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지음/보림 |
정조 때 관리 이덕무와 그의 벗들에 대해 이덕무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역사, 전기 소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추천을 받아 읽어보았는데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이덕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자' 출신으로 여러가지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덕무가 괴로움을 버티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갔는지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거든요. 공부와 노력, 그리고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뻔한 해피 엔딩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것도 이런 해피 엔딩이 거의 불가능했을 조선 후기에 말이죠!
두번째 이유로는 이덕무 본인보다도 유명한 이덕무의 벗,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이덕무의 스승 격인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학의>>의 박제가, <<발해고>>의 유득공, 이덕무의 처남으로 최근 이런저런 드라마 때문에 널리 알려진 <<조선무예보통지>>의 저자이기도 한 무인 백동수, 신분은 다르지만 순전히 책 사랑 때문에 친해진 이서구, 심지어는 정조까지 등장하는데, 이를 이덕무의 시점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담헌 홍대용이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건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덕무 시점에서 홍대용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러가지 장면을 그려내니 훨씬 생생합니다. 게다가 단순한 연주 묘사에 그치지 않아요. 홍대용이 천문, 수학,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걸 '자연의 이치는 곧 조화'라며 뛰어난 음악 실력과 연결하고 있거든요. 이런 장면들 덕분에 인물들이 더 입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이덕무와 친구들에게 명확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하는 언행 모두가 굉장히 현대적이라는게 눈에 뜨입니다. 고증의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드라마같은 느낌이라 읽기 편하다는건 확실한 장점이죠.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에 미친 책벌레로 책만 있으면 근심걱정 따위는 모두 잊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박제가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뜻을 굽히지 않고 올-인하는 혁명가로 그려지고요. 유득공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의 명랑한 메모광입니다. 백동수는 지위, 나이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 사교성 발군의 낙천적인 무예가죠.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 심지어 아끼던 책을 팔아 양식을 삼곤 했지만, 이런 벗들과 책들로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니, 뭔가 <<성균관 스캔들>> 스럽네요.
세번째는 이덕무의 무지막지한 책 사랑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독서인인 탓에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그가 직접 정리한 4가지 책 읽기의 이로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인데 그야말로 독서 하나면 만사형통인 셈이에요. 배고픔, 추위, 근심걱정, 병을 독서로 잊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독서가 좋았으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덕무가 추천하는 우리나라의 좋은 책 세 가지는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입니다. <<성학집요>>는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마지막으로 정조 시대 시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실학의 대두, 청나라와의 관계, 정조의 개혁 정치 등이 이덕무에게 닥쳤던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드라마가 함께 하니 확실히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이덕무가 출세하게 되는게 정조의 개혁 정치와 그대로 겹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너무 이덕무와 백탑파를 좋게만 그리고 있어서 그렇지, 정조가 서자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을 발탁한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보겠다는 취지도 있었겠지만 당파에 좌지우지되던 당시 정국에서 자신만의 세를 키우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 더 컸으니까요. 결국 서자 출신들을 비롯한 이른바 '백탑파' 세력을 끌어올린건, 또다른 붕당을 만든 것과 다름 없는 셈이고요. 또 서자 출신들은 고작해야 시골 군수 정도가 고작이었고 평양 감사까지 출세한건 신분이 높았던 이서구 뿐이었다는건 결국 현실의 벽이 높았다는 이야기라 여러모로 씁쓸합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역사, 조선 사람 시각으로 본 세상 등 '조선' 운운하는 발언이 많은 것도 너무 오버스러웠어요. 솔직히 진위여부도 의심스럽고 말이죠. 애초에 이덕무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위인전이라는 것 부터가 이덕무의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일종의 용비어천가스러운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백탑파에 편향된 시선, 고증과 진위여부가 모호하다는건 단점이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 한 선비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점 때문에 완벽한 역사서라 하기는 어렵고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 위인전에 가깝기에 성인분들보다는 어린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제 딸에게도 언젠가 권해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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