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피트 -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생 모리는 지진을 예언하는 기묘한 전화를 받았다. 예언이 실현된 뒤, 전화를 건 주인공 가자마는 모리를 비롯한 9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10개월의 시간을 점프할 수 있는 '리피트'에 대해 알려주며 리피트에 동참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경마 등으로 부자가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입시를 다시 치루어 도쿄대에 입학하는 등의 소망을 품고 그들은 과거로 향했다. 여행은 성공했고 모리는 함께 리피트한 미녀 시노자키와 커플이 되지만, 전 연인 유코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다시 리피트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리피트한 동료들이 차례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가자마도 두 번째 리피트를 허락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노자키의 임신으로 모리는 고뇌에 빠지는데....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유명한 이누이 구루미의 장편.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서술 트릭의 수작이지만 이상하게도 작가 이누이 구루미의 작품은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지요. 이 작품과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유이합니다. 이 작품의 존재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모처의 랭킹에서 소개해주어서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작이더군요.
10개월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가는 '리피트'가 핵심 설정인데, 이렇게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은 정말 많습니다. 작중에서도 켄 그림우드의 <<리플레이>>라는 작품이 비슷한 내용이라고 소개될 정도죠. 시간 여행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추리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도 <<타임 리프>>라던가, <<나만이 없는 거리>> 등이 있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과거로의 이동은 주인공의 능력이 아니라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 '가자마'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리피터' 들 9명을 모아서 과거로 이동하게 도와주었던 것이니까요. 순수한 선의의 발로이며 그들이 선택된건 단순한 우연이었다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받은 사람들) 가자마의 말에 주인공 모리를 비롯한 9명은 얼떨결에 과거로 향하게 되지요. 가자마만 과거로 리피트 할 수 있는 검은 오로라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으며, 오로라로 이동할 수 있는 헬기 조종사였다는 설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과거에서 특이점이 발생할 경우 미래가 바뀔 수는 있지만, 아무리 미래가 바뀌어도 결국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는 결말은 정해진 미래, 특히 죽음은 바꿀 수 없다는 영화 <<데스티네이션>> 설정과 동일하지만, 이 작품에서 리피터들은 자기들이 죽는다는걸 몰랐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덕분에 다카하시, 요코사와, 쓰보이가 차례로 죽자 생존한 리피터들은 이 범행은 리피터를 노린 누군가의 짓이라 여기고 범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다양한 추리를 펼치게 되고요.
- 범인은 리피트에 관련된 비밀이 드러나면 안되는 가자마일까? 하지만 가자마는 위험해져도 10월 30일까지만 버티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되는데?
- 리피터들을 죽이기 위해 과거로 초대했던 걸까? 그랬다면 원래 세계에서 서로 모를 때 죽였을거야. 서로 모르면 남은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었을텐데, 리피터라는 연결 고리가 생겨서 경계 의식을 품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가자마는 계속 리피트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리피트한 과거에는 다시 9명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살인을 반복할 이유는 없다고.
- 한 번 리피트 한 사람들은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한 가자마에게, '생명이 위험하니 다시 리피트하게 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덴도가 저지른 범행일까? 덴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니까.
- 가자마가 다른 누군가에게 예언을 알려준 뒤, 너가 리피트하려면 다른 리피터를 먼저 죽여라고 시켰던걸까?
- 이전 리피터 중 누군가 헬기로 뒤를 쫓아 리피트한게 아닐까?
이러한 여러가지 추리들은 상당한 재미를 선사해줍니다.
리피터 연쇄 살인 사건 외에도 리피터 시노자키가 모리의 아이를 임신한 것도 흥미를 끕니다. 모리는 옛 연인 유코를 살해한 탓에 리피트가 절실했는데, 시노자키는 임신때문에 다시 리피트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다시 리피트한다면, 아이가 없는 임신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마니까요. 그래서 극적 긴장감이 발생하게 됩니다. 시노자키의 예정된 죽음 - 헬기 추락에 의한 사고사 - 을 가자마로부터 전해들은 모리가 그녀를 죽게 내버려두고 혼자 리피트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에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고요. 그녀를 살게 해 주면, 모리의 리피트를 막을게 뻔하잖아요? 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임신 이야기를 들은 덴도가 이야기한, 갓 태어난 아이를 리피트시키면 폐 호흡을 하다가 양수로 돌아가버리는데 어떻게 될까? 라는 것도 사소하지만 꽤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어요.
진상도 꽤 기발했습니다. 우선 리피터인줄 알았던 이케다도 가자마와 같이 리피트를 반복했었던 오리지널 리피터였습니다. 둘은 사고로 생명을 잃었을 사람들을 구해준 뒤, 그들과 함께 과거로 돌아거서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즐기려고 했던 겁니다. 리피트를 반복하다 심심해졌던 탓이죠. 그리고 가자마와 이케다가 손을 써서 원래 세계에서 죽지 않았던 리피터들은 리피트한 세계에서는 운명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유코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던 모리만 먼저 유코를 살해해서 죽음에서 벗어났고, 덴도는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서 가자마와 이케다가 구해준 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우선 모리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미래의 이야기를 적어두었던 노트를, 문단속을 잊은 탓에 방에 들어온 유코가 발견해서 리피트를 눈치채자 살해했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비교적 주인공다운 모습을 보여주던 모리라는 인물상과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모리가 유코에게 죽는게 운명이었다면, 미리 흉기까지 준비했다면 유코가 맥없이 살해당하는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목이 졸릴 때 당연히 칼을 꺼내 찔렀어야죠. 왜 이 부분에서만 정해진 운명이 다르게 흘러갔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과거를 바꾸는 특이점이 생기면 미래가 바뀌어서 이런저런게 바뀔 수 있다는 전제도 사실 해석하기에 따라 애매한 말입니다. 경마로 큰 돈을 버는 것도 특이점이잖아요? 리피터들을 죽인건 정의 구현에 한계를 느낀 미친 경찰관이었다는 것도 작위적이었고요.
결말도 많이 아쉽습니다. 덴도가 미국에서 헬기 면허를 따 왔다는거야 그럴싸했는데, 그 뒤부터는 정말 막 나가더라고요. 이케다와 덴도가 서로에게 총을 쏴서 죽는다는게 특히 그러했어요. 총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도 이상하지만, 이케다만 리피트 지점을 알테니 그 지점만 알아내고 강제로 헬기에서 쫓아내겠다!는 덴도의 계획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총이건 뭐건 이케다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리가 없잖아요?
둘 다 죽은 뒤 모리 혼자서 헬기를 조종해 오로라로 들어갔다는 것도 별다른 고민없는 작위적인 전개였습니다. 리피트에 성공한 모리가 곧바로 차에 치어 죽는다는 결말도 뻔했을 뿐 아니라 <<데스티네이션>>과 다를게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흔한 소재에 약간의 변주를 가해 흥미를 유발하게끔 만든건 좋은데, 아주 독특하고 새롭지는 않았기에 감점합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만큼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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