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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Q.E.D Iff 증명종료 21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1점

Q.E.D Iff 증명종료 21 - 2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신작이 나온지 모르고 있었는데 뒤늦게 찾아 읽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졸작이었습니다. 20권이 간만에 높은 수준을 보여줬기에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수록작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디오판토스 방정식"
이즈미 코타는 수학 올림피아드 강화 학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토마와 가나를 만났다. 토마 덕분에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인연이 있었다...

수학 올림피아드 학습 중 일어났던, 합숙생 호즈미가 사유지 건물 옥상에서 사라진 방법을 해결하는 일상계 단편. 
이외에도 합숙 멤버들 책상에 놓여있던 인형의 정체, 그리고 아래의 상황에서 학생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와 마지막의 논리 퍼즐같은 소소한 수수께끼도 등장합니다.
호즈미 소실과 인형들, 논리 퍼즐은 모두 강사 세키의 계획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학생들이 단순히 수학 문제를 푸는 기계가 아니라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에 도전하고, 미지의 황야를 나아가기를 바랐는데, 그 때 불안과 고독을 느끼고 패닉에 빠질지도 몰라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호즈미는 세키의 제자로 계획에 참여한 공범(?)이었고요.

그런데 '문제를 잘 읽는게 중요하다'는걸 알려주기 위해 인형들을 사용한 것 정도는 그럴싸했지만 (인형에 표기된 글자는 모두 오자였다), 일상 속 불가능 범죄를 푸는게 수학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사유지 건물 옥상 트릭은 일종의 숨바꼭질(?)에 불과한 트릭이라서 수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요.

마지막의 디오판토스 방적식을 푸는 과정과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기쁨을 표현한 부분만 '학습 만화'로 약간의 가치가 있을 뿐,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망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사후의 편지"
폭력단 코단 조직의 말단 조직원 사사메 켄토가 밀실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용의자 와타보시는 투자회사 사장 마다라 에츠코의 사기 피해자로, 마다라 에츠코가 코단 조직을 이용해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사메의 애인 사키의 집에 조직원들이 쳐들어와 켄토가 남긴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조직은 켄토가 조직이 시킨 어떤 일의 증거를 남겼다고 여겼다. 사키와 안면을 튼 토마 덕분에 진상이 밝혀지는데....


켄토는 사키의 아이에게 마술을 보여주겠다며 조각이 들어있지 않은 빈 만화경을 샀었습니다. 그리고 켄토 사후에 사키에게 빈 봉투의 편지를 보냈고요. 트릭은 이 두가지를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빈 만화경으로 봉투를 보면, 봉투에 붙여놓았던 종이의 무늬가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무늬는 켄토가 사키에게 선물했던 지갑을 의미하는데, 지갑 안에는 SD 카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럼 SD카드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을까요? 켄토가 보스 시모아라메의 지시로 와타보시를 죽이려고 잠입했다면 (그리고 역으로 살해당했다면) 이에 대한 증거를 남겼을리 없습니다. 자기 범죄를 증명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토마는 "켄토는 시모아라메의 지시로 와타보시 집에 잠입해서 자살했으며, SD 카드의 내용은 그것을 증명한다"고 추리했으며, 그게 정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SD카드를 숨긴 곳을 알리는 만화경 트릭부터 실망스럽습니다. 만화경으로 빈 봉투를 들여다본다는걸 누가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런건 단서도 뭐도 아닙니다. 대단한 곳에 숨긴 것도 아니고, 지갑안에 숨겼을 뿐인데 암호를 남긴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발견되었을테니까요.
밀실 살인이 아니라 밀실 살인을 위장한 자살이라는 아이디어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일개 조직 폭력배 조직원이 보스가 자살하라고 했다고 선뜻 자살한다?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카리스마가 있는 보스라면 이미 일본을 제패했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그나마 추리 요소가 있을 뿐, 전작과 다름없는 망작이었습니다.

2023/11/26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고미네 하지메 / 민경욱 : 별점 2점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4점
고미네 하지메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설회사 대표 시바모토 겐지로의 딸 미유키가 임신 중절 수술 후유증으로 죽은 뒤, 아이 아빠 후보로 의심받던 야규는 친구 나이토의 도시락을 먹고 입원했다. 도시락에 비소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야규의 누나 미사코의 불륜 상대 가메이가 실종된 뒤, 야규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야규의 어머니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했지만, 노무라 형사는 야규의 알리바이를 깨버리고 진상을 밝혀내었다. 모든 사건은 엔메이, 야규, 나이토, 아라키 네 명이 결성한 아르키메데스 모임의 의도였다....

1973년 제 9회 란포상 수상작. 올해 일본 작품을 너무 많이 읽어서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지만, 란포상 수상작 완독 달성을 위해 읽게 되었네요.

야규가 가메이를 살해한 날, 수학 여행을 갔다는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습니다. 배에서는 정확하게 학생들을 확인하지 않고 사람수만 센다는 맹점을 이용해서 다른 학교 학생을 대신 세도록 만들었고, 배 안에서는 "야규와 함께 있었다"는 엔메이의 거짓 증언으로 함께 탄 것으로 위장한 트릭으로 간단하지만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트릭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규가 살인범인지, 어머니가 살인범인지를 놓고 벌이는 마지막의 취조 과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손으로 목을 졸랐다는 야규의 증언과 실제 사체의 교살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잘 풀어냈습니다. 가메이가 죽은 줄 알고 시체를 파묻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걸 알고 어머니가 확실하게 목을 졸랐던 거지요.

그런데 그 외에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사건을 저지르는 주체인 "아르키메데스 모임" 부터가 전혀 와 닿지가 않아요. 이들이 주변의 부정을 벌한다고 계획한 것들 모두 정의로움을 느낄 여지가 없는 탓입니다. 임신중절 수술로 미유키가 죽은 사건만 놓고 보아도 그러합니다.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심지어 멤버 중 한 명인 나이토의 아이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를 어른에 대해 복수에 성공했다며 희희낙락하고, 이를 꾸짖는 어른에게 한 마디도 지지않고 맞선다? 어이가 없어요. 자괴감과 미안함에 몸부림치며 사죄해도 부족합니다. 나이토가 미유키가 죽은 뒤에도 아르키메데스 모임 멤버들과 우정을 이어나간건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아예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또 미유키를 임신시킨건 겐지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는 겐지로가 지은 건물이 일조권을 빼앗아 나이토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복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토의 할머니의 사망이 일조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겐지로 역시 그냥 건물을 올린 것도 아닙니다. 분명 정당한 보상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뭘 잘못해서 딸을 잃기까지 했어야 하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미유키를 질투한 엔메이의 치정이 결합된 치졸한 행동이 원인이었습니다. 정의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셈이지요.
 
야규가 저지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연히 불륜을 저지르는 가메이같은 인간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불륜은 야규의 누나가 함께 저지른 겁니다. 왜 남자만 단죄하겠다는 걸까요? 그리고 단죄가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수학여행을 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갔다고 누나만 속여도 충분했으니까요. 
즉, 이렇게까지 치밀한 알리바이를 만든건, 단지 혼을 내주려던게 아니라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며, 이는 파렴치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다는 아르키메데스 모임의 취지를 거스르기에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1급 살인 미수라는 점에서 처벌도 보다 강력해야 할 테고요.

"청춘 미스터리"의 효시라는 소개 역시 제가 보았을 때는 지나친 과찬입니다. 작품 속 청춘은 자기 확신에 가득찬 몰염치하고 비겁한 놈들입니다. 아르키메데스 모임은 극 중 노무라 형사의 말대로 그냥 야쿠자 조직과 다를게 없어요. 게다가 고등학생들이 기성 세대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묘사는 진부했고, 특히 전공투와 연합 적군파를 긍정하는 듯한 발언 등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주인공으로 청춘(고등학교 2학년생)이 등장할 뿐 청춘과는 거리가 멉니다. 차라리 평범한 학생이 누나의 불륜남을 응징하려고 하다가 사건이 벌어지는 식으로 진행되었더라면 모를까, 고등학교 범죄 조직의 범죄극에 불과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알리바이 트릭은 일견 괜찮아 보였지만, 부두에서 기차 등을 타고 거의 3시간에 걸쳐 집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목격자가 나타나서 트릭은 실패하고 말지요. 
그 외 사건에서 작위적인 부분들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야규의 누나 미사코가 자살한걸 의문스럽게 묘사한게 대표적입니다. 미유키가 죽기 전 아르키메데스라는 말을 남긴다던가, 야규 목격자는 신문 투서를 통해 알아낸다는 등도 마찬가지고요. 엔메이 등 다른 아르키메데스 멤버들이 왜 위증으로 처벌받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리바이 공작을 위해 형사에게 거짓 증언을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작품이 발표된 40년 전에는 나름 신선하고 가치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여러모로 함량 미달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3/11/25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스튜어트 터튼 / 최필원 : 별점 2점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4점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년 전, 장남 토마스가 관리인 카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하드캐슬가의 저택 블랙히스 하우스에서 그날의 손님들을 고스란히 다시 불러모은 파티가 열렸다.
손님 중 한 명인 의사 서배스천 밸은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숲에서 깨어나 애나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걸 목격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앞에 흑사병 의사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나타나 여러가지 경고를 날렸다. 이런 저런 경고와 조언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서배스천은 누군가 자기에게 죽은 토끼를 선물한걸 발견하고 실신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고난 뒤, '나'는 집사 콜린스로 깨어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흑사병 의사는 '나' 에이든 비숍에게 그는 모두 여덟 명의 다른 사람으로 하루를 반복하게 되며, 무도회에서 살해당하는 하드캐슬의 장녀 에블린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이 루프 속에 다른 두 명의 경쟁자가 있다는 말과 함께.
에이든 비숍은 하룻동안 8명 - 마약 판매상이기도 한 의사 서배스천 벨, 집사 스탠윈, 늙고 뚱뚱한 레이븐코트, 강간범 더비, 에드워드 댄스, 순경 짐 래시턴, 도널드 데이비스, 화가 그레고리 골드 - 의 몸을 오가며, 에블린 하드캐슬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본인과 애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미래는 경고가 아니야, 미래는 약속이라고.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가 결코 깨버릴 수 없어. 바로 그게 우리가 갇힌 이 덫의 본성이라고."

어딘가에서 추천하는 글을 읽고 알게 된 영국 대장편 판타지 미스터리. 무슨 리스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하루를 반복하는 루프물이라는 아이디어는 특별한건 아닙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제목처럼 계속 반복해 살해당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내용마저도 비슷하지요. 루프보다는 시간 여행에 가깝지만, 과거를 반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세계", "리피트", "나만이 없는 거리", "타임 리프"등 수도 없이 많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설정에 딱 한 가지 차이를 두어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한 명이 하루를 반복하는게 아니라,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입니다. 

루프에 갖힌걸 모른 채 에블린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이 드러나는 도입부는 신선하고 흥미로왔습니다. 사건 자체는 심플합니다. 에블린 하드캐슬이 자살한건 부모가 돈 때문에 레이븐코트 경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걸 막으려고 동생 마이클 등의 도움을 받아 벌인 연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에블린으로 알고있던건 사기꾼 펄리시티 매덕스였습니다. 오랫만에 유럽에서 돌아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에블린은 하녀 마들렌으로 변장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마이클은 연극이라 믿고 있었던 펄리시티 매덕스를 살해해서 자살로 보이는 살인을 완성했습니다.
동기는 19년 전 토마스 살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토마스를 죽였던건 에블린이었습니다. 토마스가 에블린과 마굿간지기 파커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하드캐슬과 불륜 관계로 에블린의 진짜 부친이었던 카버는 딸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누명을 쓰고 교수대로 향했죠. 그러나 레이디 하드캐슬이 에블린이 진범이라는걸 알아채서 입막음 댓가로 가문을 위해 에블린에게 레이븐코트와 억지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에블린은 부모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자살한걸로 위장하려 했던 겁니다.

에블린의 자살이 연극으로 위장한 살인이었다는걸 증명하는 단서도 제대로 제공됩니다. 대표적인게 "왜 권총 두 정을 모두 가져갔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마이클이 나머지 한 정으로 죽은 척하던 에블린 - 으로 변장한 펄리시티 매덕스 - 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그 외 발견된 신호용 피스톨 (총 소리만 내기 위함), 피를 담아둔 병도 자살 연극에 사용되었다는 추리로 잘 이어집니다.
루프를 오가는 중간중간마다 '체스말'같은 연결고리도 충실히 제공되고 있어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전해주고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기는 한데, 이야기를 괜히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해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각 인물별로 시간대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에이든 비숍이 얻는 정보도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굉장히 복잡한 구성과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정보와 단서는 전개 후반인 순경 짐 래시턴 시점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앞서 다른 사람들 - "호스트"라고 불리우는 - 의 정보들은 추리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8명의 '호스트' 들의 설정들도 불필요하게 장황합니다. 서배스천이 마약을 몰래 공급해왔다던가, 레이븐코트가 식탐이 엄청난 고도비만이었다던가, 더비가 성범죄자라던가하는건 에블린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협박범 스탠윈, 하드캐슬 가문의 사생아 커닝햄, 또다른 루프 참여인물 대니얼 콜리지 등의 주변 인물들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황하더라도 설명이 명확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정작 중요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대니얼 콜리지가 에이든을 방해하는건 당연하지만 - 루프에서는 한 명만 탈출할 수 있어서 -, 애나가 에이든에게 협조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루프의 정체 - 일종의 감옥 - 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소자들을 살인 사건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타인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저만 이해를 못하는걸까요? 그리고 에이든 비숍은 애나를 찾아 제발로 루프에 들어왔기 때문에 배석 판사 흑사병가면이 호스트 통제권 및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반 감옥이라고 치면, 감옥 재소자를 제 발로 찾아온 선량한 시민에게 감옥에서 지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말과 같은데 이건 말도 안되죠. 그냥 일종의 "두뇌 게임"을 펼치기 위한 장을 억지로 만든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사악했던 괴물 애나벨 코커는 비숍의 여동생을 고문해 죽였지만, 그녀는 죽고 지금의 애나는 갱생했다! 비숍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 증명했다! 며 두 명 모두 풀어주는 마지막의 해피 엔딩도 허무했습니다.

복잡하고 일견 치밀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핵심 전개와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전개는 부족하고, 기본 설정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잡하지만 알고보니 알멩이 없는 미국 드라마같은 작품입니다. 정통 추리물을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23/11/24

살인 플롯 짜는 노파 - 엘리 그리피스 / 신승미 : 별점 2점

살인 플롯 짜는 노파 - 6점
엘리 그리피스 지음, 신승미 옮김/나무옆의자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서 범죄 소설 읽기가 취미인 아흔 살의 페기 스미스. 그가 즐겨 앉던 의자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을 때, 노인의 죽음은 의심 없이 자연사로 처리될 뻔했다. 간병인 나탈카가 'M. 스미스 부인. 살인 컨설턴트'라고 적힌 명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의문을 품은 나탈카는 페기의 아파트를 정리하다 페기가 소장한 수많은 범죄 소설에서도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다. 책 앞쪽 '헌사'나 책 뒤쪽 '감사의 말'에서 '페기의 조언에 감사한다'는 문구를 무수히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른 책들을 들춰보며 단서를 찾던 나탈카는 페기가 죽는 순간 읽고 있던 책에 끼워져 있던 엽서를 발견하고 만다. '우리가 당신을 찾아간다.'라고 쓰인 의문의 문장. 뒤이어 총을 든 괴한이 페기의 아파트를 찾는가 하면, 페기에게 감사의 말을 헌정한 작가 중 한 명인 덱스 첼로너가 살해당하는 등 노부인의 죽음은 책과 작가들을 둘러싼 거대한 수수께끼로 비화하고, 애거사 크리스티, 도로시 L. 세이어스를 비롯해 추리소설 황금기 작가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실라 앳킨스의 책이 사건의 단서로 떠오른다.

홀로 노년을 보내던 노인이 많은 추리작가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고, "살인 컨설턴트"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협박장까지 받았다는게 밝혀지는 도입부는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페기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을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좋은 장치들이었어요.
페기의 이웃 친구인 노인 에드윈, 간병인 나탈카와 그들 단골 카페 사장인 베네딕트와 사건을 맡은 하빈더 형사가 힘을 합쳐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별거 아닌 듯 했던 90살 노인의 죽음이 유명 추리 소설 작가 덱스 챌로너와 랜스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확장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우면서, 여러가지 단서와 정보들의 제공을 통해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고전 추리 소설인 실라 앳킨스의 "감사 단식" 이라는 책 속에 단서가 있다는 말 처럼요.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간병인이자 비트 코인으로 50만불이 넘는 돈을 가지고 있는 미녀 나탈카, 전직 수사 (수도사) 출신의 바리스타이자 추리 드라마 매니아인 베네딕트, 전 BBC 직원이자 게이로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갖춘 80대 노인 에드윈 트리오의 매력도 빼어납니다. 다들 여러가지 약점들을 갖추고 있지만, 매력도 확실해서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인물들이거든요. 

하지만 흥미로운 전개에 비하면 결말은 어설픕니다. 덱스 챌로너 사건의 범인이 밝혀진건 CCTV에 범인이 찍혔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이유입니다. 즉, 트리오가 스코틀랜드 에버딘까지 여행을 떠나면서까지 조사에 나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도 딱히 없고요. 간병인 회사 대표 퍼트리샤가 범인이었다는 진상도 앞서 별다른 단서나 정보 제공이 없어서 그리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동기도 문제에요. 퍼트리샤는 덱스의 어머니 베로니카의 돈을 빼돌리다가 들통나 그녀를 살해했고, 이 사실을 덱스가 알아챌까 두려워 살해했다고 하는데, 베로니카가 살해되었다는걸 현 시점에서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유명 작가를 살해하면서까지 입을 막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페기와 랜스를 살해한건 또 다른 추리작가 줄리였다는 것 역시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녀의 데뷰작이자 유일한 히트작이 실라 앳킨스의 "감사 단식"의 표절이라는걸 둘이 알아채서 살해했다는 동기부터 어설퍼요. "감사 단식"은 절판되었지만 베네딕트도 쉽게 구할 정도로 많이 퍼져있었습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책을 읽은 사람을 모두 죽일 수는 없잖아요? 이 이유라면 베네딕트는 왜 살해하지 않았을까요? 설령 유명 작가로 문단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랜스는 살해한다 쳐도, 페기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름 건강한 남자였던 랜스가 분명히 그의 입장에서는 요주의 인물인 - 자기 어머니 소설을 표절한 작가 - 줄리가 독약을 주사하는걸 수수방관한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다른 무언가로 협박했겠지만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뭔가 공정해보이게끔 단서를 깔아놓기는 했는데, 독자가 이를 해석하고 추리하기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책 속에 단서가 있다"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이 말은 책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성 패트릭의 그림(책갈피)을 뜻하고, 패트릭은 바로 퍼트리샤이다! 라는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책갈피의 존재는 극후반에 공개되기에 추리의 여지는 전무할 뿐더러, 간병인 마리아에게 왜 "퍼트리샤가 뭔가 수상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또 핵심 동기인 "감사단식"과 줄리의 데뷰작 내용이 비슷하다는건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에게 아예 제공되지도 않고요. 소개되는 정보, 단서 중 범인을 밝히는데 유용했던건 기껏해야 페기가 관찰한 통행인들을 기록한 노트가 전부입니다. 이 마저도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페기가 줄리의 표절을 알고도 계속 도와준 이유라던가, 마일즈가 어떻게 덱스 첼로너의 소설과 같은 소설을 먼저 완성할 수 있었는지 등 그 외에도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앞서 캐릭터가 매력적이라고 했지만, 나탈카가 우크라이나에서 비트 코인 관련 사기를 쳐서 마피아에게 쫓기고 있다던가, 나탈카를 쫓는 2인조 러시아인은 알고보니 덱스 챌로너의 출판 담당자 마일스를 쫓고 있었다는 내용은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서스펜스를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이었겠지만, 추리 소설 매니아인 독거 노인에 관련된 죽음을 다루는 코지 미스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설정이었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지만 비현실적인 캐릭터, 뭔가 있어보이지만 알멩이 없는 전개, 사전에 전혀 공유되지 않았던 충격적이면서 뜬금없는 진상 등의 요소를 종합해보면 영상물에 더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네요.

2023/11/22

친구 - 타카노 후미코 / 정은서 : 별점 3점

친구 - 6점
타카노 후미코 지음, 정은서 옮김/고트(goat)

<<막대가 하나>>로 접했던 타카노 후미코의 단편집. <막대기 하나>>는 수록작 중 이해하기 힘든게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어요. 물론 다소 설명이 부족하거나, 우리나라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감성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비교적 긴 호흡으로 나름대로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일본 친구와 미국 친구로 목차가 나뉘어져 있는데, 일본 친구 중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 그리고 미국 친구 중 <<바비 & 허시>>의 두 편이 특히 좋았어요. 잔잔한 내용도 마음에 들고, 작가 특유의 귀여우면서도 서정적인 그림체도 잘 어울려서 누구나 좋아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작품만의 평균 별점은 4점이지만, 아쉽게도 그 외 작품들은 소소하거나, 딱히 언급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전체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저 두 편 만큼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봄 부두에서 태어난 새는>>
개항기 (아마도 메이지 시대) 항구 도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의 가극 공연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메이지 시대 외국인과의 혼혈로 태어난 소녀, 전염병에 걸린 소녀의 가족들... 등 드라마틱한 소재를 잔뜩 깔고 있는데 반해, 잔잔한 전개를 보여주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음 착한 소녀인 주인공 쓰유코가 잘 몰랐던 친구 후에코와 공연을 계기로 마음이 통하게 되는 과정을 귀엽고 서정적으로, 그야말로 소녀 감성 가득하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곳곳에 실제 가극 공연 장면을 삽입한 것도 좋았고요.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 시절, 그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리게 해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백합물이 대세인 트렌드와도 얼추 어울리는게, 확실히 유행은 돌고 도는 듯 합니다. 별점은 5점!

<<바비 & 허시>>
미국 소도시의 고등학생들의 귀여운 사랑 이야기. 자전거를 갖고 싶은 소녀 허시가 자전거에 낚싯대를 달고 다녀 모두에게 웃음거리인 소년 바비와 친해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서로 살짝 호감을 갖게 되는 과정을 거쳐 마지막 파티에서 가벼운 키스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마무리 됩니다. 초등학교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순진한 이야기인데, 오히려 그런 부분이 최근 보지 못했던 거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드라마는 없다는건 단점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3/11/19

식민지의 식탁- 박현수 : 별점 4점

식민지의 식탁 - 8점
박현수 지음/이숲

일제 강점기 시대 발표되었던 문학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먹거리, 식문화 및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고찰하도록 해 주는 미시사, 식문화, 인문학 서적.

일제 강점기 시대는 관심이 많아서 예전부터 이런저런 미시사 서적을 읽어왔었는데, '문학 작품'을 가지고 식문화를 조망하는 책은 처음 봤습니다. 크게 10개의 작품으로 목차는 구분되어 있는데, 실제로 등장하는 작품은 훨씬 더 많습니다. 이광수의 "무정", 이상의 "날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동백꽃", 심훈의 "상록수" 등 누구나 아는 유명 작품들에서 이름 모를 작품까지 그 폭도 굉장히 넓고요. 
샌드위치, 우동, 설렁탕 등의 요리와 관부 연락선 내 식당, 선술집, 카페와 바, 시골 주막, 백화점과 호텔, 명치제과 등의 장소, 그리고 요리의 가격과 그 유래, 당시 레시피까지 심도깊게 알려줘서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여러 작품들에서의 해당 요리와 장소에 대한 묘사를 뽑아내어 생생하게 알려줌은 물론이고, 관련된 다른 자료들도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선술집이 술 한 잔을 시키면 안주 하나가 공짜였다, 서울 시내에서 약수를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지짐이'는 찌개와 국 사이에 위치한 국물 요리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위스키 중 하나는 '화이트 호스'였다는 등 새롭게 알게된 지식도 많습니다. 김남천의 "사랑의 수족관" 속 묘사를 통해 당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는게 일반적이었다는 것도 그러하고요. 하긴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다방' 이란 곳에 가면 항상 설탕 단지가 놓여있었지요.
또 조선 최고의 고급 식당이었다는 조선호텔의 1936년 정통 코스 순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가짓수가 다소 부족하지만, 지금 보아도 손색없는 구성이더라고요. 1936년에 조선에서 자몽 소르베라니!
  1. 애피타이저 : 콘소메와 레터스 샐러드
  2. 메인요리 : 오리간 구이와 로스트 비프
  3. 디저트 : 자몽 소르베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아침, 점심, 저녁 각각 1원 50전, 2원, 3원 50전으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45,000원에서 105,000원 정도라는 가격도 꽤 상식적이고요.
그 외에도 송이 산적 레시피는 새송이 버섯으로 대체해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등, 제 흥미를 끈 내용은 굉장히 많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작품 속 인용하는 부분으로 분석하여 알려주기도 하는데, 심훈의 "상록수"에서 동혁과 영신을 초대한 백 선생이 입만 살아있는 속물이었다는건 그녀가 대접한 카레라이스, 하이라이스 등으로 알 수 있다는 식입니다. 농촌 계몽을 부르짖지만, 본인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그걸 과시까지 한다는걸 잘 드러내기 때문이거든요. 어린 시절 "상록수"를 읽었을 때에는 카레라이스가 '새로운 화양절충'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걸 몰랐었기에 저런 은유나 비유를 잘 알 수 없었는데, 확실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느냐가 작품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영신이 일본에 갔다 온 뒤, 선물로 가지고 온 바나나를 잘게 썰어 아이들에게 먹여주었던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귀했다는건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면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거지요. 조금 부끄럽네요. 앞으로 좀 더 책을 생각하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다른 일제 강점기를 소개하는 책들과 겹치는 내용이 많은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바와 카페는 이미 많은 책을 통해 접했었습니다. 이 책처럼 문학 작품을 이용하여 소개해 준건 아니지만요. 낙랑파라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시골 주막의 풍경 등은 주제와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였으며, 가끔 저자의 주장이 뭔가 촛점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는건 단점입니다. 샌드위치와 된장찌게의 비유에서 갑자기 레비스트로스의 요리의 삼각형으로 튀는 부분처럼요. 그냥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이 훨씬 더 많은 책인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식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11/17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유키 신이치로 / 권일영 : 별점 2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4점
유키 신이치로 지음, 권일영 옮김/시옷북스

일본 추리계의 신성이라는 작가의 단편집.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공정한 정보 제공과 추리의 연계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반전들도 강렬합니다. 뒷맛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기묘한 맛' 류라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일단 사건들이 일어나는 상황, 동기들이 비현실적입니다. 사건을 저지른 다음의 뒷 수습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고요. 여기에 더해 전개가 너무 뻔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어요. 추리는 이런 예상을 굳히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추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던가 하는건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나마 2021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는 마지막 작품인 "#퍼트려 주세요"만이 뻔하지 않은 진상과 결말로 이어지기는 합니다만, 비현실적이라는 단점은 마찬가지고 오히려 '추리' 적인 요소가 별로라는 문제는 도드라지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자면담
가정교사 소개 영업사원 가타기리는 야노 모자와 방문 상담을 진행하던 중, 무언가 수상하다는걸 느꼈다. 야노 부인의 신경질적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행동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유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노린다는 아이가 간단한 수학 문제의 답으로 110만 쓰고 있었다....

요약에서 설명한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소년의 이름이 한자를 일반적으로 읽는 발음과 달랐다던가 ('유'가 아니라 '하루카'였음), 소년이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치지 않는다던가, 분명 먼 사립 학교를 다니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논다고 하고, 무슨 문제를 내어도 110이라는 답을 내 놓는 등 정보 제공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이웃집 부인이 진짜 야노 부인을 살해했던 동기인 쓰레기 봉투 문제까지도 앞 부분에서 설명될 정도입니다. 하루카는 이미 사고로 죽었었으며, 야노 마리가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은 망상 탓에 불거진 일이었다는 반전도 섬찟했고요.
상황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살인범과 피해자의 아들, 그리고 평범한 일반인이 함께 삼자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은 서스펜스 넘칩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우선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가짜가 가타기리를 만나서 방문 상담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아파서 날짜를 조정하겠다 정도로 이야기하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무려 20분이나 걸려 현장을 대충 치워야 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무리 공포에 질려 있었어도 순순히 범인의 협박에 따라 행동한 것도 이상해요. 작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이면 성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언급할 그런 나이인데 말이지요. 전개도 너무 뻔합니다. 초반부터 야노 부인이 가짜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대 놓고 수상하다는걸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매칭어플
나는 kento라는 가명으로 매칭어플을 통해 마나를 만나 데이트한 뒤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을 관찰하고 샤워를 하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나가 원조 교제 남성들을 낚아 협박하는 조직의 멤버였으며, 마나의 자취방은 일당의 아지트였다는 내용은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마나가 데이트 중 했던 말과 방 안 사물들이 일치하지 않았고, 샤워기 높이 등도 잘못 놓여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위한 정보 제공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정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어요.

그러나 딸의 원조 교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딸이 매칭 어플로 원조 교제를 한다고 딸을 닮은 원조 교제녀들을 여러명 죽이고 다닌다? 이건 비현실적을 넘어서는 미친 설정입니다.
또 주인공이 매칭 어플을 사용하는 딸과 닮은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는데다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kento의 딸 미유키 역시 조직의 멤버였다는 반전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작위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문자 메시지가 배달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도라
명문대 출신인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힘들게 딸 마나쓰를 얻은 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자 제공을 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자 제공은 딱 한 번에 그쳤다. 그리고 1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자 어린이 연속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 호조지 재판이 잘못되었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어느날, 나의 딸이라는 아이 쇼코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잔잔한 드라마로 쇼코와의 대화를 통해 마나쓰가 친딸이 아니며, 아내도 다급한 나머지 정자를 기증받았던게 아닐까라는 깨닫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고 두 아이 모두 자기 딸로 인정하겠다는 결말이 괜찮았던 작품.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정자 제공을 한 상대가 호조지의 아내였다는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서 큰 단점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정체는 금방 밝혀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물도 아닐 뿐더러, 그녀가 정자 제공을 받으려 했던 동기가 영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호조지와 마지막 관계를 가진 뒤 그가 체포된 탓에, 혹시 임신되었을 때를 대비해 누구의 딸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 기증받은 정자를 주입했다고 합니다. 혹시 딸 쇼코가 아버지의 정체를 눈치채면 딸에게 "너는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 기증받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다"라고 말해주려고요. 그런데 유전자 검사라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결국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임신 중절을 하기 싫었다면,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키우느니 이민을 가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삼각간계
나 (기리야마), 모기, 우지하라는 대학 시절 친했던 "이쓰멘" 모임 멤버로 5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오사카에 사는 모기의 집 앞으로 우지하라가 전근온 것이 계기였다. 도쿄에 있는 기리야마를 고려해 온라인으로 가진 모임 중, 우지하라는 기리야마에게 모기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 약혼녀가 모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지하라가 보낸 사진 속 약혼녀는 기리야마가 사귀고 있는 여자 미나미였다...

전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우지하라 약혼녀의 불륜 상대가 기리야마라는건 전개 상 당연했거든요. 당연히 우지하라가 죽이려 하는 것도 모기가 아니라 기리야마였고요. 오사카에 있는 척 했던 트릭은 머리를 많이 쓴 것 처럼 설명되지만, 원격 미팅이 잦은 최근 시점에서는 새롭지도 않으며 기리야마가 눈치챈게 아니라면, 우지하라가 장황하게 설명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기리야마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원격 모임처럼 가장해서 속였다는 동기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약혼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우지하라는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쳐도, 친구 모기가 공범으로 살인에 가담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1점. 수록작 중 워스트입니다.

#퍼트려주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외딴 섬 몬메지마로 이사온 와타나베 초모란마는 자기처럼 도쿄에서 오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구와지마 사데쓰, 안자이 루주, 그리고 유일하게 토박이었던 소녀 린코와 친해졌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날, 섬에 방문했던 외지인이 나가사키에서 살해당했고 그날 이후 도쿄 출신 아이들에 대해 링크를 포함한 섬 사람들이 모두 서먹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마침 그 날은 린코가 아이폰을 보여주며 유튜버가 되자고 말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 린코는 초노를 불러내었다. 린코는 중요한걸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실패했고, 절벽에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섬에 살며 TV 정도를 제외하면 문명의 이기, 인터넷 등을 전혀 접하지 않던 섬 소년, 소녀들의 부모가 알고보니 인기 최고라는 6인조 유튜버였으며, 그 유튜브 컨텐츠는 섬에 사는 자기 아이들을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트루먼 쇼의 소규모 개인 버젼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기술력과 장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섬의 비밀을 밝히려는 외지인이 살해당한건 충성스러운 구독자들 때문이었고,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유튜버 가족들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관여하지 말자고 생각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일단 유튜브를 아이들에게 비밀로 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알려주었어도 상관없었을겁니다. 구독자들만 아이들이 '모르고 있다'고 속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영원히 속일 수도 없어요. 작 중 묘사처럼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섬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로 알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마을 주민들이 비밀에 동참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부모가 아이들 몰래 유튜브를 찍어 올렸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서 보호되고 통제가 되었을 겁니다. "귀등의 섬" 세계관처럼 고아들을 모아놓은 고립된 섬에서 선생들이 작당하고 학생들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면 모를까, 21세기에는 있을 수 없는 설정입니다.
아이 세 명의 부모 중 누군가가 아니라 루주가 린코를 직접 살해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자동차도 있고 힘도 좋은 어른들이 6명이나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 생에게 살인을 저지르라고 시킬 까닭은 없지요. 알리바이 트릭도 상당히 유치했고요. 이 모든걸 알아낸 초모란마와 사데쓰가 루주에 대한 응징을 라이브 방송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마지막 장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1/15

모형 마을 - panpanya / 유유리 : 별점 3점

모형 마을 - 6점
panpanya 지음, 유유리 옮김/미우(대원씨아이)

panpanya 최신 단편집. 제목 그대로 모형으로 만들어진 마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단편들, 그리고 주인공과 충견 레오나르도가 어디인지 모르고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를 추리해내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여행" 시리즈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일상적이지만 비일상적인 세계관은 여전합니다. 특히 아래 작품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밤 여명"
침대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는 어머니 말을 따르면서도 정전된 곳을 찾아보기 위해 침대를 움직이도록 개조한다는 이야기. 이런저런 상황들과 결말까지 기묘하고 유쾌하고 좋았습니다.


"여기는 어디일까요? 여행 3편"
주인공과 레오나르도는 처음 도착한 산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큰 깃발을 걸고 마을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둘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한달간 마을에 머무른 뒤, 도착했던 산 이름을 물어보는데....!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는 신선한 경험을 선사해 준 작품.

"모형 마을 시리즈"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과 똑같은 모형이 있다는 설정 하에 같은 제목으로 여러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비슷한 설정에서 이런저런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가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이 중에서는 분실한 모형집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마지막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비슷한 인상의 집을 후보로 놓고 이상형 월드컵 방식으로 추려나가는게 기발했어요.

그러나 panpanya의 다른 빼어난 단편집들에 비하면 새롭다는 느낌을 전해주지는 못합니다. 말을 할 수 있는 물고기를 풀어주는 척 하다가 그 친구들마저 싹 잡아버린다는 반전의 "무자비 어업"은 배신 이야기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평범, 무난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3/11/13

2023 당신의 기록 (알라딘)

알라딘에서 작년과 마찬가지로 2023년 연말 결산을 해 주었기에 포스팅합니다. 아직 2023년은 한 달 넘게 남았기에 좀 빠르다 싶기는 하지만요.
작년과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알라딘 이용자라면 한 번 이용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11/12

77단의 비밀 - 방정환 : 별점 2점

77단의 비밀 - 4점
방정환 지음/반달e

어린 시절 중국인 단장의 곡마단에 잡혀와 매를 맞아가며 곡예를 배워왔던 상호와 순이 남매는 경성에서 공연 중 외삼촌을 우연히 만난 뒤, 탈출할 결심을 세웠다. 그러나 상호만 겨우 탈출에 성공했고 순이는 곡마단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갔다. 상호는 순이를 구하기 위해 외삼촌의 통역이었던 기호와 함께 중국 봉천으로 향했고, 곡마단장이 조선에 마약을 밀매하고 어린 아이를 유괴하여 매매하는 조직 '77단'의 수장이라는걸 알아냈다. 결국 모험 끝에 봉천 한인 협회이 도움으로 77단을 일망타진하고 순이를 구하는데 성공했고, 남매는 아버지와 해후하게 된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아마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비디오로 감상했던 애니메이션이 "77단의 비밀"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서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간 원작 책의 존재를 잊고 살다가 우연찮게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장르를 놓고 보면 전형적인 모험물인데, 지금 시점에서 보면 완성도를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상황마다 편의적이고 작위적인 전개가 많은 탓입니다. 갓난아기때 유괴되어 이미 청소년이 된 남매를 외삼촌이 한 눈에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해서 곡마단이 중국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아무런 근거나 이유없이 여관 다다미 밑에서 발견한다던가, 중국 봉천에서 우연히 곡마단 단장(이 변장한 절름발이)을 만나게 되어 뒤를 쫓는다던가, 봉천 한인 협회장이 알고보니 남매의 아버지였다던가 하는 식이거든요. 급작스러운 전개가 많으며, 변장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것도 단점입니다.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대표적인게 상호의 유일한 조력자인 기호가 자기 저금까지 털어가며 상호를 돕는 이유입니다. 혈연 관계도 아니고, 그냥 통역으로 연을 맺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도와주는건지 알 수가 없어요. 순이를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져 그랬다면 이해는 갔겠지만 이는 순이가 14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불가능했을테고.... 하여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악당 조직의 이름이 왜 77단인지, 모이면 그냥 평소처럼 대화하면서 소굴에 들어갈 때 왜 귀찮은 암호 따위를 사용하는지 등도 설명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냥 클리셰들 모음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도 미행하던 상호와 기호에게 단장이 성냥불을 빌려달라고 해서 성냥을 꺼내려던 기호를 상호가 저지하는 장면 (성냥불을 켜서 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확인하려는 속셈이었음), 그리고 술집에서 새를 날려 사람들의 정신을 빼 놓은 틈에 순이를 구하는 장면 등 볼만한 부분도 존재합니다.
"다음 회"로 넘어가는 마지막 문장들도 인상적이었어요. 노골적으로 흥미를 유발하면서 다음 회를 보도록 유도하는게 고전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추억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의미있었던 독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단 이는 지극히 개인적 감상이며, 작품만 놓고보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전혀 없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완성도는 한없이 미흡하니까요....

2023/11/11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

제목 그대로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입니다. 2023년 최신 버젼이지요. 메건 애벗, 할런 코벤, SA 코스비, 길리언 플린, 타나 프렌치, 레이첼 하우젤 홀, 수자타 매시 등 유명 작가들이 뽑았다고 하네요. 나무위키에도 올라온 리스트이지만, 블로그 리뷰 연결 차원에서 포스팅합니다.

선정된 작품 100권 중 26권이 국내 미출간입니다. 출간된 74권 중 저는 27편을 읽었네요. 
절반도 읽지 못했으니 미스터리 애호가로서는 반성해야될텐데, 꼭 그래 보이지만은 않네요. 선정 기준에 의문이 큰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 이후 작품이 68편이나 선정된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보다 뛰어난 고전은 100편, 아니 1,000편도 넘을겁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언제나 그렇듯, 그냥 재미삼아 보는 리스트에 불과해 보입니다. 뉴욕 타임스도 별 수 없군요. 그래도 한국 작가 김언수의 작품 "설계자들", 그리고 1950년대 이전의 몇몇 고전들은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선정된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흰 옷을 입은 여인" 윌리엄 윌키 콜린스
The Woman in White by Wilkie Collins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Crime and Punishment by Fyodor Dostoevsky

"리븐워스 케이스" 안나 캐서린 그린 (국내 미출간)
The Leavenworth Case by Anna Katharine Green

"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The Turn of the Screw by Henry James

"바스커빌 가문의 개" 아서 코난 도일
The Hound of the Baskervilles by Arthur Conan Doyle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The Murder of Roger Ackroyd by Agatha Christie

"블랙 더들리 저택의 범죄" 마저리 앨링햄 (국내 미출간)
The Crime at Black Dudley by Margery Allingham

"18호 방의 환자" 미뇽 G 에버하트 (국내 미출간)
The Patient in Room 18 by Mignon G. Eberhart

"몰타의 매" 대실 해미트
The Maltese Falcon by Dashiell Hammett

"The Conjure-Man Dies" 루돌프 피셔 (국내 미출간)
The Conjure-Man Dies by Rudolph Fisher

"A Man Lay Dead" 나이오 마시 (국내 미출간)
A Man Lay Dead by Ngaio Marsh

"가우디 나이트" 도로시 L 세이어즈 (국내 미출간)
Gaudy Night by Dorothy L. Sayers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The Three Coffins by John Dickson Carr

"레베카" 대프네 뒤 모리에
Rebecca by Daphne du Maurier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에릭 앰블러
A Coffin for Dimitrios by Eric Ambler

"이중배상" 제임스 M. 케인
Double Indemnity by James M. Cain

"If He Hollers Let Him Go" 체스터 B. 하임스 (국내 미출간)
If He Hollers Let Him Go by Chester B. Himes

"고독한 곳에" 도로시 B. 휴즈
In a Lonely Place by Dorothy B. Hughes

"시간의 딸" 조세핀 테이
The Daughter of Time by Josephine Tey

"Beat Not the Bones" 샬롯 제이 (국내 미출간)
Beat Not the Bones by Charlotte Jay

"카지노 로얄" 이언 플레밍
Casino Royale by Ian Fleming

"죽음 전의 키스" 아이라 레빈
A Kiss Before Dying by Ira Levin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The Long Goodbye by Raymond Chandler

"내 안의 야수" 마거릿 밀러
Beast in View by Margaret Millar

"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The Quiet American by Graham Greene

"재능있는 리플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The Talented Mr. Ripley by Patricia Highsmith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셜리 잭슨
We Have Always Lived in the Castle by Shirley Jackson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 카레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by John le Carré

"혼진 살인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The Honjin Murders by Seishi Yokomizo

"Where Are the Children?" 메리 히긴스 클라크 (국내 미출간)
* 과거 "잃어버린 천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듯 한데 확실치 않음.
Where Are the Children? by Mary Higgins Clark

"더 샤이닝" 스티븐 킹
The Shining by Stephen King

"The Last Good Kiss" 제임스 크럼리 (국내 미출간)
The Last Good Kiss by James Crumley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The Name of the Rose by Umberto Eco

"붉은 10월" 톰 클랜시
The Hunt for Red October by Tom Clancy

"A Dark-Adapted Eye" 바바라 바인 (국내 미출간)
A Dark-Adapted Eye by Barbara Vine

"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The Decagon House Murders by Yukito Ayatsuji

"양들의 침묵" 토마스 해리스
The Silence of the Lambs by Thomas Harris

"푸른 드레스의 악마" 월터 모슬리 (국내 미출간)
Devil in a Blue Dress by Walter Mosley

"Mean Spirit" 린다 호건 (국내 미출간)
Mean Spirit by Linda Hogan

"법의관" 퍼트리샤 콘웰
Postmortem by Patricia Daniels Cornwell

"얼굴없는 살인자" 헤닝 만켈
Faceless Killers by Henning Mankell

"Dead Time" 엘리너 테일러 브랜드 (국내 미출간)
Dead Time by Eleanor Taylor Bland

"비밀의 계절" 도나 타트
The Secret History by Donna Tartt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Smilla’s Sense of Snow by Peter Høeg

"When Death Comes Stealing" 발레리 윌슨 웨슬리 (국내 미출간)
When Death Comes Stealing by Valerie Wilson Wesley

"페이드 어웨이" 할런 코벤
Fade Away by Harlan Coben

"추적자" 리 차일드
Killing Floor by Lee Child

"레이디 조커" 다카무라 가오루
Lady Joker by Kaoru Takamura

"Morituri" 야스미나 카드라 (국내 미출간)
Morituri by Yasmina Khadra

"아웃" 기리노 나쓰오
Out by Natsuo Kirino

"Inner City Blues" 폴라 L. 우즈 (국내 미출간)
Inner City Blues by Paula L. Woods

"A Place of Execution" 발 맥더미드 (국내 미출간)
A Place of Execution by Val McDermid

"Those Bones Are Not My Child" 토니 케이드 밤바라 (국내 미출간)
Those Bones Are Not My Child by Toni Cade Bambara

"Blanche Passes Go" 바바라 닐리 (국내 미출간)
Blanche Passes Go by Barbara Neely

"Death of a Red Heroine" 추 샤오롱 (국내 미출간)
Death of a Red Heroine by Qiu Xiaolong

"레드브레스트" 요 네스뵈
The Redbreast by Jo Nesbø

"미스틱 리버" 데니스 루헤인
Mystic River by Dennis Lehane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The Shadow of the Wind by Carlos Ruiz Zafón

"외과의사" 테스 게리첸
The Surgeon by Tess Gerritsen

"The Emperor of Ocean Park" 스티븐 L. 카터 (국내 미출간)
The Emperor of Ocean Park by Stephen L. Carter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Fingersmith by Sarah Waters

"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The Ice Princess by Camilla Läckberg

"2666" 로베르토 볼라뇨
2666 by Roberto Bolaño

"케임브리지 살인사건" 케이트 앳킨슨
Case Histories by Kate Atkinson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The Devotion of Suspect X by Keigo Higashino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스티그 라르손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by Stieg Larsson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마이클 코넬리
The Lincoln Lawyer by Michael Connelly

"스네이크 스킨 샤미센" 나오미 히라하라
Snakeskin Shamisen by Naomi Hirahara

"Queenpin" 메건 애벗
Queenpin by Megan Abbott

"죽은 자는 알고 있다" 로라 립먼
What the Dead Know by Laura Lippman

"유대인 경찰 연합" 마이클 셰이본
The Yiddish Policemen's Union by Michael Chabon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Drive Your Plow Over the Bones of the Dead by Olga Tokarczuk

"Wife of the Gods" 콰이 쿼티 (국내 미출간)
Wife of the Gods by Kwei Quartey

"네 시체를 묻어라" 루이즈 페니
Bury Your Dead by Louise Penny

"페이스풀 플레이스" 타나 프렌치
Faithful Place by Tana French

"설계자들" 김언수
The Plotters by Un-su Kim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The Sound of Things Falling by Juan Gabriel Vásquez

"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Gone Girl by Gillian Flynn

"라운드 하우스" 루이스 어드리크
The Round House by Louise Erdrich

"64" 요코야마 히데오
Six Four by Hideo Yokoyama

"철로 된 강물처럼" 윌리엄 켄트 크루거
Ordinary Grace by William Kent Krueger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리언 모리아티
Big Little Lies by Liane Moriarty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셀레스트 응
Everything I Never Told You by Celeste Ng

"Land of Shadows" 레이첼 호첼 홀 (국내 미출간)
Land of Shadows by Rachel Howzell Hall

"동조자" 비엣 타인 응우옌
The Sympathizer by Viet Thanh Nguyen

"블루버드, 블루버드" 애티카 로크
Bluebird, Bluebird by Attica Locke

"Hollywood Homicide" 켈리 개릿 (국내 미출간)
Hollywood Homicide by Kellye Garrett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My Sister, the Serial Killer by Oyinkan Braithwaite

"말라바르 언덕의 과부들" 수자타 매시
The Widows of Malabar Hill by Sujata Massey

"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Miracle Creek by Angie Kim

"당신이 필요한 세계" 헬렌 필립스
The Need by Helen Phillips

"The Other Americans' 레일라 랄라미
The Other Americans by Laila Lalami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 루스 웨어
The Turn of the Key by Ruth Ware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Your House Will Pay by Steph Cha

"검은 황무지" S.A. 코스비
Blacktop Wasteland by S.A. Cosby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Djinn Patrol on the Purple Line by Deepa Anappara

"멕시칸 고딕" 실비아 모레노- 가르시아
Mexican Gothic by Silvia Moreno-Garcia

"When No One Is Watching" 앨리사 콜 (국내 미출간)
When No One Is Watching by Alyssa Cole

"Winter Counts" 데이비드 헤스카 완블리 웨이든 (국내 미출간)
Winter Counts by David Heska Wanbli Weiden

"Survivor's Guilt" 로빈 기글 (국매 미출간)
Survivor’s Guilt by Robyn Gigl

2023/11/10

소년 a 살인사건 - 이누즈카 리히토 / 김은모 : 별점 1.5점

소년A 살인사건 - 2점
이누즈카 리히토 지음, 김은모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년 전, 아홉 살 소녀가 살해당한 뒤 안구가 적출당하는 영상이 다크 웹 경매에 올라왔다. 경시청은 영상을 유출한게 경찰 내부 인력이라 생각해서, 감찰부 시라이시 계장에게 조사를 명령했다.
한편 영상 판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당시 미성년자로 간단한 처벌을 받고 풀려났던 범인 "소년 A", 오치아이 세이지의 주간지 인터뷰가 발표되었다. 오치아이가 판매한게 아니라는 기사였다. 하지만 여론은 나빠졌고, 인터넷을 통해 악당들을 사적 제재를 하는 자경단 운영자 야요이와 유튜버 료마 등은 오치아이 세이지의 현재 정체를 폭로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친구를 살해했던 미성년자 소년 A - 사카키바라 사건 말고 다른 사건입니다 - 가 번듯한 변호사가 되었다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소설.
기본적으로는 복수극이지만, "방황하는 칼날"과 똑같이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미성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 옳은지와 사적 제재가 과연 합당한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일종의 사회파 소설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극적인 실화 소재라는 것 외에는 건질 부분이 없습니다. 기본 전개부터 엉망이거든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야요이는 소년 A에게 살해당했던 소녀 미쓰키의 어머니였습니다. 소년 A의 정체를 까발린건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소년 A가 그냥 히키코모리처럼 살고 있었다면 복수가 될 수 없으니 야요이는 자살한 뒤 소년 A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조작을 추가로 벌였습니다. 
하지만 소년 A인 히토쓰바시는 정체가 드러난 탓에 모든걸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습니다. 아요이가 죽기까지 하면서 누명을 씌울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누명을 씌우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히토쓰바시가 범인임이 뻔한 상황에서 야요이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복수를 위해서라고 해도 억지스럽습니다. 히토쓰바시 입장에서는 복수의 대상은 료마니까요. 변호사라면 법적으로 해결했을 거에요. 
동영상이 있고 없고는 정체가 이미 까발려진 히토쓰바시의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동영상 원본을 구하러 옛 사건 장소에 찾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소년 A 사건을 다시 세간의 화제로 만들기 위해 야요이가 다크 웹에 딸이 죽을 때의 동영상을 경매에 올린 것도 부모 입장으로는 납득하기 힘듭니다. 딸이 죽는 장면을 복수에 이용한다는건 말도 안되며, 괜히 경찰의 눈길만 끈 셈이 되어버렸거든요. 동영상이 진짜일까 필요도 없었고요. 게다가 세간에 조금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료마나 에리코와 같은 협력자가 야요이를 도운 것도 여론 때문은 아니었지요. 물론 덕분에 히토쓰바시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결정적 계기인 주간지와의 인터뷰가 진행되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료마의 부탁대로 주간지 편집장이 히토쓰바시에게 CD롬을 보낸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애송이 유튜버 말만 듣고 움직인다는 것도 석연치 않지만, 2020년대에 사서함으로 CD롬을 보낸다? 저 같으면 CD롬 안의 파일을 메일로 보내라고 했을 겁니다.

야요이가 완벽하게 신분을 세탁한 후 복수를 시작했다는 설정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신분을 유지한채 인터넷 자경단 사이트를 운영하면 안되는 이유부터 떠올리기 힘듭니다. 가족들에게 폐가 될까봐였다고 하는데, 딸이 죽은 뒤 아들은 소아 성애 범죄자가 되도록 방치했던 어머니가 할 말은 아니지요. 이렇게 앞 뒤가 안 맞도록 설정된 인물을 보는 것도 참 오랫만이에요. 하긴 별다른 재주도 없던 40대 아줌마 야요이가 인터넷 자경단 사이트의 운영자가 되어 하나의 세력을 만든다는 설정도 말이 안되신 마찬가지겠지요.
다른 등장인물들 설정도 어설습니다. 가출 고딩이 악당들 정체를 까발리는 특종을 선보이는 유튜버라던가 하는 식이거든요. 그 중에서도 시라이시 감찰 계장 설정은 최악입니다. 감찰 조사 자체가 너무 어설퍼요. 시라이시와 그의 팀은 관계자를 찾아가 증언을 들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식으로 수사를 진행하는데, 왜 이렇게 수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서류 조사부터 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예를 들어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형사가 원래는 미마 무네키 경위였고, 그가 비디오 테이프를 반출했었다는건 가장 기본적인 증거물 출납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마 무네키 경위에 관련된 자료들을 미리 조사하지 않은 탓에 그의 행적을 놓치고 맙니다. 발로 뛰는 수사를 한다면 범인이라도 잘 잡아야 할텐데 그렇지도 못해요. 중요 참고인인 이토 유키오는 쉽게 도망갈 정도였지요. 
복싱 동작을 한 눈에 알아보는 등의 쓸데없는 지식은 과시하지만, 수사와 추리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료마와 시라이시가 엮이는 전개는 작위적인게 지나쳐서 짜증이 날 정도였고요.

이렇게 장점은 찾아보기 어렵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방황하는 칼날"보다 좋았던 점은 복수가 성공한다는 점 뿐입니다.

2023/11/08

체셔 크로싱 - 앤디 위어, 사라 앤더슨 / 황성희 : 별점 1점

체셔 크로싱 - 2점
앤디 위어 지음, 사라 앤더슨 그림, 황석희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마션"의 앤디 위어 원작의 만화라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전개가 합리적이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체셔 크로싱의 유모가 갑자기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라던가, 오즈의 마법사 구두가 능력을 따라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던가 하는게 모두 갑자기 튀어나와요.

작화도 좋은 편이 아닙니다. 특히 서쪽 마녀, 후크의 해적 군단과 3인조의 대결을 그린 클라이막스 묘사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린아이가 형광펜으로 색칠한 것 같은 그림이 전부거든요.


한마디로, "차원을 이동하는 이야기 속 소녀들을 모아놓은 어거지 팬픽"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설정, 전개, 작화 등 모든 면에서 점수를 줄래야 줄 부분이 없네요. 
작가가 데뷰하기 전 웹사이트에 공개했던 습작이 바탕이었다고 하는데, 이걸로 데뷰를 못한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

2023/11/05

오래된 책들 (12) - 시미즈 레이코 단편 걸작선 (9) MAGIC


올릴 글이 없을 때 간혹 올리곤 하는 오래된 책 소개입니다. 열 두번째로 소개드리는건 시미즈 레이코의 단편 걸작선 마지막 권인 "MAGIC"입니다. 표제작 외 "SILENT"라는 작품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 어떤 영화 감독이 영화화를 하고 싶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에는 잘 알려져 있던 작품인데, 지금은 그 존재마저도 많이 잊혀져 버렸네요. 그래도 시미즈 레이코의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재간되었고, e-book으로도 구입할 수 있으니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려요. (재간 버젼은 "빠삐용"에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구입했던건 1997년이니 이미 20년을 훌쩍 넘었는데, 과연 언제까지 소장하고 있게 될지도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2023/11/04

허상의 어릿광대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허상의 어릿광대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모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원숙기를 넘어선 달인의 경지에 이른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 전개가 능수능란합니다. 사건에서의 불가능한 현상 조사를 구사나기가 의뢰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서, 유가와가 사건에 뛰어드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끼워넣는 솜씨가 기가 막힐 정도에요. 덕분에 유가와의 조사도 사건과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 - "2장 투시하다", "4장 휘다" - 와, 반대로 유가와가 경찰까지 속여가며 범인의 실수를 유도하는 이야기 - "5장 보내다" - 가 공존하는 등, 변주의 폭도 굉장히 넓습니다. 이렇게 내용을 풍성하게 가져간건 영상화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과학을 이용한 트릭들이 별로인 탓이 큽니다. 추리의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유가와의 도움 없이 경찰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는 이야기도 많은데다가, 동기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에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은 느껴지지만, 정교한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장 현혹하다"
종교단체 구아이회의 교조 렌자키는 "염"을 사람에게 보내는 능력이 있었다. 주간지 기자가 취재차 참석한 자리에서 경리담당 부장 나카가미가 염을 받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도 나카가미에게 손을 대지 않아서 사건은 자살로 굳어져 갔고, 기자도 '염'을 받고 몸이 따뜻해짐을 느낀 뒤 기사를 발표해서 구아이회의 교세는 더 확장되어 갔는데....

상대방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 자살까지 유도한 방법이 무엇인지가 핵심 수수께끼입니다. 유가와가 밝혀낸 진상은 일종의 '전자레인지' 효과였습니다. 원격으로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피부 아래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추리의 여지는 없다시피 합니다. 애초에 교조가 '염'을 보내는건 특별한 방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방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다는건 당연합니다. 경찰이 진작에 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건물을 조사하지 않은게 의아할 뿐입니다. 
또 장치 출력을 강하게 해서 나카가미가 지독한 뜨거움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자살하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카가미가 조금만 자리를 이동해도 뜨거움으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하거든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염'을 받으면 안되니 장치는 명확한 조준이 필요했을테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을테니까요.
유가와가 대학 노트 사이에 감열지를 숨겨놓아서 트릭을 눈치챘다는 방법도 이상했습니다. 그냥 주머니같은데 넣어 두었어도 똑같았을텐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트릭 만큼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아쉬웠습니다.

"2장 투시하다"
투시 능력이 있는 호스티스 미카가 살해당했다. 수사 결과 손님이었던 니시하타가 범인이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공금 횡령의 증거를 미카가 투시했던게 동기였다. 그런데 미카는 어떻게 명함과 가방을 투시했을까?

구사나가기 해결하기 어려운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 유가와를 찾아가곤 했던 그간 시리즈의 전개 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구사나기의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사체에 남겨졌던 희귀한 담뱃재가 클럽 손님 중 한 명과 관련이 있었고, 그와 같은 회사에 다녔던 니시하타가 미카와 마지막에 만났던 손님이었다는걸 알아내서 체포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유가와도 범인 체포와는 무관하게 미카의 투시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했다는걸 밝혀내는 활약을 선보입니다. 최신 장비인데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밝혀낸 단서가 계모의 진심을 담은 메모를 찍은 사진이었다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작 중에서처럼 명함을 읽는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찍힐까?라는 의문은 가시지않았고, 어두운 바나 영화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확인했다면 들통났을 것 - 밝은 액정 화면이 티가 날테니 - 같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경찰이 가택 수사를 했음에도 이 특수한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카와 계모와의 관계를 다룬 신파조의 이야기는 많이 유치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장 들리다"
구사나기는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환자 가야마를 제압하다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가야마는 환청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수사해보니 가야마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영업부장 하야미 다쓰로가 기묘한 단어를 검색한 뒤 자살했었다는게 밝혀졌다.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환청을 들리게 만들었다는건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초반에 이명 현상을 겪는 여직원 무쓰미가 등장했고, 가야마가 환청 현상을 겪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기술을 이용했는지만이 궁금할 뿐인데, 범인이 전자파를 피해자들 머리에 쏴서 소리를 들리게 했다는 진상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작중에서도 소형화가 어렵다는 설명이 될 정도의 장치인데, 이런걸 개인이 개발해서 소지하고 운용한다는건 비현실적이니까요.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남 탓만하는 범인 고나카 설정도 진부했고요.

수사를 구사나기의 경찰학교 동창이자 관할서 형사인 기타하라가 맡도록 해서 수사 1과와 관할서 사이 갈등을 그려낸건 좋았고, 유가와의 논리 정연함을 기타하라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드러내는 솜씨는 좋았지만 이야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4장 휘다"
프로야구 선수 야나기사와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수사를 맡았던 구사나기는 방출 후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던 야나기사와가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데이터 측정을 도와줄 수 있는 유가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상심에 빠진 야나기사와의 기량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데...

강도 살인사건 범인은 구사나기에 의해 쉽게 체포됩니다. 이후 야나기사와의 재활과 더불어 피해자 다에코가 가지고 있던 쇼핑백 속 선물이었던 자명종을 누구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밝혀내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일상계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에코가 '자명종'을 남편의 현역 생활 연장에 도움이 될 대만 프로야구 관계자에게 선물하려 했고, 중국에서는 시계를 선물하는 행위인 '송종'의 발음이 '임종'과 똑같아 자명종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진상도 일상계스러웠고요. 

다에코가 타고 있던 차에 소화기 분말이 묻었다는걸 알고, 호텔 주차장에서 소화기가 분출된 시간을 알아내서 다에코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조사하는건 경찰 구사나기가 아니
었다면 조금 힘들었겠지만, 일상계물로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수작입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이번 단편집 수록작들 중에서도 에피소드들이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5장 보내다"
하루나는 텔레파시로 쌍둥이 언니 와카나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 형부 이소가이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귀가한 이소가이는 중상을 입은 와카나를 발견했다....

쌍둥이 사이에 텔레파시가 오갈 수 있다는걸 범인도 믿을 수 있게끔 그럴듯하게 설명한 뒤, 범인의 실수 - 친한 지인인 진범을 모른척하고, 진범이 외모를 크게 바꾸는 등 - 를 유도한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 데이토 대학 교수 유가와가 직접 나서서 텔레파시가 근거가 있는 것 처럼 조사했기 때문에 범인도 깜빡 속아넘어갔던 것이지요. 이 모든걸 안배한 유가와의 추리와 능력이 빛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텔레파시는 실체가 없지만, 자매간의 정은 유효하다는 결말도 좋았고요. 

다만 이소가이의 동기가 명확하므로, 경찰 수사로 충분히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장 위장하다"
구사나가와 유가와는 시골 읍장이 된 대학 동창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살인 사건 수사를 돕게 되었다. 유가와는 구사나기가 찍은 현장 사진을 보고 현장이 조작되었다는걸 알아내는데....

흔들의자에 앉은채 산탄총에 맞은 시체라는 현장 사진만 보고 조작을 눈치챈 유가와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운동에너지, 작용과 반작용을 언급하며, 흔들의자에 앉은 사람이 총에 맞으면 반동 때문에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물리학자다운 추리였어요. 발견자 다에가 현장을 조작한 이유도 그럴듯했습니다. 원래는 의붓아버지 다케히사가 다에의 친모인 아내를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다에의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다에는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순서가 반대인 것처럼 현장을 조작했던 겁니다.

다만 사건의 동기인 아내의 불륜은 식상했으며 , 다에가 현장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 이를 유가와의 말대로 '우수한 일본 경찰'이 현장 조사로 밝혀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장 연기하다"
극단 '파란 여우'의 연출가 고마이가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전 애인 아쓰코로, 그녀의 알리바이 트릭은 구사나기가 이미 밝혀냈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유가와는 소도구인 칼이 흉기라는건 이상하다는데 주목하여 진상을 추리해낸다.

아쓰코가 고마이를 찌르고 휴대폰을 조작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과정이 맨 처음에 나오는 도서 추리물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라 생각하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곧바로 구사나기가 모든걸 꿰뚫어보고 밝혀내서 좀 놀랐습니다. 구사나가도 그리 만만한 친구는 아니네요. 
고마이의 현 애인 구도 사토미가 진범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였으며, 경찰이 사건 진상을 파헤치기 힘들었던 불꽃놀이 사진은 단순히 유리창 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다는 디테일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살인범이 되어 경찰에게 쫓기는 심리를 느껴보고 싶었다'는 아쓰코의 동기, 그리고 재봉 가위를 흉기로 사용한 사토미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극단 소도구인 칼을 흉기로 위장한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범인을 극단 사람 내부인으로 한정해버리면 기껏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짜낸 트릭들의 가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11/03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 아웃핏 - 다윈 쿡 / 임태현 : 별점 5점!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 10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시공사(만화)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아웃핏 - 10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시공사(만화)

"헌터"
범죄자 파커는 자신의 뒤통수를 친 동료 말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에 왔다. 파커는 추적 끝에 말을 죽인 뒤, 말의 조직 두목 브론슨에게 4만 5천달러를 요구했다. 말이 조직에 상납했던 돈으로 원래 파커의 몫이었다. 파커는 브론슨 조직원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돈을 손에 넣은 뒤 동부로 항했다.

"아웃핏"
성형수술 후 마이애미에 머물던 파커는 브론슨이 아직도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걸 알고 복수를 결심했다. 동료들을 이용해 브론슨 조직의 사업장을 터는 것과 동시에, 파커 스스로 브론슨의 저택에 침입하여 그를 사살했다.

시공 그래픽 노블 레이블로 출간된 리처드 스타크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악당 파커 시리즈 만화. 제가 좋아하는 브루스 팀 그림체와 흡사한 작풍을 지닌 다윈 쿡이 작화를 맡았습니다.
이런 책이 출간된걸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통파 범죄 스릴러 느와르를 이렇게 멋지게 그려내다니! 감탄만 나왔습니다. 거의 아무런 대사 없이 자신을 배신한 아내 린을 찾는 "헌터"의 초반 약 20여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읽었네요. 그냥 그림만 봐도 '느와르'라는 느낌을 팍팍 전해줍니다.
재미의 핵심인 파커 캐릭터 묘사도 출중합니다. 잔혹한 범죄자로 완력도 강하며 사람 죽이는걸 예사로 알지만, 범죄는 공들여 설계하고 실행하는 두뇌파이기도 한 양면적인 모습을 잘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직하고 어두운 심리 묘사도 좋았으며, 파커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진 전개 부분도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과거와 현재, 다른 시점과 상황을 화풍으로 구분하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고요.

범죄 계획들에 대한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특히 "아웃핏"에서 브론슨 사업장 털이 작전이 대박이었어요. 비밀 도박장, 사설 경마, 마약 밀매, 소액 도박 등 다양한 사업장을 여러가지 작전으로 터는 과정을 상세하면서도 상황별로 모두 다른 그림체와 편집을 통해 일종의 잡지 기사처럼 구성하여 보여주는데 재미도 있고, 작화와 디자인 모두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등장하는 파커의 범죄 계획은 모두 잘 짜여져 있다는 점에서 피카레스크 범죄극의 달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진면목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다가 알았는데, 범죄극은 확실히 이미지가 있는게 더 낫더군요. 이해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걸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5점입니다. 후속권도 읽고 싶은데 절판 상태네요. 어떻게든 구해봐야겠습니다.

2023/11/01

스트라바간차 ~이채의 공주~ 1~7권 - 토미 아키히토 : 별점 2점


대륙을 정복하려는 오르그 족이 물에 치료 불가능한 흥분제 독약 에신을 풀어 혼란을 불어 일으켰다. 이 사실을 알아낸 오로리아국의 투구를 쓴 여왕 비비안은 세포이야, 클로드, 알브, 포클, 루가루, 콜론 등의 동맹 가능한 종족과 연합하여 오르그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막강한 오르그의 군세에 밀려 동맹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비비안은 오르그의 군사 고르모아를 생포하여 철수시키려 했지만 오르그 족장 허크가 직접 나서 고르모아를 죽이고 말았다. 결국 비비안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불살'의 원칙을 깨고 마는데....

이북으로 몰아서 구입해 읽은 판타지.

다른건 몰라도 작화 하나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섬세한 배경도 좋지만 풍만한 캐릭터 묘사가 특히 좋았어요. 움직임에 대한 연출도 탁월해서 액션장면도 수준 이상이었고요.
오크와 거인족, 수인족, 엘프와 드워프 등의 종족 등은 다른 판타지에서 흔히 보아왔던 설정이기는 하지만 거인족 세포이아가 지나가는 숲길에는 잔가지가 없다는 식으로 나름의 디테일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각 종족별 거주지, 사용하는 무기 등이 모두 종족별 특징에 맞게 잘 묘사됩니다.

하지만 대하 서사극치고는 지나치게 짧고 극적인 요소 없이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나는건 시시했습니다. 조기 연재 종료 느낌이 들 정도에요. 특히 마지막 전투에서 연합군측 막대한 피해가 뭐지 싶게 만드는 세포이아 남자들의 원거리 공격은 허탈했습니다. 이런 공격이 가능했다면 앞서 연합군의 죽음은 개죽음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총을 쏠 수 있는데 맨 몸으로 들이받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와 다름없습니다.
또 클라이막스에서 비비안이 오르그들을 죽이지 않고 협상하겠다고 말하는건 어이가 없었습니다. 동맹의 수없이 많은 희생을 무시하는, 왕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어요. 게다가 비비안은 앞서 에신때문에 광인이 된 클로드 족 쿰쿰은 직접 죽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을 공격한 오르그 군대는 죽이지 않겠다? 쿰쿰이 다른 클로드족 - 탐탐 - 을 해치는걸 막기 위해서였다면, 오르그 군대는 더 큰 희생을 만들고 있으니 다 죽이는게 마땅합니다. 이렇게 성격과 기준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설정은 이야기에서 빼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어차피 시녀와 근위병들이 전사하자 원칙을 바로 깨버리니까요. 비비안의 강함도 설명이 부족해서 잘 와 닿지 않았고요.

이렇게 뻔하고 급작스러운 전개의 군웅 - 서사극보다는 비비안이 투구를 벗고 미테라 성을 몰래 빠져나가 평민 클라리아로 행세하며 이런저런 소동과 마주치는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훨씬 좋았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이후의 삶을 그린 에필로그 형태의 7권은 아주 마음에 들기도 했고요. 비비안과 올리비에의 첫 만남, 본편에서는 많이 언급되지 못했던 루갈과 포글족 이야기 등 모두 소소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성적인 묘사가 많은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다 괜찮았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그림은 좋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부족했습니다. 추천드리기는 애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