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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2024/10/19

채택되지 않은 아이디어 - 사토 오오키 / 이현욱 : 별점 3점

채택되지 않은 아이디어 - 6점
사토 오오키 지음, 이현욱 옮김/미디어샘

일본 디자인 오피스 '넨도'의 대표 사토 오오키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을 통해 그만의 디자인 방법론과 접근법을 알려주는 책.

제목처럼 채택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은 제 1장의 3가지 프로젝트 - 자동판매기용 쓰레기통, 롯데 껌 아쿠오, 클린룸 재배 양상추 판매용기 디자인 - 인데, 이는 별로 였습니다. 채택되지 않은게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는 디자인들이 많았고, 접근법도 다소 평이했기 때문입니다. 채택되지 않을 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다카라벨몬트'의 의뢰로 진행한 미용업계의 비즈니스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작업은 굉장했습니다. 제품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야말로 '비즈니스'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모습도 놀라왔지만, 접근법도 타당했고 결과물도 설득력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기존 비즈니스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사업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 대부분의 기업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상황에서, 사토 오오키는 자신의 역할은 '문제해결까지의 과정과 디자인을 통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당연히 그 과정과 해결책은 하나가 아닙니다.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으로 보고 하나하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경쟁업체와 정면으로 승부할 것인가, 아니면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것인가? 등 방향은 아주 다양하니까요. 그래서 기업이 어떤 경영전략을 취하는지에 따라 제안하는 아이디어나 디자인은 완전히 달라지는데, 사토 오오키는 이 때 극단적으로 방향성이 다른 방법을 다각적으로 제안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제안을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경영 전략이 공격적이라면 과감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반대로 방어적이라면 철저하게 안전한 옵션을 제시하는 식으로요.

다카라벨몬트에 닥친 현재의 문제는 저가격화, 고객방문 사이클이 장기화된 시장변화가 첫 번째, 노동환경 악화로 이직률이 증가하고 젊은 직원의 기술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낮아지는 인재 부족이 두 번째, 트렌드가 희박해지고 개인별 개성이 다양해져서 새로운 컨셉 서비스가 부족해지는 문제가 세 번째 였습니다.

사토 오오키가 제시한 첫 번째 컨셉은 '개인별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과 가변성'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고객이 팔걸이, 등받이 등을 고를 수 있는 의자와 색다른 공간, 화장품과 같은 제품과 서비스를 함께 제안했고요.

두 번째 컨셉은 '커뮤니케이션 활성화'입니다. 이를 위해 나란히 연결할 수 있는 의자, 개인별 공간을 제공하는 거울 등이 디자인되었습니다.

세 번째 컨셉은 비즈니스 모델 제안으로 '시간의 리디자인과 네트워크화'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고객이 바빠서 미용실에 갈 시간이 없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특정 서비스에 대한 전문 기술만 제공하는 매장을 운영한다는 것이지요. 커트만 하는 매장, 염색만 하는 매장이 있는 식으로요. 의자도 앉았다가 일어서서 스타일링을 확인하기 쉬운 형태로, 짧은 시간을 강조하기 위해 '신선도'가 돋보이도록 화장품을 냉장고에 넣는 컨셉 등이 제안되었습다.

이 세 번째 컨셉에서 발전시켜서 내 놓은 것이, 미용실 산업 트렌드 변화를 이겨내기 위한 3/30 (3주에 한 번, 30분) 컨셉입니다. 이게 진짜 와 닿았던게, 정말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저렴하더라도 짧은 시간만 서비스를 제공하니 저가격 문제 해결, 미용실을 자주 방문하게 되니 장기화된 방문 사이클 해결, 잘 하는 것만 하면 되니 직원 기술력 문제도 해결, 새로운 서비스 키워드로 '신선도'를 제시하여 새 컨셉 서비스 제안이라는 방식으로요. 정말로 디자이너가 비즈니스를 바꿀 수도 있다는게 실감이 나는, 좋은 프로젝트 경험담이었습니다.

반면 와세다 대학 럭비부 리브랜딩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장황하게 설명은 하고 있지만, 결국 유니폼 디자인이 거의 전부였던 탓입니다. 팀의 방향성도 디자이너가 정했다는게 특이했지만 이 역시 그리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스포츠팀이라면 디자인보다는 이기는게 더 중요하니까요. 유니폼이 멋있고, 캐치프레이즈가 좋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유니폼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과정만큼은 돋보였습니다. 제가 꼬꼬마 신입 디자이너 시절에 두산 베어스 리브랜딩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이런 접근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크게 반성하게 되네요. 유니폼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디자인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 뒤 IHI 브랜딩과 프로테카 가방 디자인도 그냥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라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IHI 브랜딩에서 가장 손쉬웠을 로고 변경을 하지 않고 가능했던 커뮤니케이션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좋았습니다. 하나는 '중공업의 이미지를 좋은 의미로 배신하는 시도'였고, 또 다른 하나는 'IHI'라는 세 글자와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여러가지 제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또 제안을 할 때 '요구범위 확장형'이라고 불리우는 방식으로 접근한게 눈에 뜨입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르는 제안과 요구에서 조금 벗어난 제안, 크게 벗어난 제안을 제안하는 것으로 클라이언트가 자극을 받아 원래 생각했던 요구의 범위를 수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범위를 크게 넓히기도 한다니, 프로젝트를 외주로 받아 진행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시도해봄직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같이 회사 소속 디자이너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이겠지만요. (시키는 것만 잘하는 것도 벅찹니다..)

이렇게 수록 프로젝트가 전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유익했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디자이너로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7/13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점

눈의 황홀 - 6점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

'많은 발상가들이 생각의 도구로 사용한 ‘개념’이나 ‘형태’, ‘방법’ 등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탐색한 책이다. 다양한 ‘개념’, ‘형태’, ‘방법’ 중에서도 쌍[對]이라는 관념, 속도, 원근법, 나선, 추상 표현, 스트라이프, 콜라주, 레디메이드, 데포르메, 오브제 등 인간의 눈을 현혹해 온 18가지 테마의 기원과 변천을 묻는다. 이 과정에서 마쓰다 유키마사는 비주얼 문화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인류 가치관의 변천이 갖고 있는 놀라운 반전들을 보여 준다.'는 책 소갯글에 혹해서 구입했습니다. 

이러한 개념, 형태, 방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자의 개인적인 주장이 강하기는 하지만, 뒷받침되는 근거들이 방대하고 역사적인 깊이도 느껴졌습니다. 자기 주장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데 굉장히 능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궁금했었던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는 주장들이 특히 흥미로왔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가 동서 종교관의 차이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서양의 일신교는 수직 지향이며, 이를 통해 수직선 끝에 한 사람의 신이 있는 소실점이 등장했다고 하는데, 요약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도판, 사료가 많아서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추상 표현을 기차의 도입과 연결시킨 발상도 기발했습니다. 늘 보던 풍경이 기차의 속도로 왜곡되어 보였고, 이를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으로 잘라낸게 추상파의 뿌리일 수 있다는건 생각도 못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크 로스코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디자인 전공자라 '폰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편인데(이런 책을 읽었었지요), 폰트와 타이포크라피의 역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의 주장으로는 구텐베르크의 좁고 날카로우며 새까만 블랙 레터체(고딕체)는 성서에 위엄과 무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에서는 이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해 경멸했던 고트인의 문자(고딕체)라서 거부했고, 고대 로마 서체야말로 로마인에게 어울린다며 '로마체'를 부활시켜 사용했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프랑스에서 사용된게 올드 로마체를 대표하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가라몽체' 였고요. 그리고 서체, 타이포그라피 요소만으로 아름다운 지면을 만들어내려 했던 영국의 존 바스커빌이 18세기 모던 로마체를 도입했고, 뒤이어 이탈리아의 보도니가 완성하여 산업 혁명에 적합한, 공업 제품으로서의 활자를 만들어 냈다는군요. 이러한 주장과 함께 문자 레이아웃 디자인의 발전사도 설명해주는데, 지금 보아도 기발한 시도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외에도, 청각을 시각화한 것의 대표는 '악보'이다, 토기로 끓이는 요리 때문에 주기성-시간 관념-과 재분배에 의한 문명이 생겨났다는 등 한 번 읽어볼만한 주장이 가득하며, 주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판도 많아서 시각적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최초의 자동판매기 설명과 도판은 이런 책이 아니면 어디서든 찾아보기 힘든 자료일테니까요.

대부분 일본 중심으로 동양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류의 주장을 펼 수 있는 전문가가 나와주면 좋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5/11

우리 미술 이야기 2 : 영원한 현재 - 고려 - 최경원 : 별점 2.5점


우리 문화 유산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 그리고 알아두면 좋을 이런저런 내용을 소개해 주는 책. 저자의 "한류 미학 1"을 재미있게 읽어서 뒤이어 읽게 된 후속 권입니다. 절판 후 재출간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네요.

2권은 고려 청자 중심으로 고려 문화 예술만 소개하고 있는데, '고려의 청자를 비롯한 문화 예술품은 '대량 생산'되었기에 '디자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장인이 모든 것을 다하는게 '공예', 산업 혁명 이후 기계적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품 형태를 고안하는 일이 '디자인'인데, 국가 주도로 대량 생산된 청자는 '디자인'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표준화' 경향으로 증명된다며 대체로 유사한 청자의 형태 등으로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꽤 그럴듯 했습니다. 디자인에 의한 대량 생산품의 우수함은 문화의 우수함을 증명한다는 주장도 아주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고요.

다양한 청자를 가지고 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설명해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도입부의 '청자의 색' 설명부터 눈길을 끕니다. 고려 청자의 다소 칙칙한 색이 찬양되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데, 고려청자는 '옥'의 색을 겨냥해 만들어진, '비취' 색이었기 때문입니. 옥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석 중의 보석으로,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옥의 색과 질감을 유사하게 재현했었지만 고려 청자가 진짜 비취색을 구현해서 당대의 명물이 되었다고 하네요.

명품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게 해 주는 여러가지 발견과 정보도 볼 만 했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스케치를 통해 그림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도판도 매력적이고요. 아래와같이 돋을새김 상감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사진으로는 그 형태를 온전히 보기 어려운데, 스케치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3차원적 형태에 잘 어울리도록 그려지고, 이어진 형태로 감상해야 하는 그림이 많아서 전체를 돌려가며 보아야 된다는 착안도 좋았습니다. 이런건 박물관에서도 전시 시에 활용해주면 참 좋을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천천히 돌려서 전시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자만의 주장도 눈길을 끄는게 많은데, 그 중 두 가지가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는 황금 비례는 수학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리스 시대의 정신적 습관으로 만들어진 결과로 특정한 하나의 양식이자 독특한 미적 가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황금 비례가 많이 사용되는건 사람의 눈의 구조가 똑같고, 보편적인 감정이 있어서 대체로 2:3이나 3:4 정도의 비례를 좋다고 느끼기에 그런 조형 결과물들이 많은 것 뿐이라서 특별히 대단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청자를 만들 수 없었던 조선은 문화가 낙후된게 아니라는 일련의 주장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을 문화 퇴행기로 보는 건 일제 강점기 시기 총독부 소속의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문신들은 삼강오륜을 앞세운 근엄한 도덕적 생활을 해서 정서가 발달하지 못했고, 경제력도 보잘것 없어서 미술이나 미적 감각을 발전시킬 힘과 여유가 없었다는 김원룡의 시각도 마찬가지로 악의적 편견인 것이지요. 저자는 조선의 경향은 조형 예술 역사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추상'이라는 개념의 경향일 뿐이라며, 이를 맨 마지막에 소개된 '은진미륵'을 통해 설명해줍니다. 은진미륵은 세계에 관한 관심이 달라진 데에 따라 만들어진 새로운 미적 감각의 표현으로, 인자한 보살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단순화시킨 조형으로 특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걸 여러가지 분석으로 알려주거든요. 이러한 경향이 조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테고요. 또한 청자가 만들어지지 않은건 옥의 모조품이라는 목표가 더 이상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장은 재미는 있는데 완벽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황금비례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이론화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은진미륵에서도 추상성에 따른 아름다움은 솔직히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예가 좀 잘못된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외에도 많은 아름다운 유물을 보는건 좋았지만 청자가 대부분이고, 내용도 비슷한게 많아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청자의 형태가 유기적으로 이는 최신 디자인 경향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반복되는 탓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문헌, 사료적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문헌을 분석하는 것 보다 유물 자체를 관찰하고 추론하는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추론을 문헌을 통해 뒷받침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 주는게 보기가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유물 중심으로 분량을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4/04/26

예술에 대한 여덟 가지 답변의 역사 - 김진엽 : 별점 3.5점

예술에 대한 여덟 가지 답변의 역사 - 8점
김진엽 지음/우리학교

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거나, 특정 사조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책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을 설명해 줍니다. 딸아이 논술 학원 교제인데, 생각보다 깊이있는 내용이라 깜짝 놀랐네요.
통사적으로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모방론, 모방이 아니라 감정까지 표현한 표현론, 무관심성에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드는 색의 조합과 평면성을 강조하는 형식론, 뒤샹의 '샘'으로 논의가 시작되어 결국 예술이란게 무엇인지는 정할 수 없다는 예술 정의 불가론, 마지막으로 예술은 사회적 제도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제도론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여러 개 있다는 다윈론, 예술은 인간 생존과 관련이 있어서 탄생했다는 진화 심리학과 예술 관계론이 설명됩니다. '예술은 경험이다'는 주장으로 끝맺고 있고요.

사실주의, 낭만파, 인상파,입체파, 야수파 등 각 미술 사조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지만 그 사조와 예술, 아름다움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어느정도 감을 잡게 된 것 같아요.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 정의 불가론'에 의거하여 사람들마다 답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 보았는데, 예술은 그걸 감상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움같은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표현론과 형식론을 아우르는 것으로, 뒤샹의 '샘'이 어떤 감정을 일으켰다면 - 개인적으로는 참신함과 더불어 '재미'를 느꼈습니다 - 이 역시 예술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의 주장대로 일상 속에서 이런 경험을 하도록 해 준다면 더할나위 없을겁니다. 물론 실제 예술 작품을 실생활에 사용하는건 불가능할테니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라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경험을 계속 해야 겠지요. 같은 이치로, 집안에서 쓰는 물건들도 되도록 '예술'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걸 골라야하겠어요. 평상시에도 예술과 함께하는 경험으로 일상과 삶을 살찌우고 풍부하게 만드는게 좋을테니까요. 저는 그동안 인테리어 등에 들이는 돈을 무시하고 가성비를 중시했었는데 많이 반성이 됩니다.
이런 감상 경험에 더해, 작가 스스로 그 작품을 만들며 특별한 경험을 했다면 그 결과물이 예술이라는 관점에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다양한 예술 작품의 장르가 존재하고 계속 발표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깊이 새겨둘만한 좋은 설명이 많은데, 대상 독자 연령대가 낮은 듯한 편집 디자인은 아쉬웠습니다. 같은 내용을 성인 대상으로 보다 상세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출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좋은 책이라는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예술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4/04/19

미술관에 간 과학자 - 미우라 가요 / 지종익 : 별점 3점

미술관에 간 과학자 - 6점
미우라 가요 지음, 지종익 옮김/아트북스

과학자가 쓴 미술 작품 해설(?) 책은 전에도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 역시 유명 작품을 저자의 전문 분야로 분석하는 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약간 달랐습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는건 맞습니다. 다만 그게 화학이나 물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더라고요.

심리학으로 그림을 분석한 책은 처음 보았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사진 등을 통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장면의 묘사가, 실제 눈을 통해 지각할 수는 없다는건 놀라왔어요. '초점'이 빛나간걸 확인할 수 없다는 것처럼요. 상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물에 초점이 맞을 수 밖에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인데, 여태까지 생각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시간과 날짜 등에 따라 다른 색의 변화를 그려낸 아래의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이걸 눈으로 확인하는건 무척 어렵다는군요. 인간의 눈은 조명이나 그림자를 배제하고 원래의 색으로 보게끔 만들어져 있는 탓입니다. 즉, 모네는 '뇌'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입니다! 여태까지 빛의 변화를 인상파 작가들처럼 느끼지 못했던 저의 둔감한 센스를 탓했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당연한거라니, 위안이 됩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이 프랙탈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연구도 신기했습니다. 프랙탈 차원 값은 1에서 2까지로 2로 갈 수록 복잡해지는데, 폴록의 초기작은 인간이 가장 기분 좋음을 느끼는 1.45 정도였다가 말년으로 갈 수록 수치가 상승해서 1950년 작품은 최대치라 할 수 있는 1.9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냥 물감을 뿌린게 아니라 굉장히 고민하고 연구하여 그렸다는건데 어떻게 연구해야 저런걸 물감을 뿌려 완성할 수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확실히,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니네요. 이를 통해 코끼리가 그린 그림이 예술이 아닌 이유도 알 수 있었고요. 연구와 고민이 뒷받침되지 않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그림에서 안정, 불안감을 느끼는 요인 - 광원이 왼쪽에 있는게 안정적임 - 이라던가 그림속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 방향 - 왼쪽에서 오른쪽 -,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 방향에 따른 감상자의 생각들, 광택이 나는 장식품을 투명하게 만드는 방법에 따른 '투명시' 설명 등 그림의 여러 요소들을 이용한 연구들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 예시 작품들이 흔히 보지 못했던 독특한 것들이 많아 좋았습니다. 인간의 시각은 복수의 정보를 통해 얻은 정보를 콜라주해서 얻었다는걸 호크니의 사진 콜라주를 통해 알려주는게 대표적이에요. 호크니는 화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진 콜라주 작품도 발표했는지 몰랐네요.

다만 도판이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 어렵고, 어떤 내용은 정보와 내용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설명도 제법 되고요. '인간의 눈에는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에 반응하는 세 종류의 시세포가 있다. 이중 빨간색을 지각하는 건 장파장에 반응하는 시세포로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전형적인 빨강에 해당하는 파장 760나노미터가량의 빛에 대한 시세포의 반응은 거의 0에 가깝다. 빨강은 눈길을 사로잡는 색이지만 눈의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색이라는 것이다. 이 장파장에 반응하는 시세포의 절정은 656나노미터 정도로, 우리에게는 황색으로 보인다. 즉,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의 세 시세포는 청, 녹, 적이라는 빛의 삼원색에 반응하는 수용기가 아니다. 어떤 색으로 보일지는 세 종류의 시세포가 반응하는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그 결과, 보일 리 없는 빨간색이 어떤 색보다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는 글처럼요. 빨간색이 왜 선명하게 보인다는건지, 저는 이 글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애초에 글 자체가 친절하게, 쉽게 쓰여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목차 구성도 불만스럽습니다. 앞서 광원 등의 위치로 심리적 안정감과 시간의 흐름이 정해진다는 설명은, 글을 반대로 읽는 일본이나 아랍권에서의 예를 비교해주면서 설명해 주는게 당연히 좋았을거에요. 하지만 일본의 예는 한참 뒤에 따로 소개되어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워낙 좋은 내용이 많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서구권, 그리고 일부 일본 작품만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우리 작품도 이런 시각으로 연구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01/19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유명 건축물 이야기 : Architecture Inside+Out - John Zukowsky.Robbie Polley / 고세범 : 별점 3점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유명 건축물 이야기 : Architecture Inside+Out - 6점
John Zukowsky.Robbie Polley 지음, 고세범 옮김/영진.com(영진닷컴)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유명 건축물 이야기. 공공 생활, 기념물, 예술과 교육, 주거, 예배의 5개 주제로 구분하여 총 50개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개는 간략한 설명글과 함께 대표 사진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입체적인 일러스트, 조감도로 이루어져 있고요. 이중 일러스트가 핵심입니다. 사진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부 구조를 그래도 이해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림으로 내용을 설명해주는, 한마디로 도해(圖解)입니다. 걸작 건축물로 흔히 소개되는 낙수장의 아래 단면도가 좋은 예입니다. 어떻게 폭포와 이어지게 만들어졌는지를 그림을 통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림의 퀄리티도 높습니다. 아주 근사해요.
메종 드 벨의 특징 중 하나라는 철제 창틀의 기계 장치라던가, 콜로세움의 엘리베이터(?)와 같이 세세한 디테일들도 충실히 소개해줍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 단지 계획이나 전체 전경을 소개해주기도 하는데 이 역시 이해를 돕습니다.
제가 직접 방문했던 곳이 도해로 설명되는 것도 반가왔습니다. 아래의 베니스 도제 궁전의 아케이드가 그러했습니다. 이런 정보를 미리 접하고 갔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다른 건축 관련 도서에서 흔히 접해왔던 유럽, 미국 건축물에 치우치지 않고 인도 국회 의사당, 방글라데시 국회 의사당, 나키긴 캡슐 타워, 금각사 등 아시아 건축물들도 많지는 않지만 소개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인슈타인 타워, 타셀 호텔, 슈뢰더 하우스 같은 소규모 건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 점, 그리고 21세기 이후 건축물이 포함된 점도요. 자하 하디드의 런던 아쿠아틱 센터, 뉴욕의 세계 무역 환승센터가 대표적입니다.

다만 3만원이 넘는 고가 도서인데 오타가 간혹 눈에 띄는 문제는 있습니다. 수록된 일러스트, 도해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건축물이 제법 있고, 도해와 사진이 따로 노는 것도 단점이기는 해요. 도해와 동일한 구도로 사진을 찍었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랬으면 제목처럼 '안과 밖'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보는 동안 눈이 즐겁고, 여러가지 새롭게 안 점도 많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소개된 건축물들을 언젠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2023/12/09

똑같은 빨강은 없다 - 김경서 : 별점 3.5점

똑같은 빨강은 없다 - 8점
김경서 지음/창비

딸아이의 논술학원 교재입니다. 우연찮게 읽어보게 되었네요. 그런데 생각보다 깊이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인류는 오래전 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습니다. 빗살 무늬 토기의 빗살이 그 좋은 예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름다움의 기준은 변화했고, 사람들의 미적 가치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움의 정의는 명확합니다. '쾌락'을 주는지 여부입니다. 즉, 그게 어떤 것이 되었건 사람들이 '쾌'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든 예술 작품이 아름다운 것 만은 아닙니다. 피카소의 '황소 머리'나 뒤샹의 '샘'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아름답다고 하기 힘든 기성품들이지요. 이들이 '작품'이 된 이유는 작가의 표현 의식 때문입니다. 현대 미술에서는 이렇게 '의미'를 찾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와 과정도 예술이 됩니다. 그걸 아름다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고요.

이렇게 현대의 아름다움은 새로움과 창의성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이런 작품들은 관객들에게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기에, 예술을 비평하고 즐기는 안목을 기르려면 관객들도 자유로와야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요. 기존의 고정 관념을 깨야하고, 이를 깨는 것이 신세대 예술가와 관람객 들의 몫이라고 하네요. 저도 그동안 고정 관념에 많이 매몰되어 있었는데 앞으로는 아름다움을 즐기고, 뭐가 아름다운지를 찾아내는, 순수하게 '즐기는' 행동으로 작품들을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하는 자세도 좋지만, 그 이전에 '감상'이라는 취지를 잊지 말고요.

예술은 어렵지 않다는걸 상세한 예, 그리고 쉬운 글로 이해하기 쉽도록 잘 쓰여졌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내용이 다소 두서가 없다는 점입니다. 시대순으로 아름다움의 변천 과정을 설명하게끔 쓰여졌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읽어도 나무랄데 없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3/02/26

오래된 디자인 - 박현택 : 별점 3점

오래된 디자인 - 6점
박현택 지음/안그라픽스

디자이너 출신 공무원 박현택이 쓴 디자인 관련 컬럼 모음집. 몇 년 전에 읽고 리뷰도 남겼었는데, 기억에서 아예 지워져버린터라 새로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래된 것에서 찾은 위대한 디자인, 오래가는 디자인, 남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 이라는, 디자이너라면 한 번 되새겨 생각해볼만한 주제로 각각 8편, 모두 합쳐 24편의 컬럼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묵직하고 어려울 수 있는 주제인데, 이를 평범한 사람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여러가지 소품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저도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는 이야기가 많아서 특히 좋았는데요, 대표적인게 추사의 서예 작품에 대한 컬럼이었습니다. 추사체가 왜 좋은지, 서예 작품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잘 몰랐었는데, 추사의 '대팽고회'를 통해 뜻과 형태의 완벽한 결합을 설명해 주고 있어서 확 와 닿았거든요. 촌 늙은이 최고의 음식은 두부라는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린 졸박한 서체로 완결하여 완성했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무릎을 칠 만 했습니다.
나전칠기 X-box를 통해 단순히 나전칠기 기법이나 문양을 현대 기기에 사용하는게 과연 전통의 계승이나 디자인 혁신인지 되묻는 부분도 디자이너로서 반성하게 해 주었어요. 전통을 단순히 현대에 되살리는건 디자이너가 할 일이 아니고, 계승자가 할 일이니까요. 그 외에도 디자이너라면 한 번 쯤 돌이켜 생각할 내용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컬럼마다 소개하고 있는 여러가지 물건들에 대한 도판 수록도 확실하여 이해를 돕습니다. 디자인의 연관성과 흐름을 보여주는 도판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석기시대 주먹도끼와 다이아몬드, 선비의 책상과 이슬람 코란 독서대의 비교는 도판만으로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거든요.
안그라픽스 책 답게 편집과 책 완성도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두께와 퀄리티에 비하면, 그리고 요새 물가를 생각해본다면 15,000원이라는 가격은 놀랍기만 할 정도입니다. 무려 300페이지가 넘는데 말이죠!

하지만 다른 컬럼들이나 기사를 통해 익히 접했던 내용도 많고, 단순히 특정 사물에 대한 기록과 소개, 그리고 여행 등을 통해 잡했던 개인 경험담에 그치는 컬럼도 없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는 국민차 비틀 컬럼이 대표적이고, 두 번째는 루이비통 컬럼, 마지막은 계영배 컬럼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5만원 짜리 지폐나 한옥 마을에 대한 비판은 깊이보다는 보여지는 형태에 주로 집중되어 있어서 아쉬웠고요.

그래도 디자이너로서는 한 번 읽어볼만한 좋은 컬럼이자 에세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직속 선배님이시기도 하신데,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2023/01/28

딕 브루너 - 브루스 잉먼 외 / 황유진 : 별점 5점

딕 브루너 - 10점 브루스 잉먼 외 지음, 황유진 옮김/북극곰

미피의 창조자 딕 부르너의 일생과 작품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하는 책. 대표작을 망라한 화려한 도판이 인상적입니다.
미피를 창조한 동화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 출판사에서 천 권이 넘는 책의 표지를 디자인했던 그래픽, 북 디자이너 출신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금수저이기는 한데 능력있는 금수저였던거지요.
그가 주로 추리, 범죄 소설이 많이 출간된 레이블 <<검은곰>> 을 위해 만든 표지들이 다수 소개되고 있는데, 이 레이블은 당시 덴마크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성공의 요인 중 하나가 표지 디자인이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작품이 재미있어서 성공했겠지만 표지 디자인이 꽤 눈길을 잡아끄는 것도 사실이에요. 소개된 표지들만 보아도, 딕 브루너가 레이블과 시리즈에 일관성을 주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했다는 마티스의 색감과 꼴라주 스타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게 눈에 확 띄였고, 제가 추리소설 애호가다보니 소개된 표지들 중 레슬리 차터리스의 세인트 시리즈,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 시리즈처럼 알고 있는 작품과 시리즈도 제법 되는데, 모두 분위기가 그럴싸하더군요. 조르주 심농이 딕 브루너에게 자기 작품을 자기보다 잘 드러냈다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요.
단순한 표지 소개 뿐 아니라, 딕 부르너 스스로 검은곰 레이블의 캐릭터를 만들고 디자인에 반영해간 과정도 쉽게 알 수 있었서 좋았습니다. '펭귄 북스'와 같은 레이블 디자인을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한 셈인데, 모든 결과물이 탁월하다고 보기는 힘들어도 그 꾸준함에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네요.

그리고 이러한 표지, 편집, 포스터 디자인 작업 소개 이후, 동화 작가로서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미피 소개가 시작됩니다. 미피 첫 작품은 디자인은 물론 이름도 달랐고, 판형도 정사각형 형태가 아니었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미피를 어떻게 만들어 냈으며 작업을 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 등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새같으면 컴퓨터로 처리할 아웃라인과 색체 분할 작업을 스케치를 거쳐 색종이를 정확하게 오려 덧대는 아날로그적인 작업 방식이 독특했어요. 저도 90년대 디자인과를 졸업한 오래된 디자이너 출신인데,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이미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던 시대라 저역시 이런 작업을 실제로 겪어보지 못해서 더욱 신기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그냥 오려붙이는게 아니라 치밀한 스케치 과정을 거쳐 아웃라인 작업을 먼저 진행한다는 일종의 노하우(?)도 기억에 남고요.

딕 브루너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하기는 부족하겠지만, 디자이너 딕 브루너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도판도 훌륭하고 책 디자인도 발군이에요. 내용이 딱딱하거나 어렵지도 않고요.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인데, 다른 책들도 구해봐야겠습니다.

2023/01/07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이소영 : 별점 3점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6점
이소영 지음/모요사

미술사를 바꾼 여러 가지 그림 도구 및 각종 계기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제목에서처럼 도구들이 설명되고 있지만 화가의 직업병을 다룬 '백내장' 같은 챕터와 같이 다른 분야도 폭넓게 소개해줍니다.
특히 이런 도구와 각종 계기들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의 도입처럼요. 이동이 용이한 캔버스 덕분에 그림이 더 이상 교회와 건물에 붙박이 장식으로 활용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유행하게 되었다니 대단한 혁신을 이룬 셈입니다. 나무 패널에서 캔버스로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습하고 소금기가 많은 대기는 프레스코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베네치아에서는 나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중요 자재였기 때문이었다니까요. 그래서 해양강국답게, 돛을 만들던 기술을 활용한 캔버스가 대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의 질감을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 소개도 좋았어요.
이런 캔버스만큼, 아니 더 큰 미술사의 혁명을 불러온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크릴 물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미술은 현실 세계에 없는 입체감 없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라는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경쾌하고 선명한 색감, 빠른 건조에 어디에나 그릴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춘 아크릴 물감의 등장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크릴 물감 챕터에서는 이렇게 아크릴 물감이 현대 미술을 그야말로 '접수'한 신소재라는걸 여러가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예를 들어가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결합된 현대미술의 큰 이바지를 한 빌리 클뤼버,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E.A.T 소개도 좋았습니다. 당연히 미술가들이 기계적인 작품을 혼자서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기술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몰랐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협의 기간이 오래 걸렸고, 심지어는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못할 때 다른 기술을 제시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했던 작품도 있었다니 - 앤디 워홀의 <<은색 구름>> - 이 정도면 함께 창작을 진행한 동료라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아요. 더 이상 기술의 도움없는 예술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템페라화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템페라화는 유화가 유행한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 나름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군요. 약간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질감과 색감이 현대 미술의 어떤 분야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라나요. 게다가 21세기에는 공장에서 제조된 물감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템페라 물감이 또다시 유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니까요. 또 달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처럼 부엌 재료들이 일찍이 물감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식인데, 확실히 화가들도 계속 연구와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라는걸 잘 알려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네요.
'종이'에서는 터너의 수채화의 독특한 질감과 효과는 모두 그가 사용했던 종이 덕분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종이에 상처를 낸 뒤 물을 붓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무늬와 명암을 얻는 터너의 기법은 현재의 종이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종이 원료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용으로 '터너풍 수채화 종이'를 개발해서 판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팔레트'는 미술 도구로서의 팔레트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팔레트는 필요없는 그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가들이 팔레트에 뿌린 물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팔레트에는 대체로 열 개 정도의 물감만 쓰였고, 전통적인 팔레트는 혼색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혼색 대신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비비고 흩뿌려 작업했다고 합니다. 즉 인상주의의 탄생은 튜브형 물감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는 팔레트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튜브형 물감과 같은 합성 물감도 한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데, 일전에 다른 다른 책에서 읽었던 고흐의 독특한 노란색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은 독특하게도 화가들의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질환을 앓은 화가들이 많았다는데, 드가가 거의 완전 실명에 이르른 탓에 유화를 그리지 못해 파스텔화와 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는건 몰랐었습니다. 유별나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백내장 등의 질병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물감들에 포함된 납 성분,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 방식 등이 이유였겠지요. 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이 초기의 세밀하고 부드러웠던 그림에서 거친 파스텔 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에 걸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컴퓨터에서 재현하면 드가와 모네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도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림과 미술사, 각종 재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확실히 미술사 전문 출판사 모요사의 책 답게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잡고 있어요. 도판이 너무 작다는 점, 그리고 소개되는 모든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지 못한 점은 좀 아쉬우며, 전문가적인 이야기에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이 다소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옥의 티라 할 수 있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9/04

당신이 찾는 서체가 없네요 - 사이먼 가필드 / 송성재 외 : 별점 4점

 

당신이 찾는 서체가 없네요 - 8점
사이먼 가필드 지음, 송성재 외 옮김/안그라픽스

여러가지 서체를 통해 서체의 역사와 디자인 속성들, 그리고 쓰임새 등에 대해 안내해 주는 책. 정말 오랫만에 디자인 전공 관련 책을 읽어보았네요.

제가 이십년도 더 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내용이 많았습니다. 헬베티카가 왜 그렇게 많이 사용되는지?에 대한 저자의 해설처럼요. 헬베티카는 불편부당, 중립성, 신선함 등 스위스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기하학적 인상과 함께 근면하고 정직하다는 느낌을 전해주어 기업의 CI에서조차 친근하고 검소한 인상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애초 헬베티카는 간결하고 범용적인 알파벳, 그리고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중요한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지요.
제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유니버스는 프루티거가 디자인한 서체로 스위스의 완벽함과 프랑스의 우아함, 영국의 고귀함을 종합했지만 조금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는 반면, 프루티거는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담겼다라는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프루티거를 더 많이 쓸걸 그랬네요. 여튼, 프루티거가 했다는 말, "점심식사 때 사용한 스푼의 모양을 기억한다면, 분명 그 모양은 잘못된 것입니다. 스푼과 글자는 도구입니다. 하나는 그릇에서 음식을 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이지에서 정보를 꺼내는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자여서 독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 그것이 좋은 디자인입니다".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라 생각되고요. 평범하지만 아름답고 편안한 것, 그게 궁극의 디자인이라는 건데 정말 공감이 많이 됩니다. 메타 폰트 등을 디자인한 전설적인 독일 폰트 디자이너 슈피커만이 한 말도 마찬가지에요. <<이코노미스트>>의 리디자인 작업을 할 때 한 말이라는데, "나는 결코 누군가가 그 서체를 꼭 집어서 '멋진 서체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정말 멋진 기사네요.'라고 말해주기를 바라죠. 나는 소리를 디자인해요. 그 소리는 읽기 쉬워야 하죠". 거장은 역시, 달리 거장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푸투라, 고담, 타임스뉴로만, 배스커빌, 길산스, 리버풀, 벵돔 등 다양한 폰트의 탄생기와 사용기 등과 서체를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나가는지, 어떤 서체가 가독성이 좋은지, 어떤 문구가 서체를 표시하기에 적당한지, 어떤 서체가 어떤 상황에 적합한지와 같은 디자인 방법론, 그리고 헬베티카를 표절한 에이리얼과 같은 표절 및 폰트 저작권이 무시되고 사용되는 행태 등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가지 디테일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과연 '헬베티카' 폰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와 같은 재미난 이슈들도 포함하고 있고요.
이 중 기억에 남는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서체가 어울리는지?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 감사편지는 자신 있는 분위기와 분명하고 진실한 태도를 보여줘야 하니 제네바가 제격일 것이며, 사직서의 경우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즐거웠다면 뉴욕이나 버다나 같이 인간적인 면이 묻어나는 서체를, 일하던 시간이 지옥같았다면 냉정해 보이는 에이리얼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연애편지에 잘 어울리는 폰트는 이상적으로는 O가 큰 폰트가 사랑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조금 고풍스러운 글씨 느낌이 나거나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는 듯 부드럽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남기려면 이탤릭체인 휴머나 세리프라이트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하고요. 절교 편지에는 불쾌함을 주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하려면 평범하고 오래된 타임스레귤러, 혹은 살짝 내려놓는 느낌의 이탤릭 폰트도 나쁘지 않다네요.
그리고 항상 궁금해했던, '왜 아직도 새로운 서체가 디자인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알려준다는게 참 좋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세상이 바뀌고 그 세상의 콘텐츠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니까요. 음악 앨범, 책 디자인을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몇 개의 마스터 페이지로 돌려막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렇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좋은 책인데, 내용에 약간 두서는 없으며 편집 자체가 좋지 않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언급되는 폰트를 따로 찾아서 확인해보기가 어렵게 만들어져 있거든요. 좋은 서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좋은 디자인을 보여주지 못하니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당연하겠지만 영문 서체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는 조금 괴리감을 전해주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폰트 디자인을 막 배우기 시작했던 학생 시절이나 아니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때 읽지 못했던게 아쉽기만 하네요. 왜 이 서체가 이렇게 디자인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디자인을 했어야 했는데, 단순히 글자 몇 개의 디자인 형태에 매몰되어 대충 아웃라인만 따서 변형하여 작업했던 그 시절이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지금이라도 심기일전하여, 좀 더 좋은 디자인을 해 봐야 겠습니다.

2022/06/04

디자인 너머 - 게슈탈텐 : 별점 2점

 

디자인 너머 - 4점
게슈탈텐 지음/윌북

얼마 전 까지 기아차의 디자인을 이끌었던 피터 슈라이어 전기. 출생 후 뮌헨과 런던에서 보낸 대학 시절, 아우디와 폭스바겐에서의 활약을 거쳐 기아에서의 경력이 화려한 도판과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디자인이 어디서 태동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던 기회였습니다. 비행기와 속도에 대한 관심, 유년 시절 환경 등을 보면 자동차 디자이너로 타고 난 사람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디자인 철학과 방법론도 상세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엿볼 수 있었고요. 특히 엔지니어들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UX 디자이너로서 많이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만한 볼륨으로 전기가 나올만한 디자이너인지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논조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결국 내용은 '피터 슈라이어는 대단한 아티스트이다!'라는게 전부인데, 책은 이를 독자들에게 설득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데 성공한 결과물로 보이지 않거든요. 아무리 디자인이 호불호가 갈린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물론 그가 디자인했던 아우디 TT는 의심할 바 없는, 자동차 디자인의 한 획을 그은 디자인인건 분명합니다. 폭스바겐의 뉴비틀도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움을 안겨다 주었었고요. 기아의 자동차들에 이른바 '호랑이 코 그릴'이라는 디자인 언어를 도입하여 차량간 일체화를 준 것 역시 대단한 공로입니다. K5, 쏘울, 3세대 스포티지 등의 디자인도 성공적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책에 수록된 작업들, 특히 기아에서의 결과물들을 모두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메기'라는 별명이 더 익숙했던 4세대 스포티지라던가, 레이는 개인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10년대 이후 컨셉트 카들도 그리 디자인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힘드니까요. 팝 컨셉트, 네모, 이매진 바이 기아 등이 그러합니다. 특별히 실패했던 경험이라던가, 겸손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책의 만듬새는 나쁘지 않고, 인쇄의 퀄리티도 빼어나며 도판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그러나 담고있는 내용이 책의 가격과 완성도에 어울리냐 하면 그렇다고 보기는 힘드네요. 자동차 디자인을 꿈꾸는 학생분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2022/04/10

오늘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2.5점

오늘의 의자 - 6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사물들의 미술사 3권. 전 권에 이어 의자를 통한 당대 사회, 문화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

그러나 전 권보다는 의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훨씬 많아서, 주로 의자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토네트 14번 의자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혁신적인 디자인과 설계, 생산 및 운송으로 대량 생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당대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산업이 유행과 문화를 이끌게 되었다는건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어지는 바실리 체어, 파이미오 암체어, 임스 플라스틱 체어는 각각 금속, 합판, 플라스틱으로 의자 재료가 진화해나갔던 과정이 중심입니다. 이 역시 기대했던대로, 의자를 통해 당대 문화와 사회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실리 체어는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디자인의 태동을, 임스 플라스틱 체어는 전후 대폭발한 미국 중산층의 삶과 플라스틱의 인기를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중심에서는 빗겨나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명백히 의자였으니까요. 바실리 체어의 초기형 디자인이라던가, 임스가 공모전에 제출했었던 원형 임스 체어라던가 초기 모델에 대한 도판 등 몇몇 자료는 흥미로왔지만 책이 지향하는 바와는 좀 거리가 많았어요.

제가 기대했던, 의자보다는 그 의자가 등장했던 시대와 장소에 대한 설명이 더욱 상세한 이야기도 없지는 않습니다. 바그너의 포스트슈파르카세 의자 이야기처럼요. 이 이야기에서는 의자는 당시 최첨단, 모던의 상징이 되었던 소재들 중 하나에 불과한걸로 소개되며, 내용 거의 전부는 세기말 최첨단 유행의 도시였던 빈의 당시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웠어요. 명품 의자의 디자인적인, 그리고 디자인사에서의 의미를 다룬 책은 그동안 숱하게 읽어 왔던 탓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내용이 많지도 않았고요. 분류도 '역사'가 아니라 '디자인' 쪽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3/20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 요리후지 분페이 / 서하나 : 별점 2.5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 6점
요리후지 분페이.기무라 슌스케 지음, 서하나 옮김/안그라픽스

오래 전에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고 글을 남겼었고, 몇 권의 책을 읽기도 했던 일본의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의 에세이. 디자이너로서 디자이너라는 업과 디자인이라는 일에 관련된 여러가지 생각과 가치관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현업 디자이너로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중 특히 요리후지 분페이의 대학시절 은사가 한 말은 디자이너로서 새겨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디자인은 감성적이지 않고 과학적이다". 즉 감각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것은 아무런 가치없는 자기만족일 뿐이며, 무언가를 만든다면 왜 그걸 하는지를 언어로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가 전투적으로 커뮤니케이션했던 전공투 세대였기 때문에 그랬을거라는 부연 설명이 살짝 덧붙여져 있지만, 세대를 떠나 맞는 말입니다. 최소한 왜 만드는지는 생각하고 만들어야하는건 당연합니다. 단지 예뻐서, 멋져 보여서가 아니라요. 요리후지 분페이도 가슴 속 깊이 새겼는지, 이 책을 통해서 자기가 만든 다양한 작업물에 대해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작업도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다양한 요소를 모듈화하여, 이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일러스트를 만들고 그 모듈 킷의 사용료를 받는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조합 가능한 일러스트라는 아이디어는 흔합니다. 제 대학 졸업작품도 비슷했었지요. 시기상으로 따져보면 거의 동시기라 뭔가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겨 상용화했다는건 아주 참신했어요. 제 아이디어는 머리, 몸, 다른 유닛을 조합하여 무궁한 몬스터를 만들어낸다는, 비교적 작은 범위의 딱히 효용성 없는 결과물이라 상업화에 성공한 요리후지 분페이의 작업물과 비교하기도 어렵고요.
짤막하게 스쳐지나가는 2020년 도쿄 올림픽 엠블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도쿄는 물의 도시이고, 스포츠에서 땀은 빼 놓을 수 없고, 재생이 중요한 시대 환경을 감안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 엠블렘을 색깔만 파란색으로 바꾸어 재활용하는게 어떨까? 라는 건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디자인에 부가되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설명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중요해져 버린 시대 비판을 위해 든 예였지만, 2021년 올림픽 엠블렘으로 사용되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가 풀어놓는 본인의 경력들도 흥미로왔습니다. 디자인 업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실력만 가지고는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경제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여 피터 드러커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일화에서는 확실히 남다른 부분이 느껴졌고요. 저도 30대에 한 3~4년 정도 디자인 에이전시 사무실을 운영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의 요리후지 분페이보다도 나이가 많았음에도 이런 발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놀기 바빴었지요. 심지어 기껏 읽은 피터 드러커 관련 책은 이거 하나밖에 없고요. 많이 반성이 됩니다.
당시 읽었던 다른 책을 통해 '참신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면, 그 아이디어만으로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자세를 본받아, 그렇게 일하려 노력했다는 것도 대단해 보였고, 본인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자기의 디자인론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노하우를 참고할 만한, 프로 현업 디자이너로서의 조언들도 제법 됩니다. 그 중 아이디어를 형태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별로 특이한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막히면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라는 등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슬럼프가 왔을 때는 방법이 없으니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면서 슬럼프를 벗어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건 괜찮은 조언이었어요. 홈런보다는 번트라도 대라는 건데, 젊은 디자이너들에게는 굉장히 유용할 조언이었다 생각됩니다.
여러 관련 부서, 담당자와 소통할 때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라는 조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뒤에, 너무 자세하게 적으면 상대방이 생각을 하지 않게 되니 문제라고 바로 자기 말을 뒤집기는 하는데, 자세히 설명해서 나쁠건 없지요. 저도 한 때 디자이너에 대한 선민의식이 있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요리후지 분페이 말에 동의하는게 하나 있습니다. 전문가에게 맡기면서 정작 인쇄 감리처럼 현장에 가서 지켜보는건 확실히 이상해요. 당연히 믿고 맡겨야지요.
그림은 생각이 20%, 작업이 80%인데 디자인은 반대라는 이론도 좀 특이했고, 북 디자인은 관심이 많은 영역이 아니라서 기억에 많이 남지는 않지만 디자이너의 재능이라는 부분은 상당부분 알고리즘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의견도 굉장히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작가가 이 책을 왜 썼는지를 언어화해 두고, 이 책과 어떻게 만나고 싶은지를 상상한다는건 다른 디자인 작업에도 써 먹음직한 내용이었어요. 이는 '경험 디자인'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되네요. 잘 팔리는 책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큰 제목' 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디자이너를 본 적이 없다던가, 서로간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는 '인사하기' 라던가, 디자인을 포함해 어떤 것을 창조하는 일은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커다란 불안을 원동력으로 한다는 등의 경험이 뒷받침된 말들도 염두에 둘 만 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건 아닙니다. 내용에 두서가 없을 뿐더러, 유명 디자이너가 썼고, 본인 디자인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도판이 지극히 부실하다는 큰 문제가 있는 탓입니다. 컬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소개된 작품에 대해서는 도판을 모두 수록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원소생활>>이라는 책을 만들 때 이야기를 꽤 길게 이어가는데, 정작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그 결과물은 함께 소개되지 않는 식입니다. 북 디자인이 책 표지만 있는건 아닌데, 표지만 잔뜩 도판으로 수록한 것도 문제이며 북 디자이너로서의 생각을 잔뜩 풀어놓지만 이 책의 디자인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용에서 설득력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이 책 디자인처럼 저자와의 간극이 느껴지는 결과물은 그 외에도 제법 많습니다. 픽토그램 활용한 디자인이 대표적이에요. 솔직히 좋은지 잘 모르겠더군요. 다리 사이의 구멍이 왜 그렇게 큰 완성도를 가져다 주는지 저는 알 수 없었거든요. 본인 스스로 픽토그램은 수도 없이 손 봤다면서, 그 다음에 바로 광고 카피 문구 자간에는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하는 맥락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후배 디자이너로서 경외감을 가지고 읽을 만한 부분도 없지 않고요. 그러나 단점도 확실하고, 취향도 많이 탈 것 같아 선뜻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1/04/04

이야기의 집 - 요시다 세이지 / 김재훈 : 별점 3점

이야기의 집 - 6점
요시다 세이지 지음, 김재훈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등장 메카닉 등 관련 설정을 모아 놓은 책, 이른바 "화보집"을 좋아합니다. 멋진 그림, 그리고 자세한 설정을 알아가는 데서 큰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책도 그림과 설정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큰 차이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기존 애니메이션 화집의 경우, 이야기가 아무리 중요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내용을 파악하고 보는게 보통이었습니다. 관련된 내용은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아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책은 유명하지도 않고, 국내에서는 제대로 발표된 적이 없어서 찾아보기도 불가능한 작가 요시다 세이지의 개인 창작물에 등장하는 설정만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캐릭터, 메카닉이 아니라 '집', 또는 '거주 공간'에 대한 설정만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집이 주인공인 화집은 정말이지 처음 봤네요.

그러나 결과물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요시다 세이지가 창작했던(아마도?) 이야기 속 집들을 전경을 그린 세밀한 일러스트, 그리고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평면도 및 구조도와 함께 소개해 주는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이 정말이지 완벽하게 취향을 저격하고 있거든요. 작가의 뎃생력, 따뜻하고 정감 어린 컬러링 모두 완성도가 높습니다.

집에 대한 설정들도 굉장히 상세합니다. 만약 설정대로의 집이 있다면, 정말 이렇게 지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각 방들의 구성과 꼭 필요한 요소들이 모두 정확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용을 타고 배달하는 우체국' 그림처럼 말이죠.

이러한 집 화보가 무려 33편이나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도 부록도 풍성합니다. 컬럼으로 지붕, 화장실과 작가 아틀리에 소개가 실려 있으며, '과묵한 정비사의 별장' 이야기 속 하루를 그린 듯한 짤막한 만화, 그리고 어떻게 작품을 그렸는지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완성도도 좋습니다.

다만 함께 소개되는 이야기 설정은 솔직히 그냥저냥이기는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워낙 그림과 구성이 마음에 들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화집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추천드립니다.

2020/11/29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의자들 - 아가타 토로마노프 / 최다연 : 별점 3점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의자들 - 6점
아가타 토로마노프 지음, 최다연 옮김/시공문화사

의자는 제품 디자인의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도가 명확하고, 역사도 오래되어 새로운 게 많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소재와 구조를 연구하여 계속 진화하고,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디자이너들의 도전 정신을 일깨우는 주제인 셈이죠. 요리로 따지면 라면같달까요. 그래서 의자 디자인을 좋아하고, 관심도 많아서 이런 저런 책 - "명작 의자 유래 사전", "의자의 재발견",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 등 - 을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조금 특이합니다. 의자 디자인만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목 그대로 유명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건축물과 그들이 디자인한 의자를 각각 한 페이지씩 서로 비교하며 소개하는 구성이거든요. 의자와 건축의 연관성을 깊게 느끼게 만들 목적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 보면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사상이 의자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게 명확하게 드러나서 재미있었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프랭크 게리, 마리오 보타 등 건축계 거장들이 디자인한 의자들은 딱 보면 그들의 건축물과 곧바로 연결될 정도로 이미지가 강하고 확실합니다. 심지어 아예 건축물을 위해서 디자인된 의자들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토르셀 스피릿 하우스와 스피릿 하우스 체어, 쿠마 켄고의 GC 프로스토 박물관 리서치 디자인 센터와 GC 체어, 위엘 아레츠의 라이트쉐 라인 칼리지와 LRC 체어는 의자 자체가 건축물의 일부라 생각될 정도였어요.

물론 앞서 말씀드린대로, 의자 자체를 혁신적으로 디자인한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유명 건축가들은 유명 디자이너이기도 하니 당연하겠죠. 특히 미스 반 더 로에가 1929년에 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체어와 1968년에 디자인한 베를린 신 국립 미술관 모두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게 놀랍습니다. 단순함과 균형감이 핵심이라고 하는데, 이런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지네요. 바르셀로나 체어는 꼭 구입해서 앉아보고 싶은데, 천만원이 넘는다니 과연 생전에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리처드 마이어의 1978년 작품인 암체어 810과 2006년 디자인 된 아라 파키스 박물관도 같은 맥락입니다. 완벽한 비율, 기하학적 구조의 완벽한 균형감이라는 점에서요. 과한 장식이나 패턴보다는 이런 작품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 의자는 유명하지만 반대로 건축가로서의 작품은 잘 알지 못했던 디자이너들의 건축물 소개도 반가왔습니다. 게리트 리트벨트가 대표적입니다. 그가 디자인했던 레드 블루 체어는 몬드리안의 작품과 유사해서 유명한데, 건축물은 처음 보았네요. 건축물 역시 기하학적으로 사각형 평면을 강조했으며, 포인트 컬러가 선명하다는 점에서 레드 블루 체어와 연관성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보고 싶어집니다.  

그 외 이소자키 아라타가 1973년에 디자인 한 마릴린 체어는 유명한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디자인을 유머스럽게 재해석했다는게 눈에 띄더군요. 론 아라드의 3 스킨 체어도 역동적인 형태가 과장되어 유머스럽게 느껴졌고요. 건축가들의 의자는 딱딱하고 기능적일거라는 인상이 짙은데 이를 깨 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책의 구성과 디자인, 도판 역시 취지에 걸맞게 높은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의자에 비해 대표작 건축물 소개는 여러모로 조금 부족했습니다. 유명 건축가의 경우, 대표작이 많을텐데 한 개만 선정된 것도 그렇고, 실내, 외가 모두 중요할텐데 사진이 딱 한장만 실려있어서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종의 화보처럼 설명은 최소화하고 있는데, 의자의 캔틸레버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 정도는 별도로 해 주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단점은 크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조금 부족하지만, 책의 취지를 살리는데에는 충분했습니다.

2020/10/24

명작순례 - 유홍준 : 별점 5점

명작순례 - 10점
유홍준 지음/눌와

우리 옛 그림, 글씨와 궁중미술 중 주목할만한 일품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림이 책의 중심으로 총 32점이 조선 전기, 중기, 후기로 나뉘어 설명되며, 뒤이어 글씨 9점과 궁중미술 8점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그림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 및 작가 관련 일화, 그림이 그려진 상황 및 시대 배경 등도 함께 평가하고 소개해주고 있지요.

제일 큰 장점은 시각적인 만족감, 그리고 읽기 쉽다는 점이었습니다. 시각적인 만족감은 도판이 화려하고 인쇄질이 좋은 덕입니다. 읽기 쉬운건 유홍준 교수의 쉽고 편안한 글 솜씨와 짤막한 분량 덕이고요. 이야기 한 편 당 4~5페이지 분량밖에 안 되거든요. 하루에 조금씩 읽다보니 금방 읽게 되더라고요. 시대별로 대표작가와 대표작들이 소개되는, 일종의 연대기 식 구성이라는 점도 좋았습니다. 조선 서화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요. 잘 몰랐던 대가와 작품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요. 수월헌 임희지가 그린 난초, 몽인 정학교가 그린 괴석 그림들은 지금 보아도 가히 일품이라 할 만 하더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오원 장승업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저는 솔직히 조선 문인화가 왜 좋은지 잘 모릅니다. 선비들이 그림을 그리는건, 글씨와 어우러질 때만 뭔가 있어보이지, 그림만 놓고 보았을 때 그 결과물이 대단한 감동을 주는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 속 오원 장승업 소개를 보니, 환재 박규수라는 분 생각이 저와 같더군요. 문인화가 극에 달한 탓에 아마추어리즘이 가득해져버렸다고요. 그래서 추사 이후 주눅들어있던 전문 화원들에게 '직업 화가라면 프로 의식을 찾으라!'고 호소했고,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서 나타난게 오원 장승업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자면, 선비라는 한량들이 얼척없는 그림을 서로 돌려보며 뭔가 있어보이는 듯 자화자찬하던 상황에서, "진짜 프로는 이런거다!"라며 튀어나와 그들을 압살해버린 겁니다. 심지어 장승업은 일자무식이었다고 하는데에도 그림 하나로 당대를 평정했다니 그 실력은 두 말할 필요 없지요. 소개된 "수리"와 "고양이" 그림은 이를 잘 증명해주는 걸작이었습니다.
또 16세기 함경도 기생 홍랑이 임과 헤어지면서 쓴, 아주 오래전 교과서에서 보았던 "묏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라는 시조를 직접 한글로 쓴 '절유시'는 글씨가 너무 예뻐서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 시조가 아직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만약 수록되어 있다면, 홍랑이 직접 쓴 이 서예 작품도 함께 실어주면 참 좋을 듯 합니다. 학생들에게 우리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려줄 수 있을거에요.

물론 새로운 내용, 작품, 작가만 소개된건 아닙니다. 당연히 신사임당,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 등등 일찌기 잘 알고 있던 대가와 명작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지요. 조선 서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가와 작품들이라 어쩔 수 없었을거에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좋은 책입니다. 편집과 디자인도 완벽한 수준이고요. 이런 책을 소장하지 않으면 무슨 책을 소장하겠습니까. 별점은 5점입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제가 구입한 책은 2013년 초판 2쇄 버젼인데, 지금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시리즈 두번째 권으로 표지까지 바뀌어서 재출간되었네요. 제가 예전에 구입했던 "국보순례"도 이 시리즈에 포함되어 재출간되었고요. 이럴거면 처음부터 시리즈로 출간하는게 좋았을텐데 말이죠. 가격을 올리려는 꼼수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2020/04/26

우연한 걸작 - 마이클 키멜만 / 박상미 : 별점 2.5점

우연한 걸작 - 6점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세미콜론

여러 예술가들의 걸작들을 전부 10개의 주제로 나누어 왜 그 작품이 걸작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책으로 예술에 대해 깊이있는 식견을 바탕으로 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전혀 쉽지는 않아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설명하는 느낌이거든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기록해 볼 만 한 내용들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보나르의 작품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현대 인상파'라 부를 수 있는 좋은 그림이기 때문에 걸작이라는군요. 도판만 보았을 때에는 인상파라기 보다는 좀 더 괴기 쪽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요.
아마츄어리즘은 적은 노력으로 큰 만족을 얻는 쪽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밥 로스와 일맥상통하기에 밥 로스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츄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프로와 별 다를게 없다는 이유이기도 한데,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지요. 게다가 별다른 목적없이 그리거나 찍은 작품이 '우연과 실수'라는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와 연결되어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다는군요. 이유는, 이 책에 쓰여진대로라면 그 작품에서 무언가 놀랍거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걸작이라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 미술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과정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해 보여요.
문제는 그런 평을 전문 비평가가 해야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아마추어리즘과는 좀 분리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드네요.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 아서 딘토는 아름다움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는데, 이 노력에 대한 설명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수준이 판가름날 테니까요. 제가 '이게 걸작이야!'라고 제 딸 아이 그림을 평가해도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결국 다 평론가들 놀음이라는 점에서는 입맛이 좀 씁니다.

또 시대에 따라 경험이 변해서, 아름다움의 정의가 변한다는 것도 와 닿았습니다. 명확한 사실이니까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여러가지 매체에서 수없이 보았을 '모나리자'를 보고 놀라움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지요. '놀라움' 을 느낄 여지가 적어졌다는 점에서, 현대는 정말 예술을 하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존 케이지의 음악처럼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도 못할 기괴한 발상이 난무하고 있죠.
그래도 재미있는 작품과 발상들이 몇 가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저자의 친구 알렉스의 서재가 대표적입니다. 알렉스는 원룸 집 벽에 나무 책장을 들여 놓았는데, 책으로 가득차 책 한 권을 더 꽂으려면, 그 두께만큼 다른 책을 빼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재는 자츰 진화하고, 가꾸는 물건이 되었으며 결국 알렉스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죠. 여기에 더해 가차없으면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기에 이는 예술이며 작품이 되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합니다!
존 레넌의 아내였던 오노 요코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존 레넌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외국 여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의 교육과 깊이를 가진 여성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수동성'을 표현했다는 그녀의 여러가지 작품들도 인상적이었고요.
 수집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집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감식안과 더불어 일종의 상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인데, 이유보다도 앨버트 C. 반스의 수집품이라는 실례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진열 방식으로 수집품이 진열되었는데, 덕분에 그림을 새롭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오노 요코 외에도 새로 알게된 사실은 많아요. 화가들도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던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루이스 캐럴은 변태가 아니었다는 것,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 말이지요. 특히 보나르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옛 연인 르네를 그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보나르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마르트가 잘 보이지도 않게 등장해서, 화면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르네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보나르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만, 르네야말로 그의 마음 속 천사였고, 마르트는 그를 뒤에서 지배하는 움울한 지박령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르네가 마르트와 눈이 마주친건, 결국 지박령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암울한 그림이라 할 수 있고요. 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니 이런게 예술인거겠죠?

몇가지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굉장히 흥미로와서 인터넷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은 유대인 아가씨 샬로트가 죽기 직전까지 몰두하여 만들었다는, 1300쪽에 이르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인생? 혹은 연극?"이 대표적입니다. 그게 뭐든, 양이 많으면 일단 독보적인 무언가가 되는 듯 합니다.
자수로 프로야구 선수들 초상화를 만든 죄수 출신 작가 레이 매터슨의 작품들, 초창기 남극 탐험에서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프랭크 헐리의 기록 사진들도 찾아볼 만 하더군요. 저자가 작품 창작 과정을 직접 관찰한 화가 펄스타인의 작품들 역시 괜찮았습니다. 한 점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거대 작품, 해당 작품이 놓인 장소로 여행을 떠나야지만 볼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이상했습니다. 감상 순간의 주변 환경이 중요한 장소 특정적 예술이라는게 있다는 논리에서 시작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대의 이런 작품들은 그냥 크기로 승부하는, 크기로 놀라움을 주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전부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었어요. 거대 기념비와 별 다를게 없는데 이게 과연 예술인가요? 화가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큰 돌덩어리가 예술이 되는건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에 비하면 일상 속 아름다움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샤르댕이나 티보의 작품들이 훨씬 예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도판이 부실한건 굉장히 아쉽네요. 컬러로 수록된 도판도 부족할 뿐더러, 그나마 수록된 도판들도 저자가 설명하는 작품들을 전부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궁금한건 인터넷으로 직접 찾아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수록된 도판도 흑백이 많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고, 예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독서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지 제 취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