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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9

2020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열 일곱번 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블로그 나이가 성인이 될 날도 얼마 안 남았네요.

올해 특징이라면, 독서가 취미이신 모든 분들이라면 마찬가지겠지만 독서량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겁니다. 이 결산을 시작하고 책을 가장 많이 읽있네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숫자로 정리해보면, 2020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77 (48)권, 기타 장르문학 4 (1)권, 역사서 9 (15)권, 디자인 or 스터디 4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25 (11)권, 기타 도서 14 (18)권으로 모두 133 (97)권입니다 (괄호는 작년). 작년보다 30% 정도 늘었군요.
분야로 따지면 추리 / 호러 등 장르 문학과 Food 및 구루메 관련 책을 많이 읽은게 눈에 뜨입니다. 방콕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좀 자극적이고 재미있거나, 주요 관심사를 찾아 읽기 마련이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20년 베스트 추리소설 :
<<흉가>>
올해 읽은 작품 중 별점 3점 이상 작품은 21편입니다. 꽤 수확이 많았던 한해였어요. 읽은 작품 중 1/3 가까이가 수작 이상인 셈이니까요.
이중 올해의 베스트는 <<흉가>>입니다. 무섭고 재미난 이야기 전개도 훌륭하지만 복잡한 설정, 복선 회수, 결말까지 완벽했습니다. 욕설, 육두문자 없이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끌고간다는 점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코로나로 외출도 못하는 더운 여름 휴가철에 탐독할만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아울러 올해 읽은 단편집 중에서 최고의 단편도 뽑아 보겠습니다. 별점 4점 짜리 작품으로는 아카가와 지로 <<유령 열차>> 수록작인 <<비 옷을 입은 시체>>, 곤도 후미에의 <<타르트 타탱의 꿈>> 수록작인 <<텅빈 카슐레>>, 스티븐 킹의 <<악몽과 몽상 1>> 수록작인 <<돌런의 캐딜락>>, 마쓰모토 세이초의 <<현란한 유리>> 수록작인 <<비와 2층>>,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 수록작인 <<빈 집을 지키던 밤>>, 이사카 고타로의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수록작인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수록작인 <<탐정 스페이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수록작인 <<푸른 히아신스 향기>>, <<뇌물과 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별점 4.5점짜리 작품이 무려 2편이나 있어서 4점 정도로는 후보가 될 수 없었어요. 별점 4.5점을 받은 작품은 미야베 미유키의 <<희망장>> 수록작인 <<희망장>>과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수록작인 <<두 개의 양념병>>입니다.
이 중 베스트로는 <<희망장>>을 선정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도 걸작이지만, 발표된지도 오래되었고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니 양보해도 될 것 같네요.

2020년 워스트 추리소설 :
<<너무 예쁜 소녀>>
많이 읽은 만큼 실망스러웠던 작품도 많았습니다. 75권 중 별점 2점 이하 작품이 28편이었거든요. 그래도 평균 이하 작품이 2/3를 넘었던 작년보다는 1/3에 불과하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졸작 오브 더 졸작, 정말로 종이가 아깝고 나무에게 미안한 별점 1점의 작품도 세 편이나 됩니다. <<너무 예쁜 소녀>>, <<콜드게임>><<루팡의 딸>>이 그 주인공이지요. 이 중 워스트로는 <<너무 예쁜 소녀>>를 선정합니다. <<콜드게임>>은 잔혹한 왕따 가해자를 편드는 듯한 설정이 문제였을 뿐 재미면에서는 나름 합격점을 줄 만 했고, <<루팡의 딸>>은 최소한 짧기라도 하니까요. <<너무 예쁜 소녀>>는 추리도 없고 스릴도 없는데 길기까지한 완벽한 시간 낭비였습니다. 끝까지 참고 읽은 저에게 상을 주고 싶습니다.

2020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4권만 읽었는데 모두 고만고만했습니다. 별도의 베스트, 워스트는 없습니다.

2020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올해는 9권밖에 읽지 않았는데 7권이 별점 3점 이상이었습니다. 별점 4점짜리 책도 <<펜슬 퍼펙트>>,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의 3권이나 되고요.
이 중 베스트로는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을 꼽겠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기 위한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재미도 있고 가격까지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올해 역사 도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가장 나쁜 별점이 2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에는 너무 가혹하기에, 올해는 별도로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역사 도서는 대체로 선방한 한해였어요.

2020년 베스트 디자인 or Study :
<<명작순례>>
이쪽 분야 책들은 도판만 괜찮아도 평균 이상은 해 줍니다. 그래서 실패가 별로 없는 분야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올해 유일의 별점 5점을 받은 책이에요.요. 수록된 글들도 좋고, 도판까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을 사지 않으면 무슨 책을 사겠습니까.

2020년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올해 이 분야는 4권 밖에는 읽지 않았는데 가장 나쁜 별점이 2.5점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워스트 도서가 없습니다.

2020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커리의 지구사>>
'지구사' 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식문화 역사 시리즈 중 한 권.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작입니다. 커리에 대한 역사는 물론, 세계화된 과정과 세계속 커리 요리들, 그리고 커리의 현재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커리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중세 유럽의 레시피>>
제목에서 기대했던 중세 유럽 요리에 대한 깊이있는 정보는 커녕, 최소한의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기대하기 어려운 별점 1점짜리 망작입니다. 담고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요. 저처럼 낚이는 분이 없으면 좋겠네요.

2020년 베스트 기타 도서 :
<<탱크의 탄생>>
올해 읽은 기타 도서는 특출나게 빼어난 책은 없었지만, 평균 이상 재미를 전해주는 괜찮은 책들이 제법 많았었습니다. <<심리 조작의 비밀>>, <<탱크의 탄생>>, <망령의 기억>><<깃털 도둑>> 등이 별점 3점을 받은, 그런 책들이었지요.

다 좋은 책이지만 이 중 베스트로는 <<탱크의 탄생>>을 꼽겠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라하는 '도감' 분야의 책으로 도판, 일러스트가 완벽하게 제 취향이었기 때문이에요. 이 책의 가장 단점은 제법 비싼 가격일 뿐이에요. 무기 도감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2020년 워스트 기타 도서 :
<<편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입니다. 장르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라서 기타 도서로 분류하였습니다.
작위적이고 뻔한 전개도 감점 요소이지만 무엇보다도 핵심 주제 - 범죄자 가족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 에 대해 주인공의 심정을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어요.

2020년 베스트 Movie :
<<포드 V 페라리>>
많은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코로나 사태 직전 영화관에서 감상한 이 영화입니다. 남자 가슴을 뛰게 만드는 웅장한 화면과 음향 효과가 발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베스트 영화는 다른 작품이 되었을거에요.

그나저나, 언제쯤 극장에서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2020년 워스트 Movie :
<<머더 미스터리>>
'정통 미스터리'라고 소개된 글에 낚였네요. 일견 전형적인 미스터리물로 보이지만, 실제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으로 건질건 전무해요. 게다가 별로 웃기지도 않고요. 왜 애덤 샌들러를 요새 보기 힘든지 새삼 느끼게 해 준 망작이었습니다.

2020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올 한 해는 <<시마 코사쿠의 사건부>>를 제외하고는 추리 or 호러 만화는 전통의 시리즈인 Q.E.D와 C.M.B의 후속권을 읽었을 뿐입니다. 이 중 최고는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 목록 36>> 이었습니다. 수록작 중 <<산의 의사>>와 <<카스미장 사건>>이 아주 좋았어요.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에피소드별로 살펴보자면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5>> 수록작인 <<도토리와 솔방울>>,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9>> 수록작 <<상상 속 살인>>, <<Q.E.D iff 12>> 수록작 <<재생의 시간>>도 별점 3.5점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2020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책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이 가장 낮은데, 이 정도로 워스트로 꼽기는 좀 가혹하지요. 그래서 에피소드로 워스트를 꼽아 봅니다.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7>> 수록작인 <<크로스로드>>와 <<종려나무 동전>>이 별점 1점입니다. 동기, 트릭, 진상 모두 작위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졸작이었어요.

2020년 베스트 Comic - 기타 :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2020년 만화들은 별점 3점짜리가 무려 14편이라서 많아서 한 편을 꼽기 어렵네요. 그래도 이 중에서 딱 한 편!을 꼽으라면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입니다. 다른 단편집에서 이미 접했었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된 탓에 감점했을 뿐, 모로호시 다이지로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단편집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만 읽는다면, 별점 4점도 거뜬했을거에요.

2020년 워스트 Comic - 기타 :
<<지구빙해사기>>
대가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이 불명예스러운 올해의 워스트네요. 당대를 풍미했던 오토모 가즈히로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 설정, 작화와 분위기를 적당히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 혼종이나 결과물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산평 :
이글루스 블로그 운영도 17년 째인데, 올 한해가 가장 변화도 많고 드라마틱했습니다. 다른 해에 비해 유별나게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요. 그러나 코로나라는 예상치못한 질병 탓이라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네요.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셨고, 지금도 계속 힘든 분들이 계실 터라 가슴도 무척 아프고요. 모쪼록 코로나 사태가 빨리 진정되어, 기쁜 마음으로 블로그 운영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여러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일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게 분명합니다. 사랑합니다~!

2020/12/27

문구상식 - 와다 데쓰야 / 고정아 : 별점 2점

문구상식 - 4점 와다 데쓰야 지음, 고정아 옮김/홍시

모으는 취미도 없고, 그다지 많이 쓰지도 않지만 문구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전 "문구의 과학" 리뷰 글에서 언급했듯 친숙하지만 놀라운 창조물로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는걸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구의 과학" 외에도 "궁극의 문구", "문구의 모험" 등 문구 관련된 여러 책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문구의 대명사인 연필 관련 서적도 여러 권 읽었고요. 이 중 다큐멘터리를 글로 옮긴, 일종의 논픽션"그래, 나는 연필이다"와, 거대한 농담과 같은"연필 깎기의 정석"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문구에 대한 미시사적 접근, 혹은 특정 문구에 대한 소개나 저자의 문구 사용에 대한 노하우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책도 문구에 대한 소개와 노하우를 담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들에 비하면 재미도 없고, 내용에 대해 공감하기도 힘들었어요. 

물론 건질만한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다른 책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붙임쪽지'에 대해 한 단락을 할애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풀어놓는 부분이 괜찮았어요. 저도 책을 읽을 때, 읽고 나서 리뷰에 사용하기 위해 포스트잇이나 투명한 필름형 붙임쪽지를 붙여 놓는 편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저자 의견에 공감되는 점이 많기도 했고요. 저도 저자의 말대로 투명한 필름형 붙임쪽지가 왜 3색 이상 컬러로 구성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파일링' 단락도 볼 만 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저자와 같이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지는 않지만 기본 개념 자체는 배워볼 만한 부분이 있었으니까요. 예를 들어 쌓이는 자료는 1차적으로 '즉시 분류'한 뒤, 여유가 생길 때 제대로 분류하라던가, 데이터로 저장할 경우 폴더명의 계층화와 파일명에 신경쓰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업무에 적용해 봄 직 했습니다. 

소개되는 문구도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는 흥미가 갑니다. 첫 번째는 펜텔 오렌즈 샤프입니다. 0.2mm 두께로 경도 B나 2B로 쓰면 부드러우면서도 가늘고 섬세한 글씨를 쓸 수 있다는데 하나 구입하고 싶어졌어요. 가격도 저렴하다고 하니까요. 파카 조터 볼펜은 제가 진급 축하 선물로 받았던 거라 소개 자체가 반가왔고요. 풀과 테이프, 양면 테이프의 장점만 모았다는 '풀 테이프'는 정말 유용해 보여서, 곧 찾아서 구입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내용 외에는 다른 책에서 접했던 내용도 많고, 관심없는 분야 소개도 많은 탓에 지루했습니다. 지워지는 볼펜 프릭션, 샤프심이 회전하는 샤프 쿠루토가, 몰스킨 노트 등은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만년필에 대한 항목은 인터넷이나 다른 책을 통해 알 수 있던 내용보다도 못했고요.
그나마도 필기구 류는 관심있는 분야라서 열심히 읽었는데, 노트와 수첩은 정말 지루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문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이유인 '놀라움과 노력'을 느끼기 힘든 내용들인데다가, 제가 '노트 필기'를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식적인 자리는 회사에서 배포하는 무료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이용하고, 업무 시에는 주로 이면지에 스케치나 노트를 하거든요. 그나마도 그때그때 PC로 바로 옮길 뿐더러, 대부분은 이미 PC나 스마트폰으로 바로 디지털 작업을 시작하기도 하고요. 비싸고 전문적인 노트는 필요가 없어요. 유명한 '몰스킨 노트'도 한 번 써 봤지만, 저한테는 가성비가 최악인 물건이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제품 중 리히트 랩의 '트위스트 노트'는 그래도 혁신, 참신함이 도입된 결과물로 보이기는 하는데, 이 역시 저에게는 가성비가 좋을리 없겠지요. 아울러 도판이 전무하다시피한 것도 큰 약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다른 문구 관련 서적에 비해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런 책을 좀 많이 읽은 탓이 큰데, 이제 이 쪽 분야도 당분간 좀 접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0/12/26

Q.E.D Iff 증명종료 12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2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이번 권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괴 교섭을 다룬 "좋은 사람"과 복잡한 트릭이 사용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재생의 시간" 입니다. "좋은 사람"은 평균 이하였지만, "재생의 시간"은 Q.E.D가 다른 추리 만화와 다른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편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사람"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아르젠트 (알) 로셀리니가 시리아 무장 단체에게 유괴되었다. 교섭인 시나 샌드는 토마의 옛 동창이어서 토마와 가나는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그녀와 이탈리아 정부, 그리고 알의 백부 마이클까지 모두 3개의 창구가 존재하는 상황으로 교섭은 난항을 겪는데....

유괴 교섭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단순 교섭보다는 복잡합니다. 세 개의 창구가 교섭에 나선 탓입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에게 범인 X의 요구액이 너무 높으니 일부분을 부담해달라는 부탁을 해 보라는 토마의 계획은 기발합니다. 만약 다른 두 창구가 범인과 교섭하고 있는게 아니었다면 동의할테고(인질 석방이 우선이니), 그들도 교섭 중이었다면 거절할거라는 이유입니다.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의 거절로 범인이 세 개 창구 모두와 교섭하여 몸값을 받아낼 속셈이라는걸 알아낸 뒤, 모두의 몸값 전달 날짜가 다르다는걸 통해 각각 다른 사람들과 교섭하고 있다고 추리하게 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개 창구가 교섭하는건 가짜인거지요. 

이러한 교섭 단체간 의견 조율과 교섭 이야기는 꽤 그럴싸 합니다. 또 중동 유괴범들이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투자자도 있고, 이자도 지급하는 등 여러모로 명백한 사업이더군요. 그래서 빠른 교섭이 필요하고요. 투자금 회수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손해가 커지기 때문에 몸값이 점점 올라갈 수 밖에 없거든요.
콘테이너를 이용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에 대한 묘사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난민 소년이 유괴범 일원이 되는 과정도 설득력이 있고요. 즉 유괴 교섭, 유괴 사업, 유괴범에 대한 드라마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그런데 알을 돌려받는 클라이막스는 영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까지 토마와 가나가 나서서 위험에 휘말릴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요. 또 알과 가나가 절벽 아래에서 탈출하기 위해 숨겨둔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다는건 과정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중요한 조사를 가나 한 명으로 돌려막기 하는 내용도 비현실적입니다. 가나 혼자 이탈리아에서 마이클을 만나 협상하고, 마이클 비서를 자칭하여 은행으로부터 몸값 전달 날짜를 알아낸다는 식인데, 일본이었다면 모를까 외국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진행한건 지나쳤습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가나도 토마 못지 않은, 어학과 연기의 천재인거지요. 이 정도면 "엘프 사냥꾼"의 코미야마 아이리급이 아닐런지?

이야기도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유괴 교섭인에 대한 이야기, 유괴된 인질의 탈출극 (?),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 좋은 사람 알에 대한 이야기가 마구 뒤섞여 있거든요. 예전 "마스터 키튼" 속 에피소드처럼 '교섭' 하나에 집중하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재생의 시간" 

잡지 기자 크리스는 시의회의원 모카이에게 찾아가 17년전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며 협박하여 300만엔을 뜯어 내었다.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여 출입금지된 장소에서 목을 메고 죽은걸로 보이는 백골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었다. 유류품으로 사체는 스미야 코우사쿠로 판명되었는데, 그는 이미 14년 전 실종된 상태였었다(현 시점에서는 17년 전).
경찰은 14년 전 스미야가 이 장소에서 목을 메고 자살했다고 결론내렸었다. 하지만 스미야는 함께 일하던 쇼우스케와 자주 다퉜으며, 쇼우스케가 큰 상처를 입고 기숙사로 돌아온 17년 전 어느날 돌아오지 않았었고, 쇼우스케도 곧바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사라졌다.

이후 쇼우스케가 있는 마을로 찾아온 크리스는 시체로 발견되었고, 유력한 용의자는 쇼우스케의 아들 세이지였다. 아르바이트 중 피해자와 다퉜고, 아르바이트하던 술집 근처에서 피해자가 살해되었으며, 시체를 옮긴 보트는 그의 아버지 가게에서 분실된 것이라는 등의 불리한 정황 증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범인이 술집에서 술을 먹는다는걸 알 수는 없었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피해자가 술집에 오는걸 알지 못했다면, 보트를 미리 준비해서 유기 장소로 옮기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살해 현장 근처에는 보트를 숨길 곳도 없었다...

17년 전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사건이 하나로 만나는 작품으로 두 개의 사건은 모두 수수께끼를 품고 있습니다. 17년 전 사건에서 쇼우스케는 범인일 수 없었습니다. 쇼우스케와 스미야가 다투는게 목격된 장소에서 사체 발견 현장까지는 왕복 1시간 이상 걸리는데, 쇼우스케가 다친채로 기숙사로 돌아온건 고작 30분 뒤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누가 봐도 쇼우스케가 범인이니, 무언가 트릭이 사용된게 분명합니다. 현재의 사건에서는 술을 어디서 먹을지 모르는데 보트를 어떻게 미리 준비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요.

토마는 두 사건은 모두 밤에 술 마시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공통점에 착안하여, 술 마시러 가는 장소 모두에 미리 시체를 숨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추리합니다. 스미야는 역 앞 라면집, 산기슭 정식집, 이자카야의 세 개 가게만 다녔기 때문에 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거지요.
산 기슭 정식집 근처에서 도난당했던 포크레인이 발견된게 증거입니다. 범인은 포크레인을 휘둘러 사체를 멀리 던져 버리고 알리바이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17년전 사건에 사용된 트릭과 같아요. 사체가 밀실에서 발견된건, 담벼락 넘어 공중에서 던져졌기 때문이었죠. 꽤 기발하고, 나름 현실적인 멋진 트릭이었어요.

범인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체로 발견된 스미야가 원래 쇼우스케였던 겁니다. 스미야가 쇼우스케를 죽이고 신분을 바꾼거지요. 모카이가 이를 도왔고요. 쇼우스케와 모카이는 고교시절 야구부 배터리로 절친이었고, 모카이는 쇼우스케가 야구부 매니저였던 교우카와 맺어지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그만두고 방탕한 삶을 보내던 쇼유스케가 음주운전으로 교우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도망간 탓에 원한을 품었다가, 스미야가 저지른 사건을 알고 그를 도와준 겁니다.

이후 바꿔치기한 스미야가 교우카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사랑 이야기도 나무랄데 없어요. 처음 봤을 때 부터 사랑했다는 부부의 말은 참 슬프네요. "마틴 기어의 귀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바꿔치기와 트릭을 눈치채고 크리스는 모카이를 협박했고, 스미야(현 쇼우스케)가 그를 죽인겁니다.
크리스가 17년전 사건은 살인 사건이 분명하다며 남긴, '기름게와 무당게의 다른 점'이 핵심이라는 말도 바꿔치기를 의미합니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건 이름 뿐이라는 뜻이지요. 이를 여러가지 단서복선으로 드러내는 전개도 일품입니다.

그런데 추리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현재의 크리스 살인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이자카야에 동행했던 아오야마가 공범에 전화를 걸어 보트를 준비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요? 단독 범행이라고만 생각하는 이유를 통 모르겠어요.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30분 안에 사체를 어딘가 숨기고 돌아온 뒤, 퇴원 후 숨기러 가도 되니까요. 17년, 아니 14년 만에 백골로 발견되었다면 그 정도 차이를 눈치채는건 불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아니면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된 후, 현장을 뒤져 시체를 암매장하는 것도 방법이었고요. 살인사체 유기가 동시에 벌어졌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별다른 증거가 없는 말 뿐만인 추리라는 약점도 큽니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를 살해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설령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게 밝혀진다 한 들,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숨겼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한 명 더 살해해서 위험을 늘리기보다는, 정면으로 반박하는게 더욱 타당했습니다. 

아울러 토마와 가나가 무리하게 사건에 뛰어들어 추리를 도와주는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용의자 세이지와 교제하는 마리나와 가나가 친구라는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세이지가 혐의를 벗은 시점에서 더 도와줄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토마가 입만 다물었어도 미제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토마가 웃는 얼굴로 추리쇼를 펼치며 사건을 해결해서 세이지 가족을 파괴해버리고 맙니다. 이래서야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사랑을 방해하는 무자비한 악마, 냉정한 추리하는 기계일 뿐이지요. 한 마디로 토마의 비인간성이 부각된 에피소드입니다. 하긴, 이게 Q.E.D와 토마의 매력이긴 하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에서의 설득력이 조금만 갖추어졌더라면 걸작이 될 수 있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좀 긴 호흡의 소설로 발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2020/12/25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3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루스 렌델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중심의 단편집입니다.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몰입,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상은 열쇠, 시계, 저택과 같은 사물도 있고, 여장이나 동물로 변장하는 등의 독특한 취미도 있지요. 주인공들은 결국 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되는데, 파국을 맞는 장면이 마지막 몇 줄로 정리되는 반전 묘미가 빼어난 작품이 많습니다. 등골 서늘한 반전을 짤막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 장르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교하게 계획된 범죄가 등장하는 "휘파람 부는 남자"와 "늪지 저택, 펜 홀"은 등장 인물들 심리와 주변 배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조금 뒤처진 느낌도 들고, 반전도 뻔한 작품들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표제작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겠지요. "헤어가 살던 집", "아버지의 날" 등도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뻔하더라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구성과 전개, 묘사가 빼어나서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닌 거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남성 공포증이 있는 여자와 장난삼아 여장을 즐긴 남자가 겪는 파국을 그린 작품.

원제는 The New Girlfriend인데, 영화 때문에 제목이 바뀐걸가요? 여튼 여장한 데이빗을 진짜 여자로 생각하는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볼거리였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데이빗이 크리스틴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로 돌아오자,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남편 외 남성에 대해 갖는 혐오가 앞서서 상세하게 설명된 탓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더군요. 저는 영화 결말보다는 원작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푸른 히아신스 향기" 

아내 캐서린이 불륜 뒤 임신하자 이혼하고 40년간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캐서린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건 알고보니 그녀의 딸이었다.

남자가 캐서린에게 집착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일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살의와 살인이라는 직접적 행위가 설명되고요. 죽인 여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그녀의 딸이었다는 반전 역시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과수원 울타리"

나는 공습을 피해 엘라 이모가 사는 인치필드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엘라 이모가 남편이 징집된 틈에 병가를 받고 돌아온 조종사 데니스 클리프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밤에 총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에 매달린 허수아비를 데니스 클리프턴의 시체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킨 뒤 런던으로 쫓겨났다. 엘라 이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에서 머리에 산탄총을 맞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작품도 '나'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작품입니다. 또 어린 시절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려내는 영국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도 좋고요.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불륜으로 긴장감을 싹 틔우고, 이를 목 매달린 시체 (허수아비)로 터트리는 전개도 거장답습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마지막 반전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발견된 유골은 데니스 클리프턴일겁니다. 그렇지만 데니스 클리프턴은 전시에 병가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실종된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륜을 알고 입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전시라는 상황이면 문제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헤어가 살던 집"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싸게 나온 집을 구입한 노먼은 아내 리타와 함께 이사왔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속 신경을 쓰던 노먼과 리타는 욕실 창문이 자꾸 열리는걸 가지고 다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타를 거의 죽일 뻔 한 노먼은 다시 이사를 마음먹은 뒤, 헤어 사건이 알고보니 자기와 같이 욕실 창문이 열린 탓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이 쌓이면 사소한 일로 살의가 폭발하는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일상 속 이야기처럼 그려내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살의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네요. 일상 속 사소한 문제로 폭발한 살의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했습니다. 별다른 반전도 없고요. 창문 문제가 살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걸 이웃은 알고 있던걸로 보이는데, 이웃에 대해서 반전 형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뇌물과 부패" 

니컬러스는 여자에게 홀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엄청난 덤터기를 쓸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해고했던 아버지 회사의 보스 소렌슨이 식사비를 대신 지불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렌슨이 아내가 아닌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걸 목격했던 탓으로 여긴 니컬러스는 식사비를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소렌슨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니컬러스를 협박범, 그리고 바보 취급을 할 뿐이었다.

며칠 뒤, 소렌슨의 아내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렌슨은 식당에서 그를 목격했던 니컬러스만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자존심만큼은 갖춘 니컬러스가 펼치는, 자신을 무시했던 소렌슨에 대한 복수극입니다. 독자가 니컬러스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니컬러스가 울분을 쌓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 전개가 돋보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빌드업'이 완벽해요. 이러한 빌드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니컬러스의 한 마디, "보지 못했습니다. 절대로요."가 작품의 백미고요. 소시민의 잔혹 복수극이자 일상계라는 독특한 작품의 정체성도 인상적입니다.

식당에서 소렌슨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은 아쉽지만, 그 외에는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휘파람 부는 남자"

매뉴얼 밑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는 제레미는 영국인 불법 체류자이자 좀도둑으로, 일하던 중 모르는 집 열쇠를 줍게 되었다. 이 집을 털어서 인생 역전을 꿈꾼 제레미는 집 열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은 매뉴얼의 본가였고, 잽싸게 도망치던 제레미는 이 모든게 매뉴얼의 복수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이 결혼할 여자인 루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쿠바 이민자가 영국인 좀도둑을 가지고 놀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몇 줄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완성되는, 오 헨리 스타일의 반전물이기도 하고요. 반전을 통해 매뉴얼이 이상하게 돈이 많았다는 복선도 회수되지요. 

개인적으로는 호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영국인 제레미가 죗값을 치룬다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밉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력은 정말이지 부럽네요.

그런데 제레미가 집을 터는 동안, 제레미 짐 속에 마약을 숨긴 뒤 세관에서 걸리게 만든것 자체는 엄청난 복수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레미가 집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물론 매뉴얼은 다른 복수를 준비했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나팔꽃 시계" 

트릭시는 데본셔에 사는 친구 시빌에게 놀러갔다가 그곳 갤러리인 아티팩트에서 충동적으로 나팔꽃 시계를 훔쳤다. 시계는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고, 시계를 알아본 친구 미비마저 사고를 위장해 살해했다. 시계를 몰래 돌려 놓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트릭시는 순간적 광기로 시계를 부숴버리는데....

특정 물건에 대한 충동적인 집착이 파국을 불러온다는 심리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이 노인이며, 시계 때문에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파국이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일상계 속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트릭시가 "똑딱똑딱, 나팔꽃 시계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도 대단했어요. 그녀 정신이 붕괴했다는걸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탈" 

'나'는 임박한 결혼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연극에 쓰는 늑대탈을 쓰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걸 알아챘다. 같은 취미를 숨기고 살던 어머니와 함께 하게 되자, 늑대탈을 쓰는 행위와 늑대가 될 때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던 행위는 점점 폭주하게 되었다. 마침내 약혼녀 모이라가 양가죽 외투를 입고 찾아온 날, 야생동물 두 마리가 양을 덮치고 만다....

두 마리의 야생 동물이 바닥에 쓰러진 양을 덮쳤다는 것이다. 는 마지막 문구는 섬뜩했습니다. 전형적인 '기묘한 맛'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이라를 먹은 건지도 살짝 궁금해지고요.

그러나 정신병자가 쓰는 글이라는걸 계속 알려주고, 늑대탈을 쓰면 늑대가 된다는 행동 묘사가 상세해서 반전의 묘미는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신선함도 부족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늪지 저택, 펜 홀" 

프링글과 친구들은 아버지 친구 리던 씨가 사는 늪지 저택 펜 홀 근처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리던 씨는 저택 관리를 위해 모든걸 걸었지만 돈과 인력,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리던 씨 아내 플로라는 저택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물건에만 집착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쓰레기장같아 보였다.
태풍이 불어 포퓰러 나무가 쓰러진 다음날, 나무 구덩이에서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좋아하는 플로라는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리던 씨가 해체하던 쓰러진 나무가 구덩이로 떨어져 그녀는 깔려 죽고 마는데...

서로 다른걸 원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당연히 남편이 사고처럼 위장해서 저지른 범행이고요. 이렇게 내용은 굉장히 뻔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린 아이인 프링글 시점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묘사만큼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직접적으로 죽이는걸 본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묘사하는 식이거든요. 

그리고 본 편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늪지 저택 펜 홀과 숲에 대한 묘사가 훨씬 굉장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작나무 줄기는 은색, 너도밤나무는 백랍색, 플라타너스는 회색과 노란색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굉장히 상세하면서도 맛깔나는 묘사였어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의 날" 

테디는 처제 가족과 그리스 섬으로 여행왔다. 처제의 남편 마이클은 아내 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떠나는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아내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절벽에 떨어질뻔했던 테디와 아내 앤의 사고를 묘사하여 이어지는 사고와 연결시키는 전개는 너무 뻔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였달까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지만 이혼이 만연한 세상에 두려워하는 마이클의 강박증 설정은 괜찮았지만, 테디 시점에서 묘사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못한 것도 아쉽고요. 더 광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면 했는데, 지금의 작품은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탓에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케판다로 가는 초록길" 

나는 인기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 아서 케스트렐과 친구였다. 그러나 그가 발표했던 15권에 달하는 '칼리나스 연대기'는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베스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서는 어느날 '나'에게 런던 외곽선이 폐쇄되고 생긴 아름다운 산책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 그가 이야기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서는 혹독한 비평이 신문에 실린 뒤 자살을 택했다. 바로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아서를 찾아왔다가 귀가하던 중 아서가 이야기했던 산책로를 발견하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들이 꿈 꿔볼만한 일종의 판타지 작품.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쓴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서가 만들어낸 산책로의 아름다운 묘사가 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비교할 때 극적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12/20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0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0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스핀 오프 C.M.B도 계속된 시장 수요가 있나 보네요. 드디어 앞자리가 4로 바뀌었습니다. 이번 권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소소한 일상계 이야기는 없습니다. 살인 사건 이야기가 두 편에 세 편의 무대가 해외 - 캄보디아, 브라질, 말타 - 일 만큼 스케일이 크거든요. 

그러나 커진 스케일에 걸맞는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억지스럽고 무리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해외가 무대일 이유도 별로 없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에서 좋았던 기세를 이어나가지 못해 아쉽네요.

수록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의 신전" 

캄보디아 세관원 보오는 유럽 제약 회사 조사단이 기적이 일어났다는 시바 신전 조사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어머니가 아픈 소년을 데려가 기도한 뒤 병이 완치되었는데, 소년이 앓고 있던 병이 항생물질이 없는 라임병이기 때문이었다.

유적 탐험물에 가까운 이야기로 수수께끼는 기적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단 하나 뿐입니다. 이는 신전에 살던 벌의 독으로 밝혀지고요. 그러나 신전에서 벌떼의 습격을 받고 난 후 내린 결론이라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라가 주변 환경과 기후 등을 토대로 벌이 살고 있다는걸 먼저 알아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별다른 설명없이 기적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운이 좋아서 병이 나았다는게 전부라서 설득력도 약합니다. 언젠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왔던 ("마스터 키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었죠), 눈 다래끼 때문에 시력이 좋아진 것과 같은 급의 이야기지요. 한 마디로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고, 현학적인 재미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마약 대용으로(코브라의 독은 신경독이기에) 코브라에게 의도적으로 물린 뒤, 독 때문에 죽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다. 코브라에게 물리면 보통 죽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효과를 전하게 되어서 어처구니없는 무모한 방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거지요. 이는 기적 덕분에 병이 치료됐다는 말이 널리 퍼지는 이유와 같다고 해석됩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들은 소문을 낼 수 없으니까요. 코브라 이야기 덕분에 별점은 2점입니다.

"시끄러운 킬러"

살인청부업자 모모야는 한 번도 살인에 성공한 적이 없다. 그를 고용하는 사람들은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다는 소문으로 상대를 위협할 목적 뿐이었다. 그만큼 보수도 저렴했다. 

어느 날, 모모야에게 희귀 동물 밀매업자 가키야마를 죽여달라는 의뢰가 접수되었다. 성공 보수 2백만, 실패 보수 3만엔에 기한 3일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가키야마의 사무실은 철통 보안 상태라 모모야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결국 가키야마는 살해되고 말았다. 구지라자키 경부는 살인 현장이 밀실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신라를 찾아오는데...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살인 청부업자도 나름의 수요가 있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습니다. 무모한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모야가 저지른 습격들이 밀실을 돌파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진상도 괜찮았고요. 특히 모모야가 습격할 때 준비했던 휘발유는 불을 붙이는게 아니라, '냄새' 로 환기를 유도했다는 일종의 트릭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교하다기보다는 만화같은 허황된 내용에 가깝지만, 어차피 킬러 설정부터가 만화같아서 잘 어울리더군요.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잠깐 등장하는 이집트의 열쇠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었습니다. 열쇠라기보다는 일종의 도구에 가깝지만요.

그러나 그동안 사람을 죽여본 적 없으면서 왜 이 사건에서는 정말로 범행을 저질렀는지, 앞서의 습격으로 누가봐도 유력한 용의자라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데 무모하게 범행을 감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약점은 큽니다. 살인을 희화한 느낌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파네마에서 온 소녀" 

히시자와는 4일 전, 브라질 리오의 초고급 호텔에 투숙했었다. 브라질 고위 관리인 오스카가 부정을 저지른걸 증명하는 서류를 전달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약속 날짜까지 여가를 보내던 히시자와는 소피아를 만나는데, 그녀로부터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는 USB와 여권은 인형 속에 숨겨 호텔 내 금고 안에 넣어두라고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히시자와는 소피아와 함께 강도들에게 납치당하고, 혼자서 겨우 빠져나온 히시자와는 그간의 이야기를 비행기에서 만난 하츠키에게 털어놓는다.

신라가 히시자와의 이야기를 듣고 강도 사건과 소피아의 정체를 추리하는 이야기인데 대단한 내용은 없습니다. 어떻게 USB를 몰래 빼돌리는지?가 핵심인게 뻔한데 이 트릭도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고요. 얼굴 인식 등 뭔가 대단한 보안이 있는 척 하지만 그냥 전화 한 통화로 입구 보안이 뚫리니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소피아가 강도들과 한 패로 이 모든걸 배후에서 꾸몄다는 진상도 예상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펼칠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냥 처음에 히시자와가 아무 생각없이 USB를 주머니에 넣고 다닐 때 함께 훔치면 됐을텐데 말이지요. USB가 도난당했다는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게 목적이었다? 평범한 브라질 도둑이라면 히시자와가 누군지 알게 뭡니까. 그냥 훔치고 보는거지. 출처가 히시자와라는걸 숨기는게 목적일리도 없습니다. 브라질 국민 입장에서는 히시자와도 부정에 가담한 외부 세력에 불과하니까요. 히시자와가 방문한 일정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약속 날 전날에 도착해서 다음날 바로 서류를 전달하는게 상식입니다. 미리 도착해서 몇일간 여가를 보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도 소피아가 자신을 찾으려면 "이파네마의 물고기를 찾아라"고 말했던 부분은 C.M.B 스럽긴 했습니다. 이파네마의 어원은 '나쁜 물'로 '물고기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즉, 소피아는 없으니 찾지도 말라는 뜻이라는거지요.
또 브라질의 치안 문제, 경제가 좋지 않은건 정치가들의 부패 때문이라는 소피아의 말도 현재 일본 자민당 정권과 겹쳐 보여서 재미있었고, 작 중에 등장하는 "단지 몸만 움직인다고 돈이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브라질 속담도 인상적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잠깐 손을 멈추고, 고민해서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정작 예시로 드는건 밀수라서 조금 당황스러웠거든요. 이런 점에서는 브라질을 잘 이해하고만든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야기 핵심 사건의 동기, 전개를 납득하기 어렵고 추리라고 할 만한 내용도 없기에 감점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병속의 배" 

세금회피처인 탓에 세계 유수의 기업이 모이는 말타 공화국에 거주하는 대부호 랜드가 살해되었다. 살해된 방은 손님용 응접실과 연결된 문 외에는 전부 잠겨진 밀실이었다. 랜드가 살해된 금요일은 원래 이런저런 투자 상담을 하는 날로 살해된 3시에서 4시 사이에 만났던 사람은 프라이빗 뱅커 포쉣, 가타가케, 에코 웨스트 3명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 모두 상담 중에 랜드는 살아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프라이빗 뱅커 3명 중 한 명이 범인인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상담자 포쉣은 랜드의 돈을 횡령한 동기가 있습니다. 마지막 상담자 에코 웨스트는 결국 시체를 보았다고 증언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포쉣일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두 번째 상담자 가타가케가 살아있는 랜드와 협상 후 계약서에 사인을 받았기 때문에, 에코 웨스트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포쉣의 알리바이를 깨는게 목적인 작품입니다.

그런데 트릭은 간단합니다. 증언과는 다르게 가타가케가 먼저 상담을 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사실을 말하지 않은건 계약이 무효가 될 까 두려웠던 것이고요. 이는 솔직히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합니다. 에코 웨스트의 범행을 증명하지 못하면 가타가케, 포쉣에게도 수사가 들어갈게 뻔해서 끝까지 숨길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같은 이유로 포쉣이 흉기인 고가의 실크 넥타이를 범행 후에도 그대로 가지고 있으리라는 확신도 근거가 없습니다. 여러모로 트릭, 해결 과정 모두 기대 이하였어요.

그나마 랜드의 사체가 깨진 보틀쉽과 함께 발견된게 일종의 단서가 된다는건 좋았습니다. 원래 보틀쉽은 사무실에 숨겨져 있었으며, 랜드 스스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여주기 힘든 취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꺼내져 있었다면? 범인은 익히 잘 아는 사람이며, 그렇다면 범인은 3명의 프라이빗 뱅커 중 10년 넘게 거래해 온 포쉣이라는 것이지요. 이 보틀쉽 아이디어만큼은 좋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20/12/19

회사 밥맛 - 서귤 : 별점 2.5점

회사 밥맛 - 6점
서귤 지음/arte(아르테)

독립 출판 작가인 서귤이 쓴 회사 생활 속 에피소드와 식사를 결합하여 풀어내는 짧은 수필들 30편에 관련된 4컷 만화들을 함께 수록하고 있는 에세이 생활툰 모음집.

저는 서귤 작가를 좋아합니다. "환타스틱 우울백서"를 빼고는 작가가 쓰고 그린 전작을 구입했으니 팬이라고 해도 되겠죠. 좋아하는 이유는 나도 이런데? 라는 동질감을 불러 일으키거나,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혹은 내가 그래도 낫네! 라는 상대적 우월감을 심어주는 특유의 자학 개그가 딱 제 취향이기 때문입니다. 플러스펜 같은 걸로 대충 그린 듯한 그림도 이야기에 아주 잘 어울리고요. 아래 이야기처럼요.

이 책은 만화보다는 수필이 메인이지만 글들도 역시 서귤 작가의 감성이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야근, 회사 내 불편한 인간 관계 등 무거운 이야기를 여전한 자학 개그로 무겁지 않게 풀어가는 감성은 역시나 일품이었어요. 읽다보니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야기가 많아서 공감도 많이 되었고요. 서귤 작가는 회사 생활 7년차이고, 저는 20년이 넘은 직장인이라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직장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 비슷할테니까요. 회사 냉장고 얼음을 훔쳐먹는 얼음 도둑 이야기처럼 제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입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싶네요. 함께 수록된 4컷 만화도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4컷 만화만 따져도 120편이 수록되어 있는 셈이니 양도 풍성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탓에 좀 지루한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전 "책낸자"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설정과 내용들이라 이전 작품을 읽었던 독자라면 더 비슷하다고 생각할거에요. 일상 속 이야기 외에 중요한 회의 중 급작스럽게 화장실을 가야 한다던가, 터키에서 성추행범을 만난다던가 하는 비일상적인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만 상대적으로 비중은 적습니다. 다음 책도 이런 내용이라면 선뜻 구입하지는 않을듯 합니다. 책의 볼륨에 비하면 가격도 다소 과한 측면이 없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 1 : 서귤 작가의 직장이 좀 의외였습니다. 이전 단행본을 봤을 때에는 큰 회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구내 식당에다가 기숙사가 딸려있는 연수원에 고과 체계도 완벽하게 갖춰진 대기업이더라고요. 보통 이런 직장에서 근무하면 책을 내는 등 별도의 영리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어떤 회사인지 좀 궁금해집니다.

 덧 2 :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복면 작가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유튜버까지 하시더군요? 더더욱 궁금합니다. 이 정도면 투잡 수준이 아니잖아요? 

덧 3 : 책 안에서는 아이돌 P군을 좋아한다고 되어 있고 간략한 정보만 드러내는데, 인스타그램을 가 보니 워너원의 박지훈 군 실명을 써 놓았더군요. 그냥 책에서도 이름을 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 4 : 팬이라고 자칭하지만 "환타스틱 우울백서"를 구입하지 않은 이유는, 예전에 "우울증 탈출"을 읽었던 탓입니다. 남이 앓은 우울증에 대한 투병기는 아무리 개그 작가가 그리더라도 재미를 느끼기 힘들다는걸 깨달았거든요.

2020/12/18

빨간 리본 - 헨닝 망켈 / 홍재웅 : 별점 2점

빨간 리본 - 4점
헨닝 망켈 지음, 홍재웅 옮김/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헤세발렌에서 열 아홉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자들은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비르기타 로슬린 판사는 병가 중에 충동적으로 헤세발렌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록들을 통해 피해자 중에 어머니의 양부모가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르기타는 미국 네바다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고 이야기해 준 빨간 리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냈고 간단한 조사로 수상한 중국인 손님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정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르스 에리크 발프리드손이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던 탓이었다.
그 뒤 휴가를 얻어 친구 카린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던 비르기타는 수상한 중국인 손님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이다가 당한 강도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 실력자인 훙취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훙취는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동생 야뤼에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비르기타에게 전해지는데...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 (헤닝 만켈)이 쓴,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창조한 유명 탐정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아닙니다. 비르기타 로슬린이라는 헬싱보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요.

2006년 1월, 한 마을에 사는 친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 아홉 명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왜 이런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비르기타 로슬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서류를 통해 피해자들이 '안드렌' 집안 사람들이라는게 이유일 거라고 추리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네바다의 안드렌 일가도 얼마 전 처참하게 살해된걸 알아내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뒤, 갑작스럽게 1863년의 중국인 '싼'이 겪는 역정이 그려지는데, 흥미롭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속아서 미국으로 끌려간 뒤, 네바다에서 철로를 놓는 노역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을 잃고, 중국으로 귀향한 뒤 선교사들 때문에 결혼할 여자와 뱃속 아이마저 잃어 복수귀가 된다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엄청난 내용이거든요. "황비홍" 1편에서 '금산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 뒤 노예로 팔아먹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빨간 리본의 출처, 에덴 호델 주인의 증언과 피해자 유품인 JA의 일기를 통해 사건 배후에 중국인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게 됩니다. 중국인 '싼'의 후예인 냉혈한 야뤼가 철천지 원수인 안드렌 가문에게 복수를 집행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합친건 아무리 무리수였습니다. 거의 150년 전, 증조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철로 노역 감독관 후손들을 죽인다는 동기부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싼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펼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거에요
 물론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 일가를 모두 몰살시키는건 억지입니다. 미국 노예의 4~5대 쯤 되는 후손이 복수를 위해 노예선 선장이었던 백인 후손들을 몰살시킨다면, 미국에는 남아날 사람이 별로 없을거잖아요? 

게다가 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야뤼가 등장한 뒤부터는 이야기는 아예 다른 길로 향합니다. 중국 특권층이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빈부격차로 분노한 농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농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탓입니다.
계획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마오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정책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설득력이 높거든요. 관련된 자료 조사가 철저했던 듯 싶네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함이 잘 살아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채 50Kg이나 되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아낙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아내의 황당무계한 권력욕으로 유명해진 무가베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설명되는 짐바브웨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습니다. 또 이 계획이 식민지 주의의 재현이라며 반대하는 훙취와 야뤼의 대결도 볼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본편 살인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다른 작품에서, 다른 주제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별 상관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1/3 분량을 할애한 뒤, 누나인 훙취까지 제거한 야뤼가 비르기타를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서고, 훙취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작 중에서 야뤼는 전용 비행기까지 있는 거부이자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발상부터가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없을 외국인 여판사를 중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직접 죽인다? 말이 될 리가 없지요.
몰래 커피에 유리 가루를 섞는다는 살해 방법도 불확실합니다. 많이 어설퍼 보였어요. 이보다는 초반부에 벌어진 헤셰발렌 사건을 직접 저질렀다는게 차라리 말이 될겁니다. 그 사건 피해자들은 납득은 잘 돼지는 않아도 가문의 원수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니까요. 

전개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에덴 호텔에서 리우신이 야뤼의 사무실 주소를 적은 팜플렛을 두고 간 것, 마침 중국 베이징 여행을 간 비르기타가 그 건물을 탐문하다가 강도를 당한 것, 그래서 훙취와 만나게 된 것 모두가 우연입니다. 비르기타가 중국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야뤼가 런던에 나타나 죽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덧붙여, 주인공인 비르기타 판사의 행동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녀는 지나치게 경찰을 불신합니다. 그녀가 중국인이 배후에 있음을 알렸음에도 경찰이 무시한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흉기까지 공개한 용의자가 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사건 담당 경찰 비바 순드베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중요 물건이었던 일기장을 훔친 그녀를 용서해주고 일기장을 빌려주는 등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비르기타는 경찰을 불신할까요? 판사가 경찰을 이렇게까지 불신해도 되는걸까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야뤼의 살의를 눈치채고 런던으로 도주하는 과정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 없는 중국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경찰이 움직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 호텔 주인 스튜레 헤르만손이 수상한 중국인 투숙 후 살해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텔 투숙객 장부가 없었졌고, CCTV라는 증거도 있고요. 스튜레 헤르만손이 전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다음 목표가 비르기타라는 것도 합리적인 추리일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왜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중국인 여자 말만 믿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 외에도, 비르기타가 소싯적 마오 사상에 경도된 극좌였다는 설정도 불필요했고 야뤼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면서 스튜레 헤르만손을 살해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빨간 리본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고요. 살해 현장에 리본을 남길 이유는 나오지 않거든요. 구태여 해석해 보자면, 서구권이 노략질하고 약탈했던 중국이 복수자로서 돌아왔다는 상징적 의미이겠지만, 추리물 기준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단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제법 빠른 시점에서 중국의 위협을 드러낸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된 드라마도 제법이었고요. 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디테일들 중에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이라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0/12/13

배트맨 어드벤처 : 매드 러브 디럭스 에디션 - 폴 디니 / 브루스 팀 : 이규원 : 별점 3점

배트맨 어드벤처 : 매드 러브 디럭스 에디션 - 6점
폴 디니 지음, 브루스 팀 그림, 이규원 옮김/시공사(만화)

저는 브루스 팀을 좋아합니다. 이전 TAS 때 팬이 된 이후, 항상 우러러보고 있었죠. 전형적인 미국풍 선 굵은 카툰 터치로 그려낸 멋진 히어로들 일러스트는 반할 수 밖에 없어요. 깔끔한 선 몇개로 그려낸 역동적 그림은 동양화적인 느낌도 전해주고요. 

그러나 우리나라에 그의 작품이 출간된 이력은 없어서 아쉽던 차에, 할리 퀸의 탄생을 다룬 걸작 "매드 러브"가 디럭스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브루스 팀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한 목적으로요. 작년에 출간되었는데, 구입이 너무 늦었네요.

내용은 이전에 이미 원서로 접해보았고, 애니메이션으로도 감상했었기에 딱히 새로운건 없었습니다. 오로지 브루스 팀 작품 소장이라는 목적에 부합할 뿐이지요. 다행히 발표된 만화 외에도 손수 작업한 육필 원고 원본, 그리고 컬러링 지시용 원고까지 수록되어 있어서 단행본 완성도는 높습니다. 특히나 커버를 벗긴 양장 표지에 할리 퀸이 제대로 음각되어 있다는게 완전히 취향 저격이었어요. 몇몇 단행본 커버, 일러스트 수록도 반가왔고요.

물론 컬러링 체크 원고는 실제 원본과 별 차이도 없고, 특별한 코멘트도 많지 않아서 그냥 분량 채우기에 불과해 보이기는 합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디테일 - 빨간색으로 입술을 칠하는 컷에서 '아랫 입술만 빨갛게', 또 다른 컷에서는 '이 패널에서는 빨간 입술 안돼요!' 라고 체크하는 등 - 에서는 확실히 거장은 뭔가 다르구나 싶은 느낌을 전해 주었지만, 딱히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고요.

때문에 잘 모르고 구입하신다면, 절반 이상이 필요없는 내용, 단순한 분량 채우기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같은 팬에게는 놓칠 수 없는 선물같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단, 브루스 팀 팬이 아니시라면 구입을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가격도 비싼 편이니까요.

2020/12/12

탐정 혹은 살인자 - 지웨이란 / 김락준 : 별점 3점

탐정 혹은 살인자 - 6점
지웨이란 지음, 김락준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청은 한때 대만 연극계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지만 술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크게 상처 입혔던 사건을 계기로 교수직을 그만둔 뒤, 슬럼가같은 골목 워룽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첫 의뢰인 린부인의 의뢰는 갑자기 남편을 미워하게 된 딸아이 행동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미행과 탐문을 통해 린씨와 불륜 관계로 보였던 미스 추는 병원 대상으로 협박을 일삼던 범죄자였다는게 드러나고, 린부인은 이혼했다.

그 뒤 워룽제 주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우청은 체포되었다. CCTV로 피해자들과 근처에 있었다는게 드러났으며, 결정적으로 범인이 우청으로 변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번째 사건에서 범인 스스로 변장을 드러내 우청은 풀려난다. 경찰과 수사에 함께 참여한 우청은 범행 장소가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정확히 4방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 범인의 변장 기술은 전문가에게 배웠을 거라는 것 등 여러가지 추리를 선보이고, 결국 범인이 자신을 추종하던 극작가 쑤훙즈라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경찰은 꼭꼭 숨은 쑤훙즈를 체포하지 못하고, 결국 다섯번째 범행이 벌어지는데....

"내 심경이 어땠냐 하면 좆나 엿같았습니다!"

중국 추리 소설은 몇 편 읽어보았지만 대만 추리 소설은 처음 읽어 보네요. 그런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에는 주인공 우청의 지분이 상당합니다. 독특하면서도 생생한 매력을 그야말로 '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본인 실수로 스스로 루저의 길을 택했다는건 정신병을 앓는 탐정, 주정뱅이 탐정, 패배자 탐정 등 다른 루저 탐정들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살아있다!'는 걸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차이는 큽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는 다른 루저들과는 정 반대지요. 우청 역시 루저가 되는걸 선택한 뒤 워룽제 골방으로 숨어든건 혼자 우울하게, 어둡게 지내보겠다는 취지이기는 했습니다. 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경찰, 언론은 물론 범인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맞서 싸우면서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루저가 아니라 시민 영웅인 셈입니다.

또 우청은 사회에 대한 불만도 딱히 없고, 내면에 특별한 분노도 없습니다. 가족과도 그런대로 원만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루저의 길을 택한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서 현실감이 넘칩니다. 루저가 된 계기인 공황장애라는 병과 연극인들에게 상처를 준 '구이산다오' 사건 설명도 상세하고 현실적이고요. 어린 아이를 죽이거나, 믿었던 아내가 바람나서 도망갔다던가,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상황보다는 훨씬 와 닿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냥 루저는 아닙니다. 명확한 주관이 있으며 추리력도 갖춘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생각, 견해를 드러내는 언변과 재치도 대단하고요. 루저 탐정들이 보통 경찰 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먹고 살려고 탐정이 된 반면, 우청이 '사설 탐정'이 된건 지병 탓이라는 독특함도 눈에 뜨여요. 공황장애로 생긴 불면증으로 많은 책을 읽어서 사람 내면을 파악하는 기술을 습득했다는게 이유거든요. 스스로 추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추리 소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읽었고 타이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게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하지요. 한 마디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루저 탐정입니다. 이런 기묘한 캐릭터를 이렇게 잘 그려낸 작가에게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우청 탐정에 대한 여러가지 설정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린 부인, 천제루가 의뢰한 첫 번째 사건부터 흥미로운 부분이 있거든요. 미행과 탐문, 단도직입적 질문으로 답변을 끌어내어 해결되기 때문에 추리할 여지가 많지는 않지만, 린 선생이 받은 분재 동호회 회원 메일에 포함된 상품 번호가 날짜와 버스 번호, 내릴 정류장을 알리는 일종의 암호문이라는걸 찾아내는건 재미있었어요.

이어지는 본편 사건인 연쇄 살인 사건은 무려 다섯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라서 당연히 추리적으로 훨씬 풍성합니다. 우청이 체포되었을 때 당했던 부당한 처사를 이용하여 경찰 수사에 합류한다는 설정부터 괜찮습니다.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 연쇄 살인에 뛰어들어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찰과 협조해야 하니까요.
이후 수사 과정에서 우청이 단서를 하나씩 짚어내는 과정도 볼만해요. 우청이 7월 7일 타이베이에 없었다는걸 증명한 뒤, 7월 7일 CCTV를 뒤져 자신으로 변장한 범인 행적을 추적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범인이 변장의 달인이라는걸 알아낸 우청은 이 정도 변장은 어딘가에서 배웠을 것이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관련 세미나와 강의를 뒤져 수강생 명단에서 범인 쑤훙즈를 찾아내게 되지요.

불교의 사상, 이론과 상징을 연쇄 살인 사건에 녹여낸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기독교 상징에 따라 일어난 작품은 있었습니다. 묵시록 예언을 따르는 식으로요. 동요그림, 수학 법칙, 음악, 바둑, 체스, 심지어 추리 소설에 따라 일어났거나, 주요 소재가 된 작품도 읽어 보았었고요. 그런데 불교라니! 그동안 제가 읽어왔던 거의 1000편에 가까운 추리 소설 중 이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불교적인 상징이 사용된건 피해자들이 선택된 이유가 만(卍)자에 해당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초 피해자들은 우청을 중심으로 위도, 경도가 정확한 정4방향 꼭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해당 위치에서 무작위로 희생자를 선택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정사각형이 완성되었으니, 가운데 있는 우청만 남은 셈이지요.
그러나 5번째 사건이 일어난 위치를 확인하여 도형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불교의 만(卍)자를 그리고 있다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범인 쑤홍주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우청을 깨우치게 만드는 종교적 목적이었고요. 물론 이는 불교 사상은 아닙니다.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우리에게는 현생만 있는데 현생은 지옥이라는' 정신병자 쑤홍주 자신만의 주장이지요. 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불교 사상에 닿아 있으며, 여러가지 소재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핵심 키워드였던 금강경의 한 구절 -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으면 머물러 있는게 아니니라" - 해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기 위하면서 겉모습에 미혹된다는 거지요. 즉, 어떻게 사는게 편안한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일을 걱정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 거고요. 그래서 진짜 편안해지려면, 겉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불교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데, 모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곁가지로 진행되는 황색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사회 지도층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풍자하는 장면들도 재미납니다. 우청이 범인으로 몰렸던 상황에서 언론의 부정확한 추측 보도와 취재 경쟁이 블랙 코미디처럼 묘사되거든요. 우청의 보복 고소에 대한 묘사도 속 시원합니다. "언론 건드려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에 언론이 사람 잘못 건드린 줄 알라고 하세요. 나는 공익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난 그저 법원에서 언론에 한 방 먹이고 싶을 뿐입니다." 라고 일갈하는데, 멋지더라고요. 이런저런 결탁으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지만, 고소라도 한 게 어딥니까. 우리 나라도 이런 고소, 그리고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가 일상화, 법죄화되면 좋겠네요.

잘 모르는 대만의 복잡한 도시 묘사, 이런저런 문화와 풍습들 묘사도 새로움이 많았습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족발 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요. 서민적이고 사람사는 느낌 가득한 묘사도 정겨움을 더해 줍니다. 우청과 어머니의 관계는 물론, 우청과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 모두 서민적이고 정감가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거든요. 왁자지껄하면서 잔 정이 넘치는게 우리나라와도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수선스럽고 요란한 점은 옛날 보았던 홍콩 코미디 영화 정서와 비슷하다고 생각도 되네요.

그러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왜 쑤훙주가 우청을 함정에 빠트렸다가 바로 풀려날 수 있도록 범행을 저질렀는지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요. 우청을 고난에 빠트리려면 그를 살인범으로 모는게 당연했을텐데, 너무 쉽게 혐의를 벗겨주는 느낌이거든요. 우청도 이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등장하지 않고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추리도 기발함은 있지만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정교함을 느끼기 힘든건 마찬가지입니다. 범인 쑤훙주가 변장의 달인이라는게 전부니 어쩔 수 없지요.
경찰도 너무 하는게 없습니다. 우청과 동료들의 노력으로 범인이 쑤훙주라는게 드러난 이후에도 체포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무능해 보였고요. 쑤훙주의 집과 변장한 모습을 우청이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도 없어요. 대만의 치안이 심히 우려되더라고요.

마지막 결말은 지나치게 전형적입니다. 우청을 사로잡은 쑤훙주가 우청을 죽이기 전에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뒤, 때맞춰 나타난 경찰에게 사살당하는데 여러모로 너무 시시했어요.

그래도 독특함, 신선함이 가득차 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우청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영상물에 어울릴 듯 싶은데, 영화가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20/12/11

피너츠 완전판 18 : 1985~1986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3점

피너츠 완전판 18 : 1985~1986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완전판도 18권째군요. 전권을 읽고 탄력받은 김에 곧바로 집어들어 읽게 되었습니다.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야구 이야기와 슈로더, 루시, 라이너스 등의 비중이 많이 줄었다는 겁니다. 심지어 찰리 브라운의 비중도 줄어든 느낌이에요. 줄어든 자리는 마시와 패티, 스파이크 이야기가 채우고 있습니다. 마시와 패티 이야기는 언제나의 뻔한 설정에 바탕을 두고는 있지만 나름 재미는 있어요. 문제는 스파이크 이야기입니다.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비중이 높지만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개그도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고요.

다행히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새로운 캐릭터 타피오카 푸딩도 반가왔어요. 광고, 라이선스 업계를 풍자한 듯한데, 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아래처럼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사랑이 거짓말이라는 스누피의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찰리 브라운의 전문가 발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죠. 가슴이 아련해집니다.

루시의 독설도 여전해서 반가왔어요.

그 외에도, 라이너스가 마음에 든 소녀에게 말을 걸지만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하는 이야기 등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인용문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상세히 알려주는 등 완성도도 완전판이라는 말에 걸맞게 빼어납니다. 스크린톤이 처음 사용된 에피소드까지 알려줄 정도니 말 다했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2020/12/10

묵시록의 여름 - 가사이 기요시 / 송태욱 : 별점 3점

묵시록의 여름 - 6점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세 이단 카타리파에 대해 연구하던 야부키 가케루는 나디아와 함께 카타리파 최후의 전장이었던 몽세귀르로 향했다. 툴루즈 기업왕 로슈포르 가문이 카타리파 유적 발굴을 원조하고 있는데, 발굴을 맡은 샤를 실뱅 교수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슈포르 가문의 산장 에스클라르몽드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기묘한 살인 사건을 목격했다. 독일인 발터 페스트가 에스클라르몽드 산장 자료실에서 살해된 사건이었다.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장 노디에가 성곽도시 카르카손 성벽 탑 안 밀실에서 살해당했고, 로슈포르의 아내 니콜 로슈포르와 로슈포르마저도 몽세귀르 절벽에서 추락사했다. 이 모든 사건에는 '요한 묵시록'의 계시처럼 여러가지 상징과 말의 죽음이 함께 펼쳐져 있었다.
로슈포르 가문의 외동딸 지젤의 연인 줄리앙은 탐정 역을 맡아 사건 해결에 뛰어들고, 야부키 가케루는 이를 바라보는데...

"사건을 어디까지나 현상으로, 즉 의미와 의미가 뒤얽힌 유기체적 전체로 보고, 거기에서 전체의 지렛대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야." - 야부키 가케루 

"뭔가를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상징은 뭔가를 은폐하기 위한 암호가 되는 거죠." - 줄리앙

가사이 기요시의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썸머 아포칼립스"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고전 명작으로 '문예춘추 선정 미스터리 100선' 에는 36위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서는 무려 4위고요. 하지만 개정된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의 상위 50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리뷰를 하면서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번역되었는지 모르고 있다가, 무려 5년이 지난 얼마 전에야 우연히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부끄럽네요. 구태여 변명하자면 제목이 제목이 한국어로 번역된 탓입니다. 전작 "바이바이 엔젤"은 원제 그대로 출간되었는데 말이죠.

하여튼, 작품은 명성답게 본격물로서는 완벽합니다. 트릭의 수준도 높고,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고전 본격물다운 불가능 범죄,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를 절묘하게 수습하고 있거든요.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사건이 그러합니다.

첫 번째 사건 피해자 발터 페스트는 머리 앞 부분을 둔기에 맞아 살해당했습니다. 피해자가 창을 통해 들어온,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흉기를 든 침입자를 봤을텐데 저항없이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자료실 창문은 이미 열려있었는데 범인은 왜 창문을 깼을까요?
그리고 흉기인 석구에는 요한이 부조되어 있었는데 이는 요한 묵시록 제 6장과 관계가 있다는게 밝혀집니다. 흰말 한 필 위에 사람이 활을 들고 있었다는 묵시록 내용에 따라 시체는 화살을 맞았으며 마굿간에 있는 흰 말도 죽은채 발견되지요. 범인이 이렇게 묵시록처럼 현장을 꾸민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수수께끼에 더해 사건 관계자들 모두 알리바이가 명확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두 번째 사건은 더 기괴합니다. 장 노디에는 잠긴 탑이라는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됩니다. 자살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상황으로요. 그런데 묵시록처럼 현장에는 큰 칼이 놓여 있었고 탑 밖에는 밤색 말이 죽어 있었습니다. 장 노디에가 자살했다면, 그가 자신의 자살 현장을 묵시록처럼 꾸밀 이유가 있었을까요?

세 번째 사건에서는 로슈포르의 아내 니콜이 절벽에서 추락하고, 현장에서 묵시록대로 죽은 검은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실뱅 교수가 도주한게 목격되었기 때문에 그가 범인일거라 여겨지게 됩니다. 야부키 가케루와 나디아의 조사로 실뱅 교수는 동기가 있다는게 밝혀지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 현장에 모인 관계자들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했고요.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로슈포르 추락사 이후 줄리앙에 의해 진상은 드러납니다. 여기서 묵시록 효과를 위해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뿌렸지만, '말'에 주목해야 한다는 추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묵시록에 다른 연쇄 살인은 다른 작품들("장미의 이름", "사쿠라 신부의 사건 노트 - 고도관 살인 사건")에서도 써먹었던 식상한 소재인데, 묵시록은 본질을 흐리기 위한 연출일 뿐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말은 그냥 마굿간에서 죽여도 되는데,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에서는 현장 근처에서 말이 죽은 채 발견되었죠. 줄리앙과 가케루는 말이 범행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합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는 말의 힘을, 세 번째 사건에서는 속도를 이용한 거지요.

두 번째 사건에서 말의 힘은 밀실 안 피해자의 목을 밧줄로 걸어 밖에서 잡아 당기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빠져나갈 수는 없지만 창문은 있었거든요. 밖에서 피해자 노디에의 이름을 부르고, 피해자가 내다보기 위해 깊은 창에 머리를 내밀었을 때 창 주위에 바늘로 고정하여 둘러친 밧줄 올가미를 단번에 조여 살해한 겁니다.
이는 추리 애호가라면 친숙하실 유명한 장치 트릭입니다. "소년 탐정 김전일 26. 마신 유적 살인 사건"에서도 비슷한 트릭이 사용되었지요. 밖에서 이름을 부른건 아니고, 밀폐 공간에서 가스 냄새가 나도록 해서 피해자가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게 만들있다는 차이는 있지만요.
"명탐정 코난. 25 거미의 집"에서도 창 틀 테두리에 줄을 올가미처럼 장치하고 창에 소리가 나도록 해서 (BB탄 총을 이용) 피해자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게 한 뒤, 밖에서 강한 힘으로 낚아채는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똑같아요. 시대에 걸맞게 '말'이 아니라 '자동차'를 이용하여 밧줄을 당겼고, 거미님 전설을 이야기에 녹여내었다는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이렇게 후대에서도 모방한다는건 그만큼 잘 고안된 트릭이라는 뜻이겠지요.

세 번째 사건에서는 말의 속도를 이용했습니다. 범인 로슈포르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때 타고 갔던 겁니다. 이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범행에서는 말이 현장에 있을 수 밖에 없어서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고요. 아주 그럴듯해요.

첫 번째 사건도 묵시록 효과를 빼고 사건 현장에만 주목하여 범인의 트릭을 풀어낸다는 추리를 통해 해결됩니다. 범행에 '투석기'가 사용되었다는 건데, 아주 기발했어요. 사건 현장 건너편 건물에서 동그랗고 무거운 석구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데 이만큼 적합한 흉기는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피해자가 멍하니 머리 앞 쪽에 석구를 맞은 이유도 설명되고요.
실제로 머리에 제대로 맞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서 투석은 유리창을 깨기 위함이고, 진짜 흉기는 쇠뇌로 쏜 화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았습니다. 투석에 사용한 석구가 요한 묵시록을 암시하는 조각품이고, 쇠뇌와 활 역시 그러해서 묵시록처럼 현장을 꾸민 발상도 기가 막힙니다. 카타리파의 복수, 혹은 페스트에게 원한이 있는 실뱅 교수에게 혐의를 돌리기에 딱 맞는 연출이었어요.

사건과 함께 진행되는 카타리파의 숨겨진 보물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없어진 문서는 13세기 알비주아 십자군의 지휘자로 카타리파를 잔혹하게 살육했던 생조르주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게 보냈던, 카타리파의 숨겨진 보물에 대한 서한일 거라고 설명됩니다. 생조르주는 서한을 보내기 직전 일어난 카르카손 폭동으로 도주하다가 암살당했고, 품 속의 서한은 생조르주가 암살당한 성당인 베네딕트회의 수도사가 은닉했었죠. 베네딕트회는 생조르주가 속했던 도미니크회와 대립했던 탓으로, 이후 책임 추궁이 두려워 이를 영원히 생세르낭 성당에 묻었던 겁니다. 콜베르가 편찬했던 도아트 문서에 생략된 부분은 이 생조르주 서한인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아트 문서에는 기록되었던 걸까요? 콜베르는 실용주의자로 보물을 재정문제로 치부했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생조르주 서한을 찾아 나섰죠. 결국 생세르낭 성당에서 서한을 발견하는데, 상황이 변했습니다. 처음 서한을 찾아나섰던 8년 전에는 콜베르는 푸케와 경쟁하던 상황이라 왕에게 보물을 바치고 싶었지만, 8년 뒤 콜베르가 왕궁에서 차지한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기에 그는 왕에게 보물을 바치지 않고,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감췄습니다. 그럴듯하죠?
그러나 콜베르 사후, 이 내용은 왕에게 누설되어 도아트 문서는 헌상되었고, 그 때 생조르주 서한 부분이 삭제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중 우연찮게 발굴된 생세르낭 문서, 그리고 생조르주의 서한을 향토 사학자 투르뉘가 손에 넣었지만, 그는 나치 독일군에게 체포되었고 문서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나치 독일 군인이 발터 페스트였고, 투르뉘의 유복자는 샤를 실뱅이었다는 관계도 여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숨겨진 보물의 위치가 기록된 서한을 13세기 십자군을 대표하는 도미니크 수도회, 17세기 부르봉 왕조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콜베르가, 20세기 유럽의 최고 권력이었던 나치 친위대 모두 손에 넣었는데 모두 암호를 해독하지 못해 발굴에 실패했다는건 말이 안되기는 합니다. 작품에서는 이들 중 독일군이 결국 매장된 보물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고 설명해 주는데, 보물은 카타리파의 상징인 거대한 황금 태양 십자가라고 합니다. 종전 후 미군이 입수한 뒤 사라져 버렸다고 하네요. "레이더스"와 동일한 결말입니다만, 시기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빠르니 원조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거에요. 이 역시 나름대로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인 셈이죠.
줄리앙이 투석기 잔해를 버리는 행동, 절벽을 등산 장비를 이용하여 수직으로 타고 내려와 알리바이를 만든 것 등 세세한 부분도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러웠어요.

카타리파 보물이 사건의 중요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덕분에 관련된 설명도 상세합니다. 묵시록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적으로는 묵시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아주 좋았어요. 소네 신부를 통해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잘 설명되고 있거든요. 원래 유대인들, 그리스도교들 모두 묵시록을 열심히 믿었지만,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그리스도교는 더 믿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박해하던 로마가 멸망하고 신의 왕국이 오기를 고대하며 믿었는데, 로마 제국이 자기 나라가 되어버렸으니 그 멸망을 고대할 이유가 없어진거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민족 종교로 유대인들만의 왕국을 기다렸기에 그리스도교와 다른 길을 갔고요. 그래서 묵시록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단이 된 겁니다.

그리고 남프랑스 일대 풍광이 소개되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나쁘지 않았어요. 파리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들에 둘러 싸여 있는 마을 몽세귀르와 몽세귀르 절벽에 위치한 카타리파 유적, 카타리파 최후의 전장인 성곽도시 카르카손, 항구 도시 마르세유를 거쳐 몽펠리에 옆 작은 도시 세트까지의 여정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게 펼쳐지거든요. 심지어 실존하는 카르카손 성곽도시의 탑 안에서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하니 여정 미스터리로 보아도 손색없을 수준입니다.

여기까지 정리된 내용만 보면 본격물로 완벽하고, 보물 찾기 이야기도 잘 결합된 걸작으로 보이지요? 하지만 발표 이후 여러가지 리스트에 포함되었다가 지속적으로 순위가 하락한 이유도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 큰 헛점이 있을 뿐더러, 그 외의 단점도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인 큰 헛점은 여러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로슈포르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입니다. 노디에가 자신을 협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한 들, 남프랑스 재계의 지배자가 눈 하나 깜빡할 이유가 있을까요? 게다가 니콜이 실뱅과 불륜을 저지른다고 한 들, 이는 니콜의 잘못입니다. 로슈포르가 니콜의 아버지 피에르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는 요소이지 피에르와의 동맹이 깨질 위험 요소는 아니에요. 설령 위협을 느꼈다 한 들, 재계의 제왕이 직접 복잡한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범행의 순서입니다. 발터 페스트 살해는 이어지는 진짜 살인 목적을 흐리기 위함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를 살해함으로써 생조르주 서한이 노디에의 손에 들어간건 순전히 우연입니다. 게다가 노디에를 살해한 두 번째 살인은 공들여 만든 밀실 트릭으로 경찰도 자살로 생각했을 정도인데 세 번째, 네 번째 사건을 계속 일으킨다면 밀실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순서상으로는 생조르주 서한을 어떻게든 노디에게 전해주고 페스트를 죽인 뒤, 니콜을 죽이고 노디에를 밀실에서 죽여서 자살로 위장했어야 합니다. 지금의 이야기는 트릭을 위한 범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마지막에 로슈포르가 줄리앙과 격투를 벌이다가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결말도 시시했고요.

이런 추리적인 문제에 더해, 개인적으로 더 큰 문제라 생각하는건 쓸데없는 철학적, 종교적 이야기와 함께 테러 조직 '붉은 죽음'과 러시아인 니콜라이 일리치의 존재가 이야기에 깊숙히 개입해 있다는 점입니다. 탐정이라 생각했던 줄리앙이 사실은 붉은 죽음의 조직원으로 로슈포르 가문의 재력을 이용하여 원자력 제국을 만드려고 한다는게 진상이었다는건 솔직히 헛웃음만 나오더라고요.

시몬이라던가 야부키 가케루 입을 통해서 이야기되는 종교적, 철학적 담론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탐정 역할도 줄리앙이 담당하고 있어서 야부키 가케루는 이런 쓰잘데 없는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 강하고요. 읽다보면 두 번째 사건에서 야부키 가케루는 진상을 파악한걸로 묘사되는데, 희생자가 더 나올 때까지 손도 쓰지 않습니다. 줄리앙이야 로슈포르 부부가 죽어야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라도 있지, 야부키 가케루가 사건을 그냥 지켜만 볼 이유는 없어요.
이렇게 무의미하게 분량을 잡아먹느니 줄리앙을 정의의 명탐정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400페이지 정도로 줄이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이래서야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라고 부르기 창피할 정도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트릭은 멋집니다. 역사적 소재를 작품에 잘 끌고 들어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요. 그런데 지금 읽기에는 좀 애매하고, 지루하며 단점도 명확한 편입니다. 책 뒤 해설을 보니 역자분께서 시리즈 최고작이라는 "철학자의 밀실"이 출간될 수 있도록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적고 계신데, 시리즈 출간이 더 이어지지는 않은 듯 싶군요. 약간은 아쉽지만 당연한 결과에요. 발표된지 거의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던 시리즈였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 아니라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2020/12/06

동급생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동급생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슈분칸 고등학교 야구부 주장 니시하라 소이치는 야구부 매니저 미야마에 유키코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학기 초에 충동적으로 니시하라와 관계를 가졌었다. 니시하라는 유키코가 차도로 뛰어들은 이유는, 임신해서 산부인과에 가다가 고전 선생이자 학생 지도부 선생인 미사키 후지에에게 쫓긴 탓이었다는걸 알고 미사키 선생을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미사키 선생이 교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천문부 부장 미즈무라 히로코가 자살 미수 상태에 빠졌다. 니시하라는 야구부 친구들과 탐문 조사를 벌인 끝에, 학생 지도부장인 하이토 선생이 처음부터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극 초기작으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청춘 미스터리 장편입니다. 

추리적으로는 괜찮습니다. 범행 동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교묘하게 감춘 덕입니다. 읽는 내내 미사키 후지에를 살해할만한 사람과 동기를 떠올리기 힘들거든요. 중반 이후 하이토 선생이 진범일거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는 합니다. 유키코가 죽었을 때, 미사키 후지에 말고 하이토 선생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요. 그러나 하이토의 알리바이는 트릭을 사용할 여지없이 완벽하게 입증됩니다.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게 살인을 저지를만한 동기도 아니고요.
유키코의 부모님 쪽이 동기는 더 확실합니다. 미사키 후지에가 뒤쫓아 간 탓에 딸이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도 범인일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 미사키 후지에 선생을 불러내기도 어렵고, 압박 붕대를 이용하여 니시하라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용의자들은 모두 범행을 저지를 수 없어서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드는데, 진상은 미사키 후지에가 자살했다는 겁니다. 생각도 못했지만 설득력은 높아요. 

그녀가 자살할 때 사용된 트릭도 볼거리입니다. 그녀는 목에 붕대를 감고 한쪽 끝은 가스 밸브에, 다른 한쪽 끝에 덤벨을 매단 뒤, 학생들 사물함 속 내용물을 이용하여 만든 경사를 이용하여 덤벨을 창 밖으로 굴려 내렸습니다. 무거운 덤벨은 분해하여 현장에서 조립했고요.
단서 제공도 본격물 수준으로 공정합니다. 미사키 후지에가 관리 담당자였던 육상부실에 압박 붕대와 덤벨이 있었다는 증언, 미사키 후지에 자살 현장에서 어떤 학생이 자기 사물함 속 내용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 교실 내 가스 밸브와 창 틀에 생긴 자국에 대한 설명, 교실 밖 벽에 생긴 이상한 흔적 묘사 등 관련된 정보 모두가 독자에게도 남김없이 제공됩니다.

목을 멘 붕대에 자살한 이유와 하이토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하게 써 놓았기 때문에 -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나만 비난한다, 하이토 선생이 자기를 지켜줄걸로 믿었는데 여고생 제자와 불륜 관계를 가져서 나를 배신하더라 등 - 뒤늦게 연락을 받고 나타난 하이토 선생이 현장을 수습하고 살인으로 위장했다는 것도 그럴듯했어요.

아울러 사건에 대해 주인공 니시하라가 나름대로 추리력을 선보이는 장면들도 꽤 괜찮았습니다. 신문 기사를 토대로 미사키 후지에를 죽인 흉기는 리본이 아니라 압박 붕대라고 추리하는 장면, 미사키 선생 자택에 남겨져 있던 워드프로세서 속 시험 문제인 '만장기'는 이미 지난 학기 문제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녀가 자살했다고 추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리본이 흉기라는게 언급되지 않은 이유가 신문 기사는 사실만 써야 하기 때문이라는건 근거가 빈약합니다. 흉기를 숨기는 건 범인 심문 때 써먹기 위해 경찰이 곧잘 벌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한 마디로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지요.

미조구치 형사의 추리력도 돋보입니다. 니시하라의 반응만으로 그가 유키코를 진짜 사랑하지 않았다는걸 알아냈다는건 억지스럽지만, 이를 철저한 수사로 뒷받침하고 있다는건 마음에 듭니다. 유키코에게 연하장도 보내지 않았고, 전화 한 통 없었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었다는 등 증거는 차고 넘치니까요. 그 뒤 히로코와 니시하라가 연인이었다는걸 밝혀낸 과정도 설득력 넘치고, 니시하라가 미사키 후지에 사건 범인이 아님을 확신한 이유도 타당합니다. 미사키 선생이 니시하라를 만나는데 꽃단장을 하고 올 이유도 없고, 니시하라가 범행에 구태여 붕대를 쓸 이유는 없으니까요. 손으로 조르는게 당연하죠. 이렇게 전반적인 추리 관련 내용들은 모두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부분들은 문제가 많더군요. 먼저, 니시하라를 비롯한 학생들이 선생님, 경찰 등 어른들 모두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치기어린 묘사는 불편했습니다. 선생님들에 대한 적대감이 특히 지나칠 정도에요. 선생님들 거의 모두를 학교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악인으로 그려졌는데 공감하기도 힘들 뿐더러, 시대착오적인 묘사였다 생각됩니다.
니시하라의 여동생 하루미가 선천적으로 병을 가지고 태어난건, 미즈무라 히로코의 아버지가 임원으로 있는 반도체 공장에서 폐수를 방류한 탓이라는 곁가지 이야기도 사족으로 느껴집니다. 사회파 흉내를 낸 걸까요? 그러나 사회 고발성 메시지는 강하지 않고, 오히려 이 때문에 주인공 니시하라가 사건의 원흉이라는게 불거질 뿐입니다.
원래 니시하라는 미즈무라 히로코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로코의 아버지를 만나 하루미가 병을 가지게 된 폐수 방류 사건에 대해 비난한 뒤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다가 딱히 사랑한다는 감정도 없이 충동적으로 유키코와 관계를 가졌는데 그녀가 덜컥 임신하게 된 거지요. 한마디로 모든 사건의 원흉입니다. 유키코 부모님에게 살해당해도 할 말이 없을거에요. 이런 녀석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교사들을 폄하하며 정당함을 어필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와 닿을리가 없어요. 이런 점들 때문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청춘 미스터리 느낌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교사, 어른들과 싸울 생각만 가득한,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들이라 풋풋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그나마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야구 시합에서 패한 뒤, 모든 힘든 과거는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마무리는 청춘물답습니다만... 앞서 이야기한대로 니시하라가 과거를 떨쳐버린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죗값을 치루는게 맞아요. 청춘이라는 말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동기, 진상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미사키 선생이 이렇게 복잡스럽게 자살 현장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그냥 교실 아무데서나 붕대로 목을 메면 끝날 일인데, 덤벨을 조립하고 굴려내리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니시하라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어차피 하이토 선생이 뒷처리를 할 거라 현장의 상태는 상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 외의 부분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감점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니시하라는 최악이에요.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Q.E.D Iff 증명종료 11-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1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의 두 번째 시즌도 10권을 돌파했네요. 이번 권에는 강력 사건만 두 편 연이어 등장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많고, 생각할 거리도 전해주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평균하여 별점은 3점입니다.

에피소드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할 수 없는 증인" 

4년 전, 토마는 정원사 래디쉬와 알게 됐다. 토마는 해고된 래디쉬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래디쉬는 토마의 돈도 훔쳐 사라져 버렸다.
8개월 뒤, 어니언과 마약 판매를 놓고 대립하던 콘 시럽이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총, 발자국 등 증거에 따르면 범인은 어니언이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으로 유명한 래디쉬가 어니언의 알리바이를 보장한 탓에 검사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다행히 토마의 도움으로 어니언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 때 래디쉬도 토마의 돈을 훔친 혐의로 3년형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뒤 지금, 어니언의 부하 갈릭 오일은 출소한 래디쉬에게 '복수'라며 토마의 연구를 훔치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알리바이 깨기 작품입니다. 어니언의 알리바이는 사건이 발생한 8시 20분에 래디쉬 등 지인들과 농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래디쉬는 그 시간은 마침 3쿼터가 한창이라서 어니언이 자리를 비웠다면 바로 알아챘을거라고 증언했고요.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은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 중계를 봤다는 겁니다. 음식을 주문한 뒤, 래디쉬에게 배달 음식 대응을 시키고 그 때마다 수분간 중계를 일시 정지하는걸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였다면 3쿼터가 한창 진행될 8시 20분에 '하프 타임'이 걸리도록 만든 거지요. 어니언이 범행을 저지르고 돌아오는데에는 하프타임 15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범행 후 3쿼터를 함께 볼 수 있었고요.
대단치는 않지만, 현실적입니다. 트릭 외에도 토마가 래디쉬를 구속되게 만든 이유 - 래디쉬는 도벽이 있었고, 콘의 마약도 훔쳤었으며 법정에서 위증을 한 것 보다는 단순 절도가 형량이 낮기 때문 등등 - 라던가, 토마가 함정을 파서 배후인 갈릭 오일을 체포하는 이야기 등의 곁가지들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복선 회수를 잘 해서 이야기 완성도는 제법 괜찮아요.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우선 트릭을 수사기관이 눈치채지 못했다는걸 제일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녹화 중계를 봤다는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요? 미국은 PVR 기능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수사관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어요. 또 녹화 중계를 봤다면, 구태여 pause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을 늦춰서 시작하면 되니까요. 녹화 중계라기 보다는 타임 쉬프트 기능 -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타임 머신' 이라고 불렀던, 외부 저장장치에 라이브 방송을 저장해서 돌려보는 기능 - 을 썼다는게 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영수증에는 보통 접수 시간이 출력됩니다. 증거로 래디쉬 서명이 있는 사건 당일 영수증이 이미 확보되어 있었지요. 이 시간을 확인하면 실제 중계 시간과 래디쉬가 인지하고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도 증명 가능했을거에요.
마지막으로 아무리 래디쉬가 정직한 남자라도, 그의 증언만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교도소에 3번이나 갔다 온 어니언의 친구 증언을 사법부가 그렇게까지 신뢰하리라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아울러 갈릭이 토마 노트를 훔쳐 팔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토마가 쓴 노트를 카메라로 찍었지만 이를 공항에서 회수한다는 결말도 어설펐고요. 아예 의미가 없지야 않겠지만, 이미 메일로 어딘가에 보냈을게 뻔한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 이름도 대충 생각한 티가 물씬 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작은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물에 빠진 새" 

202X년, 일본은 AI 재판관을 도입했다. 그 뒤 20년이 흐른 204X년, AI 관리관인 미즈노 규사쿠가 아내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아내가 호스트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하고 둘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미즈노는 AI 재판관으로부터 장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미즈노는 항고하고, 변호사 견습인 미즈하라 가나가 이를 돕던 중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년 전에 수상한 사람이 AI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미즈노에게 전화를 걸었고, 사건이 벌어진 날 급히 집으로 가라고 전화해서 집에 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미즈노는 가나에게 'MIT를 중학교 때 졸업한 천재'에게 AI에 정말 문제가 있는지, 자신이 숨겨놓은 코드를 보여주고 확인받아 줄 것을 부탁하는데....

204X년의 일본에서 변호사 견습생 가나와 천재 프로그래머 토마가 활약하는 일종의 평행 우주 세계관으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AI가 재판하는 시대는 곧 다가올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실제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이 작품은 그런 상황을 가정하여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Q.E.D 시리즈 장점이기도 한 일종의 '학습 만화' 인 셈이지요.
제목인 '물에 빠진 새'부터가 AI 재판관의 특징을 잘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새가 물에 빠진걸 상상하죠. 그러나 AI는 '새'를 갈매기 등으로 해석합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가장 있음직한 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즉, '융통성' 이라는게 발휘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AI는 불법적인 조사를 인정하지 않고, 증거에 합리적 의문이 있으면 무죄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어서 결론적으로, 검찰의 기소가 성공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이럴 경우 강력범이 풀려날 가능성이 생긴다는 문제는 있지만 무고한 피해자는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여러가지 유착과 오판을 사전 차단한다는 장점이 더욱 커 보이네요.

그러나 당연히 AI 재판관이라도 문제를 일으킬 여지는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버그' 가 원인입니다. 검찰은 이를 이용하여 미즈노가 실형을 선고받게 만들지만, 토마가 모든걸 밝혀냅니다. 이를 위한 토마의 추리쇼가 법정에서 재판관, 검사와 대결을 통해 펼쳐지기 때문에 '법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부분의 완성도도 제법 높아요. 사건 현장은 부부 침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버그를 알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일부러 '부부 침실'과 '두 사람의 방'이라고 나누어 부르고, 위치도 '길'과 '복도' 왼쪽이라고 말할 때마다 다르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버그 탓에 AI는 원래 같은 공간을 나누어 생각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방'에는 침대가 있는데 사건 현장인 '부부 침실'에는 침대가 없어서 제3자가 숨어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 결과 미즈노가 범인이라는 판결이 내려진거고요. 꽤 그럴싸하죠?
이러한 추리쇼가 펼쳐지는 와중에, AI가 사건 현장이라며 침대와 다른 가구가 없는 썰렁한 방 이미지를 화면에 띄워주는 장면은 극적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이런게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장점이라 생각되네요.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기발한 장치 트릭이 하나 등장합니다. 미즈노를 옭아맨 현장 증거를 만들어 내었던 트릭입니다. 아래와 같이 문 손잡이 뒤에 나이프를 테이프로 붙여서 문을 여는 미즈노의 지문이 묻게 만든 겁니다. 부자연스러운 지문의 끊어진 형태는 스카치 테이프 자국이고요.


그러나 트릭은 억지스럽습니다. 이런 손잡이는 손 끝으로 잡는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감싸 잡는게 당연하니까요. 미즈노가 문을 열 때 이상함을 느낄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미즈노 아내의 불륜과 비밀 번호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얼굴 인식은 사진으로 돌파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은 미즈노의 회사 동료 유자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범행을 저지른 동기와 행동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버그를 팔았지만 이를 미즈노가 눈치챌걸 두려워해서 말살시키려고 했다는데, 버그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잖아요? 유자와가 코드가 기록된 노트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게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보이지는 않았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AI가 오류를 일으킨 원인을 납득하기 힘들어요. 만화에서도 평면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법정에서는 구두로만 사건 현장을 설명 AI에게 별다른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검찰이 구두로만 설명했다면 AI가 아니었더라도 해석에 오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204X라는 근미래인데, 다른 20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묘사들도 고민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204X년에 숫자 암호키와 얼굴 인식으로 집에 출입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지문이 결정적 증거가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이럴 바에야 AI가 재판하는 가상극 형태로 꾸미는게 어떨까 싶네요. 시즌 1 27권 수록작인 "입증책임"처럼 모의 재판 형식으로 말이죠.

그래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었던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피너츠 완전판 17 : 1983~1984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3점

피너츠 완전판 17 : 1983~1984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관성으로 계속 구입해 오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리뷰를 멈추어 버린 피너츠 완전판입니다. 오랫만에 리뷰 남깁니다.

이번 권에서는 마시가 찰리 브라운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펴는 놀라운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영화를 같이 보러가자고 제의하지만, 찰리 브라운이 "뭘 상영하는데?"라고 물어보자 찰리 브라운을 걷어차지요. 찰리 브라운은 여심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게다가 마시의 애정 공세를 지켜본 페퍼민트 패티마저 찰리 브라운에게 관심을 가져서 찰리는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샐리 브라운에게 사랑 고백하는 해럴드 앤젤도 등장하고요. 길게 이어지는 설정은 아니지만,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또 유명한 농담의 원조격인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누피가 쓰는 소설인데, 아래와 같습니다.

이렇게 재미는 여전하고, 책의 높은 완성도도 여전하고, 소유에 대한 만족감도 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이 이해는 되지만, 상당하다는거 하나만 단점이지요. 

그래도 지금까지 스물 두 권이나 구입했으니 포기할 수 없네요. 계속 달려봐야죠. 문제는 아직 다섯 권은 비닐 포장도 뜯지 못한 상태인데, 알라딘을 봤더니 두 권이 또 새로 나왔다는 겁니다. 고지가 멀지는 않았겠죠? 멀지 않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