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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2021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열 여덟번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블로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라니 감개무량합니다. 다 컸으니 이제 돈을 좀 벌어 와야 할 텐데 말이지요.

하여튼,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사태 장기화 탓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작년보다는 줄었어요. 작년에는 133권을 읽었는데, 올해는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7 (77)권, 기타 장르문학 3 (4)권, 역사서 17 (9)권, 디자인 or 스터디 1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5 (25)권, 기타 도서 24 (14)권으로 다 합쳐서 117권을 읽었으니까요.
이유는 백신 접종과 위드코로나 정책 덕분에 다른 활동으로 보낸 여가 시간이 늘었던 탓입니다. 올림픽도 열심히 관전했고요. 거기에 더해 작년에는 '추리 소설 1,000권 읽기'라는 개인적인 큰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열심히 달리기도 했었지요. 여러모로 작년이 역대급이었던 셈으로, 당분간은 작년처럼 책을 많이 읽는 해는 오지 않을거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최소한의 목표인 100권은 훌쩍 넘겼으니 만족합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21년 베스트 추리소설 :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별점 4.5점!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 역사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는 문학사 서적. 상세 리뷰는 링크 참고하시길.

<<나는 언제나 옳다>>
별점 4점! 복잡한 복합 장르 구성을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 단편 분량인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2021년 워스트 추리소설 :
<<ON 온>>
올해의 워스트 후보작은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술트릭의 모든 것>>,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 <<가면병동>>, <<최후의 일격>>, <>, <<범죄 캘린더>>의 7편이나 됩니다. 모두 별점 1.5점짜리였지요.
거장 엘러리 퀸의 작품이 두 편이나 포함되어 있는게 놀라운데, 한 편은 나이 탓에, 또 한 편은 양산 모드로 쓰여졌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최후의 일격>>은 괜찮은 발상의 트릭이 사용되기는 했고, 단편집 <<범죄 캘린더>>는 별점 2~2.5점짜리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워스트 급은 아닙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은 책 자체 내용 문제보다는 다른 문제로 인한 감점 요인이 더 컸고요. 단편집 <<서술트릭의 모든 것>>은 <<범죄 캘린더>>와 같은 이유로 제외하면, 진짜 워스트 후보작은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와 <<가면병동>>, <>의 세 편이 남습니다.
이 중 올해의 워스트로는 <>을 꼽습니다. 유치한 설정, 합리적이지 못한 전개,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주인공들이 어우러진 싸구려 스릴러니까요. 다른 두 편은 약간이나마 추리적인 요소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나마 <>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 물론 도긴개긴입니다만....

2021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도 3권 밖에 읽지 않아서 뽑기가 어렵네요. 재미만큼은 확실했던 별점 3점의 <<사라진 세계>>가 베스트였어요. 워스트는 따로 뽑지 않겠습니다.

2021년 베스트 역사 도서 :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별점 5점! 역사 바로 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와 <<영어 조선을 깨우다 1>>도 별점 4점을 받은 좋은 책이었는데, 아쉽게도 탈락했네요.

2021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별점 1점. 편협한 개인 의견을 잔뜩 투입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그냥 '나쁜' 책입니다.

2021년 베스트 /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딱 한 권 밖에 읽지 않아서, 올해는 평가할게 없네요. 공부가 부족했던 한해네요....

2021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올해 이 쪽 분야 책들은 다 고만고만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경양식집에서>>,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가스트로노미>>의 5권이 별점 3점을 받았습니다.
이 중 재미와 자료적인 가치, 책의 완성도 등 모든 면을 고려하여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를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1부만 한정하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던 책이니까요.

2021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올해는 2점 이하의 별점이 없어서, 워스트는 따로 뽑지 않습니다.

2021년 베스트 기타 도서 :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별점 4점을 받은 책은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n분의 1의 함정>>의 세 권이었습니다. 다 좋은 책이었지만, 이 중 재미에 더해 제 전공 분야인 커뮤니케이션과 상호 작용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준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를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21년 워스트 기타 도서 :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별점 1.5점을 받은 올해의 워스트 후보작은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만화로 보는 99가지 발명품 이야기>>의 3권입니다.
이 중 사람 열받게 만드는 가소로운 자기 주장을 담고 있는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가 올해의 워스트입니다.

2021년 베스트 Movie :
<<나이브스 아웃>>
훌륭하게 현대에 되살린 본격 추리물! 별점 3점.

2021년 워스트 Movie :
<<철권을 가진 사나이>>
황당무계하고 유치했던, 심지어 액션마저 별 볼일 없었던 '가짜' 무협 영화.

2021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전체적인 별점은 고만고만해서 베스트랄건 없네요.
에피소드 기준으로는 <<Q.E.D iff 증명종료 14>> 수록작 <<1억엔과 여행하는 남자>>가 오랫만에 별점 4점짜리 에피소드였습니다.

2021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Q.E.D iff 증명종료 16>>
수록작 3편 중 2편이 별점 1.5점, 1편이 별점 1점을 받은 워스트 오브 워스트.
그 외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의 <<앙숙>>도 별점 1점짜리 망작이었습니다. 별점 1.5점 짜리 에피소드들은 언급하기도 힘들만큼 숱하게 있었고요. 추리 만화 분야는 영 실망스러웠던 한해였네요.

2021년 베스트 Comic - 기타 :
<<그리고, 또 그리고 1~5>>
별점 4점짜리 책은 이 책 외에도 <<피너츠 완전판 19 : 1987~1988>>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베스트로 꼽은 이유는 재미와 감동에 더해 미대 졸업생인 저에게 많은걸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고요. 하여간,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지만 만화가가 그린 자기 이야기는 무조건 최고에요.

2020년 워스트 Comic - 기타 :
최저 별점이 2점이라서, 워스트는 따로 꼽지 않겠습니다.

결산평 :
이상으로 2021년 블로그 결산을 마칩니다.
올 한해는 저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한해였어요. 인생의 큰 목표 중 하나였던 '추리 소설 1,000권 읽고 리뷰 쓰기'를 완료했기 때문이거든요. 저도 하루하루, 한달한달, 한해한해가 더욱 소중한 나이가 되었는데, 2022년에도 저 개인적으로 내세울 수 있고 자부심을 가질만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2022년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했고, 또 감사드립니다!

2020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21/12/26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 변용란 : 별점 2.5점

대실 해밋 - 6점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현대문학

하드보일드의 거장 대실 해밋이 쓴,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선. 작가 인생 초기작들로 유명한 컨티넨털 탐정사 탐정이 등장합니다. 대체로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우며,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몇몇 작품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배신의 거미줄>>
외과의사 에스텝 박사가 죽고 부인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사가 숨겨왔던 첫 번째 부인이 찾아온 직후 사건이 일어났던 탓이었다. 변호사 리치먼드의 의뢰로 탐정은 의사가 죽기 전 부쳤다는 편지를 찾아 나섰다.
첫 번째 부인을 미행한 끝에 탐정은 사건 배후에 사기꾼 제이콥 레드위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이콥을 미행하는 또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아챘는데...


"의심이 든다면 미행해라"라는 말 처럼 미행을 통한 단서 찾기와 그 외 탐정 사무소를 통한 조사 및 다른 탐정들과의 분담과 협력 등 탐정의 진짜 업무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 실제로 탐정으로 일했던 대실 해밋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행 과정을 통해 당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거리와 풍경들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좋았고요. 이 때 부터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꿔치기"트릭이 사용된 덕분입니다. 에스텝 박사는 가짜로, 진짜 에스텝 박사의 의사 면허를 제이콥에게서 구입하여 의사 행세를 해 왔던 겁니다. 첫 번째 부인이라며 다타났던건 진짜 에스텝 박사의 부인이었고요. 제이콥은 에스텝 박사를 수십년 동안 뜯어먹다가, 크게 한 탕 저지를 생각으로 사건을 꾸몄던겁니다.
제이콥의 계획도 괜찮았어요. 그는 거액을 요구하면, 박사가 자살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그는 유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의도는 아니었지만, 현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다고 인정된다면 유산 전부를요!

그러나 계획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탐정이 제이콥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단서를 잡은 뒤, 협박해서 그의 입으로부터 진상을 듣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행과 감시로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허나 제이콥이 탐정에게 진상을 술술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는게 문제에요. 증거품인 에스텝 박사의 편지 (자살하겠다는)를 순순히 내 준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탐정과 제이콥 모두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이콥이 이렇게까지 설설 길 이유는 없잖아요? 도주하던 제이콥이 오가르 경위에게 사살당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허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탄 얼굴>>
탐정은 밴브룩의 두 딸 가출 사건 조사 중 잠깐 만났던 코렐 부인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둘째딸 루스 밴브룩마저 시체로 발견되었고 탐정은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거라 확신했다. 탐정과 팻 형사의 조사 결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유사했던 여성들이 자살했던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고, 모두 레이먼드 엘우드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실종되고, 자살했던 여성들 사건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된 사건을 모두 조사해 보겠다는 수사 방침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하드보일드라기 보다는,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운 탓입니다. 탐정과 팻 형사가 레이먼드 엘우드가 자주 방문했던 저택에 침입한 이후부터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저택에서 사이비 종교와 마약에 빠진 여자들이 난교 파티를 벌이던 사진을 찍어서 협박해 왔다는 진상도 허무했고요. 탐정이 팻을 설득해서 주요 증거물인 사진을 모두 소각한다는 결말도 낭만적인 모험 활극과 다를게 없지요. 팻의 백만장자 아내도 사진에 찍혀있었다는 약간의 반전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중국 여인들의 죽음>>
릴리언 샨은 하녀 한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취소하고 급작스럽게 귀가했던 날, 낯선 중국인 청년에게 습격당했다. 릴리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하녀는 죽고 말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은 지하실에서 요리사 완란의 시체도 발견하였다.
탐정은 사건을 의뢰받은 뒤 정보를 캐내다가 사건 배후에 어빙턴 호텔 소유주 코니어스와 차아니타운의 실력자 창리칭이 관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하는 작품. 단지 이국적인 배경에 그치는건 아니에요. 중국을 배신하고 한 몫 단단히 잡은 이민자의 딸이 주인공 중 한명이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중국인 독립운동가의 무기 밀수에 편승해서 악당들이 한 몫 잡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의 핵심 설정과 전개 모두가 설득력있게 활용되고 있거든요.
릴리언의 저택은 해변과 맞닿아 있었는데, 밀수를 위해서는 해변과 맞닿아 있는 저택이 필요했다는 진상도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탐정이 정말로 하는게 별로 없는 탓입니다. 전개는 우연과 억지에 의한게 많고요. 탐정이 조사원 중 한명이었던 마약중독자 얼이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었어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걸 알아챈건 순전히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동공? 눈빛? 모두 설득력이 약했어요. 주요 등장인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필요한 증언을 얻는다는 전개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휘슬러가 일본군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조작했던 사진을 결정적 순간에 주머니에서 꺼내는 장면처럼요. 탐정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의뢰인인 릴리언을 무사히 사건에서 빼내고 휘슬러를 포함한 악당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결말은 전혀 하드보일드스럽지 않더군요. 릴리언은 선량했고 선의에 가득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주는 기사가 활약하는 영웅담이자 낭만적인 모험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반영한 듯한 창리칭 저택의 복잡한 구조와 기묘한 보디가드들, 은밀하면서도 잔혹한 공격과 미모의 노예 소녀 슈슈에 대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지루했던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쿠피냘 섬의 약탈>>
탐정은 결혼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쿠피냘 섬에서 열린 헨드릭슨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날 밤, 폭풍우와 함께 강도단이 섬의 은행과 보석상을 습격했다. 결혼식 하객 중 한명이었던 러시아 공주로부터 이 사건 소식을 들은 탐정은,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헨드릭슨 저택 집사와 운전수에게 맡기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도단의 도주를 막는데는 실패했고, 헨드릭슨 저택으 복귀 후에 집사와 운전사가 살해당했으며, 결혼 선물은 도난당했다는게 밝혀지는데....


오래 전에 읽었었던 작품. 내용 자체를 잊어버려서 처음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한 강도단과 맞서 싸우는 탐정의 활약을 그린 영웅담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정통파 추리물과 하드보일드가 잘 결합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말이지요.
특히 합리적인 추리가 볼만했습니다. 탐정은 강도들이 외부에서 왔다면 일당과 무기 운반을 위해 자동차나 배가 필요했을텐데, 섬 주민의 자동차와 배를 탈취했던 상황에 주목합니다. 그 외의 여러가지 단서를 조합하여 러시아 장군과 공주 일행이 강도라는걸 알아내고 맙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한 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공주 일당의 범행 동기도 시대를 감안해보면 충분히 그럴듯했고요. 이런 추리를 일종의 추리쇼를 통해 선보이는 장면은 정통파 고전 본격 추리물을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추리쇼에서 이어지는, 돈 보다 범죄를 해결하는게 더 재미있다며 뱀 같은 공주의 유혹은 무시하고, 심지어 여자를 쏘지 않을거라 믿으며 도망가려는 공주 다리를 쏘아 맞추는 탐정의 모습은 고전 본격 추리물을 넘어선, 하드보일드 장르의 도래를 알리는 명장면이었다 생각됩니다. "난 장애인한테서도 목발을 훔쳤던 사람 아닌가?"라는 말도 희대의 명대사였고요. 구 시대의 화려했던 부르주아들은 모두 현실에 몰락해 버렸고, 이들을 악전고투끝에 살아남은 플로레탈리아가 짓밟는 구성은 시대가 변했음을 잘 느끼게 해 주네요.
마지막에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던 잔챙이 범죄자 플리포를 탐정과 공주가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 설득하는 클라이막스도 재미있었습니다. 작위적이라는건 부인하기 어렵지만요.

물론 공주가 탐정을 살려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큰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여명기, 장르의 초석을 다졌을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크게 한탕>>
탐정은 어느날 밤 술집에 패디 더 맥스, 블루포인트 밴스, 해피 짐 해커, 빅 버드 레드 오리어리 등 유명한 범죄자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맨스 은행이 습격당할거라는 정보를 전해 준 정보원 비노가 살해당한 다음날 아침, 시맨스 내셔널 은행과 골든게이트 신탁회사가 약탈당했다. 무려 150여명의 프로 범죄자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20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현금 수백만달러를 훔쳤고, 경찰 포함 3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던 대참사였다.
그런데 강도 일당 수십 명의 시신이 차례로 발견되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죽은 강도 중 한 명이 '빅 플로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생존자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쫓던 탐정은 밴스를 비롯한 다른 강도들의 습격에서 그를 데리고 겨우 탈출했다. 부상당했던 레드 오리어리가 탐정을 이끈 곳은 빅 플로라가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였다....


백명이 넘는 강도단, 수백만 달러의 강탈, 수십명의 죽음 등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을 보여주는 범죄물.
은신처에 있던 연약해 보였던 노인이 사건의 흑막 파파도풀로스였으며,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기에 무사 탈출을 위해 탐정을 이용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탐정사무소 소장인 '영감'이 사건 배후에는 굉장히 머리 좋은 인물이 있을거라고 말했었고, 빅 플로라가 탐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 등 이런저런 복선이 잘 배치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하지만 설정에 비하면 내용은 비교적 수수한 편입니다. 탐정도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를 쫓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빅 플로라의 은신처에서 벌이는 목숨을 건 연극도 유치했고요. 빅 플로라가 노인을 하인 대하듯 하는 장면같은 억지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빅 플로라가 우두머리이며 노인은 거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유능한 탐정마저도 속아넘어간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 속셈이었을텐데,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어요.
이런 점에서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건질만했던건 별로 없었던 작품입니다. 단순 화끈한 마쵸 모험 액션물에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거액을 강탈한 뒤, 공모자들을 죽이고 독차지하려고 했던 계획을 망쳐버린 사랑꾼 빅 레드 오리어리를 징벌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파파도풀로스 입장에서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피 묻은 포상금 106,000달러>>
탐정에게 패디 더 멕스의 동생 톰-톰 캐리가 찾아와 파파도풀로스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현상금에 대해 물어보았다. 몇 건의 살인과 습격이 이어진 끝에, 탐정들과 캐리는 백만장자 뉴홀 저택에 은신하고 있던 파파도풀로스를 잡는데 성공하는데...

시원치않았던 전편에서 이어지는 후편인데, 이 작품은 아주 좋았습니다. 탐정의 냉혈한스러운 면모가 빛나거든요. 탐정은 신참 탐정 잭이 파파도풀로스의 꼬임에 넘어가 한 패가 되었다는걸 진작에 눈치챘습니다. 아마도 그리스인 거주지 습격 사건 때 눈치챘겠지요. 그래서 마지막 습격 때 잭을 일부러 대동한 뒤, 모든 진상을 까발려서 잭은 캐리의 손에 의해, 캐리는 다른 탐정이 사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배신자를 징벌하고 탐정 사무소의 평판을 지켜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거지요. 이 와중에 탐정 사무소 다른 탐정들을 동원하고, 잭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안배를 하는 꼼꼼함도 볼만했고요.
잭이 배신하게 된 계기가 빅 레드 오리어리의 연인 낸시가 사실 백만장자 뉴홀의 딸이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전도 상당한 놀라움을 가져다 준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끝판왕격인 파파도풀로스의 허무했던 최후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탐정이 잭의 배신을 언제 눈치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낸시의 이상했던 시선, 잭의 이상했던 눈빛은 증거가 될 수 없었는데 말이지요. 잭이 별다른 증거도 없는데 스스로 자포자기해서 자백을 한 것도 다소 편의적인 전개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교함과 냉혹함이 잘 살아있는 하드보일드 여명기를 대표할만한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메인의 죽음>>
메인이 출장을 다녀온 날 새벽, 2인조 강도가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지갑 안의 2만 달러를 강탈해 사라졌다. 현장 근처에서는 흉기인 권총과, 여성 손수건이 들어있는 지갑이 발견되었다. 메인의 보스 군겐에게 고용된 탐정은 손수건이 군겐의 젊은 아내 것이며, 아내의 하녀가 범죄자와 어울린다는걸 알아낸 뒤, 아내로부터 사건 진상을 고백받는다. 그녀와 메인은 불륜 관계였으며, 2만 달러는 불륜을 저지르던 당일 오후에 강탈당했던 것이었다. 범인은 하녀의 애인이었다.

젊은 아내를 옭아맬 속셈으로 사건 수사를 의뢰한 군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보스의 아내까지 건드리다 파멸한 메인,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한 젊은 아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마음에 들었고요. 불륜 남녀가 돈을 빼앗긴걸 쉽게 털어놓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범인들의 잔꾀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범인 일당의 부주의한 행동이 미행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고백받은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탐정 수사' 물인데, 미행으로 진범이 누구인지 바로 밝혀내는건 너무 쉬운 전개였습니다. 메인이 좌절한 나머지 자살했고, 보험금 때문에 메인의 아내가 이를 강도 사건으로 꾸몄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게 훨씬 낫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메인을 죽이고 강도 살해 당한 것 처럼 꾸몄다는게 더 타당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메인의 아내를 비롯, 군겐의 아내까지 사건에 관련 여성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던걸까요? 여튼,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사물로는 괜찮았던 깔끔한 소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국왕 놀음>>
탐정은 미국인 청년 라이오넬 그랜덤을 찾아 유럽의 소국 모리비아로 향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과보호로부터 탈출한 그는, 유럽에서 무려 3백만달러나 되는 돈을 현금화했다. 탐정은 라이오넬이 군대를 장악한 실력자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모리비아에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3백만 달러는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유럽 소국 모리비아를 무대로 한 일종의 군웅물이랄까, 여튼 왕이 되려는 사람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 작품. 설정은 기발했고, 왕위를 놓고 여러 세력이 벌이는 암투가 짤막한 분량안에서 잘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았어요. 일단 에이나르손 대령이 왜 미국인을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군대를 장악했고, 인기도 많았다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서 왕이 되면 그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3백만 달러는 분명 거액이지만, 일국의 왕이 된다면 그 정도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거잖아요?
대통령 비서 마흐무드가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현 대통령의 통치를 못마땅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한들, 절대 권력을 가진 대통령 비서가 이를 쉽게 포기하고 혁명에 바로 몸을 맡긴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급작스럽게 에이나르손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고요.
에이나르손이 군대를 장악하여 기껏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탐정의 총에 굴복해서 순순히 라이오넬의 대관식을 치룬 것도 그의 야망과 노력을 생각하면 많이 허무했고요. 최후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낭만적인 중세 시대 모험 활극이라면 모를까, 20세기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파리잡는 끈끈이>>
뉴욕의 명문가 햄블턴 가문의 막내딸 수는 범죄자와 도망친 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1년 후, 돈 1,000달러를 요구하는 전보가 날라왔고 탐정은 돈을 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꾼 홀리 조의 계획으로 수는 가짜였었다. 홀리 조로부터 캐낸 수와 베이브의 거처를 찾은 탐정은 그곳에서 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부검 결과 수는 만성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게 밝혀졌다. 비소는 파리잡는 끈끈이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다시 협잡꾼 홀리 조를 심문해서, 그가 수와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갑자기 나타난 베이브가 홀리 조를 사살하고 달아나는데;....


부잣집 철부지 딸의 비참한 죽음, 얽히고 섥혀 서로를 죽이고 마는 애증 관계가 그려진 정통 하드보일드. 탐정이 베이브를 추격해서 사로잡는 부분은 액션 활극 느낌도 강하지만, "누가 수를 죽였나?"라는 후더닛 측면에서도 볼만한 추리물이었습니다. 
일단 홀리 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마찬가지인 수를 죽일리 없었어요. 수와 도망칠 계획이었으니까요. 베이브도 오랫동안 비소를 수에게 먹여 죽일만한 인물은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수가 자살했다고 하기에는, 만성 비소 중독은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지요. 그렇다면 진상은? 수는 비소를 오랫동안 조금씩 먹어 내성을 키운 뒤, 한번에 많은 양의 비소를 함께 먹어 베이브를 해치울 생각이었던겁니다. <<맹독>>에도 나오는 트릭이지요.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 소장 영감은 이는 체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비웃는게 재미있더군요. 파리잡는 끈끈이가 숨겨져 있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이 방법이 나와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요. 베이브가 마침 탐정이 심문하던 도중에 나타나 홀리 조를 사살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웠고, 애초에 수와 조가 베이브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사살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비소 내성을 키워 독살하려 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범행을 저지른다고 살인죄가 덮이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추리적인 부분에서 볼만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그 부분을 좋게 언급했었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2/24

끝없는 살인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주자덕 : 별점 2점

끝없는 살인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투고 매니아 이치로이 고즈에는 귀가하다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습격을 받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반격 끝에 겨우 살아난 그녀가 범인의 수첩을 끄집어 내었던 덕분에, 범인의 정체가 구츠와 기미히코라는건 비교적 일찍 드러났다. 또한 수첩 속 기록으로 그가 일련의 연쇄 살인을 일으킨 범인이라는 것도 밝혀졌지만, 구츠와가 실종된 탓에 범행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범죄 전반의 권위자가 모이는 모임 '연미회'에서 비밀리에 이 사건을 논의하기로 하여, 고즈에도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연미회 멤버인 추리작가, 탐정 회사 경영자, 범죄 심리학자 등 참석자 5인은 각자 추리를 펼쳐 보이는데....


<<맥주 별장의 모험>>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 추리작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정통 본격 추리물. 여러명의 탐정이 하나의 사건을 놓고 각자의 추리를 펼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의 구성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본격물 팬은 즐길거리가 많아요. 다양한 추리가 폭넓게 펼쳐지고, 동기와 트릭에 대한 추리도 여러가지가 등장하니까요. 이치로이 고즈에가 살해당했을 뻔한 상황부터가 그러해요. 처음에는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가 살인 미수로 도주했다고 생각되었지만, 연미회에서의 추리 배틀(?)을 통해서 현장은 일종의 밀실이었다는게 드러나거든요. 뒤이어 사전 조사로 맨션 106호에 살던 고즈에의 이웃집이 비어있다는걸 안 범인이 도주할 때 그곳에 숨었다던가, 사건 직후 비명을 듣고 복도로 나와있던 102호 거주자 모미야마 케이이치가 범인의 조력자이자 진범이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련된 추리가 이어집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추리는 경찰 나루토모가 당시 수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게 밝혀졌다고 말해서 부정됩니다. 경찰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작중 고즈에의 말대로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는건 칭찬받아 마땅해요. 현장은 밀실이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자인 척 조작했던 일종의 시간차 밀실 트릭도 꽤 그럴듯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추리 소설가나 전문가들이 탐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의 동기를 설명할 때 '미싱 링크'라면서 여러가지 추리물 고전을 들먹이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또 단순히 추리 배틀이 아니라 이야기 도입부에 벌어진, 고즈에 살인 미수 장면이 사실은 더 이전 시점에 있었던 (구츠와 기미히코가 사라진 2월 15일) 사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이 쓰인 셈인데, 깜빡 속았네요. 뻔했던 고전적 설정에 이런 아이디어를 더해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지게 한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반전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이야기 중에 고즈에가 잠깐 집을 떠나 살았던 곳에 대한 언급 등 관련 정보가 제공됨은 물론, 고즈에가 이전에 4층에 살았는데 살해당할 뻔 한 뒤 이사간 곳이 1층이라는건 이상하다는 나루토모의 착안이 핵심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사건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고즈에가 예전에 받았던 협박장과 협박 전화, 시가타의 이상했던 사고사는 초반에 이야기되었어야 했어요. 고즈에가 '연미회'에 이 사건을 의뢰한건, 구츠와 기미히코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지요. 하지만 범인이 가출했을 때를 즈음하여 고즈에에게 협박 전화와 협박장이 보내졌고, 그녀와 친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었다면 당연히 이를 범인과 연결하는건 당연합니다. 고즈에의 의문도 여기서부터 출발했어야 하는게 당연하고요. 이걸 아예 깨닫지도 못하다가 연미회 자리에서 알아채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4년간 범인의 동기에 대해 고민했다는 그녀의 절실함도 설득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추리들도 어떤건 재미있지만, 어떤건 비약과 억측이 심했어요. 고즈에의 말대로 '억지로 가져다 붙이려면 뭐든지 가능하다'는걸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고즈에가 연쇄 살인범이며, 자기가 습격당했던건 조작이었다는 진상이 드러난 이후 설명은 최악이에요.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인 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도움을 청했던 시가타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서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구츠와를 살해한건 당연히 정당방위인데 왜 경찰에 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깊게 사귀지도 않았던 남자가 부모보다도 더 믿고 의지할 만 했을지는 잘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그 뒤,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혀있던 하시타니 코지로를 찾아가 구츠와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물어본 것 부터는 완전 억지에요. 하사타니는 그녀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였다는걸 눈치챘고, 사체 처리를 도운 뒤 그걸로 고즈에를 협박해 성 노리개로 삼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했고요. 구츠와를 죽였다는 진상을 곧바로 눈치챘다는건 비약이 심할 뿐더러, 하시타니가 사체 처리에 협조한 이상 그 역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고즈에를 협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요. 차라리 고즈에가 하시타니를 공범으로 신고하겠다며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게 더 말이 되었을겁니다.
사건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혔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 죽일 필요도 없이 자기와 관련이 깊었던 하시타니만 죽이고, 현장에 수첩을 떨어트려 놓는 정도로도 충분했을테니까요. 수첩에 적혔던 이름이 있으니 나머지는 경찰이 수사하면 되잖아요. 오히려 초등학생의 경우는, 구츠와와 엮일 이유가 많지 않은 만큼 살아 있는 상태로 증언을 하게 하는게 훨씬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했다면 구태여 토네리 히로미 페이지를 뜯어낼 필요도 없었어요. 시점적으로 토네리 히로미가 먼저 죽은게 분명하니까요. 하시타니가 토네리 히로미라는 여성 (가명을 쓴 고즈에)과 방을 빌렸다는게 드러났어도, 이는 구츠와와 피해자들이 어떻게든 엮여 있다는걸 강하게 드러낼 뿐이었고요.

범인이 초반에 누구인지 드러난 탓에, 후더닛이 아니라 와이더닛 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쪽 부분으로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독자 투고는 처음부터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모두 독자 투고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건 연미회 멤버들은 몰라도 독자들은 쉽게 집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토네리 히로미를 살해하려고 했던 구츠와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도 죽일 생각을 했고, 그 연결고리가 독자 투고였다는건 연미회의 슈타라가 초반에 언급했 듯 다소 뻔한 설정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범인 구츠와와 살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된 피해자는 토네리밖에 없으니, 범인과 목록만 있다면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추리쇼따위는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주인공인 고즈에가 '무작위로 선정된 가짜 목표' 였었다는걸 알게된 후, 구츠와가 토네리에게 살의를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구츠와의 동급생 여학우들을 모조리 죽일 결심을 한다는 결말은 제가 뭘 읽었나 싶게 만들더군요. 이기던 게임 종료 직전 자살골을 넣은 선수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마 좋던 결과물을 다 망쳤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추리적인 부분은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트릭을 잘 사용한 전개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본격 추리물에서 가장 중요할 '공정성' 측면에서 큰 단점이 있고, 살인을 가볍게 여기고 희화화하고 있다는건 별로였어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아무래도 허구성이 강조되는 만큼 이런 단점이 좀 가려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2021/12/19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마틴 에드워즈 / 성소희 : 별점 2.5점

고전 추리·범죄소설 100선 - 6점 마틴 에드워즈 지음, 성소희 옮김/시그마북스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발간한 고전 범죄소설 시리즈를 읽을 때 참고할 안내서. 1901년에서 1950년 사이에 출간된 소설 중 범죄 소설에 초점을 맞춰 모두 102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기별, 장르별, 특징별로 상세하게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별로 왜 그 작품을 선정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덕분에 소개된 작품만 읽어도, 고전 추리, 범죄 소설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황금기를 지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통 고전 본격물'을 일컫는, 이른바 '페어플레이 미스터리'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지요. 저자는 1차대전 이후 전쟁에 지친 대중이 현실 도피와 함께 흥미진진한 게임을 원했기 때문에 이 분야가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점점 소설 속 탐정과 지혜를 겨루는 작품이 많아졌으며, 그 결과 오락거리로 즐기는 가벼운 문학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이른바 범죄 소설의 '황금기'가 바로 이 시기인겁니다. 복잡한 퍼즐, 이야기 속 단서 삽입, 독자를 현혹시키는 여러가지 장치들을 선보이기 위해 장편 형식이 유행하게 된 것도 필연이었고요.
또 불가능 범죄 미스터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편 형식이 가장 잘 맞는다는 주장도 기억에 남습니다. 독자가 불신을 유예하는 시간, 즉 사실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멈춰놓는 시간이 짧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저 역시 동의합니다 나중에 리뷰를 쓸 때는 "생각해보니 억지스럽고 작위적이었다'고는 해도, 최소한 읽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 없이 두뇌 게임만을 온전히 즐기려면 이야기가 길면 안 되겠지요.

이런 추리소설 통사적인 측면 말고도, 작품별 소개글도 수준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진짜 흥미를 자아내는 선까지만 알려주는, 스포일러가 전혀 없는 내용 요약도 일품이며 소개된 작품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도 충실히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화 버젼에 대한 정보가 아주 디테일해요. 영화는 물론, TV 시리즈까지 모두 소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움직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통제 불능 상태의 로터리와 마주치는 두 번째 추격 장면은 히치콕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각색한 영화에 활용했다는 이야기까지 소개될 정도거든요.
비슷하거나 영향을 받은 작품에 대한 소개 역시 그 방대함과 깊이가 남다른 수준이며 그 외 여러가지 토막 정보들도 충실합니다. 바로네스 오르치의 <<미스 엘리엇 사건>>은 1915년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남극 탐험을 떠날 때 챙겨갔던 책이었다던가, 크리스티아나 브랜드가 1979년, <<독 초콜릿 사건>> 재판 서문을 쓰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일곱 번째 방법을 발표했다던가, 우드소프의 1932년 데뷔작 <<사립학교 살인사건>>은, 1934년 미국 사립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그러합니다. 1931년 발표되었던 에블린 엘더의 <<흑백 살인>>은 주인공 샘 호더가 그린 그림이, 프랜시스 비딩의 1935년 작 <<노리치의 피해자들>>에서는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 단서로 사용되었다는 등, 추리 소설 관련된 아이디어가 이미 20세기 초엽에 정립되었다는 정보들도 재미있었고요. 읽으면서 저자의 추리, 범죄 소설 분야에 대한 방대하면서 해박한 지식에는 감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리 소설가들이 작품을 썼던 의도들도 볼만했던 정보입니다. A.E.W 메이슨이 <<독화살의 집>>을 쓸 때 목표로 했던 건,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된 후 추가 설명해야 하는 내용을 가능한 없애겠다는 것 처럼요. 페어플레이 추리 소설의 초창기 표본인 <<밤중에>>를 쓴 고렐 경의 목표는 모든 필수적인 정보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하고요. 고렐 경의 이 작품에서 건물 평면도, 지도 등이 처음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A.A. 밀튼은 추리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탐정이 독자보다 특별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는데, 과연 곰돌이 푸를 쓴 작가 답네요. 가장 마음에 든 건 마이클 이네스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추리 소설은 어쨌거나 순전한 오락물이니 독자를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해 주겠다는 야망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데 맞는 말입니다!
빅터 로렌조 화이트처치가 <<다이애나 웅덩이의 범죄>>를 쓸 때, 본인 스스로 왜 범죄가 일어났고 누가 범인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창작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자 뿐 아니라 작가조차도 의미를 모르는 단서들을 살펴보며 수사를 하고 글을 썼다는 건데, 발상이 참 독특했어요.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안내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내에 따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이 턱없이 부족한 탓입니다. 총 102편 중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래의 29편에 불과합니다. 절판된 책도 포함한 것으로, 실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보다도 훨씬 적을 거에요. 이래서야 이 책을 읽는 의미가 많이 퇴색할 수 밖에 없지요.

1. 『배스커빌 가의 사냥개』 - 아서 코난 도일
2. 『네 명의 의인』 - 에드거 월리스
3. 『브라운 신부의 순진』 - G.K. 체스터턴
4. 『오시리스의 눈』 - R. 오스틴 프리먼
5. 『하숙인』 - 마리 벨록 로운즈
6.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어니스트 브래머
7. 『트렌트 마지막 사건』 - E.C. 벤틀리
8. 『』 -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9. 『붉은 저택의 비밀』 - A.A. 밀른
10.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1. 『증인이 너무 많다』 - 도로시 L. 세이어즈
12. 『독 초콜릿 사건』 - 앤서니 버클리
13. 『목사관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14.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15.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 이든 필포츠
16.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17. 『시행착오』 - 앤서니 버클리
18. 『완벽한 살인사건』 - 크리스토퍼 부시
19. 『ABC 살인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20. 『막다른 사건 부서』 - 로이 비커스
21. 『살의』 - 프랜시스 아일즈
22.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조세핀 테이
23.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24. 『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25. 『붉은 오른손』 - 조엘 타운슬리 로저스
26.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7. 『수상한 라트비아인』 - 조르주 심농
28.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 H. 부스토스 도메크
29. 『야수는 죽어야 한다』 - 니콜라스 블레이크

* 자유 추리문고에서 출간된 <<포튠을 불러라>>는 이 책에서 소개한 『포춘 씨, 부탁입니다』 와는 다른 단편집으로 생각됩니다. 언급되고 있는 <<작은 집>>이라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외 수록작은 다르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소개된 걸로 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개된 작품은 한 3~4권 빼고 전부 읽었기에, 별 의미없는 소개였던 셈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대한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이런 이유로 감점하여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2/18

일곱 명의 술래잡기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5점

일곱 명의 술래잡기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시도쿄의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 상담원 누마타 아예는 "다~레마가 죽~였다 ..." 라는 섬뜩한 전화를 자정 경에 받았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는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전화는 곧이어 자살을 결심했다는 남자로 연결되었다. 다몬 에이스케는 자살할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 신사를 찾았다가 옛 추억이 떠올라 당시 함께 놀던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목을 맬 요량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를 포함해 여섯명 뿐이어서 월요일부터 한 명씩, 다섯명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토요일에는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후 다몬이 실종되었고, 친구들도 괴전화를 받고 한 명씩 차례로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유준, 사야에 토시까지 죽고, 사건 해결을 위해 힘을 함친 다츠요시와 고이치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일곱번째 친구 '사카야노 요시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요시코와 관련되었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장편 소설. 호러가 아니라 정통 추리물에 가까왔다는게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하야마 고이치가 추리쇼를 펼치기 직전까지는 호러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과연 미쓰다 신조 작품다왔달까요. 연쇄 살인극이 마타테 시에서 아직도 두려워하는 다레마 가문의 귀신 들린 아이,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와 결합되어 섬뜩함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동일한 "다~레마가 죽~였다 ..." 놀이를 하다가 술래가 뒤를 돌아보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는 이야기를 가지고 공포스럽게 풀어낸 솜씨도 절묘했어요. 그래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을 한 명 씩 술래가 잡았던 거지요, 설득력 넘치면서도 호러물에 딱 맞는 그런 상황과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추리물로서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탐정역인 하야마 고이치의 활약이 눈부셔요. 호러물 설정으로만 보였단 '다레마의 귀신 들린 아이'가 실존했고, 그 사건과 자기들의 어린 시절 놀이가 어떻게 엮였는지를 밝혀내는 과은 꼼꼼하면서 합리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과거, "오오니타 군"을 "오오타 군" 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세 번째 음절을 빼먹고 말했던 요시코의 버릇을 떠올려 요시코가 '사카야노 요시코'라고 말한건 사실 '사카X야노 요시X코", 즉 "사카나야노 요시히코"라고 말했던 거란걸 걸 밝혀내는 추리도 굉장했고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를 이용하는 추리도 깔끔했습니다. 이건 완성된 메시지가 아니며, TEL을 쓰려고 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전화 상담을 했던 누마타 야예가 진범이었다는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누마타 아예의 범행 동기와 과정도 이치에 맞습니다.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해도, 금쪽같았던 아들이 사라지고, 남편이 자살한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에게 살의를 품는건 당연합니다. 범행을 실제로 저질렀던 '귀신 들란 아이'도 나쁘지만, 이 범행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아이들도 큰 잘못을 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연쇄 살인극에서 오오니타를 마지막에 죽이려 했던 이유가 그가 술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인상적이었어요. 술래는 처음부터 엔카쿠, '귀신 들린 아이'가 뒤에 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제일 악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지나치게 전형적인 설정이 문제입니다. 마타테 시에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는 다레마 가문과 그들의 융성과 몰락을 가져왔단 다레마 신사의 다루마, 몰락의 상징같은 잔혹했던 후계자 '귀신 들린 아이' 등의 설정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와서 식상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기억은 봉인되고 말았다는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입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 모두가,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비교적 고학년인데 요시코가 납치되는걸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모두 똑같이 기억을 잃었다? 말도 안돼죠. 게다가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를 듣자 봉인이 풀리고 다시 기억을 떠올린다는건 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공정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 다몬 에이스케가 생명의 전화에 걸었던 전화 내용 묘사가 그러합니다. 사실을 적시하는 것 처럼 쓰여 있지만, 이 전화 내용만 가지고 상담원 누마타 야에가 자기 아들의 실종과 죽음이 다몬 에이스케와 친구들과 관계가 있다는걸 알아채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게 분명합니다. 즉, 애초부터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에 "다~레마가 죽~였다 ."는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야에의 범행도 세세한 면에서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구호단체 직원들보다 먼저 현장을 찾아가 다몬 에이스케를 살해한 첫 번째 범행이 대표적입니다. 어차피 자살을 앞두고 있었다면, 자살하도록 놔두고 친구들 정보를 빼 내는게 훨씬 손 쉬운 방법이었을거에요. 그가 구조를 받는다면, 그 뒤에 죽여도 되고요. 현장에 누군가 출동한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르는건 여러모로 무모했습니다. 다른 범행들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며, 특히 범행 전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다~레마가 죽~였다 ."를 들려준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범행 과정 전반은 죽은 요시히코의 원념이 도왔을거라는 지극히 미츠다 신조스러운 설정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만, 이건 합리적인 추리물과는 거리가 멀지요.
엔카쿠 다카야키 경부가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걸 밝히는 마지막 추리쇼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근거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메시지로, 이는 TE를 쓰다가 만 것으로 사건 관계자 중 TE라는 이니셜을 가진 엔카쿠 다카아키 경부밖에 없다는게 요지였지만 이건 TEL을 쓰려고 했다는 거니까요. 이 이니셜을 엔카쿠 경부와 엮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가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었다는걸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그가 요시히코 등을 납치해서 죽였던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고요. 비약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장에 나타나 하야미 고이치와 대면한다는 지극히 작위적이면서 편의적인 상황 설정은 둘째치고서라도요.

그 외에도 다레마 신사에 모셔진 다루마의 정체라던가, 다몬 에이스케가 전화를 하려고 했던 일곱번째 친구가 누구인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는 '맥거핀'의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불필요하고 진부했던 설정을 일부 제외하고, '귀신 들린 아이'가 엔카쿠 경부였다는 비약을 잘 정리했더라면 훨씬 간결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2/17

김재환 선수 FA 계약, 반갑지 않습니다.

두산, '영끌'해서 최초 100억+ 풀베팅..'4번 자존심은 지켰다'

이적설이 돌았던 김재환 선수가 두산과 계약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재환 선수에게 4년 115억? 솔직히 이해가 안됩니다.
물론 박건우 선수보다 더 잡아야 했던 선수는 맞습니다. 지금 두산에게 가장 부족한건 장타력이니까요. 게다가 중견수 자리에 이미 거액의 계약으로 붙잡은 정수빈 선수가 있고, 박건우 선수의 공격력은 김인태 선수가 어느정도 메꾸어 줄 수 있다는걸 이미 보여주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습니다. 두산에서 반드시 터져야 하는 김대한 선수 자리도 생각해야 하고요.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 봅시다. 지난 시즌을 볼까요? 오재일, 최주환 선수를 놓쳤으나 결과론적으로 이 선택은 크게 잘못된건 아니었어요. 오재일 선수 공백은 양석환 선수로 완벽하게 메꿨고, 오재일 선수의 보상 선수 박계범 선수는 최주환 선수에 근접한 WAR*를 기록하며 활약해 주었으니까요. 포지션도 다르고, 출장 경기수도 다르지만, 이 정도면 유출 피해는 최소화했던 셈입니다.
문제는 비록 한국 시리즈까지 올라가는 이변을 일으켰지만, 그래봤자 정규 시즌 순위는 "4위"였다는 겁니다. 그것도 심하게, 역대급으로 운이 좋았던 덕분이었고요. 경쟁 팀이었던 SK가 부상과 역대급 외국인 선수 부진으로, NC가 코로나 이슈로, 롯데가 감독 교체 문제로 인한 혼란으로 제대로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덕분이니까요. 5위를 차지했던 키움도 코로나 이슈로 인한 한현희, 안우진 선수 부재와 외국인 선수 문제만 없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기록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22시즌은 어떨까요? SK는 부상으로 빠졌던 두 명의 국내 대표 선발진이 복귀할겁니다. NC도 구창모 선수가 돌아올테고요. 우승 전력을 거의 유지한 KT, 박해민 선수가 보강된 LG는 당연히 우승권 전력이고, 삼성도 박해민 선수가 빠지기는 했어도 작년에 비해 그리 뒤쳐지는 전력은 아닙니다. 김태군 선수도 보강되었고요. 감독이 확실한 리더쉽을 보여줄 롯데, 양현종 선수와 나성범 선수가 가세할 기아도 충분히 다크호스입니다. 키움도 조상우 선수가 입대하지만, 21시즌보다는 훨씬 외국인 선수 덕을 볼 거라고 생각되고요.
하지만 두산은 국내 선발 세 명도 구성하기 벅찹니다. 계투진도 한국 시리즈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혹사를 생각하면 부진이 예상되고요. 기대되는 신인이나 복귀 선수, 2군 전력도 없어요. 5위 이상의 성적을 바라는건 욕심입니다. 박건우 선수가 커리어 하이 성적을 뽐냈던 21시즌도 운 좋은 4위에 그쳤으니 당연하지요.
반드시 잡아야 했던 양의지 선수를 잡았었더라면, 최소한 21시즌에 비교적 상식 선이었던 이용찬 선수 계약을 했더라면 달릴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었겠지만 지금은 제가 보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 쯤에서 리빌딩 버튼을 누르는게 맞지 않았을까요? 향후 몇 년은 탱킹을 통한 상위권 유망주 수급과 육성을 통한 옥석 가리기, 줍줍, 고참 선수 트레이드에 주력하고요. 이렇게 팜부터 충실히 다져나가서 2010년대 두산 전성기처럼 젊고 강한 팀을 만든 뒤, 아낀 돈으로 24년 이후에 이정후 선수같은 대형 FA 영입을 통해 다시 우승에 도전하면 됩니다.
그동안 성적이 나빴다면, 팬을 위해서 무리한 FA 영입을 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두산은 지난 7년 연속으로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었어요. 우승도 3번이나 했었고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앞으로 몇 년간은 잘 몰랐던 선수들의 성장을 보면서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팬으로서 지난 7년간 충분히 즐거웠으니까요. 5위 정도를 목표로 115억을 투자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것도 최전성기를 지나, 확연하게 성적이 감소하고 있는 33살 타자에게 말이지요. 아무리봐도 오버페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계약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물론 10개 팀 중 5위만 해도 가을 잔치에 진출할 수 있는 리그이니 전력 감소를 최소화하여 양석환, 김강률 선수의 FA 전에 승부를 볼 생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영하 선수가 성공적인 선발 복귀를 하고, 곽빈 선수가 완전히 포텐셜을 터트려 5선발로 자리잡고, 안식년을 가졌던 이승진 선수가 폼을 회복하고, 최승용 선수 등 어느정도 싹수를 보였던 신인들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등 좋은 쪽으로 if가 다 터질거라는 기대를 품고요.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이 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걸 말이지요.

2021/12/14

일개 작가가 카카오엔터에 내용증명을 보낸 건에 대하여

상세 내용은 링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약하자면, "여러분, 제대로 된 공모전에 도전하세요. 카카오 넥스트 페이지는 아닙니다!"

덧 : 저 글에 나온 동생이 바로 저입니다. 저딴 정보를 알려준게 미안하기만 할 뿐입니다....

2021/12/12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별점 2.5점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6점
이미지프레임 편집부 엮음/길찾기

기동전사 건담의 시작을 알린 1년 전쟁을 실재 있었다고 가정하고 진지하게 접근한 책. 전사라면 전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2차 창작물인 셈입니다. 예전에도 살짝 관심은 있었는데, <<섬광의 하사웨이>>를 보고 내친김에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미 절판 상태라 상, 하권 중 상권만 구할 수 있었기에, 상권만 읽어보고 리뷰를 남깁니다.

특징이라면 1년 전쟁에 관련된 설정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쟁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세한 전투 관련 분석이 돋보였습니다. 전쟁 발발 정의 지구권과 콜로니 배치에서 시작되어, 전투의 추이라는 제목으로 일주일 전쟁, 루움 전투, 공국군 지구 침공 작전, 오데사 작전 설명으로 이어지는 첫 챕터부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연방군과 지온군 함대 구성 및 이동 방향, 전투의 향방 등을 여러 전쟁사 책들과 비슷한 도판들을 이용하여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전투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콜로니와 미노프스키 물리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같은 기본 설정에 대한 상세 설명은 물론 지온 공국 성립의 역사, 전쟁 시작 후 오데사 작전 까지의 이야기 및 모빌 슈츠와 각종 병기들, 지구 연방군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MS는 물론이고 전함과 육전용 장비들, 항공기 소개도 충실합니다. 이 중에서는 아울러 스페이스노이드의 주장, 지온 공국이 전쟁에 돌입하기까지의 공국과 연방군 정세 등 1년 전쟁 당시의 사회 환경과 이데올로기, 정세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적이었고요.

예컨데 2차 대전을 다룬 책이라고 친다면, 독일이 히틀러 집권 후 재무장을 하여 폴란드를 침공하고, 결국 프랑스까지 점령하는 과정을 지휘관들과 주요 전선에서 펼쳐진 작전들, 그리고 주요 전술과 주력 병기와 함께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나치즘과 히틀러의 집권 과정, 영국과 프랑스 등 주변 주요 강대국의 정세를 이벤트별로 원인과 결과를 잘 알 수 있게 설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잘 알려진 설정이 대부분이라 새로운건 별로 없습니다. 이 책 출간 이후, 1년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디 오리진>>이 출간된 탓도 컸고요. 그래도 진지한 역사서처럼 쓰여진 결과물을 보니 색다른 느낌도 들고,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어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 발표되었던 기획임을 짐작케하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대표적인게 디오라마로 이루어진 화보였습니다. 디오라마 자체가 나쁜건 아니지만 촬영과 편집 모두 책의 컨셉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거든요. 밀리터리 풍의 화보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고요. 이왕 이렇게 책을 만들 거였다면, 장난감같은 프라모델 사진이 아니라 더 진짜같은 사진과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책의 내용도 오래전 발표된 책 답게 이른바 '정사'에 포함된 내용만 담겨 있어서 MS IGLOO라던가, The Origin같이 후대 추가된 설정과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불만스럽습니다. 그 탓에 볼륨도 가격에 비하면 영 시원치 않은 편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도판과 편집만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재간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아틀라스 전차, 항공전사와 <<2차대전 독일의 비밀무기>>를 합치는 식으로요. 지금의 결과물은 재미는 있지만 딱히 하 권을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2021/12/11

불온한 잠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불온한 잠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최신작, 2019년 12월 발표되었습니다. 2020년 초에 하무라 드라마가 방영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간행 일자를 맞춘 듯 합니다. 통상 2년 정도 기간을 두고 발표되었던 시리즈 이전 작들에 비하면, 중간 기간이 확연히 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리즈 이전 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별로였습니다. 사건들은 대부분 억지스러웠으며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었던 탓입니다. 전작에 비하면 많아진 극적 소재들 - 폭발, 유령 빌딩과 그라피티, 총격 사건, 산사태 등 - 도 대체로 비현실적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는 별명을 강조하기 위한 지나친 상황과 인물 설정들도 억지가 심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와카타케 나나미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미디어 믹스의 유혹, 편집부의 요청이 지나쳤던게 아니었나 싶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품 속의 나날>>
자신이 곧 죽을거라는 옛 기치조지의 마담 사쓰키는 하무라 아키라를 자택으로 불렀다. 그녀가 돌보던 친구 딸 하루카가 곧 출소하니 자기에게 데려와 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하루카는 마약에 취해 저지른 방화로 불륜남을 사망케해서 7년형을 받았었다.
하루카를 교도소에서 태우고 돌아오던 중, 수상한 2인조가 하루카를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경찰은 하루카가 죽게 만들었던 불륜남 다케이 소지로가 무언가 위험한걸 밀수했었고, 아직 그게 발견되지 않았다고 알려주는데...


하루카와 하무라 아키라, 악의 조직이 서로 쫓고 쫓기는 과정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세계관 그대로입니다. 재미도 있고요. 특히 하루카가 수상한 조직에 쫓기다가 도망가서 '무언가'가 있음직한 장소로 향하는 과정, 하무라가 그녀를 뒤쫓다가 조직과 마주치는 등의 장면은 <<몰타의 매>>를 연상케 합니다. 비싼 값어치가 있는 보물을 여러 명이 노리고, 여자와 탐정이 한 팀인줄 알았는데 여자가 뒷통수를 친다는 설정이 똑같으니까요.
물론 하루카는 전혀 미인도 아니고, 머리도 나쁘며 하무라 아키라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소시민인데다가, 악의 조직도 사람을 죽이기 보다는 '손을 믹서기에 실수로 넣어 버리는' 정도의 조직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현대 일본에 하드보일드 세계관을 풀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요.
'무언가'가 고작 거북이었다는 진상도 황당했지만, 현대 일본이 무대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을 거에요. 악당들이 거액과 시간을 들여, 폭행을 가해가며 노려왔지만 정작 경찰은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을 그런 물건으로 딱 적당하다 싶었거든요. 멸종 위기종으로 약효가 좋다고는 해도, 수많은 관계자들 손을 갈아가면서 찾을 필요가 있나 싶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짜 하드보일드구나! 싶었던건, 악의 조직과의 문제가 일단락된 다음입니다. 사쓰키가 죽기 전, 하루카를 데려와 달라고 탐정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7년간 면회는 커녕, 영치금 한 번 넣어준 적이 없었고, 하루카는 사쓰키를 두려워했는데 말이죠.
정답은, 사쓰키는 하루카에게 복수를 하려고, 그녀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에게 오도록 탐정에게 의뢰했던 겁니다. 이를 위해 앞서의 복선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늘합니다. 사쓰키가 장갑을 끼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이에요. 사쓰키는 하루카 때문에 손가락을 믹서에 넣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친구가 하루카를 임신했던 탓에 좋았던 관계가 깨졌었고, 하루카의 불륜으로 사업도 큰 손해를 보았던 등도 복수의 이유였고요.
이렇게 애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순수한 복수심이 대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통파 하드보일드 물임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멀쩡한 회사 대표였던 사쓰키 손을 갈아버렸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일본이 이렇게나 무식하고 무서운 무법천지란 말일까요? 하루카가 훨씬 젊고 힘도 좋을텐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죽음을 맞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았고요. 또 물론 집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드라마를 과하게 의식한게 분명해 보여서 좀 별로였습니다. 앞서의 소시민스러운 하드보일드 느낌을 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범죄물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함직한 수작이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새해의 미궁>>
하무라 아키라는 12월 31일, 하청 알선업자 사쿠라이를 통해서 철거 예정인 빌딩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빌딩이었다. 고생 끝에 경비를 마친 히무라에게 경비 사무소 사무원 사나에가 실종된 경비원 구도 쓰요시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구도 쓰요시는 회사 몰래 유령 빌딩 견학회를 열었던 사실이 질책받고 도망가 버린 상태였다. 하무라는 구도와 악연이 있다는 예술가 사촌 라이카의 집에서 구도를 발견하는데...

라이카가 빌딩 개발업자 관계자와 함께 경비 중이던 구도를 협박해서 유령 빌딩에 침입했던 이유는, 독자들도 비교적 쉽게 추리할 수 있습니다. 라이카가 이구치라는 그라피티 아티스트에게 푹 빠저 있었다는 정보가 초반에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해체 직전의 빌딩에 경비원을 둔 건 빌딩 안에 값나가는 무언가가 있다는걸 개발업자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 사실을 눈치했던 회사의 누군가가 이구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라이카를 현장에 불렀던 거라는 추리는 덕분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마 그 누군가는 직품을 확인한 뒤 몰래 빼 낼 계획이었을테지요.
그러나 진상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개발업자인 산도 개발의 오키타 부장이 이구치 그라피티가 있다고 사기쳐서 한 몫 챙기고 있었던 겁니다. 이구치 그림은 없었던 거에요! 이렇게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덕분에 사건의 복잡도도 높아져서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개는 여러모로 억지스러웠어요. 일단, 앞서 말했던 '누군가'에 해당하는 오키타 부장의 부하 후치가미가 아라카와, 라이카에게 이구치 그라피티에 대한 정보를 흘린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뭘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림을 빼돌릴려고? 작 중에서 설명되지만, 건물 속 그라비티를 훔쳐내는건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요. 벽을 해체하는게 그리 쉬울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달리 돈을 만들 방법도 없고요. 후치가미가 속수무책으로 실종된걸 보면 딱히 협박이 목적이었던걸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라이카는 이구치의 작품이 없다는 걸 알았을겁니다. 그런데도 시간을 들여 누드 사진을 찍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녀도 사실은 이구치 작품이 뭔지 잘 몰랐다는걸 의미하는 걸까요? 설령 그렇다쳐도, 작품 전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라이카가 사진가 아라카와에 의해 빌딩 안에서 살해당했다는게 가장 억지스러웠습니다. 경비원이었던 구도를 반 협박하다시피해서 들어오기는 했지만, 라이카와 아라카와가 빌딩에 잠입한건 그리 대단한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숨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 아라카와는 이구치 그림이 없다는걸 알고, 오키타 부장 패거리에게 잡히면 죽을 거라고 추리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오키타 부장 패거리가 자기들 얼굴을 목격했던 경비원 구도를 살려둔 이유가 설명이 안되지요.

사소해 보였던 의뢰가 대기업이 엮인 대형 사기극과 이어지지만, 하무라가 받은 의뢰는 사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살인 사건은 우발적인 범행이었고요. 사건 해결도 추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우연에 가까왔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물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그래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친 철도 안내서>>
하무라 아키라는 병원에 입원한 도야마의 지시로 '철도 미스터리 페어' 준비를 도맡게 되었다. 페어의 메인은 수집가 미노와로부터 빌린 <>였다. 유명 작가 가미오카의 장서로 '94식'이라는 총기 난동 현장에 있었다고 알려진 책이었다. 그러나 페어 와중에 누군가가 하무라를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킨 뒤 책을 훔쳐가 버렸다...

진상은 책이 가짜였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집가 미노와는 손자를 시켜 책을 훔쳐냈던 거지요. 나중에 가짜와 바꿔치기 되었다고 할 속셈으로요.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실마리를 더듬어나가는 과정은 하드보일드물 스타일입니다. '철도 미스터리 투어'를 준비하면서 소개되는 열차 관련 미스터리 작품들의 목록들도 현란하고요.

그러나 그 밖에는 딱히 건질게 없던, 그닥인 작품이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아주 별로에요. 살인곰 서점에서 책을 훔처간 범인은 CCTV를 통해 누구인지 밝혀지고, 진상은 범인에게서 듣는게 전부니까요. 심지어 94식 사건의 관계자 구라나 마호코의 손자 구라노가 절도 미스터리 페어의 하이라이트인 경매회를 덥쳐서, 진상을 모든 이들에게 폭로하기까지 합니다!

무슨 회사 내부의 알력 어쩌구는 억지로 가져다 붙힌 설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뿐, 하드보일드인지도 잘 모르겠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요약이 힘들 정도로 알맹이가 없었던 졸작입니다.

<<불온한 잠>>
서점 단골 시나코씨가 11년 전, 자신 소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하라다 히로카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누군가를 찾아, 유품을 전해 달라고 의뢰했다. 예전 히로키의 이웃 이와오 하쓰에 할머니가 탐문 수사 중이었던 하무라를 습격해 목을 졸랐고, 그녀가 히로카를 증오해서 위협했던게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
히로카의 과거를 계속 추적하던 하무라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얹혀 사는걸 반복해 왔다는 걸 알아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있던 생활 습관이었다. 그녀 어머니 이치카는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 집에 히로카를 보내어, 그녀가 그 집의 모든걸 독차지하여 살게 해 왔었다...


표제작, 하라다 히로카의 과거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정통 하드보일드스럽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단서를 수집하여 과거로 한 발 더 나아가고, 그러면서 숨겨져 있던 추악한 진실을 알게된다는 전개니까요. 간단해 보였던 의뢰가 범죄로 얽혀있고, 등장 인물들도 기묘하게 얽혀있는 내용도 마찬가지에요. 이거야말로 하드보일드다라는 느낌을 담뿍 전해줍니다.
반면 수사 대상인 하라다 히로카에게 아무런 개인적 감정을 품지 않고, 의뢰 내용을 수행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죽을 뻔 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상당히 독특했습니다. 복수와 같은 개인 감정 때문도 아니고, 수사 중 위험에 휘말려 살아남기 위해서도 아닌 정말로 열심히 일하는 탐정은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원래 의뢰는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고향까지 찾아갔지만, 사채 탓에 모든 사람들이 미워했다는 걸 알아냈다면 의뢰는 끝난 거에요. 히로카의 어머니 이치카가 '먼 모래'의 마담 아치요에게 돈 때문에 살해당했건, 히로카 옆집의 이와오가 사망한 히로카의 돈을 빼돌렸건, 그건 의뢰와는 무관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아치요와 이와오를 찾아갈 이유는 아니에요. 또 찾아가 봤자 이치카와 히로카의 돈이 둘에게로 흘러갔다는 증거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경찰 신고도 무용지물이었을테고요.
게다가 이렇게 하무라 아키라가 이야기를 끝낼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끝은 내기 위해 작가는 천재지변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토사 붕괴로 뉴타운이 휩쓸리고, 아치요와 이와오마저 실종되었다는 결말인데 작위적이고 허무하기로는 그야말로 끝판왕 격이에요. 차라리 하무라 아키라가 야치요에게 추리를 털어놓고, 원래 의뢰대로 유품을 전해주고 가는게 더 하드보일드스럽고 괜찮았을 겁니다.

하무라의 수사도 히로카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다는게 밝혀지는 도입부는 괜찮았지만, 이후 기타노의 아내도 식칼로 하무라를 죽이려 했다던가, 히로카가 거쳐간 세 번의 거주지를 방문했고 기타노는 직접 만났음에도 마지막까지 '사채에 대해 증언을 얻지 못한다는 등 억지가 많더군요. 이치카, 히로카 모녀가 살던 오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채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녀를 적대시 했었지요. 히로카의 정체 (사채업자)는 널리 알려져 있는게 당연했습니다. 최소한 불륜 상대로 오해받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하루카가 시나코 씨 소유의 좁고 낡은, 거지같은 집에서 혼자 머무르다 죽음을 맞았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원칙대로였다면 채무자 이마이 집에 머물며 왕처럼 지냈어야죠. 돈도 많았을 텐데...

이렇게 독특함은 있지만, 단점들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2/05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2 - 오카자키 다쿠마 / 양윤옥 : 별점 2.5점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2 - 6점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이번 권은 미호시의 여동생 미소라가 등장합니다. 그녀도 함께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 속 수수께끼들을 풀어내지만, 미소라가 아버지를 찾으려다가 유괴당하는 대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다행히 모든건 잘 수습되고, 아오야마와 미호시의 관계도 한 걸음 더 나아간 느낌을 주며 마무리되지요.

전편과 마찬가지로, 일상계 수수께끼들은 대체로 괜찮았는데,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별로였습니다. 유괴는 차원이 다른 중범죄라서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하지만 확 땡기는 맛이 없어서, 후속권을 더 읽을 것 같지는 않네요.

수록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안녕, 미래 님?>>
한 여성이 남자친구가 오사카까지 가는 차표를 사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듣고, 그 진상을 추리하는 내용.
남자친구가 오사카로 간 게 아니라, 교토에 머물렀을 거라는 미호시의 추리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프로포즈를 했을거라는 추리는 비약이 심했습니다. 단순하게 오사카에 있던 직장을 교토로 옮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프로포즈임을 확신하려면 다른 단서가 필요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성격이다' 정도로는 영 부족했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일상계로는 괜찮았습니다. 일상 속 수수께끼에 꼭 정답이 있어야 하는건 아니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제2장 여우의 둔갑 바캉스>>
미호시의 동생 미소라가 교토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 혼자 오야마 순례를 다녀온 후, 보여 준 기념 사진은 기묘했다. 기념 사진에 함께 찍혀있던 중학생은 같은 시간에, 시내에서 식사 중이었던 미호시와 아오야마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소라의 오야마 순례는 그날이 아니라 전날이었다는 이야기.
스쳐지나간 중학생 얼굴을 그렇게 잘 기억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의 부분은 모두 좋았습니다. 단순한 진상 덕분에 이야기는 깔끔했고, '미소라 옷의 향기'라는 단서로 이를 드러내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더운 날, 순례 코스를 돌고 왔는데 땀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건, 그녀가 다른 곳에 갔다 왔다는 증거로 충분하지요.
함께 소개되는 미호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미호시와 아오야마가 이성 친구인지 아닌지 등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미호시와는 정 반대인 미소라 캐릭터도 매력적이었고요. 오야마 순례, 긴가쿠지 등 교토 명승지 순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뭔가 대단한 수수께끼인듯, 미소라와 누군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이렇게 감질나게 등장시켜가며, 또 주인공을 숨겨가며 조금씩 드러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본편만큼은 교토의 매력과 적절한 수수께끼가 조합된, 좋은 일상계 추리물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3장 유백색 하트를 망가뜨리다.>>
미호시는 모카와 씨가 데려온, 라테아트를 배우고 싶다는 여고생 진바 하나양에게 1주일동안 라테아트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열심히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누군가 그녀가 만들었던 하트 라테아트를 망가뜨려서 조리부 발표회를 망쳤다며 울고 마는데...

하나 양이 사실은 악역이었기 때문에, 요코가 하트를 망치는 장면을 목격했던 다른 조리부 친구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는 발상이 좋았던 작품입니다. 아울러 이를 통해 발표회를 촬영하던 카메라에 그 장면이 찍히지 않은 수수께기도 설명됩니다. 망칠 때 잠깐 녹화를 정지시킨 것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문 것이지요. 또 조리부 부원들을 무시하는 듯한 하나의 평사시 말투를 근거로, 겉모습과는 다르게 친구들의 반감을 사곤 했을거라는걸 추리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라테아트로 잎사귀 하트, 고양이를 그리려고 했던 건, 하나가 좋아하던 남학생 고야네와 사귀게 된 조리부 친구 요코를 비난하기 위해서였다는건 읽으면서 대충 짐작이 갔더군요. 이름에서 따온 단서들이니 일본인이었다면 훨씬 쉽게 진상을 눈치챌 수 있었을 거에요.
물론 쉬운 단서(?)가 큰 단점이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야말로 일상계의 왕도다운 느낌이 마음에 드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제4장 커피 탐정 레일라의 사건 수첩>>
미소라의 휴일, 아오야마와 미호시는 미소라가 두고 간 오래전 추리 소설 <<커피 탐정 레일라의 사건 수첩>>을 읽고 내용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그 뒤 미호시는 모카와 씨와 교토 카페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돌아가려는 프리라이터에게, 그가 <<레일라의 사건 수첩>>을 쓴 카지마 후미에일 거라고 말했다...


이야기 속에서 추리 소설 <<커피 탐정 레일라의 사건 수첩>> 이야기도 펼쳐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 형식을 갖춘 작품.
<<커피 탐정 레일라의 사건 수첩>>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커피통에 로스팅한 원두를 가득 담아 두었는데, 정작 판매하는 원두는 로스팅부터 새로 했다던가, 막 갈아낸 원두가루를 봉투에 넣고 밀봉해 버렸다는 것처럼 소설 속 커피점이 벌인 이상했던 행동들을 통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걸 추리해내기 때문입니다. 로스팅 직후 원두가루는 탄산 가스를 방출하며, 가루는 표면적이 불어나 대량의 가스가 빠져나오므로 봉투를 밀봉하면 터질 위험이 있다는데, 이거야말로 제목에 부합하는, 커피 전문가만 알 수 있는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커피통 속에 시체가 있었고, 커피 봉투에 구멍을 뚫는 송곳이 흉기로 사용되었다는 진상도 합리적이었고요.

본편 에피소드도 좋았습니다. 프리라이터가 카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던건 아니라는걸 '제즈베'라는 도구를 통해 확실히 밝혀내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미호시와 아오야마 등은 '제즈베'를 모두 터키식 커피를 우려내는 도구 이브라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리라이터는 재즈 베이스로 착각했던 탓에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지요. 미호시는 직전에 터키식 커피에 대해 취재했던 프리라이터라면 모를리가 없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약간 추리쇼같은 느낌도 주더라고요.
프리라이터의 이름인 후카미 에이지에서 그가 <<커피 탐정>> 시리즈 작가 카지마 후미에라는걸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아주 간단한 애너그램이지만, 본명과 필명을 오가기에 이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니까요.

에피소드가 끝난 뒤, 그가 미소라의 친부일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살짝 흘리며 2권 전체를 아우르는 큰 이야기 시작을 알리는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기는 했지만 에피소드가 마무리 된 이후 등장하는 사족이었고, 본편은 물론 <<커피 탐정>> 이야기도 추리적으로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에, 무엇보다도 '커피'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가 핵심 증거로 쓰였다는 점에서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제5장 (she Wanted To Be) WANTED>>
미소라의 밴드 후배 무라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귀다 헤어졌던 여학생 만다 린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걱정 전화였다. 그녀는 예대 진학을 계기로 가족과도 멀어졌고, 생활고 탓에 별다른 친구도 없었다. 무라지와 함께 찾아간 그녀 자취방에서 자살 명소 도진보를 체크해 놓은 잡지를 발견한 둘은 서둘러 신칸센을 타고 도진보가 있는 야와로 온천 역으로 향했다...

미소라의 후배 린을 찾는 소동에서 있었던 수수께끼, 여행을 떠나며 자취방 문을 잠갔는데 미소라가 무라지와 함께 찾아갔을 때 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풀어내는 에피소드. 유일한 여벌 열쇠는 고베에 살고 있는 린의 어머니만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입니다.
무라지가 다른 여벌 열쇠로 미리 침입했던 거라는 아오야마의 추리는 무라지가 린의 행방을 전혀 몰랐고, 미소라와 함께 자취방을 찾을 때 까지 너무나 태평했었다는 이유로 부정당합니다. 무라지가 몇 만엔이나 되는 여행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미소라 돈으로 비용을 마련하려고 꼼수를 썼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미 린의 실종 사실을 알고 있었던만큼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진상은 사이가 나빴다는 어머니가 고베에서 자가용으로 밤새 운전해서 린의 집을 찾았던 겁니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부모는 부모라는 이야기거지요. 어머니가 자신을 찾기를 린이 원했다는 여러가지 단서들도 잘 배치되어 있는 편입니다. 책갈피 대신 책장 귀퉁이를 접어 놓는걸 개의 귀에 빗대서 '도그이어'라고 한다는 정보도 귀엽고 반가왔고요.

그러나 독립된 이야기라기 보다는,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를 통해 2권 전체를 아우르는 소재인 자매의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 수행이 더 중요했던 소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보다도,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거든요. 미소라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미호시와 만나게 하려다 위험에 빠지는 내용이 이어지니까요.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제6장 the Sky Occluded in the Sun>>
미소라를 납치한 누군가가 협박 전화를 걸어왔다.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천만엔을 준비하라고 요구했지만, 미호시는 그가 작가 카지마 후미에라는걸 바로 알아채고, 아오야마에게 경찰 신고를 부탁했다. 그런데 아오야마의 폰에는 미소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전송되어 있었다. 빨간색 태양 문자를 통해 레코딩, 녹음, '로쿠온'을 떠올린 둘은 미소라가 긴카쿠지 근처에 있다는걸 밝혀냈다. 처음 미소라를 만났을 때, 아오야마가 미소라에게 긴카쿠지의 정식 명칭이 '로쿠온지'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권의 핵심인 미소라 유괴 사건을 그린 이야기. 앞서 말씀드렸지만 영 별로였습니다. 추리적으로 특히나 볼게 없어요.
우선 문자 메시지를 통한 약간의 암호 트릭은 억지스럽습니다. 태양에서 로쿠온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그리 설득력 높다고 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그냥 빨간색 동그라미를 보냈다는게 훨씬 설득력이 높았을겁니다.
이 암호 트릭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유괴극으로, 후카미가 몸값을 안전히 전달받고 탈주하려는 나름대로 공들인 계획이 중요하게 묘사되지만 이 부분의 설득력도 낮아요. 일단 달리는 차에서 돈가방을 던지게 한 뒤 회수하여 탈주한다는건 정교한 계획이라고 부르기 힘들지요. 경찰에 신고했다면, 돈을 던진 장소 중심으로 차도만 봉쇄해도 교토 시내를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했을테니까요.

한마디로 스케일과 극적 요소에 비하면 그리 잘 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자매 아버지의 죽음도 작위적으로 보여서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제7장 별밤 하늘 밑에서 목숨을 잇다>>
자매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 자매 아버지 죽음의 계기가 되었던 물에 빠졌던 아이가 누구인지? 왜 미소라가 카지마를 아버지로 착각했는지? 그리고 미소라와 미호시가 쌍둥이였다는게 밝혀지는 약간의 서술 트릭스러운 사실이 밝혀지는 일종의 사건 후일담. 미호시가 아오야마와 미소라의 관계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은 귀여웠습니다만 독립된 에피소드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딱히 없습니다.

<<에필로그 그녀는 카페오레 꿈을 꾼다>>
미소라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체포된 후카미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되는 진짜진짜 에필로그. 6장, 7장과 결합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따로 별점을 주지는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