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레이블이 Book Review - 역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Book Review - 역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6/01/30

세계사 만물 사전 - 헤이본샤 편집부 / 남지연 : 별점 1.5점

AK Trivia Book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도감형 사전이지요. 제목 그대로 세계사와 관련된 각종 사물과 개념을 짧은 설명과 도판으로 소개해 줍니다. 

하나의 주제를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매우 짧은 항목들이 이어지는 구성이라 부담 없이 넘겨보기 좋습니다. 한 항목이 대개 도판 하나와 그에 덧붙여진 설명 정도로 끝나는 덕분입니다.
다른 사전이나 도감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소재들이 제법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특히 바다와 선박 관련 정보가 비교적 풍부한 편으로, 범선의 구조를 보여주는 도판이나 돛을 포함한 요트의 상세한 구성 설명은 꽤 볼만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만화 “해왕기”를 볼 때 참고삼아 보아도 좋겠더라고요.
말과 수레, 썰매에 대한 설명도 충실합니다. 특히 썰매를 도판과 함께 체계적으로 소개한게 눈에 띕니다. 여기에 더해 자물쇠와 열쇠, 촛대, 샹들리에처럼 일상적인 소품들의 상세한 설명도 좋고요. 특정 시기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 유용한 정보일 테지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깊이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항목이 도판 하나에 짧은 설명으로 끝나며, 배경이나 역사적 맥락 없이 현상만 나열하는 경우가 많은 탓입니다. 무엇을 왜 그렇게 쓰게 되었는지, 어떤 흐름 속에서 발전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차 구성도 아쉽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분류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국가와 전쟁에서 바다, 범선, 기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기구와 항공기, 말과 수레, 썰매로의 흐름은 그나마 이해가 되는데 이후에 등장하는 농업과 농민, 의상, 민족, 속옷, 우산, 신발 등은 맥락도 불분명하고 주제 간 레벨 차이도 큽니다. 한 책 안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축과 유적, 신화와 신을 다룬 부분은 도판이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고, 설명 역시 관련 전문 서적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서 실망스럽습니다. 굳이 이 책에서 다뤄야 했을 영역이 아니에요. 무기들도 마찬가지고요. 

도판도 수가 많고 성의가 느껴지며 하나의 일관된 일러스트로 제공된다는건 좋은데, 인쇄 문제인지 전체적으로 품질이 썩 좋지 못합니다. 이는 도감이라는 책의 정체성을 미루어 볼 때, 최악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AK Trivia Book 중에서도 최악 중 하나에요. 추천할만한 책은 아닙니다. 

2025/04/04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김성준, 김주식 : 별점 4점

미친 항해 - 8점
마이크 대쉬 지음, 김성준.김주식 옮김/혜안

마이크 대쉬가 집필한 역사 논픽션입니다. 1628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바타비아 호가 이듬해 6월, 현재의 소호주 해안 인근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한 뒤 생존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BBC History Magazine과 History Today 등의 권위 있는 역사 전문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항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선장이었지만, 직급상 최고 책임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대상인' 프란시스 펠사아르트였습니다. 선장 야콥스와 펠사아르트 사이의 갈등은 여자 문제 등으로 항해 중부터 깊어졌고,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부상인'이자 전직 약제사였던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였습니다. 그는 선장을 꼬드겨 선상 반란을 모의했는데, 바타비아 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면서 계획이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사아르트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바섬으로 떠난 틈을 타서 코르넬리스는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체계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식량과 식수를 가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서, 반항할만한 불순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펠사아르트가 구조대를 이끌고 보물을 회수하러 돌아오면, 그 배를 점령해 해적 생활을 하려는 계획으로요. 그래서 병자와 노약자,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약 115명에 달하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계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회수할 보물이 많기에 구조대 인원이 많지 않을거라는 코르넬리스 생각대로 구조대가 움직였거든요. 그러나 말라 죽으라는 의도로 다른 섬으로 보내졌던 위이버 헤이스와 건장한 남성들이 우물을 발견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코르넬리스의 학살을 알게된 후 방어 거점을 구축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코르넬리스는 친위대를 이끌고 위이버 헤이스를 속이려다가 사로잡혔고, 코르넬리스의 후임이 일당들과 함께 위이버 헤이스 섬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대상인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스럽다고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라웠어요. 여튼, 위이버 헤이스와 코르넬리스 세력은 각각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으로 사람을 보냈고,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에서 위이버 헤이스가 이겨서 폭도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코르넬리스의 음모는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난파 후 서사만으로도 영화나 소설로 각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코르넬리스가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학살을 지시하며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세계 전생물'로 바꾸어 보아도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와 조직(동인도 회사)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종교론과 조직에서의 직위를 무기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는게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저자 마이크 대쉬는 방대한 사료 조사와 기록 분석을 통해, 사고 외에도 각 인물의 생애와 심리, 사회 구조적 배경까지 책에 촘촘히 담아냅니다.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가 처한 시대와 개인적 몰락, 종교적 배경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업 구조와 식민 경영 방식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납니다. 실제로 코르넬리스의 생애만 따로 정리한 분량이 3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이 꼼꼼하게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놀라운 수준입니다. 코르넬리스의 아내에 대해서까지 최대한 조사해서 수록했을 정도니까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당시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설명 역시 상세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항해 중 먹거리 설명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바다 고기를 낚으면, 누가 고기를 낚든 매일 맨 처음 낚은 고기는 선장의 몫이었고 그 다음 12마리 정도는 상인과 사관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인정된 순서에 따라 고기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게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그래서 선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조림에 든 고기와 콩, 건빵으로 알려진 딱딱한 빵인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는 음식의 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 도축한 돼지와 소를 사들여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피도 빼내지 않은 채 바닷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리된 고기는 쌌지만, 아주 짜서 조리를 하려면 청수에 담가 짠 맛을 빼내야 했는데, 항해 중에는 한정된 식수를 절약하기 위해 바닷물에 넣어 끓였다는군요. 얼마나 짰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말린 생선도 싣고 다녔는데, 대구가 대부분이었다네요. 말린 대구는 스튜로 끓여서 역 시 말린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함께 먹었고요. 그 외 먹거리들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호 선원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잘 먹고 잘 마신 편이라는게 충격적입니다. 부과된 노동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가혹했던 항해에 대한 설명 등 재미있는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이렇게 재미와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 모두 빼어난데, 코르넬리스가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이라던가, 후일담 이후 코르넬리스가 정신병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 비중이 지나치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들 후예가 살고 있을거라는 추측도 마찬가지고요. 섬에서의 학살도 논픽션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책의 디자인과 구성도 옛스러워서 읽기 불편했고, 도판도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입니다. 난파에 대한 논픽션을 세 권째 읽게 되었는데 - "바다 한가운데서", "메두사 호의 조난" - 대체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장르인 것 같네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3/30

전쟁과 군복의 역사 - 쓰지모토 요시후미 / 김효진 : 별점 3점

전쟁과 군복의 역사 - 6점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군사사 전문가인 쓰지모토 요시후미가 집필한 책으로, 전쟁과 군복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방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조명합니다. 인류 최초로 군복 개념이 등장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를 시작으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군복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시대별, 지역별 군복의 변화를 다루면서도, 단순한 복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초로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와 독일의 효웅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격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제국의 결전에서 대활약했던 폴란드 왕 얀 3세의 유익 기병대 '후사리아(윙드 후사르)' 이야기, 군인왕 프리드리히의 생애 등 군복과 불가분한 주요 전사 및 영웅들의 활약상을 병행해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당연히 복식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폴란드 중장기병 후사리아의 복장 묘사처럼요. 등에 장착한 거대한 스크시드워(천사의 날개 모양 장식)부터, 장창 코피아, 휘어진 군도 사블라, 2미터 장검 콘체슈, 권총 반돌레트, 동양풍 투구 시샤크,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까지 장비 일체를 착용 이유와 이후 발전 상황 등까지 모두 알려줍니다. 아래와 같이 도판도 함께 제시되고요.

복식으로서의 군복에 대한 정보도 흥미롭습니다. 군복이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되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화약은 짙은 연기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전장의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총기의 명중률도 낮아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피하는 것보다 아군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원색과 금·은 자수, 매듭 장식이 선호되었다고 하네요. 또, 화려한 군복은 군대의 상징이자 국가 권위의 표상으로 기능해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이 이를 의도적으로 장려했다는 설명은 군복이 단순한 실용품이 아닌 국가 전략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고요. 또한 병사들에게 눈에 띄는 군복을 입히면 탈영을 어렵게 만든다는 설명도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프랑스 총사대의 복장, 이른바 '타바드'에 대한 고증 또한 세밀합니다. 대부분 대중매체에서 보아온 파란색 상의는 실은 루이 14세 시대의 것이며, 루이 13세나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에는 다른 복장이었다고 하네요. '늑골복'이라 불린 헝가리계 경기병의 복장이 오스만 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1848년 무렵, 재인도 영국군의 선도 군단(Corps of Guides)을 이끈 해리 버넷 럼스덴 중위(후에 중장. 1821~1896 년)가 고안한 진흙으로 염색한 군복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우르두어에 카키 (Khaki, 진흙 색)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카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위장 효과를 의식한 군복이라던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세계 최강의 패권국은 대영제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육군이 전 세계에 유행시킨 세 가지 아이템은 승마 바지와 승마 부츠의 조합, 어깨에 두르는 샘 브라운 벨트, 오늘날 일반 신사복으로 널리 정착한 '트렌치코트' 이고, 세계 최초의 위장복은 2차대전 독일 친위대가 도입했다는 등의 재미난 정보가 가득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다소 산만하고 두서없이 전개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주로 근대 유럽에 치우쳤다는 비중 문제도 있고요. 또한 소개된 내용들의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학술적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전사(戰史)'와 함께 입체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전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14

기차 시간표 전쟁 - A.J.P. 테일러 / 유영수 : 별점 4점

기차 시간표 전쟁 - 8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페이퍼로드

이 책은 1914년 7월 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는 전쟁이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강대국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기차 시간표와 병력 동원 계획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각국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군대 동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동원을 빠르게 마쳐야 했고, 이에 따라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이동시키는 계획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병력과 수천 대의 열차가 동원되는 만큼, 계획이 한 번 실행되면 중단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각국은 병력 동원을 상대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일종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원이 시작되면 이를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양면전 가능성을 고려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고, 다른 나라들도 부분 동원만으로는 전면전에 대비할 수 없어 연쇄적으로 동원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상대를 위협하려던 동원 계획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했던 동맹 및 외교 관계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입니다. 유럽 열강 간의 동맹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타협을 원했으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며 개입했습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명확한 대응 방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독일이 터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고, 영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군을 동원하면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했습니다. 독일 황제는 세르비아가 제시한 조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전쟁 준비가 진행된 후였습니다. 결국 1914년의 전쟁 위기는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강대국들의 경직된 대응으로 인해 확대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곧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각국의 황당하고 순진했던 생각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탁상공론과 연구만 오갔던 무능했던 각국 군사 작전 계획들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다들 말도 안되는 동원 계획 등으로 꿈만 꾸고 있었다는걸 잘 알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슐리펜이 여러 해 고심했던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는 계획 - 은 프랑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던가, 슐리펜이 오랫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프랑스가 어느 때인가 알아차리고 길을 막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난건 외교를 맡은 관료들 책임이 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합국이 전범으로 지목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야말로 '베오그라도 정지'를 제안하는 등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시도를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더라고요. 소위 군국주의 군주들을 온화하고 선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정치가들이 말한 바를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모든 결정권이 군주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쟁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합니다. 

1차 대전 불씨를 당긴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왜 암살을 시도했는지 -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이 나머지 민족을 지배했는데, 마침 세르비아가 터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었기 때문에 - 부터,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이 암살범 프린치프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수상 파시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 처음 폭탄 투척 사건에서는 암살에 실패했었지만 대공이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병원으로 갈 때 암살당했다는 사건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물론 범인 일당에 대한 재판 결과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당은 사형당했지만, 미성년자였던 프린치프는 사형을 면했다고 하네요. 수백만 명이 죽은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감을 안고 여생을 보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주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도판도 충실하고, 책의 장정과 디자인 모두 빼어납니다. 다만 '기차 시간표'가 중요한 핵심 소재는 아니고 일종의 키워드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시작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관련된 인물들과 국가들의 결말은 다른 경로로 알아 보아야 한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02

지도로 읽는다, 삼국지 100년 도감 - 바운드 / 전경아 : 별점 2점

지도로 읽는다 삼국지 100년 도감 - 4점
바운드 지음, 전경아 옮김, 미츠다 타카시 감수/이다미디어

남자라면 누구나 "삼국지" 팬이겠지요. 저도 무척 좋아해서 원전은 물론, 관련된 책들도 많이 읽어왔습니다. 

이 책도 그러한 삼국지 관련 책 중 하나로, 삼국지의 역사를 '지도'로 정리한 도감 형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전투의 전개 과정과 국가 간 역학 관계를 모두 지도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러한 지도 중심의 접근은, 삼국 시대의 복잡한 전쟁과 외교 관계를 시각화하여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시 이민족의 위치, 작은 난이 일어났던 지역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주요 전투도 전황과 흐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요.

또한,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 오나라의 멸망까지 약 100년간의 전개를 연대별로 다루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서술되었기 때문에 소설 "삼국지연의"와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하지만 '지도'에 너무 집착한건 단점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는 것보다, 지도로 보여줄 수 있는 주요 전투와 판도 변화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삼국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나 인물 간의 관계 등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탓입니다. 전투들도 배경이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이런 전투가 있었다"는 식이 대부분이고요. '지도'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만든 책같아요.

지도의 완성도도 별로입니다. 특히 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작은 지도들은 가독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큰 지도에서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방식이었어야 했는데, 현재 구성으로는 각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졌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표기된 전투의 진행 순서도 더 잘 보이게 만들어졌어야 했어요.
모든 전투를 지도로 설명하는 방식도 좋다고 할 수 없어요. 단순히 전투의 순서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세력의 판세나 승패를 알아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관도 대전이나 적벽 대전 같은 중요한 전투조차 다른 소규모 전투와 비슷한 비중인 것도 단점이에요. 핵심적인 전환점 정도는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오나라의 멸망까지 다룬 것은 삼국 시대를 끝까지 정리했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지나치게 지루하기는 했습니다. 앞서의 큰 전환점도 없이 소소한 전투들로만 이어지는 탓입니다. 차라리 잘 몰랐던 진나라 이후 5호 16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도와 함께 짧게라도 설명해주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독립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을 위한 유용한 참고서에 가깝습니다. 이런 류의 책이라면 십년도 훨씬 전에 읽었던 "전쟁으로 읽는 삼국지"가 훨씬 나은 선택입니다.

2025/02/16

아틀라스 마이오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도책 - 강민지 : 별점 2.5점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아틀라스 마이오르"는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도책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의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결과물로, 단순한 지도책을 넘어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틀라스 마이오르"가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지도책을 단순한 지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인문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깊이 있게 분석한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예술, 인문학 서적이자 문화사, 미시사 서적 이라는 성격도 갖추고 있습니다. 지도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좋은 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무역국이었으며, 높은 문해율과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적과 인쇄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도책은 단순한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식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 도서 지관을 꾸려 장서를 자랑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크기가 크고 값비싼 지도책이 인기를 끌었고, 이는 곧 출판 시장에서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성장했습니다.'는 것이지요.

지도책 본연의 모습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를 중심으로 지도 제작의 발전 과정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텔리우스(상업 지도책의 선구자), 메르카토르(현재도 사용되는 평면 도법의 창시자), 블라외 가문(아틀라스 마이오르 제작 명문 가문), 혼디우스 가문(블라외 가문의 라이벌) 등 지도 제작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과 이들의 대표작을 통해 지도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를 넘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지도 제작과 출판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한 권의 지도책을 탐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지도 제작에 사용된 도판과 인쇄 기술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에 대한 방대한 양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을 묘사한 지도가 포함된건 반가왔고요. 또한, 인쇄 방식과 채색 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데, 컬러 인쇄 기술이 없던 시절 '채색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이 단순한 흑백 인쇄물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기여했으니,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울러 지도책을 단순한 과학적 산물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도 연구 분석하는데, 그 깊이가 대단합니다. 지도 제작에 사용된 물감을 단순히 색채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의 유행과 연결해 설명하며, 지도 속 도상(알레고리) 분석을 통해 지도책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는 식이거든요. 특히 지도에 등장하는 문양과 장식 요소를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시대적 사고와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요소로 분석하는 과정은 지도책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틀라스 마이오르" 외의 불필요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구성은 아쉽습니다. 지도책의 유행 이유나 지도 제작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필수적인 정보지만, 당대 경쟁 지도 제작자의 지도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문화까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건 과했습니다. 특히 60페이지에 걸친 '도상(알레고리)' 설명은 지나쳤습니다. 지도책에 문양이 들어갔다고 해서, 문양의 구성 요소와 의미, 디자인 규칙까지 세세하게 독자가 이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도판도 풍성하지만,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다소 작은 도판이 많은건 단점입니다. 주요한 도판은 접어 넣는 방식으로라도 보다 크게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자의 가벼운 문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최신 트렌드를 인용한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책의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느 정도는 교열 과정에서 조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도책을 다룬 미시사,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결과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허나 지도책을 벗어난 이야기도 많기에 감점합니다. 

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

2025/02/02

방어구의 역사 - 다카하라 나루미 / 남지연 : 별점 2.5점

방어구의 역사 - 6점
다카히라 나루미 지음, 남지연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Trivia Book 58번째 책. 제목처럼 '방어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어구의 시작부터 통사적으로 정리하여 모두 105개 항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페이지는 설명, 한 페이지는 도해로 이루어진 구성은 다른 시리즈들과 마찬가지고요.

통사적으로 방패와 갑옷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고, 왜 이렇게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초창기에는 방패와 갑옷이 고르게 발달했지만, 크로스보우와 장궁 같은 무기가 도입되면서 전신 판금 갑옷이 도입되었고, 이 탓에 방패는 사라지고 양손으로 힘을 주어 타격하는 무기가 나타나는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거든요. 일본과 중국, 인도와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갑주까지 보여주는 등 다루고 있는 범위도 넓고요.

각종 방패와 갑옷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도 좋았습니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핵심 용어는 '스케일 아머'와 '라멜라'입니다. 스케일 아머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수의 물고기 비늘 모양 조각을 천이나 가죽 등 안감에 꿰매 붙여 형성한 방어구입니다. 라멜라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고대부터 존재했던 갑옷으로 스케일과 동일하게 비늘 조각이나 가죽, 금속 재질의 사각형 소찰로 이루어져 있으나, 안감은 없습니다. 조각과 소찰들을 엮어서 만든 갑옷이지요. 스케일이 보다 더 원시적이고 옷처럼 유연성이 있는 반면, 라멜라의 몸통 부분은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단단합니다. 라멜라가 스케일보다 제작에 손이 많이 가는 고급품이고요.

플레이트 아머의 가격에 대한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잔 다르크(1412~1431년)를 위해 급조된 이탈리아제 갑옷은 100리브르로서, 금화 백 닢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의 금화 한 닢은 120만 원으로 환산할 수 있으므로, 잔 다르크의 갑옷은 1억 2,000만 원인 셈이지요. 다만 영웅을 위한 특제품, 게다가 특별히 서둘러서 만들었기 때문에 예외적이고, 그보다 50년 전의 기록에 나오는 판금 갑옷은 25리브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는 약 3,000만 원입니다. 자동차 한 대 값 정도인데, 기사 전용 장비로 상위 계급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네요.

당대 세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갑옷 설명도 흥미로웠습니다. '보인갑'은 중국의 보병용 중장 갑옷의 총칭으로 10세기 송나라의 보인갑은 철제 갑엽을 엮은 라멜라였습니다. 금나라의 중장기병에 맞서는 송나라 중장 보병대를 위한 장비로, 최전선용 보인갑은 갑찰 1825장으로 전신을 감싸서 무게가 35kg이나 나갔습니다. 양산 체제도 갖춰져서, 직인 한 사람이 만들면 보인갑 한 벌을 완성하는 데 70~140일이 걸렸지만, 실제로는 분업화되어 이틀에 한 벌씩 생산이 가능했다네요. 당대 최고 장비 중 하나를 이 정도 속도로 생산했다는건 송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외에도 무기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바이저를 올려 상대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동작이 기사의 인사 = 군대의 경례의 기원이 되었다는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일본 갑주의 비중이 높다는 건 아쉬웠습니다. 일본 갑주에 대한 통사적 설명까지는 볼 만 했고, 아래처럼 "세인트 세이야"의 성궤 상자는 일본 갑주를 담는 상자의 형태와 비슷했다는 등의 정보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갑주 제작 공정 중에는 갑옷의 강도를 확인하는 시험도 흔히 이루어졌고, 오요로이가 주류이던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를 '다메시요로이'라 부르며, 후세다케노유미라는 강력한 복합궁을 쏘아 시험했는데 16~17세기에는 화승총으로 도세이구소쿠를 쏘는 '다메시구소쿠'로 변화했다는 등의 정보는 과하다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설명할 내용은 아니었다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도판도 나쁘지 않으나, 한 페이지로는 내용에 소개되는 모든 도판을 담지 못한다는 단점이 큽니다. 아래 난반도구소쿠는 뭔지 보여주지도 않더군요. 

도판 크기도 작습니다. 오래전에 구입했던 DK 무기 백과사전을 일부 참조하며 읽었는데, 이 정도 사이즈는 되어야 명확하게 세부까지 확인이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제목이 주는 기대에는 충분히 값하고, 재미도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런 류의 서적과 정보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1/17

도쿄의 가장 밑바닥 - 겐콘 이치호이 / 김소운 : 별점 2.5점

도쿄의 가장 밑바닥 - 6점
겐콘 이치호이 지음, 김소운 옮김/글항아리

1893년, 저자 겐콘 이치호이(본명: 마쓰바라 이와고로)가 빈민가로 알려진 시타야 만넨정, 요쓰야 사메가하시, 시바 신아미정 등 3대 빈민굴을 직접 찾아 하층민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이를 생생하게 글로 옮긴 논픽션입니다. 일본 근대 르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단순히 빈곤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빈민들의 식생활, 일상적인 노동, 그리고 지역 경제의 구조적 문제까지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차부'(인력거꾼)에 대한 상세한 설명처럼요. 그들의 영업과 업무 행태, 하루 벌이, 주요 먹거리, 생활상과 나이 들었을 때의 비참한 모습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는 그들의 생존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드리운 가난의 무게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초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되고요. "경성탐정록"의 "운수 좋은 날"을 쓰기 전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네요.

차부 외에도 고물상, 경매 시장, 일용직과 도급 인부들, 아침장과 야시장 등 다양한 하층민 직업에 대한 설명 및 하층민들의 생계 방식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잔반을 모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잔반야'의 존재와 그들이 판매하는 잔반들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생존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음식들 설명도 많은데, '후카가와 메시'가 차부들을 대표하는 식사 중 하나로 바다 비린내가 심해서 먹기 힘들다는게 새롭더군요. 지금은 지역 먹거리로 유명한 음식이니까요. 조리법의 문제였을까요? 원래는 꿀꿀이죽과 다를게 없었던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의 유래와 현재 위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 시점에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망하면 3년을 못 간다는 '좌식산공'에 대한 언급,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들의 무자비한 행태, 가증스러운 도급업자들에 대한 서술은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막걸리는 1홉(0.18리터)에 2센이며 잘 마시는 사람은 한 번에 5동이에서 7동이를 해치운다. 그중에는 옷가지를 잡히고 홧술로 10동이 이상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는 설명은 더 말할 것도 없을테고요.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특성 모두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으며,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빈민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책입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1/05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손지연 : 별점 3.5점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8점
사이토 미나코 지음, 손지연 옮김/소명출판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주부의 벗' 등 일본 여성지에 실린 요리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이 일본 가정의 식탁에 미친 영향을 알려주는 미시사, 식문화사 서적입니다. 잡지에 실린 요리 정보로 그 시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며, 전쟁 시기 일본인의 먹거리 변화도 굉장히 생생하게 알 수 있어서 전쟁의 실상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 순으로 보자면 1940년부터 '절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뭄과 흉작 탓으로, 일본이 쌀을 절약하기 위해 대체 음식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아빵'이라는 레시피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빵은 밀가루에 콩가루, 해초 가루, 말린 생선 가루를 넣어 만들었는데, 맛이 있을리가 없지요=.

1941년에는 국민의 영양을 고려한 '국민식 운동'이 도입되었으나, 배급제가 본격화되면서 이상에 그치고 맙니다. 배급제에서는 단백질이 특히 부족했는데 오징어와 조개가 단백질 공급원으로 활용되었고, 콩비지도 다양하게 요리되었습니다.
과달카날 패전 이후인 1943년에는 생쌀을 볶아 양을 늘리거나, 겨를 사용하는 레시피까지 등장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레시피에 설탕, 버터, 달걀과 같은 재료가 포함된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너무 비현실적이었거든요.

1944년, 공습이 심화되면서 죽과 집에서 키운 고구마, 호박이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길가의 잡초, 들풀, 곤충을 식용으로 권장하고, 심지어 차 찌꺼기를 채소로 먹으라는 권고까지 실리게 됩니다. 저자가 표현대로 '최후의 발악'이지요. 이런 쓰레기 레시피 중 하나가 '민들레 칼슘 무침'입니다. 

들풀 먹는 법 1 민들레 칼슘 무침

민들레 어린잎을 살짝 열탕한 후 물에 헹궈둡니다. 구운 생선 머리와 뼈, 달걀 껍데기 등을 갈아 으깨고, 다시마가 있으면 구운 후 갈아서 기호에 따라 맛을 내어 무쳐줍니다.

민들레의 쓴맛을 제거하려면 데친 후 얼마 동안 물에 담가 둡니다. 민들레의 쓴맛은 국화과 식물 특유의 영양소이므로 제거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전후에는 미국에서 제공된 밀가루 중심의 레시피가 많아졌고, 식량 사정이 안정되기 시작한 1949년 이후로는 점차 다양한 요리가 복원됩니다. 195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식탁은 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실상을 독특하면서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독서였는데,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요리를 현재 구현한 컬러 사진이 몇 장 실려 있지만, 더 많은 요리를 재현하거나 당시 잡지 자체의 도판을 함께 수록했다면 책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실생활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4/12/28

사카나와 일본 - 서영찬 : 별점 3점

사카나와 일본 - 6점
서영찬 지음/동아시아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해산물이 일본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다루며,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의미까지 조명하는 책. 총 57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6장 34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별로 해당되는 해산물, 어식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정어리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급 무사 사카이 반시로의 일기에서도 모두 42회 나올 정도로 서민들이 가장 자주 소비하던 음식이자, 당시 가난과 서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재료였습니다. '서민이 자주 먹는 밥반찬은 무엇인가'라는 테마의 '반즈케'에서도 생선 부문 1위는 이와시(정어리)였다고 하고요.
단순히 식탁 위의 먹거리일 뿐만 아니라, 어비(생선 비료)로 활용되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증가는 화폐 경제를 발달시켰고, 쌀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무라이 정권 체제 기반인 석고제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정어리의 활용은 단순한 생선을 넘어 일본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지요.

다시마는 일본 경제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해산물로, ‘다시마 길’이라 불리는 무역 루트를 통해 일본 상업 경제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홋카이도의 다시마가 교토와 오사카로 수송되던 이 루트는 일본 자본주의의 씨앗을 뿌린 경제적 기초였습니다. 한 차례 항해로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1억 엔 정도를 벌어들였다니 대단하네요. 사쓰마번은 불법적인 대중국 다시마 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무기류를 수입하며, 이 무기가 훗날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즉,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일본 역사를 바꾼 거대한 동력이었던 것이지요. 조금 과장된 느낌이지만 재미있는 발상이었어요.

쿠사야는 독특한 냄새와 풍미를 가진 일본 전통 발효 생선입니다. "어시장 삼대째"를 통해 단순한 건어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쿠사야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쿠사야는 해산물이 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례와는 달리, 당시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생존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대 이전 유배지로 알려진 이즈제도와 고토열도에서는 자원이 부족해 소금물을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쿠사야액이 만들어지고 쿠사야가 탄생하게 되었거든요. 이는 단순히 발효 음식을 넘어, 생존 전략으로서의 음식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덴푸라는 에도 시대에 스시, 소바와 함께 미식을 대표하던 외식 메뉴였습니다. 값이 싸고 맛이 좋아 에도의 삼미(三味)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요. 덴푸라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 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습니다. 건강을 중시하던 이에야스는 교토에서 유행하던 도미튀김을 처음 맛보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바람에 복통을 겪었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군요. 그 외 덴푸라가 =일본 음식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다수 소개됩니다.

명절 음식으로 서일본에서는 방어가, 동일본에서는 연어가 명절 요리로 소비되며, 이는 지역적, 계절적 특성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방어는 도야마만에서 잡혀 염장되어 집합지인 내륙의 히다, 그리고 주요 소비처로 운송되었으며 귀족과 무사 계급에게 주로 소비되었습니다. 도야마 - 히다 - 다카야마 - 마쓰모토 - 니가타를 이은 U자 모양 지역이 서일본 방어와 동일본 연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두 갈래 방어 길은 수백 년간 지탱되면서, 각자 고유한 문화가 나뉘는 경계선으로 자리매김하였고요.

가쓰오부시는 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에서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가쓰오부시의 본고장 야이즈는 어선이 징발되면서 마을 기간산업이 존폐 위기에 몰린 탓에, 남태평양의 마리아나제도, 팔라우 공화국,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를 포함하는 남양군도로 집단 이주해 가다랑어 잡이와 가쓰오부시 제조를 이어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난요부시'가 이때 탄생한 것이지요. 야이즈부시와 태평양전쟁 군납에 얽힌 일화도 있습니다. 1942년 해군은 항공대 식량으로 쓰려고 가쓰오부시 가루를 압축해 만든 사각형 조각에 대해 야이즈 업자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업자는 습기와 기온에 따라 부스러질 수 있으니 캐러멜처럼 말캉말캉하게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안대로 납품 계약이 체결되었고요. 군납 제품명은 '반키리 가쓰오부시'로 '적군 만 명을 벤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 난요부시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전황이 악화하면서 남양군도의 야이즈 주민은 수시로 징집돼 전장에 투입되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야이즈 주민 620명이 남양군도로 건너가 286명이 전사했고, 46%는 영영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패망은 자업자득이지만, 어민들은 좀 안됐군요.

그 외에도,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장어 먹는 날 '도요노우시노히'의 유래, '청어 소바'의 유래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도판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생선의 생김새, 특징과 소개된 요리들의 실제 모습과 조리법을 그림과 사진으로 설명해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겁니다. 방어길과 다시마길은 지도가 함께 있었더라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테고요.

또 해산물을 단순한 식재료로 다룬 내용도 많은데, 이 경우는 스시, 타코야키, 사시미나 라멘의 유래처럼 이미 잘 알려진 게 많아서 다소 지루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맥락을 짚어주는 부분도 애매한 게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동과 서를 나누는 방어길입니다. 히다에서 왜 동쪽으로는 방어를 옮기지 않았을까요? 나가노에서 니가타까지의 거리와 도쿄까지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단순히 동쪽에서는 연어를 먹는 걸로 정해져 있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주제 하나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면,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에 버금가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 보였는데 아쉬웠어요.

그래도 일본의 해산물과 엮인 문화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읽을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 해산물이 일본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10/20

히트의 탄생 - 유승재 : 별점 4점

히트의 탄생 - 8점
유승재 지음/위즈덤하우스

100년 가까이 된 우리나라 장수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알려주는 책. 미시사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제품과 브랜드의 역사 뿐 아니라 그걸 만든 사람들, 장수하게 된 이유, 광고 및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폭넓게 알려줍니다. 무려 25개의 항목이나 되어서 양도 풍성하고요.

덕분에 새롭게 알게된 정보들이 많은데, 몇 가지 소개해드립니다.

샘표 간장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수 브랜드로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는 '몽고 간장' 이름의 유래입니다. 몽골에서 전래된건 아니나,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더군요. 마산에 고려 충렬왕 시절,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겠다며 여몽 연합군을 주둔시켰던 곳에 군사들 식수공급을 위해 건설한 우물 '몽고정'이 있습니다. 이 몽고정을 수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몽고간장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한 겁니다.

'메리야스'는 일본말이 아니라 스페인어 '메디아스Medias' 혹은 포르투갈어 '메이아스Meias'가 일본을 통해 전해지면서 일본식 발음이 더해진 말로 원래는 상의나 내의가 아닌 '양말' 또는 '스타킹'에 가까운 뜻입니다. 오늘날 백양을 있게 만든 대표 상품은 흰색의 민소매 러닝셔츠인데 백양이 1958년 아염산소다를 활용한 표백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후 나온 상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입는 속옷의 사이즈 구분은 백양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1960~70년대 백양, 쌍방울과 함께 내의업계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던 '독립문'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김향복 선생이 창업한 회사로,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며 보던 독립문을 떠올리며 정한 브랜드입니다. 1947년 '대성섬유공업사'로 시작한 사업이 확장해가면서 1953년 '평안섬유공업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듬해 1954년 5월 독립문을 상표등록했습다. 김향복 선생이 평안도 출신이라 회사 이름에 평안이 들어갔는데, 1971년에 평안섬유공업의 영어 이름을 따서 피에이티PAT(Pyong An Textile)를 새롭게 출시, 내의에서 성인 캐주얼 브랜드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나다. 지금도 건재한 코뿔소 브랜드인 PAT인데, 독립 운동가가 만든 브랜드라니 앞으로 관심을 더 가져야 겠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박카스를 마시면 피로가 풀릴까?"에 대한 답도 알려줍니다. 박카스는 비타민B의 일종인 니코틴산아미드와 카페인 등을 함유하고 있어서 각성 효과와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생성해준다네요. 지속 효과는 극히 짧아서 그야말로 반짝 하고 느낄 뿐이라지만요.

마몽드는 광고 캠페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어서 흥미로왔습니다. 이영애의 "산소 같은 여자' 시리즈가 마몽드를 국내 최고의 브랜드로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하네요. 프랑스어로 '나의 세상'을 의미하는 브랜드 이름처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식이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춰 "나의 삶은 나의 것", "성취는 남자의 것만이 아니다" 등 여성의 심리적 욕구를 자극하는 카피도 강력한 위상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고요. 마몽드가 매출 1천억 원을 넘었던 해에 출시한 라네즈는 마몽드보다 더 빠르게 1천억 원 매출 벽을 넘어섰는데, 이 역시 유명한 "영화처럼 사는 여자' 캠페인이 주효했던 덕분입니다. 태평양은 1970년대부터 광고마케팅에 많은 비용을 투입했고 많은 히트 캠페인을 남겼지만, "산소 같은 여자"와 "영화처럼 사는 여자"는 태평양 뿐 아니라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 나아가 광고업계 전체를 통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법한 명작 캠페인이라고 합니다. 타깃 고객인 여성들의 심리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적절히 반영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콘셉트를 바탕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면서, 장기간 지속하며 브랜드 자산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도 아직 생생할 정도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몇몇 브랜드, 제품명의 유래도 재미있었습니다. '트리오'는 그릇 외에도 야채와 과일까지 세 가지를 모두 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군요. 처음부터 설거지 외에도 농산물을 씻어 먹을 수 있는 세제로 고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라운을 대표하는 '죠리퐁'은 뻥튀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다양한 곡물을 가지고 실험한 끝에 1972년 출시한 과자로, 처음에는 먹어서 즐겁다는 의미의 '조이 Joy'와 뻥튀기를 의미하는 '퐁'을 합성하여 '조이퐁'이라 했지만, 동일상표가 등록되어 있어 같은 의미를 지닌 '졸리Jolly'로 대체해 '죠리퐁'이 된 것이있고요.

모나미의 '사인펜'과 '매직'도 사인하는데 편리하다는 뜻의 사인펜, 신기하게 어떤 표면이라도 쓸 수 있다고 해서 매직펜으로 이름을 붙였던건데, 이제는 보통명사로 굳어져서 국어사전에까지 올라가 있다고 하네요.

이 외에도 여러가지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하고, 브랜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잘 알 수 있어서 유익했는데 딱 한 가지, 너무 많은 제품들이 소개되는 탓에 다른 책이나 자료에서 접했던 제품들 - 호빵, 활명수, 박가분, 삼양라면 등 - 이 많고, 최근까지 위상이 살아있는 제품들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비슷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브랜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10/04

당일치기 조선여행 - 트래블레이블 : 별점 3점

당일치기 조선여행 - 6점
트래블레이블 지음, 이도남 감수/노트앤노트
딸과 함께 종로 투어를 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읽어본 책.
실제 가이드가 투어를 하듯이, 코스를 짜고 그 코스 안의 여러가지 사적지들에 대해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코스는 모두 14개인데 크게는 조선 코스 6개, 일제 강점기 코스 8개로 구분됩니다.

경복궁 코스는 광화문 - 홍례문 - 영제교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순입니다. 실제 궁궐에 들어가는 순서이지요. 광화문의 '광화'는 빛으로 세상을 교화시키다는 의미로 세종이 지은 이름입니다. 즉, 왕이 백성들에게 한 약속이지요. 홍례문은 '예를 널리 편다'는 의미로 대궐 문을 들어선 관료들에게 일러주는 말이고요. 홍례문을 지나 삼도를 거쳐 영제교를 건넙니다. 다리의 이름은 원래는 '금천교'였습니다. 왕이 있는 곳이라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의미로요. 하지만 세종은 영원히 건널 수 있다는 뜻의 '영제교'로 바꿨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왕의 공간입니다. 근정문과 근정전은 공식적인 행사를 치루는 곳입니다. 회사로 따지면 행사장, 회관같은 곳이겠지요?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요. 사정전은 실제 업무를 보던 곳으로 한 마디로 사무실입니다. 이름도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뒤의 강녕전, 교태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과 사적 공간입니다.
창덕궁 코스는 돈화문 - 금천교 - 인정문 - 인정전 - 선정전입니다.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이 만든 궁이라 강한 왕권이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금천교가 그대로 있는게 특이합니다. 말 그대로 왕과 신하를 구분한 것이지요.
창경궁 코스는 홍화문 - 옥천교 - 명정문, 명정전 - 문정전 - 경춘전 - 환경전이며, 뒤에 춘당지 - 대온실 로 이어집니다. 홍화문은 '천지를 밝히고 적의 조화를 넓혀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과거 홍화문 앞은 넓은 마당으로 백성과 왕실이 서로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했고요. 다른 궁궐들처럼 궐내 다리인 옥천교를 건너면 왕의 공간으로, 명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입니다. 공식적인 의례와 행사를 진행한 곳이지요. 창경궁은 왕의 주거 공간 목적으로 지은 궐이라 다른 궐보다 규모가 작다는게 특징입니다. 다른 궐은 모두 삼문 원칙으로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지만, 정전까지의 문도 2개만 지나게 됩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경춘전은 정조가 태어난 곳, 환경전은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이한 곳입니다. 주거 공간 목적답게 이런 역사가 많네요. 춘당지와 대온실은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며 위락시설로 전락시킨 산 증거입니다. 궁궐을 일반 대중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지요.
경희궁 코스는 홍화문 - 서울고등학교 터 비석 - 방공호 - 서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희궁 자체가 고종 때 경복궁 증건을 위해 헐려 빈 터만 남은 탓에 내용이 적습니다. 이 중 '서암'이라는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왔습니다. 숙종이 강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조선 시대 왕 중 딱 7명만 가진 '적장자' 타이틀 덕분이었는데 이건 인조 반정이 성공해서 얻은 타이틀입니다. 인조가 정당한 왕이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원래부터 집에 왕기가 서려있었다!며 평범한 바위에 '왕의 기운이 어렸다'고 숙종이 직접 '서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타이틀이라는게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왕들에게는 정말로 어마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코스는 서암말고는 딱히 볼 건 없어보였습니다.
종묘 코스는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 종묘의 부속된 건물들을 차례대로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부속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보다는 종묘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 위주이고요.

덕수궁 코스는 황궁우 - 대한문 - 중화문 - 중화전 - 석조전 - 중명전, 돈덕전 - 함녕전 순입니다. 이 코스는 '대한제국'과 '황제'라는 지위를 알리는 건물들 중심이에요. 덕수궁은 대한제국 때 고종이 법궁으로 선택하여 큰 발전을 이룬 궐이니까요. 우선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가 된 걸 알리는 건물이고, '대한문'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며 한양이 넓고 크게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중화전도 '황제'의 국가를 증명하기 위해 황금색과 황제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석조전은 황제가 된 고종이 새로운 근대 궁전을 만들려고 돌로 지은 건물이고요. 이 뒤의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나타냅니다. 석조전 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일제가 궁의 격을 낮춰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미술관으로 만들었던 건물이며, 그 옆의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돈덕전은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곳이거든요.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급작스럽게 승하한 곳입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짧았던 운명을 잘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정동은 궁궐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속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 미국공사관 - 구 프랑스공사관 - 구 러시아공사관 - 구 영국공사관 - 광혜원 - 배재학당 - 이화학당 - 언더우드 사택 -  정동제일교회 - 손탁 호텔을 둘러보게 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 없네요. 그나마 주한 영국대사관이 1890년대 영국이 만들었던 구 영국 공사관 건물 그대로라는데, 한 번 가 봐야겠습니다.
서울역, 서대문 형무소는 건물만의 코스입니다. 서울역은 많이 가 보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장소는 기억에 없군요. 다음 기회에 한 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성북동은 혜화문 - 한양 도성 해화동 전시 안내 센터 - 최순우 고택 - 간송미술관 - 수연산방 - 심우장 순서입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간성미술관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다소 어려운 코스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3대 전통 정원이자 의친왕 이강이 죽기 전까지 머물던 것으로 유명한 성복동 별서는 한 번 가 보고 싶지만요.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 코스들과 정보들이 가득한데, 몇몇 코스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고궁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같이 특정 장소만을 중심으로 안내하는 코스가 특히 그러합니다. 종묘와 서울역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여러 명의 가이드가 글을 쓴 것 같은데, 사람에 따라 내용이 들쭉날쭉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코스는 구태여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애매해 보였기 때문에 코스들도 선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여행 코스라면 둘러보는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정보는 꼭 들어갔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 궁궐에 대한 책은 몇 권 읽어 보았는데, 그 책과는 다르게 돌아볼 수 있는 코스 중심으로 설명하여 실제로 관람 시 도움이 됨직한 책이라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궁궐의 구성도 코스 중심이라 더 잘 알 수 있었고요.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번 둘러보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관심이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궁궐 관련 책을 읽는 순서로 읽어 나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7/06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세기의 재판 이야기 - 장보람 : 별점 2.5점


딸아이 논술용 교재인 청소년용 법 관련 미시사 서적. 제목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12개의 재판에 대해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재판 및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크라테스의 재판 : 다수결이 과연 옳은 것인지?
  2. 토머스 모어의 재판 : 현행 법과 어긋나더라도, 옳은 양심을 처벌할 수 있는가?
  3. 세일럼 마녀 재판 : 제대로 된 근거 없이 타인을 비방하는 것에 대한 문제
  4. 드레퓌스 재판 : 억울한 상황에서는 여론의 힘도 중요하다
  5. 2차 대전 전범 재판 : 전쟁에서 일어났던 범죄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벌해야 하는가?
  6. 로자 파크스 재판 : 인종 차별 악법 없애기
  7. 미란다 재판 : 법에서는 결과 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
  8. 제인 로 재판 :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9. 워터게이트 재판 : 대통령도 탄핵될 수 있다
  10. 카렌 앤 퀸란 재판 :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11.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 : 부도덕한 기업과 싸우는 방법
  12. 벌링턴 산업 재판 : 성희롱은 기업도 책임져야 한다.
주요 쟁점들 모두 한 번 생각해볼만한 것들이며, 과거 사례를 현대에 빗대어 현대 재판 설명도 곁들여 주고 있는게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형사 소송과 민사 소송의 차이라던가 3심 재판의 기능 및 조건, 중재 등 여러가지 현대 법률 용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미란다 재판 이야기에서처럼 국내 판례를 예시로 들어주는건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음주운전이 의심되는 피의자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강제 연행하여 음주 측정을 한 결과는 위법한 수사이므로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를 통해 '공권력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걸 알려주는데, 범죄임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이런 한계를 두는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도 생기네요.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을 통해 중재 절차에 대해 알게된 것도 수확입니다. 법원의 판결 없이 당사자들끼리 합의하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걸 그동안은 잘 몰랐었거든요. 이런 방식은 크게 조정과 중재가 있는데 조정은 당사자 한쪽 또는 양쪽이 요청해 제3자를 조정자로 선임하여 해결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 중재는 반드시 '쌍방이 요청'한 후 중재인이 판정하면 양 당사자 동의 없이 바로 받아들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도 민사 조정 신청 절차가 별도로 있고, 소송 비용도 1/10이라고 하니 필요하다면 적극 고려해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재판보다는 재판 관련 상황에 더 촛점이 맞추어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게 드레퓌스 재판입니다. 이는 누명을 쓰게된 상황, 판결을 받은 뒤 벌어진 일련의 과정 등이 재판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재판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워요. '인종 차별', '낙태권', '존엄사' 등도 해당 이슈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재판'이라는 수단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또한 절반 이상의 내용이 현대가 무대라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역사'를 바꾼 재판이라면 과거 이야기부터 소급해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현대 재판을 가지고 설명하더라도, 미국 사건만 가지고 온 것도 불만스럽고요. 재판들도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주었어야 했습니다. '벌링턴 산업 재판'이 여기 사건들과 어깨를 나란히할만한 사건인지는 솔직히 갸우뚱합니다.
소크라테스 재판 이야기에서 '다수결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답이 없이 다른 법적 이론 - 시민 불복종, 저항권 - 을 설명하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저런 이슈를 한번 쯤 고민해봐야 하는 청소년이라면 모를까, 제 기대에는 별로 값하지 못했습니다.

2024/06/30

재난의 세계사 - 루시 존스 / 권예리 : 별점 2.5점

재난의 세계사 - 6점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눌와

폼페이 베수비오산 분화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일본 도호쿠 지진까지 총 11개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 소개하며 설명해 주는 책. 

몰랐던걸 새롭게 알게되는 재미가 컸습니다. 몇 가지 설명드리자면,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네요.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되며,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훌륭한 천연 요새가 되어 주고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베수비오산 일대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습니다. 유명한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산 분화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구조차 향했던 도시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래도 질식사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두 번째 분화로 사망한 폼페이 희생자들은 화산설쇄류로 타죽었거든요. 섭씨 2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무려 시속 480Km로 이동하여 사람을 덮쳐 닿자마자 사망했습니다. 정말 끔찍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최소 8.5에서 9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철학과 과학에 뚜렷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가는 성스러운 날, 교회가 가득찬 아침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 보였으니까요. 교회에 간 독실한 신자들은 목숨을 잃고, 근처 홍등가 창녀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여 기독교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돌로 지었고 홍등가의 집들은 나무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무는 돌보다도 유연하고 흔들림을 잘 견뎌 사망자가 적었던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네덜란드 정부가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 사상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숭배한 포르투갈을 신이 벌하였다면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783~18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산 분화는 인류역사상 임명피해가 가장 컸던 자연재해로 총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이었고 전 세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 탓입니다. 극심한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몬순이 사라져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화산은 자연재해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층권의 기체 조성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권 하층부는 극지방에서 밀도가 낮아서 아이슬란드 화산은 성층권으로 물질을 보내기도 쉬운 탓에 피해가 더 컸지요. 다행히 화산 폭발의 영향은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온실가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은 당시 폐쇄적이었던 중국 환경 탓에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저뚱 사후 4인방이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고전에서 지진은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 외에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음기가 강해져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하들이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경우, 또다른 하나는 여자가 정치에 나서는 경우로요. 4인방, 그리고 중심인물이 마오의 아내 장칭이라는게 이 경우에 해당되어, 인민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데 꽤 그럴싸 했어요.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의 죄수의 딜레마도 기억에 남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제방에 막대한 압력을 가할 때, 위험에서 마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맞은편 제방을 부수는 겁니다. 건너편 이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딜레마'라는 말이 걸맞는 상황입니다. 놀라운건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건너편 제방을 부쉈다 - 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 발생 시 일어났던 참극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소개된건 참 고마왔어요. 이 책에서는 학살 이유를 전통적인 세계관을 대체할만한 과학 이론이 부족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작위성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주장은 말은 되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인종 차별과 범죄는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방을 보강하게 시켰다가, 제방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서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도록 만든 범죄처럼요. 제방이 무너진 뒤 재방 붕괴지점 근처에 구조를 위해 동원된 배에도 백인과 흑인 모두 동등하게 타지 못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불과 4년 뒤라 세계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미국의 당시 사회 특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수십년의 차이는 있었을터라, 단지 세계관에 따른 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참극과 학살은 인종 차별과 인종 혐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걸 분명히 해 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이외의 토막 상식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미시시피강 홍수 때 구호활동을 지휘했던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건, 당시 흑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배신하여 흑인 표를 잃고 루스벨트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지원금이었던 10억 달러의 연방정부 자금 중 7억 달러가 불분명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도 새로왔습니다. 그냥 없다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잭 리처'가 나서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지진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많은데, 지금도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규모 5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측했지만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성공한 예측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도 새로왔어요.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규모 5의 두 배이기 때문이라지요. 어차피 지진 관련해서는 확률에 대한 논의를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세계사'라는 제목에 걸맞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볼 부분이 많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주로 과학과 재해 전, 후의 대책에 대한 주장이 보다 많은 편입니다. 마지막 장은 아예 지진에 대비해야 하는 내용이고요. 앞서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 좋았을겁니다.
설명도 쉽고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도판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5/26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하마모토 다카시 외 / 노경아 : 별점 1.5점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4점
하마모토 다카시 외 지음, 노경아 옮김/레드리버

제목 그대로 결투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는 미시사 서적. 유럽 중심으로 결투사를 개관하고,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발전되었고, 왜 사라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 저자는 근대와 현대의 결투는 '명예 회복을 위한 도전이자 심판'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전쟁에서의 일기토, 검투사들의 싸움은 결투로 볼 수 없다고 하고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결투가 이렇게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게 중세, 근대까지 왕과 귀족의 법을 따르는 '결투 재판'이 주류를 이루게 된 원인이라는 설명은 와 닿았습니다.
결투 재판은 판결의 신뢰성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반면, 기사도가 확산되는 바람에 명예 결투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과정 설명도 그럴싸 했습니다. 기사들은 사회적인 명예가 존재 기반의 하나였으니, 명예 훼손은 그들의 존재를 뒤흔드는 큰 위협이었겠지요. 그래서 당연히 명예 결투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건, 명예 결투의 시작이 이탈리아라는 설입니다. 보통 이런 '귀족'의 '결투'는 프랑스를 떠올리기 쉬운데, 왕의 권위가 막강한 프랑스에서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하네요. 왕이 재판을 하는게 당연하고, 또 그래야 권위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충분히 납득할 만 했어요. 심지어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 추기경이 결투를 없애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일화는 놀라왔습니다. "삼총사"에서 달타냥이 하루에 세 번의 결투 약속을 잡을 정도로 결투가 일반화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배 계급은 정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리슐리외는 눈의 가시였던 총사대 핵심 멤버들을 모두 사형대로 보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왜 그러지 않았는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결국 기사도와 관련이 깊은 결투를 아예 막는건 불가능했기에, 결국 유럽 대륙 전체에 결투 문화가 전파되었습니다. 심지어 북유럽을 넘어 그린란드까지요. 그런데 그린란드 이누이트족은 결투를 사람들 앞에서 노래 대결로 승부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모욕당한 자는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비웃는 노래를 불렀고, 혹시라도 가사를 잊어버리면 친구들이 그 대목을 대신 불러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결투 신청을 받은 자가 위트 넘치는 통렬한 가사로 반격했고요. 한 마디로 래퍼들의 디스 프리스타일 랩 배틀인 셈입니다! 

뒤이어 결투가 사라지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사라진 이유는 당연히 왕들이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왕정 군주들은 앞서 설명드린대로 결투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으며, 이후 계몽 군주들은 생명을 중시했기 때문에 결투를 금지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신사도'가 유행하고 신사들이 품위를 중시하면서 결투를 야만적으로 여긴 탓도 있지만, 왕권이 약화된 대신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며 근대적인 재판 시스템이 갖추어진 덕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의 득세로 장교들이 과거의 귀족처럼 특권을 인정받고, 명예를 중시하는 계급이 되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결투가 만연하였다고 하네요. 확실히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사회가 무식해지는게 사실인것 같습니다.
이런 결투의 전통은 현대에도 약간의 스포츠 형태로 바뀐 '멘주어' 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결론으로 결투의 역사 서술은 마무리됩니다.

이런 결투의 역사적인 큰 흐름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목차가 통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의 결투 설명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일화 중심으로 소개되는 등 글의 형식도 통일되지 못했고요. 여러 저자의 글을 모은 탓으로 여겨지는데, 누군가 통일성있게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 감수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감수할만한데, 더 큰 문제는 결투와 스포츠를 엮는 후반부입니다. 스포츠는 재미, 오락일 뿐입니다. 오락으로서의 스포츠는 고대에서부터 존재했고요. 그런데 두 개가 어떻게 엮인단 말일까요? "헝거 게임"처럼 나라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시합을 벌인다면야 모를까, 현대의 스포츠를 결투라고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언급한다면 칼싸움에서 발전한 펜싱 정도? 하지만 펜싱도 전쟁과 투쟁의 역사를 통해 탄생한 무술일 뿐입니다. 결투라고 보는건 무리에요. 
게다가 앞서 저자는 '심판'의 의미가 없다면 결투가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스포츠는 절대로 결투가 될 수 없어요. '결투와 스포츠는 미적 요소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는 특성을 공유하는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라면서 넘어가는데, 미적,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소가 중요한 모든게 다 표리일체의 관계가 되는걸까요? 어림도 없지요. 심지어 스포츠가 사람들의 투쟁심과 승부욕을 흡수해서 결투가 사라졌다!는 주장은 앞서의 본인들의 설명, 즉 근대화와 사회 분위기, 제도의 변화로 결투가 사라졌다는 설명에도 맞지 않습니다. 나치의 올림픽을 이용한 국민 통합(?)과 고양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고요. 이는 결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책 부제가 '스파르타쿠스는 어쩌다 손흥민이 되었나'인데, 저자들 스스로 검투사들의 싸움은 결투가 아니라고 했고, 축구가 결투일리는 없으니 이 부제는 애초에 이 책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에요. 이 정도면 사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후반부는 완전히 분량 낭비였습니다. 별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5/11

우리 미술 이야기 2 : 영원한 현재 - 고려 - 최경원 : 별점 2.5점


우리 문화 유산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그리고 알아두면 좋을 이런저런 내용을 소개해 주는 책. 저자의 "한류 미학 1"을 재미있게 읽어서 뒤이어 읽게 된 후속 권입니다. 절판 후 재출간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네요.

2권은 고려 청자 중심으로 고려 문화 예술만 소개하고 있는데, '고려의 청자를 비롯한 문화 예술품은 '대량 생산'되었기에 '디자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장인이 모든 것을 다하는게 '공예', 산업 혁명 이후 기계적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품 형태를 고안하는 일이 '디자인'인데, 국가 주도로 대량 생산된 청자는 '디자인'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표준화' 경향으로 증명된다며 대체로 유사한 청자의 형태 등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꽤 그럴듯 했습니다. 디자인에 의한 대량 생산품의 우수함은 문화의 우수함을 증명한다는 주장도 아주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고요.

다양한 청자를 가지고 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설명해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도입부의 '청자의 색' 설명부터 눈길을 끕니다. 고려 청자의 다소 칙칙한 색이 찬양되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데, 고려청자는 '옥'의 색을 겨냥해 만들어진, '비취' 색이었기 때문입니. 옥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석 중의 보석으로,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옥의 색과 질감을 유사하게 재현했었지만 고려 청자가 진짜 비취색을 구현해서 당대의 명물이 되었다고 하네요.

명품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게 해 주는 여러가지 발견과 정보도 볼 만 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스케치를 통해 그림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도판도 매력적이고요. 아래와같이 돋을새김 상감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사진으로는 그 형태를 온전히 보기 어려운데, 스케치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3차원적 형태에 잘 어울리도록 그려지고, 이어진 형태로 감상해야 하는 그림이 많아서 전체를 돌려가며 보아야 된다는 착안도 좋았습니다. 이런건 박물관에서도 전시 시에 활용해주면 참 좋을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천천히 돌려서 전시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자만의 주장도 눈길을 끄는게 많은데, 그 중 두 가지가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는 황금 비례는 수학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시대의 정신적 습관으로 만들어진 결과로 특정한 하나의 양식이자 독특한 미적 가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황금 비례가 많이 사용되는건 사람의 눈의 구조가 똑같고, 보편적인 감정이 있어서 대체로 2:3이나 3:4 정도의 비례를 좋다고 느끼기에 그런 조형 결과물들이 많은 것 뿐이라서 특별히 대단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청자를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은 문화가 낙후된게 아니라는 일련의 주장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을 문화 퇴행기로 보는 건 일제 강점기 시기 총독부 소속의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문신들은 삼강오륜을 앞세운 근엄한 도덕적 생활을 해서 정서가 발달하지 못했고, 경제력도 보잘것 없어서 미술이나 미적 감각을 발전시킬 힘과 여유가 없었다는 김원룡의 시각도 마찬가지로 악의적 편견인 것이지요. 저자는 조선의 경향은 조형 예술 역사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추상'이라는 개념의 경향일 뿐이라며, 이를 맨 마지막에 소개된 '은진미륵'을 통해 설명해줍니다. 은진미륵은 세계에 관한 관심이 달라진 데에 따라 만들어진 새로운 미적 감각의 표현으로, 인자한 보살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단순화시킨 조형으로 특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걸 여러가지 분석으로 알려주거든요. 이러한 경향이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테고요. 또한 청자가 만들어지지 않은건 옥의 모조품이라는 목표가 더 이상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장은 재미는 있는데 완벽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황금비례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이론화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은진미륵에서도 추상성에 따른 아름다움은 솔직히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예가 좀 잘못된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외에도 많은 아름다운 유물을 보는건 좋았지만 청자가 대부분이고, 내용도 비슷한게 많아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청자의 형태가 유기적으로 이는 최신 디자인 경향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반복되는 탓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문헌, 사료적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문헌을 분석하는 것 보다 유물 자체를 관찰하고 추론하는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추론을 문헌을 통해 뒷받침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 주는게 보기가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 중심으로 분량을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4/04/12

한류 미학 1 : 메이드 인 코리아의 기원 - 최경원 : 별점 3점


우리나라의 문화는 소박하지만은 않다는걸 여러가지 문화재, 유물을 통해 알려주는 책.
설명을 위해 유물들을 '디자인'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유물을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가 사용하는 '제품' 관점에서 분석하여, 해당 유물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던 '제품'인지를 알려준다는건데 꽤 그럴싸한 접근법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현재의 갤럭시나 아이폰을 먼 미래 박물관 같은데서 본다고 상상한다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어요. 두 제품은 생긴 것만으로는 차이를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차이를 느끼려면 아이폰이 가져온 혁신을 함께 알려주어야 하는데 이와 유사한 방식이 아닐까 싶거든요. 확실히 디자인 전문가다운 발상이었습니다.

또 디자이너답게 '형태'에 집중하고 있는 유물도 있는데 이 중에서는 삼한 시대의 오리모양 토기의 형태에 주목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문화권 토기들과 다르게 사실성, 장식을 배제하고 극도로 단순화한 수준높은 추상조형은 이를 소비하는 지배층의 인식 또한 뒷받침 되어야 하므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배경의 뒷받침되었을 거라는 저자의 의견은 설득력이 높아 보였습니다. 굉장히 모던하고 미니멀리즘적인 삼한 시대 토기 역시 마찬가지고요.
고구려의 다양한 화살촉은 실제 쓰임새(양력 등을 활용하여 보다 멀리 쏠 수 있도록) 때문에 발전된 형태라는 글도 흥미로왔습니다. 오히려 더 진지하게 파고들어 연구할 여지가 많은데 중간에 끝난 것 같아 아쉬웠어요. 왜 후대에 계승되어 더 발전되지 못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반 화살촉보다 분명한 장점 - 사거리 - 이 있어 보이는데, 그걸 상쇄할만큼 단점이 컸던 걸까요? 그렇다면 어떤 단점이 있었을까요? 아, 궁금합니다.

사진이 아니라 직접 그린 스케치로 이루어진 도판도 아주 좋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형적인 완성도를 알려주는 대부분의 글들 도판들이 특히 빼어난데, 아래의 용봉문 투조 금동장식 속 봉황 등의 조형이라던가, 통일신라 말 발걸이에 그려진 말 캐릭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스케치가 아니라면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을터라 무척 고마운 도판이었어요.
몇몇 유물의 경우는 디자인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현대의 제품들과의 비교도 시도하는데 이 역시 괜찮았어요. 답을 정해 놓고 끼워맞춘 감이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습니다. 한국형 비파형 청동검은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걸작품으로 고조선이 상당한 수준의 문명 국가였다는걸 증명해 준다는 등이 그러합니다. 신라의 누금세공 귀걸이도 저 큰걸 귀에 어떻게 걸지? 싶었었는데, 명주실을 꿰어 귀나 모자에 걸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찾아보니 기사도 있네요).

하지만 다소 억지섞인 주장도 없지는 않습니다. 쌍용총 속 벽화의 무인의 패션이 샤넬, 아르마니의 컨셉과 일치하는 시대를 앞서간 패션이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무채색이라는 것 정도로는 논거가 부족합니다. 아래의 백제 허리띠처럼 실제로 꽤 감각적이고 멋드러진 형태라는걸 구체적으로 알려줬어야 했어요.
누구나 최고의 명품이라고 인정하는 금동대향로가 소개되는건 노력의 낭비가 아니었을까 싶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의견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증빙되지 못한다는 문제도 커 보였습니다.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적인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거든요.

그래도 디자이너가 유뮬을 제품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책의 컨셉은 확실히 빼어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