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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9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 에리카 오크런트 / 박인용 : 별점 4점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 8점
에리카 오크런트 지음, 박인용 옮김/함께읽는책

자연 발생적인 언어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어에 대해 설명해주는 책.
프롤로그를 거쳐 존 윌킨스와 진리의 언어, 루드비크 자멘호프와 평화의 언어, 찰스 블리스와 기호의 언어, 제임스 쿡 브라운과 논리의 언어, 스타트렉의 클링온 등 연대순으로 주요 인공어와 왜 그 인공어를 발명했는지가 발명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소개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17세기부터 수학에 바탕을 둔 언어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그동안 세계어였던 라틴어의 힘이 약화되면서 벌어진 일이었지요. 때문에 글자를 수 처럼 사용하거나, 말을 숫자로 바꾸거나, 아예 기호화하는 등의 아이디어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중, 언어를 수학화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네요. 예를 들어,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므로, 만약 동물 a가 2이고 이성적이라는 것 r이 3이면, 사람 h는 ar과 같아야 하며, 이 경우 2*3 즉 6이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각 항목별 '기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가 문제였는데, 이를 진지하게 파고든게 존 윌킨스였다는군요. 윌킨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모든 단어를 분류하여 계층화하였습니다. 자연 언어에서 '개'는 단순히 외우는 것이고, 그 발음도 임의로 정해진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윌킨스 체계를 통해서는 개를 나타내는 단어는 개가 무엇인지를 알려 줄 수 있습니다. 단어가 짐승 > 타원형 두개골 > 순으로 되어있는 계층도 하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분류도 지극히 임의적이고, 사용자가 개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는 탓에 사용하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도 단어가 아니라 완성된 '언어'로 만들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지요.

윌킨스의 언어에 비하면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 어는 분명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커뮤니케이션을 제공한다는 목적에 잘 부합했으니까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언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세계어가 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오그던이 영어 단어 갯수를 850개로 줄어 제안했던 '기본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동사를 없애고, Get, Put, Take. Come. Go, Have. Give 등의 기본 동사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윈스턴 처칠이 팬이었던 등 꽤 인기를 끌었었지만, 실제 사용할 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니까요. 하긴, 숙어라던가 관용적 표현 없이 언어가 존재하기는 힘들 거에요.

찰스 블리스의 블리스 기호는 단순한 기호들을 조합하여 여러가지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블리스가 중국 체류 시 배웠던 한자 조어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습니다. 해석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한 등 문제도 많았지만, 아예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장애아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이어서 온타리오 장애아 학교 등에서 아주 잘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찰스 블리스가 자존감이 낮은 정신병자였던 탓에, 지루한 법정 싸움으로 인해 이 기호를 활용한 교습법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는 상당히 유용했을테고, 온갖 이모지 사용이 일반화된 지금에 더 잘 먹힐 방식인데 아쉽네요.

제임스 쿡 브라운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할 수 있으므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인 객관성을 지닌 언어 '로글랜'을 발표했습니다. 소개된 내용을 보니, 수학과 논리학에 기반을 둔 언어로, 일반 언어라기 보다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가깝더군요. 그래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일반적인 언어처럼 사용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너무 컸습니다. 로글랜은 창시자 브라운에게서 벗어난, 비영리 단체 논리 언어 집단이 이끄는 '로지반'이라는 언어로 발전해 나갔는데, 어렵기는 별 차이가 없고요.

마지막에는 스타트렉의 '클링온'이 소개됩니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소수의 열광적인 팬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언어로, 특별한 목적이 없고, 유용하지 않아도 언어는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입니다. 저자는 클링온의 존재 이유를 '유희' 라고 단정하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아울러 이런 재미 요소가 앞으로는 신규 언어의 필수 조건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드네요.

이렇게 대표적인 인조어 외에도 언어로 여성의 관점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라아단'과 같이 파생된, 관련된 인조어도 조금씩 소개되고 있으며, 수많은 인조어들의 목록과 번역 예로 구성된 부록도 풍성합니다.
저자가 인공어들을 직접 배워서, 그리고 그 인공어들의 학습 코스나 세미나 등에 직접 참석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언어인지에 대해 보다 생생하게 제공해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고요. 덕분에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로글랜, 로지반과 같이 지나치게 어려운 언어는 그 사용 방식이 책만 읽어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으며, 찰스 블리스의 블리스 기호는 그 기호에 대한 설명보다는 정신병자 블리스의 인생 이야기가 더 길게 소개되는 등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책이었어요. 회사에서 UX 업무를 담당하는 저에게는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생각됩니다. 딱딱하고 어렵게가 아니라 저자의 체험 중심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재미있게 쓰여져 있기도 하고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상호 작용 (인터랙션) 등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8/28

문 나이트 Vol. 1 : 광기 - 제퍼 르미어, 그렉 스몰우드, 조디 벨레어 / 임태현 : 별점 2.5점

문 나이트 Vol. 1 : 광기 - 6점
제프 르미어 지음, 그렉 스몰우드.조디 벨레어 그림, 임태현 옮김/시공사(만화)

'문 나이트'라는 히어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최근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는 소식 정도만 접했을 뿐이죠. 하지만 이 단행행본 에피소드는 어딘가에서 엄청나게 추천하셨기 때문에 관심을 조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알라딘 e-book 쿠폰이 생겨서 겸사겸사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본 결과는 조금 미묘하네요. 이야기 자체는 꽤 그럴듯합니다. 마크 스펙터가 진짜 문나이트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에 대해서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환상과 현실이 겹쳐지는 전개, 그가 진짜 문나이트일 수도 있다는걸 서서히, 기묘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전개 모두 짜임새 있고요.
마크에게 환각처럼 나타나 악신 세트에 맞서 떨쳐 일어날걸 강요했던 콘슈가 사실은 마크의 육신을 빼앗으려는 악신이었고, 이를 거부한 마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뒤, 성공하고 행복한 영화배우 스티븐으로 다시 눈을 뜨는 결말도 뻔했지만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 모든게 꿈인지, 정신병자의 환각인지 끝까지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요.

그런데 문제는 결말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호하다는 겁니다. 주인공 마크 스펙터가 히어로 '문 나이트'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거든요. 마크는 힘을 잃고 정신병원에 갇힌 히어로 문 나이트일 수도 있지만, 이집트 신 콘슈에 대한 환각을 보다가 이를 주변 다른 정신병자들에게도 전염시켜(?) 탈출을 감행하는 위험한 정신병자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이는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별다른 슈퍼 파워 없이, 그냥 맨손 격투로 일관하는 액션 역시 이런 모호함을 가중시키고요.
또 이 작품을 통해 '문 나이트'라는 히어로에 대해 알아가는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독립된 작품으로 친다면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시리즈를 의식한 듯한 모호한 결말 대신, 마크는 정신병자였고, 미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였다는걸 깨닫는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미쳤을 때가 차라리 행복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작화는 빼어납니다. 그러나 환상이 뒤섞일 때 여러 작가들 화풍으로 다른 이야기를 그려내는 방식은 식상했고, 과연 이런 방식이 필요했을지도 의문이 남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화풍이 정해져 있던 걸까요? 그랬다면 나름 좋은 아이디어지만, 독립된 작품으로는 완성되었다고 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목에 "Vol.1"이 있는 만큼, 후속작을 읽으면 평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지금으로는 잘 달려가다가 어정쩡하게 끝난 느낌입니다. 문 나이트 입문작으로는 돌직구 히어로 액션물이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21/08/27

영매탐정 조즈카 - 아이자와 사코 / 김수지 : 별점 2.5점

영매탐정 조즈카 - 6점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20회 본격미스터리대상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본격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등 온갖 상을 휩쓸고, 자주 가던 추리 소설 커뮤니티에도 극찬하는 분들이 많으시길래 구입해서 읽어본 작품. 아래의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화. 우는 여자 살인>>
추리소설가 고게쓰는 대학 후배 구라모치 유이카의 부탁으로 영매 조즈카 히스이를 찾았다. 우는 여자에 관련된 이상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조즈카는 조사를 위해 고게쓰와 함께 유이카의 자택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유이카의 집을 찾은 둘은,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조스카는 유이카의 혼을 자신에게 빙의시켜, 경찰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2화. 수경장 살인>>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추리소설가 구로고시 아쓰시의 별장 '수경장'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되었다. 수경장에서 발생하는 심령현상의 조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비큐 파티가 있던 날 밤, 구로고시 아쓰시는 살해되었다. 조즈카는 범인이 벳쇼라는걸 영능력으로 알아냈지만, 경찰은 구로고시와 불륜 관계였던 신타니를 체포하고 말았다. 고게쓰는 유일한 단서였던 조즈카가 꾼 꿈을 토대로 범인이 벳쇼라는걸 경찰이 믿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3화.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
고게쓰의 팬이라는 여고생 후지미 나쓰키가 자기 학교 여학생들이 살해된 사건 조사를 부탁했다. 고게쓰는 조즈카와 함께, 경찰의 도움을 얻어 사건 현장 및 학교를 방문해서 조사에 나섰다. 조즈카의 영시를 통해 범인이 여자 아이라는걸 알게 된 고게쓰는, 프로파일링을 지어내서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지미 나쓰키까지 살해되고 마는데....

<<최종화. VS엘리미네이터>>
그런데 구성이 독특하네요. 1~3화는 각각 완성된 단편들인데, 네번째인 <<최종화. VS엘리미네이터>>를 통해 앞서 3개의 이야기를 뒤집는 반전과 앞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추리적인 장치들이 정리되고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장점이라면,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할 만 하더군요. 우선 조즈카가 영능력으로 얻은 정보를 통해 진범을 알아내고, 트릭을 밝혀내는 1~3화에서의 고게쓰의 추리와 활약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수경장 살인>>에서 조즈카의 꿈을 캐비닛 거울과 연결시켰던 추리, <<여고생 연쇄 교살 사건>>에서 나쓰키가 살해되었을 때 범인이 카메라에서 필름을 가져갔고, 렌즈캡을 떨어트렸던걸 단서로 하스미 아야코는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추리 등은 설득력이 높았거든요.
그러나 이 정도였다면 흔해빠진, 그냥저냥한 추리물 수준에 그쳤을거에요. 조즈카가 던져주는 단서가 워낙 명확해서 고게쓰가 대단한 명탐정일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4화 덕분에 이 작품이 한 단계 수준을 뛰어넘는 완벽한 본격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4화에서 조즈카는 영매가 아니라, 천재 탐정으로 사건 현장을 쓱 보고 추리했던 걸, 영능력인양 고게쓰에게 단서를 던져주었다는게 밝혀지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앞서 세 건의 사건에서 그녀가 어떻게 모든걸 추리해 내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는데, 이 추리들이 정말 대박이었습니다. 합리적이며 설득력 있는건 물론, 모두 독자에게도 주어졌던 공정한 단서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왠만한 고전 걸작 본격물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추리적 쾌감을 선사해주는 덕분입니다. 여고생 교살 사건에서 핵심 단서로 쓰였던 스카프 고리와 같은 디테일을 조즈카의 대사로 스쳐지나가듯 드러냈던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즈카가 추리력을 선 보일 때 셜록 홈즈라던가, 일상계의 정의 같은 지식을 피로하는 것도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부분이고요.

하지만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우선 별로 새롭다는 느낌은 받기 어려웠어요. 1~3화 까지의 설정인, 영매가 영능력으로 탐정과 컴비를 이루어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는 쎄고 쎘으니까요. 귀신이 알려준 단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건 이미 만화 <<카코와 가짜 탐정>>에서 써먹었었지요. 고전 <<싸이코메틀러 에지>>라던가, 미쓰다 신조의 <<사상학 탐정>> 도 비슷한 류일테고요.4화의 반전과 본격물로의 전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능력자로 알려진 순진한 미녀가 알고보니 추리력이 뛰어난 닳고 닳은 아가씨였다는건 <<영능력자 오다기리 쿄코의 거짓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하기 어려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천사에서, 마지막에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는 고게쓰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웃는, 닳고 닳은 건방진 아가씨로 변모한다는 조즈카 캐릭터도 오다기리 쿄코 판박이고요.

지나친 과장과 억지도 불만스럽습니다. 캐릭터부터 만화같아요.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영능력(?)과 추리력을 갖춘 절세의 미소녀 조즈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그녀가 영능력(?)을 발휘할 때의 과장된 연기, 고게쓰와의 알콩달콩한 로맨스 묘사는 읽으면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였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영 부족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요.
일개 추리 소설가가 경찰과 협력한다는 편의적인 설정이야 본격물이니 그렇다고 쳐도, 현장을 쓱 보고 진상을 모두 추리해냈다는 것도 과장이 지나쳤습니다. 말로 설명하는데 50분이나 걸리는 추리를 단 몇 초만에 끝냈다는게 말이 될까요? 이 정도면 영능력보다 더한 초능력이지요. 추리도 설명은 그럴싸하지만, 결론에 단서를 끼워 맞춘 느낌도 강했고요. 대표적인 예는 2화입니다. 구로고시의 신작이 정확하게 몇 권 배달되었는지, 구로고시가 여분의 책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구로고시 서재에 책을 따로 둘 곳이 없었다는 걸 잠깐의 관찰 후 추리하여 단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이럴 바에야 그냥 뛰어난 영능력자라는게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겁니다.
그 외에, 고게쓰가 여대생 연쇄 살인마 쓰루오카 후미키였다는 것과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이후를 그린 에필로그도 뻔하고, 억지스러운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여대생들을 칼로 찌르며 '아프지 않았지?'라고 물어보던 이유가 과거 누나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애초에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려웠고요. 고게쓰에게 납치된 조즈카가 탈출하는 과정도 작위적이었습니다.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저에게는 일본 서브 컬쳐 특유의 과장된 묘사, 어디서 많이 보았던 뻔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들로 가득차 있다는 단점이 더 크게 느껴졌던 작품입니다. <<사쿠라코 씨 발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와 별로 다르지 않은 느낌이에요.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은, 잘 짜여진 본격물이기는 하나, 제게는 소문만큼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차라리 만화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화에 가깝게, 가볍게 쓰여진 작품이 먹히는걸 보면, 확실히 시대가 변하긴 변한 듯 합니다..

2021/08/22

왕의 밥상 - 함규진 : 별점 3점

왕의 밥상 - 6점 함규진 지음/21세기북스

부제는 '밥상으로 보는 조선왕조사'.
제목처럼 조선 시대 왕들이 먹었던 식사와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알려주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는데, 이를 통해 여러가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알 수 있었습니다. 브리아 샤바랭이 말했던 "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네가 먹는 게 무언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마" 가 허언이 아니라는걸 새삼 깨달았네요.
대표적인게 세조의 예입니다. 세조는 술을 좋아하고 주량이 남달랐다고 하니까요.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호전적인 성격답습니다. 종친 중 가장 어른으로 영향력이 상당했던 양녕대군이 수양대군 편에 섰던 이유도, 호탕하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천하의 호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니, 술을 좋아한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역사에서 보기 드문 한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종도 식사를 통해 할아버지 세조와 다른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종은 수랏상 음식 양이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철선과 감선을 자주 했다는 점에서, 문치주의를 국정 기조로 삼았던 학구적인 왕이었다는게 드러나니까요. 그런데 성종이 서병이라는 병을 고질적으로 앓았던게 문제였습니다. 서병에는 찬 음식이 독과 같아서, 검소한 식단을 구성하고 물 말은 밥을 많이 먹은게 명을 재촉했던 거지요. 할아버지처럼 술은 좋아했고, 여색도 심하게 탐해서 병치레도 잦았고요.
성종의 아들 연산군은 그 식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에서 소고기는 대부분 더 이상 농사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늙은 소의 고기였다고 하는데 연산군은 소의 태아를 즐겨먹었다고 하니까요. 연산군의 강했던 왕권도 새삼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요.
연산군에 대해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당연히 왕권도 약해서 연산군만큼 막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슴 꼬리나 노루 새끼, 사슴의 혀와 같은 진미는 포기하지 못했다니, 식탐만큼은 이복형 못지 않았던 셈입니다.
광해군은 편식이 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네요. 이를 통해 독선적이고 고집이 셌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중간이 없었던 셈인데, 그래서 당파간 세력 다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게 아닐까요?
효종은 북벌을 결심했던 만큼 무인 기질이 강했고, 그래서인지 술을 좋아했고 식탐이 많았다는 사료가 많습니다. 세조 스타일인 셈입니다.
영조는 장수와 오랜 집권 기간을 누린 군주답게, 철선과 감선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게 재미있네요. 왕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 처럼 보여서 신하들이 알아서 기게 만든거지요. 절대 왕권을 내세우거나, 특정 당파를 밀어주는게 아니라 신하들이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참으로 현명했다 싶어요. 게다가 이 철선과 감선이 과식을 막고, 결과적으로 장수를 누리게 했기에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반면 정조는 영조의 밥상 정치를 흉내내었지만 건강도 함께 챙긴 할아버지의 현명함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감선하면서 업무의 강도는 그대로였으며 편식도 심해서 건강을 해쳤고, 이씨 왕조 핏줄답게 술은 좋아했던데다가 담배까지 즐겨서 결국 천수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담배는 백해무익하다고 멀리했지만, 매독으로 사망한걸 보면 여색을 탐한 것으로 보이고요.
고종 때에는 외국 문물이 들어와 마구 섞이고, 왕실 권위가 떨어져 궁중 법도도 흔들렸던 시기라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종이 돌이 든 밥을 먹다가 이빨이 부러지는 사고까지 있었다니 놀랍네요. 고종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는데, 직계가 아닌 탓이었을까요? 조금 궁금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식탐이 있었고 술을 좋아했으며 여색을 탐했던 왕들이 많은데 확실히 피는 못 속이나 보네요.

이러한 왕의 밥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 뒤에는 실제 왕의 수랏상에 올랐던 여러가지 음식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단순한 수랏상 소개를 넘어서서, 언제 어떤 요리를 먹었는지, 음양오행과 의식동원의 원리는 무엇인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아주 높아요. 조선 왕들은 그렇게 화려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건 새롭게 다가왔고요. 곰발바닥, 제비집같은 희귀한 재료도 없고, 세간에서는 못 먹고 왕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유밀과 정도만 사치를 금하는 의미에서 민간에서 먹지 못하게 했을 뿐이거든요.
이유는? 나라가 가난했던 탓은 아닙니다. <<청성잡기>>나 <<전집>> 등의 사료에서 한양의 양반 대가들이 사치스러운 요리를 먹는 행태를 알려주고 있는걸 보면 말이죠. 저자는 그 이유를 조선의 궁중 요리 조리법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치스러운 재료보다는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사들의 손이 무척 많이 가면서, 재료들의 맛이 조화를 이루게 만든 평범한 음식이 조선의 궁중요리이기 때문이라면서요. 평범하면서도 은근하게 멋스러운, 조선백자의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의식동원에 대한 설명은 지나친 감이 있네요. 그냥 논문 한 편을 수록해 놓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왕의 밥상에 사용되기는 했지만, 의식동원 자체는 왕의 밥상을 통해 관련된 역사를 논한다는 취지와는 동떨어진 내용이었고요.
그래도 독특한 미시사 서적으로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모두 높은 좋은 책이라는걸 부정할만한 단점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큐멘터리 영상물로 제작된다면 좋겠습니다.

2021/08/21

그리고, 또 그리고 1~5 - 히가시무라 아키코 / 정은서 : 별점 4점

그리고, 또 그리고 1 - 10점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정은서 옮김/애니북스

일본의 순정만화가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자전 만화.

저는 만화가가 그린 자기 이야기는 무조건 재미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화의 길>>이라던가 거장의 단편 <<종이요새>>과 같은 고전은 물론, <<아오이 호노오>>, <<만화가 상경기>>, <<바보도 따라할 수 있는 만화 교실>> 등 만화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대부분의 작품은 제게 실망을 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전기 만화인 <<블랙잭 창작 비화>>, 아니면 만화가가 주인공인 <<호에로 펜>>, <<바쿠만>>이나 <<만화가의 사랑>>같은 픽션들도 본전치기 이상은 충분했고요. 
이 작품도 제 지론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작입니다.

고등학교에서 미대를 진학하여 졸업하고, 순정만화가로 데뷰하기까지의 삶에서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화실 선생님인 은사 히다카 켄조 선생과의 이야기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그리고 있는데,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대를 목표로 했던 미야자키 소녀 아키코의 입시 분투기, 대학에서 방탕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며 만화가를 꿈꾸던 시기의 이야기, 만화가로 데뷰한 뒤 켄조 선생이 폐암으로 죽을 때 까지의 이야기로요. 히가시무라 아키코라는 작가가 미대에 진학하여, 만화가를 꿈꾸다가 데뷰하여 만화가가 되는 과정에 중요했던 인생의 변곡점만을 콕 찍어 그려낸 거지요.

이 중 초반부를 담당하는 입시 분투기와 헐레벌레한 대학 생활 이야기는 굉장히 웃겼습니다. 수험 공부가 아니라 문제 푸는 비결을 터득하여 고득점을 기록했다던가, 단지 게가 먹고 싶어서 가나자와 미대에 지원했다던가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이 많은 덕분이에요. 입시 대응 전략은 <<수험의 제왕>>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제가 미대를 다녔기에 더 와 닿는 이야기였습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풀자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빠져있었던 고등학교 당시의 저는 갑자기 미대 진학을 결심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 겨울 방학에요. 그런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내렸던 충동적인 결정이었지요. 그래서 1년도 안 되는 짧은 미대 입시 준비 기간을 가졌었지만, 정말 운 좋게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바로 입학할 수 있었지요. 평생 운을 거진 다 끌어 쓴 것 같아요.
그러나 정작 대학 입학 후에는 그 꿈을 바로 접었습니다 너무 힘들다는 걸 금방 알아버렀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학교 4학년 내내 놀았던 기억 밖에는 없네요. 충동적인 대학 선택과 유흥과 음주밖에 기억에 남지 않은 대학 생활 모두가 이 책에 나오는 히가시무라 아키코와 똑같습니다... 미대에 대해 작가가 말한 아래의 비판은 정확합니다! 미대생 학부형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대학 졸업 이후 나름의 좌절을 겪다가 만화가가 되는 과정은 담담하게, 진지한 톤으로 전개됩니다.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많은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당시 자기는 핑계만 대며 도망치기만 했다는 아키코의 후회섞인 고백이 특히 그러했어요. 저도 많이 반성하게 만드네요.
그림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줄 알고 대했던 그림 바보 켄조 선생과, 현실과 타협한 속물인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갈등도 재미 요소였고요. 사실 미대 진학에 성공한 뒤에도, 켄조 선생이 아키코에게 집착하여 그림을 강요한건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키코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건 은사 켄조 선생님 덕분인건 분명해요. 수백장, 수천장의 그림을 그렸고, 그림과 만화와 삶에 대한 고민을 어린 나이에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림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줄 알았던 그림 바보인데, 그 순수함과 열정은 정말 놀랍고, 이런 분을 어린 시절에 만나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은 아키코가 너무나 부럽기만 합니다.
켄조 선생이 폐암으로 별세하면섣, 끝까지 '그려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큰 울림을 가져다 줍니다. 켄조 선생님 장례식까지 담담하게 그려나가다가 마지막에 눈물샘을 터트리는 전개도 효과적이었고요. 죽는다는걸 알고 읽기는 했지만, 정말 뭉클했어요.

켄조 선생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아키코를 휘둘렀고, 아키코도 지나치게 죄의식이나 후회를 갖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묘사는 다소 아쉽지만, 재미와 성장기 측면에서, 그리고 감동 측면에서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2015년 만화 대상을 수상했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미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특히 미술 대학 쪽과 관련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도베르만 형사를 그렸던 하라마츠 신지의 <<극도 만화가 이야기>>는 제 지론이 틀렸던 실패작이었습니다. 만화가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그려낸 자전 만화인건 분명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억지스러운 마쵸 세계관 설정이 삽입된 기묘한 판타지가 되어버렸지요.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졸작으로, 연재도 조기 종료된 듯 하더군요. 다행히 우리나라에 정식 발매되지는 않았습니다.

2021/08/20

홍순민의 한양읽기 : 궁궐 - 홍순민 : 별점 3점


서울과 도성, 궁궐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서적. 궁궐 중심의 미시사 서적이라기 보다는, '답사기'에 가깝습니다. 저자 개인 시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요.

그래도 조선 궁궐 역사에 대한 설명만큼은 확실합니다. 조선 창건 당시, 현재 위치에 도성을 짓게 된 연유에서부터 시작하여 온갖 세세한 궁궐 관련 정보들을 총 망라하고 있거든요. 덕분에 우리나라에 궁궐이 왜 그리도 많았는지, 궁궐은 어떤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경복궁, 경운궁, 경희궁, 창경궁, 창덕궁의 5개 궁궐별로 각기 그 역사와 구조, 현재를 따로 설명해 주는 것도 아주 좋았어요. 특징적인 건물과 구조물 하나하나를 콕콕 집어 설명해주기 때문에, 실제 궁궐을 찾지 않아도 답사하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현재와 사뭇 달랐던 과거의 궁궐 모습을 잘 알려주는 옛 사진과 사료들, 그리고 현재 궁궐의 모습이 어떤지를 충실하게 알려주는 도판도 수준급입니다. 현재의 모습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듯 한데, 모두 설명에 딱 들어맞는건 물론, 저자가 특히나 강조하는 초라한 현재를 알려주는데 부족함이 없었어요.

하지만 답사기스러운 부분이 조금 아쉽더군요. 특히 초라한 현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조금은 부당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저자의 아쉬움은 충분히 동의합니다. 이왕 복원할 거라면 제대로 시간을 들여 복원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들이고, 현재의 모습도 변화한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의 일부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비판보다는 좀 더 미시사스러운, 객관적인 정보 전달을 해 주는 책을 기대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재미있던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8/15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유성운 : 별점 1점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4점
유성운 지음/이다미디어

총 6장 구성으로, 이런저런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걸 알려주는 역사서
신라 4대왕 석탈해의 다파나국은 캄차카반도인가?, 고대 남부 한반도 왜의 위치는 한반도 남부를 포함할 수 있다, 처용은 페르시아 왕자일 수 있다, "金을 왜 금이 아니라 김이라고 읽게 되었나?, 왕건의 호남 차별론은 사실인가? 등 목차만 보아도 흥미로우며, 재미있는 내용도 많았습니다. 다양한 사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구성도 좋았고요. 도판들도 빼어나며 특히 제목처럼 지도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소개하자면, 金을 김이라고 읽게 된 이유입니다. 원래는 조선 왕가와 관련된 음양오행설 때문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최근 설은 수, 당 시대만 해도 '금'에 가깝던 발음이 5대 10국을 거치며 '김'에 가까운 발음으로 변했기 때문이라는군요.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몽골 상류층 이름에 金이 많아서 발음 변화가 퍼졌다는 설인데 꽤 그럴싸했어요.
왜 중국의 왕조들이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이른바 '실용적인 외교'를 잘 했기 때문이라며, 대표적인 예로 서희가 거란과 강동 6주를 얻어낸 담판을 들고 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국교를 위해서는 여진이 머무는 압록강 일대 확보가 필요하니, 그걸 달라는 요청이었다면서요. 하지만 당시 고려군은 이미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말 만으로, 외교만으로 평화와 땅을 얻어낸건 아니지요. 이게 적합한 예인지는 아리송합니다. 이 보다는 항복하러 몽골로 향하던 고려 태자 왕전이, 몽케 칸이 급작스럽게 죽자 후계자 후보 중 쿠빌라이에게 미래를 걸었던 행동이 더 좋은 예가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자료와 소문을 수집했다 하더라도 이건 순전히 '감' 이었다고 생각은 됩니다만...
고려 말, 토지 개혁을 외치며 건국했던 건국 공신들이 결국은 자기들 잇속을 챙겼다는 이야기는 씁쓸했습니다. 공신 조준이 받은 표지는 현재 기준으로 약 124만 7,300평이나 된다니까요. 고려에서도 최고의 권문세족 가문이었던 조준이 혁명에 동참했던건 다 이런 이유가 있던 거지요. 왠지 청렴한 학자일 것 같은 퇴계 이황도 무려 36만평이 넘는 땅부자였다고 하니, 돈이 없으면 성공 못하는 세상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것 같네요.

이외에도 17세기, 전 세계를 강타했던 소빙기 한파로 조선이 입었던 피해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부분이라던가, 조선에서도 서울 주택 가격은 100년 동안 10배 가량 뛰었다는 등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큽니다.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게 본인 생각이 많이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도공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이 일본에 남은건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이 조선에 남았더라면 이런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시각이에요. 당시 끌려간 포로 일부는 조선 귀환을 거부했다는 사료를 토대로, 조선이 문제였다고 마무리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이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는 논리하고 똑같죠. 애초에 왜 끌려갔는지를 망각한 망발이었습니다.
이러한 친일적 시각은 왜의 위치에 대해 분석하며, 그들이 실제로 가야와 신라 이남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 보는 내용 등에도 진하게 묻어 나옵니다.
아울러 역사적 상황이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다며 추가한 저자의 개인 의견들도 마찬가지에요. 한국사 도감에 이런 내용이 들어갈 이유도 없고, 그나마도 한 쪽에 치우쳐진 개인적인 시각이라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신진 사대부를 강남 좌파에 비유하는 정도에서 그쳤다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이런 내용이 포함된줄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알았다면 절대로 읽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좋은 부분도 많지만, 단점이 너무 컸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서로 볼 수 없으며, 권해드리지도 않습니다.

2021/08/14

사일런트 페이션트 -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 남명성 : 별점 3점

사일런트 페이션트 - 6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해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리 상담사 테오 파버는 그로브 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화가 앨리샤 치료를 맡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의자에 묶인 남편을 총으로 사살했고, 그 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화상인 <<알케스티스>>만 남겼을 뿐이었다. 앨리샤와의 첫 면담에서 그녀는 테오를 폭행했지만, 이윽고 그녀도 테오에게 마음을 열며 자신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테오는 그녀의 형부인 맥스, 사촌인 폴, 친구인 장 펠릭스 등과 만나서 얻은 정보와 일기장 내용을 조합하여, 그녀의 정신병의 원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냈던 교통사고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이런 치료를 통해 앨리샤는 다시 말문이 트였다. 그리고 테오에게 남편을 죽인 사람은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고 말해주었지만, 테오는 물론 병원장 디오메디스 교수 등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앨리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는데...

영국을 무대로 한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서술 트릭이 사용된 추리물.
앨리샤 시점에서 사건 전부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까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테오 시점에서 테오가 앨리샤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아내 캐시의 불륜을 알고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과정이 뒤섞여 전개되는데, 앨리샤의 일기는 사건 전부터이므로 과거 시점입니다. 당연히 독자들은 테오 시점의 묘사는 모두 현재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하지만 테오 시점의 묘사는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었다는게 사용된 서술 트릭의 핵심입니다. 테오가 앨리샤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만 현재에요. 아내 캐시의 불륜을 의심하다가 뒤를 밟고, 결국 불륜남의 집을 덮치는 이야기는 모두 앨리샤 일기와 동일한 과거 시점이지요. 그리고 앨리샤와 테오의 과거는 서로 만나게 된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엘리샤 일기 속 정체불명의 남자이자 진범은 테오였던거지요.
화자별로 병행 전개되는 이야기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걸 숨기다가, 마지막에 드러내면서 반전으로 이어지는건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한 명의 화자 시점의 이야기지만 시간이 다른 이야기 두 개가 진행되는 이야기라는건 <<통곡>>으로 이미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섞어서 진행하는 작품은 처음 읽어 봤네요. 전개가 절묘해서 독자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트릭을 알고 나서 돌이켜보면, 두 이야기가 전혀 섞이지 않게끔 확실히 구분되어 있을 뿐더러, 캐시 이야기에서의 테오는 명백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식으로 나름 서술 트릭에 대한 단서도 제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을 수 밖에 없었어요.

또 남편에게 배신당한 뒤 말을 잃은 알케스티스 공주 이야기는 단순히 상징인줄 알았는데, 그게 앨리샤에게 실제로 닥쳤던 일이었다는 진상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테오는 앨리샤의 남편 가브리엘이 아내 캐시의 불륜남이라고 확신하고, 집을 덥쳐서 앨리샤와 가브리엘을 포박한 뒤 가브리엘에게 누굴 살릴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지요. 이 때 가브리엘이 자기를 살려달라고 이야기한게 앨리샤의 과거 - 어머니와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앨리샤가 죽었어야 했다고 절규했던 - 상처를 헤집어 폭발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테오가 사랑을 비웃으며 떠난 뒤, 앨리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가브리엘도 죽인거지요.
맥스, 폴, 장 펠릭스 등 앨리샤 주변 인물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앨리샤의 일기 내용도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앨리샤가 테오를 처음 만났을 때 공격했던 이유는, 테오가 침입자였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은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하지만 조금 과장된 심리 묘사와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많다는건 아쉽네요. 두 화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 (특히 앨리샤) 모두 수상하고, 비정상적입니다.
앨리샤의 일기도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며 흥미를 더해주는건 맞지만, 그냥 읽으면 혼란스러워요. 명백한 사실은 테오가 앨리샤 집을 감시하다가 침입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 뿐입니다. 그 외의 내용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잘 모르겠거든요. 증거도 일기 외에는 전무하고요. 피해망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일기를 읽고 당사자들을 찾아가서 추궁하는 테오에게 거의 모두가 사실을 털어놓는다는건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적이 있다고 일기장에 쓰여있다며 테오가 크리스티안을 추궁할 때 처럼요. 크리스티안은 그로브에서 앨리샤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입니다. 앨리샤가 자신이 아는 정신과 의사 이름을 대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왜 생각해보지 않은걸까요? 테오야 지은 죄가 있으니 앨리샤의 모든 증언을 믿는다 쳐도,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침입한 이후 가브리엘을 죽인게 테오인지 앨리샤인지, 캐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건 맞는지, 그 불륜 상대남이 가브리엘이 확실한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테오의 심리 상태도 극히 불안하고, 마리화나도 피우는 탓에 1인칭 시점 묘사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이니까요.

테오가 앨리샤의 입을 막기 위해 약물 과다 복용을 위장하여 피하 주사를 놓아 죽이려 했다는 결말도 석연치 않습니다. 앞서 테오가 이끌어 내었던 앨리샤의 증언 - "앨리샤는 범인이 아니고, 그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범인" - 은 디오메디스 교수 등을 통해 부정됩니다. 그냥 봐도 제 정신으로 한 증언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정신병이 있는 환자의 이 정도 증언따위가 테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 증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테오라고 주장한다는건 인정될리 없습니다.
뭐 앨리샤의 말문이 트인게 위협이라고 생각되어 살의를 품었을 수는 있습니다만... 구태여 피하 주사 자국을 찾았다는걸 밝힐 필요는 없었습니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타살이라는걸 부각시켜 얻을게 별로 없지요. 혐의를 크리스티안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크리스티안이 과거 앨리샤를 진료했다는걸 숨겼다는게 살인 동기라는데, 이를 증명하는건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앨리샤의 증언과 일기장은 실체는 남아 있지 않았고, 오로지 테오의 증언만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티안을 옭아매는건 무리였다 생각됩니다.
앨런 형사가 일기장을 찾았다며 테오를 찾아와 그가 범인이라는 페이지를 읽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리샤의 몇 안되는 짐에서 일기장을 찾지 못하고 경찰에게 빌미를 준 테오의 행동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일기가 증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녀의 증언은 이미 정신과 의사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는데, 일기가 진실일 이유는 없잖아요. 일기는 굉장히 설득력있게, 잘 정리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일기 전체가 거대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최소한 테오가 범인이라는걸 밝히기에는 많이 부족했어요. "열심히 치료해 주었는데, 뒷통수를 맞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테오의 주장을 뒤집긴 힘들었을겁니다.
캐시가 연극도 포기하고, 정크 푸드만 먹는 돼지가 되었다는 결말도 불륜남 가브리엘이 죽은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 너무 비정상적인 심리 묘사가 많고, 결말이 석연치 않아 감점하지만 아이디어도 좋고 전개도 일품인 만큼, 색다른 추리 스릴러를 찾으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8/08

빛의 현관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2.5점

빛의 현관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품이 꺼진 뒤 몰락해버린 건축업계에서 친구 오카지마의 도움으로 겨우 설계일을 이어나가던 아오세는, 의뢰인 요시노로부터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평생의 걸작인 Y주택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요시노 가족이 Y주택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아오세는 그들의 행적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옛 유명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존재가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는걸 알아채는데....


원제는 <<노스라이트>>. 2020년에 발표되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신작입니다. 2020년 당시, 온갖 순위를 휩쓴 작품이지요. '202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국내편 2위, '2020 주간문춘 베스트 미스터리' 1위, '202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2위 등을 차지했었습니다.

건축가가 주인공인 추리 소설은 보기 드뭅니다.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건물들이 사건의 무대가 되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건축가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는 없고, <<낯선 승객>>은 주인공 거이가 건축가지만 내용은 건축과는 무관했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아오세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인 Y주택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심혈을 기울인 Y주택에 의뢰인 가족이 이사오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하며 직접 찾아 나선 설정과 동기는 지극히 건축가스러웠어요.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외국인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설명들은 나중에 아오세가 건축가로 더욱 성장하여 미술관 공모전이라는 큰 도전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아오세의 가족 복원에도 도움을 주고요. 이 정도면 건축가가 주인공이며, 건축물이 주요 소재인 추리물이라고 하기 충분하겠죠.

물론 주인공 아오세가 평범한 건축가인 탓에 대단한 추리력이나 수사력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일반인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수사와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꽤 괜찮았어요. 요시노 가족을 찾을 때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 가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진품이 희귀한 덕분입니다. 그래서 요시노 도타라는 의뢰인의 뿌리를 알아내는 과정도 타당했고, 아오세가 브루노 타우트를 알아가는 과정은 독자도 함께하는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Y주택을 짓게 된 의뢰는 요시노 가족이 아니라, 이혼한 전처 유카리의 바램에서 비롯되었다는 진상을 알아내는데까지의 전개도 자연스럽습니다. 아오세와 유카리가 함께 살 때 이야기했던 내용을 복선처럼 앞에서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따뜻한 가족 관계의 복원을 암시하는 마무리는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저는 해피 엔딩을 좋아하니까요.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재이며 가족 관계 복원의 핵심인, 이른바 '노스라이트'를 끌어들여 빛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는 Y주택에 대한 묘사도 엄청납니다.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어요. 드라마화 된 영상물에서의 모습은 생각보다 작고 볼품없는 모양새라 실망스러웠지만요.




2020년 발표작인데, 아오세와 주변 인물들이 버블로 몰락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특이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극초반을 무대로 하고 있는 탓으로, 이 시기가 무대인건 1930년대 일본에 잠깐 머물렀던 브루노 타우트와 등장인물들이 연결점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1930년대 당시 브루노 타우트를 어린 나이에 만난 뒤, 요시노 이사쿠는 타협없는 깐깐한 장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상황을 목격했던 90대의 야마시타 구사오가 살아서 아오세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시노 도타는 요시노 이사쿠의 손자라고 설정해도 되고, 야마시타 구사오의 증언도 일기나 편지 등의 형태로 남아있었어도 무리는 없었을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아오세가 버블 경제의 쓴 맛을 톡톡히 보았다는 설정을 위해 이 시기로 무대를 설정했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하여튼, 이렇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아주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광의의 미스터리'로 볼 수는 있지만, 정통 추리 소설은 아닌 탓이 가장 커요. 요시노 가족의 실종을 추적하는 과정만큼은 추리 소설인데, 진상이 드러나는건 뒤에 다시 설명드리겠지만 결국 주요 등장인물들의 증언이 전부니까요.
요시노 가족의 실종이 아오세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요시노 도타의 아버지 이사쿠와 아오세의 아버지가 구관조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다가 아오세의 아버지가 절벽으로 추락사했던 과거의 속죄를 위해서라는 설정부터가 그닥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요시노가 아버지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3천만엔의 거금을 쓴다는건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딱히 대단한 애정을 품지 않았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살아 생전 듣지 않았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거금을 쓴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지요.
등장인물들이 서로 인연을 더듬게 되는 이유도 '아오세', '요시노'라는 성이 특이하다는 탓이 큰데,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강했고요.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오세라면 모를까 요시노가 그렇게 특이한 성은 아니지 않나요? 유명한 규동 체인점 이름도 '요시노야'인데....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온갖 순위를 휩쓸었는데에도 불구하고, '2020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걸로 짐작됩니다.

브루노 타우트 비중이 너무 크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작 중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 타우트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부분 등은 읽으면서도 한편으로 타우트의 작품을 계속 찾아보게 만들게끔 잘 쓰여져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타우트와 그의 작품들이 이야기에 꼭 필요했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요시노 이사쿠가 브루노 타우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장인이라는게 이 작품에서 유일했던 브루노 타우트의 존재 이유인데, 자존심으로 버티는 장인이 딱히 그런 공예가일 필요는 없잖아요? 이런 장인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가 Y주택에 남아 있던 덕분에 요시노 이사쿠의 과거가 일부 드러나게 되지만, 이 역시 사건을 밝히는데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쳐지나가는 오카지마의 말이 진상을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되지요. 탐정이 아오세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이었는데, 아오세는 이를 통해 탐정을 이용하던 요시노가 전처 유카리를 직접 만났다는걸 알아냅니다. 그리고 유카리가 직접 요시노의 의뢰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요. 그 뒤 목적이 아버지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였다는건 아오세가 요시노로부터 직접 듣게 됩니다. 이렇게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증언으로 밝혀져서, 추리도 무의미할 뿐더러 브루노 타우트 엮일 이유는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브루노 타우트와 연인 에리카의 관계도 확대 해석한 느낌이고요.
이런 점을 보면, 작가가 큰 감동을 받은 브루노 타우트를 어떻게든 끌어들여 작품을 쓰려고 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네요.

아울러 전체 분량의 2/3가 지난 시점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이어지는, 아오세가 근무하는 오카지마 건축 설계 사무소 이야기는 앞서의 요시노 가족 실종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뿐더러, 너무 뻔했습니다. 대단치 않은 부정 - 택시비 대납 - 탓에 궁지에 몰린 오카지마가 사고로 죽은 뒤, 그가 남긴 설계안을 바탕으로 사무소 직원들 모두가 힘을 합쳐 공모안을 완성한다!는 내용은 철지난 열혈 청춘 드라마와 다를게 없으니까요.
게다가 아오세를 중심으로 한 직원들이 공모안을 완성시킨 뒤, 이를 공모전에 참여하는 대형 건축 사무소의 소장 노세에게 가져간다는 결말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설계안은 무상으로 넘기고, 이름 올려달라는 말도 안 할테니 나중에 오카지마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지은 건물이라고 말하게 해 달라? 대체 뭘 위한 노력이었을까요? 뻔한 열혈 청춘 드라마도 요새 이렇게 쓰면 욕을 먹을 겁니다. 이미 인생에서 쓴 맛을 여러번 겪었을 아오세가 한 말이라는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보다는 오카지마는 죽었지만 공모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남은 직원들이 힘을 합친 결과물이 선정된다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후지미야 하루코의 유족이 오카지마를 지지했다는 설정은 남아있는 만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오카지마의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었다던가, 마유미와 오카지마의 은밀한 관계 등은 구태여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가족간의 애정은 꼭 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조금 더 세련되게 풀어냈어야 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입부는 흥미로왔고, 건축 관련된 묘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족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가 만드는 메시지도 뭉클했고요. 그러나 브루노 타우트에 관련된 내용 비중이 지나치고, 클라이막스와 결말은 뻔하고 납득하기도 어려워 감점합니다.

2021/08/07

산괴담 - 이토 준지 외 4인 + 아즈마 준페이 : 별점 2점

산괴담 - 4점
이토 준지 외 4인 그림, 아즈미 준페이 원작/미우(대원씨아이)

아즈마 준페이의 원작을 이토 준지, 이토 미미카, 이노카와 아케미, 이마이 다이스케, 요시토미 아키히토의 5인이 만화화한 단편집. 등산 중 일어났던 여러가지 괴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사토끼가 블로그에 연재하는 만화 소갯글을 보다가 꽂혀서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래의 소개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하나도 무섭지 않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 '괴담'일 뿐, 기승전결이 거의 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요. 비슷한 설정이 많다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원작자 솜씨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마사토끼가 무섭다고 했던 첫 번째, 네 번째 이야기가 그나마 볼 만 했을 뿐입니다. 그나마도 과연 만원이라는 가치에 어울리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만, 한없이 1.5점에 가깝습니다. 마사토끼의 소개가 훨~씬 재미있었어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이야기. 이토 준지.
H다케 일출 산장에 관리인과 3명의 등산객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며칠 전 일어났던 기묘한 조난 사건에 대해서였다. 노련한 등산객이었던 50대 여성이 등산로에서 제법 먼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젊은 등산객과 사진 작가가 각각 자기들이 등산 중 만났던 괴이한 남자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데...
호러 킹 이토 준지 작품이라 기대했었는데,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작품. "등산로에서 얼굴에 증오심을 한껏 드러낸 괴이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가 한 명이면 왔던 길을 되짚어 도망갈 수 있었지만 두 명이면 어쩔 수 없이 등산로를 이탈하여 도망가다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별로 무섭지가 않았던 탓입니다. 전개도 뻔했고요. 이토 준지다운, 괴이한 남자에 대한 묘사만큼은 볼만 했습니다만 기승전결이 있는, 완성된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우며, 전체적인 수준도 그닥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뻔하더라도 일출 산장에 모였던 사람 중 한 명이 그 남자였다! 아니면 이야기를 끝내자 산장 문을 열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같이 마무리하는게 훨씬 나았을거에요. 문으로 들어오면 도망갈데가 없으니...

두 번째 이야기. 이마이 다이스케.
T대학 산악부는 1년 전, 신입인 코이즈미를 구하려다 실종된 리더 추모 등반에 나섰다. 그날 밤, 산장에 급작스러운 눈보라가 몰아쳤고, 누군가 코이즈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년 전 죽은 리더가 코이즈미를 계속 찾다가, 코이즈미의 괜찮다는 말을 듣고 안심한채 성불한다는 이야기. 괴담은 아닙니다. 뻔하디 뻔한 감동 신파극에 가깝달까요. "오겐키데스카~"와 별다를게 없거든요. 전혀 무섭지 않은건 당연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이토 미미카.
3-1 : 버섯 채집을 나선 아즈미와 타키가와. 버섯 채집은 실종자가 많이 발생하는 위험한 산행이었다. 송이버섯에 정신을 빼앗긴 아즈미는 길을 잃고 말았다. 헤메던 중 폐허가 된 리프트를 발견하는데...
3-2 : 아즈미는 등산 중 급작스러운 악천후로 휘테로 향하던 중, 지친 등산객과 만났다. 그리고 휘테에서, 그 등산객이 이미 죽어있는걸 알게 되는데...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뻔하고 별로 무섭지 않다는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앞서의 이야기가 조금 더 낫기는 합니다. 아쉽지만 리프트가 사람을 홀려 죽게 만든 뒤, 망자를 태우고 움직인다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풀어냈더라면 괴담으로서는 꽤 쓸만했을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너무 짧고, 결말도 시시해서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 요시토미 아키히토.
10년 전, 곤들메기를 잡기 위해 산행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 누군가 먼저 텐트를 쳐 놓은 것을 발견했지만, 텐트 주인은 자러 들어갈 때 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으니 옆 텐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두 자기가 사고로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사토끼가 무섭다고 한 또 다른 이야기. <<이트맨>>, 등의 작가 요시토미 아키히토의 작품. 그다지 무섭지 않다는 점에서는 다른 작품들과 똑같지만, 그래도 기승전결이 있는 완결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조금 낫긴 합니다. 특히 '나'가 텐트를 친 곳 바로 옆 텐트에 귀신들이 모였던 이유가, 텐트를 친 곳이 물살이 잔잔해져 조난자들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괜찮았어요. 무언가 타당한 이유를 대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였습니다. 확실히 단편으로 단련된 작가는 다르네요.

다섯번째 이야기. 이노카와 아케미
5-1 : 아즈미는 오래 전, 겨울에 카미코우치에 들어가면 K다이라 캠핑장에 있는 화장실은 사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선배로부터 들었다. 화장실 거울을 봤을 때 목이 없으면, 사고로 목이 날아간 시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배도 K다이라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화장실 거울을 본 것일까?
5-2 : 신주쿠발 급행 '알프스'를 타고 북알프스로 향할 때, 파란 비옷을 입은 청년을 만났었다. Y다케에서 청년이 알려준 흑백합 군락지를 찾았는데, 그 곳에서 청년의 시체를 발견했다.

세 번째 이야기처럼 두 편의 짤막한 괴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조금 더 낫다는 것도 똑같네요. 곧 죽을 사람은 목이 잘린 채로 보이는 거울이 있다는 설정이 꽤 흥미로왔거든요. 물론 단순한 괴담이고, 결말도 시시한 편이라는 단점마저 같다는건 문제지만요.
뒤이은 이야기도 이미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드라마라는 비슷한 설정을 반복할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8/06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 이홍이 : 별점 2점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4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이홍이 옮김, 최재훈 그래픽/알마

축제에서 금붕어를 손에 넣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본인 몸도 난자하여 자살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손녀 아키라는 심한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사건 취재 차 마을을 찾은 르포 기자 사쿠라이는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고교생 아마노를 만났고, 취재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나루미는 남편 신지가 축제에 갔다가 금붕어 하나를 가진 채 병원에 입원한 뒤, 신지가 이전 남편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걸 알아챘다.

사람들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인 아마노와 아키라가 만나서 지구 정복을 계획하고, 이를 막기 위해 사쿠라이는 나루미,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신지는 나루미로부터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게 되는데...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SF 소설. 별다른 정보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는 정말 대박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할머니가 축제에서 낚은 금붕어를 집에서 '회'라고 하면서 산 채로 잡아 먹고, 그 다음날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장면까지요. 굉장히 짧은 분량 속에서 공포심과 흥미를 모두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후 중반부까지도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이른바 '외계인'들이 선보이는 독특한 능력 덕입니다. 외계인들은 대화하는 상대방이 특정한 단어의 이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면, 그걸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빼앗긴 사람은 그게 뭔지를 잊어 버리게 되고요. '개념'을 수집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데, 이를 통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루미의 동생 아스미로부터 신지가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아 온 뒤, 아스미가 가족에 대해 모든걸 잊고 아빠를 변태로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완전 별로였습니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 계획을 막기 위한 르포 기자 사쿠라이의 노력이 그려지는데, 하는건 외계인 아마노가 외계인 아카리를 만난 뒤 도망친게 전부거든요. 그밖에 하는 일들 거의 모두가 즉흥적이라 치밀한 느낌은 전무하고요.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신지를 다른 두 외계인과 못 만나도록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외계인들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인 나루미와 신지 이야기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 지루했어요. 사랑 이야기가 나쁜건 아닙니다. 저도 아주 좋아하고요. 하지만 나루미에게서 '사랑' 이라는 개념을 빼앗은 신지가 새롭게 태어나서, 나루미를 위해 살아갈 결심을 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황당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잔혹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이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라니,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어요.

핵심 설정인 "개념 빼앗기"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앞서 아스미는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가족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지요. 의사는 아예 폐인이 되어 버렸고요. 하지만 신지에 대한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멀쩡한 채로 신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을 바꾼, 편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수준 이하였습니다. 
차라리 <<기생수>>처럼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들의 냉혹한 행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전개가 더 나았을거에요. 선한 마음을 가진 신지와 개념 빼앗기에 골몰하는 아마노, 아키라의 행각을 대비시키면서요. "개념" 빼앗기는 <<죠죠>> 시리즈에 등장했던 스탠드 능력과 흡사한만큼, <<죠죠>>, 혹은 <<기억파단자>>처럼 두뇌 배틀처럼 그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고요.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이 핵심인 현재의 작품에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이었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야 재미는 있었을거에요.

2021/08/01

명탐정 코난 침묵의 15분 (2011) - 시즈노 코분 : 별점 2.5점


코난의 활약으로 지하철 터널 폭발 테러가 무사히 수습된 후, 코난과 유명한 탐정, 미란과 보라, 브라운 박사와 소년 탐정단 일행은 테러가 댐이 있는 북쪽 마을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뒤 조사 차 방문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초등학교 동창 사이라는 4명과 만난 다음 날, 트래킹 중이던 코난 일행은 동창생 중 한 명인 오대오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티빙으로 감상한 <<명탐정 코난>> 극장판 Vol 15. 무려 10년전 작품이군요. 휴가는 시작되었는데, 코로나로 딱히 갈 곳도 없기에 집에서 딸 아이와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아이랑 같이 보기 위해서 더빙판을 선택했고요.

솔직히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예상 외로 추리적으로 볼만한 부분이 많았던 덕분입니다. 피해자 오대오가 사람들에게 보여준 신문기사 스크랩의 접힌 면을 주목해서, 더 중요한 스크랩은 안 쪽에 있던 강도 살인 사건 기사였다는걸 알아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과 뺑소니 사건, 다비 사건을 엮어 신기루가 범인이라는걸 끌어내는 추리같은 부분이요. 미나가 안경대신 렌즈를 착용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꾼걸 유명한 탐정의 유혹 때문이라고 오해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다비가 의식을 되찾은 뒤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서 변장한 거라는 디테일도 괜찮았고요. 오대오 살인 사건에 사용된 아주아주 간단한 발자국 트릭도 추리 퀴즈 수준이지만 깔끔했습니다.
이야기도 잘 짜여져 있는 편입니다. 처음에 다비와 아이들을 쫓던 사람과 진짜 범인이 다르다는 진상이 대표적입니다. 오대오와 신기루가 댐으로 수몰된 지역 지도를 찾아갔을 때 코난과 잠깐 만났던 장면도 복선으로 활용되는 것 역시 잘 짜여진 구성의 한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코난 극장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액션도 화끈합니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터널이 폭파되고, 마지막에는 댐 폭파로 인한 수몰을 방지하기 위해 눈사태를 일으키는 식으로 스케일이 크거든요. 폭탄의 타이머도 15분, 눈사태에 묻힌 뒤 살아남으려면 15분 안에 발견되어야 한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제목도 마음에 들었고요.

물론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문제가 많기는 합니다. 폭탄 테스트를 위해서 터널을 폭파시킨다던가, 명탐정이 와 있는데 구태여 살인 사건을 저지른다던가, 수몰된 마을 집에 묻혀있는 100억대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 댐을 폭파시킨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게다가 폭탄의 테스트를 위해 지하철 터널을 폭파시킨다? 뭐하러요? 애초에 범인이 이 정도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전문가라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사건들 역시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미나가 동생을 밀쳤을 때 우연히! 동생은 길로 굴러 떨여졌고, 굴러 떨어진 미나의 동생을 지나가던 신기루가 우연히! 차로 치었고, 이 장면을 지나가던 다비가 우연히! 목격했다는 건데, 이런 상황이 겹칠 수 있을 확률은 10만분의 1도 안될거에요.

그래도 어린 아이들도 고려하여 만든 작품임을 감안해야겠죠. '아동용' 치고는 무난한 오락물로 재미와 추리 모두 나쁘지 않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망작이 많았던 코난 극장판치고는 그래도 본전치기는 했다고 봐야겠네요. 제 딸 아이도 좋아했습니다.

Vol 12 : 전율의 악보

Vol.11 : 감벽의 관

Vol.10 : 탐정들의 진혼가

Vol.9 수평선 위의 음모

Vol.8 은빛 날개의 마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