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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엔드 오브 왓치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엔드 오브 왓치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 컴비 홀리와 함께 사설업체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던 빌 호지스는 그가 췌장암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편, "메르세데스 킬러" 브래드 하츠필드는 재핏이라는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조종하는 능력을 손에 넣은 후 이 능력을 이용하여 세상과 빌 호지스에게 복수하려 한다.

재핏 게임기와 관련된 기묘한 자살 사건, 특히 제롬의 여동생 바브라에게 닥친 자실 미수 등을 접하며 빌 호지스는 사건의 이면에 브래디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지만 브래디는 담당 의사 배비노의 몸을 빼앗아 도주하고, 빌 호지스는 브래디의 음모를 막기 위해 생명을 걸고 마지막 승부에 나선다.


스티븐 킹의 빌 호지스 3부작 (요새 말로 트릴로지) 마지막 편. 이번에는 병원에서 신비한 능력을 얹은 1편의 살인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디 하츠필드가 재등장하여 빌 호지스와 숙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결말은 "끝"을 의미하는 제목 그대로고요. 시리즈는 정말 확실하게 끝나요.

일단 재미만큼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입니다. 그런데 다른 시리즈와 확실한 차이점은, 이 작품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1편은 2015년 에드거상 수상작답게 분명 추리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정교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죠. 2편은 빌 호지스 시리즈라고 부르기 민망할 뿐 범죄물로는 괜찮았고요. 허나 이번 편은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고, 외려 "싸이킥 호러 스릴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브래드가 손에 넣은 특별한 능력 - 염력과 재핏 게임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 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니까요.
물론 빌 호지스가 브래디의 능력을 알아내는 과정은 수사 비스무레한 절차를 걸치긴 합니다. 그러나 브래디의 능력이 상식을 초월했다는 것만 문제지 그의 행방과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은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해요. 몇가지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브레디의 담당 의사가 수상하다! 녀석을 쫓아가자! 그냥 이게 전부입니다.

허나 브래디의 능력이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된 것이 큰 다행입니다. 세상에 있지 않은 것을 있음직하게 그려내는 스티븐 킹의 특기가 잘 발휘되어 있거든요. 단지 능력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재핏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후 게임기를 확산시켜서 자살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준다는 음모도 아주 그럴듯해요. 이는 희대의 IT 전문가이자 정신병자 살인마인 브래디 캐릭터에도 잘 어울렸음은 물론, 재미의 핵심 요소로 잘 활용됩니다.
또 여러모로 열세였던 빌 호지스가 브레디의 최면 침투를 이겨내고 반격을 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앞부분에 사용되었던 커다란 벨소리라는 복선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은 정말이지 기가 막힌 명장면이었습니다! 너무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엔딩이지만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냥 통증 때문에 침투에 걸리지 않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를 위한 기지국 복선 역시 적절했고요.

다만 이 음모는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문제 투성이이기는 합니다. 왜 최면에 게임기를 반드시 써야 하는지가 가장 의문이에요. 그냥 화면을 들여다보고 탭하는 것으로 최면에 걸릴 수 있다면,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유도 하는게 훨씬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잖아요? 사이트 뿐 아니라 앱 형태로 뿌리면 갯수 제한이 있는 게임기보다 훨씬 넓게, 멀리 확산시킬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게임기라는 특정 조건이 꼭 필요한 것으로 설명되지도 못한 탓이 큰데, 조금 아쉽습니다.
아울러 브레디의 자살 전염, 전파 계획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좀 허무합니다.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 했던 살인마가 개개의 사람들 마음 속 빈틈을 파고들어 자살을 유도 한다는 것은 소박해 보이기도 하니까요. 피해자들이 주변인들을 죽이게끔 하는 장치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피해자가 고작 서너명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죠.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제롬의 비중이 등장이 적다는 것도 별로였어요. 이럴바에야 등장하지 않고 그냥 홀리와 빌 컴비의 활약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아요. 특히 이번 편에서 빌 캐릭터가 너무나 멋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통도 참아가며, 심지어 마지막에 오줌까지 싸 가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친구와 선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지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정말 멋진 올드 히어로거든요. 지금은 멸종해버린 서부영화 주인공인 셈이죠. 죤 웨인이 늙어서 형사 역할을 맡는다면 이련 역할이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여튼, 늙은 죤 웨인의 최후의 활약을 뒤로하고 젊고 잘생긴 신예가 마무리를 짓는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정교하지도 않고, 추리물로써의 가치는 낮지만 스티븐 킹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 책을 찾으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타임슬립이 무엇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빌 호지스 캐릭터가 정말로 멋지게 그려진 만큼 그의 젊은 시절 활약을 그린 프리퀄이 나와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7/10/22

걸 온 더 트레인 - 폴라 호킨스 / 이영아 : 별점 2점

걸 온 더 트레인 - 4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임으로 인한 알콜중독으로 이혼과 퇴사로 인생이 엉망이 된 레이첼의 유일한 낙(?)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 그리고 기차가 정차하는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레이첼은 부부 중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지는데, 뒤이어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인어 다크, 다크 우드>>와 동일한, 요새 유행하는 듯한 1인칭 시점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 영화화되었다는데, 영화화될 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전해줍니다. 사라진 메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였는지?가 전개 과정을 통해 계속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든요. 이 중 메건이 실종된 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의 기억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특히나 일품이에요. 레이첼이 메건을 죽인걸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이러한 전개가 모두 3명의 여성 - 레이첼, 메건, 애나 -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교차되는 전개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읽은 이런 류의 전개 방식은 보통 서술 트릭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았던 것에 반해, 이 작품은 애나가 톰이 거짓말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 애나가 톰이 숨겨둔 전화기를 찾아내는 장면 등 레이첼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을 보강해주는 장치로서, 또 톰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이유에 대해 레이첼에게 한 말과 애나 시점의 심리 묘사가 반대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첼은 모르지만 독자에게만 해당 정보를 살짝 알려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등 정직하게 전개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레이첼이 메건을 엿보며 "제스"라고 혼자 부르다가 갑자기 "메건" 시점으로 넘어올 때의 기묘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아울러 "일상계" 느낌이 가득하다는 독특함 역시 큰 장점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 (아니, 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현 상태만 보면 오히려 그 이하)인 레이첼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좌석의 기차를 타면서 똑같이 정차 하는 곳의 집을 쳐다보다가 사건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설정 부터가 아주 매력적이에요. 게다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사소한 사항에 불과할 뿐더러 사건의 진실과도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는 진상도 마음에 들고요. 우연히 찍은 사진에 거대 조직의 음모가 담겼다! 이런 것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범죄 스릴러냐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는데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리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작 중 레이첼이 벌이는 일종의 탐정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밝혀질 뿐이에요. 단지 메건 사건 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씩의 비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비밀들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메건의 비밀은 비교적 초반, 즉 심리치료사 카말과 면담 때 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철없을 때 낳았던 딸을 부주의로 잃었다는 것인데, 이걸 아는 사람은 헤어진 아이 아빠 맥 밖에 없으므로 본 사건과 관계가 있을리가 없으며, 심리치료사 카말이 이 것을 안다고 해도 딱히 뭘 할 리가 없으니까요. 레이첼이 술을 마시는 이유? 불임 때문에 알콜 중독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톰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본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요.
톰이 진범임이 드러나는 장면도 황당합니다. 메건 시점으로도 작품이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메건 시점의 마지막 날 범인은 밝혀지게 됩니다. 때문에 최대한 레이첼, 애나 시점에서 범인을 제대로 드러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정교한 맛이 없어서 설득력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결정적 단서는 애나가 우연찮게 발견한 톰의 또다른 휴대전화가 전부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왜 휴대전화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톰이 뜬금없이 둘 앞에서 "내가 범인이야. 놀랐지?"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죠... 이는 "톰은 거짓말을 잘한다"를 드러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범인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 탓이 큽니다. 레이첼이 필름이 끊겼을 때 톰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요.
이럴 바에야 레이첼 1인칭 시점으로만 작품을 전개하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메건과 애나 시점의 전개는 실상 본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장황한 묘사로 페이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이는 레이첼 시점의 묘사가 너무 많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고, 이혼에 대해 자책하고 항상 알콜 중독을 의식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도피처를 찾는 식인데 솔직한 심정으로 짜증 났어요. 무능력한데다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오지랖은 넓어서 쓰잘데 없는 사건에 뛰어들어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 자체니까요. 경찰 라일리가 그녀를 못견뎌하는게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 역할도 불가능한 인물이 탐정역을 한다? 어불성설도 유분수여야죠.
레이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 모두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에요. 메건? 남편 덕에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바람을 피면서 사람 가지고 노는게 취미인 유부녀로,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됩니다. 남자들은 더해요. 카말은 자신의 환자와 바람을 피는 부도덕한 심리치료사, 스콧은 의처증 가득한 정신병자, 톰은 거짓말을 일삼는 살인자라는 점에서 말이죠.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 애나, 그리고 "좋은 사람"은 레이첼의 친구 캐리가 유일할 정도로 작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 (아, 캐리는 거의 마더 테레사 수준입니다)

또 최근 접했던 이런 류의 여성 1인칭 시점의 스릴러물의 대부분이 "아이"와 "임신"이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도가 지나칩니다. 레이첼이 알콜중독이 된 이유는 그녀의 불임이고, 톰과 애나의 불륜과 재혼은 애나의 임신 때문이고, 메건의 불면증의 원인은 그녀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탓이고, 메건이 살해당하는 이유는 톰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고.... 모든 사건이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재미는 그냥저냥이나 최근 유행(?)에 편승한 작품으로 딱히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말이죠.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걸"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제목이 "걸 온 더 트레인" 일까요? 이 역시 미스테리입니다...

2017/10/18

150cm 라이프 1 - 다카기 나오코 / 한나리 : 별점 1.5점

150cm 라이프 1 - 4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한나리 옮김/시공사(만화)

작품이 있으면 읽어보곤 하는 일상 에세이툰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작품. 제목 그대로, 키가 작기 때문에 겪었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털어놓는 작품입니다.

언제나처럼 귀엽고, 생활 밀착형 에피소드들은 역시나 잔잔하니 좋긴 한데...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일단 제 자신이 키가 작은 편은 아니라서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별 관심이 없는 "패션" 관련 이야기 비중이 높은 탓도 큽니다. (약 2/5 정도?)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 옷에 대해 아는게 없는 저로서는 즐길거리가 별로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키가 작아서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분들이라면 모를까,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3권까지 출간되었는데, 저 역시 더 찾아볼 것 같지는 않네요.

덧붙이자면, 100여 페이지를 갓 넘을 뿐인데 정가가 9,000원이나 한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됩니다. 왜 이렇게 비싼거지?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 단편 8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러나 <<정신자살>>에서는 변격물적인 취향이 엿보였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더군요!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나름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죠.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몇몇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고 하다가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는 경찰에 순순히 체포되고,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하지만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이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이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 것이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너무 무리수였습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다는 것은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거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쉬웠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인 작품. 이 환상은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이유가 있다는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미묘한 소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요청하는 한 할머니의 의뢰가 접수된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상태...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다는 기묘한 사건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였습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그것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 (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리게 되었으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면 좋겠네요.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하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게 되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인 작품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할 뿐더러,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워스트로 꼽겠습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밖에 되지 않는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사건을 수임하게 된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어느날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한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듣게 되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이죠.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은 편입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고,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 것을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죠.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건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 타임 슬립을 다루고는 있는데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가지는 두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결말이니까요.
또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은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것이죠.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하더군요.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 것이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고 있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단,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게 된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오른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사건은 꼬여만 가서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 수준도 높은 편입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범주 안에 들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호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7/10/14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박연선 : 별점 2.5점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6점
박연선 지음/놀(다산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수생 강무순은 얼마전 할아버지를 잃은 할머니 감시 (?)차 시골 마을 두당리에 유배(?)된다. 아흔이 넘어도 건강한 할머니와 함께 익숙하지 않은 시골 생활을 보내던 중, 그녀는 우연히 15년 전 마을 소녀 4명이 한꺼번에 사라진 실종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게다가 15년전 할머니 집에 와 있던 강무순이 어떤 식으로든 실종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강무순은 마을의 유력자인 경산 유씨 종가댁 후계자 "꽃미남"과 함께 당시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게 되는데....

한국 작가 박연선의 작품. 이쪽 바닥(?)에서의 입소문이 제법이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유명 드라마 작가라고 하는데 드라마 원작은 아닙니다.

읽어보고 처음 든 생각은 입소문이 날 만 하다는 것입니다. 재미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고, 장점도 아주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면장면의 대사가 아주 찰지고 현란합니다. 흉내 내기 힘들 정도에요. 주인공 강무순이 억지스러운 시골 유폐 생활을 한탄하는 독백은 개중에서도 백미죠.
또한 좀 지루해질만 하면 중요한 변곡점이 등장하는 식의 전개라던가, 사연이 있으면서도 개성적인 캐릭터들은 드라마 작가로 다져온 내공이 잘 발휘되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굉장히 한국적인 묘사들도 빛납니다. 두당리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세세한 소품과 설정들을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 디테일은 가히 압권입니다. 마을의 중심에 있는 경산 유씨 종가집과 마을 사람들, 농사와 식사 등 상세한 것들 모두가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묘사를 묘사로 끝내지 않고 전개에 슬쩍 끼워 넣는 솜씨도 탁월해요. 명아주라던가 바랭이 풀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에 녹아들어가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전개, 묘사에 더해 이야기의 핵심 미스터리도 흥미롭습니다. 15년 전 마을 소녀 4명의 실종 사건이 중심인데, 이것을 강무순이 당시 묻었던 보물 상자와 결합시켜 전개함으로써 독자를 몰입하게 만들거든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수수께끼가 하나씩 드러나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주요 변곡점과 합쳐져 독자의 관심을 계속 잡아 끌고요. 이는 보물 지도 속 "다임개술"이라는 기묘한 말과 보물 상자 속 소품들이 무엇인지가 이 소녀들 실종 사건과 연결되는 덕분으로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4명의 소녀가 실종된 것은 모두 개별적 사건이라는 진상도 엄지 척입니다.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그 중에서도 황부영 실종에 대한 진상은 정말이지 최고에요. 지극히 한국적인 비극적 가족 관계를 이야기에 잘 녹여낸 아주아주 괜찮은 이야기였거든요. 이것만 따로 떼어네어 이야기를 한 편 꾸며도 충분히 좋겠다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좋은 추리 소설, 장르문학이냐고 하면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강무순이 종가댁 꽃미남과 벌이는 조사는 모두 진상과는 무관한 헛된 노력일 뿐이며,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별다른 추리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녀들 실종 사건은 모두 우연에 의해 해결되니까요. 우선 유미숙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미행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목사댁 조예은의 사체가 발견된 것도 우연이고요. 황부영 사건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도 억지스러운 작위적인 설정 - 강무순이 우연히 만난 황부영을 기억하고, 또 우연히 당시 사진을 찍어 조사가 가능했다는 두번의 우연이 겹친 것 - 에 의해 해결되기에 더욱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솔직히 우연히 만난 여성의 엄지손가락을 기억하여 그 여자가 황부영이 아닐까?를 떠올린다는 것 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이죠. 유선희 실종 사건의 진상도 별로 와 닿지 않아요. 황부영을 통해 알아낸 정보가 도화선이 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게다가 진상은 모두 당사자 (황부영, 종가댁)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은 부실한 추리 구조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유선희를 임신시킨 진짜 악당이 안체부였다는 진상입니다. 아무런 복선도, 단서도 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뜬금없기가 이루 말할 수 없네요. 최소한 안체부와 꽃돌이가 닮았다는 정도의 단서라도 제공해 주던가...
그 외, 강무순이 타임 캡슐로 묻은 뱃지와 목각인형을 얻은 경로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 설명이 부실한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21세기를 무대로 한 작품이 30년 전 <<전원일기>> 당시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시골 마을과 캐릭터 설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는 잘 되지 않았고요. 

그래도 이러한 단점을 덮을만큼 압도적인 재미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라면 미스터리 쪽으로도 나름 즐길 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저는 본격물 애호가라 감점 했습니다만... 한국 추리 소설,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분들께 꼭 권해드리고 싶네요.

2017/10/09

허구추리 - 시로다이라 쿄 / 박춘상 : 별점 2점

허구추리 - 4점
시로다이라 쿄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북스(D&CBooks)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머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아이돌 나나세 카린의 유령이 마쿠라자카 시에 나타난다. 큰 가슴에 미니 드레스, 리본을 달고 손에는 큰 철골을 든 모습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강철인간 나나세"라고 부른다. 유령은 사람들을 습격하다가 결국 경찰마저 살해하게 되며, 사건에 관련된 교통과 순경 사키는 우연히 만난 소녀 이와나가 코토코, 그리고 전 애인 쿠로와 함께 강철인간을 없애기 위한 승부에 나서는데...

일본작가 시로다이라 쿄의 장편 소설. <<스파이럴>> 등의 원작으로 알려진 작가로, 본 작은 만화적인 설정이 가득찬 라이트 노벨이지만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짜 진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어보이는 가설을 연달아 내 놓는다는,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여요. 이런저런 가설, 추리가 선보이는 작품은 그 중에서 "진상"을 찾아내는 것이 보통인데 이 작품은 "허구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 추리"를 진짜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이 아이디어 덕분에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같은 이유로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애호가 모임인 "하우미스터리"에서도 추천하는 분들이 제법 계셨을 테고요. 저도 "하우미스터리"에서 관련 정보를 접하고 관심을 가지던 차에, 기나긴 추석 연휴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일단 라이트 노벨답게 쑥쑥 읽히는 것은 장점입니다. 만화 원작을 많이 쓴 작가답게 캐릭터와 장면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묘사, 그리고 재치넘치는 대사도 볼거리고요. 주인공인 일안일족 아가씨 이와나가 코토코도 마음에 들어요. 귀한 집 아가씨이지만 상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남자친구 사쿠라가와 쿠로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개성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말로 '갭모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우선 "허구 추리", 즉 이와나가가 '강철인간 나나세 종합 사이트'에 올리는 네가지의 추리 모두 조금만 뒤집어보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반박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로요.
그리고 네번째 추리를 설득력있게 포장하기 위해 앞의 세가지 추리를 내 놓았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테라다 형사가 혼자서 수사에 나섰다", "나나세 카린의 아버지가 악의를 가지고 수기를 남겼다.", "나나세 하츠미가 매스컴에 수기를 흘렸다."라는 것은 구태여 이렇게 (가설까지 만들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것들입니다. 네번째 추리의 핵심이 이 세가지 요소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첫번째 테라다 형사 이야기를 제외하면 결국 나나세 카린은 "궁지에 몰리고", "죽고 싶었다."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기에 외려 드러내면 안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냥 네번째 가설로 정면 승부를 하면 될 것을, 구태여 앞에 장황한 설명을 덧붙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또 네번째 "허구 추리"의 핵심인 나나세 카린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시체 바뀌치기 트릭은 조금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기는 했지만 솔직히 현대 경찰을 우습게 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만화적인 설정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특히 인어 고기와 쿠단의 고기를 함께 먹은 사쿠라가와 쿠로에 대한 설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쿠단의 "미래 결정 능력"에 불사의 능력이 결합되어 죽지 않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사건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거든요. 단지 강철인간과 호각으로 맞붙기 위한, 액션용 소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능력이 있다고만 묘사되지 딱히 어떻게 발휘되는지 묘사가 없으니 독자는 알 도리가 없죠. 그냥 이와나가가 올린 글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어요. 이 점은 쿠로의 사촌 누나이자 동일한 힘을 가졌으며, 강철인간 나나세를 만들어낸 최대의 적 릿카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럴 바에야 이와나가는 귀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쿠로는 일종의 호위 무사다,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거에요. 아니면 "미래 결정 능력"을 좀 더 시각화하던가. ("그래 결심했어!"와 함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던가...)

이렇게 독특함 외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조금 연령대가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구태여 구해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로도 발표되었는데 만화가 훨씬 괜찮을 것으로 보이네요.

2017/10/06

하늘을 나는 말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3점

하늘을 나는 말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 "동서 미스터리 100"의 일본편 17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죠. 오래 전 부터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작품입니다. 사실 국내 소개가 이렇게나 늦어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에요. 앞서 말씀드린 "동서 미스터리 100"선 상위 20개 작품 중 국내 미출간 작품은 이 작품과 아유카와 데쓰야의 <<검은 트렁크>> 두 작품이 유이할 정도거든요. <<검은 트렁크>>는 1950년대 출간된 묵직한 고전이라 그렇다쳐도, 이 작품은 80년대 발표된 나름 신세대 미스터리 작품일 뿐더러 일상계 미스터리는 국내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등으로 제법 인기를 확보하고 있기까지 한데 말이죠. 온갖 수준 이하의 작품들까지 번역되는 일상계 추리물의 홍수 속에 이 유명 작품이 이제서야 소개된 것 자체가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는지 조금은 궁금하네요.

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는데 다행히 재미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하여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며, 추리적으로도 상당히 정통적인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이야기가 선보이고, 그것을 엔시씨가 주어진 단서만으로 풀어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인데, 대체로 설득력있고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화자 "나"와 라쿠고가 탐정 엔시 씨 캐릭터도 좋습니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물론, 주인공의 "국문학도" 로서의 전문가적인 지식과 엔시 씨의 "예인"으로서의 특수 능력 - 놀라운 기억력과 라쿠고 연기를 통해 단련한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 이 이야기와 잘 결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점이라면 분량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이것은 엔시씨와 나, 그리고 그 외 등장 인물들과 본 편 추리와는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덕분에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다가오고, 전개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더해진다는 장점은 있습니다만, 추리 부분의 비중이 작아진 것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더군요. 국내 소개되었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 - <<시미가의 붕괴>> - 등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여유있고 풍요로왔던 시대에 어울리는 느긋한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거든요.

그래도 숨 넘어갈 것 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쉬어갈 필요는 있는 법이죠. 단점은 사소할 뿐,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일상계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리베의 망령>>
"나"는 우연히 대학교 은사 가모 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가 엔시씨 인터뷰에 동행하게 된다. 인터뷰 후 회식 자리에서 가모 교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기묘한 꿈 이야기를 하는데 엔시 씨는 이야기만 듣고도 진상을 알아낸다. 그는 증거 보완을 위해 한달의 시간을 요청하는데...

화자인 "나"와 탐정역인 라쿠고가 엔시씨가 등장하는 기념할만한 시리즈 첫 편. 섬세하면서도 느긋하고, 조금은 할머니 취향인 "나"라는 캐릭터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엔시씨 캐릭터가 제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통 일본적 소재인 라쿠고와 오리베 자기, 그리고 교수님 꿈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개도 괜찮고요.

추리적으로도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꿈의 이유가 된 숙부님이 평소 책을 함부로 대했다는 것이 핵심이거든요.
물론 교수님이 어렸을 때의 일본 사회 분위기, 당시 경매 제도 디테일 등은 국내 독자로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일본 한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도입부로는 적절한 이야기였습니다.

<<설탕 합전>>
"나"는 어느 날 엔시 씨를 우연히 만나 홍차를 함께 마시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앞 테이블에 앉은 3인조의 기묘한 행동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정말로 사소한 것에서 진상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의 능력이 잘 드러난 작품. 핵심 추리는 "왜 세 명의 마녀(?)가 설탕 합전을 벌이는가?" 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신경쓰는 사람들이 세 명의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아낸다던가, 그녀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등의 소소한 추리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설탕을 홍차에 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꺼내려는 목적이었다"에서 시작되는 핵심 추리의 흐름 및 진상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아울러 변장과 연기(?)로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엔시 씨의 활약까지 더해진,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나"가 무언가 이상한 것 (소금)을 넣는 것을, 원래 퍼낸 설탕을 다시 넣는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용기에 담아온 것을 넣는 것일 텐데 이걸 착각한다는 것은 무리죠. 앙심을 품은 알바생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게에 출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시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주 좋은 일상계 소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두 껍데기 안의 새>>
"나"는 친구 다카오카 쇼코와 함께 도호쿠 여행을 떠난다. 엔시 씨의 공연도 보고, 온갖 절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던 중, 현지에서 만난 친구 에미의 차 시트가 모두 벗겨진 채로 발견되는데...

분량은 약 90페이지에 가까운데, 80여 페이지에 걸쳐 도호쿠 여행담이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일상계 작품이라지만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아요. "나"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역시 지나친 감이 없지 않고요.
또한 이 작품 속 추리는 조금은 억지스럽습니다. 동일 차종의 차 커버를 벗겨 위장한다는 것이 대표적이죠. 단지 시트 커버만 벗긴다고 차가 비슷해질까요? 그 안의 모든 디테일, 쿠션이라던가 소품이라던가 등이 다를텐데... 아울러 이렇게 위장하려고 했던 대상이 어린 여자아이라는 것을 쉽게 떠올리는 것은 너무 심한 비약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배경 묘사가 아주 근사하긴 합니다. 일본 인형 코케시의 고장이라고도 하는 "자오산"의 풍광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지기는 하거든요. "나"가 문학에 대해 정말로 조예가 깊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고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에 감점합니다.

<<빨간 모자>>
"나"는 치료 차 방문한 동네 치과에서 우연히 함께 대기실에 있던 "점 여사"로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알고 있는 점 여사의 동창 모리나가 유미코 씨에 관련된 이야기로, 매주 일요일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집 앞에 나타난다는 것...

전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전편의 결과 (아이를 버린 어머니)를 궁금해 한 엔시 씨가 "나"를 공연에 초대한 후 이야기를 듣는다는 설정, 그리고 본편 이야기가 이혼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는 사실 모리나가 유미코의 창작으로, 점 여사가 찾아온 날, 화장실 옆에서 신발장을 정리한 것이 핵심 단서라는 것은 괜찮았어요. 충분히 일상계스러우면서도,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주니까요. 그날 목격한 "빨간 모자"는 유미코의 딸일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점 여사의 남편과 모리나가 유미코가 불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 관계, 인간 심리를 그려낸 묘사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점 여사의 방자한 태도라던가, 마지막에서 "나"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 등에 대한 묘사는 솔직히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거든요. 본 편 추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는 모리나가 유미코의 <<빨간 모자>> 동화 묘사도 좀 길고요. 이러한 점은 한 편당 8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그냥저냥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
"나"는 집 근처 상점 "모퉁이 집"의 젊은 사장 구니오 씨가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다. 이후 "나"는 부탁을 받아 유치원 크리스마스 공연 비디오 촬영을 나서고, 그 곳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구니오 씨를 다시 만난다. 그날 그는 유치원에 가게에 있던 목마를 선물로 기증한다.
그런데 이웃집 며느리로부터, 유치원 마당에 놓여져 있던 목마가 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표제작. 일상계 단편집 마무리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추리적으로 수수께끼 자체는 평이합니다. 그래도 다무라씨 (구니오씨의 연인)가 날짜를 착각한 것이 잘 설명되고 있는 만큼, 즐길거리는 충분합니다. 일상계에 딱 어울리는 정도의 수수께끼였다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제가 읽었던 크리스마스용 소품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고, 소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며, 이야기의 핵심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것이니 이만큼 좋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더해 별점은 3.5점입니다.

2017/10/03

살인자의 선택 - 에드 맥베인 / 박진세 : 별점 2점

살인자의 선택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애니 분은 그녀가 일하던 주류 판매점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구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쾌활한 여자인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금욕주의자인지, 누군가의 정부이고 만나는 남자하고 모두 자는 방탕한 여자인지, 플라토닉한 연애를 즐기는 순수한 여자인지, 장애인 청년의 말벗이 되어주는 박애주의자인지.. 경찰은 그녀의 전남편, 정부, 애인들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편, 악덕 경찰 하빌랜드가 강도에게 살해되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스티브 카렐라는 30분서에서 이동한 형사 코튼 호스의 실수로 용의자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는데...


87분서 시리즈 신작 장편. (신작이라 함은 국내 소개 기준입니다). 87분서 시리즈답게 수사 과정의 디테일은 마음에 듭니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수사의 모범이랄까요.
또 팔색조 매력의 피해자 여성 애니 분 설정도 좋아요. 그녀의 전 남편, 애인, 친구들 모두에게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기묘한 캐릭터로, 제목인 "살인자의 선택"은 그 중 하나였다는 설정인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일본 만화에서는 히로인일 팔색조 슈퍼 우먼이 단순한 피해자라니! 시대를 앞서간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대로 마무리되기에는 아이디어가 아깝다 싶을 정도에요.
애니 분 외의 캐릭터들 묘사도 좋습니다. 그녀의 딸 모니카 분에 관련된 묘사들 - 특히 버트 클링과의 밀땅과 재치 -도 아주 귀엽고, 이번 이야기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코튼 호스의 데뷰도 아주 강렬하거든요. 코튼 호스의 첫 실수는 정말이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후 시리즈에서도 가끔 언급될만한, 그런 이야기니까요.

작가 특유의 묘사력, 상상력도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승강기 운전원이 수사 중인 버트 클리에게 하는 대사가 굉장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밖에 비가 오는 줄도 모릅니다. 빌딩 안 승강기에 8시 부터 저녁 5시까지 묶여있기 때문이죠. 점심도 빌딩 안 지하층 골방에서 먹고요. 때문에 그는 자기와 도시 사람들을 "두더지"라고 묘사합니다. 
아이솔라는 현대판 (작중 시점으로) 마굴이고, 모두 그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는건데, 지하와 실내만 오가는 상황만 놓고보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인지 굉장히 와 닿았어요. 더위나 추위를 끔찍하게 그려내어 아이솔라라는 도시를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로 느껴지게 만든 전작들에 비하면 좀 부드러운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명장면이라고 해도 좋겠죠.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일 뿐, 단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완전히 꽝이에요. 애니 분 사건은 전개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 '괴편지'를 찾아낸 것이 해결 방법의 전부로, 전체 250여페이지 분량 중 마지막 10페이지 정도에서 쉽게 해결되어 버릴 정도로 허무합니다. 이 편지의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운전면허 등록증 서명이 필적 감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상황도 어설프지만,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을 준비한 범인이 충동적으로 자필 편지를 써서 스스로 범행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곁가지로 삽입되어 전개되는 하빌랜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상 강도와의 다툼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 상황도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범인 찰스 페터릭의 행보가 여러모로 황당하기 그지 없어요. 그는 도난 차량을 도색하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본명과 주소를 기입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 정직 그 자체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때문에 찰스 페터릭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꼼꼼한 수사가 바탕이 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여지는 전무합니다. 백번 양보해도 경찰까지 살해한 도주 중인 강력범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코튼 호스도 영 별로입니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인기를 노리고 투입한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감식반에서 감식반원 피트와 말다툼하는 장면이 좋은 예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가 느껴지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의자를 체포하러 갔을 때는 노크를 한다?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장편 한편으로서의 완성도가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인기없는 악덕 경찰을 퇴출시키고, 인기가 있을만한 새 캐릭터(코튼 호스)를 등장시키는 편집부의 요구 사항이 장편 한편으로는 모자란 이야기에 결합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차라리 애니 분의 독특한 매력을 극대화시켜 다른 작품으로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2017/10/02

아름다운 흉기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아름다운 흉기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스포츠 의학계에서 유명한 센도 고레노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경찰이 현장을 조사하던 와중에, 누군가 경찰을 살해한 후 총기를 훔쳐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녀는 바로 센도가 양성하던 궁극의 운동선수 '타란툴라'. 그녀는 센도를 살해한 과거 유명 스포츠 선수 4인방에게 복수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고, 그들을 한 명 씩 차례로 참혹하게 살해해 나가는데...


긴 연휴를 버티기 위한 목적으로 집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얼마전에 읽었던 단편집은 별로였지만 장편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 역시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유는 많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추리 소설이 아닌 탓입니다. 타란툴라가 은퇴한 스포츠 선수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 전부이며, 복수는 그녀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 별다른 두뇌 게임이나 추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찰 수사라도 치밀해야 할텐데 이 역시 실망스럽습니다. 타란툴라가 복수 과정에서 본인을 숨기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묘사가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그녀가 복수를 거의 성공할 때 까지 찾아내지 못하거든요. 무려 키가 190 가까이 되는 외국인 여성이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며 복수를 행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래서인지 경찰 여러 명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데도 캐릭터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뭐 하는게 있어야 기억에 남죠....

추리적으로 별게 없다면 전개에서 긴장감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는데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타란툴라의 신체 능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며, 복수도 너무 쉽게 이루어지기에 긴장감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임산부를 보고 갑자기 감성적으로 돌변하여 자멸한다는 결말은 허무하기 그지 없고요.
아울러 독자로서 감정이입할 대상을 찾기 힘들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복수 대상인 도핑 4인방은 어쨌건 과거 도핑 경력에 더해 센도를 죽인 일당이니 벌을 받아도 싸고, 타란툴라 역시 복수라는 명분은 있지만 아무 죄도 없는 경찰을 살해하는 것에서 시작하니 선역이라고 볼 수 없어요. 결국 악당들끼리 서로 죽이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데, 이래서야 관심이 갈 리가 없잖아요.

사실 이렇게 특수 능력을 갖춘 킬러가 복수를 진행하고, 경찰이 이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작품은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습니다. <<신주쿠 상어>> 시리즈 두번째인 <<독 원숭이>>가 대표적이죠. 그러나 단순히 비교해 보아도 <<독 원숭이>>에서 복수 대상은 사악한 야쿠자이고, 독 원숭이가 복수를 행하는 이유도 충분히 공감할만해서 독자는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습니다. 독 원숭이를 쫓는 사메지마의 활약도 충분히 설득력있고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특징을 단 한 개도 갖추지 못해서 여러모로 실망스럽습니다. <<독 원숭이>>가 그닥 훌륭한 작품이 아닌데도 말이죠.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이름값에 걸맞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4인방 중 한명인 사쿠라 쇼코가 진정한 흑막이라는 진상, 반전이 대표적입니다. 그녀가 센도를 살해한 총을 몰래 숨기고 있다가 그 총을 사용하여 타란툴라에게 한 방 먹이고, 히우라 유스케를 살해하여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다는 계획은 꽤 그럴 듯 하거든요. <<아름다운 흉기>>라는 제목이 타란툴라가 아니라 쇼코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는 무릎을 치게 만들어요. 아울러 경찰이 진상, 진범을 눈치채게 된 이유가 히우라 유스케에게 총을 쏜 인물의 신장이 160 이하일 것이라는 검시 보고서 때문이라는 전개 역시 합리적입니다.

이과계열 작가다운 독특한 도핑 이론도 눈길을 끕니다. 특별한 스테로이드를 여성에게 장기 투약하여 조기 유산하는 체질로 만들어, 여자를 항상 임신 상태에 있게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임신 상태는 근육이 생기기 쉬운 등 여러가지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는데, 여러모로 실현은 불가능하겠지만 뭐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했어요. 이 덕분에 타란툴라가 복수하는 이유 (아이의 아버지?)도 나름 부각되고요.

그래도 장점에 비하면 단점이 더 눈에 뜨이며, 킬링 타임용으로 읽기에도 너무나 시시한 이야기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무리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차라리 SF 스릴러로 보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추리적으로 별 내용이 없고, 강화인간의 복수 과정이 중심이 된 이야기니까요. <<블레이드 러너>>나 <<사일런트 뫼비우스>>처럼 말이죠. 타란툴라가 스포츠 의학, 도핑을 통해 만들어낸 일종의 강화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점은 <<윈터 솔져>>하고도 좀 비슷해 보입니다. 내용이나 설정을 놓고 본다면, 영화나 만화로 발표되었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2017/10/01

미저리 - 스티븐 킹 / 조재형 : 별점 3점

미저리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황금가지

격조했습니다. 바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통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네요. 연휴도 되었으니 이 다시 달려 봐야죠.

이 책은 최근 개봉한 <>의 대흥행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스티븐 킹의 대장편입니다. 한창 원숙한 필력을 뽐내던 1980년대 중반 (1987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1990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영화화되었는데, 주인공 캐시 베이츠의 명연기로 일세를 풍미하기도 했죠. 영화를 오래전에 감상한 덕에 그간 읽어볼 생각을 하지는 못했는데, 연휴를 맞아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스티븐 킹의 그것입니다. 작가의 특기 중 특기인 궁지에 몰리고, 위기에 처하게 되는 주인공의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전편에 걸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가공할만한 악의 덩어리 애니도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봄직한 크리쳐들, 그리고 싸이코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고요. 아울러 폴과 경찰 등에게 벌어지는 잔혹한 폭력을 상세하게 그려낸 고어 묘사로 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것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긴장감을 자아내는 솜씨가 일품이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집 한 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부라 스케일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상황과 심리 묘사를 통해 긴장감을 자아내는 전개가 아주 빼어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애니의 집에 젊은 경찰이 찾아왔을 때 폴의 심리 묘사 ("아프리카!!!!")는 정말 최고로 치고 싶어요. 말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행동해야 하는 딜레마의 순간을 이렇게 잘 표현한 작품은 달리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과연 거장은 거장이에요.

또 전형적이라고 하였지만, 확실한 차별화 요소들도 재미를 더합니다. 미친 광팬 애니에게 사로잡혀 그녀만을 위한 새로운 소설을 써야 하는 신세가 된 소설가 폴에 대한 설정부터가 아주 독특해요. 광팬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는 지금에는 딱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분명 아주 참신한 이야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 <<더 팬>>이 발표된 것이 1997년이니까요.
게다가 애니가 단순히 세헤라자드에게 이야기를 듣는 왕이 아니라, <<미저리>>의 광팬으로 상세한 내용을 꿰뚫고 있다는 것도 효과적으로 활용됩니다. 폴이 대충 쓴 도입부만 가지고 '이야기가 불공정하다'고 지적하여 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일종의 편집자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재미있는 아이디어였다 생각되네요. 이를 애니가 이야기하는 '로켓맨이 비행기 좌석 밑 낙하산을 발견하는 것'을 폴이 철지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생각하여 비웃다가 결국 '공정하다'는 말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전개로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아주 그럴듯했고요. 애니와 폴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끄집어낸 명장면이라 생각됩니다.
탄탄한 캐릭터 설정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작가적인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지만 결국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폴의 심리묘사는 그 중에서도 아주 돋보였어요. 애니가 그냥 미친게 아니라 나름의 루틴, 철학과 삶이 있다는 것으로 보다 공포심을 이끌어내는 묘사도 훌륭했고요.

또 몇가지 장치를 통해, 폴이 애니에게 휘둘리는 것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도 괜찮았어요. 첫번째는 자동차 사고로 폴의 두 다리가 박살나다시피 한것, 두번째는 이 상처 때문에 애니가 공급해주는 진통제 노브릴에 폴이 중독되어 버렸다는 것이죠. 여기에 애니가 지닌 흉폭한 과거와 때때로 엿보이는 잔인한 행동 묘사가 더해져, 폴은 완벽한 애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킹의 최고작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에요. 폴이 애니를 죽이기 위해 식칼을 하나 숨겨놓은 것이 들통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날 들통난다는게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애니가 저지른 과거의 범죄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가는 상황이 아니었고요.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애니를 제압하는 장면 묘사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돌아온 미저리>> 원고를 태우는 것으로 충격을 준 뒤 습격한다는 내용이긴 한데... 우연이 결합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결판이 날 것이라면 앞서 있었던 생고생은 대체 뭔가 싶거든요. 타자기로 근력을 조금 붙인 뒤 습격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뭘 해도 죽을거, 고생이라도 좀 덜 하는게 낫지 싶은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애니의 환영에 시달리며, 소설가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결말은 완전 사족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대표작 중 한편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읽는게 전혀 힘들지 않는 몰입감을 선사해 주는, 재미 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킹의 쫄깃한 심리 묘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