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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5

살인자의 사랑법 - 마이크 오머 / 김지선 : 별점 2점

살인자의 사랑법 - 4점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이는 20년 전, 자기 동네에서 벌어졌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웃 글로버라는걸 알았지만 그가 도망가는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만보았던 과거 탓에 프로파일러가 되었다. 그러나 글로버는 그녀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며 회색 타이를 보내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계속 어필해 왔다.
그리고 현재, 시카고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돕기 위해 조이는 FBI요원 테이텀과 함께 수사팀에 합류했다. 언론에서 '목조르는 장의사'라 부르는 살인범은 살해한 여자들을 방부처리하여 시내에 유기하고 있었다. 조이는 프로파일링과 수사를 진행하면서, 사건의 범인이 20년 전 사건의 범인 글로버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연쇄 살인마와 프로파일러, FBI 요원 컴비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작품.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슷한 제목 때문에 영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인데, 읽어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던 부분이 많았던 덕분이지요.
우선 연쇄 살인마인 '목조르는 장의사'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초반에 방부처리된 사체를 보고 가짜 프로파일러가 범인은 전문 장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체의 발목 부분이 부패했다는걸 조이가 간파하고 범인은 이러한 사체 처리에 익숙하지 않은 초짜라는걸 밝혀내는 첫 장면부터 그럴듯했어요.
연쇄 살인의 패턴을 파악하여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과정도 여타 연쇄 살인물과 비슷하지만 추리의 여지는 많은 편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의 키가 전부 달랐는데,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범인은 살해 전에 피해자들에게 옷을 사 입혔던 겁니다! 첫 희생자 집 배관이 자주 역류했다던가, 납치되었던 피해자가 범인에 대해 재갈이 물린채 했던 말 등을 통해 범인이 배관공이라는걸 드러내는 식으로 단서 제공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고요.

범인이 여성들을 방부처리한 이유와 유기한 시체들이 전부 우는 듯한 표정이었던 이유를 범인이 오랫동안 함께 한 '연인'을 꿈꿨고, 그녀와 헤어지게 되자 사체들이 슬퍼하는 것 처럼 연출했다는 황당무계한 추리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그냥 범인의 광기 묘사에 집증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광기어리고 비참했던 유년 시절의 끔찍했던 학대가 원인이었다는건 다소 뻔했습니다만, 도화선이 된 사건은 동기로서는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잘 그려져 있거든요.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조이가 범인의 판타지를 활용하여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범인 앞에서 옷을 벗으며, 팬티에 감춘 권총을 테이텀이 잡게 만드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영화화하면 괜찮았겠다 싶더라고요.
현재의 사건과 병행 진행되는 20년 전 과거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글로버가 진범이란걸 확신한 뒤, 그의 집에 몰래 잠입해서 증거를 뒤지다가 글로버와 마주치는 장면, 글로버가 조이의 집에 쳐들어와서 자매를 협박하는 장면은 굉장한 서스펜스를 안겨줍니다. 21세기 작품다운 속도감있는 전개 역시 좋았어요

그러나 워낙 뻔한 설정이라 비슷한 작품과의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고, 캐릭터가 진부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프로파일러 조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공포스러운 기억, 그에 따른 불면증, 감정적이면서 도전적인 말투와 행동 등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여성 수사관 캐릭터와 별다를게 없거든요.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가 바로 떠오를 정도었어요. 그나마 조이에게는 여동생 안드레아, 그레이에게는 여든 살 넘은 할아버지 마빈이라는 가족이 굳건한 유대를 보여준다는건 좋았지만 , 이야기와 크게 관련이 있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편의에 따라 작위적으로 쓰여진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20년 전 사건 관련 내용에 특히 그러합니다. 우선 12살 중학생의 고발이라 하더라도 이를 무시해버린 처사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고발 직후 소녀들 집에 침입해서 협박하다가 도주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범인으로 몰려 자살했던 용의자 매니 앤더슨의 부모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1996년이라는 시기는 그리 옛날도 아닙니다. 어느정도 법의학이 정립되어 있었을터라 분명 단서도 남아있었을텐데, 경찰이 매니 앤더슨에게만 촛점을 맞춘건 말이 안됩니다. 글로버의 철벽같았던 알리바이가 알고보니 매니 앤더슨을 옭아매기 위해 검시 보고서가 조작된 탓에 불과했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글로버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이야기니까요. 이를 테이텀이 짧은 시간 동안 밝혀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또 현재의 시카고 사건에 갑작스럽게 글로버가 끼어드는건 전혀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글로버가 등장하는 속편을 강하게 암시하는 결말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설득력도 없어요. 조이가 동생 안드레아의 심층 트라우마를 일깨울까봐 글로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드레아가 글로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납치될 수도 있다는건데, 조이가 스토킹을 당했다면 안드레아도 글로버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건 당연합니다. 진작에 최대한 상세히 정보를 제공해 주었어야 했어요.
덜 떨어진 것 처럼 보였던 글로버가 20여년 동안 FBI의 자문역도 맡고 있는 전문가를 거리낌없이 스토킹하며, 나중에는 덮치는데 성공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과거의 알리바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충동적 범죄자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조이가 습격당한건 대낮이었습니다. 미국의 치안이 이 정도로 엉망일까요?
납치되었던 피해자 전화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려는 시도 외에는 범인을 잡아낼 방법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범인이 범행을 저질렀던 거리까지 알아냈는데도 불구하고 범행 장소도 결국 특정하지 못하는 등, 시카고 경찰의 무능만 작품 전체에 걸쳐 도드라지고, 범인을 잡은건 오로지 조이의 프로파일링 덕분인데 이는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매력적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작품입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09/24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김현화 : 별점 2점

 

앨리스 살인게임 - 4점
가코야 게이이치 지음, 김현화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61년, 지구는 식량 부족으로 파국을 맞았다. 가혹한 현실에서 하루는 돈을 벌기 위해 VR로 가상 현실 세계 '앨리스'에 접속했다가 정체불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로그 아웃도, 다른 곳으로 이동도 불가능하며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시스템 컨트롤 불가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피노키오'라고 불리우는 이 새로운 공간에서, 가이드를 따라 목숨을 걸고 '빨간 새우의 집'에 도착한 하루는 자기와 같이 끌려온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죽을 때마다 집의 잠겨진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들은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가상 공간을 무대로 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피노키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는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있어서 약간의 추리물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고요.
액션 스릴러적인 성향은 "빨간 새우의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강을 건널 때 그 편린을 살짝 보여준 뒤, 빨간 새우의 집 안에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벌이면서 절정에 달합니다. 하루가 LK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클라이막스고요. 여기서 가상 현실을 잘 이용한 두뇌 게임은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하루가 시스템 내에서 아바타 외모를 다른 사람처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내고 시체를 자기로 위장시킨다던가, 공간에 자기처럼 보이는 영상을 투영한 뒤 급습한다는 식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가상 공간 피노키오에 대한 진상도 신선했습니다. 앨리스 시스템 내의 다른 공간이 아니라, 앨리스에서 접속할 수 있는 또다른 가상 공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했을 뿐인 하루 등은 어떻게 피노키오에 접속할 수 있었나? 라는 수수께끼가 새로 불거지는데, 이는 하루가 앨리스 내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루는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한게 아니라, 앨리스에서 피노키오에 접속했었던 겁니다. '푸른 머리의 소녀'는 하루를 만들어낸, 진짜 현실의 인공지능 연구자였고요. 앨리스 안에서 인공지능을 만들어냈던건 현실 세계에서 대파국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대신해 앨리스 안에서 생활할 인공지능이 필요했다는 거지요.
이렇게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려 했던 이유는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터무니없다는 점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지 않으면 본성을 알 수 없어서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특정 공간에 가두었다는 발상부터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이런다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까요? 설령 그렇다쳐도, 구태여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불필요한 설정들을 따 오면서, 이상한 공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존 게임으로 알 수 있는건 가장 싸움을 잘하고 강한 인공지능이 누구인지일 뿐이니까요. 극한 상황이 필요했다면 앨리스 시스템 내의 문제로 시스템 컨트롤을 할 수 없는 특정 클러스터 - 현실의 무인도같은 - 에 갇히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생존자들에게 '푸른 머리의 소녀'라는 수수께끼를 던져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추리력은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피노키오'를 가져다 붙인 것도 억지스럽고요.
생존 게임도 앞서 소개했던 배틀 자체는 그럴싸하지만, 설정은 진부합니다.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묵한 전사, 쎈 언니, 이해심 높은 조력자, 양아치 (?) 등 등장 인물들도 진부한데다가, 설정상 오류가 크게 느껴집니다. 이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앨리스 내부에서 활동할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평범한 인물들이었어야 했습니다. 문신충 앗슈라던가, 사교성없고 폭력적인 LK는 인공지능 프로토타입으로는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테스트를 반복해서 하루에게 부담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화 후 업데이트된 버젼으로 테스트했다면 이전 히스토리를 알 수 없는게 당연할텐데요. 찬호께이의 <<S.T.E.P>>에서의 시뮬레이션처럼, 각 테스트는 모두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결과라는 설정이 더 이치에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좋았던 아이디어와 설정에 기묘한 생존 게임을 더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린 작품입니다.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2022/09/18

한 문장의 충격!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180도 뒤집히는 경악의 미스터리 소설! - 혼토 북트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소개드렸던 honto의 북트리 서비스에서 추천하는 '반전'이 있는 작품들. 그냥 반전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뒤집히는 작품들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본격물보다는 아무래도 서술 트릭에 가까운 작품들이 많은데, 전부 '반전'이라는 취지에는 충실한 좋은 작품들입니다. 일본 작품만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하지만요. 그나저나 이 서비스, 보면 볼 수록 괜찮네요. 다른 추천도 찾는대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뛰어난 구성에 잘 짜여진 작가의 안배로 때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 한 문장. 미스터리 소설 중에는, 마지막 단 한 문장으로 세상이 바뀌는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걸작들이 있습니다. 기분 좋게 속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이누이 구루미
'나'는 마유코와 만나, 곧 사랑에 빠졌다.
대학생에서부터 사회인에 이르기까지를 그리는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같지만, 마지막 한 문장 덕분에 걸작 미스터리로 변신하는 작품. 다시 읽어보면, 저자의 철저한 계획에 감탄의 한 숨을 내 쉴 수 밖에 없다.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대학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 젊은이들은 외딴 섬에 위치한 십각형 모양 저택을 방문했다. 그들은 반년 전에 타 죽은 건축가 수수께끼에 접근하려 했지만, 차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왜 살해당하며, 범인은 누구인가? 마지막 충격적인 문장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

<<미로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시가 지은 기괴한 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는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미로같은 관에 모인 젊은 작가들에게 닥치는 살인 사건.
이 작품은 '마지막 한 문장'이 여러 개 존재하기 때문에, 종반부에서 이야기는 여러 번 뒤집힌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여러 번 맛볼 수 있는 작품.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 로커>> : 이사카 고타로
대학생 '나'가 이사하자마자 이웃과 함께 서점을 덮친 이유는 코지엔 사전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세련된 대화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청춘 소설에 가깝지만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야기는 뒤집힌다. 조금은 잔혹하고 센티멘탈한 결말의 작품으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로
연속 엽기 살인 사건을 범인, 전직 형사, 범인의 가족이라는 세 명의 시점으로 그려나가는 작품. "범인"의 시점으로 그려져서 범인은 초반부터 확실하지만, 평범한 사이코 서스펜스로 끝나지는 않는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뒤집히는데, 충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작품.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2022/09/12

흑마술의 여자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흑마술의 여자 - 4점 모리무라 세이이치 지음/동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흑마술과 관련된 기묘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카미치 도키코는 다카네자와 다쿠야와 결혼하여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던 중, 남편 친구 우나하라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되어 버렸다. 밀실인 그녀의 별장에서 우나하라의 시체가 발견된 탓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남편 친구 아리자와가 수상하다고 주장했지만, 아리자와마저 살해되어 버렸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했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과 이 사건이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고, 도키코를 추궁하여 결국 진상을 밝혀내게 되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책을 정리하다가 집어들게 된, 거의 30여년 전 구입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장편.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잔혹한 범죄에서 시작되는 범죄 스릴러물, 그리고 몇 가지 트릭이 등장해서 비교적 정통 추리물 느낌을 전해줍니다. 특히 '유니트 하우스'라는 건물의 특징을 이용한 밀실 트릭 아이디어가 돋보였어요. 우나하라는 도키코의 별장이 아니라 바로 옆 아리자와 별장에서 살해당했고, 아리자와가 별장 이층 방을 통째로 떼어내 교체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수사 과정에서 도키코와 아리자와 별장의 이층 유니트가 바뀌어져 있다는게 드러나지요.
'이층 유니트를 통째로 바꾸는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층을 통째로 교체하느니 지붕이나 벽면 일부만 떼어내어 사체를 옮기는게 더 편했을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등 이어지는 수수께끼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당연히 아리자와가 범행 후 유니트를 교체한건 아니었습니다. 진범은 도키코로 그녀는 우나하라를 별장에 먼저 초대한 뒤, 독이 든 위스키를 먹도록 유도하여 살해했던 겁니다. 유니트는 설치 당시 도키코가 자기 별장에 더 새 것처럼 보이는 유니트가 설치되도록 했던게 전부였습니다. 설치 공사는 명찰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명찰만 바꾸는 걸로 교체가 가능했었죠. 유니트 하우스이니 설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요. 나중에 범행을 아리자와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사실을 이용했던 겁니다.
경찰이 이를 증명하는 과정도 합리적입니다. 별장 해체 후 유니트 패널 조사를 통해, 우나하라 살해 사건 당시 별장 근처 아자마 산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내렸는데, 패널에는 화산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건 당시 유니트는 분해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로서는 꽤 첨단이었을 유니트 하우스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교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등 꽤 괜찮은 발상이 많이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작 밀실 살인에는 굉장히 간단한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유니트가 바뀌었던 이유가 '자기 것을 더 좋은 걸로 만들고 싶은' 보편적인 인간 심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리고 3인조 성폭행범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이 우나하라, 그리고 아리자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이 경찰 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그리고 흥미롭게 드러나는 전개도 볼 만 합니다. 우나하라가 3인조 성폭행범 일당 중 한 명으로 그들은 게이코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미스기 게이코와 동행했다가 함께 성폭행범에게 납치되었던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라는건 초반에 독자에게 공유되는 덕분입니다. 독자도 게이코 살해의 진상과 우나하라를 죽인 범인이 도키코인지 아니면 게이코의 약혼자였던 아리자와인지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지요.
경찰이 우나하라가 3인조 중 한 명이라고 추리하여 나머지 일당을 체포하고 아리자와 사건의 진상을 밝혀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우나하라가 살해된 뒤, 남은 2인조가 아리자와가 복수했다 여기고 그를 살해했던 겁니다. 여기서 아리자와 사건은 게이코 사건과 연결되지 않으니, 우나하라 사건과 게이코 사건이 연결되며 두 사건의 범인은 도키코라는 결론에 이르는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도키코가 우나하라를 살해한 이유는 협박받았기 때문일텐데, 그 이유는 우나하라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걸 폭로하겠다는 협박일리는 없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면 잃을게 더 많은건 우나하라니까요. 결국 우나하라는 게이코를 죽인 진범이 도키코라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임을 밝혀내고 결국 도키코를 체포하는 경찰의 집요하면서 끈질긴 수사 과정도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다운 디테일이 돋보였습니다. 고소우 경찰 부장 등 등장하는 경찰 캐릭터들도 생동감있게 잘 그려내고 있고요.

가장 마지막에 드러나는, 도키코가 게이코를 살해했던 이유는 정말 놀라왔습니다. 그녀는 선천적 기형으로 질결손 상태였는데, 성폭행범들 때문에 이 사실이 게이코에게 알려지자 그걸 숨기기 위해 살해했던 겁니다. 그 뒤 인공 질 성형술을 시술받아 결혼했고요. 좀 급작스러게 드러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복선으로 - 특히 다쿠야가 미국 출장을 간 사이, 도키코가 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이유처럼 - 설명되고 있어서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발표된 1974년이라는 시점에서는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비슷한 아이디어가 1975년 작품인 나쓰키 시즈코의 <<흑백의 여로>>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데, 아마 당시 일본에서 사회 문제가 되었던게 아니었다 싶기도 하네요.

이렇게 3인조 성폭행범의 범죄에서 촉발된 연쇄 살인극만 놓고 보면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도 잘 사용되어 있고, 수사 과정과 진상 모두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작가 인생 최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에도 있는 '흑마술' 입니다. 이는 도키코의 남편 다쿠야가 흑마술과 집단 난교 등을 행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인 '신비학회'의 본부가 있는 미국 라스베가스까지 날아가 비밀 모임에 몰래 참석하는 등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 처럼 장황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해요.
추리적으로도 도키코가 아리자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리자와에게 알리바이가 있을 경우 대책이 없었다는 헛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아리자와의 알리바이가 증명된 이후, 도키코는 빠져나갈 여지가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아리자와가 운 좋게 (?) 살해당해서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작가 특유의 성적 묘사도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장점도 분명하지만 단점이 너무 커서 완성도 측면에서는 점수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나마 흑마술과 성적 묘사 부분만 뺐더라도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어차피 절판되어서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2022/09/11

스완 - 오승호 / 이연승 : 별점 2.5점

 

스완 - 6점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형 쇼핑몰 고나가와 시티 가든 스완을 '엘리펀트'라 자칭한 2인조 테러범이 습격했다. 그들이 대량의 사제 총기를 무차별 난사한 탓에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 때 여고생 이즈미는 범인에게 협박을 받아서 쳐다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이 사실이 학교 친구 고즈에의 증언으로 기사화된 탓에 오명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얼마 후, 변호사 도쿠시마가 스완 사건 생존자들을 모은 비밀 모임에 이즈미를 초대했다. 사건 당시 사망했던 기쿠노 할머니의 아들이 어머니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다며 만든 모임이었다. 몇 번의 모임에서 참석자들의 증언을 통해 서서히 사건 당일의 진상, 그리고 그들이 각자 숨기고 있었던 진실이 드러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추리 소설계에서 부쩍 유명해진 재일교포 작가 오승호 (고 가츠히로)의 작품.
2명의 테러범이 일으킨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그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았는데 사망한 피해자 요시무라 기쿠노의 아들이 진상을 밝히기 위해 당시 생존자들 몇 명을 불러 그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거대한 스완 내부 구조의 상세 설정, 그리고 정교하게 짜여진 테러범들과 피해자, 생존자들의 동선이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단지 공들여 만들어진 것에 그치지 않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면서도 서서히 진상을 드러내도록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쿠노 할머니가 왜 스카이라운지에서 3층으로 이동했는지, 왜 비상계단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던 고즈에와 유키오와 함께 스카이라운지로 돌아가지 않았는지에 대해 거의 분 단위로 밝혀지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참석자들의 증언으로 서서히 진상에 이르는 과정이 정말 좋았어요. 지적인 쾌감과 함께 독자가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솜씨가 일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존자들이 증언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각자 무엇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는지? 라는 또 다른 수수께끼 풀이도 볼거리입니다. 생존자 중 도산 - 오다지마와 이쿠노는 각각 피해자인 누군가의 죽음에 큰 책임이 있었고, 가장 정의로운 척 했던 꼰대 호사카 할아버지가 기쿠노 할머니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걸 지루하지 않게, 합리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덕분이에요.
이 과정에서 오다지마의 거짓말은 연인 하마야를 감싸기 위해서였다는게 밝혀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추리해내는 도쿠시마 변호사의 활약도 눈부셨습니다. 하야마는 오다지마가 걱정되어 비상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총에 맞았는데, 스카이라운지에 도움을 요청한 탓에 기쿠노 할머니가 내려왔던게 할머니의 이유를 알 수 없던 동선에 얽힌 진상이지요. 하야마가 깜짝 등장하여 증언을 더해주는 등 사건의 중요한 열쇠들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추리물로서의 가치도 적절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멤버 중 가장 주변인으로 보였던 하타노가 사실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사살당해 죽었던 아이 유키오의 아버지였다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하타노와 이즈미 등을 통해 선과 악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테러범들이 찍은 동영상에 대한 정보가 독자들에게 공유되지 않는 탓입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으니까요. 유키오가 얼굴 앞 뒤에 총을 맞은건 고즈에가 방패로 써서 그렇다는 반전도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어요. 추리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는 결국 이즈미의 기억이 전부라는 의미거든요.
고즈에가 총에 맞은 상황에 대한 진상도 마뜩치 않습니다. 고즈에는 이즈미를 괴롭히던, 학폭 주동자였습니다. 사건 후 이즈미에 대해 고발하는 인터뷰를 해서 이즈미의 현재를 더 지옥처럼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사건 경과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고즈에는 위험에 처한 이즈미를 구하기 위해 구태여 밖에서 스완으로 들어왔던 의리녀입니다. 또 범인 니와가 총을 쐈을 때 '이미 죽은' 유키오의 시체를 방패로 삼았다는 이유로 자살을 시도했던 마음 여린 소녀이기도 하고요. 즉, 앞서의 학폭 주동자와 너무 상반된 모습이라 전혀 다른 두 명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에서 계속 언급하는 백조와 흑조, 오데트와 오딜은 이즈미와 고즈에가 아니라 고즈에 한 명 안에 포함된 두 개의 인격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에요.
기쿠노 할머니의 응급처치를 호사카 할아버지가 질타했던 탓에, 그렇잖아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할머니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할머니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기 어렵게 만드는 작위적인 설정에 불과해 보였거든요.

설정과 묘사에서 '스완', 즉 백조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과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했던 대형 쇼핑몰 이름부터 시작해서, 테러의 주 현장이었던 백조, 흑조 광장와 이즈미가 사랑하는 발레 '백조의 호수' 속 백조, 흑조 이미지와 엮는 여러가지 묘사들은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마지막에 한 단계 성장한 이즈미가 스완에서 홀로 백조의 호수 연기를 펼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했고요. 영상화를 염두에 둔 장면 같은데, 여러모로 실소만 자아내는 장면이었어요.
그 외에도 여러 명의 관계자들이 모여 증언을 하는데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던가, 살아남은 이즈미가 언론에 의해 여러 명을 희생시킨 희대의 악녀가 되어 버렸다던가 하는 흔한 설정이 많은 것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래도 흔한 설정을 무대와 상황에 대한 변주를 통해 독특하게 그려내고, 비교적 정교하게 짜여진 전개로 지적 쾌감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작가가 왜 최근에 '핫' 한지를 잘 알 수 있었어요. 단점은 있지만 재미와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9/09

BOX ~상자 속에 무언가 있다 1~3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이야기의 진상 및 반전, 여러가지 트릭과 장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의 죽음으로 가정이 엉망이 된 고등학교 1학년 가쿠다 코우지에게 어느날 발신인 불명으로 세공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 퍼즐을 풀자 큰 소리와 함께 알수없는 무언가가 어디론가 향했고, 집과 어머니 머리 일부는 사라져 버렸다. 해명을 위해 무언가가 향한 곳을 찾아간 코우지는 루빅스 큐브를 풀고 있던 마스다 메구미를 만났다. 그 뒤 둘은 공원의 기묘한 정방형 건물 앞에서 똑같이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퍼즐을 받았다는 다른 다섯 명을 만났고 (두 명은 부부라서 네 팀), 호기심 넘치는 기묘한 여자 쿄우코와 함께 정방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은 곧바로 건물의 출구가 사라져버린걸 알게 되었다. 건물 속 네비게이터라는 괴소녀가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상자'가 제공한 퍼즐을 모두 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일행 중 야마우치는 퍼즐을 풀지 않으려 했다. 건물과 관련된 민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간 사람 중 돌아오지 않거나 존재조차 사라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퍼즐을 풀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야마우치는 괴물로 변했고, 퍼즐을 풀지않고 편법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고우다도 자기 퍼즐을 쿄우코에게 넘기다가 괴물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쿄우코,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 네 명은 괴물 고우다의 공격, 상자 퍼즐 네비게이터 괴소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퍼즐까지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최후의 순간, 괴소녀가 품었던 네 명을 모두 없앨 계획도 쿄우코의 기지로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는데...


좋아하는 작가인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장편(?)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아닙니다. 일본어 독해 실력은 형편없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도전해 보았는데, 전 3권으로 각 권당 200페이지 정도 분량 정도라 다행히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체 불명의 누군가가 보낸 초대장으로 모인 사람들이 폐쇄된 장소에서 생존 게임을 벌인다는 설정은 흔합니다.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없애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는건 독특했습니다. 초대장이기도 한 '퍼즐'을 모두가 푸는게 살아남는 조건이라서, 모두 살아남는 것도 가능했으니까요.
또 이런 류의 생존 게임은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많았었는데, '상자'에 갖혀있는 '인과'를 잡아먹는 괴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게임을 벌인다는 나름의 이유도 괜찮았습니다. 황당무계하게 스케일을 키워버리니까 오히려 번잡하고 비현실적인 게임이 더 말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을 불러들였지만,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키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자 - 당연합니다. 정체 불명의 공간에 갇혔을테니... -, 사람들이 단계를 밟아 나가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퍼즐'을 풀게 했다는 설정, 그리고 '먹이'가 사람들이 버리고 싶은 것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물의 먹이가 '인과'인 탓에, 사람들이 상자에 두고가서 '무언가'가 원래부터 없던게 되어버리면 - 예를 들어 아내를 상자에 준다면, 상자에서 나온 세상에는 아내가 처음부터 없다. -, 인과관계 변화가 크게 생겨서 그에 따른 에너지를 상자 속 괴물이 먹어치운다고 설명되는데, 상황에 대한 설득력은 충분했어요. 괴물의 실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자주 써먹는 특유의 크툴루 신화스러운 분위기를 적당히 살린 은근하게 묘사도 한 몫 하고요.
다른 소소한 설정들도 잘 짜여져 있는 편입니다. 초대된 사람들이 6명인 이유는 '상자', 즉 육면체가 플레이어들을 선택하여 퍼즐을 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가 죽은 사람 것이라도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육면체에 카드를 붙여야 했기 때문이었거든요. '퍼즐'을 풀지 않는게 가장 중요한 규칙 위반이라서 그런 짓을 한 플레이어는 상자가 처단한다는 설정, 그리고 입장권과 퍼즐을 넘기면 플레이어로서의 권리를 넘길 수 있다는 설정은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뿐더러 이야기 절정부에서 아주 잘 써먹고 있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작가가 직접 고안했다는 퍼즐들도 좋습니다. 종이를 접어야 풀 수 있는 미로, 일행의 이름을 사용하는 힌트없는 크로스워드 퍼즐에서 시작해서, 각 에피소드 표지 그림 등 곳곳에 삽입된 그림 퍼즐들 모두 볼거리였거든요. 퍼즐 풀이에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들도 적절합니다. 코우지는 세공 상자를, 메구미는 루빅스 큐브를 이미 풀었는데 상자에 들어갈 때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를 받지 못했었지요. 오히려 '안'에서 다시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고요. 이는 세공 상자와 루빅스 큐브를 풀었던 방법을 상자 안에서 그대로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세공 상자의 해법 순서대로 '문'을 열고 닫아야 하는데, 이 때 열린 문으로 괴물이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메구미가 풀어야 하는 퍼즐이 전체 면이 백색인 루빅스 큐브라는 것도 기발했습니다. 원래 밖에서 풀었던 큐브 순서 그대로 다시 풀어야 했던 거지요. 네비게이터가 이를 방해하기 위해 건드리려 했었던 상황은 정말로 큰 위기였고요. 한 칸이라도 돌렸으면 푸는게 불가능했으니까요.

캐릭터 구성도 나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다운 쾌남 코우지를 비롯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활약이 잘 배분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메구미가 상자에 갇힌 타니 부부를 데려오려 했던게 알고보니 중요했다는 - 타니 부부의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어서 - 게 대표적입니다. 딜러, 힐러 등으로 역할 구분이 되는게 아니라 모두 퍼즐을 푸는데 성공하는 두뇌파 모습을 공평하게 보여주는 것, 코우지가 메구미, 치에코의 기묘한 삼각관계도 독특했고요.
패닉을 일으키는 어른 두 명과 네비게이터 괴소녀와의 대결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닌 탓에 다소 부족했던 갈등과 대결 구도를 보완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네비게이터'같은 설정 구멍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목숨을 걸고 게임을 시키고, 그 결과 자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걸 먹이로 준다는게 상자 퍼즐 게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왜 이를 플레이어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걸까요? 애초에 제대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상자 속 괴물이 상자를 찢고 나올 수 있어서 이 게임을 벌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은 퍼즐을 잘 풀도록 도와줘서 필요없는걸 - 그리고 그에 따른 인과 에너지를 - 쉽게 받아내는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구태여 플레이어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다고 인과 에너지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네비게이터는 마지막에 카드에 표시되는, 자기가 바쳐야 할 무언가를 상자에게 주는걸 거부하면 그 플레이어 혼자서만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는건데 그걸 거부하고 상자를 빠져나오는 선택을 하는 플레이어가 있을까요? 실제로 작중에서 코우지는 집안의 우환이 되어버린 죽은 형의 존재, 메구미는 성정체성장애를 겪는 자신의 '남성', 치에코는 자기를 고립되게 만든 '영감'을 주는데, 이것들은 그들이 너무나 쉽게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하는 것으로 작 중에서 설명됩니다. 코우지 일행 중 이것들 때문에 배신을 할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친구 이상이 되기도 했고요.
게다가 네비게이터는 쿄우코의 작전으로 진짜 '플레이어'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무언가를 주는걸 거부하면 됐습니다. 일행을 유혹해서 배신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모두가 필요없는걸 바친 정도가 보상이라는건 좀 시시했다 생각되고요.

그래도 이런 설정 구멍은 빠른 전개와 여러가지 퍼즐의 배치로 읽으면서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발암 캐릭터 쿄우코의 존재입니다. 이야기 맥락을 많이 끊을 뿐더러, 그녀가 네비게이터 소녀에게 싸움을 걸어서 코우지 일행이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단순히 '흥미가 넘쳐서' 상자에 일부러 뛰어든다는 등의 캐릭터 설정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대활약하는 '착시 퍼즐' 부분은 퍼즐이라고 하기는 억지스러운, 다소 개그스러운 내용이라서 역시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저자 스스로 그녀는 '트릭스터'이며 <<요괴헌터>>의 히에다 교수의 제멋대로 무책임 버젼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히에다 교수 본인이 등장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정신나간 여자가 어설픈 개그, 색기 따위를 보여주는것 보다는 말이죠.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테이스트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괜찮은 모험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 입문작으로 제격인 작품으로 생각되는 만큼, 국내에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2022/09/04

대단한 밀실 트릭! 신비로운 고전 걸작 5편 소개 (from 'honto')

일본의 전자책 서점 honto에는 책 전문가인 북 큐레이터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선정하여 소개해주는 서비스 '북트리'가 있습니다. 그 중 밀실 트릭 고전 걸작 소개입니다. '고전 걸작'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고전이면서도 트릭면에서 나무랄데없는 좋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류의 추천치고는 일본 작품 비중이 비교적 낮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이 서비스를 좀 더 이용해 보아야겠네요.

1. <<모르그 거리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밀실에서 일어난 범행이라는 수수께끼, 홈즈의 원형이라고 불리우는 명탐정 듀팽, 논리적인 해결, 의외의 범인 등의 요소로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의 막을 연 작품.

2. <<노란 방의 비밀>>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원작자로도 유명한 저자가 그려낸 '완벽한 밀실'인 노란 방에서의 범행, 거기에 두 개의 인간 소실 수수께끼까지 더해져 있다. 고전 모험 활극의 향기도 느껴지고, 밀실 추리물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올 타임 베스트에 단골 선정되는 명작.

3. <<유다의 창>> 존 딕슨 카
엘러리 퀸, 크리스티 여사님과 함께 황금 시대 (골든 에이지) 삼대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딕슨 카의 작품. 밀실의 거장이라고도 불리운 카의 작품답게 밀실 살인과 법정 미스터리가 결합되어 있다. 밀실에서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피고를 명탐정인 법정 변호사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하는 내용으로, 아주 유명한 트릭이 사용되었지만 트릭을 알아채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4. <<혼진 살인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명탐정의 대명사 긴다이치 코스케의 데뷰작. 열쇠도 없고, 장지문으로 만들어져 밀실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본 가옥을 무대로 한 최초의 밀실 추리물로도 유명한 불후의 명작.

5. <<문신 살인 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타카기 아키미츠의 데뷔작으로 명탐정 카미즈 교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명 문신가의 문신을 한 3자매 중 한 명이 토막난 사체로 밀실에서 발견된다. 쌍둥이 자매, 토막난 시체, 욕실이라는 밀실에서의 살인이라는 본격 추리물의 재료가 가득한 작품. 트릭도 훌륭하다.

당신이 찾는 서체가 없네요 - 사이먼 가필드 / 송성재 외 : 별점 4점

 

당신이 찾는 서체가 없네요 - 8점
사이먼 가필드 지음, 송성재 외 옮김/안그라픽스

여러가지 서체를 통해 서체의 역사와 디자인 속성들, 그리고 쓰임새 등에 대해 안내해 주는 책. 정말 오랫만에 디자인 전공 관련 책을 읽어보았네요.

제가 이십년도 더 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내용이 많았습니다. 헬베티카가 왜 그렇게 많이 사용되는지?에 대한 저자의 해설처럼요. 헬베티카는 불편부당, 중립성, 신선함 등 스위스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기하학적 인상과 함께 근면하고 정직하다는 느낌을 전해주어 기업의 CI에서조차 친근하고 검소한 인상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애초 헬베티카는 간결하고 범용적인 알파벳, 그리고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중요한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지요.
제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유니버스는 프루티거가 디자인한 서체로 스위스의 완벽함과 프랑스의 우아함, 영국의 고귀함을 종합했지만 조금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는 반면, 프루티거는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담겼다라는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프루티거를 더 많이 쓸걸 그랬네요. 여튼, 프루티거가 했다는 말, "점심식사 때 사용한 스푼의 모양을 기억한다면, 분명 그 모양은 잘못된 것입니다. 스푼과 글자는 도구입니다. 하나는 그릇에서 음식을 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이지에서 정보를 꺼내는 것입니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자여서 독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 그것이 좋은 디자인입니다".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라 생각되고요. 평범하지만 아름답고 편안한 것, 그게 궁극의 디자인이라는 건데 정말 공감이 많이 됩니다. 메타 폰트 등을 디자인한 전설적인 독일 폰트 디자이너 슈피커만이 한 말도 마찬가지에요. <<이코노미스트>>의 리디자인 작업을 할 때 한 말이라는데, "나는 결코 누군가가 그 서체를 꼭 집어서 '멋진 서체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정말 멋진 기사네요.'라고 말해주기를 바라죠. 나는 소리를 디자인해요. 그 소리는 읽기 쉬워야 하죠". 거장은 역시, 달리 거장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푸투라, 고담, 타임스뉴로만, 배스커빌, 길산스, 리버풀, 벵돔 등 다양한 폰트의 탄생기와 사용기 등과 서체를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나가는지, 어떤 서체가 가독성이 좋은지, 어떤 문구가 서체를 표시하기에 적당한지, 어떤 서체가 어떤 상황에 적합한지와 같은 디자인 방법론, 그리고 헬베티카를 표절한 에이리얼과 같은 표절 및 폰트 저작권이 무시되고 사용되는 행태 등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가지 디테일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과연 '헬베티카' 폰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와 같은 재미난 이슈들도 포함하고 있고요.
이 중 기억에 남는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서체가 어울리는지?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 감사편지는 자신 있는 분위기와 분명하고 진실한 태도를 보여줘야 하니 제네바가 제격일 것이며, 사직서의 경우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즐거웠다면 뉴욕이나 버다나 같이 인간적인 면이 묻어나는 서체를, 일하던 시간이 지옥같았다면 냉정해 보이는 에이리얼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연애편지에 잘 어울리는 폰트는 이상적으로는 O가 큰 폰트가 사랑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조금 고풍스러운 글씨 느낌이 나거나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걸려는 듯 부드럽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남기려면 이탤릭체인 휴머나 세리프라이트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하고요. 절교 편지에는 불쾌함을 주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하려면 평범하고 오래된 타임스레귤러, 혹은 살짝 내려놓는 느낌의 이탤릭 폰트도 나쁘지 않다네요.
그리고 항상 궁금해했던, '왜 아직도 새로운 서체가 디자인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알려준다는게 참 좋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세상이 바뀌고 그 세상의 콘텐츠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것을 표현하고 싶어하니까요. 음악 앨범, 책 디자인을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몇 개의 마스터 페이지로 돌려막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렇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좋은 책인데, 내용에 약간 두서는 없으며 편집 자체가 좋지 않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언급되는 폰트를 따로 찾아서 확인해보기가 어렵게 만들어져 있거든요. 좋은 서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좋은 디자인을 보여주지 못하니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당연하겠지만 영문 서체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는 조금 괴리감을 전해주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폰트 디자인을 막 배우기 시작했던 학생 시절이나 아니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때 읽지 못했던게 아쉽기만 하네요. 왜 이 서체가 이렇게 디자인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디자인을 했어야 했는데, 단순히 글자 몇 개의 디자인 형태에 매몰되어 대충 아웃라인만 따서 변형하여 작업했던 그 시절이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지금이라도 심기일전하여, 좀 더 좋은 디자인을 해 봐야 겠습니다.

2022/09/03

할거 없어서 몰아본, 요새 핫한 넷플릭스 액션 영화 3편



<<그레이맨>>
한줄평 : 돈을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넷플릭스에서 사상 최고액 (2억 달러)을 투자하여 제작한 영화.
거대 조직에 의해 킬러로 키워졌지만 그 조직에게 배신당한다는건 너무 흔한 설정이었고,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는 CIA 부문장이 자기 친구이자 사설 용병단 리더인 로이스를 시켜 식스를 뒤쫓게 하는 전개 역시 특별한 반전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전개에서 설명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전 팀장이었던 피츠로이가 뒷통수를 한 번 쳤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던가, 자기 경력이 제일 중요했던 미란다가 식스와 갑작스럽게 힘을 합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미란다가 도와줄걸 확신한 것으로 보였던 식스의 행동 - 로이스의 총구 앞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는 - 도 이해가 되지 않고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돈을 많이 투자했기 때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 이런 류의 영화에서 특별한 설정이나 이야기를 기대하는건 무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액션 장면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시종일관 액션이 이어지기는 하는데, 화끈함과 기발함 모두 평이한 수준이었던 탓입니다.

그래도 프라하 도심에서 펼쳐지는 액션은 볼 만 했습니다. 특히 도심을 가로지르는 '트램'과 추격하는 자동차들이 겹치는 액션 장면이 백미였어요. 복잡한 무대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거든요. 트램 지붕에 올라간 식스가 트램이 지나가는 건물 유리창을 통해 트램 내부의 적 위치를 인지하고 총으로 쏘는 장면처럼요.
피츠로이와 그 조카를 왜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조카 클로이 앞에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나타나는 모습은 전형적인 클리셰이기는 하나 꽤 멋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데,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게 거대한 제작비를 썼다는 겁니다. 로저 코만이 이야기했던 대로, 2억 달러를 썼으면 2억 달러를 쓴 티가 확실히 나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카터>>
한줄평 : 액션은 좋은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악녀>> 등의 작품으로 액션 영화의 장인으로 거듭난 한국 감독 정병길의 신작.

이 작품의 문제는 각본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카터가 왜 기억을 잃고 소녀를 찾아 나서는지, CIA는 왜 남의 나라에서 무리한 작전을 펼쳐가면서까지 소녀를 확보하려 하는지, 북한 쿠데타 세력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되는건 하나도 없습니다. 카터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고, 누구랑 왜 싸우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도 독특한 촬영과 액션은 괜찮았어요.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를 하나의 씬으로 찍은 듯한 촬영인데, 중간중간 무리수가 보이기는 해도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촬영과 결합된 액션도 화끈하기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그레이맨>>보다는 화끈하지만, 더 잔혹하고 더 말이 안됩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작품이에요.



<<R.R.R>>
한줄평 : 어이는 없지만 재미는 있었다.

인도산 액션 영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를 무대로 인도 독립 운동가 두 명 - 빔과 라주- 의 활약을 그린 작품.

가장 눈에 띄는건 액션입니다. 화끈함을 넘어서 과장이 정말 심하거든요. 초반 불타는 강에서 빔과 라주가 위험에 처한 소년을 구하는 장면을 필두로 하여 기존 상식과 물리 법칙을 뛰어넘는 액션이 난무합니다. 단 둘이서 활과 창만으로 영국 총독의 군대를 쓸어버리고 총독부 관저(?를 날려버리며 총독마저 없애는 결말의 액션 장면이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여기에 액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영화 특유의 뮤지컬스러운 노래와 군무가 빠지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이 안되기는 하는데, 재미있게 보기는 했습니다. 두 친구의 고민도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고, 권선징악이 명확한 이야기 구조도 마음에 들었거든요. 우리나라로 따지만 백범 김구 선생이 각시탈로 나와서 일본군을 쓸어버리다가 마지막에 일본 총독마저 없애버린다는 영화인데 이런게 재미가 없을리가 없잖아요? 어이없는 액션도 흥을 돋우는 요소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누구에게나 권해드릴 수는 없지만 취향이 맞으신다면 꽤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파기환송 - 마이클 코넬리 / 전행선 : 별점 1.5점

 

파기환송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전행선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방검사장 게이브리얼이 미키 할러에게 특별 검사 자리를 제안했다. 아동살해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20년 이상 수감되어 있었지만, 스스로 사법 투쟁을 벌여 파기 환송을 만들어낸 제이슨 제섭 사건 때문이었다. 사건 당시 발견되었던 정액이 DNA 분석 결과, 제이슨 제섭의 것이 아니었다는게 결정적 이유였다. 앞으로 60일 이내에 검찰은 그를 무죄 방면할지, 재심할지 결정해야 했다.
게이브리얼은 사건을 재심하기를 원했지만 특별 검사제를 시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키 할러가 필요했다. 미키는 전처 매기를 차석 검사로, 이복형 해리 보슈를 전담 수사관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받아들였다.
재판을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하던 미키의 팀은 세라의 증언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걸 알아챘다. 사건 당시 13살의 나이로 제섭을 범인으로 지목했던 그녀는 현재 실종 상태였다. 해리 보슈는 수사를 통해 세라를 찾아냈고, 그녀를 증언대에 세우는데 성공하는데....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이후 이어지고 있는 마이클 코넬리의 미키 할러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이전 작에서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미키 할러가 '특별 검사'로 변신하여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변호사 클라이브 로이스와 맞서 싸운다는 설정 변주가 독특했습니다. 전처인 검사 매기 맥퍼슨,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인기 시리즈 주인공 해리 보슈와 함께 하는 '드림팀' 구성도 볼만했고요.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제이슨 제섭 사건 재판은 분량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세라의 증언 - "제이슨 제섭이 동생을 납치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정액이 묻었던 옷은 원래 내 옷으로,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탓에 정액이 묻었었다." - 가 증거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이를 뒤집기 위한 클라이브 로이스의 카드도 별볼일 없습니다. 세라의 전 남편인 에디 로만을 증언대에 세워, 당시 양부가 멜리사를 죽였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세라에게 거짓 증언을 시킨 거라는걸 폭로하려 했는데, 이 시리즈 내내 반복되어 왔던, '검찰 측 거짓 증인' 이나 '교도소 내 밀고자' 를 통한 물 흐리기 작전과 똑같아서 식상했어요. 게다가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에디 로만을 무너트리는건 전작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디 로만의 현재 동거인 소니아 레이예스를 법정 안에 데리고 들어온게 전부니까요. 그녀를 본 정도로 에디 로만이 증언을 완벽하게 번복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있거나 없거나 에디 로만의 증언이 바뀔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클라이브 로이스의 작전은 배심원들에게 의심의 씨앗만 심으면 충분했는데, 이렇게 전적으로 증언을 번복할 이유 역시 없고요.

추리, 범죄, 스릴러물로도 기대 이하입니다. 멜리사 사건의 진범이 제섭이고, 초반 재판의 키 포인트로 보였던 정액이 양아버지 것이었던 이유는 세라가 성폭행 당했기 때문이라는 등 주요한 수수께끼 모두는 세라의 증언으로 밝혀지거든요. 세라는 제섭의 얼굴을 24년이 지났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양아버지 정액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설명할 수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억지로 다른 수수께끼를 집어 넣었는데 억지스럽기만 했습니다. 제섭이 재판 전, 한 밤중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따라 프랭클린 캐니언 등의 공원에 몰래 방문해서 촛불을 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수수께끼가 대표적이에요. 제섭은 연쇄 살인범으로 자기가 죽였던 피해자들이 묻혀있어서, 그걸 기념(?)하는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해리 보슈의 지인인 FBI 심리 분석관 레이철의 분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뒤,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피해자를 살해했던걸 어떻게 연쇄 살인과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동 살해범이 이전에도 범행을 저질러왔던 연쇄 살인마라는건 당황스러울 정도로 전형적이었을 뿐더러, 설령 그렇다쳐도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는 곳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묻혀있는 시체를 제섭과 연결시킬 수 없으니 일단 묻고 가자는 미키 할러의 주장은 용납할 수도 없었고요. 그게 제섭의 범행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종된 여자들과 그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심이 있다면 만사 젖혀두고 시체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제섭이 해리 보슈의 집 앞에 머물렀던 이유, 은밀한 거처를 만들었던 이유 등도 딱히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전개도 시원치 않습니다. 우선 미키 팀이 피해자의 언니 세러를 찾아내서 인터뷰하는 부분이 작품의 1/3 정도 지점이라 그 이후 제섭 사건에 대한 흥미는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제섭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니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미키 팀이 에디 로만의 증언을 박살내 버린 후, 좌절한 제섭이 자기 변호사 팀과 감시하던 SIS 요원들을 사살하고 도주한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법정물이나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영화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섭이 도주 후 딱히 하는 것 없이 사살당하는 장면도 허무했고요. 복수를 노린 것도 아니고, 뭔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단지 숨어있으려고 했던 것 뿐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러한 제섭의 도주로 중반부에서 엄청나게 치밀하고 복잡하다고 설명되었던 SIS 감시 시스템이 별볼일 없이 무너져버렸다는 것 역시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제섭이 총을 손에 넣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4명이나 제섭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SIS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해리 보슈의 등장이라던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름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제섭이 도주해서 사건을 키우지 않았다면, 배심원 중 한 명이 반대해서 - 심지어 미키 할러의 의도로 재판 초기에 바뀐 배심원 -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나름의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단점이 훨씬 더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이 시리즈도 이제 더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