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유리코 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중 마지막으로 남는 유리코는 ‘유리코 님’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모든걸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쓰자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고, 그 뒤 다른 유리코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나' 야사카 유리코는 자신도 이 전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친구 미즈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일본 작가 기도 소타의 데뷰작인 학원 미스터리입니다.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괴담, 본격 추리, 인물 간 심리전이 어우러지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유리코 님 전설’이라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학교 괴담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주요 매개체로 결국 학교에 유리코는 딱 한 명만 남게 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작품 속 사건들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설에 따른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돋보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 추락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가 떨어진 옥상은 밀실이었습니다. 최소한 범인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미즈키는 불탄 교복과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항상 열려있다는걸 근거로 범인이 교복을 이어 로프를 만든 뒤 아래층 '흰 백합 모임' 방을 통해 탈출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탈출 후 방법을 숨기기 위해 교복을 불태웠던 겁니다.
이외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담긴 위화감을 단서로 삼아, 실제로는 그 일기가 1970년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초대 유리코 님이 사실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부분은 서술 트릭물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일기 속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독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배치해 둔 덕분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도 논리적입니다.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어야 하고, 해당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리코 님으로 변장할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작아야 했다는 조건들을 하나씩 밝혀내며 결국 ‘유리 선배’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교복을 불태운 뒤 어떻게 옷을 챙겨입고 도주했는지도 이 추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여자 교복 밑에 원래의 남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성정체성이 여성인 유리가 '유리코'들을 모두 죽이고 유리코 님이 되려고 했다는 동기도 유리코 님 전설 및 일기를 통한 서술 트릭과 잘 맞물려 있고요. 이를 학원제 연극 후 일종의 추리쇼처럼 밝히는 과정도 볼만 했으며, 다카미자와 선생이 과거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남긴 인물이며, 유리코 님 전설에 오랫동안 개입해 왔다는 반전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핵심 트릭인 교복을 로프로 만들어 탈출했다는건 그리 좋은 트릭은 아닙니다. 유치할 뿐더러, 아래에서 로프 교복을 불태웠다고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상입니다. 옷이 옥상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는건 현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마쓰자와 유리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추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도 큽니다. 범인이 범행에 성공한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이 점점 확대되는데 학교나 경찰 차원의 진지한 대응이 없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최소한 '유리코' 들에 대한 보호는 진행했어야 해요.
다카미자와의 정체에 대한 반전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흑막으로 사건을 조종했다는 추리는 다소 억지스러웠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합니다. 에필로그에 비교하면요.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미즈키가 친구 야사카를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진짜 학교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진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만 보이고,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명탐정 미즈키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탓입니다. 학교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미즈키는 유리가 유리코들을 살해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쩔 생각이었던걸까요? 직접 다른 유리코들을 죽였을까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에필로그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망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미즈키의 계획이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선배에게 간파당해 미즈키가 살해당한다는 결말도 엉망입니다. 차라리 미츠다 신조 스타일로 야사코 유리코가 인지를 벗어난 '유리코 님'으로 거듭나며 괴담이 진짜가 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발한 설정, 본격 추리 요소는 매력적이었는데 에필로그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에필로그만 없었어도 별점 2.5점은 줄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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