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1/06/30

2021, 6월의 두산 베어스 단상과 7월 전망, 그리고 기대

 


2021, 5월과 6월의 두산 베어스 단상

6월의 두산 베어스 평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죠. 완전히 망했습니다. 이전 글에서 썼던 약간의 기대감 따위는 아득하게 날아가 버렸어요.
1,2,3 선발은 대체로 좋은 성적을 거둬주고 있고, 모처럼 4, 5 선발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도 1점차 패배가 잦은 이유는, 이길만한 점수를 뽑지 못하는 타선 탓입니다. 상대 투수가 누가 나오든 리그 굴지의 에이스로 만들어주고, 계투진과 마무리는 누가 나오든 필승조로 만들어 주는데 정말 환장하겠네요.
이에 반해 투수진, 특히 중간 계투진은 1실점씩 해서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큰 잘못이 없습니다. 6월 시작과 동시에 주전 마무리 김강률 선수가 엔트리에서 빠지고, 이승진 선수도 부진으로 2군을 오가는 등 필승조 "건-치-승-률'이 제대로 가동된 날이 단 하루도 없기도 했고요. 오히려 계투진은 잦은 혹사에서도 분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실점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복귀한 이현승 선수, 그리고 필승조로 승격한 윤명준 선수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어요.

문제는 7월은 더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제가 되는 타선은 박건우 선수의 질책성 2군행, 김재환 선수의 부상에 따른 2군행 등 악재가 더 겹쳤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탄탄했던 투수진도 로켓과 박치국 선수의 부상으로 암울해졌습니다...
솔직히 지금의 상황은 김태형 감독님 탓도 어느정도 있습니다. 리그 최고 수준의 1,2,3 선발을 갖추었다면 5할 이상의 승률을 보여야 합니다. 번트나 스퀴즈 등 어떤 짜내기 작전을 써서라도 점수를 냈어야 해요. 선발 투수가 최고의 투구를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한 경기 6병살 같은 추태를 보이면서 패배하는건 감독으로서 자격이 없는 행동입니다. 지나친 오재원, 강승호 선수 편애 등 경직된 라인업 운영도 비판받아야 마땅하고요.
또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4, 5 선발은 어차피 시즌 전 부터 문제라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영하, 유희관 선수가 부진했더라면 빠르게 대안을 투입했어야 했습니다. 이미 작년부터 부진해 왔던 선수들이기도 하고요. 김민규 선수라는 대안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잖아요? 이들이 본 경기에서 폼을 회복하기를 기대하는건 무책임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날려먹은 경기도 경기지만, 초반 강판으로 계투진 투입이 잦아진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요.
항상 핑계로 이야기하는 선수 유출도 이제 더 이상 탓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MVP급 성적을 거두었던 외국인 투수들은 모두 그만한 선수들로 교체되었습니다. 알칸타라와 플렉센 선수의 WAR은 11.78인데,로켓과 미란다 선수의 추정 WAR은 12.31로 오히려 더 높으니까요. (물론 로켓 선수는 부상으로 빠졌으니 이 수치는 하락할 가능성이 높지만요) 오재일 선수의 공백 역시 양석환 선수가 완벽하게 메우고 있습니다. 즉, 전력 누수는 최주환 선수의 2루 자리 뿐입니다. 이 정도 누수가 없는 팀은 없어요. 최주환 선수도 부상으로 한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했었고요.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무리하지말고 재정비하는 시즌으로 삼아도 될텐데, 그러기에는 7위라는 순위는 미묘하네요. 5위까지는 노려볼만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미란다, 최원준 선수 경기와 이영하, 김민규 선수 경기 중 한 경기를 꼭 잡는 전략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는 경기는 당연하고, 비기는 경기에서 필승조 투입만 하지 않으면 계투진 부하도 덜 수 있을거에요. 땜빵 선발 경기는 이기면 고마운 셈 치고요. 신인이나 새 얼굴 활약을 기대해 보는 거지요. 박종기, 박웅 선수들이 버텨주고, 2군에서 조정한 곽빈 선수가 가세한다면 어떻게든 굴러는 가지 않을까요?
이렇게 5할 승부에만 주력하면서 힘을 비축했다가 부상 선수들이 돌아올만한 시기에 승부를 보면 좋겠습니다.

아니, 아무튼간에 김태형 감독이 지금이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더 바랄게 없겠네요. 지거나 비기는 경기에 주력 계투진을 투입하지 않고, 공격 시에 작전을 적절하게 쓰고, 라인업과 선수 기용은 실력 위주로 해서 제발 대타에 오재원 선수를 쓴다던가 하는 운영만 하지 않는다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납득하겠습니다. 지금 라인업과 경기 운영은 이기자는 건지, 신인을 키우겠다는 건지도 영 모르겠으니까요.

그래도 제발 5할 승률이라도 하기를 바라며, 파이팅 허슬~두.

2021/06/29

만화 돈 까밀로와 뻬뽀네 1 - 죠반니노 과레스끼, 다비데 바르치 / 김정훈 외 : 별점 3점

만화 돈 까밀로와 뻬뽀네 1 - 6점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다비데 바르치 그림, 김정훈 외 옮김/서교출판사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는 제 어린 시절 베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국내 출간된 전권을 갖추어 놓고, 틈날 때마다 탐독했었지요. 호적수인 돈 까밀로 신부와 공산주의자 읍장 빼뽀네의 이야기는 어느 권, 어느 편을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작가 죠반니노 과레스끼가 직접 그려넣은 일러스트도 아주 좋았었고요. 물론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어 빼보네가 국회의원이 되고, 그 아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는 솔직히 재미가 떨어지기는 했습니다만...

하여튼, 이 작품의 만화 버젼이 있다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국내에 정식 출간되었다는걸 이번에야 알고 구해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2014년에 나왔던 책의 복간이더군요.1권만 먼저 읽었는데, 모두 1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원작 순서대로는 아니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재미있고, 의미있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만화화한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만화 강국 이탈리아 작품답게 작화가 아주 빼어납니다. 특히 캐릭터 묘사가 아주 일품이에요. 돈 까밀로와 뻬뽀네 모두, 머릿 속에 담겨있던 그 사람을 그대로 그려냈습니다. 아주 오래전 감상했던 드라마 버젼은 돈 까밀로 역이 <<내 이름은 튜니티>>의 테렌스 힐이라 영 안 어울렸었거든요.
이야기들도 모두 재미있습니다. 일종의 츤데레들인 돈 까밀로와 뻬뽀네의 티격태격이라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설과 주먹을 나누다가도, 서로에게 이해와 용서를 주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폭력이(?) 난무하지만 제 아이에게도 권해주고 싶은, 그런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예수님의 뼈를 때리는, 피와 살이 되는 명언들도 그대로고요.


그러나 만화의 전개 방식이 친숙하지 않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중간 생략이 왠지 모르게 많고, 액션 장면의 묘사가 부족한 식으로요. 컷 사용도 굉장히 정형화되어 있고요. 우리에게 친숙한 만화와 그림 소설, 그 두 중간에 위치한 느낌입니다.
소설보다도 돈 까밀로에 치우쳐 있는 점도 약간 아쉬웠어요. 상남자 뻬뽀네 중심 전개인 이야기도 한 편쯤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배경 설정을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고요. 두께와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좀 비싼 편입니다.

그래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팬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2권도 바로 구입해 봐야 겠습니다.

2021/06/27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별점 4점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8점
배한철 지음/매일경제신문사

국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은 역사서. 역사적인 가치와 담고 있는 의미는 물론 국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짧게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가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구입했던 고령 가야 금관이 도굴품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12개국이나 되는 나라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듯 'OO가야'가 아니라 가락국, 가라국, 아라국과 같은 이름이었다. 임나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문무왕릉비 설명도 재미있는 내용이 많더군요. 비에 따르면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 왕손의 후예라는 것 처럼요. 비 외에도 거대 무덤, 북방 민족이 신성시하는 나무와 사슴뿔로 꾸며진 금관, 왕의 명칭이 '칸'과 비슷한 '마립간'이라는 등의 다른 근거들도 꽤나 그럴듯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신라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평지에 목곽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넣은 뒤봉분을 올리는데, 이게 바로 카자흐스탄 양식이랍니다. 동시기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인데 말이죠. 금관도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때 등장하며, 아프카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 무덤 유물과도 흡사하고요. 또 이러한 거대 무덤과 금관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으로, 후대 법률왕 무덤은 규모가 작은, 돌로 무덤방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며 부장품들도 주로 투기류였다는 것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법치 체계가 확립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결말은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정말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은 아니고, 단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데, 근거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어요.
화엄사 석탑 설명에서 소개되는 여러가지 국보 탑 소개도 재미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차례 수정되었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불상의 명칭과 뜻을 알려주는 부분도 좋았어요. 석가모니는 '샤카족 (인도 종족)의 성인' 이라는 의미, 비로자나불은 지혜와 진리의 부처를 부르는 칭호로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의 음역이라는 것, 아미타불은 '무한한 수명의 것'이라는 범어 '아미타우스'에서 유래, 미륵은 석가모니 제자 중 한 명으로 사후 부처로 신격화 보살은 부처처럼 깨달았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존재라는 등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밀레 종의 유명한 인신공양 설화는 일제 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공한 설화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어요.

그 외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관촉사 은진미륵이 이름처럼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데 놀랐습니다. 생긴 걸로는 영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관촉사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이 따로 없고, 법당 벽 창으로 야외 불상이 보이도록 만들었다는데, 다음에 관촉사에 가면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일본이 계속 노렸었고, 심지어 '구변국'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사칭하면서까지 달라고 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이 때 조선은 유교 국가라서 딱히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태종과 세종 모두 주려고 했지만, 예조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난중일기가 국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여기서 왜 난중일기가 국보인지에 대한 설명이 특히 와 닿았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귀중한 '기록 유산'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뿐 아니라 전략과 전술, 일반 백성 모습까지 고스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누군가의 일기도 내용에 따라서는 국가 1급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저도 일기를 열심히 써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선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과연 '충'무공이다 싶더군요.
1968년과 70년, 중국에서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 한나라의 가장 중요했던 유물이 나온 곳이 우리나라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910년대, 일본 학자의 낙랑 고분군 발굴에서 수습된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인데, 손바닥만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정말 엄청나더군요. 중요한 유물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러한 국보들의 입수, 보존 경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라면 간송 전형필 관련 일화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 중에서 특히 훈민정음 혜레본을 입수한 경위가 인상적이었어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지하 조직원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가보를 판 것이라고 하거든요. 이 항목에서 훈민정음은 오롯이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도 나왔었던 승려 신미 창제설의 경우, 신미는 산스크리트어의 자음, 모음 설명에 그쳤다는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식입니다. 훗날 문종이 된 세자와 정의 공주의 도움이 오히려 컸다는데, 특히 정의 공주 관련 사료들을 보면 공주는 정말 똑똑했었나 보더라고요. 신미보다는 정의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와는 반대인 문화재 훼손과 도난 등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내용이 많았습니다. 훼손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억지로 복원해서 망가진 문화재들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석굴암이야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 떡칠을 해서 복원에 십 수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던가, 부석사 무량수전의 해체 복원 때 철물을 사용하여 건물을 망쳐놓았고 해체 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내용은 화가 날 정도였어요.
물론 불국사 복원 같이 광복 후 복원도 엉망인건 사실입니다. 개발 독재 시대 성과 주의에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습성이 결합된 아쉬운 결과물들이지요. 지금이라도 다시 잘 복원하기를 바랍니다. 제 생전에 제대로 복원된 유물을 볼 수 있도록요.

국보 도난 사건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 2019년 말 기준으로 도난 피해를 입은 국가지정문화재는 2,438점이었고 이 중 1,552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니 놀랍습니다. 문화재 도둑들에게는 제발 천벌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200명이나 되는 괴한을 동원하여 해체 후 도쿄로 빼내려던 다나카 미쓰아키의 계획이 실패했던 사건, 해방 후 미국에 국보급 백자를 팔아먹으려는 시도를 막아내었다는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의 활약 등은 다행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국내로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일은 안타깝더군요. 이런 일은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쉽고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으며, 도판도 좋습니다. 단순한 국보 사진이야 인터넷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긴 한데, 일제 강점기 등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이 많이 수록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문화재가 어떻게 방치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에요. 수학여행 때 첨성대를 둘러싸고, 올라거서 찍은 사진을 보면, 이래서야 도굴만 문제는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책 초반부를 장식하는 무령왕릉 발굴과 유물에 대한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 관련 이야기, 백제 금동 대향로 이야기 등 다른 자료를 통해 많이 접했던 이야기가 제법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국보와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1/06/26

안개의 항구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5점

안개의 항구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시내 한 복판에서 머리에 수술을 받은 채로 기억을 잃은 남자가 발견되었다. 신문 광고를 통해 그는 위스트르앙의 항만 관리소장인 조리스 선장이라는게 밝혀졌다. 하녀 쥘르 르그랑이 나타난 덕분이었다. 조리스 선장은 쥘르, 메그레 반장과 함께 위스트르앙 자택으로 귀가했다.
하지만 귀가한 바로 그 날, 조리스 선장은 독살당하고, 메그레 반장은 끈질긴 수사를 통해 이 사건에 마을 시장 그라메종과 쥘르의 오빠 그랑 루이, 그리고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게 되는데...


1932년에 발표되었던,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 초기작. "피해자가 총상을 입은 뒤 정성껏 치료를 받고 살아났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독살당한다"는, 다른 메그레 반장 시리즈에서는 보기 드문 기묘한 사건이 등장한다는게 특이했습니다. 선장을 누가 공격했으며, 결국 누가 죽였는지? 다친 선장을 깔끔하게 치료해준건 누구인지? 선장에게 30만 프랑의 거액을 입금해 준 건 누구인지? 등 여러가지 본격물스러운 수수께끼도 가득하고요.
이를 밝혀내는 메그레 반장의 추리도 빼어납니다. 메그레가 그랑 루이와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 (레몽)를 체포하고, 그랑메종 시장을 자살하게 만든건 모두 수사 과정에서 알아낸 정보를 통한 추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덕분이지요.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추리력보다는 경험과 통찰력이 돋보이며 범죄 드라마에 가까운 다른 메그레 시리즈보다는 본격 추리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밝혀진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는 원래 그랑메종 시장의 조카 레몽으로 과거 함께 일했지만 부정을 저지르고 외국으로 쫓겨났었습니다. 그 뒤, 그랑메종은 장의 연인 엘렌과 결혼했고요. 그런데 당시 엘렌은 레몽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거부가 된 레몽은 아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랑메종으로부터 아들을 빼앗아 오기 위해 작전을 벌이게 되었지요. 이 때 레몽을 도와주던 조리스 선장이 그랑메종의 총에 맞았고, 레몽은 그릴 정성껏 치료하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30만 프랑까지 입금해 주었지만, 조리스 선장이 입을 열 걸 두려워했던 그랑메종이 그를 독살했던 겁니다.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 느낌도 살짝 드는데, 그만큼 대중적으로 먹힐만한 소재 - 기억 상실, 거액의 유산, 숨겨진 아들, 복수 등등등 - 들이 엮여있는 셈이지요. 그래서인지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전형적인 '사나이'인 메그레 반장과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그랑메종 시장의 대비, 그리고 둘의 알력 다툼도 눈에 뜨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짜증나긴 하지만 당대 부르주아를 잘 묘사했을 그랑메종 시장 캐릭터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크리스티 여사의 짜증나는 부르주아 독신녀들 묘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니까요.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읽는 재미도 좋은 반면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관계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는 설정은 답답할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특히 레몽의 경우, 선장을 독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른다쳐도, 그에게 총상을 입혔던건 그랑메종 시장이라는걸 경찰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시장이 자살한 뒤에도 입을 다물 이유는 더더욱 없고요. 레몽도 레몽이지만, 단순 조력자였던 생미셀호 선원들이 입을 다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선원들간의 의리'로 입을 다물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조리스 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선원들간의 의리에 해당하지 않는걸까요?
그랑메종의 행동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엄연히 남의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까닭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는 건지... 또 선장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걸 알았을텐데, 돌아온 날 바로 살인을 저지를만한 이유도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파리에서 온 형사가 함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거부인데도 불구하고 범행을 직접 저지를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하긴, 레몽과 일당들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형사가 있는데도 다시 아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으니, 다들 메그레 반장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추리적인 요소들은 좋았지만, 이런저런 비현실적이고 지루했던 전개는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하니, 메그레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여, 쥘리의 오빠 그랑 루이가 쥘리를 찾아왔을 때 쪽지를 남겼으리라는건 당대 프랑스인의 상식이었을까요? 쪽지가 있다는걸 당연하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소한 점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궁금합니다.

2021/06/25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4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각 걸작과 졸작으로 극명하게 수준이 갈립니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났던 권은 많지 않았었는데 말이지요. 평균 별점은 2.5점,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억엔과 여행하는 남자>>
파자마 차림으로 1억엔을 든 채 배회하던 남자가 발견된다. 기억을 잃은 상태였는데, 곧 '우라시마 타로'라는 남자로 밝혀진다.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였는데 아내가 죽은 뒤 의식을 회복했으며, 1억엔은 사고 배상금으로 집에 놓여져 있던 돈이었다. 타로는 기억을 잃었지만, 아내 나오코가 언제나 오르골로 쇼팽의 이별의 곡을 울렸으며, '오토구치를 찾으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는 걸 기억해냈다.
토마의 조사로 오토구치 마사요시는 실존 인물로, 그가 지방검사 시절에 담당했던 우라시마 긴지 살인 사건 피고인이 우라시마 타로였다는게 밝혀진다. 그는 나오코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 주장을 했지만 오토구치 검사가 가져온 CCTV 영상으로 거짓이 밝혀져 15년 형을 선고받았었다. 12년 뒤 석방된 그는 4년만에 자살을 시도해서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오래전 있었던,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의 범죄 드라마이자 본격 추리물이자 복수극.

우선 토마는 우라시마 긴지 사건 재판의 진상에 대해 추리해냅니다. 우라시마 타로가 갔던 에비스 카페 주차장이 범행 현장 주차장과 같은 형태였던걸 이용하여, 우라시마 타로가 현장에 있었다고 오토쿠치 검사는 증거를 조작했던 겁니다. 토마는 사진 속 가로등과 그림자 위치로 이 추리를 증명해 내고요.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의 수수께끼, "우라시마 타로에게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무엇이며, 1억엔이 왜 남겨져 있었고, 나오코는 왜 오토구치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남겼는지"를 풀어내게 됩니다. 

그 답은, 이 모든건 오토구치의 증거 조작을 알아낸 나오코의 복수였다는 겁니다. 나오코는 오토구치가 조작으로 이겼던 재판에서의 형량만큼 그가 형을 살도록 하기 위해, 26년간 약을 먹여 재운 겁니다! 지금의 우라시마 타로는 오토구치 검사였다는 거지요.
1억엔은, 국가에서 죄가 없는 사람이 형을 살았을 때 보상금에 기초한 금액이었습니다. 하루에 대략 1만엔이니, 365일 곱하기 26년하면 대충 1억엔인거지요. 나오코가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떠올려 내라는 뜻이었고요.
이는 오토구치가 검사 시절 선고했던 형량의 총합인 26년과, 오토구치가 기록에서 사라진지 올해가 26년 째라는 점 등으로 증명됩니다.

추리를 위한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이라서 본격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반전이 드러나는, 우라시마 타로가 사진을 보고 자기가 오토구치였다는걸 깨닫는 장면도 아주 좋았습니다. 사진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자기 딸이 미도라는걸 깨닫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만화라는 매체에 어울리게 잘 표현했다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 끔찍한 진상을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밝히다가 가나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하는 토마의 모습은, 토마 소라는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인지 잘 드러난 명장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소중한건 가나 뿐이라는 이야기니까요. 가끔 보면 이 친구는 정말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싶어요. 사회적인 공감이 결여되어 있는걸로 느껴지거든요.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약간의 헛점은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헛점은 오토구치의 실종이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냥 기록에서 사라졌다고만 언급되고 있거든요. 아무리 옷을 벗었어도 전직 검사인데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건 말도 안되지요.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닐테고요. 또 26년간 약으로 잠들어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오토구치였다는 '기억'을 잃은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의 우라시마 타로는 자살했는데, 그 역할을 오토구치에게 맡길 때 시체를 어떻게 했는지도 설명되지 않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완성도는 손색이 없는 좋은 작품입니다. 타나바타 형사의 재등장도 반가왔고요.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메모리>>
MIT 출신 수학자 황성이 사망 후, 양자 암호에 대한 핵심 기술을 남겼는데, 이 기술을 러시아와 중국, 미국 정부가 노려서 대 소동극이 된다는 이야기.

전작이 아주 빼어나서 기대가 컸는데, 아쉽게도 부응하지는 못했습니다. 세계 초 강대국 3개국이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유치한 첩보전이 그려지는 탓입니다. 토마와 가나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던가, 가나가 강대국 정보부원들의 습격을 격투와 함정(?)으로 저지한다던가, 3개국이 USB를 확보하기 위해 유원지에서 대소동을 벌인다던가 하는 전개 모두 유치하기 짝이 없네요. 토마가 애초에 가짜 USB를 넘겨줘서, 3개국 정보기관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진상도 유치하기는 마찬가지고요.

약간 등장하는 추리적인 요소도 실망스럽습니다. 황성이 토마의 데이터를 훔치려고 했지만 훔치지 못했던 방식에 대한 소소한 트릭 - 몰래 작은 USB를 노트북 후면에 꽂아 두고, 누군가 USB를 연결하면 그쪽 연결은 없이 후면 USB가 연결되게 함 - 은 일견 그럴듯해보이지만 설득력은 낮아요. 노트북으로 필요한 데이터를 탐색하여 USB로 복사하는 과정에서 보통은 자기 USB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니까요.
황성이 사망전 머물렀던 산장 벽걸이 시계에서, 멈춘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장소에서 USB를 발견한다는 일종의 암호 트릭도 유치합니다. 구태여 암호 트릭을 풀지 않았더라도, 주변만 수색했어도 정보기관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을테고요.

황성이 러시아에서 태어난 조선족으로 중국 칭화대에서 공부했으며 여동생 황해심이 한국의 친척에게 보내졌다는, 우리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설정의 인물이라는건 재미있었습니다. 일본도 토마가 손에 넣은 USB를 입수하기 위해 움직이는데, 이 과정에서 전작에 등장했었던, 단맛을 좋아하는 내각 조사실 소속 나시다가 재 등장하는 것도 반가왔고요.

하지만 대체로 점수를 줄 부분은 없는 졸작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6/20

철권을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Iron Fists, 2012) - RZA : 별점 1.5점


라이온 족 수령 골드 라이온이 부하 실버 라이온들에게 살해당했다. 골드 라이온의 아들인 블레이드 X 젠이 복수에 나섰지만 실버 라이온이 고용한 킬러 브라스 바디에게 패했고, 죽기 직전의 그를 마을 대장장이가 구해주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실버 라이온에 의해 두 팔을 잃게 되었다.
정부의 금을 가로챌 실버 라이온의 계획에 마을 환락가를 지배하는 마담 블로썸이 가세했고, 이들과 정부의 특사 잭 나이프, 젠, 대장장이의 마지막 혈투가 펼쳐지는데...


2012년 영화. 래퍼 RZA가 각본, 주연을 맡아서 만든 작품입니다. 싼마이틱 B급 무협 영화를 좋아해서 관심이 가던 차에, 넷플릭스에 있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무협 영화를 미국의 흑인 래퍼가 좋아해서 만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궁금해서 보았는데, 나름 무협 영화를 많이 본 티는 나더군요. 완성도를 떠나서 스스로 각본과 주연을 맡아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그 오타쿠 정신에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장과 의상 등 아트워크나 비쥬얼적인 부분도 괜찮았어요. '금강불괴'라던가, 온 몸에서 칼이 튀어나오는 갑주를 이용한 액션이 어떤건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장면들도 볼 만 했고요. 두 팔을 잃은 대장장이가 쇠로 된 의수를 장착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데즈카 오사무의 <<철의 선율>>도 이렇게 영화화하면 괜찮겠다 싶었거든요.

하지만 문제도 많습니다. 무협 영화인데 불구하고, '액션' 장면이 시시하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서로간의 합이 빠르게 오가는게 아니라, 느릿느릿한 동작에 와이어에 의지하고 있는 탓입니다. 그나마 젠이 초반부에 보여준, 암살단을 처치하는 장면과 단순히 파워 파이트를 선보이는 브라스 바디와 대장장이의 마지막 대결이 그나마 제일 볼만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무협 영화가 아니라 WWE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심지어 어떤 장면 - 제미나이 부부가 등장한 액션 씬 - 은 그냥 춤을 추는 느낌이었습니다. 결말의 젠과 실버 라이온의 대결은 시시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대충이라 황당할 정도였고요. 한마디로, 무협 영화로서는 실격이에요.

이야기를 괜히 복잡하게 만든 탓에 결국 산으로 가고 만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제일 웃기는건 창녀촌의 주인인 마담 블로썸이 라이언족을 배신하고 금을 차지하려고 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기습을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결국 전면전을 통해서 서로 전멸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거든요. 기습의 의미를 모르는건가? 마담 블로썸이 어린 아이를 구하려다가 본인 목숨을 잃는 장면도 황당하기 그지 없었고요. 뜬금없는 클리셰에 불과했습니다.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잭 나이프 캐릭터도 이야기를 흐리게 만듭니다. 대장장이와 젠을 무력이 아니라 두뇌로 돕는 역할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뭔가 비중이 있어보이다가도 실제로 하는건 별로 없어서 왜 나왔는지도 의심스러웠어요. 그냥 젠의 복수극을 대장장이가 돕다가 팔과 연인을 잃은 뒤, 젠과 힘을 합쳐 복수에 나선다는 단순한 구조로 정리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또 넷플릭스 자막 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Gemini Female, male을 "제미나이 아내", "제미나이 남편"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상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줄거리는 유치하고 뻔하기 그지없고, 설정들도 황당무계하지만 이런게 B급 무협의 정서라고 생각한다면 볼 만은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너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애초에 불가능해요. 구태여 찾아 보실 분들도 계시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궁금하시다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1/06/19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상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여러 단편들에서 엄선했다는 좀비 관련 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 여름에는 좀비물이지요. 원래 책으로는 무려 34편,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상, 중, 하로 분권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한 번에 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양이니까요.

상권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댄 시먼스, 제프리 포드 정도가 제가 아는 작가인데, 다른 작가들도 소갯글만 보면 모두 나름대로 유명 작가들로 보입니다. 좀비라면 바로 떠오를 고어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비롯하여, SF, 범죄 드라마, 풍자, 블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들이 수록되어 있고요.
덕분에 풍성하기는 한데, 작품들 편차는 큽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과 같은, 기존 좀비물 팬을 만족시키는 걸작도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거나, 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분만>>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과 몽상 1>>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출산을 앞둔 임산부 시점에서 그려낸 작품.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좀비의 기원까지 설명되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 문제였는지 뭔가 누락된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보통은 주인공이 도와주는 역할은 임산부가 주인공이며, 무대가 섬마을이라서 한 개 뿐인 묘지만 사수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상황이 독특했습니다. 버티는 와중에 죽은 남편을 한번 더 죽이는 처절함,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인공과 무대 설정의 독특함을 더해 스티븐 킹의 필력을 써 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픈 변화구 보다는, 그냥 한가운데 직구 승부가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심지어 그 공을 던지는게 스티븐 킹이라면 더더욱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슴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재벌들이 과시용으로 데리고 사는 '트로피 와이프'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뒤 벌어진 일들을 그려낸 작품. 좀비로 돌아온 트로피 와이프는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고, 사람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부활시켰는지를 찾아 헤멜 뿐이지요. 이런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더군요.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탓이에요. 시체가 되살아난건 충분히 드라마틱한 사건인데, 이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 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부활시켰다는 여동생이 찾아 오는건 아주 뜬금없었고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외모, 돈과 사치품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주는가 싶은데, 자동차 한 대 값을 들였다는 실리콘 가슴만 쳐지지 않고 영원이 남았다는 묘사에서 '적절한 투자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서, 뭐가 맞는지는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재미만 놓고 보자면 후자 쪽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만.

하여튼 좀비물로 보기는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고, 쟝르도 모호하며 이야기도 딱히 볼만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
노년의 가이스 선생은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 혼자 살아남았다. 그녀는 포획한 좀비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데...

좀비 설정에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어요. 그냥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한 뒤를 그리고 있거든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물입니다. <<가정 분만>>과 같이, 뻔한 설정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더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교육' 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꽤 잘 그려내고 있기도 하고요. 좀비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는 결말은 깊은 울림을 가져다 주네요. 단지 치킨 너겟 때문에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뭐 그것도 학습이라면 학습이니까요.

<<칼리의 노래>><<테러호의 악몽>> 등의 공포 소설로 유명한 댄 시먼스다운 필력도 돋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디테일이 특히 압권이에요. 좀비 아이들을 포획하고, 이들을 교실에 묶어 놓은 뒤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학교를 요새처럼 만든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아주 빼어난 덕분입니다.
좀비물로서의 기본 재미도 놓치지 않습니다. 학교로 수백명의 좀비가 몰려오고, 이를 가솔린 해자와 레밍턴 소총, 권총으로 처단하는 가이스 선생의 활약이 그려지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화끈했어요.

뻔하지만 독특한 설정에 더해, 재미도 기본 이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작가적 명성은 허투루 얻어진게 아니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유령의 춤>>
커스터 기병대가 좀비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추격하던 FBI 요원 에드거는 좀비의 습격에 대한 모든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쓰레기 백인 경찰관이 인디언을 몰래 학살하다가 되살아난 좀비 커스터 기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도입부 외에는 별로 건질게 없네요. 그냥 에드거 요원이 좀비 기병대의 잔학한 행동을 모두 알게되는 신기한 능력을 얻었다가 전부인 뒷부분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닙니다. 군대식 명령으로 좀비떼를 제어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로 좀비떼를 격퇴했다던가 하는 결말도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제 기준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시체>>
아프리카 수용소를 통해 좀비를 대량 생산하여 유통시킬 계획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도널드는 좀비 격투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좀비 매춘부를 만난 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에요. AI,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과 별다를게 없거든요. 하지만 AI를 좀비로 바꾼 아이디어가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가치가 폭락하고, 심지어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 큰 충격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했던 작품입니다.

<<죽음과 선거권>>
시체가 되살아나 투표를 하기 시작해서, 대통령 선거는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버튼 후보의 보자관 롭은 지고있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었던 소녀 데이나 맥과이어가 되살아나 좀비가 된 모습을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고, 버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의가 이루어지는걸 보기 위해서라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 롭이 어린 시절 저질렀던 총기 오발 사고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펼쳐질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거든요. 시체들이 되살아난게 롭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고요. 또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버튼이 대통령이 되는게 왜 정의인걸까요? 좀비물이나 호러물적인 속성이 전무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초원>>
모종의 탐험대가 대륙 횡단을 하면서 괴멸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대항해 시기 쯤, 그러니까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탐험대가 굶주림과 초현실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댄 시먼즈의 <<테리호의 악몽>>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탐험대는 시체들과 산 사람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저지르는 악당들이라는 차이는 큽니다. 화자인 '나' 조차도 대륙 횡단에만 골몰해서 학살, 식인을 꺼리지 않는 정신병자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사뭇 부족하고요. 왜 시체가 되살아나 배회하는지, 시체를 되살린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결말도 모호해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잔혹하기만 할 뿐인 이야기였습니다.

<<세 번째 시체>>
매춘부를 유혹한 뒤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리치의 희생자였던 '나'가 되살아나서 리치를 찾아간다는 이야기. 복수극으로 보이기도 하고, 멜로물로도 보이기도 하고, 범죄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에요.
그런데 별로 의외성이 없고, 리치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말도 밋밋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무엇보다도 무섭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밤처럼 아름다운>>
성인 모델들 촬영으로 거부가 된 네이선 그라임스는 좀비 사태 발발 후 카리브 해의 섬 요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모델들과 좀비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좀비 사태가 끝나면 아름다운 모델 수요가 폭증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모델들은 좀비가 되어버렸으며 심지어 이성이 남아있는 듯 네이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네이선도 생존자를 가장했던 좀비에게 물려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데...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주인공, 성인지 모델들이 좀비가 되고, 좀비들이 생전의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행동한다는 설정이 독특했던 작품. 하지만 전개는 뻔했고, 애매한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처럼 죽어봐>>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그려낸 작품.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습격하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리나 냄새, 체온 등에 반응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단순하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한 곳을 찾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요. 실제로 주인공은 그렇게 좀비 떼 속에서 살아가고요. 이 와중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지를 만나 섹스를 하는 설정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의지인 상황인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설명은 부족합니다.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니까요. 물론 자기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죽어봤자 좀비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나름 와 닿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해도 저라면 진작에 자살을 택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맬더시안의 좀비>>
이웃 노인 맬더시안은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뇌 수슬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맬더시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나는 그가 숨겨두었던 좀비를 떠맡아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데...

기존의 '좀비', 즉 부두교 주술로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뇌 수술처럼 뭔가 있어보이는 장황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환상 소설에 가깝게 풀어나가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뭔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라는 환상 소설을 쓴 작가 작품다왔달까요. 결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점 까지 말이지요. 좀비가 등장해서 급격하게 노화한 뒤, 맬더시안이 되었다는게 결말인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멜더시안이 심장마비로 죽은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젊은 좀비가 되었고, 다시 급격하게 노화해서 멜더시안이 된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환생이라면 젊은 육체로 있는게 맞을텐데, 이런 일을 벌인 동기도 잘 모르겠고요. 주인공도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끝맺는데, 작가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데, 그런 평가가 가능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2021/06/18

눈물점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점

눈물점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인 미시마야 시리즈 6권째 작품. 모두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권 부터는 전작에서 시집간 오치카를 대신해서 도미지로가 괴담을 듣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런데 전작에서부터 예견된 이 교체는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결과물은 역시나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냥 괴담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한량이라서, 괴담 이야기를 듣는 진지한 목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괴담 이야기에 대한 별다른 책임감도 느낄 수 없었고요. 그 외에도 전작들에 비하면 괴담들의 섬찟함이나 무서움이 훨씬 덜한 편이라는 점, 그리고 가장 대작인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이 특히 지루했던 점 등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도미지로로의 주역 교체에 대해 갖고 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된 만큼, 이후 이 시리즈를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눈물점>>
도미지로에게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하치타로가 찾아왔다. 그는 과거 자신의 집이었던 두부가게 '마메겐' 일가족을 파괴했던 눈물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과거 마메겐에서는 형수들과 누나가 남자 가족을 잇달아 유혹했었다. 마지막에 큰 누나가 아버지를 유혹하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큰 누나의 '눈물점'을 잡아 뜯어 잘근잘근 씹어버렸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가출한 뒤 죽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악령이 눈물점 형태로 여자에게 씌워지면, 남자를 유혹하게 된다는 뻔한 이야기. 거기에 더해 악령이 '마메겐' 여자들에게 씌워져 가문을 박살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답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사과했다던가, 가출했다던가 하는걸 미루어보면 뭔가 여자에게 원한을 산 듯 한데, 암시만 줄 뿐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냥 재수없게 귀신에게 씌웠다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가출해서 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창피해서? 그렇다면 눈물점의 여자가 아버지가 죽은 자리에 귀신으로 나타날 이유는 없지요. 어머니가 가족이 흩어지는걸 허락한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하치타로의 부인은 얼굴이 점투성이었다는 결말과, 어린아이답지 않게 똑똑했던 막내 누나 치이 캐릭터는 괜찮았습니다. 치이는 눈물점이 수상하다는건 알지만, 이를 방관하는걸로 그려지는데, 차이가 주도적으로 활약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갔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하지만 장점보다는 아무래도 단점이 더 많았다고 생각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시어머니의 무덤>>
꽃놀이 철, 비단 장사집 노부인 오하나가 찾아와 고향 벚꽃 마을에서 있었던 무서운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다. 마을에는 묘지 언덕에서 꽃놀이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오하나의 집 가가리야의 여자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가가리야 증조 할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다가 자살한 뒤 가가리야 여자들은 꽃놀이 때 묘지 언덕에 오르면 죽는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가가리야에 며느리 오케이가 들어온 뒤, 당찬 그녀의 주도로 가가리야 여자들은 묘지 언덕 청소를 위해 꽃놀이 전날 묘지 언덕에 올라갔다. 그 때 무언가에 씌인 어머니가 며느리를 죽였고, 그 뒤 행복했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과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내렸다는 저주에 대한 괴담. 미야베 미유키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 꾼인지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꽃놀이 묘사에서 시작해서 평화로왔던 벛꽃 마을 묘사, 말괄량이 며느리 등 저주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재미있게 묘사하다가, 과거 증조 할머니의 저주와 그 저주의 재림이 이어지는 클라이막스까지 달려가는 전개가 절묘하고, 호흡과 긴장감도 최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눈물점>>처럼 저주에 대한 이유 설명이 없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증조할머니가 비정상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해서 생겨난 것으로 설명되고 있거든요. 물론 왜 미워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편입니다. 며느리 뱃속 아기까지 죽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심지어 그 저주가 미워하는 대상인 며느리가 죽고 나서도 몇 대를 이어서 내려올 까닭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정도라도 설명이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낫긴 합니다. 괴담이나 퇴마물에서 저주는 어쨌건 이유가 명확해야 이야기가 성립되니까요.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혹은 저주 때문에 죽거나 피해를 받더라도 이유를 알아야 하는 탓이지요.

그러나 이 괴담이 현실화된 과정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벚꽃 마을 사람들 행동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거든요. 마을의 유력자인 가가리야 가문 며느리가 꽃놀이 때 저주로 비참하게 죽었다면 꽃놀이를 계속 그 곳에서 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최소한 위험한 묘지 언덕을 오르는 계단은 보수했었어야 합니다. 이래서야 저주로 인한 죽음을 그냥 가만히 기다린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너무 설득력이 없어요.
마지막에 도미지로가 오하나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어깨의 손자욱은 밀기 위함이 아니라 안아주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도 멋지기는 하지만 도미지로가 말해서 별로 어울리지 않더군요.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으며 여자도 아니고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고 아픈 경험도 딱히 겪어본 적 없는 도미지로가 한참 어른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오하나에게 할 말은 아닌 듯 싶었거든요. 도미지로가 이야기를 듣는 역할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제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만든 결말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괴담으로의 재미는 확실했고, 미시마야 시리즈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지만 단점도 명확해서 감점합니다.

<<동행이인>>
이번에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미시마야를 찾아온 건 나이 쉰 살의 파발꾼 출신 지배인 가메이치였다. 그는 파발을 위해 달리던 어느날 들러붙었던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귀신이 그에게 들러 붙었던 이유는, 귀신 간키치처럼 가메이치도 당시 처자식을 잃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들과 장, 단점이 완전히 반대인 작품입니다. 장점이자 차이점이라면, 귀신 및 기타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완벽하다는 점이에요. 가메이치에게 귀신이 달라붙은 이유는 줄거리 소개와 같고, 간키치가 귀신이 되어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난건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이고 (얼굴이 없으므로), 얼굴없이 가메이치를 뒤 쫓을 때 고개를 계속 끄덕이던건 울고 있어서였습니다. 아버지 찻집에 벼락이 떨어진건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고요. 물론 여관 부뚜막에서 화재를 일으킨 이유는 애매합니다만, 이 정도면 귀신에 관련된 거의 모든 현상에 대해 충실하게 설명해 준 셈이지요.
파발꾼 이야기답게, 당시 에도에서 도카이도를 통해 가는 지방과 길에 대한 풍부한 묘사도 특징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시대물이지만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전해주네요. 파발꾼과 파발 업무에 대한 세세한 설명도 좋았고요.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는 단점이 너무 명확합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치유에 대한, 감동 계열의 이야기인 탓입니다. 솔직히 이게 괴담인가? 싶을 정도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괴담이라면 일단 무섭고 봐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
정체 불명의 저택에 여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괴저택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모아 신처럼 그들을 가지고 놀 속셈이었다. 과거 예수교를 믿었었지만, 기도에 보답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참한 일을 겼었던 저택 주인의 분노와 원념 탓이었다.
올곧은 무사 긴에몬이 지휘했지만 여섯 명은 차례대로 비참하게 죽어갔고, 결국 긴에몬, 진자부로, 오아키 3명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최후의 힘을 모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저택의 심장부인 불타는 화산 장지문을 뚫고 나갔다. 그 때 긴에몬은 저택 주인인 검은 무사와 싸운 뒤 용암에 삼켜졌지만 진자부로와 오야키는 살아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저택에서의 일로 건강을 해친 진자부로는 죽기 전 이 경험을 도미지로에게 이야기해 주는데...


한 편의 장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분량을 자랑하는 대작.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모인 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는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을 연상케 합니다. 제가 명명한 명칭인데 (원조!), 이 장르는 보통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살아남는 방식, 또는 갇힌 공간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탈출하는 방식 중 한 가지 방식을 따릅니다. 특정한 룰을 따라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건 동일하고요. 이 작품에서의 룰은 "6명 중 5명이 죽어야 탈출할 수 있다", 즉 최후의 한 사람만 탈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택은 초반에 이를 노골적으로 가르쳐 주지요. 그래서 첫 번째 방식, 즉 사람들간의 아귀다툼과 생존경쟁으로 진행되나 싶었어요. 그러나 의외로 이야기 전개는 두 번째 방식이더군요. 서로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탈출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이는 인격자이자 참 리더인 긴에몬의 존재 덕분입니다. 하긴, 한 명만 살아남는다면 검술에 능한 무사를 하녀와 부잣집 마나님, 도박에 미친 한량과 주정뱅이 목수, 약국집 후계자가 이길 수 있을 턱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탈출하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밝혀낸다는, 이러한 전개의 핵심 재미요소를 간과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저택에 갇히고, 죽을 위기에 처한건 모두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며, 제령이나 퇴마의 방법도 합리적이지 못한 탓입니다. 애초에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니, 없애는 방법이 합리적일리 없지요. 마지막 탈출도 모 아니면 도 방식으로 우격다짐에 불과했고요.
또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다보니 별로 무섭지도 않다는 점도 단점이에요. 차라리 첫 번째 방식으로 서로 살아남고자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식으로 전개하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건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호러물에 꽤 잘 아울리는 방식이니까요. 미시먀야 시리즈 초반에 비슷한 이야기가 몇 편 있었지요. 이 시리즈도 점점 인간미,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걸 알려주는 이야기가 많아지는걸 보면, 미야베 미유키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네요. 아울러 이런 전개로 반전이라면 반전인, "진자부로는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는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것도 유감스러웠습니다.

이야기도 다른 작품들에 비교하면 지루한 편입니다. 저택이 악의를 드러내는 과정까지가 너무 긴 탓이 큽니다. 우선 오아키가 한텐을 보내어 에둘러 이야기거리가 있다고 요청하는 시작부터 진자부로의 이야기까지의 분량 낭비가 심했어요. 괴저택의 기묘한 디테일도 어린아이들 동화같은 내용과 분위기라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내용에서 불거지는 "예수교" 설정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분량 낭비였습니다. 저택 주인의 원한과 분노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있게 그려지지도 못했어요.꽤 괜찮은 설정이었는데, 불필요한 정보로 낭비된 느낌이 들어 아깝더군요.
화자인 진자부로도 등장 인물들 중 가장 호감가지 않는 인물이라 읽는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가진 재주도 없고, 용기도 없고, 별다른 계획도 없으면서 일행 마사키치를 질투하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진자부로가 도박에 미쳤다는 묘사도 지나치게 많고요. 엄연히 진자부로가 도미지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니만큼, 이런 쓸데없는 묘사들은 좀 걷어내는게 좋았을거에요.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도미지로가 최악이라는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교 관련 천조각이 들어간 한텐을 한 번 만났던 골동품 가게에 맡기는 행동 때문입니다. 여러 명의 목숨이 걸려 있을 물건인데, 굉장히 무책임했어요. 이야기 때 무슨 과자를 먹을지 정도의 고민도 하지 않은 듯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오야키가 '미시마야의 괴담회는 단순한 놀이일 뿐'이라고 일갈해도 할 말이 없겠지요. 제 생각도 오야키와 같습니다.

그래도 저택이 악의를 드러낸 뒤, 이노스케가 딸을 사창가에 팔아먹은 죄를 고백하고 검은 무사에게 참살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생존자들이 탈출할 때까지 달려주는 부분만큼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괴현상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묘사가 탁월하고, 괴저택과 그 안의 괴이 현상에 대한 상상력도 빼어난 덕분이지요.
에도 시대에 대한 디테일도 역시나 최고 수준으로, 특히 예수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교라는 말만 듣고도 도미지로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예수교를 얼마나 배척했는지 드러내고 있는데, 이런 작품은 이전에 본 적도 없네요. 신불을 믿는 사람이 예수교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럴듯하게 설명되고 있고요. 현재와 사뭇 다른 당대 상황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마사키치가 이노스케가 죽은 뒤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설정이 대표적이에요. 온갖 자극에 익숙해진 현대인이라면 이 정도로는 정신이 무너지지 않겠지요.

이렇게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무섭지도 않았고, 설명도 부족하며, 도미지로의 부족함이 두드러진 작품이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6/13

나이브스 아웃 (2019) - 라이언 존슨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할런 트롬비가 85세 생일 파티 다음 날, 칼로 목이 베어진 채로 가정부에게 발견되었다. 경찰 수사에 유명 탐정 브누아 블랑이 함께 하게 되었는데, 누군가 그에게 사건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건 할런의 간병 간호사 마르타의 실수 때문에 할런이 꾸민 것이었고, 마르타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할런의 유서가 공개되면서 사건은 마르타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웰 메이드 추리 영화로 유명한 작품이지요. 넷플릭스로 감상하였습니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잘 만든 본격 추리물이거든요. 구조도 정교하고, 복선과 단서 제공도 공정했습니다.
사실 마르타가 실수로 할런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자, 할런이 그 실수를 덮기 위해 자살하고 그녀는 범인으로 몰리지 않게끔 수를 쓴게 초반에 등장해서 도서 추리물인줄 알았습니다. 자살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실수와 단서가 드러나자 그걸 덮고자 하는 마르타의 필사적인 노력이 이어지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건 유산을 받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하자, 마르타를 살인범으로 몰려고 했던 할런의 손자 휴의 작전이었다는 결말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증거는 빈약하지만, 앞서의 이런저런 사소한 대사와 휴의 행동으로 정교하게 짜맞추고 있을 뿐더러, 휴의 작전이 실패하고 마는 결말까지 완벽했습니다.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마르타의 '선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도 아주 신선했던 발상이에요. 또 부족했던 증거는 휴의 자백으로 채워지는데, 이 장면에서 마르타가 거짓말을 하면 토한다는 특징을 활용하여 통쾌한 맛을 전해주는 것도 좋았고요. 제목 그대로 휴가 칼을 뽑아 들지만, 가짜 칼이어서 마르타 카브레라가 살아남고 결국 재산을 모두 손에 넣는다는 완벽한 해피엔딩도 제 취향이었습니다.

본격 추리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명탐정과 추리쇼도 확실히 선 보여 줍니다. 사실 명탐정은 현재극에서 제대로 그려내기 힘듭니다. 수사 기법이 발달한 탓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추리' 영역으로만 승부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의 브누아 블랑의 중반부까지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치는 첫 등장부터, 온갖 현란한 대사를 떠벌이는 모습은 뻔한 과거 고전 시대 명탐정의 과장된 모습을 답습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추리라는걸 별로 보여주지도 않고요. 또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도 지적인 명탐정역에 별로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추리쇼 장면에서 이런 실망감을 모두 날려보내 줍니다. 멋진 추리력을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샌님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힘과 행동력이 느껴지는 모습이 좋았던 덕분입니다. 기생충같은 가족들 앞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할거라고 시원하게 일갈하는 모습, 경찰에게 붙들린 휴 앞에서 유산은 모두 할런이 이룬 것이라고 비웃는 모습 등은 과거 명탐정들에게는 보기 힘든 멋진 퍼포먼스였어요.

이런 류의 영화에서 많이 보는, 유명 배우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캐스팅도 볼거리더군요.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를 비롯하여 폰 트랩 대령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플로머 (아직 살아 계시다니!), 왕년의 호러 퀸 제이미 리 커티스, 마이애미 바이스 돈 존슨,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 등이 관객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2시간이 훌쩍 넘는 긴 상영 시간은 너무 길었어요.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버지의 돈만 노리고, 그 돈에만 기대어 사는 트롬비 가족들의 모습은 뻔하고 진부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설명도 지나쳤습니다. 이런저런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여긴 듯 한데, 그런 장치까지 넣을 필요는 없었지요. 가족 수를 줄인다던가, 무능함과 불성실한 모습에 대한 설명을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또 휴가 나쁜 짓을 했다는 증거를 잡은 프랜이 그를 불러낸 뒤 무력하게 살해당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협박으로 돈을 뜯어내려는게 아니라, 비난이 목적이었다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증거를 들이대는데 아무런 대책도 하지 않는다? 현대물이라면 휴대폰을 이용한 녹음이라던가, CCTV 등 다양한 대책이 가능했을텐데, 납득하기 어렵지요.

그래도 오랫만에 재미있는 추리 영화를 감상했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브누아 블랑이 등장하는 다음 작품도 보고 싶네요.

2021/06/12

크라바트 -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 박민수 : 별점 2점

크라바트 - 4점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비룡소

고아 소년 크라바트는 꿈 속 계시로 방앗간 주인에게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술을 배우며, 다른 직공들과 나름대로 즐거운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친구 톤다가 죽은 뒤, 이는 마술을 배우는 댓가라는걸 깨닫고 방앗간 주인에게 복수를 결심하는데...

<<왕도둑 호첸플로츠>>의 작가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의 판타지. 1978년에 발표했던 초기작이네요. 2013년에 올렸었던 <<왕도둑 호첸플로츠>> 리뷰에 난난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통해 구입했던 책입니다. 왠지 손이 잘 가지 않아서 지난 수 년간 묵혀 두고 있었는데, 딸 아이가 이제 이런 두꺼운 책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에 딸 아이에게 권해줘도 될까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도둑 호첸플로츠>>같은 유쾌한 아동용 모험극이 아니라 놀랐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복수극일 뿐더러, 톤다와 미할의 죽음이라던가, 자살을 시도한 메르텐이 목이 부러진채 살아가게 되었다는 등의 잔혹한 설정과 묘사도 너무 많았거든요. 아래의 영화 포스터가 불길함 가득한 잔혹 판타지인 이 작품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라도 좋은 점이 명확하다면 딸 아이에게 권해주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완성도부터가 미흡했어요. 크라바트가 친구를 죽인 악독한 방앗간 주인에게 복수하는게 핵심인데, 이런저런 디테일이 과했고 기승전결의 배분도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방앗간 주인의 숙적인 품푸트는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직공들이 마법을 써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내용들도 불필요했고요. 직공들이 방앗간 주인으로부터 마법이라는 힘을 얻어서 잘 써먹었다는 뜻이고, 그러면, 주인을 배신하는게 오히려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니까요. 물론 1년에 한 번씩 직공들 중 한 명이 죽기는 하지만, 전능한 힘을 얻기 위한 지불이라고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건 아닙니다. 즉, 크라바트가 마법을 배운 이상, 친구가 죽었다고 복수하는게 좀 애매해지는거지요. 반대로 이런 이야기보다는 중요할, 방앗간 주인이 모시는 주인은 누구인지, 그의 마법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예 없습니다.
이야기 배분이 이상한건 불필요한 내용보다 중요한 전개 과정을 대충 넘기는 탓입니다. 우선 칸토르카가 왜 크라바트를 위해 목숨을 거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칸토르카가 두려움에 떨던 크라바트를 찾아내는 클라이막스도 단 2페이지로 끝낼 내용은 아니었어요. 멍청한 유로가 사실은 굉장히 똑똑한 조력자였다는 것 처럼 복선과 반전으로 쓸 요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잘 써먹지도 못합니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볼 때, 창작 동화보다는 오래 전 독일 전래 동화를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느낌인데, 차라리
고아 소년 크라바트가 방앗간을 찾아가서 방앗간과 주인, 그리고 동료들에 대해 알게되고 방앗간의 정식 직공이 되는 '기'
친구 톤다가 죽고, 이는 방앗간에서 마법을 배우는 직공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거래였다는걸 알고나서 복수를 맹세하는 '승'
방앗간 주인을 물리치기 위한 방법을 유로로부터 전해듣고 작전을 짜는 '전'
칸토르카와 함께 방앗간 주인과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결'

로 명확하게 정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승' 부분에서 암흑의 마법 학교에서 마법을 배우는 댓가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추가해주고, 마지막 한 판 승부를 지금보다는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면 더할나위 없을테고요.

하지만 지금 결과물은 여러모로 단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딸 아이에게는 권해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영화는 어떨지 조금 궁금하네요.

2021/06/11

범죄 캘린더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범죄 캘린더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엘러리 퀸 단편집. 비교적 후기작으로 엘러리 퀸이 주인공인 라디오 드라마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읽다보니 확실히 라디오 드라마구나 싶었습니다. 설득력있는 동기, 복선으로 뒷받침되는 탄탄한 이야기 구조보다는 극적인 상황을 쉽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릭도 모두 정교하기 보다는, 전달하기 쉬운 트릭들이고요.
문제는 그래서 책으로 읽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는거지요... 트릭들은 추리 퀴즈 수준이고,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탓에 동기와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낮은 탓입니다. "~ 모험" 이라는 제목 때문에 걸작 단편집이었던 <<엘러리 퀸의 모험>> 수록작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또 '캘린더'라는 제목답게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한 편씩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해당 월에 이야기가 진행될 필요가 있었던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3월의 소득세 신고, 5월의 전몰 장병 기념일 정도만 특정 날짜와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뿐이에요. 10월의 할로윈과 12월 크리스마스에 사건이 벌어지는 두 작품은, 날짜를 사건과 무리하게 연결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망작이었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라디오라면 모를까 책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믾지 않고, 권해드리기도 어려운 그런 단편집입니다. 엘러리 퀸의 이름만 믿고 읽으시면 실망하실겁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부자 모임의 모험>>
이스턴 대학교의 유서깊은 야누스 클럽의 멤버 빌 업다이크가 엘러리 퀸을 찾아왔다. 야누스 클럽은 13학번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현재 생존자는 7명 뿐이었는데 그 중 3명이 최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업다이크는 야누스 클럽 안에 5명으로 이루어진 내부자 모임이 20만달러라는 돈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자신과 또 다른 멤버 중 생존자가 모든 걸 갖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48시간 뒤, 빌 업다이크는 살해되고 말았다.

1월의 야누스 클럽 정기 모임 날짜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로 야누스 클럽이니, 내부자 모임이니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핵심은 암호 트릭입니다. 피해자 업다이크가 내부자 모임 멤버들 이름에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남겼었고, 그 말이 유일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미국인이 아니면 풀 수 없는,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쉽게 풀었음직한 트릭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멤버들 이름을 변주하자면, 황연세, 한국민, 양홍익, 김아주, 서인하인 셈이랄까요. 업다이크의 경우는 부부의 이름을 합쳐 윌러임 앤 메리 칼리지라는 약간의 변주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식으로 박성균, 최관이라는 식이니 딱히 정교한 장치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한 마디로 라디오에 적합한, 추리 퀴즈에 가까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전개도 정교하지 못하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3명의 회원이 우연찮게 자연사한 뒤, 살의를 품었다는 동기를 잘 풀어내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대통령의 5센트 은화 모험>>
미모의 아가씨 마사 클라크는 전보로 엘러리 퀸과 죠지 워싱턴 관련 골동품 수집가 패치, 희귀 주화 수집가 체크 남작부인, 희귀 서적 수집가 쇼 교수를 불러모았다. 죠지 워싱턴이 남긴 칼과 은화를 찾기 위함이었다. 죠지 워싱턴이 오래전, 마사의 조상 시미언 클라크를 만났을 때 농장에 묻었던 물건들이었다.

2월 죠지 워싱턴 생일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전무했습니다. 시미언 클라크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워싱턴이 당시 심었던 나무 중 하나 아래에 칼과 은화를 묻었다고 쓰여 있거든요. 이건 암호도 아닙니다. 당연히 별다른 트릭도 없어서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이 말에 따라 마사 클라크 가족이 워싱턴이 심었다는 나무 12그루 밑을 모두 파 보았지만, 칼과 은화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더 황당합니다. 원래 13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가 죽어 버린 탓이라는데 정삼각형 모양으로 간격까지 정확하게 심은 12그루의 나무는 멀쩡하고, 삼각형 한 가운데 심은 나무만 죽었다는건 지나치게 작위적이니까요. 게다가 13그루 나무를 심었다는 엘러리 퀸의 주장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미국 건국은 13개 주였기에 나무는 13그루를 심었어야 한다!"라는게 근거의 전부거든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또 애초에 농장을 잃을 위기였다면, 나무 밑이 아니라 나무 근처 땅을 모두 파 보는게 정상 아니었을까요?
전개도 이상했어요. 이야기 처음에 패치 등 관계자들을 불러 모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 투성이의 본편 이야기보다는, 엘러리가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가 추리적으로 더 볼만했습니다. 돈이 많지만 자동차를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엘러리의 비서 니키가 미인인 마사 클라크를 질투하는 묘사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네요. 추리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이클 마군의 3월 15일 모험>>
퀸 경감의 옛 동료였던 사립탐정 마이클 마군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3월 15일 소득세 신고를 앞두고 관련 서류를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서류 도난 당시, 사무실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엘러리 일행은 다시 사무실에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사무실을 관리하는 카슨 부인이 참혹하게 살해된걸 발견하는데...

이야기 초, 중반부까지는 "왜 도둑은 소득세 신고와 관련된 서류를 훔쳐갔을까?"가 핵심입니다. 이는 마군의 서류 중에 사교계 지배자 벤돔 부인의 딸이 도벽이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으로 밝혀지고요.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기묘한 사건이 특별한 강력 범죄와 연결되는 전개는 재미있었습니다.
소득세 신고일이 3월 15일이고, 소득세 신고용 자료가 협박의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3월이라는 날짜와 이야기를 엮은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마군이 화재 소동을 일으킨 뒤 서류가 도난당한걸로 위장했고, 이를 카슨 부인이 눈치채 죽였다는 진상은 여러모로 불합리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엘러리를 찾아와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하소연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앨러리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냥 강도가 살해한걸로 무마할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엘러리 말대로 벤돔 부인을 협박할 생각을 버리고 카슨 부인을 죽인거라면, 더더욱 서류가 도난당했다는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어요. 협박할 생각을 버렸다면, 카슨 부인에게 불을 지른 이유를 둘러대는게 살인보다는 훨씬 나은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게 오피스를 쉐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안일한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마군이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한 시점보다 나중인 신문지가 들어있었던 증거는 명확했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아주 잘 만든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네요. 별점은 2점입나다.

<<황제의 주사위 모험>>
퀸 경감은 엘러리, 니크와 함께 오랜 친구 짐 해거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역으로 마중나온 짐의 아들 마크 해거드는 아버지 짐이 살해당했다며 10년 전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해거드 가족은 아버지를 쏜 건 가족 중 한 명이라며 지난 10년간 지옥처럼 살아왔다고 말했다. 엘러리는 짐이 죽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황제의 주사위'에 주목해서 범인을 알아내는데...

짐이 쥐고 있던 주사위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였습니다. 두 개 중 한개가 항상 6만 표시한다는 의미로, 6번 피스톨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의미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 뒤는 가관이에요. 6번 피스톨은 왼손잡이가 잡기에 용이해서, 가족 중 유일한 왼손잡이인 딸이 범인이라는 추리가 펼쳐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니까요. 총을 쏘는 것도 아니고, 꺼내는데 왼손잡이냐 아니냐가 뭐가 중요할까요? 중요했다 한 들 이 정도로 딸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그 총은 '왼손잡이만 잡을 수 있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거든요.
칼리굴라와 주사위 속임수에 대해 이런저런 소개도 이야기에는 하등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잡지식에 불과했고요.

무엇보다도, 3월 마지막 날에 수수께끼를 풀어내며 이 모든게 퀸 경감과 니키, 해거드 가족이 함께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을 속이기 위함이었다는 반전은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40년 전 결혼식과 10년 전 40번째 결혼 기념일에 선물을 드렸다는 모순은 말장난이면서도,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서 속임수같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게티즈버그 나팔의 모험>>
엘러리가 니키와 함께 한 충동적인 게티즈버그 여행 중에 자동차가 고장나버렸다. 그 때 잭스버그 군수 스트롱이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스트롱은 마을에서 진행하는 남북전쟁 전몰장병 추모일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날 남북전쟁 생존자가 게티즈버그 나팔을 부는게 전통이었는데, 작년에 생존자 중 가장 고령이었던 케일럽이 나팔을 불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건강했고, 다른 생존자 2명과 남북 전쟁 중 찾았던 보물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군수는 수상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몰장병 기념일 아침에 또 다른 생존자 애브너 체이스가 뇌졸증으로 사망하고, 기념일에서는 나팔을 불던 마지막 생존자 잭 비글로마저 나팔에 묻힌 독으로 죽고 마는데...


어디선가 읽었던 작품. 4월 전몰장병 기념일에 맞춘 이야기는 깔끔합니다. 노인들이 이야기하던 거액의 보물은 휴지조각과 같은 남부 정부가 발행했던 지폐라는 설정도 좋았고, 애브너 체이스의 손녀 시시가 진범이라는 반전도 그럴듯했거든요. 이를 드러내기 위한 엘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잭 비글로가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된건 애브너 체이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우연 덕분이었다는게 핵심이지요.

하지만 이 추리로는 시시가 진범인지, 잭 비글로의 손자 앤디가 진범인지는 드러낼 수 없습니다. 앤디가 할아버지가 남긴 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에, 그 돈을 보다 빨리 갖고 싶어서 할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즉, 엘러리는 그냥 용의자를 한 명 추가한거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법정에서도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완벽한 얼개를 갖추고 있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전개되는 수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약 손가락의 모험>>
트로이는 딸 헬렌 결혼식에 엘러리를 초대했다. 헬렌을 흠모했던 루즈 때문이었다. 그는 헬렌이 헨리 예이츠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의를 드러내다가, 이후 갑자기 변심해서 사죄하고 신랑 들러리로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심한 불안감을 느낀 트로이의 부탁으로 엘러리는 벨리 경사와 결혼식에 참석해서 루즈를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식 직후 헬렌은 결혼 반지 속 독침에 의해 살해되고 마는데...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엘러리가 범행을 막지도 못했고, 경찰보다 범인을 찾아내는데 늦어버린 완벽한 실패담이라는겁니다. 엘러리는 루즈가 아닌 신랑 헨리 예이츠를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거는 결혼만 하면 헬렌의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하지만 결혼 반지는 왼손에 끼고, 압력을 가해 독침이 튀어나오게 하려면 왼손으로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범인이다! 라는 논리로 루즈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흉기인 반지 조사로 경찰이 밝혀내고요.
이렇게 엘러리는 체면만 구긴 셈이며, 사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종료되기 때문에 추리물로는 볼 여지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고, 이렇게 길게 풀어낼 필요도 없는 졸작입니다.

<<추락한 천사의 모험>>
센터 저택에는 기괴한 키마이라 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현재 센터 제약 사장인 마일스의 아내 도로시는 니키의 친구로, 그녀가 니키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걸 고백한 뒤 마일스가 저택 지붕에서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에 깔려 죽을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조각상은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의 아틀리에 지붕 쪽에 위치했었다.
데이비드를 의심한 마일스는 엘러리 퀸에게 관련된 조사를 의뢰했고, 데이비드 아틀리에를 조사하기 위해 엘러리가 방문한 날 마일스는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데이비드는 실종되었고, 도로시가 범행을 자백하는데...


도로시의 불륜 상대가 밝혀지기 전 까지, 범인은 데이비드 아니면 마일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마일스만 없으면 센터 제약과 그 아내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일스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복수심으로 데이비드를 실종으로 위장해서 죽이고, 다친걸로 위장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비서 하트가 폭죽으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살해했다는게 진상이었지요. 즉, 도로시가 사랑에 빠진게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가 아니라 비서 하트였다는 반전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상식을 깨는 맛이 괜찮았어요. 7월 4일 독립 기념일과 '폭죽'을 연결한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캘린더라는 주제에도 잘 맞을 뿐더러, 간단한 트릭이지만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상을 드러내는 핵심 증거 중 하나가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편의적인 전개를 위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일스가 총에 맞았을 때, 누가 쐈는지 보지 못했다는게 대표적이지요. 여기서 그가 죽지 않은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전개면에서는 더 깔끔했을거에요.
또 45Kg이나 되는 조각상에 데이비드를 죽인 뒤 매달아 물에 빠트리는게 혼자서 어떻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가능했을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도로시가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이유가, 하트가 총을 쏘는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고요.

그래도 정통 본격 추리 단편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평작은 충분히 되는,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잘 짜여진 단편이었으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늘 귀의 모험>>
유명 탐험가 에릭슨은 결혼한 조카딸 잉가의 남편과 그 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엘러리 퀸에게 의뢰했다. 잉가의 남편 홉스-왓킨스 부자가 에릭슨이 거주하는 섬에서 잉가와 자기를 살해하지 않을까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섬에는 캡틴 키드가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서, 엘러리는 보물 찾기 핑계를 대고 섬으로 향하는데..

엘러리는 키드가 남겼다는 일종의 암호를 간단히 풀어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그 보물은 키드가 묻은게 아니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그 증거가 보물 상자 속 '백금' 이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백금은 1900년대 이후 보석 셋팅에 이용되었기 때문으로, 박학다식한 엘러리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보물은 홉스-왓킨스 부자가 훔친 장물로, 장물을 공식적으로 유통하기 위해 키드 전설을 이용했다는 앨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에릭슨이 죽기 전 쏜 총알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롱 존의 의족에 박혔기 때문이라는건 많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롱 존이 홉스-왓킨스 부자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가 에릭슨을 단순한 탐욕으로 죽였다고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어요. 보물을 묻은게 부자라는게 증명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에릭슨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습니다. 롱 존이 자백한다 한들,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롱 존을 이용해서 에릭슨을 죽이는 전개만 빠졌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좀 아쉽네요.

<<세 개의 R의 모험>>
발로 대학 학장 발로 박사는 엘러리 퀸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 문학을 가르치는 칩 교수의 실종 때문이었다. 니키와 함께 미주리 주에 있는 발로 대학을 찾은 엘러리는 칩 교수 방의 핏자국,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 된 책을 통해 교수가 6월 30일 밤에 살해당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칩 교수가 여름을 보낸다고 알려진 아칸소 주 통나무집에서 칩 교수의 백골화된 사체와 그가 쓰던 추리 소설인 <<세 개의 R의 모험>> 원고를 발견하는데...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대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게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건 연극이어고, 엘러리 퀸은 발견된 시체가 백골이었다는걸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고작 10여주 동안 사체가 백골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동기는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 홍보를 위해서였지요. 유명 탐정이 헛다리를 짚은 이야기를 기사화할 생각이었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깔끔하고, 주어진 단서도 공정한 괜찮은 본격물이에요.

하지만 교수들이 꾸민 계획은 여러모로 부실했어요. 핏자국을 발견한 시점에 경찰을 부르지 않은 이유부터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제가 탐정이라면 먼저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했을 겁니다. 또 백골 사체가 이상하다는 근거도 빈약합니다. 사체를 백골로 만드는 무슨 방법을 썼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죽은 고양이의 모험>>
니키 포터 양은 저주받은 검정 고양이 모임 회합에 엘러리 퀸과 함께 참석했다. 10월 31일의 챈슬러 호텔에서의 비밀 회합은 니키의 친구가 개최한 할로윈 파티였었다. 파티 중 추리 게임을 하다가 참석자 중 한 명인 크롬비가 살해당했고, 동기는 그의 무분별한 여자 관계 때문으로 드러나는데...

핼로윈 파티에 대한 장황한 묘사를 빼면,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파티를 위해 복잡하게 꾸며놓은 호텔 방을, 불이 꺼져 있었던 추리 게임 당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냐는 것이지요. 엘러리 퀸의 추리는 이 방을 꾸민 루시 트렌트가 범인이라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방을 꾸몄다고해도 과연 어두운 상황에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또 파티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 추리 게임이 시작되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외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루시 트렌트 범인설은 이렇게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복잡한 여자 관계가 동기인데, 정작 당사자가 아니라 그 동생이 복수했다는 설정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초대해서 추리 게임을 하는 동안 저지를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도 몇 명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추리 게임이라는 작 중 소재처럼, 추리 퀴즈 수준의 졸작으로 점수를 줄 여지는 전무합니다.

<<비밀을 폭로하는 병의 모험>>
추수감사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배달하던 엘러리 퀸과 니키는 우연히 방문한 프랑스 레스토랑이 마약을 밀매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캐리가 마약 밀매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누명을 썼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체포하기 전에 마약을 건넨 웨이터가 살해되는데...

우연히 방문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샤토 디켐"을 주문하니 마약이 나오고, 우연히 탄 택시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택시 운전사가 흑막이라서 그가 레스토랑 웨이터를 살해했다는 내용의 작품. 우연으로 점철된 전개로 실소를 자아내는 졸작입니다. 작품이 아니라 입문자용 추리 퀴즈라고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황태자 인형의 모험>>
입슨 양이 30년을 쏟아 부어 만든 인형 컬렉션인 '돌렉션'문제로 변호사 본들링이 퀸 부자를 방문했다. 컬렉션 중 가장 가치가 큰, 49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황태자 인형을 유명한 예술품 도둑 코머스가 훔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입슨 양 유언으로 돌렉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백화점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고, 퀸 부자는 직접 경찰과 함께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했지만, 인형은 결국 가짜로 바꿔치기 당하는데...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예고장을 보내는 전설적인 괴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만화같은 작품. 진상은 간단합니다. 변호사 본들링이 도둑 코머스였던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인형을 직접 바꿔치기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본들링이 예고장을 보내면서까지 사건을 키울 필요는 없었어요. 과거 꾸준히 예고장을 보내왔다면 모를까, 예고장을 보낸건 이번이 처음이라고도 하니 더더욱 불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변장시켜 경찰의 시선을 끈 행동 역시, 대역들이 체포되면 금방 드러날 유치한 작전이었고요. 그냥 다이아몬드가 사라진다면 본들링이 무조건 혐의를 받을 테니 그 혐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본들링이 범인이라는 엘러리의 추리는 너무 당연해서, 그의 정체는 어쨌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이런 위험을 짊어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산타클로스로 변장해서 인형을 지켰던 벨리 경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작품다운 왠지모를 유쾌함과 활기는 좋았지만, 추리 퀴즈 수준밖에 안 되는 작품이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중반에 잠깐 라디오 극본을 그대로 옮긴 듯한 부분이 있는데, 의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라디오 극본이라는걸 알려주기 위한 의도였다면, 극본 전체를 부록처럼 수록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