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마틴 베일리 지음, 박찬원 옮김/아트북스 |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들의 탄생과 미술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현재 작품들의 상황이 어떠한지까지만을 집중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 미술사, 미시사 서적.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유명하지만 그 작품들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되는지,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작품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비록 미술 대학을 졸업하여 디자인 쪽 업무를 하고 있지만 창피하게도 잘 알지 못하는건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 책 덕분에 <<해바라기>>라는 작품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주석 빼고 27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거의 모두를 <<해바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생은 거의 비중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해바라기>>를 창작하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바라기>> 창작 이후 자살까지는 몇 페이지로 끝날 뿐이에요.
그만큼 <<해바라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단순히 정물화가 아니라 반 고흐가 굉장한 창작열과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그려냈고 본인 스스로도 살아 생전 엄청나게 자부심을 가졌다던가, <<해바라기>>의 창작 과정에 고갱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해바라기 연작의 창작과 그 과정에서의 고갱의 역할을 다음과 같습니다.
맨 먼저 당대 인기 작가였던 고갱이 <<해바라기>>의 초기작인 <<해바라기 두송이>>를 보고 작품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들여 아를의 '노란집'에서 몇 달간의 공동 창작 진행을 약속하죠. 고흐는 고갱을 위해서 '노란집'을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는 '데코라시옹' (장식 계획)을 세우고 무려 네 점의 해바라기를 순식간에 그려내게 됩니다. 즉, 고갱을 환영하기 위한 장식 용도였던 셈이죠. 그 뒤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지만 그래도 고갱이 <<해바라기>>를 탐낸 탓에 고흐는 원래의 작품을 자가 복제하여 두 점의 카피까지 그립니다.
결론적으로 고흐가 고갱을 위해 그린<<해바라기>>는 모두 일곱 개가 됩니다. <<해바라기 세 송이>>, <<해바라기 여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카피)>>,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1)>>,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2)>> 순이죠. 고갱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많은 해바라기가 그려지지는 않았을테니, 고갱이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에 따르면 고흐를 그냥 미친 사람 취급했고, 고흐가 그에게 준 작품들은 그냥 돈으로만 본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 작품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했네요.
또 왜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지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당대에서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엄청나게 화려한 색깔과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가끔 접하는 '광인들의 그림'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당대 기준으로 보면 흑백 사진들 속에 혼자 컬러 사진이 놓여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사이즈도 높이가 90cm가 넘는 대작인데다가 임파스토라는 반 고흐 특유의 울퉁불퉁한 질감들도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더해 주었을 테고요. 아,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정말 당시 기준으로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반 고흐가 썼던 화려한 노란색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데 당시 색깔로 감상한다면 그 충격은 훨씬 더할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디지털로 당시 색감을 구현한 이미지가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흐가 죽은 직후부터 <<해바라기>>를 비롯한 작품들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그가 죽은 뒤 고작 10여년 뒤에 유명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작품을 구입할 정도였다니까요. 이러한 구매 과정을 거쳐 <<해바라기>> 들이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일담도 재미있습니다. 온갖 유명 인사들과 사건들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와 괴링이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지금 다른 작품들은 전부 남아있어서 볼 수 있는데 딱 한 작품, <<해바라기 여섯 송이>>는 일본의 야마모토 코야타가 구매했지만 2차대전 공습으로 소실되었다니 아쉽습니다. <<갤러리 페이크>>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죠. 버블 경제 시절 일본 야스다 보험사가 무려 2,500만 파운드 (한화 약 400억)나 지불하고 구입한 <<해바라기 열 다섯송이 (카피)>>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야기고요. 위작 논란까지 있었기에 솔직히 미친 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작품 전시 관람 수익만해도 구입 가격 이상일 뿐 아니라 지금 가치는 천억이 넘는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동생 테오, 그리고 테오가 빈센트 사후 얼마 뒤 사망하여 미망인 요하나가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해바라기>> 중 <<해바라기 열다섯송이 (카피)>>만 남기고 판 이유가 무엇인지는 궁금해지네요. 개인적으로는 카피의 경우,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있는 느낌이라 오리지널이 더 나은데 그녀는 왜 카피를 남겼을까요? 단순히 개인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굉장히 궁금하지 않나요? 이를 소재로 픽션이 하나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그녀가 해바라기를 한 폭 남기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을 남겨서 그 덕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에 주요 작품들이 소장, 전시될 수 있었다니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다행인 셈이겠죠.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바라기>>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해바라기>>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책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높아요. 전체 풀컬러에 도판도 완벽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실되었다는 <<해바라기 여섯 송이>> 컬러 이미지가 첫 수록된 책이기도 하고요. 재미는 물론 천재와 미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