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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6

죽음의 전주곡 - 나이오 마시 / 원은주 : 별점 2점

죽음의 전주곡 - 4점
나이오 마시 지음, 원은주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 펜쿠쿠에서 자선 행사로 교구 교민들이 진행하는 소박한 연극이 진행되던 중,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마을의 부유한 노처녀 이드리스 캠패뉼러로,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피아노 안에 장치된 총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런던 경시청 범죄 수사반 로더릭 앨린 경감이 수사를 맡게 되는데.... 

전성기에는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즈, 마저리 앨링엄과 더불어 4대 범죄 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렸다는 - 누가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 나이오 마시의 장편. 국내에는 첫 소개된 작품입니다.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다가 이번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지극히 전형적인 황금기 시절 영국 시골 마을 추리물이더군요. 미스 마플 시리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심도깊은 마을 주민들 묘사가 인상적이에요. 소수의 등장인물들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꼼꼼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거기에 더해 앨린 경감의 발로 뛰는 수사 역시 치밀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 하면 그렇다고는 이야기 못 하겠네요. 단순 소거법으로만 보아도 범인이 누군지는 상당히 뻔한 탓입니다. 
주요 등장인물 일곱명 중 월터 목사와 그의 딸 다이나, 저닝햄 부자는 일단 제외됩니다. 노처녀들의 목사에 대한 짝사랑은 엄청나지만, 목사가 그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건 상상하기 힘들고 다이나와 헨리 저닝햄의 사랑을 방해하는건 엘리너 프랜티스이지 이드리스 캠패뉼러는 아닙니다. 조슬린 저닝햄은 아예 동기 자체가 없고요. 의사인 템플렛 박사와 셀리아 로스도 마찬가지, 둘의 불륜을 눈치챈건 엘리너 프랜티스이지 이드리스 캠패뉼러가 아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드리스가 죽으면 그녀로부터 유산도 받고, 연적까지 없앨 수 있던 엘리너 프랜티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물론 피아노 연주자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설정 때문에 엘러너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까?라는 추리도 가능합니다. 작품도 당연히 그 쪽으로 몰아가고 있고요. 하지만 연주를 포기한건 엘리너 본인이라는 점에서 이건 수수께끼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수사를 통해 엘리너가 이미 피아노에 장치되었던 물총에 맞았었고, 공연 직전 피아노 연주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게 밝혀진 시점에서 범인은 확정입니다. 물총이 장치된걸 알았던 사람이 총을 바꿔치기 했을테니 그건 엘리너입니다! 

자, 이렇게 범인이 드러났으니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장치 트릭만 남았습니다. "피아노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총을 장치했는지?" 라는 트릭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추리쇼를 통해 밝혀진 진상은, 피아노 뒤에 쳐진 무대막 사이로 손을 넣어서 안전장치를 풀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독자는 어리둥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밝혀진 상황만 놓고 보면 무대를 한 번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아무도 "무대막 뒤에서 손을 뻗으면 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이 정도 트릭이면, 아니 트릭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단순한 상황을 앨린 경감 등이 기묘한 불가능 범죄처럼 언급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수사가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도 없습니다. 또 무대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가 추리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공정함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고요. 앞부분에 펜처치 지역 지도를 실어놓지 말고, 무대에 대한 그림을 실어주었어야 했습니다.
양파나 상자와 같은 요소에 집착하는 것도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디테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이들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시기 명탐정 흉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에 더해 이야기가 너무 길다는 문제도 큽니다. 특히 초반부, 사건이 벌어지기 전 100여 페이지는 짜증나는 노처녀들의 심리를 장황하게 그려서 도저히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어요. 노처녀들에 대한 '살의'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는 잘 된 묘사일 수는 있겠지만... 독자가 살의를 품어서 뭘 하겠습니까? 

그래서 별점은 2점. 몰랐던 작가의 몰랐던 탐정을 접했다는 역사적 가치 말고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왜 지금은 잊혀진 작가가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네요. 당시에는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읽기에는 한없이 지루했습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3/03/25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3 톱니바퀴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3 톱니바퀴

토모히로의 집 앞에 고급 택시가 멈춰 섰다. 토모히로가 자신의 집에 들어선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운전기사가 대문 차임벨을 누르자 바로 토모히로가 나타났다. 그는 남색 바지와 코트를 입고 한 손에는 큰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뒤를 이어 마사오의 모습이 보였다. 트위드 소재의 하얀색 코트에 크림색 가방을 들고 있다. 마사오는 머리를 다시 묶고 있었다. 익숙한 은색 머리 장식이 보였다.

잘 단장한 마사오의 얼굴 윤곽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화장을 한 모양이었다. 운전기사가 토모히로의 가방과 마사오의 여행 가방을 뒤쪽 트렁크에 실어주었다.

"어떻게 봐도 여행 가는 모습이군. 그것도 꽤 긴 여행같은데........"

마이코가 혼잣말을 했다.

토모히로의 집에서 두세 살짜리 어린아이를 안은 노인이 나왔다. 얼굴이 마사오를 닮았다. 마사오는 노인에게서 옆으로 긴 검은색 가방을 받아든 뒤 아이의 뺨을 살짝 찔렀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충치가 보였다.

토모히로와 마사오는 차에 올라탔다. 노인과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차는 마이코의 에그를 지나갔다. 잠시 후, 토시오는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미행하고 있는걸 알아채도 상관없어. 어차피 의뢰인의 차니까."

토시오는 마이코의 에그로 어떻게 택시를 놓치지 않고 미행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지만, 마이코의 말 한마디에 택시 뒤에 꼭 붙어 가기로 결심했다.

도로의 혼란은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고, 택시의 운전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사이에 두세 대의 차량이 끼어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토시오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그랬다. 토모히로의 가방은 국내 여행치고는 너무 과했다. 마사오가 아침부터 소우지를 만난 것은 당분간 두 사람의 밀회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계속 쫓아갈 자신이 없어요."

마이코는 시계를 보았다.

"걱정할 것 없어. 공항까지는 외길이니까. 그런데 만약 해외로 출국하는 거라면, 그 전에 내가 토모히로를 붙잡고 이야기하게 될 수도 있어."

고속도로 앞에서 큰 탱크로리 차량이 끼어들면서 마이코의 에그를 억지로 밀어붙였다. 정지 신호에서 마이코의 차는 유조차의 배기가스를 정통으로 맞았다. 오른쪽 도로변에는 '개와 고양이 병원' 간판이 큼지막하게 서 있다. 마이코는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정말 개 같은 일이네."

이것으로 이 일도 끝이겠구나, 라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였다. 토시오는 하늘에서 기괴한 물체를 목격했다. 색깔도 모양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 전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유리창이 날아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토시오는 직감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의 탱크로리 차량에도 빨간 불이 들어왔다. 타원형 탱크가 눈에 띄게 커 보였다. 토시오는 뒤따라오는 차를 신경 쓰며 계속 브레이크를 밟았다.

에그가 멈추자 토시오는 반사적으로 차도로 뛰쳐나왔다. 서너 대 앞의 차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타고 있던 택시였다. 택시 뒤에는 또 다른 차량이 달려오고 있었다.

탱크로리 차의 문이 열리고 운전자가 튀어나왔다.

"도망쳐!"

누군가가 소리쳤다.

차도 위에서 하얀 코트가 날아갈 것 처럼 흩날렸다. 토시오는 코트로 뛰어들었다. 일어나보니 마사오는 피를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토시오는 정신없이 마사오를 끌어안았다. 작은 신발 한 켤레가 옆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아도 그때의 행동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토시오는 한 손으로 그 신발을 집어 들었다. 곧이어 신발 옆까지 불길이 다가왔다.

"엎드려!"

미친 듯이 외쳤다.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두 번째 차에 불이 붙은 것이다.

토시오는 에그에 마사오의 몸을 밀어 넣었다. 마이코의 모습은 차 안에 없었다. 마사오의 옆에 긴 가방 끈이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토시오는 가방을 풀어 놓으려고 했다. 그때 마사오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가슴의 부드러움에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토시오는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 넣고 문을 닫자마자 U턴을 했다. 차체가 탱크로리 차량에 부딪힌 것 같았다.

반대편 차선의 차량이 멈춰 섰다. 뒤돌아보니 두 대의 차량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사오의 이마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눈과 입을 굳게 다물고, 피부에 피가 묻어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병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몇 분 전에 보았던 '개와 고양이 병원' 간판을 떠올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토시오는 동물 병원 앞에 차를 세웠다. 보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멀리 보이는 검은 연기를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토시오는 차도로 내려와 차를 돌려 반대편 문을 열었다. 마사오는 반 쯤 쓰러진 채였다. 토시오는 조용히 마사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사오는 곧 의식을 되찾았다.

".....나는........"

"사고를 당했어요. 곧바로 피신을 한게 다행입니다. 어디 아프신데는 없나요?"

마사오는 놀란 듯 온몸을 훑어보았다.

"병원 앞입니다. 상처를 확인하면 좋겠어요."

"사고를 당했나요 ......?"

토시오는 처음으로 마사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약간 코를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들렸다.

토시오는 에그에서 사고 현장에서 주운 신발을 꺼내 마사오의 발에 놓았다.

"당신은..."

마사오는 토시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차, 서너 대 뒤에서 달리고 있었어요."

"도와주셨군요."

토시오는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습니다."

마사오는 신발을 신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팔에 쓰러졌다.

"무리하면 안 돼요."

마사오의 머리카락이 눈앞에 있었다. 향수와는 다른, 기억에 남는 미묘한 향이 느껴졌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팔에 기대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세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쥐고있던 토시오의 팔에 힘을 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엄청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와 불길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유조차에 불이 났네요."

마사오는 갑자기 토시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토시오는 놓아주지 않았다.

"남편이 있어요.......남편이 ......"

"남편?"

"저, 남편과 함께 그 차에 타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몸이 무언가에 부딪힌 것 같더니 눈 앞에 불이 났어요. 운전자가 밖으로 굴러가는 것이 보였어요. 남편이 문을 열고 저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달려갔을 때 좌석에 불이 붙지 않았어요. 대피할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마사오의 다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상처가 더 걱정스럽습니다."

토시오는 억지로 마사오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대기실에 있던 두세 사람이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한 여자는 가슴에 작은 개를 안고 있었다.

"급한 환자에요. 근처에서 사고가 났어요."

토시오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소방차와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개가 짖어댔다. 일반 병실과는 다른 소독액 냄새가 났다.

의사는 온화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외투를 벗겨보니 안감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의사는 스타킹에 가위를 집어넣고 벗겨내어 상처 부위를 살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는 재빠르게 수액을 놓았다.

"다른 통증은 없습니까?"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맞았나요?"

"글쎄요."

의사는 마사오의 눈과 입안을 살폈다.

"다리의 상처는 출혈에 비하면 얕은 것 같군요. 나중에 반드시 전문의에게 뇌파를 검사받아야 합니다."

또 여러 대의 사이렌 소리가 지나갔다. 마사오의 침착함이 사라졌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남편에게 데려다 주세요."

"남편이 함께 있었나요?"

의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토시오를 남편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맞습니다. 같은 차에 타고 있었어요."

"잠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이제 괜찮아요. 남편이 걱정돼요."

마사오는 절망에 빠졌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간호사가 수화기를 들고 응대하다가 곧바로 토시오에게로 향했다.

"카츠 씨, 계십니까?"

"네."

토시오는 전화를 받았다.

"이, 이봐요!"

마이코가 소리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로 사라져 버리다니. 마사오는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큰 부상이야?"

"아니요,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걸을 수 있겠지?"

"네."

"토모히로가 더 큰일이야. 빨리 마사오를 데리고 와. 키타노 제일의원 외과. 알았지? 도로는 교통이 통제되어 있어. 멀리 돌아서 와야 해. 바로 와."

"잘도 여기가 어딘지 알았군요."

"방금 전 '개와 고양이' 병원 간판을 봤었고, 차가 달리는 방향이 그쪽이었으니까. 네가 생각한 것 정도는 알 수 있어."

마이코는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뭐라구요......."

마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타노 제일의원이라는 곳으로 이송된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마사오는 피 묻은 외투에 손을 넣었다.

"내 차에 타세요."

토시오는 의사에게 키타노 제일의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밖으로 나오니 구경꾼들이 인도로 가득 차 있었다. 소방차의 사이렌과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의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 헬리콥터 소리.

연기의 세기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가끔씩 주황색 불꽃이 연기 속에서 되살아났다.

멍하니 서 있는 마사오를 바라보며 토시오는 에그에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카츠 씨라고 말씀하셨죠?"

마사오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보면서 말했다.

"네, 카츠 토시오라고 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큰 도움을 주셨네요. 저는 마와리라고 합니다."

"마와리……"

토시오는 그 이름을 감탄하듯 반복했다. 하지만 마사오는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니,

"이름은 마사오입니다."

라고 말했다. 마사오는 남자다운 호칭에 대해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카츠 씨의 주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

"감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런건 싫습니다."

거절하려던 말이 어느새 강한 어조로 변해버렸다.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위안이 될 만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조급해지면서 좋은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에그는 그대로 키타노 제일의원 현관에 도착했다.

하얀색 2층짜리 병원이지만 안쪽은 훨씬 더 깊었다. 마사오는 현관 계단을 오를 때 다친 다리를 끌며 올라갔다.

접수처에서 이름을 말하자, 안내를 맡은 간호사가 두 사람을 2층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인가요?"

토시오가 물었다. 간호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2층 복도 의자에 마이코가 앉아 있었다.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고 일어섰다.

"수혈이 필요하다면 내 피를........"

마사오는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시오는 못 본 척하며 걸어갔다. 간호사는 마사오의 다리를 보고 시선을 멈췄지만 걸음걸이를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간호사는 2층의 긴 복도 끝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뒤따라오는 것을 본 뒤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하얀 마스크를 쓴 의사가 나왔다.

"가족분들입니다."

간호사가 짧게 말했다. 의사는 마스크를 벗었다. 토시오는 부상자의 아내라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까부터 아내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제 때에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의사는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사오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이성이 승리한 것일까.

토모히로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약간 튀어나온 코에 산소 흡입용 마스크를 씌우고 있었다. 수혈병에는 거품이 일고 있었다. 거꾸로 된 A라는 글자가 보였다.

"당신……"

마사오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토모히로는 팔을 뻗으려 했지만 수혈을 위해 팔이 고정되어 있었다.

토모히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나는.......괜찮아."

고개를 움직여 입으로 마스크를 밀어내려고 했다.

"당신, 힘들겠지만, 힘내세요....... ......"

"나는, 괜찮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마사오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뺨을 문지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 당장 출발해 ...... 지금이라면 아직 ...... 비행기에….. 늦지 않아 ......"

"하지만--"

토모히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일 ...... 예정대로 호놀룰루에 있는 러더퍼드 데이비스 씨를 만나 ...... 마도죠를 ...... 건네줘."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마세요."

"쓸데없는 일 아니야 ...... 당장 출발해 ...... 마도죠를 ...... 반드시 ...... 내일 ......

"알았어."

마사오는 아이를 달래듯 토모히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말대로 할게요. 안심해라. 그러니 조용히--"

"당장 출발해"

토모히로는 빨리 떠나라는 말을 반복했다.

마지막에는 눈을 감고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마사오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토모히로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의사가 토모히로의 죽음을 알린 것은 그로부터 십오 분이 지난 후였다.


마이코는 2층 복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불쾌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제까지 멍청한 짓을 할거야?"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토모히로가 죽었어요."

"알아. 아까 토모히로의 병실에서 산소호흡기가 꺼져 있는 걸 봤어. 내가 어려울 때 죽고 말았지 뭐야."

마이코는 토모히로의 죽음에 대해 매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넌 생각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군."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배웠어요"

"그렇구나.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돼."

토시오는 신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게, 도무지 모르겠어. 사고 직전에 여러 사람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저도 봤어요."

"불덩어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연기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토시오 군, 토시오 군이 본건 뭐였어?"

"제 생각에는 하얀 연기 같았어요."

"어쨌든, 토모히로의 차에 낙하물이 부딪힌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군."

"토모히로가 그렇게 큰 부상을 입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요."

그것이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렇겠지. 택시 운전사도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채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택시와 부딛혔던 차의 사람들도 자기 차에 불이 나기 전에 피난할 수 있었고."

"그럼?"

"차에서 뛰어내린 후, 토모히로가 취한 행동이 문제였지. 그건 자살행위였어."

"우다이 씨는 그걸 보셨나요?"

"응, 똑똑히 봤어. 토모히로가 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반쯤 열린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가방을 꺼내려고 했어."

"가방을?"

"응, 가방도 가죽이 찢어져 안의 물건이 튀어나온 상태였어. 그래도 토모히로는 가방을 꺼내려고 애썼지. 그러던 중 급속도로 택시가 불길에 휩싸여 버렸어. 결국 토모히로는 가방을 꺼내기는 했지만 도로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고. 다리가 엉켜서가 아니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일거야. 그리고 그 순간, 토모히로는 삽시간에 불덩어리가 되고 말았어."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불덩어리가 될 수 있나요?"

"그냥은 힘들지. 뭔가에 불이 붙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내 생각에 그 가방 안에는 뭔가 인화성 액체가 담긴 병이 들어있었던 것 같아. 넘어지는 바람에 병이 깨지면서 토모히로는 그 안에 있던 액체를 뒤집어 썼고, 그 액체에 불이 옮겨붙었던게 아닐까."

"그 가방에는 꽤나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 가방도 다 타버렸어."

하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 기름병 등을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 그래, 아직 마이코에게 해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다이 씨 말이 맞았어요. 두 사람은 호놀룰루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사오가 말했구나."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로스엔젤레스, 플로리다를 거쳐 2주 후에 보스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고 했어요."

마이코는 가만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 맞아, 생각났어. 보스턴에서 11월에 '국제 장난감 박람회'가 열릴 예정이야. 각국의 참가업체가 백 수십 개, 전 세계 바이어와 업계 관계자가 1만 명 이상 모일 것이라고 신문에 나와 있었어."

"두 사람은 그 국제 완구 박람회에 참가할 예정이었을까요?"

"그래, 아직은 좀 이르지만, 마사오 말대로 세계여행도 겸해서였겠지"

"해바라기 공예에서는 수출도 하고 있나요?"

"일본 장난감 생산액의 3분의 2 이상은 수출하고 있어."

마이코는 장난스럽게 토시오를 바라본다,

"장난감 수출액 1위는 어느 나라라고 생각해?"

토시오는 조금 당황했다.

"일본이야. 이것도 후쿠나가 씨가 가르쳐 준 건데, 수출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됐어. 메이지 초기에 이미 요코하마에 있는 외국 상관을 통해 장난감 수출이 시작되었어.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본 전체 무역액의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수출품이었다고 하더라고. 일본 장난감의 인기 비결은 정교한 기술과 아이디어의 재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렴한 가격이었고. 종전 이후에 장난감은 빠르게 부활했어. 인간에게 장난감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인 것 같아. 주둔군이 버린 빈 깡통을 두드려서 만든 재료로 업체는 장난감 자동차를 만들어냈을 정도였다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수출 회복도 빨랐어. 마찰 장난감의 개량을 계기로 일본 장난감은 다시 수출의 선두에 서게 되었어."

"마찰 장난감?"

"스프링을 사용하지 않고도 달리는 자동차를 말하지. 봐, 바퀴를 몇 번 돌리고 손을 놓으면 의외로 멀리 가는 자동차가 있을 거야. 이는 자동차 내부에 플라이휠이라는 무거운 톱니바퀴가 들어있기 때문이지. 자동차의 바퀴를 바닥에서 마찰시키면 플라이휠이 빠르게 회전하도록 되어 있어. 이 플라이휠의 관성으로 놀이기구는 꽤 멀리까지 달릴 수 있고. 원형은 메이지 초기에 하숙집 장인이 고안했다고 하더군. 이 마찰물을 시작으로 수출은 순조롭게 성장했어. 1951년에는 수출액이 3백억에 육박하며 세계 1위로 성장했고."

"해바라기 공예에서는 어떤 장난감을 수출하고 있나요?"

"아까 보여주었던 달그락달그락 새가 달러박스인 것 같아. 나머지는 비슷한 소품 장난감. 하지만 더 큰 시장을 노린 해바라기 공예는 스페이스 레이스에서 실패하고 말았지."

토모히로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사오에게 끈질기게 '마도죠'라는 것을 어떤 외국인에게 건네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마도죠라는 것은 장난감의 상품명이 아니었을까.

"국제 박람회에선 여러 가지 신제품이 출품되겠지요?"

"물론이지. 바이어들은 눈을 부릅뜨고 좋은 제품을 찾아낼 거야. 국제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 회사도 큰 수익을 올릴 수 있겠지."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토모히로의 임종을 이야기했다.

"마도죠란 뭐야?"

"모르겠어요. 가방 안에 들어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마이코는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형사가 너랑 얘기하고 싶다고 했어"

"형사가?"

"에노키초 경찰서 교통과 형사야. 사고 경위를 듣고 싶다고 했어."

"우다이 씨는?"

"나는 싫어. 그 차에 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해 주면 좋겠어. 얼굴만 내밀고 오면 돼. 금방 끝나겠지."

그때 마사오가 복도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이코가 알아차렸다,

"나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마."

라고 말하면서 토시오의 곁을 슬그머니 떠났다.

마사오는 홀을 둘러보다가 토시오의 모습을 보고는 옆으로 다가왔다. 한쪽 다리는 여전히 끌고 다니고 있었다. 마사오는 토시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루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평범하게 유감스럽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서둘러 글씨를 써서 찢어서 마사오에게 건네주었다.

"제 주소입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곤란합니다."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싫으시다면........"

마사오는 종이 조각을 소중히 받았다.

"호놀룰루로 떠나실 건가요?"

"아니요."

마사오는 분명하게 말했다. 마이코가 뒤를 돌아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남편의 부탁이 굉장히 강했는데도요?"

"평소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분명 의식이 정상적이지 않았겠지요. 데이비스 씨에게 회사에서 전화를 걸도록 하겠습니다."

마사오에게 아직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우연히 마사오를 구해서 차에 태워준, 지나가던 사람이 알고 싶어할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부인도 ...... 몸조심하세요"

"고마워요."

마사오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마사오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토시오는 허탈한 표정으로 마사오를 배웅했다.

"불행이란 것은 한순간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구나."

어느새 마이코도 마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가 죽으면 마사오는 소우지와 함께 할 수 있을까?"

마이코의 말은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라서 부도덕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소우지를 사랑하지는 않을 거예요."

"호오.......그렇구나."

마이코는 토시오의 눈빛에 놀란 듯했다.

"마와리 가문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어. 토시오 군이 마사오와 친분을 쌓은 것은 다행이야. 좀 더 편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어. ….. 사랑에 빠진 척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토시오는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토시오의 운전으로 두 사람은 에노키초 경찰서에 도착했다. 토시오만 에그에서 내렸고, 차는 마이코가 운전하며 멀어져 갔다. 토시오는 마이코의 차를 배웅하면서 마사오의 긴 가방이 뒷좌석에 놓여있던 것을 떠올렸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2 스페이스 레이스

삼성퇴의 청동문명 1, 2 - 웨난 / 심규호 : 별점 2점

삼성퇴의 청동문명 1 - 4점
웨난 지음, 심규호 외 옮김/일빛
삼성퇴의 청동문명 2 - 4점
웨난 지음, 심규호 외 옮김/일빛
중국 촉 지방에서 발견되어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유명한 삼성퇴 문명의 발굴에 대한 이야기. 
고대 유물 발굴에 대한 괜찮은 논픽션을 많이 발표했던 웨난의 저작입니다. 제가 읽었었던 작가의 다른 논픽션들 모두 기본 이상은 했기에 이 책도 진작부터 읽고 싶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절판된 탓에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서야 읽게 되었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드리자면,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유는 제 기대와 많이 달랐던 탓이에요. 제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삼성퇴 문명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누가 이 유물들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두 권 분량의 책에 가득 담겨있을 것으로 기대했지요. 화려한 도판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정작 책에는 삼성퇴의 문명 발굴에 대한 에피소드만 넘쳐날 뿐입니다. 게다가 그 설명도 무척이나 장황합니다. 처음 삼성퇴에서 의미있는 유물을 발굴했다는 연도성의 일화만 보아도 그러해요. 연도성이 청나라 시기 지방 관직을 맡았지만 이후 민국이 되면서 자리를 잃었다는 설명이 3~4페이지 씩이나 길게 이어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설명보다는 실제 발굴이 진행되었던 삼성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와 도판이 추가되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연도성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이후 연씨 일가가 보물을 하나씩 풀면서 그 정보가 학계에 알려지는 과정, 2차 대전과 문화혁명을 거친 뒤 삼성퇴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벽돌 공장이 세워져 유적 일대가 훼손되지만, 학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결국 1호갱, 2호갱이라는 두 차례의 큰 발굴 성과를 내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너무 길어요. 저는 삼성퇴 문명의 수수께끼가 궁금했을 뿐, 이런 발굴 이야기가 궁금했던건 아닙니다. 성과 현에서 출토된 유물 소유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이야기는 반복이 지나쳐서 짜증이 날 정도였고요. 
물론 이런 발굴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재미가 없던건 아닙니다. 길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거에요. 그나마 한가지 웃겼던건 성 고고연구소에서 현과의 협상을 위해 진덕안을 보낼 때 두 청장이 삼국지 고사를 인용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갈량의 출사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진덕안을 파견하여 삼성퇴에 주둔하도록 했고, 현에서 변화가 있을 때 그가 나가서 단기필마로 응대한다, 그 뒤 우리와 같은 대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지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고고학 연구원들이라 이런 인용이 자연스러운건지, 아니면 중국인 특유의 허풍인지 감이 오지 않네요. 

이런 발굴 에피소드들 중심의 1권보다는 2권은 그래도 삼성퇴 문명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이 많이 있어서 좀 낫기는 합니다. 
그런데 가장 현실적이고 이치에 맞는 이론을 엄선하여, 요약 설명해주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이론을 정제하지 않고 모두 수록하고 있어서 다소 복잡했습니다. 대충 제가 판단한 바로는, 고대 사천 지역에 여러 개의 부족 국가(마을)가 있었고, 이 마을의 왕들이 잠총, 백관, 어부, 두우, 개명 등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즉 파국이 고대 기록에서처럼 수도가 사방으로 천도했던게 아니라 애초에 나라가 여러개 있었던 겁니다. 시초라 할 수 있는 잠총 부족은 이유가 무엇이었건 중원에서 남하하여 나라를 만들게 된 것이고요. 이후 두우 시기에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별령이 치수 기술을 활용하여 민심을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이 되어 개명 왕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 왕조는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진나라에 제압당하고 '촉군'이 되고 말았고요. 이후 청동기 문명이었던 촉도 철기 문명인 진나라에 융합된게 간략한 이 지역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퇴의 1호갱, 2호갱에 보물들이 부장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단순 묘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근거는 갱내 기물이 모두 불에 탔다는 사실이죠. 하지만 화장한 왕의 유골이 없다는 점에서 화장묘라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재사갱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출토 유물이 모두 제사에 사용되는 기물이고, 불에 탔다는건 불을 이용한 제사에 사용되었다는 논리죠. 그런데 출토된 유물의 양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아요. 한 나라의 재력을 모두 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유물들이라서, 제사에 한 번 쓰고 버리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삼성퇴 유적은 어부 왕조 당시 수도로 두우 왕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 마지막 제사를 벌이고 전멸한 흔적이다, 거대한 홍수 탓이었다는 등의 이론들이 발표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쟁으로 전멸하고 남은 유산이라는 설이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승리한 국가가 망한 국가의 신묘에 있는 제사용 보기들을 훼손하여 묻어버리는건 충분히 있음직했으리라 생각되거든요. 이 책에서도 이른바 '망국 보기 매장갱' 과 '상서롭지 못한 보기 매장갱' 이라는 해석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있고요. 
그리고 주요 출토 유물의 형태와 용도에 대한 설명, 다른 국가 유물들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특유의 안구 형태와 대담한 문양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허나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앞서 말씀드렸듯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는게 가장 큰 감점 요소입니다. 기이할 정도로 잡다한 주변 이야기가 많은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웨난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독자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요. 2권 내용을 보다 결론 중심적으로 요약 정리하고, 1권 내용은 에피소드 중 중요한 것만 짧게 인용하는 식으로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23/03/1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2 스페이스 레이스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마와리 토모히로의 집은 조용한 주택가의 한 구석에 있었다. 평범한 목조 모르타르 2층 건물로 나뭇결이 드러나있는 판자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옆에는 5층짜리 아파트가, 앞에는 초록색 화장 벽돌로 마감한 신축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새 건물의 선명한 색감 속에서 마와리 가가 있는 한 귀퉁이만 어둡게 느껴졌다. 인적은 드물었다. 가끔 가방을 걸친 세일즈맨, 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갈 뿐이었다.

"시간을 맞추지."

마이코가 말했다. 열시 십분, 마이코의 시계가 5분 늦었다. 토시오는 아침에 역에서 확인했으니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이코가 자신의 시계 바늘을 움직여 맞췄다.

두 사람의 차는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토모히로의 집을 등지고 멈춰 서 있었다. 백미러로 집 현관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위치였다.

"해바라기 공예 사장, 마와리 데츠바는 올해 예순두 살야.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지만, 작년에 가벼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업무에서 손을 뗐지. 요코하마 안쪽, 오나와(大縄)에 살고 있고……. 저기, 언젠가 고대 토기가 출토된 땅이지. 데츠바는 특별한 용무가 없는 한 회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하더군. 실제 업무는 아들 마와리 소우지가 담당하고 있어."

마이코의 설명은 토시오에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처의 사정까지 조사해야 하는 건가요?"

"조금, 이유가 있어서."

마이코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와리 소우지라고 하면 아까 본 사진에 있는 토모히로의 형제인가요?"

"아니야. 소우지와 토모히로는 사촌 사이야. 토모히로의 아버지는 류키치(龍吉)라고 하는데, 해바라기 공예의 사장인 마와리 데츠바의 동생이야. 류키치는 이미 20년 전에 죽었고, 아직 어린 아이였던 토모히로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지만, 생활은 데츠바의 도움이 필요했지. 그 어머니도 토모히로가 학생일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런 인연으로, 토모히로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바라기 공예에 입사하게 되었어. 그래서 현재 소우지는 해바라기 공예의 영업부장, 토모히로는 제작부장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이 둘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군."

사촌 사이지만, 토모히로 쪽은 일찍 부모를 잃고 데츠바의 보호 아래 있었다. 사진 속 모습만 보아도 굴곡진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성격도 달라. 소우지는 장난감을 수집하는 취미에 몰두하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토모히로는 오히려 장난감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현실적인 불평불만가이지. 게다가 토모히로는 데츠바와 소우지에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기도 했고. 그런 두 사람의 대립이 격렬해진건 한 사건이 계기였어."

술집의 소형 트럭이 토모히로의 집 앞에 정차하고 점원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곧 몇 개의 빈 병을 적재함에 싣고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장난감 업계는 최근 큰 변화를 겪고 있어. 백화점 장난감 매장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니? 십만 원이 넘는 호화로운 장난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장난감의 메커니즘도 현대 과학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고. 자동차도 그냥 움직이는 장난감은 이제 과거의 장난감이 되어버렸어. 동력은 배터리로, 조작은 전파나 음파를 통해 멀리서도 움직일 수 있어. 라디오 컨트롤이나 소닉 리모컨이라고 불리는 자동차는 알고 있겠지? 여자아이 인형만 해도 예전 같으면 궁궐에서 공주가 가지고 놀았음직한 화려한 패션 인형이 즐비해. 즉,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광고를 통한 대량 생산과 장난감 자체의 고급화가 이전에는 없었던 장난감 전성시대를 만들어내고 있어."

토시오는 장난감에 대한 관심은 적었지만, 장난감에 대한 광고가 너무 많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대체로 장난감 산업은 예전부터 가내 수공업이 주를 이루며 규모가 커지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었어. 두세 명의 가내 수공업부터 규모가 큰 곳이라고 해도 종업원은 기껏해야 천 명 정도에 불과했지. 이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난감 산업의 성격이야. 실제로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은 20여 명으로 이는 해바라기 공예의 전신인 츠루슈도 (鶴寿堂)시대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달그락달그락 새로 대표되는 이른바 소품 완구 제조 및 판매가 주 업종이었고. 그런데 작년에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유행에 편승하려 했던 것인지, 해바라기 공예가 경주용 자동차에 손을 댔어. 사장인 마와리 데츠바가 아닌 젊은 후계자의 기획이었던 것 같더군."

"알아요. 레이싱카는 요즘이라면 아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 수 있을것 같은데요."

"해바라기 공예의 신제품 이름은 스페이스 레이스였어. 다른 업체들이 놀랄 정도의 최고급 제품이었지. 이게 잘되면 해바라기 공예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거야."

마이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실패했나요?"

"그래. 경주용 자동차를 달리게 하려면 주행로에 전류를 흘려보내야 하지. 보통은 가정용 전기를 사용해서 변압기로 전압을 10볼트 정도로 낮춰서 한 두 암페어의 전류를 주로에 흘려보내. 자동차는 이 전류를 받아 내장된 모터를 돌려서 달리게 도고. 그런데 해바라기 공예의 스페이스 레이스는 이 변압기에 결함이 있었어. 판매된 제품 중 갑자기 불이 나거나 만지면 감전되는 제품들이 발견되고 말았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거죠?"

"변압기는 하청업체에서 만들었기 때문이야. 전부 다 불량품은 아니었지만, 극히 일부라도 위험한 불량품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기에 스페이스 레이스는 전면 제조 금지, 전 제품은 회수되어 폐기 처분되었지."

"큰 피해를 입었군요."

"실제로 해바라기 공예는 부도 직전까지 갔어. 업체들 중에는 아직도 해바라기 공예의 존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현재 해바라기 공예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을거야."

"소우지와 토모히로는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는 건가요?"

"아까 말했듯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을 피한 것은 토모히로가 더 참을성 있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최근 토모히로가 드디어 참을성을 잃은것 같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마이코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토모히로의 집 출입문이 열리면서 백미러에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 마사오다."

마이코는 시계를 보았다.


목적이 있는 발걸음이었다. 백미러 속 마사오는 사진에서 본 것처럼 웃고 있지 않다. 그래서 더 말라 보이는 것일까. 얼굴색이 생각보다 훨씬 더 하얗게 보였다. 마사오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검은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재빠르게 움직여 차 옆을 지나갔다. 마이코의 에그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마사오는 큰길로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돌아서서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역 방면이야."

마이코는 에그의 문을 열었다.

"아마 역이겠지. 나는 걸어서 마사오의 뒤를 쫓을게. 만약 마사오가 다른 차를 타면 그대로 따라가면서 틈틈이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구로사와군에게 상황을 알려주도록 해. 만약 차를 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산인은행 뒤에 주차장이 있으니 그곳에 차를 두고. 그럼 역에서 만나자."

마이코는 말을 마치고 차 문을 닫았다. 큰길로 나와 좌회전하자 마사오의 뒷모습이 금방 보였다. 차를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같은 걸음으로 계속 걷고 있었다. 토시오는 주차장에 에그를 놓고 국철역으로 달려갔다. 역에 도착한 것은 토시오가 더 빨랐다. 잠시 후 마사오와 마이코가 역으로 걸어왔다. 

마사오는 망설임 없이 표를 샀다. 토시오는 자판기 숫자를 읽고 같은 금액의 표를 두 장이나 샀다.

기차는 비어 있었다. 토시오는 마사오가 있는 곳에서 문 두 개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마이코가 다가왔다.

"차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마사오는 시간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그리고는 가만히 밖을 바라보았다.

중후한 체격에 탄탄한 옆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예쁘게 묶고 은빛 머리 장식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그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상상하게 하는 입매, 미끄러질 것 같은 어깨는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바로 옆에서 보고 처음 알아차린 부분도 있었다.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 코와 고양이처럼 구부정한 등 굽은 모습이었다.

다음 역에서 골프채를 든 남자가 일어나서 내렸다. 마이코는 빈 자리에 앉았다.

마사오는 그보다 대여섯 정거장 지나 작은 역에서 내릴 기미를 보였다. 토시오는 눈빛으로 마이코에게 알렸다.

소수의 승객들과 뒤섞인 마사오는 예의 그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가자 곧장 상가를 지나갔다. 상가를 지나자 마사오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늘게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길. 붉은 열매를 한가득 맺은 감나무가 무겁게 기울어져 있다. 인적이 드물었지만, 미행을 당할 염려는 없었다. 마사오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왼쪽으로 돌아서자 그 한 귀퉁이는 작은 호텔, 여관이 즐비한 거리였다. 대부분 깊은 입구 앞에 물을 뿌려놓고 조용히 손님을 기다리는 구조였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토시오는 이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 마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이코를 비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보면 모르겠어? 러브호텔이잖아."

마이코는 토시오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넌 그 반대라고 생각하겠지만, 보라고."

마사오는 흰 블록 담벼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토시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상대가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누구일까요?"

"나도 몰라."

토시오는 마사오가 사라진 자리에 섰다. 입구의 흰 벽에 기품 있는 파란색 글씨가 보였다. 

샹보르관.

양쪽에 원통형 날개가 있는 4층짜리 호텔이었다. 벽은 흰색이고, 삼각뿔 모양의 파란 두 지붕 사이로 창문이 보였다. 창문 가장자리에는 복잡한 덩굴 장식이 붙어 있었다.

마이코는 시계를 보고 5분이 지나자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토시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너도 들어오라고."

마이코가 말했다. 지나가던 주부가 토시오를 본 것 같았다. 토시오는 당황하며 마이코의 뒤를 쫓았다.

검은색 유리로 된 자동문에 들어서자 안은 어두웠고,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오렌지색 조명에 비춰진 종려나무 화분이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밤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작은 체구의 여인이 안쪽에서 슬그머니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옆으로 돌아섰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여자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로 4층, 여자는 한 방문을 열었다.

유리로 된 샹들리에, 벽에 장식용 벽난로가 달려 있고, 안에는 전기 난로가 있었다. 방의 장식은 어딘가의 궁전을 모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푹 쉬세요, 천천히……"

홍차를 두고 나가려는 여자를 마이코가 붙잡았다.

"이건, 성의표시."

마이코는 여자에게 지폐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5분 전에 이 호텔에 들어왔던 여성분에 대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여자는 표정이 굳어졌다. 이를 본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검은색 수첩을 슬쩍 보여주었다. 

"기다리는 분은 아직 안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바로 옆 방에 함께 계십니다."

여자는 벽을 가리켰다.

"익숙한 손님인가요?"

"네, 뭐, ......."

토시오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이코는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옆 방 손님이 돌아갈 것 같으면 그 전에 알려주실 수 있나요?"

"돌아가기 전에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나가자 마이코는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까?"

"이 수첩을 말하는 거야?"

마이코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경찰 수첩 같은 건 아닐거잖아요."

"당연하지."

"만약에 발견되면 어떻게 할 거죠?"

"괜찮아, 그 여자도 그런 건 다 알고 있을 거야"

"뭐라고요?"

"모르겠어? 나는 그 여자가 말하기 쉽도록 도와준 것 뿐이야."

토시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까지 이런 행동을 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당당했지?"

마이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모처럼이니까 목욕이나 할까?"

마이코는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침실 문을 열고 전등을 켰다. 침대의 반쪽이 보였다. 침대 옆에는 꽃무늬 스탠드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욕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물소리가 들렸다.

마이코는 거실로 돌아왔다.

"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어디까지라뇨?"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멍하니 있으면 안 돼. 일 얘기야. 차 안에서 토모히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잖아."

"......그랬습니다. 최근 토모히로와 소우지의 사이가 나빠졌다, 그 정도였지요."

"그래. 그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했지. 그 전에, 우다이 경제연구회의 손님은 어디서 오는 것 같아?

"주간지 등에 광고를 내는 건가요?"

마이코가 입을 열었다.

"카츠 군처럼 세상이 움직여 주면 정말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일반인들이 거래 조사 같은 걸 하겠어?"

비야냥거리는 말이라면 익숙해져 있다. 트레이너의 욕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 멍청아, 죽어버려라. 토시오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니시키 빌딩의 상호를 보고 뭔가 업무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싫어하지는 않아. 하지만 지금 조사 업무는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선배가 흥신소 소장인데, 그곳의 하청을 받고 있어."

마이코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우연히 내게 들어온 일 중에 마와리 토모히로가 의뢰한 신용조사가 있었어. 조사 내용은 신규 거래와 관련된 상대 회사에 대한 신용조사였지. 개인 이름으로, 특히 해바라기 공예에 대해서는 극비리에 진행해야 하는 조건. 어때?"

"토모히로는 해바라기 공예와 결별하고 거래처를 빼앗은 뒤 자기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사전 작업 중인 걸까요?."

"아마도 그런것 같아. 토모히로는 해바라기 공예와 결별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토모히로가 과연 제대로 독립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야."

"스폰서가 없나요?"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래. 그래서 토모히로는 새로운 회사 설립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노리고 극비리에 움직이기 시작한거니. 그렇다고 해도 내가 굳이 그 내용을 파헤쳐서 조사할 이유는 없어."

"마사오의 행적 조사도 토모히로의 의뢰였군요?"

마이코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 행적 조사까지는 아니야. 2~3일 전에 토모히로를 만났는데, 그때 마사오를 미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토모히로는 단 하루만 해도 좋다고 했어. 오늘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냥 호기심 때문에 나는 승낙했지. ……결국은 신원 조사가 된 것 같지만..."

"토모히로는 전부터 아내의 행동을 의심하고 있었습니까?"

"마사오가 이런 곳에 온 이상, 토모히로도 어느 정도 예상한게 아닌가 싶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아들이 한 명. 두 살 몇 개월로 세 살은 아직이야. 이름은 토우이치(透一). 마사오의 어머니가 돌보고 있을거야."

이상하게도 토시오는 아직 마사오를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마사오의 표정은 남편의 눈을 피해 애인을 만나러 가는 표정이 아니었다.

물소리가 달라졌다.

"물이 가득 찬 것 같군."

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어딘지 모르게 침착하지 못하다. 토시오는 담배를 서둘러 피웠다.

힘찬 물소리가 들린다. 문득 욕실에 면한 벽이 투명하게 비춰졌다. 지금까지는 그저 꽃무늬 벽인 줄 알았던 것이 유리로 된 칸막이였던 것이다. 욕실의 전등을 켜면 반대편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마이코 쪽에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하얀 나신이 어린아이처럼 양손을 높이 뻗고 있었다. 풍만하고 젊은 가슴이다. 살이 통통한 것에 비해 몸 전체가 탄탄했다. 마이코는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욕조에 뛰어들었다.

토시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리 칸막이 옆에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토시오는 서둘러 커튼을 잡아당겼다.

잠시 후 마이코가 수건을 몸에 두르고 침실 문을 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다.

"카츠군도 목욕하지?"

그 대답은 어렴풋이 기다리는 동안 준비해 두었다.

"아뇨. 마사오가 갑자기 돌아가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반쯤은 이대로 마사오가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

마이코는 문득 커튼을 발견하고 조금 열어 화장실을 보았다.

"흐음 ....... 자네는 꽤나 신사로군."

토시오는 마이코를 곤란하게 해주고 싶었다.

"우다이 씨는 몸매가 좋더군요."

그러자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에 토시오의 얼굴이 되려 조금 붉어졌다.

"그래도 스포츠에는 자신 있다고. 유도도 3단 정도 되는 실력이야."

마이코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어제 저녁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이제부터 조금만 더 자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줘. 한 시간만 지나면 깨어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마이코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자물쇠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멍하니 침실 문을 계속 바라보았다.

마사오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같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일까. 남자 쪽은 안이 보이는 유리 너머로 마사오의 나체를 감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호텔 여자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손님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자는 같은 욕실에서 마사오와 몸을 씻고, 다른 두 몸은 서로 엉키면서 침실로 ......

토시오는 의자의 팔꿈치 걸이를 잡고 힘을 다해 몸을 띄워 거꾸로 섰다. 신발 끝이 샹들리에에 부딪혔다. 샹들리에가 크게 흔들렸다.

토시오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TV를 켰다. 모든 채널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겨우 뉴스가 나오는 방송을 찾았다. 아나운서는 하호쿠가타(河北潟) 매립 공사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 운동의 쟁점을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설의 말이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토시오의 생각은 마치 자석에 빨려 들어가듯 마사오에게로 향했다. 토시오는 TV 옆에 작은 냉장고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을 열자 맥주와 주스가 보였다. 토시오는 맥주를 꺼내어 병뚜껑을 열었다.

정확히 한 시간 후, 마이코가 침실에서 나왔다. 옷차림이 단정하고 표정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혼자서 너무 많이 놀아 화상을 입은건 같은 얼굴이네. 얼굴이 벌겋다고."

마이코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병을 보며 말했다. 마이코는 냉장고에서 자신도 맥주를 꺼내 컵에 부어 한 모금 마신 뒤 한숨에 마셔버렸다.

45분이 지난 뒤, 호텔 여직원이 조용히 문을 두드리며 마사오 일행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샹보르관에서 마사오가 나왔다.

마사오 혼자만 있었다. 얼굴이 달랐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풀려 양 어깨에 걸려 있어 순간적으로 마사오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은 똑바로 호텔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 걸음걸이도 마찬가지였다. 경기하러 갔다가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과 비슷했다. 마사오는 몸을 숙여 원래 왔던 길을 걸어갔다.

"상대 얼굴 좀 보자."

담벼락 뒤에서 마이코가 말했다.

5분 정도 기다리자 그 남자가 나타났다.

피부가 하얗고 입술이 붉고 날씬한 체격의 남자였다. 옅은 색의 안경을 쓰고, 흰 코트에 양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마이코의 얼굴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우지다!"

마이코가 낮게 외쳤다.

마사오의 상대는 토모히로의 사촌인 마와리 소우지였다. 소우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사오가 지나간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이코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더 이상 소우지에게 볼일이 없었다. 마사오를 쫓기 위해서다. 마이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우지를 추월했다. 소우지는 마이코에게 조금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토시오가 지나갈 때, 소우지는, "오, 주모우......"라고 말한 것 같았다. 반짝, 의치의 금빛이 빛났다.

마사오는 역에서 처음 왔을 때와 같은 표를 샀다.

"소우지가 나를 알아챘어?"

기차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우다이 씨의 얼굴을 알고 있나요?"

"몰라. 모르니까 아무렇지 않게 소우지 옆을 지나칠 수 있었지. 그런데 소우지가 뭔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주모우 어쩌구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주모우?"

마이코는 생각에 잠겼다.

"주모우라는 게 뭔데요?"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

마사오는 자신의 역에서 내렸다. 역 앞 큰길을 건너 상가로 들어섰다. 이대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주의력이 약해진 것일까. 마사오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상가는 한낮이라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했다. 토시오는 마사오가 사라진 주변 상점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걸었다. 그 중 약국에서 마사오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리 넓지 않은 가게였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마사오는 새로운 손님에게 전혀 무관심했다. 카운터 맞은편에 콧수염을 기르고 흰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나이를 보면 이 가게의 주인인 것 같았다. 지금 막 작은 초록색 상자를 포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토시오는 상자 안의 약 이름을 재빨리 읽었다.

마사오는 돈을 지불했다. 계산대가 울리며 금액이 표시되었다. 토시오는 금액도 기억에 담아두었다. 마사오는 소포를 받아 가방에 넣고 가게를 나섰다. 달콤한 냄새가 남았다.

주인은 새로운 손님에게로 향했다.

"감기약을 ......"

주인은 증상을 듣고 뒤쪽 유리 선반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는 마사오가 구입한 약과 비슷했지만 브랜드가 달랐다. 토시오는 기억하고 있던 약의 이름을 말했다.

"............"

주인은 손의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한 번 토시오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콧수염이 살짝 움직였다.

"...... 의사의 처방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처방전? 가지고 있지 않은데요."

"그럼 유감스럽습니다만, 판매할 수 없습니다."

주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약인가요?"

"용도에 따라서는 ...... 수면제니까."

"방금 전에 가게에 있던 사람한테는 팔지 않았나요?"

"그 분은 ...... 제대로 된 처방전을 가지고 있었어요."

토시오는 어쩔 수 없이 감기약만 받았다.

상가를 빠져나오는 길에 마이코를 따라잡았다.

"뭘 샀어?"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포장을 꺼냈다.

"감기약입니다."

"또 쓸데없는 걸 샀나 보네. 다음에는 사지 않고 물건을 물어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사오도 감기약을 샀어?"

"그 사람이 산 약은 저한테는 안 팔더라고요."

"안 팔았다고?"

"그 사람이 산 건 수면제입니다."

"수면제라니......."

마이코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수면제는 의사의 처방전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건가요?"

토시오는 거절당한 것에 대해 여전히 불만이 있었다.

"마사오가 처방전을 가지고 있었어?"

"가게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습니다."

마이코는 약국 주인과 마찬가지로 토시오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본거야."

"사람을?"

"제대로 된 가정의, 아는 사람이라면 의사의 증명 따위는 없어도 팔 수 있어. 하지만 지나가던 낯선 젊은이에게는 팔지 않아."

"그렇습니까?"

"물론, 마사오라면 처방전을 몇 장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녀는 원래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많았을거야."

"그녀는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건가요?"

"...... 그건 나야 잘 모르지"

마사오는 끝까지 걸음걸이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신의 집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은 괜찮아?"

마이코가 물었다.

"괜찮냐니.......?"

"맥주를 마셨잖아."

"저 정도, 이미 깼어요."

지금은 마이코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토시오는 은행 뒤편 주차장까지 걸어가 에그를 마이코에게 돌려주었다. 마이코는 차에 탔다.

"아직도 감시를 계속하는 거예요?"

"그래. 다섯 시까지는 약속이니까."

근처 유치원이 끝났나보다. 교복을 입은 아이와 엄마가 몇 쌍이 지나갔다.

잠시 후, 역에서 온 샐러리맨 같은 남자가 마사오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키가 작고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저게 마사오의 남편이야. 마와리 토모히로."

마이코가 말했다.

전에 보았던 사진은 토모히로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 튀어나온 이마, 너무 작은 입, 퉁퉁 부은 턱........ 토모히로는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마이코의 차를 힐끗 쳐다보았다.

토시오는 소우지와 비교했을 때, 토모히로의 표정에서 음흉한 그늘을 느꼈다.

"토모히로가 돌아왔으니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글쎄, 잠깐만."

마이코는 시계를 보았다.

"토모히로라는 사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부분이 있단 말이지."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