습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이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단서라고 하기 힘들죠.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러워요.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았어요.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20/08/09

테미스의 검 - 나카야마 시치리 / 이연승 : 별점 3점

 

테미스의 검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동족 인간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불손하고 오만하네. 구로사와 재판관 (시즈카 재판관의 스승)
쇼와 59년 (1984), 부동산업자 구루마 부부가 살해된다. 우라와 경찰서 검거율 1위인 나루미 경부보는 유력한 용의자 구스노키 아키히로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심문한 뒤 자백을 이끌어낸다. 나루미의 파트너인 신참 형사 와타세는 나루미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말없이 따른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아키히로는 결국 몇 년 뒤 구치소에서 자살한다.

헤이세이 1년 (1989) , 나루미의 은퇴 후 도지마와 파트너가 된 와타세는 가미키자키에서 발생한 강도 사건 수사에 나선다. 고급 주택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강도에게 살해된 사건이었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환경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도지마와 와타세 컴비는 이 사건이 단순 빈집털이 사건인 오하라 현장과 유사하다는걸 알아낸 뒤, 흉기와 도구에서 열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수사해 나간 끝에 범인 사코미즈를 체포한다. 그리고 와타세는 이 사건기 쇼와 59년 부동산업자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걸 깨닫고 심문을 통해 사코미즈가 진범임을 밝혀낸다.
와타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조직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지만, 시즈카 재판관 등의 조언을 받고 사코미즈의 조서를 공개한다. 이후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와 함께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해임된다. 그러나 핵심 수사관이었던 나루미는 이미 퇴임한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와타세는 내부 고발자로서 온다 검사로부터 보호받아 처분에서 빠져나간다. 와타세 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자책하며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23년 뒤인 헤이세이 24년 (2012).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코미즈는 출소 직후 공중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수사 1과 1반을 맡는 경부가 된 와타세는 사건을 알게 된 후, 독자적인 수사에 나선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등으로 접해보았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한 '원죄'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왜 가해자보다 피해자 가족이 더 비참해져야 하는지, 흉악한 살인범도 인권이라는게 있는지 등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던져주는 작품입니다.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또 사회파스러운 소재에 더해진 본격 추리라는 작풍이 작가의 특징인 듯 한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재판, 특히 사형 판결을 내린다는게 얼마나 무거운 행위인지' 알려주는 작품은 여러 편 보아 왔지만 묵직한 내용을 추리적으로 잘 포장한 작품은 <<데이비드 게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순으로, 사건별로 구분되어 전개되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아키히로의 자백을 받아내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강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진범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지요.
이 과정에서 수사에 대한 묘사는 빼어납니다. 우선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 사건에서는 나루세 경부보가 용의자 아키히로를 옭아매는 조작 수사와 그 결과에 의한 재판이 아주 상세합니다.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살인 사건에서는 와타세 형사의 추리에 이은 수사에 대한 설득력이 높고요. 모자 살인 사건 범인은 '열쇠업자' 일거라는 착안이 특히 빼어납니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직접 만든 자물쇠 따는 도구인 '피크'를 버렸는데, 와타세는 다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뒤 관련자 수사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게 되거든요. 이후 범인 사코미즈가 전편에 등장했던 부동산업자 살인도 저질렀다는걸 알아차리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합니다.

중, 후반부는 진범 사코미즈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23년 후 출소하자마자 살해된 사건을 다룹니다. 앞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중심이지만, 의외로 본격 추리물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알리바이 조작, 흉기 은닉과 같은 정통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이지요. 마지막에 와타세 경부가 범인인 아키히로의 부친을 찾아가 사건 시각에 경운기에 탔던건 치매에 걸린 아내이고, 흉기는 농기구인 경운기 부품이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추리쇼와 다를게 없어요.
여기에 사코미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반전 -그를 죽이려는 온다 검사의 음모였다는 - 까지 더해져 추리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와타세 경부도 매력적이에요. <<연쇄 살인범 개구리 남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수사 기계처럼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과거 원죄를 저지른 과오를 깊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이 그려지거든요. 단순한 수사 기계보다는 인간적인 모습, 고뇌하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져서 좋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라 주위의 눈총을 받는 탓에 출세를 포기하고 범인 체포에 열중하는 모습도 설득력 높고요. 작품 속 진짜 수사 기계인 나루미 경부보는 알고보니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는, 자기 중심적인 악당이라서 대비가 강렬했던 탓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본 작품이 와타세 경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후속권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개구리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고테가와의 카메오 출연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진짜 흑막은 온다 검사!'라고 내세운 반전은 지나쳤습니다. 초반에 정의로운 모습을 보였던 온다 검사가 부동산 부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당시 현장 근처 러브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범인을 목격했지만 나서서 증언하지 않은 바람에 애꿎은 아키히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그럴싸 합니다. 범인 사코미즈도 '커플에게 들켰지만 경찰은 찾아내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오는 밤에 커플이 사코미즈의 얼굴을 기억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사코미즈가 당시 목격자인 온다 검사의 얼굴을 기억하여 협박하려 했다는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28년 전 비오는 밤에 잠깐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또 와타세 경부의 수사처럼, 28년 전 사건의 첫 목격자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보았던걸 떠올린 덕분에 그 선을 수사하여 진상을 알아냈다는건 그나마 말은 됩니다. 허나 이 역시 그 연예인 닮은 사람이 진짜 그 연예인이었다는건 지나친 우연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불확실한 목격 증언에 기대는 것 보다는, 사코미즈가 출옥한다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누군가를 상세히 캐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사코미즈가 아키히로 부친에게 살해당한다는건 더욱 억지스러웠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인 부동산 업자 부부의 딸이나, 모자 살인 사건의 남편이 살해했다면 말은 됩니다. 하지만 아키히로의 부친이 진범 사코미즈를 살해한다? 부친이 원죄 사건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면 최우선 목표는 나루미 경부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코미즈는 원죄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아키히로가 사형 판결을 받고 자살한건 경찰의 무리한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이를 제대로 확인못한 재판관의 잘못이니까요. 그리고 와타세 경부도 이야기 하듯, 무려 28년을 (아키히로가 자살한 것부터로는 25년 쯤?)참고 살다가 급작스럽게 복수를 결심한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세 명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온다 검사는 어쩔 셈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사코미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는 불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애초에 편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사코미즈의 주장을 무시하는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중반부에서 경찰 조직이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증거 (조서)까지 확보한 와타세가 이를 밝히려하자 철저히 격리시키고,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조직의 잘못을 알게 된 언론도 대중과 영합하여 총 공격에 나서며, 관계자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되고 처벌받으며 이 와중에 지나친 관료 주의가 대두되는 등등 모두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묘사들이에요.
게다가 와타세가 관계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며 사죄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의아해할 수 있어도, 이는 조직에서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하는데 마땅하니까요. 와타세는 나루미 경부보만 처벌받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말리는 선배까지 힘으로 눌러버리던 모습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묘사는 와타세 경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는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묵직한 주제를 추리적으로 재미있게 포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원죄에 대한 뻔한 묘사는 조금 줄이고, 온다 검사 수사에 조금만 더 설득력을 부여했더라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거에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만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2020/08/08

Q.E.D Iff 증명종료 10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10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 시즌 2도 대망의 10권째. 그러나 수록작 두 편 모두 수준 미달이라 아쉽네요. 기본적인 재미, 추리의 완성도 모두 부족했습니다. 두 작품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11권부터는 예전의 명성을 회복해 주면 좋겠네요.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한 법이니까요.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아웃로스>>
떠다니는 카지노인 호화 유람선 킹 마이다스 호에서 '더 아웃로스 쇼'가 개최된다. 배의 소유주 리치 부어만이 직접 선택한 아웃로 6개팀이 참가하는 게임으로, 6팀은 각자 한개 씩의 열쇠를 받는데 6개를 모두 모아야 보검이 있는 금고를 열 수 있다. 시간 제한은 3시간으로 1시간마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검사하여 열쇠가 없으면 바로 실격한다. 마지막 시간 종료 때 까지 열쇠 6개를 모아 보검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남은 팀 중 열쇠를 많이 가진 팀이 이기게 된다. 상금은 1억달러! 과연 어느 팀이 승리할 것인가?

아웃로스가 뭔가 했더니 Outlaws더군요. 토마는 무법자는 아니고, 주최자 부어만의 부탁으로 게임에 참가합니다. 부어만은 딸 케이트가 라스베가스에서 사기 도박을 벌이는걸 고칠 목적으로 도박의 무서움을 몸소 체험하게 하게 할 생각이었지요.
게임의 규칙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변수라면 6개 팀은 각자 변장, 3D 프린팅, 소매치기 등의 특기가 있다는 설정이고요.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럽고, 간단한 규칙이지만 온갖 변수를 만들어내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카이지>>와 같은 박진감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참가자들이 열쇠를 너무 쉽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변장, 소매치기 등에 의해 열쇠를 빼앗겨버리니, 이래서야 세계적인 아웃로 어쩌구 하면서 모아 놓은 참가자로는 실격입니다. 열쇠를 그냥 방에 놔 두었다가 빼앗긴다는 것도 황당했어요. 무려 1억불이 걸려있는 열쇠인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객실에 완벽한 보안 장치가 가동 중이라더라도요.
또 토마가 객실 열쇠를 훔쳐내는 과정도 억지스럽습니다. 금고털이인 맥거폰 부부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들이 전기를 차단할걸 예측했다는건데, 주어진 단서라고는 게임 시작 전 물어본 질문밖에 없었습니다. 이 질문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추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게임의 결말도 당황스럽습니다. 마지막 남은 두 팀 중 케이트가 가진 열쇠는 2개이고 토마, 가나 팀은 4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케이트가 3백만 달러를 줄테니 열쇠를 전부 걸고 포커를 하자는데, 상식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상금이 1억불인데, 3%밖에 안되는 돈에 혹해서 확실한 승리를 내팽개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를 수락하고 포커 승부를 펼친 토마에게 필승의 비법이 있다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갑니다. 다른 동료가 있어도 되는 규칙인데, 딜러가 토마와 한 패였던 거지요.
결국 딜러는 리치 부어만의 변장으로 밝혀지고 딸 케이트와 눈물의 정을 나눈다!는 흔해빠진 신파로 마무리되... 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는 반전이 이어집니다. 리치 부어만은 알고보니 게임을 관전하기 위해 참가한 수많은 부자와 스타들의 폰을 해킹하여 정보를 빼돌리려는 사기꾼이었다는 거지요. 폰에서 게임에 배팅하기 위해 접속하는 상황을 이용했다나요?
그런데 그럴거면 구태여 유람선에서 게임을 벌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또 토마를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요. 리치 패거리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잠수함을 타고 나타나는 마지막 장면은 황당함의 정점입니다.
아울러 Q.E.D스럽게 수학 이론인 '부동점정리'가 등장하는데, 설명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 이론이 '나비 효과'와 연결되는 것도 잘 설명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절대 변하지 않는 부동점' 이 항상 있다는건 게임과 아무 관련도 없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게임이면 게임, 사기면 사기, 어느 한 쪽에 집중하는게 훨씬 좋았을텐데 괜시리 스케일만 크면서 이야기의 설득력은 전무하고, 재미도 없는 어정쩡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일하게 건질건 플레이어 중 한 명인 에멧이 가나로 변장하여 토마를 유혹하듯 다가와 뺨에 키스하는 장면 뿐이었습니다.


<<다이잉 메시지>>
80년대 개발되던 남쪽 섬의 리조트는 버블 붕괴 후 회사가 도산하고 관계자가 도망쳐 30년 넘게 방치되어 '유령 호텔'로 불리운다. 그리고 현재, 호텔을 철거하기 위해 내부 기둥을 해체하던 중 기둥 속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된다. 유령 호텔 건설 당시, 리조트용 토지를 불법적 수단으로 빼앗긴 피해자들을 대신해 개발 회사를 고소했던 변호사 치아키 실종 사건이 있어서 경찰은 사체가 그녀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30년 전 일이라 유전자 감식은 불가능했다.
호텔 건설 당시 어둠의 보스라고 불리었던 원 총무부 부장 스에요시 분지는 호텔 부지의 소유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건설에 대해서는 당시 건설 책임자 유하마 메이에게 물어보라고만 답하는데, 그녀 역시 30년 전에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메이가 치아키를 살해하고 사체를 호텔 기둥 속에 집어 넣은 것일까? 조사하던 중 유령 호텔은 내진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지만 여러가지 도움과 돈의 힘으로 개업 허가를 받았다는게 밝혀진다.
그리고 부동산 업자의 의뢰로 사건을 조사하던 사립 탐정 나카노사토가 중상을 입은 채 유령 호텔 방 안에서 발견되는데, 방의 입구는 안쪽에 냉장고를 놓아 막아 놓고 창문은 합판을 못박아 놓은 상태의 밀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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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는 두 가지입니다. 30년 전 백골 사체 사건의 진상과 현재의 나카노사토 탐정이 발견된 밀실에 대한 것입니다.
30년 전 백골 사체 사건의 경우, 시체는 기둥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러려면 건물 완성 전에 기둥 안에 시체를 넣어야 하고 유하마 메이는 건물 낙성식에 참석했으니 시체는 치아키일거라는게 경찰, 그리고 가나 들의 추리입니다.
그러나 토마의 추리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호텔이 내진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증언을 통해, 낙성식 당시 기둥은 '껍데기만 있는 가짜'였을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현재 유령 호텔의 이상한 기둥 배치를 통해 원래 껍데기만 있는 가짜 기둥에 콘크리트를 담아 굳혀 진짜 기둥을 만들었다고 추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둥 하나에 시체를 넣고 굳힌 것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피해자도 치아키가 아니라 유하마 메이가 될 수 있습니다. 낙성식까지는 가짜 기둥이었다는 이야기니까요.

추리는 대담하고 재미있습니다만 문제는 증거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짜 기둥은 껍데기만 있었다라는게 핵심인데, 이건 도저히 증명할 수 없어요.
또 미와코로 변장하여 나타난 치아키의 행동도 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치아키가 호텔 부지를 매입하여 개발에 나선 것 까지는 말은 됩니다. 리조트를 없애고 해안을 원상복구 시키는건 30년 전의 목적이기도 했으니까요. 호텔 해체 작업 시 사체가 발견되고, 옷을 갈아입힌 덕분에 피해자가 치아키로 오인되면 유력한 용의자가 스에요시 분지가 될 거라고 예상한 것 역시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그러나 사체 발견 시 살인 사건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는 석연치 않습니다. 또 탐정이 사건 조사를 시작한건 미와코가 살인 사건 해결없이는 부지 매입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해서, 부동산에서 어쩔 수 없이 고용한게 발단입니다. 나카노사토 탐정에 의해 미와코가 치아키이며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알아낸 탓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으니, 한 마디로 긁어 부스럼을 만든거지요.
아울러 탐정이 진상을 알아냈다 한 들, 스에요시를 옭아매는 계획만 실패할 뿐입니다. 그녀 자신의 범행은 30년 전의 사건이라 공소시효도 이미 끝났을테니까요. 이 진상 때문에 탐정을 습격한다는건 더욱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나이로 보면 상당히 버거울, 빨래 운반 통로를 수직으로 기어올라 탈출하면서까지 밀실을 만들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또 이 두 번째 수수께끼인 밀실 트릭은 추리라고 부르기도 힘든 민망한 내용이에요. 수사를 통해 빨래 운반 통로가 발견되지 않은 것 부터가 이상합니다. 사람이 충분히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밀실은 아닌데 말이지요. 그리고 치아키가 어떻게든 스에요시 분지를 엮어 범인을 만들 생각이었다면 탐정을 살해했어야 합니다. 단순히 중상을 입힌걸로는 부족했어요. 어차피 탐정이 깨어나면 증언을 통해 모든게 밝혀질테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도 없고요.

마지막으로 미와코가 호텔에 결함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고 말한게 앞선 대담한 추리 - 사체는 유하마 메이이며 기둥은 원래 가짜였다! - 의 단서가 되었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토마는 호텔의 결함은 범인만 알고 있을거라 단언하는데, 그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어요. 근거도 없고요.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됩니다. 호텔이 내진 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정도의 부실 건물이라는걸, 건설 반대파를 대표하는 변호사 치아키가 알고 있었다? 고발 등 모든 조치를 동원하여 개업을 방해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즉, 치아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아울러 설령 범행 때 알게 되었다 한들, 유하마 메이를 죽인 뒤 시멘트를 붓는 등의 공작을 혼자서 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런 작업을 혼자서 하는건 절대로 불가능했을겁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완성도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2020/08/07

소년탐정 칼레 1 -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햇살과나무꾼 : 별점 2.5점

소년탐정 칼레 1 - 6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논장


탐정을 꿈꾸는 13살 소년 칼레는 친구 안데스, 이웃집 소녀 에바 삼총사와 매일매일을 즐겁게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에바 어머니의 사촌 동생 에이나르 아저씨가 찾아오고, 칼레는 수상함을 느껴 개인적인 조사를 해 나가는데...

전설적인 아동 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1942년에 발표한 소년 탐정이 활약하는 모험 소설.

아주 오래전 읽긴 했던거 같은데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지 오래였었습니다. 다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와카타케 나나미의 <<녹슨 도르래>> 덕분입니다. 작 중에서는 히로토가 살인곰 서점으로 하무라 아키라를 찾아왔을 때 핑계삼아 이 책이 있느냐고 묻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며, 뒤에 부록격으로 수록된 '도야마 점장의 미스터리 소개'에서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미스터리 팬이라고 자칭할 수 없다.' '아동 대상 도서라고 얕보지 마라, 복선을 깔아놓는 방식이 절묘하다.'고 극찬하고 있거든요. 도저히 구해보지 않고서는 못 배길 찬사죠. 단, 도야마 점장의 소개에 따르면 작 중 등장한 책은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만, 이번에 읽은건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 탓에 어쩔 수 없더라고요.

읽으면서 조금 놀랐던 건, 1940년대 스웨덴 시골을 무대로 13살 짜리 소년이 해결하는 사건 치고는 상당한 강력 범죄들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에이나르 아저씨와 그의 일당들 때문에 삼총사는 유적 지하에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에이나르 아저씨는 그들을 구해주지 않을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세 명 모두 죽어버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어요. 에이나르 아저씨의 지문을 몰래 뜨다가 권총으로 위협당하고, 마지막 추격 장면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의 묘사도 아동용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묘사였고요.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역시 소년 탐정 고바야시 소년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걸 보면, 확실히 수십년 전은 지금과는 시대가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강력 범죄가 등장하는 만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추리적인 요소도 몇 가지 있는데,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꽤 그럴듯하게 사용하고 있다는게 돋보입니다. 에이나르 아저씨의 지문을 몰래 채취한 칼레가 보낸 편지 덕분에 스톡홀름에서 형사가 출동하게 된다던가, 악당 차의 타이어를 스케치해 놓았던 덕분에 갈림길에서 악당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아 챈다는 식이거든요. 충분히 있음직하면서도, 아이가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활약으로 눈길을 끕니다. 유적에 써 놓았던 낙서가 지워지고, 진주가 떨어진걸 토대로 유적에 에이나르 아저씨가 몰래 숨어들어 흔적을 지우고 보석을 훔쳤다는걸 눈치채는 장면도 추리적으로도 흥미로왔어요.

그러나 추리는 양념일 뿐이며, 전체적으로는 전형적인 아동용 모험 소설이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스웨덴 시골에서 13살 짜리 탐정 지망생 소년이 해결할만한 사건이 그렇게 대단할리 없잖아요? 에이나르 아저씨가 수상하다는건 계속 이야기되고 있어서 별다른 의외성도 없고, 전개도 반전없이 평이한 수준이에요. 오히려 전개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느낌마저 전해 줍니다. 10만 크로네 보석 도난 사건과 사건의 범인인 에이나르 아저씨를 쫓는 칼레의 활약과, 삼총사의 여름 방학 이야기 - 서커스 공연을 하고 식스텐 패거리와 장미 전쟁이라고 이름 붙인 다툼을 벌이는 등 - 가 같은 비중으로 뒤섞여 있는 탓입니다. 물론 식스텐 패거리 때문에 에이나르가 보석을 손에 넣는 시간이 지연된다는 등, 장미 전쟁 자체는 핵심 사건과 나름 엮이기는 하지만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하지만 단점은 순전히 제 기준일 뿐으로, 어린 친구들이 재미있게 즐기기에는 무리없는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바로 읽어봐야겠어요. 도야마 점장의 소개만큼 대단한 작품인지는 무척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