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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8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2014) - 매튜 본 : 별점 3점



올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작. 영화보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뒤늦게 감상하게 되었네요. 줄거리는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만화 원작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확실히 B급 향취가 가득하더군요.
특히나 한국인이라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흔해빠진 무협지의 얼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생명의 은인의 아들을 거두어 제자로 삼은 무림 고수가 죽은 뒤, 제자가 사부의 복수에 나선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니까요.
여기에 더해 나름 심각한 내용임에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고 B급 정서를 유지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어요. 마지막 머리가 그야말로 "폭죽처럼" 터지는 묘사, 핀란드 공주의 "뒤로 해줄께" 발언 같은 것이 그 중 백미라고 할 수 있겠죠.

동네 찌질이 에그시가 첩보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대체로 건너뛰고 철저하게 액션에 집중한 감독의 선택도 나쁘지 않습니다. 혹독한 훈련을 거쳤을 테니 당연히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건 관객도 당연히 아는 상식일테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로 설명이 없는 것은 드문 케이스이긴 한데 이야기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게 신기했어요. 그동안 히어로, 주인공의 성장에 러닝타임의 많은 비중을 할애했고, 그래서 실패했던 영화들도 있는데 정말 발상의 전환이랄까요?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 최고의 매력 포인트는 콜린 퍼스가 연기하는 갤러해드 해리 하트 캐릭터죠. 젠틀맨이 무엇인지 눈빛에서부터 보여주는데 정말로 역대급이에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액션도 놀라운 수준으로 선보이고요. 딘 일당을 쓸어버리는 펍에서의 액션도 좋지만 교회에서 광기에 가득찬채 살육을 벌이는 시퀀스는 놀라울 정도로 황홀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해 주더군요. 비록 최후가 좀 시시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모습이었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비교하자면 <스타워즈>의 오비완급이었달까요? <스타워즈>의 프리퀄 작품들처럼 젊은 시절의 해리가 주인공인 프리퀄이 나와도 좋겠다 싶더군요. 배우도 너무나 마음에 드니 아주 오래전 이야기는 아닌걸로. 벽에 붙어있던 날들의 작전 중 하나여도 괜찮겠고 말이죠. (* 방법은 알 수 없지만 후속편에 콜린 퍼스의 해리를 계속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이클 케인이 킹스맨의 수장 아서로 등장하는 것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뼈 속까지 영국인 같은 인물들이 젠틀맨으로 연기해주니 어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겠어요? 죽을 때가 되니 쌍욕을 하는 것도 독특한 반전매력을 선사해줍니다. 이렇게 친숙한 영국인 배우들이 등장하니 휴 그랜트도 카메오, 아니면 처음에 죽는 란슬롯 역으로 출연해주었더라면 하는 바램이 살짝 생기기도 하더군요.

그 외에 "첩보 영화"의 왕도와도 같은 다양한 특수 무기들이 선보이는 것, 중간중간에 고전 첩보영화 (007?)을 언급하는 유머도 고전 영화 팬으로 좋았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멀린의 해킹으로 모든 위기가 대부분 해결된다는 것이죠. 너무 손쉬운 전개라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이정도 해킹에 대비도 하지 않은 발렌타인이 폭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이래서야 해리는 대체 왜 죽은건지....
또 록시의 활약이 미미하다는 것도 아쉽더군요. 초중반부의 비중에 비하면 마지막 모습은 이럴 바에야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솔직히 핀란드 공주보다도 비중이 없어보여요. 이래서야 분량과 캐릭터의 낭비죠.

허나 장점이 워낙에 확실한, 즐거움 가득한 영화이기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이야기는 헛점 투성이에 유머, 잔혹함의 정도가 과하지만 이상하게 즐겁고 재미있는, 제 취향에는 딱 맞는 영화였습니다. 인생 뭐 있습니까. 보면서 즐기면 그게 최고죠. 후속작이 나온다는데 아주아주 기대됩니다.

2015/09/23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 변광석 : 별점2점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 4점
변광석 지음/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이라고 해서 정말 이슈가 될만한 스캔들을 모아 놓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호기심에 구입한 책.

그러나 그런 저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더군요. 제목 그대로, 비리의 종합선물세트인 인물 아홉명이 소개되기는 합니다만 부정부패가 당연시되는 인물들을 가지고 "스캔들"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어요. 책에도 나오듯, 기준은 애매하나 청백리가 조선왕조 역사상 200명이 되지 않다고 하죠. 이래서야 거의 모든 관리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이야기인데 하물며 무신정변기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 중종반정의 핵심 공신이었던 박원종, 역관으로 거액을 모은 부자였을 뿐더러 원자를 낳은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현과 오빠 장희재, 매국노 민영휘와 이지용 등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리라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이래서야 스캔들이고 뭐고 할 것도 없고요.
또 충혜"왕"은 엄연히 왕이기에 폭군, 악군이라고 묘사할 수는 있지만 부정부패한 인물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어려워보였습니다. 왕이면 어차피 나라가 자기 것이니....

그래도 사료를 충실히 반영한 여러가지 디테일들은 제법 볼 만 합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역사이나 잘 몰랐던 인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특히나 재미나더군요. 고려말 대표적 간신 염흥방이 조반을 무고하였다가 된서리를 맞고, 조반은 이성계의 개국공신이 된다는 이야기같은 것이 그러합니다.
또 확실히 새로왔던 이야기도 있어요. 조선 태종의 공신으로 세종때까지 세력을 유지한 조말생이 대표적으로 엄연한 대형 비리사건에 연루되고도 - 불법으로 받은 뇌물이 80관 이상이면 교형에 처하나 무려 그 10배를 편취! - 왕들이 적극적으로 사면을 도와준 인물이라는데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책에서는 그만큼 대단한 업무능력이 있었다.. 라고 되어있는데 과연?
그 외에도 중종반정의 킹메이커 세명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모두 요절(?) 혹은 비명횡사 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고 농민 봉기를 촉발한 순조때 곡산부사 박종신의 부정부패 행각을 자세하게 그린 것도 눈에 뜨이는 부분입니다. 부자, 상인층 뿐 아니라 빈민과 영세민에게 예외없이 수탈을 자행하고 엄하게 다스려 100여명의 주민이 죽었다니 정말로 대단하죠. 심지어 농민 봉기 후에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니 이래서야 돈을 안 뜯어내면 바보인 시기가 맞긴 맞았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근대 매국노 민영휘에 대해서는 실제 자료적으로 꽤나 유용한 정보가 많았습니다. 근대를 무대로 한 창작물을 몇가지 준비하고 있기에 눈이 갈 수 밖에 없는데 고마왔던 부분이죠. 1917년 민영휘의 총 재산이 5~600만원 정도로 이는 지금의 6~7,000억 정도 되는 돈이라는 것, 그런데 이나마도 추정 불가능한 다른 재산은 제외한 것이라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이후 한일은행을 경영하며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더 큰 부를 축적하여, 그의 사후 1936년 삼천리 기사를 보면 총 1,200~1,300여만원의 재산으로 추정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돈으로 1조 5천억 정도 되는 돈이라네요.
이와 함께 민씨 가문이 얼마나 매국행위를 저질렀는지를 상당히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선의 국모 어쩌구로 알려진 명성황후도 결국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만 행동한 매국노 일파의 한명일 뿐이라는거죠. 기황후와 다를게 하나도 없어요. 하긴 고종부터가 매관매직에 앞장섰다고 하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을리가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재미가 아주 없지는 않으나 제목에서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멀기에 감점합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책 치고는 쉽게 읽을 수 있게 구성한 책의 기획 의도는 마음에 듭니다. 다른 주제로 출간된 시리즈를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2015/09/18

나를 아는 남자 - 도진기 : 별점 1.5점

나를 아는 남자 - 4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구는 혜미의 부탁으로 박민서라는 남자의 뒷조사를 시작한다. 별거 중인 그의 아내 문성희가 남편의 불륜을 의심했기 때문. 그러나 물증을 잡지 못한 기간이 길어지자 문성희가 남편 집에 침입하여 조사해 줄 것을 요구하고, 마침 박민서가 인천으로 향한 것을 알게된 진구는 몰래 집에 침입했다가 박민서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데...

추리소설가이자 판사이신 도진기 작가의 진구 시리즈 2작. 일단, 판사라는 업에 종사하면서 이렇게 많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시는 노력과 정렬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작품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극적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진구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쓰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핵심인데 전개와 묘사 모두 별로에요. 진구 본인이야 엄청 스트레스 받고 힘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독자는 그걸 알기 어려울 정도거든요. 수사를 빙자해서 좋은 것만 먹으러 다니던가 하는 식이라서 작중에서의 긴장감이 전무하더군요.언제까지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잡혀간다! 와 같은 한계점이 명확히 존재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국내 사법제도 특성상 그러한 설정이 힘들었다면, 차라리 이렇게 하는건 어땠을까요? 진구는 구치소에 갖히고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 재판만 시작하면 유죄는 확실한 상황이라는 전제를 깔고 면회오는 혜미를 통해 진범을 밝혀나간다는 전개였다면 극적인 긴장감은 훨씬 높아졌으리라 생각되네요. 물론 <환상의 여인>이나 <처형 6일전>과 같은 설정이라는 약점은 있지만요.

그리고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약하다는 것도 문제점입니다. 진범이 누구일까?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과정이 너무 길어요.
또 중반 이후부터는 박민서가 남긴 증거물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되는데, 이 증거물 (노트) 덕분에 임재엽이라는 제 3의 인물과도 엮이게 되는 등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핵심 증거로는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일단 이런 노트를 프로 플레이보이(?)가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놓아두었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죠. <사냥꾼의 일기>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 시점에 노트라고요? 인터넷 노트, 뭐 예를 들면 구글 드라이브같은 것을 활용하는게 당연하잖아요. DB화 하기도 쉽고,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으니까요. 폰도 아이폰을 쓴다면서 노트라니... (참고로 이 리뷰도 삼성 갤럭시S4 + 에버노트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에는 박민서의 핸드폰을 바꿔 가져간 방수연이 핸드폰을 다시 바꾸기 위해 박민서의 집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박민서의 핸드폰에 깔린 앱을 보게 되고, 거기서 문제의 글을 보게 되어 극렬한 살의를 품게되었다는 식으로 가는게 트릭과도 연계성이 생길 뿐더러 훨씬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웠을 것 같아요. 왠만한 핸드폰은 자동 로그인이 될테니. 그리고 문제의 노트를 삭제하면 모든게 완벽하게 끝났겠죠. 그리고 진구는 오프라인으로 작성된 이 노트를 발견하다는 결말! 아... 제가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노트가 방수연이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입니다. 핸드폰이 바뀌었다는 것은 진구의 추리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경찰은 진구, 아니면 노트 때문에 또다른 살인을 저지른 문기동을 범인으로 기소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진구의 천재적인 추리력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커플링을 발견한 상황에서 박민서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눈치챘다는 설정이 훨씬 나았을텐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어요.
물론 박민서가 정신병원을 다녔다는 것, 커플링을 맞췄다는 것, 한서원과 모종의 썸씽이 있었다는 것 정도로 박민서가 플레이보이였다고 짐작하는 것은 절대 무리이긴 합니다. 좀 더 장치가 필요한 부분이죠. 이 부분의 정보가 부족한 것은 박민서 캐릭터를 거의 마지막까지 순진무구한, 마음에 상처입은 어린왕자로 몰고간 탓인데 여러모로 실패 같네요.
그 외에도 문기동이 퍽치기를 살인에 사용한다는 트릭, 최초 구속 기소된 진구가 빠져나갈 수 있었던 닦인 지문 트릭 등 작위적이고 별로인 트릭도 감점 요소입니다.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일단 그동안 국내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진구 캐릭터는 여전히 재미있기는 합니다. 또 진구 수준의 일반인이 조사할 수 있는 극한까지 정보를 조사하는 과정도 굉장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나 작가의 전문분야 지식을 활용한 일종의 편법들이 아주 재미있는데 예를 들자면 경찰 신분증 위조와 같은 것이죠. 일부만 위조하면 신분증 위조죄에 해당하지 않고, 벌금 몇만원 수준의 사칭죄에만 해당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꽤 유용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또 국내 작가 중 가장 본격 추리물 스타일 작품을 발표해오신 도진기 판사님 작품답게 괜찮은 트릭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인천으로 향하며 곧 집에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박민서의 전화 관련된 트릭이나 M.S.H라는 이니셜이 사용된 커플링 관련 트릭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화 트릭은 핵심 중의 핵심 트릭이고 커플링은 박민서의 여성 편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등 작품에 잘 녹아든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괜히 노트 가지고 왔다갔다하는 등의 잔가지는 다 쳐내고 핸드폰 트릭에 다른 증거 한가지만 더 덧붙여 깔끔하게 중단편 분량으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15/09/16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 구세희 : 별점 1.5점

데인 가의 저주 - 4점 대실 해밋 지음, 구세희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나'는 도난당한 다이아몬드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레게트 가를 방문한다. 에드거 레게트의 딸 가브리엘을 알게 된 나는 그녀가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다이아몬드 사건의 수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용의자로 지목되던 남자들이 살해당하고 레게트 본인마저 자살하면서 레게트 가에 감춰져 있던 충격적인 내막이 드러나는데… 과연 악몽같은 사건들의 연속은 '데인 가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인가? (출판사 책 소개 인용)


대실 해밋 전집 두번째로 출간된 작품. 컨티넨털 탐정사의 이름없는 탐정이 주인공인 시리즈입니다. 첫번째 작품은 유명한 <붉은 수확>입니다만, 아주 오래전 (대학교 3학년 쯤 되었을 때인 20여년 전, 당시 거주하던 인천 동네 문방구 서점에서 구입!) 일신 추리문고 시리즈로 읽어보았기에 이 작품부터 읽게 되었네요. <붉은 수확>의 두께를 보니 제가 예전에 읽었던 버젼은 일어 중역일뿐만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좀 축약되고 줄어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만, 뭐 읽긴 읽은거니까요.
<붉은 수확>도 좋은 작품이지만 <몰타의 매>가 워낙에 걸작이니만큼 꽤 큰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편 <쿠비날 섬의 약탈> 역시 재미있게 읽었었고 말이죠.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어요.
일단 제목만 보면 막장 가문이 등장하는 일본 고전 추리물 느낌인데 정작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데인가"의 딸 가브리엘의 주변에서 수많은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애초에 근거도 없고 애매한, 게다가 가브리엘의 의도는 하나도 없는 상황일 뿐이에요. 이걸 "데인가의 저주"라고 묶는 것 자체가 문제죠. 가브리엘도 뭔가 있어보이게끔 생김새까지 제대로 묘사하지만 정체는 불쌍한 어린양에 불과해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김성모 화백의 만화를 보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나간다는 점이죠.

그나마 1부라 할 수 있는 레게트 (메이엔) 부부의 죽음까지는 읽을만 합니다. 앨리스가 가브리엘이 어렸을 때부터 벌인, 광기어린 복수극이 꽤 그럴싸하게 펼쳐지니까요.
물론 미쳐도 너무 미쳤다 싶은 광기는 과했으며, 레게트가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쓰고 투옥된 후 겪은 - 프랑스에서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미국에 이르는 -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너무 황당해서 그닥 설득력있게 다가오지는 않는 단점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냥저냥 무난하고 읽을만한 하드보일드로 평작 정도는 됩니다.

허나 가브리엘이 치료를 위해 사이비 종교단체라 할 수 있는 성배의 사원에 머무르게 되는 2부부터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사이비 종교단체의 비밀이 가스와 최면 효과를 이용한 과학적인 사기였다는 진상만큼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데인가의 저주"와 엮어서 이야기를 전개한게 문제랄까요.
또한 아무리 최면술이 강하다 하더라도 미니가 리스를 죽이게 된 것 처럼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조종한다던가, 조셉이 스스로 신이 된 착각에 빠진다는 류의 설정부터 영 와닿지 않네요. 조셉이 아내 에레니아를 죽이려는 이유도 미쳤다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설명이 부족하고요. 사실 1부도 그랬지만 그냥 "미쳤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만드려는 작가의 고민없는 전개도 볼썽사나웠어요.
범행들도 하나같이 허술해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뭘 이렇게 거하고 어렵게 사건을 일으키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가 조셉 할던이었으면 차라리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죽이고 신도들을 자신의 최면술과 카리스마로 입막음을 했을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부, 가브리엘의 남편 에릭이 죽은 후의 이야기는 막 나가는 전개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에릭의 시체가 발견된 후 가브리엘이 사라지고, 그녀가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 와중에 갑자기 경찰서장 코튼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불륜 상대인 하비가 용의자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다다르는 과정도 급작스러운데, 불륜 상대 하비의 알리바이를 코튼 부인이 증명하는 황당한 상황에 더해 코튼이 그를 범인으로 만드려고 현장을 조작하는 등의 개막장 스토리가 펼쳐지니 제가 대한민국의 일일연속극을 보고 있는 건지, 하드보일드 3대 거장 중 한명의 하드보일드 장편을 읽고 있는건지 아주 혼란스럽더라고요.
마지막에 시체가 따뜻했다는 이유로 코튼을 진범으로 체포하는 결말 정도만이 이 작품이 그래도 하드보일드 추리물이구나 싶은 요소였습니다만...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즉흥적인 전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마지막 4부는 결말이 밝혀지는 대단원인데 앞의 개막장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가 펼쳐집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인물인 작가 오웬 피츠스테판이 진정한 흑막으로 등장하죠. 허나 설득력을 갖추었다 보기에는 어려운 뜬금없는 결말일 뿐더러 작가가 피츠스테판을 흑막으로 만들기 위해 1부, 2부, 3부의 사건을 하나로 엮는 억지스러움에는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 1부 - 피츠스테판도 데인가의 후손이다! 이렇게 해서 앨리스와 엮죠 (불륜 관계였다는 설정도 살짝 포함)
  • 2부 - 에레니아 할던과 불륜 관계였다! 
  • 3부 - 범인 하비는 사실 죠셉 할던 밑에서 일하던 핑크의 양아들이었다! 그래서 에레니아를 통해 조종이 가능했다!
... 이게 당쵀 뭔지 싶습니다.

아울러 피츠스테판을 괴물처럼 묘사하려는 시도 역시도 실패작이에요. 무엇보다도 피츠스테판의 모든 범행은 운에 의지한 즉흥적인 범죄들이 대부분이라 한번 걸리니 증인들이 속출해서 모든 사건에서 범인으로 밝혀지게 되니까요. 애초에 피츠스테판이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으로 "나"가 과거의 인연으로 본격적인 사건 조사 전에 방문한 것이 시작이니 피츠스테판이 뭔가 작전을 짜는 등의 시도를 할 이유나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리고 주인공 탐정이 가브리엘을 보살피는 과정은 왜 들어갔는지 그 이유도 좀 궁금합니다. 여주인공의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주인공이라... 뭔가 차도남같은 이미지를 만들어주려 한 것 같은데 여러모로 어색하고 안 어울렸어요. 하드보일드 주인공이라면 따뜻한 보살핌이 아니라 구타와 감금으로 마약을 끊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주인공 탐정이 나름 묵직하게 묘사된 점과, 그나마 가브리엘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결말 정도는 괜찮지만 그 외에는 딱히 읽을 가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하드보일드 장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점인 복잡한 인간관계를 극단적으로 활용해서 작위적인 이야기를 만든 아이디어는 그럴듯합니만 전개가 너무 막장이었어요. 이야기 하나하나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괜찮은 것도 있는 만큼, 차라리 하나하나를 단편으로 발표하는게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이번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작가의 대표적으로 <몰타의 매>와 <붉은 수확>만 거론되는 이유를 알려준다는 점 뿐이군요. 전집은 3,4권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더 읽어볼 필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차라리 <붉은 수확>이나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5/09/12

대프니 듀 모리에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4점

대프니 듀 모리에 - 8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레베카>로 유명한 데프니 뒤 모리에의 단편집.
<레베카>의 후속작이라는 <미세스 드윈터>는 아주 오래전 군대 있을때 읽었죠. 허나 정작 <레베카>는 아직까지도 읽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구해보기 힘들었으며, 정식 출간된 이후에는 유명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재미없고 지루한 고전들에 많이 치였기에 구태여 찾아 읽게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단편집이 눈에 뜨이기에 워밍업 차원에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왠걸, 완전 대박이네요. 최근 읽어본 단편집 중에서는 최고였어요. 수준높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한가득 수록되어 있거든요.
대체로 일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마주치는 기이한 사건과 위기를 다루고 있는데,  깔끔하고 깊이있는 묘사와 독자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구성력이 아주 돋보이네요. 이야기들의 설정 및 결말도 발표 시기를 짐작하면 놀랍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새로왔고요. 아울러 결말들도 무척 좋았습니다. 반전이 좋은 작품은 물론이고, 조금은 뻔하고 식상한 결말이라도 짤막한 묘사나 대사만으로 모든것을 정리해버리는데 역시나 거장이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시대를 초월하지 못한 식상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고, 몇몇 작품은 조금은 억지스럽고 뜬금없기는 합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소수의 단점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고 저의 선입겸을 무색케하는 좋은 단편집이에요. 장르문학, 그리고 단편집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레베카>도 바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 작품별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있는 점 참고하시길~

<지금 쳐다보지 마>
아이를 병으로 잃은 영국인 부부가 베네치아 관광 중, 부부의 죽은 아이 크리스틴이 보인다는 기이한 영매 할머니를 만난다.

아내 로라가 사기꾼에게 걸렸다고 생각하는 남편 존의 심리묘사가 핵심이자 대부분인 작품. 묘사력이 대단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먼저 런던으로 떠난 로라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장면도 제법 박진감이 넘치고요. 영국인 관광객이 베네치아에서 무슨 모험을 즐길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이랄까요?


하지만 쫓기는 여자아이와 베네치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연결시키는 결말은 좀 뜬금없더군요. 존도 사실은 영매다!라는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고 말이죠. 이국적인 풍광, 영매와 유령, 연쇄살인마라는 소재를 조합시키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잘 마무리된 것 같지는 않아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도널드 서덜랜드 주연의 영화가 유명하죠. (특히나 베드신) 앞서 말씀드린 아이디어 덕분에 영화화하기에 특히나 좋았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새>
히치콕 영화로 유명한 단편. 읽어보니 과연 명불허전. 한마디로 걸작!.
새들이 인간을 습격한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이렇게까지 재미있게 그려낸 것, 그것도 크리쳐물에 흔하디 흔한 고어스러운 묘사가 없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인공 냇이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설정도 돋보여요. 덕분에 새들이 사람을 습격하는 사태의 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뭐건간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에 강한 설득력이 생기거든요, 그 외에도 새들의 습격이 간조와 관련이 있다던가, 냇이 공습을 경험했기에 어느정도 대비가 가능했다는 설정들도 적절하게 배치되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어찌되었건 우리 가족은 살아남을 것이다... 라고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정말 뭐하나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딱 하나 궁금한거, 버틸 식량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새들을 먹어도 되지 않을까요?

<호위선>
2차대전 당시 븍해를 운항하던 화물선이 유보트에 쫓기다가 안개와 함께 나타난 영국해군 범선의 호위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
<파이널 카운트다운>과 같은 시공간 이동물입니다. 안개에 휩싸이고 이동한다는 설정도 판박이네요. 띠문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긴박감이 넘쳐야 할 항해 묘사 역시도 이 분야 대표 작가인 알리스테어 맥클린에 비하면 별게 없고말이죠. 전시상황의 긴박함을 단지 1등항해사의 심리로만 묘사하는건 확실히 무리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자동차 사고로 20년을 타임 슬립한 엘리스 부인의 이야기.
1932년에서 1952년으로 워프한 뒤 여러가지 낯선 상황에 난처해하는 엘리스부인의 모습이 가장 큰 볼거리에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아줌마가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가 너무나 설득력넘치게 묘사되고 있거든요.

그러나 타임슬립물로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누구인지 딸조차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해요. 일반적이라면 같은 시공간에사 이동했을테니 타임 슬립을 하였더라도 동일인물이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 그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로 옮겨온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발표 시점을 고려해보면 아이디어는 높이 평가할만하며, 잘된 sf는 아니지만 볼만한 드라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이 당황스러운 하루를 영원히 반복한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으며, 그러한 오싹 일상계 호러물이라면 충분히 좋은 점수를 줄 만 하죠. 별점은 3점입니다.

<낯선 당신>
우연히 만난 극장 매표원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자동차 정비공 이야기.
한 청년이 그야말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 만큼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기할만한 점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녀가 공습 때문에 죽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공군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라는 진상도 굉장히 뜬금없고요. 뭐라 평하기 어려울 정도로 짤막하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른 렌즈>
눈 수술 후 마다는 모든 사람들이 동물로 보이게 된다.
멋진 단편입니다. 발상 부터가 놀라워요. 모든 사람들이 개, 뱀, 소, 양 등으로 보인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냈을까요? 나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게 공포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또 살짝 설정에서 드러나듯 동물 형태가 사람일 때의 습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도 좋았습니다.
결말과 반전도 제대로에요. 다시 사람들을 보게 된 마다 부인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까라는 것인데 예상 가능하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몰아서 터트리는 작가의 솜씨가 참 인상적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남편과 앤설 간호사가 불륜 관계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은 마다의 재산을 노리는 남편이 벌인 수작질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전개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성모상>
남편 장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리는 그가 바다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모상 앞에서 필사적인 기도를 하는데....
다섯장짜리 짧은 이야기. 꽁트라고 해도 좋겠죠. 마지막 단 두줄을 제외하고는 마리가 얼마나 장을 사랑하고 걱정하는지, 그리고는 절박하고 필사적인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두줄의 반전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성모상이 그녀 기도에 화답했다 생각했던 환영은  마리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장이라는 것인데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이 반전이 단 두줄이라니!
데프니 뒤 모리에가 단편의 대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주는 작품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경솔한 말>
주인공이 과거에 겪었던 꽃뱀 도둑이야기.
결말은 예상그대로라 의외성은 없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뻔한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있게 쓴다는 것이야말로 재능이자 실력이 아닐까 싶네요.
마지막 단 한마디, "아는 얼굴이군요. 워더가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도 깔끔하니 좋았고, 작품의 주제인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도 굉장히 공감가는 것이었고요.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몬테베리타>
등산이 취미인 사나이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몬테베리타라는 산 정상에 있는 원시종교 집단으로 향한다.
종교적 이상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잃어버린 지평선>이 떠오르는 작품. 차이라면 몬테베리타 산 정상의 종교 공동체는 가는 길이 숨겨져 있지도 않고, 그 존재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고, 빅터의 순애보를 그렸다고 보기에는 빅터의 비중이 많이 작은 것이 단점입니다. 아울러 미심쩍고 모호한 결말 역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워요. 애나가 애초에 나병에 걸려서 몬테베리타에 오게 된 것인지, 이 종교집단의 영생의 비밀은 무엇인지, 그들은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끝나거든요. 이들의 삶을 갈구하지만 속세와 거리를 두지않는 주인공의 심정만이 이해가 될 뿐입니다.

그래도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등산에 대한 묘사는 탁월해서 놀랐습니다. 등산은 남자의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직접 등산을 해본게 분명하다 생각될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9/08

면세구역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면세구역 - 6점 이영수(듀나) 지음/북스토리

얼마전 소개해드린 알라딘의 <끝내주는 책>을 통해 알게된 책. 소개된 책 중 읽지 않은 책이 태반이지만 그중 가장 눈길이 가기에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방대하고 깊이있는 리뷰로 존경해마지않는 게렉터블로그의 주인이시기도 한 SF 소설가 곽재식님의 소갯글이 너무나 멋졌기 때문이죠. 제가 읽은 책은 2000년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라는데, 모두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듀나의 평론은 많이 읽어봤지만 소설은 처음이네요. (이전 <판타스틱>에서 단편을 하나 읽어보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로는 몇몇 작품의 경우 드라마라는게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에요. 등장인물들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설정이나 소재에 휩쓸리거나, 적응하거나 할 뿐 본인 스스로 맞서 싸우거나 극복하려는 시도, 노력이 전혀 등장하지 않거든요.
또 몇몇 작품은 재미는 있지만 단편으로는 어울리지 않기도 합니다. <펜타곤 계획>이 대표적인데 보다 상세하게 설정과 배경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생각됩니다. 작가 스스로 제시한 떡밥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고 등장인물들의 행동도 설득력을 보이기 어렵더라고요.

물론 아이디어, 발상 자체는 확실히 대단하긴 하더군요. 10년도 더 전에 발표된 작품들임에도 현 시점에 딱히 낡았다, 뻔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아이디어를 하나의 작품으로 풀어나가는 힘이 부족한게 아쉬운데, 작가적인 실력이 성숙해진 최신작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되도록 장편으로 말이죠. 혹 추천작 있으시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작품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면세구역>
사고로 죽은 동생이 찍은 몇장의 사진에는 서울임에는 분명하지만 어디로도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찍혀 있었다. 그곳은 어디일까?
앞서 말씀드린 "드라마라는게 없다시피하다" 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한 작품. 일단 죽은 동생의 사진 속에 남겨진 비밀의 공간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모습까지는 상당히 재미있어요. 면세구역이라는 아이디어도 좋고요. 그런데 찾아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런 곳이 있다고 적응하고 끝이에요. 이래서야 한편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죠. 별점은 2점입니다.

<스핑크스 아래서>
인터넷으로 장난삼아 <스핑크스 아래서>라는 가상의 영화를 등록하는데, 실제로 그런 영화가 존재했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역시나 중간까지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인터넷 루머가 어떻게 확대재생산되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은유로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결말은? 실제로 영화가 존재했건 아니건간에 그건 별로 중요한지 않더라... 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 운운하면서 짤막하게 설명하긴 하는데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올리비아 에번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좀 궁금하지만 또 그런걸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짤막한 결말이었어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나비전쟁>
모든 사물의 인과관계를 꿰뚫고, 심지어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이야기.
이 단편집 속에서 몇 안되는, 주인공이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설정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였어요. 바닥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식의 인과관계를 조작하는 내용이 그럴듯하게 펼쳐지거든요. 적도 악당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려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등 캐릭터도 그럴듯하고요. <와치맨>의 오지맨디아스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딸에게 남긴 편지 형태로 구성되었으며 설정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누군가 구술한 전설의 요약본같은 느낌이 아쉽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라지는 사람들>
사람들이 사람들을 서로 인식할 수 없게되는 설정의 작품. 그런데 주인공의 수동적인 모습이라던가, 그래서 어쩌라고? 식의 결말이라는 단점을 그대로 갖추었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낡은 꿈의 잔해들>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구체화되어 인격체가 되었다는 작품.
일종의 도플갱어물입니다. 어떤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떠올렸다는 창작 배경은 독특했고,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한 내가 허구이며 그 누군가가 진짜 나였다는 진상만큼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너무 일직선으로 드러내어 반전의 맛이 없다는 것은 단점이네요. 그냥 조금 조사해서 진상을 알아내었다.. 이게 전부거든요. 단편의 한계일 수는 있지만 보다 깊있는 묘사를 통해 결말의 충격을 극대화할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오발행동>
무언가 지구로 다가오고, 그 무언가에 의해 지구인들 모두가 성적 흥분에 가까운,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빠지게 되어 신을 영접하기를 기다린다는 내용.
예전 휴거 사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한데, 지구로 다가온 그 무언가가 지구와 짝짓기를 원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생물이었다는 결말이 아주 괜찮았습니다. 주인공들이 부르던 노래가 흰긴수염고래의 구애가와 비슷한 것이었다는 것도 좋았고요.
허나 역시나...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수동적인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단점은 여전합니다. 단편집 전체적으로 이 작품과 같이 1인칭 시점의 작품이 많은데 구태여 1인칭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이에요. 특히나 이 작품만큼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타인의 눈>
태어날 때 부터 장님이었던 손녀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에드 버크먼이라는 남자와 연결되어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독특한 SF.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은 화자가 이 손녀의 할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에드 버크먼에게 일어난 변화, 그리고 그가 정아와 연결된 후 어떻게 변화되었고 어떻게 죽어갔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 모든 것을 제 3자 입장에서 그냥 듣고 전달할 뿐이거든요. 에드 버크먼 시점으로 교차 편집하던가 후반부를 다시 썼더라면 훨씬 좋았을거에요. 솔직히 미완성이 아닌가 싶기까지 하더군요. 솔직히 설정도 그저그랬고 말이죠. 별점은 1.5점입니다.

<펜타곤 계획>
모종의 사고에서 살아남은 5인. 그들은 육체를 잃고 뇌사에 빠진 누군가의 몸으로 부활한 정보요원들이다. 그런데 그들 중 한명인 구엔 투 레가 병원에서 탈출한 뒤, 모두를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
초반에 5인에 대한 설정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전개도 일품일 뿐더러, 구엔 투 레가 왜 그들을 모두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 추리물 스타일의 전개를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구엔 투 레가 남자였지만 임신한 여자의 육체로 부활했다는 설정도 괜찮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펜타곤" 이라는 설정이 정말 대박이었어요. 그들 모두가 한명의 뇌에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5개의 뇌로 나누어 부활시킨, 결국 동일인물이라는 설정인데 정말 생각치도 못한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허나, 앞의 총평에서 언급했듯이 이 멋진 설정을 풀어나가기에는 작품이 너무 짧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금 길고 탄탄하게, 등장인물 5인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훨씬 좋았을것 같거든요. 원래의 육체를 부활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즉 원래 인물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등 풀리지 않은 설정도 많으니까요.
그래도 설정과 진상만으로도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기녀기담>
송나라, 손재주가 조금 있다는 식으로 묵적선생에게 모욕받은 기술자 공수반이 일종의 기계 인간을 만든다는 내용.
그런데 중국이 무대라는 특이성 외에는 딱히 언급할 부분이 없네요. 우리보다 우월한 기계가 우리 사이에 나타났을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해서 이미 많기도 하고요. 그냥저냥한 소품입니다. 별점은 1.5점.

<집행자>
호전적인 지성체들이 가득한 행성에 조난당한 지구 개척단의 이야기.
왜 그 별의 지성체들이 호전적인지에 대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또한 이 설정을 이야기의 핵심인 존속살인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일품이에요. 호전적인 종족 우두머리의 아들을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추리적인 전개도 괜찮았고요.
허나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존속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는 내용은 잘 와닿지 않네요. 당장 무슨 위기가 닥친것도 아니고, 이런 행동을 벌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역시 작품이 단편이라 생긴 문제로 보여 조금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 크고 검은 눈>
거대한 생명체가 자신의 분신들을 우주 각지로 보내 그들로부터 지식을 습득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풀어낸 장대한 SF.
설정도 괜찮지만 풀어나가는 전개도 흥미로왔던 작품. 화자인 페를리니가 겪었던 과거의 모험담으로서도 괜찮을 뿐더러, 기이한 기형 생명체가 보인 행동에 대해 추리물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괴생명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역시 압권으로 작가의 대단한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요.
허나 결론이 시시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이 거대 생명체를 찾기 위해 죽어가는 장거리 우주 여행자를 찾는다는 결말은 좋았던 과거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였거든요. 어차피 찾게 될 것이라는 것도 뻔하고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잔티움>
비잔티움이라고 불리우는 행성에 찾아간 행성 주인의 상속녀와 그녀의 후견인이 마주하게 된 행성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
행성이 지적 생명체가 만든, 인공 생명체를 키우기 위한 인큐베이터였다는 상상력만큼은 발군이지만 설득력이 부족했던 작품. 이유는 행성의 소유자이자 이미 사망한 에오닌 -드 -레다가 예술품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는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부분에 대한 설정을 보다 탄탄하게 가져갔어야 설득력이 높았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또한 이렇게 예술품에 집착했다면 죽을때 별과 함께 파괴되는 것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죠.
이렇듯 설정에 걸맞는 전개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여전한 단점을 지니고 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로렐라이>
한 전투정 비행사가 자신이 죽인 적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들릴 수 없는 적 (그녀)의 노랫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게 되죠. 이를 없애기 위해 적의 우주선을 다시 찾아 나서지만 외려 진짜 적의에 휘말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무대가 우주일 뿐 내용 자체는 좀 많이 뻔한 심령 호러물입니다. 짤막할 뿐더러 별다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숲의 제단>
우주의 황제가 자신이 출생한 별에 방문했다가 숲에 집어 삼켜진다는 이야기.
숲을 숭배하는 무속신앙같은 설정이랄까요? 숲의 의지가 정말로 대단하다는 점에서 <미사고의 숲>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허나 딱히 대단한 반전도 없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
<숲의 재단>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별에 방문한 이주민들이 별에 삼켜져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
이 작품 역시 너무 짧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야기를 좀 더 복잡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어요.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 설화를 가져다 쓰는 식으로 복잡하게 구성했더라면 훨씬 드라마틱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대로는 결말이 너무 뻔해요. 아울러 이주민과 원주민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주어진 떡밥도 잘 회수하지 못한 것도 불만스러웠고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2015/09/03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김명남 : 별점 4점

소름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명남 옮김/엘릭시르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삼대장의 한명인 로스 맥도널드의 걸작. 이미 오래전, 십년도 더 전에 동서문화사 동서추리문고 출간본으로 읽어보았지만 이번에 엘릭시르에서 재출간되었기에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별점 5점을 주기는 했지만 다시 읽어도 흥분과 재미를 안겨다 줍니다. 확실히 걸작은 걸작이에요. 오히려 예전과는 다르게 범인과 진상을 알고 읽으니 색다른 재미가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죠. 루 아처가 단서를 하나씩 짚어나가며 20년전, 10년전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사가 마지막에 어떻게 범인으로 연결될지에 집중해서 읽었는데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허나 아무래도 두번째 읽는터라 제법 많은 단점이 눈에 뜨이긴 합니다. 우선은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경고 전화를 하고 방문해서 쏴죽인다는 설정이 그러해요.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불필요한 행위에 불과한데 정작 이유는 설명되지 않거든요. 그나마도 헬렌과 로라 서덜랜드에게만 한 것이 이상하고요. 콘스탄스에게는 그러한 경고를 왜 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이라 체포되기 딱 좋은데 턱하니 "내가 너 죽이러 갈께~"라고 전화를 한다니, 이건 너무 말이 안돼죠. 꼭 전화를 제외하더라도 범행이 지나치게 운에 의지한 부분이 많다는 것도 확실히 약점입니다. 헬렌 사건만 해도 루 아처가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고, 저드슨 폴리가 조금만 빨리 방문했어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범인 티시가 로라 서덜랜드를 어떤 시점에서 죽인다면 어쨌건 사건은 거기서 끝난다는 것도 문제에요. 헬렌이 살아있었다면 진상을 폭로했을테고, 혹 이 소설처럼 먼저 죽었더라 하더라도 티시가 더 이상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테니까요. 주요 용의자인 돌리, 맥기 모두 어딘가에 구류된 상태이니만큼 경찰 수사가 제대로 시작된다면 로라 서덜랜드 살인 동기는 브래드쇼 부인이 가졌으리라는 점이 밝혀졌을테니 이야기는 끝이죠. 마찬가지로 헬렌 사건은 맥기를 범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고, 아처가 수사기관에 저드슨에 대한 정보만 제공했어도 그를 옭아매어 헬렌이 누군가를 협박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었을겁니다. 이런걸 보면 사립탐정들은 정말이지 공권력의 적이에요.
여튼,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마지막에 아처가 티시의 정체를 깨닫는 반전의 힘은 강하지만 그것이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미 사건은 다 끝난거나 마찬가지니...

그 외에도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묘사나 설정이 분량을 제법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헬렌이 창녀와 다름 없었다라는 증언이 대표적으로 작중 묘사된대로 과거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심한말을 한 것도 그때 뿐 결국 그녀가 로이 브래드쇼 협박범이 되었다는 점은 아주 씁쓸할 뿐더러, 팜프파탈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으로 캐릭터가 애매해져 버리고 말았네요. 차라리 돌리처럼 어린시절 겪었던 덜로니 사건에 대해 트라우마를 간직한 캐릭터로 끌고나가는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덜로니 부인이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산다는 것도 말이 맞지 않습니다. 재산 형성을 보면 로이 브래드쇼의 재산은 결국 부인의 재산이고, 그 재산이 합리적으로 흘러가려면 어떤 식으로든 이동이 있었을텐데 그것을 전혀 모를 수는 없을거잖아요? 아울러 덜로니 부인이 사건을 덮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했다면, 동생 티시의 사망증명서를 미리 떼어놓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에요. 덜로니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조작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외려 사명증명서로 사망을 증명하면 재혼을 계획하고 있는 로이 브래드쇼에게만 좋은 일일테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이죠.

어떻게 쓰다보니 이상하게 단점만 잔뜩 썼는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걸작은 분명해요. 서정적이면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다는 점에서는 독보적이기도 하고요. 맥기를 감옥의 무게에 짓눌린 성자로 묘사한다던가, 협박범에 불과한 헬렌에 대해 여러모로 가엾음을 느끼는 아처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남자는 첫 결혼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 또 여자가 더 빨리 늙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연한 교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겨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약간 있다는 것 정도? 
언제 읽어도 여전한 흥분과 재미를 가져다 주는, 제 All-time best 10에 언제나 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도 좋으니 더할나위 없네요.

2015/09/01

팡토마스 1 - 피에르 수베스트르, 마르셀 알랭 / 성귀수 : 별점 2점

팡토마스 1 - 4점 피에르 수베스트르.마르셀 알랭 지음, 성귀수 옮김/문학동네

아주 어렸을 적, 아마 초등학교 시절 <팡토마> 라는 영화를  TV를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로는 보기드문 프랑스 액션 영화로 꽤나 시끌벅적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팡토마”가 주인공이 아니라 악당 조직의 우두머리 범죄자 이름이라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범죄자가 주인공인 작품이야 뤼뺑을 필두로 많긴 하지만 그래도 악당이라기보다는 안티 히어로같은 캐릭터인데 반해 팡토마는 잔인무도한 악당이라는 점 때문이었죠. 흡사 만화버젼 루팡 3세 스타일이었달까요? 시퍼런 얼굴 빛깔의 범죄 신사로 2편의 시리즈가 연이어 방송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잡히지 않고 도망친다는 결말도 인상적이었고요.
이 작품이 사실은 100년도 더 된 옛날 프랑스에서 발표된 범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를 감상한 한참 이후, 장르문학 애호가가 되면서 알게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보만 있을 뿐 국내에서 출간된 이력이 없기에 입맛만 다신 세월이 오래죠. 어린이용으로 발표된 절판본을 어렵사리 구하기는 했지만 번역도 문제에다가 축약이 심해서 제대로 감상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요.
이러한 기다림의 시간에 보답하듯 <뤼뼁> 시리즈 완역으로 유명한 전문 번역자 성귀수씨께서 직접 손댄, 정말로 제대로 된 원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어언 3년 전이긴 한데 여튼, 뒤늦게 읽은 이 작품은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절절이 소개한대로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음에도 그동안 읽지 않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왠지 기대가 별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걸작으로 유명한 고전에서 뒷통수를 맞은 경험이 많아서인데 역시나, 이 작품 역시 오랜 기다림과 기대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시간이 오래 흐른 탓이죠. 발표 당시 충격을 안겨다 주었을 여러 설정과 아이디어는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숱하게 써먹은 탓에 신선함이 휘발된지 오래거든요. 예를 들어 변장에 능숙한 천재 범죄자와 뛰어난 추리력을 갖춘 탐정의 대결, <괴인 20면상> 시리즈와 다를게 없잖아요?

게다가 소설로서의 완성도 역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창작 배경부터가 철저한 상업성이었고, 신속한 저술이 더욱 중요했다고 하니 애시당초 완성도가 높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정말 기대 이하였어요.
일단 사건이 반복되는 전개부터가 문제입니다.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 벨담경 살인사건, 에티엔 랑베르 재판 (랑그륀 후작부인 사건과 이어지는), 소냐 대공비 강도사건, 거언 체포, 돌롱 살인사건이 숨쉴틈없이 이어지는데  사건 하나하나는 흥미진진하지만 이어지는 방식이 영 뜬금없기 때문이에요.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 - 벨담경 살인사건 - 소냐 대공비 강도사건의 전혀다른 세가지 이야기가 연결된 느낌이랄까요? 이런 점에서는 이야기의 얼개를 제대로 갖추어 놓고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더군요.
게다가 추리 - 범죄물로 보기에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애호가로서 아쉬운 점입니다. 오직 등장하는 것은 변장밖에는 없어요. 밀실트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 랑그륀 후작부인 살인사건의 진상은 에티엔 랑베르로 변장한 팡토마스가 방문한 것이고, 대공비 사건에서 팡토마스가 깜쪽같이 호텔을 빠져나간 방법 역시 변장이라는 식이며, 심지어 주변인물인 샤를 랑베르조차 변장하여 은신해있었고 쥐브 반장의 주요 수사 방법도 변장해서 탐문 수사하는 것이니 작가가 변장 외에는 다른 아이디어가 전무했구나! 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물론 범죄자가 주인공인 범죄물에 꼭 대단한 트릭이 등장할 필요는 없긴 합니다. 허나 팡토마스가 익히 알려진 만큼 천재적인 범죄자로 잘 그려졌느냐, 그리고 범죄가 정말 잘 짜여진 치밀한 범죄냐 하면 그 역시 아닙니다. 에티엔 랑베르가 아들 샤를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초중반 장면이 대표적이죠. 에티엔 랑베르가 무죄 방면 된 것은 순전히 운일 뿐으로, 배심원 설득에 실패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라는 문제에는 답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거언 (팡토마스)이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탈옥하기까지는 어이없음의 정점을 찍습니다. 돌롱 집사를 살해하기 위해 잠깐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형집행 전날 자신을 닮은 연극배우를 끌어들여 대신 죽게 만드는 결말까지 전부가 설득력이 전무하더군요. 팡토마스가 그 시점에 정부인 벨담 부인을 찾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돌롱 집사를 살해하기 위해 쉽게 빠져나갔음에도 다시 돌아와 사형 전날까지 목숨을 걸고 운에 의지한 채 버틴다? 이게 말이 될리가 있습니까. 그냥 돌롱 집사를 죽이고 도망가면 그만이지... 연극배우 발그랑 포섭에 실패했디면 어찌 되었을지에 대한 답도 없고 말이죠. 돈으로 몇시간 빠져나오는게 가능하다면 도주는 더 쉬웠을텐데 일만 크게 벌인 꼴 아닌가 싶어요.
한마디로 변장과 행동력있지만 명성만큼의 전설적인 범죄자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캐릭터만 따지자면 오히려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쥐브 반장의 캐릭터가 더 낫더군요. 초반 살인사건에서 외부에서 범인이 침입헸음을 설명하는 장면 등에서 제대로 추리력을 선보이거든요. 직접 발로 뛰면서 증거를 모아 범인이 어떻게 기차를 타고 내렸으며 어디서 뛰어내렸는지 등을 확인한 증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은 동시기의 셜록 홈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싶긴 하지만 추리애호가로서 충분히 만족할 만 했습니다.
좀 특이했던 점은 쥐브 반장의 추리가 샤를 랑베르를 범인으로 만드는 저주받은 유전자 논리와 엮이는 부분이었어요. 근대와 중세적 사고관의 충돌이 뭔지 정말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작중 시대가 증기기관차와 자전거, 마차가 공존하는 근대화 초입기라 그러한 것 같은데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베르티용 측정법이 효과적으로 쓰이는 것도 인상적이였고요.

그래도 좋은 점은 너무 적네요. 지금 읽기에는 너무 퇴색해버린, 낡아버린 이야기일 뿐입니다. 전설임에는 분명하기에 역사적 가치까지 평가한 별점은 2점. 소개가 너무 늦은 것이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2권은 아무래도 읽게 될 것 같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