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한가운데서 - 나다니엘 필브릭 지음, 한영탁 옮김/중심 |
1920년 실제로 일어났던 미국의 포경선 에식스호의 조난을 둘러싼 이야기로 아주 오래전, <딴지일보>였었나.. 에서 소갯글을 읽은 뒤 관심을 가지게 된 책. 그러나 폭풍 절판된 이후 얼마전까지는 도저히 구할길이 없었습니다. 원하는 헌책을 구입하는 노하우는 제법 갖췄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헌책방은 물론 근처 도서관 어디에서도 구할 방법이 없었더랬죠. 그런데 얼마전 알라딘에 중고도서 매물이 심지어 "알라딘 직배송"으로 저렴하게 떴길래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이 책을 찾아 해멘 시간이 거의 10여년이라 손에 들어오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더군요.
사실 이전의 책 소갯글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표류한 에식스호의 선원들이 결국 식인까지 저지르며 살아남는 과정에 대한 처절함, 그리고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최초 표류 시 보트의 방향을 "식인종"이 살고 있으리라 여겨진 소시에테 제도가 아니라 남아메리카 쪽으로 잡은 탓이 크다는 아이러니함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으로 어떻게 보면 자극적인 소재에 끌린 탓이 크죠.
그러나 책 자체는 생각과는 약간 달랐습니다. 총 300여페이지의 분량 중 거의 절반은 에식스 호 선원들의 처절한 표류와 생존기이지만 그 외의 약 절반은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디테일에 할애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19세기 초의 낸터컷이라는 포경의 도시와 포경이라는 조업에 대해 다큐멘터리와 같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당시 포경을 위한 원양 어업의 과정,어장, 실제 포경의 방법, 잡은 고래의 처리 등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디테일이 한가득이에요. 지도와 사진같은 도판도 기대 이상이고요.
그리고 에식스호가 향유고래의 공격으로 침몰하게 되고 이후 처절한 표류가 허먼 멜빌의 굴지의 걸작 <<백경>>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허먼 멜빌은 <<백경>> 출간 1년 뒤에 실제로 낸터컷을 방문하여 에식스호의 선장이었던 폴라드와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니 이 사건과 사건을 다룬 회고록이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물론 당연하게도 표류, 생존에 대한 디테일도 최고입니다. 생존자들이 다음에 먹힐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투표를 했다던가, 뼈만 남은 잔해를 뒤지고 빠개어 골수까지 빨아먹었다는 등의 처절한 행위 뿐 아니라 가장 먼저 죽은 4명의 선원이 흑인이었다는 것, 결국 살아남은 최후의 5인은 이른바 "낸터컷 출신자" 뿐이었다는 불편한 사실도 가득합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갈증이 인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설명 및 굶주림으로 체지방이 극한으로 떨어진 살코기를 섭취하면 그다지 효율이 좋지 않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순 살코기보다는 적당히 기름이 낀, 마블링 좋은 고기가 더 맛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것... 일까요?
그 외에도 실제 바다에서 있었던 각종 사고들의 사례를 들어 함께 설명해 주는 것도 아주 좋았던 부분이에요. 유사한 조난자들이 시체를 다른 방법으로 활용 (낚시의 미끼로 사용함)하여 전원 생존한 사례를 함께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죠. 덧붙이자면 바다사나이들이 왜 바다에서 식재료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는 참으로 의아한 부분이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들이 조난하게 된 바다가 극단적으로 물고기들이 없는 해역이었다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재수가 없었던거죠.
마지막으로 사건에 대한 에필로그도 충실합니다. 폴라드 선장이 조난 후에 다시 포경선의 선장이 되고 같이 조난당했던 2명의 선원이 함께 배를 타는 최대급의 신뢰를 얻지만 또 난파당하여 바다사나이로서의 생명이 끝난 뒤 낸터컷에서는 하위계급인 자경단원을 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게 되었다던가, 1등 항해사로 조난 중에 나름의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선보인 체이스는 이후 당당히 선장으로 활약하게 되지만 정신병원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는 등 모든 생존자들의 후일담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심지어 "낸터컷"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까지 서술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사고를 겪고도 결국은 다시 바다로 나가다니...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삶인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튼 결론내리자면 명성에 걸맞는 가치와 재미를 가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간 이 책에 대한 갈망을 감추지 못하고 유사한 책을 몇권 구해 읽어보았었으나 모두 완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거나 중반에 종교적인 내용같은 삼천포로 빠지는 책들이었는데 확실히 원조는 다르네요. 10여년을 기다려 입수했을 때의 기쁨까지 감안하여 별점은 5점! "2000년 최우수 논픽션" 등 여러 논픽션 관련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허언이 아니었어요.
이런 좋은 책이 나오자마자 절판된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쉽기만 합니다. 해양 조난, 식인, 포경 (그리고 <백경>)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어떻게든 구하셔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무한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저라면 어땠을까요? 저 역시 폴라드 선장처럼 조카를 잡아먹어서라도 살아 남았을 겁니다. 꼭 살아남아서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니까요. 책 내용에서 밝혀지지는 않지만 저는 이러한 원초적인 생존본능은 돌아갈 곳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