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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30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마틴 베일리 / 박찬원 : 별점 3점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6점
마틴 베일리 지음, 박찬원 옮김/아트북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들의 탄생과 미술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현재 작품들의 상황이 어떠한지까지만을 집중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 미술사미시사 서적.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유명하지만 그 작품들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되는지,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작품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비록 미술 대학을 졸업하여 디자인 쪽 업무를 하고 있지만 창피하게도 잘 알지 못하는건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 책 덕분에 <<해바라기>>라는 작품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주석 빼고 27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거의 모두를 <<해바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생은 거의 비중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해바라기>>를 창작하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바라기>> 창작 이후 자살까지는 몇 페이지로 끝날 뿐이에요.

그만큼 <<해바라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단순히 정물화가 아니라 반 고흐가 굉장한 창작열과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그려냈고 본인 스스로도 살아 생전 엄청나게 자부심을 가졌다던가, <<해바라기>>의 창작 과정에 고갱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해바라기 연작의 창작과 그 과정에서의 고갱의 역할을 다음과 같습니다. 
맨 먼저 당대 인기 작가였던 고갱이 <<해바라기>>의 초기작인 <<해바라기 두송이>>를 보고 작품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들여 아를의 '노란집'에서 몇 달간의 공동 창작 진행을 약속하죠. 고흐는 고갱을 위해서 '노란집'을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는 '데코라시옹' (장식 계획)을 세우고 무려 네 점의 해바라기를 순식간에 그려내게 됩니다. 즉, 고갱을 환영하기 위한 장식 용도였던 셈이죠. 그 뒤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지만 그래도 고갱이 <<해바라기>>를 탐낸 탓에 고흐는 원래의 작품을 자가 복제하여 두 점의 카피까지 그립니다. 
결론적으로 고흐가 고갱을 위해 그린<<해바라기>>는 모두 일곱 개가 됩니다. <<해바라기 세 송이>>, <<해바라기 여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카피)>>,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1)>>,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2)>> 순이죠. 고갱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많은 해바라기가 그려지지는 않았을테니, 고갱이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에 따르면 고흐를 그냥 미친 사람 취급했고, 고흐가 그에게 준 작품들은 그냥 돈으로만 본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 작품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했네요.

또 왜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지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당대에서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엄청나게 화려한 색깔과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가끔 접하는 '광인들의 그림'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당대 기준으로 보면 흑백 사진들 속에 혼자 컬러 사진이 놓여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사이즈도 높이가 90cm가 넘는 대작인데다가 임파스토라는 반 고흐 특유의 울퉁불퉁한 질감들도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더해 주었을 테고요. 아,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정말 당시 기준으로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반 고흐가 썼던 화려한 노란색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데 당시 색깔로 감상한다면 그 충격은 훨씬 더할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디지털로 당시 색감을 구현한 이미지가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흐가 죽은 직후부터 <<해바라기>>를 비롯한 작품들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그가 죽은 뒤 고작 10여년 뒤에 유명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작품을 구입할 정도였다니까요. 이러한 구매 과정을 거쳐 <<해바라기>> 들이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일담도 재미있습니다. 온갖 유명 인사들과 사건들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와 괴링이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지금 다른 작품들은 전부 남아있어서 볼 수 있는데 딱 한 작품, <<해바라기 여섯 송이>>는 일본의 야마모토 코야타가 구매했지만 2차대전 공습으로 소실되었다니 아쉽습니다. <<갤러리 페이크>>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죠. 버블 경제 시절 일본 야스다 보험사가 무려 2,500만 파운드 (한화 약 400억)나 지불하고 구입한 <<해바라기 열 다섯송이 (카피)>>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야기고요. 위작 논란까지 있었기에 솔직히 미친 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작품 전시 관람 수익만해도 구입 가격 이상일 뿐 아니라 지금 가치는 천억이 넘는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동생 테오, 그리고 테오가 빈센트 사후 얼마 뒤 사망하여 미망인 요하나가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해바라기>> 중 <<해바라기 열다섯송이 (카피)>>만 남기고 판 이유가 무엇인지는 궁금해지네요. 개인적으로는 카피의 경우,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있는 느낌이라 오리지널이 더 나은데 그녀는 왜 카피를 남겼을까요? 단순히 개인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굉장히 궁금하지 않나요? 이를 소재로 픽션이 하나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그녀가 해바라기를 한 폭 남기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을 남겨서 그 덕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에 주요 작품들이 소장, 전시될 수 있었다니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다행인 셈이겠죠.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바라기>>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해바라기>>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책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높아요. 전체 풀컬러에 도판도 완벽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실되었다는 <<해바라기 여섯 송이>> 컬러 이미지가 첫 수록된 책이기도 하고요. 재미는 물론 천재와 미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6/29

천사의 잠 - 기시다 루리코 / 오근영 : 별점 1.5점

천사의 잠 - 4점
기시다 루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북스캔(대교북스캔)

교토의 의학부 연구원으로 있는 아키자와 소이치는 연구실 조수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13년 전 불같이 사랑했던 여성, 아키호 히후미를 만난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듯 떠난 그녀를 지금까지 못 잊고 있던 그는 뜻밖의 만남 앞에서 반가움보다는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인다.
이미 중년이 되어 있어야 할 그녀가 20대의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지닌 채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그녀의 딸은 열다섯 살 소녀로 성장해 있는데 어째서 그녀만은 세월을 거스르듯 오히려 13년 전보다 더 앳된 모습인 걸까?
타오를 듯한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 다시 그녀 주변을 맴돌던 소이치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다. 그녀를 사랑한 주변 남자들이 모두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사라졌던 13년 동안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살인 단백질 이야기>>로 접했던, 유전병인 치명성가족성불면증 (FFI)를 앓다가 죽어가는 가족이 주요 소재인데 자세하게는 몰라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라 반가웠습니다.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읽고나서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10년도 더 전인 2006년에 이미 관련 작품이 발표가 될 정도였네요.

소재도 반갑고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여러가지 음식들 묘사도 괜찮지만 특은 패션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빨간색 코트에 초록색 정장을 받혀 입는다던가 초록색 캐시미어 재킷에 하늘색 원피스, 노란 부츠에 파란색 가방이라는 히후미의 패션은 화려한 수준을 넘어선, 상상도 잘 안 될 정도의 시대를 앞서간 컬러 조합이니까요. 교토를 주 무대로 하여 은각사, 은사탄 등 각종 명소와 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나서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소재와 약간의 묘사만 괜찮을 뿐, 내용은 수준 이하입니다. 아무리 현실을 뛰어넘는 이야기는 없다지만 실존하는 이탈리아 FFI 가족 이야기보다도 여러모로 부족하거든요. 어딘가에서 괜찮아 보이는 실화를 접한 뒤 깊은 조사 없이 그냥 동기로 이용해서 책을 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여요. 이럴 바에야 프리온 어쩌구, 유전병 어쩌구를 소재로 사용할 이유도 없어요. 그냥 심장 이식이 필요했다고 해도 무방했을테니까요. 
일단 범행 동기인 히후미의 에마에 대한 걱정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워요. 어머니 입장에서 자신의 딸에게 같은 병이 유전되었을지 모른다는건 어마어마한 고민이겠지만 아무런 의학적 검사 없이 그냥 '유전병이니 죽을거야' 라고 생각하는게 말이 되나요? 그것도 프랑스의 유명한 연구소까지 갔다 왔다면서?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보면 이미 20세기 후반에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유전자 변이에 대한 검사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발표된 시점에서는 이미 발병 여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거에요. 최소한의 검사도 없이 무조건 병에 걸릴거라고 믿는다? 최소한 '의학 미스터리'라고 홍보한다면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죠.
그래도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만큼은 설득력이 있다고 칩시다. 저 역시 딸이 병을 앓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고쳐주고 싶을테니까요. 하지만 프랑스 연구소에서 5억엔을 기부받으면 치료약을 완성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설정과 이 5억엔이 동기가 되어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살해하는 연쇄 살인극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지금도 프리온 관련 병의 치료제는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냥 완벽한 사기죠. 5억엔이라는 애매한 금액은 대체 뭔가 싶고요. 차라리 피실험자로 자원한다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그걸 위해 최소한의 체류비를 목표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말은 되니까요. 

연쇄 살인극 이야기는 더 가관입니다. 핵심 트릭인 '바꿔치기' 부터가 어이 상실이에요. 아무리 지인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나이부터가 차이나는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삼는게 과연 말이 될까요? 그것도 불법 체류자를 자신의 대역으로 마련한다? 완전히 비상식적이에요. 게다가 불법 체류자를 가르쳐서 한 사람의 간호사로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니... 간호사들의 업무가 그렇게 호락호락할걸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대역 본인도 아니면서 13년전 소이치와의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 히후미 본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걸 너무 쉽게, 대충 넘기고 있다는 점도 문제고요.

왜 이런 범행을 저지르는지도 설득력ㅇ 약합니다. 13년 전 시점에서 히후미는 굉장한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되며 나름 유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5억엔을 위장 결혼과 살인으로 마련하느니 지위가 높은, 예를 들면 의사와 결혼하여 마련하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겁니다. 최소한 살인 계획을 짜기 전에 그런 노력이라도 했어야죠. 하지만 히후미는 서슴없이 살인을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5억엔을 마련하려면 범행을 최소화했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연쇄 살인극을 벌이고요. 경찰을 우습게 알아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더라도 동기가 명확한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범행이 연달아 성공할리도 없어요. 공범자를 밝혀내는게 수사의 기본이니 분명히 꼬리를 잡혔을겁니다. 부유한 남편들이 연달아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면 더 이상 희생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근거지를 옮기지도 않고 버티는 건 무슨 배짱인가 싶네요.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키자와 소이치의 존재도 작품을 수렁으로 몰고갑니다. 히후미를 불같이 사랑하여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그녀를 '가장'한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원래의 히후미는 가차없이 버린다는 이야기의 결론은 사랑 따위는 없고 결국 그냥 젊고 예쁜게 좋았을 뿐이라는 거니까요. 또 새로운 연인이 히후미와 교제할 때 옆집에 살던 중국에서 온 매춘 소녀 레이카였고, 히후미가 소이치와 동거를 결심한게 레이카를 자신의 대역으로 삼으려던 의도였다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유치하고 어이없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레이카가 소이치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안 넣으니만 못한 설정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에 얹은 음식물 쓰레기 느낌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소재는 흥미로우나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한 졸작입니다. '의학 미스터리' 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함량 미달이고요. 추리적으로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오래전 작품으로 이미 절판되었지만 혹시나 눈에 뜨이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전무합니다.

2019/06/22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 별점 3점

책만 보는 바보 - 6점
안소영 지음/보림

정조 때 관리 이덕무와 그의 벗들에 대해 이덕무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역사전기 소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추천을 받아 읽어보았는데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이덕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자' 출신으로 여러가지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덕무가 괴로움을 버티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갔는지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거든요. 공부와 노력, 그리고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뻔한 해피 엔딩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것도 이런 해피 엔딩이 거의 불가능했을 조선 후기에 말이죠! 

두번째 이유로는 이덕무 본인보다도 유명한 이덕무의 벗,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이덕무의 스승 격인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학의>>의 박제가, <<발해고>>의 유득공, 이덕무의 처남으로 최근 이런저런 드라마 때문에 널리 알려진 <<조선무예보통지>>의 저자이기도 한 무인 백동수, 신분은 다르지만 순전히 책 사랑 때문에 친해진 이서구, 심지어는 정조까지 등장하는데, 이를 이덕무의 시점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담헌 홍대용이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건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덕무 시점에서 홍대용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러가지 장면을 그려내니 훨씬 생생합니다. 게다가 단순한 연주 묘사에 그치지 않아요. 홍대용이 천문, 수학,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걸 '자연의 이치는 곧 조화'라며 뛰어난 음악 실력과 연결하고 있거든요. 이런 장면들 덕분에 인물들이 더 입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이덕무와 친구들에게 명확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하는 언행 모두가 굉장히 현대적이라는게 눈에 뜨입니다. 고증의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드라마같은 느낌이라 읽기 편하다는건 확실한 장점이죠.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에 미친 책벌레로 책만 있으면 근심걱정 따위는 모두 잊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박제가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뜻을 굽히지 않고 올-인하는 혁명가로 그려지고요. 유득공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의 명랑한 메모광입니다. 백동수는 지위, 나이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 사교성 발군의 낙천적인 무예가죠.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 심지어 아끼던 책을 팔아 양식을 삼곤 했지만, 이런 벗들과 책들로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니, 뭔가 <<성균관 스캔들>> 스럽네요.

세번째는 이덕무의 무지막지한 책 사랑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독서인인 탓에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그가 직접 정리한 4가지 책 읽기의 이로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인데 그야말로 독서 하나면 만사형통인 셈이에요. 배고픔, 추위, 근심걱정, 병을 독서로 잊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독서가 좋았으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덕무가 추천하는 우리나라의 좋은 책 세 가지는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입니다. <<성학집요>>는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마지막으로 정조 시대 시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실학의 대두, 청나라와의 관계, 정조의 개혁 정치 등이 이덕무에게 닥쳤던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드라마가 함께 하니 확실히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이덕무가 출세하게 되는게 정조의 개혁 정치와 그대로 겹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너무 이덕무와 백탑파를 좋게만 그리고 있어서 그렇지, 정조가 서자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을 발탁한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보겠다는 취지도 있었겠지만 당파에 좌지우지되던 당시 정국에서 자신만의 세를 키우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 더 컸으니까요. 결국 서자 출신들을 비롯한 이른바 '백탑파' 세력을 끌어올린건, 또다른 붕당을 만든 것과 다름 없는 셈이고요. 또 서자 출신들은 고작해야 시골 군수 정도가 고작이었고 평양 감사까지 출세한건 신분이 높았던 이서구 뿐이었다는건 결국 현실의 벽이 높았다는 이야기라 여러모로 씁쓸합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역사, 조선 사람 시각으로 본 세상 등 '조선' 운운하는 발언이 많은 것도 너무 오버스러웠어요. 솔직히 진위여부도 의심스럽고 말이죠. 애초에 이덕무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위인전이라는 것 부터가 이덕무의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일종의 용비어천가스러운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백탑파에 편향된 시선, 고증과 진위여부가 모호하다는건 단점이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 한 선비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점 때문에 완벽한 역사서라 하기는 어렵고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 위인전에 가깝기에 성인분들보다는 어린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제 딸에게도 언젠가 권해줄 생각입니다.

2019/06/21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성미 : 별점 2점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성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건 복지 사무소 과장 미쿠모가 납치되고 보름 후, 결박당해 아사(餓死)한 시체로 발견된다. 참혹한 범행 방식을 볼 때 원한 관계가 의심되나 피해자는 직장 내, 외적으로 인격자로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수사에 난항을 겪던 경찰 앞에 두 번째 아사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 조노우치 타케루는 지방 의회 의원으로 살해 방식을 비롯하여 모든 점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였다.
때문에 피해자들의 접점을 찾던 경찰 도마시노와 하스다는 그들이 8년 전, 한 지방 보건 복지 사무소에서 함께 근무했었다는 걸 알아낸다. 8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범인은 누구인가?


"호의라든가 배려라는 건, 일대일로 주고받는 게 아니야. 해준 일에 감사했다면 너도 똑같이 낯선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면 돼. 그런 일들이 점점 퍼지고 퍼져 세상은 점점 좋아지는거야." - 케이

비교적 재미있게 읽었던 범죄 스릴러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저자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 화끈한 범죄 스릴러를 기대했는데 고전적인 정통 사회파 범죄 소설이더군요.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고, 트릭보다는 "동기" 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물론 <<개구리 남자>>도 형법 39조의 모순을 다룬 사회파 추리, 범죄 소설이었죠. 사회적인 이슈를 전면으로 다루면서도 진범이 아닌 사람을 1인칭에 가깝게 묘사하여 진범처럼 내세우는 전개, 그리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반전도 <<개구리 남자>>와 완전히 똑같아요.

하지만 <<개구리 남자>>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추리, 범죄보다 사회 고발 쪽에 훨씬 큰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고발하는건 기초 생활 수급자와 생활 보조금 관련 문제인데 정말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다루고 있거든요.
특히나 아사(餓死)라는 살해 방식을 선택한 이유인 8년전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압권입니다. 생활 보조금이 너무나도 필요했던, 그야말로 죽기 일보 직전의 케이 할머니의 서류 접수를 피해자들이 거절해서 할머니가 굶어 죽는 사건이 주요 관계자인 도네 카스하시 시점으로 처절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먹은 건 역전 앞에서 무료로 나누어주는 휴지였다니 말 다했죠. 또 원인이자 사건의 동기인 피해자들의 말도 안되는 탁상 행정에 대한 묘사는 실제 생활 보조금 지급이 얼마나 부실하게 관리되는지를 재고하게 만들며, 또한 독자도 함께 분노하게 해 줍니다.
이와 함께 예산 부족과 노령층 인구 등 기초 생활 수급자의 급격한 증가로 철저한 심사가 필요하다는 현실을 수사 과정에 결합해서 전개하는 장면도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생활 보조금 지급 대상자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설득력을 더 해 주고요. 희미하게 시큼하고, 희미하게 달달하다는 '가난의 냄새' 묘사에서 시작하여 생활 보조금 지급에 대한 불법 행위라던가 기초 생활 수급자들의 절규가 눈 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이죠. 정말 자료 조사를 철저하게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너무 사회 고발 쪽 비중이 큰 탓에 추리, 범죄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추리라는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경찰의 수사만 있을 뿐이죠. 게다가 도네 카스하시가 범인이 아니고 마루야마 스가오가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급작스러울 뿐 아니라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케이 할머니 사망 당시 중학생이었던 마루야마 스가오가 증오를 품고 있다가 8년 뒤 범행을 벌인 이유가 대체 뭘까요? 게다가 본인 스스로 생활 보조금 지급 업무를 진행하게 되었다면, 더더욱 피해자들의 불가피한 사정도 알았을텐데 말이죠. 그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법률적으로 하자는 없는 행동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억지스럽게 반전을 집어넣느니 도네가 범인인 도서 추리물 형태로 구성하는게 더 깔끔하고 명확했을겁니다. 정 간짱이 필요했다면 케이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불쌍한 사람을 돕는 착한 어른이 됐다 정도면 괜찮을텐데 말이죠. 캐릭터에게 급격한 변화를 주는게 작가의 특기 같은데, 좋아보이지는 않는군요.

추리적으로 건질게 없다면 범죄물로의 가치라도 있어야 할텐데 역시나 함량 미달입니다. 초반, 자신의 족적을 숨기기 위해 사이즈 범위가 넓고 바닥 무늬가 없는 슬리퍼를 신었다는 디테일 정도만 볼만하며 그 외에는 전부 대충 넘기고 있거든요. 납치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미쿠모 과장의 경우는 마루야마 스가오가 부하 직원이라 방심했을테니 납치가 용이했다 치더라도, 두번째 피해자 조노우치, 세번째 피해자 (가 될 뻔한) 가미사키를 쉽게 납치한 방법은 전혀 설명되지 않아요.
이야기 전개의 핵심인 도네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게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공항에서 변장한 도네를 경찰이 체포하는 장면입니다. 도네의 목적은 마루야마의 범행을 막기 위해 가미사키를 공항에서 납치하려 했다는건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공항에서 경찰과 대치하느니 마루야마의 뒤를 쫓아 범행을 막는게 훨씬 현실적이잖아요. 이야기 속에서 도네가 진범이 아니라는걸 너무 작위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도 문제고요. 

마지막으로, 휴지를 먹다 죽어간 케이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동기는 처절하지만 나름 수입이 있었던 도네가 단지 '찾아뵙지 못해서' 할머니가 아사한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송금을 하거나, 배달을 시키거나 하는 등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을텐데 말이죠. 작 중에서도 설명되지만 '누군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생활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는데, 도네는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보아도 할머니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이를 두고 출장을 갔다는건 도네 역시 할머니 죽음을 방조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사망 후 무려 10년 형을 받을 정도로 폭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복수보다는 속죄를 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 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얼마전 아베 총리가 이야기한,' 노후 자금으로 2억이 필요하다'는게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사회파 소설로의 가치는 높지만 추리, 범죄물로는 점수를 줄 여지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생활 보조금 관련된 이슈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읽어보셔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9/06/16

독서실력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지영 : 별점 3점

독서실력 - 6점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지영 옮김/생각의집

일본의 유명 장서가이자가 독서가, 서평가 오카자키 다케시의 독서 관련 에세이집. 제목만 보면 책을 읽는 일종의 요령을 알려주나 싶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평상시 가지고 있는 독서에 대한 생각 중심의 에세이들을 모아 놓았을 뿐이죠. 저자의 말대로라면 독서 실력은 별게 아니라서 요령이라는게 있을리도 없습니다. 그냥 많이, 즐기면서 읽으면 느는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읽을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전에는 몰랐던 것이 갑자기 보이기도 하고, 젊은 시절 읽고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 나이 들어 다시 읽었을 때 확 와닿기도하는 것' 이죠. 

원래 저자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책만 읽는 인생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맞게 쓰였다'라는 말머리부터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두에서 책 읽는 여자>> 속 모드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멋있었고요. 또 앞서 말씀드렸듯 '독서 실력은 별거 아니다'라는 등 독서에 대한 저자의 여러가지 생각이 상당히 공감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린다면, 우선 "책은 효과가 서서히 나타난다. 책은 본디 불편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려면 집중해야 하는 장소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기타 등등 필요한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책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동의합니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건 거짓말이다. 마음이 있다면 얼마간이라도 읽을 수 있다." 는 독서를 하지 않고 핑계만 대는 주위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고요.
책을 왜 읽는가? 라는 화두를 던지고 답하는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서 "즐기기 위해서"라는 말도 굉장히 와 닿더군요. 읽는 걸 즐기고, 더 알아가는 걸 즐기기 위해서인데 저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같은 이유로 자기개발서적은 즉효성을 기대하는 안일한 생각에 불과하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밖에 없고요. 이러한 주장을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말로 마무리하는 것도 멋집니다. "즐기지 못하는 정신은 허약하다. 즐기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문화는 미숙하다. 시나 문학을 즐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얼마나 얕은 수준으로 현실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베스트셀러가 존재하는 이유는 독서가 힘든 현대인들이 독서에 투자하는 시간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검증된 상품을 구입하는 행위 때문이다, 따라서 베스트셀러는 상품이며 화제일 뿐이다'는 "베스트셀러 論"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베스트셀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나중에 읽어서 재미있다는 베스트셀러 읽기 방법도 따라해보고 싶네요. 재미와 가치를 떠나 책이 유행했던 당대의 트렌드와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아주 그만인 방법임에는 분명해 보였거든요. 80년대 일본 청춘 만화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겠죠.
마지막으로 만화를 읽는다고 타박하면 안된다는 것도 제 생각과 똑같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유도 같아요. 만화를 읽는 사람은 활자 책에도 손댈 가능성이 높고, 최소한 만화도 안 읽는 사람이 책을 읽을리는 없으니까요.

이렇게 독서에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여러가지 자잘한 서평을 쓴다고 해서 책 추천을 받는건 난처하다는게 대표적인데 저 역시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 공감이 많이 가더라고요. 최소한 자기가 보고 싶은게 어떤건지는 상세하게 알려줘야 그나마 추천이 가능하다는데 맞는 말이죠. 저한테 "재미있는 추리 소설을 추천해 줘" 라고 물어본들 고전 본격물을 좋아하는지, 하드보일드를 좋아하는지, 현대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는지, 일본 쪽 작품이 취향인지 아니면 유럽 쪽 이야기가 취향인지 등 기본적인 정보는 알려줘야 좋은 추천이 가능하니까요. 정말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읽어야 하는 걸작이라면 자신있게 추천하겠지만 그런 작품이 많지도 않고요. 저자의 말대로 서평가는 책을 추천하는 자동판매기가 아니죠.
독서에 대한 기묘한 발상들도 매력적입니다. 독서를 하면서 감정의 진폭으로 인해 가까이 가거나 멀어지는 것은 정신 쪽으로, 어떤 책이라도 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접해야 하고 감정의 진폭은 정신이 그 거리를 안배한다는 색다른 시각이 그러합니다. 책만이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체화 될 수 있다니 생각해 본 적도 없거든요. 독서가 걷기와 비슷하다는 발상도 마찬가지고요. 소설을 처음 읽을 때 몰입 전 파장을 맞추기를 튜닝이라 표현한 것도 재미있었어요. 
아울러 서평가로서 서평 쓰는 요령도 짤막하게 실려있는데 참고할 만 하네요. 저자는 800자 분량으로 그 책이 저자에게 어떤 책인지 평가하고, 줄거리, 읽을 만한 부분, 핵심 부분의 인용, 마무리 순으로 쓴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건 그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을 북돋아야 한다는데, 많이 반성이 됩니다.

언제나처럼 책 소개도 볼거리입니다. 대부분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소개된 책으로만 한정한다면, 우선은 자신의 학력에 자신이 없다면?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 (국내 출간명)이 있습니다. 자서전으로 배움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다는 내용이라는데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동화책 <<코딱지>>는 제 딸이 이런 책을 읽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긴 해서 아쉽게 패스하지만요.
국내 소개되지 않는 책 중에서는 이소다 가즈이치의 <<소재 만다라, 책과 사투하는 사람들>>은 정말 땡깁니다. 책에 미쳐 그야말로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데 제 꿈이기도 한 삶이라 어떨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저자의 말대로 소재는 성채고, 저는 작은 왕국의 국왕이 될 수 있죠.
한 때 (1980년대?) 시대의 총아였다는 가타오카 요시오의 여러 작품들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옛 추억이 하나 떠올라 반가웠어요. 80년대 OVA 황금기에 발표되었던 <<바비에 반해서>>라는 애니메이션 원작이 가타오카 요시오였거든요. 
그리고 저자가 꼭 한 명을 고른다면 선택한다는 작가 쇼노 준조의 작품들도 국내 소개된다면 한 권 정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독서가 취미인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공감되고 와 닿는 내용이 많기는 한데, 모든 내용에 공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버스 운전석 뒤에서 책을 읽는 게 최고로 좋다는 작가의 말입니다. 저는 멀미가 심해서 흉내도 못 내겠습니다. 저자가 일반 취미인 수준을 넘어선 광狂이라서 좀 무리한 주장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어요. 책을 쌓아놓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러하죠. 저도 마찬가지이긴하나 너무 과장하고 있어서 썩 공감이 가지는 않더군요. 순수하게 책을 읽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발상도 마찬가지고요. 재미야 있겠지만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독서인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같은 독서인 후배로서, 저자 만큼은 아니지만 저만의 독서 철학과 독서 세계를 언젠가는 정립하여 꾸며보고 싶은 욕심도 드네요.

덧붙이자면, 책의 맨 뒤는 저자의 추천 책 여러 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국내 정식 출간작은 기타무라 가오루의 <<하늘을 나는 말>> 밖에는 없네요. 소개된 작가도 별로 없고요. 일본 작가의 책이 대부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팔릴 일이 없을 책 관련 에세이 등이 많기는 하지만 조금은 아쉽군요. 그래도 검색하다 찾은 구시다 마고이치의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고전과의 대화>>도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합니다.

2019/06/15

The Box - 마크 레빈슨 / 김동미 : 별점 2.5점

The Box - 6점
마크 레빈슨 지음, 김동미 옮김/21세기북스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얼마나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경제학 서적. <<책장의 정석>>에서의 소개가 흥미로와서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했었는데, 제가 구하고 얼마 안되어 복간되었더군요. 좋은 일입니다.

내용은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시작과 진행 과정, 그리고 현재 (물론 책이 발표된 시점이겠지만) 까지를 아주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색인을 제외하고 42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 전부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죠.
책의 초반부는 컨테이너 화물 시장을 처음 개척해서 시장을 주도했던 풍운아 말콤 맥린 사장의 일대기와 거의 겹칩니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 초기에는 말콤 맥린 사장 자체가 시장의 전부이며 또 리더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죠. 여튼 초, 중반부는 말콤 맥린 사장이 처음으로 컨테이너와 컨테이너를 나르는 화물선 아이디얼 X호, 그리고 이를 옮기는 크레인을 도입하여 혁신을 일으킨 뒤 맷슨사 등 후발 업체들이 이를 모방하여 속속 컨테이너 화물 사업에 뛰어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기존 대비 얼마나 경제적으로 이익이 일어났는지 등의 데이터들도 확실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그 뒤 컨테이너 운송과 관련되어 마찬가지로 혁신이 일어난 트럭, 철도 운송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각 해운 회사별로 독자적인 컨테이너 운송 사업을 벌이다가 이를 표준화하면서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각 회사별 이해가 상충되어 잘 협의되지 않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네요. 
후반부는 풍운아 말콤 맥린의 실패 - 기름을 엄청 먹는 빠른 배를 도입했지만 오일 쇼크로 치명타, 다음에는 기름을 적게 먹지만 느린 대형 화물선으로 재기를 노렸지만 석유값 폭락과 너무 커서 이용할 수 있는 항구가 제한된 탓에 파산 - 와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현재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신기했던 건 우리나라 관련된 내용이 가끔 등장하는 점입니다. 한진의 조선소가 대형 선박을 수주받았다던가, 한국의 부산이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죠.

이런 소개와 설명으로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가끔 직구를 할 때, 특히나 중국에서 구입할 때 이 가격에 어떻게 해외 배송까지 무료로 될까? 궁금했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이것,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발달 덕분이었던 것이죠. 그만큼 운송 비용이 저렴해졌기 때문으로 심지어는 사방이 육지로 가로막혔거나, 항구에서 내륙으로 운송하는 비용이 더 들 정도라는군요. 예를 들어 미국 볼티모어에서 남아프리카 더반으로 컨테이너 화물을 보내는 비용은 2,500달러인데, 더반에서 남아프리카 수도 마세루까지 보내는 비용은 이보다 7,500달러가 더 든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가 반도 국가로 3면이 바다로 인접했다는게 행운이란걸 새삼 느끼게 되네요.

그 외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건 하역을 진행했던 부두 노동자 단체들이 컨테이너 화물 사업 앞에서 어떻게 협상하였고, 어떤 항구들이 컨테이너 운송에 적응하여 살아남았으며 어떤 항구들이 몰락했는지에 대한 챕터입니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의 거친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은 결국 무의미했다는 건데 (영화에서의 노동자들은 항구 노동자들만은 아니었겠지만) 이는 최근 인공지능이 대두되어 곧 없어질 직업군 리스트가 이런 저런 곳에서 회자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빠른 시간 내 도태되지 않으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텐데... 많은걸 생각하게 합니다.

하여튼, 컨테이너 화물 운송에 대해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경제라던가 산업의 흐름,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도 많고요. 제 전문 분야라던가 핵심 관심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 개인적인 만족도는 높지 않았지만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람녀 곡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06/08

오래된 책들 (6) - 타임시커즈 1~3

포스팅꺼리가 없을 때 업로드하려고 모아놓은 오래된 책들 이야기 여섯번째. 순수한 의미의 화력(畵力)으로는 우리나라 만화 역사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싶은 이태행의 (아마도) 국내 마지막 발표 작품입니다.

그림 솜씨에 필적하는 이야기 구조를 갖추지는 못했고, 어딘가에서 본 듯한 설정과 장면들이 많다는 단점은 큽니다. 하지만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좋은 스토리 작가와 손을 잡아서 보다 긴 호흡의 이야기를 펼쳐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가끔 뒤적이면서 추억하기에는 그림 솜씨가 너무 아까우니까요

2019/06/07

위험한 저녁식사 - 조너선 에드로 / 이유정 : 별점 4점

위험한 저녁식사 - 8점 조너선 에드로 지음, 이유정 옮김/모요사

<<닥터 하우스>>라는 미드를 아시나요?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그레고리 하우스가 팀원들과 함께 환자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밝혀낸다는 내용으로 한 때 상당히 인기를 끌었었죠. 특히 환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병명을 밝혀내는 과정은 주어진 단서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추리물과 비슷한 재미를 선사해 주기도 했습니다. 아마 인기의 큰 요인 중 하나였을 거에요.

이 책은 <<닥터 하우스>>의 현실 버젼입니다. 실제로 환자들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질을 밝혀낸 의사들의 활약을 그려낸 논픽션이거든요. 모두 15편의 사례가 실려있는데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추리물을 방불케하는 내용도 많아요. 
대표적인 예는 합성 섬유 가공업을 하는 멜빌에게 닥친 질환 이야기입니다. 그는 극심한 흉통, 가벼운 발열로 입원하지만 심전도, 혈액 검사 등으로는 병의 정체를 알 수 없었죠. 그러나 멜빌은 퇴원 후 공장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몇 명이 유사한 증상을 경험했다는 걸 알고난 뒤 이를 하버드 보건 대학원에 알립니다. 피터스 교수는 직접 공장으로 찾아가 발병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게 되죠. 교수는 발병 원인은 중합체 증기열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직원들의 흡연 탓이라는 걸 밝혀냅니다. 손에 중합체가 묻은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독소 증기가 발생하여 이를 흡입하게 된게 원인이었죠!
고양이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는데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무심코 손에 연고가 묻어 동공 확장 증상이 일어난 소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앞으로 손은 더욱 철저히, 깨끗이 씻어야겠어요.

그 외에도 아기가 혼자서 희귀한 세균에 감염된 이유는 피라냐 어항 물을 욕조에 버렸기 때문이며, 길랭-바레 증후군처럼 보였던 괴질의 원인은 진드기가 물고있던 탓이었다는 등 재미있는 사례들이 가득합니다. 장티푸스 보균자로 유명했던 "장티푸스 메리"의 일화 등 각종 배경 설명도 상세하며 잘못 알고 있던 의학 상식을 바로 잡아 주는 부분들도 인상적이에요. 섬유소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트밀을 과잉 섭취하다가 장폐색을 일으킨 환자 이야기, 건강을 위해 허브차를 섭취했는데 제대로 품질 관리가 되지 않아서 독소가 포함된 컴프리 차를 마셔서 간에 이상을 일으킨 환자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뭐든 과하면 안 좋은 법이죠. 저도 요새 통귀리를 한 줌씩 집어먹고는 하는데 자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 초반, 의학 기술이 지금보다 뒤떨어져 있을 때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조금 시시한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이런 이야기가 15편이나 실려있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의학적인 설명도 상세하고, 모든 사건에서 환자들이 완치되어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점도 마음에 들며 글도 쉽게 재미있게 쓰여진 편이고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류의 논픽션을 좋아하신다면, 특히나 <<닥터 하우스>>를 좋아하셨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9/06/02

알라딘 (Aladdin) (2019) - 가이 리치 : 별점 2.5점



<<신데렐라>>, <<미녀의 야수>>, <<정글북>>에 이어 4번째(맞나요?)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작품. 이전에 공개되었던 스틸 컷에서의 이미지가 애니메이션과 괴리감이 심해서 상당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었죠.

그런데 작품 자체는 굉장히 깔끔합니다. 애니메이션의 기둥 줄거리와 설정,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기는 했지만 실사 영화에 어울리도록 주요 장면을 적절히 구성한 솜씨가 괜찮기도 하고요. 특히나 가장 우려했었던 윌 스미스의 '지니'가 아주 잘 구현되어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원작의 지니를 윌 스미스 스타일로 잘 어레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수준이에요. 시종일관 웃음과 흥을 자아내는 연기는 물론 춤과 노래 모두 최고였고요. 과거 힙합 아이돌이었던 솜씨가 여전합니다.
다른 캐릭터들 역시 마찬가지에요. 적절한 어레인지, 변주가 이루어져있는데 지나치게 애니메이션을 의식해서 '코즈프레'에 가까왔던 몇몇 작품들 보다는 훨씬 낫더라고요. 새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자스민 공주의 시녀 달리아, 충직한 근위대장(?) 카심의 등장과 활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파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가본데 저는 괜찮았어요. 그냥 사악한 악당은 아니고,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와서 최고를 추구하는 설정이 이야기와 잘 어울렸습니다.

이야기의 변형도 역시나 적절합니다. 크게 두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한 개는 알라딘의 두번째 소원입니다. 원래 애니메이션에서는 물에 빠진 알라딘을 지니가 구해주기는 하지만 과연 소원을 쓴 것인지 아닌지 논란의 여지가 있었죠. 알라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영화에서는 지니 임의로 '두번째 소원을 쓴 것'으로 서약서를 쓰는 장면을 삽입하여 깔끔하게 정리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개는 마지막에 알라딘이 지니에게 자유를 주는 장면입니다. 영화에서는 보통 사람이 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아주 괜찮았어요. 애니메이션에서는 지니의 모습과 능력 그대로를 갖춘 채 자유를 얻어서 너무 막강한 캐릭터가 된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시녀 달리아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그 모습이 도입부 선원으로 이어지는 수미쌍관식 구성도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약간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건 아무래도 화끈한 액션이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동굴에 갖히게 된 알라딘의 탈출 장면 정도만이 기대에 값할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자파와의 대결은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여러모로 기대 이하였어요. 단지 양탄자를 타고 좀 날라다니다가 잡힌 뒤, 입을 털어서 자파를 설득하는게 전부거든요. 양탄자 비행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텐데 화끈함이 부족하고요.

자스민 공주가 자립적인 여성으로 훌륭한 여왕이 될 수 있다는 최근 트렌드에 맞춘 듯한 설정도 딱히 들어갈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왕의 그릇이라는 걸 증명하고, 카심도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알라딘의 도움 없이는 자파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니 기존의 수동적인 공주님 캐릭터와 딱히 다르지도 않잖아요? 아니, 알라딘을 숨기기 위해 자파에게 키스를 하는 기존 캐릭터가 과감한 측면에서는 더 나아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파의 소원 중 '왕이 되겠다'는게 무의미하게 소모된건 옥의 티입니다.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주의 말 한마디로 신하들이 배신(?)을 한다면, 지니의 마법이 그만큼 보잘 것 없다는걸 증명하는 꼴이니까요.
그 외에, 주연 배우들 모두가 아랍인이 아니라 인도인으로 보이더라는 문제도 있긴 한데 어차피 고증과는 담 쌓은 작품이니 뭐 큰 흠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그래도 이 정도면 실사화의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괜찮아 보입니다. 제 별점은 2.5점.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두 시간 정도 즐겁게 감상하는 데에는 적당했어요. 저처럼 어린 친구와 영화관을 가실 일이 있으시다면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9/06/01

이웃집 살인마 - 데이비드 버스 / 홍승효 : 별점 4점

이웃집 살인마 - 8점
데이비드 버스 지음, 홍승효 옮김/사이언스북스

사람이 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진화와 심리학 측면에서 분석한 책. 살인이라는 감정이 생기는 이유에 대한 분석이 굉장히 설득력있습니다. 정답이라고 하기에는 심리학 측면 내용이 많아 애매하지만 최소한 저에게는 아주 그럴듯하게 보이더라고요. 대표적인게 짝짓기, 성적 경쟁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며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여성이 자신을 보호해주고, 많은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남성을 선호하기 때문에 남성은 폭력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죠. 반대로 남성은 여성의 외모와 젊음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여성 간에는 이러한 부분에서 경쟁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요. 
이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후손을 많이 남기기 위해 남성은 최상의 생식 능력을 지는 여성을 선호하도록 진화한 것이거든요. 당연하겠지만 단자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종에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하네요.

또 남녀 관계를 분석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여성의 배란 시기가 은폐되어 남성과 여성이 후손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남성의 손해와 희생을 불렀다는 대목입니다.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되기 때문에 남성이 자신의 후손을 가진 여성 외의 여성에게 자원을 투자하기가 힘들어 졌으며,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가 가치있고 유지되어야 함을 보장해야 했기 때문에'사랑' 이라는 감정이 등장했다는 식이죠.
그런데 이렇게 이어진 남성과 여성의 등급차가 존재하게 되면 각자 바람을 피우는 식으로 서로에게 원하는 자원을 획득하려는게 정상이라는군요. 저자의 연구진이 여성들이 단기적인 관계를 가질 때에는 '섹시한 아들' 유전자를 추구한다는 정황적인 증거를 찾아내어 이를 증명하였고요. 섹시한 아들이 후손을 많이 남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내가 바람을 핀 경우 남자는 자신이 자원을 투자한 여성이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후손을 남기면 이중의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는데 굉장히 와 닿더군요. 이를 통해 사랑에 빠지거나 빠졌다고 착각한 남자가 왜 위험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통계와 실제 사례로 충실하게 검증도 해 주고 있고요.

강간범에 대해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분노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합리적입니다. '성의 약탈자'는 상술한 자연스러운 후손 만들기와 그것을 위한 자원 투자에 역행하는 중요 범죄이기 대문에 사악한 행위로 유전자에 깊이 기록되어 있다는건데 아주 그럴듯해요. 계부가 의붓 자식들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자원을 투자하기 싫다는 자연스러운 진화 이론의 결과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외 다양한 살인의 유형을 진화와 심리학적 측면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각 유형별로 실제 사례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의 방향성이 맞다면 일본의 유토리 세대나 우리나라의 3포 세대처럼 결혼과 가정, 후손에 특별한 목적 의식을 지니지 않는 사고 방식이 퍼지면 살인이 감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긴, 다른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이 살인과 같은 노력과 수고가 많이 필요한 일을 벌이지도 않겠지만 말이죠.

실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살의'를 품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이 많은건 조금 불필요해 보였지만 딱히 단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좋은 책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살인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궁금하신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