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지음/매일경제신문사 |
국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은 역사서. 역사적인 가치와 담고 있는 의미는 물론 국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짧게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가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구입했던 고령 가야 금관이 도굴품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12개국이나 되는 나라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듯 'OO가야'가 아니라 가락국, 가라국, 아라국과 같은 이름이었다. 임나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문무왕릉비 설명도 재미있는 내용이 많더군요. 비에 따르면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 왕손의 후예라는 것 처럼요. 비 외에도 거대 무덤, 북방 민족이 신성시하는 나무와 사슴뿔로 꾸며진 금관, 왕의 명칭이 '칸'과 비슷한 '마립간'이라는 등의 다른 근거들도 꽤나 그럴듯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신라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평지에 목곽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넣은 뒤봉분을 올리는데, 이게 바로 카자흐스탄 양식이랍니다. 동시기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인데 말이죠. 금관도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때 등장하며, 아프카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 무덤 유물과도 흡사하고요. 또 이러한 거대 무덤과 금관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으로, 후대 법률왕 무덤은 규모가 작은, 돌로 무덤방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며 부장품들도 주로 투기류였다는 것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법치 체계가 확립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결말은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정말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은 아니고, 단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데, 근거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어요.
화엄사 석탑 설명에서 소개되는 여러가지 국보 탑 소개도 재미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차례 수정되었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불상의 명칭과 뜻을 알려주는 부분도 좋았어요. 석가모니는 '샤카족 (인도 종족)의 성인' 이라는 의미, 비로자나불은 지혜와 진리의 부처를 부르는 칭호로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의 음역이라는 것, 아미타불은 '무한한 수명의 것'이라는 범어 '아미타우스'에서 유래, 미륵은 석가모니 제자 중 한 명으로 사후 부처로 신격화 보살은 부처처럼 깨달았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존재라는 등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밀레 종의 유명한 인신공양 설화는 일제 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공한 설화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어요.
그 외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관촉사 은진미륵이 이름처럼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데 놀랐습니다. 생긴 걸로는 영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관촉사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이 따로 없고, 법당 벽 창으로 야외 불상이 보이도록 만들었다는데, 다음에 관촉사에 가면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일본이 계속 노렸었고, 심지어 '구변국'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사칭하면서까지 달라고 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이 때 조선은 유교 국가라서 딱히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태종과 세종 모두 주려고 했지만, 예조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난중일기가 국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여기서 왜 난중일기가 국보인지에 대한 설명이 특히 와 닿았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귀중한 '기록 유산'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뿐 아니라 전략과 전술, 일반 백성 모습까지 고스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누군가의 일기도 내용에 따라서는 국가 1급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저도 일기를 열심히 써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선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과연 '충'무공이다 싶더군요.
1968년과 70년, 중국에서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 한나라의 가장 중요했던 유물이 나온 곳이 우리나라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910년대, 일본 학자의 낙랑 고분군 발굴에서 수습된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인데, 손바닥만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정말 엄청나더군요. 중요한 유물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러한 국보들의 입수, 보존 경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라면 간송 전형필 관련 일화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 중에서 특히 훈민정음 혜레본을 입수한 경위가 인상적이었어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지하 조직원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가보를 판 것이라고 하거든요. 이 항목에서 훈민정음은 오롯이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도 나왔었던 승려 신미 창제설의 경우, 신미는 산스크리트어의 자음, 모음 설명에 그쳤다는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식입니다. 훗날 문종이 된 세자와 정의 공주의 도움이 오히려 컸다는데, 특히 정의 공주 관련 사료들을 보면 공주는 정말 똑똑했었나 보더라고요. 신미보다는 정의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와는 반대인 문화재 훼손과 도난 등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내용이 많았습니다. 훼손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억지로 복원해서 망가진 문화재들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석굴암이야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 떡칠을 해서 복원에 십 수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던가, 부석사 무량수전의 해체 복원 때 철물을 사용하여 건물을 망쳐놓았고 해체 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내용은 화가 날 정도였어요.
물론 불국사 복원 같이 광복 후 복원도 엉망인건 사실입니다. 개발 독재 시대 성과 주의에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습성이 결합된 아쉬운 결과물들이지요. 지금이라도 다시 잘 복원하기를 바랍니다. 제 생전에 제대로 복원된 유물을 볼 수 있도록요.
국보 도난 사건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 2019년 말 기준으로 도난 피해를 입은 국가지정문화재는 2,438점이었고 이 중 1,552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니 놀랍습니다. 문화재 도둑들에게는 제발 천벌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200명이나 되는 괴한을 동원하여 해체 후 도쿄로 빼내려던 다나카 미쓰아키의 계획이 실패했던 사건, 해방 후 미국에 국보급 백자를 팔아먹으려는 시도를 막아내었다는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의 활약 등은 다행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국내로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일은 안타깝더군요. 이런 일은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쉽고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으며, 도판도 좋습니다. 단순한 국보 사진이야 인터넷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긴 한데, 일제 강점기 등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이 많이 수록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문화재가 어떻게 방치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에요. 수학여행 때 첨성대를 둘러싸고, 올라거서 찍은 사진을 보면, 이래서야 도굴만 문제는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책 초반부를 장식하는 무령왕릉 발굴과 유물에 대한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 관련 이야기, 백제 금동 대향로 이야기 등 다른 자료를 통해 많이 접했던 이야기가 제법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국보와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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