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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0

모리무라 세이이치 별세

관련 뉴스. 2023년 7월 24일, 향년 90세로 사망하셨습니다.

80년대에 비교적 많이 소개되었을 뿐이라 최근 독자들은 잘 모를 작가입니다만 한 때는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비롯한 많은 상의 수상 작가이자, 마츠모토 세이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회파 추리 소설의 거장으로 일세를 풍미했었지요. 영화화도 많이 되었고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당대의 라이벌 마츠모토 세이초처럼 대표작 (<<고층의 사각>>, <<인간의 증명>>) 정도는 국내에 꾸준히, 계속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설정은 있을리 없다! 트릭이 변화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오랫만에 소개드리네요. 국내 소개된 작품은 3편입니다. 이 중 '사쿠라다 리셋 3부작'은 라이트 노벨 같은데, 이미 절판되었고 중고 시세는 사악하네요. 구해 읽기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만,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겠지요.
그나저나 지나치게 일본 작품 위주라는건 좀 거슬립니다. 이런 류라면 '다아시 경 시리즈'를 빼 놓을 수 없었을텐데 말이죠


특수 설정 미스터리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처음부터 설정으로 포함되어 있는 미스터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현실과 다른 물리법칙, 심령현상이나 초능력, 판타지나 공상과학과 같은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미스터리의 트릭과 추리 논리에 특수한 설정으로 인한 구속력이 더해지는 것이 매력이다.

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 가모우 다츠야
19세기 영국을 연상시키는,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총 6편의 연작 미스터리. 이 세계의 마법에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며, 결코 무법천지가 아니다. 마법이 개입된 세계의 법칙에 따라 왕립 마법원 수사관인 데이븐포트가 논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마스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의 주민이 된 꿈을 꾸는 주인공들. 꿈속에서 누군가가 죽으면 현실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들은 꿈속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꿈과 현실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은 파격적이지만, 세계관은 매우 논리적이다.

일곱 번 죽은 남자 - 니시자와 야스히코
주인공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같은 하루를 9번 반복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소년. 그에게는 가끔씩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루프에 빠진 두 번째 바퀴에서, 첫 바퀴에서는 무사했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말았기 때문. 주인공은 루프의 법칙에 따라 할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혀낸다.

명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탐정이 경찰 아래 움직이는 조직이 되어버린 세상. 증거를 조작해 죄를 면했다는 의혹으로 명탐정의 탄핵 재판이 열리는데........ 이 책의 특수 설정은 탐정 조직의 존재 뿐 아니라, 특수한 조건에서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환생한다는 것. 환생자도 참여하는 탄핵 재판의 행방과 사건의 진실이 복잡하게 펼쳐진다.

고양이와 유령과 일요일의 혁명 (사쿠라다 리셋 3부작) - 코노 유타카
주민의 절반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 '사쿠라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주인공은 기억을 완전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그리고 여주인공은 세상을 3일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초능력자들로 가득한 마을에서 두 사람이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데, 능력끼리 조합하는 퍼즐 같은 논리성이 매력적.

2023/07/29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우타노 쇼고 / 이연승 : 별점 2점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우타노 쇼고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물. 이런 류의 기획물은 그리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원작을 이야기와 별 관계없이 무리하게 집어넣는 등 억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도가와 란포와 상관없는 독립된 작품으로 발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의자? 인간!>>
인기작가 스즈카는 창작 동반자였던 아키히로를 차버리고 부유한 간부급 공무원 하라구치와 결혼했다. 아키히로에게서 사람을 써서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5년 뒤, 아키히로가 문자를 보내왔다. 지난 5년간 그가 어떻게 복수를 계획하여 실행해 왔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즈카의 소파 속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고, 스즈카가 문자를 보내자 정말로 소파 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인간 의자>>에서 따 온 이야기. 의자 안에 남자가 들어간다는 설정을 따왔고, 비현실적인 인간 의자 제작과 안에 들어가는 과정, 방법에 대한 디테일은 유사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원작에서 인간 의자가 변태의 집요함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여기서는 복수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즈카가 궁지에 몰리는 심리 묘사도 범인의 서간문으로만 이루어진 원작과의 차이점인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결말로 이르는 빌드업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다만 진상, 그리고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아키히로는 의자에 여벌 휴대폰을 넣어놓고 전화를 걸면 진동이 오게 했을 뿐으로 실제로 안에 들어가 있던건 스즈카의 남편 하라구치였다, 그래서 아키히로가 의자 안에 있다고 굳게 믿은 가즈키가 의자를 난도질해서 하라구치는 죽고 말았다는건데 억지스럽고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키히로가 "나를 죽이세요"라는 메시지를 이렇게나 장황하게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스마트 폰 속 여자와 여행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괴담물 (?). 현대 문명의 이기로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일종의 다른 세계(사후 세계?)와의 연결고리로 활용하고 있는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자신이 너무 사랑해서 죽여버린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을 학습시킨다는 설정도 꽤 참신했습니다.

하지만 설정을 빼면 <<어느날 갑자기>> 등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는 단순한 괴담에 불과합니다. 기승전결도 애매하고, 이야기에서 합리적인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는 탓입니다. 남자마저도 사후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결말도 어정쩡했고요. 보다 독특한 반전 정도는 나와주는게 좋았을거에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원작에 현대적인 설정을 덧붙였을 뿐, 새로움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D의 살인 사건>>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이지만 주로 흥신소 의뢰로 먹고 사는)인 '나'는 도쿄 뒷골목 거리에서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친해진 초등학생 세이야와 함께였다. 피해자 노조미는 SM 플레이를 즐기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밀실에 가까왔고 접근 가능했던 인물들도 제한적이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세이야가 범인일 것이라 추리했다. 목격자 두명의 증언 - 범인이 입은 옷을 각각 주황색과 검은색이라고 다르게 말한 - 이 근거였다. 사건 당시 세이야가 입고있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티셔츠는 주황색과 검은색 양쪽 모두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다소 변태적인 성행위 도중 살해당한 피해자, 밀실에 가까운 현장, 범인의 옷을 서로 다르게 말하는 목격자라는 소재를 따 와서 현대적으로 재 구성한 작품.
'나'의 추리는 좋았습니다. 옆 건물과 좁게 붙어있던 창문으로 초등학생은 충분히 침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었고, 목격자의 증언이 달랐던 이유라며 제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도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 세이야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건 솔직히 무리였습니다. 동기가 설명되지 못하니까요. '나'가 제시한, 성범죄를 저지르려다가 살인까지 저질렀다는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진상은 더 억지에요. HR 기기 등 가상 현실을 활용하여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가 사망했다는건데, 가상으로 채찍질 같은 자극을 주는 기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있다손 쳐도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안전 기준이라는게 있을테니까요. '비가시 광선' 때문에 옷이 두 가지 색깔로 보였다는 것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만큼이나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요.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장비를 해체하고 숨겼다는 마사코의 행동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봤자 SM플레이를 즐긴 흔적을 숨길 수는 없었거든요.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 '실수로' 죽었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살해당했다'는게 낫다고 여겼을 수는 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단순 변사가 살인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라도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게되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게다가 세이야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나'에게 아동 성 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씌운다는 마지막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배신감을 느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뒤의 설득력없는 추리와 결말을 덧붙이지 말고, '나'의 추리로 이야기를 끝내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동기만 좀 합리적으로 만들어서요. 이 인물 구도에서 합리적인 동기를 만드는건 불가능해보입니다만.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
스무살 가까이 차이나는 어린 여성과 결혼 후 실직해 기둥서방처럼 얹혀사는 타로는 그 탓에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 고스케를 떠맡아 돌보게 되었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던 타로는 란포의 소설 오세이 등장을 읽은 뒤, 고스케를 사고로 가장하여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소설처럼 고스케를 의류함에 넣고 질식사시킬 속셈이었다. 치매 탓에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키던 고스케가 했음직한 행동으로 의심을 살 이유는 없었다.
아내의 파리 출장에 맞춰 범행을 결의한 타로는 사전 조사차 직접 의류함 안에 들어갔다가 갇히고 말았다. 고스케가 별 생각없이 다른 물건들을 함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타로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직접 구조를 요청하겠으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타로가 나이가 많은 탓에 평소에 스마트폰에 대해 무지했고,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아내 유코가 원래 자기 것이었던 타로의 폰을 원격잠금하고, 회선도 정지시켜 통화를 못 하게 막아서 죽게 만든다는 트릭이 사용되었거든요.
이렇게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데다가, 나름의 트릭까지 사용된 점 만큼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유코가 타로에게 품었던 살의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코가 진작부터 불륜을 저질러 왔다는 설명은 있는데, 이를 살의로 이어지게 만드는 설명은 좀 부족했어요.
치매 노인 탓에 의류함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늙은 치매 노인이 의류함 뚜껑 위에 무언가 덮어놓았다고 뚜껑을 열지 못한다? 저는 잘 와 닿지 않더라고요. 뭔가 다른 이유 - 자물쇠를 잠갔다던가 - 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치매 노인이 평소에 무언가를 잠그는 (?) 행동을 많이 했다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졌다면 더욱 좋았을테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원작과도 유사하고, 현대적인 설정과 트릭을 효과적으로 사용한건 분명합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치매 노인 관련된 복수극은 오가와라 히로시의 <<냉혹한 간병인>>이 아직까지는 최고네요.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붉은 방에 모여 일탈을 즐기는 일곱 명의 남자들.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다. '죄를 물을 수 없는 살인'을 저질러온 T역의 배우가 공포탄이 아닌 실탄에 맞은 사건이었다. 관객 중에 경찰이 있어서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관객들은 모두 중요 참고인이 되었는데....


사건도 연극의 일부로 마지막 공연에서 선보인 특별 부록이었다는 이야기.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관 투입과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고, 이후의 과정이 모두 작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막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스포일러를 이용하여 관객들에게 더 충격을 주려고 했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흥분했던 관객이 무대로 난입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결말은 영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연극으로 여긴 관객의 반응 등 볼만한 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없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깔끔했을거에요. 이 결말 탓에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음울한 짐승의 환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육체만 생각하는 변태였지만, 스스로를 철저하게 통제하여 교육자로 잘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날 산책 중 이상형인 여자 유키를 알게되어, 그녀가 운영하는 북유럽풍 잡화점 락카우스의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두달 쯤 뒤, 내가 란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걸 알게 된 유키가 도움을 청해왔다. 오에 슌데이라는 발신자가 트위터 DM으로 그녀에게 버림받았었는데, 그녀를 다시 발견하여 복수한다는 글과 에도가와 란포의 귀한 초판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하는 글을 연달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짐작가는 사람이 없냐는 질문에 유키는 20년 전 사귀었던 여자 후배 가야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라는 3인칭에서 '나'로, 다시 '그' 전환되는 시점이 급작스럽고 미묘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 의도인지, 번역 오류인지 헛갈리네요.
여튼 변태인 '그'가 카메라를 설치해 유키를 협박하는 한편, 착한 단골로 위장하여 조력자 위치에 올라가지만 유키에게 정체가 드러나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키의 펜던트가 카메라였고, 그 때문에 '그'의 범행이 발각되는 결말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카메라를 몸에 달고다닐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키가 알고보니 트랜스젠더라서 살해했다는 일종의 반전도 신선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영화 <<크라잉 게임>>이 발표되었을 때 정도의 시기였다면 모르지만요. 지금은 그렇게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마니와 가즈키를 유혹하다가 가즈키는 '시짱'이라는 피규어를 사랑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분노가 폭발한 나는 가즈키를 속여 집에 침입한 뒤 시짱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가즈키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신의 옷 주머니에 부서진 인형 머리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라는 증강현실 게임 엔딩을 접한 나는 다시 가즈키를 골라 게임을 시도했다. 그런 나를 방해한건 남편 가즈키였다. 게임에 빠진 나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가즈키와 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출소 후 70세 노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조용히 살게 된 나는우연찮게 노인 스나무라 다케오에게 교도소 주문에 대해 털어놓았다. 노인은 혼자서 주문에 대해 조사한 뒤,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주문에 등장하는 단어는 모두 1990년에 방영된 TV 프로그램이었고, 주문은 방송 채널 번호를 이용하는 암호문이었다. 암호문은 특정 지역을 의미했고, 노인은 그 곳에 무언가를 숨겼으며 그건 1990년에 일어났던 흉악한 강도사건의 절도품이라고 추리했다.
하지만 방문한 장소는 이미 신축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기괴한 사이버 애정극에서 시작해서 암호 해독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은 짤막한 쇼트쇼트 블랙 코미디로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 수록작 중 유일하게 원작을 접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호 해독은 재미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구전되는 '행운을 불러오는 주문'이 90년대 당시 TV 프로그램의 명칭이었다는 아이디어도 좋고, 이걸 어떻게 글자로 치환하는지?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잘 그려지고 있거든요. 노인은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에 끈기있게 도전하여 풀어낼 수 있었다는 설정도 좋고요. 암호문을 풀어낸 뒤, 암호문이 가리키는 장소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추리역시 합리적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조사해서 밝혀내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따로 논다는 겁니다. 특히 화자인 유리나가 겪은 게임 속 사건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암호 해독 이야기와 별로 관계는 없어요. 유리나가 감옥에 간 이유인 남편 살해 동기에 불과하거든요. 이렇게까지 펼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란포의 원작을 너무 의식한 것 같아요. '비인간적인 사랑'을 이렇게 무리하게 삽입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두 개로 분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만큼 두 이야기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물이라 생각했던 증권이 버블 지나면서 파산한 회사라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는 결말도 뜬금없었을 뿐더러,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결말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른 설정은 다 없애고, 나이 많은 노인과 함께 사는 손녀딸이 교도소 자원 봉사를 갔다가 주문을 들었다는 정도로 풀어나가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상한 설정과 앞과 뒤의 곁가지 이야기는 불필요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살해해서 복역 후 출소한 유리나가 오갈데 없어서 나이 많은 노인과 결혼했다는 설정은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도, 남편 살인범과 함께 살고 싶을까요? 젊은 여자가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상황인지 궁금해집니다.

2023/07/28

숫자 갖고 놀고 있네 - 폴 록하트 / 김정은 : 별점 2.5점

숫자 갖고 놀고 있네 - 6점
폴 록하트 지음, 김정은 옮김/생각의서재

수, 숫자가 본질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찰하는 책. 숫자 체계가 생겨나서, 기호화되는 과정과 가상의 부족인 바나나 부족 등의 예를 거쳐 이집트 상형문자, 로마, 중국과 일본의 한자 표기까지 소개가 상세합니다. 본질적인 의미를 되짚기 위함이지요.
이집트의 계산용 동전, 로마의 타불라, 일본의 주판 등 계산 방법 소개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데, 타불라 계산법이 주판과 유사하다는건 흥미로왔습니다. 주판으로 어떻게 계산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인도 숫자 설명에서 0이 그리 대단한게 아니라는 말도 신선했습니다.

사칙연산에 대해서는 특별히 공들여서 설명하고 있으며, 내용도 방대한데 여러가지 팁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453과 866을 더한 뒤 395를 빼야 한다면, 덧셈 과정에서 받아올림을 아예 하지 않고 답을 12 11 9 (즉, 십이백 십일십 구)로 적은 뒤에 바로 395를 빼는 식입니다. 그러면 받아내림을 전혀 하지 않고도 924라는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게 숫자를 가지고 노는것이겠지요. 사칙연산에서 분수 항목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요.
계산기가 있는데 왜 산수를 공부해야 하느냐는 평상시 궁금증에 대한 답도 실려있습니다.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산수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에서 나오는 지적이고 창의적인 시각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저자가 단순한 사칙연산을 새롭고 재미나게 바라보았나봅니다.

그런데 사칙연산 분량은 지나치게 많았습니다. 숫자에 대해 잘 알려주고자하는 책의 취지는 알겠지만 쉬운 이야기를 너무 길고 장황하게 썼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었어요.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정도의 독자라면 사칙연산은 당연히 알고 있을텐데 말이죠.
또 처음에는 아이들이 읽기 딱 좋다고 생각했지만 뒤로 가면 많이 어려워지는 편입니다. 숫자를 가지고 놀기는 버거울 정도로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이런 걸 보면 어떤 독자가 읽어야 적합할지 감이 잘 오지는 않네요. 최소한 저는 적합한 독자는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7/26

이 삶을 다시 한번 - 도다 세이지 / 조은하 : 별점 1.5점

이 삶을 다시 한번 - 4점
도다 세이지 지음, 조은하 옮김/애니북스

마사토끼의 추천 글을 읽고 보게 된 작품. 아래의 유명한 <<양파와 인생>>이 수록된 책입니다. <<양파와 인생>>처럼 짤막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맛이 있는, 기묘한 맛에 가까운 쇼트쇼트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승전결이 무난한 드라마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페이지로 구성된 짤막한, 쇼트쇼트라 부를만한 작품들 역시 반전이나 기묘한 맛 장르물보다는 삶과 인생에 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고요. 인스타 단상을 만화로 옮긴 느낌이랄까요? 짧고, 뭔가 있어보이지만 실제로는 별 알맹이 없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유명한 <<양파와 인생>>도 시인 칼 샌드버그의 원본이 있더라고요.

"인생은 양파와 같다. 한껍질씩 벗기다 보면 가끔 눈물이 난다. (Life is like an onion. You peel it off one layer at a time and sometimes you weep.)"

작화도 정성들여 열심히 그리기는 했지만 캐릭터 묘사나 뎃셍력, 터치 모두 좋지 않습니다. 아마추어가 단상을 홀로 SNS에 올리다가 주목을 끌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의 작품들이에요. 프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완성도도 미흡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사토끼한테 그만 낚여야겠습니다.

2023/07/25

'젊은 모색 2023' 관람

지난 달의 '게임사회' 전시에 이어, 이번달에 관람한 전시입니다. 회사에서 매달 실시하는 문화 행사를 이용하였습니다.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집에서 가까워서 딸 아이가 어릴 때 자주 데리고 갔었던, 여러가지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평일에 혼자서 방문한건 처음이네요. 이렇게 또 추억이 하나 쌓여 갑니다.

언제나 방문하면 찾아보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과 큰 화분을 둘러보고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저 큰 화분 위에 뭐가 있나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살짝 봤더니, 평면에 올록볼록하게 뭔가 나와 있는 형태더군요. 싹이 나기 직전의 무언가를 입체화한 것일까요? 살짝 궁금해집니다.
이번에 찾은 전시는 '젊은 모색 2023' 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정례전이라고 하네요.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전시는 주제가 전시의 무대가 되는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으로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순수 미술 뿐 아니라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다양한 직군의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고요. 같은 이유로 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도 굉장히 직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었고, 제 이해 수용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작품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작품들에 더 눈길이 많이 갔는데요, 대표적인건 과천 현대 미술관이 주제라면 누구나 생각해봄직한, 미술관 자체를 미니어쳐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공간 및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인 씨오엠 COM의 작품입니다. 누가 보아도 미술관임을 알 수 있는, 원뿔모양의 형태가 돋보이는 미니어쳐가 특히 귀여웠는데, 더 작게 만들어서 뮤지엄 샵에서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미술관이라는 공간 내에서 가장 존재감이 있는 사물인 기둥에 초점을 맞춘 작가가 여러명 있는건 신기했습니다. 작가들도 깊은 연구와 고민보다는,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사물에서부터 아이디어를 발산하는게 더 용이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오브젝트 자체로도 괜찮았으니 선택했겠지만요. 당연히 작품들 수준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시에서 시작하여 사진, 조각, 설치 미술 등 작품들이 보여주는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도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고요. 이 중에서는 개인적으로는 건축가인 김현종 작가의 <<범위의 확장>>이 가장 좋았습니다. 기둥을 손대지 않고 감싸서 새로운 무언가로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는게 좋았어요. 건축가답게 건축의 핵심 구조이지만, 전시장에서는 애물단지인 기둥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졌습니다.
미술관의 공간과 환경에 집중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래 황동욱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빛과 바람의 흐름, 움직임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키네틱 아트인데, 정말로 자연이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과 효과가 좋았어요.
 

그런데 이런 결과물이라면, 구조물 없이 원통 공간 안 360도를 커버할 수 있도록 빔 프로젝터 여러대를 설치하여 보여줄 수도 있어 보였어요. 원통형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제품이 나와도 괜찮겠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제 베스트는 추미림 작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평면 작업이지만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여 시간의 이미지를 씌운 <<횃불과 경사로>>도 인상적이었고, 과천 미술관을 단순하게 시각화한 평면 작업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려한 그래픽으로 과전 현대 미술관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점 정도 집에 걸어두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래와 같이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며 오랫만에 여유를 즐기며, 힐링하고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관람을 마치며 제가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라면 뭘 만들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라면 과천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가지고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만드는 시도를 해 보았을 것 같아요. VR로 다다익선을 뒤집어서, 감상하는 사람이 TV가 안쪽으로 쌓여진 탑 안에 들어가 있는 형태로 감상할 수 있도록요. 과연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요? 거울로 된 구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발광한다는 에도가와 란포 작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2023/07/23

N - 미치오 슈스케 / 이규원 : 별점 2.5점 (2점에 가까운)

N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

수록작들 대부분이 정통 추리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건이 많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등장한다 해도 전형적인 범죄물이나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탓입니다. 예를 들어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은 살인, 사체 은닉과 같은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범죄와는 별 관계없는 인간 드라마입니다. 살인범이 체포되지도 않고요.

그래도 드라마들은 괜찮은 편이고 재미도 있습니다. 인간 드라마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일상계 추리물 (이름 없는 독과 꽃), 성장기 + 청춘물 + 인간 드라마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가족 드라마 + 일상계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등 선보이는 장르의 폭도 넓습니다.
정통 추리물이 아닐 뿐, 추리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특히 <<이름 없는 독과 꽃>>은 작가 명성에 걸맞는, 괜찮은 일상계 추리물이에요. 학교 무대의 가벼운 일상계라는 점에서 요네자와 호노부 느낌이 살짝 들더군요. 결말은 전혀 달랐지만요.

그러나 읽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뀐다는 광고는 과장 광고였습니다. 세계관과 무대, 등장 인물들이 겹치는 연작 단편 소설일 뿐이에요. 읽는 순서에 따라 대단히 이야기가 바뀌고 감상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작가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작품이 그걸 잘 반영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기는 힘드네요. 소설이라는 매체에 적합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읽은 순서대로에요.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고등학교 야구부원 신야는 보결이지만 매일 새벽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형 히데오는 고시엔 진출을 눈 앞에 둔 결승전 직전 무리한 포크볼 연습으로 팔꿈치를 다쳤고, 그 이후 자살했다. 신야는 형에게 악질 DM을 보낸 누군가가 보란듯 형처럼 자기를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죽어 버려"라고 말하는 회색 앵무 리쿠짱과 주인인 소녀 나가미 지나미를 알게되었다. 지나미가 죽고 싶어 한다는걸 눈치챈 신야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한 원양어선 선원 니시키모 씨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서 함께 빛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꽃을 보게 되었다.


학원물이자 성장기인 작품. 거대한 꽃을 보았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서로의 속 마음을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곤충 연구원인 나는 버블 붕괴로 전 재산을 잃은 연인 다사카에게 폭행을 당해왔다. 마침내 살해당하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니시키모라는 남자가 다사카를 막는 와중에 먼저 다사카를 죽이고 말았다. 니시키모는 원래 자신이 다사카를 죽이려 했다며, 사체 은닉을 도와준 뒤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경찰이 뒤를 쫓는 상황에서 다섯 줄기 박명광선이 만드는 거대한 꽃을 보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 뒤 나는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니시키모는 원래 빈집털이였으며, 다사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걸 알게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를 구해주었던 동네 소꼽친구였고, 주폭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떠올려 나를 구해주었던 것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에서 주인공을 도와주는 원양어선 선원으로 나왔던 니시키모의 과거와 정체가 드러나는 작품. '나'와 니시키모의 오랜 인연이 함께 소개됩니다.
범죄물이기는 하지만, 주폭에 희생당한 가족의 생존자에 대한 슬픈 드라마라고 하는게 맞겠지요.
 
하지만 너무 생각대로 뻔하게 흘러간다는건 아쉽습니다. 자기를 한 번 도와준 정체모를 남자에게 푹 빠지고 마는 전문직 여성이라니, 너무너무 뻔하잖아요..... 조폭과 사랑에 빠지는 여의사가 나오는 20여년도 더 지난 신파 멜로물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일일 드라마도 이것보다는 의외성이 있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아일랜드에서 호스피스로 일하는 가즈마는 일러스트레이터 홀리의 터미널케어(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를 맡았다. 홀리의 착한 딸 올리아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기 위해 가즈마에게 시 글래스를 찾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올리아나와 홀리의 언니 스텔라 모두 시 글래스를 찾았다. 그러나 두 개의 시 글래스 중 한 개는 가즈마가 만들어서 놓아둔 것, 또 하나는 원래 스텔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시한부 인생, 소원을 비는 아이템 등은 <<마지막 잎새>>와 비슷합니다. 착하디 착한 사람들만 나온다는 것도요. 착하기 그지없는 올리아나에 대한 묘사가 특히 빼어났습니다.
지금 읽기는 다소 낡은 소재이지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이런 서정적인 작품도 쓸 수 있는 작가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이름 없는 독과 꽃>>
중학교 교사 요시오카 리카는 펫 탐정일을 시작한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와 파트너 에조에 마사미와 함께 외딴 섬에 개를 찾으러 갔다가 3학년 학생 이이누마 가즈마를 발견했다. 가즈마는 섬을 찾은 이유는 독 미나리를 캐기 위해서였다. 리카는 가즈마가 어머니의 사고사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허튼 짓을 막기 위해 뒤를 쫓는다.

독미나리를 왜 캤는지?에 대해 조사해나가는 일상계 추리물. 추리 자체는 대단한게 없는데, 중학교 선생과 학생이 얽혔을만한 작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세이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너무 깹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급전개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아울러, 책 뒤 해설에서는 결말에서 사고사한건 펫 탐정들이 찾은 개로 착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됩니다. 개가 죽었다면 에조에가 리카에게 자책하며 꾸준히 돈을 보낼 이유가 없거든요. 더 결정적인 증거는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세이치의 부모도' 나를 벌하지 않았다는 묘사입니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남편 요시오카 세이치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저는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읽는 순서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전대미문의 체험판 소설이라고 광고하는건 무리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중학교 영어 교사를 하다가 은퇴한 '나'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어 회화 실력 부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잔돈을 구걸하는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빼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매개체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 어머니가 죽기 전 말했던 무언가에 대해 들었다.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소녀 몰래 상자를 열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귀국 후 조사하다가 알게된 건 소녀의 죽음이었다. 소녀는 상자 속에 무언가가 없어졌다며 패닉에 빠져 뛰쳐나갔다가 버스에 치였다고 했다.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에서 착하디 착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소녀 올리아나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 이유도 "아이소어호리브르...."라고 말한걸 "I saw a horrible"이라고 이해했던 영어 교사 -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성실한 영어교사 니이마 선생 - 의 무식한 착각 탓이라니 더 입맛이 씁니다. 올리아나는 사실대로 "I saw a holy-blue" 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남의 소중한 상자를 몰래 열어본 행동은 용서가 안되고,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해도 - 그것도 영어 교사가 - '리' 발음과 '러' 발음을 헛갈린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자 안에 정말 나비가 들어있있는지, 니이마 선생은 보지 못했는데, 올리아나의 믿음에 의한 환각이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해서 답답했습니다.

본인이 만든 감동을 본인 스스로 무너트리는 이런 작품을 왜 썼는지도 모르겠고,. 이 작품만 읽으면 내용 이해가 힘들다는 점에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도시에서 50년 만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기자키 부부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사라진 개를 찾기 위해 여형사는 펫탐정 에조에를 고용했다. 꼬박 이틀에 걸친 수색 끝에 에조에는 사라진 개 부차티를 찾아냈다. 하지만 개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알고보니 살해범은 이웃집의 히키코모리 청년 게이스케가 수상하다고 했던 부부의 아들 다카야였다. 여형사는 게이스케의 어머니로 아들이 유죄라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개를 찾아 나섰었다....

<<이름 없는 독과 꽃>>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여형사가 아들을 의심한 나머지 증거를 인멸하려고 개를 찾아 나섰다는 동기가 밝혀지는 장면이 마음에 들었어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닫고 자책하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런 부분에서 다 큰 어른이지만 의외로 성장기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게이스케와 다카야 증언과 상황이 뒤바뀌는 일종의 반전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헐겁습니다. 다카야가 했던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는걸 에조에가 초반에 눈치채지 못한 이유부터 석연치 않아요. 개와 함께 했던 유년 시절 경험으로 개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자인데다가, 펫 탐정일을 하면서 쌓아온 경력도 있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 거짓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반에 무의미하게 반대 방향을 돌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범인이건, 개를 없앤다고 증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닐겁니다. 범인이 체포된 이유도 개와는 무관했고요. 평범 이하의 범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수록작의 시간대별 순서는 아래와 같은데, 이대로 읽는게 가장 좋아보입니다.
  • <<날지 못하는 수벌의 거짓말>>
  • <<이름 없는 독과 꽃>>
  • <<사라지지 않는 유리 별>>
  • <<떨어지지 않는 마구와 새>>
  • <<잠들지 않는 형사와 개>>
  • <<웃지 않는 소녀의 죽음>>
제가 4를 가장 먼저 읽은 이유는, 에이스였던 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Touch>>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2023/07/22

던전밥 월드 가이드 모험자 바이블 - 쿠이 료코 / 김민재 : 별점 2점

[고화질] 던전밥 월드 가이드 모험자 바이블 - 4점
쿠이 료코 지음, 김민재 옮김/㈜소미미디어

<<던전밥>>은 1권 출간 당시부터 관심있게 보아왔던 판타지 만화입니다. 판타지와 먹부림을 결합한 신선한 아이디어가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쿠이 료코의 팬이 되어 여러가지 단편집들을 구입하기도 했었지요. 지금은 <<이세계 식당>>이나 <<이세계 주점>>과 같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서 그 신선함이 퇴색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조로서의 품격은 잘 유지하고 있으며, 다른 유사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세계 전생같은 개념이 아닌 판타지 세계관 내에서만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미궁의 주인' 자리를 놓고 벌이는 긴 호흡의 이야기를 잘 마무리 해 나가고 있다는 장점은 여전합니다.

이 책은 <<던전밥>>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마물들, 그리고 세계관 설정에 대해 알려주고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부록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는, 일종의 팬 서비스용 도감입니다.

주요 인물별로 아래와 같이 상세 설정 및 이야기 속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정리해주는게 좋았습니다. BMI 지수까지 알려줄 정도이며, 심지어 '첫 사망'이 언제였는지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만화책을 열심히 보았다면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인물별 설정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가는건 나름의 재미가 있더군요. 인물별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만화를 수록해 준 것도 고마운 부분이고요.


인물 설정 뿐 아니라 거주하는 곳 까지 소개해주는 등의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화로 읽을 때는 잘 모르고 지나갔던 디테일한 설정들도 볼거리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작 중 최고 인기 연애 소설인 <<다르티안의 일족>> 소개였습니다. 아~ 왠지 뻔하지만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라이오스 파티 이외 인물들 설명은 그만큼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몬스터들은 더 간략해서 일러스트와 간단한 설명 뿐이고요. 그리고 이야기가 완결되기 전에 출간된 탓에, 전체 이야기를 완전하게 담지 못하고 있다는 단점도 큽니다. 이 책만 읽으면 여러모로 답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완결 이후에 이야기 모두가 정리된 버젼으로 출간되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실망한건 작품의 핵심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요리' 관련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가지 몬스터로 만든 요리와 그 레시피에 대해 더 상세하게 소개해 주리라 기대했거든요. 끝까지 읽었는데 요리 관련 이야기가 없어서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던전밥>> 팬이라면 보시면 좋을 책이지만, 제 기준으로는 단점이 명확했습니다. 풀 컬러이기는 하지만 컬러가 사용된 부분이 많지 않은데 2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에 비하면 가격도 비싼 편이에요. 

2023/07/21

우중괴담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점

우중괴담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미쓰다 신조가 직접 듣고 기록했다는 다섯 편의 괴담이 수록된 단편집. 다 그런건 아니지만, ' 이 이야기는 <<노조키메>> 1부의 바탕이 되었던 체험담을 이야기 해 주었던 작가가 해 주었던 이야기다'라는 식으로 설명되어 조금 더 현실감을 부여해 주는게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전해들은 괴담'인 탓에 이야기의 설명이 부족하고, 기승전결도 애매한게 많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완성된 단편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소설'로 완성하기는 시간이 걸리니, 괴담이라는 핑계로 빠져나간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드네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찾아온다는 것도 그간의 미쓰다 신조 과담들과 비슷해서 식상했고요. 무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런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은거의 집>>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골의 외딴 집에 맡겨졌었다. 할머니 홀로 밭을 돌보며 생활하던 집은 주변에 기묘한 결계같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주일을 머물며 일곱살이 되는걸 기다려야만 했다. 울타리 밖을 나가면 안되고, 본명이 아니라 '도리쓰바사'라 불리우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군가와 절대 이야기를 나누어선 안되고, 휘파람을 불면 안되는 등의 몇가지 규칙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었던 '나'는 집을 찾아온 아이와 친해졌다. 아이의 필사적인 요청으로 '나'는 울타리를 넘어 아이를 따라갔다가 무언가에 잡힐 뻔했다. 할머니가 주었던 부적을 잃어버린 탓이 컸지만, 입고있던 기모노의 힘으로 겨우 탈출했다. 그러나 집 안에 '무언가'가 함께 따라 들어왔고, 결국 할머니마저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행히 '나'는 일곱살이 되는 날 아침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돌아왔다....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왜 일곱살이 될 때까지 이상한 규칙을 따르며 결계 안에 있어야 하는지, '무언가'의 정체는 무엇인지 , 할머니는 누구였고 어떻게 되었는지 등 핵심 설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그냥 그런 체험을 했다는게 전부입니다. 체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던 '나'가 미쓰다 신조에게, 자기 손자가 곧 일곱살이 되는데 밤마다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는 이야기 - 즉 손자에게도 똑같은게 찾아올거라는 의미 - 로 마무리되는 일종의 에필로그도 설명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괴담치고 별로 무섭지도 않아요. '무언가'가 집 안에 들어와 와글와글하며 휘파람을 부는 장면, '나'를 밤새 지켜주던 할머니가 '무언가'에 사로잡힌 뒤 결계인 모기장 밖에서 나에게 얼굴을 쓱 들이미는 장면 등은 묘사에 심혈을 기울이기는 했는데 밋밋했습니다. 할머니가 갑자기 휘파람을 분다던가, '무언가'의 실체를 좀 더 그려주었다면 더 나았을텐데 말이지요. 
설정도 어디선가 본 듯해서 신선하지도 못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예고화>>
미쓰다 신조는 아이들의 사망사고에 있어서, 아이들이 생전에 그린 그림들 중 사고사를 암시하는 그림 '예고화'에 관심을 가지던 중, 초등학교 교사 구보타 나오트의 체험담을 듣게 되었다.
구보타 나오토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었는데, 다쓰토라는 학생이 그린 그림이 미래의 사고를 예지한다는걸 알아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다쓰토의 그림은 구보타 나오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이전 그림과는 다르게, 나오토의 시점으로 그려진 그림은 명백한 사고를 예고하고 있었다. 구보타 나오토는 그림 수업을 중지하는 식으로 저항했지만, 나오토가 개인적으로 그리는 그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오토는 살아남기 위해 온수풀 수업에서 다쓰토를 익사시킨 뒤 다른 학교로 옮겨갔다...

단순한 괴담은 아니고, 하나의 완성된 호러 단편입니다. 저주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기승전결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 저주의 방법 - 다쓰토의 그림
  • 저주의 대상 - 다쓰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 : 통학로에서 사납게 짖는 개, 자기를 귀찮게 하는 반장, 어머니를 독차지하는 아픈 할머니, 그리고 구보타 나오토
  • 해결방법 - 그림을 고쳐서 대상자를 바꾼다
덕분에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지 않고 대충 넘기는 괴담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이야기를 들은 미쓰다 신조가 체험담 속 몇몇 단어와 변화 포인트를 짚어내어 다쓰토의 어머니와 구보타 나오토가 불륜관계라는걸 밝히는 부분은 추리 소설같은 느낌도 전해주고요.
'예고화'라는, 실재 존재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초등학생이 그림으로 저주를 내린다는 발상, 그리고 피해자 시점으로 그려졌던 그림에 다쓰토를 그려넣어 저주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결말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쓰토가 죽은 뒤에도 나오토가 저주를 다시 겪었다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불필요했습니다. 첫 번째 저주 - 물에 빠지는 것 - 는 다쓰토가 피해자가 되어 끝난 저주인데, 이게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설명이 부족했어요. 나오토는 저주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차라리 그림으로 싫은 사람을 없애게 되었다는 식으로 흘러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데스노트? 하지만 그림은 사람을 그려넣는게 제한적이니...) 이렇게되면 단편 분량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겠지만요.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모 시설의 야간 경비>>
센바는 신인상 수상 뒤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며 창작에 매진하기 위해 야간 경비원을 하게 된 센바는 종교시설 광배회의 야간 경비를 맡게 되었다. 기묘한 공원같은 '십계원' 순찰을 하다가 괴이한게 따라오는 체험을 한 뒤, 이에 대해 광배회 관계자와 이야기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십계원'에서 연달아 자살 사건이 일어나서 출입 금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경비의 목적은 야간 경비들이 체험했던 괴현상을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센바에게 정식 임금 외 사례금까지 제안했고, 센바는 창작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5일 째 순찰날, 센바는 '십계원'에 나타난게 경비원 연수 때 동기인 이사코라는걸 알게되는데...

미쓰다 신조가 작가 센바 아츠오에게 들은 전형적인 괴담으로, 센바 아츠오가 겪은 끔찍한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괴담답게 십계원 괴현상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사코가 왜 십계원을 떠도는 괴이가 되었는지 등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괴상한 오브제로 가득차있는 십계원의 묘사와 센바의 체험담도 박진감이 넘쳐서 읽는 재미는 있지만, 설명이 없으니 결국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더군요. 무엇보다도 이전에 십계원 경비를 맡았던 경비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이사코처럼 사라져버린 경비들이 있었다면 소문이 나지 않는게 불가능하니까요.
 
센바가 이사코를 처음 인지했던게 '보살계'였고, 뒷걸음질치다가 '불계'까지 들어왔다는게 뭔가 중요한 포인트처럼 묘사되는데 이것도 좀 이상했어요. 십계원의 끝이 '불계'라서, 괴이 이사코가 십계원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불계도 엄연히 십계원 내부이니, 여기서 쉽게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다른 '계'에 있어도 가능했겠지요. 물론 센바가 있었던 경비실이 불계 내부에 있어서, 괴이가 경비실을 들어오려고 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비실만 십계원 밖에 설치하면 경비원 보호 문제는 해결됩니다.
아울러 광배회가 사례금까지 지불하면서 야간 경비를 맡겼다면, 왜 2인 1조로 경비를 돌게 하지 않았을지?도 의문입니다. 괴현상 수집이 목적이었다면 괴현상을 수집하는 이유도 설명되었어야 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공간 덕분에 읽는 재미는 제법 괜찮았지만, 설명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부르러 오는 것>>
대학생 아이다 나나오는 매년 오봉 때 할머니가 홀로 다녀왔던, 나메라의 오이노쇼 씨 집에 향전 바치는 행사를 맡게 되었다. 할머니가 아팠던 탓이었다.
기차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의 대저택에 찾아간 나나오는, 향전만 바치고 바로 돌아와야 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창고를 찾아가 2층에 있는 사람을 불러달라는 한 노파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뒤, 오봉마다 나나오의 집에 '무언가'가 찾아와 나나오를 불렀고, 나나오가 없자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할머니, 어머니를 잃은 나나오는 결혼한 뒤 성이 바뀐 덕분에 더 이상 '무언가'의 부름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쓰다 신조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유령 따위는 없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 올렸다.
지역 유지 아마노가의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교사 부부가 이사를 간다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부인만 홀로 집에 있을 때, 기분 나쁜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누군가 찾아오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벨을 누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척을 하자 부엌문을 노크하기 시작해서...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였다.


본편인 아이다 나나오 이야기는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나나오가 겪은 체험이 전부에요.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시골 마을에서 모시던 무언가에 씌워져서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식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제가 읽은 비슷한 이야기만해도 열 편은 넘을거에요.

그러나 아버지 이야기는 재미있었습니다. 현실주의자인 아버지답게 논리적인 추리를 내 놓거든요. 부인만 혼자 집에 있을 때 유령이 아니라 집주인 아마노 영감이 찾아왔다는 거지요. 그걸 피하려고 집에 없는 척을 하니 아예 문까지 두드리게 되었고요. 그래서 남편과 의논했지만, 집주인이고 지역 유지라 험담을 할 수도 없으니 이사를 하면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퍼트리려고 했다는 겁니다. 아주 그럴듯하지요? 
이런 식으로 '현실주의자 경찰이 괴담을 파헤친다!'는 이야기였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우중괴담>>
미쓰다 신조는 예전에 알았던 장정가 마쓰오로부터 괴담을 들었다. 그는 장정을 맡은 교정지를 산책로에 있는 정자에서 읽곤 했는데, 그곳에서 비오는 날 한 노인으로부터 괴담을 듣게 되었다. 노인의 어렸을 때 이야기로, 당시 그는 사냥꾼 할아버지가 두고 간 도시락을 전해주러 사냥 오두막에 갔다가, 폭우가 쏟아질 때 오두막 밖에서 들여보내달라는 한 여인의 부탁을 받았었다. 여인이 들어오기 직전, 위기의 순간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구해주었지만, 그 뒤 할아버지는 사냥꾼 오두막에서 혀가 뽑힌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쓰오는 또다시 비오는 정자에서 이번에는 어린 여자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마쓰오에게 한 이야기는 아빠와의 그림자 놀이였다.
그 뒤는 아이 아빠가 학교 선생으로 학교 숙직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흰 형체를 쫓느라 시간가는줄 모르다가 숙직실에 돌아가니 아내가 와 있었고, 아내와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숙직실로 집에 있던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고 그 뒤 아내가 임신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차례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은 마쓰오는, 다음날 가족과 관계된 누군가가 실제로 해를 입었다고 했다....

표제작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여러 명으로 부터 들은 괴담을 마쓰오가 겪은 체험과 합쳐 이야기해 주기 때문에 단순 괴담보다는 훨씬 복잡한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담이 중심이라는건 다른 이야기들과 다를게 없지만, 다른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르게 노인과 그 가족들이 마쓰오에게 이야기를 해 준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주기는 합니다. 마쓰오의 가족 구성이 노인의 가족 구성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인과 그 가족들이 마쓰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해 줄 때마다, 원래는 마쓰오 가족이 해를 당했어야 했지요. 그런데 마쓰오가 별거 중이라 홀로 나와 살고 있던 탓에 마쓰오 주변 사람들이 대신 해를 입게 된 겁니다.
마쓰오가 미쓰다 신조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준 이유도 그가 이미 괴이 쪽에 속해있었다고 설명해 줍니다. 마쓰오 사무실의 책들이 전부 낡은 것이었다는 단서로 이를 알아내는 미쓰다 신조의 추리도 돋보였고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해서 마쓰오 가족에게 해를 입히려고 한 이유는 설명이 없습니다. 누군가 마쓰오 가족에게 원한을 품고 저주를 내렸던 걸까요? 마쓰오가 미쓰다 신조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줬어야 하는 이유도 없고요. 이 논리대로라면 미쓰다 신조 주변의 누군가도 해를 입었어야 했는데 (괴담을 들었으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마쓰오가 언제 괴이 쪽에 속하게 되었는지, 이후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이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하기만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순 괴담보다는 낫지만, 뭔가 부족하고 애매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었습니다.

2023/07/19

마션 (2015) - 리들리 스콧 : 별점 4점


소설을 읽고 탄력받아 영화까지 감상했습니다. 마침 디즈니 플러스에 있더라고요. 

일부 디테일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며, 와트니에게 닥친 위기 중 몇가지 - 와트니 실수로 패스파인더가 망가져서 NASA와의 통신이 불가능하게 된 것, 마지막 여행 중 로버가 뒤집혀 버렸던 것 등 - 가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상영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탓이겠지요. 
 
반대로 영화에서 추가된 부분도 있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와트니가 우주 공간에서 슈트에 구멍을 뚫어서 대장에게로 이동하는 클라이막스, 두 번째는 구조 이후의 에필로그 형식 후일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영화 쪽이 훨씬 좋았어요. 클라이막스는 와트니가 불확실하지만 대담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주장하며 - 아이언맨처럼 날 수 있잖아요! - 실행에 옮기는건 그의 캐릭터에 딱 들어맞을 뿐더러, 영화라는 매체에도 잘 어울리는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단순히 '우주선이 이동하고, 와트니를 잡아서 구조한다' 정도였다면 심심했을테니까요.
그리고 후일담은 없어서 불만이라고 소설 리뷰에 적었었는데, 영화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전 지구적(?) 유명인사가 된 와트니가 NASA 교관이 되어 특유의 언변으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마지막 장면은 짤막하지만 만족스러웠어요. 그 외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빠짐없이 챙겨주고 있고요.

마크 와트니의 화성에서의 생존을 위한 분투가 너무 유머러스하고 재미있게 그려진 나머지, 위기감을 느끼기 힘들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 수백일을 감자만 먹고 지냈으며, 그마저도 부족했던 와트니 묘사를 위해 맷 데이먼이 감량이라도 좀 했어야 하지 않을까... - 사소합니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감상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3/07/17

오전 0시의 상드리용 - 아이자와 사코 / 신우섭 : 별점 2점

오전 0시의 상드리용 - 4점
아이자와 사코 지음, 카토기 마리 그림, 신우섭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유리탑의 살인>>으로 추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아이자와 사코의 데뷰작. 제 19회 아유카와 테츠야 상 수상작입니다. 이전에 아유카와 테츠야 상 수상작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은 다 읽어본 줄 알고 포스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빼먹었었네요. 서둘러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나' (스가와) 가 한 눈에 반한 마술이 특기인 미소녀 토리노와 함께 학교 내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전형적인 일상계 학원 청춘 추리물로, '마술'이 주요한 요소로 사용되는게 특징입니다. 
단편들이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연결된 연작이라는 특징도 있는데, 수록된 4편의 작품이 자살한 소녀 '후지이 아야카' 를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작답게 여러가지 복선들도 이야기별로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2화에서 기호 fff를 설명하면서 등장했던 16진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 이야기에서 결정적 단서로 써 먹는 식으로요.

그러나 미소녀가 뛰어난 마술사라는 만화같은 설정을 무리하게 도입한 것 치고는 마술이 그다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습니다. 등장하는 사건 중 마술로 트릭을 풀어내는건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거든요. 장황하게 트럼프 카드를 이용하여 설명을 펼치는 정도일 뿐, 실제 트릭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장기를 그리기 위한 소재에 불과할 뿐이에요. 이래서야 마술이 아니라 육상이든, 대학교 진학이든, 고시엔이건 마찬가지였을겁니다. 이 중 마술이 선택된건, 작가의 마술 지식 과시 외의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네요.
추리적으로도 빼어나다고 보기 힘듭니다. 일상계답게 사건들도 별 볼일 없지만, 애초에 사건도 아닌걸 괜히 유령을 가져다 붙여서 이상 현상처럼 보이게 만든 탓입니다. 2화가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밀실에 나이프로 이상한 문자를 남긴게 유령의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니었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합니다. 4화도 마찬가지에요. 후지이 야아카가 학교 인트라넷에 접속해서 소란이 일어난다는데, 이게 왜 사건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정 정보만 알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지인이건 가족이건 누군가 후지이 아야카의 계정을 아는 사람이 접속했다고 생각하는게 당연한거 아닐까요?

1화는 평범한 일상계스러운 추리물 분위기가 좋았고, 3화는 예지능력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괜찮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토리노에게 스가와가 진심을 고백하며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는 마무리는 괜찮았는데, 이런 식으로 마술을 좋아하는 소녀와 추리 소설 매니아 소년간의 평범한 일상계 학원 청춘 미스터리로 가볍게 풀어나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자살한 소녀 이야기를 이야기 전편에 억지로 풀어가며 연작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었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헛도는 트라이앰프>>
도서실에서 발견한 작고 바퀴가 달려있는 책꽂이의 세 번째 단에 있는 잡지는 왜 전부 뒤집혀져서 꽂혀 있었을까? 잡지 중 딱 한 권, 한 가운데 있는 것만 책 등이 보였다.

화자인 스가와, 그리고 스가와가 빠져버린 미소녀 토리노라는 주인공들과 중요 설정이 설명되는 시리즈 제 1작.
빼곡하게 꽂힌 잡지 사이에 잡지를 꽂으려면, 표지가 말리지 않게 뒤집어서 꽂는게 좋다는 착안에서 시작되는 추리는 좋습니다. 책꽂이는 바퀴가 달려 있었기에, 누군가 책꽂이를 반대쪽으로 밀어 놓았던게 진상이었어요. 책 등이 보이던 잡지 한 권만 그 전에 누군가 밀어 넣었던 겁니다. 왜 책꽂이를 밀어 놓았는가?는 무언가 바닥에 있던걸 숨기기 위해서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그런데 도서부원 요시나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진을 숨기려고 책꽂이를 밀어두었다는 동기는 별로였어요. 도서위원이라면 도서실에 있는 시간도 많았을텐데, 사진을 진작에 회수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의외성도 별로 없고요.
그리고 책꽂이를 밀어두느니, 사진이 안 보이게 보이는 부분만 뜯어내던가, 아니면 아예 사진이 끼어버린 책장 밑으로 밀어 넣는게 더 상식적인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억지로 사건을 만든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가슴 속 카드 스탭>>
토리노가 학교 음악실에서 마술을 보여준 뒤, 깜빡하고 두고왔던 나이프가 책상 위에 새겨진 세 개의 f 기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음악실 위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던 후지이 아야카의 유령이 남긴 메시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음악실이 일종의 밀실 상태였다고 하지만, 알고보니 밀실이 아니었다는게 진상이라 도무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작품. 비상계단을 통해 한참 돌아가기는 하지만 밖으로 나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었으니까요. 이래서야 트릭이고 뭐고 없는 셈입니다.
책상에 f자 세 개를 남긴 동기도 억지였습니다. 칼로 자기 악보를 찢다가 후배 손수건을 망가트린게 이런 조작을 벌일 정도로 대단한 일일까요? 이 정도를 숨기려고 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이상한 조작을 하고, 괴소문을 퍼트린다는건 설명하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믿음이 가지 않는 프레딕터>>
스가와는 '영'이 보인다는 이이쿠라가 분실했다는 수첩에서 미래의 영어 시험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정말 '영' - 후지이 아야카 - 이 보이는 걸까?
이런 스가와의 질문에 이이쿠라는 스가와가 떠올린 단어를 맞추는 솜씨를 보여주는걸로 답했다. 연극부의 미소녀 하탄마루와 함께 후지이 아야카로 보이는 형체까지 목격하게 된 스가와는 밤 잠도 설칠 정도로 겁에 질렸는데, 그를 도와준건 토리노였다.


이이쿠라 수첩에 적혀있던 영어 시험 결과에 대한 추리, 진상, 그리고 동기는 모두 괜찮았습니다. 이이쿠라가 방과 후에는 '노는 아이'로 변신한다는게 단서였어요. 그녀는 방과 후 밖에서 츠루미 선생님과 사귀고 있었던겁니다. 남자친구인 츠루미 선생 수첩에 스티커 사진을 붙였는데, 그걸 츠루미 선생은 분실했고 이를 입수한 분실물 담당자 무코지마 선생은 스티커 사진만 보고 여자아이 것으로 오인했던 거지요. 츠루미 선생은 학생과 사귀는걸 비밀로 하기 위해 똑같은 수첩을 구입해서 사용하면서, 원래의 수첩은 이이쿠라가 잃어버린 척 해서 찾아오라고 시켰고요. 그 와중에 혹시 몰라, 분실한 수첩과 쓰던 수첩을 바꿔치기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영어 시험 결과를 적어 놓았던걸 스가와가 우연히 보고 미래의 영어 시험 결과를 예지했다고 착각한게 진상입니다. 수첩과 스티커 사진, 이이쿠라의 변신 등 여러가지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이를 조합해서 펼치는 추리도 깔끔했던 좋은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하지만 스가와가 하탄마루와 함께 본 유령의 정체는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하탄마루는 소녀 - 아마도 이이쿠라 (다른 사람으로 밝혀지지만) - 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스가와에게 들켰다는걸 숨기려고 그녀가 몰래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유령이 아니라는걸 하탄마루는 왜 스가와에게 숨겼던 걸까요? 옷을 갈아입는걸 목격당한 소녀가 창피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이쿠라와 토리노 간에 마술,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 이를 잘못 해석한 스가와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는 토리노의 모습은 다소 지루했습니다. 전형적인 청춘물스러운 전개라 식상했어요.이 시리즈에서 마술의 가치는 추리적인 요소보다는 청춘물 전개를 위해 필요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다른 작품들보다 확실히 빼어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습니다.

<<당신을 위한 와일드카드>>
후지이 아야카의 계정으로 학교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유령이 없다는걸 증명하기 위해 스가와가 하탄마루와 함께 조사에 나섰지만 정체를 밝혀내는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스가와는 루리카와 선배의 자살 시도를 목격했다. 이를 막은건 토리노였다. 그녀는 후지이 아야카와 루리카와 사이에 있었던 과거와 아야카의 마지막 메시지를 알려주며 루리카와의 마음을 푸는데 성공한다....

진상은 별볼일 없었습니다. 후지이 아야카에게 동생이 있었고, 그 동생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는게 전부거든요. 동생이 요시나가라는건 첫 작품에서부터 삽입되었던 이런저런 복선으로 비교적 잘 설명되고요.

그러나 동생이 누구냐인 것 보다 후지이 아야카와 얽힌 친구가 루리카와 선배라는게 추리의 핵심인데, 단서인 후지이 아야카의 숫자 ID는 억지스러웠습니다. 숫자가 생일이 아니라 16진법으로 '루리색'을 의미한다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상상의 영역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생년월일에 가까운 숫자라서, 억지로 16진법 코드를 가져다 붙인 느낌이에요.
전개도 별로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를 유령 소동으로 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후지이 아야카가 루리카와에게 남긴건 글이 아니라 음악이었고, 그건 원망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07/16

천국대마경 (Tengoku-Daimakyo / heavenly delusion) 시즌 1 : 별점 4점

디즈니 플러스로 감상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흔해빠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DVD프라임 사이트에서 추천글을 읽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로도 설정과 묘사가 상당히 탄탄하며, 뼈대가 되는 타카하라 학원에 대한 설정도 참신한 부분이 많은, 잘 만들어진 SF더군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현재 시점의 마루와 키루코의 여행과 모험, 그리고 15년 전 타카하라 학원의 일상이 교차시키는 전개도 빼어납니다. 추리물처럼 복선과 단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현재 시점의 떡밥들은 모두 과거 학원 이야기를 통해 밝혀지는데, 예를 들어 '히토구이'의 정체는 병으로 죽은 학원생이고, '마루'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학원생 토키오와 코나의 아들 클론 (누가 진짜인지는 불명)이며, '천국'은 아마도 타카하라 학원이라는 등이 그러합니다. 그 외의 소소한 것들 모두 학원과 현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모든 진상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던져지는 복선과 떡밥은 모두 회수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복선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도 대단한 장점입니다. 다른 부가적인 공부, 연구가 필요하지 않다는건 요즘과 같이 복잡한 컨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분명한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시즌 1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는 내용 중 중요한건 아이들의 정체 - 외계인으로 보이는 아스라의 모습을 보면 외계인을 통한 유전자 조작? -, 왜 마루가 클론에게 무언가를 주사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나자키 로빈이 폭주한 이유와 그 목적 정도인데 이 중에서는 이니자키 로빈에 관련된 내용들이 특히 궁금합니다. 학원생도 아니었고, 거리 고아들의 리더 정도에 불과했던 인물이 몇 년 만에 의학 기술을 깨우치고 히토구이와 사람의 접합을 시도한다는건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거든요. 학원의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여러모로 다음 시즌이 너무 궁금해집니다. 

현재의 여행과 모험을 통해 선보이는 여러 단발성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개그스러운 내용들은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의 작가다운 웃음을 전해주면서도, 얼마나 현재가 끔찍한지 - 이른바 '대마경' - 와 함께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성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건 제 8화입니다. 연인 호시오를 히토구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발병 부위를 잘라내가며 버텨왔지만, 결국 그녀를 마루의 힘으로 죽게 만든 우사미가 호시오의 마지막 말 - 정말 좋아해 - 을 보고 눈물을 터트리는 장면이지요. 아,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유튜브에 다양한 시청자들이 감동하는 리액션을 모아놓은 동영상도 있을 정도로요.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음악도 좋고요. 다만 중간중간 몇 편에서 원화가 조금 튀고, 이상한 일본 신화를 설정에 집어넣은건 별로이기는 한데 큰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데, 오랫만에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빨리 시즌 2가 나오면 좋겠네요.

2023/07/15

오래된 책들 (11) - Sports 2.0 2007년 6월 25일호

간만에 올리는 헌책 소개. 이번에 소개드리는건 스포츠 주간지 Sports 2.0입니다. 그간 올렸던 책들 중에서는 가장 신간(?)이라 할 수 있겠네요. 고작15년 조금 더 지났을 뿐이니까요.

스마트폰 시대가 아니었기에 발매가 가능했던 잡지로, 스마트 폰 시대와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죠. 다른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들과 마찬가지로요. 그래도 당시에는 꽤 인기 있었던걸로 기억됩니다. 저도 발간 당시에는 자주 구입했었어요. 과거 OB베어스 팬으로 학교 내에서 유명했던 덕분에 OB에서 두산 베어스로 바뀔 때 BI 작업에 참여했던 적이 있을만큼 야구 팬이기도 했지만, 지하철을 탈 때 이만한 오락거리가 당시에는 드물었던 탓입니다.

거의 한, 두 번 읽고 버렸던 다른 호들과 다르게 이 호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이유는 특집 기사인 역대 고교야구 최강팀 분석이 마음에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게, 당시 같은 회사 근무하던 기아팬 강과장을 놀리기 위한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던 탓도 크고요 (기아팬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여튼 간만에 열어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강과장, 이 글 보면 연락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