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살인 -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투고 매니아 이치로이 고즈에는 귀가하다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습격을 받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반격 끝에 겨우 살아난 그녀가 범인의 수첩을 끄집어 내었던 덕분에, 범인의 정체가 구츠와 기미히코라는건 비교적 일찍 드러났다. 또한 수첩 속 기록으로 그가 일련의 연쇄 살인을 일으킨 범인이라는 것도 밝혀졌지만, 구츠와가 실종된 탓에 범행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범죄 전반의 권위자가 모이는 모임 '연미회'에서 비밀리에 이 사건을 논의하기로 하여, 고즈에도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연미회 멤버인 추리작가, 탐정 회사 경영자, 범죄 심리학자 등 참석자 5인은 각자 추리를 펼쳐 보이는데....
<<맥주 별장의 모험>>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 추리작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정통 본격 추리물. 여러명의 탐정이 하나의 사건을 놓고 각자의 추리를 펼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의 구성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본격물 팬은 즐길거리가 많아요. 다양한 추리가 폭넓게 펼쳐지고, 동기와 트릭에 대한 추리도 여러가지가 등장하니까요. 이치로이 고즈에가 살해당했을 뻔한 상황부터가 그러해요. 처음에는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가 살인 미수로 도주했다고 생각되었지만, 연미회에서의 추리 배틀(?)을 통해서 현장은 일종의 밀실이었다는게 드러나거든요. 뒤이어 사전 조사로 맨션 106호에 살던 고즈에의 이웃집이 비어있다는걸 안 범인이 도주할 때 그곳에 숨었다던가, 사건 직후 비명을 듣고 복도로 나와있던 102호 거주자 모미야마 케이이치가 범인의 조력자이자 진범이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련된 추리가 이어집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추리는 경찰 나루토모가 당시 수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게 밝혀졌다고 말해서 부정됩니다. 경찰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작중 고즈에의 말대로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는건 칭찬받아 마땅해요. 현장은 밀실이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자인 척 조작했던 일종의 시간차 밀실 트릭도 꽤 그럴듯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추리 소설가나 전문가들이 탐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의 동기를 설명할 때 '미싱 링크'라면서 여러가지 추리물 고전을 들먹이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또 단순히 추리 배틀이 아니라 이야기 도입부에 벌어진, 고즈에 살인 미수 장면이 사실은 더 이전 시점에 있었던 (구츠와 기미히코가 사라진 2월 15일) 사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이 쓰인 셈인데, 깜빡 속았네요. 뻔했던 고전적 설정에 이런 아이디어를 더해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지게 한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반전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이야기 중에 고즈에가 잠깐 집을 떠나 살았던 곳에 대한 언급 등 관련 정보가 제공됨은 물론, 고즈에가 이전에 4층에 살았는데 살해당할 뻔 한 뒤 이사간 곳이 1층이라는건 이상하다는 나루토모의 착안이 핵심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사건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고즈에가 예전에 받았던 협박장과 협박 전화, 시가타의 이상했던 사고사는 초반에 이야기되었어야 했어요. 고즈에가 '연미회'에 이 사건을 의뢰한건, 구츠와 기미히코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지요. 하지만 범인이 가출했을 때를 즈음하여 고즈에에게 협박 전화와 협박장이 보내졌고, 그녀와 친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었다면 당연히 이를 범인과 연결하는건 당연합니다. 고즈에의 의문도 여기서부터 출발했어야 하는게 당연하고요. 이걸 아예 깨닫지도 못하다가 연미회 자리에서 알아채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4년간 범인의 동기에 대해 고민했다는 그녀의 절실함도 설득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추리들도 어떤건 재미있지만, 어떤건 비약과 억측이 심했어요. 고즈에의 말대로 '억지로 가져다 붙이려면 뭐든지 가능하다'는걸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고즈에가 연쇄 살인범이며, 자기가 습격당했던건 조작이었다는 진상이 드러난 이후 설명은 최악이에요.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인 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도움을 청했던 시가타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서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구츠와를 살해한건 당연히 정당방위인데 왜 경찰에 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깊게 사귀지도 않았던 남자가 부모보다도 더 믿고 의지할 만 했을지는 잘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그 뒤,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혀있던 하시타니 코지로를 찾아가 구츠와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물어본 것 부터는 완전 억지에요. 하사타니는 그녀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였다는걸 눈치챘고, 사체 처리를 도운 뒤 그걸로 고즈에를 협박해 성 노리개로 삼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했고요. 구츠와를 죽였다는 진상을 곧바로 눈치챘다는건 비약이 심할 뿐더러, 하시타니가 사체 처리에 협조한 이상 그 역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고즈에를 협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요. 차라리 고즈에가 하시타니를 공범으로 신고하겠다며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게 더 말이 되었을겁니다.
사건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혔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 죽일 필요도 없이 자기와 관련이 깊었던 하시타니만 죽이고, 현장에 수첩을 떨어트려 놓는 정도로도 충분했을테니까요. 수첩에 적혔던 이름이 있으니 나머지는 경찰이 수사하면 되잖아요. 오히려 초등학생의 경우는, 구츠와와 엮일 이유가 많지 않은 만큼 살아 있는 상태로 증언을 하게 하는게 훨씬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했다면 구태여 토네리 히로미 페이지를 뜯어낼 필요도 없었어요. 시점적으로 토네리 히로미가 먼저 죽은게 분명하니까요. 하시타니가 토네리 히로미라는 여성 (가명을 쓴 고즈에)과 방을 빌렸다는게 드러났어도, 이는 구츠와와 피해자들이 어떻게든 엮여 있다는걸 강하게 드러낼 뿐이었고요.
범인이 초반에 누구인지 드러난 탓에, 후더닛이 아니라 와이더닛 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쪽 부분으로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독자 투고는 처음부터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모두 독자 투고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건 연미회 멤버들은 몰라도 독자들은 쉽게 집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토네리 히로미를 살해하려고 했던 구츠와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도 죽일 생각을 했고, 그 연결고리가 독자 투고였다는건 연미회의 슈타라가 초반에 언급했 듯 다소 뻔한 설정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범인 구츠와와 살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된 피해자는 토네리밖에 없으니, 범인과 목록만 있다면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추리쇼따위는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주인공인 고즈에가 '무작위로 선정된 가짜 목표' 였었다는걸 알게된 후, 구츠와가 토네리에게 살의를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구츠와의 동급생 여학우들을 모조리 죽일 결심을 한다는 결말은 제가 뭘 읽었나 싶게 만들더군요. 이기던 게임 종료 직전 자살골을 넣은 선수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마 좋던 결과물을 다 망쳤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추리적인 부분은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트릭을 잘 사용한 전개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본격 추리물에서 가장 중요할 '공정성' 측면에서 큰 단점이 있고, 살인을 가볍게 여기고 희화화하고 있다는건 별로였어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아무래도 허구성이 강조되는 만큼 이런 단점이 좀 가려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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