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이소영 지음/모요사 |
미술사를 바꾼 여러 가지 그림 도구 및 각종 계기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제목에서처럼 도구들이 설명되고 있지만 화가의 직업병을 다룬 '백내장' 같은 챕터와 같이 다른 분야도 폭넓게 소개해줍니다.
특히 이런 도구와 각종 계기들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의 도입처럼요. 이동이 용이한 캔버스 덕분에 그림이 더 이상 교회와 건물에 붙박이 장식으로 활용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유행하게 되었다니 대단한 혁신을 이룬 셈입니다. 나무 패널에서 캔버스로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습하고 소금기가 많은 대기는 프레스코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베네치아에서는 나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중요 자재였기 때문이었다니까요. 그래서 해양강국답게, 돛을 만들던 기술을 활용한 캔버스가 대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의 질감을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 소개도 좋았어요.
이런 캔버스만큼, 아니 더 큰 미술사의 혁명을 불러온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크릴 물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미술은 현실 세계에 없는 입체감 없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라는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경쾌하고 선명한 색감, 빠른 건조에 어디에나 그릴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춘 아크릴 물감의 등장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크릴 물감 챕터에서는 이렇게 아크릴 물감이 현대 미술을 그야말로 '접수'한 신소재라는걸 여러가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예를 들어가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결합된 현대미술의 큰 이바지를 한 빌리 클뤼버,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E.A.T 소개도 좋았습니다. 당연히 미술가들이 기계적인 작품을 혼자서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기술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몰랐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협의 기간이 오래 걸렸고, 심지어는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못할 때 다른 기술을 제시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했던 작품도 있었다니 - 앤디 워홀의 <<은색 구름>> - 이 정도면 함께 창작을 진행한 동료라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아요. 더 이상 기술의 도움없는 예술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템페라화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템페라화는 유화가 유행한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 나름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군요. 약간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질감과 색감이 현대 미술의 어떤 분야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라나요. 게다가 21세기에는 공장에서 제조된 물감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템페라 물감이 또다시 유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니까요. 또 달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처럼 부엌 재료들이 일찍이 물감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식인데, 확실히 화가들도 계속 연구와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라는걸 잘 알려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네요.
'종이'에서는 터너의 수채화의 독특한 질감과 효과는 모두 그가 사용했던 종이 덕분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종이에 상처를 낸 뒤 물을 붓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무늬와 명암을 얻는 터너의 기법은 현재의 종이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종이 원료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용으로 '터너풍 수채화 종이'를 개발해서 판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팔레트'는 미술 도구로서의 팔레트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팔레트는 필요없는 그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가들이 팔레트에 뿌린 물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팔레트에는 대체로 열 개 정도의 물감만 쓰였고, 전통적인 팔레트는 혼색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혼색 대신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비비고 흩뿌려 작업했다고 합니다. 즉 인상주의의 탄생은 튜브형 물감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는 팔레트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튜브형 물감과 같은 합성 물감도 한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데, 일전에 다른 다른 책에서 읽었던 고흐의 독특한 노란색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은 독특하게도 화가들의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질환을 앓은 화가들이 많았다는데, 드가가 거의 완전 실명에 이르른 탓에 유화를 그리지 못해 파스텔화와 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는건 몰랐었습니다. 유별나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백내장 등의 질병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물감들에 포함된 납 성분,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 방식 등이 이유였겠지요. 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이 초기의 세밀하고 부드러웠던 그림에서 거친 파스텔 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에 걸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컴퓨터에서 재현하면 드가와 모네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도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림과 미술사, 각종 재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확실히 미술사 전문 출판사 모요사의 책 답게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잡고 있어요. 도판이 너무 작다는 점, 그리고 소개되는 모든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지 못한 점은 좀 아쉬우며, 전문가적인 이야기에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이 다소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옥의 티라 할 수 있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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